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운동도식을 넘어서기 위한 영화적 사유

Cinematic Speculation for Overcoming ‘Sensori-Moteur Sche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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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Most huge matter in the art history is representation. If the ground of art were in the world, the things which making a way of looking and express the world have been artist’s interest. Although the progress of technology guaranteed transparency of media to some degree, the matter of representation not limited to optical aspects. The discourse, of ‘point of view’ and ‘perspective’ make reveal its limitation. Accordingly, representation come to how to do, many artists put out their various answers.

    With the advent of Italian NEO-realism, modern cinema speculated time itself and made farewell to sensori-moteur schéma. Cinematic modernism fought against single narrative through multiple narratives and liberated narrative from obsession through open ending structure.

    Ironically, the cannon of modernism such as ‘speculation to time-image’, ‘multiple narratives’, ‘open ending structure’ reconnected through the matter of representation. However returned representation took off the legend of transparency and accompanied essential question “how to see the world”, Since the matter of seeing is apt to become the matter of power. There are numerous networks in the matter of representation. If we neglect it, we can’t speculate substance of the world. For this reason, modern cinema dragged ‘semi-subjective image’ naturally.

    Finally Modern cineaste acknowledged the power of camera’s eye which can cross over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Free indirect discourse is the path of out of bounds. Also the natural attribute of cinema, semi-subjective image is revealed through it.

    Pasolini would have identified his theory with cinematic attributes at that time. He did not made cinema but film. It was not until then that cinema can integrate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to some degree with his theory. One who dreamed total cinema as media hope that multiple narratives will meet life-log in the future. Romanticists who did not abandon the legend of total cinema in another sense want integrate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through free indirect discourse.

    This Pasoliini’s endeavor showed a model whom wants to make a total cinema. Free indirect speech will present new direction to cinema that might be disappear someday in the future by providing epistemological thoughts. If these hopes will be achieved, cinema will be hologram in front of us beyond screen. The moment, the world will be a cinema.

  • KEYWORD

    영화이론 , 감각?운동 도식 , 반주관적 이미지 , 완전영화 , 자유간접화법 , 시적 영화 , 파졸리니 , 모더니즘 , 투명성

  • 1. 완전 영화의 신화를 꿈꾸며

    영화의 역사를 다루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첫번째는 매체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담론으로써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이 도래하게 된 원인을 과학사 혹은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잔상 효과와 파이 효과를 논하기 시작하면서 촉발된 인간의 시・지각에 관한 오래된 연구는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장치들 예들 들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주프락시코프(zoopraxiscope), 조에트로프(Zoetrope), 매직랜턴(magic lantern),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환타즈마고리아(Phantasmagoria)와 같은 광학적 장치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시각과 관계 맺고 우리를 움직임의 세계로 인도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영화 탄생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은 이러한 광학적 연구들이 19세기 초반 발명된 사진이 마치 영화의 도화선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재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을 뿐, 영화와 관계 맺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눈속임 회화(trompe-l’oeil)를 구축(驅逐)한 사진의 자연주의적 특징은 스탠포드(Leland Stanford)의 내기에 동원된 머이브릿지(Edward Muybridge)의 실험이 있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동안 영화와 접목을 시도하지 못했다. 결국 바쟁이 언급하듯이 영화의 발명을 이끌어 온 것은 운동(movement)을 현현하고자 했던 발명가들의 무목적적인 우연한 실험의 결과였다.2)

    세계가 보여주는 운동을 기계로 재현하려는 원대한 욕망은 완전영화(cinéma totale)의 신화에 접근하려는 노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완전영화에 대한 목마름은 필연적으로 영화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기계적 재현이 선사한 투명성(tranparency)에 대한 맹목은 새로운 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오히려 궁극의 목표지점을 더 멀리 설정하게 만들었다. 완전한 투명성에 대한 욕구는 필름, 카메라, 영사기와 같은 장치(device)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관객은 눈은 점점 높아져갔다. 거북이와 아킬레우스의 경주를 설파했던 제논(Zenon)의 역설처럼 기술은 최첨단을 내달릴 만큼 진화했지만 완전영화의 신화는 언제나 아킬레우스에 한 발짝 앞선 거북이처럼 우리를 좌절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매체의 우월성을 믿는 동시대의 발명가들은 관객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필름은 흑백에서 컬러 그리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했으며, 스크린은 점점 커졌다. 영화의 수요를 대체했던 TV 마저 어느 순간 베젤(bezel)의 흔적을 서서히 지우면서 타블로(tableau)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화 스크린을 지향하게 되었다. 2차원의 운동에 깊이를 부여한 3D의 종착점은 결국 홀로덱(holodeck)3)에서 구현되는 홀로그램(hologram)으로 귀결될 것이다. 자넷 머레이(Janet Murray)가 상상한대로 미래의 영화는 재매개(remediation) 전략 중에 비매개(immediacy)로 탈주를 시도할 것이다. 프레임의 무한확장을 통해 이뤄지는 스크린과 현실의 구분 불가능은 아이러닉하게도 언젠가 영화 매체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인간 오성이 절대정신에 복무하는 그 순간 예술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헤겔(G. W. F. Hegel)의 변증법이 영화 예술에 적용되는 순간을 우리는 기술의 종착역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화가 세계를 올바르게 재현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영화 역사를 다루는 두 번째 시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최초의 영화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문스터베르그(Hugo Munsterberg)가 시작한 영화의 심리학적 연구는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재현해야 하는가?” 하는 당위적, 윤리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영화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이론과 논의들은 결국 세계의 진실 혹은 실체를 “영화 카메라가 드러낼 수 있는 있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발라즈(Béla Balázs)와 에이젠슈쩨인(Сергей М. Эй зенштей н) 그리고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형식주의는 영화 카메라의 투명한 재현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카메라가 포착한 편린들을 조립하고 포개고 충돌시키면서 감춰진 세계의 실체를 순간적으로나마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의 복제로써 기능하는 사진적인 리얼리티보다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의 접근을 요구했다. 따라서 인식론에 기반한 이들의 여정은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와 바쟁(Andre Bazin)의 존재론적 영화론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영화 카메라의 위대한 힘이 세계 속에 살아 숨 쉬는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던 크라카우어 미학의 기본 전제는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진술의 확장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기록하는 것”4)이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리얼리티의 추구는 바쟁의 생각과 그대로 일치한다. ‘금지된 몽타주(Montage interdit)’5)로 대변되는 바쟁의 이론은 “영화적 특질은 몽타주와는 반대로 공간의 단일성에 대한 전적인 사진적 존중 속에서 발견된다.”6)고 역설한다. 이들의 논쟁은 어찌 보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계(Welt)’와 ‘대지(Erde)’의 개념을 영화적으로 변형한 것이며, 이후에 등장한 형식주의와 리얼리즘 영화 미학의 통합 노력은 진리를 감추는 ‘대지’와 드러내는 속성을 가진 ‘세계’의 변증법적 투쟁의 합의 과정을 상정하고 기획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 카메라가 보여주는 운동하는 이미지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이고 예술가(감독)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이때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7)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통해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변증법의 결과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자연을 ‘세계’로 볼 것이냐 아니면 ‘대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상이하게 달라진다. 두 개념 사이의 변증법적 투쟁은 결국 예술(영화)을 매개로해서 서로를 끌어들여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트리(Jean Mitry)가 촉발한 형식주의 와 리얼리즘 이론의 통합에 대한 열망은 다분히 하이데거 언술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예술)를 ‘세계’ 혹은 ‘대지’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범위를 넓혀 재현에 대한 믿음/불신, 영화와 언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론(異論), 영화적 시각에 대한 이데올로기/헤게모니 효과와 같은 서로 다른 견해들의 기본 전제가 된다. 결국 이 담론은 영화적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저 유명한 ‘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창을 통해 재현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리얼리티’라는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만약 그 창들을 제거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투명성에 바탕을 둔 영화 매체론자들과 또 다른 차원에서 완전 영화의 신화를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이 문제에 직면했으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재현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한 핵심은 올바른 재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재현이란 무엇인가?’, ‘영화가 올바른 재현을 하기 위해서 카메라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은 영화 인식론과 존재론을 통합하는 차원을 넘어 지극히 윤리적인 문제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미트리의 반주관적 이미지(image mi-subjective)와 파졸리니 (Pier Paolo Pasolini)를 전유해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speech)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파졸리니는 실제로 작품을 통해서 주관과 객관의 사유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파졸리니의 노력은 완전 영화를 꿈꾸는 자들에게 하나의 전범(典範)을 선보였다. 그가 시도한 자유간접화법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기술적 진보가 극단으로 치달아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를 미래의 영화에 인식론적인 사유를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영화가 지향해야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줄 것이다.

    1)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시각과 언어, 2001, 32쪽  2)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의 2장 “완전영화의 신화” 전체를 완전한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발명가들의 노고를 “자연의 완전한 모방“을 겨냥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은 영화라는 매체의 탄생을 위해 복무한 것은 아니다. 광신적이고 편집광적인 선구자들은 완전한 움직임에 대한 상상력을 자신의 모든 노력에 집결시켰다. 그 결과 영화는 무욕의 산물로써 탄생한 것이다.-위의 책, 25∼33쪽  3)홀로덱은 1967년도부터 방영된 SF 드라마 스타트랙에서 파일럿프로그램으로 선보인 에피소드 ‘The Next Generation’(1996)에서 처음 선보인 개념으로써, 1964년 처음으로 홀로그래피 랩을 만들었던 진 겔도프(Gene Dolgoff)의 연구를 이용한 것이다. 홀로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할 것-Ford, Paul J. “A further analysis of the ethics of representation in virtual reality: Multi-user environments”. Ethics and Information Technology 2001, Volume 3, Issue 2, pp. 113∼121  4)Kracauer, Siegfried, Theory of Film: The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New Jersey, 1997, p. 28  5)금지된 몽타주(Montage interdit)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한 사건의 본질이 서로 다른 두(혹은 그 이상) 요소들의 동시적인 현전(présence simultanée)에 의존하고 있을 때 몽타주는 금지된다”는 것이다. 바쟁은 미트리가 시도했던 변증법적 통합의 전제를 이미 자신의 영화 존재론에 깔고 있었던 셈이다. 바쟁의 금지된 몽타주에 대한 상세한 개념은 『영화란 무엇인가?』에서 <백마의 갈기 Crin Blanc>의 예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바쟁 앞의 책, 77∼79쪽  6)같은 책, 77쪽  7)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해제)』, 2006,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2쪽

    2. 감각?운동 도식의 파괴

    경제적인 관점이라는 표현은 ‘유용성’이라는 개념을 배경으로 자리잡는다. 유용성에 의해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한다. 이 때 선택해서 받아들여진 부분을 ‘지각’이라고 베르그손(Henri Bergson)을 전유한 들뢰즈(Gilles Deleuze)는 말한다. 받아들인 부분은 다시 뇌로 이행해서 판단하고 명령을 내린다. 그렇다면 유용성에 기반한 지각을 운동으로 환원한 양태를 ‘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필요나 유용성에 따라서 받아들여진 지각, 즉 선별적 지각은 고전영화의 클리세를 생산하는 감각–운동 도식(sensori-moteur schéma)을 만든다. 감각–운동 도식은 고전영화의 공식인 ‘질서(균형)-무질서(불균형)-질서(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며, 이 클리세가 떠받들고 있는 ‘봉합된 세계’의 이미지는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언급한 SASˊ 형식(행동 이미지의 큰 형식)8) 즉, 상황/환경(Situation)-행위(Action)-변화된 상황/변화된 환경(Sitationˊ)과 같은 구조와 의미를 지닌다. 들뢰즈가 감각–운동 도식의 부정적인 측면을 『시네마』 전체를 횡단하면서 강조하는 이유는 첫 번째, 그것이 ‘그릇된 재현’의 전형적인 예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세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더 이상 인간에게 친숙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도 아니다. 양차대전 이후에 세계와 인간 사이의 낯설어짐은 바로 인간과 세계 또는 인간과 사회 사이를 매개시켜 주던 틀들이 무너져 내린 지점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영화에서 도식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개념이 된 것이다.”9)

    또한 감각–운동 도식이 제공하는 유기적 재현의 패러다임은 질서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를 제시하고 난 후, 행위와 사건으로 야기된 벌어진 틈을 보여준다. 틈을 메우기 위한 인물들의 행위는 다시 세계를 무질서 이전의 원상태로 복구한다. 고전영화에서 카메라가 포착하는 세계는 이처럼 유기적이며 인물들의 행위도 유기적이다. 그리고 복구된 세계 역시 유기적이다. 유기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질서와 균형 상태, 꽉 짜인 조합 그리고 이성과 정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영화는 전후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승전의 기운에 취해있던 미국은 영화 형식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할 이유가 없었고 드골주의 아래에서 승리자의 대오에 합승하려는 프랑스 역시 유기적 재현의 세계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환경이 주어지고 행위가 더해지고 이어서 다시 복구된 환경은 예전 그 환경이 아님을 그들은 역사가 아닌 일상을 통해 목격했다. 유기적 재현과 현실로 직조되는 리얼리티의 간극에 카메라를 들여놓은 것은 새로운 영화 세계를 꿈꾼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의 결과였다. 이 회의하고 반성하는 일단의 예술가들의 눈에 지각된 세계의 실체는 고전영화를 떠받들던 유기적 재현의 그물망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았다. 일상으로 다가온 역사적 사건은 비로소 그들에게 사유를 강제했다. 그들은 감각–운동 도식으로 이루어진 고전영화의 이야기를 폐기할 때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우리는 사물 혹은 이미지를 그 전체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해진 상태로 지각한다. 즉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만을 지각하는 것이다. 혹은 우리의 경제적인 이해관계, 이데올로기적 믿음, 또는 심리적 욕구에 따라 흥미로운 것만을 지각한다.”10)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판에 박힌 것들만을 지각하는 것이다. 감각–운동 도식은 우리의 지각을 유용성이라는 테두리로 엮어서 부분을 삭제하고 뼈대만 남긴다. 그 뼈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과 특정한 방식으로 다시 봉합되는 영화적 세계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스키조(Schizophrenia)들은 고다르(Jean-Luc Godard)의 영화 <미치광이 삐에로 Pierrot Le Fou>에서 주인공 페르디낭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11)

    현대영화 나아가 현대예술의 탄생은 도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분열증 환자들을 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영원히 무대를 맴돌 것이며, 등장하지도 않은 대머리 여가수는 그 자체가 텅 빈 기표를 상징한다. 유기적인 관계를 벗어난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와 베케트(Samuel Beckett)의 연극을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은 ‘부조리(The Theatre of The Absurd)’12)라고 명명했지만 이는 유기적 관계를 벗어나 새로운 ‘리얼리즘’의 서막을 알리는 탈 유기적 관계, 즉 감각– 운동 도식을 해체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이제 영화는 “인물이 체험한 일종의 시각적 드라마가 전통적 드라마 구조를 대체”13)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감각–운동 도식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것들을 패러디하거나 균열을 내거나 비우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단순히 지적인, 혹은 더 나아가 사회적인 의식의 힘만이 아닌, 더 깊은 생명의 직관으로부터 솟구치는 거대한 힘들이 시지각적–음향적 이미지와 조우하도록 해야만 한다.”14) 이러한 자각은 시선과 쇼트의 불일치, 내러티브에 복무하는 음악 대신 대위법적 음악을 탄생시켰으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점을 촉발시켰다. 이미지는 감각–운동적 관계를 벗어나야했고, 순수한 시지각적, 음향적 이미지가 되기 위해 유기적인 행동–이미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것만으로 유기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호, 즉 죽은 상징과 은유에서 벗어난 탈코드적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귀착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사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시지각적 이미지가 발현되는 것이다. “순수한 시지각적 이미지와 기호는 주관적/객관적, 실재적인 것/상상적인 것, 혹은 물리적/정신적이라는 두 극점을 가질 수 있다. 순수한 시지각 기호와 음향기호는 지속적으로 이 두 극점들을 소통되도록 하며, 어떤 방향으로건, 식별 불가능한 지점을 향한(둘 사이의 혼동이 아니라) 이들의 이행과 방향 전환을 보증해 준다.”15)

    이 지점에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와 베르그손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퐁티의 용어인 ‘감각 덩어리(masso du sensible)’는 사물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이는 표면뿐만 아니라 심층구조를 이루는 사물 그 자체를 가리킨다.”16) 이 감각덩어리 즉, 사물 더 나아가 사물의 연쇄들로 이뤄진 세계의 참모습은 주관과 객관의 합일을 통해서 이뤄진다. 퐁티는 세잔(Paul Cézanne)을 인용한다. “풍경이 내 안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The landscape thinks itself in me and I am its conscience.)”17) 세잔은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풍경이 어느 순간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주・객관을 합일한 감각적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퐁티에게 소여(所與)의 통로는 몸이다. 정신이 아닌 몸이 지각장을 형성하는 이유는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살’(chair)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온 우주는 살이라는 단 하나의 원소로 되어있다. 즉 살은 들뢰즈가 말하는 ‘강도적 다양체’(multiplicité intensive)의 다른 표현이며, 이미지와 실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써, 표상과 사물을 아우르거나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객관을 합일하는 것은 이전의 감각–운동 도식에서는 불가능한 테마였다. 고전적 지각장에서 빠져나온 이미지들, 감각–운동 도식의 그물망에 포섭되지 않은 현대영화에서 사건을 재현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의 사건을 실재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진 현세적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초월론적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다.”18) 그렇다면 차이의 초월론적 조건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시간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아닌 시간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시간 이미지를 드러내는 현대영화들에서 발견된다. 철학이 언제나 버거워하던 시간이 영화라는 이미지의 연속체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영화가 태초부터 존재했던 양식이 아닌 기계적 장치에 의한 인위적 이미지라는 자각은 영화를 사유를 강제하는 기계로 격상시키기에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영화는 현실의 촉발되지 않은 미분화된 잉여로써의 잠재태가 아니다. 영화는 인간보다 훨씬 유용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새로운 지각장을 형성함으로써 현실 속에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실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 그 틈은 비집고 들어가면 또 다른 틈을 열어 보인다. 유기적으로 구성된 감각–운동 도식과 죽은 은유로는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사유를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의 자장 안에서만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낸다. 완전 영화의 신화는 앞에서 전술한대로 매체의 투명성만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보다 뛰어난 영화의 기계적 시선으로 세계를 재구성해 진리의 비은폐성(aletheia)을 지향하는 ‘세계’의 시선을 드러냄과 동시에 은폐적 속성을 지닌 ‘대지’를 한꺼번에 껴안으려는 원대한 목표를 지향한다. 이는 부연하자면 지각되는 세계 그 자체에 진리가 현현할 것으로 믿는 영화 존재론과 은폐하고 있는 실체를 뒤흔들어 우리 앞에 재구성하려는 영화적 인식론을 통합하는 변증법적 투쟁의 노정이다.

    8)질 들뢰즈, 『시네마 1』, 유진상 역, 시각과 언어, 2002, 266쪽  9)박성수, 「영화와 충격」, 『철학과 현실』, Vol.59. 2003, 53쪽  10)질 들뢰즈, 『시네마 2』, 이정하 역, 시각과 언어, 2005, 45쪽  11)현대영화를 개창했던 고다르가 영화의 주인공들을 주로 낭만주의 시대의 피카레스크(picaresque)식 인물을 차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낭만주의 시대의 부랑아들의 정신 상태는 일상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떠도는 자아 분열적 특징을 보여준다.-“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의 가슴 속에 두 개의 영혼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의 내부에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있어 그것이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 자기의 악마와 심판관을 함께 데리고 살고 있다는 것, 요컨대 정신분석학의 기본적 사실들을 발견하였다.”-아놀트 아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 하, 염무웅, 반성완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97, p.212  12)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김미혜 역, 2005, 한길사, 38∼40쪽  13)Claude Ollier, Souvenirs écran, Cahier du cinéma-Gallimard, p.86  14)질 들뢰즈 위의 책, 48쪽  15)질 들뢰즈, 『시네마 1』26쪽  16)성광수, 『몸과 몸짓 문화의 리얼리티』, 소명출판사, 2003, 487쪽  17)Victor Chan, Rubens to Picasso: Four Centuries of Master Drawings, The University of Alberta press, Edmonton, 1995, p.28  18)클레어 콜브룩, 『들뢰즈 이해하기』, 한정헌 역, 그린비, 2007, 203∼204쪽

    3. 영화의 자유간접화법과 반주관적 이미지

    화자(話者, Narrator)가 인물(Character) 속으로 들어가는 고전적인 방법은 이미 필름 느와르(Film Noir)에서 여러 차례 선보였다. 그 전형적인 기법은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으로써 이미 죽은 화자가 과거를 진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중 배상 Double Indemnity>과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에서는 세련된 방식으로 등장인물의 세계관을 여과 없이 관객에게 보여준다. 내적 독백은 인물의 생각을 청자인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다. 따라서 내적 독백으로 인해 관객은 벌어진 사건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관객 모두는 영화적 상황(환경=S)과 사건(액션=A)에 대한 단일한 결론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내적 독백은 세계를 단일한 시점으로 파악할 수 있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 독백은 내러티브의 부수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존재가능한 모든 잠재적 운동을 은폐하면서 닫혀있다. 내적 독백으로 구축된 세계는 SASˊ 형식을 취한다. 상황(환경=S)과 상황(환경=S) 사이에 사건(액션=A) 이어지고 그 사이에 잘 짜인 가짜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전형적인 고전영화의 감각–운동 도식으로 관객이 내러티브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이야기와 카메라의 시점은 일치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화해를 통한 갈등의 중재 혹은 징벌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따라서 SASˊ 형식에서 앞 뒤축을 담당하는 상황(환경)들은 아무런 강도적 차이를 지니지 못한다.

    이와 달리 자유간접화법은 작가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이전에 누리던 전지전능한 권한을 포기하고 인물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연기하게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인물이 마치 제 삼자에 의해 이미 언급된 대로 자신의 몸짓이나 대사를 실행에 옮기게”19) 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내게 만든다. 하지만 이때 자유간접화법으로 괄호쳐진 인물의 언술은 작가와 인물의 생각이 혼재되어 양자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문학에서 사용하는 자유간접화법은 간접화법에서 주절만 생략하면 간단하게 변환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직접화법은 전달되는 내용에 현실감을 부여하지만, 이와 달리 간접화법은 내용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다. 자유간접화법은 전달되는 내용에 현실감을 부여하면서도 속도감을 부여한다.”20) 하지만 자유간접화법은 직접화법의 주관적 시점과 간접화법의 객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점이 이동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벡터로 표시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자와 인물의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 가능하지만 간단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시점의 변곡점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없다. 복잡한 문장에서는 화자와 인물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작업이 더 요원한 일이 된다.

    널리 알려진 개념이지만 바흐친(Михаи́л Бахти́н)은 소설의 특징으로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혼합을 예로 들었다. 다성성(multi-vocality)은 화자와 인물의 목소리가 완전히 분리되거나 뒤섞여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화자와 인물 양자는 서로 독립적이며 또한 강도적 차이를 지니면서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자유간접화법의 화자는 감각–운동 도식에 익숙한 “청자의 개념적 지평을 뚫고 들어가 청자의 지각체계에 맞서서 자신의 발언을 구축한다.”21)

    이 이질적인 다성적인 목소리가 영화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은 쇼트의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통용되는 주관적 시점은 반응 쇼트 혹은 시점 쇼트를 말하는 것이며, 객관적 시점은 시점 쇼트 앞에 위치하는 ‘주인 없는 시점’22)이거나 카메라 자체의 시점을 나타낸다. 하지만 영화적 지각의 근본은 주관적 시점과 객관적 시점이 항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프레이밍과 몽타주로 인해서 시점이 역전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적 시점이 이렇듯 가변적인 것은 몽타주가 아닌 시퀀스 쇼트 혹은 롱테이크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23)

    미트리는 카메라를 통한 자유로운 시점변화를 영화의 특징으로 지목했고 이에 대해 반주관적 이미지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카메라는 인물과 혼동되지 않고 인물의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인물과 함께 있다. 이 순간 카메라의 반주관적 이미지가 표출된다.”24) 베르토프(Дави́д Ка́уфман)가 발견한 영화 카메라의 확장된 지각의 세계는 미트리로 인해 또 다시 인간의 지각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자연적 지각 속에서 결코 등가물을 찾아볼 수 없는 카메라의 반-주관성은 바쟁이 ‘풍선의 동물화’25)라는 표현했던 알베르 라모리스(Albert Lamorisse)의 <빨간 풍선 Le ballon rouge>에서 의인화된 풍선의 시점을 통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누벨바그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좌안파(Rive Gauche) 감독26)들이 누보로망을 각색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적인 표현으로 끌어들였다.

    영화의 반주관적 이미지가 반드시 현대영화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르나우(F.W. Murnau)와 레르비에(Marcel L’Herbier), 뒤퐁(Ewald André Dupont)27)의 영화에도 주관적 쇼트와 객관적 쇼트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고전영화 시기에 등장한 반주관적 이미지는 현대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 Der letzte Mann>에서 관찰되듯이, 고전 무성영화 시대에 사용하던 반주관적 이미지는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지, 화자가 인물의 지각장의 지평을 뚫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무성영화 감독들이 생산한 반주관적 이미지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교를 카메라의 실어서 관객에게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는데 봉헌하려는 목적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구분하는 방식은 이론가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카메라 드러내기’와 ‘시간 이미지의 출현’으로 집약된다. 고전영화는 디제시스 내부(intra-diegetic)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쇼트와 쇼트의 부드러운 연결을 중요시했다. 공간의 분위기와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설정쇼트(establishing shot)는 내러티브의 밑그림을 만들고 주관적 쇼트와 객관적 쇼트의 적절한 사용은 동일시 효과를 생산한다. 최종적으로 콘티뉴이티가 깨지지 않는 이음새 없는 편집을 통해 고전영화의 디제시스는 하나의 세계로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영화의 규칙과 공모하는 관객들의 상투적인 관람태도를 바꾸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 관객의 자발적 역동성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쇼트 사용 관습에 반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 했다.

    고다르와 안토니오니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자각한 현대영화의 선구자들이었으며,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 du Cinéma」, 「시네티크 cinétique」, 「텔 켈 Tel Quel」과 영국의 「스크린」은 많은 영화 관련 글을 쏟아내면서 현대영화를 이론적으로 후원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파졸리니는 정통 기호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자유간접화법을 정식화했다. 그는 로라 멀비(Laura Mulvey)보다 10년 앞서서 시선의 문제를 담론화했으며 메츠(Christian Metz)와 바르트(Roland Barthes) 그리고 에코(Umberto Eco)에 맞서서 영화가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의 영화론은 ‘시적 영화(cinema di poesia)’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지만 핵심은 바로 자유간접화법에 있다.

    19)김태희, 「문학과 영화에서의 자유간접화법」, 『프랑스학 연구』, Vol. 39, 2007, 320쪽  20)이병창,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의 철학」, 『시대와 철학』, Vol.15 No.1, 2004, 55쪽  21)미하일 바흐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역, 창작과 비평사, 1988, 91쪽  22)“이 주인 없는 시점은 사물이나 집합이 그 집합의 외부에 머물고 있는 이에게 보일 때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들뢰즈는 이 정의 역시 부정적이며 잠정적인 정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집합 바깥에 있다고 하는 누구도 결국 그 집합 안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변적인 상황을 들뢰즈는 알버트 르윈(Albert Lewin)의 <판도라와 유령선 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의 한 시퀀스를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질 들뢰즈, 『시네마 1』,140쪽  23)웅장한 성(城)을 바라보는 한 인물을 뒤에서 프레이밍 한다, 카메라가 트래킹을 하면서 인물을 쫒다가 어느 순간 인물을 앞서는 상황을 가정하면, 이 때 한 쇼트 내에서 시점의 전도가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카메라가 인물을 앞서기 전의 상황은 분명 객관적 시점이다. (주변에 다른 시선의 주인이 없다는 가정 하에) 그러나 카메라가 인물을 추월하는 순간 쇼트 내부에서 인물은 사라지고 방금 전까지 피사체였던 그는 화면에 담긴 쇼트의 시선의 주인이 된다.  24)Mitry, Jean, The Aesthetics and Psychology of the Cinema, Trans by Christopher King, 2000, p. 67  25)앙드레 바쟁 위의 책, p. 75  26)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르네(Alain Renais), 뒤라스(Marguerite Duras)는 각각 <불멸의 여인 L’immortelle>, <히로시마 내사랑 Hiroshima, mon amour>, <지난해 마리앵바드 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인디아 송 India song>에서 영화의 반주관적 이미지를 선보였다.  27)<타르뛰프 Herr Tartüff>-무르나우(F.W. Murnau), <엘도라도 Eldorado>-레르비에(Marcel L’Herbier), <바리에떼 Varieté>-뒤퐁(Ewald André Dupont)-질 들뢰즈, 위의 책, 141쪽

    4. 시적 영화 속의 자유간접화법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벤야민(Walter Benjamin)을 평가했던 방식을 인용하자면, 파졸리니는 시인으로 출발했지만 위대한 시인이 되기보다는 영화감독이 되길 원했고, 혁명가였지만 68혁명을 반대했으며, 공산주의자였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의 노선에 반대해 축출 당했다. 카톨릭 교도였지만, 교황제도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이단이었다. “신성모독과 혐오, 하드코어가 뒤섞인 역겨운 영화”28)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쾌감이 부재한 아름다운 매저키즘”29)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마지막 작품 <살로 소돔 120일 Salo o le 120 giornate di Sodoma >이 보여줬던 엄청난 시각적 충격 때문에 관객은 여전히 파졸리니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한정적 자원으로 설정된 쾌락을 독점하기 위한 파시스트들의 광기를 다룬 이 영화로 인해 파졸리니는 자신의 찬란한 영화적 유산마저 지워버린 채 동성 애인에게 살해당했다. 항상 부정어법으로만 정의될 수밖에 없는 이단적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생전에 정신 나간 돈키호테 취급을 당했지만 그는 꿈만 꾸는 ‘몽상가’30)는 결코 아니었다. 사회정의와 상관없는 표현주의 미학의 초월적 관념론에 빠졌다는 바란스키(Zygmunt G. Baranski)의 평가는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난 파졸리니의 영화관(映畵觀)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출발한다.

    파졸리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객관적인 시퀀스 쇼트로 이뤄진 워홀의 미니멀리즘 영화에도 분명한 반대 의사32)를 표현한다. 파졸리니의 워홀(Andy Warhol)비판은 다큐멘터리 수법을 사용한 네오리얼리즘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카메라의 화각을 지정하는 감독의 의도가 개입된 주관적인 매체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시선인양 담담하게 현실을 모사하는 태도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은폐할 뿐이다. 영화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시가 될 수 있다. 비개념적이며, 형식적이며 주관적인 시의 언어로써 영화를 만들어야한다. 그리고 그 주관성을 관객이 느끼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감독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할리우드의 수법을 버리고 카메라를 느끼게 해야 한다.”33)

    시네마(Cinema)와 필름(Film)에 관한 파졸리니의 독특한 구분법 역시 위와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시네마는 모든 각도, 모든 대상, 모든 사건을 무수히 많은 주관적 시점들로 기록한 전지전능한 ‘완전 영화’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시네마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영화적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네마가 모든 주관성을 통합해서 하나의 객관적 실체를 기록하는데 봉헌한다면 필름은 어쩔 수 없이 예술가의 주관성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파졸리니가 ‘시적 영화’에서 주장한 강령들은 바란스키가 평가한 것처럼 초월적 관념론에 의거한 크로체(Benedetto Croce) 미학이나 랭보(Arthur Rimbaud)가 선보인 몽상적인 시학에 근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객관적 사실주의만으로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고 여겼으며, 한계가 있는 주관적인 시퀀스 쇼트로도 올바른 재현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주⋅객관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자유간접화법은 이러한 통합의 필요성에서 제시되었다.

    ‘카메라를 느끼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영화의 반주관성을 드러내는 행위에 해당한다. 인물이 화면 위에서 움직이면서 세계를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동시에 카메라는 그 인물을 보고 그가 본 세계를 볼 것이며 또 다른 차원에서는 인물의 관점을 사유하고 반영하면서 변형시킬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인물과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만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그 안에서 먼저의 관점이 스스로 변형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내적인 분화 과정이 자유간접화법의 핵심이다. 파졸리니는 내적인 분화과정을 발생시키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양식적 기법을 제시한다.

    ① 강박적인 프레이밍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화면을 잡게 되면 화면은 말 그대로 운동의 양태를 보여주는 일종의 ‘창문’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그 장면은 커팅 된다. 더 이상 운동의 변화가 없는 상태를 지속하도록 영화의 고전적인 감각–운동 도식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졸리니는 카메라를 느끼게 하기 위해 인물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화면은 프레임을 벗어나 타블로(tableau)가 되면서 공간은 순수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 순간 관객은 이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카메라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시적 영화의 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만든, <마테복음 vangelo secondo Matteo>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비추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인물이 부재한 프레임을 통해 타블로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런 방식으로 강박적인 프레이밍은 운동이 정지한 후에 타블로가 기능했던 방식을 통해, 어느 순간 주관적인 시점에서 객관적인 시점으로 변화한다.

    ② 동일한 이미지를 다양한 렌즈로 촬영하기

    같은 이미지에 대해 렌즈를 바꾸어 가면서 여러 번 촬영하는 기법 역시 영화 <마테복음>에서 자주 등장한다. 파졸리니는 이에 대해 “짧고 집중적인 파노라마의 전개를 위해 50mm와 70mm 렌즈로 정면에서 예수의 얼굴을 강조했다. 비신자의 입장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34)라고 말한다. 이 기법을 통해 파졸리니는 자유간접화법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추구했다. 영화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종류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감독이 자신의 주관적인 시점에 다른 사람의 시점들을 병치시켜 시선의 통합을 이뤄내겠다는 의도이다. 영화 언어의 렉시콘(lexicon)은 무한하거나 부재한다. 이러한 영화 언어의 특징으로 인해, 감독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의 기표는 헤아릴 수 없는 기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영화는 부재하는 렉시콘을 가지고 그릇된 도식을 만든다. 이 도식의 놀음에 길들여지는 것은 도식을 원하고 그러한 도식을 만든 자들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졸리니는 인물들의 대사에 리얼리티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를 읊듯 혹은 인형극의 마리오네트처럼 대사를 낭송한다. 파졸리니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분명 파시스트, 억압받는 민중, 권력을 가진 자, 성직자와 같이 유형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화의 렉시콘은 언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시선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파졸리니는 바흐친을 전유하면서도 ‘언어’ 대신 그 자리에 쇼트의 ‘시점’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인물들이 자신의 계층에 맞는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다성적인 목소리가 촉발되지 못하는 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장치는 시선밖에 없다. 다양한 시점들로 이뤄진 쇼트가 시간 축에 몽타주 되면, 그 때 비로소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혼재하는 반주관적 이미지가 생성된다.

    ③ 잘못된 몽타주의 사용

    ‘잘못된 몽타주’의 사용은 파졸리니 영화 전편에 흐르는 스타일상의 특징이지만, ‘인생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데카메론 Il Decameron>, <캔터베리 이야기 I racconti di Canterbury>, <아라비안 나이트 Il fiore delle mille e una notte>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잘못된 몽타주’ 기법은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 고전영화의 도식과는 완전히 상반된 화면 구성과 몽타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파졸리니 영화가 ‘어설픈 아마추어 영화’라는 편견을 갖게 만든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는 ‘잘못된 몽타주’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파졸리니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 중에서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던 네 개의 에피소드35)를 추려서 특이한 방식으로 몽타주한다. 내러티브의 큰 틀은 주로 ①누레딘과 주무롯의 이야기가 이끄는데, ①의 이야기 안에 ②의 이야기가 액자구성으로 들어가 있으며, ②의 이야기 안에 ③과 ④의 이야기가 또 다시 액자 형태로 삽입되어 있다. 그러다가 내러티브는 돌연 ②이야기로 돌아오다가 ①의 이야기로 끝맺는다.36) 파졸리니는 이야기의 중첩을 통해 인물들의 목소리가 특정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울려 퍼지게 만든다. 유기적인 구성으로 관객의 이해를 돕는 고전영화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액자 속의 또 다른 액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공명하면서 미장아빔(mise en abîme)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또한 원작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세헤라자데(Scheherazade)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더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화자인 세헤라자데가 청자인 왕, 샤리야르(Shahryar)에게 들려주는 내러티브에서 세헤라자데를 생략함으로써 생생한 목소리가 손상받지 않은 채 관객에게 전달된다. 파졸리니가 세헤라자데를 과감하게 생략한 이유는 그가 시적 영화의 핵심으로 제시했던 문학에서의 자유간접화법 이론을 영화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Scheherazade said that once upon a time Nuredin met a nice girl in the slave market…” 이라는 문장을 가정한다면 이 문장에서 주절 역할을 하는 “scheherazade said”을 생략한 채, 종속절로 기능하는 “once upon a time Nuredin met a nice girl in the slave market…”을 남겨두면서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을 절충한 자유간접화법을 시도한 것이다. 자유간접화법이 지닌 신속성과 직접성의 속성으로 인해 관객은 훨씬 더 생생하게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전략은 또 다른 인생 삼부작을 구성하는 <데카메론>,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④ 트래킹 쇼트의 사용

    영화를 볼 때 관객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카메라의 시점이 인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익명의 관점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트리는 카메라의 이러한 속성을 공존재(共存在, être-avec)”37)라고 말했다. 인물과 카메라가 영화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역설은 영화가 펼쳐 보이는 세계가 우리의 지각장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또한 카메라는 스토리 공간에 머무르는 동시에 시시때때로 이를 벗어나 담론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미지가 한편으로는 등장인물의 직접적 발언 즉, 직접화법에 해당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간접화법에 해당하게 된다. 카메라가 인물의 시점에서 주관적 쇼트를 구사할 때에도 그것은 담론 공간에 있는 카메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시선의 주인이 없는 객관적 쇼트를 구현할 때 역시 영화 밖의 관객이나 감독의 주관적 쇼트가 된다. 이렇듯 카메라는 내러티브 공간과 담론 공간 사이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진동한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시선에 의지하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자유간접화법 그 자체”38)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카메라의 이중적 기능은 트래킹 쇼트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카메라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일 때, 관객은 비로소 상황과 사물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얻는다. 마치 기차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볼 때, 모든 사물들에게 등가의 시선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실재 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운동을 눈으로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파졸리니는 영화에서 구사할 수 있는 트래킹 쇼트가 신적인 시선, 곧 전지전능한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조감독이었던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와의 대화’39)에서, 인물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식별 불가능한 존재의 시선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영화적 기법이 바로 트래킹 쇼트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트래킹 쇼트가 자체적으로 신적인 시선을 담지하고 있다는 말은 주관과 객관을 통합한 임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다음 상황을 가정해보자.

    네 개로 구성된 쇼트에 시점을 표시한다면 첫 번째 쇼트는 객관적 쇼트거나 주관적 쇼트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직관적으로 판단할 때는 객관적 쇼트이지만 건물 옥상에서 미소 짓고 있는 B가 등장하는 세번째 쇼트로 인해서 관객은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떠올린다. 두 번째 쇼트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쇼트는 A의 조력자가 어딘가에서 전능한 시선으로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가정만 하지 않는다면 명백한 객관적 쇼트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쇼트이다. 이 쇼트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쇼트처럼 주관적 쇼트와 객관적 쇼트 양자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건물로 들어간 순간 주관적 쇼트일 가능성은 완벽하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옥상에 있는 B는은 건물 안에 들어선 A를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A를 뒤에서 따르는 객관적 쇼트로 인해 우리는 A가 처한 상황을 알아가게 된다. A가 보는 것을 관객인 우리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함께 보면서 정보를 공유한다. 하지만 지속되던 쇼트가 A를 앞지르는 순간 화면 속에서 A는 사라지게 된다. 카메라 홀로 벽면의 낙서를 읽으면서 관객에게 사건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이때 우리는 당연히 A가 이 장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선의 주체는 A이며 주관적 쇼트이다. 트래킹 쇼트는 이처럼 주관과 객관이 섞여있는 반주관적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다. 시점의 도치가 일어나는 변곡점이 트래킹 쇼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파졸리니는 트래킹 쇼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줌렌즈를 사용한다. 순간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줄이면서 인물들을 공간 안에 가두거나 공간에서 사라지게 하는 줌렌즈의 사용은 트래킹 쇼트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우리를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즉 객관적 지각에서 주관적 지각으로 또는 그 역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영화에서 지각–이미지가 갖는 항구적인 운명”40)일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주・객관이 통합된 사유를 목격한다. 파졸리니가 시적 영화의 개념을 주장한 것은 인간의 시선이 가진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주・객관을 유유히 넘나드는 카메라의 전능한 시점을 깨달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감각–운동 도식에 맞설 새로운 캐논을 만드는 것이었다. 억압받는 민중의 시선 속에 자신의 정치・사회적 이데아를 교합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기 위해 그는 영화의 반주관적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는 자유간접화법을 제시했다. 여전히 그는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한 불운한 감독이지만 열린 영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성적인 목소리가 영화의 표층을 뚫고 관객에게 전달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가 만든 것은 필름이었지만 꿈꾼 것은 시네마의 세계였다. 어떤 단어로도 설명하기 힘든 이 플라톤주의자의 원대한 계획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하지만 반주관적 이미지로 가득 찬 자신의 자유간접화법 영화에 대해 왜 ‘시적 영화’라는 라벨을 붙였는지를 파졸리니는 우리에게 충분히 논증해보였다.

    28)Maggi, Armando,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Pier Paolo Pasolini from Saint Paul to Sad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llinois, 2009, p. 74  29)Vighi, Fabio and Nouss, Alexis, Pasolini, Fassbinder and Europe: Between Utopia and Nihilism,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0, p. 121  30)“파졸리니를 지배한 것은 사회적 실천(social praxis)의 관점이나 그람시가 아닌 크로체와 랭보”-G. Z. Baranski, “Pier Paolo Pasolini” Culture, Croce, Gramsci’, Culture and Conflict in Postwar Italy, Four Court Press, Dublin, 1999, p. 145  31)Pasolini, Pier Paolo, Heretical Empiricism, Edited by Louise, K. Barnett, Indiana Univ. Press, Bloomington,, 1988, pp. 233∼234  32)“워홀은 조르노(John Giorno)가 자고 있는 모습을 231분이나 찍었다. 이런 전위적 영화가 감독의 주관적 시선을 배제한 진정 객관적인 리얼리즘인가? 그런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이 작품은 지루함 그 자체이다.”-Ibid., p. 242  33)Ibid., pp. 170∼177  34)오토 슈바이처, 『파졸리니』, 안미현 역, 한길사, 2000, 132쪽  35)① 누레딘과 주무롯의 이야기, ② 타지와 두냐의 이야기, ③ 아지즈와 아지자 이야기, ④ 샤즈만과 유난의 이야기  36)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분석은 한동원의 「파졸리니 <생의 삼부작>」에서 차용했다.-한동원, 「파졸리니 <생의 삼부작>, 『인문과학연구』, Vol.11, 2003, 447쪽  37)질 들뢰즈 위의 책, 141쪽  38)이병창,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의 철학」, 『시대와 철학』, Vol.15 No.1, 2004, 61쪽  39)“인간의 눈 자체로는 카메라와 같은 트래킹 쇼트를 만들 수가 없다. 심지어 우리가 부드럽게 조망하려고 할 때조차도 우리는 풍경을 띄엄띄엄 보게 된다. 트래킹 쇼트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시선일수도 있다. 만약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존재한다면,(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아마도 신의 방식은 카메라가 전달해주는 바로 그와 같은 시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트래킹 쇼트에서 신성함을 느낀다.”-http://mantlethought.org/content/running-film-2013/07/11 최종확인.  40)질 들뢰즈 위의 책, 140쪽

    5. 나가면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41)

    시대를 불문하고 ‘재현’은 예술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다. 예술의 근거가 세계에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고 모사하는 일은 애초부터 모든 예술가들의 관심사였다. 기술의 발전은 매체의 투명성을 일정 수준 보장했지만, 재현의 문제는 광학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되지는 않았다. 시점(point of view)과 관점(perspective)에 관한 담론에 이르면 재현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따라서 재현은 비슷하게 혹은 똑같이 묘사하고 복제하는 차원을 넘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론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술가들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재현은 때로는 그 안에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유용성의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재현을 버리고 추상과 비구상을 도구삼아 탈 재현을 꿈꾸는 예술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때로는 마르리트(René Magritte)처럼 재현 개념 자체를 소재삼아 메타적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영화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 아방가르드의 세례를 받은 구조주의 실험영화는 영화관보다 미술관을 택하면서 탈재현과 추상은 다시 회화의 세계로 복귀를 했다. 결국 TV 드라마를 닮아가는 감각–운동 도식의 영화42)와 이 도식에서 벗어나 관객의 인식과 지각장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의 영화만 남게 되었다. 네오리얼리즘의 태동으로 시작된 현대영화는 시간 그 자체를 사유하면서 감각–운동 도식의 영화와 결별을 선언했다. 영화적 모더니즘은 다중서사를 통해 할리우드의 단일서사에 대항했으며, 열린 결말을 통해 내러티브를 강박에서 해방시켰다. ‘시간 이미지의 사유’, ‘다중서사’, ‘열린 결말’과 같은 모더니즘의 강령들을 이어준 것은 바로 아이러닉하게도 또 다시 ‘재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재현은 투명성의 신화를 벗어버리고 그 자리에 ‘시점’과 ‘관점’의 문제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동반했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은 권력적인 것이며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관계망들이 설정되어 있기에 이것을 간과한다는 것은 세계의 실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사유하면서 더불어 ‘보는 행위’ 자체를 사유하게 된 현대영화가 반주관적 이미지를 끌어올린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의 시선과 닮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카메라의 위대한 힘이 바로 주관과 객관을 넘나들 수 있는 탈경계의 가능성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현대영화작가들은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자유간접화법은 바로 탈경계의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통로이며 반주관적 이미지는 영화가 가진 고유한 속성으로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드러난다. 파졸리니는 당시까지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영화의 속성을 테마로 삼아 자신의 영화 이론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본적 없는 완전영화, 즉 시네마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시네마라는 이데아를 닮은 현실의 필름을 만들었다. 영화는 파졸리니가 정초해놓은 이론 덕분에 주관과 객관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적은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매개의 세계를 지향하는 영화매체의 기술적 발전에 궁극에 이르고, 다중서사가 생생한 라이프로그(life log)와 만나 반주관적 이미지의 자유간접화법으로 주관과 객관이 통합되는 때, 그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영화는 스크린을 벗어나 완벽한 홀로그램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그 순간 세상이 영화가 될 것이다.

    41)『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평론가 정성일의 책에서 인용한 것임  42)“오래 전에 영화와 텔레비전 사이에 진정한 ‘분업’이 실행되었다. 즉 텔레비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얌전하고 어리석고,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일상적으로 관장하는 반면, 이런 염려에서 해방된 영화는, 모험, 곤경, 섹스, 폭력…영화광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Daney Serge, “Cannes et Billancourt”, Libération, 20 mai 1983; repris in Serge Daney La maison cinéma et le monde: 2 Les Années Libé 1981-1985, P.O.L., Paris, 2002, pp. 693∼694, 이윤영,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과 ‘죽은 시간’의 모험, 『영화 연구』44호, 2010, 245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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