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Gao, Xing-jian’s Film

가오싱지안(高行健) 영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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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work has tried to review Gao Xing-jian’s films. Gao is Chinese French who has exiled because of political oppression on his works of art. He has directed two films: one is La Silhouette sinon l’ombre(2006), another is APRES LE DELUGE(2008). There is an objection that was already raised by myself to producing knowledge and building up discourse on Gao in Korea. For this reason I have argued intertextuality his own works, and considered the ways how the signification of the inner-texts meets some contexts in outer-texts as an advocate for contextuality and articulation for overcoming some gaps and splits between object and subject of study. Firstly it has argued the relationship of La Silhouette sinon l’ombre and APRES LE DELUGE. Despite of some differences like running time or the method of using and arranging images, APRES LE DELUGE has succeed La Silhouette sinon l’ombre from various angles something like atmosphere, style, shots, hybridity of identity. Secondly, it has also argued the signification of his films is very similar to poetic signs: they have excluded narrative and arranged images with non-lineal method. It could borrowed the argument of poetic cinema by Pier Paolo Pasolini. Especially his concept, free indirect point of view shot, a requisite of poetic cinema is discovered repeatedly in his films. However, in conclusion, it has presented those requisites of form or style could not explain some in-depth signification of his films, it would be secured from understanding context as the conditions that could created those form and styles. Gao has problematized hybridity of self identity articulating his own life history with arranging ambiguous images. And it is connected to some post-colonial interpretations.


  • KEYWORD

    Gao Xing-jian , La Silhouette sinon l’ombre , APRES LE DELUGE , Semiosis , Signification , Poetic Cinema , Free Indirect Point of View Shot

  • 1. 머리말: 가오싱지안과 그의 영화

    주지하다시피 가오싱지안(高行健; Gao Xing-jian, 1940.1.4∼)은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다. 노벨상 수상 이전 가오싱지안에 관한 학문적 혹은 대중적 논의와 토론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의 노벨상 수상은 매우 의외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 초ㆍ중반에 이미 문제적 실험극과 평론 등을 발표하면서 중국 내 관련 분야에서 적잖이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1989년 티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발한 뒤 <도망(逃亡)>이는 연극으로 인해 자신의 작품이 전면적으로 공개 금지되는 상황에 이르자 프랑스로의 망명을 선택했고, 이후 그의 이름은 중국 내부에서 일종의 정치적 금기가 되고 말았다. 국내 학계나 관련 분야도 가오싱지안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따라서 미지의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때문에 야기된 의외성은 정치성과 긴밀하게 맞물리게 됐다. 더불어 무릇 수상이라는, 특히 노벨문학상과 같이 계가 주목하는 경우의 사건이 그러하듯이 가오싱지안의 수상은 그에 대한 학술 연구와 지식 생산, 담론의 유통이 폭증하는 계기가 된다.

    가오싱지안은 1940년 중국의 지앙시성(江西省) 간저우(贛州)에서 태어나 베이징외국어대학(北京外語學院)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 번역가,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화가 등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예술 창작에 헌신해 왔다. 특히 그의 실험극은 개혁개방 초기 중국 극단에 전혀 새로운 연극 양식과 이념을 소개했고, 그는 현대 중국 극단의 문제적 인물로 부상했다.1) 프랑스 망명 이후에도 예술문학훈장(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1992)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에는 프랑스로 국적을 바꾸기에 이렀으며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부터는 국제적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세계 여러 나라의 관련 기관에서 수상과 전시, 강연 등을 수행하고 있다.2)

    그는 주로 극작과 회화, 소설 장르의 창작을 통해 예술 세계를 구현해 왔으나 지금까지 두 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실루엣 혹은 그림자>(La Silhouette sinon l’ombre; 側影或影子, 2006)와 <혼돈 이후(APRES LE DELUGE; 洪荒之後, 2008)>3)가 그것이다. <실루엣 혹은 그림자>는 그의 첫 번째 영화로 가오싱지안 자신과 프랑스의 작가이자 영화인인 알랭 멜카(Alain Melka), 장 루이 다르민(Jean-Louis Darmyn)이 함께 연출을 했고 그 해 베를린 국제문학제에서 처음 공개된 바 있다. 두 번째 영화인 <혼돈 이후>는 200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독자 기금회(Circulo de Lectores)와 산다(Sanda)화랑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시의 개막식에서 처음 공개됐다. <실루엣 혹은 그림자>는 128분 분량의 장편 영화이고 <혼돈 이후>는 가오싱지안이 단독으로 연출한 28분 분량의 단편이다. 두 영화 모두 실험성과 자전성을 강하게 갖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그의 노력은 이미 중국 체류 시절부터 시작된 바 있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서 실험 영화인 <붉은 강낭콩(花豆)>의 촬영을 시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제 작품의 완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4) 그이후 프랑스로 건너와 첫 번째 영화인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연출함으로써 영화감독이라는 명명을 얻게 됐다.

    이 연구는 가오싱지안의 영화 두 편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서 우선 가오싱지안 관련 지식 생산과 담론 유통의 성찰적 사고를 전제로 그의 영화를 연구하는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 그의 두 영화, 즉 <실루엣 혹은 그림자>와 <혼돈 이후>가 가지고 있는 모종의 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이를 그의 영화 세계가 구축하고자 했던 의미망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로 삼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영화 내부에서 구축되는 의미망과 그것이 생산하는 의미작용(semiosis)으로서의 문제를 통해 어떻게 그러한 의미의 구조들이 영화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면서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할 것이다. 마지막 언급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오싱지안의 영화는 실험성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그 실험성은 곧 난해성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리스티앙 메츠(Chrstian Metz)가 말한 바와 같이 “기표에 접근하기 힘든 선택적 결함을 내포한 맹목적 주체”나 “실질을 담고 있는 기표가 물질적으로 손상을 입은 경우”가 아니라면 “영화는 항상 이해되는 편이”라는 진술5)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출발한다.6) 물론 우리가 “연속체인 시각 메시지를 계량적 단위로 분절해낼 수 있다”7)거나 “영화를 손쉽게 자연언어와 동일시한 결과는 아닌가라는 의문을 지우기 어”8)렵다고 평가받는 메츠의 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우리가 이미 의미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의미작용이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의미작용은 뚜렷이 구분되는 조작적인 행위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 그 행위를 통해 의미가 재분배되는 것이다. 의미작용은 정확하게 이산적인 기표들에 상응하는 불연속적인 기의들로 절단하기를 좋아한다. 정의상 의미작용은 아지 결정되지 않은 의미내용을 채우는 것이다”9)와 같은 그의 어떤 발언들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연구는 가오싱지안 영화 내부의 의미작용의 문제를 두고 그 자신도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를 시로 간주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다시 말하면 그의 영화 텍스트가 시적 기호의 나열과 배치를 통해 기호화(signification)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감독은 시적 주체와도 같은 방식으로 영화 언어들을 조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검토를 수행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감독 자신의 자전적 삶의 기록으로도 독해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뜻에서 이 연구의 의미작용에 대한 탐구는 텍스트 내부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형식적인 서술보다는 그 외부를 함께 둘러보는 맥락적 차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그의 실험극에 관해서는 국내에서도 다수 연구가 이뤄진 바 있다.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연구 성과를 참조할 수 있다. 김두영, 「까오싱지엔(高行健) 연극의 실험성」, 『한국연극학』 제16호, 한국연극학회, 2001; 양회석, 「高行健 實驗劇 初探: 三部作 「경보등」, 「버스정류장」, 「야인」을 중심으로」, 『중국인문과학』 제21호, 중국인문학회, 2000; 이정인, 「1980년대 실험극 연구」, 한국외대 박사학위논문, 2004; 양회석, 「1980년대 중국 실험극의 문화적 의의」, 『중국인문과학』 제36호, 중국인문학회, 2007; 한혜경, 「고행건(高行健)의 실험극 『절대신호(絶對信號)』에 관한 고찰」, 『중국어문논총』 제40호, 중국어문연구회, 2009 등.  2)관련 활동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페로니아(Feronia)문학상 수상(2000), 프랑스 명예기사훈장(Legion d’Honneur) 수여(2002), 프랑스 마르세이유(Marseille)시 ‘가오싱지안의 해’ 예술 행사 주최(2003), 미국 뉴욕공공도서관 곰사자상 수상(2006), 홍콩 중문대학, 프랑스 프로방스대학, 대만대학, 대만 중앙대학, 중산대학 등에서 명예박사학위 수여. 70여 차례 개인전 개최 등. 지난 2011년 5월 한국에도 처음으로 방문한 바 있으며, 이 때 대산문화재단 등이 주최한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2000년 이후 가오싱지안의 예술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문학이론가인 리우짜이푸(劉再復)가 정리한 「高行健近十年創作年表」를 참고할 수 있다.  3)<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프랑스어 원제는 ‘La Silhouette sinon l’ombre’이며 중국어 역제(譯題)는 ‘側影或影子’이다. 간혹 일부 자료에 영화의 역제를 ‘側影與影子(실루엣과 그림자)’로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가오싱지안 자신이 직접 쓴 해설(각주4 참고)에 근거하여 ‘실루엣 혹은 그림자’로 옮긴다. <혼돈 이후>의 원제는 프랑스어로 ‘APRES LE DELUGE’, 즉 ‘(노아의) 대홍수 이후’이지만, 중국어 역제는 ‘洪荒以後’여서 ‘DELUGE’와 ‘洪荒’이라는 두 어휘의 의미를 모두 감안하여 우리말로 ‘혼돈 이후’로 옮겼다. 중국어에서 ‘洪荒’은 혼돈하고 몽매한 상태로 태고 시대를 의미한다.  4)가오싱지안의 영화 촬영 시도와 그 실험성의 추구는 일찍이 중국 체류 시절부터 지속 돼 온 것이었다. 이는 가오싱지안 자신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를 찍고 싶었던 유래는 이미 오래됐다. 1980년대 초,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반문화적이었던 ‘문화대혁명’ 이후 연극과 영화 창작이 부흥을 맞이했다. 한 번은 영화계의 신세대 젊은 감독들이 영화창작토론회를 열었는데 나더러 와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를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모두들 영화자료관에서 이미 1960∼70년대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화들을 봤을 테니 이 기회를 빌려 참고삼아 미래 영화에 대한 내 구상을 말하겠노라 했다. 내 생각을 말하고 나자 모두들 그걸 1990년대 가오싱지안의 ‘삼원영화(三元電影)’라고 하자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얼마 뒤 나는 정말 첫 번째 시나리오인 <붉은 강낭콩>을 발표했다. 그건 평행으로 세 프레임을 촬영하는 쇼트가 나뉜 시나리오였다. 첫 번째 프레임은 쇼트의 화면이고, 두 번째 프레임은 여러 음향과 음악이고 세 번째 프레임은 언어였다. 나는 언어를 음향과 음악 속에서 구분해 냄으로써 영화의 독립 요소로 보았고, 그 때문에 대체로 화면과 소리라는 이원 구조와는 다른 영화를 생각했다. […] <붉은 강낭콩>은 중국에서 나의 첫 번째 시도였다. 한 영화감독과 함께 시도했으나 끝내 실 현되지 못했다. 그 뒤 독일의 어떤 영화 제작자의 요청을 받아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여러 차례 의논도 했으나 역시 촬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예 그것을 「우리 할아버지에게 낚싯대를 사 주세요(給我老爺買魚竿)」라는 단편소설로 썼다. 꿈과 실제 장면, 기억과 상상, 연상, 급기야는 텔레비전의 실황 중계까지도 모두 한데 교직돼 있었다. 세 번째 영화에 대한 계획은 파리에서 프랑스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찾아와 모든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겠다며 나더러 영화를 찍으라 한 것이었다. 이것이 「순간(瞬間)」이라는 소설이 나온 까닭이다. 나는 한데 이어진 화면과 이미지로 영화시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작자는 중국의 조미료와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이국의 정취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계획도 물거품이 됐기 때문에 소설로 쓰고 말았다.” 高行健, 「關於 ≪側影或影子≫」, 『聯合文學』 제24권 7호(283호), 臺北: 聯合文學, 2008.5, 19ㆍ21쪽.  5)Christian Metz, Essais sur la signification au cinéma, Klincksieck, 2003; 이수진 옮김,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1)』, 문학과지성사, 2011, 94∼95쪽.  6)이에 반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제스처 기호체계’를 따로 떼어 놓고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로 연구할 수도 있다. 추상적 가정을 내놓자면, 제스처 기호 체계가 인간이 사용하는 단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을 수 있다(예를 들어 귀머거리, 벙어리인 나폴리 사람들). 바로 그런 가정의 시각 기호체계에 근거하여 영화 언어는 자신의 실제 존재 가능성을 세우고, 일련의 자연스런 커뮤니케이션 원형들을 나열할 수 있다”고 말한다. Pier Paolo Pasolini, “Cinema de Poesia”; 이승수 옮김, 「시적 영화」, 『세계 영화이론과 비평의 새로운 발견』, 도서출판 가온, 2003, 129쪽.  7)김치수 외, 『현대 기호학의 발전』, 서울대 출판부, 1998, 404쪽.  8)박일우, 「영화기호학을 향한 일반기호학의 제언」, 『기호학연구』 제26집, 한국기호학회, 2009, 12∼17쪽.  9)Christian Metz, 이수진 옮김, 위의 책, 53쪽.

    2. 가오싱지안 영화 연구의 의미

    가오싱지안 영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서 그에 관한 지식과 담론이 한국 사회 내에서 어떤 방식과 태도, 입장 등을 가지고 생산, 유통되는지를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문 연구의 생산에 관한 논의를 수행하면서 연구주체와 연구방법, 연구대상의 문제에 있어 중국문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주체의 확대 필요성과 텍스트 분석을 넘어서는 창의적 연구방법론의 원용, 다양한 예술장르를 가로지르는 창작 실천을 수행하고 있는 가오싱지안에 대한 국내에서의 문제화, 유의미한 재맥락화를 위해서라면 그 “작가론은 적어도 전방위적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0)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오싱지안 영화에 대한 연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표층적으로는 무엇보다 연구 범위와 대상을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앞선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한국의 연구자들이 가오싱지안에 대하여 수행한 연구 범위와 대상은 대부분 그의 문학창작에 집중돼 있다. (극작에 대한 일부 연구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공연으로서의 연극에 대한 연구는 다소 적은 편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가오싱지안의 예술 창작과 비평 활동은 소설이나 평론에 그치지 않고 번역과 극작, 회화, 영화에 이르기까지 경계와 장르를 넘나드는 폭넓은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다. 즉 그는 소설가이기도 하면서 화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한 예술가로서 가오싱지안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욱 심화하려고 한다면, 그 연구 범위와 대상의 확대는 불가피한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심층적으로 볼 때 (비록 이 연구가 실천적으로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가오싱지안 영화 연구는 영화 자체에 대한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의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들간에 어떤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소설과 희곡 사이, 소설과 영화 사이, 소설과 회화 사이, 희곡과 영화 사이, 희곡과 회화 사이, 그리고 영화와 회화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오싱지안 예술 세계의 면모를 더욱 근사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의미이다. 셋째 의미는 상술한 두 가지 관점 혹은 의미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실 연구 대상과 연구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분열의 문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오싱지안은 일찍부터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장르를 섭렵했다. 극작과 소설, 평론, 회화, 영화 등을 포괄하는 그의 예술적 성취는 단지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는 형식적 특성만이 아니라, 작품 내부에서도 “뒤죽박죽 시간과 공간을 엉클어놓고, 경험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으며, “서사와 서정, 추억과 느낌의 구별도 없”이,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펼쳐내는 듯싶다가 느닷없이 객관적 사건을 서술하”는11) 예술가의 두 뇌와 손을 통해 펼쳐졌다. 그러나 연구 주체로서의 학자들은 언제나 그것들을 인위적인 장르들로 구분하면서 근대적 사유의 틀 속에 구속했다. 인간이 태어난 이래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행위는 줄곧 이어져 온 관습이었으나, 그런 관습은 근대에 이르러 제도화된 방식으로 정착하고, 세계의 모든 현상을 ‘분류’ 과정을 통해 설명하려는 편의적 시도가 계속돼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근대적 사유의 방식이 결코 세계의 현실을 더욱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실(the real)과 실존(the existence), 그리고 미디어(the media: 문학과 영화 등을 포괄하는)는 이미 “뒤죽박죽 엉클어진” 방식으로 존재(exist)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과 영화에 관한 논의에 있어 기존의 한국 학계에는 종종 두 장르 간 교차 현상을 일종의 유행으로 치부하거나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장르의 영향력 정도로 해석하려는 시도마저 없지 않았다. 그 내부에 다양한 문학장(文學場; literary champ) 또는 문화장(文化場; cultural champ) 내 다중 주체의 권력 관계가 뒤얽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문제는 이 연구가 취하고자 하는 의미작용에 관한 탐구가 단지 텍스트 내부의 기호적 관계들을 설명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외부의 맥락적 층위에서 독해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고 한, 바로 그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즉 감독의 실천을 따라잡지 못하는 독해와 설명을 초월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가오싱지안이 직접 우리에게 보여준 인간의 행위, 인간의 예술행위, 인간의 문화행위는 결코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제 근대 이후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사유가 만들어낸, 이른바 세계의 다원적 현상을 구별하는 태도를 버리고 오늘날 단순하지 않은 세계에 더욱 다가감으로써 “예술 간의 대화”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낡은 세계 인식을 단호히 거부하고 상호텍스트성(‘분류’에 대항하여)과 콘텍스트성(‘텍스트’에 대항하여), 그리고 절합(articulation: ‘단절’에 대항하여)의 가치와 태도를 지지하면서 가오싱지안의 영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의 영화가 분명하게도 문학과 회화, 그리고 영화 자체가 함께 협력하고 투쟁하고, 조화를 이루며 투쟁하는 모순과 갈등의 ‘장’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지금까지 서술한 세 가지 의미는 주로 ‘가오싱지안 연구’라는 이른바 작가론적 층위에서 살펴본 것들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우리는 그의 영화 연구를 통해 유럽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영화)의 실험성과 창조성에 대한 계승이 어떻게 오늘날 동양 출신의 작가에게서 성취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가오싱지안 영화의 제작에 함께 참여한 프랑스 영화인 알랭 멜카는 가오싱지안의 영화를 두고 “영국의 사진가 머이브리지(Muybridge)와도 같이 가오싱지안의 진정한 목적은 동작의 화면을 분할함으로써 화면의 매 상태들을 붙잡고자 한다”면서 그를 “동서양 문화를 넘나드는 전방위적 예술가로서 가오싱지안은 회화와 같은 미감을 드러내는데 힘을 쏟은 것 외에도 연극과 순서사의 공력을 이 영화에 녹여넣기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가오싱지안의 <실루엣 혹은 그림자>중에는 적나라한 창조자로서의 시인 멜빌(Mellville)이 시를 쓰는 백묘(白描)의 방식으로 자신의 문학과 회화 작품을 영상과 분절된 이미지, 음악으로 변화시킨다”고도 평가하기도 한다.12) 이런 논의들은 향후 가오싱지안의 예술과 유럽적 예술 전통의 상관성을 탐구하는 어떤 단초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살펴본 의미들은 이 연구에서 당장 실현되어야 할 어떤 단기적 계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향하는 바로서 가오싱지안이라는 한 예술가와 그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고자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인식의 전환이자 그에 대한 요청으로서의 주장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10)임대근, 「국내 중국 문학 관련 지식의 생산과 유통: 가오싱지안(高行健)의 경우」, 『중국문학』 제70집, 한국중국어문학회, 2012.2, 339-345쪽.  11)김용표, 「高行健 『영혼의 산』의 언어와 소리」, 『중국학연구』 제26호, 중국학연구회, 2003, 330쪽.  12)阿蘭ㆍ麥卡(Alain Melka), 繆詠華譯, 「高行健的電影」, 『聯合文學』 제24권 7호(283호), 臺北: 聯合文學, 2008.5, 27∼28쪽.

    3. <실루엣 혹은 그림자>와 <혼돈 이후>의 관계

    <실루엣 혹은 그림자>, 그리고 <혼돈 이후>. 두 영화의 제목은 비록 다르지만, 두 번째 영화인 <혼돈 이후>는 표면적으로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승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래 예시된 <그림 1>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영화 곳곳의 쇼트들이 사람의 옆모습 혹은 그림자를 상징하는 그림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면 <혼돈 이후>가 집중화, 단순화, 추상화, 이미지화(意象化)의 방식으로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가오싱지안의 두 번째 영화 <혼돈 이후>는 텍스트 내부에서 그의 전작의 제목인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두 영화 사이에는 ‘형식’(‘실루엣 혹은 그림자’라는 첫 번째 영화 텍스트 외부에 위치한 제목)과 ‘내용’(<혼돈 이후>라는 텍스트 내부의 형식)으로 이어지는 승계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실루엣 혹은 그림자>가 장편이었으므로 이를 승계한 <혼돈 이후>는 단편일 수밖에 없었고, 집중과 단순, 추상과 이미지라는 기호 배치의 전략으로 인해 전작보다는 짧아야만 했던 것이다.

    화면 구성의 순서를 보면 <실루엣 혹은 그림자>에는 가오싱지안의 자전적 특성이 드러난다. 바꾸어 말하면, <실루엣 혹은 그림자>는 기승전결 식의 아무런 서사성을 담고 있지 않은데, 이런 특성은 가오싱지안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을 구성한다. 즉 거기에는 일련의 행위들만이 기호로서 나열돼 있다. 그 행위들을 순서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것이 그 과정에 대한 정교한 서술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선형적(lineal)이라기보다는 마치 나선형(spiral)의 방식으로 혹은 전진과 역진의 방식으로 앞뒤의 쇼트와 신들이 번갈아가면서 결국 어떤 지점을 향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두 상황에 대해서는 부연이 필요하다. 우선 ‘여인을 회상함’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인데, 이 장면은 남자 아이의 시각으로 구성된다. 여인의 회상 장면은 특히 가오싱지안 자신이 기차를 타고 가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면서 그 사이에 대만의 어느 옛 건축을 둘러보는 자신의 모습, 연극 연습 등이 겹쳐진다. 특히 남자아이의 등장에 뒤이어 자신의 뒷모습을 동일한 위치에 두는(mis-en-scene) 쇼트의 교차 편집이 보이기도 한다(<그림 2>).

    특히 가오싱지안 자신이 달리는 기차 안에 앉아 있는 동안 교차 편집을 통해 등장하는 여인 회상 신은 흑백으로 처리된다. 카메라는 핸드헬드 서클링으로 숲속에 던져진 ‘혼돈’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잡는다. 그렇다면 이때 등장하는 여인은 남자 아이의 어머니일 개연성이 커진다. 그런데 남자 아이는 여성과 달리 백인이다. 뒤이어 가오싱지안 자신의 뒷모습과 남자 아이 쇼트가 교차된 뒤, 어느새 여인은 그림 앞에서 벌거벗은 뒷모습을 보이는 서양의 여인으로 뒤바뀌어 있다.

    한편 ‘언어적 혼란’이란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뒤섞인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는 프랑스어들이 뒤섞여 있다. 그 이후 ‘이방의 언어’로서 정상 속도의 프랑스어가 등장하고, 마지막 연극 연출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러운 프랑스어를 구사하게 된다. 즉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가오싱지안 자신이 중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상황, 심리적 공황 상태의 직면, 새로운 사람과의 조우, 새로운 예술의 창조, 언어적 혼란과 적응, 새로운 언어로 예술을 창조하는 자전적 삶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측면, 그러니까 여인에 대한 회상에 있어서 남자 아이와 자기 자신의 교차, 동양 여인과 백연 여성의 등장, 그리고 언어적 혼란의 문제를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는 가오싱지안의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문화 정체성’과 연관된, 자전적 영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사실로 증명된다. 첫째, 이 영화는 가오싱지안 자신이 주인공을 맡아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하게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내재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말하는 지표기호(index)와 도상기호(icon)적 성격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로서 재현 대상으로서의 현실(the real)과 재현된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히는 역할을 하게 된다.13) 둘째, 그 자신이 그리는 수묵화는 항상 여인 이미지와 중첩된다(<그림 3>). 여인과 더불어 수묵화에 언제나 등장하는 원형(圓形) 이미지는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이 때 가오싱지안의 영화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 속의 남자(즉 가오싱지안 본인)는 자신의 작업 공간 계단 위에서 드러눕고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 가게 되고, 뒤이어 괴로워하는 남자 아이, 회상의 여인이 다시 교차된다. 남자 아이와 여인의 형상이 교차되면서 보여질 때 그것은 관객에게 모종의 슬픔을 가져다준다. 괴로워하는 아이 뒤에 근심어린 표정의 여인이 등장하고 뒤이어 빨래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건물 쇼트가 등장하는데 그 건물 풍경은 마치 중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것이다. 따라서 곧이어 교회당의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클로즈업 쇼트가 이어지면 그것은 어머니를 향한, 곧 구원을 향한 열망을 의미하게 된다(<그림 4>).

    한편 <혼돈 이후>는 늘 “실험적 영화의 촬영 기법을 갖춘 영화로서 온 세계가 종말을 맞이할 때 인류가 갖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탐구한다. 28분의 짧은 시간 동안 배경음악도, 대사도 없이 단지 효과음만 삽입되어 인류의 정서를 표현한다”고 평가된다.14) <혼돈 이후>는 비록 자전적 영화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분위기와 쇼트를 보전하거나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때 우리는 <혼돈 이후>가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그림 5>).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혼돈 이후>가 표현하는 추상적인 동작은 마치 인간의 몸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추상화를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다시 배우의 현대 무용 동작이 겹쳐지는 쇼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곧 <실루엣 혹은 그림자>에서 가오싱지안이 그림을 그리는 쇼트들을 연상케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행위, 즉 예술 창작과 그것의 전시라는 행위를 통해서 가오싱지안의 영화들은 단순한 연관 관계를 넘어서는 계승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13)찰스 퍼스의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Charles Hartshorne & Paul Weiss eds.,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 Vol.Ⅱ,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Charles Sanders Peirce, 김성도 옮김, 『퍼스의 기호사상』, 민음사, 2006.  14)"拍撮手法有如實驗性電影, 探討全球在面臨末日來臨時, 人類對於生存的恐惧, 28分鐘的短片没有配樂、對白, 僅搭配音效方式, 來傳達人類的情緖表現。” 臺灣中央社報道, 2010.4.16: 보도에 따르면 2010년 4월 타이베이 아시아예술센터(亞洲藝術中心)에서 가오싱지안 회화전(“빛과 그림자”; “光與影”)과 ..연극론(論戱劇).. 출판전, <혼돈 이후> 상영전 등이 열린 바 있다. [http://www.arttime.com.tw/ArtNews/news_column_cont.aspx?ID=457] 최종 검색일 : 2012.4.2

    4. 의미작용: 시로서의 영화, 시적 영화

    영화는 시인가, 그렇지 않으면 소설인가? 그것은 매우 오래된 문제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비자각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서 영화는 당연히 ‘소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경향은 물론 상업 극영화의 영향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세계화 장막 아래에서 극영화 이외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하는 관객들이 길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두 영화, <실루엣 혹은 그림자>와 <혼돈 이후>를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순차적 사고의 수행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영화는 시인가 소설인가? 이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평론 「시적 영화(Cinema de Poesia)」를 거의 즉자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파졸리니 역시 영화감독이었으며 소설가였고 평론가였으며 시인으로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였다. 그의 글 「시적 영화」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영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그는 영화와 문학의 비교를 수행하면서 문학의 용어로 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을 취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주장에 근거해 본다면 우리는 가오싱지안의 영화가 특정한 기호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기호들의 연속인지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기호’라는 말을 ‘이미지’라는 말로도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파졸리니는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크리스티앙 메츠와는 그 주장을 달리 한다. 즉 이중 분절이 되지 않는 영화는 언어가 아님을 주장했던 메츠에 대해 파졸리니는 “영화는 쇼트와 영화소로 이중 분절이 가능한 언어”이며, “현실 속의 인간 행동이 인간의 첫 번째 언어이고 영화는 ‘현실에서 행동인 전체 자연어의 문어(文語)적 순간”17)이라고 주장했다. 파졸리니는 이어서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영화 역시 공통된 기호들의 자산 위에 근거한다는 말이다.”18)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시적 영화’는 ‘전-문법’적인 것이고 마치 꿈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영화 감독의 작업은 하나의 작업이 아니라 이중 작업이다. 1) 그는 혼돈 속에서 이미지 기호를 꺼내 그것을 마치 중요한 이미지 기호(제스처, 환경, 꿈, 기억)의 사전 속에 정리되어 있던 것인 양 가능하게 만들어 제시해야 한다. 2) 그 다음 글쓰기 작가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혹은 순전히 형태론적인 이미지 기호에 개인적인 표현 특성을 부가해야 한다.”19)

    가오싱지안은 시를 쓰고 있는가, 소설을 쓰고 있는가? 파졸리니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그의 영화는 일종의 (나는 ‘속한다’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오싱지안 영화의 독창성을 훼손하고 싶지는 않다.) ‘시적 언어’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문의 언어’인가?

    조금 더 과감한 방식으로 앞당겨 말해 보자. 앞서 예시(豫示)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가 시를 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시적 영화’가 된다. 오늘날 영화계에 강한 서사적 전통이 그 주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시적 영화의 전통은 그에 대한 어떤 성찰일 수 있다. 시적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충돌(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의 ‘몽타주’와 같은 쇼트와 쇼트의 충돌만이 아니라) 혹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숨겨진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마치 시를 쓰듯이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시 쓰기와 추상화 그리기, 영화 찍기는 모두 공통된 행위다. 창작 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면 자신의 언어와 의미를 특정한 기호 위에 숨기는 행위이며, 수용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면 일차적으로 그 숨겨진 언어와 의미를 찾아내려는 행위일 수 있다. 그 때 영화는 오락이 되며 유희가 된다. 그 때 두 주체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의미작용’(semiosis)이 발생한다.

    가오싱지안 자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한 알랭 멜카도 가오싱지안의 영화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시적 영화’의 구체적인 표현 방식은 어떤가? 파졸리니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자유 간접 화법’(free indirect speech)에 의존한다. ‘자유 간접 화법’은 본래 문법학과 문예학에서 사용되던 용어 가운데 하나였으나 파졸리니는 그것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시적영화’를 설명한다.

    ‘자유 간접 화법’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 간접 화법은 직접 화법 혹은 간접 화법과는 달리 고유한 언어학적 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문맥을 떠나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둘째, 자유 간접 화법은 고정적인 도입의 표지가 없어서 독자들은 곤혹스러울 수 있다. 셋째, 자유 간접 화법은 구문(syntax)에 속하지 않고 매우 다양한 서로 다른 텍스트 도처에 존재한다.23) 이 용어는 파졸리니의 글에서 ‘자유 간접 시점 쇼트(free indirect point of view shot)’로 바뀐다. 그는 문학에서의 자유 간접 화법과 내적 독백을 구분하고(내적 독백은 “작가에 의해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살아난 대화”로서 “적어도 관념상으로 그 등장인물의 재산, 나이, 사회적 상황을 드러”내며, “독백에 쓰인 인물의 언어는 작가의 언어와 동일할 수 있다”. 반면 자유 간접 화법은 “인용부호가 없는 진정한 진짜 직접 화법이고 그래서 등장인물의 언어사용을 보여주기 때문에 좀 더 자연주의적”이다.24)) 자유 간접 화법과 자유 간접 시점 쇼트의 다른 점들을 추적한 뒤 결론적으로 “자유 간접 시점 쇼트의 기본 특징은 언어학적인 것이 아니라 스타일적인 것이다. 그래서 아주 추상적인,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요소가 없는 내적 독백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25) 그것은 포커스 쇼트도 아니며 카메라의 포커스도 아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스타일이다. 자유 간접 시점 쇼트는 일종의 포커스 변화라고 말할 수 있는데, 동일한 쇼트에서의 포커스 변화는 매우 흥미로운 기법 혹은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희원은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분석하면서 안드레이의 시선을 통해 ‘자유 간접 시점 쇼트’를 설명한다. 그는 ‘오페라 공연 장면’의 분석을 통해 “이 장면에서 무대에 있는 안드레이를 바라보는 제인의 시선”이 “팽팽한 첼로 활을 가운데 두고 바라보고 있는 안드레이의 시선으로 인해 대상화된다”고 하면서 “정신착란 증산까지 보이는 안드레이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팽팽한 활줄을 응시하는 불안한 시선으로 효과적으로 전달되는데”, “이 때 안드레이의 시점 쇼트는 상당히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대상의 주관성과 심리 상황의 강조된 묘사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26)면서 이를 예의 파졸리니가 말하는 ‘자유 간접 시점 쇼트’라고 보았다. 우리는 <실루엣 혹은 그림자>에서도 이런 포커스의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가오싱지안 본인이 연기한 주인공이 창가에 기대어 파리의 거리 풍경을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거리에서 하늘 또는 벌거벗은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쇼트/신들은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 보자. 가오싱지안이 그의 영화에서 이와 같은 자유 간접 시점 쇼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가오싱지안이 이를 활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유 간접 시점 쇼트의 가장 큰 기능은 대상의 주관화일 것이다. 포커스의 혼돈을 통해 객관적 대상을 주관화함으로써 대상과 세계에 대한 판단을 작가 자신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가오싱지안은 시적 주관화를 의도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그것은 무엇보다 가오싱지안 자신이 처한 정체성의 혼돈 문제를 드러내는 스타일로 기능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영화의 자전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고향을 떠난 이방인이 가질 수 있는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한 심리 상태와 대상을 초점화하는 혼종적 방식을 통해 자기 정체성의 혼란스러운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가오싱지안이 어떤 형식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자신의 영화를 통째로 스타일화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순간순간 드러나는 스타일의 배치를 통해 이미지 기호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며, 그 이미지 기호들의 불연속적 절합 혹은 단절적 연속을 통해 특정한 의미 작용을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효과는 분명하다. 그는 시의 언어들이 마치 그러하듯이 일정한 기호들의 충돌을 지속적으로 시도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오히려 방해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들이 창출하는 의미들을 끊임없이 재고하게 한다. 그러므로 가오싱지안은 이미 시인의 자격으로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오싱지안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 간접 시점 쇼트 혹은 시적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의 의미 작용인 것이다. 가오싱지안 자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감독의 기대가 관객의 해석에 다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가 그는 결국, ‘실루엣 혹은 그림자’, ‘혼돈 이후’와 같은 영화 제목에서 이미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자신의 영화를 통해 혼종적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십분 드러내고 있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는 정면보다는 측면을 선택하고, 명시적 신체를 마다하고 실루엣을 전시하고, 실상(實像)을 거부하면서 허상(虛像; 그림자)를 그려내면서, 이런 모호한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의 고된 삶의 역정과 절합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의 영화에는 중국을 떠나 왔으되, 중국에서 나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고향과 운명에 대한 고뇌가 담겨있다. 그의 영화에는 중국성을 부정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과 프랑스인이 되었으면서도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표출되고 있다. 거기에는 프란츠 파농(Franz Fanon)28)이 말한 바와 같은 끊임없이 충돌하는 혼종적 정체성의 양태가 언어와 예술, 기억과 트라우마, 회상과 노스탤지어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15)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가오싱지안 본인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실루엣 혹은 그림자>는 오늘날 영화 양식으로는 분류할 수가 없다. 극영화도 아니며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전기(傳記)도 아니다. 영화시(電影詩)라기보다는 현 시대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高行健, 위의 글, 19쪽.  16)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28쪽.  17)이승수, 위의 글(해설), 127쪽.  18)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28쪽.  19)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30쪽.  20)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35쪽.  21)高行健, 위의 글, 21쪽.  22)阿蘭ㆍ麥.(Alain Melka), 繆詠華譯, 위의 글, 28쪽.  23)정지영, .자유 간접 화법 연구., 92∼93쪽; 전명수, .현대 불어 자유 간접 화법의 한국어 번역., 『아시아문화연구』 제8호, 경원대 아시아문화연구소, 2004, 213쪽 재인용.  24)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37∼138쪽.  25)Pier Paolo Pasolini, 이승수 옮김, 위의 글, 140쪽.  26)이희원, 「보편서사구조와 행위의 특수화: 영화 <시베리아의 이발사>의 인물구조를 통한 행위소 모델의 영상화 분석」, 『기호학연구』 제15집, 한국기호학회, 2004, 427쪽.  27)高行健, 위의 글, 22∼23쪽.  28)Franz Fanon, Peau Noire Masques Biancs;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인간사랑, 1998.

    5. 맺음말

    이 연구는 중국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지안의 영화 두 편을 통해 그 영화 세계가 구축하고 있는 의미망을 살펴보고자 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수행된 가오싱지안 관련 지식 생산과 담론 유통의 성찰을 앞서 제기한 바 있었기에 그에 관한 연구 범위와 대상을 확대하고, 그의 예술 창작 내부의 상호 텍스트성을 검토하며, 연구 대상과 연구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맥락성과 절합성을 지지하는 바탕 위에서 그 텍스트 내부의 기호 작용이 어떻게 바깥의 맥락과도 조우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당초에 그의 예술 행위가 분리 불가능한 통합적 실체임을 인정하고 출발했으나 오히려 이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설명은 순연돼야만 할 것 같다. 이 연구는 그의 영화가 생산하는 의미 작용이 어떤 방식으로 독해돼야 하는지에 관해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 이 연구는 우선 지금까지 가오싱지안이 연출한 영화들, 즉 <실루엣 혹은 그림자>와 <혼돈 이후>를 텍스트로 삼아 수행됐다. 그 결과 <실루엣 혹은 그림자>와 <혼돈 이후>는 비록 장편과 단편이며 이미지의 차용과 배열이 다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됐지만, 이미지의 배열, 내용적 배치, 분위기와 스타일, 쇼트의 활용, 혼종적 정체성의 표현 등과 같은 측면에서 <혼돈 이후>가 전작인 <실루엣 혹은 그림자>를 승계하고 있음을 밝혔다. 나아가 가오싱지안의 영화가 실험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성격, 즉 서사성을 배제하면서 이미지들을 비선형적 혹은 전진과 역진의 방식 등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그 의미작용의 성격은 시적 언어의 기호화와 매우 유사함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적극적으로 주장한 바, ‘시적 영화’에 관한 논의를 차용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시적 영화의 특성으로서 자유 간접 시점 쇼트는 가오싱지안 영화에서도 빈번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론적으로 그러한 형식적, 스타일적 특성들이 가오싱지안 영화의 심층적 의미 작용을 규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텍스트 내부의 그러한 형식과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조건들로서 그 외부의 맥락들을 이해해야 만 함을 알 수 있었다. 가오싱지안은 곧 모호한 이미지들의 배치를 통해 자신의 삶의 역정을 절합하면서 혼종적 자기 정체성을 문제화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해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동기로 연결될 수 있음도 언급하였다.

    이제 이후 가오싱지안은 여전히 노벨문학상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연구 대상과 범주로서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확립해 갈 것이다. 예술에 대한 그의 초장르적 접근 방식은 후속 영화의 창작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연구가 궁극적으로 성취하지는 못했을 뿐더러 단지 일정한 문제제기와 모종의 역할에 그치고 말았으나, 가오싱지안 예술을 독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더욱 정치(精緻)한 프레임이 설정 될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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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1>] <혼돈 이후>에 보이는 ‘실루엣 혹은 그림자’
    <혼돈 이후>에 보이는 ‘실루엣 혹은 그림자’
  • [<그림 2>]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여인 회상 시퀀스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여인 회상 시퀀스
  • [<그림 3>]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여인 이미지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여인 이미지
  • [<그림 4>] 구급차와 회상, 성모 마리아 시퀀스
    구급차와 회상, 성모 마리아 시퀀스
  • [<그림 5>] 사람과 그림의 합일 쇼트(<혼돈 이후>)와 그림 그리기 쇼트 (<실루엣 혹은 그림자>, 오른쪽)
    사람과 그림의 합일 쇼트(<혼돈 이후>)와 그림 그리기 쇼트 (<실루엣 혹은 그림자>, 오른쪽)
  • [<그림 6>]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자유 간접 시점 쇼트’ 사례(1)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자유 간접 시점 쇼트’ 사례(1)
  • [<그림 7>]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자유 간접 시점 쇼트’ 사례(2)
    <실루엣 혹은 그림자>의 ‘자유 간접 시점 쇼트’ 사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