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영화운동 담론에 나타난 세계영화사와의 전이적 관계 연구*

A Study on the Transferent Relationship between the 1980s' Discourse of Korean Cinema Movement and the World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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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Korean cinema has referred to and translated the important trends and movements through its filmmaking and discursive practices since the colonial period. The long history of cultural translation and transference can be defined as making attempts to demarcate Korean cinema as a national cinema. This paper focuses on the 80s, which is called “the revolutionary era in Korea”, because it is sharply differentiated from the earlier periods since the beginning of the era of division in Korean peninsula in terms of its activation of anti-imperialist and anti-american discourses.

    We could witness the most radical and organized underground cinema movement among the filmmaking groups in the 80s. Then, how about the dimension of discursive practices? I tried to trace how the active anti-conventional discursive choices reflected and translated certain moments of the world cinema history and developed the transferal relationships with them. As a result, I could confirm that the young filmmakers and critics in the 80s held tight to the independent and socialism-friendlier attitude the ones in any other periods since the 50s.

    However, there was also the tension and conflict between the competitive discourses even in the 80s: the one between the cinema-movement group, which considered cinema as a agitating and mobilizing medium partly accepting the attractive power of Hollywood conventions, and the counter-cinema group, which was more likely to take up the counter-cinema strategy totally resisting the mainstream conventions. Therefore, Chang, Sun-woo’s conception of ‘open cinema’ sounded out the possibility of combining neorealist practices, Godard’s experiments and Korean traditional theatrical conventions in the early 80s. However, the movement group started referring to The Third Cinema in the southern America in the mid-80s and finally to the Chinese and Vietnamese socialist cinema and then even to the North Korean cinema. However, the collapse of the socialist world resolved the tension between the two groups because the launching of the journal “Film Language” became the critical moment of absorbing almost all critics as its workforce.

    According to Zizek and Mouffe, the whole historical process in the 80s could be defined as the process of translation of the antagonism into agonism. Psychoanalitically speaking, the subject needs to overcome the transference phase of identification with the Other in order to be separated from the desire of the Other and to be really subjectified in the process of transference. Ironically enough, the concept of Minjok cinema, that was none other than the fantasy of the nation and the national cinema, indicates how the colonized subject is integrated into ideology of the national autonomy, the colonized fantasy. Henceforth, the80s’ concept of “Minjok cinema” was liberally diluted with the de-political concept of national cinema when Korean cinema began to pursue its fame and award-winning pride in the world film festivals.

  • KEYWORD

    The 80s' Korean Cinema , Cinema Movement , Cinema-ism , Transference , Translation , Antagonism , Universal Singularity , Minjok cinema

  • 1. 1980년대라는 결절점

    최근 ‘탈경계’의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 담론들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아무래도 신자유주의가 강제한 글로벌리즘과 다문화 현상을 해명해야 할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매체만으로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탈경계는 전혀 새로운 쟁점이 아니다. 영화는 이미 그 발명과 탄생의 과정부터가 국제적인 것이었으며, 탄생 이래로 지금까지한 순간도 지역의 경계에 갇혀 있었던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영화만큼 다수의 동시대인들이 국가와 인종을 망라하여 동시다발적으로 향수하는 문화적 산물이 또 있던가? 타 매체와 구별되는 영화의 특수성 중 하나가 바로 이 ‘국제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영화의 국제성을 지역 간 경계의 기능 마비의 지표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경계 저편의 것이 경계 이편으로 건너올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경계의 엄연한 존재와 그 작동방식은 오히려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국제성이란 경계의 무력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부단히 갱신되는 경계의 (재)구성의 결과다. 그리고 바로 그 (재)구성의 논리적 근거야말로 한국영화에 지역 영화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된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영화사 또한 이러한 영화의 국제성에 복속된 채 형성되어온 것인 한, ‘한국적임’의 성격을 규정해온 통시적, 공시적 맥락을 규명하기 위해 이러한 (재)구성과 (재)확립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영화라고 하는 ‘내셔널 시네마’가 발전하기 위해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라는 내적 토양에 뿌려진 세계영화의 동향과 영향이라는 외적 자양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해왔던가. 그러한 영향사를 관통해온 한국영화 혹은 영화인의 (무)의식적 욕망은 무엇이었으며 그 욕망의 실제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 역사적 과정을 되돌아보려는 까닭은 오늘날 한국영화가 처한 ‘세계화’의 상황을 어떠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지를 타진해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는 시대는 1980년대다. 왜 80년대인가. 무엇이 80년대를 특이하게 하는가. 무릇 대개의 ‘전환기’는 자기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위기 탈출을 위한 대안을 고민하는데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예컨대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에서는 50년대 후반이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대중오락적 성격을 강화해가고 있는 당대의 영화제작 현실을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비판하면서 50년대 비평가들은 ‘새로운/한국적 리얼리즘론’을 타개책으로서 내놓았다.1) 50년대 리얼리즘 담론의 기조는 30-40년대 한국영화 비평담론의 좌파적 색채를 탈각시키면서도 영화의 윤리적 기능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타협은 70년대 말까지도 본질적인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80년대에 이르러 급진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분단 이후 우경화된 모든 담론적 실천을 폐기하고 상대적으로 좌경화된 자신의 언어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전환기가 되고자 했던 시대, 그것이 바로 80년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포를 주도했던 영화운동 진영이 공유했던 비평담론 역시 그러한 시대정신의 강력한 자장 안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혁명의 시대”2)로 농축되는 80년대의 급진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사건은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었다. 광주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두 가지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다. 첫째, 신군부의 광주 학살을 방기한 미국에 대한 자주적 인식, 둘째, 민중에 대한 계급적 인식이 그것이다.3) 그리하여 70년대까지의 민주화 운동은 개량주의적,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비판되었고, “민족과 민중, 민주의 세 과제는 자주, 민주, 통일로 재정립”4)되어갔다. 민족운동은 미국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제국주의론에 의거해 비판하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북한체제와 관련해서 이해했으며, 민중운동은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론에 의거한 정치투쟁과 노동현장 투신을 설파했고, 민주화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반체제운동의 관점에서 전략화되었다.5)

    한편 이러한 이념적 급진성과 더불어 80년대의 사회적 저항은 철저하게 제도권 밖을 “해방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주로 대학과 교회를 중심에 둔, “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일종의 도덕적 기관”이 비판세력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따라서 정치적 항의와 과격한 시위, 분신 등의 양상으로 터져나온 장외 투쟁을 조직화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도 학생과 성직자, 교수들이었다.6) 이러한 상황은 “어떠한 중간노선도 용납되지 않는 경직성이나 절박한 현실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낳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80년대의 “고유한 활력과 비전”의 원천적 조건이기도 했다.7)

    김경일에 따르면 이러한 활력과 비전은 1987년 6월항쟁의 부분적 승리에 따른 거대서사로서의 대중적 민주화운동의 종언 이후에 나타났던 일련의 경향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었다. 즉 남성 중심의 노동조합 운동이 점차 노조의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보여준 “경제주의적, 실용주의적 경향”8), 그리고 대항운동 세력이 선거 국면에서 사로 잡히게 된, 최종적 결과만을 중시하는 “권력과 성장의 물신성”9)의 경향 말이다. 하지만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규모로 이식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와 1989년에서 91년 사이에 진행된 소련의 해체 및 동구권의 몰락은 80년대의 활력과 비전을 신속하게 체제 내적 문화현상으로서 편입해나갔다. 그렇게 80년대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의 주창자들이 탈냉전 시대를 맞아 “고도산업사회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들어가는 후기산업사회적 인간으로 급격히 변모”10)하는 가운데 80년대는 역사적으로 저물어갔다.

    이처럼 80년대의 이념적 급진성은 70년대 이전의 냉전적 윤리의식과 90년대 이후의 탈냉전적 윤리의식 사이에서 양자를 연결하는 동시에 구분하는 결절점과도 같았다. 따라서 80년대의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작업은 해방 이후 한국영화 담론사를 분절하고 각각의 분절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특히 관심이 있는 문제는 80년대 영화담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영화운동 세력이 어떻게 당대의 이념적 급진성을 영화담론으로 풀어냈던가 하는 것이다. 이들은 국내적으로는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좌익 영화담론의 당파성을 자신들의 이념적 기원으로서 확립하고자 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서구 예술영화와 제3세계영화, 북한영화 등을 다양하게 참조하면서 이를 당대 변혁운동의 문제틀 속에서 소화하고자 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에 이루어졌던 이러한 문화 번역의 노력은 일사불란한 논리적 일관성과 계열성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고 기묘한 착종과 교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80년대 영화담론을 관통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분석을 더욱 흥미 롭고 의미 있는 작업으로 만들어주는 측면일 것이다.

    1)이에 관한 논의로는 김소연, 「전후 한국영화담론에서 ‘리얼리즘’의 의미에 관하여: <피아골>의 메타비평을 통한 접근」, 『매혹과 혼돈의 시대: 1950년대 한국영화』,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한국영화사 연구의 현단계: 신파, 멜로드라마, 리얼리즘 담론을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12호(2004년 12월) 참조.  2)이해영 편,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새로운 세상, 1999.  3)김진균, 「1980년대: ‘위대한 각성’과 새로운 주체 형성의 시대」, 위의 책, 13-14쪽.  4)김경일,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백산서당, 2003, 295쪽.  5)김경일, 위의 책, 292-94쪽 참조.  6)김동춘, 「1980년대 민주변혁운동의 성장과 그 성격」, 학술단체협의회 편저, 『6월 민주항쟁과 한국사회 10년 I』, 도서출판 당대, 1997, 75쪽.  7)김경일, 앞의 책, 92쪽.  8)김경일, 위의 책, 92쪽.  9)김경일, 위의 책, 306쪽.  10)김동춘, 「1980년대 한국의 민족주의: 고도산업화 시대의 때늦은 민족주의」, 유병용 외저, 『한국현대사와 민족주의』, 집문당, 1996, 183쪽.

    2. 비제도권 영상운동의 조직적 분기

    80년대 영화담론의 형성과정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어봐야 하는 것이 바로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조직과 실천이다.11) 사실 80년대적 고유성의 모든 것은 이 ‘비제도권’이라는 표현에 압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분단 이후, 영화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그토록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시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사회운동적인 관점으로 바뀌게 된 시점은 82,83년에 걸쳐”12)서였으나, 영화산업을 백안시하면서 주류영화가 아닌 영화의 역사와 존재방식을 탐구하고 지지하는 집단적 움직임의 시작은 70년대 동호인 모임의 존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상연구회,13) 카이두 클럽(1972-75),14) 영상미학반(1974-80),15) 시네클럽,16) 동서영화동우회,17) 청년영상연구회18)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80년대 한국영화와의 관계 속에서 주목을 요하는 활동은 문화원 중심 동호회들의 활동이다. 당시 공식적 영화교육제도 외부에서 성장한 많은 후발세대 영화인들이 문화원 활동을 매개로 인적, 이념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1979년, 강한섭, 전양준, 정성일, 신철, 홍기선 등의 학생들이 동서영화동우회의 후신으로서 출발시킨 동서영화연구회다. 이 모임은 비록 80년 봄 계간지 『프레임 1/24』 1호 발간19)을 끝으로 같은 해 6월 해체됐지만 문화원 시절의 관점이 후발세대에게서 어떻게 소화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한편 80년 ‘광주 사태’ 이후 대학 내에 막 생겨나던 영화 서클(동아리)들에서도 영화를 운동과 결부시키는 관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을 선도한 것은 서울대의 ‘얄라셩 영화연구회’다. 1980년 3월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공대 내 서클에서 본부 서클로 전환한 당시 얄라셩에는 박광수, 김홍준, 홍기선, 문원립, 김동빈, 송능한, 황규덕 등이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1980년 ‘서울의 봄’이라 불린 투쟁기간 중 ‘초보적인 기록활동’을 펼쳤으며 ‘영화마당’이라는 감상회를 열었고20) 여러 편의 집단창작 단편영화를 제작했다.21)

    얄라셩의 주요 성원들이 대부분 졸업하면서 이들이 재결집해 만든 조직이 바로 80년대 최초의 비합법적 영화운동조직인 서울영화집단(82-86)이다.22) “소형영화를 하는데 상업영화와 다르다면 결국 사회운동 속에서 어떤 역할들을 해야 하는가”23)를 고민했던 이들의 출발은 사실상 “80년대 영화운동의 시발점”24)이었다. 하지만 우카마우 집단의 활동방식을 모델로 삼아 영화소집단 운동의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적용했던 최초의 영화인 <수리세>가 조직에 대한 정부의 탄압의 직접적 계기가 되면서 침체기를 겪다가 86년 10월 18일 소규모 영화집단들이 통폐합해 창립한 서울영상집단(대표 홍기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한편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의 작은 영화제(1984. 7. 7-8, 국립극장 실험무대)다. ‘작은 영화’란 광의로는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하는 열린 영화”를, 협의로는 “큰 영화(35mm)와 규격상으로 구별되는 16mm, 8mm 영화”를 가리키는 신개념으로서 “‘단편영화=대항영화’라는 개념을 한국식으로 붙인 용어”였다.25) 전양준, 정성일 등과 서울영화집단 등이 주축이 된 ‘단편영화 동인’26)이 “종래의 극장 유통구조 개선, 검열의 대폭완화, 수정 등 영화법 개정을 통한 대중 및 민중영화를 위해 숨통을 열어줬으면 하는 바램”27)을 갖고 기획한 이 소형영화 상영28) 및 관객과의 토론 행사는 200여 석이 만석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비록 일회적인 행사였지만 이후 대학가에서 열린 유사한 영화제들의 모델이 되었다.

    영화제에 참여했던 대학 영화인들의 열기는 “충무로와 민중영화 사이에서 중간상태를 유지하며 ‘영화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취지”에서 결성된 ‘영화마당 우리’29) 워크숍(85년 1월 7일-4월 7일)으로 이어졌다. 영화제작 실습 외에도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영화, 제3세계영화론, 영화소집단 활동에 대한 교육을 병행했던 이 워크숍은 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인해 대학 서클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는 상황에서 각 대학 영화 서클 결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대학 영화패는 서울대 얄라셩(80년 창립), 고려대 돌빛(83) 외에도 경희대 그림자놀이(85. 4), 명지대 필름 아트(85. 4), 서강대 영화공동체(85. 4), 성균관대 영상촌(85년 하반기), 연세대 영화패(85년 하반기), 외국어대 울림(85. 4), 이화여대 누에(85년 하반기), 한양대 소나기 등으로 늘어나고, 87년 5월 24일에는 13개 대학이 모여 대학영화연합을 발족했다. 대학영화연합은 공동 워크숍30)을 마련하거나 연우무대 창단 10주년 기념 영화제인 ‘열린 영화를 위하여’를 개최31)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영화마당 우리 워크숍의 참여자들 중 일부인 영화아카데미 1기생들과 안동규, 장주식, 전양준, 정성일 등의 주도로 ‘열린 영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84년 겨울부터 85년 가을까지 『열린 영화』를 4호에 걸쳐 발행했는데, 1호가 주로 ‘작은 영화제’와 관련한 글들로, 4호가 영화법과 영화정책, 검열의 역사 등을 점검하고 당시 상업영화를 비평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면, 2호와 3호는 서구 영화이론의 소개에 주력하고 있다. 2호의 특집 ‘현대 영화사상’은 「영화작가론」(이종학), 「영화기호학에 대하여」(편집부), 「영화기호학에서의 실험 연구를 위한 제안」(미쉘 꼴렝), 「영화와 정신분석학」(조재홍), 「영화의 통계학적 스타일 분석-배리 솔트 이론을 중심으로」(정재형), 「남성의 사이비 대립항, 실체 잃은 아이콘들을 위하여」(유지나), 「영화,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식」(안동규)로 구성되어 있고, 3호의 특집 ‘영화와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에 대하여」(김소영), 「영화/리얼리즘/이데올로기 I」 (송능한), 「영화/리얼리즘/이데올로기 II」(전양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정재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론적 경향 내지 지향은 영화운동 세력에 의해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 90년대를 주도한 한국영화 비평담론의 기틀이 된다.

    한편 “모든 민주적 영상팀들이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32)되 과감히 공개적 대중조직으로 전환, 산하에 제작국, 교육국, 기록국, 기획국, 편집국의 구성을 갖추고 『영상집단』 창간호(1986. 10. 18)를 내는 등 보무도 당당하게 출발했던 서울영상집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직접적 계기는 영화 <파랑새>(8mm, 40분, 1986) 사건이었다.33) 결국 대표의 구속 사태 및 운동노선을 둘러싼 이견으로 출범 5개월만에 서울영상집단은 일단 해체를 결정했다. 그 후 이효인, 이정하는 잠시 충무로로 갔다가 민족영화연구소를 설립했고, 홍기선은 장동홍과 만나 장편 극영화 제작을 도모하기로 하고 <오! 꿈의 나라>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배인정, 주명진 등 나머지 회원들은 ‘서울영상집단’이라는 명칭을 유지하면서 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로 들어가 노동자 교육용 슬라이드 작업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34)

    이들 중 영화운동론의 이념적 분기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조직은 민족영화연구소(1988. 8-1991)다.35) 이 조직은 사상, 조직, 실천의 총체적 전개라는 조직의 창립목표에 걸맞게 창작, 보급, 교육 활동을 이시기 어느 조직보다도 더 활발하게 벌여나갔다. 그 과정에서 89년 5월부터는 제작과 연구의 기능을 분리하기로 하고 제작을 전담하는 ‘한겨레 영화제작소’를 따로 운영했으며36) 90년 1월 30일에는 아리랑 영화연구회(대표 윤석일), 영화공동체(공동대표 최용배), 영화마당 우리(대표 김영진), 우리마당 영화분과(대표 민병진)와 함께 한국독립영화협의회(의장 이정하)라는 협의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한편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탈퇴한 서울영상집단은 89년 초에 영화단체 ‘들풀’37) 및 ‘새힘’의 구성원들과 함께 1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할 특위체로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출범시켰다.38) 노뉴단은 89년 말 자신들의 활동을 자체 평가하면서 창작방법론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고 90년에 다시 서울영상집단과 노동자뉴스제작단으로 분리된다.39) 같은 해 말에 서울영상집단, 바리터(1989-92),40) 노뉴단, 장산곶매(1987-93),41) 노동자문예운동연합 영화분과 ‘11월 13일’ 등 5개 단체가 모여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라는 연대기구를 결성했다. 그러나 대표자회의는 조직의 위상과 방향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함으로써 91년 해체되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잡지 ≪영화언어≫의 창간이다. 89년 봄호로 창간해서 95년 4월 15호를 내고 폐간된 이 잡지는 필진들의 다양한 배경42)만큼이나 상이한 정치적, 영화적 지향성이 이합집산하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잡지의 기조는 한편으로는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성과들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주의와 예술영화, 형식주의적 분석방법론에 더욱 친근감을 표했던 ‘열린 영화’ 모임의 이른바 “영화주의”43)적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따라서 ≪영화언어≫에서 선보인 비평들의 초점은 대개 영화‘운동’보다는 ‘영화’운동에 놓여 있었고, 영화운동 진영의 주축 중 하나였다가 이후 ≪영 화언어≫ 편집진에 합류했던 이효인, 이정하가 그러한 논리를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 사실상 급진적 영화운동 담론과의 통폐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90년대 들어 변혁운동의 쇠퇴 속에서 이 잡지는 이른바 ‘정치적 모더니즘’44)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해오던 진영에게 한국영화담론의 헤게모니를 넘겨주면서 영화비평계 세대교체의 기반으로서 기능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비제도권’이라는 용어로 포괄되는 영화적 실천들에는 상당히 다양한 정치적 수위를 가진 집단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정치적 급진성의 수위 혹은 당시 사회운동과의 교감 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를 크게 두 흐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열린 영화’ 모임으로부터 ≪영화언어≫ 모임으로 이어지는 영화비평(“영화주의”) 진영의 실천과 서울영화집단에서 노뉴단, 민족영화연구소로 이어지는 영화운동 진영의 실천이 그것이다. 영화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거칠게나마 민족해방(NL) 계열(대표적으로는 민족영화연구소)과 민중민주(PD) 계열(대표적으로는 노뉴단)로 분류될 수 있는 조직들의 활동방식에는 차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조직들이 비록 참여의 심도나 정치적 급진성의 수위에서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 안에 포진해있기는 했으나 모이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이합집산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자유주의적 저항의 제스처부터 급진적 혁명에의 투신까지가 비교적 상호 배타적이지기보다는 타협적인 방식으로 연대하며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문학계나 미술계와 변별되는 80년대 비제도권 영상운동 진영의 특수성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1)80년대 영화운동사에 관해서는 양윤모, 「80년대 한국영화 개관」, 『한국영화의 이해』, 예니, 1992; 서울영상집단 편저, 『변방에서 중심으로: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 시각과 언어, 1996; 한국독립영화협회 편, 『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2001; 김명준, 「80년대 이후 진보적 영화운동의 전개과정」, 『영화운동의 역사: 구경거리에서 해방의 무기로』, 서울출판미디어, 2002; 남태제·이진필, 「격동의 현실 속에서 피어난 독립 다큐멘터리: 1980-90년대 초반의 영상운동과 다큐멘터리」,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예담, 2003 참조. 양윤모, 「한국영화사 속에 나타난 민족의 저항」, 『현상과 인식』, 1988년 여름호에는 1978년부터 1987년 사이에 각종 영화 소집단과 각 대학 연극영화가에서 개최하거나 간행한 영화제 자료집 및 팜플렛, 비공식적 잡지들이 일정 및 내용과 함께 도표화되어 있다.  12)『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149쪽.  13)1971년에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이 만들었으며 20여 편의 16mm 영화를 제작하고 6회의 영화제를 개최했다.  14)이화여대 시청각교육과 출신 여성들로 구성된 실험영화 제작집단.  15)연세대 영화감상 모임.  16)1977년 프랑스 문화원을 거점으로 창립되었고 김정옥, 정용탁, 안병섭 교수를 중심으로 매주 영화감상과 토론을 진행했다.  17)1978년 독일문화원의 후원 및 유현목 감독의 지도 아래 300여 명의 현역 영화인, 학생, 회사원들이 모여 창립했다. ≪동서영화회보≫를 3회에 걸쳐 발행하는 등 1년쯤 활동했다.  18)1979년, ‘영상시대’(1975) 출신의 이세민, 장길수, 신승수, 김창화 등이 조직했다. <강의 남쪽>(16mm, 14분, 장길수, 80)을 만들었다.  19)≪프레임 1/24≫은 ‘어제의 난장판, 오늘의 현실, 그리고 내일의 암시’라는 특집에서 「우리 영화의 죄상: 사회적 관점에서」(강한섭), 「우리 영화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전양준), 「영화는 이제 여기 살지 않습니다: 영화언어적 관점에서」(정성일), 「미학, 영화 그리고 비평: 예술사적 관점에서」(신철), 「겨울이 길면 봄은 멀지 않으리」(홍기선),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 객관의 눈」(김종필)을, 영화평으로 「죽음보다 깊은 잠」(전양준), 「심봤다」(김진·황청민), 「발포령(Der Fangschuss)」(강한섭·정성일), 「쟈크 리베트」 (강한섭)를 싣고 있다.  20)80년 11월 7-8일 첫 번째 영화마당은 <서울 7000>(7분, 76), <짚신>(15분, 77), <웃음소리>(9분, 77), <겨울의 문턱>(4분, 79), <여럿 그리고 하나>(16분, 80)의 감상 및 ‘대학문화와 영화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대화 마당으로 구성됐다. 두 번째 영화마당은 1981년 9월 18-19일에 있었다.  21)<여럿 그리고 하나>(16분, 79), <이층침대>(10분, 80), <섬>(30분, 81), <그들도 우리처럼>(20분, 82) 및 이규성, 김명준 등의 얄라셩 2세대가 만든 <얼어붙은 땀방울>(50분, 84), <불청객>(20분, 84), <이 땅의 갈릴리 사람들>(30분, 84), <민주화투쟁 25년>(30분, 84) 등이 있다.  22)박광수, 문원립, 홍기선, 송능한, 황규덕, 윤영주, 오만호, 배인정, 김대호, 김인수, 김의석, 김홍준, 김동빈, 이홍철, 박은미, 전양준 등이 참여했다. 82년에 <판놀이 아리랑>(18분), <전야제>(30분), <출가(15분), <결투>(4분), <장님의 거리>(18분)을, 83년에 <생활>(16분)을, 84년에 <수리세>(컬러, 35분)와 <그 여름>(컬러, 35분)을 제작했으며(16mm 였던 <장님의 거리> 외에는 모두 8mm)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학민사, 1983)와 『영화 운동론』(화다, 1985)을 출간했다.  23)『독립영화, 매혹의 기억』, 148쪽.  24)『변방에서 중심으로』, 24쪽.  25)전양준, 「작은 영화는 지금」, ≪열린 영화≫1호, 1984/85년 겨울호, 12-13쪽.  26)강한섭, 곽재용, 권영락, 김석훈, 김소영, 김일우, 김용태, 김의석, 김재수, 김재희, 김홍수, 노인화, 문명희, 문원립, 박건섭, 서명수, 송미혜, 신동민, 신승수, 신철, 안동규, 오병철, 유지나, 이덕신, 이세민, 이용배, 이정국, 이종학, 이하영, 임종재, 장길수, 장주식, 전양준, 전찬일, 정성일, 정성헌, 정재형, 정홍순, 조재홍, 최사규, 최영학, 한상준, 한정석, 현창석, 홍기선, 황규덕, 황혜경이 동참했다.  27)「작은 영화가 더 맵다?」, 『스크린』, 1989년 2월호, 200쪽.  28)출품작은 <강의 남쪽>(장길수, 16mm, 흑백, 14분, 80), <문>(서명수, 16mm, 흑백, 12분 30초, 83), <승의 눈물>(최사규, 16mm, 흑백, 15분, 83), <판놀이 아리랑>(서울영화집단, 8mm, 컬러, 18분, 84), <전야제>(황규덕, 8mm, 30분, 82), <천막도시>(김의석, 16mm, 컬러, 30분, 83).  29)동서영화연구회와 시네클럽 출신의 구임서, 낭희섭, 문명희, 정성헌, 정흥순, 한정석 등이 84년 3월 결성했다. ‘작은 영화’와 공동창작을 추구하며 <우리들의 춘삼 씨>(16mm, 흑백, 12분, 85) 외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25쪽 참조.  30)87.7.20-7.23, 고려대. 강사진: 장선우[시나리오·연출], 곽재용[촬영·조명], 정흥순[편집·녹음], 이효인[영화운동론]  31)87.12.1-15. <문>, <백지기행>(이덕신, 16mm, 흑백, 22분, 85), <단전>(이광진, 16mm, 컬러, 17분, 86), <인재를 위하여>(장윤현[한양대 ‘소나기’], 8mm, 컬러, 42분, 87), <백일몽>(16mm, 흑백.컬러, 33분, 84-85), <그 여름>, <강의 남쪽>, <울타리를 넘어서>(정성진[서울예전], 16mm, 흑백, 17분, 87), <강아지 죽는다>(박광우, 16mm, 흑백, 11분, 84), <해 뜨는 풍경>(영화마당 우리, 8mm, 컬러, 29분, 87), <울림>(외대 ‘울림’, 8mm, 컬러, 20분, 86), <그 날이 오면>(장동홍[서울예전], 16mm, 흑백, 13분, 87), <버려진 우산>(조진[서울예대], 16mm, 흑백, 12분, 85)이 상영됐다. 이밖에도 대영연은 <민중이 주인되는그 날까지>(비디오, 50분, 87), <우리의 조국은 백두에서 한라까지입니다>(비디오, 50분, 88)를 공동제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91년 해체됐다.  32)서울영상집단 창립선언문, 『변방에서 중심으로』, 118쪽.  33)<파랑새>는 홍기선, 이효인, 변재란, 이정하 등이 전북 완산의 한 마을에서 농촌활동을 하면서 점심 때 잠깐씩 찍어나간, 예닐곱 가구 주민들이 실제 주인공인 영화로서 카톨릭 농민회를 통해 충청, 호남 일원에서 20여 회 순회상영되어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대학가에서 상영되던 <부활하는 산하>(연세대 총학생회 제작, 8mm, 90분, 86)가금서였던 『계급투쟁사』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연세대 총학생회에 일제 검거령을 내리면서 그 제작배후로 지목된 <파랑새> 관련자들에게도 검거령이 떨어졌다. 수사기관에서는 <파랑새>를 농민 선동영화로 주시하던 참이었다. 결국 서울영상집단이 제작배후가 아님이 드러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도 찾지 못하자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 없이 영화를 불법으로 상영했다는 죄목으로 대표 홍기선과 총무 이효인을 구속했다.  34)배인정 대표 하에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슬라이드가 인천 기독노동자연맹이 지원한 <우리는 떡고물이나 받아먹는 노동자가 아니다>(주명진, 45분, 87)와 한국 여성노동자회가 지원한 <순영이의 사랑 이야기>(배인정, 40분, 87)다. <순영이⋯>는 87년 가을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첫 선을 보인 이래 40여 군데의 노동자 집회와 교육에서 상영됐다. 이밖에도 서울영상집단은 89년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탈퇴하기 전까지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8mm, 30분, 88)와 <가자, 여의도로>(주명진, 비디오, 90분, 88)를 제작했다.  35)이효인, 이정하가 주축이 되고 구성주, 이상인, 김응수, 김재호, 민병진, 이수정, 김혜준, 이유미 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무크지 『민족영화 I』(친구, 1989)과 『민족영화 II』(친구, 1990)를 출간했다. 91년 상반기에 해체됐다.  36)민족영화연구소 작품으로는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이정하, 8mm, 50분, 87), <그대 부활하라, 민족의 꽃으로>(민족영화연구회·이광린, 비디오, 40분, 87,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 의뢰로 제작), <노동악법 개정을 위한 전국 노동자대회>(비디오, 35분, 88), <5공이 6공인데>(비디오, 38분, 88), <깡순이-슈어프로덕츠 노동자>(이상인 촬영·연출, 비디오, 55분, 89), <천만형제여 총단결하라!>(비디오, 45분, 89), <최윤범 열사-다시 태어나도 민주노조를>(비디오, 50분, 89), <노동하는 민중을 위한 세계사>(비디오, 90분, 89)가, 한겨레 영화제작소 작품으로는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비 디오, 40분, 89), <탄압을 뚫고 어둠을 뚫고>(비디오, 40분, 89), <일어서는 땅>(비디오, 40분, 89), <꽃들에게 희망을>(비디오, 40분, 89)이 있다.  37)대학영화연합 출신들이 구성한 조직으로서 88년 현대중공업의 128일 파업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흩어지면 죽는다>(89)를 제작했다.  38)당시 구성원은 서울영상집단의 배인정, 주명진, 김양래, 정현주, 홍형숙과 ‘들풀’의 최원석, 한경훈, 신종관, 민경철, 영화제작소 ‘새힘’의 이상빈 등이었다.  39)주명진, 김양래, 홍형숙, 남인영, 신종수 등이 서울영상집단으로 독립하고, 노동자뉴스제작단에는 배인정, 최원석, 김명준 등이 남았다.  40)독립영화 진영과 충무로, 대학원 영화과 등에서 활동하던 여성 영화인들(김소영, 문명희, 정혜영, 허현숙, 문혜주, 장진경, 신영희, 서선영, 윤미희, 도성희, 강미자, 변영주, 이언경, 홍효숙이 창립 멤버고 이후 임혜원, 김영, 권은선 등이 합류)이 창립했다. 여성 민우회와 공동으로 사무직 여성문제를 다룬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김소영, 16mm, 42분, 90), 지역탁아소연합과 함께 <우리네 아이들>(도성희, 비디오, 40분, 90)을 만들었고, 다큐멘터리 작가회의 시절에는 서울영상집단과 함께 <전열>(도성희, 비디오, 53분, 91)과 <옥포만에 메아리칠 우리들의 노래를 위하여>(홍형숙, 비디오, 40분, 91)를 제작했다.  41)87년 7월, <인재를 위하여> <그날이 오면> <노란 깃발>을 제작했던 이들과 홍기선이 광주항쟁 소재의 극영화 <오! 꿈의 나라>(이은·장동홍·장윤현, 16mm, 90분, 89)를 만든 뒤 ‘장산곶매’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면서 생겨났다. 이 영화는 제작진이 영화법 위반으로 고발되는 가운데서도 전국 150개 상영공간에서 500회 이상 상영됐고 10만 이상 관객을 동원했다. 두 번째 극영화인 <파업전야>(장동홍, 16mm, 105분, 컬러, 90) 역시 백만 명 이상을 동원하고 일 억 이상의 순수익을 올렸다. 장산곶매는 <닫힌 교문을 열며>(이재구, 16mm, 컬러, 86분, 92)를 만들고 93년 해체됐다.  42)≪열린 영화≫(전양준, 정성일, 김소영 등)와 『민족영화』(이정하, 이효인 등), 대학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이용관, 김지석, 김영진, 이충직, 정재형, 조재홍 등)이 주요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43)이정하, 「민족영화운동의 조직실천적 임무와 과제」, 『민족영화 I』, 55쪽; 이효인, 「문화 과학으로서의 영화」,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이정하·이효인·전양준 편, 이론과 실천, 1988, 13-14쪽 참조.  44)이는 로도윅이 68혁명 이후 프랑스와 영국의 영화학계를 휩쓸었던, 알튀세르와 라캉, 브레히트 등의 영향 아래 형성된 영화이론을 규정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D. N. Rodowick, The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 The Retents of the Univ. of California, 1988, p. vii 참조.

    3. 세계영화사와의 영향사적 (비)관계

    80년대 변혁운동 담론의 핵심어를 민족·민중·민주라 할 때, 한국영화에 관한 영향사적 탐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민족’ 개념이다. 80년대 이후의 민족 개념은 반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한국을 신식민지 상태로 만든 미국(미제)에 대한 저항의지를 함축하는 것이었고, 이는 혈맹 미국에 대한 지지만큼은 확고하던 이전 시기와의 결정적 차이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영화담론에서도 문화민족주의의 확립을 향한 욕망의 내용적 차이로 나타났다. 하지만 외국의 영화적 경험들을 80년대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전유하(지 않)고자 했던 이러한 문화 번역의 욕망은 결코 일관되고 균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한국영화의 방향을 타진하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 유럽 영화, 제3세계 영화, 북한영화, 공산권 영화 등 다양한 세계영화의 역사가 참조되거나 거부되었다. 지금부터 그 복잡다기한 논의의 진행과정을 따라가보자.

    먼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 민족을 문화식민 상태에 빠뜨리는 미국식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파자로 간주되었으며 한국의 지배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국내 영화산업도 “할리우드의 충실한 아들”, “할리우드의 아류”로 규정되곤 했다.45)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한창 주가가 높았던 홍콩 영화, 수입개방 논의가 재개된 일본영화 역시 ‘외부’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일본영화의 수입개방 문제를 한일 간의 문화교류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한·미·일 삼각안보체제의 결과로 해석한다는 사실46)은 80년대의 문화민족주의가 얼마나 반미에 집중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이미 세계라는 커다란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에게서 한국과의 영화교류는 경제적 목적을 훨씬 넘어서서 국가적 발전의 상이한 단계 또는 상이한 수준을 설명하고 화면 내에 위치지어져 있는 미쟝센들을 이용해 이데올로기적 부등가교환을 달성하려는 것이다”라는 주장에서도 반미와 동일한 맥락에서의 반일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47) 아래 인용문은 반외세(반일·반미), 반자본, 반정부가 어떻게 하나의 연결고리 속에서 사고되었던가를 보여주는 총괄편의 주장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양식의 모방이라는 차원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80년대의 대응은 사뭇 이중적이었다. 일각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의 관습적 형식을 비타협적으로 거부한 반면, 변혁운동과의 조직적 결합이 강화되는 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그리고 독립영화 제작에 주력하던 이들일수록 관습적 영화언어에 대래 상대적으로 더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먼저 반할리우드, 탈할리우드를 주창하는 입장들을 보자. “동구권이나 유럽 쪽의 나라는 그들 나라의 특성이나 문화에 따라 그들의 영화를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시켜왔는데 우리 영화계는 성을 다룬 영화든, 리얼리즘 영화든, 사극 영화든 간에 그 방법이 헐리우드적이라는 취약점이 있다”49)는 우려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씬에서 흔히 사용되는 짧은 쇼트들의 순간적인 진행”은 “자극적 영상의 악순환 과정을 발생”시키며 “관객의 무의식적인 자기 시점화가 이루어지는 카메라의 촬영 시점은 헐리우드 영화의 내용성을 떠받쳐주는 주된 표현기법으로 이용”되기에 “관습적 양식은 본원적으로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50) “영화가 가진 특수성과 문화선전의 관점을 통해 새로이 변형되고 확장된 영화의 내용 영역은 영화운동 주체들이 빠지기 쉬운 극영화의 관습과 발자크류의 리얼리즘론을 발전적으로 뛰어넘을 때 전취될 수 있을 것”51)이라는 단언 등은 분명히 할리우드 영화와의 거리두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할리우드 영화는 내용 못지않게 그 ‘형식논리’로도 “대중들을 상대로 선전, 교육을 하고 있”52)으며 그 결과 “비정치성이라든가 현실도피 등의 결론에 다다르게”53)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오! 꿈의 나라>가 전통적인 할리우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선전선동적 효율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미학상으로 굳건하지 못해서 적절한 구성을 차용할 수 없었기 때문” 이며 따라서 “미학을 결정하는 인식과 태도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내용과 구성도 달라질 수 있었”으리라고 이들은 생각했다.54)

    반면 <인재를 위하여>의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은 이 영화가 “형식에 있어서는 가장 헐리우드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반헐리우드적인 영화”라면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주제 자체가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동안 미국영화에 길들여져온 관객들이 부담 없이 매끄럽게 볼 수 있도록 촬영된 데 있지 않나”, “결국 미국영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헐리우드적인 형식으로 가장 반헐리우드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얘기”라고 진단했으며55) 홍기선은 “헐리우드 영화가 대중성을 갖기 위해 시나리오 구성을 치밀하게 한다든가 하는 점 등은 서구의 지적이며 관념적인 영화와는 또 다른 대중성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배울 점들이 있다”56)고 언급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할리우드식 영화 스타일마저도 대중의 꾸준하고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다는 점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저버리기가 꺼림칙하다던 장선우의 고백57)의 바통을 잇는 것이었다.

    관습적 형식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관객-주체성의 활성화라는 쟁점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낯익고 일면 단순한 형식의 영화들을 통하여 현실 사회가 안고 있는 복잡하고도 절실한 문제들에 대해 대중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58)다는 것이었다. 김지석 또한 할리우드 영화의 고도로 체계화, 장르화된 단선적 내러티브 구조가 “관객으로 하여금 수동적 자세를 지니게 만들며, 그 과정에서 환상이나, 현실에 대한 왜곡, 편향된 이데올로기의 주입, 문제해결을 위한 등장인물의 영웅화, 소비지향적 요소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끔”59) 한다고 비판했다. 소박한 수준의 정치적 모더니즘에 가까웠던 이러한 입장은 이후 ≪영화언어≫의 편집방향이 됨으로써 경쟁하던 영화운동 담론의 퇴조 이후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60)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할리우드 외의 지역 영화들이 참조되는 경향과 방식이다. 장선우의 ‘열려진 영화론’은 80년대 초 민중영화론이 세계영화사를 대하는 방식의 얼개를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61)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네오리얼리즘이야말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포토제니의 한계를 넘어선 영화 만들기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장선우에 따르면 쇼트를 짧게 잘라 몽타주해서 얻어지는 대상의 세분화란 사실성의 희생과 허구성의 강화를 의미한다. 반면 포토제니는 영상적인 것에 대한 관념적 집착의 표현으로서 허구적인 형식미에 오염될 여지가 있다. 누벨 바그는 이러한 포토제니의 영상주의를 새롭게 수용했으나 대중적 감성보다는 지성적 태도를, 현실의 본질보다는 표피만을 그려내는 데 그쳤다. 영국의 다큐멘터리즘 작가들은 대상과 카메라 사이에서 인위성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지만 주관적 선택과 극적 구성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네오리얼리즘은 “이 모든 아쉬움을 수용한 영화의 경향”62)이었다. 카메라는 대담하고 예민하고 솔직하게 관찰하면서도 사건과 사건의 충돌을 통해 전체적인 세계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선우가 찾아낸 최후의 대안은 ‘신명의 카메라’였다. 네오리얼리즘이 구사한 ‘카메라의 소극성’은 카메라 자체의 생명력을 희생시킨 결과이기에 비스콘티나 펠리니와 같은 메시아적 신비주의나 퇴폐주의적 경향에 굴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명의 카메라란 대상에 군림했던 에이젠슈테인의 카메라, 대상에 복종했던 로셀리니의 카메라와 달리 탈춤과 판소리, 서사무가, 민요 등에서 볼 수 있는 구전성의 생명력, 즉 마당극에서처럼 대상과의 친교를 모색하는 카메라를 뜻했다. 장선우의 눈에는 고다르의 영화가 그러한 사례였다. 결국 ‘열려진 영화론’의 최종 착지점은 쇼트의 중심을 사건에 둠으로써 현실성을 담보하는 네오리얼리즘 정신과 고다르식 시네마토그라피의 파격이 우리 전통연희의 민중적 감각으로 재탄생한 영화인 셈이었다. 이는 80년대 초의 영화운동론이 아직은 70년대 대학가에서 시도됐던 ‘탈춤 부흥운동’63)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장선우의 글이 실린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에는 네오리얼리즘, 누벨 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 뉴 저먼 시네마, 동유럽 영화, 전후 다큐멘터리,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영화에 관한 글들 및 미국영화에 관한 비평이 함께 번역, 소개되어 있다. 이 목차는 그 자체로 초기 영화운동 진영이 새로운 한국영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지나온 참조대상들의 전시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82,3년경 영화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진정한 대안’으로서 집중 참조된 것은 제3세계 민중영화운동의 사례였다. 이는 ‘제3영화’로 불렸는데,64) 체제와 투쟁을 시작하는 영화,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계된 혁명적 영화, 혁명적 작업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영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컨대 ‘우카마우 집단’의 영화의 힘은 바로 “영화적인 트릭이나 과도한 편집에 의하여 왜곡됨이 없이 관객은 마치 먼 거리에서 ⋯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 결국 자발적인 해결을 모색하게 만드는 경지에 이르게”65) 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기존 영화계 밖에서 소집단을 결성, 현장성과 민중성에 뿌리를 두고 대부분 다큐멘터리 영화형식을 택하여 집단창작한다는 특징을 보였던 제3영화의 실천방식66)은 “내일의 한국 영화운동에 직접적인 참조가 될 수 있다”67)고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우카마우 집단’과 그 실질적인 주도자였던 호르헤 산히네스의 공저서가 번역되기도 했다.68)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50년대 이래로 문화 번역의 욕망을 자극해온 네오리얼리즘에서부터 80년대에 새로이 주목받게 된 우카마우 집단의 영화를 참조하는 데 이르는 동안 우리의 영화담론은 꾸준히 ‘롱 쇼트, 롱 테이크’를 바람직한 형식으로서 선호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향은 80년대 말 본격적으로 독립 장편 극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전술했듯이 할리우드 영화관습의 활용 가능성에 착목했던 바로 그 젊은이들에 의해서 말이다. 예컨대 <파업전야>의 책임연출자인 장동홍은 자신이 “일부 비평가들의 롱 테이크 선호 경향에 대해 부정적”이며 “배창호의 <황진이>류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고 못박았으며69) 이정하는 롱 테이크를 쓰면 사실주의, 몽타주를 쓰면 표현주의라는 식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70) 김경형은 <구로 아리랑>이 대체로 미디엄 이상의 쇼트들을 구사하려고 애쓰면서 “네오리얼리즘이나 제3세계의 영화미학을 적용시켜보려” 했던 시도가 “드라마 전반을 객관화”시켜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대중적 코드를 상실한 것이 흥행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또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 영화’는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서 대안영화의 형식은 한국 관객에게는 유용하지 않다고 단언했다.71)

    이러한 목소리는 유럽 예술영화의 아류가 아닌 ‘민족영화’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이윽고 북한의 영화미학을 참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혁명영화의 창조』의 첫 장에는 “민족영화의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애쓰는 의식 있는 영화인들에게, 그리고 한반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모든 분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헌사가 들어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정작 ‘민족영화’ 진영에서는 제3세계영화의 소개가 “주체적이지 못한 맹목적인 형태의 수용으로 그침으로써 새로운 도식적인 결과만을 받아들인 저급한 행동주의와 심약한 패배주의로 드러나고 만것”을 반성하면서, “주체적인 민족 영화의 범주 속에서 외국의 모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72) 주체적, 통일지향적인 영화운동론을 고민했던 그들에게는 대항영화나 제3영화보다는 북한의 영화론과 베트남, 중국 등 공산권의 영화운동사가더 적합한 참조대상으로 보였던 것이다.73)

    그러나 민족영화연구소의 주요 필진이던 이효인, 이정하가 ≪영화언어≫의 편집진으로 합류했다는 사실이 상징하듯, 이처럼 점점 더 급진화의 길을 걸어갔던 영화운동 담론의 역사는 90년대 비평담론의 헤게모니를 이른바 ‘영화주의’ 진영에 넘겨주면서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74) 이러한 귀결은 80년대 변혁운동사의 성쇠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술했듯이 정치적 모더니즘의 대항영화론과 유사했던 ≪영화언어≫의 비평적 입장은 식민지 시대 이래로 70년대까지 한국영화 비평담론이 견지해왔던 친유럽영화적 태도를 정교화한 것에 가까웠다. 결국 90년대 비평담론은 80년대 영화운동담론을 하나의 예외구간으로 남겨둔 채 80년대 이전 비평담론의 기조를 되살리며 선형적 발전의 역사를 써나가게 된 셈이었다.

    45)이해영, 「대학영화론: 그 논의와 현황」, 『영화운동론』, 236-37쪽; 홍기선, 「영화 소집단 운동의 향방」, ≪대학문화≫(서울시립대 교지), 1985년 2월, 79쪽 참조.  46)홍기선, 위의 글, 78-79쪽.  47)유지나·정성일, 「일본영화 수입에 부쳐」, 『영화운동론』, 313쪽.  48)『<오! 꿈의 나라> 자료집』, 1989, 13쪽.  49)「특집좌담: 80년대 한국영화의 현단계와 그 전망」 중 장길수의 발언, 『레디고』, 이론과 실천, 1986, 25쪽.  50)김지수, 「헐리우드 영화: 매체, 제작, 수용에 걸친 논리를 중심으로」, 『영화운동론』, 299쪽(주7).  51)이해영, 「영화운동의 방향에 대하여」, 『레디고』, 41쪽.  52)「특별좌담: 현단계 영화운동의 점검과 모색」 중 전양준의 발언, 『민족영화 II』, 38쪽.  53)위의 글 중 전양준의 발언, 39쪽.  54)위의 글 중 이용관의 발언, 35쪽.  55)『스크린』, 1988년 1월호, 197쪽.  56)「특별좌담: 현단계 영화운동의 점검과 모색」 중 홍기선의 발언, 40쪽.  57)장선우, 「민중영화의 모색」, ≪실천문학≫, 1985년 봄호, 151쪽.  58)「특별좌담: 현단계 영화운동의 점검과 모색」 중 전양준의 발언, 38쪽.  59)김지석, 「할리우드의 한국영화시장 점유과정」, ≪영화언어≫ 1호, 1989년 봄호, 48쪽.  60)≪영화언어≫ 4호에 실린 ‘한국영화 10 베스트’라는 기획기사를 위한 영화선정 기준은 “사회의식”과 “탈할리우드 영화를 위한 표현양식의 가능성”이었고(89년 겨울호, 5쪽), ≪영화언어≫ 7호에 실린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라는 특집은 ‘새로운 한국영화’의 조건으로 “1. 할리우드의 고전적 스타일을 탈피하고자 하는 영화, 2. 60년대 이후 끊겼던 리얼리즘의 맥을 부활시킨 영화, 3.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인식하고 현시대와 사회의 진솔한 모습을 담은 영화”를 제시했다(91년 봄호, 3쪽).  61)장선우, 「열려진 영화」,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학민사, 1983, 305-22쪽 참조.  62)위의 글, 313쪽.  63)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 및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과 더불어 70년대 중반 양심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통 민속연희를 계승하려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후 이는 유신통치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대학가의 ‘탈춤 부흥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때 마당극을 중심으로 탈춤 부흥운동을 시도한 단체는 채희완, 이애주, 임진택 등 탈춤 1세대가 결성한 ‘한두레’였다. 이들의 운동은 80년대 초(80-83년)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일시적 침체기를 거쳤으나 84년 유화조치 후 탈패를 중심으로 풍물패, 민요반, 미술패, 노래패 등으로 확산되면서 탈춤과 마당놀이, 풍물은 본격적인 대중 장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서대정, 「한국영화의 역사성 연구: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 한양대 석사학위 논문, 2001, 38쪽 참조).  64)제1영화란 할리우드 영화로서 이미지가 현실 자체보다 중요하며 지배계급의 욕구충족에 봉사하는 특정 이념과 세계관을 주입시키는 영화이고, 제2영화란 그 대안으로 나온 소위 작가영화, 표현적인 영화, 누벨 바그, 시네마 노보(Cinema Novo) 등을 가리킨다. 제2영화는 자유로운 작가정신을 의미하긴 했으나 선택된 관객의 욕구만을 충족시켰으며 사회문제를 다루되 정치는 건드리지 않는, 체제가 허용한 외적 한계에 이미 도달한 영화였다. 장선우는 솔라나스(Fernando Solanas)와 게티노(Octavio Gettino)의 논문 “Towards A Third Cinema”를 인용하여 제3영화를 설명하고 있다. 「제3세계의 새로운 영화」, ≪예술과 비평≫ 2호, 1984년 6월, 194-95쪽.  65)「토론: 한국영화의 반성」 중 박광수의 발언,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330쪽.  66)<파랑새>가 공동작업의 초기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제작자가 2년 동안이나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철거투쟁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피사체였던 빈민들을 대본 작성과 촬영, 내레이션 등에 적극 참여시킨 <상계동 올림픽>,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협의와 협력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뉴스>, 극영화임에도 공동토론을 통해 시나리오를 쓰고 공동연출제로 운영한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 등은 공동창작의 가장 적극적인 실천사례다.  67)홍기선, 「영화운동에 대해서」, 『한국문학의 현단계 III』, 백낙청·염무웅 편, 창작과 비평, 1984, 348쪽.  68)볼리비아 ‘우카마우’ 집단·호르헤 산히네스 저, 양윤모 편역, 『혁명영화의 창조』, 한겨레, 1988. 원저는 Teoria y práctica de un cine junto al pueblo(Siglo veintiuno editores, s.a., México, 1979)이고 한국어판은 일어판 『혁명의 창조』(三一書房, 1981)를 중역한 것이다.  69)「대담: <파업전야> 연출자 장동홍과 제작자 이용배」, 『민족영화 II』, 178쪽.  70)「특별좌담: 현단계 영화운동의 점검과 모색」 중 이정하의 발언, 위의 책, 47쪽.  71)김경형, 「1989년의 한국영화, 희망과 좌절」, 위의 책, 154쪽.  72)머리말,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4-5쪽.  73)『민족영화 I』이 북한의 영화이론과 베트남 영화운동사를, 『민족영화 II』가 중국 공산당 활동과 영화운동과 카프 영화운동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또 89년에는 북한의 『영화 예술론』의 일어 중역본인 『북한영화의 이해』(친구, 1989)가 출간되기에 이른다.  74)≪영화언어≫를 매개로 민족영화운동론이 대항영화론에 수렴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김소연, 『실재의 죽음: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에 관하여』, 도서출판 b, 2008, 36-56쪽 참조.

    4. 적대의 번역, 전이의 실패, 그리고 민족영화라는 환상

    지금까지의 추적과정은 80년대 영화운동담론의 기저에서 역동하고 있던 문화 번역에의 욕망을 잘 드러내준다. 물론 한국영화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세계영화의 특정 국면을 참조하고 이를 대안적 한국영화로서 번역해내려는 시도는 오직 80년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네오리얼리즘을 향한 외사랑은 이미 50년대에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80년대를 한국영화담론사의 예외구간으로 만든 특이성은 무엇인가. 그 단서를 80년대의 문화 번역이 ‘적대(antagonism)의 번역’75)과 중첩되는 욕망의 시연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적대의 번역이라는 표현에 담긴 이중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80년대가 분단 이후 가장 근원적인 수준에서 ‘적대’와 직면했던 시대였음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직면이 적대를 경합(agonism)76)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환원되고 말았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적대과 경합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라클라우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이처럼 민주주의란 적대를 대항으로 번역하는 것에 의존하는 체제라는 라클라우의 주장에 대해 지젝은 “차이와 적대를 모든 사회정치적 현상들에 공평하게 적용 가능한 극한적 개념으로서 이용하는 한, 너무 불충분”78)하다며 비판한다. 적대는 전체를 구성하는 극단(들) 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주체나 사회가 일관된 전체로서 그 자신을 구성할 수 없게 하는 내속적 균열과 불균형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보편성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으려면 보편적 전체로서의 유한 안에 무한으로의 어떤 열림(전체의 자기분열)이 더해져서 보편성의 비전체(not-all)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좌파들에게 요청되는 선택은 “정치적 경쟁의 규제된 게임”79)으로서의 경합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구성적 성격을 인정하는 것, 나아가 보편적 전체로부터 배척된 그 적대의 지점, 전체의 자기분열적 증상을 오히려 보편적인 것으로서 단언하고 지지하는 것이다.80)

    이와 같은 적대 개념에 상응하는 헤겔적 용어가 바로 ‘단독적 보편성’ 혹은 ‘보편적 단독자(singularity)’다. 보편성의 구조 내에 어떠한 위치도 할당받고 있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자를 직접 대표하는, 보편자와의 최소차이만을 가지면서 보편성을 체화하는 이 보편적 단독성은 계급 적대와 관련하여 이를테면 “시위자들, 제3신분, 반체제자들”81)에게서 구현된다. 이들의 위상의 독특함은 현존하는 어떠한 진영으로도 포섭 혹은 번역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어떠한 논리로도 아직은 역사화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와는 반대로 적대의 번역은 이를테면 보편적 계급 적대를 부르주아 대 노동계급이라는 특수한 대립으로 번역하면서 이에 통합되지 않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배척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적대의 번역이 특정한 특수성을 보편성의 ‘전형’으로서 봉합하려는 헤게모니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배척의 구성적 틈새를 메우면서 보편성의 일관된 외양을 지탱시켜주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이를테면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환상의 요소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은 원본의 전달이나 재현이 아니다. 번역은 해방이다. 즉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82) 실천이다. 그러나 거칠게 말해서, 문화 번역이 적대의 번역이라는 욕망과 중첩되는 한, 원본이 번역되면서 생성되는 해방의 열림은 헤게모니 투쟁의 이해관계에 의해 설정된 특수한 경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결국 이데올로기 비판 행위는 과연 어떤 특수성을 보편자의 대리물(전형)로서 기능하게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게 되어 있다. 이때 진정한 좌파의 제스처는 전형을 확립하고자 투쟁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전형을 깨뜨리고—비록 그것이 자신들이 그토록 열정과 희생을 다해 구축했던 것일지라도— 바로 그 특수자 내의 분열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적대에 다시 또 다시 직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III장의 내용을 상기해보자. 80년대 영화운동담론은 민족(주의)라는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효용성을 담보해줄 전형적으로 특수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놓고 벌어진 헤게모니 투쟁의 역사 속에서 구성된 것이었다. 그 10여 년간 적대의 전선은 각각 우월한 자본주의와 열등한 자본주의의 문화적 표상들인 할리우드 영화와 유럽 영화 사이에 형성되었다가, 외부의 근대적 세계로부터 이식된 대중문화와 ‘좋았던 옛 시절’로 추억되는 전근대적인 공동체 문화인 전통연희 사이로 옮겨갔으며, 다시 자본주의 영화와 사회주의 영화 사이로, 또 남한 영화와 북한 영화 사이로 옮겨갔다. 그 결과 열려진 영화에서 민중영화로, 다시 민족영화로, 한국영화라는 보편성을 가로지르는 내파의 지점에 붙여진 이름은 계속 바뀌어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확실히 기존의 사회 상징적 질서 속에서는 기표화될 수 없었던 새로운 적대를 언표하려는 지난한 히스테리적 열정83)을 보여준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이르러 모든 정치적 적대의 전선들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80년대 내내 잠복해 있었던 영화주의와 영화운동 담론 간의 적대조차도 결국 영화주의의 승리로 귀결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서 90년대의 도래란 해소될 수 없는 적대의 무한한 갱신을 선포하는 힘의 약화 내지는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비제도권 영화와 제도권 영화간의 적대가 주류 상업영화와 비주류 독립영화 간의 (불공정한) 경합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따져보면 80년대를 규정해온 “히스테리적 혁명성”84)의 이토록 급격한 퇴행은 80년대 영화담론이 적대를 번역하기 위해 동원한 논리적 근거였던 ‘민족영화’라는 환상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물론 민족영화는 80년대를 균질적으로 관통한 개념은 아니다. 민족영화라는 용어는 대학영화연합 주최의 민족영화제85) 선언문과 대영연 발행 『민족영화』라는 연구지86)에서 일차 제기된 이후 무크지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에서 주체적인 영화 실천을 위한 범주로서 확립되었다.87) 이 때까지만 해도 민족영화란 80년대 민족문학 논쟁88)과 민족예술의 필요성에 대한 진보적 문화예술운동 진영의 공감89)에 부응하는 선언적 개념에 가까웠다. 그러나 『민족영화 I』에서 제출된 민족영화 개념은 어떤 면에서는 ‘민중’영화 개념보다도 더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민족’영화의 낡은 의미작용에 개입하여90) 이를 계급운동 및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바꿔 읽게 만들었다. 이처럼 본격적 운동노선으로서 천명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이전의 논의보다는 한결 더 급진화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민족주의 담론에서 분기한 민족영화 개념(들)을 관통한 것은 근본적으로 근대 민족국가의 온전한 도래라는 환상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더욱 철저한 근대화를 통해 (통일)민족국가를 형성함으로써 모든 적대가 소멸되리라는 환상이었다. 그러므로 87년 6월 항쟁의 (부분적) 성공을 통해 적어도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또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짐에 따라 적대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더 이상 견지하지 못하고 서둘러 경합의 길—신사회운동 등으로 표현된—을 도모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애초에 식민적 지배자로부터의 민족(문화)적 독립 혹은 자주성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서구의 민족국가적/민족문화적 자율성의 형식이라는, 식민 지배자에게서 넘겨받은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민족국가/민족문화의 쟁취라는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피식민적 주체가 식민적 이데올로기에 온전히 통합되어 있음을 지표하는 것이기도 했다.91)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진정 호혜적인 소통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문화 번역의 상황은 정신분석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원본이 되는 문화와 이를 번역하는 주체의 관계가 마치 분석가와 분석주체(analysand) 간의 전이적 관계처럼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에게 전이란 분석주체가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정동(affect)을 분석가와의 관계로 이동시키면서 어린 시절 경험한 (부모와의) 원형적 갈등관계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전이 개념을 세공하면서, 전이란 단순히 감정의 전치라 기보다는 “무의식의 성적 현실을 현행화하는 것”,92) 즉 분석주체가 자신의 억압된 성욕(충동의 대상)을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재현하는 계기라고 설명했다. 이때 분석주체는 자신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을 분석가가 알고 있다고 간주하게 되는데, 이러한 전이의 효과로서 분석주체가 자신을 분석가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제공하는 현상이 바로 ‘전이 사랑’이다.

    전이는 치료과정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다. 하나는 분석가가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로서의 대타자의 위치를 점유한 채 분석주체에게 전이에 대한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곧 분석주체를 분석가(대타자)의 욕망의 대상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에 따라 분석주체를 대타자의 욕망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한 주체화가 아니라 또 다른 환상의 고착으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라캉은 자아심리학의 이러한 치료방식에 반대한다. 그에게 전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분석주체가 자신의 무의식 속의 진리를 겨냥하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사랑에의 요구에 대하여 자신을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으로서 제시하기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x로, 순수한 공백으로 되돌려줌으로써 “동일시의 국면을 뛰어넘”93)어야 한다. 즉 분석가의 해석적 욕망은 분석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끼로서만 기능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 주체가 대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의 욕망의 진실을 다루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결국 전이의 실패는 곧 분리의 실패고 주체화의 실패다.

    문화 번역 상황에서 원본 문화와 번역된 문화 사이의 전이적 관계란 번역의 행위자들이 원본 문화에 대타자의 위치를 부여하고 원본이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욕망에 따라 욕망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게 되면 (탈)식민적 상황에서 제국의 문화는 식민지 문화의 궁극적 수신처로서 가정되고, 제국의 수신을 위해 상연되는 식민지의 문화는 제국이 이미 ‘저 미지의 x’를 알고 있다는, 혹은 소유하고 있고 즐기고 있다는 ‘믿음’에 의해 지배된다. 지식의 유무에 의해 이미 위계화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본연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의 가능성은 오직 주체와 타자 양쪽 모두에게서 발생하는, 자기동일성을 깨뜨리는 분열과 분열의 만남을 통해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상이한 문화들 간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상대 문화 속에서 동일한 근본적 ‘적대’, 곤궁, 실패지점에 대한 어떤 다른 답을 인지할 수 있는 한에서”94)라야 문화적 소통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80년대 한국영화담론이 추구했던 세계영화와의 관계는 전이의 관점에서, 아울러 소통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었나? 그것이 유럽 영화사와 제3세계 영화사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영화사를 순차적으로 펼쳐들 때 그러한 전이적 관계들에 게재된 욕망은 무엇이었나? 80년대 영화담론이 세계영화사를 참조해나간 과정은 정녕 상대 문화 속에 있던 적대와의 소통이었던가? 한 마디로 그것은 주체화를 성공 시키는 소통이었던가, 종속을 심화시키는 소통이었던가?

    이 질문들에 대한 이 글의 결론적인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영화운동 진영이 보여준, 적대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어떤 문화와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확실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주류 상업영화 일반을 상징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논리가 곤궁에 빠지고 실패하(게 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던 영화사적 시도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참조 지점들은 이미 성공한 시도로서 역사화되고 권력화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80년대 영화운동담론의 궁극적 관심이 주류와의 차이 그 자체를 견지해나감으로써 적대의 가파른 경계를 유지해나가기보다는 그 차이를 어떻게 새로운 권력화의 매개로서 동원하고 활용해서 스스로 전복된 권력의 위치에 설 것인가에 있었음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80년대 영화운동담론이 세계영화(사)와 맺고 있던 전이적 관계는 일종의 벤치마킹 전략이자 ‘다른 무언가를 안다고/가지고 있다고/즐긴다고 가정되는 주체’에 대한 매혹과 동일시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분열은 주류 할리우드 영화와 비주류 유럽/제3세계/사회주의 영화와의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주류적 실천들 자체에도 내속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전이, 성공적인 주체화를 위해서는 그 불가피한 분열의 지점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그 속에서 언어화되지 않는 어떤 X와의 동일시를 다시, 또 다시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80년대의 영화운동 담론이 보여준 것은 세계영화사의 몇몇 예외적 국면들에 대한 전이 사랑이었고, 그랬기에 투쟁은 보편성을 강제한다고 가정되는 외부의 적(주류 상업영화)에 대한 한시적이고 내속적인 위반의 역학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애석하게도 80년대 영화운동 담론의 히스테리적 열정은 외부의 적에 대항할 최후의 동지로서 선택된 사회주의 혁명영화사가 더 이상 대타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역사적 계기가 도래하자 전이 사랑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단 이후의 한국영화사가 가장 급진적으로 세계영화사와의 전이적 관계를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체화의 계기로서 살려내지 못하고 결국은 주류적 관습과의 타협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순간인 동시에 민족영화 개념의 급진성이 내셔널 시네마 개념의 자유주의적 기미로 희석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75)슬라보예 지젝, 『이라크』, 박대진 외 역, 도서출판 b, 2004, 118-211쪽 참조.  76)『이라크』에서는 ‘대항’으로, 다른 논자들은 ‘쟁의(爭議)’ ‘경쟁’으로 번역하지만, 이 글에서는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보경 역, 후마니타스, 2007에서 채택한 용어인 ‘경합’을 따른다.  77)Chantal Mouffe, “Religion, Liberal Democracy and Citizenship”, in ASCA Report 2001, Asca Press, 2002, p. 110, 『이라크』, 119쪽에서 재인용.  78)위의 책, 119쪽.  79)위의 책, 118쪽.  80)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05, 366-67쪽 참조.  81)슬라보예 지젝, 『신체 없는 기관』, 박제철 외 역, 도서출판 b, 2006, 139쪽.  82)발터 벤야민, 「번역가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139쪽.  83)라캉의 네 가지 담화 이론에서 히스테리 담화는 주인기표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면서 사건과 사건의 상징적 명명 사이에 있는 틈새를 고수하는 입장을 가리킨다.  84)90년대의 성격에 관한 이러한 규정은 『실재의 죽음』, 80-90쪽 참조.  85)민족영화제는 88년 3월 15일부터 5월 말까지 서울대(3월 15-16일), 단국대(17-19일), 고려대(22-24일), 이화여대(26-27일), 경희대(28-29일), 성균관대(30일-4월4일), 연세대(4일-9일), 한성대(11-12일) 등 13개 대학을 순회하며 개최됐다. <노란 깃발>(장동홍[서울예전], 16mm, 컬러, 20분, 87), <인재를 위하여> 등의 작품이 상영됐다.  86)이 연구지에는 「문화예술운동의 이론적 검토」와 「8mm 극영화 제작에 있어서」라는 글과 함께 일본 『영화운동』지에서 고른 「자주제작·자주상영」 「기록영화운동」의 번역문이 실렸다.  87)이효인은 “1. 한국영화에 관한 제 범주의 설정과 특수성의 입증은 민족영화의 개념설정과 실천적인 검증을 통해야만 한다. 2. 민족영화의 개념정립과 실천을 통해서만이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의 총체적인 고찰이 가능하고 그 화해의 통로가 열릴 수 있다. 3. 민족영화론 정립과 민족영화의 실천은 민족운동과 결부되며 그 과정 속에서 조직적, 이론적, 실천적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문화과학으로서의 영화」, 29쪽).  88)문학계에서의 ‘민족문학’을 둘러싼 논쟁사에 관해서는 김명인, 「시민문학론에서 민족해방문학론까지: 1970-80년대 민족문학비평사」, 『사상문예운동』, 1990년 봄호, 풀빛 참조.  89)그 역사적 결실이 민족예술인총연합의 결성이다. 민예총은 1차 간담회(88. 9. 30)와 함께 준비를 시작, 발기취지문을 작성하여(11. 1) 총 839명(문학 153명, 미술인 185명, 민족극 149명, 영화 102명, 음악 123명, 춤 37명, 건축 67명, 사진 23명)의 발기 동의 서명을 받아 발기인대회(11. 26) 및 창립총회(12. 23)를 개최함으로써 창립됐다. 89년 3월부터 기관지 ≪민족예술≫을 발행했다.  90)‘민족영화를 위하여’라는 제목 아래 ‘영화마당 우리’ 주최로 소형영화, 비디오, 슬라이드 작품을 발표하려 했던 영화제(89. 1. 13-2. 3. 독일문화원 예정. 당국의 개입으로 취소됨) 기획을 이효인은 현실주의적 민족영화론자 혹은 사이비 민족영화론자들에 의한 실천이라고 일축하고 그들은 사상적 엄격함이나 목적의식적 실천을 교조주의라며 조소한다고 비판하였다(「민족영화의 당면과제와 임무: 미학과 창작방법론을 중심으로」, 『민족영화 I』, 29쪽 참조).  91)이처럼 언표 내용과 행위행위 위치 간의 모순을 통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함정을 지적하는 견해는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05, 409쪽 참조.  92)자크 라캉,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주요 개념』, 맹정현·이수련 역, 새물결, 2008, 221쪽.  93)위의 책, 412쪽.  94)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07,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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