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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탈/경계(의/에서) 글쓰기 Trans-/Boundary Writing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탈/경계(의/에서) 글쓰기

This study examines the feministic elements of the major novels and essays by the early 20th century female writer Virginia Woolf, and the contemporary male South African writer J. M. Coetzee. There is an affinity between the two authors in that their works give us a depth of insight into imperialism, fascism, and patriarchy based on a dichotomous way of thinking. First of all, it is noteworthy that the elusiveness or ambiguity of their novels works as an effective way of exploring the connections and tensions between art and politics. The first half of this paper argues that Woolf's subversive writing “inside/outside the boundary” -- A Room of One's Own, and Jacob's Room -- criticizes the male's exclusive attitudes. The second half of this study suggests that a white woman narrator's writing “between the boundaries” in Coetzee’s Foe is closely aligned to the “postcoloniality” and “feminism” of a colonial male writer. Thus, the conclusion is drawn that the “trans-/boundary” writing of Woolf and Coetzee develops into political, aesthetic, and ethical writing in terms of de-constructing hierarchy and leading to reflective thinking.

KEYWORD
elusiveness , art and politics , subversion , trans-boundary , feminism , postcoloniality
  • 1. ‘모호성’의 문학: 정치와 예술의 탈/경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와 존 쿳시(John Maxwell Coetzee, 1940-)에 대한 초기 비평은 사회적 현실 참여를 회피한, 비겁한 유미주의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1)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울프와 쿳시를 과연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간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들의 작품에 페미니즘적 요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작품의 질적 향상에 있어 도움이 되고 있는지 등,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제시할 수 있는 ‘모호성과 양가성’은 오랜 기간 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어왔다. 울프의 페미니즘을 특징짓는 “양성론”(Androgyny)은 비겁한 타협 내지는 여성 문제에 대한 회피로 간주되었고, 쿳시 작품 다수의 서술을 이끌어가는 백인 여성 화자들의 모호한 위치와 이들의 글쓰기는 정치 문제와 여성문제로부터의 회피 내지는 ‘거리두기 장치’라는 비판을 불러왔다.2)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울프는 고전적인 여성 작가의 최고 모범사례이자 문화의 아이콘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쿳시는 소설가, 비평가, 그리고 학자로서 남아프리카라는 맥락의 특수성으로부터 소설을 해방시킨, 현세대의 가장 중요한 ‘백인 작가들’ 중 한 명(Kossew Critical Essays 1)으로 인정받게 되었다.3) 울프와 쿳시는 폭넓은 독자층을 보유한,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가들이었지만 그러한 성공만큼이나 수많은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은 예술가들로서, 이들에 대한 매체와 평단에서의 양극화된 평가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들이 갖는 예술 문화사적 주요 위치를 반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시대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핵심이 된다는 점에서 두 작가에 대한 비교 연구는 유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울프와 쿳시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 속에서 우리는 그 시대 문화의 인종적, 성적 편견 등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울프와 쿳시의 작품에 대한 초기 평단의 비판적인 시각은 불의와 고통으로 점철된 여성의 역사와 남아프리카 식민 역사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책무라는 당대 평단의 지배적인 경향과 기대에서 비롯된 오해와 잘못된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4) 애트리지(Derek Attridge)는 “비평이 무슨 특권으로 문학이 진실을 말하도록 요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쿳시의 케이프타운(Cape Town) 대학에서의 강연 내용을 인용하면서 쿳시의 소설들은 문학의 진실을 말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지만 소설들의 독창적인 열림에 참여함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64). 애트리지가 쿳시 소설의 특징으로 제시한 독창적인 열림으로의 참여 유도는 독자에게 그 해석과 판단을 열어두는 ‘자율적 글쓰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울프와 쿳시 문학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문학을 통해 단 하나의 해석이나 진실을 요구하거나 제시하고자하는 권위주의적인 읽기와 쓰기에 대한 해체적, 반성적 태도에 기반한 그들의 ‘자율적인 글쓰기’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5) 울프와 쿳시는 작가와 독자가 열린 자세로 각각 쓰고 읽어내는 공동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훌륭한 문학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사한 문학관을 갖고 있다.6) 그러므로, 두 작가의 텍스트는 독자에게 독립적인 사고와 복잡한 울림을 가져오는 ‘자율적 예술’의 맥락에서 해석될 때 그 진가가 확인될 수 있다.

    울프는 「여성과 소설」(“Women and Fiction,” 1929)이라는 에세이에서 사회비판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의 통합을 예술작품의 필수요소로서 강조한 바 있다. 그녀는 가부장제 가치관에 의해 억압되어 온 여성들의 삶에 대한 항의나 대의명분을 변호하려는 욕망이 여성소설의 예술적인 면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개인적인 관심이나 성의식에서 벗어나 초연한 태도로 쓴 “몰개성적인”(impersonal) 것이라고 보았다(48-50). 따라서 울프를 “빅토리아조의 치마를 두른 게릴라 투사”(A guerrilla fighter in a Victorian skirt)로 부르며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의 기수(“Thinking” 1)로 간주한 마커스(Jane Marcus)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달리, 배철러(J. B.Batchelor)는 울프가 페미니스트들의 전사적 태도와 여성들의 조직화된 정치 활동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제이콥의 방』(Jacob's Room, 1922)의 여권 신장론자 줄리아 헷지 양(Miss Julia Hedge)을 그 한 예로 제시하였다(171).7) 이러한 맥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울프의 페미니즘이 성의식에 함몰된 채, 남성들에게 분노하고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려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기보다는 성의 문제를 초월해 예술과 사회전반에 대한 혜안을 보여주는 ‘정치, 사회, 그리고 예술 비평’이었다는 것이다.

    쿳시 또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모비어스(Susan Moebius)와 같은 전투적인 페미니스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는 여성작가 코스텔로와 당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비평적 편견 등을 통해 성의식에 치우친 페미니스트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울프의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른 독법을 “둘/다의 논리”(logic of both)에서 찾은 펠스키, 그리고 쿳시의 소설을 ‘정치학과 포스트구조주의 소설 간의 상호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 자체로 지배의 위치를 해체하는 저항적 전략(50)으로 읽어낸 도비(Teresa Dovey)의 연구 이래로 쿳시 소설의 ‘담론의 복잡함’을 재평가하기 시작한 후기구조주의의 틀과 같이, 울프와 쿳시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호하고 양가적인 글쓰기의 특징은 ‘예술과 정치’ 사이의 긴장과 그 연결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때 두 작가의 작품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8) 따라서 이 글은 두 작가의 ‘모호성’이라는 예술적 특징이 현실 도피의 기제이거나 단순한 형식적 실험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복적, 정치적, 급진적 페미니스트 담론을 담아내는 예술적 실험 장치로 승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울프와 쿳시의 작품은 독자에게 이분법적 경계를 끊임없이 의문시하고 해체하게 하는 전복적이고 반성적인 사유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향하고 있는 비판의 지점은 문단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권력 중심의 위계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두 작가는 권력 중심의 지배의 역사가 가부장제와 파시즘, 그리고 제국주의와 같은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혜안을 가진 사회· 문화 비평가로 간주될 수 있다.9) 울프는 20세기 초의 영국 여성작가로서, 쿳시는 현존하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남성작가로서 그 시대적, 문화적, 그리고 성적 배경 등에 있어 많은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작품은 정치, 역사, 문화 등 다방면에 있어 예민하고도 비판적인 통찰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러한 비평적 견해들이 고도의 미학적 장치와 철학적 비전으로 정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미학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의 통합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울프의 ‘경계 안/밖에서’, 그리고 쿳시의 ‘경계의 중간지점에서’의 ‘탈경계’의 글쓰기가 다양한 소설 형식의 실험과 유동적인 화자의 설정, 불연속적인 서술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실험을 통해 고정된 시점과 권위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과 판단을 요구하는 반성적인 사유와 다원성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미학적,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울프의 페미니즘의 선언서로 평가받는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과 그녀의 실험적 글쓰기의 시작이자 가부장적 남성담론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는 『제이콥의 방』을 중심으로 울프의 전복적 글쓰기의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이콥의 방』은 성의 ‘경계 밖에서’ 『자기만의 방』을 요구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여성 아웃사이더들의 목소리들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경계 안의,’ 폐쇄적이고 왜곡된 남성들만의 독점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이 글은 여성의 존재를 자신의 삶에 허용하지 않고 남성적 이상에만 고착화 되어 있는 제이콥 플랜더스(Jacob Flanders)라는 당대 영국의 한 엘리트 남성이 자기만의 방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즉 자신이 고수해 온 제국의 논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개방적인 삶의 자세가 우리의 삶을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울프의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울프보다 한 세기 이후의 남성 작가 쿳시의 작품들 중, 바턴이라는 백인 여성에 의해 작품의 대부분이 서술되고 있는 『포』라는 소설을 통해 인종적, 문화적 경계 밖으로 배제되어 있는 프라이데이(Friday)라는 피식민 원주민의 침묵을 복원하고 그의 권위 없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쿳시가 모색하고 있는 ‘탈권위적 글쓰기’의 요소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쿳시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있는 원주민 프라이데이와 여성 바턴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남아프리카의 백인 남성이 가진 자신의 계급적, 성적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울프가 작가 스스로 높은 단상에서 내려와야 할 문학의 새 시대를 선언했던 것처럼, 쿳시는 백인 남성 작가로서의 권위적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와 작가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미학적 구조와 ‘탈권위적인 글쓰기’를 모색하는 일환으로 페미니즘적 요소를 작품에 가져왔다.

    무엇보다 쿳시의 작품 속에서 ‘작가’를 상징하면서 그를 위한 대변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백인 여성 화자들은 쿳시의 작품을 페미니즘 독법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되어왔다. 봉기(Chris Bongie)와 라이트(Laura Wright), 그리고 프로빈(Fiona Probyn)과 같은 비평가들은 쿳시의 백인 여성 화자들을 식민주의 작가의 딜레마를 탐색하게 하는, 쿳시의 페미니즘의 핵심에 자리한 식민주의자의 “탈식민성”(postcoloniality)을 제시하는 특징적 전략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이들의 양가적이고 모호한 ‘경계인’의 위치는 쿳시 자신이 처했던 아프리카 내 백인 식민주의자이자 탈식민주의자라는 이중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치가 낳은 쿳시의 ‘이중의식’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려는 탈식민주의 작가로서의 책무와 동시에 식민주의의 범죄에 대한 공모의식 및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자의식적”(self-conscious)이고 “자기반영적인”(self-reflexive) 글쓰기라는 특징을 낳았다.10) 소설 속에서 백인 여성 화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작가로서의 위치는 ‘글쓰기의 과정과 글쓰기의 권위’에 대한 쿳시의 깊은 성찰과 의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뒤플레시스(Menan Du Plessis), 애트웰, 코슈, 도비, 브리간티(Chiara Briganti), 스피박, 겔러거(Susan Vanzanten Gallagher) 같은 많은 비평가들은 쿳시의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를 ‘힘과 권위, 그리고 언어에 대한 문제 제기’의 구조를 위한 매체 혹은 텍스트의 전략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쿳시의 여성 화자들의 이러한 복잡하고 모호한 위치는 울프의 여성 인물들과는 다른 해석을 요한다. 쿳시의 여성 화자들은 분명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울프의 여성들만큼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에 의해 철저하게 희생된 아웃사이더들로 규정될 수만은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쿳시의 백인 여성들은 가부장제 논리의 아웃사이더이지만 식민주의 논리의 아웃사이더는 아니기 때문이다.11) 또한, 울프가 사회의 종속적 위치에서 폭력과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 아웃사이더들의 목소리를 재현하고자 했다면, 쿳시의 여성 화자들은 자신들을 그 사회의 완전한 아웃사이더로 설정하지도, 아웃사이더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도 않고 있다. 대신, 쿳시는 자신의 백인 여성 화자들에게 프라이데이와 같은 아웃사이더들에게 저지르는 식민주의의 범죄를 공유하는 ‘공모자’로서의 의식적 고통을 겪게 하고 있다. 바턴과 같은 쿳시의 여성 화자들은 모두 작품 속에서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이중적인 경계인의 위치에서, 언어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중간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식민주의 논리의 인사이더들인 이들 백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위치를 식민주의 논리의 아웃사이더, 적어도 그것의 경계에 두고자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울프 작품에서 남성 인사이더들의 비극과 파멸이 성의 경계를 그 내부에서부터 해체하는 전복적인 기제였다면, 쿳시의 작품에서 ‘여성 화자-작가’들의 경계인으로서의 중간자적 위치와 이들이 수행하는 젠더의 전복과정, 나아가 식민지 타자들에 의해 이들의 서술이 실패하게 되는 추이는 남성 중심의 정전과 제국의 언어에 대한 역설적 해체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울프와 쿳시의 작품을 페미니즘적 독법으로 읽어냄으로써 두 작가의 부단한 예술 형식의 실험이 여성들과 피식민지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자 우리의 삶을 더욱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정치적, 윤리적, 미학적 장치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1)울프는 오랫동안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나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그리고 엘리엇(T. S. Eliot, 1888-1965) 등과 같은 주요 모더니스트 작가들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특히, 울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캠브리지 학파를 이끈 리비스(Frank Raymond Leavis 1895-1978)가 이끈 평론지 『검토』(Scrutiny) 등을 통해 예컨대, ‘과민한 정신’의 소유자라거나 ‘가혹한 리얼리티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작가라는 등의 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Minow-Pinkney ⅸ). 많은 남성 비평가들은 울프를 경박한 보헤미안이나 무시해도 무방한 블룸즈버리(Bloomsbury) 그룹의 유미주의자 정도로 간주하였다(Moi 1). 블룸(Harold Bloom)과 같은 남성 비평가들은 대개 ‘초연한 예술가’로서의 울프의 모습만을 강조하고 ‘사회 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도외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블룸의 관점에서 울프는 페이터(Walter Pater, 1839-1994)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처럼 묵시록적인 미학주의자로 묘사되는 것이 최선이었다(405). 펠스키(Rita Felski)에 따르면, 초기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울프를 여성중심적인 가치를 긍정한 작가로, 그녀의 작품을 여성의 경험에 바탕을 둔 미학적인 토대의 주요한 초석으로 환영했던 우호적인 평가 또한 그 관점에 있어서는 블룸과 같은 남성 비평가들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146). 쿳시에 대한 초기 비평 또한 울프의 경우에서와 같이 비판적인 견해가 주종을 이루었다. 비평가들은 쿳시의 작품이 남아프리카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치적 저항과 역사적 재현에 대한 주장을 거의 표명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머레(Mike Marais)의 견해대로 이러한 역사 비평의 양식은 인종적 압제라는 이슈들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문학 텍스트들을 높이 평가(83)하였기에 쿳시의 ‘모호하고 자의식적인 서술’은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이슈들을 회피하는 것으로 대개 간주되었다.  2)쿳시 작품에 대한 현대 비평 전망에 대해 애트웰(David Attwell)은 일찍이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의 연구와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의 연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쿳시의 소설에 있어 가장 흥미롭고 문제가 되는 측면들 중의 하나가 그의 작품들 중 다수의 서술을 이끌어가는 ‘백인 여성 화자’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관련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215). 비평가들은 주로 쿳시의 작품들 속 여성 화자들, 예를 들어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 1977)의 마그다(Magda), 『포』(Foe, 1986)의 수전 바턴(Susan Barton), 『철의 시대』(Age of Iron, 1998)의 엘리자베스 커렌(Elizabeth Curren), 그리고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 2003)의 코스텔로 등이 작품 내 차지하고 있는 ‘여성 화자-작가’의 역할이 의미하는 바, 그리고 이들의 내러티브와 남성작가 쿳시의 관점과의 연관성 등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쿳시를 페미니즘의 옹호자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논의해 왔다.  3)쿳시에 대한 양극화된 평가와 관련해 코슈(Sue Kossew)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를 그 근본 원인으로 설명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지식인들과 작가들을 ‘문화 활동가’아니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문제를 회피한 ‘유미주의자’로 나누는 논쟁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작가들에게 제한과 도전이라는 역설적 상황, 즉 검열로 인한 책의 금지와 두려움, 의심, 불안의 기후 속에서도 글쓰기의 도덕적, 윤리적 본질에 대한 탐색에 천착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Kossew의 Critical Essays 2-3면 참조.  4)쿳시는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경제적 양상들을 작게 취급하고 있고,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 포스트모던적인 고뇌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 직면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비판한 초기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대해 그는 “현재 남아프리카에서 소설과 역사에 관한 논의는 소설을 역사 밑에 두고, 소설을 실제 역사적 힘들과 상황들에 대한 상상적 조사들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읽으며, 이러한 조사를 수행하지 않는 소설들을 진지함이 부족한 것으로 취급하는 강력하고 지배적인 경향과 관련된 것”이라고 진술하면서 당대 평단이 소설을 단순히 역사의 실제 사건들을 보고하는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다고 반박하였다(“Novels and History” Nov: 2003).  5)쿳시는 자신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작가의 직업을 가진 여성화자 코스텔로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코스텔로의 책은 어떤 것을 가르치지도 설교하지도 않는, 다만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의 방식을 최대한 명확하게 기술하는(207) 하나의 실례(example)로서 존재하기에 학자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녀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아들 존(John Bernard)의 판단이다(8).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평단에서 선구적인 페미니즘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는 코스텔로는 한 강연에서 자신의 소설이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자신은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고 강조하면서 이제 작가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권적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10-19). ‘작가의 권위’를 작가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코스텔로의 선언은 쿳시 스스로가 백인 남성작가라는 권위가 가진 일체의 편견과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6)울프는 에세이 『일반 독자』(The Common Reader, 1925) 1권의 서문에서 ‘일반 독자’를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 창조’하려는 본능에 의해 글을 읽는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에드워드 왕조(Edward Ⅶ 1841-1910) 작가들의 ‘독자와 작가사이의 구분’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또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How should One Read a Book?,” 1926)에서는 독자의 ‘독립성’을 강조하였고(258),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Mr. Bennett and Mrs. Brown,” 1924)에서는 ‘작가’를 ‘대중과 같이 있는 존재’, ‘독자’를 ‘작가의 책 쓰는 일의 동반자’(208-11)로 규정하면서 작가와 독자가 긴밀하고 동등한 동맹관계(alliance 212)를 맺어야 훌륭한 소설이 창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7)파울로스키도 울프의 작품에 간혹 드러나고 있는 선동적 어조와 관련해서 울프가 파시스트들의 선전에 대항하는 반응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예술에서 그러한 정치학을 제거하려는 욕망 또한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에 그녀의 작품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4).  8)울프 작품의 특징을 ‘모호성과 양가성’에서 찾고 그 의의를 밝히고자 했던 비평가들로는 파울로우스키(Merry M. Pawlowski)와 코기(Pamela Caughie) 등이 있다. 파울로우스키는 『버지니아 울프와 파시즘』(Virginia Woolf and Fascism: Resisting the Dictators' Seduction, 2001)에서 울프의 페미니즘 선언서로 인정받는 『3기니』를 ‘예술과 정치의 통합’의 산물로, 현대의 문화 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 역사가로서의 울프의 작업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하면서 울프의 에세이들을 “여성 혐오주의”(misogynist)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이 구성한 ‘여성성’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저항의 목소리이자 당대 사회에서 많은 남녀들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파시즘의 위험성에 대한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였다(4-5).  9)울프와 그녀의 작품을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 위치지은 최초의 비평가 즈워들링(Alex Zwerdling)이 후, 1990년대 들어 비평가들은 본격적으로 울프와 그녀의 글을 역사적 맥락에서 탐색하기 시작하였다(Goldman 33-34). 허시(Mark Hussey)의 『버지니아 울프와 전쟁』(Virginia Woolf and War, 1991)과 레벤백(Karen L. Levenback)의 『버지니아 울프와 세계대전』(Virginia Woolf and the Great War, 1999)은 세계대전의 맥락에서 울프의 소설을 분석하고 있고, 커디-킨(Melba Cuddy-Keane)의 『버지니아 울프, 지성인, 그리고 공적영역』(Virginia Woolf, the Intellectual, and the Public Sphere, 2003)은 교육과 문화에서 민주적 운동들에 공헌한 울프의 “공적인 지성인”으로서의 역사적 위치를 탐색하고 있다. 또한 코기는 『기계재생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2000)에서 현대 과학기술 시대의 도래와 대중문화, 나아가 대중과의 의사소통의 맥락에서 울프를 선도적인 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커스 등의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울프의 글쓰기의 급진적인 정치적 차원에 주목하면서 울프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 현대의 페미니즘 비평은 대체로 울프의 텍스트들 이면에 있는 미학적 요소들을 급진적으로 읽어내고자 하였다(Minow-Pinkney ⅸ-ⅹ). 특히, 울프의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단의 평가는 주로 『3기니』와 관련해서 이루어졌는데, 엘쉬테인(Jean Bethke Elshtain)은 『여성과 전쟁』(Women and War, 1995)에서 『3기니』를 전쟁에 관한 최고의 글로 선언하였고(235),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2003)에서 울프가 『3기니』를 통해서 너무나 분명하거나 부적절해서 입에 올린다거나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지던 것, 즉 “전쟁은 남성의 유희이며, 살육 기계도 성별을, 그것도 바로 남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독창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6).  10)애트웰은 쿳시 소설의 여성화자들이 속한 ‘모호한 경계인’의 위치가 낳은 자의식적이고 자기반영적인 글쓰기의 특징을 “메타픽션”(metafiction)의 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메타픽션은 ‘반성적 픽션 혹은 픽션에 대한 픽션’을 의미하는 것이다(로일 191). 패트리샤 워(Patricia Waugh)는 메타픽션을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가공물로서의 그 위상에 자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관심을 갖는 허구적인 글쓰기로 정의하면서 최근의 메타픽션 소설가들은 픽션을 구성하는 것과 관련된 이론적인 문제들을 보다 깊이 인식하는 경향을 보여 왔고 그 결과 그들의 소설은 자아반영과 형식상의 불안정을 그 특징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메타픽션’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비평가이자 자의식 소설가인 윌리엄 개스(William H. Gass)가 쓴 글(Fiction and the Figures of Life, 1970)에서 연유한 것으로 ‘메타정치학’ ‘메타수사학’ ‘메타연극’ 같은 용어들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반영하고 구성하고 조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1960년 이래 보다 일반화된 문화적 관심을 반영하는 말들로서, 워는 이러한 자의식적인 메타픽션이 소설의 하위 장르라기보다 모든 소설에서 고유한 긴장과 대립의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소설 내의 한 경향이라는 점을 이 저서에서 강조하고 있다. 패트리샤 워, 『메타픽션』(Metafiction, 1984) 16-17, 19, 28-29면 참조.  11)쿳시의 백인 여성화자들과 피식민 여성들의 위치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과 비셀(Robin Visel) 등은 식민지 역사에서 피식민 여성들이 ‘이중 식민화’된 상태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백인 여성화자들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비평가들마다 이견이 존재한다. 그 중, 비셀은 쿳시의 백인 여성화자들을 ‘강하거나 약한 위치’라는 ‘반식민화’된 위치로 규정했지만(39), 코슈는 이들의 위치를 ‘식민화되고 동시에 식민화시키는’ 위치로서 이들의 목소리는 권위에 대한 대항이자 그 권위에 연루되는 모호하고 복잡한 것이 된다고 주장하였다(“Women's Words” 168).

    2. ‘경계 안/밖’에서 글쓰기: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제이콥의 방』

    울프의 페미니즘은 ‘젠더와 권력’ 간의 연관관계를 파헤침으로써 파시즘 및 전쟁 문화를 가정 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확장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문화 비평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울프의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울프의 텍스트의 가치를 고정된 위치와 정통성(orthoodoxies)에 대한 의심, 당파성(partisanship)과 진실에 대한 불신에서 찾고 있으며, 그녀의 소설이 여성성을 긍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에게 여성성이라는 것을 규정짓고 고정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불신했다고 지적하고 있다(Felski 146).12) 이러한 의미에서 미노우-핑크니는 울프의 실험적 소설들이 주제, 서술, 글쓰기를 정의하는 가장 깊은 형식적 원리들, 즉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한 페미니스트의 전복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였다(ⅹ). 따라서 울프의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은 젠더의 문제에만 국한된 정치적인 팸플릿 정도로만 간주될 수 없는,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함의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울프는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에서 다양한 화자들이 내는 다성적 울림과 인상주의적 기법을 통해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제시하는 실험적 글쓰기를 제시하였다. 울프의 실험적 글쓰기의 서막을 알리는 소설 『제이콥의 방』은 인상과 묘사들에 의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26년이라는 제이콥의 삶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인물들과 장소들의 갑작스러운 이동, 서로 단절된 단편적인 에피소드들, 파편화된 화자의 일관적이지 않은 서술 등으로 인해 독자의 해석을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연히 얻게 된 인상들과 정보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소설 속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러한 울프의 서술 기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알 수 없고 신비로운 삶과 인간에 대한 그녀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9장에서 화자는 “삶은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것”13)이라는 로즈 쇼(Rose Shaw)의 외침에 대해 동의하는 발언도 반대하는 발언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갑자기 “영어 구사 능력이 타고 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름다움은 거의 항상 말이 없는 것”(96)이라는 말이 끼어든다. 삶이 아름다운 것인지 추한 것인지 또는 행복한 것인지 힘든 것인지 그 누구도 쉽게 판단내리지 못하며 삶의 아름다움은 말로 정의내릴 수 없는 언제나 무언의 대상이라는 울프의 견해를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울프는 “수백 년 동안 삶에 대한 적절한 정의를 내린 사람이 없었고 . . . 사람의 열정은 도표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며, 다음 코너에서 누구를 만날지 알겠느냐”(95)고 반문할 뿐이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삶의 잔해 속에서 삶의 실체를 찾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울프의 문학적 특징과 관련해 수전 딕(Susan Dick)은 울프가 『제이콥의 방』에서 비연속적이고 리듬적인 서술구조를 선호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딕에 따르면, 이 작품은 파편화 된 서술과 그 파편들이 서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시점의 리듬적인 변화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작품을 전체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화자의 관점과 어조의 변화들이 가진 리듬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다(24-25). 따라서 독자에게 울프의 작품이 요구하는 이야기의 기능과 방법에 대한 탐색은 훨씬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울프의 작품에서 이러한 비연속적인, 파편화된 목소리와 에피소드를 통일하는 것이 바로 리듬이라 할 수 있다. 『제이콥의 방』의 9장에는 이러한 파편화된 언어가 병치되면서 교묘하게 통일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샌더스(Mr. Sanders)와 보나미(Mr. Bonamy)의 대화를 듣는 팹워스 부인(Mrs. Papworth)이다. 그녀는 아홉 아이의 어머니이다. 이 때 ‘객관적인,’ ‘견해의 일치’ 같은 단어가 파편적으로 묘사되고, 부인은 ‘다 긴 단어뿐이군’, ‘공부하면 그렇게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는 대화의 내용과 그것을 듣는 부인의 생각이 파편적으로 제시되다가 샌더스와 보나미가 서로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뭔가 떨어지는 소리(stamp, stamp, stamp) 등으로 합쳐지게 된다(102). 하퍼(Howard Harper)는 울프의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리듬을 편안한 안정적인 상태와 발견의 고뇌․흥분 사이의 이동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리듬”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영화의 언어는 연속적인 프레임들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들”을 인식하게 해줌으로써 작용하게 되며, 이러한 “프레임들의 전환들”이 모든 구조적 단계에서 작품의 복잡한 의미를 환기시키게 되는 것이다(5).

    『제이콥의 방』은 여성의 독립을 위한 울프의 페미니즘 선언서인 『자기만의 방』과 그 제목에 있어 상징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을 원하는 여성들에게는 배제되어 있는 남성들만의 독점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제이콥의 방에 대한 인상주의적이고 파편화된 묘사는 초반부 오랫동안 독점권을 소유해온 사람에게서 보이는 활기차고 자신감 있는 삶의 기운이 느껴진다(111). 제이콥은 킹스 칼리지 예배에 여자가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개 한 마리가 예배를 망칠 수 있는 것처럼 여자도 마찬가지이고, 여자는 “죄처럼 추악한”(so ugly assin) 존재라고 생각한다(32-33). 고향을 떠나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 제이콥이 사는 하숙방에는 그 곳 대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지식과 의견을 교환한다. 제이콥의 방은 바로 캠브리지 대학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국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문명의 빛을 발산하는 곳으로, 그리스어와 과학, 철학이 그 빛으로 타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44). 그들의 확신은 오랜 역사동안 그들의 생각과 판단만이 사회의 기준이 되어온 남성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한 자신감에서 연유한 것이다.

    제이콥이 사는 빌라의 주인인 물리학 교수 플럼버 씨(George Plumber)의 차가운 눈 속에는 바로 ‘캠브리지의 빛’을 대변하는 ‘추상적인 빛’이 서려 있다. 이곳에서 나오는 빛은 “심상, 상징, 역사, 그리고 알려진 것과 알려질 것의 빛인 언어의 빛”이다(42). 플럼버 교수는 페르시아, 무역풍, 선거법개정안, 추수 주기 등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백하게 피력한다(35). 그러나 그의 아내 플럼버 부인(Mrs. Plumber)은 집에 웰즈(G. D. Wells), 쇼(G. B. Shaw)의 책들과 진흙투성이 부츠를 신은 창백한 이들(pale men)이 쓴 진지한 6페니짜리 잡지들을 탁자 위에 놓아두고는 두 책 모두를 읽기 전에는 자신이 어떤 일에 대한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5). 플럼버 부부의 집에서 본 이러한 책들에 대해 제이콥은 점심을 먹고 나오며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것은 존재 가능하지만 너무나도 불필요한 세계, 즉 여성들의 세계에 대한 불만이며 왜 그들 여성들이 쇼나 웰즈, 잡지 같은 것을 읽고 호머, 셰익스피어 등의 정전을 읽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여기서 제이콥이 숭상하는 정전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말로우 등의 작품들은 거대한 지성의 축적지인 대영박물관의 야경원의 보호아래 지켜지고 있다. 제이콥에게 “당신은 대영박물관에 있는 ‘조각상들’ 중 하나와 같다”(80)고 지적한 플로린다(Florinda)의 말이 상징하듯, 제이콥은 절대적인 과거 정전의 목소리, 특히 그리스 정전의 목소리에 수용적인 인물이며, 대영박물관은 이러한 과거의 권위적 목소리들의 보고로서, 박물관의 거대한 정신은 . . . 현대의 삶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그리고 여성들에게 완전히 닫혀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Handley 116). 『제이콥의 방』에서 화자는 박물관의 두뇌가 끊임없이 죽음의 강을 건넜고 플라톤은 자신의 문답을 계속 하고 있다고 어느새 끼어들어 말하고 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를 읽고 있던 제이콥은 석탄이 불에서 떨어지듯 문을 두드리고 “들여보내 달라”(Let me in! Let me in! 109)고 외치는 여성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독서를 끝내고 창문으로 다가가 거리에서 외국인 여성들이 시위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한다. 고독한 독자로서 제이콥이 읽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와는 대조되는 다른 부류의 대화들이 거리에서 진행 중에 있는 이 장면은 제이콥과 같은 젊은 남성들에게 파괴적인 신화를 가르치는 당대 영국의 ‘교육’이 실제로 아래 거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계급, 국가, 성에 대한 문제들을 그에게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음을 시사한다(Dalgarno 56).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성들의 교육이 어떤 점에서는 여성들이 받은 교육만큼이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울프는 근본적으로 어떤 계급이나 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주장한다(49). 울프는 남성들의 소유욕과 권력욕은 교육과 문명이 조장한 것이기에 대다수 남성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며, 한편으로는 남성들도 억제할 수 없는 이러한 본능에 휘둘려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게 되는 희생자일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제이콥의 방』에서 외국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제이콥의 모습은 바로 다른 성과 인종에 대한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조장한 문명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울프는 파시즘의 근원이 이러한 타자에 대한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있음을 간파한 사회 비평가로서도 의의를 갖는다. 파시즘을 가장 모방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로 제시했던 마커스의 주장(“Afterword” 194)처럼, 「공습 중 평화에 관한 사고」(“Thoughts on Peace in an Air Raid,” 1940)에서 울프는 ‘공격성, 폭정(tyranny), 그리고 권력에 대한 광적인 사랑이 구현된 존재’(245)를 히틀러로 제시하면서, 여성을 노예의 상태로, 남성을 폭군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잠재의식적 히틀러주의(Hitlerism)에서 문명을 구하기 위해서 여성들은 정신적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45). 여기서 울프가 제시하는 바는 남성들을 전쟁터에 나가 싸우도록 이끄는 것이 국가의 명령뿐만이 아니라 교육과 전통이 양육해 온 자신의 본능, 즉 명예와 영광, 그리고 훈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246).

    핸들리(William R. Handley)는 『제이콥의 방』에서 플라톤과의 대화를 끝낸 후에도 여전히 외부와 차단된 채 ‘고정’되어 있는 제이콥의 정신이 그가 읽는 책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제이콥이 물려받은 문학전통은 특정 젊은 남성들에게 특권을 주는 제도적, 계급적 맥락 내에 정전을 고정시키고 그의 읽기를 위치 짓고 있으며, 그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그들이 숭상하는 예술이 결국 쓸모없다고 증명되듯이--궁극적으로 이용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116). 또한 그는 제이콥이라는 인물의 삶이 마치 그가 찾아가는 매춘부와 같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교환”되고, 전쟁을 위한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120), 이 작품에 제시된 정전은 제이콥이 그 일원으로 속한 사회를 정체시키고 정치적 리얼리티에 대해 비판적 반응을 할 그의 능력을 저하시킴으로써 결국 그의 삶에 또는 문명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하였다(116-17). 플라톤과 같은 매우 “영국적인” 책들로 가득 채워진 제이콥의 책상 위에는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로 구성되는가? (“Does History consist of the Biographies of Great Men?”)라는 논문이 있고,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작품도 있다. 그런데 제이콥은 오스틴의 책이 위대한, 영국적인 책들이라고 생각해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기준에 ‘방어’하기 위해 방에 둔 것일 뿐이다(39). 오스틴의 책은 제이콥의 방에 있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비 영국적인 것이고, 영국적이라는 것은 바로 남성 작가들만의 작품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문화는 제이콥의 방이 대변하듯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철저하게 배재되어 있다. 따라서 제이콥의 방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기다리고 있는 줄리아 헷지 양은 책이 나오지 않자 박물관에 왜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나 샤롯 브론테(Charlotte Brontë)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도서관에는 온통 ‘위대한’ 남자들의 이름들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제이콥에게 서류를 떨어뜨린 마치몬트 양(Miss Marchmont)의 책들 또한 출판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겁쟁이 자본가들인 출판업자들”(126)에게 줄 자금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당대 여성의 문학은 박물관에 거의 없었고, 그것은 여성의 책이 출판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여성은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었을 뿐더러 여성의 책을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업자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마치몬트 양의 발언은 울프가 출판업에 종사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마커스에 따르면, 영웅과 플롯이 없는 울프의 소설과 팸플릿들은 당시 출판업계에서는 돈이 되지도 않았고, 문학적, 사회적 관습에도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여기서 마치몬트 양이 지적한 겁쟁이 자본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출판할 의지도 용기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Feminist Essays ⅹⅲ).

    이러한 여성 문학과 여성 작가의 현실은 『자기만의 방』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의 1920년대 페미니즘 선언서로, 현대 페미니스트 문학, 문화 및 정치적 이론들의 토대가 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텍스트는 대부분의 여성들의 대학교육과 전문 직업들로부터의 배제, 그리고 지식인의 문학담론과 주류로부터의 배제라는 울프 당대의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Goldman 36). 이 작품에서 울프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규정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당대에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치부했던 편견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남성 문학 중심에서 여성 작가의 존재와 그 존재를 위해 필요한 과제와 어려움을 제시하고 있다.14)

    울프는 변호용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쓴 작품이 한편도 없는 『제이콥의 방』과 같은 서가를 바라보며 여성의 작품은 『제이콥의 방』의 마치몬트 양의 글처럼 출판업자들의 요구로 서명되지 않은 채 출간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19세기까지도 여성 작가에게 익명을 요구한 것은 바로 가부장제 정조관의 유산이라고 지적하면서 익명이나 남성의 이름으로 글을 썼던 여성 작가들을 내면적 투쟁의 희생자들로,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리고 여성들이 이렇게 훌륭한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문학 전체의 측면에서도 큰 손실이 된다는 것 또한 울프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재능 있는 개인이 파멸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글을 쓸 자유를 여성에게 허용해야 하고, 그러한 여성 작가가 인생을 진실하게 관조하여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가 제시하는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독립적인 방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과 그 다음 1930년대를 대표하는 『3기니』의 가교가 되는 중요한 에세이 「여성의 전문직」(“Professions for Women,” 1931)에서 역사 상 최초로 다양한 직업들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이 존재하게 된 지금,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소유되었던 집안에 자신의 방을 차지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62). 그녀는 ‘제이콥의 방’으로 상징되는 남성들만의 독점적인 소유권이 『자기만의 방』에서는 여성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제 「여성의 전문직」에 이르러 그러한 자유가 조금씩 획득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자신만의 방을 얻을 자유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며 그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는 상태로서, 울프는 이제 여성이 “그 방을 어떻게 꾸미고 누구와 어떤 조건으로 공유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62-63)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이것은 수많은 제이콥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방을 공유하지 않았던 오랜 시간들을 이제 자유와 소유권을 얻기 시작한 여성들이 그대로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논의인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울프가 여러 에세이들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성의 자유와 독립은 다른 성과의 소유권 전쟁이나 권력 투쟁으로 해석되기보다 진정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타인과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그녀의 부단한 고민과 모색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이콥의 방』에는 『자기만의 방』에서 중요하게 제기된 여성들간의 관계와 여성들의 글쓰기가 남성중심의 가치관과 문화로 ‘경계 안/밖에서’ 분리된 채 살아온 남녀 모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암시가 파편처럼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여성의 사랑을 구현하는 줄리아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비극적 멸망으로 치닫는 걸 보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으로 구현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낳은 ‘탐욕과 파괴성’을 뜻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파괴성은 일주일마다 다른 여인을 찾아가는 남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병자로 살아가는 바풋 부인(Mrs. Barfoot)과 같은 여성들에게도,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용기 있다고 생각하며 나라에 봉사하다 불구가 된 바풋 대령(Captain Ellen Barfoot)이나 전쟁터에서 사라지는 제이콥 같은 남성들 자신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적인 일은 자비스 부인 말대로 남자들이 어리석어 일어난 것으로, 그것은 자신들만의 방을 향유하며 즐기려 했으나 그 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역으로 갇혀버린 남성들 세계의 ‘폐쇄성과 왜곡성’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던 것이다. 『자기만의 방』의 1장에서 화자는 도서관의 문 ‘밖’에 있는 것,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위치가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를 생각하다가 어쩌면 잠긴 문 ‘안’에 있는 것, 즉 남성들의 ‘인사이더’의 위치가 더욱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31). 『제이콥의 방』에서 묘사되던 “600여 년 동안” 음악소리(드럼과 트럼펫)에 맞춰 “행진”하며 “강을 건너”(113)오던 남성들의 군사문화와 개척정신, 그리고 그들의 활기찬 분위기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기를 든 16인의 참전 지지자들과 기를 들지 않은 반전 여성 참정권자들의 시위 장면 후에 바로 이어지는 낡은 구두 한 켤레만 남겨두고 사라진 제이콥의 방에 대한 묘사로 전복되고 있다. 이러한 종결부의 ‘텅 빈’ 방과 신발의 이미지는 남성미와 파괴적인 전쟁 신화를 이상화시키는 당대 영국의 교육이 여성 아웃사이더들로부터 제이콥과 같은 젊은 남성들을 분리시키고, 종국에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 즉 남성의 자리를 “비우는”(emptying) 결과를 초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Dalgamo 57). 그러나 그의 방은 18세기의 것이었고 그 때는 지금보다 나름의 개성이 있었다는 화자의 마지막 발언은 더 이상 인간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전쟁 문명의 검은 흐름에서 제이콥은 사라졌지만 그를 외치는 친구의 부름과 엄마로 인해 다시 살아날 것이 약속되는 듯하다.

    12)토릴 모이(Toril Moi)는 이런 의미에서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를 강하고 변함없는 고정된 젠더 정체성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믿음이 보여주는 파괴적 성격을 묘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3).  13)Woolf, Jacob's Room (New York: Harcourt Brace & Company, 1992) 95. 이하 본문에 표기함.  14)배철러는 『자기만의 방』에 이르러 울프가 여성 작가들에게 보이는 장애물, 즉 교육, 사생활, 경제적 독립의 부족과 집에서 계속되는 방해들, 그리고 여성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대상”(fetish)로서의 여성 순결의 이용, 나아가 더 큰 장애물인 영국 소설에서 여성들 간의 중요한 관계의 전통이 부족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173).

    3. ‘경계에서’ 글쓰기: 쿳시의 『포』

    18세기 초의 영국 남성 작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1660-1731)가 쓴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1719)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쓰고 있는 『포』는 바턴이라는 여성 ‘화자-작가’를 통해 이 작품의 제목이 상징하듯, 백인 남성 식민주의 작가 포(Foe)라는 ‘적’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 『포』는 “18세기 영국에서 젠더와 인종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진 소설 정전화의 과정들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Attridge 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쿳시는 여성 작가 바턴의 대항담론을 통해 『로빈슨 크루소』라는 정전이 대변하는 백인 남성의 식민주의 및 가부장제 담론에 대한 전복적 시도를 꾀하고 있다. 라이트는 이러한 쿳시의 프로젝트를 ‘페미니스트 수정주의’(feminist revisionism)로 규정하면서 쿳시가 바턴을 통해 디포의 서술을 전유함으로써 여성의 글쓰기를 남성이 전유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였고(64), 로디(Caroline Rody)는 바턴의 목소리를 “페미니스트 비평 속에서 식민주의의 난제와 포스트모던 조건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전복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162).

    『포』는 바턴이라는 디포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여성인물이 크루소의 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녀가 서술하는 크루소(Cruso)는 디포의 크루소(Crusoe)에서 “e”가 빠진 인물로서, 이것은 상징적으로 디포의 크루소가 대변하는 ‘영국성’이 빠진 인물, 단적으로 말해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15) 이것은 포이너의 해석대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가 도착한 섬은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전제조건들”의 배경이 갖춰져 있는 곳이며, 크루소는 바로 영국의 식민주의적 임무를 그러한 섬, 일종의 “모형” 속에서 재생할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것(95-96)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는 디포의 크루소와 그의 섬에 대한 서술에 식민주의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적 사유 속에서 진정 리얼한 크루소와 섬에 대한 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포』에서 묘사되고 있는 크루소는 60세 정도의 늙고 고집 센 유럽인 남자로서, 그가 자신의 성(castle)이라고 부르는 집에서 밭을 일구면서 살고 있다. 바턴은 이년 전 외동딸이 영국인 중계업자에게 납치된 후 딸을 찾아 바이아(Bahia)에 갔다 돌아오는 배에서 일어난 선상반란으로 선장의 시신과 함께 보트에 실려 크루소의 섬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제 크루소의 왕국에서 그의 첫 번째 하인인 프라이데이에 이어 그의 두 번째 하인이 되었다.16) 이러한 크루소와 바턴, 그리고 프라이데이의 위치관계는 디포의 소설 속에 감춰져 있는 영국 식민주의 체제를 상징적이지만 더욱 리얼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바턴은 프라이데이처럼 ‘표류자’(castaway)이면서 동시에 크루소와 같은 ‘백인 식민주의자,’17) 그리고 ‘여성’이라는 3중의 위치에 속해 있다. 바턴은 ‘(가부장제의) 희생자’이자 ‘(식민주의의) 가해자’라는 이중적 위치에 선 ‘경계인’이라는 특징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바턴은 크루소가 지배하는 섬에서든, 바이아에서든, 영국에서든 제한되고 억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18) 하지만 백인 식민주의자로서의 바턴은 프라이데이처럼 노예로 살아야 한다거나 말을 못하여 영국에서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존재는 아니다. 그녀는 이 작품의 크루소와 포가 대표하는 가부장제에 의해 “식민화된” 입장에 있음과 동시에 백인 식민주의자로서 프라이데이와 같은 피식민지인을 “식민화시키는” 입장에 속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위치는 양가적이고 모호하다(Kossew Critical Essays 5).

    라이트는 이러한 여성 화자의 중간자적 목소리가 식민주의의 환경에서 사람들과 정치들에 대해 가장 “자의식적으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목소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54). 『포』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바턴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크루소의 이야기와 그가 지배하는 섬의 논리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일체의 고정된 위계구조를 전복적으로 해체하는 인물로 부각된다. 작품 속에서 바턴은 원숭이가 여성이기에 그녀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크루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원숭이에게 남성과 여성은 다른 존재인지’ 의문시하면서 섬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또한 바이아에 관해 포에게 그녀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바턴이 여성에 대한 그 사회의 어떤 편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여성들을 바이아는 창녀로 취급할 뿐이다. 바턴에 의하면, 포르투갈에서 바깥출입이 자유로운 여자는 창녀로 여겨졌고, 자신도 창녀로 여겨졌으며, 그 곳에서 여성들이 바깥출입을 할 자유는 평생 세례, 결혼, 그리고 장례식 세 번 뿐이다(115). 하지만 바턴은 그곳의 창녀들, 즉 자신은 자유 여성이라 부르고 싶은 여성들이 너무도 많아 자신이 창녀로 인식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포에게 얘기한다(115). 그녀의 이러한 자유로운 사고는 여성에 대한 크루소나 포가 상징하는 사회의 편견과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소설 속에서 바턴은 비록 자신이 크루소의 하인이라고 얘기하지만, 크루소의 말에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녀는 어느 날, 크루소에게 왜 배를 만들어 탈출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에게 답을 구하는 차원을 넘은 설득의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배를 타고 브라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그녀의 말에 크루소가 브라질은 그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식인종으로 가득하다고 대답하자, 바턴은 자신이 이 년 동안 브라질에서 살았지만 식인종을 한 번도 본 적 없다(13)며 그의 의견을 반박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식인종들이 만연하다고 크루소가 주장하지만 바턴은 그들의 존재를 믿으려하지 않는데, ‘식민화’를 위한 이러한 ‘투사된 정당화’를 믿지 않는 그녀의 능력이야말로 바로 바턴을 식민주의 입장의 아웃사이더, 적어도 그것의 경계에 두게 하는 것이다(65). 바턴이 그 곳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 크루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거처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다 온 후, 이 사실을 알아차린 크루소가 크게 화를 내며 “내 지붕 아래 사는 동안 당신은 내 지시를 따라야 해!”(20) 라고 소리친 일이 있었다. 이에 바턴은 “저는 크루소 당신의 섬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에요.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죠”라고 대답하면서 당당히 자신을 “표류자”이지, “포로”는 아니라고 밝힌다(20).

    이 작품에서 크루소는 자신의 섬에서 자신의 법과 지시를 따를 것을 바턴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독재자’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프라이데이의 혀를 잘라 하인으로 복종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바턴의 판단19)에 의거해 볼 때 폭력적인 ‘식민주의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와 함께 수많은 돌멩이들을 나르며 일구었던 그의 밭은 바턴의 눈에는 “무덤”(tombs), 즉 이집트의 왕들이 자신들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노예들을 희생해 사막에 세운 무덤과 같았다(83-84). 바턴은 크루소가 자신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신의 섬 왕국(island kingdom)에서 늙어가면서 시야가 좁아졌다고 판단한다(13). 자신의 왕국에서의 폐쇄된 삶은 크루소에게 무미건조한 생활과 습관, 그리고 고집만을 낳았다(14). 바턴이 알게 된 크루소는 디포의 크루소, 즉 정전에 그려진 역경을 이겨내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고정된 사고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늙은이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수년간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크루소의 폐쇄된 왕국에 들어와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를 설득하려하는 바턴이라는 여성은 결국 크루소의 왕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크루소가 항해 중에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바턴과 크루소의 여성과 남성의 가부장적 위계구도는 전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바턴과 크루소의 위치 전복’은 섬에 표류했을 당시 스스로를 크루소의 하인으로 소개했던 바턴이 크루소의 섬을 떠나서는 폐쇄된 자신의 왕국에 갇혀 죽어가는 죄수(prisoner)와 같은 존재인 크루소를 돌보고 위로하는, 그의 간수(gaoler)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 장면에 잘 드러난다(43).

    이와 같이 바턴은 크루소를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기를 쓰지 않는 크루소에게 그녀가 표류의 기록을 남겨야한다고 제안하며 크루소를 비판하는 것은 디포의 크루소를 기억하는 독자들과 바턴의 기대를 이 작품의 크루소가 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턴에 따르면, 크루소의 내면에는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도 사그라져 버렸고, 그는 죽는 날까지 그의 조그만 왕국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13-4). 그녀는 크루소가 모닥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고 언덕 위에서 모자를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해적이나 식인종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무관심과 습관 그리고 늙은이의 고집일 뿐이었다고 판단한다(14). 따라서 바턴은 크루소가 구출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크루소의 15년간의 섬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모험가에게서 기대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구출된 크루소는 세상 사람들의 실망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34). 조규형에 따르면, 바턴이 본 실망자체의 크루소가 일반의 기대에 부응하여 인식되고 존재하게 된 것은 그가 단지 이야기라는 내러티브에 의해 창조된 인물임을 재확인해 주며, 이는 이 작품이 중요하게 제기코자 하는 말하기와 글쓰기 문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329).

    쿳시는 “‘소설의 본질과 과정’이 무엇인가라는 모페(Tony Morphet)의 질문에 ‘누가 글을 쓰느냐의 문제, 누가 권력의 위치, 즉 손에 펜을 잡는 위치를 떠맡느냐’의 문제라고 대답했다(462). 『포』의 딜레마는 쿳시에 의해 “권위에 대한 심문”(“interrogation of authority,” Doubling 247)으로 묘사되어 온 포라는 작가의 힘의 위치를 처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턴은 작품 속에서 포라는 정전 작가의 권위와 그의 글쓰기, 예컨대 정해진 틀에 따라 구성되는 소설 쓰기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성찰하는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쿳시의 다른 여성 화자들과 같이 바턴은 작품 속의 그 어느 인물들보다 “서술의 한계, 다시 말해 글쓰기가 불가분 권력에 종속되는 방식과 자신들의 서술로의 제한된 접근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Probyn 2). 모페와의 인터뷰에서 바턴의 위치에 대해 말하면서 쿳시는 “어떻게 힘을 가진 위치에서 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반대의 입장, 즉 약자의 입장에서 힘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Almighty Pen”)고 밝혔다. 바턴의 이러한 ‘약자’로서의 위치는 ‘여성 작가’로서의 그녀의 위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다.

    크루소가 사망한 후 바턴은 여성 난민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섬의 경험)가 성공적인 소설로 출판되길 희망하면서 프라이데이와 함께 작가 포를 찾아 런던으로 간다. 하지만 크루소가 지겨운 섬 생활에서 스스로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식인종의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 수 있다는 바턴의 의심(82)을 증명하듯, 작가 포는 바턴의 섬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위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식인종과 해적, 그리고 가상의(바턴의 잃어버린 딸이라고 포가 주장하는) 소녀를 등장시킨다. 포는 바턴에게 소설적 재구성이 빵과 같은 섬의 이야기를 맛있는 과자와 같은 책으로 만들 수 있고, 그러한 과자와 같은 책을 독자들은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17). 이러한 의미에서 라이트는 이 작품을 그 핵심에 있어 크루소, 포, 그리고 (아마도 자기 비판적으로) 쿳시라는 남성들이 전유하는 힘들에 의해 백인 여성(바턴)의 이야기와 몸이, 그리고 “가상의 식인종”(프라이데이)이 “착취당하는” 내러티브로 해석하였다(65). 포와 바턴이 키스할 때 포는 그녀의 “입술을 너무 격렬하게 물어뜯어”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고 마치 빨아들일 듯했다”(139). 이와 같이 포에 의해 바턴의 몸이 착취당하듯, 그녀의 이야기도 그에 의해 착취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바턴은 바이아에서도, 크루소와 포와의 관계에서도 ‘교환’되는 상품처럼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바턴은 작품이 전개되면서 섬 이야기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포에게 당당히 밝히고 여성 작가로서 끊임없이 남성 작가 포의 서술권을 견제하려 한다. 포가 상징하는 남성 문학의 힘에 대한 바턴의 이러한 전유는 포의 책상에 앉아 그의 글쓰기 도구를 차지하고는 “당신의 펜이고 잉크인 줄 압니다만, 어쩐지 글을 쓰는 동안 그것이 마치 제 것처럼 느껴지는 군요”(66-7)라고 포에게 적어 보낸 편지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바이아의 이야기에서 창녀로 암시되던 바턴은 이제 포이너의 지적처럼 포의 작가적, 성적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95)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또한 백인 여성 작가로서의 바턴은 서구 정전을 상징하는 포와 달리 프라이데이를 공감하고 그와 대화를 시도할 방법, 그리고 그에게 ‘표현의 자유’를 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발굴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소설 속에서 바턴은 포의 이야기 구성에는 결정적으로 프라이데이의 침묵이 빠져있다고 비판한다(117-8). 바턴은 혀가 잘려 말을 못하는 프라이데이와 음악을 통해 대화를 공유하려 하고 그의 침묵을 복원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해보지만, 그 모든 노력은 정작 포가 아닌 프라이데이의 침묵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포이너는 말 못하는 프라이데이가 식민주의 담론에 의해서, 그리고 인종 차별주의적인 환상에 빠지기 쉬운 크루소와 바턴, 포에 의해 잘못 읽히기 때문에 삼중으로 침묵되어 있고, 프라이데이의 혀의 침묵이 이 작품의 서술을 단계적으로 압도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92, 102). 바턴이 남성 작가 포의 펜을 쥐고 그의 서술권을 떠맡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그[프라이데이]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바턴]의 권력의 위치를 거부하는 사람은 바로 프라이데이인 것이다(Clarkson 36). 크루소의 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만나게 된 사람은 알몸의 흑인(naked Negro) 프라이데이였고,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식인종이 사는 섬에 온 것이라고 판단했다(5-6). 이러한 바턴의 프라이데이에 대한 첫인상은 백인 식민주의자로서 그녀가 가진 편견을 드러내며, 이러한 그녀의 한계는 프라이데이의 잘린 혀와 관련된 진실을 밝히려는 그녀의 모든 시도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춤과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프라이데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그를 교육시키려는 바턴에 대해 포이너는 그녀가 담론의 힘, 사실상 계몽주의에 전념하고 있고, 프라이데이에게 식민자의 언어를 부여하려한다는 데 그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였다(99). 바턴이 끝내 프라이데이의 침묵을 복원하지 못하는 『포』의 결말은 크루소와 포, 바턴이 상징하는 ‘제국의 언어가 전복’되는 순간이자 그 한계들이 극화되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로써 쿳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압제자에 의해 말해 질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Nashef 39).

    하지만 프로빈은 이 작품의 바턴과 같이 쿳시의 백인 여성 화자들이 공통적으로 봉착하고 있는 난관, 즉 침묵하고 있는 피식민지인들에게 말할 권한 내지는 자유를 부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녀들의 중요한 가치라고 역설하고 있다(2). 여성으로서 바턴은 크루소와 포가 대변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어 온 자신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려는 전복적인 시도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녀의 페미니스트적 시도는 침묵하고 있는 다른 약자, 프라이데이로 인해 결국 좌절된다. 이것은 그 어떤 주체도, 비록 같은 약자의 입장에 있는 여성 주체라 할지라도 다른 약자들을 쉽게 반영할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쿳시의 반성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 화자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들을 공감함과 동시에 약자들을 서술하는데 있어 개입될 수 있는 권력을 끊임없이 경계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를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레이엄(Lucy Graham)은 쿳시가 자신의 문화적 공유자인 백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쓰는 동안 “인종적으로 타자”(racially other)인 인물들은 침묵 또는 아주 제한된 말에 의해 특징 지워지지만, 쿳시 소설에서 여성의 목소리들은 담론의 조건에서 더욱 급진적인 타자성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232). 작품 속에서 바턴의 서술의 성공 여부가 침묵하고 있는 프라이데이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은 쿳시 작품의 윤리적 메시지와 글쓰기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쿳시의 자기 반영적 글쓰기와 여성 화자들의 중간자적 위치는 지배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그것들의 전복을 꾀하는 쿳시의 ‘탈권위적인’ 글쓰기의 한 전략이자 타자의 침묵을 복원해내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를 정치적, 미학적 예술가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할 만하다.

    15)디포의 크루소는 근면하게 그 땅에서 일을 하는 전형적인 “경제 개인주의”(economic individualism)의 알레고리로서 읽히지만, 『포』에서 크루소는 생산성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난 ‘모험 리얼리즘’과 ‘식민주의 로망스,’ 즉 개인적인 모험과 경제적인 모험이라는 두 종류의 모험은 식민주의의 내러티브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Poyner 95-96).  16)Coetzee, Foe (New York: Penguin Books, 1987) 11. 이하 본문에 표기함.  17)바턴은 크루소에게 자신을 플랑드르(Flanders)에서의 신교 탄압으로 영국으로 탈출한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18)애트웰은 이 작품의 바턴과 같은 쿳시의 여성 화자 모두가 ‘추방된’ 인물들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들에게 나타나는 ‘여성적 요소’들은 사회적, 담론적 권위들에 대해 쿳시 자신의 주변부적 위치를 극화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9)바턴은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의 혀를 자르고서 노예 상인이 한 것으로 덮어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경험상 노예 상인들이 노예의 혀를 잘랐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브라질에서 벙어리 노예를 그녀가 실제로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크루소가 침몰한 배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도구가 칼이었다는 것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된다(84).

    4. 울프와 쿳시의 페미니즘: 탈/경계의 전복적 사유

    이 논문은 울프와 쿳시가 당대의 사회 현실 문제에서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였다는 기존의 많은 비평들이 이들 작품의 심미적 요소에 내재하는 철학적, 정치적 기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성급한 결론임을 밝히고, 두 작가의 사회 문화적 예술가로서의 의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울프와 쿳시의 예술적 실험 장치들은 당대 사회의 위계구조와 지배 담론을 효과적으로 해체하려는 정치적 차원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울프의 페미니즘은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고통과 성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미적인 글쓰기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여성 글쓰기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이러한 울프의 미학적, 정치적 페미니즘 담론은 당대 사회 운동 차원에 머물러 있던 페미니즘이 정교한 이론적, 문학적 토대를 갖춘 현대 페미니즘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쿳시는 남아프리카의 백인 남성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성적 위치가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작가의 권위적 위치에서 내려와 작가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소설 구조와 ‘탈권위적인 글쓰기’를 모색하는 일환으로 페미니즘적 요소를 작품에 가져왔다. 쿳시는 다수의 작품을 작가의 직업을 가진 여성 화자들에 의해 서술하게 함으로써 남성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편견과 서술의 권력을 버리고 성의식을 초월한 객관적인 작가로서의 부단한 자기 실험을 꾀하였다. 따라서 쿳시의 서술은 울프가 「여성소설가들」(“Women Novelists,” 1918)이라는 에세이에서 비판하고 있는 브림리 존슨(R. Brimley Johnson)과 같은 남성 작가들 대다수가 보이고 있던 ‘작가의 성에 대한 강조’의 태도를 남성 작가 스스로가 버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글은 그동안 주로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의 논의들에 남성 작가의 작품을 적용시킴으로써, 간혹 이분법적인 경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발생시키기도 했던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성과 인종, 종 등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진정한 열린 논의로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더불어 이 연구를 통해 울프와 쿳시의 ‘탈경계적 글쓰기’가 보여주는 전복적이고 반성적인 사유와 다원적인 세계의 윤리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읽어내는 데 페미니즘이 유용한 독법임을 증명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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