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부대 창군과정과 북한 상황 분석

An Analysis o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Soviet’s and China’s Strategic Rocket Forces and the Situation of Nor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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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study start from the fact that Establishing of Soviet’s Strategic Rocket Force and China’s Second Artillery Force is related with a change of Weapon System. In terms of this fact, this study have three questions. First, Why was the Force like a strategic nuclear force established? Second, What does the change of Strategic Rocket Force(SRF) mean? Finally, What is ultimately the pursuing strategy of SRF?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olve these questions.

  • KEYWORD

    Strategic Rocket Force , The Second Artillery Force , Weapon System , Military Institution , Military Strategy , Missile , Nuclear Weapon , satellite

  • Ⅰ. 서론

       1. 문제인식 및 연구목적

    북한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에게로 권력승계가 이뤄졌다. 이러한 가운데 2012년 4월 15일, 김일성의 100회 생일을 맞이하여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김정은의 첫 대중 연설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연설의 핵심은 경제 강국 건설과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인 ‘선군정치’를 이어갈 뜻을 밝힌 것이었다. 또한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영용한 육・해・공군 그리고 전략로켓군”이라고 직접 호명하면서, ‘전략로켓군’이라는 새로운 군종에 대해 언급하였다.

    과연 김정은이 언급한 ‘전략로켓군’은 어떠한 조직이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북한은 1999년부터 운용해 온 ‘미사일지도국’을 ‘전략로켓군’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이는 필시 북한이 김정은 체제 출범 직후 기존 인민무력부 소속의 미사일지도국을 전략로켓군으로 변화하면서 육・해・공군과 맞먹는 별도의 독립군종으로 승격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한 나라의 군사조직의 변화는 전력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며, 더욱이 전략적 변화가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전략로켓군으로 조직을 변화하였는지, 이러한 군사조직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그렇다면 전략로켓군의 변화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첫째, 전략 핵 부대인 전략로켓군과 같은 부대가 왜 창설되었는가? 둘째, 이러한 전략로켓군으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그렇다면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라는 사실이다. 이들 궁금증의 해결을 통해 전략로켓 부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하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2. 연구범위 및 방법

    본 논문의 연구대상은 소련과 중국이며, 세부적인 연구내용으로는 양국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에 관한 사례를 비교 연구한다. 아울러 본 논문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서로 다른 전략로켓군의 창군과정을 효율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연구의 시기적 범위를 한정한다. 소련의 전략로켓군은 공식적으로 1959년 12월 17일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창군되었다. 따라서 창군된 시점을 기준으로 전・후의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 소련 사례의 시기적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스탈린이 독일의 V-2 로켓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시점으로부터 1964년 그가 실각하면서 브레즈네프가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등장하기까지의 시기로 한정한다.

    중국은 전략미사일 부대인 제2포병부대를 1966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창군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홈페이지, 2013). 중국의 제2포병부대 창군과정 연구에 관한 시기적 범위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처음으로 전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한 1976년까지로 한정한다.

    다음으로 연구의 방법은 비교 연구 방법을 사용한다(Charles C. Ragin, 1987, pp. ⅶ-x).1) 즉, 소련과 중국의 사례에서 전략로켓군의 창군과정을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이라는 핵심적인 요소를 통해 변화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들 요소의 일반적인 상관관계를 고찰한 후 이들 요소들을 기준으로 소련과 중국의 사례에 있어 각각 전략로켓군의 창군과정이 어떠하였는지를 비교함으로써, 연구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구성은 모두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한다. 제2장에서는 비교연구를 위한 핵심적인 지표로서 무기체계, 군사제도 그리고 군사전략에 대한 핵심 요소들의 개념들을 정리하고, 본 연구를 위한 연구의 구성에 대해 설명한다. 제3장에서는 1950년대 소련의 전략로켓군 창군시기를 중심으로 무기체계의 발달이 부대 편제 등 군사제도의 변화와 군사전략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사례를 연구한다. 제4장에서는 1960년대 중국의 제2포병부대 창군시기를 중심으로 소련과 마찬가지로 무기체계의 발달이 군사제도의 변화와 군사전략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사례를 연구한다. 제5장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양대 사례연구를 비교 연구하여 분석한다. 마지막 제6장에서는 양국의 창군과정 사례를 비교 연구하여, 이를 통해 시사점과 정책적 함의를 도출함으로써 북한의 전략로켓군 전력의 새로운 등장 속에서 향후 우리의 전략적 대응을 위한 발전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라긴은 연구방법을 사례위주의 연구와 변수위주의 연구로 대별한다. 전자가 소수의 사례를 비교 하는 방법인 반면 후자는 다수의 사례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다. 사례위주의 연구방법은 다시 사례를 비교하는 비교 연구방법과 개별사례를 다루는 사례 연구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사례위주의 연구 중 비교 연구방법에 해당한다.

    Ⅱ. 개념적 고찰

       1.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의 개념

    가. 무기체계의 개념

    군사학 대사전에는 무기체계란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가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전투용 기구”라 정의하고 있으며, 합동참모본부의 합동무기체계규범은 “전투수단을 형성하는 장비와 그의 조작 및 운용기술을 망라한 복합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 규범에는 “장비와 숙련기술로 이루어진 완전한 전투기술로서 무기 자체뿐만 아니라 무기를 보관, 운용 및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제반 시설, 보조지원 장비, 보급물자, 서비스 그리고 일정수준의 기준을 가지고 이들을 운용 조작하는 인적자원 등을 총 망라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유근환・김봉환・강진석, 2009, p. 3). 따라서 이들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보면,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주 임무 무기와 이와 관련된 물적, 인적 요소의 종합체계로서 물자, 시설, 인원, 보급 및 전술, 전략, 훈련 등을 총 망라한 총체적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들어 가장 각광 받고 있는 현대 무기 체계로써 주 임무를 수행하는 본연의 전략로켓(미사일)은 미사일 발사대, 통제 및 관제시설, 연료, 핵폭탄, 저장시설, 연구 및 개발 공장, 운용인원의 작전 및 기술수준까지를 종합한 모든 것들이 무기체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미흡하다면 전략로켓 본래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무기 자체로서는 완전한 기능 발휘가 곤란하며,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들이 상호 기능적・유기적으로 결합되었을 때에 진정으로 성능 발휘가 가능하다.

    나. 군사제도의 개념

    대개 동양에서 논의되었던 군사제도는 군대의 조직을 가리키는 군사조직, 훈련, 편성, 유지, 관리 등을 위한 각종 법제적 체계를 총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즉, 지휘 및 편제에 대한 군사조직을 골간으로 하여 이를 유지하기 위한 병역관리 및 동원, 그리고 작전, 교육, 훈련, 법령, 장비 등 운용의 측면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아울러 군사제도는 국가 단위의 구성원들을 직접 동원하여 조직화하는 제도장치이므로 당대의 사회구성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대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이 모두 군사제도 안에 망라되어 있다.

    서양에서의 정의를 살펴보면, ‘military system’이라든지 ‘military organization’, ‘military establishment’라는 용어로 인해서 혼란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 용어들을 우리말로 각각 바꾸어 보면, ‘군사제도’, ‘군대제도’, ‘군사체제’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번역된 용어에서도 의미상의 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전 중에 하나인 웹스터 영영사전(Webster’s New World Dictionary)이 비교적 ‘system’이라는 용어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10가지로 해석하며 대체로 보아 체계, 유기체, 법도, 방식 등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상 ‘organization’은 그 의미를 ‘organ(기관)’에서 찾아야 하니 유기체적인 개념을 함축하고 있고, ‘establishment’는 브리태니커 백과전서(Encyclopaedia Britanica)에 의하면 국가와 종교사회의 관계처럼 명확하고도 구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한용원, 1980, p. 16). 따라서 ‘military system’이 어느 정도 동양에서 이야기 하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서양에서의 다양한 개념들을 종합하여 봤을 때, 군사제도란 국가의 군사적 안전보장을 주 임무로 하는 일종의 사회제도로서, 사회와는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며, 합법적인 권위인 군정권과 군령권을 가지고 군인을 조직 및 편성, 충원 및 은퇴, 교육 및 훈련, 작전 및 관리하는 법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한용원, 1980, p. 17). 다시 말해 군사제도의 구체적인 요소로써 병역제도 및 장교의 충원제도, 조직편성 및 장비, 참모제도, 교육 및 훈련, 군민관계 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군사제도에 있어 앞서 언급했던 구체적인 요소들 가운데 부대 운용에 초점을 두고 해당 조직의 편성과 임무에 국한한다. 물론 군사제도로서 기타 병역제도 및 장교 충원제도, 참모제도, 교육훈련, 군민관계 등도 살펴보면 좋겠으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룸으로써 오히려 연구 목적 달성의 흐름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세부적인 요소는 국가별 군 자체조직의 차원에서 가능할지 모르나 그 하부 조직에서의 체계를 밝히기란 자료의 제한 등 현실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다. 군사전략의 개념

    군사전략은 바로 한 국가의 전반적인 관점이며, 군사영역의 활동에 대해 진행하는 계획과 방책이다. 이는 주로 군사력 건설과 운용을 통하여 정해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 이 때문에 군사전략의 제정은 미래전쟁에 대한 해당 국가의 구상이 나타나며 그 국가의 군대가 진행하는 전쟁준비의 주요 방식이 반영된다(차이밍옌 저・이두형 옮김, 2006, p. 67).

    최근 현대에 들어서 어느 수준에서건 전략을 정의하는 데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요소로 ‘목적(objectives)’ 또는 ‘목표(ends)’, ‘자원(resources)’ 또는 ‘수단(means)’, 그리고 ‘개념(concepts)’ 또는 ‘방법(ways)’ 등을 지목하고 있다. 이 세 요소는 전략을 구성하는 삼위일체로서 어느 하나를 빼고서는 전략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 목표는 국가나 조직이 달성해야 할 궁극적인 지향점 또는 최종 상태이다. 수단이란 국가나 조직이 보유하고 있는 유형 또는 무형의 자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방법이란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나 조직이 보유하고 있는 가용 자산을 운용하는 술 또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박창희, 2013, p. 101).

    이렇게 볼 때 박창희 교수는 일반적으로 전략이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용한 수단을 운용하는 술과 과학”으로 정의하였다. 아울러 모든 전략은 이러한 일반적인 전략의 정의를 바탕으로 각 수준 및 영역별로 정의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결국 이러한 논리로 군사전략이란 “정치적 목적 또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용한 군사적 자산을 운용하는 술(術)과 과학(科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박창희, 2013, pp. 101-102).

    앞서 언급한 박창희 교수의 군사전략에 대한 개념 정의는 다른 학자에 의해서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용섭 교수 역시 군사전략이란 “전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며,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효과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며 운용하는 방책이다.”라고 언급하였다(한용섭, 2012, p. 212). 다만 한용섭 교수는 전략과 정책의 상관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전략의 구성 체계를 더욱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군사전략 개념은 전략의 구성체계로 볼 때 국가이익과 국가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국가정책 및 국가전략의 하위 개념이다. 즉, 군사전략이란 정치전략, 경제전략, 외교전략과 함께 국가전략을 구성하는 하나의 하위 전략으로서 국가정책에 의해 설정된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수단을 효과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하며 운용하는 방책이라 정의할 수 있다(정병호, 2007, pp. 138-139).

    결론적으로 과거의 군사전략 개념이 전시에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한정되었다면, 이제는 전시는 물론 평시의 국가목표를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즉, 현대의 군사전략이란 단순히 전쟁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시 외교를 지원하고 경제활동을 보호하는 등 확대된 영역에서 국가이익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울러 군사전략의 개념 정의에 대한 언급에서와 같이 군사전략을 논하는 데 있어 ‘목표(목적)-수단(자원)-방법(개념)’의 핵심요소들에 대한 폭넓은 정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져야 한다.

       2.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 제 요소의 상관관계

    지금까지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에 관한 각 요소들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들 세 가지 요소들은 서로 어떠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흔히 무기체계와 군사전략의 상관관계를 논함에 있어, 무기체계의 발달이 군사전략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주장과 반대로 군사전략의 변화로 이에 부합하기 위해 무기체계가 변화하였다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다. 이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의 딜레마적인 논의와 동일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 등 이들 요소들은 단순히 한 방향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무기체계의 선 결정으로 인해 군사제도가 그에 걸맞게 변화를 보이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수립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반면에 반대로 목표달성을 위한 군사전략의 선 결정으로 이를 위한 무기체계의 선택과 군사제도의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양자적인 입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요소들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가 논쟁의 핵심이 아니고, 세 가지 요소들 간에는 상호작용의 관계로 상관관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관계를 그림으로 살펴보면, 아래의 <그림 1>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기초로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무기체계의 발달이 군사제도 및 군사전략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라는 가정하에 출발한다. 이는 인류의 군사사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 신형무기의 출현과 발전은 작전방식과 방법의 변화를 이끌어 냈으며, 더 나아가 군대의 조직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반드시 이러한 수순을 밟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례를 비교 연구하기 위해 핵심지표로서 선정한 이들 요소들 간의 관계 설정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본 연구에서는 무엇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초래하였는가라는 측면에서 어떤 요소가 먼저인가의 문제가 아닌, 이들 세 가지 요소들은 상관관계를 형성하여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기체계의 발달과 변화로 인해 군사제도와 군사전략이 변화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사전략이 먼저 변화를 함으로써 무기체계와 군사제도가 군사전략의 실현을 위해 후속하여 변화할 수도 있다. 결국 핵심은 어떠한 요소로 인해 변화가 이루어졌는지가 아닌, 이들 요소들의 변화과정에는 반드시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군사제도의 측면에서 본 연구는 새로운 조직의 탄생 자체로 끝나지 않고, 이는 필시 무기체계의 변화 또는 군사전략의 변화와 연관성이 있음을 바탕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3. 연구의 구성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연구는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에 관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앞의 개념적 고찰에서 세 가지 핵심지표 요소인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의 개념과 이들 요소들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미 제시한 핵심적인 지표로서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소련과 중국의 각각의 사례에 적용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위의 <그림 2>와 같이 소련의 전략로켓군과 중국의 제2포병부대가 창군하는 과정 속에서 당시의 무기체계, 군사제도 그리고 군사전략이 어떠하였는지를 각각 살펴보고, 이후 두 국가의 사례를 비교 연구를 통해 새로운 군종의 탄생으로 나타난 특징들을 분석함으로써 시사하는 바를 도출하고자 한다. 결국 소련과 중국의 사례를 통해서 서론의 연구목적 및 문제제기에서 언급하였듯이 전략로켓군 혹은 제2포병부대인 새로운 군종의 전략로켓 부대를 왜 창설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전략로켓 부대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은 무엇이며, 향후 무엇을 위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 국가의 전력 변화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함께 우리의 전략적 대응방향을 판단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Ⅲ. 소련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  Ⅲ. 소련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소련의 첫 탄도미사일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 독일의 V-2(A-4) 미사일의 유산에 의해 발전되었다. 소련은 V-2 미사일을 소련 모델로 개량하여 R-1(R은 로켓의 첫 글자)이라고 칭하였고 그 후 더욱 강력한 R-2를 제작하였다. 즉, 소련의 첫 탄도미사일 R-1, R-2는 전쟁기 독일 미사일 기술이 밀접하게 파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R-5는 순수한 소련의 기술로 오로지 소련 자체의 미사일 계획으로서 새로운 세대에 첫 발을 딛게 되었다.

    이후 소련은 1957년 8월 21일 세계 최초의 2단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이어 동년 10월 4일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으며, 1959년 1월 2일에는 로켓을 행성간 궤도에 진입시켰다. 또한 1961년 4월 12일에는 바이코누르 우주항공기지로부터 유인우주선 보스토크를 성공적으로 발사하기에 이르렀다(이재훈, 1997, pp. 375-376). 이처럼 20년이 넘는 소련 탄도미사일 발전 현황을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다음으로 소련의 핵무기 개발 현황에 대해 살펴본다.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최초의 플루토늄탄(20KT) 폭발시험에 성공했다. 그 결과는 같은 해 9월 25일에 있은 「TASS 통신」의 공표에 의해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즉 타스 통신은 소련이 핵무기와 핵무기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공표하였던 것이다. 이후 소련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핵폭발 실험이 진행되었으며, 신형 핵무기들이 속속 생산되었다(이재훈, 1997, p. 349).

    1953년 8월 수소폭탄 완성에 이어, 1955년 11월 6일 항공기에서 핵 투하 실험을 실시하고, 1955년 11월 22일 수소폭탄(1,600KT) 폭발실험, 1961년 10월 11일 지하 핵실험, 1961년 10월 30일 최대 규모의 대기층 핵실험(50,000KT), 1962년 12월 25일에는 최후의 대기층 핵실험을 실시했다(김용남 , 2005, p. 401). 이상에서와 같이 소련의 초기 핵 실험에 대한 노력은 당시 미국의 핵독점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아래 <표 2>의 소련 핵실험 현황을 기초로 이들 핵무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개발 현황을 살펴본다.

    소련 최초의 대기 실험 RDS-1은 1949년 8월 29일 실시되었고, 이는 내부적으로 코드명 ‘First Lightning’으로 불려졌다. 이 모델은 TNT를 사용하는 미국 최초의 ‘Fat Man’ 플루토늄 폭탄과 유사하다. 다음의 RDS-2는 폭발력 약 38.3KT으로 트리튬이 증가된 우라늄 내파장치를 기초로 1951년 9월 24일 실험되어졌다. RDS-3는 41.2KT 장치로서, 플루토늄과 우라늄-235의 혼합구성물을 사용한 증가된 무기로 1951년 10월 18일 폭발되어졌다. 이 실험은 소련 최초의 공중 낙하실험이었으며, 고도 10Km에서 낙하하여 지상 400m 지점에서 폭발하였다.

    RDS-4는 소규모 전술무기 연구로 대표적이었다. 이는 뜨는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증가된 핵분열 장치로서 첫 번째 실험은 폭발량 약 28KT으로 1953년 8월 23일 공중투하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이 장치는 R-5M 준중거리 미사일의 탄두로 구성되었고, 1956년 2월 2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사일과 핵탄두의 실제 결합 하에 실험을 하였다. RDS-5는 핵 원자의 뜨는 핵심 기술은 유사하지만 플루토늄과 우라늄-235를 혼합했다는 점이 조금은 다르다.

    다음으로 RDS-6는 소련의 첫 번째 수소폭탄 실험으로 1953년 8월 12일 실시되었다. 이것의 폭발력은 400KT에 달하며, 핵분열과 핵융합 연료(우라늄-235와 리튬-6 중수소화물)의 층별 구분된 형태로 사용되어졌다. RDS-9은 T-5 핵 어뢰를 위해 개발되어졌고, 3~10KT 규모로서 RDS-4의 저용량 버전이다. 이 장치의 실험은 3.5KT 규모로 1955년 9월 21일 어뢰를 통해 수중 실험으로 실시되었다. RDS-37은 메가톤급에 달하는 소련 최초의 순수 수소폭탄으로 1955년 11월 22일에 실험되었다. 이들 가운데 RDS-1, RDS-6, RDS-37은 모두 카자흐스탄에 세미팔라티니스크(Semipalatinsk) 실험장에서 실험되었다.

    Tsar Bomba(RDS-220)는 유례없던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핵무기이다. 이것은 약 50MT의 폭발력을 가진 3단계 수소폭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전체 핵 폭발력의 약 10배에 달하는 수준과 동등하다. 1961년 10월 30일 노바야 젬리아 아치펠라고(Novaya Zemlya archipelago)에서 실험되어졌다. 비록 이 장치는 무기화되었지만, 실전화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단순히 소련의 군사기술 능력을 증명하는 실험에 불과하였다.

    마지막으로 차간(Chagan)은 국가경제 또는 ‘프로젝트 7’을 위해 핵무기의 평화적 사용의 일환으로서 핵폭발되었다. 이것은 1965년 1월 15일 수면 밑에서 폭발하였다. 실험 장소는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 모퉁이에 Chagan강의 하천이었고, 폭탄구멍의 가장자리가 강을 둑으로 막기 위해 선택되어졌다. 실험 결과 형성된 폭탄구멍의 크기는 직경 408미터에 깊이 100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렇듯 1963년 미-소 부분적 핵실험 금지 협정 이후 소련은 평화적 목적으로 핵을 사용하여 인공호수를 만드는 데도 사용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은 핵 개발에 있어 1949년 원폭실험의 성공 이후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전력을 다하였다. 초기에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작하여, 보유한 핵무기의 수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실용화할 수 있는 핵 기술의 수준은 대등한 위치에까지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핵 기술 개발의 진일보한 발전으로 이를 투영할 수 있는 운반수단 즉, 인공위성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된 우주개발의 수준을 살펴본다. 로켓에 의해 발사되는 인공위성은 인류가 우주개발과 이용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인공위성을 연구개발하고 발사체인 탑재로켓을 제작하는 것이 우주개발의 가장 중요한 활동 영역이다. 더욱이 이를 통해 핵보유국에 있어서 우주개발의 수준자체가 핵 운반수단의 질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7년 8월 21일 소련은 사정거리 5천 마일의 R-7(NATO명 SS-6 Sapwood)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와 동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의 발사로 우주시대를 개막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성공은 공산권에게는 체제의 우월감을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 국가들에게는 소련의 핵무장에 대한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정성화, 1999, p. 213). 이러한 인공위성 발사의 성공은 다시 말해 사거리의 연장된 능력을 보여주는 기술로서 궁극적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기술적 보유가 완성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57년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후 우주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활기 있고 신중하며 조직적인 계획을 추구해 왔다. 1961년 소련은 최초로 사진정찰위성을 발사함으로써 우주를 처음으로 군사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하여 소련의 군사우주계획은 영역의 면에서나 수적인 면에서나 확장되었다. 우주셔틀시대가 출현함으로써 이러한 계획은 더욱 성숙되고 통합된 시스템으로 발전되어 소련의 군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고도가 낮은 미국 및 동맹국의 위성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소련 미사일 및 핵무기의 발전, 그리고 핵전력의 실전 배치는 과거의 모든 전쟁 준비와 수행 관행, 전쟁에서의 시간, 공간, 전역 등이 차지하는 의미, 각 군종 및 병과의 상호관계, 각 군종 및 병과 간의 협조 성격, 군의 전투 및 동원체제 등 군사 전반에 변화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이하에서는 이러한 변화 가운데 군사제도의 변화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2. 군사제도의 변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핵미사일의 발전은 소련 지도부의 군사력 재무장 및 조직적 강화 시책 수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즉 핵미사일의 발전은 소련의 군사정책 담당자들로 하여금 군 조직체계상에서 “이 무기를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 전쟁의 전략적 수단을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라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업을 부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핵미사일의 광범위한 도입이 시작된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군 내부에 새로운 형태의 군종 및 병과의 창설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1959년에 있었던 전략로켓군의 창설이었다.

    1960년 1월 소련 최고위원회 회의 전, 흐루시초프와 국방장관 말리노브스키는 새로운 병종인 전략로켓군 조직의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듬해 21차 당 회의에서 말리노브스키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발생한 세계 어떤 전쟁에서든 반드시 핵 로켓전쟁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또한 전략로켓군을 재차 언급하면서, 새로운 군의 창설로 인해 소련군사술의 재정립과 병력 특히 장교에 대한 재교육을 지시하였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활동 중인 의무복무인력을 감축할 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William E. Odom, 1983, p. 128). 이렇듯 핵무기라는 새로운 무기체계의 발달은 새로운 조직의 탄생 및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략로켓군의 조직 편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로켓군의 최고직은 소련군 원수 칭호를 가진 총사령관이다. 그의 지휘하에는 아래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3개 로켓군, 3개 독립 로켓군단, 10~12개 로켓사단, 3개의 대형로켓 사격장과 다수의 과학연구소 및 교육기관들이 있다. 이들 전략로켓군의 총 병력은 창군 당시에는 약 35만 명 규모였으나, 소련군에 있어 전략로켓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조직 구성의 확대를 통해 현재는 대략 50만 명에 이르렀다.

    전략로켓군에는 작전 및 행정기구가 있다. 평시에 있어 총사령관은 행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국방장관에게 책임을 지며, 로켓의 작전적 사용에 관한 모든 면은 정치국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전시 전략로켓군은 최고사령관을 통하여 국방회의에 의해 통제되며 전략로켓의 대량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국방회의 즉, 정치국에 의해 결정된다.

       3. 군사전략의 변화

    소련 전략로켓군의 군사전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핵심적 수단인 핵무기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사용하였는가, 다시 말해 핵전략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최초 소련 전략사상의 기본 바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러한 소련이 혁명 이후부터 탈냉전기 도래 시까지의 전략의 변천을 살펴보면 아래의 <표 3>과 같다. 본 연구의 연구목적 달성을 위해 연구의 시기적 범위를 제3기부터 제5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군사전략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제3기(1940~50년대 전반)의 군사전략은 1941년 6월 23일 독일군의 전략적 기습공격을 받아 참패를 당하여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까지 철수를 감수하였다가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가하여 2차대전 시 승리국가로 등장한 전략이다. 이 전략을 군사평론가들은 적극방어전략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며, 북괴, 중공 등 사회주의국가들이 높이 찬양하고 이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군사전문가의 연구와 창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고 스탈린 개인의 창안에 의하여 채택된 것이다.

    다음의 제4기(1950년대 후반)는 흐루시초프의 핵전략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량보복전략에로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결정한 ‘전쟁불가피성의 부정’으로 소련은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구축하여 소련의 군사이론계가 비로소 핵 이념을 놓고 논쟁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권력을 확립한 흐루시초프는 최초의 핵 억지 전략, 즉 대량보복전략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량보복전략의 전환기라는 것 자체가 이전의 재래식 전력에 의한 전략에서 핵무기의 보유에 따른 전략적 개념의 전환에 의한 것이며, 더욱이 이는 당시 서구에서 추구하는 핵전략의 개념에 대응을 하기 위한 것으로서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군사전략을 핵전략의 측면에서 다시 바라보면, 존슨(Alastair Iain Johnson)은 그의 논문 “China’s New Old Thinking: The Concept of Limited Deterrence”에서 핵 억지 전략의 세 종류(①최소억지전략, ②제한억지전략, ③최대억지전략)를 언급하였는데(Alastair Iain Johnson, 1995-96, p. 18; 오규열, 1999, pp. 213-226),2) 이를 기준으로 하여 소련의 당시 전략을 달리 말하면 최소억지전략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소련의 기술 개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존슨이 주장하는 제한억지전략을 추구하기 위한 이른바 전략 핵무기 삼원체제(Triad)의 세 가지 조건 ①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②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③다중공중발사시스템(MIRV) 중 ICBM의 한 가지 기술적 조건밖에는 충족하지 못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5기(1960년대 전반)는 1960년 초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전략로켓군의 등장을 천명하면서 대량보복전략이 절정에 도달한 완성기이다. 이 전략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 시에 채택하였던 대량보복전략과 거의 동일한 전략이다. 이 전략은 1960년 1월 24일 흐루시초프가 최고회의에서 발표한 핵 편중정책에 의하여 1962년 당시 참모총장직에 있던 소코로브스키 원수가 ‘군사전략’을 편집 발간한 것으로 모든 제한전쟁은 전면 핵전쟁으로 확대 발전되므로 핵무기로써 무제한 보복공격을 가한다는 개념이다. 이 군사전략은 1963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고, 이것은 핵전쟁 본질상에 있어 가장 포괄적인 소련의 성명 내지는 입장으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다(William E. Odom, 1983, p. 121). 또한 이 전략은 때에 따라서는 기습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위협적인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이 시기 역시 존슨이 말한 핵 억지전략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최소억지전략의 단계에 해당된다. 이전의 4기에 비해 1961년 소련은 SLBM의 기술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MIRV의 기술에 있어서는 한참 후인 1973년에 이르러서야 달성되어진다. 따라서 이 시기는 소련 핵전력의 양적・질적인 확대 성장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략적 측면에 있어서는 제한억지전략을 추구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2)이러한 전략 개념을 도출하는 이유는 뒤에 제4장에서 언급할 중국의 전략과 비교 연구를 위해서임을 먼저 밝히는 바이다.

    Ⅳ. 중국의 제2포병부대 창군과정

       1. 무기체계의 발달

    먼저 중국의 탄도미사일의 개발과정을 살펴본다. 중국의 미사일 개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95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과학을 향해 진군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미사일 기술을 포함한 장기 과학기술발전계획을 수립한 후 1956년 2월 해외로부터 귀국한 치엔슈에선(錢學森) 박사가 미사일 기술 발전을 위한 건의를 하게 되면서 미사일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동년 10월 8일 중국정부는 녜륭전(聶榮瑧) 원수의 책임 하에 국방부 제5연구원을 설립하였으며, 이때부터 중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설계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60년 11월 5일 중국은 소련의 미사일을 모방한 최초의 ‘둥펑(東風)-1호’ 근거리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였으나, 1962년 3월 21일 자체 설계로 개발한 중근거리 미사일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기술상의 좌절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계속적인 노력 끝에 1964년 6월 29일 독자적으로 개발한 ‘둥펑(東風)-2호’ 중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였다.

    그 이후 중국의 미사일 개발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중국은 1966년 핵무기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였고, 1970년에는 중거리 및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였으며, 1971년에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또한 중국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거리 전략미사일 및 잠수함 수중발사 고체전략미사일 발사시험에 성공함으로써 기본적으로 핵 반격능력을 확보하였다(이건일, 2001, pp. 273-274).

    중국의 전략탄도미사일을 분류해 보면 미사일 기술능력의 진보 수준에 따라 제1세대와 제2세대 탄도 미사일로 분류할 수 있다(김용남, 2005, pp. 141-144).3) 제1세대 탄도미사일은 지대지 탄도미사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둥펑(東風)-2, 3, 4, 5호’로 4가지 형의 지대지 전략탄도미사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 잠수함에 의해 발사하는 탄도미사일 ‘쥐랑(巨浪)-1호’ 미사일을 들 수 있다(김용남, 2005, pp. 141-144). 다만, 본 연구에서 ‘쥐랑(巨浪)-1호’ 미사일에 대한 연구는 제외한다(이건일, 2001, p. 302).4) 이는 ‘쥐랑(巨浪)-1호’ 미사일은 제2포병 부대에서 운용되는 전력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1세대 미사일의 대표적인 4가지 둥펑(東風) 미사일의 연구개발과 성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본다.

    먼저 둥펑(東風)-2호(CSS-1) 미사일은 1단 추진 액체로켓엔진으로 발사하는 중단거리 전략탄도미사일로, 1960년 연구개발을 시작하여, 1964년에 실험발사에 성공하였고, 1966년 이래 부대에 장비하여 운용하고 있다. 사거리는 약 1,019Km이며 기동발사가 가능하고, 20KT 상당의 핵탄두를 장착 가능하다(김용남, 2005, p. 142). 이로써 1966년 중앙군사위는 실험이 끝난 둥펑(東風)-2를 중국의 동북부에 배치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황병무, 1995, p. 169).

    두 번째로 둥펑(東風)-3호(CSS-2) 미사일은 1단 추진 액체로켓엔진으로 발사하는 중거리 전략탄도미사일로, 1966년 12월 시험 발사되었다. 그러나 실전배치는 열핵탄두의 장착을 위해 늦어졌다. 결국 1970년대 초에 부대 배치하여 운용되었으며, 사거리는 2,544Km로써 필리핀의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다(황병무, 1995, p. 169).

    세 번째로 둥펑(東風)-4호(CSS-3) 미사일은 2단 추진 액체로켓엔진으로 발사하는 중장거리 전략탄도미사일로, 1967년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1970년에 시험발사에 성공하였다. 최대 사거리 4,800Km까지 메가톤의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제한된 대륙간 탄도미사일(Limited-range intercontinental ballastic missile)이다. 중앙군사위는 태평양 괌에 있는 미국 전략항공사령부 기지를 이 둥펑(東風)-4형의 가상적 목표물로 삼으려 했다(황병무, 1995, p. 170).

    마지막으로 둥펑(東風)-5호(CSS-4) 미사일은 2단 액체로켓엔진으로 발사하는 대륙간 지대지 전략탄도미사일로, 1960년대 중반에 연구개발에 착수하여, 1970년에 과학연구비행시험에 성공하고, 1980년에 실탄비행시험에 성공하였다. 사거리는 11,112Km로서 500MT 상당의 핵탄두를 장착 가능하다(김용남, 2005, p. 142). 이로써 핵탄두를 하와이와 미 본토 대륙에 운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의 제1세대 미사일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와 70년대의 기술로 제조된 것이며, 1기의 미사일이 1개 탄두를 장착할 수 있고, 명중률이 낮은 편이다. 또한 이들 미사일은 모두 액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체적이 크고 기동성이 약하며 보관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발사를 위한 준비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이건일, 2001, p. 274). 지금까지 살펴본 중국 핵운반수단에 대한 종합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은 미사일들이 핵무기 운반수단의 주역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중국 핵무기의 개발과정을 살펴본다. 핵보유국들은 지속적인 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질적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으므로, 이러한 핵 실험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은 핵무기의 질을 평가하는 데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핵 실험 현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5>와 같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은 1964년 첫 번째 핵실험 이후 1980년까지 약 27회에의 실험을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약 15년 동안 중국은 핵탄두의 성능 면에서 괄목할 만한 개선을 이룩하였다. 파괴력은 1964년 20KT까지에서, 1976년 11월 4MT과 동년 1월 2KT까지 낮아지는 광범위한 변동의 범위를 갖는 핵탄두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탄두의 규모와 무게는 감소되었다(황병무, 1995, p. 349). 양적으로 볼 때 핵탄두의 재고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70년에는 75개, 1975년에는 180개, 1980년에는 270개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인공위성 발사와 관련된 우주개발의 수준을 살펴본다. 구체적인 중국의 인공위성 개발 현황은 <표 6>에서 보는 바와 같다. 1970년 중국의 최초 인공위성 발사가 성공한 이래로 수차례에 걸쳐 현재까지도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앞서 설명한 연구의 시기적 범위를 고려하여 1981년까지로 한정하여 연구토록 한다. 이렇게 한정한 이유는 1981년 1기의 로켓으로 3개의 위성을 동시에 발사시키는 기술을 성공한 시점인데, 이는 다탄두화(MIRVs)를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기술적 진보의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다단계형태인 둥팡홍(東方紅)-1호 인공위성은 1970년 4월 개량된 중거리 미사일에 의해 발사되었다. 그 후 1972년 완전히 실전배치가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의 실험에 성공하였다. 1975년 11월, 중국은 최초로 위성을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점은 대륙간 탄도탄의 대기권에서의 재돌입기술을 중국이 획득한 것을 의미한다. 1976년 12월 중국은 7번째의 위성을 개량된 대륙간 미사일 발사대에 의해 궤도에 진입시켰다. 그러나 중국 최초의 완전한 발사거리를 갖는 대륙간 미사일의 실험은 1980년 5월에 성공했고, 1981년 9월 하나의 로켓에 3개의 위성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중국이 다탄두탑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황병무, 1995, pp. 361-362).

    결론적으로 중국은 1970년도에 첫 번째 인공위성 발사를 성공시킨 이래로 80년대 초까지 총 14회에 걸쳐 발사 시험을 해서 그 결과 8차례에 걸쳐 성공에 이르는 초기단계임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달성하였다. 초기 2회는 실험적인 목적으로 인공위성 발사를 하였으나, 이후 3번의 실패를 맛보며 4년의 공백기를 거치면서 75년도에 들어 CSS-3의 발사수단을 통해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사진정찰용 인공위성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기권 재진입이 가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과 다탄두탑재 미사일 기술 등 이러한 중국의 우주개발 진척은 핵 운반수단으로써 중국 핵전력 향상을 직・간접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2. 군사제도의 변화

    지금까지 중국 핵전력 무기체계의 발달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무기체계의 발달은 중국 역시 군사제도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66년 탄생한 전략미사일 부대인 제2포병부대의 창군이다.

    제2포병부대의 설립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핵 위협을 다루고, 핵 독점을 저지하며,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중국은 1956년 전략미사일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전략미사일을 위한 연구소, 훈련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1959년에는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 부대를 만들었고, 1966년 7월 1일 제2포병부대로서 공식적으로 창설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제2포병부대가 중국적 특색을 가진 최저수준의 효과적인 전략적 미사일 부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홈페이지, 2013).

    제2포병부대의 정식적인 창설이 이루어진 후 1968년 미사일・핵무기의 신속한 개발에 따라 제2포병은 중거리, 장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지대지전략부대와 일단의 전투보장과 기술 근무부(분)대를 설립하였고, 또한 이 영도기관은 산하조직으로 사령부, 정치부, 후근부를 두었으나, 1975년 12월, 무기・장비의 관리와 과학기술 연구공작을 강화하기 위해 과기부(科技部, 후에 기술장비부로 개칭)를 증설하였다. 1982년 9월 이후 미사일부대장비의 복잡성과 기술상의 특성에 부응하고 간부의 연경화, 전문화 및 장교와 병의 비례, 그리고 작전과 근무보장전문 기술인의 비례 등 작전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제2포병은 육군부대와는 다른 편제의 특성을 지녀야 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1985년 6월 전군의 정편공작에 따라 제2포병기관은 중첩된 조직을 철폐하고 인원수를 줄였으나 지휘, 통제, 자동화 지휘계통을 편제에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제2포병은 지대지전략미사일 무기계통을 장비하여 전략 핵 반격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써, 창설 당시 편성된 조직에 비해 근거리, 중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부대 및 공정, 정보, 정찰, 측지, 계산, 기상, 통신, 방화, 위장 등 작전보장, 기술보장과 후근보장부대로 편성을 확대 및 강화하는 등 명실상부한 중앙군사위원회의 직속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결국 1985년 9월 중앙군사위원회의 미사일부대 체제와 편제의 개혁지시에 따라 발사 분대가 제2포병의 주체가 되는 합성체제를 만들어 비교적 완성된 작전체제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황병무, 1995, pp. 227-228).

    이러한 제2포병부대의 편성 및 배치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의 <그림 4>와 같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제2포병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으면서 대군구에 소속되어 전술미사일부대와 전략미사일부대를 가지고 있다. 제2포병사령부는 북경에 있으며, 샨시성(陜西省) 타이바이(太白)에 예비지휘소가 있다(김덕기, 2002, p. 137). 사령부 예하에 7개의 군구급(軍區級)5) 기지가 있으며(황병무, 1995, pp. 191-198), 14개 미사일 발사여단을 관할하고 있다. 이외에 조기경보부대, 통신연대, 경비연대, 기술지원대 등의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알려진 제2포병시험・훈련기지는 감숙성의 오위, 쌍자성과 산서성의 오한 등 3곳에 있다(김덕기, 2002, p. 137).

    결국 제2포병부대는 중국에 대한 적의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며, 적이 중국을 향해 핵 습격을 발동 시 통수부의 명령에 따라 독자적으로나 또는 다른 군(병)종과의 협조하에 적의 중요한 전략목표를 공격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제2포병부대는 지대지 전략미사일 무기체계로 무장하여 중국에 대한 다른 나라의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고 전략핵 반격(제2격)임무 및 재래식 유도탄의 정밀 타격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것이다(中國國務院, 2009, p. 18).

       3. 군사전략의 변화

    중국 군사전략의 큰 흐름은 국내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 현실적인 중국의 군사 역량 및 군사・기술적 조건 등에 대한 복합적인 고려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의 군사전략은 국가가 무력을 건설하고 운용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지침이며, 또한 군대와 국방의 모든 사업과 관련되는 기본원칙이다. 건국 이래 중국의 군사전략방침은 기본적으로는 마오쩌둥(毛澤東) 군사사상 속의 적극방어 원칙을 계승해 오면서 서로 다른 역사적 발전단계에 적응하는 상이한 내용으로 조정되었다(David M. Finkelstein, 2007, pp. 79-80).6)

    중국의 제2포병부대 창군시기(1966년)를 기준으로 전・후 중국 군사전략의 변천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는 “적의 기습을 방지하고 적극방어를 실행한다.”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후 제2포병부대가 본격적인 창군이 전개된 시점인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는 “곧 다가올 전쟁, 대규모적인 전쟁, 그리고 핵전쟁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이건일, 2001, p. 239).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기간은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보를 위협하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연속적으로 터진 시기였다. 소련과의 결별, 인도와의 국경분쟁, 대만해협의 긴장고조, 미국의 월남전 개입 등으로 인해 중국의 안보상황은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국은 자국의 안보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의 수정은 필연적이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단계의 군사전략방침으로 변화한 것이다.

    군사전략방침의 수정은 1964년 10월 22일에 이루어졌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지시를 통해 “반드시 전쟁에 입각하여 대규모적인 전쟁과 곧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며, 곧 다가올 전쟁과 대규모적인 전쟁 및 핵전쟁을 하는 것에 입각해야 한다. 우리는 전략배치, 후방시설, 작전준비 및 국방산업 건설 등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국민 경제의 건설 등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이건일, 2001, p. 241).

    결국 “다가올 대규모적인 전쟁 및 핵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도사상하에 중국은 1960년대부터 국방건설을 위한 각종의 중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중국은 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으며, 3선 건설을 대규모적으로 추진하였고, 핵무기와 운반수단에 대한 연구개발에 착수하였으며, 제2포병부대를 창설하고 민병사단과 생산건설병단을 조직하였다. 더욱이 이 기간 중 중국은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투입하여 전쟁대비에 진력하였으며, 원자탄과 수소탄의 실험, 인공위성의 발사, 핵 잠수함 건조 등 전략무기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핵전략의 태동은 단면적인 요인이 아닌 다양한 복합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요인들 중 핵실험 실시 이전과 이후로 가장 중요한 목적을 나누어 본다면, 핵실험 이전의 목적은 국가 자존심의 실추로 야기되었던 수치와 두려움이었다. 즉 중국의 독립 이후 핵무기를 강대국으로부터 또다시 침해를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핵실험 이후에 있어서는 특히나 중・소분쟁의 심화로 인해 핵무기 보유를 통한 국가의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종합적인 국력과 핵전력의 기술적 진보 수준을 고려했을 때, 중국은 미국과 소련에 대해 ‘최소억지전략’을 구사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오규열, 1999, pp. 213-226).7)

    3)이 글에서 저자는 세대분류를 시기적으로 봤을 때 1980년대 이전까지를 제1세대로, 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를 제2세대로 보았다. 한편 이건일, 위의 책에서는 제1세대와 제2세대의 시기적 구분의 기준 시점을 1980년대 중반으로 보았다. 이렇듯 제1세대와 제2세대를 구분하는 명확한 근거나 이유가 있진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많은 연구들에서 1980년대를 기점으로 중국의 전략미사일이 진일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서론에서 제시한 연구의 시기적 범위를 고려하여, 1980년까지의 시기를 제1세대로 국한한다.  4)둥펑(東風) 계열의 미사일은 지대지 탄도미사일로써 이는 육상기지의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사령부가 지휘하지만, 쥐랑(巨浪) 1형과 같은 잠대지 전략미사일은 전략미사일잠수함부대가 해군함대에 편입되어 해군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본 연구의 범위와 맞지 않기 때문에 제외한다.  5)중국의 군구는 최초 1950년대는 6대 군구를 유지하였으나, 1985년도에는 7대 군구를 유지함에 따라서 제2포병부대는 이러한 군구 단위에 맞게 기지를 둔 것으로 판단된다.  6)이 글에서 중국 군사전략의 내용과 성격을 구성하는 군사전략방침의 기능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권위 있는 지침이다. 일반에 공개되었든 비밀리에 취급되든 실제 기획 또는 행동의 지표가 되는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국력의 군사력 요소가 상위의 국가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셋째, 커다란 개념으로 제시되나, 결국은 그 개념을 이행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기획 또는 프로그램으로 연결된다. 넷째, 대개는 단기, 중기, 장기의 관점에서 기획을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 다섯째, 목적, 방법, 수단의 문제를 제시한다. 군사전략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에서도 목적은 달성해야 하는 근본적인 목표를, 방법은 목적이 달성되는 전략개념과 행동방식, 수단은 어떠한 자원을 사용하는가의 문제를 의미한다. 여섯째, 중국의 군사전략은 군사전략방침에 나타난 그들의 위협인식, 능력평가, 전략평가 등을 분석하고 전략을 추동하거나 제한하는 국내적 요인을 식별함으로써 알 수 있다.  7)국제사회의 군사적 억지전략은 ‘저지와 보복’을 수단으로 상대의 적대적 행위를 차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런데 핵의 개발로 억지이론은 핵 공격 시 상대가 반격을 실시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할지라도 상대의 전략 핵무기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여 핵 반격을 받으면 자신이 받는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핵보유국들이 구사하는 억지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월등한 양질의 핵무기로 상대의 위협을 제지하는 최대억지전략(Maximum Deterrence), 둘째, 핵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국가가 전략핵무기의 타격 목표를 인구가 밀집된 상대의 주요 도시에 두어 대량살상을 인질로 적의 선제공격을 차단하는 최소억지전략(Minimum Deterrence), 셋째, 최대억지전략과 최소억지전략의 중간개념으로 핵무기의 조준점을 탄력적으로 운용하여 소수의 핵무기로 최대억지전략의 효과를 보는 제한억지전략(Limited Deterrence)이다. 제한억지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전략 핵무기 삼원체제, 즉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그리고 전략폭격기로 대표되는 다중공중발사시스템(MIRV)의 구비가 필수적이다.

    Ⅴ.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부대 창군과정 비교와 북한 상황 분석

       1. 소련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분석

    앞의 3장에서 소련 전략로켓군의 창군과정에 있어 핵무기라는 무기체계의 발달, 군사제도의 변화, 군사전략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아래의 <표 7>에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에는 장차 핵전력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과 냉전체제를 맞이하면서 절대무기로서 핵무기에 대한 필요성의 증대로 무기체계 개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소련제 자체 미사일, 원폭 및 수폭 실험, R-7 ICBM 그리고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핵전력을 구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무기체계의 개발을 통해 소련은 이들 핵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1959년 기존에 최고사령부 예하의 여단급 직할 포병부대들을 통합하여 전략로켓군이라는 독립적인 군종을 창군하게 되었다. 아울러 군사제도의 변화에 끝나지 않고, 미래 전쟁 양상에 대한 판단과 더불어 적에 의한 핵공격에 보복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까지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당시의 핵심적인 전략으로 앞서 언급한 이른바 핵 억지전략의 하나인 ‘최소억지전략’인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혁신적인 무기체계의 등장은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방법적 차원에서 기존의 군사제도의 변화가 수반되며, 또한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목표 차원에서의 전략 수립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략의 수립으로 끝나지 않고, 이는 또 다른 기술적 발전과 군사제도의 변화를 이끌면서 결국 이들 요소들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소련 전략로켓군의 창군과정을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로서 소련의 군사력은 다음의 네 가지 중요한 상호 관련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핵 공격에 대한 억지, 통상 병기에 의한 본토 공격에 대한 방위, 동구에서의 ‘사회주의 제국 공동체’의 보호, 마지막으로 서남아시아처럼 소련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의 군사력 투영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핵전력의 보유를 통하여 무력 파괴의 선택이 가능해짐에 따라 냉엄한 긴장이나 위기적 상황하에서 미국이나 그 동맹권을 ‘협박’하거나 ‘강요’하는 능력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소련은 군사력을 계속 확대함으로써 당대나 다음 세대가 과거에 비해 보다 적은 위협으로 보다 큰 성과를 거두면서 ‘소련과 사회주의 제국 공동체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또한 핵전력의 보유를 기반으로 당시 대외적 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을 보강했다고 판단하여 소련은 전후 피폐한 대내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변화를 천명하였다. 그것은 1961년 제22차 당 대회에서 소련 사상 최초로 “대포”우위정책으로부터 “버터”우위정책으로 표면상 전환하는 신당강령을 채택하여 소련의 제1목표를 80년대까지 국민생활에 안정과 향상을 가져온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체제안정을 위한 말뿐으로 그쳤고, 그 후 정책변화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으며, 여전히 군비증강에 집중하여 왔다(박용덕, 1971, p. 184). 이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핵무기의 발전과 경제발전의 병진 노선’의 일환으로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2. 중국 제2포병부대 창군과정 분석

    1949년 건국 후 마오쩌둥(毛澤東) 시기 중국은 냉전구조하에서 내외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당정부와의 정치적・군사적 투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국가의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정부의 성격이나 기본적인 정부조직 및 기능의 기본이 되는 헌법이나 강령도 없었다.

    또한 건국 후 중국은 다양한 안보위협에도 대처해야 하였다. 주요 안보위협으로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 특히 핵공격의 위협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일면 중국을 대륙과 해양으로 포위하여 중국을 압박하였다. 마오쩌둥(毛澤東) 시기 중국은 이러한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강력한 군사위협을 받았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군사정책과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가운데에서 핵무기 개발 초기 미국 등 자유진영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냉전적 구조하에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핵무기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중국의 성장에 대한 우려와 이념적 갈등으로 소련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의 강력한 의지와 전폭적인 관심으로 중국은 1964년 원자폭탄을, 3년 후인 1967년에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되고 지속적인 핵무기 운반수단의 능력 향상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핵위협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박응수, 2012, pp. 108-110).

    이러한 핵무기 기술 개발은 중국군 군사제도에 있어 결국 1966년 중국 제2포병의 창군과정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지금까지 핵무기라는 무기체계의 발달, 군사제도의 변화, 군사전략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표 8>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경우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수단으로서 핵무기체계 기술의 발달은 목적 차원에서의 군사전략과 방법 차원에서의 군사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966년 제2포병부대가 창설되었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제2포병부대는 지휘체계에 있어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제하에서 핵・미사일을 직접통제 및 운용되었다. 그러나 인공위성에 있어서는 제2포병부대가 아닌 민간기구로서 중국방송 위성공사가 상업적인 측면에서 관리하였다. 제2포병부대의 예하 조직에 있어서는 군구별 기지를 구축하여 제2포병부대가 운영이 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운용 및 통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통수부에 의해서만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무기체계의 발달이 군사제도로 그 다음 군사전략의 변화라는 수순이 아닌 새로운 무기기술력을 기반으로 전략적 목표를 확고히 수립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군사제도의 기틀을 잡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여기에서도 무기체계, 군사제도 그리고 군사전략적 요소들은 상호 연관된 관계를 형성함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미국과 소련이라는 핵강대국에 대해 핵무기 생산기술이나 시설 등이 전반적으로 낙후한 중국이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은 최소한의 핵무기를 가지고 국가의 생존을 유지하고 국가의 위상도 어느 정도 제고할 수 있는 ‘최소억지전략’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국은 핵무기 개발 초기 이 ‘방어적’ 핵전략을 채택함으로써 한편으로 미국이나 소련 등 핵 강국의 위협과 견제를 피해가면서, 핵무기 강화에 전력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의 지도자들도 핵무기의 ‘선제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을 계속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중국의 핵무기 개발 목적이 중국 본토의 방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국의 핵보유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우호적으로 조성하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이들 핵 강국의 핵위협을 ‘종이호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국민들의 동요를 막으면서 공산당정권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박응수, 2012, pp. 107-108).

    요컨대 마오쩌둥(毛澤東) 시기 중국은 혁신적인 핵기술 개발의 노력으로 제2포병이라는 전략미사일부대 창군이라는 핵 강국의 대열 진입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최소억지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였음은 물론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서, 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3.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부대 창군과정 비교 분석

    본 논문에서는 소련의 전략로켓군과 중국 제2포병부대의 창군과정을 비교 연구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군종의 탄생과정에서 비교 연구를 위해 무기체계, 군사제도, 그리고 군사전략의 세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분석하였다. 이들 요소들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 본 논문을 연구하기 위한 핵심적인 지표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연구 분석틀로 도출한 분석 결과를 종합해 보면, 아래의 <그림 5>와 같이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경우를 비교한 위의 그림에서 보면, 몇 가지 특징적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양국의 경우 모두 새로운 무기체계의 발달이 군사제도와 군사전략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소련과 중국은 핵무기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구비하기 위해 탄도미사일, 핵폭탄, 인공위성 등 부단한 기술 개발과 실험을 통해 그러한 능력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기술력은 전략로켓군이라는 새로운 조직의 태동과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의 수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중국의 경우는 핵 무기체계에 있어 완전한 능력을 구비하고 난 후 조직과 전략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당시 중국의 대내외적 환경에 의한 것으로 최소한의 핵 사용능력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전략로켓군이라는 조직의 형성 자체는 결국 기본적으로 핵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적어도 최소한의 무기체계 기술력 혹은 능력을 보유했다는 점을 판단할 수 있다.

    둘째, 소련과 중국의 경우 모두 다 전략로켓군과 제2포병부대의 창군 후 더 나은 핵무기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핵전력의 사용 가능한 능력 범위에 머물지 않고, 더욱 진일보하기 위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대지 미사일 방식의 완성체인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넘어 잠수함발사 미사일(SLBM), 전략폭격기로 대표되는 다중공중발사시스템(MIRV) 등 개발에 주안을 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이러한 노력들은 사거리 확대와 정확성, 파괴력과 생존성 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무기체계의 진보된 변화는 또다시 군사제도와 군사전략의 변화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결국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하는 핵전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전략로켓군의 태동 자체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향후 예상되는 기술적 개발 노력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존슨(Alastair Iain Johnson)은 그의 논문 “China’s New Old Thinking: The Concept of Limited Deterrence”에서 세 가지 핵 억지전략으로 ①최소억지전략, ②제한억지전략, ③최대억지전략 등을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소련과 중국의 경우 존슨이 언급한 핵 억지전략 가운데 어떠한 전략을 추구하였는지 판단이 가능하였다. 결국 소련과 중국 모두 창군 당시 수립된 전략은 최소억지전략에 해당하였다. 이는 존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한억지전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전략 핵무기 삼원체제인 ICBM, SLBM, MIRV 등의 선결 조건이 충족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과 중국 모두 핵 무기체계의 발달을 통해 전략로켓군이라는 군사제도를 만들고, 군사전략을 구체화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또다시 진일보한 기술적인 노력을 계속한 것은 좀 더 강화된 핵 억지전략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전략로켓군의 태동과 현재까지의 기술적 개발 수준 정도를 분석한다면, 결국 어느 정도 그들이 추구하는 전략도 파악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4. 북한 로켓부대 분석

    그렇다면 북한의 전략로켓군의 실태는 어떠한지를 알아본다. 조선인민군 전략로켓군은 조선인민군의 전략미사일 부대이다. 육군, 해군, 공군의 삼군편제와는 별도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1959년 창설된 소련의 전략로켓군과 196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제2포병부대와 똑같은 사군(四軍)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로켓군으로 발돋움하기까지의 과정을 좀 더 살펴본다.

    북한은 1965년 자체 미사일 생산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60년대에 소련은 북한에 탄도미사일인 FROG, 지대공미사일인 SAM, 그리고 연안방어 대함 미사일들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북한은 자체 미사일 생산을 결심하면서 로켓 및 미사일 개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함흥 군사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1970년대까지 중국으로부터 지대함,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받았으며 자체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위해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 결과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필요로 하는 미사일 부대를 별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미사일여단은 인민군 총참모부 직속의 독립여단으로서 전략 및 전술부대로 운용하며, 예하의 스커드-B/C 미사일대대는 총참모부에서 직접 통제하여 재래식 탄과 화학탄으로 지상군 지원을 맡게 된다. 즉 미사일여단 예하에는 3개의 스커드 미사일대대와 1개의 노동1호 미사일대대, 그리고 전투근무 지원대대와 통신대대, 본부근무대대를 비롯해 총 7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전투근무 지원대대는 미사일 탄두와 미사일의 예비량 및 미사일의 연료와 산화제를 저장, 보관하며 미사일 발사 시 이를 공급해 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연료 주입 시, 위험에 대비한 제독장비의 운용도 병행하고 있다. 여기에 탄두를 결합하는 크레인 등 다양한 특수차량 장비 등을 이용하여 미사일대대 운용에 수반되는 전투근무 지원을 제공하고 기상레이더 운용까지 맡고 있다. 미사일여단으로부터 대대, 중대 간 그리고 인민무력성과 총참모부와도 직통선을 연결하는 통신대대에서는 유・무선은 물론, 고도의 통신 보안장비를 운용,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연합뉴스, 2003, p. 509).

    1997년 노동 미사일의 실전배치와 함께 이 무렵 총참모부 직속의 미사일 사단이 새로 편성되었다. 신설된 미사일 사단은 사단본부(참모후방지원), 통신대대, 미사일 기술대대, 방공대대, 공병대대, 핵・화학 방호중대 등과 함께 주력인 프로그여단, 스커드연대, 노동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북한은 현대 전장에 보다 유연하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민무력부와 지상군은 1999년 인계받은 미사일과 프로그 포병 로켓부대를 재편성하였다(북한연구소, 2005, p. 179).

    새로운 편성에서 강동포병군단은 해체되고 유일한 포병군단인 제620포병군단은 전방군단에 예속시키는 등 모든 미사일 부대는 경험이 축적되고 훈련된 ‘미사일훈련교도국’ 예하에 편입되었다. 미사일훈련교도국은 기본적으로 지상군 소속이며 미사일의 공급과 운반발사대 및 이동발사대 그리고 화기통제장비를 포함하여 모든 미사일 부대를 관장하고 있다. 지상군은 2001~2002년 연례 탄도미사일 야전 훈련에서 스커드-B/C 미사일과 노동미사일 부대의 대대 수준에서 실시했으나 스커드와 노동 미사일 훈련을 통해 이들 부대들을 확장하고 부대를 증편하여 재배치하였다. 2004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군은 인민무력부 산하에 군단급의 ‘미사일지도국’을 신설했으며 이를 통해 하부 지휘체계를 일원화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곳에서는 군사적 요충지에 구축된 노동 및 스커드 미사일기지와 1개 미사일사단을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북한의 전략로켓군은 미사일지도국에서 전략로켓사령부로 변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규모는 기밀이여서 알 수는 없지만, 군단급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전략로켓군은 미사일의 개발과 생산, 작전배치 임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하에는 4개의 미사일 공장과 12개의 발사기지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993년 5월 노동 1호 미사일,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1호(백두산 1호) 미사일, 2006년 7월 5일 대포동 2호(백두산 2호 혹은 목성 2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바 있으며, 2009년 4월 5일 은하 2호 위성발사 로켓을 발사한 바 있다. 이러한 북한의 전략로켓부대는 2012년 3월 3일 김정은이 전략로켓사령부를 시찰한 이후부터 전략로켓사령부의 존재가 알려졌다. 동년 4월 15일 열병식부터 참여하였으며, 그 존재가 김정은의 연설로 전략로켓군으로 공식화되어 발표되었다.8)

    8)위키백과 ‘조선인민군 전략로켓군’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9D%B8%EB%AF%BC%EA%B5 %B0_%EC%A0%84%EB%9E%B5%EB%A1%9C%EC%BC%80%ED%8A%B8%EA%B5%B0 검색일: 2013. 1. 18.

    Ⅵ. 결론

    서론에서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세 가지 질문 첫째, 전략 핵 부대인 전략로켓군과 같은 부대가 왜 창설되었는가? 둘째, 이러한 전략로켓부대로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그렇다면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에 대한 해답은 소련의 전략로켓군과 중국의 제2포병부대의 창군과정을 비교함으로써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요컨대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 세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 전략로켓부대는 핵무기라는 무기체계의 발달을 통해서 이를 좀 더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용병술의 차원에서 조직의 변화와 전략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조직으로의 변화는 핵전력을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반증한다. 아울러 창군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창군 당시 궁극적으로 추구한 전략은 존슨이 언급한 핵 억지전략에 입각하여 봤을 때, ‘최소억지전략’의 단계에 해당하며, 더욱 진보한 기술적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로 비추어봤을 때, 북한이 언급한 전략로켓군이란 조직에 대해서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같은 점은 2012년 4월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전략로켓군의 존재를 표명한 북한의 경우에도 적용 가능하다. 북한 역시 기존의 미사일 및 인공위성 발사, 핵 실험 등은 궁극적으로 핵전력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의 차원에서 전략로켓군이라는 조직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북한은 기본적으로 핵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전력 사용 능력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실험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도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 전략로켓군이라는 조직의 형성은 북한의 핵전력 사용 능력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북한은 기존 인민무력부 예하 미사일지도국이 아닌 소련과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전략로켓군을 중심으로 예하부대를 지역단위로 구분하여 운용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9개의 미사일여단을 작전배치하고, 4개 지역에 KN-08을 작전배치 중인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9) 다만 지역단위로 작전배치가 되었더라도 실질적인 운용 및 통제는 통수부에 의해서 임무를 수행할 뿐 독자적인 실시는 제한될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향후 북한은 핵 무기체계의 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이는 북한 역시 전략로켓군의 태동 자체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기술수준을 뛰어넘어 제2세대로의 도약 시도를 위해 더욱 성능적으로 향상된 ICBM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또한 MIRV, SLBM 능력에 대한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핵전력 보유국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이러한 기술 개발은 또 다른 군사제도와 군사전략의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SLBM의 기술 개발 완성은 향후 전략 핵잠수함 부대를 구성하기에 이르는 지경에 달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연계하여 북한의 현재 전략로켓군이 추구하는 전략은 ‘최소억지전략’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기본적인 최소한의 핵사용을 위한 무기체계 기술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아직 SLBM이라든지 MIRV 기술을 확보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향후 기술 개발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며, 머지않아 추구하는 전략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진일보한 전략의 변화는 북한에게 있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질 수 있는 외교적 수단으로서 향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예의주시를 통해 북한 핵전력의 변화를 파악하고, 분석해야 하며, 이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위한 노력과 고심을 해야 할 시점이다.

    9)이는 육군정보학교에서 실시한 ’13년 북한군전술 및 정보발전 세미나(’13. 11. 14.) 중 ‘김정은 집권 후 군사위협 변화’에 발표한 내용에 근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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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1>]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 제 요소의 상관관계
    무기체계, 군사제도, 군사전략 제 요소의 상관관계
  • [<그림 2>] 연구의 구성
    연구의 구성
  • [<표 1>] 소련 탄도미사일 발전 현황
    소련 탄도미사일 발전 현황
  • [<표 2>] 소련 주요 핵실험 현황
    소련 주요 핵실험 현황
  • [<그림 3>] 전략로켓군 조직 편성
    전략로켓군 조직 편성
  • [<표 3>] 소련의 군사전략 변천과정(1920~1980년대)
    소련의 군사전략 변천과정(1920~1980년대)
  • [<표 4>] 중국 핵 운반수단의 연도별 배치 현황
    중국 핵 운반수단의 연도별 배치 현황
  • [<표 5>] 중국의 핵 실험 현황
    중국의 핵 실험 현황
  • [<표 6>] 중국의 인공위성 개발 현황
    중국의 인공위성 개발 현황
  • [<그림 4>] 제2포병 편성 및 배치도
    제2포병 편성 및 배치도
  • [<표 7>] 소련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주요 연표(1946~1963)
    소련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주요 연표(1946~1963)
  • [<표 8>] 중국 제2포병 창군과정 주요 연표(1958~1980)
    중국 제2포병 창군과정 주요 연표(1958~1980)
  • [<그림 5>]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비교표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군 창군과정 비교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