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몸의 표상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The phenomenological approach on the body in the film

  • cc icon
  • ABSTRACT

    In the classic movie film, human’s body has been treated as a tool of reflection on man’ emotions and thoughts, and after the age of silent film, how to express the body and to deliver the message of the body has been coded in a standard way. In this point, the body cannot escape from the passivity in the consciousness. However, Robert Bresson’s film shows a different view of human’s body in terms that the body is treated as the subject of perceiving the world. Such a view has similar to Merleau-Ponty’s view over the phenomenology of the body which regard human’s body as the subject of human’s experience, not as the object and the accidental element of building human’s recognition,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not to apply Merleau-Ponty’s phenomenology to Bresson’s body image, but to find the possibility that Bresson’s body image could be interpreted as the phenomenology. This paper, first, would find out the cause of general view over the human’s body through the silent films which began to try showing body’s expression, and then, would find out the relations Bresson’s body with Merleau-Ponty’s body, by way of analyzing body’ characteristics showed in some Bresson’s films. Bresson’s body image theory should be understood that the meaning of body’s image does not come from the similarities of reality, but from the relationship itself among various body’s images which is removed a meaning as much as possible. As the result, Bresson’s film shows the process how to body’s performance reveals the emergence of existence, the occurrence of events and thoughts, and self internality. Bresoon’s body image is similar to Merleau-Ponty’s phenomenology of the body in terms that body’s image shows the process of revealing the other people, and the world.

    This paper would also examines the phenomenology of the body could be simply not only a study of a new perspective on the body’s image, but also, a study of the ontology of the film image.

  • KEYWORD

    Body , Fragment , Perception , gaze , Image , Robert Bresson , Maurice Merleau-Ponty , Phenomenology

  • 1. 들어가며

    본 논문의 목적은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이 영화이미지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고찰하는데 있다. 즉, 몸에 의한 세계인식이라는 추상적인 사유를 영화이미지는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몸은 배우가 영화속 인물을 표현하는 도구로써의 역할을 해왔다. 영화 속 인물은 그를 연기하는 배우에 의해 공간상에서 형상화되고, 인물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시간속에서 발생한다. 인물의 공간화와 사건의 시간화속에서 몸은 인물의 감정, 심리상태, 의사를 표현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건을 만들어나가는데 필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또한 인물을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인물을 개체화하는 역할을 했다. 몸은 인물의 행위와 사건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내러티브의 맥락에서만 파악되었다.

    그러나 브레송 영화에서 몸은 표현과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몸의 ‘개별적인 부분들이 세계를 지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몸의 의미는 서사의 의미론적인 맥락에서 표현(인물의 사유, 감정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성이 제거된 채 신체의 각 부분들의 움직임 즉, 행위를 통해 스스로 인간,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교류 하는가를 드러내는데 있다. 이러한 사고는 ‘시네마토그라프’1)란 브레송의 영화관에 의거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란 의미와 표현성이 최대한 제거된 “편편한 이미지”(image aplatie)2)로 이미지의 의미는 각각의 이미지자체의 표현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브레송은 몽타쥬가 아닌 ‘접합(jointure)’이라 부른다.)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네마토그라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재와의 만남’에 있다.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은 미지의 것, 알려지지 않은 것과의 만남이다.”3) 그러나 브레송은 이러한 실재가 카메라에 의해 직접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신에 이른 실재는 더 이상 실재가 아니다. 우리의 눈은 지나치게 사유하고 지나치게 지성적이다. 두 종류의 실재가 있다 : 1. 카메라에 의해 기록된 날 것으로의 실재. 2.우리의 기억과 오류로 변형된,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고 있는 것. 문제. 너가 보는 방식대로 보지 않는 기계(카메라)를 통해서 너가 보는 것을 보게 하라.”4) 브레송은 접합에 의해 우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실재이며, 실재의 성격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비가시적인 실재를 포착하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다. 필립 아르노는 브레송 영화의 이러한 특징을 “브레송영화에서 이미지는 형상화(figurable)될 수 없는 것을 증거한다.”5)고 표현한다. 따라서 브레송 영화에서 몸이란 형상화 할 수 없는 실재를 드러내는 새로운 표현방법중의 하나6)로 간주되며, 몸은 표현적인 몸이 아닌 지각하는 몸으로 나타난다.

    바로 여기서 브레송의 지각하는 몸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몸7)의 현상학과 연관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메를로-퐁티는 의식의 본질을 지향성으로 규정하고 의식의 선험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는 훗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면서, 철학에서 인식형성의 이차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로서 인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었던 몸을 존재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몸은 지각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지각하는 주체이다. 왜냐하면 몸은 감각기관들에 의해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사물과 타자에 반응하고, 이러한 몸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체화된 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몸이란 의식에 앞서 “이미 거기에 현전”8)하는 실존으로 세계로 지향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에로의-존재’(être au monde)라 할 수 있다. 몸은 단순히 의식의 대상이 아닌 끊임없이 세계를 체험하는 “경험의 장”9)이 된다. 훗설의 의식의 지향성이 아닌 몸의 지향성에 의해 세계인식의 과정을 밝히려 했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몸에서 표현성과 재현성을 제거하고 몸의 행위에 의해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에 주목하는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만나게 된다.

    영화학에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이미지를 지각하는 관객의 지각형성과 관련하여 다뤄져 왔다10). 이 관점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미지를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환각상태와 같은 몰입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미지를 전체의 구조내에서 구성, 통일할 수 있는 지각의 능동적인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관객의 경험에 대한 분석은 1970년대의 정신분석학이 꿈과 영화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관객을 영화를 보는 주체로서 정의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본 글의 관심사는 관객의 지각과 지각대상으로서의 영화와의 관련성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으로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브레송의 몸의 이미지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본 논문은 우선 몸에 관한 재현적인 시각의 시초가 된 무성영화에서의 몸의 표현성을 살펴보고, 브레송의 지각하는 몸의 특징들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몸에 관해 새로운 시각들을 보여준 감독들은 더러 있지만, 브레송만큼 전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론에 의거하여 체계적으로 사유한 감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작품분석은 브레송의 작품으로 국한하되 비교분석이 필요할 경우 다른 감독들의 영화도 인용할 것이다. 또한 브레송의 영화들 중에서 <무세뜨>(Mouchette, 1967)와 <돈>(L'Argent, 1983)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영화보다 몸에 관한 현상학적인 관점들이 더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들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한편, 메를로-퐁티의 저서는 『지각의 현상학』의 논의에 국한한다. 왜냐하면 브레송의 몸은 표현성이 제거되고 의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 몸은 여전히 지각의 주체로서 작용하지 동시에 지각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지각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몸은 아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1)에서 논의되는 후기철학의 ‘살’(chair)의 존재론은 브레송의 몸 이미지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 결론에서는 브레송의 몸의 이미지에 관한 현상학적인 해석이 1980년대 이후의 프랑스 영화학의 영화이미지연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도 고찰할 것이다.

    1)당시의 문학소설의 각색, 극적인 드라마구성, 배우의 연기에 중점을 둔 영화를 시네마(cinéma)로 분류하고 그와 구별되는 영화를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라 지칭했다. 브레송은 이 시네마토그라프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로 된 글쓰기’로 정의한다. Robert Bresson, Notes sur le cinématographe, Paris, Gallimard Folio, 1975, p.18.(『시네마 토그라프에 대한 단상』, 오일환, 김경온역, 동문선, 2003) 본문 인용은 원문 페이지이며, 번역서의 내용을 원문에 맞게 수정함.  2)Ibid., p.23.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단상』에서 이미지의 비의미성을 ‘insignifiant’ 또는 ‘non sugnifiant’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영화학자인 자끄 오몽은 ‘a-signifiant’으로 표현한다. (Jacques Aumont, Les théories des cinéastes, Nathan, 2002, p.40) 불어에서 a는 부정 혹은 없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브레송이 이미지로부터 의미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최대한 제거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몽의 ‘a-signifiant’가 비의미적인 이미지를 설명하는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한국어의 비의미성은 이러한 의미를 정확이 나타내기 어려워 ‘최대한 의미가 제거된’으로 풀어 설명했다.  3)Ibid., p.35.  4)Ibid., p.79.  5)Philippe Arnaud, Robert Bresson, Ed., Cahiers du cinéma, Paris, 1986, p.13.  6)비가시적인 실재를 드러내는 방법들은 모델, 생략, 고전적인 인과성과 연속성의 균열, 이미지와 대사의 모순, 파편화, 사물의 비내러티브성등등이다.  7)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번역서에는 ‘corps’가 ‘신체’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에는 ‘몸’으로 번역되어 있다. 철학의 현상학 전공자들 역시 ‘신체’ 혹은 ‘몸’ 두 용어로 사용하고, 한국의 영화논문에서도 ‘신체’, 혹은 ‘몸’으로 사용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용어에 관한 명확한 개념규정이 없다. 필자는 이미 연구비 수혜논문제목으로 ‘몸’이란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논문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본 논문의 주 참고원전인 『지각의 현상학』번역서에는 ‘신체’로 번역되기 때문에 인용문의 경우엔 ‘신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임을 밝혀둔다.  8)Maurice Merleau-Ponty,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Gallimard, Paris, 1945.(『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2002 13쪽. 이하 본문인용은 번역판을 따르되 일부 표현은 원문에 따라 수정했음을 밝힌다.)  9)앞의 책, 607쪽.  10)대표적인 저서가 Vivian Sobchack의 The address of the eye : a phenomenology of film experi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이다.  11)Maurice Merleau-Ponty, Le visible et l'invisible, Gallimard, Paris, 1964.

    2. 무성영화에서의 몸의 표상

    영화에서 몸에 관한 재현적인 해석은 무성영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자끄 오몽에 따르면, 1895년 프랑스와 델자르트(François Delsarte)에 의해 이론화 된 팬터마임론12)은 정신과 신체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전제 한다. 즉, 신체엔 감정(분노, 질투, 불안, 걱정, 애정 등)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식이 있고 모든 감정들은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역으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우린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유추할 수 있다. 이 팬터마임론에 따르면, 연기를 한다는 것은 몸에 의해 ‘진술되고 형식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감정과 신체와의 대응성은 관상학(physiognomonie : 신체적인 특성에 의해 인간의 심리와 성격을 연구)과 결부되어 일종의 코드화된 연기로 정착했다. 무성영화에서는 소리(목소리, 음향등)가 부재했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 혹은 전달은 언어가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것13)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몸짓이 관객에게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몸짓을 통일된 방식으로 코드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몸은 영화에서 의식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서만 간주 되었다. 이후 유성영화에서도 몸에 관한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배우의 신체는 외모, 동작, 행위를 통해 인물의 개체성이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도구로서만 작용했다. 몸짓, 행위는 항상 심리적이건, 상징적이건 혹은 서사적이건 의미를 담지해야 하며, 그 의미는 인물의 정신(사유, 감정을 포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다. 몸은 인물의 의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에의 수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달과 표현(감정과 의사 등)의 기능에만 국한되었다. 의식에의 의존성과 수동성이라는 몸의 의미작용은 특히 고전영화가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기반으로 서사구조의 완결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영화에서 몸의 수동성은 때로는 사물화로 나타나기도 했다. 몸의 사물화란 인간의 몸이 살아있는 유기체와 물질성이란 이중적인 경계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사물화는 몸의 대상화와 물질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대상화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도구적인 의미로 사용됨을 의미하고, 물질성은 주로 SF, 판타스틱영화장르에서 몸의 변형14)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화에서 몸의 사물화는 대개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면서 이 대상화, 도구화는 주체의 개체성을 상실한 ‘비인격성’과 동의어로 간주되어 인간의 비인간화를 표현해왔다. 유명한 사례가 채플린(Chaplin)의 <모던 타임즈>15)(Modern times, 1935)와 프릿츠 랑(Fritz Lang)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6)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는 일이 끝난 후에도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주인공의 몸짓을 통해,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노동과 수동적인 삶을 보여준다. 또한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 스> 역시 지하노동자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에서 자율성이 배제된 비인간화된 삶을 표현한다. 많은 영화에서 답습되고 있는 이러한 몸의 사물화는 이성과 감정, 인간과 비인간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에 의거하는 것으로 몸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이 사유는 근대철학의 정신과 신체의 이원성, 근대과학의 기계론적인 자연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연은 더 이상 신의 섭리에 의한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견된 법칙에 의해 자기 운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자연은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되는 거대한 기계이다.

    몸의 사물화를 대상화, 도구화보다는 물질적인 관점에서 파악한 감독이 바로 버스터 키튼 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몸의 물질적인 측면을 판타스틱영화처럼 몸의 변형이 아닌 물리적인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는 찰리 채플린과 동시대의 무성영화 감독이지만, 내러티브의 전개나 구성, 연기, 미장센느가 아니라, 정확한 수학적인 계산에 기초한 몸개그를 보여준다. <일주일>(one week, 1920)의 도입부의 공간은 두 대의 차 사이를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양(두 대의 자동차와 한대의 오토바이)의 대비, 움직임(사선으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직선으로 움직이는 오토바이)의 대비로 나타내면서,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공간을 보여준다. 무성영화 역사에서 많이 회자되는 <스팀보트 빌 주니어> (Steamboat Bill Junior, 1928)의 집이 넘어지는 장면은, 카메라의 트릭이나 몽타주를 사용하지 않고 주인공과 그 위로 넘어지는 집과의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여 연출된 장면이다. 한 치의 오차가 있어도 배우가 다칠 수 있었던 위험한 이 장면은 키튼의 개그가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개그임을 보여준다. 키튼 영화의 또 다른 축은 바로 몸의 운동성이다. 그는 <셜록 주니어>(Sherlock Jr.1924), <카메라 맨>(The Camara man, 1928), <7번의 기회>(Seven chance, 1925)에서 항상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자전거에 앉아 도시와 들판을 가로지르며, 어떤 장애물에도 넘어지지 않고 질주하는 주인공, 애인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하로 혹은 옥상으로 끝없이 올라가던가, 애인의 전화를 받자마자 시내를 완주하는 주인공, 구혼광고를 보고 뒤쫓는 수많은 여성들을 뒤로하고 도심으로 산으로 달아나는 주인공, 이 모든 주인공들의 질주는 마치 가속도가 붙어 멈출 수 없이 전 속력으로 달리는 사물의 운동과 같은 물리적인 운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키튼의 몸의 물리적인 운동성은 앞서 언급한 몸의 사물화처럼 의식이나 정서가 배제되어 자율성을 상실한 기계적인 사물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키튼의 질주하는 몸은 감정, 생각, 욕구가 반영되기에 앞서 이것을 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뱅상 아미엘은 몸의 질주라는 이 속도성을, 인물의 감정 혹은 사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감정을 야기하는 원인이나 근원”으로 파악하며 “속도성에 감정이 실려 전해진다.”16)고 해석한다. <카메라 맨>에서 주인공이 습관대로 애인과 빠른 걸음으로 걷다 데이트중임을 알아채고 걸음을 늦추는 순간 바나나껍질에 걸려 넘어진다던가, <셜록 주니어>에서 주인공이 자전거로 질주하다 뒤에서 아무도 운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이 중심을 잃는 장면 등은, 키튼의 질주하는 몸이 물리적인 운동 상에 놓여있으며 의식의 반영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이 개입하는 순간 오히려 그 물리적인 운동이 균형을 상실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키튼의 몸에 관한 이러한 해석은 동시대 영화에서 사유나 감정이 배제된 사물화 된 몸, 혹은 표현의 대상으로서의 팬터마임 론과는 상이한 관점을 나타낸다. “의식은 신체를 매개로 사물로 향하는 존재이다”17)라는 메를로-퐁티의 표현처럼, 몸은 사유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앞서 있다. 무표정한 얼굴, 침묵이 특징인 키튼의 영화는 모델개념을 통해 얼굴과 목소리의 비표현성을 강조하는 브레송의 영화관과 유사하다. 바로 그 때문에 표현적인 얼굴보다는 몸의 운동성, 몸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키튼의 영화는 브레송에 앞서 몸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12)Jacques Aumont, Le cinéma et la mise-en-scène, Armand Collin, Paris, 2006, p.20-21.  13)특히 얼굴은 감정과 사유의 표현, 전달, 소통의 장으로 여겨지고 영혼의 내재성, 개체성, 사회성을 의미했다. Jacques Aumont, Du visage au cinéma, Ed., Cahiers du cinéma, Paris, 1992. (『영화속의 얼굴』 김호영역, 서울: 마음산책, 2006.)  14)몸의 변형의 문제는 이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형의 문제가 현상학과 관련될 수 있는지 여부는 해당 작품들을 검토해야 가능한 것인데 몸의 변형이란 주제는 독립된 주제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판타스틱영화의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15)이 영화는 무성영화는 아니지만, 몸의 사물화를 다루는 대표적인 영화들중의 하나이며, 채플린은 후에 언급될 버스터 키튼과 함께 무성영화시대를 대표하는 코메디영화 감독이기 때문에 인용했다.  16)Vincent Amiel, Le corps du cinéma, P.U.F, Paris, 1998, p.23, 29.  17)메를로-퐁티, 위의 책, 221-222쪽.

    3. 몸의 지각성

       1) 봄과 보여짐의 균열 - 존재의 출현

    영화에서의 몸에 대한 사유의 우위는 서양철학의 지배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코기토’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이후의 근대인식론은 인간의 이성을 진리인식의 근원으로 파악하여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의 정초는 경험이 아닌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인식했다. 경험이란 가변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에 진리인식의 원천일 수는 있지만 그를 통해 진리를 정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근대철학의 인식론에 의해 몸은 경험이 최초로 이뤄지는 통로로 감각기관과 동일시되었다.

    메를로-퐁티는 몸의 감각기관들은 인간이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항상 나 밖의 세계에로 지향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감각활동이 아니라, ‘지각’(perception)으로 규정한다. 이 지각은 “지향성”18)을 본질로 하는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은 근대인식론처럼 경험과 사유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후, 경험의 대상들이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란 몸의 행위(본다, 만진다, 듣는다등등)에 의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신체적 의식이며 세계라는 “항상 상황속에 놓여있는 실존적인 양상”19)이다. 브레송 영화의 봄과 보여짐의 균열은 바로 이러한 신체적인 의식을 보여준다.

    우선 영화에서 시선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면, 영화에서 ‘봄’은 본다는 것으로 시선(regard)을 의미하며, 봄은 시선의 주체인 보는 자의 의식을 전제한다. 보여 지는 모든 대상, 타자는 보는 자의 시선의 대상으로만 있게 되는 것으로, 보는 자의 보여 지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지배관계를 나타낸다. 이 관계에 의해 보는 자와 보여 지는 것(인물 혹은 사물)들은 서로 대응한다. 영화에서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일치(match)는 영화 속 현실과 실재와의 유사성을 전제로 성립한 것이 다. 영화란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시선(의식)에 의해 구성된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신의 섭리가 아닌 이성에 의해 파악하려는 인간의 전지적인 시점을 전제했던 회화의 원근법20)과 마찬 가지로, 인물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수습하는 주재 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21)한다. 봄과 보여짐의 대응성은 세계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구성하여 재현된 세계에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히치코크(Alfred Hitchcock)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1959)에서 이러한 인물의 시선에 의해 구축되는 세계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케플란이라는 익명의 사람으로 오인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오인이란 히치코크의 영화속 주인공들의 특징22)이지만, 이 영화의 차별성은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려 지는 순간, 한 인물의 개체성을 입증하는 요소였던 외연적인 요소들, 즉 외모, 직업, 관계 등이 오히려 가상의 인물인 케플란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는 점이다. 단순한 오인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정체성으로 대체된다는 점에서, 인물을 형성하는 요소들이 그 인물의 정체성과 성격을 규정하는 근본요소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주인공인 ‘나’의 체험이지만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이기도 한 주인공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세계 속에 던져진 실존적인 주체가 된다. 이러한 주체의 익명성은 주체의 경험이 특정 인물(주인공)의 경험이기 보다는 익명의 ‘몸’이 겪는 경험임을 나타낸다. 영화속 인물의 주재자적인 위치에 대한 반성은 히치코크의 영화가 고전영화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영화의 가교 역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레송은 이 주재자적인 위치를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를 통해서 제거한다. 브레송영화에서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는 주로 대화 장면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으로 인물들의 공간을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브레송의 이상한 리버스 앵글 쇼트는 그 각도에 따라 비전을 부분적인 비전으로 만들고 공간을 파편화한다.”23) 그러나 <무세뜨>(Mouchette, 1967)에서의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는 인물의 의식이 메를로-퐁티의 ‘상황속에 놓여 있는 실존적인 양상’으로서의 신체적인 의식과도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소매치기>(Pickpocket, 1959)의 주인공은 형사로부터 소매치기범으로 의심 받고 있던 어느 날, 자신의 집을 기웃거리는 낯선 인물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간다. 그는 그 인물을 따라가며,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의도로 자신을 엿보는 가를 질문한다. 카메라는 이 낯선 인물을 보여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는 주인공을 계속 보여준다. 익명의 이 인물은 외 화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문의 인물로 남는다. 이장면 마지막에 카메라가 인물에게로 향하지만 그는 이미 버스를 타러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인물이 가시적인 영역에 들어와 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두 이미지의 연결이 공간적인 연속성에 기초한 몽타쥬가 아니라, 그 일치를 거부하는 불연속성에 기초한 몽타쥬이기 때문이다. 봄과 보여짐의 불일치는 단순한 거짓매치에 머물지 않고 보여 지는 대상에 대한 파악이 어려움을 나타낸다. 이 장면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의 소매치기 행위가 의식과 행위와의 일치를 보여주기 위해 실행된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은 영화 도입부에서 일기에 ‘실천하는 자는 침묵하고 말하는 자는 행하지 않지만, 나는 둘 다 했다.”24)고 쓴다. 그의 범죄는 사유와 행위의 일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그는 그 범죄행위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 때문에 그의 시선은 소매치기의 대상인 값어치 있는 사물들로 제한된다.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는 소매치기행위들은 그의 세계가 사물들로 둘러싸인 세계이며, 그의 손은 세계의 주재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익명의 인물과 만나는 장면은 주인공이 보는 대상이 사물이 아닌 인간이며,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행해지는 행위의 세계인 소매치기의 세계가 아니라, 보는 것에 대해 어떤 확실성도 얻을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임을 의미한다. 사유와 행위의 일치가 인물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마련했다면, 사유와 그 대상과의 불일치는 이 근거에 물음을 제기한다.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의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영화는 <무세뜨>의 도입부 사냥장면이다. 이 장면은 사냥꾼과 밀렵꾼의 시선과 그 대상과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밀렵꾼은 숲에서 덫을 놓아 새를 잡으려하고 사냥꾼은 그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이 시퀀스는 밀렵꾼이 덫을 놓는 과정을 묘사하는 손의 클로즈업과 그를 바라보는 사냥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눈의 반복된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진다. 이 눈은 다시 덫에 걸려 파드득 거리는 새의 클로즈업과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그리고 나서 다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누군가의 발과 새를 놓아주는 손의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다음엔 다른 인물(밀렵꾼)의 눈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보여 진다. 이 쇼트는 시퀀스 내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쇼트로 우리가 보아온 사냥꾼의 시선과 그 대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냥꾼의 시선과 시선의 대상은 꿀레쇼프 효과에 의해 자연스럽게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밀렵꾼의 시선은 그 동안 보여진 대상(덫과 새)이 누구의 시선의 대상이었는지, 사냥꾼의 시선과 밀렵꾼의 시선은 어디서 시작해서 끝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는 보여진 대상들이 보는 자의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여진 대상이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인 인물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과는 달리, 보여진 것은 보는 자의 시선에 의해 규정될 대상이 아니다. 이는 보는 것과 보여진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선의 불일치는 이 시퀀스에서 인물의 공간을 통일적으로 완결시키지 못하고 내러티브의 균열을 파생시킨다. 그런데 보여진 대상이 보는자의 의식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25)은 세계가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가 아니라, 보여진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그 속에 거주할 ‘열려진’ 세계임을 의미한다. 이 세계는 아무리 시선을 통해 대상에 주목한다 해도 매순간 재창조 또는 재구성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 이 반투명한 세계를 메를로-퐁티는 “대상-지평” 이라 부른다. 대상-지평은 “나의 시선에 열린 주거지”26)로 남아있는 세계로, 전적으로 의식에 의해 구성될 수 없는 경험의 세계이고 ‘익명의 지평’ 이며, 항상 ̴미완결의 개방상태”27)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를로-퐁티는 ‘대상-지평’을 말하면서 영화엔 이 ‘대상-지 평’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클로즈업을 들고 있다. “영화의 경우, 촬영장치가 대상을 클로즈업하기 위해 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재떨이나 등장인물의 손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확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크린(écran)이 어떤 지평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28) 메를로-퐁티는 영화의 클로즈업이 ‘대상-지평’을 갖지 않는 이유가 이미 대상에 대한 관점이 한계지어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의 영화에 관한 이 주장이 타당한가를 알기 위해서는 좀 더 긴 분석이 요구된다. 영화의 존재론을 확립하고자 한 바쟁은 스크린(screen, écran)과 프레임(frame, cadre)을 구별하면서 프레임은 공간을 내부로 집중시키는 데 반해, 스크린(écran)은 우리에게 보여 지는 모든 것을 세계 속으로 무한히 확장시킨다고 규정했다. 스크린의 경계선은 프레임이 아니고, 현실의 일부분만 보여주는 은폐(cache)에 그 특징이 있다. 그는 프레임(cadre)은 구심력(centripète)을, 스크린은 원심력(centrifuge)을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29)하며, 스크린을 열려진 지평으로 간주 했다. 바쟁의 관점에서 볼 때, 메를로-퐁티의 클로즈업은 스크린이 아닌 프레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계지어지지만, 이 클로즈업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들이 한계지어진다고 확대해석 할 수는 없다. 스크린은 은폐될 뿐이기 때문에 대상-지평처럼 반 투명적이다. 그러나 바쟁의 이론을 비판하는 파스칼 보니체는 카메라와 프레임이 자유롭게 대상을 쫒을 수는 있지만, 관객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는 비전이란 부분적인 비전으로 “차단된 비전”(vision bloquée)30) 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메를로-퐁티가 클로즈업이 이미 시점에 의해 한계지어져 있기 때문에 영화는 ‘대상-지평’이 없다고 주장한 점이 바쟁에 의해 반박된다고 해도, 보니체의 주장대로 영화가 이미 특정의 관점을 전제로 한 ‘차단된 비전’이기 때문에 영화는 무한하게 열린 지평이라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상학은 영화와 관련하여 항상 지각된 대상과 지각하는 관객과의 문제로만 다뤄져 왔다.

    그러나 본 연구의 초점은 영화의 몸의 이미지가 어떻게 존재인식(브레송의 실재)이라는 추상적인 사유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는가에 있다. 이 물음은 몸을 표현하는 영화적인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메를로-퐁티의 클로즈업이 시점에 의해 한계지어진다는 사실은 클로즈업된 대상은 상징적이든 혹은 서사적이든 표현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브레송의 이미지는 표현성과 의미가 최대한 제거된 것이기 때문에 클로즈업된 대상에 위의 의미를 적용하기가 어렵다. 또한 시선의 불일치는 두 이미지의 관계가 불연속적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브레송의 시선의 불일치는 보여진 대상에 대한 시선의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보여진 세계는 보는 자의 시각적인 장에 들어오지만 그의 관점에 의해 한계 지어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시선의 불일치에 의해 보여진 대상은 보는 자에게 ‘열려진’ 대상-지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열려진 대상 지평은 영화적 세계가 인물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아니라 인물이 ‘체험’하는 세계임을 드러낸다.

    영화학자인 알랭 베르갈라는 롯셀리니 영화인 <이태리로의 여행> (1953)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불일치문제가 ‘체험’의 세계를 드러낸다고 분석한다31). 그는 여주인공의 네 번에 걸친 나폴리 유적지의 방문을 사례로 든다. 그에 따르면, 이 네 번의 방문에는 여주인공의 시선과 대상과의 불일치가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에 직면한 이 여성에게 보여지는 대상들은 그녀의 의지, 의도에 의해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그녀에게 닥쳐오는 현실이다. 이 닥쳐오는 대상들은 보여진 현실로서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놓여있는 여주인공을 끊임없이 흔들어댄다. 시선의 불일치는 관객을 잠시 혼란에 빠뜨리는 거짓매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봄과 보여짐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론적인 균열”32) 이라 할 수 있다. 상황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실존론적인 해석은 보여짐이 주인공의 의도, 의식과는 상관없이 닥쳐오는 것으로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의 출현”33)이다. 어떠한 결말도 해결점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놓인 주인공이 겪는 이러한 ‘체험’이 이전의 영화와 구별되면서 모더니즘영화의 시발점을 알리는 특징이 된다. 이 존재의 출현은 바로 어떠한 한계도 정해 지지 않는 ‘대상-지평’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의 시선과 대상과의 불일치가 나타내는 바는 바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출현’이다. 메를로-퐁티는 클로즈업을 사례로 들면서 영화가 ‘대상-지평’을 갖지 않는다고 했지만, 시선과 시선의 대상과의 불일치는 열려진 ‘대상-지평’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브레송에게 있어 ‘본다’는 영화적 시선은 데카르트적인 코기토가 아니라, 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의식’, 즉, 현상 학적임이 드러난다. 브레송은 이렇게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의 출현’을 시선의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손이라는 신체적 행위로 확대한다.

       2) 거주하는 몸 - 사건과 의식의 발생

    브레송의 영화에서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의 <사형수 탈주하다>(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1956) 부터이다. 그 외에도 대표적인 영화로는 <소매치기>, <무세뜨>, <호숫가의 란슬로>(Lancelot du lac, 1974), <돈>(L’Argent, 1983)를 들 수 있다. 이들 영화에서 브레송은 몸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하나의 인격 혹은 개체라는 통일체로 통합시키지 않고 파편화시켜 그 자체가 독립된 부분들로 기능하게끔 한다. 몸은 전체로 보여지는 설정 화면(개인임을 증명하는)이 생략된 채 각 부분들로 클로즈업되고, 행위의 주체가 생략된 채 신체의 움직임(동작이나 행위)만으로 보여진다. 구체적인 신체의 제스처나 움직임의 연속이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만들어내며 서사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몸은 경험의 주체로 등장한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적 의식’은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이 라고 규정하듯이 브레송영화에서 의식은 신체의 움직임들, 그 행위들 속에서 생겨난다. “발원적으로 ‘나는 -을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을 할 수 있다’.”34) 몸에 의한 의식의 생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이다.

    롯셀리니의 <이태리로의 여행>이 본다라는 몸의 행위에 의해 주인공이 ‘체험’하는 세계를 보여준다면,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몸의 행위를 통해 인물의 체험을 구체화한다. 이 영화의 도입부 장면은 몸이 현재와 과거, 사랑과 역사,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주인공들의 몸의 일부를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에서, 이들의 몸은 떨어지는 부드러운 모래에 뒤덮인다. 이어지는 과거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영상은 앞선 주인공들의 몸 장면과의 교차편집을 통해서 주인공들의 사랑하는 몸과 원폭 피해자들의 기형적인 몸을 교차시키는데 이는 사랑과 역사, 현재와 과거의 교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교차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역사는 주인공들의 몸으로 전이된다. 그 전이가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이다. 첫 번째는 주인공들의 몸이 점차 떨어지는 모래로 뒤덮이는 것으로, 그들의 몸이 화석화되는 것인데 그 화석화는 원폭피해자들의 몸으로 상징된다. 이 화석화되는 몸은 역사적인 사건이 정신적인 고통이라기 보다는 몸으로 겪는 직접적인 체험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역사는 사랑하는 주인공들의 몸으로 전이된다. 두 번째로 전이는 바로 기억에 의해 가능해진다. 화면밖 목소리인 남녀의 대화(여자는 히로시마를 보았다고 말하고 남자 주인공은 이를 부정한다.)는 본다는 것을 앎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여성과 역사적인 사실인식은 이해와는 다른 것임을 주장하는 남성의 인식차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여성 또한 남성처럼 이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와의 고통스런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은 히로시마 원폭사건과 유사한 동시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고통으로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인 사건은 두 주인공에게 개인적인 기억으로 구체화된다. 떨어지는 모래와 함께 남성과 여성의 사랑하는 몸으로 전이되었던 역사적인 사실들은 각자에게 고통스런 기억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나 기억들은 화석화되는 몸과 달리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사랑과 공존한다. 즉, 몸은 사랑과 고통스런 기억의 공존의 장소이자 현재와 과거의 공존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런 기억과 현재의 사랑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장소는 기억과 사랑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정신적인 사실들이 거주하는 세계이며, 이 세계는 영화 전편을 통해 주인공들을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몰고 간다. 레네의 몸은 사랑을 표현하거나 혹은 화석화라는 상징적인 비유의 의미만 지니는 몸이 아니라, 즉, 표현이나 의미만을 담지하는 몸이 아니라, 기억과 사랑이라는 의식을 출현시키는 몸이라 할 수 있다.

    레네가 몸에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행위(사랑)와 사건(역사적인 사실)의 결합을 통해 보여주는 반면, 브레송은 몸의 행위자체만을 통해 보여준다.35) 브레송은 클로즈업으로 신체의 각 부분들 중 손에 초점을 맞춰 손이 세상(사물, 타인등)과 접촉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가를 묘사한다. 브레송은 자신의 모델론을 통해 배우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얼굴의 무표정과 단조로운 목소리의 웅얼거림으로 인물의 심리적인 상태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얼굴과 목소리가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 혹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얼굴과 소리가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체의 모든 기관들 중에서 손이 신체의 각 부분들 중 세상과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손은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움직임에 의해 이미 세상 속에 ‘거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브레송의 영화에서 손은 대개 사물들을 만지고 이 사물들은 일상의 물건들36)이고 때로는 타자가 그 소유주이기 때문에, 손이 사물을 만진다는 것은 그 사물들이 속한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고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손이 ‘타자’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소매 치기>의 저 유명한 리용역 소매치기 장면이다. 주인공의 소매치기행위는 타인의 물건을 훔치고 동료에게 건네고 전달하는 손의 연쇄적인 움직임으로 보여 지면서, 이 행위는 현재 리용역이라는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범죄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몸의 공간성을 메를로-퐁티는 “상황의 공간성”37)이라 부른다. 브레송은 신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상황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상황성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성과 현재성은 손이 세계에 거주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형수 탈주하다> 역시 주인공이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탈출도구들을 만드는 과정을 손의 연속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소매치기>와 <사형수 탈출하다>는 소매치기 혹은 감옥탈출이라는 인물의 목적 혹은 의도에 의해 시작된 행위라는 공통점이 있다. 손의 행위가 이미 그 의도에 의해 행위의 대상을 정한다는 점에서 몸은 경험의 주체이긴 하지만 코기토를 대체하는 또 다른 코기토가 됨을 알 수 있다. 봄과 보여짐의 불일치에서 출현했던 존재는 이 손의 행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선과 달리 손의 행위에선 ‘대상-지평’이 명확하게 한계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인 <돈>에서 손의 행위는 앞서의 두 영화와 달리, 자기의식이 수반되지 않은 습관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이 습관적인 행위에서 한계지어진 대상-지평이 확대된다. 이 영화는 부르주아층 집안의 청소년이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위조지폐를 상점 주인에게 유통시키고 상점주인은 손님들에게서 받은 많은 위조지폐를 주인공에게 유통시킴으로써 주인공의 인생이 갑작스럽게 파멸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손의 활동이 나타난다 :. 현금을 인출하는 손, 물건을 구입하고 지불하는 손,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손, 현금이 든 봉투를 꺼내는 손 등등. 모든 손의 행위들은 일상에서의 돈의 유통과 관련된다. 이러한 손의 행위는 목적이나 의도가 포함된 행위들로 경험의 주체이지만 대상이 될 수 없는 손으로 앞서의 영화들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손의 행위는 일상의 노동하는 손에서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 범죄의 손으로,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는 살인자의 손으로 변해가면서 앞서의 영화들과는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우리가 분석할 장면은 주인공의 등장 장면인데, 주인공은 대부분의 영화에서처럼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야 등장하는데, 그의 등장은 얼굴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손의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의 일하는 손은 <사형수 탈주하다>, <소매치기>처럼 주인공의 상황을 전체로 보여주지 않고도 이미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세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상점외벽에 설치된 관에 기름을 주유하는 손은 주유를 끝내고 장갑을 벗은 후 영수증에 싸인을 하고 손으로 문을 열고 상점에 들어가서 영수증을 점원에게 내민다. 암실에 있는 주인이 나와서 주인공에게 위조 화폐를 지불한 후에야 카메라는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트럭을 몰고 떠난 후 레스토랑 앞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식사를 끝낸 주인공은 위조지폐로 식사 값을 지불하려다 위조범으로 몰려 경찰에 체포된다. 이 시퀀스는 일상의 세계에 위조지폐의 유통이라는 범죄사건이 우연하게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손은 일하는 노동의 손이며 노동은 그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이 시퀀스는 상점 주인이 위조지폐를 유통시키겠다고 말한 다음 시작되는데, ‘유통 시킬 거야’라는 대사는 기름을 주유하는 손과 몽타쥬 되면서, 언어가 이미지와 결합한다. 이 결합은 기름이 액체라는 성질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유통’이라는 대사와 ‘흐른다’는 의미가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위조지폐의 유통이라는 범죄(사건)와 기름을 주유하는 노동(일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 양자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손이다. 손이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지불받는 것은 일상의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손이 지폐(위조지폐)를 받는 것은 일상에 속한다. 따라서 손은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범죄와 일상이라는 별개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름은 흐른다는 의미 외에 흐르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주인공의 손은 습관적으로 영수증을 제시하고 지불받은 것이지만, 이 반복적인 습관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갑작스럽게 개입한다. 이는 위조지폐를 받은 후에야 주인공의 얼굴이 보여지는 데서 알 수 있다. 즉, 얼굴이 한 개인의 신원확인 혹은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때, 위조지폐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유통 되듯, 얼굴 없는 익명인인 주인공의 손으로 전달된다. 기름은 손이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 가운데 사라져갈 주인공의 인생(살인자로의 변화)을 의미한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손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위조지폐를 받은 후, 다시 상점의 문을 열고 나가서, 트럭의 문을 열고 차에 타서 문을 닫고 떠난 후, 정차하여 다시 트럭의 문을 열고 내려,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레스토랑에서 주인공은 식사비로 위조지폐를 지불하려다 경찰에 체포된다. 손은 트럭의 문을 열고 닫고, 레스토랑의 문을 열면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한다. 손의 움직임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신체적인 이동이 발이 아니라, 손에 의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공간적인 이동은 손이 방해받지 않고 위조지폐를 유통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손의 행위는 앞서 언급 했던 상황성과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사건이 일어나는 발생과정을 나타낸다.

    이상의 시퀀스에서 보듯이 손의 행위는 노동과 공간상의 이동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그 손의 움직임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고, <소매치기>나 <사형수 탈주하다>처럼 주인공의 의도가 담겨있지도 않다. 손의 행위는 ‘습관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손의 움직임은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발생시킨다. 첫 번째는 사건의 일어남이다. 손이 행하는 행위들은 위조지폐가 은연중에 아무도 모르게 다른 장소로 흘러들어가서 유통되는 경로와 과정을 보여준다. 인물의 의도가 아니라 신체의 행위가 사건을 일으킨다. 둘째는 의미의 일어남이다. 구체적이고 습관적인 손의 행위는 사건을 발생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유통’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이 의미는 우선 ‘유통’이란 대사와 ‘흐르는’ 기름이 언어와 이미지로 결합됨에 의해서이고, 다음은 손에서 손으로 건네받은 지불 행위(위조지폐)에 의해서이고, 마지막으로 손으로 문을 열고 닫으면서 공간상의 이동을 통해 다른 장소로의 유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주인공의 손은 표현적인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름, 배관이라는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유통’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생성한다고 할 수 있다. 몸의 행위들 속에서 추상적인 사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나의 신체는 자기의 세계를 ‘표상’을 거쳐야 할 필요도 없이, ‘상징적 기능’이나 ‘객관화 하는 기능’에 종속할 필요 없이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다”38) 고 한다. 즉, 몸의 동작이 상징적 의미 혹은 표현적인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동작에 의해 차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돈>의 습관적인 손은 앞서의 두 영화와 달리 지각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지각되는 대상이 된다. 즉, 주인공의 손은 일상의 노동하는 손이라 그의 행위는 자동적이고 습관적이다. 그러나 상점주인의 손은 위조지폐를 건네는 나쁜 의도가 반영된 손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손은 주체이지만 상점주인 앞에서는 대상으로서의 손이 된다. 메를로-퐁티는 ‘만져지고 만지는’ 손의 이중적인 기능39) 으로 몸이 지각하는 주체이면서 지각되는 대상이 됨을 설명한다. 브레송의 몸(손)은 <사형수 탈주하다>와 <소매치기>에서 지각하는 주체로만 그려졌고 <돈>의 많은 손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몸의 이중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몸의 이중성은 주인공의 손의 행위가 <소매치기>, <사형수 탈주하다>처럼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운명이 일상의 순간에 우연히 개입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주인공의 손이 상점 주인에 의해 타자화 되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위조지폐)이 개입하여 주인공의 운명을 바꾼다(딸의 죽음, 이혼, 살인). 손의 이중성이 이렇게 실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작용함으로서 대상-지평은 확대된다. 메를로-퐁티는 습관이란 인식도 기계적인 동작도 아니고 ‘손안에 있는 앎(savoir)’이며, “우리가 겨냥하는 것과 주어지는 것 사이에서, 의도와 실행사이에서 조화를 경험하는 것”40) 즉, ‘이해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습관적인 손은 바로 우연적으로 예상치 못한 실재를 만나게 되는 것을 이해시켜주는 신체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적인 신체의 지향성의 본래적인 의미는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인 <돈>에 와서야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손의 습관적인 행위가 사유와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은 바로 브레송만의 독특한 신체에 관한 현상학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3) 반응하는 몸 - 자아의 내면성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나의 신체는 “상자속의 대상처럼 그 상황 속에 실재로 갇혀있는”41)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운동’이며 열려진 대상-지평에로 향한다. 브레송의 몸의 세계를 향한 운동은 앞서의 영화들처럼 특정한 신체의 부위, 즉 손을 클로즈업하여 그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무세뜨>에서처럼 파편화된 몸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발생과 종결을 대비시켜 세계를 향한 몸의 운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인물의 행위의 일상성42)과 일회성을 대비시켜, 전자는 과정이 생략된 채 처음과 끝만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후자는 행위의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대비시킨다.

    <무세뜨>에서 어느 일요일의 풍경이 다음과 같이 하나의 시퀀스로 보여진다. 무세뜨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커피를 따르는 행위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와 오빠의 카페장면으로 이어진다. 이어 성당 앞에서 빗물이 고인 흙탕물로 발장난을 하는 그녀의 행동으로,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는 아버지와 성당의 성수에 처박히는 그녀의 모습이 이어진다. 설거지가 끝나 손을 닦는 그녀의 손에 돈을 쥐어주는 카페주인으로 끝나는 이 시퀀스에서, 브레송은 무세뜨의 일상의 행위를 그 과정이 아닌, 행위의 끝만을 보여준다. 즉,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를 통해 사건의 발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행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행위의 ‘있었음’은 앞으로 일어날 행위의 ‘과정’과 대비되면서 그녀의 일상이 갖는 의미를 드러낸다. 즉, 반복되는 무세뜨의 일상은 노동의 가치에 대한 보상이 없는 무가치한 그녀의 일들을 의미한다. 손43)(커피를 따르는)에서 손(커피를 마시는)으로, 발(장난치는 무세뜨의)에서 얼굴(야단맞는 무세뜨)로, 다시 손(카 페에서 일하는)으로 이어지면서, 무세뜨의 몸이 끊임없이 일하고 학대받는 몸임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장난치는 것조차 부정당하는 몸임을 나타낸다. 그녀의 몸은, 병든 어머니의 수발과 갓난아기인 동생의 보살핌, 알코올에 찌든 아버지와 실직자인 오빠를 부양해야 하는 버거운 삶의 무게가 내려앉은 몸이기도 하다. 무세뜨는 학교에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동네에서는 아는 남자에게 끊임없이 고초를 겪고 학대를 당한다. 이러한 그녀의 몸은 학대당하는 수동적인 몸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은 이러한 행위의 ‘있었음’과 구별되는 다음의 두 장면에서는 행위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이 장면들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의 능동적인 행위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학대당하는 무세뜨의 몸이 해방을 느낀 순간은 우선, 놀이터에서 자동차놀이기구를 탈 때이다. 무세뜨는 한 청년의 자동차에 우연히,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부딪히면서 그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다. 그녀의 몸은 자동차들끼리의 과격한 부딪힘 때문에 휘청거리지만, 기꺼이 몸의 과격한 움직임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이 시퀀스는 앞서 언급된 행위의 ‘있었음’(결과)만을 보여준 시퀀스와 달리,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을 길게 묘사한다. 이 놀이과정은 그녀가 고단한 삶으로 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이기구를 타며 느낀 그녀의 해방감은 그녀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는 순간 다시 학대받는 몸으로 돌아온다. 이 몸은 다시 동네 남자에게 겁탈당하는 몸으로, 영화마지막에는 연못에 빠지는 몸으로 이어 진다. 이 연못에 빠지는 장면 역시 앞서 놀이기구장면처럼 길게 묘사된다. 무세뜨는 새 옷 입은 모습을 보려 언덕아래 연못가로 다가가다 미끄러져 물에 빠질 뻔 한 후,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자발적으로 언덕 아래로 몸 구르기를 반복한다. 몸은 가까스로 연못가에서 멈추지만, 다시 놀이가 시작되고 가속도가 붙은 몸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채 연못 속으로 빠진다. 버거운 삶속에서 학대와 수난을 받던 수동적인 몸은 자발적인 몸 굴림을 통해 일시적인 재미와 놀이 속에 빠지지만 곧 죽음으로 치닫는다.

    뮤세뜨의 놀이공원과 연못가에서의 행위들은 타인과 세상에 대해 감정을 발산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며,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몸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뮤세뜨는 대사 혹은 얼굴표정으로 그녀의 심리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늘 일하고 학대받는 그녀가 놀리는 친구들을 향해 돌맹이를 던져 보복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행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바로 이 몸의 행위가 그녀가 타자에 대해, 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반응’하는 몸은 학대에 대한 반항이,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 담겨있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놀이공원과 연못이란 공간은 그를 괴롭히는 인물들이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무세뜨는 몸을 자동차에 부딪히고 몸을 땅위에다 굴리면서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발산한다. 이 공간은 사적인 유희공간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세상에다 표현하고 나의 있음을 알리는 발산적인 공간이며, 몸은 자아의 바램, 곧 욕망이라는 그 내면성이 드러나는 실존론적인 장소가 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공간에 대한 지각을, “특수한 종류의 ‘의식상태’또는 ‘작용’이 아니다. 그 양상들은 언제나 주체의 모든 삶을 표현하고 주체가 자신의 신체와 세계를 통하여 미래를 향할 때 같이하는 에너지를 표현 한다”44)고 말한다.

    브레송의 신체들이 행위를 통하여 존재의 출현이나 사건의 발생을 다루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 몸은 행위(수동성, 대상성)와 운동(능동성, 주체성)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러나 몸의 운동성 즉, 세계에 대한 ‘반응’은 놀이터에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면서 부정당하고, 몸 굴리기는 스스로 행위의 즐거움을 부정하는 것으로 몰고 간다. 연못가에서의 몸의 운동은 몸 굴리기를 통해 삶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유희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성이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소매치기>, <사형수 탈주하다>, <돈>에서 몸의 행위는 항상 그 활동성에 의해 존재의 출현, 사건이나 사유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세뜨>의 몸은 경험의 대상과 주체라는 양면성을 갖지만, 몸의 능동적인 행위는 더 이상 그 활동성이 일어날 수 없는 죽음을 야기하면서, 대상성으로 전락한다.

    <무세뜨>에서 몸은 봄이나 혹은 손의 행위라는 신체의 파편화가 아닌 몸의 운동성을 통해서 세계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서의 영화들과는 차별화된다. 그러나 몸의 지각성이 대상성과 주체성으로 대비될 뿐 그 양자의 가역성을 통해 대상-지평의 확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송의 몸에 관한 시각은 신체의 지향성이라는 의미에만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앞의 책, 220쪽.  19)앞의 책, 329쪽.  20)서양회화에서 15세기 알베르티가 원근법을 체계화하면서 ‘세계를 향한 창’으로 규정했는데, 이와 유사하게 영화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은 영화의 프레임을 ‘세계를 향한 창’으로 규정한다.  21)그러나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를 모색했던 영화감독들 중에서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탈프레임을 통해 이러한 고전적인 프레임을 거부한다.  22)“히치코크의 내러티브는 익숙하고 관습화된 상황이 될수록 낯설고 방해받는 상황으로 변화한다.” Pascal Bonitzer, Le champ aveugle, Ed., Cahiers du cinéma, Paris, 1982, p.61.  23)Ibid., p.100.  24)주인공은 소매치기행위를 통해 언행일치를 보여주는데, 이 행위는 자신의 도덕적인 우월성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소매치기 장소로 항상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경마장, 은행, 지하철을 택한다. 이 장소는 은폐된 장소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지켜보는 공개적인 장소이며, 여기서 주인공은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런 행동을 행한다.  25)“반성철학의 오류는 성찰하는 주관이 성찰하는 대상을 자신의 사고에 흡수하거나 남김 없이 파악할 수 없고,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메를로-퐁티, 위의 책, 119쪽  26)앞의 책, 125쪽.  27)앞의 책, 127쪽.  28)앞의 책, 124쪽.  29)André Bazin, Qu'est-ce que le cinéma?, Vol. II : Le cinéma et les autres arts, Cerf, Paris, 1959, p.100.  30)Bonitzer, op.cit, p.128.  31)Alain Bergala, Voyage en Italie de Roberto Rossellini, Yellow now, Paris, 1990.  32)Ibid., p.55.  33)“(…) 현상학이 현상학이라는, 말하자면 미리 주어진 가능성을 의식에 전제하는 대신 의식에 대한 존재의 출현을 연구하는데 대한 이유이다.”  34)메를로-퐁티, 위의 책, 220쪽.  35)롯셀리니와 레네, 브레송은 새로운 표현방식의 영화가 출현하던 때 -모더니즘영화로 불려지는-의 동시대인이지만 동일한 영화 사조, 예를 들면 누벨바그나 네오 리얼리즘과 같은 공통된 특징을 가진 영화의 흐름에 속해 있지는 않다. 이 논문에서 롯셀리니와 레네를 인용한 이유는, 우선 롯셀리니는 본다라는 시선을 실존론적인 체험의 문제로 해석 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레네는 몸을 기억의 문제와 연관시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동시대인인 브레송역시 몸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한다는 점에서 비교사례로 언급될 수 있다.  36)브레송 영화에서 사물들은 주로 인물의 일상이나 주변 환경과 관련된 대상들이다. 서정아, 「영화에서 사물의 미학」, 『영상문화』, 16, 2010년 겨울호 참조.  37)메를로-퐁티, 위의 책, 168쪽.  38)앞의 책, 225쪽.  39)앞의 책, 158쪽. 손의 이중적인 기능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살의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가역성으로 나타나지만, 『지각의 현상학』에서 손의 이중적인 기능은 몸이 지각의 대상이자 주체임을 밝히기 위한 설명이다.  40)앞의 책, 229-230쪽.  41)앞의 책, 539쪽.  42)일상성개념의 주요한 의미중의 하나는 반복성이다.  43)일련의 신체의 행위는 클로즈업되지만 클로즈업된 신체들의 파편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장면의 시작만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44)메를로-퐁티, 위의 책, 428쪽.

    4. 결론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은 영화에서 몸이 인물의 정체성 혹은 통일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사유나 감정의 표현의 도구로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 지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편화되고 자기운동적인 몸은 봄과 보여진 것과의 불일치를 통해 존재의 출현을 나타낸다. <소매치기>, <사형수탈주하다>에서는 손의 행위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경험의 주체로서 작용하지만 인물의 의도가 내재된 손이라는 점에서 몸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의식의 코기토를 대체하는 주체로서만 작용한다. 메를로-퐁티의 몸의 의미(지각의 대상이자 주체인)는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인 <돈>에서야 나타난다. 습관적인 손의 행위는 사건과 의식을 발생시키며, 주체이면서 대상화된다. 바로 손의 이 이중적인 기능에서 예측할 수 없는 실재가 개입하게 됨으로써 신체(손)는 대상-지평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실재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무세뜨>는 몸의 운동성을 통해 몸의 대상성과 주체성이란 양면성에 대해 숙고하면서 신체가 내면적인 의식의 발현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은 메를로-퐁티의 몸의 현상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브레송의 몸이 의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의 주체로 등장하지만 지각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지각되는 대상일 수 있는 몸의 이중성이 마지막 영화에서 잠시 다뤄졌다는 점에서, 메를로-퐁티의 후기사상에서 논의되는 ‘살’의 존재론으로까지 확대해석할 수는 없다.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사고는 살의 존재론이 아닌 신체의 지향성이란 관점만을 보여준다. 이는 브레송 영화의 한계일 수도 있다. 살의 존재론이 적용될 수 있는 몸의 이미지들이 있는가의 여부는 더 많은 영화에서 몸을 분석함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의 목적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브레송의 영화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브레송의 새로운 사유가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설명가능한가를 고찰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몸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영화와 철학이라는 상이한 분야에서 어떻게 다루는 가라는 그 상관성에 대한 연구에 의의를 둔다.

    이상의 몸에 관한 현상학적인 해석은 영화에서 몸에 관한 새로운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영화이미지연구와도 관련성을 갖는다. 1980년 예술사가인 장-루이 쉐퍼는 『영화의 일상적인 인간』45)에서 영화를 ‘낯선 것에 대한 체험’으로 정의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낯선 경험, 즉, ‘낯선 것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이다. 영화란 이 ‘세계의 타자성(altérité)이 가시화되어 관객이 체험하는 것’이 된다. 쉐퍼에 따르면 영화는 더 이상 과학적인 담론구성체(1960-1970년대 프랑스의 영화기호학과 정신분석학)가 아니라, 이 체험을 가시화하는 현상이다. 그는 들뢰즈가 ‘이미지는 사유한다(L’image pense)’로 정의하기 이전에, 이미 이미지의 본질을 이미지와 실재의 유사성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감응(affect)46)으로 설명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는 과학적인 담론들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영화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화이미지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뤽 방쉐리는 『영화와 회화』47)에서 1966년작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Blow up, 1966)가 이미지의 가시성을 문제 삼고 있다고 분석한다. 주인공인 사진 작가가 우연히 공원에서 찍은 커플 사진에서 이상한 면을 발견하여 사진을 확대 한 후 공원 수풀 속에 누워있는 시체를 발견한다. 그러나 시체가 사라진 후, 다시 확대사진을 볼수록 그에게 보이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닌 검은 점들로 뒤덮인 일종의 추상화이다. 방쉐리에 따르면, 영화 속 현실은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물질성으로 변화하고, 물질적인 표면은 살인사건의 증거물이라는 현실을 재현하는 기능을 상실한다. 이미지가 더 이상 실재를 재현할 수 없을 때, 이미지는 실재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미지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의 ‘나타남’으로만 기능한다. 방쉐리는 안토니오니의 <확대>를 통해 이미지의 본질은 실재의 재현이 아닌 알수 없는 것의 가시화에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이미지가 모더니즘 영화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쉐퍼의 ‘가시화’와 방쉐리의 ‘나타남’은 영화 이미지가 재현성에서 정의할 수는 없는 무엇(혹은 실재)의 나타남으로 변하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의미작용은 실재와의 유사성이나 과학적인 담론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48)를통해 스스로 운동하는 과정속에서 산출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운동과정은 브레송 영화에서 몸의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속에서 존재의 출현, 사건 혹은 의식의 발생, 자아의 내면성이라는 의미들을 스스로 산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고찰된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몸의 이미지들이 시네마토그라프 즉, 표현성이 제거된 이미지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산출하는 영화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브레송의 이미지에 관한 새로운 사고가 80년대 이미지에 관한 새로운 사고에 많은 영향49)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브레송의 몸의 이미지는 메를로-퐁티가 세잔느의 회화를 분석하면서 “가시성의 수수께끼”50)라 불렀던 것처럼 타자, 세계의 드러남의 과정을 다루는 이미지론임을알 수 있다. 따라서 브레송의 몸의 이미지에 관한 현상학적인 분석51)은 쉐퍼가 정의한 영화 이미지의 가시성 문제를 일깨우며, 타자와 세계가 드러나는 과정을 다루는 발생론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브레송의 몸에 관한 새로운 시각은 영화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반성임을 의미한다.

    45)Jean-Louis Schefer, L’homme ordinaire du cinéma, Gallimard/Cac,Paris, 1980.  46)들뢰즈의 감응이 아니라, 정서적인 충격, 즉, 낯섦이라는 체험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사용.  47)Luc Vancheri, Cinéma et peinture, Armand Colin, Paris, 2007.  48)고다르는 1980년대 이후의 영화들에서 이미지에 관한 반성을 통해 이미지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며 “하나의 이미지를 보게끔 한다는 것은 그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Jacques Aumont, Les théories des cinéaste, op.cit. p. 47. 그의 이러한 사고는 영화<열정>(Passion, 1981)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 열정의 시나리오>(Le scénario du film passion, 1982-83)에서 설명된다. 현대 프랑스 영화 이미지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 디디-위베르망은 이미지의 세계는 “논리적인 양상으로 투사되지 않는다.(…) 이미지의 세계는 그 부정성의 힘이 나타나는 곳에서 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작동한다”고 이미지의 자기 운동성을 설명한다. Geoges Didi-Huberman, Devant l'image : question posée aux fins d'une histoire de l'art, Minuit, Paris, 1990, p. 175.  49)그 때문에 브레송의 영화는 누벨바그의 일원이 아니면서도 프랑스의 영화감독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평론가인 정성일은 「브레송, 혹은 불가능한 계보학」 논문에서 브레송영화에 영향을 받은 유럽과 동양의 감독들을 열거하면서 그 특징을 설명한다. 시네마테크 부산 엮음, 『로베르 브레송』, 부산:동방문화, 2003. 91-110.  50)Maurice Merleau-Ponty, L'oeil et l'esprit, Gallimard, Paris, 1964, p.26. , Sens et non sens, Nagel, Gallimard, Paris, 1966, p.20, p.23. 메를로-퐁티는 이 저서에서 후기 살의 존재론에서 발전시킨 ‘살’ 개념을 세잔느의 회화에서 ‘색’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세잔느 회화의 색을 ‘원초적인 세계’의 나타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존재의 파열’을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비록 브레송의 영화와 메를로-퐁티의 후기사상과의 연관성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브레송의 몸의 행위들이 세계를 산출하는 과정은 세계의 나타남과 비유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51)1960년대 프랑스의 카톨릭 비평은 현상학의 ‘현상’을 비가시적인 실재의 가시화 즉, 초월적인 신의 나타남으로 해석하여 그 나타남을 의미하는 ‘현재성’(présence)개념을 중심으로 주로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루는 영화를 비평의 대상으로 했다. 대표적인 학자들이 앙리 아젤(Henri Agel), 아메데 에프르(Amédée Ayfre)이며, 브레송의 영화도 1970년 이전까지는 이 관점에서 다뤄졌다. 그러나 브레송의 실재를 초월적인 신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논리적인 오류들로 인해 197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 영화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폴 슈레이더와 수잔 손탁을 통해서 오히려 이러한 해석이 확산되는 경향을 가져왔다.

  • 1. 브레송 로베르 2002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단상』, 오일환, 김경온역 google
  • 2. 2002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google
  • 3. 2003 『로베르 브레송』 google
  • 4. Vincent Amiel 1998 Le corps au cinema google
  • 5. Philippe Arnaud 1986 Robert Bresson, Ed. google
  • 6. Alain Bergala 1990 Voyage en Italie de Roberto Rossellini google
  • 7. Andre Bazin 1959 Qu'est-ce que le cinema?, Vol. II : Le cinema et les autres arts google
  • 8. Pascal Bonitzer 1982 Le champ aveugle, Ed. google
  • 9. Georges Didi-Huberman 1990 Devant l’image : question posee aux fins d'une histoire de l'art google
  • 10. Jacques Aumont 2002 Les theories des cineastes google
  • 11. Jacques Aumont 2006 Le cinema et la mise-en-scene google
  • 12. Jacques Aumont 1992 Du visage au cinema, Ed. google
  • 13. Jean-Louis Schefer 1980 L’homme ordinaire du cinema google
  • 14. Luc Vancheri 2007 Cinema et peinture google
  • 15. Maurice Merleau-Ponty 1945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google
  • 16. Maurice Merleau-Ponty 1964 Le visible et l'invisible google
  • 17. Maurice Merleau-Ponty 1966 Sens et non-sens google
  • 18. Maurice Merleau-Ponty 1964 L'oeil et l'esprit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