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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김유진 감독의 충무로영화관 논의* The Study on the View of Kim, Yujin’s Chungmuro Film Work
  • 비영리 CC BY-NC
ABSTRACT
김유진 감독의 충무로영화관 논의*

Dir. Kim, Yujin has maked various genre film. This thesis try to study on the view of Kim, Yujin’s film works in the Chungmuro film world. His film world has pursued the value of Korean film which tried to show His works to watch ordinary life and represented the popular entertainments. The real life of Kim, Yujin’s film’s makes his audience to feel the outside world of ordinary life.

By his filmography his main filn are belong to realism works except <Singijeon>. His film works are divided Three part by making film period such as the first period, the middle period and the last or the new beginning period.

In the first period his film images are shoot by longtake and theatrical blocking better than shot frame because of his theatical directing experience. as the result he directs his film to show the extremism ensemble image represented. His debut’s film, <Song for hero>was very enought to demonstrate a new director appeared. In the middle period his important film are <Danji geudaega yeojaraneun iyumaneuro>, <yaksok>. Those films are noticed dir. KIm’s thought for Korean Chungmuro film. His film making style is continued to the last period. <Wild Card>, <Singijeon> shows dir. Kim’s style and his creative technique by try to make new film image. We can find his responsibility for Korean film audience and Chungmuro film.

Dir. Kim, Yujin’s film idea and directing style is arranged by three parts. The first, he pursued for making entertainment and social issue. The second, his social film shows very simple and turly points. The third, he has instinct will to represent the identy of Korean film.

By above mention it is very difficult to determind Dir. Kim, Yujin’s film world. Anyway his instinct idea which has made various film genre creates his dream world to make ordinary peoples’s peace and happiness life. In this point Dir. Kim, Yujin is always important director of Chungmuro film.

KEYWORD
한국 충무로 영화 , 한국영화의 가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 <약속> , 연극적 블록킹 , <신기전> , 한국영화관객의 책임 , 한국영화의 정체성
  • 1. 들어가며

    한국영화가 세계시장의 수출무대를 장악하게 될 전략산업이라는 사고는 1990년대까지 충무로영화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89년 <위험한 정사>가 UIP에 의해 직접 배급이시작된 이후 무차별적 동시 개봉되는 외화로 인해 한국영화계는 급속히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영화계의 적극적인 체질변화없이는 한국영화 존재 자체가 위기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국가의 지원정책과 영화를 예술보다 돈벌어주는 거대한 산업으로서 바라보기 시작한 대기업의 자본투자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던 충무로영화계의 제작시스템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켰다. 한 예로 대기업 제일제당은 할리우드의 최고 감독인 스필버그감독와 손 잡고 설립한 영화사 <드림웍스>의 최신작 <딥 입팩트>가 빅히트를 하여 7천 4백만달러(약 1천 억원)을 벌여들였다. 제일제당은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1억 5천만 달러의 예상 순이익 가운데 33%인 3천 3백만 달러 가량을 손에 넣었다.1) 이처럼 대기업이 영화계에 자본을 투자하면서 성과를 거둔 결과는 1990년대 부터 한국영화계에 재벌자본이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양한 한국영화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한국영화를 찾는 대중들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최근 한국영화 개봉작과 경쟁하고 있는 해외영화들은 오히려 한국영화들에게 추격당하고 있는 상황에 빠졌다.

    한국영화에 대한 국가의 지원정책과 대기업의 자본투자는 그동안 가벼이 흥행성만을 추구해 온 충무로영화계의 제작시스템을 변화시켜 다양한 방식의 한국영화 제작사를 이끌어냈다. 지리적으로 충무로지역에서 번성하던 한국영화인의 거취는 점점 사라지면서 ‘충무로영화’에 대한 향수가 노장 한국영화인에게 미련처럼 남게 된다. 그들에게 충무로는 할리우드처럼 대중영화를 생산하는 본 고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할리우드와 성격이 다른 충무로영화의 위상은 본격적인 독립영화와 대자본이 이끌어가는 영화사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충무로의 향수를 지키고자 한다.

    김유진은 1986년 영화사 대진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고 <영웅연가>로 감독 데뷔하였다. 첫 작품 <영웅연가> 만들면서 검열과 많이 싸운 당시 보기드문 순수한 영화감독으로 충무로의 눈길은 그를 주시하였다. 풍자코미디 <영웅연가>를 시작으로 그가 다루는 영화의 소재들은 항상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재미를 추구하면서 우리 삶의 현실을 직시하는 고급멜로영화에 집착하였다. 그의 영화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의미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화면 밖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관객과 자신과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본 연구는 충무로영화를 모색하는 김유진 감독의 충무로영화관을 논의하고 충무로영화에 대한 위상을 할리우드적 대중영화와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이 추구하는 영화의 공익주의적 가치관을 토대로 김유진의 충무로 영화작가적 태도를 논의하고자 한다.

    1)동아 일보, 1998년 5월 19일자, 참조.

    2. 김유진의 영화계 입문 계기2)

    김유진 감독은 『나는 영화가 좋다』라는 책에서 죽을 때까지 영화를 찍고 싶다.3)라고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김유진은 1950년 11월 19일 서울 서대문구 천년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김재훈은 경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로 예술을 생활처럼 즐기신 분이었고 모친 김준자여사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로 김유진은 3남 1녀 중 막내였다. 1970년 서라벌예술대 연극영화과(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전신)에 진학한 그의 입장은 분명치 않다. “뭐 살다보면 그냥 흘러흘러 가는 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은 공부 못해서 갔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확실한 뜻이 있어서 갔을 수도 있고. 나는⋯ 음⋯대학 다닐 때는 줄곧 연극 연출만 했어요. <극회 동인무대>라는 동아리를 만들어…”4) 확실하게 말문을 맺지 못하는 김유진은 그냥 호기심으로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갑자기 연극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실은 예술을 삶처럼 즐기셨던 부친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훗날 유인촌의 극단 <유 시어터>가 김유진의 대학시절 동아리인 <극회 동인무대>와 실험극단 <거론>(대표 : 김수남)을 이어가는 지속적인 연극 단체로 유인촌은 김유진의 배우였다는 것이다. 몽타주의 원조 에이젠스타인도 연극연출에서 영화연출로 옮겨 온 동기가 좁은 무대보다 무한한 시야를 동경해 왔듯이 김유진도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영화예술에 대해 선망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1974년 대학 졸업후 해병대 장교로 입대한 김유진은 “사실, 4학년쯤 됐을 때부터 연극을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 되고. 그리고 내게 과연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자신이 없더라니까.”5) 라고 말한 김유진은 영화에 대한 미련이 있어 회사를 퇴사하고 극단에서 연극 연출을 하다가 영화감독으로 변신한다. 1984년 12월,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는 영화법 개정이 발표되면서 한국영화인회의 이사장이며 시네 2000 대표인 이춘연과 함께 1986년 영화사 대진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고 곧 <영웅연가>로 감독 데뷔한다. 첫 작품 <영웅연가>를 만들면서 검열과 많이 부딪혔다. 당시 검열관계자는 ‘영웅’란 것도 ‘전통’을 연상케 한다고 쓰지 말라고 난리쳤고 ‘재벌’이란 단어가 불순하다고 하여 ‘그룹’이라고 수정하여야만 하였다. 스탭들은 준비된 빨간색 플래카드도 일부러 파란색으로 바꿨을 정도로 검열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연출부 경험도 없이 영화만들 생각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다는 김유진의 고백이다. 대학 재학시절에는 주로 연극연출을 공부했고 영화감독 데뷔 전에는 극단에서 연극연출 활동을 하면서 무대 감각을 익혔던 그가 갑자기 <영웅연가>라는 블랙코미디 형식의 영화로 감독데뷔한 것이다. 비록 <영웅연가>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독특한 소재를 다룬 코미디로 평가받은 이 작품 이후 김유진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김유진 감독이 현재까지도 충무로에서 연출력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관객에 대한 순수한 배려때문이다. 씨앤필름 장윤현 대표는 ‘김유진 감독이 일반 시사회장을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관객이 어떤 지점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체크하며 애초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비교해 어떤지 따져보며 난 관객에 대한 계산이라는 면에서 한참 배워야 한다.’6)라는 그의 태도에 감탄했다고 말한다. 김유진이 영화에 들어온 이후 확실한 것 하나는 한번도 영화 이외의 것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7)고 자신있게 고백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린 적이 없는 배경도 한 몫을 하였지만 이춘연은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엄살부리지 않고 여유있게 기다릴 줄 알며 고민하기 시작하면 집요하지만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8)고 말하며 김유진 감독이 충무로영화계의 영화작가로서 정도를 걸으려는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김유진이 충무로의 장수 감독으로 가는 왕도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2)김수용, 『영화를 뜨겁게 하는 것들』, 대원, 1995, 357-359쪽, 참조.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 사전』, 국학자료원, 2004, 136-137쪽, 참조. 문석, “충무로의 50대 청춘 김유진 감독” ≪씨네 21≫, No. 403, 2003. 5. 23., http://www.cine21.com., 참조. 김수남 정리, 김유진 인터뷰, 2012. 12. 13., <시네 2000> 사무실, 참조. 김수남 정리, <한국영화인회의> 이사장 이춘연, 인터뷰, 2012. 12. 13., <시네 2000> 사무실, 참조.  3)이창세, 『나는 영화가 좋다』, 지식의 숲, 2011, 참조.  4)문석, 앞의 글.  5)김유진, 앞의 인터뷰  6)문석, 앞의 글.  7)김유진, 앞의 인터뷰, 참조.  8)이춘연, 앞의 인터뷰.

    3. 김유진의 충무로영화관과 작품 소개

       1) 충무로영화관에 대한 견해

    김유진 감독이 ‘충무로영화’ 운운하는 것은 단순히 향수에 젖은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다. 한국영화의 산업적인 면을 비판하면서도 제작자로서 감독으로서 그 나름대로 새로운 대항영화를 모색한 것이다. 바로 한국영화산업의 위기성을 누구보다 느끼고 있는 징후로서 김유진은 1986년 영화사 대진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고 <영웅연가>로 감독 데뷔한다. 첫 작품 <영웅연가> 만들면서 검열과 많이 싸운 당시 보기드문 순수한 영화감독으로 충무로의 눈길은 그를 주시하였다. 풍자코미디 <영웅연가>를 시작으로 사회법정드라마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영화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시대물 중 전기류로 <금홍아 금홍아>, 사극 액션물 <신기전>을 만들었고 정통멜로물 <시로의 섬>과 액션 요소를 가미한 혼합장르 멜로물 <약속> 등도 있다. 정통액션물 <와일드카드>는 그의 본격적인 남성영화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항상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재미를 추구하는 그의 충무로영화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관객과 자신과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추구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사회 각 다른 계층들은 서로 다른 능력과 성향을 지니고 서로 다르게 인지하고 분류하고 기억한다고 주장하는데,9) 이 의미는 각기 다른 집단들은 다른 방식으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사실 국가의 정체성과 대중문화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로 대중문화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충무로의 명망받는 제작자가 언급하는 김유진의 충무로영화론은 구체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김유진은 영화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관객을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어린 스탭부터 비영화인에게까지 온갖 질문을 던지며 모니터링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 관객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하기 때문이다. “관객에 대한 계산이라는 면에서 난 한참 배워야 한다.”라는 그는 진정한 충무로영화에 대한 기본 의식을 보여주는 영화작가이다. 오락성이라는 것에 복종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의 중요한 덕목으로서 관객의 반응을 김유진은 우선하고 있다.

    스튜어트 홀은 관객의 반응을 ‘지배적 독해, 타협적 독해, 대항적 독해의 세가지 범주로 나눈다. 지배적 독해는 텍스트가 주장하는 의미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대항적 독해는 비판의식이 강한 쪽이다. 타협적 독해는 일반적인 경우로 두 다른 독해사이의 어떤 시점에서 발생하여 텍스트를 전적으로 부정도 수용도 안하는 관객의 경험에 따른 판단에 의지하여 모순적인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10) 문제는 한국의 대중영화 관객은 ‘지배적 독해’에 순응한다는 사실이다. 김유진은 지배적 독해를 피하기위해 관객에 대한 계산을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지 흥행을 위해 관객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한 ‘타협적 독해’를 추구하고 있다. 그 기대감때문에 현재 진행형의 한국영화작가 김유진을 기대하는 것이다. 김유진이 영화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관객을 생각한다는 것은 충무로영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김유진이 일반 시사회장을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관객의 반응을 체크하는 것은 그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는 관객을 배려하고자 하는 그의 신조이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만들 때부터 그의 신조는 확실하게 들어난다. 데뷔작 <영웅연가>와 <시로의 섬>을 만들 때만 해도 주제의식이 선명하면 관객이 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두 영화가 잇따라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그의 생각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초고는 연극인 이윤택이 썼는데 연극적 경향이 짙었다. 김유진은 그대로 수정없이 촬영하려고 했지만 관객이 외면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 몇 차례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쳐 세련된 법정드라마로 방향을 잡았다. <약속> 역시 관객에 대한 꾸준한 관심의 결과로 빛을 발한 작품의 예이다. 김유진은 마지막 부분의 성당장면에서 관객을 울리기만 하면 이 영화가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제작사 삼성픽처스의 노종윤 싸이더스 이사는 “그는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은 정확하게 가져가는 감독이다. <약속>때도 불필요하게 모든 장면에서 다 힘을 주고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영화의 모든 장면을 놓고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관객이 편하게 볼 거고 이런 부분에서 약간 달아오를 거고, 이렇게. 그런 식으로 편하게 찍다가 가장 중요하다는 마지막 성당장면을 찍을 때는 진지하게 돌변하더라.”11)라고 증언하고 있다. <와일드카드> 경우도 제작 전 시나리오를 놓고 일반인들에 대한 모니터 조사를 했고 그 반응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후반부가 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를 확인한 김유진은 모니터 의견을 상당히 고려하면서 결말부를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였다. 영화에서 형사들이 퍽치기 일당에게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모니터 의견을 대폭 수용하여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기 위한 그의 판단의 결과였다

    이처럼 김유진의 충무로영화관은 관객의 반응을 배려하는 노력이지 흥행만을 겨냥하는 산업적인 측면의 할리우드적 대중영화관과는 차별화되어야 한다. 김유진 감독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약 2∼3년(혹은 5년) 간격을 두고 영화를 제작하였음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프로젝트 형식으로 영화를 오랫동안 준비하여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긴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한 만큼 감독의 색깔이 영화 속에 짙게 묻어난다. 또한 비슷한 영화를 거부하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작업하는 감독으로서 한 가지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김유진은 싫어한다.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고집과 확고한 의지가 새로운 이야기를 찾고 준비하는 시간을 길어지게 하였다. 영화는 대중과의 만남이다12)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는 항상 현실 속에서 소재를 연구하며, 스스로 어떤 영화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을까13)라는 기본적인 고민을 자주 한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사이의 공백 기간은 길지만 소재는 현실과 잘 맞아 떨어졌다. 김유진이 항상 관객을 우선하며 새롭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찾아 장고의 시간을 투자하면서 관객과 만난다는 것은 그의 독특한 장점이다. 충무로영화관에 입각한 그의 작품만들기 신념을 정리하면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진지한 영화 그리고 흥행영화를 추구한다.

    <시로의 섬>을 만들 때만 해도 김유진은 주제의식을 강조하였으나 잇따라 흥행에서 참패하였다. 그 때 그는 ‘우리끼리는 프랑스영화가 이것 보고 베껴야 한다고 큰소리쳤고 그렇게 두편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니까, 집장사나 할걸, 카페나 할걸 이런 생각이 들었어’14) 그의 솔직한 고백처럼 충무로영화에 대한 그의 시행착오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약속>으로 관객의 공감과 흥행 면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유진은 자신이 만든 <약속>에 대해 만족하지는 않았다. “헤어짐이 안타까워 눈물이 나는 영화를 만들려 했는데, 누가 이만희의 <돌아서서 떠나라> 희곡을 추천하더라고. 몇번 읽어보니까 좋이 그래서 이만희에게 그랬지. 이거 영화하자, 당신이 각본 써라. 근데 정경순이 나오는 연극은 나중에야 봤는데 연극이 더 좋대.”15)라고 씁쓸한 미련을 남긴다.

    둘째, 사회성 영화에 대한 김유진의 영화작가적 태도는 단순하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발표하여 보호받아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여성을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한국의 남성우월주의, 성차별, 여성인권 등의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영화는 ‘성폭행’이라는 사회문제에 대해 성폭력 정당방위 사건으로 최초 대응한 실화를 소재로 한 시의성이 있었다.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끌어내면서 1990년대 페미니즘영화의 신호탄이 된 화제작이었다. 그러나 김유진의 생각은 단순하다. 당시 사회에 어떤 점이 문제화 되었는지 영화를 통해서 현 사회성을 영화에 반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사회를 좀 더 똑바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소통하기를 원할 뿐이었다. 작품평가 결과 이후 그의 생각은 이 작품으로 상도 많이 받고 했지만, 그때 서울에서 관객 10만 들면 성공하는데 5만6천인가 들었으며 아무래도 오락성이란 기준에서는 한계가 있다.”16)는 것이다. 그는 관객의 의식을 탓하기 보다 오락성에 대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관객의 오락성을 존중하는 충무로영화인임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셋째,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본능적인 의지가 들어난다.

    <나 홀로 집에>가 가족영화로서 흥행성적 올릴 때, 김유진이 우리의 아동영화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만든 영화가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이다. 이 작품은 아동영화로서 우리의 정체성있는 가족영화를 의미있게 발표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흥행 참패를 회상하면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가 끝난 다음에 태흥영화 이태원 사장님이 부르더라구. 언제 한번 영화 같이 하자고 하시대. 그때가 그래서 초등학생 4, 5, 6학년들 만나서 너희들 왜 싸우니, 월경은 언제 하니, 시시콜콜 인터뷰하면서 기획을 했어. 여름방학 때 개봉했는데, 가족끼리 손 붙잡고 올 줄 알았건만 썰렁하더라고. 그땐 아직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가족끼리 삼겹살 먹기 바빴던 시대였나봐.”17)라고 회고하는 그의 언급에서 김유진 나름대로 삶의 방향잃은 현실을 파악하여 건전한 우리 삶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음이 들어난다. <와일드 카드> 이후 5년 6개월 만에 발표한 <신기전>을 만들면서도 영화에 많은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호소하면서도 관객이 부담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를 우선시 했다고 어느 인터뷰18)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오락영화를 만든 감독의 단순한 제작 의도와는 달리 민족적 정체성이 느껴지는 <신기전>의 깊은 의미를 거론할 수 있겠다.

       2) 시기별 작품 소개

    현 한국영화계는 중견이나 노장감독들이 현역을 떠나야만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198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김유진 감독은 오히려 초창기 작품보다 최근의 작품들이 더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김유진 감독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 목록을 보면 <신기전>를 제외하고는 주로 리얼리즘 계보에 해당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나누자면, ‘주목할 만한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분기점으로 그 이전은 초창기 작품, 그 이후 <약속>까지를 중반기 작품으로 나눈다. 그리고 2000년대 <와일드 카드> 이후 작품들을 끝나지 않는 전성기로서 말기 작품을 논할 수 있다.

    (1) 초창기 작품

    김유진의 초창기 작품으로는 <영웅연가>와 <시로의 섬> 두 편을 들 수 있다. 1986년 개봉한 <영웅연가>의 원제는 <영웅 만들기>로 예식장에서 결혼한 신랑 신부가 24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블랙코미디 형식의 풍자 영화로 만들었다. 씨네 2000의 이춘연 대표가 지금도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영화로 이 작품을 연극 연출하던 김유진이 독특하고 참신한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를 만들어 냈다. 이 기상천외한 내용의 영화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코미디로 평단에서 평가는 받았지만 관객들은 외면하였다. (2만 8349명) 자본주의의 맹점과 거대 대중매체의 폐해를 고발하는 이 작품은 그다지 통찰적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제작된 1980년대는 군사정권 시절로 대기업 중심의 경제체계가 한창 문제되던 시기였고 표현의 한계와 검열이 가혹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영웅, 재벌이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검열바람에 원제 <영웅 만들기>를 <영웅연가>로 개작하기도 하였다. 영화도입부에서 흑인이 권총으로 신부를 쏘는 장면이 반미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 해서 까맣게 처리되는 수난도 겪었다. 김유진의 두 번 째 작품 <시로의 섬>(1998년)은 한 남자와 얽힌 모녀의 은밀한 욕망과 갈등, 사랑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정통멜로드라마로 그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역시 흥행에는 실패하였다.(서울관객-7363명)

    김유진의 초창기 작품은 연극 무대에 익숙한 관계로 쇼트 프레이밍적인 영상미보다는 연극적 블로킹과 롱 테이크로 씬의 앙상블을 극대화한 경향이 짙었다. 영화의 흥행성적과는 관계없이 새로운 감독의 등장을 검증하기에는 평단의 긍정적인 충분한 평가를 받았음은 확실하였다.

    (2) 중반기 작품

    김유진의 중반기 작품으로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년),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1993년), <금홍아 금홍아>(1995년),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1996년), <약속>(1998년) 등이 있다.

    김유진을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예필름이 제작한 사회성 짙은 영화이다. 술집여성의 경력이 있는 주부가 치한의 혀를 깨물어 법정에 선 여인의 실화19)를 다루웠다. 성폭행당한 여성이 오히려 상해죄로 고발당하자 치한들을 강간죄로 맞고소하면서 가부장적 법정에서 이중의 피해자가 되는 한국여성의 현실을 법정드라마로 묘사한다. 연극연출 경험이 많았던 김유진은 등장인물의 분석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여성심리를 때로는 예리하게 때로는 감상적으로 파고드는 일가견을 보여 주었다. 김유진은 보호받아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여성을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한국의 남성우월주의적 성차별, 여성인권 등의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영화를 감독하면서 그 만의 독특한 영화적인 사고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영화는 ‘성폭행’이라는 이슈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는 시점(성폭력 정당방위 사건에 대해 최초로 대응한 것)에서 실화를 소재로 한 시의성이 화제가 되여 평단의 좋은 평가를 끌어냈다. 또한 여성 단체와 페미니스트들이 이 여성을 옹호하고 나서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1990년대 일어난 페미니즘영화의 신호탄이 된 영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처럼 김유진은 사회의 이슈나 문제화를 영화를 통해 느끼도록 현 사회성을 영화에 반영하여 관객의 사회의식을 촉구하였다. 즉 영화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를 좀더 똑바로 바라보고 이에 대해 소통하기를 원했고 그결과 사회적 행위로 승화되길 기대하였다.

    초창기 작품들이 다소 사회비판적이고 자극적이었다면 이후에 그의 작품은 좀 더 일상적이며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아이들 세계를 그들의 눈으로 바라 본 <참견은 노, 사랑은 오 예>는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호응을 얻지 못한다.(서울관객-8271명) 이 영화는 학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구부 결성을 추진하는 어린이들의 노력을 그린 청소년드라마다. 아이들은 스스로 야구부 결성을 추진하지만 교장과 부모들의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아이들은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간섭과 몰이해, 시험과 학원이라는 두꺼운 벽을 극복하고 야구부를 만든다. 이 영화에 나오는 소재와 일화는 특정 환경에 놓인 어린이의 가정사나 개인사가 아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김유진의 영화적 재능이 번뜩인 작품이었다. 태흥영화사가 제작한 <금홍아 금홍아>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천재 시인 이상의 연애 기행을 담은 수작으로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 그리고 기생 금홍의 이야기로 압축되어 있다. 불분명한 주제의식으로 아쉬움을 남긴 <금홍아 금홍아>는 파격적인 소재로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감독은 그 어떤 작품보다 준비성이 부족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였고 이어서 만든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는 여성을 비하한다는 비판을 받은 공동연출작이다. 여성의 섬세한 심리묘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이미 평가받았던 김유진이 마침내 통속 멜로드라마 <약속>으로 다시 승부를 걸었고 그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그의 6번째 영화 <약속>을 선보일 당시 한국영화는 <고스트 맘마>(1996), <접속>(1997), <편지>(1997)등으로 멜로드라마가 붐을 일으키고 있었고 동시다발적으로 기획되는 멜로영화를 통해 김유진의 전성기를 예고했다.20) 1996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되어 흥행에 성공한 이만희21)의 희곡 <돌아서서 떠나라>를 신씨네가 제작한 것이다. 여의사와 조직폭력배 두목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그린 <약속>은 서울에서만 70만,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1999년도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의 내용을 보면 극과 극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열렬히 사랑하게 되지만 큰 장애물로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흔히 볼 수 있는 통속멜로의 소재이다. 이 흔한 소재의 영화가 많은 관객들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치밀한 연출의 결과로 본다. 김유진은 연극연출을 하여 오랫동안 연극무대에서 쌓아 온 저력을 토대로 멜로영화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극구성에 충실하면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감각의 멜로영화를 생각하였다. 조직폭력배 상두가 자신으로 인하여 그의 연인이 위험해질까봐 사랑하지만 헤어짐을 고하거나 후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과 같은 행동과 대사들은 관객이 주인공들에게 동화될 정도로 애절하게 잘 표현되었다. 그 결과 남자주인공의 조폭이란 사실은 말끔히 지워지고 그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평범한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로 남게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IMF 이후 가부장적 남성성의 균열이 만든 남성형 멜로드라마의 특징 또한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만 보면 남성적인 영화일 거 같은데 자세히 보면 여성적인 영화로 초반부에 희주의 시점만 제시한 것은 그런 느낌을 준다. 이는 근본적으로 누가 운명적인 사랑의 시선을 느꼈는가 하는 문제이며 감독은 희주가 상두를 사랑하게 된 것이고 전체적인 이야기도 그걸 따라간 거다. 이 영향은 현대드라마와 영화에도 여전히 미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한 인물(또는 어떤 단체)이 뜻이 같은 다른 인물들을 만나 여러 장애물속에서도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내는 소재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삼각관계, 사랑하지만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애틋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드라마의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진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독특한 소재로 특색있는 영화를 연출해 온 김유진의 이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약속>은 다분히 시류에 편승한 이질적인 영화로 비판받기도 한다.

    이상 김유진의 중반기 영화작품을 정리하면 이 시기에 그의 충무로 영화적 사고의식은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영화감독으로서 정체성이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3) 말기작품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성기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유진을 지켜보면서 영화작품 시기의 구분을 말기로 결정짓는 것은 이른감이 든다. 그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충무로 영화관계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2000년대 이후, 김유진의 두 작품은 시대배경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버디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던 <와일드 카드>(2003년)는 <약속>의 이만희 작가와 김유진이 4년 만에 다시 작업한 영화로 서울 55만, 전국 15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이다. 그는 형사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사명감과 투철한 직업의식을 확인했다. 형사는 일반회사에 다니는 직업인들과는 달리 사건 피해자들을 향한 연민과 진실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김유진은 영화화를 결심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범인이 휘두르는 칼에 맞서기도 하며 집보다는 경찰서에 머무는 날이 많은 형사들은 거친 강력계 형사이기 이전에 늦은 밤 잠든 아이의 키를 조심스레 어림잡아 재보는 아빠이며 첫눈에 반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찾아가는 평범한 남자이다. 경찰 중에서도 가장 험한 일을 하는 강력반 형사들은 사실 기득권층이 아니라 또 다른 소외계층이기도 하다. 김유진은 영화를 통해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소외계층인 형사들의 실체를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관객을 이끌어 간다. 세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신기전>(2008년) 역시 세계 최초의 미사일인 신기전을 만드는 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자들의 암투 속에서 신기전을 완성시킨다는 약자들의 투쟁적인 내용이다. 역사이야기라기 보다 박정희정권 때부터 핵폰탄 개발을 놓고 미국과 갈등을 일으킨 비화를 생각게하는 현실의 알레고리 영화이다. 세종의 명령으로 극비리에 신기전을 만들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이어 신기전을 완성 시키고자 하는 홍리는 전쟁까지 언급하며 이를 중단 할 것을 요구하는 명나라에 맞서 신기전을 완성한다. 조선의 군대도 왕도 아닌 백성의 손에 조선이란 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신기전 하나로 나라를 구한 주인공에게 “짐은 왕이요, 그대들은 황제이니라’22)라고 이 영화는 전하고 있다. 김유진은 한국이 개최한 월드컵 때 수많은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때를 잊지못하고 그때 그 느낌을 되살리고자 만든 영화가 <신기전>이었다고 말한다. “정치적 배경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수많은 국민이 모여 하나가 되었던 때가 있었는데, 대단히 경이로웠다. 우리 모두가 즐거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이 우리를 쓰라리게 만들었다. 세태가 그런 데다 우리의 개인사는 얼마나 또 걱정거리가 많아졌는가. 그러니 영화라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 그 느낌을 되살려서 ‘우리 능력 있다’ ‘지금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위로해주고 즐기자’ 그런 의도로부터 출발한 소재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 배경의 문제는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를 선명하고 극적으로 만들다 보니 상대가 필요했고, 그런 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명나라가 나왔다.”23) 관객이 부담 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를 추구했다는 김유진은 이 영화를 만든 의도는 처음부터 순진했다고 어느 인터뷰24)에서도 밝혔다. <신기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애국적, 민족적인 우월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같지만 단지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사나이의 휴머니즘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신기전이라는 화포가 결국 불꽃놀이처럼 고전적인 낭만마저 느끼게 하는 엔딩은 김유진의 고백처럼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보다는 두 연인의 치열한 인간적인 삶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진의 말기 작품은 <와일드 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화적 스타일과 <신기전>같은 창의적 기교에 도전하는 영화적 연륜이 확인된다. 두 작품은 김유진의 관객과 한국영화에 대한 진중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끝나지 않는 전성기를 기대하게 한다.

    9)문재철역, 조안 홀로우즈. 마크 안코비치 저, 「왜 대중영화인가」, 한울, 1999, 17쪽.  10)Stuart Hall, “Encoding/Decoding”, 「Culture, Media, Language」, Unwin Hyman, 1980, 128쪽.  11)문석, 앞의 글.  12)김유진, 앞의 인터뷰, 참조.  13)위의 인터뷰, 참조.  14)위의 인터뷰.  15)위의 인터뷰.  16)문석, 앞의 글, 참조.  17)김유진, 앞의 인터뷰.  18)이용철(ibuti), 김종철(다크맨), 정리: 김송호(Loomis), 김유진 인터뷰, 2008년 8월 22일 오후 3시-5시 30분, 장소: 케, 이엔제이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참조.  19)1988년 9월 10일, 주부 변월수가 한밤의 귀갓길에서 강간범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변월수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 남성의 혀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됐고 과잉방어라는 이유로 징역 1년을 구형받는다. 이로 인해 한때 여성계는 “그렇다면 성폭력 위기에 처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자기방어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으켰다. 동아일보, “시민 토론 여성인권 침해부각”, 1990. 10. 5, 1990. 10. 17.  20)김유진 감독의 「약속」, 정중헌, 한국논단, Vol.113 No.1, 1999, 132쪽, 참조.  21)이 작품을 계기로 김유진 감독은 이만희 작가와 이후 모든 작품을 함께 작업하였다.  22)영화 <신기전>에서 안성기(세종 역)의 대사.  23)이용철(ibuti), 김종철(다크맨) 정리, 김유진 인터뷰.  24)위의 인터뷰, 참조.

    4. 김유진의 충무로영화의 영화작가적 태도

    김유진은 ‘영화작가주의론’’으로 논할 수 없는 충무로를 대변하는 스스로 장인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영화작가이다. 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구영화계에서 논의된 작가주의론은 영화감독의 우위론을 주장하며 동일한 스타일, 내적 비전(주제), 탁월한 기술력 등 세 가지 조건에 충족된 감독 만을 영화작가로 인정하였다. 이와같은 서구의 ‘작가주의론’을 충족시킬 수 없는 한국영화 감독을 영화작가로 격상시키기 위해 김수남이 주창하는 비평적 성격의 감독연구라기 보다 자선전적인 감독론인 ‘한국작가주의론’25)도 있다. 그러나 김유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감독론 모두가 효과적인 연구방법론이 아니다. 이 사실은 김유진의 영화예술관을 확인하면 설득력있게 닥아온다. 김유진은 “내게 뭐 일관된 어떤 지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도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하나의 예술 분야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 안에 또 예술이 있는 건가”26)라고 주장하며 일단 영화작가에서 물러나 스스로를 장인으로 위치지운다. 씨네2000 대표, 이춘연은 연극을 해서 그런지 상업영화를 해도 닭살스런 짓을 안 한다.27)고 말한다. 김유진 역시 감독이라는 자리가 자신의 작품을 객관성을 갖고 바라보기 참 어려운 직업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그는 한국의 어떤 영화감독보다 영화작가적인 태도를 앞세우기보다 관객을 우선 생각하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그는 진정한 충무로영화인으로서의 영화작가적 태도를 갖추고 있다. 뭔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의지로 한번 했는데 어떻게 비슷한 걸 또 할 수 있겠냐며 항상 새로운 작품을 구상한다는 그는 어쭙지 않은 영화예술을 내세우거나 흥행 만을 생각하는 여타 감독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한국영화작가이다. <와일드카드>를 만들기 전에 다른 시나리오를 준비하다가 포기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또 다시 <약속>같은 멜로영화를 하려니 과연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 의심이 들어 포기하고 그의 새로움에 대한 강한 투지로 우여곡절 끝에 형사물을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와 이만희 작가는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 같은 다른 형사영화와 어떻게 다르게 만들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이 과정에서 강력반 형사들의 소외된 삶을 그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싸이더스 노종윤 이사는 당시 흥행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김유진 감독에게 투자하기로 한 것은 그의 연출능력, 특히 선굵은 드라마를 만드는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28) 라고 말한다. 아무리 관객을 고려하고 젊은 마음을 갖고 장르적 돌파를 한다 해도 영화의 만듦새가 떨어졌다면 오늘의 김유진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무로영화인들은 김유진영화에 대해 기본기가 탄탄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점은 연극 연출로부터 출발한 그의 경력때문일 것이다. 김유진은 “어차피 영화나 연극이나 기본은 똑같다. 연기자를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가는 연극에서 배울 수밖에 없어. 드라마의 리듬, 호흡, 스피드 역시 연극쪽이 강해.”29)라고 생각한다. <약속>과 <와일드카드>에 출연한 정진영은 “감독님은 영화를 찍으면서 연출이나 카메라가 앞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셨다. 배우만 보이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관객 입장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것 같다”30)라고 말한다. 김유진은 영화작가적인 욕심을 버리면서 관객을 배려하고자 연기자를 관객 앞에 내세워 충무로영화를 고집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감독이었다. 그 결과 독특한 소재로 자기만의 색깔있는 영화를 연출해 온 김유진의 작품은 각종 영화제에서 언급되고 수상도 많이 했지만 정작 자신은 상복없는 소외감도 있었다.

    독특한 소재, 창의성있는 충무로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유진은 다작하는 감독은 아니다. 한국영화계에서 최다작품 감독은 103편을 만든 김수용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10편을 만든 고영남 감독이 있다.31) 이들에 비해 김유진은 1986년 <영웅연가> 이후 2008년 <신기전>까지 20여년 동안 9편을 만든 소작 감독으로 위치지움은 그의 연출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관객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작품을 준비하는 충무로영화계에서 신뢰받는 감독이다. 항상 독특한 소재로 관객과 승부하고 창의성있는 연출력으로 영화작가로서의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김유진은 노장감독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숨겨진 저력이 있다. 신씨네 신철 대표는 “그는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본질은 딱 하나다. 그의 영화에선 그가 품고 있는 세상과 못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32)고 말한다. 우락부락한 김유진의 인상을 떠올린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본격적으로 그가 품고 있는 영화세상을 만나는 작품이요 김유진의 한국영화에 대한 전복의 시작이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지를 다지며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약속>은 시류에 편승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거친 조폭과 감수성이 있는 여의사와의 사랑이야기는 당시 대중들에게 특별하게 닥아갔다. <와일드 카드> 또한 조폭같은 형사의 삶을 깊이있게 통찰하여 그의 특유한 연출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한 충무로영화였다.

    결론적으로 김유진의 영화작가론을 거론하자면 영화작가론적 어떤 논리적 기준에서 규정하기가 쉽지않다. 그는 나름대로 투철한 충무로 영화관을 가진 대중영화작가로 영화작가적 태도는 분명하다. 대중문화이론이 대중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조건에 관심을 기울임에 반해 작가영화는 대중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상업성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문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 ‘영화는 달라져야 하고 그래야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관객을 설득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달라짐은 착각이며 마케팅과 배급의 산물로 영화나 관객이 차별화되며 마케팅과 배급의 역할로 생산물을 구분하고 관객을 나누는 것이라 한다.’33)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 또한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힘은 관객이 자각 능력을 잃고 순응적으로 된다고 보고 그 결과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위에 복종하고 따르도록 만든다. 한마디로 영화는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34)고 강변한다. 프랑크푸트학파나 아도르노오 호크하이머의 대중문화론의 부정적 시각은 문화의 산업화가 문화를 상품화하여 문화의 유일한 가치는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그 존재가치를 부여하였다는 현상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의 부정적인 주장대로라면 이제 영화는 문화산업의 일부로서 관객을 소비자로 재생산하려는 목적의 이데올로기를 지녀 이제 좋은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김유진의 충무로영화론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오락성을 배려하는 모순을 극복하는 대항영화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김유진의 작품은 그의 인생을 걸고 영화를 통해 관객의 바람직한 삶을 추구한다. 피터 울른은 ‘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전 인생을 소비한다는 르누아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런 영화는 꼼꼼한 비평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비평가는 한 감독의 총체적 작품을 가로지르는 숨겨진 구조를 읽어내고 있음을 지적한다.’35)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제작자 한 사람인 신씨네 신철 대표가 이미 언급했듯이 김유진 감독이 다양한 영화를 만들며 추구해 온 충무로영화의 이상은 그가 품고 있는 세상과 못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관객과 나누는 것임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김유진의 충무로영화관이자 영화작가적 태도는 바로 못난 사람들이 일구워내는 이 세상, 그들이 숨쉬는 세상을 솔직하고 재미있게 만들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다.

    25)김수남, 『한국영화작가연구』, 예니, 1995, 서문, 참조. 김수남은 『한국영화작가연구』에서 “한국작가주의론”을 제창하고 40명의 한국영화작가를 연구한 『한국영 화감독론』I, II, III권을 출간함.  26)문석, 앞의 글.  27)이춘연, 앞의 인터뷰, 참조.  28)문석, 앞의 글, 참조.  29)김유진, 앞의 인터뷰.  30)문석, 앞의 글.  31)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 한국영상자료원 자료 참조.  32)문석, 앞의 글.  33)문재철 역, 앞의 책, 42쪽.  34)문재철, 앞의 글.  35)peter wollen, “The Auteur Theory”, Sign and Meanings in the Cinema, London:secker and warburg, 1972, p. 93.

    5. 나가며

    김유진 감독의 영화를 디테일이 약하다고 혹자들은 지적한다. 이 지적의 의미는 김유진의 작품이 주제 말고 형식적 측면에서 스트레이트하면서 선이 굵지만 캐릭터가 다양하지 않고 분명하게 나간다는 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유진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다음 인터뷰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는 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한계라고 두서없이 밝힌다.

    “나라고 경험이 있다고 해서 영화를 다 아는 건 아니며 표현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 영화에서 거친 측면은 디테일한 부분을 미리 생각해야 하는데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 거야. 찍고 나면 ‘아 저런 건…’하는 게 많지. 영화라는 게 한 번 찍으면 다시 못 돌아가니까… 그런 모든 요소들이 내 영화에 아쉽게도 많이 들어나. 내가 가장 못하는 게 스타일이야. 영상미라든가 그런 건 카메라에 많이 의존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잘 못해. 어떻게들 그렇게 할까? 내가 연극 연출을 전공해서 그런가? 영화 전공을 했다면 수많은 장면을 배우기도 하고 응용도 해서 독창적으로 만들었을 텐데, 그런 쪽에 주안점을 두고 싶어도 나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36) 김유진은 영화만들기의 결과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감독이다. 그의 충무로영화는 감독과 관객, 나와 또 다른 누군가와의 연결고리로 보는 그는 이 연결고리를 통해 한국과 못난 한국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삶의 여러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목소리로 우리의 사회를 비판하고자 우리의 정서를 창출하여 한국관객들을 감동시켜 왔다. 또한 한국의 역사를 그의 방식대로 풀어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느끼게 하였다. 매 작품마다 배경도 다르고 이야기의 소재도 다르지만 공통된 한 가지의 큰 테두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끈끈하게 끌어안고 그 안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한 나라의 사회와 역사, 정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영화가 다소 어렵고 다른 여러 문제를 발생시켜 영화가 지루해 질 수 있는 위험도 따른다. 하지만 김유진은 관객의 눈을 집중시키는 구성과 감정라인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표현, 튼튼하게 엮은 공감의 끈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 연구에서 김유진의 ‘충무로영화’를 논하는 것이 보편타당하지 못한 또는 타당성을 인정하더라도 연구자의 논리가 설득력이 없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한국영화계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영화제작자들이 김유진이 구축한 충무로영화의 패러다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김유진의 충무로영화관의 실천이 쉴 새 없이 제작되는 드라마와 영화의 기본 틀이 되어가고 있으며 이에 반전과 재미를 더해 재구성되고 진화되는 것을 충무로영화 제작자들은 긍정적으로 지켜 보고 있다. 이 점에서 연구자는 김유진이 언제나 충무로영화의 의미있는 감독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연출작품 목록

    <영웅연가>(1986)

    <시로의 섬>(1988)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1993)

    <금홍아 금홍아>(1995)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1996)

    <약속>(1998)

    <와일드카드>(2003)

    <신기전>(2008)

    기획

    <와일드카드>(2003)

    제작

    <와일드카드>(2003)

    연출지원

    Mr. 아이돌 2011

    각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내 사랑 동키호테>(1989)

    <수상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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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와일드 카드> 제11회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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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영웅연가> 제11회 영진공 선정 좋은 영화

    36)김유진, 앞의 인터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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