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발생적 공간과 하이데거의 불안의 현시에 관한 연구*

An Research on the Genetic Space in the Films of Michelangelo Antonioni and the Presence of Anxiety in Heideg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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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find how Heidegger’s anxiety over the Antonioni film refer to the study of genetic space. Heidegger’s anxiety is not a psychological phenomenon, but the ontological experience that Dasein in the world meets nothing. The anxiety is related to the space. Antonioni film’s characters are always feel insecure, lonely and incommunicable. The reality is strange to them. The emotion premise the anxiety. The anxiety stems from the area in which they live. The relationship between anxiety and space issues associated with Heidegger’s anxiety and the Dasein in the world. Our research focuses on analyzing multi-layered meaning of the space in the Antonioni’s film.

    This paper examine two type of the space in his film : the empty space and the landscape. The former is relate on Die Unheimlichkeit : the Heidegger’s concept reveal in the film a sens of loss and the wanderer. The empty space is materialized by the wall, land, out-of-town, desert. The latter is relate on Die Stimmung : this concept is materialized by the light, the fog and the dust. Die Stimmung indicate the disappearance the reality it self in which Dasein live. In this disappearance, Dasein meets the Sein concealed. But, in the film of Antonioni, in the spite of the disappearance of the reality, the landscape leave the possibility of the revelation about Sein.

    The process of dynamic movement of space in the film show Heidegger’s anxiety, Unheimlichkeit, Stimmung. In the result, this paper would find out how material space show metaphysical anxiety through the genetic space. This is a study of a new perspective on the space’s image.

  • KEYWORD

    Heidegger , Antonioni , anxiety , nothing , space , landscape , Die Unheimlichkeit , Die Stimmung

  • 1. 서론

    본 연구는 모더니즘 영화감독들 중 가장 독창적으로 공간에 대해 사유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관해 하이데거적인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안토니오니의 영화적 공간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불안’(Die Angst)개념과 맞닿아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많은 서양의 철학자들이 예술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하이데거는 예술을 철학의 하위분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칸트, 들뢰즈 처럼 자신의 철학, 즉, 존재론의 한 가운데서 다루고 있는 철학자이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명한 반 고호의 신발회화에 관한 분석인데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예술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그 존재의 드러남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현존재의 ‘불안’1)을 주제로 삼는다.

    하이데거의 ‘불안’개념은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 내지는 정서적인 측면의 불안정성 혹은 상실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안’은 현존재의 무(없음)와의 맞닥뜨림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불안’은 현존재가 거주하는 세계 내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짐에 대해 느끼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불안은 바로 ‘죽음을 향해 있는 현존재’의 ‘없음(무)’에 대한 부딪힘이기도 하다. 그 ‘없음’은 ‘있음(현존재의 일상의 세계)’의 ‘없음’일 뿐만 아니라, 비 본래적인 현존재2)가 본래적인 존재양식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는 점에서 ‘있음’의 영역이기도 하다. 현존재는 ‘없음’ 즉, ‘무’와 대면하면서 ‘있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편, 안토니오니 영화를 떠올리면 그의 유명한 초기 삼부작인 <모험>, <밤>, <일식>뿐 만 아니라, <붉은 사막>에서 인물들이 공간을 헤매는 불안의 정서를 상기할 수 있다.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항상 소통의 불가능성, 소외, 무관심 속에서 불안의 정서에 휩싸여 있다. 이 불안함은 그의 일부의 영화에만 나타나는 일회적인 성격이 아니라, 그의 전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안은 단지 정서적인 불안정함이나,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 불안이 심리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면, 어디서 유래하는가. 인물들의 ‘불안’은 항상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 혹은 임시로 머물거나 거쳐 가는 공간 안에서 발생한다. 공간 안에서의 인물의 불편함과 불안감은 인물과 공간과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며, ‘불안’이라는 문제가 심리적인 현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과 관계된 존재론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그 이유는 인물들이 자신 혹은 타자, 세계와의 관계가 문제시 될 때, 그들이 속해 있는 공간과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며, 인물이 겪는 자아, 타자, 세계와의 관계의 문제는 바로 존재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니 영화의 ‘불안’과 ‘공간 내의 인간’이라는 두개념은 바로 하이데거가 오래도록 다뤄왔던 ‘불안’, ‘세계-내-존재’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안토니오니의 영화가 하이데거의 철학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안토니오니 영화의 공간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불안’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가 하이데거의 이론들을 영화이미지에 적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하이데거의 주요개념(불안, 무, 섬뜩함, 기분등)들을 중심으로 공간 이미지를 분석할 것이다.3) 따라서 본 논문은 안토니오니의 ‘불안’에 관한 존재론적인 문제가 공간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그 공간에 대한 사유과정들이 어떻게 하이데거의 ‘세계-내-현존재’의 ‘불안’을 현시하는가를 다룰 것이다. 이 문제는 안토니오니영화에서 공간에 관한 다양한 층위의 사유 과정에 관한 분석을 전제로 한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공간의 다양한 움직임의 과정’들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둘 것이며, 이를 통해 하이데거의 ‘불안’이 어떻게 현시되고 있는가를 드러낼 것이다.

    1)“불안은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서, 불안 속에서 개시된 현존재 자체와 하나가 되어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 전체성을 명시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현상적 기반을 부여한다.”, “불안은 현존재를 ‘가능존재로서’ 개시하는 것이며, 더구나 이 가능존재는 단독 화된 것으로서 현존재가 전적으로 자기편으로부터 단독화일 수 있는 그러한 가능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면서, ‘불안’은 현존재의 본래성이 드러날 수 있는 기반이자 개시의 장소로 정의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동서 문화사, 2008, p.250, p.257.  2)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모습은 비 본래적인데 ‘없음’을 경험하게 되면서 본래적인 현존재의 모습을 찾아간다고 설명한다.  3)모든 이론들이 그러하듯, 철학적인 이론들은 추상적인 개념과 그를 토대로 한 논증과 체계적인 이론들로 구성된다. 반면 본 논문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안토니오니 영화의 공간들은 인물들이 처한 하이데거적인 불안의 상황들을 다양하고 구체적인 공간이 미지들로 표현한다. 이 공간의 다양한 움직임들은 이론처럼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일관 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즉, 이미지가 담론 화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하이데거의 이론 들을 영화이미지 분석에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그 개념들이 안토니오니 영화 공간의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미지들로 어떻게 사유되는 가에 초점을 맞춘다.

    2. 불안(Die Angst)의 생성 : 사라짐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거기(da), 즉, 세계 속에 있는 존재로 정의된다. 현존재는 세계와 ‘거주4)’의 관계에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라는 이 공간을 칸트의 선험적인 공간처럼 물질적이고 인간에 독립해서 선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존재자들이 그 안에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발생적 공간’으로 정의한다. 이 ‘발생적’이란 공간이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 사물들을 통해서 산출, 생산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그리스 용어인 토포스(topos)의 의미이다. 토포스는 이야기가 생겨나는 공간이 라는 의미로 ‘현존재가 세계-내에 있음’이라는 ‘사건’(인간이 일상세계에서 삶을 영위함)이 발생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의 공간을 하이데거는 ‘장소’로 정의하면서 이 다양한 장소에 의해 공간이 형성된다고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가 거주함으로써 경계를 갖는 이질적인 장소에 의해, 수학적인 혹은 물리학적인 3차원적인 공간이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들 간의 ‘상호적인 관계성’이 강조 되는 것이다.5) ‘사건’의 발생으로서의 공간과 공간상호성은 우리가 분석하려는 안토니오니 영화의 ‘공간6)들 간의 움직임의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면, 우선‘사건’의 발생으로서의 공간에 관해 다뤄보도록 하자. 이 ‘사건’이란 바로 ‘불안’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불안’은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존재의 무와의 대면에서, 즉, 현존재를 둘러싼 환경세계의 없어짐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인물들은 어떻게 ‘불안’을 만나게 되는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는 주인공과 관련된 인물들이 그들의 익숙한 공간에서 사라지면서 발생한다. <외침>(Il grido, 1957)에서는 함께 오랜 시간을 같이한 아내가 전남편의 죽음을 접한 후, 새로운 남자가 있음을 고백하고 남편을 떠난다. <모험>7)(L’Avventura, 1960)에서는 여 주인공의 친구가 섬에서 실종되고, 그녀의 실종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밤>(La notte, 1961)에서는 여주인공의 친구가 암으로 죽어가며 그녀를 떠나간다. <일식>(L’eclisse, 1962)은 여주인공이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선언하며 그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확대>(Blow up, 1966)에서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공원에서 데이트중인 커플을 우연히 사진 찍고 확대하던 중, 그 남자가 살해당한 것을 목격한다. <직업: 리포터>(Professione : Reporter, 1975)에서 주인공은 호텔 옆방에 있던 사람이 죽자 그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새 삶을 살아가고 주변인들은 그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여인의 정체성>(Identificazione di una donna, 1982)은 감독인 주인공이 사라진 연인(주인공의 감독이 준비하는 영화의 모델 혹은 연인)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주인공은 가까운 이의 떠남, 이별, 죽음 등 ‘사라짐’이란 사건을 겪으면서 시작한다. <외침>의 주인공은 아내가 떠난 후 그의 정든 집이 낯선 곳으로 변하자, 딸을 데리고 정처 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모험>의 여주인공은 사라진 친구덕분에 그의 애인과 사랑하게 되지만, 실종된 친구는 그녀에게 망령처럼 따라다닌다. <밤>의 여주인공은 친구의 죽음으로 남편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고 이미 식어버린 사랑 앞에서 방황하고 절망한다. <일식>의 여주인공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 하지만 서로 다름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모두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는 무관한 인물들이 주인공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공간을 채운다. <확대>에서 주인공은 사진을 확대하지만 확대된 사진은 친구가 그린 그림처럼 추상화로 변해 버리고 증거인 시체는 사라진다. 현실의 한 부분을 확대 할 수록 오히려 현실은 파편화되어 사라진다. 이 사라진 현실은 서사의 균열, 인물의 생각의 균열을 야기한다. <직업: 리포터>에서는 주인공이 왜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서 살아야하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자유를 추구하려는 그의 심정이 막연하게 표현될 뿐이다. 한편, 그의 아내는 죽은 남편의 여권사진이 남편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사라진 남편을 뒤쫓고, 주인공은 죽은 이와 연루된 무기 밀매 상들과 아내로부터 쫓겨 다니게 된다. <여인의 정체성>에서는 사라진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이 그녀와 유사한 여성을 만나고 그 여성이 또사라짐으로 인해 겪게 되는 부재를 다룬다. 이렇게 주인공의 아내, 친구, 시체 등은 그들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사라지지만, 그 사라짐의 이유는 서사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사라짐은 주인공들에게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외침>의 정처 없이 떠도는 알도, <모험>의 참된 사랑을 갈구하는 끌로디아, <밤>의 식어버린 사랑에 아파하는 리디아, <일식>의 사라진 비토리아와 피에로, <확대>의 진실을 찾는 토마스, <직업: 리포터>의 무한한 자유를 갈망하지만 감옥 같은 현실을 경험하는 로크, <여인의 정체성>의 이상을 쫒는 니꼴로, 이 모두에게 사라짐은 불안의 정서를 야기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에게 ‘불안’이란, 명백하게 보였던 자신을 둘러싼 환경세계가 무너져버려 완전히 부재한 가운데, 그 세계에 집착했던 일상의 모든 가치들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일상적 세계의 무의미성을 ‘무’8)라고 부른다. ‘무’는 ‘존재하는 것 일체에 대한 부정’이며, ‘무’는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가 만나는 낯선 세계는 ‘불안’을 야기하고 ‘무’를 대면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불안’을 경험한다. 우선, 인물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혹은 알고 있던 사람이 사라지거나, 익숙한 환경이 사라짐으로 인해 그들에게 익숙한 세계는 낯선 세계로 변화한다. 익숙해져 있던 이 모든 것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주로 사랑, 믿음, 일상으로 표현된다. 부부, 연인간의 익숙한 사랑(<외침>, <모험>, <밤>, <일식>), 가시적인 현실에 대한 믿음 (<확대>), 구속 같은 일상(<직업: 리포터>)등이다. 사랑, 믿음, 일상의 익숙한 세계는 ‘사라짐’이라는 사건을 통해 낯선 세계로 변화하는데, 이 세계들은 영화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 <외침>의 알도가 헤매는 낯선 시골, <모험>의 끌로디아가 접하는 상류층 세계, <밤>의 리디아가 헤매는 로마의 외곽 혹은 낯선 상류층 파티, <일식>의 연인의 일터인 증권가 혹은 그의 집, <확대>의 사진으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 <직업: 리포터>의 로크의 도피처들, <여인의 정체성>의 여러 낯선 도시들. 이 낯선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홀로 이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제까지 익숙해져 있던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이렇게 익숙한 것들에 대해 ‘무’를 경험하는 주인공들은 낯선 세계를 ‘방황’하게 되고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하이데거는 ‘불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안에는∼로 부터 물러서 피한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물러서 피함은 무에서 시작된다.”9) ‘무’, ‘방황’, ‘불안’은 함께 공존하는 것이며, 방황은 불안에서 시작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 때문에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항상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이 방황은 인물들의 공간상에서의 ‘헤맴’10)으로 나타나며, 이 헤맴은 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보인다. : 사랑 (<외침>, <정사>, <밤>, <일식>, <붉은 사막>, <여인의 정체성>), 진실(<확대>), 자유(<직업: 리포터>)

    이렇게 ‘불안’은‘사라짐’, ‘낯섦’, ‘무’, ‘홀로 던져져 있음(현존재의 실존)’, ‘헤맴’등으로 다양한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과정들은 영화에서 시간적인 순서대로 혹은 논리적인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과는 달리, 안토니오니는 인물들의 내면적인 변화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 과정들은 인물의 내면에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안토니오니는 이러한 공존의 상태를 공간의 다양한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특히 빈 공간과 풍경(자연 현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이데거의 추상적인 개념(불안, 무등)들은 이렇게 다층적인 공간의 이미지들로 나타난다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안’과 관련된 ‘사라짐’, ‘낯섦’, ‘무’, ‘홀로 던져져 있음(현존재의 실존)’, ‘헤맴’은 다양한 빈 공간과 풍경이라는 공간이미지를 통해 ‘사유’된다. 이 공간의 이미지는 바로 영화적인 이미지가 하이데거의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화이미지의 ‘사유성’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영화이미지가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지의 ‘형상성’(figural)을 의미한다. ‘형상성’11)이란 이미 1990년대부터 프랑스의 영화학 연구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방법론으로 영화이미지를 구성주의적이고 의미 환원적인 담론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주요한 방법론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이미지의 본질은 사유성에 있는데 이미지가 사유한다는 것은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즉, 현실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서사와 다르게 작용하여 현전하는 어떤 것(존재, 현실, 생각 등)의 작용과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미지의 ‘형상성’이란 이미지가 사유과정과 그 작용등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영화 이미지는 이 사유의 ‘나타남’에 관심을 갖는 것이며 이 나타남은 이미지들 간의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빈 공간과 풍경이란 공간들이 앞서 언급했던 ‘불안’의 다양한 사유의 과정들을 어떻게 나타내는가가 문제시 된다. 지금까지는 인물들이 ‘불안’에 이르는 과정을 서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지금부터는 앞서 언급했던 빈 공간과 풍경을 중심으로 ‘불안’이 사유되는 과정을 분석하기로 한다.

    4)Martn Heidegger, Essais et conférence, Paris, Gallimard, 1986, p.188.  5)서도식, 「존재의 토폴로지 : M. 하이데거의 공간이론」, 『시대와 철학』, 제 21권, 4호, 2010, p.233-237.  6)하이데거는 ‘장소’와 ‘공간’을 구별하여 정의했지만, 본 논문에서 안토니오니 영화를 분석할 때 이러한 구별을 따르지는 않는다. ‘공간’이라는 통일된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7)<모험>과 <일식>, <직업: 리포터> 은 한국에서 각각 <정사>, <태양은 외로워>, <여행자>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된 제목들은 이태리어 제목과는 전혀 그 의미가 무관한 제목들이다. 한국에서 많은 외국영화들의 제목이 오역인 채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영화학자로서 볼 때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종래의 관습을 따라야한다는 이유에서 오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연구자로서 내세울 합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원제를 번역한 제목으로 사용한다.  8)“무는 존재하는 것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다.(...) 존재하는 것 일체는 그 자체가 부정될수 있기 위해서, 그리하여 이 부정 속에서 비로소 무 자체가 스스로를 알려올 수 있기 위해서, 우선 먼저 주어져야 한다.” (75) 존재하는 것 일체는 현존재가 속한 세계이며이 세계는 이미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하이데거는 이 ‘무’와 ‘불안’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안이 무를 드러낸다.(...) 무는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존재자로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상으로서 주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안은 결코 무의 파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는 불안을 통하여 불안 속에서 드러난다.”(85), M.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1994, p.75, p.85.  9)M. 하이데거, 위의 책, p.87.  10)“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그 실존이 위협받을 때만 존재한다.” Alain Bonfand, Le cinéma de Michelangelo Antonioni, Paris, Images modernes, 2003, p.109. 즉, 안토니오니의 인물 들은 실존 그 자체가 위협인 것이다.  11)‘형상성’(figural)에 대한 논의는 이미 이정하교수의 논문인 <구조주의 이후의 새로운 영화분석 방법론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영상예술 연구』, 2010년, Vol. 16. p. 97-121. ‘형상성’ 개념의 시작은 아우에르바허(Auerbach)의 Figura저서의 프랑스 번역판 출간 (1994년)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이미지를 사유로 파악하는 시각은 장-루이 쉐퍼(Jean Louis Schefer)로부터 시작하여 들뢰즈(Gilles Deleuze)를 거쳐 미술사가인 조르쥬 디디-위베르망(Georges Didi-Huberman),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등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형상성’을 미술사가인 디디-위메르망은 ‘다른 이미지들 간의 관계의‘움직임’(자기 운동성)으로, 철학자인 들뢰즈는 ‘힘(감각, 욕망, 현상의 힘)의 흔적’으로, 영화학자인 자크 오몽(Jacques Aumont)은‘정신과정의 나타남’으로 해석하는 등 학자들 간의 형상성 개념은 상이하다. 그러나 이미지(영화이미지까지 포함하여)를 담론이 아닌, 사유의 과정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영화연구자로는 자크 오몽, 필립 뒤부아(Philippe Dubois), 니꼴 브러네(Nicole Brenez), 뤽 방쉐리(Luc Vancheri)등을 통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방향의 다양성으로 인해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되지 못하는 것이 한계이다. 오몽은 그의 저서의 번역판의 부록 인터뷰에서, 형상 론이 이론화되지 못하는 한계를 기존의 영화이론들이 언어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달리, 형상론은 시각성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시각성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크 오몽, 영화 『영화와 모더니티』, 열화당, 2010년, 부록을 참조.

    3. 섬뜩함 (Unheimlichkeit) : 빈 공간

    영화에서 공간은 서사적인 의미를 갖는데, 공간의 서사성이란 인물 들의 사건과 상황이 발생하는 공간에 한정된 경우를 의미한다. 그러나 안토니오니 영화에 나타나는 공간은 주로 비 서사적인 공간으로 서사 구조의 균열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감각-운동도식의 균열을 일으켜, 인물의 반응이 멈춘, 우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하는 ‘탈 접속된 임의의 공간’, ‘방기된 공간’12)으로 변화한다. 주인공이 사라지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빈 공간의 문제는 많은 논문에서 다뤄져 왔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와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에서 빈 공간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즈의 영화 속 빈 공간은 대개 정물화 혹은 화분 같은 대상들로 채워지는 공간으로, 인물이 부재함을 통해 인물의 일상과 자연 혹은 사건과 사건의 부재를 대비시킨다. 이 대비는 영화의 리듬에 휴지기를 주기도 하고, 관조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브레송 영화의 빈 공간은 후기영화로 갈수록 한 프레임 안에서 사건의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을 대비시켜, 영화의 서사와 비서사간의 경계를 강조하면서 비 서사적인 빈 공간 안에서 존재와의 만남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13)를 보여 준다.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빈 공간 역시 오즈나 브레송 영화의 빈공간의 쓰임새처럼 일회적인 혹은 간헐적인 출현에 머물지 않고, 영화전반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출현한다. 인물과 함께 혹은 인물의 부재 하에 빈공간이라는 이미지는 인물을 따라다니는 망령처럼, 영화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 비어있는 공간은 공원, 넓은 공터, 공장부지, 도시의 외곽, 사막 등으로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며 인물이 헤매고 방황하는 장소들이다. 그런데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이 빈 공간들은 공간 내에 인물이나 사건이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간의 관계의 부재, 인물 자신의 공허함(존재의 비어있음)을 의미한다. 즉, 빈 공간은 관계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이란 실존적인 문제를 보여 준다. 또한 관계의 상실은 주로 사랑의 상실로(<외침>, <모험>, <밤>, <일식>, <붉은 사막>), 자아 상실은 믿음(<확대>), 혹은 자유(<직업: 리포터)의 상실이란 구체적인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관계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는 것이며, 단지 영화에 따라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이 상실감은 탈 프레임 혹은 빈공간의 다양한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파스칼 보니체는 그의 저서 『탈 프레임』에서 안토니오니의 프레임의 성격에 대해 “안토니오니영화에서 비어있음은 현재성의 망령처럼 지속된다.”14)라고 표현한다. 이 빈공간은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마주하게 되는 비 본래적인 일상의 무너짐이고 무의미함이다. 이러한 상실감은 관계(인간들간의 혹은 인간과 세상과의)의 불확실성 즉, 인물들 간의 관계에 혹은 세상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비어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이데거는 ‘불안’에는 ‘∼로부터 피하려는 현상’이 동반된다고 하지만,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에겐 불확실성이 더 추가된다. 이로 인해 인물들은 낯선 공간을 헤매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를 ‘거주’로 정의했었다. 이 ‘거주’는 인간과 세계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의미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세계-내-존재-로 하이픈으로 연결된다. 한마디로 ‘거주’란 현존재의 공간화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가 되지 못할 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섬뜩함(Unheimlichkeit)15)을 느끼게 된다. 낯선 세계에 대해 느끼는 이 섬뜩함은 일상(사랑, 믿음 등)의 무의미함과 상실(‘무‘로 표현된), ‘헤맴’으로 나타난다. 상실과 헤맴은 인물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빈 공간 즉, 대지, 벽, 도시외곽, 공원, 공장부지, 사막 등은 앞서 언급했던 상실감 외에 ‘헤맴’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된다.

    빈 공간 즉,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이 ‘거주’하지 못하는 낯선 공간은 상실의 공간이다. 인물들은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며 낯선 세계를 경험 하지만 그 경험이 그들의 상실감을 채워주진 못한다. <외침>은 인물의 주거지가 더 이상 ‘거주’의 공간이 되지 않을 때 닥치는 ‘거주’의 위기를 다룬다. 황폐화된 겨울의 시골길과 들판은 영화초반부에는 갈등을 겪는 인물들의 후경에 위치하여 프레임상의 배경으로서 작용한다. 단지 안개 자욱한 시골 거리들만이 오리무중인 아내의 심리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인 알도의 관계를 나타낸다. 알도가 어린 딸과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나 여러 도시를 방황할 때, 이 안개 낀 거리는 황량한 시골들판의 지평선으로 대체된다. 알도가 잠시 머무는 모든 곳들은 겨울의 들판, 빈 도로, 언덕 등으로 잿빛 하늘아래 앙상한 나무들만 보이는 겨울의 대지이다. 알도가 어떤 곳에 머물며 어떤 여성과 사랑을 하던지 간에 그의 후면에는 이 대지들이 프레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그를 감싸고 있다. 하늘과의 경계가 모호한 이 지평선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갇혀있는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어떤 여성과도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대지에 정착하지 못한다. 영화전반을 통해 나타나는 이 얼어붙은 겨울의 대지는 그를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이뤄질 수 없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알도가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는 이 황량하고 텅 빈 겨울 대지는 거주가 아니라 방황하는 장소이며, 이는 거주의 위기임과 동시에 사랑의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황폐화 된 낯선 빈 공간은 사랑을 상실한 알도의 비어있는 내면을 형상화한다.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에게 사랑의 상실은 단지 사랑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자아의 상실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 때문에 알도의 빈 공간은 끝까지 ‘낯선’공간으로 남는다. 이 낯설음은 불안의 끝인 그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불안의 궁극적인 대상이 죽음이라고 본 것 처럼, 끝나지 않는 불안은 본래의 자기를 되찾게 하기 보다는 죽음과 마주하게 한다. <외침>의 삭막한 겨울 대지는 <모험>의 폐허가 된 거대한 벽으로 대치된다. <모험>의 마지막 장면에서 끌로디아는 연인인 상드로의 배반행위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호텔을 뛰쳐나오다 폐허가 된 성곽에 다다른다. 황폐한 성곽만큼이나 황폐해진 끌로디아는 오열한다. 황폐한 그 벽을 마주하고 있는 언덕길에 홀로 서 있는 끌로디아 뒤로 상드로가 천천히 다가와 옆 벤치에 앉는다. 그들의 심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던 끌로디아는 상드로 뒤로 다가와 주저하며 오열하고 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롱 쇼트로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은 화면의 절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벽과 대비되어 그들의 왜소함을 강조한다. 끌로디아는 사라진 친구의 망령 속에서 출구 없는 사랑을 하던 중 자신을 배신한 상드로에 대해 배반감과 상실감을 느끼지만 그녀로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회색 벽의 출현은 그들의 사랑이 출구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프레임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벽과 그 옆으로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은 사랑, 욕망, 배반이라는 인간의 감정들이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는 너무나 왜소한 것임을 나타낸다. 자연의 거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기능하는 자연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회색 벽과 자연은 배경으로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서사와 대사를 대체하면서 빈 공간이 인물의 내면의 과정을 형상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낯선 빈 공간은 <외침>의 알도처럼 사랑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을 드러낸다. <모험>의 벽과 자연은 <밤>에선 도시의 고층건물의 차갑고 텅 빈 건물 벽으로 나타난다. 친구의 예고된 죽음과 남편의 부정으로 그의 사랑을 의심을 하는 리디아가 죽어가는 친구의 병실을 떠나 차갑고 삭막한 도시를 헤맬 때, 그녀는 주로 프레임을 가득채운 거대한 고층빌딩의 콘크리트 벽의 주변에 머문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이 탈 프레임은 인물이 주위환경으로부터 소외되고, 관계가 단절된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정착할 수 없어 헤매는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텅 빈건물 벽은 영화후반부의 파티장면에서 리디아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는 장면들로 대체된다. 그녀는 항상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공간에 있으면서 남편의 행동들을 관찰하고 그 행동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려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디아는 남편의 옛 편지를 읽으며 그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프레임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두 그루의 나무이다. 우거진 나뭇가지 아래 오른쪽 후면으로 사랑을 나누는 리디아와 남편이 보인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은 <모험>의 마지막 장면의 자연처럼 의미없는 불안한 몸짓일 뿐이다. <직업: 리포터>는 사랑의 상실이 아닌 자아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취재차 아프리카를 방문한 로크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한 가운데서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호텔 옆방에 묵던 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새 삶을 살고자 한다. 다큐멘터리 작가인 그는 현실을 취재하기를 포기하고 현실을 떠나 무한한 자유가 보장된 새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그는 사회가 인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대신 무기밀매상이란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또한 그녀의 아내는 그의 죽음을 의심하여 그를 뒤쫓고, 무기 밀매상들도 그를 뒤쫓는다. 도피처를 찾던 로크는 마치 사막과도 같은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묵는다. 8분간 지속되는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침대에 누워 있는 로크와 그 옆 창밖을 보여주다 천천히 창살로 다가간다. 카메라는 창살을 통해 무기 밀매상들이 도착하고 한 사람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리고 나서 다시 그 차가 프레임을 빠져 나간다. 카메라가 창살 밖으로 나가면 아내를 태운 경찰차가 도착하고 카메라가 사막 같은 공간을 오른쪽으로 천천히 트래 블링 하여 다시 호텔 창살로 다가가서 침대에 죽어있는 로크를 보여 준다. 이제까지 살아온 현실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원했던 로크는 고의적으로 신분을 상실하지만 또 다른 신분(무기밀매상)이 그를 죄어 온다. 또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아내는 그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로크는 취재차 방문한 아프리카 사막에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상실하지만, 다시 사막과도 같은 시골마을에서 타인에 의해 자신을 상실한다. 사막이란 공간은 앞서의 안토니오니 영화의 자연(대지, 벽, 도시외곽, 공원)들처럼 배경으로서 있기 보다는, 인물의 상실감과 헤맴을 형상화한다. 현존재를 둘러싼 하이데거의 세계처럼, 로크의 사막은 애초에 직업상 헤매는(취재) 공간이었고 거주의 공간이 아니었다. 영국 도심의 거주공간을 떠나 정착하고자 했던 공간은 쫒기면서 우연히 다시 사막으로 되돌아온다. 익숙한 현실을 떠나고자 했지만 다시 낯선 현실로 돌아온 그는 마치 <외침>의 알도처럼 헤맴의 끝인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외침>, <모험>, <밤>, <직업: 리포터>의 빈 공간(대지, 벽, 사막등)들은 인물들이 섬뜩함’을 느끼며 끝없이 헤매면서 결코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없기에 불안에 시달리는 ‘상실’과 ‘헤맴’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섬뜩함’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형태는 <일식>의 공간이다. <일식>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토리아와 피에로는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지만 그 약속장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이 방문했던 비어있는 공간만이 그들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잔디밭에 내뿜는 분수, 쌓인 공사판의 벽돌들, 공사 중인 건물, 그들이 걷던 텅빈 거리, 도로바닥, 물 고인 양철통 위를 떠다니는 쓰레기 등. 이어서 이 공간에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무관한, 영화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들(엑스트라, 혹은 서사와 무관한 일상인들)과 사물들이 나타난다. 주인공들이 사라진 공간, 비어있는 공간에 서사와는 무관한 새로운 ‘일상의 공간’이 생겨난다. 주인공들의 흔적만이 남아 있는 이 비어있는 공간은 절대적인 ‘무’로 남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있음’으로 채워지고 있는 공간이다 : 익명의 인물들, 그들의 움직임 (퇴근), 도심외곽의 콘크리트의 아파트들, 화면을 가득 채우고 분사되는 분수, 물방울 맺힌 꽃등. 그 ‘있음’은 앞서 사라진 서사의 주인공들과 다른 이질적인 인물들과 사물들이다. 서사 속 주인공의 부재와 서사와 무관한 인물들의 출현(즉, 일상의 현존)은 주인공들이 데이트를 하던 공간을 이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이질적인 공간은 시간의 경과라는 계기적인 시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공간은 비 서사적이고 비 재현적이라는 면에서 이질적인 공간이며, 인물들이 살던 허구적인 공간이 일상의 사실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공간이다. 영화는 앞서 비토리아와 피에로의 각자의 다른 삶의 방식을 공간을 통해 보여주었다. 비토리아는 번역 일을 하며 도심외곽의 한적하고 삭막하기 까지 한 아파트에 거주한다. 그러나 피에로는 항상 인파가 붐비는 증권사에 근무하며 익명의 사람들을 상대하고, 이웃을 볼 수 있는 도심 아파트에 거주한다. 그들의 거주방식의 차이는 곧 그들의 삶의 방식의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관계에 늘 회의를 갖는다. 이 회의는 그들의 일상이 낯설게 다가 오는 순간을 통해 암시된다. 비토리아가 떠난 사무실에 혼자 남은 피에로는 내려놓았던 수화기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미소를 띠며 바람에 날리는 흰 커텐 앞에 서 있던 그에게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려온다.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진다. 제자리에 앉은 그는 내려져 있던 수화기를 올려놓은 후, 크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다. 익숙한 그의 환경(숨 실틈 없이 움직이는 증권가)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어서 계단의 난간에 놓인 여주인공 비토리아의 클로즈업된 굳은 얼굴이 나타난다. 멀리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건물철망에 기대어 커다란 나무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이어 앞서 분석했던 일상의 장면들이 나타난다. 피에로의 설명할 수 없는, 이 낯선 순간들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그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며, 이 낯설음은 일상과 자신과의 균열이며 구체적으로 나와 타자와의 균열이다. 바로 이 균열로 인해 피에로와 비토리아는 테이트했던 약속장소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회의와 관계의 불가능성은 앞서의 영화들처럼, 도피, 방황, 주저함, 권태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이 양상들의 주체인 인물들의 사라짐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 이 공간은 인물들이 일상으로 부터 도피한 후 나타난 세계이며, 영화의 허구적인 세계에서 실제적인 세계에로의 존재론적인 변형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섬뜩함’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현존재가 ‘불안’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무의미하고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본질적인 삶을 찾게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존재’는 존재자인 현존재에게 ‘개시’되는 세계이다. 이 ‘존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자.

    하이데거에 있어 ‘없음’과 마주한 이 ‘불안’의 세계는, 현존재가 비존재에서 본래의 자기를 회복하는 존재로 이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전통 형이상학과 달리, 고대 희랍어인 ‘아레테이아(a-letheia)’에서 찾는다. 아레테이아는 ‘드러남’인데 존재자의 비 은폐성을 일컫는 그리스어로 로마인들은 이를 ‘베리타스(veritas)’ 즉, 진리라고 해석했다. 하이데거는 아레테이아의 ‘숨어있지 않고 드러남’의 의미를 진리의 고유한 뜻으로 회귀시킨다. 이 ‘드러남’은 그것이 숨겨져 있지 않고 드러난다는 뜻이기에 시원 상 ‘숨김’을 전제로 한다. 존재의 성격은 숨어있으면서 드러나고 드러나면서 또 다시 자신을 숨기는데 있다. 이 ‘숨겨진’, 즉, ‘은폐된’ 존재는 존재자인 현존재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현존재는 ‘불안’을 통해 ‘무’, ‘섬뜩함’을 대면하면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일식>후반부의 현실적인 공간은 서사의 공간이 아니라, 실재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공간에로의 회귀로 볼 수 있다. 주인공들은 더 이상 그들이 머물던 허구의 세상에 있지 않고 사라진다. 그들이 불편해 했던 그 공간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닌 일반인들로, 그들의 일상인 현실로 채워진다. 이 낯선 공간은 허구적인 인물들(현존재)을 매개로 하지 않고 본래적인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일식>을 제외하고는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섬뜩함’과 대면하면서 불안이 생겨나고, 상실감(사 랑, 믿음, 자아 등)과 헤맴 속에서 본래적인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사랑의 상실은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며, 상실된 믿음은 진실을 찾기 때문이며, 상실된 자아는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섬뜩함’속에서 단지 상실감을 느끼고 헤맨다기 보다는 이 헤맴은 바로 본래성을 찾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일식>을 제외하고는 본래성, 즉, 존재가 개시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안토니오니는 이 본래성을 찾는 ‘과정’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앞서의 빈 공간의 분석을 통해 대지, 도시외곽, 공원, 벽, 사막이라는 공간들은 바로 상실과 헤맴이 나타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본래성을 찾는 ‘사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유의 공간은 곧 현존재의 실존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에 ‘실존’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토니오니 영화의 공간들은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혹은 드라마적인 공간들에 머물지 않고 ‘사유의 공간’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의 ‘불안’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분위기’(Die Stimmung)이다. ‘기분’16)으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현존재가 항상 ‘현(Da)’ 바로 세계 속에 있음을 집요하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이 상기시킴을 통해 현존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건가를 깨닫게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기분’은 짧게 인용되지만, 이 논문에서 다루려는 이유는 우선,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풍경은 빈 공간과 더불어 인물의 내면의 변화의 과정을 드러내는 주요한 공간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풍경은 ‘불안’(‘사라짐’, ‘섬뜩함’, ‘무’, ‘상실’, ‘헤맴’등)과 더불어 ‘분위기’를 드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2)질 들뢰즈, 『시네마 II: 시간 이미지』, 시각과 언어, 2005, p. 531.  13)서정아, 「영화에서 사물의 미학」 『영상문화』16, 2010.  14)Pascal Bonitzer, Décadrage, Paris, Cahiers du cinéma, 1987,réed., 1995, p.101.  15)‘섬뜩함’은 앞에서 쉬운 이해를 위해 낯선 세계로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정확한 하이데거적인 이해를 위해 ‘섬뜩함’으로 번역한다.  16)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Die Stimmung은 ‘기분’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다른 하이 데거의 설명서들에는 ‘분위기’로 번역되기도 한다. 필자가 ‘분위기’로 번역하는 이유는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인물을 둘러싼 자연환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국어사전상, 개인 적인 감정의 의미가 강한 ‘기분’보다는 외적인 환경에 초점을 두는 ‘분위기’로 번역하 고자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관련해서는 번역문의 인용 때문에 ‘기분’으로 번역하고, 안토니오니 영화 분석에서는 ‘분위기’로 번역할 것이다.

    4. 분위기(Die Stimmung): 풍경의 형이상학

    안토니오니는 1942년 겨울에 이태리의 영화잡지 에 쓴 <헤겔에 관한 제언>이라는 글에서 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화란, 회화처럼 원래 형상적인 것이어서 자연이나 개인의 내재성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자연이나 개인을 외화 시키는 재현의 방법을 보여준다.”17) 그에게서 영화란 그림을 그리듯이 영화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과 달리 영화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으며, 이 움직임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즉, 우리의 현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 ‘현상성’이 바로 안토니오니가 생각하는 영화가 다루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로 나타나는 이 현실의 현상성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이다. “로마에서 청소부들의 파업이 4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로마의 거리는 온갖 쓰레기들,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난무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와 폭력적인 형상들을 난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반대로 막시무스 서커스장의 폐허에 모인 수천 명의 청소부들은 푸른색 셔츠를 입고 조용히, 질서정연하게 무엇을 할지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 그 장소를 지켜 보면 다음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다.”18) 안토니오니는 영화를 영화이미지와 서사로 나눠볼 때, 서사는 이미지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는 근원지이자 그 이야기가 가져올 감정(인물의, 혹은 관객의)을 생성시키는 원천이 된다. 예를 들어 <외침>은 우연히 로마의 하얀 벽을 보며 상상한 작품이라 한다.19) 이 영화 속 알도가 겪는 미로와 같이 얽힌 많은 감정들은 벽은 아니지만, 대지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안토니오니는 영화 이미 지가 갖는 이러한 힘을 강조한다. 알랭 봉팡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풍경자체가 인물들의 미스터리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20)

    앞서 분석한 빈 공간 즉, 대지, 도시외곽, 공원, 벽, 사막 외에도 자연 풍경(혹은 자연 현상)은 인물들의 ‘불안’과 관련된 주요한 개념인 ‘분위기’를 드러내는 주요한 공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분’은 현존재의 기초적인 실존범주로써 현존재는 항상 ‘기분’에 규정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 ‘기분’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또 어떤 상태가 되는가를 드러낸다. 사람이 어떤 상태가 되는가에 있어서 기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이 존재를 그 ‘현’속으로 초래하게 하는 것이다.”21) 이 ‘기분’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불쾌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기분’은 외부에서 오는 것도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내-존재라는 존재 방식으로서 세계내존재 자체로부터 싹터온다.”22) 이 ‘기분’은 개인의 내적인 기분이나 혹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존재가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당면하는 것이다. 즉, 그가 세계 속의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분’은 또다른 의무를 띤다. “기분은 그때 그때에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개시하고 있으며, 무엇에 대해 스스로를 향하게 하는 것을 우선 가능하게 한다.”23) 이 ‘기분’이 현존재에게 개시하는 전체의 세계는 바로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성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놓은 세계라는 의미이다. 즉, ‘기분’은 현존재가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거나 혹은 본래적인 삶을 살아가거나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의미이다. 이 선택의 가능성 앞에 서 있는 현존재는 바로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현존재가 본래성을 얻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불안’은 ‘사라짐’, ‘섬뜩함’, ‘무’, ‘상실’, ‘헤맴’등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며, 이 과정들은 시간적인 계기나 논리적인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섬뜩함’은 빈 공간으로 나타났고, 빈 공간은 궁극적으로는 인물의 상실감(무)과 헤맴을 통해 실존에 관한 물음을 제기 했다. 그러면이 ‘분위기’는 풍경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우선 풍경의 분석을 통해 그 연관성을 살펴보자.

    영화에서 풍경은 주로 자연으로 빛, 바람, 안개, 하늘, 먼지, 사막 등은 주로 미장센의 배경으로 기능하며, 서사구조에 종속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안토니오니 영화의 자연은 단지 자연의 일부로서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대면하는 세계24)로 나타난다. 우선, 자연 현상들 중 빛은 주로 현존 혹은 부재로 나타나며, 빛의 현존은 생명체의 살아있음을 가시화하고, 빛의 부재는 그 생명의 사라짐을 의미하며 심리적인 안정감과 불균형을 보여준다. 안토니오니 영화의 삼부작이라 부르는 <모험>, <밤>,<일식>은 빛과 관련이 깊다. <모험>과 <밤>은 새벽에, <일식>은 저녁에 끝난다. <모험>과 <밤>은 커플의 불안정한 심리와 사랑을 다루는데, 이들 영화가 새벽으로 끝난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고통과 불안을 잠재우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불안함을 드러낸다. <일식>의 마지막 장면에서 롱 쇼트의 가로등 불빛은 갑자기 클로즈업되어 하얀 불빛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는 과 함께 갑자기 사라진다. 빛은 가시적이지만 동시에 빛의 과다는 모든 것을 비가시적으로 만든다. <일식>에서 일상의 현실의 공간은 서사의 인물들이 사라지고 난 후 대체된 공간으로, 일식이 빛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불안했던 주인 공들의 상황은 가로등의 과다한 불빛을 통해 폭발하면서 모두 현실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과도한 빛은 바로 ‘무’와 상통한다. <일식>은 빛의 사라짐을 통해 상실감의 극대화인 현실의 사라짐을 보여준다. 이렇게 저녁과 새벽은 시간상의 변화에 국한되기 보다는, 빛의 부재와 현존을 통해 인물들에게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황(실존)을 묘사하고 있다.

    안개 또한 안토니오니 영화에 자주 나타나는 풍경인데, 화면을 감싸는 대표적인 안개장면은 <붉은 사막>과 <여인의 정체성>에서 나타난다. <외침>속 안개가 커플의 모호하고 낯선 심리를 표현했다면, <여인의 정체성>에서 니꼴로가 도로 한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새벽녘 안개는 그의 미로 같은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갑자기 나타난 안개 속에서 사라진 마비를 기다리며 헤맬 때 그의 행동은 마비의 상실이 아니라, 니꼴로의 내면의 위기상황과 사랑에 대한 불안감을 보여 준다. <붉은 사막>의 안개는 일차적으로는 산업화 된 도시의 자연의 폐해라는 위기를 표현한다. 이차적으로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신경 불안 증세에 놓인 줄리아니의 내면의 불안을 다루고 있다. 안토니오니의첫 컬러영화인 <붉은 사막>에서 안개는 도입부의 산업화로 인해 오염된 대기를 짓누르는 뿌연 노란 연기로 시작하여 줄리아나의 불안한 내면으로 확장된다. 대표적인 안개 시퀀스는 공장시퀀스와 부두가 시퀀스이다. 도입부의 공장의 안개 시퀀스에서, 공장의 굴뚝이 뿜어내는 하얀 안개가 물밀듯이 밀려와 화면을 압도한다. 우선, 익스트림 롱 쇼트로 촬영 된 공장외부에서 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이어지는 쇼트들은 공장에 근무하는 줄리아나의 남편과 그 동료가 바라보는 쇼트와 그 대상인 흰 연기로 나눠 보여 진다. 다음 쇼트에선 인물들이 전경에, 연기는 그들의 후경에 위치하여 함께 보여 진다. 배경으로 작용하던 흰 연기는 다음 쇼트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후 무한하게 확장되다, 다음 쇼트에서 인물들 너머로 사라져 간다. 이 연기는 삶의 터전인 공장을 집어 삼킨 후 사라진다. 프레임의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는 연기의 끝없는 움직임은 연기가 지배하는 공간의 무한함, 측정할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 공간의 무한함이란 다름 아닌 끝없이 오염물질로 가득한 도시이다. 줄리아나가 등장하는 공장의 부지와 그녀에게 보이는 이 항구도시들은 공업폐기물로 썩은 검은 땅으로 변했으며, 폐기물들로 넘쳐난다. 독성으로 가득 찬 노란연기가 화면을 가득 메우며 시작했던 <붉은 사막>은 공장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뿜어 나오는 노란 연기를 보여주며 끝난다. 노란 색의 이 연기는 산업화로 앓고 있는 병든 도시와 땅을 의미하며, 나아가 치유할 수 없는 불안증을 앓고 있는 줄리아나의 상태를 나타낸다. 환경오염에 의해 오염된 땅과 풍경은 끝없이 확장되어 줄리아나가 사고로 인해 겪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들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끝없는 자연 공간이 인물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와서 그녀의 불안한 내면을 텅 비우고 황폐화시킨다. <붉은 사막>에서 공간은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모호하며 이 오염된 공간들은 단지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인물과 공존하고 있다. 안개와 관련된 두 번째 시퀀스인 부두가 시퀀스는 부두가 오두막에서 줄리아나가 남편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데서 시작한다. 오두막에 당도하기 전 줄리아 나가 보는 것은 더러운 웅덩이들과 더 이상 낚시가 어려운 하천이다. 줄리아나가 다른 부부들과 즐거운 휴식을 취할 때 큰 배가 근처에 정착을 하고 의사가 방문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줄리아나는 전염병일 수도 있다고 두려움에 떨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오두막을 뛰쳐나간다. 밖은 안개로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순간 지나가던 경찰차를 바라보던 줄리아나는 두고 온 장갑이 생각난다. 남편이 가지러 가는 것을 막던 그녀는 남편 대신 장갑을 가지러 가는 남편의 친구를 돌려세운다. 그 순간 그녀 앞에 한 명씩 떨어져 서 있는 남편과 친구부부들이 보인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들은 안개 속에 서서 줄리아나를 바라보고 있다. 줄리아나는 그들을 한 명씩 쳐다 보는데 그들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굳은 표정이다. 다시 줄리아나가 그들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안개가 몰려와서 그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흐릿하게 보이던 남편마저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갑자기 줄리아나는 뛰어서 앞으로 나가더니 혼자 자동차에 올라타서 앞으로 질주한다. 안개 속에 사라지던 그녀의 자동차는 갑자기 부둣가에 멈춰 선다. 달려와선 그녀를 질책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집에 가고 싶었다고 소리친다. 그녀의 불안 증세는 오염된 환경과 기후 때문에 더 심해진다. 이 안개 시퀀스는 그녀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즉, 이미 살기 어렵게 된 도시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인 남편과 아들마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을 경험한다. 사고 순간부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랑을 갈구하는 줄리아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과 그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 안개시퀀스에서 그녀 앞에 나타난 안개속의 정지된 주변인들은 바로 그녀가 갑작스럽게 대면하는 ‘무’의 순간이다. 이 ‘무’는 앞서의 영화들과는 다른 ‘무’이다. 즉, 앞서의 영화들이 ‘무’와의 대면에서 상실감(사랑, 믿음, 자아)을 견뎌내면서 그것을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데 반해, 줄리아나의 ‘무’는 어떤 노력도 의미 없는 상실감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실은 사랑, 믿음, 자아로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현실자체의 사라짐’이다. 이 현실자체의 사라짐은 <일식>과 <직업 : 리포터>에서도 나타난다. <일식>에선 과도한 빛으로 인해 사라지는 현실을, <직업 : 리포터>는 사막을 통해 현실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로크는 다시 사막의 먼지 속에서 자신을 최종적으로 잃어버린다. 그의 죽음은 그가 속한 현실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빛, 안개, 사막 등은 그 자체 사라짐을 내포하고 있는 자연현상들이며, 이 자연현상들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현실자체의 사라짐’을 형상화한다. 즉, 자연풍경은 구체적 대상이나 사물의 부재가 아니라, ‘현실 자체의 사라짐(총체적인 부재)’을 야기 시켜 더 이상 도피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게 한다. 그리고 현실자체의 사라짐은 나의 사라짐도 포함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나마저도 사라지는 이 한계는 존재와 마주25) 할 수 있게 하는 무의 부정성이다. 즉, 현존재가 본래성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빛, 사막, 안개라는 풍경은 총체적인 현실을 사라지게 하면서, 그 완전한 ‘무’앞에서 본래의 자신을 마주하게끔 한다 : 그 본래성이 가능성(<붉은 사막>, <일식>)이건 혹은 죽음(<직업 : 리포터>)이건 간에.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분’은 현존재의 내적인 혹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세계내 존재인데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의 ‘현’(Da)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비 본래적인 혹은 본래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풍경들, 빛, 안개, 사막은 현존재의 ‘분위기’(Die Stimmung)26)를 형상화한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미장센으로 사용되었던 풍경들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인물이 겪는 실존적인 불안을 사유하는 존재론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7)Aldo Tassone, Antonioni, traduit de l’italien par Caecilia Pieri avec la collaboration de Josiane Tourrès et Vincent Forestier, Paris, Flammarion, 1995, p.124.  18)Michelangelo Antonioni, Ce bowling sur le Tibre, Paris, Images Moderne, 2004, p. 61.  19)안토니오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Gianni Massioni, 1994), 이태리와 영국 합작.  20)Alain Bonfand, Le cinéma saturé : Essai sur les relations de la peinture et des images en mouvement, Paris, Vrin, 2011, p.148.  21)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p.190-191.  22)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194.  23)마르틴 하이데거, 위의 책, p.194.  24)예술사가인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는 그의 저서인 『구름에 관한 이론(Théorie du nuage)』에서풍경의 구성요소들 중의 하나인 구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즉, 그는 회화 속 장식으로 혹은 배경으로만 그려진 구름의 이미지가 유사성에 기반한 재현적인 의미들을 벗어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들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Hubert Damisch, Théorie du nuage, Paris, Ed., Seuil, 1972.  25)불안 앞에선 현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도피하지만, 이미 ‘불안’속에 개시되어 있던 본래성은 무의 부정성이라는 성격을 통해 현존재가 존재의 본래성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무는 부단히 무화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그 지식으로는 이러한 사건을 본래적으로 알지 못한다.” “근원적으로 무화하는 무의 본질은, 현-존재를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자 그 자체 앞으로 데려온다는데 있다.” M. 하이데거, 앞의 책, p.89, p.93.  26)‘분위기’라는 이 상태를 알랭 봉팡(Alain Bonfand)은 멜랑콜리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상실감, 무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멜랑콜리가 정점을 이루는 영화는 <붉은 사막>(Il Deserto Rosso, 1964)이다. 봉팡은 이 멜랑콜리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그는 칸트가 숭고를 위협적인 바위, 끝없는 폭풍우등으로 묘사한데 착안하여 숭고를 ‘경계 없음’이란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 봉팡에 따르면, 숭고함은 인간의 가시성을 넘어서 있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 균열, 추락의 상태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안토니오니 영화의 인물들이 직면하는 상실, 균열등을 멜랑꼴리의 숭고함으로 파악한다. 또한 봉팡은 가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Gaspar David Friedrich)와 조르지오 드 시리코(Giorgio de Chirico)의 회화와 관련시켜 이 숭고성을 설명하고 있다. Alain Bonfand, op.cit. p.149-151.

    5. 결론 : 발생적 공간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공간은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인물의 내면을 외재화 시키는 것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공간은 하이데거의 세계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인물들에게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는 공간이다. 하이데거의 은폐된 존재가 전통철학(하이데거 이전의 형이상학)과 달리 현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듯, 안토니오니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이 공간에 의해 자신과 타자가 분리되고 균열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곧 자아와 타자와의, 자아와 세계와의 균열이 발생하는 장소이며, 실존적인 물음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숙명처럼 죽음을 향해가 듯, 안토니오니의 인물들은 정해지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가며(헤매며), 공간은 인물들이 걸어가는 길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공간의 의미작용 즉, 공간이라는 이미지들이 영화 속에서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대한 주목이 우리의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앞서의 공간의 의미작용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항은, 안토니오니의 공간은 인물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인물이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실존의 공간이며, 인물이 이 세계로부터 사라지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거주적, 실존적, 사건적인 공간의 형성과정이 바로 ‘불안’이 펼쳐지는 공간의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본 논문은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공간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불안’을 형상화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즉,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불안’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가 영화의 공간 이미지로 어떻게 사유되는가를 밝히려 했다. ‘불안’은 ‘사라짐’, ‘낯섦’, ‘무’, ‘헤맴’등의 다양한 과정들과 연관 되며, 이 내면의 과정들은 순차적인 계기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형태로 작용한다. 안토니오니 영화의 빈 공간, 즉, 대지, 벽, 도시외곽, 공원, 공장부지, 사막 등은 하이데거의 ‘섬뜩함’속에서 인물들의 상실감과 헤맴을 형상화하는 다양한 공간의 움직임들이다. 풍경, 즉, 빛, 안개, 사막 등은 현존재의 ‘거기 있음(Da)’을 상기시키며 현실자체의 사라짐을 통해 불안을 극대화하여 본래성과 마주하게끔 하는 ‘분위기’를 형상화한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하이데거의 ‘발생적’ 공간이란 물리학적인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그 속에 거주하는 공간으로 그 안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통해서만 생산되는 공간이다. 또한 현존재의 있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이고 다양한 장소들을 통해서 공간이 형성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토니오니의 공간역시 인물이 거주하는 공간이며, 이 공간은 빈 공간과 풍경들의 다층적인 움직임을 통해 불안과 연관된 다양한 과정(‘사라짐’, ‘낯섦’,‘무’, ‘헤맴’등)들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안토니오니영화의 공간을 ‘발생적’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공간은 인물을 둘러싼 환경 즉, 서사적이고 미장센의 배경으로만 작용했던 것에서 벗어나, 비서사적이고 형상적인 공간으로 변화했다. 형상적이란 공간이 각 공간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공간들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하이데거적인‘불안’이 현시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발생적’공간은 불안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사유하는 공간이 된다. 이는 영화이미지의 본질이 서사에 기초한 재현이 아니라 ‘사유의 나타남’에 있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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