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화나우도 아니다. . . 우리를 표현할 말이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Not family, not whanau. . . maybe there aren’t words for us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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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Keri Hulme’s globally-recognized novel, The Bone People, which deftly combines the themes of family violence, exploitation of natural resources, and the regeneration of Maoritanga. Set in the harsh environment of island beaches, The Bone People is an emotionally powerful story of love and friendship among three alienated outcasts: a reclusive female artist of mixed heritage Kerewin Holmes, a widowed Maori factory worker Joseph Gillayley, and a mute white child Simon. Self-isolated in a spiral-shaped tower, Kerewin is intellectual, eccentric, fish-obsessed, and asexual. Joe seems to be a hardworking and caring father, but he is an alcoholic and abusive father to his foster son. Simon is known as a manipulative, wicked child with an unknown past washed ashore in a shipwreck and rescued by Joe. The three characters are family-less and homeless. They treat each other with a perturbing mixture of tenderness and brutality. Concerning this point, the paper focuses on their homing process and complicated relationship which brings the characters together in the name of a new family. The unorthodox trinity of mother, father, and son represents the utopian landscape of family where Maori and Pakeha meet, clash, and merge.

  • KEYWORD

    케리 흄 , 『태초의 사람들』 , 마오리성 , 귀향 , 새로운 가족의 탄생 , 폭력과 치유

  • I. 케리 흄의 마오리성(Maoritanga)

    마오리 혼혈여성 작가 케리 흄(Keri Hulme, 1947~)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뉴질랜드 백인여성작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와 재넷 프레임(Janet Frame)의 뒤를 이어 주목 받고 있다. 이 논문은 1985년 명성 높은 부커 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설 『태초의 사람들』(The Bone People, 1983)1)을 분석하면서 조상의 땅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마오리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diasporic identity),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 애증의 관계로 점철된 가족의 붕괴와 재탄생 그리고 탈식민적, 탈민족적, 미래지향적 귀향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흄의 『태초의 사람들』은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 케러윈 홈즈(Kerewin Holmes), 고독하고 폭력적인 공장노동자 조셉/조 질레리(Joseph Gillayley), 그리고 그의 도벽이 있는 골칫덩어리 양아들 사이먼(Simon/Sim/Haimona)이 엮어가는 사랑과 증오, 폭력과 애착, 신화와 현실 그리고 마오리와 파케하(유럽계 후손)2)가 기묘하게 얽힌 다층적 이야기이다. 이 비밀스럽고 사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소외, 갈등, 분노, 폭력, 아동학대, 그리고 술‧마약중독 등이 하나하나 드러나 사회의 일그러진 현실이 폭로된다. 이 세 명의 만남은 식민 지배의 본질, 즉 그것의 폭력성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흄 특유의 복잡한 다층의 내러티브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통해 서구 문명의 획일적이고 편협한 이분법적 사고가 해체되고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절묘하게 뒤섞이면서 문화적 혼종성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상호연관성이 어떻게 추리 소설적 요소들과 긴밀하게 부합되어 미학적으로 재현되는지 고찰한다.

    크리스 프렌티스(Chris Prentice)는 호주 작가 B. 웡가(Wonga)와 흄을 비교분석한 흥미로운 논문에서 마오리 여성의 탈식민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적 텍스트로서 흄의 『태초의 사람들』이 내포한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다의성에 주목하여 이 소설을 폭력적 식민과거에 대한 치유의 알레고리로 읽는다(104). 하지만 뉴질랜드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C. K. 스테드(Stead)는 생물학적으로 흄의 여덟 명의 증조부모 중 한 명만이 마오리였고, 문화적으로도 흄이 마오리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다른 파케하처럼 성인이 되어서야 마오리어를 조금 배웠다는 점에서 그녀의 마오리 작가로서의 정체성3) 그리고 그녀가 묘사하는 마오리성의 정통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103-4). 이에 반해 마저리 피(Margery Fee)는 이런 주장이 순수혈통 우위론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백인주류사회가 비백인 소수집단을 자격박탈한 근거와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쟁들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 논문에서는 흄의 마오리 작가로서의 문학적 그리고 자기표상의 정치적 합법성의 여부를 논외로 친다. 대신, 현대 뉴질랜드의 탈식민주의적 사회‧문화적 문맥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구체화하고 재현하면서 마오리와 파케하의 귀향과 새로운 가족의 형성이라는 미완성의 진행형 비전을 제시하는 흄의 작품 그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실 탈식민 사회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혼혈과 혼종으로 인해 정체성의 본질적 범주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순혈 원주민 정체성이나 순수한 원주민 문화의 회복은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논쟁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태초의 사람들』에서 규범적 틀에 갇혀 타자로 인식되는 인물인 케러원과 조의 대화에서 암시되듯이, 오늘날 뉴질랜드 마오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종족의 역사적 존재성을 인식하며 현재적 삶 속에서 마오리성이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가이다.

    동양의 철학에 심취한 창백한 케러윈과 가톨릭 신자인 검고 건장한 마오리 청년 조는 분열되고 단절된 인물들을 재현한다. 이들을 통하여 흄은 지배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의 형성을 경계하는 한편, 이들이 겪는 문화적, 인종적, 성적 혼종성과 타자성(Otherness)을 받아들이는 정체성의 재인식의 여정을 보여준다. 즉 흄은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고통과 경험을 인물들을 통하여 구체화한다. 복합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케러윈은 고립된 삶을 추구하는 작가의 실제 모습과 닮았다. 보편적으로 종족의 순수성이 여성의 몸, 성, 특히 재생산으로 유지된다고 인식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아주 평범한 여성의 몸을 가졌지만 성적 본능이나 욕망이 결여된 자신을 무성(neuter)으로 인식하는 케러윈이 보여주는 여성성과 모성은 흥미롭다. 비슷하게 양성애적인 건장한 청년 조은 가부장적 사회가 이상으로 여기는 이성애적 남성성(heterosexual masculinity)을 해체하고, 목소리를 잃은 소년 사이먼은 어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아이의 무지성과 순수성에 도전한다. 이렇듯 너무나 “다르고 까다로운”(250) 세 사람은 여성/남성, 파케하/마오리, 어른/아이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 상용범주를 벗어나 대안적이고 차별적인 정체성을 추구한다. 『태초의 사람들』에서 그려지는 고립된 공간에 갇혀 버린 캐러윈과 그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피할 수 없는 타자인 조와 사이먼의 만남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몸짓과 목소리를 통한 자기인식과 공동체적 연대가 필수적임을 함축한다. 동시에 주목할 점은 각자의 어두운 과거를 품은 자기파괴적 세 사람이 서로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징적, 육체적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1)마오리어 이위(iwi)는 가장 큰 사회 단위인 부족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뼈(bone)를 뜻한다. 이는 다시 조상들의 뼈가 묻힌 매장지를 의미하며 조상이나 시조의 근원(root)으로 해석될 수 있다.  2)뉴질랜드 토착민을 일컫는 마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 반면에 유럽 정착민들은 ‘크고 하얀 사람들’을 의미하는 파케하라고 불렀다.  3)흄은 이름의 철자를 Kerry에서 더 마오리적인 Keri로 바꿨다(Prentice 103).

    II. 낯선 타자와의 만남

    공간과 전치(displacement), 정체성 신화, 사회적, 문화적 소외, 그리고 자아 이미지의 위기 등을 탈식민주의 영문학의 고전적이면서도 보편적 특징(Ashcroft, et al., 9)으로 여기는 데에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메라타 미타(Merata Mita)는 『태초의 사람들』을 오늘날 뉴질랜드 사회가 겪고 있는 “파케하 세계의 강박적 개별화와 마오리 세계의 역사적, 정신적 의식 사이에서의 정신분열 증적 동요”(schizophrenic oscillation)를 보여준 “최초의 진정한 뉴질랜드 소설”(7)로 규정한다.4) 흄의 소설은 이러한 상이한 파케하와 마오리 세계가 공존 결합한 이중적 의미의 집/고향(home)이라는 상징적, 문화적, 물질적 공간을 구심점으로 하며, 생물학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여성, 남성, 그리고 어린 아이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타자의 관계성, 폭력성, 치유성을 보여준다. 즉 은둔자적 삶을 선택한 무성의 혼혈 여성, 양성애적인 마오리 남성, 그리고 정신적‧육체적 상흔을 간직한 백인 소년 등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 내적독백, 심리적 사실주의, 마오리어 혼용과 같은 기법을 이용하여 현실과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복합적 시점으로 풀어나간다. 이 세 인물들은 모두 성, 가족, 공동체, 마오리, 그리고 파케하의 주변부에 머문 채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는 분열된 존재이자 과거에 갇히거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단절된 존재이다.

    예술가로서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케러원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산물인 복권에 당첨되면서 가족과 절연하고 외딴 곳에서 자신만의 고독한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녀가 세운 거대한 나선형의 6층 탑모양의 거주공간에 놓인 것은 미완성의 자화상뿐이다. 모든 인간적 관계를 거부하고 기이한 고립된 공간에 갇힌 채 그녀는 자신의 모호한 성정체성, 즉 무성의 타자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어떠한 방문도 허락하지 않는 “감옥”(7)이라 부르는 나르시시즘적 공간에 갇혀 더 이상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부유한 화가 케러원의 방황과 무기력한 삶은 너무나 낯설다. 또한 그녀가 벗어나고자 하는 과거가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은 채 그녀의 예술적 치열함보다 지독한 자기애가 전경을 차지한다. 이러한 케러원의 매우 은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이먼이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서게 되면서 이들의 피할 수 없는 만남과 불안한 관계는 시작되고 사이먼의 마오리 양부 조와 함께 낯선 삼인조의 삶은 풀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게 된다.

    안체 라우워다(Antje M. Rauwerda)는 마오리와 파케하의 화해(reconciliation) 그리고 마오리성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태초의 사람들』을 탈식민적 알레고리(postcolonial allegory)로 읽는다(24). 그녀는 생물학적 특성에 기초하여 백인 소년 사이먼은 파케하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마오리 청년 조는 마오리의 모든 것을 대변하며 혼혈 여성 케러윈은 중간자적 역할을 한다고 해석한다. 반면, 필립 암스트롱(Philip Armstrong)은 병적으로 자신의 세계에 파묻혀서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캐러윈의 자기중심성(egocentrism)을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보여주는 타자의 자리를 배제하는 식민주의자적 경향의 풍자(parody)로 규정한다. 크루소가 고립된 섬에서 식인종 프라이데이의 발자국을 발견하면서 원하지 않은 타자와의 관계를 시작하였듯이, 캐러윈 또한 자신만의 해변가에서 침입자 사이먼의 샌들을 발견하면서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자발적 고립을 방해받는다(11). 이러한 점에서 크루소처럼 캐러윈 또한 궁극적으로 타자와의 식민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서구의 개인적 주체(Western individual subject)로 보일 수 있다. 이렇듯 탈식민적 다양성과 혼종성, 포스트모던적 모호성과 우연성, 문화적 양가성과 가변성, 신화적 필연성과 불확실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흄의 텍스트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사실 초연한 듯, 태연한 듯, 무심한 듯 보이는 흄의 인물들은 결코 쉽게 이해되고 인식되기를 거부한다. 이는 추리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일련의 사건이나 사실들이 선택적, 순환적으로 암시될 뿐 진실의 여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데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이먼의 친부가 아일랜드 귀족 출신의 방탕한 마약 중독자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조의 동성애적인 과거와 케러원의 가족 불화의 원인이 모호하게 설명된다. 게다가 캐러윈의 말기 위암, 조의 심한 골절상, 사이먼의 청각장애의 신화적, 자연적, 기적적 치유는 현대의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더불어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의 복합적 전환, 신화적 상상력, 마오리어와 영어의 충돌, 의식의 흐름, 상이한 문화적 요소(아동 음주, 흡연, 카니발리즘 등)의 끼어들기는 논리적인 사고와 해석적 내러티브에 익숙한 독자들을 한층 당혹스럽게 한다. 무엇보다 소설 전반을 통하여 생생하게 묘사되는 알코올 중독자 조와 신체적 결함이 없음에도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몬의 지독한 의존과 폭력으로 점철된 부자관계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부모님 세대들의 갈등, 가족의 해체, 소아마비 등으로 인해 심리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조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돌다 아내 해나(Hana)를 만나 처음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꿈꾼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아내를 위한 집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 채 공장노동자의 길을 택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해변에서 폭풍으로 난파된 배에서 밀려온 두세 살 정도의 금발머리, 파란 눈동자, 하얀 피부의 전형적인 백인 아이를 발견하여 “자신의 숨결”(85)을 불어넣어 기적같이 살려낸다. 남자 신이 흙으로 여자를 만들고 그 형상을 껴안으면서 코 속으로 숨결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전하는 마오리 신화와 이마를 맞대고 코를 부비는 코인사 홍이(hongi)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의 숨을 나눈다는 것은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소설의 첫 장에서 케러윈이 상처입은 사이먼을 발견하여 치료해 주듯이, 조 또한 사이먼의 죽어가는 몸에 자신의 숨결을 나누어 준다. 비록 임신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해나는 낯선 사이먼이 조에게 필요한 가족/부족(people)을 선사할 아들임을 예지한다. 결국 아내의 간청으로 생물학적 아들을 기다리던 조는 사이먼을 입양한다.

    하지만 케러원의 복권 당첨이 가족의 붕괴를 가져왔듯이, 조가 사이먼을 발견한 후 단순한 독감에 걸린 해나와 갓난 아들 티모테(Timote)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가족을 갖고자한 그의 꿈도 사라진다. 그 후 죽은 아내가 “우리 아들”(6)로 명명한 사이먼과 조의 애증 섞인 전쟁과 같은 삶이 이어지고, 그들의 자존감의 분열이 시작된다. 과거와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이먼은 이웃의 아주 사소한 물건을 훔치거나 망가뜨리면서 매일 매일 말썽을 일으키는 반사회적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아버지와 아들, 어른과 아이, 그리고 마오리와 파케하라는 지족적인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사이먼의 공격적인 도벽과 적대적인 집착이 조를 자극하여 폭력이 일상이 된다. 이러한 폭행의 상처는 일곱 살 사이몬의 앙상한 몸에 남은 옛 상처에 더해져 그대로 새겨진다. 몸이 기억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이먼은 조의 반복되는 구타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케러원조차 조의 폭력을 어느 정도 묵인하고 허용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폭력과 아동학대에 대한 흄의 관용적인 모호한 태도는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소설의 기저에는 사랑과 폭력 그리고 학대와 치유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흄의 낯선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불편하고 불안한 관계성은 탈식민적 뉴질랜드 사회가 직면한 단조롭고 평화롭게 보이는 사적인 영역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

    4)스테드는 『태초의 사람들』은 마오리 작가에게 수여되는 상을 받은 파케하의 작품이 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폭력과 사랑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로 정의한다(104).

    III. 관계성과 폭력성

    앞서 언급하였듯이, 흄의 인물들은 다양한 유형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인물들인 직면한 절박한 현실을 대변한다. 갈등과 대립, 분노와 광기, 결핍과 공포로 가득 찬 부조리한 사회에서 폭력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은 그의 저서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폭력은 야만의 잔재에 불과하고 지식의 진보에 따라 소멸되는 것”(113)으로 여기는 부르주아 문명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에 경멸감을 내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하지만 혁명적 수단으로서 폭력은 “계급투쟁의 노골적이고 명확한 표현일 때에만 역사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128)고 주장하면서 폭력의 역사적 역할에 주목한다. 더욱 흥미롭게도, 원시문명으로부터 후기자본주의 사회까지 광범위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희생 이데올로기에 은폐되어 있는 신성한 제의적 폭력에 관하여 논하면서 인간사회에서의 폭력의 역할을 밝혀내려고 한다. 제의적 기능과 성스러움을 내재한 폭력성은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상징적 함의를 지닌다. 폭력에 관하여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주장 또한 탈식민 사회를 이해하는데 유익하다. 파농은 식민지배 자체가 폭력적이므로 “탈식민화는 항상 폭력적 현상”(29)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폭력을 지배관계와 소외로부터 해방과 자기 존엄을 회복시키는 정화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정당화, 합리화한다. 탈식민화의 역사적 과정에서 혁명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자존의 성격을 지니며 필수적이고 본질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흄의 소설에서 폭력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어린 사이먼의 몸에 가해진 조의 가혹한 구타와 케러윈의 방조는 폭력, 강탈, 착취의 식민역사의 트라우마라는 탈식민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흄의 분열되고 폭력적 인물들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지라르는 “욕망을 유발한 대상이 정복/쟁취 불가능할 때 폭력은 그 대상을, 폭력을 초래할 아무런 명분도 없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한다”(11)고 주장한다. 즉 모든 인간은 폭력의 피해자 또는 생산자로서의 양가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사이먼의 가냘픈 몸에 아로새겨진 조의 폭력의 흔적은 조의 남성으로서의 좌절, 분노, 무기력을 상징한다. 특히 어릴 적 조가 경험한 나이 많은 남성과의 동성애적 관계는 개인적으로는 소중한 기억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남성적 자존감을 방해하는 오욕이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을 이성애적, 동성애 공포증적 주체로서 규정하려 한다. 사회문화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조의 양성애적인 성향은 과장된 남성성을 강요하게 되고 이는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표출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사이먼은 조 자신이 보호해야할 아이가 아닌 제거되어야할 어떤 것(욕망)으로 표현된다.

    조(마오리-어른)와 사이먼(파케하-아이) 사이에는 상호의존적 공존관계가 존재하며 그들의 폭력적 긴장 관계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드러낸다.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모순적 자기학대는 세 인물들의 맹목적인 난폭성이나 불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이 직면한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을 유발하는 과거와 현실을 강조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폭력과 깊은 후회, 증오와 사랑, 죄책감과 분노”(Edmond 279)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학대와 용서의 악순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려지는 폭력을 단순하게 서구의 도덕적‧윤리적 규범으로 판단하거나 전형적 남성적 속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마오리 문화적 감수성과 역사적 복잡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파농이 무질서의 상태인 탈식민화에서 대립적인 “두 세력의 첫 만남은 폭력적이다.”(30)라고 언급하듯이, 사실 조와 사이먼의 만남 또한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다. 조의 물리적 폭력성만큼이나 사이먼의 도발적 행동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분노에 싸여있다. 훗날 조가 만난 신비한 마오리 노인(an ancient Maori kautatua)의 “치유하기 위해 분노는 필요하다”(356)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지만 일본의 무술 아이키도(Aikido)를 익혀 남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한 케러윈에게는 조의 폭력성보다 사이먼의 타자성이 더욱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첫 만남에서 케러윈은 사이먼을 “파괴자, 부랑자, 골치 아픈 사내 녀석, 허깨비 같은 아이”(36)라고 명명한다. 게다가 사이먼의 백인성은 과장되어 강조된다.

    케러윈과 조를 연결하는 사이먼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아이면서도 아이 같지 않고, 백인이면서도 백인 같지 않으며, 현실적이면서도 신화적이다. 술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며 놀림과 구타를 당하고 목소리를 빼앗겼지만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백인 소년은 매우 흥미롭고 불가사의하다. 라우워다는 『태초의 사람들』의 매 맞는 소년(whipping boy)이 파케하 식민주의자와 마오리 신을 동시에 해체적으로 상징한다고 주장한다(23). 사이먼의 전형적인 백인의 특징(흰 피부, 푸른 눈, 금발)이 트라우마와 공포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백인성을 강조할수록 강탈과 억압의 역사가 새겨진 조의 마오리성 또한 강하게 드러난다. 사이먼의 하얀 피부에 새겨진 상처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마오리에게 행했던 폭력과 탄압으로 얼룩진 식민과거에 대한 탈식민적 인과응보의 대가이다. 즉 백인 아들은 마오리 아버지가 가하는 채찍질의 고통을 견뎌야 하며, 이는 파괴된 마오리성(Maoriness)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위계적 인종주의에 기반 한 백인성(Whiteness)이 추방과 강탈의 식민역사에 대해 반드시 응징을 받아야 함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사이먼은 구원의 표상이자 희생양이며, 조의 야만적 폭력은 과거역사의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코드리나 코즈마(Codrina Cozma)는 백인사회가 지향하는 자본주의적 삶을 살고자 노력하면서 무의식적 분노와 좌절 속에서 백인 양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마오리 청년 조와 그의 각성과 변화를 “문화적 혼종성의 전형”(a model of cultural hybridity)으로 규정한다(69).

    폭력을 숨기고 폭력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케러윈, 조, 그리고 사이먼은 가족처럼 일상의 영역을 공유하지만 단단하게 세워진 사적인 경계를 넘어서 다가서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기억하는 또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갇힌 인물들이다. 언급하였듯이, 그들이 직면한 현재의 문제는 고통스러운 과거에서 비롯된다. 과거로부터 도망치려는 끊임없는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평생을 함께 가야한다”(444)라는 단순한 진실을 깨닫는 순간 이 삼인조는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세 사람의 타자성이 빚어낸 무지막지한 폭력은 방아쇠가 되어 불안하게 유지되었던 그들의 관계적 삶을 산산조각으로 부순다. 『태초의 사람들』은 폭력의 편재성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일상에서 심리적, 육체적 폭력으로 억눌렸던 모든 것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폭력은 과거가 지배하는 현재의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함의하며 난파선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멈춰버린 삶과 불안한 긴장감을 터뜨리는 전환점을 만든다. 결국 그들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각각 고향/집을 떠난다.

    IV. 치유적 귀향과 새로운 가족의 탄생

    폭력은 이 세 사람의 기나긴 여정을 절정으로 이끄는 촉매가 된다. 이들의 폭력은 전염성이 강하고 습관적이며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연하게 유혈이 낭자한 채 처참하게 죽어있는 비니(Binny)5) 노인을 발견한 사이먼은 케러윈을 찾아갔지만 차갑게 외면당하자 그녀가 가장 아끼는 기타를 깨부수고 상점의 모든 유리창을 깨뜨리는 난폭한 행위를 통하여 불안과 공포를 표출한다. 사회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소외된 사이먼에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소통의 수단”(Fox 43)으로서 폭력은 습관화 되었다. 더불어 훈육의 일환으로 조가 행하는 육체적 체벌 또한 과격해지며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어 집으로 끌려온 사이먼에게 화가 난 조는 케러윈과 전화로 상의한다. 사이먼의 도벽과 기타 파손에 화가 난 케러윈 또한 사이먼을 “뱀같이 사악한 녀석”(308)이라 여기며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고 조의 체벌을 용인하다. “모든 것을 망쳤다”(308)고 소리치는 조의 성난 목소리와 비니의 시체 주위를 맴도는 파리 떼의 윙윙거림이 겹쳐지는 환영 속에서 사이먼은 매질하는 조를 유리조각으로 찌른다. 흥미롭게도 흄의 절망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인물들은 종종 독백이나 일기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반면, 상대방을 향해서는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소설에 나타난 폭력을 "극단적 또는 그릇된 형태의 혼성 국제어(lingua franca)의 상징”(31)으로 읽은 메리엔 디버(Maryanne Dever)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결국 조는 2주간의 병원 치료를 받아야하고, 온 몸이 망가진 채 혼수상태에 빠진 사이먼 또한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극도로 무서워하는 차가운 병원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사이먼의 상처 난 머리를 감싼 하얀 붕대는 다시 그의 백인성과 겹쳐진다. “피투성이의 부푼 얼굴, 부서진 코와 깨진 턱. 그리고 문틀에 세게 부딪쳐서 끔찍하게 움푹 들어간 두개골”(314)로 묘사되는 처참한 모습의 사이먼을 바라보는 케러윈은 폭력행위에 맞부딪쳤을 때 일반적으로 도덕론자들이 내보이는 깊은 혐오감과는 다르게 연민과 동정심으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조와 사이먼을 껴안는다. 케러윈은 조에게 더 이상 사이먼을 만날 수 없음을 냉철하게 전하면서 법적인 자문을 해주지만 서구의 윤리적,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와 사이먼의 “진실한 사랑”(325)을 이해한다. 비극적인 사건 후 케러윈은 세 명의 머리가 함께 붙어있는 실물크기의 상(tricephalos)을 조각하여 그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음을 예술적 형식으로 승화시켜 표현한다. 조 또한 6년 동안 파케하처럼 가족을 위한 집을 장만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자 열심히 일한 것이 시간낭비였고, 그에게 가족이나 집은 사이먼이었음을 깨닫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린다.

    환언하자면, 남자, 여자, 아이 또는 마오리, 혼혈, 파케하로 구성된 이삼인조의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들이 탈식민적 공간에서 새로운 삶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한다. 사이먼이 차가운 병원에서 생사의 고비를 맞이하듯이, 조는 가정폭력으로 3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 후 거친 광야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뼈들이 부셔지는 고통을 당한다. 마찬가지로 케러윈 또한 자신을 가두었던 탑을 불태운 뒤 떠돌다 몸을 점령한 암세포로 뼈 속 깊이 아픔을 느낀다. 이 세 사람은 육체적 고통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치유, 정화되어 간다. 흄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치유를 동일시하면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편견을 반박한다. 게다가 소설 전반부에서 전개되는 폭력의 이미지가 심리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졌다면 후반부의 치유의 과정은 마술적 사실주의로 묘사된다.

    파케하 의사들은 끔찍한 폭력으로 인해 사이먼이 영구적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정신장애를 앓게 될 거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사이먼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하고 가장 먼저 자신이 조를 찌른 사실을 기억해 낸다. 의사들은 고집스럽게 조만 찾는 사이먼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능이 떨어진 아이로 취급한다. 병원에서 위탁보호소로 보내진 사이먼은 일곱 살 아이가 행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반복적 탈출을 감행한다. 결국 그는 조와 함께 살았던 집은 다른 이들이 차지하였고, 케러윈의 탑은 불타 사라져 버렸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홀로 집으로 가는 여정을 통하여 사이먼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세 사람이 절대적으로 함께 존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될 수 없음(nothing)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사이먼이 그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 사이먼을 삼켜버린 도시문명을 벗어난 조와 케러윈은 각자 미지의 자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벼랑에서 떨어진 조는 “그날 어느 순간에 자신이 죽을 것”(355)이라고 예언하는 마오리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자신이 죽은 후 한 점의 살을 떼어내 먹으라고 유언한 그의 할머니에 대한 낯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가 평생 동안 지켜왔던 태초의 조상들이 타고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카누를 보여준다. 게다가 노인은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죽은 후 카누가 숨겨진 황무지 땅을 법적으로 승계할 후계자 될 “낯선 사람, 땅을 파는 사람, 망가진 사람”(358)이라 불리는 이를 평생 동안 기다려왔음을 밝힌다. 조는 자신이 망가진 자(broken man)이며, 자신의 아들 사이먼이 낯선 사람(stranger)이고 케러윈이 땅을 파라고 지시 받은(digger) 꿈을 꾸었음을 상기하면서 삼위일체가 된 자신들이 노인이 60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카누를 지키는 이(watcher)임을 깨닫는다. 박물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카누를 보고 실망한 조를 향해 노인은 “땅의 심장”(364)으로서 카누가 상징하는 의미를 전한다.

    조는 노인의 간절하고 절박한 이야기를 통하여 마오리로서의 뿌리를 잃어버린 자신이 무엇에 분노하고 좌절하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조는 지우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개인적 과거와 지워져 버린 것 같지만 이어져 내려오는 마오리의 신화를 받아들인다. 그는 노인의 죽음을 그에게 주어진 카누를 지키는 마오리로서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반면에 집을 떠나 낯선 지역에서 위암으로 고통 받는 케러윈은 의사에게 “왜 내가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죠?”(414)라 반문하며, 현대의학에 강한 불신을 내비치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한다. 더 나아가, 변호사와 재산 문제를 정리한 후 그녀는 자신의 병을 자살로 의심 받지 않고 자살 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하지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 홀로 죽음을 기다리던 케러윈은 그들 “세 명이 가능성이며 자유의 시작”(424)임을 지각하는 현현(epiphany)을 경험하게 된다. 그 순간 “나이도, 성도, 인종도 모호한 마르고 작지만 강인해 보이는 사람”(424)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에게 여러 가지 약초로 우려낸 시큼한 차를 마시게 한 후 홀연히 사라진다. 기적처럼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은 케러윈은 자신(I)이 그(his)도 그녀(her)도 아닌 성적 규범에 구속되지 않는 나(me)라는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길고도 험한 여정을 통하여 삼인조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 세 사람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과 치유는 소설의 제목에서 나타난 뼈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사이먼이 모든 소리로부터 단절된 후 클레어(Clare)라는 과거의 이름을 되찾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파악하여 자신을 표현하게 되듯이, 조는 마오리 노인을 만나 치료를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385)오고 케러윈도 자연 속에서 불가사의하게 치유되면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437)임을 깨닫게 된다. 케러윈은 사이먼을 입양하고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조를 받아들여 법적으로 만남이 금지된 그들을 연결한다. 이런 점에서 케러윈은 조와 사이먼에게 부재한 어머니 자리를 채운다. 사회적 통념의 틀을 벗어난 무성적 어머니로서 케러윈은 폭력과 침묵의 어둠속에 갇힌 조와 사이먼을 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형성의 구심점이 된다. 마오리와 파케하,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사이의 공간에서 케러윈의 여성적, 혼종적 경험과 더불어 생물학적 무성의 몸을 통한 모성과 가족이라는 여성의 몸의 공동체적 그리고 생명 원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이미지는 새롭게 조명된다.

    크리스마스 날에 케러윈와 조의 소원해졌던 가족친지들이 모두 케러원이 새로 지은 마오리족의 전통 집회장소인 마라이(marae)에 모여 세 사람의 재결합을 축하한다. 이는 이들뿐만 아니라 파케하와 마오리 친지들을 포용하는 새롭고 희망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관습적으로 혈연제도의 기본이 되는 가족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로 이루어진다. 지라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생물학적인 가족은 요지부동의 단위가 아니라, 결혼제도에 근거한 “하나의 합성물”이다(334). 비록 입양이라는 법적 절차를 거쳤지만, 케러윈, 조, 사이먼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가족은 파케하와 마오리를 나누는 핏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존을 위한 절대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합성물이다. “밀려오는 미래의 가능성”(395)을 표상하는 가족/집/고향은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 감정적, 상상적, 현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이렇게 로드 애드몬드(Rod Edmond)가 주장하듯이, 『태초의 사람들』에서 세 명의 불안하고 까다로운 인물들은 과거에서 비롯한 집단적 트라우마의 개인적 치유의 여정에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결국 “화해”와 “재탄생”(186)이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마오리와 파케하, 역사와 신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가족/집/고향이라는 울타리를 만들면서 새로운 종족(bone people)이 시작된다. 하지만 “새벽의 밝은 빛으로 엮인”(445) 새로운 가족은 불안하고 미래 또한 미지의 상태인 채 소설은 모호한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새로운 끝과 시작을 알리는 분열되고 상처 입은 이들을 껴안은 “아직 무엇이라 이름 짓을 수 없는”(395) 이 새로운 가족은 국가적 화합을 염원하는 탈식민적 뉴질랜드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할 수 있다.

    5)비니는 아동성애자(pedophile)로 알려져 있다. 조는 사이먼에게 비니의 집을 방문하지 말라고 금하였지만 성에 대해 무지한 사이먼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비니를 찾아갔고 사람이 그리운 그 또한 사이먼의 방문을 반겼다. 사실 비니가 사이먼을 성적 대상으로 여겼는지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Ⅴ. 나가면서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흄의 『태초의 사람들』은 음악과 그림, 술과 담배, 바다와 육지, 시와 산문, 감각과 지각,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채 가득한다. 이 혼종적 소설은 복권에 당첨되어 물질적인 풍요로운 삶이 주어지지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 예술가의 미완성 그림, 아내와 갓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고 술에 의지하는 저임금 공장노동자의 폭력 그리고 마약밀매 난파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소년의 침묵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신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무엇이라 정의하기 어려운 그들의 관계 속에서 상호보완적이고 유기적인 내러티브는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의식의 연속성에 기초해서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치유하는 화해와 용서의 과정을 전개한다. 다른 마오리 작가들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공존 관계의 재현을 통하여 마오리 정체성을 지키려하거나 집단구성원으로서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경향이 있다면, 흄은 뉴질랜드의 식민역사를 넘어서 마오리와 파케하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적 화합이라는 탈식민적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식민역사와 이산경험으로 문화적 뿌리를 잃어버린 유색여성들의 글쓰기는 문화적 소외와 역사적 단절, 동화와 차별, 공동체적 기억과 대화적 상상력을 통하여 정체성을 새롭게 구체화하여 과거에서 비롯된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는 탈식민 과정을 묘사한다. 흥미롭게도 흄은 이러한 탈식민적, 여성적 치유의 과정을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의 혼용뿐만 아니라 심리적,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 그리고 서구 문학의 핵심적 기법인 꿈 이미저리(dream imagery)와 의식의 흐름 등을 발전ㆍ활용한 중층적인 내러티브를 통하여 보여준다. 무엇보다 흄의 심리적 독백과 단절적 내러티브는 여성, 남성, 아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그저 각각 인물들을 고뇌하는 주체로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흄의 낯선 인물들은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태초의 사람들』은 마오리 전통과 신화를 그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만 재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태초의 사람들』에 나타난 흄의 글쓰기는 뉴질랜드 특유의 현대적 일상과 신화적 요소가 공존하는 상상력의 공간에서 타자화 된 하위주체들의 육체적 회복과 정신적 치유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귀향과 부여된 위계질서 없이 차이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열린 결말로 나아간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뉴질랜드의 탈식민 현실을 반영한 흄의 저항적, 비판적 텍스트는 기존의 지식이나 상징담론의 틀에 의존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자기파괴적 의식과 폭력 그리고 침묵 속에 갇힌 타자화된 하위주체들의 자기치유적 귀향과 유토피아적 가족의 형성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마오리와 파케하를 어우르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미완성 진행형으로 단순하게 희망적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TE MUTUNGA - RANEI TE TAKE = the end - or the beginning)처럼, 이는 기나긴 여정의 끝이자 시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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