<러시안 소설>, 대화적 관계 안에서의 삶과 예술

<The Russian Novel>, Life and Art in Dialectic-relat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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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Independent cinema has been growing steadily for recent years in Korean film industry. Despite an increase in production and generalization of onlinescreening, communication between independent cinema and the public is still lacking.

    Based on critical awareness of this situation, by suggesting clearly differentiated production system from commercial films, <The Russian Novel> creates an unique aesthetic of independent cinema.

    Like most of the experience of independent cinema, this film is coming to audiences very unfamiliarly because the story and the plot of this film are intricately intertwined as like the character said the Russian Novel is quite long, complicated and have many characters.

    Moreover, there is a clear difference between this film and other recent independent films that represent a reality in Korean society in the way using conventional codes.

    An interesting feature of this film is in focusing from a different standpoin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ubject and others in the center of dialecticrelationships between life and art. In <the Russian Novel>, characters in the middle of momentous of the twenties are talking with each other and filling up an individual’s life with acceptance of others’ reaction and the result of this communication is a novel.

    To use the words of Bakhtin, the subject does not have its own language in area of literary and everyday utterance. Therefore, the utterance by the subject only can have the meaning through interaction which is others’ reaction. The subject and others are co-producers living together in special social and historical context.

  • KEYWORD

    , independent cinema , Bakhtin , subject , other , dialectic- relationship , utterance , meaning

  • 1. 2013년 한국영화산업, 그리고 한 낯선 영화의 도착

    제작 규모의 확장은 물론 제작과 유통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 자본은 한국영화산업에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급사의 지배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전국 스크린 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멀티플렉스를 통해 관객의 볼 권리를 통제하고 있다. 흔히 수직계열화로 개념화되는 이와 같은 시스템을 통해 자신이 운동한 흔적을 은폐하고 항구적으로 최대의 이윤을 축적하고자 하는 자본의 욕망을 관철하고 있는 상황이 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이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음 1) 에도 불구하고 풍요롭게만 보이는 통계의 이면에는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현실이 놓여 있다. 물론 독립영화 2) 에 대한 지원 정책 아래 제작 편수가 증가하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실현된 온라인 상영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관을 중심으로 한 유통구조가 다변화하고 있다. 3)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영화들이 광범위한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4) 2013년에 개봉된 저예산 영화의 흥행 실적을 살펴보면,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오멸)이 14만 여의 관객을 동원한 것이 최고 기록이며, 홍상수의 <우리 선희>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김기덕의 <뫼비우스>가 두감독의 유명세에 답하는 관심을 얻은 정도이다. 물론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대중적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류 상업영화의 기획 역시 표면적으로는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은 현재 통용되는 문화적 약호들의 체계 안에서 해독되는 범위에서만 인준된다는 점에서 그 실질적 내용이나 진정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상업적 이윤 추구라는 목표에서 벗어나는 기획을 허용할 수 없는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근원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화산업이 내어준 외곽의 공간이라는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주류영화와 다른 내용과 형식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균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창작의 열정과 의지는 개인적 미학으로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넘어 시스템에 대한 인식을 동반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장(場) 안에서 작동하는 시장 중심의 영화산업 혹은 자본과 협상하는 동시에 저항하는 전략으로서 독립영화의 제작과 유통 시스템의 특수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반해 그에 가장 적합한 미학을 생산하는 것이 그것이다. 5) 신연식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러시안 소설>은 이와 같은 요구에 응답했던 2013년의 영화들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독립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지점을 그려냈다. 6)

    감독 인터뷰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 보도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듯이 <러시안 소설>은 제작 방식에서 주류 시스템으로부터 창조적으로 이탈한 영화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감독의 확고한 자의식 아래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다. 아래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제작 마인드와 시스템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저예산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의 시스템과 다른 고유한 제작 시스템과 그에 적합한 스토리텔링의 결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뚜렷한 자의식을 일관되게 견지하며 현실화시킨 사례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 다. 창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자기 고백과 전작 두 편을 제작/감 독하며 경험했던 시스템에 대한 분석 9) 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러시안 소설>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나는 예술적 상부구조가 결국 제작 방식이라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한정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가운데, 주류 영화의 규모를 단순히 축소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하부구조를 구축한 사례이다.

    독립영화 보기의 경험이 대부분 그러하듯 <러시안 소설> 관람은 전략적으로 짜여진 대중영화의 스토리텔링에 훈련된 관객에게 지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일종의 규칙성을 찾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자의적인 플롯은 매력적이지만 혼란스럽기도 하다. 더욱이 이 영화는 다수의 독립영화들이 한국사회의 현실을 환기하는 데 있어 타자와 폭력 이라는 범주의 소재를 “출구 없는 타자의 일상, 죽은 듯 고여 있는 현실의 시간” 10) 으로 재현하는 경향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독립영화의 약호들에 일정하게 익숙한 관객조차도 이 영화를 생경 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경계를 해체하며 펼쳐지는 플롯의 구조를 세세하게 해명 11) 하는 대신 등장인물을 주체/타자의 대화적 관계에 놓고 그들의 의사소통과 행위가 지향하는 바를 읽어냄으로써이 영화의 낯섦에 답하고자 한다.

    1)2011년과 2012년의 여름과 연말 극장가에 한국영화와 외국영화가 백중세를 보였다면 2013년에는 설과 추석을 포함한 극장가의 모든 성수기에 한국영화가 강세를 보였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3년 한국영화 관객점유율은 57.9%를 기록하며 외국영화를 크게 앞섰다. 흥행 20위권 안에 든 한국영화는 <7번방의 선물>을 포함 총15편으로 <아인언 맨 3>를 포함한 외국영화 5편에 비해 3배나 된다. (「2013 한국영화산 업통계결산, 영화산업 성장동력을 장착하다」, 『한국영화 47호』, 영화진흥위원회, 2014.2, 21쪽)  2)독립영화는 최근 다양성 영화, 예술영화 인정 영화 등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 글에 서는 독립영화로 통칭하기로 한다.  3)국가의 직접적인 지원을 포함해서 대기업에는 투여가 제한되는 공적 자본이 출자된 투자조합의 존재도 독립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한 배경이다. 실제로 다양성 영화는 지난해 전체 영화 제작 편수의 37.8%를 차지했다. 그러나 서울 관객 수의 3.1%, 전국 관객 수의 1.6%만을 점유한 기록이 보여주듯이 영화관 상영 실적은 여전히 초라하다. 더욱이 편수의 증가는 상영을 둘러싼 경쟁을 고조시키고 있는 실정이며, 상영이 결정된 후에도 교차 상영되거나 좋은 시간대에 걸리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즉 다양성 영화의설 자리가 양적 증가라는 현상과 달리 점점 좁아지는 상황이다. (위의 글, 23쪽)  4)주류 상업영화가 대중적 관심을 선점하는 것은 대기업 중심으로 정착한 제작과 유통 시스템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영화와 관련된 정보를 소통시키는 국면에서도 압도적이다. 이 역시 마케팅 비용과 관련한 자본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잠재적 관객이 독립영화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온라인 마케팅을 비롯해 지상파를 비롯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주류 상업영화와 달리, 독립영화의 제작이나 개봉 정보에 접근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5)독립영화의 내러티브와 미학이 주류 밖에서 생산된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기존의 약호 시스템에 저항하려는 문제의식이 “결국 그것이 더이상 자율의 표상이나 분출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길 거부하며 자기 인생에 속박된 인간의 자화상임을 보여”주는 도착에 빠지는 경향에 대해서는 남다은, 「한국 독립영화들의 최근 경향에 대하여」, 『독립영화』, 제41호, 2011년, 한국독립영화협회, 25쪽.  6)신연식 감독은 2005년, 300만원의 초예산으로 제작한 장편 영화 <좋은 배우>로 데뷔했 다. 이후 안성기와 이하나 주연의 로맨스 영화 <페어 러브>(2009)로 주목 받았으며, <러시안 소설>이 그의 세 번째 장편이다. 이 영화는 지난 해 부산영화제의 화제작에 올랐으며, 한국영화감독조합상, 제33회 영화평론가협회 각본상을 수상하였고, 국내 소규모 영화제인 마리끌레르 필름 페스티벌 초청 상영을 비롯해 해외에서는 제42회 로테르담 영화제 스펙틀럼 부문, 제36회 예테보리 영화제에도 초청되었다.  7)SBS E!연예뉴스(http://movie.daum.net/movieinfo/news/movieinfoArticleRead.do?article1d=1818806)  8)물론 최근에는 클라우드 펀딩과 같이 지배적인 제작/유통방식에 속하지 않는 개인 투자 자들의 연합으로 제작비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작 <또 하나의 약속>(김태윤)은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참여만 으로 제작비는 물론 마케팅 비용까지 조달한 클라우드 펀딩의 성공 사례이다. (연합뉴스, http://movie.daum.net/movieinfo/news/movieinfoArticleRead.do?article1d=1814877)  9)“창작을 하면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나는 누굴 만나도 창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느꼈다”는 감독의 고백은 두 편의 장편영화 실패가 창작을 포기하게 만들기보다 새로운 창작 방식을 고민하게 한 동력이었다. (조이뉴스, http://movie.daum.net/movieinfo/ news/movieinfoArticleRead.do?article1d=1818806)  10)남다은, 위의 글, 24쪽.  11)이 영화의 플롯을 글을 통해 해명한다는 것은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영화 속 현실과 영화 속 소설이라는 내러티브의 결합 사이에 여러 내레이터가 개입하는 상황을 비연대기적으로 풀어놓은 플롯을 글을 통해 복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물론 플롯은 형식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지극히 유기적으로 이 영화의 내용과 조응된다는 점에서 내용과 주제를 읽어내는 과정 중에 쉼없이 개입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2. 길고 복잡하고 인물도 많은 러시아의 소설처럼

    따로 제목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물론 두 개의 오프닝 크레딧으로 구별되는 <러시안 소설>의 플롯은 대단히 복잡하다. 이것은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 가림의 대사처럼 “길고 복잡하고 인물도 많은 러시안 소설”에 비교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묘하 게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만을 객관적인 연대기로 진술하자면 이 영화의 내용은 반대로 단순하게 요약되기도 한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 속에 살아가는 신효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펼치는 스토리로서 신효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1부와 27년의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어난 신효가 그 사이 걸작의 반열에 오른 자신의 소설을 개작한 이를 찾아나서는 2부가 그것이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큰 규모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고 1부와 2부 각각은 그리 길지 않은 서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하며 공간 역시 단출하기 그지없다. 12) 이 영화의 새로움은 서술방식으로서의 이 영화의 플롯이 인물들이 서로 반응하고 행위 하는 스토리를 조직하는 방식 자체가 주제를 구성하는 데서 온다. 이 주제 역시 개인성의 신화에 갇힌 후기-현대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기에 주체/타자의 관점에서 영화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주체/화자와 타자/청자의 대화적 관계

    모든 텍스트에서 인물들은 차이의 창조를 통해 구별된다. 서로 다른 행위자로 개체화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각각의 인물에게 지속적인 현존의 자질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13) 시각적으로 주어진 특징뿐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을 대사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주체로 가정하는 능력을 부여받는 인물들은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주류영 화는 인물들의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고정된 기호체계 안의 재료 들을 상호 배타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물들의 관계가 표면적인 서사의 구성에 참여하도록 조직한다. 이에 비해 <러시안 소설>은 각각의 인물에게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는 부분에서도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약호체계를 일정하게 벗어남은 물론 그들이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고유성 대신 각각의 정체성을 서로에게 전적으로 개방함으로써 영화의 의미를 생산하게 한다.

    먼저 인물에게 부여되는 특징은 ‘배움 없음/창작에의 열망’(신효), ‘물려받은 문학적 재능/무의미한 연극동아리 활동’(성환), ‘여공 출신/ 도도한 신인작가’(경미), ‘목사의 딸/소설가 지망생에 대한 헌신’(재혜), ‘10대 소녀/학교에 가지 않음’(가림) 등으로 재현됨으로써 일상적인 관습을 위반하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14) 주체가 계급의 기호를 수용할 때만 그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는다면, <러시안 소설>의 인물들은 영화 속 현실에서든, 영화 속 소설에서든, 일정 정도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사회적 약호체계가 부여한 특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이들이 사건의 행위자로 기능할 때도 관객의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반은 등장인물들이 신효가 추구하는 예술 창작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토리와 플롯의 통일성을 획득하는 데 기여한다. 즉 영화속 현실과 영화 속 소설이 교차되는 내러티브가 매끄럽게 봉합되는 대신 둘 사이의경계를 넘나들며 해체하는 데서 오는 텍스트의 모호성이 이 영화가 성취한 내용과 형식의 내적 통일성이다.

    스스로가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신효는 미숙한 자신의 작품으로 주변사람 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불행한 가족사가 규정하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도 그 한계 너머에 존재 하는 세계로의 이전을 꿈꾸는 신효의 욕망은 그 자체로서는 익숙한 것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서 타자에게 말 걸기를 시도 하며 심지어 타자의 말에 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주체와 타자의 상호작용의 대한 이 영화의 입장을 대변한다. 신효가 작가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이미 구성된 개인적 정체성의 발현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획득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정체성은 언제나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과정은 필수적으로 타자의 존재 혹은 그들과의 대화를 요구한다. 이 대화의 본질은 주체와 타자의 ‘대립성들이 서로를 통하여 서로에게 대화함으로써 반향되는 동시에 간직되는 모습’ 15) 으로 드러난다. 형식적인 대화가 일방향적인 지시와 그 수용에 그치는 데 비해 바흐친(M. Bakhtin)이 제안했듯, 진정한 대화적 관계 16) 는 의미 생산을 위해 타자와의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이러한 이론적 입장이 <러시안 소설>의 서사 안에서 구체적 기호들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이 영화의 중심인물들이 창작 혹은 의미를 추구하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더불어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상태는 이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신효, 성환, 재혜, 경미 모두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20대 초중반을 통과하는 지점을 살고 있다는 데서 강화된다.

    주체의 정체성 구성과 관련하여, 이 영화의 20대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체의 정립을 욕망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신효와 성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는 가림 역시 집을 떠난 어머니와 그녀를 찾아다니는 소설가 아버지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소녀이다. 이들의 불안과 외로움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구 하게 하며 그것은 대체로 자신들의 외부에 놓인 어떤 것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 즉 약호들의 체계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조건이 이들의 인식과 관심을 타자를 향하게 한다는 점이야말로이 영화의 내용은 몰론 미학적 고유성을 성취하게 한다. 신효의 소설 <조류인간>, <천년의 물약>, <귀 기울여 속삭이기>와 경미의 소설 <통정>을 보면, 모든 작품이 개인적 성찰에서 비롯된 위대한 관념의 산물이라기보다 결국 타자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과 그 순간 타자들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효와 경미의 소설은 서로의 삶을 참조하며 성환과 재혜, 가림 등 영화 속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인물들의 일상 언어를 창조의 재료로 사용한다. 즉 소설은 타자들과의 얽힘과 그로 인한 사건의 변형인 것이다. 따라서 주체와 타자의 서로 다른 대립적 성질은 항시적으로 충돌하지만 결코 상호파괴적이지 않으며 때로 그 둘이 서로 겹쳐져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의사소통에서도 일방적인 말하 기/듣기의 관계가 아닌 대화적 관계가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의사소통의 대화적 관계에 대한 모델은 타자 탈-주체적인 이론적 경향 지니는데 바흐친의 초언어학은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타자의 자리를 주체의 옆자리에 마련한 바 있다. 바흐친의 관점 외에도 말을 ‘가르치 다/배우다’의 관계에서 고찰했던 비트겐슈타인(L. F. Wittgenstein)에게서 참조점을 찾을 수 있다. 17)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흔히 상상하듯 교수자와 학습자 간의 권력관계가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과 배우는 입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언어가 소통되기 이전에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없었다면 그 어떤 의미의 교류도 존재할 수 없는 만큼, 마치 상품의 가치가 사전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의 결과로 주어 지듯이 주체가 무엇인가를 의미하고자 한다면 타자의 인정이 필수적 이며 그것에 의해서만 의미가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 내부에 미리 주어진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2) 타자, 대화적 상화작용을 통한 의미의 공동 생산자

    <러시안 소설>은 등장인물이 추구하는 예술 창작의 과정과 세대로 서의 청춘이 공유하는 특징으로서 완결된 상태가 아닌 과정 중의 삶이라는 소재를 통해 주체와 타자 간의 대화적상호작용으로 서사를 조직하고 있다. 그런데 바흐친에 의하면, 주체로 하여금 대화적 관계의 당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폐쇄적 개인성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타자와 더불어 특수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위치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바흐친과 유사하게 타자를 인식과 실천의 중심에 놓고 바라보면서도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레비나스 (E. Levinas)의 입장과 구별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바흐친에게 있어 타자의 중요성은 그가 이미 나와 함께 좋든 싫든 생성 중인 사건의 장에 존재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18) <러시안 소설>은 스토리텔링의 목표 로서 특정한 사건 해결이나 로맨스의 완성 등을 설정하지 않고, 특정한 기호로서 지시되기 어려운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묘하게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지금, 이곳’에서 ‘우연히 생성 중’이 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사건들은 모두 대화의 상대로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주체를 의미 생산의 궤적 안으로 진입하게 하는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가 늘 의식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 이것은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의 인물들이 아직은 미숙한 청춘의 때를 살고 있어서라고 할 수도 있으며, 이론이 아닌 현실의 장에서 미시적으로 펼쳐지는 관계는 때때로 자신을 포함해 대화의 상대인 타자를 여전히 낯선 텍스트로 여기게 한다. 예를 들어 신효는 삶과 문학의 영역에 걸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변화하지만 자신이 글을 쓰게된 계기를 제공하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의 이해를 그토록 욕망하는 자신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유독 김기진의 글에만 공명했던 그에게 성공한 거장의 기호는 부재한 부모이며 동시에 세계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통로이자 대화 상대로서의 타자이며 이해와 인정의 권위를 가진 대타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실제로 소설을 쓰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며 예술적 재료를 제공하는 것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기호로서의 김기진이 아니라 일상의 장 안에서 부딪히며 문학에 대해 소통하는 타자들이다. 물리적 현존의 상태로 신효와 만나는 성환, 재혜, 경미, 가림은 때로 친근한 유사성을 가진 존재로, 때로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신효는 이들 각자와 맺는 다양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던 불투명한 의미를 구체화한다. 이것은 1부를 특징짓는 영화 속 소설 텍스트로 드러나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대화가 삶 자체이자 예술적 텍스트의 원천임을 밝힌다.

    바흐친이 설명하는 발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발화가 다른 발화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발화는 과거에 이미 수행되었던 발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최초 혹은 최후의 발화란 있을 수 없다. 20)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러시안 소설>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그들이 상대를 향해 던지는 최초의 발화가 아니다. 성환이 신효의 소설을 비평하는 언어는 이전의 문학 비평 들이 수행했던 담론에서 선택된 것이며, 신효의 글이 소설도 시도 아니며 대한민국에는 그의 글을 담을 그릇이 없다는 경미의 독설도 그녀를 질시하는 기성 문단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21) 특히 신효의 소설을 읽은 후 그에게 매료된 재혜는 시대를 초월할 만한 생명 력이 있다는 찬사를 던지는데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이 발화의 순간에 조차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절반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진정성이 없다고 의심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일상을 살든, 예술을 창조하든 역사적으로 축적된 언어의 세계 속에 존재하며 크리스테바가 말했듯이 “모든 텍스트(발화)는 모자이크와 같이 여러 인용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흡수하고 그것을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2) 더욱이 재혜는 좌절감에 자신이 쓴 원고를 모두 버린 신효를 독려하면서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모든 글을 정확히 복기해 새로운 원고를 써낸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신효의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수정되었을 뿐더러 재혜만의 억양 23) 이 부가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도 텍스트는 고립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위에 논의된 바들은 텍스트의 소유권이 화자/작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귀결된다. 이와 관련해 <러시안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신효가 쓴 소설의 일부라는 것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화면에 등장하는 소설 속 문자 텍스트를 읽는 내레이터가 신효와 성환, 재혜와 경미를 오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2부에서 밝혀지 듯이 문자 텍스트 모두가 신효의 소설은 아니다. <통정>은 신효와의 짧은 연애담에 근거한 경미의 소설이며 일부는 재혜가 성환에게 보냈으리라고 짐작되는 편지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창작자의 독점적 저작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작가와 화자의 일치는 주장되지 않는다. 이것은 삶 자체로부터 예술의 재료가 주어진다고 할 때, 발화의 주체가 누구이든 그것이 최초의 언어가 아니라는 입장과 일치한다. “언어로 말해지거나 표현된 모든 것은 화자(작가)의 ‘영혼’ 밖에 존재하며 오직 화자 한 사람에게 귀속되지 않는” 24) 것이다. 즉 김기진을 매개로 한 신효와 성환의 관계, 한 순간이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어 신효 에게 헌신하는 재혜와 그녀의 헌신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신효의 관계, 선망과 동일시가 뒤섞인 신효와 경미의 관계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그들의 실제 삶속의 대화로 실천되며 그것이 생산한 의미가 신효와 경미의 소설 또는 재혜의 편지를 통해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로 구체화되었다면, 그 누구도 텍스트에서 발화된 언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누구의 언어이든 그것은 발화되기 이전에 이미 또 다른 누군가의 언어였으며 따라서 청자/독자 역시 발화된 언어에 대해 화자/작가와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다. 25)

    더욱 명료하게 발화의 소유권 없음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가림과 신효 사이의 대화이다. 김기진이 마련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 우연제 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낸 뒤, 소설을 포기하려던 신효에게 가림은몇 가지 비평적 조언을 한다. 작품이 엉성하게 보이는 이유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주는 어린 소녀의 말에 신효는 어떤 작가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라며 경탄하고 다시 글을 쓸 용기를 얻는다. 심지어 가림이 그녀의 아버지 정석보다도 대단한 작가가 될 재능을 타고났다는 예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이 잠든 사이에 명성을 얻은 작품들이 사실은 누군가에 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신효가 의문을 푸는 과정에서 만난 가림은 그 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기억의 공백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림이 신효에게 한 말은 모두 성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복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부의 핵심적 플롯은 신효의 소설을 개작한 이를 찾는 것이다. 장르로서의 미스터리와 달리 1부처럼 느슨하게 구성된 2부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원고를 고쳐 쓴 사람이 성환임이 밝혀진다. 아버지의 명성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매년 같은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그는 가림의 표현에 의하면 “러시안 소설처럼 길고 복잡”하며 재혜의 말처럼 “다 듣고 있고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인물이다. 신효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에서 성환을 유명한 작가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비극적 인물로 표상하기도 한다. 26) 거칠고 문장도 형편없는 신효의 글에서 성환이 본 것은 현실의 신효가 그렇듯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열정이다. 이것은 성환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서 그것이 타고난 재능의 문제인지혹은 남근으로서의 아버지로 부터 도피하려는 무의식적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성환의 입장을 이해적으로 들여다보자면, 그는 자신에게 기대되는 것이 아버지에 버금가는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고정된 특성을 가능한 한 부정한 채 주위 사람들을 지켜봄으로써 자신과 주위의 세계를 인식하고자 할 뿐이다. 그런데 이 ‘조용히 지켜봄’은 예술의 언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를 말하는 순간에도 타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응답을 가능하게 하기에 성환을 창조적 존재로 만든다. 이것이 신효의 작품을 세상이 인정해줄 날을 기대하며 개작을 부탁하는 재혜의 요청을 수락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신효가 거의 새로운 작품이라고 느낄 정도의 수준으로 개작을 하는 데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성환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 하는 성환의 내레이션은 신효의 작품을 고치면서 자신과 신효는 둘다 작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개작한 소설을 통해 아버지의 명성을 능가할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인식은 바로 지금까지 논의 했던 바와 일치한다. 즉 대화적 관계에 놓인 주체와 타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행된 발화로서 성환과 신효의 실제 삶과 창작에의 열정이 교차되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개체이기도 한동시에 하나가 되어 최고의 작품을 생산한 것이다. 자신이 개작하고 있는 글이 두 번 다시는 쓰여질 수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특수한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그 순간의 수행성이 강조되는 발화에 관한 바흐친의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

    12)1부가 신효와 다른 인물들이 각각 다양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삶과 예술의 관계와 의미를 드러낸다면 2부는 27년 동안 잠 든 사이에 금세기 최고의 작가가 되어 있는 신효가 변화한 현실에 적응하는 부분과 자신의 소설이 개작된 것을 알고 과거의 인물 들을 회고하고 개작한 이를 찾아나서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2부는 1부에 비해 러닝타임이 1/2 정도이며 1부가 시공간을 오가는 복잡한 플롯인 데 비해 과거 회상 외에는 대체로 연대기적으로 짜여진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는 1부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궁금증을 해소시키고 모든 것이 열려 있어 혼란스러웠던 1부의 의미를 잠정적으로나마 종결하며 영화의 주제를 보다 분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1부와 서사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13)스티브 코헨 외, 임병권 옮김 『이야기하기의 이론』, 한나래, 2001, 111쪽.  14)심지어 주변 인물인 음악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녀는 미대생 출신이며, 연인일 때조차 연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기표와 기의의 결합을 비트는 전략은 2부에도 이어진다. 27년만에 깨어난 늙은 신효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청년에 머물러 있고, 그를 영상에 담는 젊은 사진작가는 어울리지 않는 늙은 남자를 좋아하고 재혜의 딸인 고등학 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맥주를 마신다.  15)피터 지마 외, 여홍상 옮김, 『바흐친과 문학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7, 343쪽.  16)대화 혹은 대화적 상호작용은 바흐친의 초언어학에 토대한 소설 연구에서 제출된 개념 으로 변증법과 유물론적 역사철학에서 출발한 바흐친의 이론의 초석을 이룬다. 기본적 으로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를 분석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바흐친의 개념/들은 문학 텍스트 내부 혹은 문학의 생산과 수용의 관계만이 아니라 일상세계의 의사소통에도 적용될 수 있다. (위의 책, 134쪽.)  17)포스트주의 철학이 오래 전에부터 근대적 주체를 회의했으며, 후근대의 탈-주체는 이미 익숙한 형상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일상생활에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서로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가, 바꾸어 말해 그러한 자의식이 일상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인 듯하다. 그러므로 언어와 그 발화를 통한 의사소통에 있어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항시적인 연구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근거해 소쉬르 언어학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와 타자성에 대한 논의를 펼친 기라타니 코오진의 관점은 언어학과 철학, 경제학을 오가며 현실 적용이 용이한 참조점을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흥미롭 다. (기라타니 코오진, 송태욱 옮김, 『탐구 1』, 새물결, 1998)  18)최진석, 「타자 윤리학의 두 가지 길 – 바흐친과 레비나스」, 『노어노문학』, 21권 3호, 2009, 174쪽.  19)오프닝 크레딧이 소개되기 전 영화의 첫 장면에 인용된 “그가 내 앞을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니라”(욥기 8:14)라는 성경 구절은 영화 속 인물들의 1부를 살아가는 동안 처한 상황이다. 이 구절은 영화의 엔딩 에도 등장하여 텍스트에 수미상관적 구조를 부여하는데 2부가 1부에서 종결되지 못한 수수께끼를 일정하게 풀어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란 근본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창작자의 세계관이 반영된 언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0)김욱동, 『대화적 상상력』, 문학과 지성사, 1988, 134쪽.  21)성환은 자신의 글을 아버지 김기진이 읽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신효의 부탁을 거절한다. 신효의 소설이 거칠고 미숙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기준은 그가 뛰어난 개인적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가림이 지적했듯이 ‘너도 밤나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이 기표가 등장하는 러시아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전에 발화되었던 언어들을 이해하는 능력의 산물이다. 한편 경미가 신효에게 소설 쓰기를 그만두라고 하는 장면은 스토리 시간상 그녀가 선배 문인들과의 불편한 술자리를 마친 후에 이어진다. 즉 그녀의 독설은 신효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질시와 혹평을 흉내내거나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2)앞의 책, 139쪽.  23)억양 역시 바흐친의 개념이다. 억양란 이미 존재해 온 발화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사용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이미 주어진 동시에 화자에 의해서 재창조되기도 한다.(위의 책, 140쪽)  24)위의 책, 134쪽.  25)위의 책, 138쪽.  26)현실과 예술이 서로를 침윤하는 관계라는 것이 성환을 모델로 한 소설과 실제 성환의삶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의 소설을 더 뛰어난 것으로 개작한 아들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살을 선택한다는 신효의 소설 속 이야기는 성환이 신효의 소설을 10년에 걸쳐 개작한 후, 그것을 가족에게 넘기고 현실에서는 거의 파산한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으로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3. 의미가 종결되지 않는 삶과 예술

    영화가 타자를 재현하는 전형화된 약호를 사용하는 것은 관객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는 경제적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영화는 영화관 공간에 위치지어진 주체로서 관객이 심리적으로 동일시할수 있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을 배치하고 그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타자화함으로써 갈등을 생산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손쉬운 쾌락을 생산한다. 주체와 타자의 위치가 이러한 동어반복을 계속하는 한, 그들이 옆자리에 앉거나 자리바꿈을 하는 일을 통한 대안적 시선의 획득은 요원한 바람이 될 것이다. <러시안 소설>은 예술과 로맨스 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통해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며 나아가 일상은 물론 예술적 의미 생산의 영역에서 둘 사이의 경계조차 해체되는 지경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인물의 독백을 통해 설득의 담론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밝혔듯이 스토리와 플롯이 직조되는 방식이 구조와 탈구조를 넘나들며 주체와 타자의 경계 해체에 기여하는 것이다.

    경계의 해체는 양식적 실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예술을 포함해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란 결코 완전히 종결될 수 없다는 성찰로 이어진다. 2부에서 신효는 자신의 글을 고쳐 쓴 것이 경미나 가림의 아버지 정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환은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림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인물이 성환이라는 것을 듣고 신호는 옛친구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성환은 전문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신효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동의 의미 생산자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성환은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바쳐 신효의 글을 고쳐 쓰면서 ‘두 번 다시 이런 글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독백한다. 영화의 맥락으로 볼 때, 이 독백은 두 사람의 삶이 진정성을 갖고 치열하게 교차했던 시간이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 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라기보다 시간의 회귀 불가능성, 그리고 유일했던 시간에 축적한 의미가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정이다.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운동하는 효율적인 삶을 모범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유 부동해 보이는 외적 조건과 역설적으로 필연성 안에 삶을 가두는 사고를 벗어나,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유일한 순간이며 언제나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순간을 인식하는 것! 그러나 이 순간들은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환을 찾아가는 여행에 1부에서 가림의 친구로 나왔던 소녀의 재혜의 딸로 재등장하고 그녀의 의상은 경미의 것과 겹쳐지진다. 삶이란 어딘에선가 마주쳤던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 아래 선택된 이러한 기호의 일탈은 의미의 종결이 권위적 담론 안에서 가능함을 보여준다. 관객의 기대와 달리 이 영화는 신효와 성환의 만남을 유보한다. 마치 신효가 재혜가 준 약을 먹고 27년의 긴 시간 동안 잠을 잤지만 결국은 기적처럼 깨어났듯, 두 남자의 만남도 재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삶이란 결코 명료하게 경계 지어질 수 없으며 그 의미 또한 신효와 성환의 재회, 신효와 재혜의 재회가 유보되었듯이 완전히 종결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의 엔딩 후에도 등장인물과 그들의 삶 27) 에 대해 여전한 호기심을 갖고 이 영화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안 소설>을 보는 내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견인한다는 맑스(K. Marx)의 고전적 명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텍스트의 내용은 오히려 예술이 속해 있는 상부구조의 자율성에 관한 것이지만, 창작자의 세계관과 함께 하부구조로서의 독특한 제작 방식이 이 영화의 미학을 가능하게 한 선행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신연식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러시아의 학자 바흐친의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흥미로운 독해가 가능했다는 점도 <러시안 소설> 비평의 즐거움이었다.

    27)등장인물에 대해 바흐친은, 작품은 심미적 완결성을 달성할 수 있지만 인물은 항상 미결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작가에 의해 이미지를 부여받는 대신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독자가 최종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들 인물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자신의 삶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텍스트를 살아낸다. (김욱동, 앞의 책,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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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최 진석 2009 ?타자 윤리학의 두 가지 길? [『노어노문학』] Vol.21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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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SBS E! 연예뉴스 9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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