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적 현대성의 젠더화된 구조와 가내성(家內性)의 정치적 부상

Gendered Structure of Korean Political Modernity and the Rise of Domesticity in Korean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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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글은 ʻ제3정치성ʼ, ʻ시민정치ʼ 등으로 개념화되어온 2000년대 초 이후의 한국사회의 새로운 정치참여, 집합행위의 양상,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 ʻ개인ʼ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적 현대성의 구조화의 일면을 젠더화의 과정으로서 개념사적으로 재구성한다.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에 고유한 것은 서구적 공론장 모델에 내재한 남성지배, 성별분업의 다소 보편적인 상황이 한국사회에 고유한 사회문화적 상황과 결합하여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것의 구분,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조차도 젠더화된 상상과 문화모델로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시민사회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 욕망, 이익의 장소, 즉 ʻ가내성ʼ의 장소로 정위되어 ʻ여성성ʼ이 할당되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것, 이념과 가치의 세계로서의 ʻ남성화된ʼ 국가와 대립된다. 이러한 사회적 편제에 의해 지배적이 되는 초월적 공공성의 정치의 이상과 ʻ초연적 남성성ʼ의 정치주체성의 모델은 한국의 정치사회를 ʻ가치의 정치ʼ와 ʻ욕망의 정치ʼ로 이중적으로 구조화하였고, 공식 정치사회의 엘리트적 과두화와 자율화를 낳았다. 이러한 체제의 균열은, 시민사회의 탈가내화와 남성 중심의 형제애에 기반한 질서를 지향했던 사회운동 중심의 저항적 공중이 아닌, 여성성으로 간주되었던 사생활과 가내성을 수용하고 그 가내성 자체를 정치화하려는 대중적 움직임에 의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ʻ기러기 아빠ʼ와 ʻ유모차 부대ʼ로 상징적으로 집약될 수 있는 이 새로운 정치주체성은 가내화된 사적 공간이 그 동기적 원천일 뿐 아니라, 내거는 목표와 참여의 양상, 그 주체에 있어서도 가내화된, ʻ정치화된 가내성ʼ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 탐욕스럽고 반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정치적, 공적 공간에서 추방되었던 가내성은 자신을 공적인 것, 정치적인 것으로 승화, 전화시키면서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정치참여의 모델을 균열시켰다. 이러한 사사화된 정치주체성의 등장은 저항적 공중으로 시민사회를 환원해온 사회과학의 기존 문제틀을 수정하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의해 구축되는 ʻ사회적인 것ʼ의 다양한 공간과 그에 수반되는 공론장의 현대적 형태를 분석적으로뿐 아니라 규범적으로도 적절히 수용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In this study, I attempt a conceptual historical reconstruction of one facet of Korean modernity in order to achieve a better understanding of features of political participation, collective action, and nature of ‘persons’ or ‘individuals’ rising therefrom, which have been conspicuous in South Korean political development toward so-called ‘the third political,’ or ‘citizen politics’ since the early 2000s. What is argued here to be unique in Korean political modernity is that the more or less universal process of genderization and social division of labor between two sexes, with its combination with socio-cultural situations specific to Korean society, led to the structuration of the division of the public and the private, of the political and nonpolitical, and eve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e and civil society into gendered imaginaries and cultural models. As a consequence, civil society assumes ‘femininty’ as a locus of the private, the personal, desire, interests, i.e. that of ‘domesticity,’ and categorically stands against the ‘masculinized’ state as a locus of the public, the political, and of the worlds of ideologies and values. ‘Transcendental publicness,’ as an ideal for politics, and ‘masculinity of aloofness,’ as a model of political subjectivity, became dominant in official political society of Korea by virtue of gendered social formations mentioned above, and resulted in dualistic structuration of political society between ‘politics of value’ and ‘politics of want,’ and in the elitist oligarchization and autonomization of political society. The decisive rupture of this social formation came from mass upheaval based on politicization and self-acceptance of domesticity and private life, which had been regarded as femininity, rather than from protest publics of social movements oriented toward the de-domestication of civil society and toward an order based on male-centered fraternity. This new aspect of political subjectivity, which can be symbolically epitomized into the images of ‘wild goose dad’ and ‘squad of baby stroller,’ can be conceptualized as ‘politicized domesticity’ in that not only its motivational sources were domestic private spaces, but also it was domestic in nature in its goals, exhibited participatory features, and even socio-demographic properties of participants. This transformation or sublimation of domesticity, from being greedy, anti-social, resulting in its excommunication from the political, public spaces, to the public and political being, has disrupted every problematic element of the conventional ‘republican’ model of civic engagement in Korea. This advent of privatized political subjectivity calls attention to theoretical needs 1) to modify the conventional theoretical framework in which civil society is reduced into protest publics, and 2) to accommodate, both analytically and normatively, diverse spaces for ‘the social,’ newly rising from the private and the personal as well as the contemporary forms of public sphere accompanied by those spaces.

  • KEYWORD

    한국 정치적 현대성 , 가내성 , 젠더화 , 시민정치 , 시민사회

  • Ⅰ. 서 론

       1. 새로운 시민정치와 한국 정치적 현대성의 이해에 내재한 문제들

    낙천낙선운동(2000)에서 시작하여 노사모(2000-2002),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다른 이슈를 중심으로 일어난 촛불시위들(2002, 2004, 2008, 2013)로 이어지는 21세기 한국정치의 주요한 사건들은, 소셜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일반시민의 새로운 대중적 참여양상을 선보이면서 사회과학 아카데미 뿐 아니라 저널리즘, 정치, 사회비평 영역의 지속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이제 이러한 대중적 참여의 양상은 급기야는 21세기 ‘뉴미디어(New Media)의 시대’에, ‘관변’ 댓글과 악플로 오염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우회하는 직설적 언로(言路)로서 선택된 대자보라는 형식을 취한 최근의 ‘안녕들하십니까’의 행렬(2013)로 이어졌다.1)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시민정치, 새로운 정치주체성을 특징짓는 담론적 키워드는 ‘개인’과 ‘네트워크’로, 이를 개별화(individualization)로 파악하건 혹은 개인화(개성화, 인격화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personalization)로 이해하건 그 근저에는 전통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있는 ‘조직’과 는 다른 동원과 참여의 채널, 주체의 발견이 존재한다. 이는 이전의 반체제 세력들과 공식정치사회의 일부 블록에 의해 주도된 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 전통적 사회운동과는 다른 어떤 것의 출현, 최소한 그러한 것들에 일의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적 측면을 “제3정치성”(조희연, 2012)의 출현으로 명명하던 혹은 “시민정치”(이남주, 2012)나 “생활정치”(Giddens, 1991)의 한국적 등장으로 명명하던 그것이 새로운 실체라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진지한 사회과학적 해명이 요구된다는 점에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듯 그간 학계와 넓은 의미의 공론장에는 이미 상당히 풍성한 경험적, 이론적 성과들이 축적되었는데, 한편에서는 새로운 참여양상에서 보이는 군집양상, 행동논리(behavioral logic)를 이론화하는 방향으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참여양상에서 두드러지는 주체의 이전과는 다른 행위지향(action orientation)적 내포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논의들에서 일반적으로 상수(常數)로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이하 ICTs로 약칭), 소셜미디어, 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활용이다.3) 이들이 제공하는 다면적인 경험적 통찰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들은, 새로운 참여양상과 주체성의 사회(변동)적 의미를 요약하려는 순간 다소 단순화된 무매개적인 설명, 그리고 근대사회의 변동과 현대화(modernization) 과정에 대한 매우 단선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ICTs가 정치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정식화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기술결정론적이고 도구주의적인(instrumentalism) 단순화에 입각한 성급한 ‘새시대’ 담론을 양산했듯, 위의 논의에서는 전통적 좌파의 조직적 관행에서 벗어난 것으로서의 새로운 사회운동, 새로운 시민정치에 대한 기술(description)과 수사(修辭)가 더 지배적인 반면, 그것의 사회적 토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설명이 불충분한 경향을 보인다. 이 때 새로운 참여와 정치주체성의 양상을 선보이는 ‘새로운 개인’들은 생애주기의 교체(신세대의 등장) 혹은 보편적 사회변동의 진전(후기산업사회, 정보화사회, 네트워크사회 혹은 신자유주의)과 더불어 갑자기 출현한, 이전의 사회적, 역사적 경과와는 동떨어 진,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어떤 것의 출현으로, 일종의 ‘단절성(disrupture)의 담 론’ 속에서 파악된다.4)

    일례로, 새롭게 변화된 한국사회의 정치적 구도를 횡단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 속에서 조희연(2012: 20-21, 78-81)은, 새로운 정치주체성을 “제3정치성”으로 개념화하고, 서구의 탈근대적, 탈물질주의적(post-materialist) 운동, 즉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이나 환경운동, 소비자운동(political consumerism)과 그것이 공유하는 이념적 유사성, 그리고 그것이 지닌 모바일 동력을 그 정의의 중심에 놓고 있다.5) 제1, 제2, 제3 정치성의 구분은 많은 논자들에게서 전제되고 있는 근대사회의 세 가지 정치·사회적 과제의 구분, 즉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탈근대적(post-modern) 과제의 구분(김동춘, 2012)과 상응하는데, 이러한 유형론(typology)에는 서구의 진화적 과정을 단순화시키고 이를 전형적이고 전 지구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사회학주의적 일반화, 그리고 그로부터 사회변동의 행위자와 주체성을 무매개적으로 연역해내는, 민주주의와 대중정치에 관한 사회학주의적 결정론(sociological determinism)의 문제가 존재한다.6)

    이러한 문제적 측면은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내포를 이론화하려는 다른 시도들, 이를테면 “기성 사회집단들에 의해 인습적으로 당연시되었던 가치지향들을 ‘방법론적 일관성’으로 검증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는 “탈인습적(post-conventional) 주체”(한상진, 2007: 13)나 업적주의, 소통적 합리성, 자기표현적 가치를 담지한 것으로 간주되는 연고주의적 주체에 대비되는 “탈권위주의적인” “네트워크적 주체”(김정훈, 2010b)와 같은 주장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liberal) 사회에서도 인습과 권위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습’과 ‘권위’는 그 자체로 그렇게 의미가 충만하거나 자명한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탈인습과 탈권위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하고 소통가능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서구-비서구’라는 대립적 의미론 체계 속에 놓이기 때문일것이다. 이 의미체계 속에서 민주, 민주화로 총칭되는 것들은 대부분 ‘서구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반민주적’, ‘인습적’, ‘권위(주의)적인 것’은 대부분, 서구의 정상적(正常的) 국가, 정상적 시민사회로부터의 비서구적 일탈로서의 권위주의적 국가, 가부장제적 부성(父性), 전통적 유산과 동일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속에서 후자는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어떤 것,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것은 외래(外來)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 마련이고, 결국 이러한 문제틀 속에서 새로운 정치주체성은 일종의 ‘서구화(Westernization)’의 현현(顯現)으로 이해된다.7)

    이러한 경향의 또 다른 더 심각한 문제적 측면은,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행위지향이 그 자체의 어떤 중심적 속성의 존재에 의해서가 아닌 무엇의 결여로서 부정적으로만, 다시 말해 ‘잔여적인 방식으로(residually)’ 이들 논의에서 개념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희연의 제3정치성은, 반독재의 과제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수립, 공고화를 겨냥하는 ‘제1정치성’(과거 재야민주화운동 세력과 일부 제도권 정치가의 그룹)과, 실질적 민주주의와 사회복지국가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제2정치성’(조직화된 노동자, 농민, 그리고 여타 민중들, 사회운동단체, 반([半]직업적 활동가로 구성된 시민단체, 학생운동의 급진적 세력)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으로 사실상 정의된다(조희연, 2012: 19-21; 김동춘, 2012: 2-3). 따라서 그 정의의 요체는 제1, 제2 정치성을 정의한 후에 나머지를 묶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탈인습주의와 탈권위주의 개념 또한 무엇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포스트모던논쟁 이래 성행하는 조어(造語)습관에 따라 ‘탈’로서 그것을 정의하고 있다.

    적극적 정의의 이러한 결여가 새롭게 등장한 ‘개인들’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실질적 고려 또한 결여한 것일 때, 그 개인들은 막연히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인과 닮은 어떤 것으로 상상되며, 그러한 상상은 결국 부지불식간에 서구주의적 사회학주의, 혹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인 근대화이론과 유사한 이론화로 귀결되게 된다. 이들 논의에서 개별화, 개성화, 개인 등의 개인화의 수사(修辭)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처럼 채용되거나, 새롭게 등장한 개인의, 우상화(idolization)까지는 아닐지라도 이상화(idealization)가 종종 발생하는 이유는 그러한 맥락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8) 분석적 엄밀함의 희생을 동반하는 이러한 공허한 총체화는 또한 사회변동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동시에 그러한 변동과정 자체를 표상(represent)하기도 하는 행위자와 그 주체성에 대한 ‘이념주의(ideologism)’적 이해와 설명, 즉 “사회관계를 이념적 관계로 이해”하거나 “이념의 교정과 변화가 구체적인 현실의 변화를 유도할것”(김동춘, 1993: 297, 304)을 함의하는 이론화로 이어지게 된다.9)

       2. 연구의 목표

    상술한 기존 논의들의 문제적 측면들에 주목하여 이 글은 새롭게 등장한 정치주체성을 그에 고유한 ‘역사성(historicity)’ 속에서 규명하게 할 수 있는,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인 ‘스토리(story)’, 단절적이고 무역사적인 ‘출현’의 스토리가 아니라 연속성 혹은 더 정확히는 ‘변전(變轉, alteration)’의 스토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새로운 시민정치의 중심적 특성, 주요한 요소, 그리고 그 복합적인 동학의 구조와 핵심적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장기적 정치발전의 한 구조적 측면(facet)에 대한 ‘개념사(Begriffsgeschichte)’적인 재구성이 시도된다. 이러한 다소 사변적인 재구성의 근저에는 기존의 논의들에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역사성의 차원에서 답변되지 않은 다음의 질문이 존재한다: 왜 이 새로운 정치주체성은 사회운동과 시민단체라는 ‘저항적 공중(protest publics)’ 의 장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그러한 준(準) 공적인 세계와는 구분되는 사적(私的)인 세계의 문법, 수사(rhetoric)에 의거하여 추동되는 듯 보이는가? 동시에, 한국 정치사에서 그리 자주 볼 수 없었던 일반시민의 그처럼 큰 규모의 공민(公民)적 융기들은 어떻게 그토록 팽배한 개별화와 사사화(私事化)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출현할 수 있었는가?10)

    본 연구는 이렇듯 새로운 시민정치의 수수께끼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사사화된(privatized) 사회적 주체성의 특징적 성격과 그 변천이 ‘새로운 시민정치’라는 말로 등장한 문화적 모형, 정치·사회적 세력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 글의 첫 번째 주장은, 사사화된 사회적 주체성의 동학(動學)과 진로를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생활세계의 발전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가내성(domesticity)’, ‘가내적인 것(the domestic)’이 한국적 현대성에서 차지하는 모순적이고 젠더화된 지위(제2장)를 인식하는 것이 선차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시도되는 재구성의 주요한 이론적 초점은, 가내성의 그러한 지위를 낳는, 정치주체성의 조형과 공론장의 구조화라는 측면에서의 한국 정치적 현대성의 구조화된 면모이다. 이러한 면모의 주요한 구성요소는, 해방 후 신생탈식민사회와 개발독재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출현한, 유교적 유산의 변용(變容)으로서의 ‘초월적(超越的) 공공성(transcendental publicness)’의 공공정치 관념과 ‘초연적(超然的) 남성성(masculinity of aloofness)’의 정치주체성, 그리고 이 양자에게만 허용된 대단 히 제한된 공론장의 출현과 작동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제3장).

    일종의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적 편제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구조화된 면모를 통해 가내성과 사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남성적인 것으로서의 공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고 공론장과 국가-시민사회 관계는 젠더화하였다. 초월적 공공성과 초연적 남성성의 위계질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계획득과 계층상승의 개별화된 노력으로 축소된 시민사회로부터 정치사회를 자율화, 독자화시켰다. 그 결과 가내성으로서의 시민사회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의 장소’로 정위(定位)되어, 심의적 공중(deliberative public)과 저항적 공중이 대변하는 ‘가치의 정치’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글의 두 번째 주요한 주장은 이러한 상황을 깨뜨린, 즉 시민사회의 ‘탈여성화’, 국가-시민사회관계의 ‘탈젠더화’를 야기한 정치주체성이 흔히 가정되듯 억압적 가족, 사적인 것, 봉건성에 반대하는 독신자적인 것, 공적인 것, 근대적이고 개인주의적인것, 혹은 또 다른 남성성으로서의 서구적인 것의 저항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등장은 상술한 ‘사회적 편제’ 내에서 성장한 사사화된 행위자, 즉 여성성으로 인식되었던 ‘사적인 것’, ‘가내성’ 혹은 ‘가내화된 주체성(domesticated subjectivity)’의 역사적 진화와 그 급격한 변전 혹은 그 고유한 정치화 과정으로 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제4장).11) 이러한 문제틀로 조명된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발달의 역사는 그것의 담지자들이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의 부재와 그로 인한 사사화라는 역사성에 제약되면서 동시에 그러한 역사성 하에서 산출된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the personal)의 힘에 기반하여, 그리고 새롭게 획득된 그들의 신뢰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를 정치주체로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12)

    한편 이러한 시도는, “전쟁정치”, “기업사회”(김동춘, 2006, 2013) 그리고 “반공규율사회”, “엘리트주의적이고 과두적인 정치사회”(조희연, 1999, 2009) 등으로 개념화되는, 국가폭력과 공론의 억압, 왜곡으로 얼룩 지워진 한국의 정치사회, 공론장, 지배체계의 동전의 또 다른 면 혹은 그 이면(裏面)의 내재적 논리를 규명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13) 위의 두 대표적 논의에는 사회적 지배, 적대, 갈등이 어떻게 배치되어있는가에 대한 이론, 그리고 그와 연관되어 국가와 정치가 어떤 모습, 어떤 정상태(正常態)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함의는 명시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전쟁정치와 독과점에 대응하는 일반대중의, 특히 소시민들의 주체성의 ‘현상학’에 대한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14) 동아시아발전국가에 특유한 국가-사회관계의 젠더화된 질서를 이론화하여 본 연구의 이론적 출발점을 제공한 한과 링(Han and Ling, 1998)의 작업 또한, 국가와 자본의 결합체로서 시민사회를 여성화하려는 “초남성화된 발전국가(hypermasculinized developmental state)”가 부과하고자 한 젠더질서, 담론적 전략만을 조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사회 간의 모순적이고 복합적 인 상호작용에 대해 일면적이고 단순화된 설명 이상을 제동하지 못하고 있다.15)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한 개입으로서 본 연구는 초남성화된 국가와 여성화된 시민사회라는 젠더화된 담론적, 실제적 쟁투의 근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젠더화의 질서, 즉 시민사회 속의 정치주체성, 정치참가에 있어서의 젠더화된 ‘(시민)사회적 질서’를 조명하고, 이를 최근의 시민정치적 사건들의 연쇄적 흐름과 이론적으로 관련 시킨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성은 상기한 젠더적 질서에 대한 사적 세계의 대응 혹은 그것의 정치적 승화로 이론화된다. 이로써 그간 억압적 국가와 저항적 공중이라는 두 단일한(monolithic) 남성적 행위자들 간의 대결의 드라마로만 인식되었던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의 전개는 다른 방식으로 고찰될 가능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고, 그러한 전통적 시각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론화되지 않았던 ‘시민’사회, 즉 문화적이고 사적인 의미로 충만한 생활세계의 특징적 구조와 그 정치적 함의는 그 적절한 이론적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16)

    본 연구에서 시도되는 개념사적 접근은, 문화적 구성물(cultural construct)로서의 일종의 이념형적 유형들의 사회적 작용과 발전을 그 내적 논리와 다른 구성물들과의 상호관계의 전개로서 기술하고 분석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17) 이러한 접근은, 무한히 많은 역사적인 요소들의 간섭과 참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역사사회학적 방법이나, 특정한 단선적 인과사슬(linearly causational pattern)을 색출하여 그것을 확정적으로 검증하는 실증주의적 방법에 비해 체계적인 경험적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 일종의 형태론적(morphological) 소묘(素描)만을 낳는데 그칠 수 있는 이러한 접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경험적 측면과 수많은 변인들의 얽히고 설킨 역사적 작용으로 가득 찬 포스트민주화 한국 정치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가로지르는한 유의미한 서사(敍事, narrative), 무엇보다 이 새로운 시민정치를 실천하는 담지자 들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에 근접한 서사에 대한 포괄적인 사회학적 맥락화를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18) 따라서 여기서 채택된 방법은 비록 그 경험적 지지가 주로 인상주의적이고 사건적인 증거(episodic evidence)에 의해 구축된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이 작동하는 기본규칙들과, 그에 대해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출현이 갖는 전환적인(transformative) 면모, 효과, 그리고 그것이 갖는 정치·사회(이론)적 의의를 기존의 설명과는 다른 강조점과 측면에서 보여주는 목표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1)이 대자보의 최초의 작성자, 주현우 씨는 “인터넷에 올리려고도 했지만 휘발성이 크고 진정성이 없어 보일 것 같아 접었다”고 말한다. 비록 “대자보라는 형식이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를 공유·확산·발전시킨 일등 공신은 페이스북 ‘안녕들하십니까’(facebook.com/cantbeokay)였다”(나·들, 2014.3.1.).  2)첫 번째 방향의 이론화는 대표적으로 “유연자발집단”(조대엽, 2007), “팬덤(fandom)”(조흡, 2002), “다중(multitude)”(최현, 2009) 등의 주장을 들 수 있고, 두 번째 방향에는 젊은 세대와 이전 세대의 차별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세대 간 갈등에 주목하는 논의들(송호근, 2003; 윤상철, 2009; 이해진, 2009; 정상호, 2002; 한상진, 2007; Han, 2012)이 포함된다. 한편 후자의 논의들은 몇몇 주요한 사회변동적 측면, 이를테면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확산과 위험사회라는 전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관련되어 진행되기도 한다(대표적으로, 김욱, 2007; 정진성·이재열·조병희·구해란·안정옥, 2010; 이해진, 2012).  3)ICTs의 정치적, 사회적 함의에 대한 국내 학계의 논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무수히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엄밀히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연구 분야에 속한 연구들을 제외하고 소셜미디어와 그 정치적 활용에 한정한다면 백욱인(2012), 이원태(2012), 이항우(2012), 장덕진(2011) 등의 지속적인 연구가 대표적이다.  4)이러한 단절성의 인식론에 근거한 현실 규정이 논쟁의 상호 준거틀(referential platform)로 기능할 때 논의는 지나친 낙관론과 그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격돌하는 매우 비생산적인 양상으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는 ICTs의 사회적 함의, 정치적 결과(consequences)에 대한 90년대 중반 이후의 초기 논쟁들이 전개된 양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후자에 관해서는 구자혁(2012b) 참조.  5)조희연(2012: 17)에게 있어서 ‘정치성’ 혹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대중의 삶에서 발생하는 불만과 잠재적 저항성으로 존재하는” “즉자적인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 “기존의 정치와 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불만과 비판, 저항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칭한다. 이와는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정의는 주지하다시피 칼슈미트의 고전적인 논고(Schmitt, 1996[1932])에서 제시되었다.  6)이 점에 관한 좀 더 확장된 논평은 구자혁(2013: 36-38)참조.  7)이 때 이러한 주체성이 서구적 현대성의 전개과정에서 실현된 보편적 역사발전의 공간적 변이(variation), 즉 한국적 출현으로 이해되든 혹은 서구의 압도적 정치, 문화, 경제적 영향력 혹은 심화된 지구화에서 비롯된 가중된 ‘확산효과(diffusion effect)’로 이해되든 양자의 이론적 함의는 최소한 이 글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김정훈의 논의(2010a, 2010b)는 ‘현대성의 부재 혹은 과잉’이라는 기존 접근방식에 내재한 ‘모 아니면 도’ 식의 문제적 접근을 탈피하여, 한국적 현대성의 착근, 굴절, 그리고 현대사의 격변과 관련하여 식민지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 오리엔탈리즘의 부과 등의 다양한 현실층위와 상당히 넓은 대상 시기를 고려함으로써 다른 논의들에 비해 그 역사적 천착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주체성으로 제시되는 네트워크적 주체의 요소를 지적함에 있어서 ‘성찰적 주체성)’나 ‘소통적 이성’과 같은 서구의 논의들에 의존하면서 결과적으로 새시대, 새 주체를 둘러싼 무역사적 총체화의 담론과 유사한 것으로 귀결되게 된다.  8)이러한 문제적 측면은, 기성학자들이 많은 경우 속해있는 386/486세대에 대한 비성찰적 미화나, 선거 결과에 따라 찬양과 단죄를 오가는 2030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일관되지 못한 논평들로 드러난다. 이렇듯 특정 세대를 총체화하고 젊은 세대를 좌-우의 전통적 구도에서 단순화시켜 파악하는 방식은 세대를 분석적 중심에 놓는 연구들(Han, 2012; 한상진, 2007)에서 다소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9)칼리니코스(Callinicos, 1987)에 준거하여 위와 같이 이념주의를 정의하고 있는 김동춘(1993, 1996)은, 이러한 이념주의적 사고방식이 정통맑스주의, 포스트맑스주의, 알뛰세르적 구조주의등의 지적운동 뿐 아니라 한국적 자유주의, 사회주의에도 역시 드러남을 지적한다.  10)낙천낙선운동, 노사모와 같은 운동들은 이민, 유학, 외국어 열풍이 지배하던 시기에 출현하였고(정상호, 2002: 103), 또한 촛불시위와 같은 범국민적 참여가 두드러졌던 시기는 특목고, 웰빙, 뉴타운, 그리고 보수 성향의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한나라당에 대한, 유보적이나마 지배적이고 공고한 지지와 겹쳐져 있었다.  11)따라서 이 글은 개인화와 가족주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가족지향적(family-oriented) 개인화’, ‘가족주의적(familialistic) 개인화’와 같은 최근의 연구동향(김혜경, 2013: 108)과 보조를 같이 한다. 한편 ‘탈젠더화(de-genderization)’라는 용어가 채용되는 상술한 맥락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양성 평등화 경향의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미국의 현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의 당선(2008)에 의해 개시된 것으로 운위되는 ‘탈인종주의적 정치(post-racial politics)’의 실제 요체가, 이제 미국사회가 인종차별과 다문화 공존의 문제가 없는, 인종적, 문화적 약자에 대한 보상법률(The Affirmative Action)이 없어도 될 만큼의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과 유사하다. 단지 양자는 관련 문제의 주요 지평이 젠더화된 혹은 인종차별의 의미공간으로부터 탈피해가는 경향을 지칭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제시되는 가내성의 정치적 부상은, 자본주의 발전의 장기적 추세(Bowles and Gintis, 1994: 20)이자 근래의 신자유주의화, 사회양극화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제도적으로 뚜렷해지고 있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맞벌이 부부의 증가, 그리고 그로 인한 양성평등화의 부분적인 진전과 밀접한 경험적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인소득자 원리의 새로운 핵가족주의”(김혜경, 2013: 134)라는 이러한 현대적 추세에 관한 개관은 카노이(Carnoy, 2000), 까스텔스(Castells, 2008: 286-304) 참조.  12)이러한 발전은 미국의 여성운동이 “개인적인 것은 곧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고 선언함으로써, 여성에게 고유한 체험과 주체성을 승인하고 정치화한 과정과 유사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춘 여성(운동)사로서 대표적으로 사라 에반스(Evans, 1980, 1989) 참조.  13)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한국사회의 지배구조와 지배블럭의 억압적 본질에 관한 이론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왔고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들과 긴밀한 실천적 관련을 유지해온 두 정치사회학자의 주장이 전형적 사례로 예시되고 있다.  14)이러한 결여는 맑스주의적 유산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비판적 사회과학에 어느 정도 공통된 것이다. 보울즈와 진티스(Bowles and Gintis, 1994: 42-44)는 맑스주의적 정치이론의 취약성이, 자유주의적 공-사 구분의 사회적 편제가 내포하는 사회적 권력, 지배에 저항하는 대중의 민주적 추동력을 소극적인 방식으로만, 즉 그 저항의 중심에 있는 ‘사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인 이론이 없이 단지 위의 공-사 구분의 억압적 본질을 비판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이론화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15)따라서 본 연구에서 전개되는 젠더화나 여성화의 논의는, 한종우·링(Han and Ling, 1998)에 의해 제시된 젠더화의 입론,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전개된, “국가의 초남성성은…모든 사회적 영역의 ‘여성화’를 요구”한다는 조은(2000)의 주장과는 다소 상이한 초점을 갖는다. 이들 논의는 여성, 가족과 관련된 지배질서의 정교함과 치밀함을 조명하는 장점을 갖지만, 국가(+자본)-노동관계,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젠더적 재개념화(re-fashioning) 이상의 분석적 층위를 발굴하는 데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젠더적, 가족적 질서의 탐구가 갖는 잠재력, 즉 여성해방이나 양성불평등 완화라는 시급한 실제적 문제 뿐 아니라 사회학이론, 정치이론의 발전에 대해서도 갖는 그것의 잠재력이 비판사회과학에 특징적인 급진적, 실천적 관심에 의해 역설적으로 위축되는 예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6)이러한 생활세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미시적이고 준(準)인류학적인 형태로 활발히 이루어져왔지만, 아직까지 그 세계의 독자적인 정치적 의의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정립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중산층, 특히 소위 ‘신중산층’으로서의 도시중산층의 생활세계는 김은희(1993, 1995), 문숙재·최혜경·정순희(2000), 함인희·이동원·박선웅(2001) 등에 의해 해당 인구층의 일, 소비, 가족문화에 관한 연구들이 수행되었고, 근래에는 남은영(2010), 남은영·홍두승(Nam and Hong, 2011) 등과 같이 이들의 소비문화를 사회자본, 문화자본의 축적이라는 시각에서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성과들 또한 산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중산층의 생활세계의 구조가 가진 정치적 함의를 발굴한 이재열-남은영(2008), 이해진(2012), 김문숙(2009) 등은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비정치적이었던 기혼여성의 참여라는 초점에서 2008년 촛불시위를 분석한 김영옥(2009)은 이 글의 주장과 가장 근접한 기존 연구이지만, 새로운 정치주체성의 사적이고 젠더파괴적인 성장, 정치적 현대성의 젠더화된 구조의 전환이라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입론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17)아렌트(H. Arendt)가 『인간조건』(1996)에서 구체화했던 이러한 개념사적 방법(Benhabib, 1992)의 또 다른 예로 근대국가의 이념형적 구성요소들의 전개를 추적한 폿지의 연구(Poggi, 1978)를 들 수 있다. 베버(M. Weber, 1988)의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또한 신교윤리가 갖는 역사적이거나 보편적인 인과효과에 대한 경험적 입증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이념형과 그 내적 논리를 제시하는 데 그 요체가 있었다.  18)정치생활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신뢰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단계적 요건을, “연구의 시작이 시민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story)에서 출발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의 차이를 통계(statistics)를 통해 비교하고, 그렇게 드러난 차이의 의미를 이론적 모델링(formal modeling)을 통해 검증”하는 것으로 제시한 김남국의 논평(2013: 103, 강조는 필자)은 그 취지에 있어서 본 연구의 접근과 일맥상통한다.

    Ⅱ. 한국적 현대성에서 공(公)과 사(私), 그리고 가내성(家內性)

    ‘공적인 것(the public)’과 ‘사적인 것(the private)’에 대한 정의와 구분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다양한 변이(variants)가 존재해왔다. 와인트로브(Weintraub, 1997: 4-5)에 의하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론적 대립체계는 다음의 두 주요한, 하 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요소들에 의해 구성된다: 1) 감추어지고, 물러나 있는(withdrawn) 것 對 열려진, 드러난, 그리고 접근 가능한(accessible) 것; 2) 개별적이거나 개인에게만 관계된, 혹은 개인들의 한 집합체(a collectivity)의 이해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 對 집합적인(collective) 것. 서구의 사회, 문화적 발전에서는 이 두 요소의 조합과 취사선택에 의해 다음과 같은 공-사 구분의 주요 변이들이 등장하였다. 양자의 구분은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공화주의(republican) 전통에서는 가계와 정치공동체(polis) 간의 대립으로, 아리에스(Philip Aries)와 같은 역사학자에게서는 가내성과 사교성(sociability)의 대립으로, 맑스주의적 페미니즘에서는 가족과 시장경제(market economy)의 대립으로, 그리고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경제와 정부(혹은 행정적 개입) 간의 대립으로 표상되었다(Weintraub, 1997: 34-35). 요약하면 공과 사의 구분은 매우 유동적인 것으로, 특히 사교성과 시장경제의 위치는 그것이 놓인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 따라, 그리고 이론적 조류와 규범적 입장, 학문 분과에 따라 공적인 것도 될 수 있고 사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버마스(Habermas, 2001)의 공론장 이론의 발전에서 중요한 참조점으로 작용한 아렌트(Arendt, 1996)의 사회이론은 위의 첫 번째 유형,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 전통의 공-사 구분에 상응하는 사회적 실천(practice)의 유형론을 전개한다. 그것의 핵심은 ‘노동(labor)’과 그 공간으로서의 ‘가계(household, Oikos)’, 그리고 ‘행위(action, praxis)’와 그 공간으로서의 ‘정치체(Polis)’ 혹은 공론적 장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노동은, 생계와 물질적 수단의 획득을 통해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의 유형(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입과 소득의 증대를 위한 활동)을 의미하며 정의상 그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자연적 리듬, 모든 생명체가 종속되어야 하는 자기재생산의 노력과 주기에 종속된 사회적 실천이다. 이러한 노동은 아렌트의 그리스사회의 원형적 맥락에서 오이코스의 삶, 즉 경제 영역에 한정된 삶을 대변하며, 그 특징은 사사화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는, 생계적 활동에 부과되는 자연적, 사회적 필연성에 얽매인 삶이다.

    이에 반해 ‘행위’ 혹은 프락시스는 복수성(plurality), 차이성, 동등성이라는 인간 삶의 또 다른 조건, 즉 타자와 의견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개입시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활동을 해야 하는 사회적 실천의 측면이자 또 다른 방식의 실천 원리인데 이는 공론적 장으로서의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행위에서 중심적인 조건은 노동에서처럼 자연과 자신의 고립된 상호작용이 아닌 타인의 현존이며, 이들과의 의사소통의 과정이다(Arendt, 1996: 235-240).19) 이러한 원형적 공화주의 모델이 함의하는 정치참여의 주체는 노동과 필연의 세계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 해방되고 일정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가부장 남성으로, 그리스적 맥락에서는 이들만이 민주적 정체의 완전한 성원이자 공론적 장에서의 발화자이다. 한편 이들이 참여하는 평등한 ‘행위의 세계’ 뒤에는 완전한 시민권을 갖지 않은 종속적 지위에 있으며, 경제, 생계, 필요, 욕망의 불평등하고 전제적인(despotic) ‘오이코스의 세계’ 내에서만 활동하는 여성, 노예, 미성년, 하층민(proletariat)들이 있다.

    이러한 남성성 혹은 부성(父性)이 수행하는 활동은 실천, 즉 정치적-사회적 관여에 해당하는 프락시스(praxis, vita activa)이거나, 그로부터 물러나 사색과 독서, 저술 등에 몰두하는 은둔, 정관(靜觀), 참구, 성찰, 즉 테오리아(theoria, vita contemplativa)이다(Hirschman, 1982: 6-7). 이러한 행위 주체성의 양태와 관련하여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는,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불려가기 이전에는 어떤 궁핍한 상황에서도 학문에 전념하는 조선시대의 선비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그 순수형에 있어서 이러한 남성성의 담지자가 활발한 정치활동, 즉 프락시스를 하고 있지 않을 때 남은 선택은 테오리아이지 제작(poesis)이나 경제활동은 아니다. 사실 포에시스나 오이코스가 유산(有産) 성인남성의 일상활동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경제적, 물질주의적 근대사회의 핵심은 행위대신 노동이 사회적 실천의 중심적 범주로 부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0)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이념형적 구분과 정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정치주체성이 상상되고 실천되는 방식에 대해 그것이 갖는 상당히 직접적인 관련이며, 또한 그 관련성이 함의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젠더화된 인식과 분류이다. 그것은 특정 사회영역의 젠더화된 정위(定位), 그리고 특정 활동에 대한 제한과 허 용, 입장자격, 그리고 결사(結社)의 방식 등을 근거지음으로써 정치주체성의 정당화 와 특정한 방향으로의 형성, 그리고 특정한 정치, 사회적 의제의 선택과 배제에 매우 심원한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21)

    한국의 정치적 주체성의 발전과정에도 또한 젠더화된 상상은 깊이 내재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동시에 근대적인 성별분업과 계층상승, 사회적 야심에 대한 문화 모델의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아렌트가 묘사한 그리스적인 원형적 공화주의 모델의 젠더화 양상과 놀라운 유사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적 현대성에서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정의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어의론적 요소(semantic element)는 ‘가내성(domesticity)’으로, 여기서 공적인 것은 이 가내성에 환원된 사적인 것의 대립항으로서 주로 정의되어 왔다.

    근대사회로의 이행과 더불어 가부장은 더 이상 정치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앉아서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지는 않으며 이 점에서는 한국의 가부장 남성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들은 생계를 위하여 일과 직업을 갖고 특정한 조직, 이를테면 공-사기업의 고용원으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소득의 원천이나 그 담당자로서만이 아닌 ‘바깥일’과 ‘집안일’이라는 구분의 발달이 갖는 특징적 측면이다. 남성적 영역으로서의 바깥일은 일과 직업, 그리고 그에 대한 준비로서 유사한 세계에 속하는 공부 등으로 구성되며, 구별된, 일종의 준(準) 공적인 영역으로 상상된다. 그에 반해 여성에게는 이들 남성과 미성년을 돌보고 생계의 문제를 관리하는 ‘집안일’, 즉 가사, 경제, 필요, 욕망의 세계가 할당된다.

    여기서 설령 남성에게 생계수단의 확보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책임이 부과될지라도, 그의 역할이 이러한 분업체계 속에서 갖는 의미는 단지 그것이 가져올 금전적 수입이나 그로부터 구매 가능한 여러 재화와 서비스라는 도구적이고 공리적인(utilitarian)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밖에 나간다’는 것은 단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설령 아무런 물질적 기여를 낳지 못할지라도 그가 하는 ‘바깥일’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 것, 즉 다른 남성과 함께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세상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이고, 그 이유로 그것은 남성에게 가장 일차적인 관심사이고(혹은 그러해야 하고) 그 무엇에도 앞서는 선결과제이다성성에 대한 진솔하고 생생한 묘사를 담고 (김은희, 1993).22) 따라서 남성영역이 사실상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노동’일 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문화적으로 ‘성화(聖化, consecration)’되고, ‘칸막이화(compartmentalization)’되어 있는 양상을 띠게된다.

    바깥일로 남성의 일을 성화하고, 현모양처로서 여성의 역할을 성화하는 가족 내 양성불평등, 성별분업은 다른 문명, 사회에도 다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젠더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단순히 전근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델이 그 한국적 전개 속에서 전근대적, 유교적 유산과의 결합에 의해 상대적으로 더 정교하고 집요하게 작동해왔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한국적 현대성의 고유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후자가 지닌 특징적 면모는 남성 역할의 성화가 공적인 것의 정의와 내포를 ‘정신화(精神化)’하고, 공-사의 구분을 ‘성스러운 것(the sacred)’과 ‘속된 것(the profane)’의 절대적 구분으로 현상하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적 현대화, 현대성의 전개에서 다소 지배적으로 자리 잡은 남녀분업의 모델은 여성에게는 이기적이고 사사화된 세속적 이익 추구, 즉 교육, 소비문화, 가계의 재정적 관리를 포함한 모든 경로의 물질주의적, 계층상승적 추구와 가내성의 관리를 ‘할당’해왔다. 그에 반해 남성은 거창하고 높은 목표, 즉 공적인 어떤 것의 달성,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적인 ‘출세’를 도모하고 나랏일을 걱정해야 한다. 여성 성역할의 전형적 모델은 이렇듯 고상하고 초연적인 남성의 세계가 커버하지 않는 모든 다른 일들, 즉 극성, 치맛바람, 과잉교육열, 부동산투기 등 엄숙주의적인 언론에 의해 주기적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일들을 여성이 담당하도록 종용하는데, 이를 통해 남성들은 그들의 ‘신성하고’ ‘공평무사하게 처리되어야 할’ 바깥일이 심려받거나 교란되지 않게 된다.23) 예컨대, 설사 부동산투기가 한 가구의 사실상 가장 주요한 재정적 원천이고 어머니의 과잉교육열이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결과할지라도 그것들은 ‘하찮고 사사로운’ 것, 즉 ‘집안일’, ‘사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남성은 그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24)

    이러한 문화적 매트릭스 속에서 한국남성의 마초주의(machismo)의 특징적으로 ‘숭고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기 부과적인 과대망상적 야심, 거국(擧國)적인 일에의 별스러운 골몰과 열광, 그리고 고지식할 정도의 매우 완고한 도덕주의적 자존심이 등장한다. 이는 사회의 ‘영혼’, 사회 전체를 근거 짓는 거대 이데올로기를 걱정해야 하는 남성과, 각개약진 형식으로 사회의 ‘몸’, 그 원자적 단위의 재생산에 전념해야 하는 아내라는 이분법적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심려와 추구로부터 벗어나고 면제되어 공부와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남성성, 공적인 것의 모델에서 그 대립항으로서의 여성과 가족, 가내성은, 공순(恭順)하고 순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비일비재하게 전투적이고 억척스러우며 자기주장적이고, 때로는 남성적 영역에 고도의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생계’라는, 사회적 삶의 ‘육신적 측면(corporeality)’으로 표상된다.25)

    한국여성 혹은 동양여성의 순종성이라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젠더모델 혹은 남성들의 ‘보편적 바램(?)’이 투사된 이미지와는 달리, 한국여성의 ‘전투성’, 억척스러운 생계의 담당자로서의 한국적 여성성은 서구의 일부 관찰자들과 여성학 연구자들에게도 일찌감치 인정되어 왔으며, 한국인의 특징적으로 역동적인 성격의 주요 요소로도 간주되고 있다(경향신문특별취재팀, 2006: 61-64). 그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흔히 특징 지워지는 한국사회의 근대로의 험난한 진입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근대화, 산업화의 산물만은 아니다.26) 이러한 여성성은 기혼여성, 어머니 이상의 함의를 갖고 있는, 즉 단순 인구학적 범주를 넘어 구체적인 문화적 행위양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아줌마’의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이다. 아줌마의 문화모델은 가부장적 남성이 꺼리는 ‘후안무치(厚顔無恥)’, ‘체면몰수’적인 일을 떠맡음으로 써 남성적인 체면과 명분이 지닌 관념성을 보완하는 세속성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수 있다.27) 남녀성역할의 이러한 문화모델은 한국사회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통틀어 여성의 경제적 권력화(economic empowerment) 패턴으로 높이 평가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위에서 공적 세계로 총괄된 ‘바깥일’로부터 여성을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28)

    따라서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공격적인(aggressive) 것과 공순한 것의 대비가 아닌, 정신화된 공적인 것, 공공성을 독점하고 스스로를 유일하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남성적인 것과 비(非)공적인 것, 나아가 비정치적이고 비사회적인 것(때때로 반[反]사회적이거나 반[反]국가적인 것으로도 취급되는), ‘비속성(卑俗性)’으로 위치 지워지는 여성적인 것 간의 대비이다. 그러한 여성적인 모든 것은 바로 가내성, 가내적인 것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이 젠더화된 상상과 결합한 순간 가내성은 고도로 정신화, 성화, 추상화된 공적인 것으로서의 남성성과 절대적으로 분리, 대립되게 된다.

    이러한 젠더화의 과정이 가진 강력함은 그것을 통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마치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그러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범주적으로(categorically), 즉 연속체(continuum) 상의 상대적 지점으로 서가 아닌, 중간지대가 전혀 존재할 수 없이 명확히 질적으로, 배타적으로 구분되는것들 간의 대립으로 사고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가내성 혹은 가내적인 것으로 환원된 사적인 것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 중간 성(性)이 없듯이, 정치적이지 않은 것 혹은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취급되어, 정치와 공공성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고 시민권을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보편적인 성별분업에 대한 문화모델은 그것이 다른 이분법적 구분들과 결합하여 그것들을 젠더화한 순간, 서로 상호 상승적으로(synergically) 개개의 이분법적 대립을 공고화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현대성의 젠더화 차원의 고유성은 세계 어느 문명 하에서도 공통된 여성적인 것을 순종과 조신함, 공순함으로 정의하고 부과하는 방식 혹은 그 심화된 정도보다는, 가내성과 사적인 것에 대한 젠더화된 표상-온전한 남성성이 탈각시켜야할 것으로서 사고된다는 점에서 여성성으로 정의되는-에서 찾아져야 한다.29) 이러한 양상은 기원적으로 사적인 것의 영역에서 부화되는 공공성, 그리고 국가-시민 사회 양자를 매개하는 부르주아 공론장이라는 근대적 이념(Haberams, 2001; Poggi, 1978)이나, 개별적이고 사적인 이익의 상승 혹은 승화를 통해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s)과 국가의 정책적 목표가 추출되는 자유주의적 정치과정의 ‘순환고리적 모형(the loop model of democracy)’(Fox and Miller, 1995: 15)과는 다른 정치사회의 구조화, 정치주체성의 양상을 함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술된 젠더화의 양상이 정치사회 속에서 구조화되는 과정은 공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동일시하고, 사적인 것, 가내성을 비정치적인 것, 여성적인 것과 등치하는 시민사회 내의 환원이 또 다른 환원, 즉 시민사회로부터 모든 정치적 목소리(voice)와 발의(initiative)를 제거하고 그것을 비정치적인 사적인 것, 가내성의 영역으로만 위치 짓는 국가주의적(statist) 환원과 결합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19)여기서 의사소통은, 노동의 수행, 기본적 욕구의 충족과 관련된 특정 작업의 실행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의 단순 ‘기능적’ 역할, 더 정확히는 전달(transmission)적 역할을 하는 것을 벗어나 내면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말’은 이러한 역할을 할 때에만 행위의 부분이 된다(Arendt, 1996: 235-240).  20)그리스-로마적인 원형에서 나온 이러한 기본개념들을 가지고 근대사회의 본질을 이론화하려는 시도는 사실 18, 19세기 유럽의 사회이론가에게는 매우 일반적이다. 주지하다시피 맑스(K. Marx)의 노동 개념은, ‘정신(Geist)’의 운동으로 관념화되고 지성화된 헤겔(G. W. F. Hegel)의 ‘노동’ 개념을 제작의 행위, 즉 ‘포에시스(poesis)’와 프락시스의 결합으로 재개념화함으로써 탄생했다(Larrain, 1986). 위의 아렌트의 이론적 작업은, 이러한 맑스의 노동개념 속에서 노동, 제작과 미분화된 채 결합되어 있던 프락시스를 따로 떼어내어 그것이 갖는 그리스적 어원과 맥락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하버마스의 초기 논술인 “노동과 상호행위”(Habermas, 1993), 그리고 후기의 의사소통패러다임의 제기는 바로 그러한 아렌트적 전환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락시스 개념의 지성사적 변천에 관해서는 롭코비츠(Lobkowicz, 1967), 그리고 그와 관련된 행위 개념의 철학적 논쟁의 정리로는 번쉬타인(Bernstein, 1971) 참조.  21)일반적 차원에서 한 사회가 가진 사회적 분업(social division of labor)에 대한 (문화)모델은 단지 작업장이나 노동과정 영역 뿐 아니라 정치의 특화, 전문화와 같은 전 사회적 차원(societal dimension)에서의 분업 또한 구조화하고 정당화한다. 이에 관해서는, 사회분업의 진행이 단지 효율성, 합리성만이 아닌 사회적 권력, 문화적 모델의 문제와 직결되었음을 상술한 뤼쉐마이어(Rueschemeyer, 1986) 참조.  22)한국 남성성에 대한 진솔하고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는 전인권(2007: 72-73)의 자전적 에세이, 『남자의 탄생』에는, “쾌락산출이 기대되는” 소비(Hirschman 1982: chapter 1)에 대한 의사결정을 공유할 때 부부 간 상호 유대가 효과적으로 발전된다는, 한국의 가족 내 동학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갖는 매우 통찰력 있는 진술이 발견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소비를 포함한 가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부터의 한국 가부장의 격리는 바로 이들이 노년에 겪게 되는 자녀, 배우자로 부터의 소외, 감정적 괴리의 생애사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인권이 지적하듯이 그러한 소외와 괴리로부터 얻어지는 가부장의 이득, 만족은, 대략 중년까지만 유지되는 신성화된 그의 최고 권위(supreme authority), 그리고 가정 내의 유일한 ‘공적인간’으로서의 ‘아우라(aura)’일 것이다. 1966년 김기수 선수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되었을 때, 자신의 가족과 그 감동을 나누기 보다는 이웃집 아저씨와 약주를 하러 외출하는 아버지의 모습(전인권, 2007: 31-32)은 바로 다른 공적 인간, 즉 타 남성들과의 교류, 유대가 가부장적 남성에게 얼마나 지배적인가를 보여준다.  23)남녀 주체성의 이러한 모델은 전근대시기, 식민지시대, 산업화 시기, 그리고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의 문화적 주형(cultural template)의 항상적인 성분이었는데, 그 사회적 발현의 예는 상당히 무수하게 열거될 수 있다. 떡을 써는 어머니 곁의 한석봉에서부터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만주로 간 남편과 홀로 생계를 꾸리는 아내, 대학생 남동생과 여공누나, 감옥에 간 민주화 운동가와 막일과 일수로 아이들을 키우는 아내 등이 바로 그러한 모델을 표상하는 잘 알려진 대중적 일화들이다.  24)물론 그와는 별도로,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잘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매우 일반적이다. 한편 이러한 배경에서, 설령 남성 가부장이 아내와는 다른 생각, 즉 교육에 대한 매우 진보적이고 비경쟁적인 ‘높고 고상한’ 뜻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영역은 여성의 영역이라 대부분 관여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1980·90년대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아버지세대들[의]…어쭙잖은 잔소리”, 즉 “애를 너무 심하기 다루지 말라거나 과도하게 과외를 시켜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식”(조희연, 2012: 41)의 참견을 한다면 당장 퉁명스러운 반박과 상관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25)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내에 대한 의존성이 강하여 종종 “응석적 관계”를 형성하는 한국 남성성의 모습(조혜정, 1988: 253)으로 희화화되기도 하고, 가정 내에서 한국 여성의 일종의 ‘저주받은 권력(?)’으로 과장되기도 한다.  26)조혜정(Cho, 1998: 188), 한종우·링(Han and Ling, 1998: 71-72)에 인용된 서구의 초기 선교사들과 여성학자들의 보고를 참조할 것.  27)한편 보다 현대적 맥락에서 이 ‘아줌마’는, 정규직 남편의 조기퇴직 이후를 책임지기 위해 ‘처분 가능한 노동(expendable labor)’이 주류인 비정규직 노동시장으로 점점 더 많이 유입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어머니들로 나타난다(한겨레21, 2014. 2. 17.).  28)이를테면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 시집간 여성에게 시어머니로부터 계승될 ‘곳간열쇠’나, 대부분의 월급쟁이가 통장을 아내에게 맡기는 등의 현대적 패턴 (김은희, 1993)등이 그러하다. 사회발전과 여성의 가족 내 지위 간의 경험적 연관을 추적하는 블룸버그(Blumberg, 1995: 5-7)는 여성이 가진 사회적 권력 중 매우 중요한 차원이 가정 내의 경제적 권력, 즉 가정경제 내의 자산, 수입의 처분권이며, 이것이 개별가구 단위에서나 전 사회적으로 복지지수(welfare index)의 상승에 있어서 결정적임을 주장한다.  29)탈식민주의연구(postcolonial studies)와 페미니즘 이론의 성과를 사회발전론과 결합시킨 한과링(Han and Ling, 1998)은, 남한사회의 ‘초남성화된 발전국가’에 의해 시도되는 시민사회의 여성화와 그 동원전략을 1475년 소현왕후에 의해 간행된 『내훈』, 『삼강행실도』의 텍스트에 준하여 예증하는데, 여기서 여성성이 대변하는 가치는 근면, 순종, 공순, 겸손, 삼가함 등의 준칙으로 열거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여기서 나온 준칙들의 대부분이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과 하급자에게 서로 다른 정도로나마 기대되는 윤리일 뿐 아니라 그 중 몇몇은 유교적 여성 뿐 아니라 유교적 남성에게도 역시 기대되는 덕목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발전국가가 전근대적 가부장 남성으로 스스로를 사회에 부과하고 후자를 근면하고 복종적인 여성으로 훈육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적 자본(+국가)-노동관계에서 그리 예외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담론적 전략 면에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 그러한 요소들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활용하지만, 지배-피지배관계에 늘 수반되는 그러한 젠더화된 유추(metaphor) 자체가 동아시아적 현대성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구성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Ⅲ. 정치사회와 공론장의 젠더화된 구조화

    해방 이후 남한사회의 현대화 과정은 오직 경제와 종교의 자유만을 배타적으로 허용, 장려하고 정치적 결사, 집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김동춘, 2000) 매우 제한된 ‘자유화(liberalization)’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아시아 발전국가에 어느 정도 공통된 것으로 지적되는 소위 “시민사회의 ‘여성화’”(Han and Ling, 1998)는 이렇듯 시민사회 영역을 복종적이고 근면한 주체로 훈육하고 궁극적으로 총체적 ‘탈정치화(depoliticization)’하는 과정을 지칭하며 이는 동시에 정치의 통치화, 국가화라는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젠더화 과정은 단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시민사회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그에 여성성의 표상을 부과하는 담론적 전략이나, 스스로 자임하는 군사주의적 남성성의 순수한 억압 능력과는 조금 구분되는 더 중요한 측면을 갖고 있다.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에 고유한 젠더화의 차원은 시민사회 ‘내의’ 남녀 성별분업의 이상적 문화모델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한 젠더화된 표상으로 이어짐으로써 가내성의 탈각 여부를 기준으로 정치적 주체성 자체가 젠더화되는 양상에 있으며, 이 과정은 동시에 공적인 것,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사회적인 것과 사적인 것 모두를 추방하거나 열위(劣位)에 놓는 과정이었다. 시민사회의 여성화,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젠더화라는 과정은 사회적 삶에 대한 젠더화된 상상이 국가-시민사회의 관계 자체로 확대되고 전치(轉置)되는 이러한 토대에 기반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젠더화된 상상 속에서 한국의 발전국가(the developmental state)는 조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 속에서 단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공적인 것의 총화로서의 ‘남성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육화(肉化)시켰고, 시민사회는 그러한 남성적인 것에 적극 복종하거나 혹은 늘 그보다 열위에 있는 어떤 것들의 집합장소, 즉 여성적인 것으로 위치 지워졌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초월한 것처럼 스스로를 표상하는 국가는 가내성과 완전히 절연되어 있지는 않다. 발전국가의 특징은 다만 가내성을 상당히 우회적이고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정치사회와 국민공동체의 문제로 포장하고 포섭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편제 속에서 여성적인 것, 가내성의 영역은 남성적인 것, 즉 정치, (국민)경제, 공공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것으로 위치지워지며, 그러한 문제를 제기할 주체나 통로는 오직 남성성을 대변하는 행위자나 제도적 영역, 즉 정치가, 관료, 대기업, 언론, 학계에만 존재하게 된다. 공론장의 이러한 젠더화된 형성, 구조화의 중심에는 한국사회의 유교적 유산과 긴밀히 연관된, 최소한 그것의 근대적 변용의 주요한, 그리고 아마도 가장 강력한 또 하나의 시민문화적 요소인 교육, 즉 공부와 학문이 현대화 과정에서 갖게 된 사회적 위상과 함의가 놓여있다.

       1. 교육과 공론장, 그리고 초월(超越)적 공공성

    교육이 한국사회의 현대화 과정에서 단순히 계층상승의 근대적이고 주요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데에는 신생탈식민국가로서의 한국사회가 그 이전의 식민지 체제를 통해, 그리고 해방 후의 농지개혁, 그리고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 한국전쟁을 통해 전통적인 계급질서의 문화적, 물질적 토대를 모두 일소하고 하나의 ‘백지상태’, 최소한 문화적 차원에서는 일종의 ‘무계급사회’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다.30) 이러한 백지화된 공간에서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은 그 열망과 문화의 차원에서는 사실상 제한되지 않은 것이었고 그러한 계층 간 이동의 가장 주요한 통로는 바로 상업(장사와 기업활동)과 교육이었다. 한국적 시민문화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적 정향(orientations)이 특히 강력하게 표출되는 영역으로 지목될 수 있는 상업과 교육은 전통의 영향력이 폭력적으로 제거된 무계급사회의 주요한 원인인 동시에 결과인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Alavi, 1972)의 작동방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과대성장국가 하에서 사업의 성공적 수행이 자원을 독점한 국가에의 접근 정도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면, 그런 국가적인 것에의 접근을 위한 가장 합법화되고 ‘떳떳한’ 통로는 바로 교육이었다.

    더 거시적인 구도에서 관찰한다면 이 두 가지는 한국정치(문화)의 구조화의 대립적인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두 축을 대변하는 것으로, 상업이 비공식적 정치의 차원, 즉 이익집단, 욕망, 생계, 요약하면 ‘밥그릇’의 세계(즉 오이코스의 세계)를 표상한다면, 교육은 공식적 정치의 차원, 즉 국민 공동체(national community), 가치, 공공성, 이념, 다시 말해 밥그릇과 오이코스를 초월하는 세계(프락시스의 세계)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사회의 과대성장국가가 관료적 국가로 체계화되는 과정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총화인 국가(적인 것)에의 정당한 참여자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갖게 되는데, 여기서 교육과 공부는 정치참가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경로, 그리고 정치주체성의 이상(理想)을 산출하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모든 정치가 국가로 흡수된 상황에서 교육은 정치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사회적 갈등,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시키는, 개인, 개별가구에게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허용된, 추구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김동춘, 1998). 그 결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상하 계층구분도 좌-우의 정치적, 문화적 구분도 소용이 없다.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에의 열망(실제적 혹은 단지 자동적으로 부과되는)의 한국적 풍경에 깃든 독특한 정치적 뉘앙스는 ‘측은한 외곬수’에서 국가의 상층성원으로 급상승하는 ‘고시생의 신화’, 그리고 서구학문의 체화(體化)를 통해 조국근대화를 달성하려는 관료와 지식인의 ‘청운(靑雲)의 꿈’ 등에서 가장 순수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전형적 경로 속에서 정치 그리고 정치참여는 조심히 다루어져야 하는, 그리고 때가 올 때까지 ‘중립적인 외관’을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대상으로 표상된다. 잠재적 정치지망생들 그리고 모든 야심에 찬 청년들은 명문대학 입학, 대기업 입사, 혹은 고시합격으로 시작되는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를 얌전히 올라가면서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인내심과 자제심을 가지고 유용한(듯보이는 모든) 네트워크, 인맥을 구축, 축적하면서 기다리는 과정으로, 정치는 이들이 고위관료로 입각하거나 교수, 언론인이 되어 칼럼을 쓰기까지는 개시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침내 거물들의 후원을 받아 ‘입각’하거나 ‘출마’하는 도정(道程)으 로서 주로 의미를 갖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들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침묵의 투표행위 외의 정치참가는 ‘정치입문’과 대부분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31)

    그렇다면 전통적인 엘리트 중심의 후원-수혜관계(patronage relations)적인 선거정치, 관료적 임면의 정치의 세계와의 연결로 결실을 맺을 이러한 ‘공부’, 그리고 그러한 오랜 인내와 심고원려 끝에 마침내 발화될 정치적 목소리는 어떤 성격의 것이 될까? 그것은 국가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행정적 지식이기도 하지만, 그것 이전에 관념적 차원에서의 ‘이념’, 즉 오랜 경력과 당당한 학벌에 의해 성화(聖化)된, ‘긴 가방끈’으로 체계화되고 심오해진 숙고와 지혜를 담은 것으로 기대되는 거창한 이념이다.32) 따라서 공부를 통해 획득되는 것은 공공성, 불편부당함등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산출하는 지적 위광(威光, prestige)과 그로부터 ‘가정되는’ 똑똑함이다. 공부에 대해 가해지는 이러한 기대는 그로부터 얻어지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함께 사실상은 공적인 것에 대한 발언자격, 그리고 정치 영역에의 입장권을 구성하게 된다. 요약한다면 교육은 가내성이 정치적인 것, 공공성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몇 안되는 통로였다.

    물론 한국사회의 국가주의적 발전의 이러한 문화적 대응물이 정·관·재계 엘리트들의 의사결정을 과거 개발독재의 시기에서조차 경험적 의미에서 순수하게 혹은 전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충격 이후 한국사회의 사회적 분화와 층화(stratification) 경향의 증대와 더불어 공부, 학문은 그것이 지녔던 고전주의적 광채와 감상주의(sentimentalism)를 떨쳐버리고 더 나 은 소득을 위한 매우 ‘담백한(?)’ 수단으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까운 평가일 것이다.33) 따라서 이러한 이념형적 양상이 지닌 현재적 의의는 오히려 다른 곳, 즉 정치를 바라보는 우리의 상상(imageries), 일종의 문화적 지체 (cultural lag)처럼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 상상을 강력하게 조형하는 문화적 모델에 대한 그것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다.

    공부와 학문에 대한 이렇듯 고전주의적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대단히 도구주의적인 태도는 그에 대한 정치문화적 상응물을 갖는데, 그것은 공론장, 공론의 공간을 대단히 제한적이고 엘리트주의적으로 구조화하는데 기여하는 정치, 정치참가에 대한 특정한 이해방식이다. 정치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특유하게 한국적-혹은 동아시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인 이러한 이해방식, 태도는 ‘초월적(超越的) 공공성(transcendental publicness)’의 관념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것으로 공공성, 정치와 정치참여를 사적인 이익과 욕심, 당파성(partisanship)이 아닌 무욕(disinterestedness)과 비당파성의 세계로서 이해하고 이상화하는 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정치를 어떠한 사적인 이익도 표백된 어떤 것으로 상상하고 기대하는 이러한 태도, 즉 정치의 국가주의적 환원을 넘어 도덕주의적 성화(聖化)라고 할 만한 이러한 태도는 어떤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쟁투에도 ‘밥그릇 싸움’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냉소와 경멸의 대상으로 바꾸는 놀라운 담론적 효과를 갖는다.

    초월적 공공성이 대변하는 정치적 태도, 정치문화의 이중성과 관념성은 거의 동일한 어의적 의미를 가짐에도 사실상 무제한적인 정치적 정당화 효과를 갖고 있는 ‘민생(民生)’이라는 단어의 모순적인 기능에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공직선거의 시기에 “‘서민,’ ‘민생’이라는 용어는 뭔가 시국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돌아가자’라고 외치며 일제히 몸을 피하는 정치적 참호 및 벙커”와 같은 어떤 것으로 조롱된다.34) 그렇지만 그러한 상투화는 동시에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하고 일상적인 호소력을 웅변한다고 할 수 있다. 민생과 밥그릇이라는 두 단어의 모순적 관계가 보여주는 것은 ‘사적인 것’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묵살될 수 있는 반면, 동시에 ‘(국민)경제’라는 이름으로 그 무엇에도 우선시될 수 있는 가내성, 즉 오이코스의 양가적인 정치적 위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단어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다양성을 혐오하고 그 위에 존재하는 더 고차적이고 우선권을 갖는 초월적 공공성과 그에 의한 권위주의적 교통정리, 재결(裁決)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35)

    초월적 공공성의 관념에 의해 매우 제한적 성격을 갖는 공론장, 즉 학계, 언론, 지적 장, 고급관료 등의 소위 ‘심의적 공중(deliberative publics)’들로 배타적으로 구성된 공론장과 그들의 ‘가치의 정치’, ‘이념의 정치’가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무식하고 배운 것 없고 가방끈 짧은 일반인, 대중, 서민들의 감정적이고 눈앞의 이익에 눈먼, 그런 의미에서 단시안적인 ‘욕망의 정치’를 초월하고 이를 불편부당하게 성찰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표방하며 지배세력, 지배적 (매스)미디어의 승인에 힘입어 스스로를 여론지도층, 사회지도자층으로 공언하게 된다. 이러한 ‘엄숙주의적인’ 가치의 정치는 모범생의 사회적 계층상승의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자격(credentials)’의 위계에 터 잡고 ‘충족유예(satisfaction delay)’의 정서에 침윤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과시적이고 고답적으로 작동하면서 때때로 대중의 간헐적인 자발성과 자생적 운동을 짐짓 찬양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이 제기하는 목표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회의를 내비치며 대부분의 경우는 인내와 자제를 일반 대중에게 요구하고 강변하곤 한다.

       2. 정치주체성의 젠더화된 모델과 반(反)사회적 가족: 초연(超然)적 남성성과 ?배운녀자?

    공론장에 대한, 그리고 정치에 대한 한국사회의 상상력은, 그리고 새롭게 출현한 사적인 혹은 사회적인 것의 영역은 이렇듯 유교적 유산이라는 전근대적 이미저리의 구심력, 즉 개별 가구와 그 이익을 초월하는 것으로 상상되는 초월적 공공성을 대변하는 심의적 공중과 그 정치주체성의 모델에 의해 견인되고 조형되었다. 그것의 핵심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것으로 치부된 가내성, 욕망의 장소로서의 가내성과의 대립물로 구축된 공공성, 정치주체성의 이상적 이미지인데, 이를 대변하는 것이 ‘초연(超然)적 남성성(masculinity of aloofness)’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정치주체성의 모델, 그리고 정치참가의 지배적 양상이다.

    이 모델에 내포된 ‘초연성’은 내적으로는 야심이 있되 밥그릇,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 개인적 감정에 관심이 없거나 최소한 언제든지 그것을 ‘대의(大義)’에 종속 시킬 태세가 되어있는(혹은 그렇게 비치고 연출[演出]되는) 미학적으로 자기희생의 비장함이 강조되는 모습에 있다.36) 또한 이 초연성은 외적으로는 정파와 파벌, 이익집단 등의 밥그릇 싸움이나 대내적인(domestic) 갈등에 관여하기보다는, 국제무대에서의 단일 행위자로서 간주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민족적인 것, 국가적인 것을 지향하고, 국제적으로(더 정확히 서구의 시선 앞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인정받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성취함으로써 더욱 완벽하게 된다. 이러한 남성성의 이미지의 완성에서 결정적인 것은 바로 그것의 담지자가 가진 야심의 ‘웅대함’과 그것으로부터 사적이익이 ‘표백된’ 정도이며, ‘대장부(大丈夫)’라는 단어는 그것이 가진 젠더적 성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남성적 야심을 위해 ‘수신제가(修身齊家)’보다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더 골몰하는(해야 하는) 이러한 정치주체성의 모델에서 대내적인 것으로서든 오이코스적인 것으로서든 가내성과 사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동시에 정치주체성의 연출로부터 축출되거나 초월될 것이 기대되기 마련이다.37)

    이러한 초연적 남성성의 정치주체성의 모델의 지배는 간헐적으로 등장해온 여성의 정계진출 혹은 주목할 만한 정도의 정치참여 증대 자체로 인해 자동적으로 잠식되거나 반증(反證)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델에서의 핵심은 세속적 이전투구(泥田鬪狗)로부터 초연한, 그래서 ‘밥그릇’의 문제와는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남성적 영웅으로서의 정치담당자(국가관료, 정치가, 정치후보, 활동가)의 모습이며, 여기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담지자가 속해있는 가내성, 오이코스의 세계가 이들의 정치·사회참여의 전면(前面)으로부터 늘 배제되고 은닉되어 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와 자녀는 이 정치주체를 완성하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 배후에 존재해야만 하지만(‘미(未)’혼자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전면에 드러나서 이들의 공공성, 탈가내성의 이미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저 ‘어디엔가 전제’되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돌출’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 특히 교육받은 여성이 이러한 정치주체성의 모델과 가내성에 대해 갖는 모순적인 관계는 이들이 갖는 이중적 정체성, 무엇보다 가정과 결혼에 대해 이들이 가진 양가적인 관련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사회적 지위와 정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정(假定)되는 가내성을 자신이 완전히 떨쳐버렸음을 남성이 지배하는 공공성과 직업의 세계에서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들의 정치참가는 교육을 통한 권력행사, 정치자격 획득이라는 공적(더 정확히는 교양적) 인간의 정치 모델에 대한 더 가열 찬 추구, 그리고 남성 담지자에 의한 가사, 경제, 필요의 세계에서 벗어난 남성성 모델의 구현보다도 더 철저한 ‘배우고 당찬 여자’로서만 정치를 실천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가내성을 대변하는 자신의 동류, 여성 자매들로부터의 어느 정도의 소외와 자기분리를 수반하며 문화적으로 전업주부적인 것, 그리고 가내성과 여성성이 대변하는 가치(모성, 친밀성, 내면성, 안정성[security] 등)에 대한 거리두기의 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여성이 고유하게 직면하게 되는 문제, 즉 성폭력, 사회경제적 박탈, 결혼에 수반되는 억압적 관계의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일례로, 성폭력에 대해 가장 선진화된 인식을 보여줘야 할 법조계, 특히 검찰 내부에서 통탄할 정도로 만연되어 있는 성추행의 실상은 여성 법조인들의 ‘남성적인’ 정체성에의 동조로 인한 여성 간 유대와 공유, 정서적, 제도적 지원의 미달로 그 재발 방지가 난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38)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정치참가는 때때로 가내성과 여성성의 가치에 대한 외면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권위주의적 부성(父性)에의 합류로 귀결되어 초연적 남성성의 정치주체성의 모델을 ‘어머니’ 혹은 ‘여성’의 외피를 통해 실현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아버지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출하는 고집스러운 맏딸의 모습, 가족과 가내성에 얽매이지 않는 독신 ‘누님’의 정체성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는 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지난 2013년 12월 철도파업 와중에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심정으로” 철도노조 가담자들을 직위해제했다고 발언한 최혜연 코레일(Korail) 사장은 이러한 양상의 확연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배운녀자’로서 직업 영역에서의 성공과 육아라는 가내성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살고 있는 여성들, 혹은 그마저도 ‘경력 단절’되어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상황은 더욱 힘겹고 특히 심리적으로 고달프다. 정당한 자기실현의 욕구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과되는 억압적 의무의 모순적 공존은, 자신이 꿈꾸었고 자신에게 기대되는 것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자괴감과, 가내성과 모성의 문제를 자신이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끊임없이 회귀하는 자책(自責)의 질문 사이의 악순환을 일으킨다. “현재의 가부장적 질서 아래서 사회활동이 제약되어 있는 고학력 어머니들이 자녀의 학벌을 자신의 성취로 알고 ‘전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비극적 현실”(조희연, 2012: 41)은 이렇듯 찢겨질 듯이 서로 충돌하고 과열되는 마음속의 모순된 바램들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재난(disaster)’, 교착 상태의 한 결과,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한 매우 일반적이고 몇 안 되는 현실적 해결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전보다 더 도시화되고 핵가족화된 환경 하에서 가내성의 개별화와 사사화, 요약하면 그 “반사회적 가족”(Barret and McIntosh, 1994)으로서의 면모는 더욱 심화되었다. 가내성은 더더욱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고고(孤高)한 가치에 대립되는 사사롭고 파괴적인 욕망으로 간주되게 되고 그것이 정치와 공적 생활로부터 갖는 거리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90년대 후반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한국 시민사회의 정치적 변동은 이러한 가내성의 사회적 본성에 있어서의 중대한 변전에 힘입은 것으로 초월적 공공성과 초연적 남성성의 타자(他者)인 여성성, 그리고 ‘초연적이고자 노력하기를 중단한’ 남성성이 이전 체제의 모순과 새로운 사회변동의 압력 속에서 자신을 정치화하기 시작한 근저의 흐름의 산물이었다.

    30)현대성(modernity)의 인식론적이고 동시에 사회적인 특성은 ‘백지화(tabula rusa)’의 이념과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Touraine, 1996a: 29-30). 그것은 감각적 인식에 의해 경험적으로 획득되는 대상에 대한 오성(Verstand)의 지각, 범주화, 인과관계 정식화(causation)에 기반한 과학적 지식을 여타 신뢰할 수 없는 다른 관념과 구분하고, 그러한 과학적 지식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삶의 영역에의 적용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자연법(natural law)’을, 사회를 조직하는 원칙으로 전통과 차별, 관습, 특권에 우선시하려는 운동이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과정의 담당자인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끊임없이 쇄신되는 상품을 지구상의 가장 궁벽한 곳에까지 공급함으로써 상품관계를 이식하고 모든 구체제의 관습, 특권 등을 일소하는 ‘혁명적’ 역할을 수행한다(Marx, 1988; Berman, 2001: 제6장). 하지만 이전의 것을 백지화하고 자신의 새로운 논리를 착근시키는 실제의 과정은 그런 식으로 이상화된,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거나 평화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먼데, 부드러운 상품화의 방식일지라도 그것은 함포를 앞세운 ‘개항’과 식민지 쟁탈 전쟁의 방식을 띠거나, 폭력적인 국가행정에 의한 인구의 이동, 강제수용, 노동력으로의 순화(順化)를 수반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31)따라서 이들로 하여금 정치입문 이전에 정치적 목소리를 억제하게 하는 것은, “전쟁정치”(김동춘, 2013)가 부과하는 정치적인 것과 권력에 대한 공포만은 아니다. 그에는, 군부독재의 탄압과 검열, 교체되지 않음으로 하여 정부 자체와 동일시되는 ‘영원한 여당’, 그리고 그러한 지배적 현실로부터 체화된 두려움 자체 뿐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측면, 즉 사회적 상향이동(social upward mobility)을 위한 고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시장합리적인 계산 또한 존재한다.  32)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로 시작되는 서울대학교의 교가(강조는 필자)와 그에 깃들어 있는 엘리트적 자의식이다. 이것은 뒤에 언급하게 될 초월적 공공성과 그 담지자로서의 초연적 남성성이 갖춰야 할 것, 다시 말해 국가로 환원된 정치에 가담할 자격이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지목하고 있다. 사실 ‘국립’ 서울대학교가 이토록 힘주어 권장하는 이 ‘이념’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주의, 반체제 사상 등의 ‘불온한’ 어떤 것으로 일반인에게 표상되는 사실상의 ‘정치이념’ ‘이데올로기’ 일리는 없다.  33)이는 상위권 대학에서조차 고전·인문학 관련 과 뿐 아니라 소위 ‘정치적인’ 과(정치, 외교, 사회)가 예전보다 쇠퇴하고, 지방대에 개설되었을지라도 의예과나 한의대 등의 안정된 고소득 전문직으로 가는 경로가 전자에 비해 선호되는 추세로 드러난다. 한편 전통적으로 가장 국가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전문직(legal profession)의 변화는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상징되는 그 내적 층화와 어느 정도의 탈정치화-양적 규모의 확대에 의해 불가피하게 드러나기 마련인-로 나타나는데, 이는 공안검사(국가)와 인권변호사(시민사회)간의 양자택일적이고 정치화된 이분법에 지배되었던 이전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법률전문직의 정치에 개재되는 그 직종의 양적 규모, 층화, 전문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를 비교사회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뤼쉐마이어(Rueschemeyer, 1973) 참조.  34)한동원. 2013. “매우 민생스러운 질문 하나.” 「한겨레21」 2013. 11. 4.  35)프랑스, 독일의 대륙법(Continental law) 체계를 따르고 있는 한국의 사법체계와 영미시민법(Anglo-Saxon civil law)국가 사법체계에서 판사가 수행하는 서로 다른 역할은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는 데 좋은 유추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후자에 있어서 판사는, 정부와 시민이 상대적으로 동등하게 맞서는 선수로서 참가하는 스포츠 게임(사법심리)에서의 일종의 심판으로, 이들은 게임규칙의 준수를 감시하고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에 비해 전자에서의 판사는 그 자신이 심판이면서 동시에 선수로, 시민이 제기하는 법률적 요구와 갈등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군림한다. 따라서 대륙법 전통을 따르는 사법시스템에서는 법에 우선하는 국가, 정치권력의 지위가 어느 정도 노정된다고 할 수 있다.  36)이러한 과정에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개인, 특정한 리더쉽이 어떻게 타인, 매스미디어의 눈에 ‘비치는가’이며, 그 축조된 이미지가 얼마나 진정성(authenticity)을 ‘가진 것으로 간주 되는가’인데, 이 점은 90년대 초반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아직도 종종 정치인의 믿기 어려운 자기술회로 등장하는 ‘마음을 비웠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이론적 진술은 연극무대로서의 사회적 삶, 그 속에서 개개인의 자아의 연극적 연출이라는 고프만(Goffman, 1959)의 고전적 문제틀의 취지를 일종의 ‘극장으로서의 정치’의 공간에 다소 거칠게 적용한 것이다.  37)일각에서 제기되는 ‘세계 대통령’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대통령 후보론은 이러한 표상적 전통에 힘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양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유교적 준칙 중 사실상 ‘제가’는 생략하고 ‘수신’은 ‘치국’, ‘평천하’에 종속되는 것이 바로 유교적 유산이 한국의 현대성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상술한 남성성에 상응하여 수신, 제가는 오이코스, 가내성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사실 그 의의가 상당히 축소되는 양상을 보인다.  38)「검사들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나」, 「여검사들조차 왜 피해자에게 등 돌릴까?: 남성 우월적 조직내에서의 생존전략」(한겨레21, 2014.2.10.). 한편 2012년 19대 총선 이래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에 의해 중용된 많은 여성장관, 여성의원, 여성 정치후보들의 숫자는, 어떤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던 복지국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노익장’들과 ‘성추행범’이 많다는 점에서 큰 무리 없이 반(反)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적 여당과 뭔가 화해할 수 없는 어색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Ⅳ. 가내성의 정치적 부상

       1. 민주화의 불만과 저항적 공중, 그리고 정치사회의 인민주의적 개방

    87년 이후의 사회적 상황은 3저 호황 등에 힘입은 경제성장과 경제구조의 고도화, 그리고 이로서 달성된 소비사회와 중산층의 확대가 중산층을 중심으로 일반대중들을 보수화, 개별화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의 상황은 강요된 세계화로 인한 계층화의 심화, 사회적 안전망의 와해라는 장기적 추세와 더불어 전체 사회체계의 관리에 있어서 정치체계의 반복되는 무능력을 드러내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굴절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IMF경제위기(1997)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서해 훼리호 사건(1994), 성수대교 붕괴(1996), 그리고 더 최근의 광우병 파동(2008), 한미FTA 체결(2006, 2011) 등 일반대중의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연속된 사건들은 정치쇄신에 대한 혁명적 기대와 정치사회에 대한 불만상태를 199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만성적이고 상시적인 부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초월적 공공성과 초연적 남성성의 지배에 기반한 전통적인 엘리트 중심의 공식적 정치사회에 대한 도전은 주지하다시피 재야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시민운동으로 대변되는 사회운동과 시민단체의 발흥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다. 이것은 위의 심의적 공중과 공식적 정치체계에 대비되는, 그와는 어느 정도 독립된 저항적 공중 혹은 비판적 공론장의 발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흐름이 발전시키고자 한 이데올로기적, 거대 담론적 동원에 의거한 준(準)직업운동가들의 ‘운동정치’는 비록 상기한 후원주의적 선거정치, 관료화된 임면의 정치의 세계와는 구분되지만 이 또한 일반대중들의 정치참가의 형식으로서는 접근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거물들의 선거정치에서처럼 전문가와 지식인, 대학생의 사회운동의 정치에서도 학력과 지위, 그에 의거한 명망과 자격은 하버마스의 부르조아 공론장에서 교양(Bildung)과 합리성이 수행하는 역할, 즉 여과(filtering)와 제한의 역할을 여전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공론장에의 참여는 학력과 지위에 근거한 ‘배운 사람들’, ‘거물’들의 몫, 혹은 더 정확히는 배운 ‘남성’, 그런 남성과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층화와 초연적 남성성의 지배라는 기존의 정치 구조화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운동조직들은 그 대중 참여적 저변을 심화하고 확장하는데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39)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치사회, 공론장의 상황은 투표할 대상과 기회가 많아지고,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일반대중들에게 갖기 힘든것이었다. 선거정치 공간의 개방과 시민, 사회운동 단체의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정치문화, 정치참가 양상의 지속성은 강고한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양상, 즉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정치참가(투표 이외의)가 갖는 특정 계층 한정성, 참여적 불평등의 상당히 큰 정도(Kim, 2011; 구자혁, 2011)로 드러나고, 다른 한편 비당파적이고 자기 이익에 추동되지 않는 ‘철인왕(philosopher king)’과 유사한 권위적 부성(父性), 지사(志士)형 지도자와 그에 의해 이끌어지는 관료, 전문가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희구로 재귀하기도 하였다(Kim, 2010).40)

    교육에 의한 위계화에 터 잡은 공론장과 매우 제한적인 정치주체성의 모델의 지배 하에서 일반 대중의 참여적 열망, 행위의 세계(praxis)로의 열망은 다시금 비속한 ‘오이코스의 세계’, 그에 한정된 세계로 되돌려 보내지게 된다. 오이코스의 세계로 보내진 가내성의 요구와 욕망은 가치의 정치의 위선적인 경멸을 감내하면서 어둠 속에서 비공식적인 통로-특히 중앙정치보다는 지방자치의 장에서 더 집요하고 두드러지는-를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고 하거나 혹은 손을 뻗고 줄을 댈 수 없다면 기껏해야 투표불참이나 꺼림칙하나마 차선으로서의 “투표를 통한 복수”(김헌태, 2009)로 방향을 잡게 된다. 이렇듯 고립되고 다소 ‘수동적 공격성(passiveaggressive)’의 태도와 유사한 기층의 감정이 바로 민주화 이후의 대중정치에 내재한 냉소와 환멸의 원천이었다. 이제 정치 ‘청중’들은 어떤 새로운 것이 주장되어도 감흥이 없는 불감적인(desensitized)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심의적 공중과 저항적 공중의 이러한 교착상태, 혹은 후자의 1987년 민주화 이후 상승에 뒤이은 점진적 쇠락의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된 것은 또 하나의 ‘가치의 정치’로서의 저항적 공중의 노력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촉발시킨 최초의 충격, 균열적(disruptive) 사건이 저항적 공중에 의해 발의된 낙천낙선운동(2000)이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납득할 만한 전개 속에 있다. 그것은 지배 권력을 구성하는 성원을 겨냥하는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제도적 정당화 절차를 저해하는 어떤 부정적 의견의 유포, 즉 그런 여론을 형성하는 어떠한 ‘사회적인 것’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지배블록과 정치사회에 대한 저항적 공중의 대담한, 그리고 불법적인 도전이었다. 그것이 가진 파괴력과 놀랄만한 대중의 호응은 이전까지 입법과 정책적 제도화를 주창(advocacy)하는 활동에 의해 그 대(對)사회적 영향력이 ‘상종가’를 치고 있던 시민운동이 그 활동방향을 급전환하여 전체로서의 정치사회에 대한 인민주의적 공격(김원, 2009: 46)을 감행했다는 점에 귀인 될 수 있다. 1차 낙선명단 발표 시 500여개였던 참여단체수가 총선이 끝날 무렵 981개로 늘어났다는 시민단체들에서의 반향에 덧붙여 폭주하는 수만 명의 네티즌들, 일반시민들로 포화상태에 빠진 당시 총선참여연대의 서버, 사이트들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주는데, 이 때 거둬진 후원금은 총 3억5000만원에 이르러 대체로 적자로 끝나던 이런 종류의 연대운동이 흑자로 끝난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낙선률에 의거한 최종수확에 있어서도 전체 낙선대상자 86명 중 56명이 낙선(전국, 68.6%, 수도권, 95%)하였고, 집중낙선대상자 22명 중 16명이 낙선(72.7%)하였다.41)

    이러한 성공이 동시에 역설적인 이유는 이때가 바로 심의적 공중과 저항적 공중 모두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가치의 정치’에 대해 심원한 효과를 갖는, 통제 불가능한 연쇄효과(chain reactions)를 낳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기때문이다. 이때 탈정치화, 비정치성의 상자로부터 풀려난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가내성으로, 낙천낙선운동은 가내화된 개인들이 초연적 남성성의 위계질서에 의해 독과점화된 정치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 믿음을 공유하는 많은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고 또 그들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집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깨닫게 해주었다.42)

       2. 가내화된 생활세계의 정치적 융기: 노사모, 촛불시위, 그리고 유모차 부대

    저항적 공중의 운동정치가 가진 지배적인 표상은 부정의(不正義)한 초남성성(hyper-masculinity)으로서의 권위주의적 부성에 대항하는 또 다른 남성성, 즉 여성화된 시민사회를 (재)활성화하는 정의로운 ‘남성적’ 전위로서의 저항적 공중의 영웅주의와 ‘그들 중심의 연대’였다. 그것이 꿈꾼 세계는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던 ‘형제애(fraternity)’의 세계(Hunt, 1992) 혹은 내적으로 남성 가부장들 간의 권위주의적 위계화로 귀결될 수 있는 조직의 정치, 코포라티즘(corporatism)의 세계였다.43) 이러한 운동정치에는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을 관류하여 작동하던 이중적 젠더화 과정의 산물, 즉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정치, 공적인 것과의 범주적 분리, 대립 구도가 여전히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남성적 국가권력에 의해 여성성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한 반체제세력들의 저항적 공중이 지향한 정치화, 전체 시민사회의 일종의 ‘남성화’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정치화의 노력에는 여전히 시민사회의 가내성을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젠더화된 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가치의 정치, 초월적 공공성의 또 다른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사회적인 것과 분리된 가내성, 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박탈(disenfranchisement)과 정치적 무책임성을 정당화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정치이해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했다.44)

    반면 새로운 시민정치의 개시를 추동한 것은 오히려 여성성으로 간주되었던 사생활과 가내성을 수용하고 그 모습 자체로 스스로를 정치주체로 주장하는 ‘가내성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노사모가 개시하고 이후의 시민정치적 정치발전에서 활성화된 특징적 면모는 일반시민들이 정치를 자신의 가족, 아이들과 더불어 레저와 여가 생활을 즐기는 것 같은 환희와 나눔의 공간으로 지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시민사회의 정치참가의 역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지금까지 이론적으로 충분히 맥락화되지 않아왔다.

    이러한 모습들이 가히 ‘혁명적’이라고 불릴만한 이유는 그것이 처음으로 정치를 가내화된 어떤 것으로 가내화된 주체성이 실천하는 것으로 전시하고 장려했다는 점이다. 앞서 제시되었듯이 그 이전의 정치는 집안을 대표하는 남성가부장이 배우자와 자녀를 집안에 두고 나와서 다른 남성과 함께 민족, 국가, 개혁, 혁명과 같은 ‘큰일’을 논의하는 ‘바깥일’에 해당되었다. 여기에 집안일이나 사사로움, 개인적 감정이 놓일 자리는 없으며, 그 이유로 가족은 반국가적이거나, 최소한 순수한 공공성을 향한 의지, 결연한 투쟁적 의지를 무디게 하는 어떤 것, 본질적으로 불순(不純)하고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위치 지워져 왔다.

    정치의 가내화, 정치화된 가내성의 시작은 2002년 3월의 광주 지역 민주당 국민 경선장에 아이와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소풍을 하며 투표 독려와 노무현 지지를 호소한 노사모의 애기아빠 혹은 애기엄마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45) 이들의 참여는 정치사회 내의 위계화된 질서를 개인으로서 타고 올라가는 방식(정치입문과 동일시된 정치참가)이나, 혹은 투사(鬪士)주의적인 헌신이 요구되는 반(半)전업적 운동조직 속에서의 활동가로서의 정치참가와는 다른 것이었다(노혜경 외, 2002: 159). 이들에게서 정치는 이념적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엄숙주의적이지 않고, 개인으로서의 생활과 내면적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자발적인 시간 제공과 부담 없는 협력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전업적이지 않다. 그것은 ‘전인(全人)’이 아닌 부분적 인간으로서의 소시민의 사적 생활에 머무르는, 배우자와 함께 아이를 키워야하는 생활인 으로서, 그리고 그 생활세계 속의 감정과 바램을 주장하는 정치의 직접적 ‘실행’이었다. 요약하면 참여 이후에 가정으로 돌아가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며 성적에 신경쓰고 재테크에 열중하는 이들 참여자들은 정치와 사회진보를 부업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아마추어’이며 이들이 정치하는 방식은 ‘프로답지 못하다’.46)

    초연적 남성성의 거물들, 전통적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위계화된 정치세계와 그들의 ‘짜고 치는’ 엘리트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치질서를 경악하게 한 것이 또 다른 ‘프로’인 조직화된 이념 중심의 사회운동의 정치가 아닌 바로 이 ‘아마추어’, 현역이 아닌 ‘예비군’의 정치였다는 데에 포스트민주화의 한국정치가 자아내는 경이와 수수께끼가 있다(“우린 예비군이야, 군기 완전히 빠졌어, 어, 근데 니네들 왜 우릴 그렇게 무서워해?” (노혜경 외, 2002: 158).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구성원은 무엇보다 자신이 획득한 교양과 인적 네트워크에 힘입어 공화주의적 자신만만함과 높은 정치효능감에 의해 출사표를 던지고 사회단체에 명함을 내밀며 학회에 출석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집되기 이전의 이들은 일상생활의 시시비비와 사소한 이해관계의 계산에만 몰두하고 정치적인 것에의 연루를 기피하며 사생활의 속물적이고 기민하지만 공적으로 무기력한 세계 속에 침잠하던, 고립되고 자기 속에서 침묵하던 사사화된 개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정치참가는 등산, 낚시, 골프, 가족 야유회와 언제나 대체가능했던 투표라는 형식이 아닌, 자원봉사와 모금운동, 그리고 ‘번개’ 공지에 의거한 깜짝이벤트에의 참여라는 만개한 형식의 정치참여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것이었다. 소셜미디어를 매개한 가내화된 정치주체성의 이러한 최초의 결집은 한국 정치문화의 역사에서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정치 참가의 민주화’, 혹은 ‘정치주체성의 민주화’라고도 할 만한 것이었다.47)

    이제 2000년대의 시민적 정치참가는 그것이 대중적 반향을 증폭하는 순간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운동의 제기에서조차도 예전부터 더 큰 정도로 학생, 도시중산층, 지식인, 비전통적 자영업자 등이 그 주체로 드러나고 그들에 의한 특정한 물리적 공간의 점유와 축제적 양상이 되어갔다.48) 그리하여 급기야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에 이르면 이제 주체는 단순히 자녀를 둔 학부형 남성 뿐 아니라 여성, 주부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소울드레서’, ‘쌍코’, ‘앞치마 연대’, ‘배운녀자’, 그리고 프로축구 서포터즈, 시위하는 예비군들, 간호사들의 모임, 그리고 ‘촛불소녀’로 불리는 10대 소녀들까지 확장되었다(김영옥, 2009; 목수정, 2008: 143-153; 이동연, 2009).49)

    가내성의 이러한 정치화는 단지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내화된 ‘형식’ 혹은 참여 주체의 인구학적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속에서 제기되는 목표, 그리고 그 목표의 근저에 깔려있는 어떤 세계에 대한 바램이라는 측면에서도 역시 가내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되는 정치의 중심에는 생산과 일터, 즉 ‘근로남성’, 노동자, 피고용인과 그들의 작업장, 사무실보다는 퇴근한 노동자, 화이트칼라, 시민이 있었고 또한 거주지로서의 도시가 주요무대인 전업주부, 학생들, 그리고 이들이 희구하는 지역공동체와 국민공동체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도 ‘정치의 풍경’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러한 모습들의 핵심을 포착하는데 탈인습주의나 탈권위주의, 혹은 탈물질주의와 같은 서구주의적 개념이상이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개념들이 이들 행위자의 행위의미가 어떤 이념적이고 거창한 목표에 지향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융기는 핵가족화와 도시화가 더욱 진전된 한국사회에서 개개인의 삶의 자기결정에 특히 유의미한 단위인 핵가족과 비혼개인들의 행복추구의 노력을 ‘감내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좌절시키는 정치사회의 전횡과 무능력, 좀 더 전통적인 표현을 쓴다면 ‘대표성’, ‘대의(代議, representation)의 위기’ 혹은 ‘불통(不通)’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되었지, 거창하게 인습, 권위, 물질주의 등과 같은 것에 대항하는 지성화되고 이념화된 반대로 시작되지 않았다.50) 따라서 그러한 자발적인 참여의 열망과 운동이 꿈꾼 세계는 보수언론의 집요한 반(反)정치의 수사에 대항하여 진보적 지적 장이 제기한 ‘저항의 정치’, ‘운동의 정치’가 요구하는 그런 세계와는 어느 정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 포퓰리즘적이지도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다시 말해 최소한 표면적인 차원에서는 현재의 세계와 확연히 다른 어떤 새로운 사회조직,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시장 속에 놓인 개별화된 주체로서 (자본주의적)경쟁과 능력주의의 현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성실히만 인생을 영위한다면 자신의 자리가 확보되는 그런 사회, 개개인의 행복추구와 관련된 그럭저럭 승복할만한 사회적 규칙이 존재하고 또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고 있는 그런 사회였다. 그것은 고졸 이하의 학력이어도 빈농과 선반공의 자식이어도 장애인, 독거노인이라 할지라도 서울과 수도권에 살지 않아도,51) 최소한의 존중을 받고 겨울에 보일러를 꺼놓고 살지 않아도 되며, 소고기를 사먹을 때 원산지 표식을 보고도 여전히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에 대한 바램이다.

    이것이 바로 ‘상식’과 ‘원칙’ 등과 같은 슬로건의 반복적인 출현 밑에 놓여있는 대중적 열망의 다소 항상(恒常)적인 부분이며,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매우 가내화된 꿈과 바램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8대 대선의 예비국면에서 당시 손학규 민주당 경선 후보에 의해 제기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주었던 커다란 사회적 반향과 정치마케팅으로서의 성공(강준만, 2012: 347-51)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슬로건과 극명히 대조되는 한국사회에서의 현재적 삶은 일상화된 잔업, 특근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장시간 노동시스템, 그리고 그에 덧붙여 예전보다 더 증가한 진학과 취업, 실업, 재취업의 압박과 함께 폭발적으로 증대된 자기계발의 노고로 인해 단적으로 ‘저녁이 없는 삶’, 가족에 얽매여 살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찾기 힘든 아이러니한 삶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의 전형적이고 상징적인 담지자는 그간 시민정치의 논의들이 주목한 소셜미디어나 그 속의 주요 행위자 중의 하나인, 정치적 룸펜, 폐인이었다가 다시 패션, 비디오게임, 취미에 변덕스럽게 다시 몰두하는 사이버공간의 “잉여인간”(백욱인, 2013)만은 아니다. 공론적 (난)장이라는 그러한 새로운 온라인 담론공간에서 발화된 오프라인의 현실과 열망이 지향하는 바는 새로운 가족주의, 핵가족주의적 가내성의 표상인 ‘기러기 아빠’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가 가진 다면적 형상을 통해 우리는 정치화된 가내성의 현재형을 보다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3. 가내화된 사회적 주체성의 상징, 기러기 아빠

    60년대 이래 한국사회의 산업화에 덧붙여 90년대 이후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사회변동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한국적 사생활의 주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러기 아빠 혹은 ‘기러기 아빠적인’ 가내화된 의식은 그 자체로도 매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형상을 갖고 있음이 충분히 유의되어야 할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증가되었던 해외이민의 이러한 트렌드에서 ‘영어광풍’, 자녀교육에서의 ‘올인전략’으로 등장하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점, 즉 과잉교육열이라는 지배적 측면(김은희, 1995; 김동춘, 1998)은 분석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녀의 의사와 감정의 자율성이 존중되지 않는 기묘한 방식의 매우 한국적인 ‘자녀중심’ 가족의 한 극단화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으며, 또한 “‘희생’을 통해 가족번영을 꾀하는 가족의 통솔자”(이재경, 2005: 252)로서의 이전의 전통적 남성성의 유산 또한 짙게 깔려 있다.52) 이를 반영하듯 기러기 아빠 혹은 그 주요부분으로 추정되는 민주화세대, 경제위기세대의 남성들은 이전 부성, 남성성과 완전히 단절된 남성성을 구현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53)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트렌드에서 ‘청운의 꿈’, ‘계층상승욕구의 아이를 통한 대리만족’(이제 국제화된, 즉 글로벌 엘리트, 글로벌 시티즌에의 꿈)과는 다른 어떤 것을 변별할 수 있다. 그것은 지위와 학력의 대물림, 세습이 아닌, 한국의 교육현실, 사회 환경에서 아이가 겪는 고통과 불합리함, 그리고 그들에게 닥칠지 모를 위험과 그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한 선택으로서의 측면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측면은 비록 여유 있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현재 공동육아와 자연유치원, 생협의 발전과 착근으로 그 ‘국내적’ 해결의 통로를 따라 성장해왔으며 이제 상당히 일반화되었다.54)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초의 위험 사회적 사건(1994년 서해 훼리호 사건)이 일어난 지 이미 2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안전관리 체계의 만성적 문제들, 그리고 정치체계의 고질적 무능력에 기인한 그 해결의 난망함으로 그러한 면모는 점점 확산, 심화되어가고 있다.

    이 측면에서 관찰된 기러기 아빠 세대에게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는 이전의 부성과는 다른 정서적으로 친밀한 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아버지로서의 자기평가의 출현과 상승(김혜영, 2011)이다. 이러한 양상들이 바로 “가내화된 남성성(domesticated masculinity)”(구자혁, 2012a)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새로운 양육태도(parenting style) 혹은 그것이 일부인 새로운 가족주의의 특징적 면모로 자녀에 대한 돌봄이, 그리고 세속적 성공이 아닌 자신과 세계와의 도덕적 관계가 자신의 삶의 개인적 의미에서 이전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남성성, 부성, 모성의 등장과 그에 상응하는 가정생활의 모습이다.55) 그것은 아무리 부도덕하고 얼굴 한번 볼 수 없어도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되는 그런 이전의 ‘유능한’ 아버지와는 다른, 혹은 ‘바깥세계’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집안에서는 권위적이고 자기 일과 야심의 성취 외에는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는 다른 좀 더 가내화되고 내면적인 아버지의 상의 출현이다.

    이러한 새로운 아버지, 남편의 상은 이전에 팽배한 남성성(초연적 남성성의 대중화된 버전으로서), 즉 남성의 ‘대외적 역할’이 강조되고 그 외부에서의 성공이 남성됨, 부성의 성취에 있어 결정적인 남성성(김은희, 1993), 그리고 그 담지자의 ‘탈가내적’이고 ‘활발한’ 사회생활, 그에 상응하는 ‘무심한’ 가정생활과는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한국 중산층 남성의 전통적인 모습은 상사와 거물들에게 발탁되기 위해 잔업과 밤샘을 하며 전력을 다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동창회나 향우회 등 온갖 모임에 나가 관계망 구축에 골몰하거나, 간혹 올 수도 있는 자신들의 성취와 지위상승을 자랑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즉 알파메일(alpha-male)의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남성의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모습의 일차적인 구조적 요인은 사생활을 통째로 저당 잡으려 하고 동시에 공적이건 사적이건 어떤 인맥과 경력도 조직을 위해 활용할 준비가 되어있기를 바라는 한국의 기업·조직문화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 속에서의 성공을 위한 공리적 계산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 되고 사적인 것 모두를 흡수해버리게 된다.56)

    자본주의적 축적의 드라이브와 흡사한 가히 허무주의적(nihilist)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추구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거나, 혹은 노력했어도 손이 닿지 않게 된 상황을 패배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용하는 데에 바로 새로운 남성성의 특징이, 그리고 교육, 육아와 관련된 새로운 가족주의의 몇몇 양상이 존재한다. 이들과, 그리고 이미, 늘 개별화된 오이코스적 가내성에 포박되어있었던 그들의 배우자가 어느곳에서도 지배하는 우두머리 남성, 즉 알파메일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고 인정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부과하기를 중단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들의 정치적 인간으로의 ‘전향(conversion)’과 승화는 준비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국민경선장과 촛불시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 댓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샐러리맨 아기 아빠, 아기엄마, 홀로 사는 노인, 장애인들의 모습으로 먼저 등장했다.57) 초월적 공공성과 초연적 남성성의 부성이 그 중심에 있는 뿌리깊이 젠더화된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이 쇄신·전환되는 과정은 이렇듯 가내화된 성인들의 자기수용(self-acceptance)에서 시작되어 이들의 자기주장, 그리고 자기혁명으로 전이(轉移)해가는 역설적인 과정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놓인 자리에서 정치를 실천하고 공민(公民)이 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려는 바램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이 가진 도덕적 성격에 대한 예민함에 기반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에 대한 팽배한 불만에 의해 증폭되고 노무현이라는 ‘숭고한 패배’, 강력한 인민주의적 상징을 매개하여 극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 새로운 사회적 주체성의 양식, 정치적 태도는 이전에 팽배했던 다양한 귀속적, 이념적 집합체들의 도덕적이고 사회규범적인 압력으로부터 탈피해나가는 일종의 ‘도덕적-정치적 개인주의(moral-political individualism)’로 간주될 수 있다.58) 사회적 압력에 대항하여 ‘개별적 양심(individual conscience)’이 한 개인의 도덕적 판단의 궁극적 기초로 대두되는 이러한 근대적 개인주의의 발전의 한국적 양상이 가진 정확한 성격은 그것을 잉태한 핵가족주의적 가내성의 ‘자궁(子宮)’과 한국사회의 문화적 토양 내에서 그것이 차지했던 고유한 위치에 의해서만 비로소 충분히 음미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해외이민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 권장되는 개인적 선택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한 선택은 한 개인의 문화인종적(ethnic) 뿌리, 지역적, 연고적 배태성(embededness)을 강조하는 전통문화의 찬양, 고향을 떠난 ‘객지(客地)생활’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온갖 형태의 민족주의적 정서 뿐 아니라, 남겨질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자매와의 우애, 오랜 세월 축적된 지인들과의 관계 유지, 국민으로서의 추상적 충성심 등과 같은 ‘사회적’ 요구들에 의해서도 효과적으로 억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59) 공론화된 ‘기러기 아빠적’ 사례들 중,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후 메달과 훈장을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 간 전(前) 국가대표 하키선수 김순덕 씨의 선택은 국민국가에 대한 충성(committment), 국민적 정체성, 사회의 기능적 요구에 대해 개인적 요구를 우선시키는 사회의식의 변화를 다른 어떤 해외이민의 사례보다도 잘 보여준다. 그것이 내포하는 강렬한 상징성은 기존의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구조 하에 놓여왔던 해외이민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적 헌신을 진작하고 고양시키는 임무의 첨병이라 할 국가대표 메달리스트에 의해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연원한다.

    해외이민과 마찬가지로 도시중산층의 아파트적인 삶의 세계 그리고 그에 지배적인 ‘자녀 중심적 핵가족 문화’는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문화비평에서 공통적으로 부정적 논평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그것은 나름의 정당한 근거를 갖는다. 이들의 ‘도회적 행위방식’은 그 순수형에 있어서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추석 때 제사하러도 오지 않는’ 호들갑스러움과 유별남, 그리고 놀이공원 등 공공장소(public spaces)에서 다른 집 아이들을 마구 밀쳐내는 ‘이기주의’로 흔히 표상되곤 한다. 이러한 자녀 중심적 혹은 배우자 중심적 핵가족 문화의 대립자로서 그것을 이기적인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유사 확대가족(extended family)주의적 관계 윤리(relational ethics)의 태도’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의 핵심은 그것을 체화한 전통적 남성성과 기러기 아빠의 가내화된 남성성을 대비시킴으로써 보여 질 수 있다.

    전통적 남성성은 타자, 즉 의무로 묶여진 부모나 충성으로 묶여진 국가, 그리고 위신과 평판으로 묶여진 친구, 동창, 이웃, 마을에 대해 자신의 ‘외관(appearance)’의 ‘흠집 없음’을 유지하는데 집중되어 있는 남성성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남성 가부장의 전제적 권한과 중심성, 그리고 가족 내에서 그 위엄을 침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그러한 남성성의 유지는 개인의 욕구와 감정, 배우자, 자녀, 그리고 이로 구성된 개별가구의 이익에 대해 핵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가능하다.60) 따라서 전통적 남성성과 가내화된 남성성은 양자 모두 그 행위가 도덕적 관심에 의해 높은 정도로 동기화됨에도 불구하고, 그 도덕의 내포적 핵심이 전자에 있어서는 상술된 관계적 윤리에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기 보다는 정면으로 대비된다.

    전통적 남성성이 우선시하는 상술한 ‘바깥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 원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 이웃, 동료, 동기, 동창, 나아가 특정 도민(道民),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전체 사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체계 속에서 이기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자녀중심적, 핵가족적 가내성의 요구와 주장은 단지 ‘볼썽사납고’ ‘근본을 모르는’ 것일 뿐 아니라 반(反)사회적인 것으로까지 의미화 된다.61) 새로운 시민정치의 사건들에서 전업주부들과 샐러리맨 아빠의 활발한 참여가 큰 의미를 갖는 까닭은 이들이 “공공성으로서의 정치의 장에서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감히 주장하려 한다”거나 “개인적 이익을 이유로 전체가 추진하는 일을 감히 막으려 한다”는 전통적인 ‘이타주의적’ 공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가 바로·지금·여기서 문제가 됨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때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불운에 걸려들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조용히 자신과 자기가족만을 위한 해결책을 열심히, 몰래 추구하던 이전의 반사회성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초연적 남성성의 모델이 처방하는 ‘개별적 상승’(사실상 “이탈(exit)”(Hirschman, 2005)을 통한 물리적 초월)의 경로가 아닌 바로 가내성의 정치화라는 경로를 택했다.

    도시중산층의 멘탈리티와 행위양식은 그것이 아무리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정확히 바로 그 이유 때문에-반(反)사회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이를 통해 개별성에 대한 존중, 이해관계의 합리적 조정, 그리고 무엇보다 한 집합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울릴 공간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는 그 이유때문에 중요하다. 무엇보다 대중정치의 장에서 그러한 도덕적, 정치적 차원의 개인주의의 공간은 그러한 중간단계를 단순히 초월하거나 우회함으로써 건설될 수 없다.62)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국정치를 짓눌러 온 사회문화적 토대를 균열시킬 개개인의 양심, 하지만 단순히 몇몇 반체제적 인사의 영웅적이고 고독한 전유물이 아닌 대중적 규모의 협력적 작업과 집합적 도덕으로 스스로를 현실화하고 마침내 정치적 의지(political will)로까지 결집되었던 개인적 양심의 ‘인큐베이터(incubator)’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39)김동춘(1999: 55)이 소개하는 참여연대 아래층 식당주인의 말은 이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들은 교수나 변호사들처럼 잘난 사람들만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김정훈(2004: 35)에 의하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은, 10만의 회원을 가진 환경운동연합이나 활성화된 다른 여러 사회, 시민단체들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근거 없는 오해거나 음해이지만,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풀뿌리 지역운동의 발전이 더디다는 의미로 이 용어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정당한 지적일 수 있다.” 즉 시민사회운동이나 민중운동 모두 일반시민, 일반회원의 주도적 참여가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40)김강훈(Kim, 2010)은 이러한 경향을 “스텔스 민주주의(stealth democracy)에 대한 선호”로까지도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정치에 대한 보다 온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축, 즉 인민주의, 평등주의와 그러한 위임주의가 갈등하고 결합하는 역동성을 모두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사회의 대중적 정치의식의 이러한 측면은, 정치가 이전의 법률가로서의 진보적인 이력이라는 실질적 근거를 어느 정도 갖기는 하지만, 문민정부(1992-1997)와 당시 신한국당의 정권연장 전략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각된 이회창의 깨끗한 정치, ‘대쪽’의 이미지가 갖는 호소력, 그리고 ‘착한 안철수’ 이전에 등장했던 노무현의 ‘원칙 중심의 사회’나 ‘클린문국현’ 등의 구호가 가졌던 호소력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이런 측면에서 문국현 지지자와 이회창 지지자의 동근원적인 상호 겹침(overlapping), 대체적 관계에 관해서는, 17대 대선 이전에 실시된 여론조사결과(2007년 11월)에 대한 장우영·박창규의 분석(2007)을 참조할 것.  41)이하 임혁백(2000: 343-46), 조대엽(2005: 218-220) 참조.  42)이미 많은 연구들이 보여주었듯이 사태의 이러한 전개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이나 ‘집합적 효능감(collective efficacy)’과 같은 개념적 도구는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그러한 효능감의 발생 기제와 작동 맥락을 적절히 이론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이미 발생한 효능감의 ‘상태(feeling efficacious)’에 대한 사후적 합리화, 기술에 불과하다. ICTs와 집합적 정치 효능감의 상호관계에 내재한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 대안적인 이론적 모델로 구자혁(2012b: 4절; Koo, 2011: chapter 2)을 참조할 것.  43)권명아(2000)는 형제애의 가족적 상상에 기반하여 사회를 재편하려는 90년대 노동운동의 열망을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방현석(1990)의 『내일을 여는 집』을 지목한다. 그녀에 의하면 신경숙(1993)의 소설은, “언제나 세상 밖에다 침을 뱉고 있는” 80년대의 ‘친부살해적인’대학생 오빠들, 학교 선후배들의 공동체라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그것을 동경하는 젊은 여성들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형제애라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 종속된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권명아, 2000: 제4장).  44)이런 맥락에서 ‘모성화된 담론(maternalized discourse)’이 사회운동의 추진력으로 작용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활동(Han and Ling, 1998: 71-72)은 상당히 예외적이라고 할수 있으며, 가내성의 구성요소가 저항적 공중에 의해 정당한 정치주체성의 자격을 승인받은 몇 안 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45)노혜경 외(2002: 166-177)에 수록된, 당시 국민경선장에 와서 활동한 한 노사모 회원의 현장보고 참조.  46)이것은 “예비군”, “아마추어”로서의 당시 참여자들의 자기인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노혜경 외, 2002: 140-165), 이러한 ‘아마추어 정치’의 등장은 선진민주주의사회(advanced democracies)에서는 오래전에 출현한 현상이다. 그 일례로 미국의 대도시정치(metropolitan politics)에 대한 초기 사례연구인 윌슨(Wilson, 1962)을 참조할 것. 한편 90년대 중반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광고 카피는 사실 한국적 현대성에 매우 전형적인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취미, 여가 생활조차 대학입시를 준비하듯이 최고의 장비와 고도의 경쟁심, 진지함을 가지고 ‘프로처럼 수행하는’ 현대 한국인의 모습에 그것이 잘 부응하기 때문이다. 박민규(2002)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이러한 한국적인 ‘프로의식’, 소위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비성찰적 골몰을 거부하는 X세대적, 탈물질주의적 지향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47)대통령 직선제와 지방선거의 실시라는, 민주화 이후 선거공간의 급격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선거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상층에서의 정치적 거래를 할 수 있는 정치엘리트나 고위관료, 당직자, 혹은 명망 있는 지식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주로 지방 유지거나(혹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무런 신념이나 헌신이 없이 대부분 아르바이트로서 동원된 계절 임시 노동자로서의 반(半)실업자, 대학생, 전업주부들이었다. 하지만 “노사모의 이러한 참여형태로 인하여 정당 행사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 “사람들이 정당행사를 연상하는 낯익은 풍경”, 즉 “한복을 입은 아줌마들이 인사를 하고 배 나온 아저씨들이 어슬렁거리고, 여기저기서 막걸리를 마시고, 집단적으로 모여서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풍경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윤상철, 2002: 124).  48)물론 한국적 상황에서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이 사실상 촛불시위로 하여금 촛불 ‘문화제’라는 문화행사로서의 기이한 외피를 입게 하지만(홍성태, 2009), 여전히 이러한 유희적 성격은 새로운 집단행동의 특징적 패턴, 그리고 그것이 온라인 상호작용, 온라인 공동체와 공유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49)80년대 중반 이래 진행된 사회변동에 의해 또한 가중된, 이러한 선거정치 바깥의 정치참여 형식에의 참여주체 상의 이전과의 결정적인 인구학적, 사회경제적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지식인층의 경우, 이전보다 양적으로 더 확대되고 그 위광도 축소되어 덜 독점적이 된 결과, 이들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사회의 중상층을 구성하지 않게 되었다. 학생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중고등학생들의 참여가 증가하고 연령이 점점 내려가는 것이 확연한 추세이며, 특히 대학생은 대학의 양적 확대(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의 시행으로 인한)로 인해 더 이상 특권적이자 상대적으로 ‘한가했던’ ‘아방가르드’(Avangarde, 혹은 더 일반적이고 유행했던 용어로는 ‘전위’[前衛)])로서의 대학생이 아니게 되었다.  50)물론 연구자는 행위자의 개인적 의미, 사회적 운동의 자기 천명적 목표와는 독립적으로 그에‘사회적’ 의미, 이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 제기되는 이념적 목표, 실천적 슬로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뿐 아니라, 동시에 반대로 해당 행위가 지키고자 하고 꿈꾸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그와는 동떨어진 이념의 레이블을 부과하는 것을 또한 경계해야함을 의미한다. 보편적 ‘사회(the Society)’의 이론가로서의 사회학자들에게 좀 더 행위자 중심의 사회이론, 사회학적 실천의 방법을 제안한 뚜렌(Touraine, 1981[1978])은, 행위자들로 하여금 그들 행위가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을 사회학의 목표로 주장한 ‘사회학적 개입(sociological intervention)’의 방법을 주창하고 있다.  51)김용호(2003)는 노사모가 이례적으로 지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으로 확산된 몇 안 되는 정치운동의 특징을 지님을 지적한다.  52)이 점은 기러기가족을 먼저 제안하는 것이 엄마보다 아빠인 경우가 더 많다는 연구결과에서도 함축된다(김양희, 장온정. 2004. “장기분거가족에 관한 탐색적 연구,” 이재경(2005: 253)에서 재인용). 어쩌면 조기유학이라는 사회문제적 상황 그리고 이를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려는 결정은, 가내화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사생활, 개인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갖지 못한 그리고 떠받들려지고 성화되지만 궁극적으로 소득의 원천으로서만 기능하면서 이미 다른 가족구성원들로부터 정서적으로 저 멀리 격리되어 존재하는 “돈 버는 기계”, “고등하숙생”(이광규, 1996)으로서의 고전적인 한국의 부성에게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동전의 또 다른 면으로, 오직 가내성의 총책임자로서 남편보다는 자녀와 더 결연한 유대, 운명공동체의 의식을 가진 한국의 모성만이 이러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한국 가족의 내적 동학이 조기유학 자체의 빈도 뿐 아니라 기러기 아빠, 조기유학 가족에게서 빈번히 발견되는 아버지의 극심한 소외감과 궁극적인 이혼의 원인일 것이다.  53)여러 경험적 분석에 의하면, 이 세대에게도 공적 노동의 담당자, 생계부양의 제1차 책임자로서의 남성성은 강한 영향을 미치며(김혜영, 2011: 361), 그것은 원가족(분가 혹은 독립 후 부모, 형제)과의 강한 연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측면이 강하다(김혜경, 2013).  54)구체적인 공동육아운동의 전개에 관해서는 그에 대한 초기의 현장연구(field study)인 류경희(2004), 정치적·일반적 개관으로는 공동육아와 생협의 성장을 풀뿌리운동의 일환으로 고찰한 김정훈(2010a) 참조. 한편 김문숙(2009)은 ‘노작’과 ‘자연’의 가치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공동육아운동의 대안적 현대성으로서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해진(2012)은 수동적 소비자에서 ‘먹거리 시민권’으로의 전환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55)다른 한편 아버지 돌봄의 증대로 인해 발생한 젠더적 질서의 긴장과 남성성 재생산의 복합적 양상을 세간의 ‘아버지 자녀양육서’에서 드러난 아버지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제시한 조윤경(2012)도 참조할 것.  56)막스 베버의 잘 알려진 진술에 빗대어 표현한다면, 삶의 합리성의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이 자율화되고 기계적으로 자동화된, “개인의 「행복」과「효용」에 대립되는 전혀 초월적이고 단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알파메일을 향한 이러한 추구는 “이러한 동력기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생활양식을 압도적인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그 마지막 화석연료가다 탈 때까지 아마 규정할 것이다”(Weber, 1988: 22, 135). 서구사회, 특히 미국사회에 처음 이민이나 유학의 형식으로 발을 딛게 된 한국의 기혼 남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화적 충격 중의 하나는, 현지의 기혼 남성, 특히 백인중산층남성의 사생활이 압도적으로 핵가족의 가내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사생활은, 평일저녁과 주말은 당연히 자신의 직계 가족과 보낸다는 의미에서 결코 ‘사회적’이지 않고 동성(同性)간 연대적 성격도 한국에 비한다면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 이민생활을 “지옥 같은 천국”이라고 한탄하는 한인 남성들이다(이에 반해 한국에서의 생활은 “천국 같은 지옥”이라고 흔히 회고된다). 단지 선진 서구사회뿐만이 아니라 1인당 GNP가 한국보다 훨씬 낮은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남성에게는 그런 가내화된 사생활과 가족과의 시간이 허용되는데, 그러한 차이는 칠레와 같은 나라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려는 한국기업이 현지에서 겪는 마찰 등으로 종종 언론에 보도된다. 단적으로 평균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인 네덜란드는 연간 노동시간이 1379시간으로 한국(2116시간)보다 700시간 이상이 짧은(201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즉 한 사람당 1년에 90일 가까이 적게 일한다(한겨레21, 2014.2.17.).  57)노혜경 외(2002: 274-317)에 수록된 노사모 회원들의 블로그와 자기고백 참조.  58)‘숭고한 패배’라는 관념이 고전주의, 계몽주의와 대비되는 낭만주의(Romanticism)적 지적 전통에서 특히 중시되는 맥락, 그리고 그것이 가진 정치적·실존적 함의에 관해서는 벌린(Berlin, 2005) 참조. 뤼쉐마이어(Rueschemeyer, 1986: 153-55)에 의하면, 상기한 도덕적-정치적 개인주의는, 근대사회의 점증하는 사회적 분화에 대응하여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의 기초로 작용하는, 파슨즈(Parsons, 1989)적 의미의 ‘가치 일반화(value generalization)’라고 할 수 있으며, 개별화된 시민들이 각자의 자기 이익 추구,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넘어서 평등한 시민으로서 국민적 공동체라는 집합체에 통합되는 근대적 개인주의의 또 다른 발전적 측면을 표상한다.  59)따라서 해외이민이라는 개인적 선택은, 부유층을 제외한다면 경제사범이나 정치범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는, 가족, 이웃, 친우, 친척, 동창 등 한 개인이 알던 모든 사람과 조국에 대한 배반 혹은 일종의 ‘야반도주’와 같은 어떤 것으로 인식되던 것이 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감은 더 이상 그리 강력하지 않은데, 그것은 세계화에 의해 한껏 권장되고 휘황찬란해진 한국적 현대성의 또 다른 강력한 정신적 추동력, 즉 한 개인의 국제적 성취와 그에 대한 민족적 일체화라는 정서에 의해 해소되어 해외이민은 국가적, 가족적 가치에 특별히 반(反)하지 않는 선택으로 간주되고 있다.  60)예컨대 만약 ‘제사(祭祀)를 누구 집에서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논란이 가족 내에 발생했을 때 전통적 남성성의 경우는, 차례를 지내는 것은 배우자가 당장 몸져누워 있어도 세계의 운명 혹은 자신의 ‘인간성’의 본질이 걸린 것처럼 중차대한 의무로 다가올 것이며, 그 이전에 그런 논란 자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경멸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61)‘아줌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90년대 중반 이후 “내 아이는 다르니까”라는 유아용품 광고 카피로 대변되는 신세대 주부의 ‘미시 스타일’은 언론과 지적 장의 집중 포화를 맞아왔으며, 그것의 핵심은 반(反)사회적이라는 데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적 지적 장과, 전통적인 동시에 산업화 시대의 가치를 대변하는 보수적 언론은 신세대의 행태, 담론에 대한 논평에서만큼은 자주 유사한 시각을 보인다는 점이다. ‘신세대,’ ‘소비사회’ 그리고 그와 관련된 ‘합리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좌파주의적, 진보주의적 공중이 가지는 일반적 거부감과 그와 관련되어 관찰되는 좌·우의 묘한 담론적 수렴에 관해서는 이동후·김영찬·,이기형(2005) 참조.  62)러시아 혁명(1917)을 집합적 열광과 이타주의의 용광로로 만들어냈던 많은 꿈들이 한 세기도 그 ‘외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러시아 마피아와 푸틴의 지배라는 잔해를 남긴 데 그친 역사의 궤적은 이러한 교훈을 간접적으로나마 함의한다.

    Ⅴ. 결론- ?소시민?의 정치 ?혁명?과 사회과학의 ?이론적? 과제

    이 글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일반시민들, 유권자들 속에서 분출한 국민적 열망과 ‘바램’의 이면에 놓인 추동력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한국의 근대사, 현대성의 전개속에서 형성된 한국 정치의 구조적 측면 중 하나를 개념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2000년대 이후의 대중적 참여의 양상을 ‘탈젠더화된 시민사회’ 그리고 ‘핵가족 주의적 가내성의 정치적 부상’으로 개념화하였다. 이러한 명제들은 단순히 이전에 사회적 의미의 유추적 체계(metaphorical system of social meaning) 속에서 사적이고 가내적인, 그래서 여성적인 것으로 위치 지어 졌던 시민사회와 그 속의 개인이 정치화되는, 즉 시민사회의 ‘탈여성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다른 대안적 개념들로도 포착 가능한 ‘시민들의 민주적 융기’에 대한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현학적인 재개념화 이상이기를 의도한다.

    궁극적으로 이 글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분석된 변화가 심의적 공중과 저항적 공중에 의해 대변되는 공화주의적 ‘가치의 정치’가 기대하듯, ‘소(少)’시민이 ‘대(大)’시민으로 바뀌는 것, 혹은 단순히 아담스미스(부르조아적 시민)가 루소(정치적 공민)로 교체되는 과정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시민정치의 요체는 가내화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 존재에서 출현하는 요구와 감정을 정치사회가 반영하기를 감히 ‘분수를 모르고’(?) 요구하기 시작한 정치화된 ‘소시민’의 등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이 비록 민주화나 혁명과 같은 거창한 깃발을 들고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그 사회변동적, 정치적 의의가 심대한 것은 단순히 ‘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한국의 정치적 현대성을 구성하는 제도적, 실행적 그리고 상상적 측면 모두를 규정하던 권위주의적, 엘리트주의적, 남성주의적 그리고 집단주의적 정치문화를 균열시키는 “개인적 주체(personal subject)”(Touraine, 1996b), 한국 근대정치사에서 상당히 드문 그러한 주체의 대중적 융기,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포착된 정치(문화)적 혁명을 그것이 표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역사성과는 다소 동떨어진 시민사회, 시민권, 공론장, 근대국가에 대한 고도로 추상적인 정치철학적 주해(註解)를 수행하고 이를 한국사회와 단순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63) 그 결과 비판사회과학은 서구적 이념형, 그 이상화된 이미지와 그토록 대비되는 한국적 후진성, 즉 연고주의, 가족주의, 집단주의, 사생활주의를 벗어나게 할 어떤 모범적인 시민성의 모델을 순수형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서구에서도 완전하지 않은 시민혁명 모델 혹은 ‘슈퍼시티즌’의 모델에서 찾거나 그러한 모델을 실현할 것을 의욕하는 전위적 운동단체에서 찾아왔다.64) 공화주의적 모델에 대한 좌-우의 이러한 공통된 집착과 이상화는 동시에 소시민적인 것, 사적인 것에 대한 폄하와 경멸로 아이러니하게 수렴되어왔다.

    그러한 수렴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자괴감(自愧感)과 자기혐오(self-hatred)와 결합하여 한국 정치를 지나치게 규범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 하였고, 사회변혁을 위한 대중정치의 주요한 문제를 가치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그리고 전자에 의해 후자를 어떤 식으로든 제거, 억압, 전화시키는 문제로 사고하게 하였다. 이렇게 구축된 대중정치에 대한 이해는 시민사회를 그 운동적 전위로서만 환원하는 공화주의적 이상화에 빠지거나 혹은 그것을 사적이고 개별화된 시장의 개인으로 단죄하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65) 그 와중에 새로운 정치주체성에 대한 지적 장, 공론장의 평가는,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융기’(촛불시위)에서 ‘욕망의 정치에의 굴복’(17대 대선) 혹은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20대 ‘개새끼들’(18대 대선)로 찬탄과 단죄 사이를 왕래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국정치의 최근의 전화 양상이 갖는 다기하고 모순적인 측면이 한국 사회과학에 대해 제기하는 바는 새로운 개인과 그들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시민사회, 혹은 더 정확히 새로운 문제틀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치주체성으로 발아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다양한 이론적 틀에 입각하여 조명하고 공론장의 참여주체와 작동양상에서의 이러한 변화를 한국적 현대성의 고유한 전개라는 역사성 속에서 추적하는 경험적 노력이다. 이 글은 사사화된 일반대중들, 즉 ‘소시민’, ‘서민들’의 자생적 동력으로서의 정치화된 가내성을 ‘전쟁정치’(김동춘, 2013)와 ‘과두화된 정치사회’(조희연, 2009)라는 지배계급의 현대성이 부과한 역사성의 압박 속에서 형성되고 진화된 ‘시민’사회적 대응물(counterpart)로서의 또 다른 역사성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새로운 정치주체성과 그 생활세계를 국가폭력과 통치화된 정치에의 대응(reaction)으로만 수동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적 법칙과 동력을 가진 어떤것으로 적극적으로(positively) 이론화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동시에 그에 입각한 차후의 보다 체계적인 경험연구의 예비 작업으로 복무하게 될 것이다.

    63)이러한 기존의 상황을 고려할 때, 최근에 여러 중진 연구자들에 의해 시도된 한국의 시민사회, 시민성에 대한논고들(송호근, 2013; 정상호, 2013; 최정운, 2013)은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 또한 여전히 서구적 시민의 원형 혹은 ‘교양중산층’을 이상적이고 이념형적인 기준점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적 측면을 갖고 있다. 한편 서구의 사상체계만큼이나, 아니 훨씬 더 우리에게 낯설은 또 다른 체계인 한국전통사상의 연구동향에 대한 김용옥(1995: 30-31)의 비판은 서구사회과학과 그들의 역사성에 불균형하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사회 과학의 입장에서도 경청할만하다. 그에 의하면, 동양철학계의 논의에는 “철학사만 있고 사상사가 부재”하며, 조선조 성리학 연구는 “퇴계와 율곡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자체구조만을 밝히려 하지 과연 퇴율이 말하려고 했던 것이 그 시대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오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historical signficance)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그 상대적· 역사적 관계성을 밝히려 들지 않는” 한계를 갖는다. 일례로 “사단칠정론변만 하더라도…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들, 예를 들자면 왜 퇴계와 고봉이 무엇이 그다지도 다급하길래 수십년을 걸쳐 집요하게 편지를 통해 싸움을 했어야만 했는지…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속 시원한 해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한편 그렇다고 김용옥의 그간 활동이나 저작이 동양철학계가 처한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 상황의 해결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에 머무는 것을 학문 활동과 업적으로 과장하고 왜곡하는 그의 매체중독증, 소영웅주의에 대한 김진석의 비판(2010: 제2부, 특히 179-180)을 참조할 것.  64)19세기 미국 결사체 생활에 대한 토크빌(A. Tocqueville)의 경탄에서 시작된 이러한 “민주주의적 슈퍼시티즌이라는 이상”(Dalton, 2010: 49)은 좀 더 회의적인 이론가들, 이를테면 슘페터(J.Schumpeter)나 리프만(W. Lippman)등에 의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반박되어왔다(Dalton, 2010: 456), 한편 이렇게 이상화된 미국인들에게 제기된 “당신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정치가 맨 끝에(가족, 친구, 종교, 일, 여가 다음으로), 그것도 다른 범주들과 큰 격차를 보이며 등장하는 조사결과(1999년 세계가치서베이, (Dalton, 2010: 457)에 대해 어떤 반응을 선택할지는 단지 규범적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인(ontological) 것이기도 하다.  65)맑스(K. Marx)는 그의 초기적 발전 단계, 특히 “헤겔법철학 비판”(1843)이나 “유대인문제”(1843)와 같은 논고에서 두 인간형의 대립·병존·순환 자체가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중심적 문제임을 인식했고 그 대립과 상호교체로 드러나는 현대성의 정치적, 사회적 제한성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틀의 창출에 고심하였다. 이는 맑스 초기 정치철학의, 그리고 채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사회학적 문제의식의 중요한 일면으로, 여기서 해방과 집합행동의 문제가 단지 이기적 개인을 공화주의적 공민으로 전향시키는 것에 의해 해소되는 것으로 사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소의 “혁명적이고 공동체적인 반(反)현대주의”(Touraine, 1996a: 40)가 가진 일종의 ‘근본주의적 허무주의’보다 이론적으로 진전된 문제설정이었다. 이렇듯 생산적인 이론적 모순이 ‘변증법적 지양’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철학과 혁명적 주체의 필연적 실현이라는 신비주의적이고 안이한 해결에 의해 일축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후기의, 혹은 그의 후계자들의 이론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맑스의 후기 저작인 자본』에까지 걸쳐서 드러나는, 개인의 무한한 발전과 욕망의 개화라는 면에서 맑스의 맑스주의가 자유주의, 낭만주의와 공유하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설득력 있게 조명하고 있는 마샬 버만의 작업(Berman, 2001)은 깊이 숙고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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