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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재미한인 시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태에 대한 인식 Conception of Capitalistic Ecology in Korean American poem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재미한인 시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태에 대한 인식

This study aimed the conception of Capitalistic Ecology in poems written by Kim Yoon-Tae in New York. Capitalism pursuits endless growing and profit. During this process, human being and the nature are isolated and exploited by becoming the Other. For this reason, the capitalism is pointed out as the source of ecological crisis.

Kim Yoon-Tae immigrated in the U.S. before the enactment of 1965 Immigration Law which annulled the forbidden clause of Asian immigrants. He captured the shock and realistic pain caused by American capitalism which was totally new to him. He criticized the money oriented capitalism and the society which missing the trust and caring. He also describes dark side of American capitalistic society through the lives of exploited and isolated ethnic minority workers. He reflected what is like to live as an ethnic minority in the U.S. not a Caucasian.

The poet strongly criticizes the racism and white dominant social structure by describing African American, Asian American and other ethnic minorities. While most other Korean American poets embodied the difficulty in immigrant life and conflicts as immigrants in their personal level, Kim Yoon-Tae penetrates the exploiting and isolating structure of American capitalism through his own experience. Kim Yoon-Tae constituently sticks to sharp critical view point toward American capitalistic ecology from his early writings. He showed the life of ethnic minorities who were encroached by American capitalism. This includes economy, race and natural ecology.

His poems represent the way American capitalism treats immigrant workers. These types of immigrants’ lives are interlocked with his life experience, and are represents in his works. His writing vividly describes how human dignity and meaning of life become impoverished by the capitalism. His poems expose the light and shade of American society. Although Kim Yoon-Tae’s poems do not claim to advocate ecological poems, his wo rks are most ecological poems because they criticize the capitalism as the cause of the ecological crisis.

KEYWORD
자본주의 , 자본주의적 생태 , 타자 , 인종 , 생태위기
  • 1. 들어가는 말

    본고는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윤태의 시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태1)에 대한 인식에 관해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하나의 시장체계로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날 미국이 이렇게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비롯하여 라티노, 아시아계 미국인 등과 같은 유색인종들의 값싼 노동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미국 경제부흥의 역사 뒤에는 이민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자리하고 있다. 본고는 김윤태의 시가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의해 소외 되어가는 이민 노동자의 모습과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인종차별의 문제,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발생되는 생태계의 위기까지 자본주의가 야기한 다양한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의 사회문제의 근원과 생태 위기의 근원을 자본주의에서 찾고 있다. 현재의 인류를 지구적 대재앙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성장 방식이라는 것이다(폴 버킷, 96).

    자본주의는 성장과 이윤을 추구한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며 만족이 없다. 이렇게 성장과 이윤이라는 한 극단을 향해 치닫다보면 언젠가는 인류가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바로 현 생태계의 위기의식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되는 자연은 끝없이 재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레이 북친은 인간의 자연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인간사회의 지배구조가 자연계를 위계적 존재의 연쇄 구조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47). 그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생태파괴의 핵심에 경제적 갈등과 인종적, 문화적, 성적 갈등이 있음을 지적한다(17).

    김윤태는 1940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서울에서 성장,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고등학생 신분이던 58년과 59년 연속 문교부 전국백일장 장원을 하고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도미 후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지내다가 뒤늦게 뉴욕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해 문인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 뉴욕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2) 시인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1963년 당시는 아직 아시아인에 대한 이민금지 조항이 철폐되기 이전이었다.3) 그가 뉴욕에 발을 디뎠던 당시는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하니 낯선 곳에서의 첫 출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종차별과 언어의 벽, 그리고 한국에서와 전혀 다른 사회구조 속에서 젊은 시인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의 시에서 유달리 미국 자본주의와 인종에 대한 문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체험의 소산이다.

    김윤태는 김정기, 최정자, 곽상희 등과 더불어 미 동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그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재미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의 논의가 있었지만 그들 문학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전히 지엽적이고 편향적인 상태이다.4) 특히 미 서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 비해 미 동부 지역의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한국문단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만큼 그들 작품에 대한 연구는 거의 미미한 상태이다. 본고에서 김윤태의 시를 주목한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시작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와 불평등의 문제, 인종차별 문제 등과 함께 인간 삶의 조건들에 대해 지속적인 숙고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많은 재미 한인 작가들이 이민생활의 어려움과 소수자로서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에서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한 데 반해서, 김윤태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주의 사회가 한편으로는 타자들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구조로 되어있음을 간파한다. 물론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더라도 개개인의 상황과 경험에 따라 미국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김윤태가 그려내고 있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의 모습이 모든 소수자들을 대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은 최소한 미국사회에 존재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타자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작품 속에 그려내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윤태는 작품에서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자본주의 논리에 착취당하는 소수민 노동자의 삶을 그려낸다. 미국 자본주의는 인종주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시인은 이 점을 날카롭게 꿰뚫고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여전히 백인 위주의 사회인 미국은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민자들을 그들 사회로 편입시키고 백인 위주의 사회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주민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왔다. 하지만 경제 부흥의 열매를 공정하게 나누는 대신 이주민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정책을 교묘하게 펴왔다. 김윤태는 이러한 미국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작품에 담아낸다. 또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착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태 속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모두 타자화 되면서 착취되고 소외된다. 본고에서는 김윤태 시에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태 인식에 대해 경제, 인종, 환경문제 등으로 구분하여 논하려 한다.

    1)‘자본주의적 생태’라는 용어는 오윤호가 「탈북 디아스포라의 타자정체성과 자본주의적 생태의 비극성」(『문학과 환경』10궝 1호, 2011, 6. 참조)에서 사용한 바 있다. 그는 논문에서 ‘자본주의적 생태’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의 권력적 힘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생태”(239)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사회문화적 환경”(254)이라는 의미로 자본주의 여건에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아도르노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사회의 물질적 기반뿐만 아니라 물질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까지 물상화(reification)하여 인간은 그들에게 주어진 주체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적합한 주체로 변형되고 왜곡된다(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본 논문에서 필자는 사용가치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어 버리게 만드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자본주의적 생태’라 이름 하였다. 본 논고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삶의 양식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는 뉴욕이라는 세계적인 도시의 그늘에 가려진 이민 노동자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인간소외와 왜곡, 그리고 단순히 이윤 추구의 도구로 전락되어 버린 자연의 문제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2)시인에 대한 개인사는 연구자가 뉴욕에 거주할 때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그는 미동부한국문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2003년에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문인들과 함께 한미문학가협회를 발족했다. 그리하여 2005년부터 『한미문학』을 발행하고 있으며, 이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뉴욕지역위원회를 설립하여 2009년에 『뉴욕펜문학』을 발행하였다. 현재 그는 뉴욕에서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1세대 작가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품창작 뿐만 아니라 문예지 발간과 후학 양성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윤태의 작품집으로는 시집『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시학사, 1992), 『아사달』(도서출판 영하, 1994),『하대리에 부는 바람』(도서출판 문예사조, 1996),『사랑이여 보아라』(도서출판 영하, 1996),『잎새에 잠드는 청산의 별곡』(도서출판 영하, 1996),『원효의 무릎을 베고』(도서출판 마을, 1999),『멀고도 먼 길』(도서출판 마을, 2000), 『꽃비내려 젖은 길에 쌓인 기도들』(문예운동, 2003) 등이 있고, 산문집『거기에도 무궁화 꽃은 있네』(도서출판 지혜네, 2000),『뉴욕에서 세상보기』(문예운동, 2003) 등이 있다.  3)아시아인에 대한 이민금지 조항을 없앤 새 이민법이 통과된 것은 1965년이었다. ‘미 이민국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한국 이민자 수는 10명에 불과했으며 1958년에 와서야 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시인이 미국으로 건너간 당시는 한국인 이민자 수는 공식적으로 2,508명 이었다.(민병갑,「새 이민법 제정과 한국 이민자의 쇄도」, 민병갑외 9인,『미국 속의 한국인-교포들의 이민 생활 및 사회적응 분석』, 유림문화사, 1991, 36쪽..)  4)재미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에 대해서는 최미정의 논문「재미한인 한국어 시문학 연구」(숭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0)와 「재미한인문학의 현재와 미래」(『한국문학과 예술』,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4, 9.) 등을 참조할 것.

    2.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가려진 타자의 초상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로 미국을 발전의 모델로 삼아 경제성장에 주력해 왔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고, 국민들의 삶은 가난했다. 김윤태가 도미했던 1960년대 초 한국은 전쟁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느라 고군분투하던 시기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델로 삼아 미국식 가치를 구현하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했다. 해방 이후 미국은 남한 정치와 사회에 깊이 개입하면서 미국식 사회와 문화가 우월하다는 사고를 전파하였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미국을 동경하게 되고 미국은 모든 것이 앞서가는 꿈의 나라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선망했다. 사람들은 선진적인 학문을 배워 개인의 영달과 국가의 발전을 꾀해보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또 풍요로운 그곳에서 성공하여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꿈꿔보았다. 이민 문호가 개방되기 이전인 해방 이후부터 1965년 이전의 이민자들 중 미군병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전쟁고아로 입양된 이들을 제외하고, 유학을 떠나거나 이민을 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야심과 꿈을 가지고 미국행을 택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언어 장벽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김윤태는 미국 생활의 어려움을 그의 시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시인이 처음 발을 내딛은 곳은 세계 제일의 경제도시 뉴욕이다. 그곳에서 시인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창가에 닿기도 전 별빛을 돌려보내는 차거운 도시’라는 언술에서 드러나듯 그곳은 시인에게 배타적이다. 시인이 있을 곳은 따뜻한 창 안이 아니라 길거리 ‘가로등 밑’이다. 이는 오갈 데 없는 시인의 처지를 보여준다. ‘연정’을 품고 온 미국에서의 꿈과 희망은 이렇게 미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시인은 ‘미국이란 나라는 치사하게 돈 버는 일만 재촉하며 등을 떠민다’고 토로한다. 시인이 미국행을 결심한 데는 돈을 벌어 잘살아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돈 버는 일만 재촉하는 미국생활은 시인을 당혹케 한다. ‘할 수 없이 밀려서 가기야 가겠지만’이라는 언술의 이면에는 자신이 원하던 삶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 담겨 있다.

    김윤태는 칼럼집 『뉴욕에서 세상보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인이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 맞닥뜨린 것은 ‘철저한 경쟁과 정확한 자본주의 사회’였다. 막연한 동경과 꿈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상처받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 글에서 시인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어설픈 자본주의’인 한국에서 ‘제대로 훈련이 안 된 상태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을 했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이 서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직접 체험하고 체득’하는 길밖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시인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철저한 경쟁’을 그 기본 원리로 한다. 그리고 이윤 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지향한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끝없이 재투자하는데 문제는 여기에 만족이 없다는 것이다. “돈 버는 일만 재촉하며 등을 떠”미는 미국의 사회구조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다른 대안은 없다. 시인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오로지 이윤만을 최상의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돈이 없으면/ 미국의 짐승보다도 못하다는 경제철학을/ 철없는 이주민에게/ 이상한 말로 가르치는 선생님”(「방아」부분,『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78) “뉴욕은 항구/ 피안의 항구// 상심한 사람들이/ 작별도 없이 휴지처럼 버리고/ 다리를 넘어갈 때// 경제지수에 깔려 보채다/ 장부를 덮고 이름을 씻는다”(「항구 뉴욕」부분,『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103) 등의 시편에 돈이 최상의 가치가 되는 현실이 드러난다.

    ‘일방통행’은 일단 길에 들어서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현실을 말한다. 막상 미국에 도착해 생활해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를 시인은 ‘일방통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전히 공동체적인 의식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한국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시인으로 하여금 생각지도 못했던 경쟁적 삶 속으로 내몰았고 이로 인해 시인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삶에 대해 천착하게 된다.

    오번가는 미국 자본주의 문명의 심장인 뉴욕에서도 가장 화려한 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는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처럼 눈을 홀리는 많은 보석상과 백화점 등을 동경을 품고 흘끗거린다. 그러나 시인은 그 오번가가 이방인에게는 그저 다다갈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피난민’에 비유하는데, 여기서 자조감과 피해의식이 드러난다. 오번가는 ‘축제의 날’처럼 화려하고 왁자지껄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안개가 되어 간 거리’이다. 시인은 여기서 겉으로 드러나는 ‘오번가’의 화려한 외향과 그와는 반대되는 이면을 대비시킨다. ‘안개’는 속성상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좀처럼 진짜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그곳에서 시인은 혼란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결국 ‘오번가’는 눈을 홀리는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만 결국 그곳은 이방인에게는 상대적으로 더욱 소외감을 안겨주는 곳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상징은 월가(Wall Street)다. 그러나 그곳에는 돈만 있고 사람은 없다. 그곳에 있는 인간의 모습은 차갑고 딱딱한‘프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은 가을의 중년여인’처럼 처량하고 스산하다. 겉으로 드러난 물질적 풍요는 ‘위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인은 ‘증권가의 법칙’은 ‘가난을 감추는 도시의 삐에로’라고 한다. 화려하게 치장된 그들의 모습은 단지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곳에선 ‘부라스 밴드’의 노래 소리도 ‘건물벽에 튕겨져 나뒹’굴 뿐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지 못한다. 월가를 그려내고 있는 또 다른 시에서 시인은 “관 지고 들어가는/ 맨하탄 남단에 가장 좁은 길// 종이꽃 화려한/ 꽃상여의 만발한 웃음 아래// 인간은 거기 없고// 허상으로 낙서된/ 지폐 속의 얼굴이// 시려서 떤다.-(「월스트리트」전문, 『원효의 무릎을 베고』,135)”라 했다. 시인의 눈에 비친 미국 금융의 심장인 월가는 ‘관 지고 들어가는’ 무덤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는 진짜가 없다. ‘종이꽃’은 그 화려한 모습으로 인간을 울리고 웃기지만 결국 인간성을 매몰시키고 파멸로 이끄는 돈의 모습이다.

    경제 논리에 매몰되어 버린 인간의 삶은 파편화되고 기계화된다. 그래서 시인은 “현대는/ 부속품이 발달한 조립의 가설 무대/ 살아있는 자와 다름없이 움직여도/ 피 없는 심장이/ 화면에 얹혀 노는 그림일 뿐이다”(「이정표」부분,『꽃비내려 젖은 길에 쌓인 기도들』)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개체 의식(individual consciousness)’이 급부상하게 된다. 이것은 현대인은 복잡한 사회구조의 한 유기적 구성 인자로서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결국 인간의 ‘기계부속품화’를 촉진하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 분업이 심화되면 될수록, 그리고 각자의 활동 영역이 특수화·전산화되면 될수록, 인간은 부속품처럼 더욱더 개체화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부속품화 현상은 결국 인간 영혼의 기계화를 불러온다(박호성, 190-191). ‘조립의 가설 무대’에서 ‘심장’ 없이 ‘부속품’화 되어버린 삭막하고 소외된 이민자의 삶은 기다림도 기약도 없는 같은 인스턴트화 된 삶이다. 그래서 시인은 “약속없이/ 때도 없는 식탁에 오를 때마다/ 자존을 챙기어 보지만// 웃음을 나누는/ 환한 얼굴의/ 여유는 아니었다// 원리의 곁에서 맴돌다 흩어지는/ 가장의 원리// 임시를 때우다가 헤어지는/ 라면 같은 사람들/ 즉석의 망각// 이역의 의미인가/ 약속 없는 인연”(「라면」부분, 『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72-73)이라 한다. 식사 시간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는 삶, 수많은 일회적인 만남 속에서 금방 잊혀져 가는 사람들, 이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여유와 관계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속에서 인간의 자존과 행복은 찾기 힘들다.

    위 시의 ‘이씨와 민씨’로 대변되는 한인노동자의 삶은 신산하기 그지 없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고된 노동을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팍팍하다. ‘이씨와 민씨’도 여느 이민자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쉽지 않은 미국행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오랜 세월 쉬지 않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시에 그려지고 있는 그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긴 세월 신고 다닌 헌 신발 다 닳은 밑창’ ‘짜여진 순서대로 잊혀져가는’ 그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 고된 노동과 생활고에 허덕이며 점점 소외되어 가는 타자의 초상이다. ‘젖은 땀이 육젖’이 되도록 일을 해도 고작 손에 쥐는 것은 ‘얇은 생계비’다. 한 주 내내 고된 노동을 하고도 싸구려 ‘선술집’에 들러 한 잔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 귀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그 어떤 여유도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이씨와 민씨’는 말이 없다. 단지 ‘핏발 선 눈동자의 노을’만이 이들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다. 시인은 무겁고 암울한 톤의 회화적인 기법으로 한인 노동자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물론 ‘이씨와 민씨’ 같은 노동자가 한인 이민자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단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사회 한 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한인 노동자의 삶을 작품에 구현해 냄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한 구석에서 소외되어 신음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불러낸다. 어쩌면 미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성공과 행복이라는 면에 치중해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직접 생활해 보면 ‘이씨와 민씨’의 이야기가 결코 과장되거나 극히 일부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뉴욕’은 오염된 공간이다. 시인은 “땡볕이나/장대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개미는/ 맞벌이를 한다/ 살충제 뿌려진/ 배추밭에서/ 벌레도 남모르게/ 맞벌이를 한다// 그래선지/옥상에서 내려다보면// 개미나 벌레나/ 뉴욕 이민 수용소에서/ 살겠다고 우글거린다(-「맞벌이」전문, (『아사달』,131)”라며 자신과 같은 이민자의 삶을 ‘개미나 벌레’에 비유한다. ‘살충제 뿌려진 배추밭’은 벌레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인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다. ‘살충제’로 대변되는 유해하지만 생산적인 삶의 조건에서 벌레나 인간은 모두 건강한 삶을 꿈꿀 수 없다. 이 시는 ‘살충제가 뿌려진 배추밭’으로 표상되는 오염된 삶의 조건이 비록 인간과 동물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생태계를 죽음으로 몰고 갈지라도 당장은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그곳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으며, 그마저도 쉬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현실 보여준다.

    3.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그들, 인종적 타자

    인종(race)이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유사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가, 인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19세기 이후로 혈통적 집단 또는 그 후손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환되었다.5)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종이라는 용어의 역사는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인종 문제는 오늘날 미국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면서도 미국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다.6) 신문수도 미국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인종주의가 사라졌지만 “인종주의적 주체(the racist subject)를 양산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이러한 사회구조가 흑인들과 소수 종족의 기회와 응분의 보상을 지속적으로 박탈”7)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백인의 국가 미국은 백인에 의해 백인 중심의 제도를 만들었으며 그 근간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자유, 평등, 정의의 사회라 불리는 미국은 역사적으로 백인들을 위한 특권 사회였으며, 소수 민족들은 백인들이 누리는 특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착취의 대상이었던 셈이다(장태한, 29-30).

    김윤태는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주의 사회인 미국의 이면을 흑인들의 현실과 역사를 통해 그려낸다. 할렘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실상을 그리고 있는 「할렘의 거리·1」(“마틴 루터 킹의 목소리를 지키는 흑인병사가/ 때 묻은 NY의 헝겊모자를 철모로 쓰고// 살려 달라/ 먹여 달라/ 배급을 더 달라/ 술병속에서 수용소가 되는 거리”-「할렘의 거리에서·1」부분, 『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89)나 백인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미국 독립기념일의 의미를 꼬집는 「이상한 국경일」(“반쯤은 원화지도 않았던/ 남북전쟁의 피묻은 얼굴에/ 두꺼운 분칠을 하며/ 아전인수로 의미를 꿰매고 있었지만// 전사들의 제복이/ 남북의 국기로 퍼득이다 지치면/ 검둥이는 눈치만 보며/ 갈대 밭에서 외로웠다”-부분,『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98) 등의 시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흑인은 타인종에 대한 백인의 착취와 차별의 역사를 대변한다. 처음에 흑인들은 계약제 노동자로 미국으로 건너 가 자유민으로의 지위를 누렸지만 곧 백인들의 필요에 의해 노예로 전락한다.8) ‘아프리카 아무 나라 국기’를 가슴에 달고 춤을 추는 ‘검둥이 데시몬’은 비록 이름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존재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무 나라 국기’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지 ‘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원숭이가 되어 춤을’ 춘다. 그가 백인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백인 같은 땀을 흘리’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원숭이’가 재주부리는 것을 구경하듯 ‘검둥이 데시몬’의 춤을 구경한다. 그의 춤은 ‘원통하게’ ‘가슴을 때리며’ 추는 분노의 몸짓이다. 시인은 ‘살 곳을 배급받는 인심 좋은 복지국가 갈 곳을 지정받는 자유의 나라’라는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미국이 가진 이중성을 폭로한다.9)

    루이스 R. 고든은 파농의 말을 인용하여 “‘흑인Negro people’이라는 명칭 아래 모든 흑인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려는 것의 목적은 그들로부터 개인적 표현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을 사람들이 가진 생각에 맞추려는 강제 아래 흑인들을 두려는 것(84)”이라고 한다. ‘흑인성’이라는 사실은 흑인성의 세계화(흑인은 어디를 가든 흑인으로 존재한다)뿐만 아니라 그것이 재현하는 익명성의 왜곡이다. 그래서 고든은 “인종주의는 개인이 자신조차도 익명화시키는 것이다. 바로 의식의 관점에서, 구체화 자체는 개인을 사물의 메커니즘 속에 가두거나 혹은 개인을 추방하여 그를 바로 그 사물 주위를 배회하는 관찰자로 바꾸어 버리는 생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게 하는 아이러니한 방식이다”(100) 라고 한다. 미국의 인종적 소수자들은 자신이 개체성을 잃어버린 익명적인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을 겪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소수자들을 자신이 당한 방식으로 익명화시킨다. 그래서 인종적 소수자들은 백인으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소수자로부터 소외되는 이중의 소외를 경험한다.

    시인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갖는 지위와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들의 이야기가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인의 역사와 삶을 통해 시인은 타자인 자신의 처지를 가늠한다. 그래서 그는 “여기까지 오게 된 편력을/ 아무도 불행하다고 후회하진 않지만/ 분노를 갈아내는 흑인의/ 맷돌 소리를 들으면서/ 경험으로 공포를 비켜가는/ 서툰 솜씨 앞에// 낙조는 왜 가다말고/ 아름다운 노래로 으스대는지// 그걸 물으면서/ 황무지를 포장하는/ 한포기 새로운 풀이 된다(「항구 뉴욕」부분, 『꽃비내려 젖은 길에 쌓인 기도들』,24)”라고 한다.

    위 시에서 시인은 미국사회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면 흔히들 겪는 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시인은 그의 국적을 묻는 사람에 따라 ‘差異니스’ ‘制覇니스’도 되는 상황을 희화적인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멋대로 떠들면서 가까이’오는 것이나, ‘슬쩍슬쩍 웃으면서 가까이’ 오는 태도에서 시인을 한 인간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서 시인의 대답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미 ‘정해놓고 물어 보는 일방통행 질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누구인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인들의 눈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혹은 한국인이나 다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일 뿐이다. 장태한은 “백인들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으나 유색 인종들에게는 인종적 정체성만이 부여 된다”(31)고 한다. 위 시에서도 시인은 한국사람 김윤태라는 개인은 온데간데없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중국인이 되기도 하고 일본인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국적을 묻는 행위가 진정 그를 한 개인으로서 관심을 갖고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시인에게 당혹감과 불쾌감을 준다. 개인의 정체성이 무시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경험은 그를 무국적 자로 만든다.

    ‘부자 나라’에 이민을 왔지만 그것은 백인들만의 것이고 미국이 표방하는 ‘자유’라는 것도 ‘하루의 노동을 희망 없이 세어보는’ 이민 노동자들에겐 남의 것에 불과하다. 자유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부르주아계급의 신념 체계요, 행동강령”이며 “정치제도 및 경제활동의 기본원리일 뿐만 아니라, 이제 는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요 몸에 밴 생활 습관의 한 가닥” (박호성,192)이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개인주의인데, 문제는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은 거인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힘 있는 존재만이 자유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힘’의 논리에 뿌리박고 있다”(193). 독립 전쟁과 미국 건국의 기초 토대가 되었던 자유주의 사상의 전통을 뿌리 깊게 간직한 미국 사회에 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유는 기득권층의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만 사회·경제적 약자가 적극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경쟁의 논리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소수계의 이민자들은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같지만 자본과 힘의 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판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음을 말해 준다. 시인은 이러한 삶을 ‘이민 수용소’ 생활에 비유하고 있다. ‘끼일 데도 없이 표정 없는 얼굴로’ ‘하루의 노동을 희망 없이 세어보는’ 이민노동자 들의 삶은 ‘부자 나라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과 대비를 이룬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더라도 내일에의 희망을 꿈 꿀 수 있다면 현실의 삶은 힘들어도 견딜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 없다면 현실은 그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희망이 없는 삶, 그것보다 절망적 인 것은 없다. 그런데 시인은 ‘희망’이 없다고 한다. ‘희망’이 없기에 그 의 삶에는 ‘사랑’도 ‘기다림’도 없다. 그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도 못하 는 그저 쓸모없는 ‘고물 전차’같은 존재이다.

    ‘이민 수용소’에 비유되는 타자들의 공간은 자연과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소외된 공간이다. 여기서 시인의 ‘공간 상실’10) 의식이 드러난다. 생태적 삶의 공간을 상실한 시인은 공간 상실 이전의 세계를 꿈꾼다. “물 받아 씨가 되는 조선 오이를 씹으며/ 내가 잊은 옛날의 그 시대를 찾아/ 낮 정오에 나는 누웠다”(「나이가 들어서야」부분, 『꽃비 내려 젖은 길에 쌓인 기도들』,119)라는 언술에서 시인이 잃어버린 삶의 공간을 희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신문수, 『타자의 초상-인종주의와 문학』, 집문당, 2009, 22-23쪽.  6)장태한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편향적이라고 지적한다. 각기 다른 민족이 차이를 극복하고 공존하는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는 순전히 백인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며 실제의 미국은 인종과 민족에 근거한 차별과 수탈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백인의 시각으로 조장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암흑의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는 인종주의에 근거한 차별 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미국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인종 차별주의에 근거한 백인 자본가의 자본 축적 및 이윤 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한다( 장태한, 『아시안 아메리칸-백인도 흑인도 아닌 사람들의 역사』, 책세상, 2004, 14-49쪽).  7)신문수는 인종주의가 특정한 인종집단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인종적 편견과 적대적 표현이 개인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구성체의 지배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앞의 책, 45-46쪽) 카마이클과 해밀턴은 제도적인 관행과 정책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제도적 인종주의가 횡행하고 있는 나라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제도적 인종주의는 사회에 편재해 있는 반흑인적 태도와 관행의 운용에 입각해 있다. 우월한 인종집단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곧, 백인이 흑인보다 훌륭하다는 것, 따라서 흑인은 백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종주의적 태도이다. 이런 생각이 사회 전체에 개인적으로는 물론 제도적인 차원에서, 또한 명시적으로는 물론 묵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Charmichael, Stokley, and Charles Hamilton. Black Power:The Politics of Liberation in America. New York: Random House, 1967, 20쪽. 신문수, 『타자의 초상』, 47쪽 재인용.  8)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백인 식민자들은 백인 연한계약제 하인과 인디언 노예를 대신할 수 있는 양질의 노동력을 흑인에게서 발견하고, 흑인들이 자유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평생 예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신문수, 『타자의 초상』, 130쪽).  9)장태한은 “미국은 두 얼굴을 가진 국가다. 미국은 자유를 표방하면서 흑인을 노예로 착취했으며, ‘죽은 인디언이 가장 좋은 인디언’이라는 식으로 인디언 몰살 정책을 실시했으며, 라틴계와 아시아인에 대해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을 펴왔다. 이러한 미국의 양면성을 이해한다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보인 부도덕한 모습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리라”고 한다(23쪽).  10)존 벨라미 포스터는 오늘날의 지구적 생태 위기의 단초를 ‘공간감 상실’(140)에서 찾는다. 그는 급속히 세계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체제에 내제된 생태적 제국주의 경향에 따라 지구상의 어디도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공간 상실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간 상실은 “모든 집합적·생태적 생활양식과 특정 환경의 특정 지역에서 살아간다는 일체감을 해체”한다는 것이다(존 벨라미 포스터, 추선영 옮김,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책갈피, 142쪽).

    4. 환경의 상품화, 인류의 위기

    자본주의의 특징인 생산제일주의 세계관은 인간이성중심주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것은 폭력적인 이항대립체계에 기초한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와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를 낳는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인간들은 주변부를 철저히 지배, 착취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아간다.(문흥술, 80) 우리 삶을 안락하게 해준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져 온 온갖 종류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 착취는 생산제일주의 세계관이 불러온 결과이다. 끝없는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상 자본이 되는 자연에 대한 침탈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 자본이 무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인간은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인간이 생활의 터전을 삼고 있는 토지는 단순히 땅이라는 물리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면서 또한 심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칼 폴라니(Karl Polan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토지라 부르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 제도와 뒤얽힌 자연의 요소다. 땅을 격리하고 땅 없는 시장을 형성하는 것은 아마도 옛사람들에게는 가장 섬뜩한 일이었을 것이다. ⋯⋯ 경제적 기능은 토지의 극히 중요한 여러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땅은 인간에게 안정적 생명을 준다. 거주 공간이기도 하다. 땅은 인간의 신체적 안전의 조건이다. 경관이고 계절이다. 땅 없이 살아가는 것은 손 발 없이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토지를 인간과 분리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개념의 핵심적 부분이었다.11)

    현대인들이 고향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고향에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갈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 간직하며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갈 고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떠돌이로 사는 것 인지도 모른다. 공동체적 삶은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되었고 따라서 인간 관계도 철저히 개인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립되어 있고 고독하다. ‘토지’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거주 공간’을 잃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안정적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땅을 갈아엎을 때, 실은 인간의 ‘안정적 생명’ 또한 파헤쳐지는 것이다.

    디아스포라가 발생하게 된 원인도 자신의 근간을 잃은 인간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나게 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존 재의 근간인 땅을 빼앗고 그것을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의 삶 또한 파편화하고 물화시켰다. 뿌리가 뽑힌 인간들은 어디로 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가속화로 인한 세계화 바람이 거센 지금 어느 때보다 도 이산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 개발의 논리 하에서 자연은 예전의 신성성과 생명력을 잃었다. ‘명문대학 교수들’ ‘건축업자’ ‘도로건설국’은 모두 개발의 논리로 자연을 파괴하는 데 앞장선다. ‘산꽃의 씨앗들’이 꽃피울 미래마저 빼앗아 가 버리는,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명문대학 교수들’의 논리란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개발은 몇 몇 기업과 관계자들, 혹은 소수의 사람들의 배만 불려줄 뿐, 정작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할 뿐이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간이기도 하다. 식물과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도 땅을 터전으로 해서 살아간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타지로 내몰린다. 결국 땅이 파괴됨으로서 인간의 안정적 생명도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안정적 생명을 잃은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폐허에서 불어가는 스산한 신음소 리’가 자리한다. 우리가 건설이라 부르며 이룩하는 것들은 사실은 ‘파괴’ 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삶을 학대하여 파괴하는 것과 같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징후들은 이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자연을 죽이면, 자연이 죽인다”(박호성, 218). 시인은 ‘산’과 ‘강’이 ‘분노’에 차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것임을 예감 한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분노를 씻으며 흘러가는 강가에 분노가 더 쌓이는 산 핏줄’의 언술에서 인류파멸의 재앙 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은 버려졌다’고 선언한다. 결국 인류의 파멸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이다.12)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은 그저 인간에게 이익을 내기 위한 유용한 수단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보다 안락하게 해 준다는 명목 아래 산을 깎고 강을 파헤지고 자연 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체들을 멸절시키고 있다. 끝없는 생산과 이윤의 추구는 서로 맞물려서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연을 착취하고 그로 인해 건강한 인간 생태계 또한 파괴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생명을 파괴하고 자연을 오염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간 을 노동의 도구로 또 파괴의 수단으로 만든다. 그래서 “개인들은 자본주의의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며 파괴적인 충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인적 자원에 대한 생산적 착취와 시장에 걸림돌이 되는 자연환경 및 기타의 것들(개인, 공동체, 그리고 국가)에 대한 훨씬 더 치명적인 파괴에 스스로 종사하게 된다.”13)

    자연에서 분리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자신의 근간으로 또 친구로 여기지 않고 그저 유용한 도구로 인식한다. 끝없는 생산과 이윤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자연 자본은 한계가 있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파괴로 인해 그 조정 능력까지 잃어가고 있다. 그로인해 야기될 자연재해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연 재해는 인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되돌 릴 수는 없는 것인가. 시인은 현실을 고발하고 암울한 전망을 이야기하 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절망하거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제라도 자연의 자연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자연성 또한 회복하기를 희망한다.

    이성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서구의 자연관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자연을 인간과 분리하지 않고 벗으로 여겼다. 옛 선비들이 사군자를 벗으로 여기거나 자연을 벗 삼아 지내던 것은 그러한 사고의 일면이다. 또한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은 자연을 유기체적인 생명의 창조 과정과 완 성과정으로 보고, 자연에서 생명의 가치와 조화로운 질서의 원리를 찾아 내고자 했던 동양의 자연관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우리가 서로 품어주는 공동체적인 삶의 원리를 자연에서 배우기를 희망한다. 그는 자연과 같이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 여긴다. ‘발길로 차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구박하지 않고’ ‘사 이를 비켜주는’ ‘아량’을 베풀 줄 아는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언술의 이면에는 인간은 나무와 달리 자본주의적 경쟁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발길로 차고, 밀어내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구박하고, 양보와 배려를 잃어버렸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시인은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이라 호칭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연에서 삶의 원리를 터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삶의 변화는 개인 혼자만 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 자체가 서로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저마다 다른 온도에 시달리며/ 시련을 겪는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하지 않는 여유를/ 눈이 오면/ 눈을 피하지 않는 인내 를// 우리는/ 나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의 내용을 본다”(「나무」부분, 『우리, 숲속으로 가지 않으련』, 151)라며 ‘나무’를 통해 삶의 이치를 배 운다. ‘나무’는 어떤 환경에서든 오랜 시간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서서 자연의 삶을 살아낸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인간의 삶과는 대조적이다. 본래 가진 것을 잃지 않고 그것이 속한 환경을 감내하고 또 이겨내는 ‘나무’의 모습에서 시인은 인간이 회복하 고 살아가야 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연에서 배우는 진정한 삶의 원리에 대해 시인은 이후의 작품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그는 “오르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깨우침 있어/ 목 꺾고 등 굽혀/ 아래 로 키를 줄여 되돌아 내려가는/ 산들의 능선”(「산」부분,『원효의 무릎 을 베고』, 88), “온유를 보아라/ 꽃대를 키우는/ 물방울의 온유를// 겸손을 보아라/ 숙인 머리 하나로/ 무리를 끌어모으는 꽃잎의 겸손을” (「온유와 겸손」부분,『원효의 무릎을 베고』,95)“이라며 자연의 원리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바란다.

    11)Karl Polany, The Great Transformation(Boston: Beacon Press, 1944, p.178) 위의 책, 54쪽 재인용.  12)이것은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홀로코스트”(박호성, 201), “일제 침탈 40여 년의 국토 훼손보다 더 큰 파괴의 재앙”(최병성, 『강은 살아 있다: 4대강 사업의 진실과 거짓』, 황소걸음, 2010, 12쪽.) 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4대강 사업의 폐해는 이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13)Kellner,D.,1982, "Marcuse, Liberation, and Radical Ecology", Illuminations, 5April. 데렉 웰, 조유진 옮김, 『그린레프트』, 이학사, 2013, 119쪽 재인용.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김윤태 시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태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았다. 시인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충격과 그것이 야기하는 현실적인 고통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나 신뢰가 사라지고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비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 착취되고 소외되는 소수민 노동자의 삶을 통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려낸다. 또한 시인은 미국 사회에서 백인이 아닌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성찰한다. 흑인과 아시안, 그리고 다른 소수인종의 역사와 삶을 그려내면서 미국 사회에 여전히 팽배해 있는 제도적 인종주의와 백인위주의 지배구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피난민’ ‘무국적자’ ‘고물전차’ 등의 비유는 미국에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회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도 풍요로운 삶의 여건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인만큼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을 바란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현대의 자본주의가 소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다수를 착취하고 희생시킨다는 점이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풍요와 권리는 오직 백인을 위해 존재 한다.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은 고된 노동과 소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시인은 자본주의가 자연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목도한다. 끊임없는 이윤추구가 목적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이나 모두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김윤태 시의 특징은 매우 진솔한 언어의 사용에 있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적 생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인 언어로 보여준다. 현실 고발적인 그의 의식을 담아내는 데는 수사적인 표현보다는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김윤태는 시작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관성 있게 미국 자본주의 생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미 자본주의 사회에 잠식당하는 소수자의 삶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경제문 제, 인종문제, 그리고 자연 생태계 문제까지 포함된다. 그의 시에는 미 국의 자본주의가 이주민 노동자와 소수자들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이민 자들의 삶이 시인 자신의 체험과 맞물려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생 생하게 알 수 있다. 처음엔 고향을 잃고 나중에는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많은 인종적 소수자의 모습은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 시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서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명암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연환경의 파괴가 끊임 없는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개발 논리에 의한 것임을 인식한다. 시인은 심각한 생태계 파괴가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연의 원리 에서 찾아낸다. 자연에서 양보와 배려, 온유와 겸손과 같은 상생의 법칙을 배워 서로가 품어주는 공동체적 삶의 원리의 회복을 주장한다.

    자본주의와 그것이 야기하는 물질만능과 인간소외 및 착취의 문제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자연생태계의 파괴를 불러온다는 면에 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생태계의 위기가 전 지구적으로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는 현시점에서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일컬어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시작품에 담아내고 있는 김윤태의 시는 그런 점에서 생태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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