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미술가 윤상열 연구

A Study on the Production Designer, Yoon Sang-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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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Yoon Sang-yeol defected to North Korea for political reasons, where he was branded as a fractionalist. So his life was unknown to the world.

    He began his career as a painter, and after worked as a set designer in theater and a production designer in a movie studio. Also he was a activist of the proletarian art movement who struggled against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fter liberation he was the central figure of film movement which was led by lefties. In 1948, he defected to North Korea. he was elected to representative of the North Korea’s supreme command, but he was purged when North Korea purged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at Korean War.

    Yoon Sang-yeol was a fauve in Korea. He used a contrast of color, shape and space. He cut details and emphasized on the spatial feature at his stage.

  • KEYWORD

    윤상열 , 영화미술가 , 영화운동 , 야수파 , 대비 , 월북 영화인 , 프롤레타리아 , 영화미술

  • 1. 들어가며

    근대 광학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영화는 복사가 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복사가 가능하다는 점은 영화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 행태를 실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야말로 근대적 소산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움직임까지 재현해 내는 영화만의 특징은 인접 장르의 예술가들이 그 재능을 발휘할 예술적 충동을 자극시키기 충분했다. 이들의 창의적인 영감은 영화가 상품 혹은 예술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움직임까지 묘사해 낼 수 있는 영화의 능력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1919년 조선인들의 손으로 영화제작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영화제작자들은 재능 있는 미술가들을 필요로 했고, 미술가들 역시 근대적 예술인 영화창작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관련한 미술가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큰 주목을 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1)

    이 논문은 일제말기 유일한 영화회사인 조선영화사(朝鮮映畵社)와 해방 후 북한의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北朝鮮國立映畵撮影所)의 미술책임자로 영화미술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윤상열(尹相烈)의 생애와 활동을 다루고 있다. 그에 관해서는 그가 토월회(土月會) 멤버였고, 일본에서 유학중 프로연극의 무대미술을 담당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하 鮮展)에 입선한 내역 등이 언급되고 있지만 실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특히 그가 주로 활약했던 영화분야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영화미술 분야를 연구의 대상으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영화사 연구의 경향과 더불어 윤상열이 1948년 월북해서 그곳에서 활동했기에 그의 신상정보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이 논문에서는 영화미술가 윤상열에 대한 전기적 사실을 복원하는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삼을 것이다. 부족한 자료나마 최대한 찾아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들을 복원하여 식민지시기 영화사(映畵史)와 미술사의 공백을 메울 것이다. 더불어 북한에서의 활동 내역을 살핌으로써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북한영화가 실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 다른 가지와 같음을 확인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윤상열의 생애와 활동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 영화미술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1937년 이전 미술가로써의 활동 시기. 두 번째, 영화미술가로 활약하다 해방을 맞게 되는 1945년까지 시기. 세 번째, 해방 이후 영화운동의 중심부에서 활약하다가 월북하여 <내 고향> 등의 영화미술을 담당하는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1)일제강점기 영화미술가들의 계보에 관한 손민정의 석사논문 「초기 한국 영화미술의 형성과정과 계보 연구」(홍익대학교, 2008.)만이 일제강점기 영화미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2. 초창기 미술 활동(1923∼1937)

       1) 토월회 활동

    미술사가인 최열은 2006년 발간한 『韓國近代美術의 歷史』에서 윤상열의 출생연도를 1905년 즈음으로 추정했다.2) 반면 손민정은 윤상열이 1910년에 출생 한 것으로 추정했다.3) 정확한 출전 없이 교우관계 등을 통해 추정한 이것은 정황을 통해 짐작해야만 할 정도로 윤상열 개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행이 동생 윤경열(尹京烈, 1916∼1999)이 회고록을 통해 가족사를 공개하면서 10살 위의 큰 형 윤상열의 생년이 1906년임이 확인되었다.4) 2010년에 발간한 최열의 『한국근현대미술사학』에서는 윤상열의 생년이 1906년으로 수정되었다.5)

    1906년 함경북도 주을에서 과수원을 하던 윤정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윤상열은 종조부인 윤익선(尹益善)이 한때 교장으로 재직했던 보성학교에서 수학했다.6) 이 시기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고희동(高羲東)이 휘문, 보성, 중앙, 중동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는데 윤상열이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한 데에는 고희동의 영향이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던 고희동의 영향으로 서양화를 그리는 청년들은 출신 학교와 상관없이 서로 알고 지냈다. 특히 100여 칸이 넘었던 옥인동(玉仁洞) 이승만의 거택에 모이던 패들을 구본웅(具本雄)은 옥동패(玉洞牌)라고 불렀는데 윤상열도 이곳을 자주 찾은 옥동패 중 한명이었다.7)

    윤상열의 이름이 거명되는 시점은 1923년 토월회의 멤버로 이름을 올리면서 부터이다. 토월회는 박승희(朴勝喜), 김을한(金乙漢), 김복진(金復鎭), 김기진(金基鎭) 등 일본유학생들이 세운 극단이었다. 윤상열을 비롯해 미술 관련 인물들인 이승만(李承萬), 원우전(元雨田), 안석영(安夕影) 등은 1923년 7월 조선극장에서 개연한 토월회 1회 공연이 실패한 직후 토월회에 가세했다. 동경유학생이 아닌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토월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미술가 김복진과의 교유를 통해서였다. 1901년생인 김복진은 동갑인 안석영과 함께 서양화에 관심을 두고 있던 또래들 사이에서 연장자이자 리더였다. 김복진과 안석영은 토월회 1회 공연이 실패로 끝난 직후 정동정칙강습원(貞洞正則講習院)에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를 설치하고 1923년 8월6일부터 9월10일까지 회원을 모집하여 미술연구를 했다.8) 토월미술연구회는 토월회 1회 공연의 무대배경을 만들었던 김복진과 2회 공연에서 <부활>의 네흘류도프역을 맡기로 한 안석영이 주도하였기에 이 연구회에 참여한 미술인들이 자연스럽게 토월회 2회 공연의 무대장치 제작을 맡았다. 특히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도쿄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무대장치 제작은 이승만과 토월미술연구회원들이 함께했다.9) 윤상열도 토월미술연구회를 통해 토월회 멤버로 이름을 올리고 무대제작에 참여했다.

    무대미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923년 9월 상연된 토월회 2회 공연은 신파극의 평면적인 무대를 뛰어 넘는 입체적인 무대와 빛의 창조적 사용으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토월회를 주도하던 박승희가 전문극단으로의 전환을 주장하자 내분이 발생했고 윤상열을 포함한 미술인들은 이때 토월회를 탈퇴했다.

       2) 선전출신의 야수파 화가

    이승만이 남긴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윤상열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위는 행동이 유별나고 괴팍했던 김종태(金鍾泰)의 면모를 설명하기 위해 이승만이 꺼내 든 에피소드이다. 여기서 김종태와 비교되는 인물은 온후하고 원만한 성격의 윤상열이다.

    위의 예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윤상열의 성품은 무던하여 주변 인물들과 잘 어울린 듯하다. 특히 이창현(李昌鉉)이 윤상열과 단짝처럼 어울렸는데,11) 그는 1926년 5회 선전(鮮展, 朝鮮美術展覽會)에서 <정물>로 서양화 부문에서 입선했던 “한국에 있어서「포비즘」(野獸派)의 흐름을 맨먼저 탄 화가”12)였다. 야수파(포비즘)는 강렬한 순색의 사용과 보색을 이용한 대비, 장식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갖는 미술사조이다. 1935년 선전 출품작에 대해 단평을 남겼던 구본웅은 藤井芳子, 芝田宗市, 明日勘 등 일본인화가 사이에 윤상열의 이름을 넣어 그를 당대 조선에서 활동하던 야수파 화가의 한명으로 거명했다.13) 윤상열의 작품에서 야수파적 특성이 드러난다는 평을 얻은 것으로 보아 윤상열과 이창현의 교유는 이러한 화풍의 유사함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윤상열의 작품 중 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던 작품 4점과 ≪사해공론(四海公論)≫의 표지그림, 심훈(沈熏)이 ≪사해공론≫에 번역하여 연재한 펄벅의 소설 <대지>의 삽화 등이 있다.14)

    윤상열이 언제부터 선전에 출품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7년 <정물소품(靜物小品)>(그림1)이 선전에 입선한 것이 최초의 입선경험이었다.15) 이후 1931년 <흰 꽃(白い花)>(그림2)으로 특선, 1935년에는 <선인장(サボテン)>(그림3)과 <철도길목(踏切り近所)>(그림4) 두 점이 입선했다.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 윤상열의 선전 출품작들에서 과감한 색의 사용이 특징인 야수파 특유의 느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당시의 평문과 흑백 도판의 비교를 통해 윤상열의 작품들의 특징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1927년에 입선한 <정물소품>에서 흑백도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과일을 담은 그릇을 화면 가득 채운 과감한 구도와 거친 표현이다. 여기에 야수파 특유의 풍부하고 대담한 색이 더해졌을 것이다. 1931년 선전에 특선한 <흰 꽃>에 대해서는 평문이 남아 있어 그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위 글은 김종태가 쓴 평문이다. 우선 빛을 감각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무엇보다 색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특히 검은색이 성공했다는데, 도판으로 정확히 확인 할 수 없지만 대상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배경이 화병에 담긴 꽃을 감싸면서 백색의 꽃과 대비되어 큰 효과를 냈던 것 같다. 반면 꽃잎이 부드러웠으면 여운이 있어 유쾌할 것이라는 언급은 두텁게 칠한 꽃잎이 무거운 느낌을 주었던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 밖에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화병과 다양한 크기의 꽃이 생동감 있게 꽂힌 모습은 그림에 경쾌한 리듬감을 주고 있다.

    1935년 선전에 입선한 <선인장>은 <흰 꽃>과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다. 화면의 중앙을 선인장이 차지하고 있고, 물고기가 담긴 어항을 우측 하단에 배치했다. 선인장이 춤을 추는 것처럼 구부러져 얽혀 있는 모습은 생동감을 주며 단조로운 형태의 어항과 대비된다. 어항과의 대비는 시점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선인장은 서있는 상태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며 어항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내려다 본 정도로 차이가 난다. 이 작품에 대해 구본웅은 “若干 裝飾的으로 흐르는 便이 잇으나 氣槪가 보히는 作品”이라고 평했다.17) 반면 남궁백(南宮白)은 간판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된다며 간판화(看板畵)같은 독기(毒氣)로 말미암아 작품의 가치가 소멸되고 말았다는 혹평을 퍼부었다.18) 윤상열이 청진에서 간판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비꼰 이러한 평가는 그의 그림에 사용된 색이 극장의 간판 그림처럼 원색이어서 강렬한 느낌을 주고 대상의 특징을 강조한 표현이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또 다른 입선작인 <철도길목>은 철도 건널목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하단을 차지하고 있는 둥글게 휜 철로가 화면 가운데의 건널목에서 다른 철로와 만나면서 시선을 화면의 중앙에 집중토록 했다. 또한 철로 주변의 다른 풍경들은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면으로 단순화한 형태로 채색되었다. 도판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다양한 원색을 거친 터치로 두텁게 칠한 듯 보인다. 이러한 표현은 1927년의 선전 입선작인 <정물>과 비슷하다.

    흑백사진에 담긴 윤상열의 선전 출품작에서 색을 추측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이 비슷한 시기에 그린 ≪사해공론≫ 1936년 4월호의 표지그림은 칼라로 인쇄되어 윤상열이 사용했을 법한 과감한 색채를 짐작케 한다. ≪사해공론≫의 표지 그림은 하얀 구름이 떠있는 파란색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머리카락에 홍조를 띈 얼굴, 노란색과 빨간색, 흰색이 섞인 목도리를 두르고 연두색 저고리를 입은 모습의 여성을 약간 올려다 본 구도로 그렸다. 여성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오뚝한 코, 작은 입이 둥근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어깨를 좁게 그려 전체적으로 얼굴이 도드라질 수 있는 구성을 취했다. 또한 원색을 사용하고 색을 대비시켜 화사하고 화려한 느낌을 보여주며, 대상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검은색 윤곽선,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명암으로 인해 색이 보여주는 강력한 느낌이 화면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과감한 구도와 화려한 색채는 그 의도를 읽지 못한다면 극장 간판화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윤상열이 서양의 야수파 화가의 작품 혹은 유학했던 일본의 야수파 화가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윤상열이 관심을 두었던 무대미술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무대의 배경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객석의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이기에 세부묘사는 생략하고 거칠고 강렬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3)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참가

    사상적인 측면에서 윤상열은 카프가 만들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김복진, 안석영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윤상열이 김복진, 안석영과 깊은 유대를 가졌던 사실은 토월회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1925년 카프 창설시 윤상열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카프가 문학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27년 방향전환을 계기로 조직이 개편될 당시, 강호(姜湖)를 비롯해 미술인들도 카프에 참여했던 것을 보면 1927년 윤상열이 조선에 없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윤상열이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관심을 두고 활약한 내역이 발견되는 곳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이다.19) 윤상열은 1921년경 최귀금(崔貴金)과 결혼하여 영희(英姬), 옥희(玉姬) 두 딸을 두었으나 1924∼5년경 최귀금이 사망하자 두 아이만 주을에 맡겨두고 서울서 지내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도쿄에서 윤상열은 신문배달과 초상화그리기를 하며 고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20) 윤상열이 미술공부를 위해 찾은 곳은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연구소였다.21) 1931년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연구소에 조선인 연구생으로 있었던 윤상열은 동년 6월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가 발족 하는데 최병한(崔丙漢), 한홍규(韓弘奎), 이화삼(李化三)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이 연구회는 “무산계급운동에 있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역사적 필연을 정확히 인식하고, 무산계급 운동의 일부분인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에 의해서 봉건적 계급관념과 자본주의적 관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전피압박민중의 해방을 기한다”는 기치를 내 걸었다.22)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가 발족한 것은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이끌던 김두용(金斗鎔)이 주도한 예술운동의 볼세비키화라는 2차 방향전환에 따른 것이었다.23) 몇 차례 이동공연을 펼친 동경프롤레타리아 연구연구회는 같은 해 10월 동경조선어극단으로 개칭됐고, 11월 동지사(同志社) 결성에 참여했다.24)

    1932년 1월 동지사가 코프의 조선협의회로 해소된 직후인 2월 8일 동경조선어극단은 코프 산하 프롯트(일본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에 정식 가입하면서 이름을 3.1극장으로 개칭했다. 3.1극장은 2월 13일부터 시작한 프롯트 동경지부의 “2월 15일(IATB데이) 기념경연”에 <하차(荷車)>를 가지고 참가했다.25) 윤상열은 이 공연에서 장치를 책임졌으며, 교수역할로 출연까지 했다.26)

    이후 3.1극장의 공연에 윤상열이 참여한 기록은 없다. 무대장치가 김일영(金一影)이 입단하여 무대제작 인력이 충원되자 연극활동보다는 출판활동에 주력한 듯하다. 윤상열은 박석정(朴石丁)과 함께 야프(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가동맹)의 조선위원회에서 발행한 만화 ≪붉은주먹≫을 제작했다. 1932년 5월 1일자로 배포된 ≪붉은주먹≫은 조선인의 계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어 만화로 2색 인쇄로 300부가 발행되었고 마쓰야마 후미오(松山文雄), 요리모토 시린(寄本司麟) 등 일본만화가들도 제작에 함께 참여했다. 이어 윤상열은 코프 조선협의회에서 발행한 ≪대중의벗(大衆の友)≫의 부록인 ≪우리동무≫의 제작에 참여했는데27) 이 잡지의 편집은 김두용이 맡았고28) 1933년 2월까지 발간되었다. 그러나 제작에 관여했던 인물들에 대한 일본 관헌들의 탄압으로 윤상열은 1932년 체포되었다. 다음해 2월에는 윤상열과 함께 활동하던 박석정 마저 체포되었다.29)

    일본 관헌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도쿄의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참여하는 조선인의 수는 줄어들었다. 야프에 참여하고 있던 조선인의 수는 1932년 12월 도쿄에 20명, 교토에 1명으로 총 21명이었다가 1933년 12월에는 윤상열 외 5명으로 감소했다.30) 윤상열과 함께 활약하던 박석정은 석방된 후 조선으로 활동지역을 바꾸었다. 반면 윤상열은 야프가 해소되던 1934년 무렵까지 일본에 머물러 있었다.31)

    조선에 돌아온 윤상열은 러시아인 마을에 사는 용병출신 마(馬)씨의 딸과 재혼하여 함경북도 청진에 정착했다.32) 간판가게를 운영하며 그림그리기에 열중한 그는 1935년에는 선전에 참가해 입선했고 1936년에는≪사해공론≫에 삽화를 그렸고 같은 해 9월 26일부터 3일간 청진부립도서관(淸津府立圖書館)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33) 1936년 11월에는 청진방송국의 개국을 앞두고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방송예술연구회(放送藝術硏究會)를 조직하여 이사에 선임되었다.34)

    2)최열, 『韓國近代美術의 歷史』, 열화당, 2006, 278쪽. 이 논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미술관련 사항에 대한 인용은 대부분 이 책의 도움을 받았다.  3)손민정, 앞의 논문, 159쪽, 표23.  4)윤경렬,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학고재, 1997, 19쪽.  5)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494쪽.  6)윤경렬, 앞의 책, 53쪽.  7)具本雄, <朝鮮畵的特異性(下)>, ≪東亞日報≫, 1940.5.4.  8)<土月美術硏究會>, ≪東亞日報≫,1923.8.6.  9)李承萬, 『風流歲時記』, 中央日報 東洋放送, 1977, 36쪽.  10)李承萬, 앞의 책, 254쪽.  11)위의 책, 287쪽.  12)위의 책, 290쪽.  13)具本雄, <鮮展의 印象(二)>, ≪每日申報≫, 1935.5.24.  14)≪사해공론≫에 실린 윤상열의 그림에 대해서는 다음의 블로그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심훈의 ‘대지’에 삽화그린 윤상렬> http://blog.hani.co.kr/dong5797/10221(2013.10.4.검색)  15)<第六回朝鮮美術展覽會 入選者發表>, ≪每日申報≫, 1927.5.21.  16)金鍾泰, <第十會美展評>, ≪每日申報≫, 1931.5.26.  17)具本雄, <鮮展의 印象(五)>, ≪每日申報≫, 1935.5.28.  18)南宮白, <第十四回 美展作品評(1)>, ≪朝鮮中央日報≫, 1935.5.29.  19)윤상열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민정이 1927년 조선프로연맹 동경지부를 조직하는데 윤상열이 참여했다고 서술했지만 이에 관한 출전은 밝히지 않았다.(손민정, 위의 논문, 163쪽.) 1927년 선전에서 경성을 주소지로 출품을 했었고, 이후 1931년까지 선전입선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27년경에 일본유학을 떠났을 수 있다. 하지만 1931년 5월, 서울을 주소지로 선전에서 특선을 받을 당시에 일본에서의 활동이 발견되는 것을 미루어 선전 출품은 일본유학과는 별개로 서울의 주소지에서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윤상열이 도일한 시점은 조선에서 마지막 활동으로 확인되는 토월회 2차 공연이 끝난 이후인 192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일본에서 활동이 확인되는 1931년으로 내려갈 수 있다.  20)윤경렬, 앞의 책, 53∼55쪽.  21)1931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미술연구소의 연구생이었던 마쓰오 타카오(松尾隆夫)의 회상문(「プロレタリア美術研究所と共同研究の頃」, 『美術運動』117, 1987.)에서 연구소 5기생중에 오종렬, 박석정과 함께 윤씨 성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윤상열이 이후 박석정과 함께 활동했던 점으로 미루어 윤씨 성의 조선인은 윤상열로 보인다. 기다 에미코, 「韓⋅日 프롤레타리아 美術運動의 交流에 관하여」 『미술사논단』12호, 2001, 73쪽.  22)박영정, 「일제강점기 재일본 조선인 연극운동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3집, 2005, 110쪽.  23)박경수, 「일제하 재일 문학인 김두용의 반제국주의 문학운동 연구」, 『우리문학연구』25집, 2008, 309쪽.  24)동지사는 무산자사의 중요 인물들인 고경흠(高景欽) 김삼규(金三奎) 등이 공산당재건운동으로 체포되어 조직이 와해되자 무산자사의 남은 맹원과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연구회의 회원, 그 외 동경유학생을 포함하여 조직된 것으로 1국 1조직을 주장한 코프(KOPF :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의 의견을 받아들여 1932년 1월 코프의 조선협의회로 해소되었다. 박경수, 위의 논문, 310쪽.  25)박영정, 앞의 논문, 110쪽.  26)倉林誠一郞, 『新劇年代記』(戰前編), 白水社, 1972, 447쪽, 박영정, 위의 논문, 110∼111쪽 재인용.  27)기다 에미코, 앞의 논문, 73∼74쪽.  28)박경수, 앞의 논문, 314쪽.  29)오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의 논문에 근거한 기다 에미코의 주장에 의하면 윤상열은 1932년 일본 관헌에 체포되었다고 한다.(기다 에미코, 앞의 논문, 73쪽.)  30)기다 에미코, 앞의 논문, 72쪽.  31)윤경열은 1933년 무렵 윤상열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기억했다. 윤경렬, 앞의 책, 55쪽.  32)앞의 책, 55쪽.  33)<學藝消息> ≪每日申報≫, 1936.9.26.  34)<放送藝術硏究會創立> ≪每日申報≫, 1936.11.5.

    3. 영화미술가(1938∼1945)

       1) 조선영화주식회사 입사(1938∼1942)

    윤상열의 청진 생활은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에 입사하면서 마감됐다. 미술과 연극 분야에서 활약하던 윤상열이 영화미술가로 활약하게 된 시점은 1930년대 후반이었다. 이승만은 “그 무렵 尹相烈이 연줄을 타고 일자리를 하나 얻어 간곳은 서울에서 떨어진 議政府 근처에 있던 某映畵撮影所였다.”35)고 했다. 의정부의 모영화촬영소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의정부촬영소를 말한다. 윤상열이 조선영화 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시점은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성봉영화원(聖峯映畵園)을 인수, 성봉영화원에서 짓고 있던 의정부촬영소를 확보하여 인력이 필요하게 된 시점이었다. 청진에 있던 윤상열이 의정부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이승만이 말한 그 연줄 때문이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의 누가 그 연줄 역할을 했을까?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과 윤상열은 몇 개의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 호남출신 영화지망생으로 <꽃장사>라는 영화를 제작한 바 있던 최남주(崔南周)가 금광개발로 번 돈으로 설립한 조선영화주식회사는 박기채(朴基采), 이재명(李載明) 등 최남주와 동향의 영화인들이 주도했다. 이중 제작책임자로 회사를 장악하고 있던 이재명은 1930년 도호(東寶)의 전신인 P.C.L에서 연구생으로 있었고,36) 프로영화운동의 일파인 프로키노(일본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37) 윤상열 역시 같은 시기에 도쿄에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 둘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38)

    또 다른 연결점은 박기채의 데뷔작 <춘풍(春風)>의 원작자이자 각색자이기도 했던 안석영이다.39) 안석영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한 것은 1940년으로 늦은 편이었으나,40) 창립 준비 시부터 박기채, 이재명 등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기신양행(紀新洋行)에서 제작하고 안석영이 연출한 <심청(沈淸)>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동소문로 촬영소 시설과 인력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다.41) 기신양행은 이기세(李基世)가 운영하던 영화배급회사이지만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만들어질 당시에 동업을 꾀하기도 했을 정도로 조선영화주식회사와는 무관하지 않았다. 안석영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윤상열을 추천했을 가능성도 있다.42)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안석영의 추천으로 입사한 것이라면 “연줄을 타고 일자리를 얻어갔다”는 이승만의 기술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 안석영, 윤상열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모르는 누군가를 통해 영화회사에 입사한 것이라는 추정이 설득력이 있다.

    나운규(羅雲奎)가 도쿄의 영화회사에 있던 조선인들을 위주로 채용한다며 반발했다는 사실은,43) 교토에서 활약하던 박기채 보다는 도쿄에 있었던 이재명이 인력채용에 전권을 휘둘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윤상열을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데려온 인물은 이재명일 가능성이 크다. 왜 이재명은 영화미술의 경험이 일천했던 윤상열을 청진에서 데리고 왔던 것일까?

    1938년 6월,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는 무라야마 토모요시(村山知義)의 연극 <춘향전(春香傳)>을 영화로 만들 것을 언론에 발표했다. 이 계획에 맞춰 인력보강이 이루어졌다. 일본 P.C.L에서 촬영기사로 활약했던 이병우(李炳宇)가 5월 조선에 들어와 양세웅(梁世雄)이 촬영하고 있던 <무정(無情)> 제작에 투입되었다. 1920년대 초반 일본으로 건너간 이병우는 P.C.L의 전신인 음화예술연구소(音畵藝術硏究所)와 P.C.L을 거쳐 예술영화사(藝術映畵社)에서 촬영반을 지휘하고 있는 인물로 소개되었다.44) 이노우에 칸(井上莞) 혹은 이완(李莞)으로도 알려진 그는 이재명, 박기숙(朴基淑) 등과 프로키노에서 활동했던 전력이 있었다.45) 또한 이 시기 음악가 박영근(朴榮根) 역시 조선영화주식회사와 관련을 맺었는데 그는 일본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코프 조선협의회에서 활동한바 있었다.46) 여기에 카프 출신의 김유영(金幽影)을 통해 박기채를 소개 받았던 나프 출신의 백철은 <무정>의 시나리오를 일어로 옮기는데 힘을 보탰다.47) 이렇듯 일본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무라야마 토모요시의 <춘향전>을 영화로 제작할 것을 기획한 이재명에 의해 도쿄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참여했던 동료들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모였던 것이었다. 왜 이재명은 무리하면서까지 도쿄의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일까?

    무라야마의 <춘향전>을 영화로 만드는 문제는 ≪경성일보≫에서 무라야마의 경성도착에 맞춰 좌담회를 가질 정도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화제였다. 이 자리에서 무라야마는 “양반, 서민이라는 두 가지 계급의 존재가 여러 가지 모순을 낳은 그 갈등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눈 여겨 보아간다는 태도로 나아가고 싶다”고 영화화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정인섭(鄭寅燮)이 “계급사상적 의미냐”고 되묻자 무라야마는 자리에 함께 하고 있던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최남주,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카라시마 다케시(辛島驍) 교수와 이구동성으로 그렇지 않다며 크게 웃었다.48) 무라야마의 무의식적인 생각이 밖으로 표출된 것을 웃음으로 서둘러 막은 것이었다. 제작을 맡은 이재명은 무라야마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무라야마도 잘 알고 있는 도쿄에서 활동하던 동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나운규는 조선출신을 천대하고 도쿄출신들을 우대한다며 불만스럽게 바라 본 것이다.

    윤상열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처음 담당한 작품은 무라야마가 각색하고 있던 <춘향전>이 아니라 이규환(李圭煥)이 연출한 <새출발>이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는 무라야마의 <춘향전>을 영화로 만드는 기획 말고도 유치진(柳致眞) 원작의 <풍년기(豊年記)>를 영화로 만들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풍년기>는 조선영화협회(朝鮮映畵協會),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학생예술좌(學生藝術座) 등 도쿄의 조선인 연극, 영화단체에서 협력하여 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공동프로젝트였다.49) 이재명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도쿄에 가서 조선영화협회의 이병일(李炳逸)을 만나고 있는 사이, 이규환을 만난 최남주가 이규환이 계획 중인 <새출발>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병일이 쓴 <풍년기>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귀국한 이재명은 즉흥적으로 기획된 <새출발>의 제작에 반대했다. 취소가 될 뻔한 이 기획은 전무 오영석(吳榮石)의 개인 출자로 제작될 수 있었다.50) 그러자 이재명이 <춘향전>을 위해 준비해 놓은 인력은 <춘향전>이 아닌, <새출발>의 제작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이규환은 <새출발>이 철원 월정리에 안채, 사랑채, 외양간까지 갖춘 50칸짜리 기와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어 제작되었다고 증언했다.51) 하지만 세트제작을 책임졌던 윤상열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끌던 <춘향전>과 <풍년기>의 제작은 취소되었다. 좌익 예술인들이 모여 있던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영화를 제작하기에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애련송(愛戀頌)>을 끝내고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김유영 연출로 제작을 준비 중이던 <처녀호(處女湖)>는 배경과 제목까지 <수선화(水仙花)>로 변경해서야 비로소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작자 이재명에 의하면 “이 영화가 제작될 무렵 일제는 조선말로 연극이나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여 씨나리오에 수정을 가하고 시대를 이조말기의 이야기로 고쳐서 제작”52)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연출자 김유영이 촬영 중 병사하면서 유작이 된 이 작품의 미술을 윤상열이 맡았다.53)

    일제의 간섭이 심해진 것은 군에서 영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것이 원인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군이 직접 언론 관계 사무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 역할은 조선군보도부가 맡았다. 중일전쟁 발발직후인 1937년 10월 조선군사령부는 정보반의 보도기능을 분리하여 신문반을 신설했다. 1938년 1월 신문반은 보도반으로 개편되었고 그해 10월 보도부로 확대되었다.54)

    조선군보도부의 영향력이 커지자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요시찰 대상인 좌익영화인들은 확실히 전향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1938년 카프 출신들인 박영희(朴英熙)(원작), 안석영(연출), 최승일(崔承一)(제작)이 조선인지원병제도 실시에 맞춰 <지원병(志願兵)>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55)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영화들이 연거푸 취소되면서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의정부촬영소는 소규모 영화회사의 촬영을 위해 활용되었다. 의정부촬영소에 촬영된 <지원병>은 윤상열이 미술을 담당했다. 그 역시 재일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가담했던 전력이 있었다.

    <지원병>에 이어 윤상열이 미술을 담당한 작품은 이병일이 연출한 <반도의 봄(半島の春)>이었다. 이 영화는 일제의 조선영화산업 통제를 입법화 한 <조선영화령(朝鮮映畵令)>의 도입을 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영화는 야외 촬영이 많았던 <지원병>과 달리 대부분의 장면이 세트에서 촬영되어 극중 공간적 특징들을 잘 살려냈다. 연출자 이병일은 촬영, 조명, 미술 담당자의 성과를 언급하며 “裝置에는 大端히 無理한 點이 많었으나 尹相烈氏가 內地作品에 조금도 遜色이 없을만치 自信있는 셋트를 二十五個나 세웠다.”56)며 감사를 표시했다.

       2)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와 조선영화사(1942∼1945)

    필름 수급의 불안정, 영화제작에 있어 조선군보도부의 간섭, 1개 영화회사로의 통합을 위한 암중모색으로 영화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최남주를 대신해 장선영(張善永)이 최대주주가 되었다. 영화제작이 줄어든 상황에서 윤상열은 과거 도쿄의 3.1극장에서 활동한바 있던 안영일(安英一)이 연출한 <삼대(三代)>의 무대제작을 맡기도 했다.57)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와 조선군보도부는 선전활동 강화를 위해 제작회사 설립에 직접 개입하여 경성상공회의소(京城商工會議所) 부회장인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회사를 설립토록 했다. 발기인 대회와 함께 주식모집도 이루어져 회사의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이어 만영(滿映)에 있던 나카다 하루야쓰(中田晴康)가 제작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인력 채용이 시작되었다. 윤상열은 채용에 응하여 미술과원으로 입사했다. 미술과장은 일본인 타카가키 노보루(高垣昇)였다. 그는 도호출신의 영화미술가로 이마이 타다시(今井正)가 연출한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에서 미술을 담당한 바 있었다. 그 밖에 미술과원으로는 文元永石, 桑原光殷, 촉탁으로 柳如玉, 皐月つぎ子가 포진했다.58)

    1942년 9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창립되었고, 창립 기념작으로 <젊은모습(若き姿)>이 선정되어 일본영화인을 중심으로 제작이 결정되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인들이 주축이 된 2회작 <조선해협(朝鮮海峽)>도 제작이 진행되었다. <젊은모습>은 일본의 유명 영화인들이 동원되었다. 도호영화사의 토요타 시로(豊田四郞)가 연출을, 미우라 미츠오(三浦光雄)가 촬영을 맡았고, 다이에(大映)촬영소에서 세트촬영을 했는데 다이에의 미술책임자 고쇼 후쿠노스케(五所福之助)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미술과장인 타카가키 노보루가 세트제작을 맡았다.59) 반면 박기채가 연출한 <조선해협>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조선인 사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미술담당자는 윤상열이었다.

    <조선해협>은 창립기념작으로 거대한 제작비와 내지의 일류 제작진이 가세한 <젊은 모습> 보다 빨리 제작되었고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젊은 모습>의 실패를 책임지고 나카다 하루야쓰가 상무직에서 물러났다. 그를 대신해 노자키 신조(野崎眞三)가 제작책임자가 되어 방한준(方漢駿)이 연출을 맡은 <거경전(巨鯨傳)>의 제작을 책임졌다. <거경전>의 제작이 끝난 후 방한준은 조선군보도부에서 제작한 <병정님(兵隊さん)>을 연출했다. 윤상열이 방한준이 맡은 두 편의 영화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4년 조선영화배급사(朝鮮映畵配給社)가 제작사를 합병하는 식의 조정을 통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사로 재편되었다.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영화제작이 힘들어진 것과 꾸준한 수익을 통해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배급과 제작의 일원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직의 개편과 함께 인적 구성도 새롭게 바뀌었다. 영화감독인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가 제작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윤상열이 몸담고 있던 미술과는 제작부 산하 미술계로 개편되었으며, 나카다 하루야쓰가 내지에서 데리고 온 미술과장 타카가키가 물러나면서 미술계 주임인 윤상열이 조선영화사의 미술책임자가 되었다.60)

    조선영화사로 개편 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たち)>, <사랑과 맹세(愛と誓ひ)> 두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 두작품은 모두 최인규가 연출했다. 윤상열이 미술을 직접 담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61) 정확한 제작진 이름이 표기된 자료가 발견되어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술책임자로서 영화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35)이승만, 앞의 책, 293쪽.  36)李載明, <나의 映畵 遍歷>, ≪映畵≫, 1974.3⋅4, 73쪽.  37)『在日朝鮮人文化年鑑』1949年版, 朝鮮文藝社, 1946, 54쪽.  38)윤경열 역시 윤상열과 친구였던 이재명의 주선으로 영화 일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윤경렬, 앞의 책, 56쪽.  39)조선영화주식회사와 관련을 맺었던 백철(白鐵)은 안석영이 <연가(戀歌)>라는 영화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는데, 이를 계기로 박기채가 연출한 <무정(無情)>의 각색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白鐵, 『眞理와 現實』, 博英社, 1975, 218쪽.) 그러나 <무정>은 연출자 박기채가 각색했다. 안석영이 박기채와 관련을 맺은 작품은 <춘풍>이다. 백철의 착오로 보인다.  40)<朝映으로 가는 夕影> ≪朝鮮日報≫, 1940.5.3.  41)李載明, 앞의 글, 73쪽. ; 김남석, 「조선의 영화제작사 ‘조선영화주식회사’ 연구」 『우리어문연구』 44집, 2012,, 482쪽.  42)윤경열은 안석영의 <심청전>도 윤상열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했다. (윤경렬, 앞의 책, 93쪽.) 그러나 <심청전>의 미술은 원우전이 담당했다.  43)김남석, 위의 논문, 477쪽.  44)<新技師 맞은 『朝映』 『無情』撮影에 着手> ≪東亞日報≫,1938.5.14.  45)『在日朝鮮人文化年鑑』, 54쪽.  46)김태영, 「조선에서 전개된 프롤레타리아음악운동에 관한 고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석사논문, 2003, 148쪽.  47)白鐵, 앞의 책, 382쪽.  48)村山知義(李錫滿, 鄭大成 옮김), 『일본 프롤레타리아 연극론』, 월인, 1999, 144쪽.  49)<三團體 協力으로 新作을 計劃 中> ≪東亞日報≫, 1938.1.23.  50)李圭煥, <映畵60年(29)>, ≪中央日報≫, 1980.1.29.  51)李圭煥, <映畵60年(30)>, ≪中央日報≫, 1980.1.30.  52)李載明, 앞의 글, 74쪽.  53)조선영화주식회사의 마지막 작품은 김영화(金永華) 연출의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으로 국방사상을 강조한 시국영화였다. 이 영화에 윤상열이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54)한상언, 「조선군 보도부의 영화활동 연구」, 『영화연구』41호, 2009, 156∼157쪽.  55)<“志願兵”映畵化> ≪每日新報≫, 1939.8.25.  56)李炳逸, <情熱의 描寫>, ≪朝光≫7권5호, 1941.5, 244쪽.  57)<“阿娘”의 신춘공연 『三代』와 演技陣> ≪每日新報≫, 1942.2.19.  58)高島金次, 『朝鮮映畵統制史』, 朝鮮映畵文化硏究所, 1943, 136쪽.  59)<新作朝鮮映畵紹介> ≪映畵旬報≫, 1943.7.11, 30쪽.  60)한상언, 「일제말기 통제 영화제작회사 연구」, 『영화연구』36호, 2008, 412쪽.  61)<거경전>과 <병정님>을 연출한 방한준과 <태양의 아이들>, <사랑과 맹세>를 연출한 최인규는 고려영화협회 출신으로 조선영화주식회사 출신의 윤상열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방한준, 최인규가 조선영화사의 전속배우들보다는 주인규, 강홍식(姜弘植) 등 고려영화협회 출신의 배우들과 주로 작업한 점으로 미루어 조선영화주식회사 출신의 윤상열을 대신하여 다른 장치가와 함께 작업했을 수 있다.

    4. 해방기 영화운동과 월북 이후(1945∼)

       1) 해방직후 영화운동

    해방이 되자 조선영화사에는 이재명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일본인 운영자들에게서 영화사를 인수하기 위한 조치였다. 윤상열은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62) 위원회는 임화(林和)와 김남천(金南天)이 주도하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산하의 조선영화건설본부(朝鮮映畵建設本部)로 확대되었다. 영화건설본부 의원으로는 김정혁(金正革), 박기채, 윤상열, 이병일, 이재명이 포진했다.63)

    조선영화건설본부는 조선영화사의 제작부장이던 이재명이 주도했다. 이재명은 윤백남(尹白南)을 비롯해 조선영화사와 관계를 두지 않던 안종화, 이규환 등 우익영화인들과 급진적인 소장영화인들을 포함한 범영화인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윤백남을 제외하고 우익 영화인들 대부분은 참여하지 않았고, 추민(秋民)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영화인들 또한 영화건설본부를 거부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을 만들었다. 조선영화건설본부의 활동이 지지부진 한 가운데 서기장을 맡고 있던 김정혁이 일간예술통신(日刊藝術通信)을 맡게 되면서 윤상열이 서기장직을 이어받았다.64) 이재명과 윤상열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올라가 영화건설본부에서 제작한 <해방뉴스(解放뉴스)> 등을 북한에 전달하기도 하고, 오영진(吳泳鎭)의 소개로 소련에서 온 영화인들을 소개받고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65)

    1945년 12월 14일, 조선문학건설본부(朝鮮文學建設本部)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여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이 만들어졌다.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조직의 통합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조선영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도 16일 통합하여 조선영화동맹(朝鮮映畵同盟)으로 재조직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잔재 소탕, 봉건주의 잔재 청산, 국수주의 배격, 진보적 민족영화의 제휴”를 모토로 탄생한 조선영화동맹은 좌우의 영화인이 모두 집결한 범영화인 조직으로 중앙집행위원장에 안종화, 부위원장에 안석영, 이규환, 서기장에 추민이 선임되었고, 윤상열은 중앙집행위원 25명중 1인에 선임되었다.66)

    조선영화동맹이 설립된 직후인 1946년 초, 신탁통치문제로 인한 좌우의 갈등이 심해졌다. 정판사(精版社)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좌익진영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조선의 대중조직은 조선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던 민전(民戰, 民主主義民族戰線) 산하에 집결해 있었다. 좌익진영이 주도하던 대중운동과 미군정은 계속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우익 영화인들은 조선영화동맹을 탈퇴했다. 1946년 8월 20일 우익 영화인들이 빠진 가운데 개최된 1차 정기영화인대회에서 윤상열은 중앙집행위원에 다시 선임되었다. 서기장은 추민이었다.67) 그러나 영화동맹을 이끌던 추민이 1946년 말 월북하자 영화동맹은 이재명과 윤상열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재명은 1946년 12월 24일 만들어진 영화동맹 서울지부 위원장직을 맡았고,68) 윤상열은 1947년 미소공위협의(美蘇共委協議)에 참가할 영화동맹의 대표로 추천되었다.69)

    1947년 8.15 해방 2주년을 맞아 좌익이 폭동을 기획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해 좌익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이 내려졌다. 영화동맹을 이끌고 있던 윤상열도 체포 대상자 중 한명이었다.70) 지하에 은신했던 윤상열은 1948년 8월 월북하여71)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72)

       2) 북한에서의 활동

    북한의 영화제작은 인프라가 전무한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1946년 처음 제작된 다큐멘터리 <우리의 건설>은 녹음시설이 없어 무성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제작시설의 확충, 기술의 확보, 인력의 충원을 통해 짧은 기간 안에 극영화를 제작하는데 까지 이어졌다. 초창기 북한영화의 기획자는 주인규(朱仁奎)였다.

    1948년 북한정권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최초의 극영화(예술영화)인 <내고향>의 제작이 추진되었다. 시나리오는 김승구(金承九), 연출은 강홍식, 촬영은 고형규(高亨奎)였고, 월북 직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의 미술책임자가 된 윤상열이 미술을 맡았다. 1949년 <내고향>이 완성된 이후에는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생산활동을 소재로 한 <용광로>가 제작되었다. <용광로>의 미술 역시 윤상열이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고, 전세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다. 1951년 서울을 다시 점령한 북한은 남북의 문학예술조직을 통합하도록 한다. 1947년 이후 활동을 멈춘 서울의 조선영화동맹은 평양의 북조선영화동맹(北朝鮮映畵同盟)과 통합되어 영화동맹으로 재탄생했다. 전쟁기간 중 숙청된 주인규를 대신하여 북한의 북조선영화동맹을 대표하던 심영(沈影)이 위원장직을 맡았고 서울의 영화동맹을 대표하고 있던 윤상열은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4월, 윤상열은 전쟁 중의 공훈을 인정받아 공로매달을 수여받았다.73)

    윤상열의 마지막 공식기록은 전쟁 중이던 1951년 제작된 <소년빨치산>의 미술을 담당한 것이다. 이 영화는 남한에서 <마음의 고향>을 만들었던 윤용규(尹龍奎)가 전쟁 중 북한에서 만든 첫 번째 작품이자 북한에서 전쟁 중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였다.

    전쟁 기간 동안 북한에서는 <소년빨치산>을 포함하여 <또 다시 전선으로>, <정찰병>, <비행기 사냥꾼조>,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빨치산의 처녀>(휴전이후 완성) 등 총6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들 영화의 미술 담당은 <또 다시 전선으로>의 강호, <정찰병>과 <빨치산의 처녀>의 김혜일(金惠一), <빨치산의 처녀>의 김일영이다. <소년빨치산> 이후 윤상열의 활동을 발견할 수 없다. 전쟁 중 사망했거나, 숙청당했을 것이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력대미술가편람』74)에도 윤상열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미술가들을 망라한 이 책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들은 남한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거나 숙청당한 사람들이다. 윤상열은 임화, 김남천이 주도하던 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정치적 배경은 박헌영(朴憲永)이 이끌던 남로당이었다. 전쟁 중 종파사건으로 남로당계열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지자 임화는 1952년에, 박헌영은 1955년에 사형 당했다. 윤상열도 전쟁 중 숙청되어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북한의 문헌에서조차 그의 활동내역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지금까지 복권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62)한상언, 『해방공간의 영화⋅영화인』, 이론과실천, 2013, 25∼26쪽.  63)위의 책, 42쪽.  64)위의 책, 52쪽.  64)65) 위의 책, 59쪽.  66)위의 책, 76쪽.  67)위의 책, 84∼86쪽.  68)위의 책, 89∼91쪽.  69)<共委協議에 參加할 代表 南北 各政黨과 團體멤버> ≪京鄕新聞≫, 1947.6.22.  70)<八.一五事件關係者>, ≪東亞日報≫, 1947.11.22.  71)윤상렬, <행복스러운 환경속에서> ≪映畵藝術≫1949년 2호, 47∼48쪽.  72)한상언, 앞의 책, 223쪽.  73)위의 책, 225∼230쪽.  74)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5. 윤상열의 영화미술

       1) 대비를 통한 주제의 강조

    윤상열이 영화미술을 담당한 작품 중 <지원병>, <반도의 봄>, <조선해협> <내 고향>, <용광로>, <소년 빨치산> 등 6편의 필름이 남아 있다.75) 윤상열의 영화미술의 특징은 <반도의 봄>의 세트에 대해 손민정이 언급한데로, “입체적으로 설계된 공간”, “그림자를 이용한 공간의 은유적 표현”, “단출하지만 공간적 특징을 잘 살린 세트”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76) 하지만 이러한 점을 스튜디오촬영이 보편화 되면서 나타난 일반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그만의 독창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없다.

    윤상열의 무대미술을 특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용어는 무엇일까? 윤상열의 그림에서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대비이다. 선전 특선작인 <흰 꽃>에서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 입선작인 <선인장>에서의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대비는 주제를 강조하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윤상열이 제작한 세트에서도 공간의 대비는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지원병>에서 마름이 된 덕삼(金昌震 扮)이 지인들과 연회를 여는 요릿집은 곧바로 이어 나오는 춘호(崔雲峰 扮)의 방과 대비가 된다. 요릿집은 잘 차려진 음식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벽면에는 동양화 두 폭을 대칭이 되게 구성하고 가운데 덕삼과 기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색과 진미가 펼쳐진 타락한 공간이다. 반면 이어 나타나는 춘호의 방은 벽면에 걸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상 사진에서 시작하여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도, 책상 위에 꽂혀있는 책들과 늦은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남폿불이 덕삼의 타락한 공간과 대비되어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춘호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 그림6]∼[그림8])

    <내 고향>에서도 공간의 대비를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방식은 되풀이 된다. <내 고향>의 완성을 기념하는 특별호로 구성된 영화잡지≪영화예술≫에는 윤상열의 다음과 같은 소회가 실렸다.

    <내 고향>을 만들면서 윤상열은 지주와 소작인의 생활을 대비할 수 있는 세트의 제작을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정권수립 1주년에 맞춰 공개되기 위해서는 촬영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럼에도 언덕 밑에 쓰러질 듯 자리하고 있는 관필(劉源準 扮)의 초가는 순사부장, 면장, 유지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지주 최경천(太乙民 扮)의 집과 대비가 된다. 이렇듯 윤상열의 영화미술은 공간의 대비를 통한 주제를 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2) 세부묘사의 생략과 공간의 단순화

    1935년 선전 입선작인 <철도길목>은 곡선으로 표현된 철길과 세부묘사가 과감히 생략된 주변 풍경이 잘 나타난 작품이었다. 윤상열의 작품은 사실주의적인 공간의 창출보다는 세부묘사의 과감한 생략을 통해 대상의 특징을 단순화하고 강조하여 표현했다.

    윤상열이 창출한 영화 속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미술을 맡은 영화들에서는 공간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소품들을 제외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시킨 다소 연극무대와 같은 느낌의 공간을 창출했다. 25개의 세트를 만들어 대부분의 장면이 세트촬영으로 이루어졌던 <반도의 봄>의 경우 윤상열은 소품으로 공간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방식을 취했다. 영화인들이 머무는 합숙소와 영화사 사무실은 뒷벽에 걸린 포스터를, 음반회사 사장의 방에는 거대한 스피커를, 고민하는 지식으로 묘사된 주인공 영일(金一海 扮)은 방에 자리 잡은 책장을 배경의 일부로 이용했다.

    소품을 이용한 공간 설정은 세부 묘사에 해당하는 소품들을 스크린 위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공간을 미니멀한 분위기로 만들어 냈다. <조선해협>의 초반부에서 세키(南承民 扮)가 전쟁 중 사망한 형의 제단에 참배하는 장면은 흰색의 포장과 흰색의 제단, 흰색의 조화 등으로 구성된 흰색의 공간 안에 인물을 배치하여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림9] 참조)

    그가 영화미술을 맡은 마지막 작품인 <소년빨치산>에는 비슷해 보이는 공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윤상열은 특징적인 소품을 통해 비슷해 보이는 공간을 구분 짓는 전략을 취했다. 당위원장실은 뒷벽에 걸린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으로, 미군사령관실은 성조기, 경찰대는 태극기를 걸어 놓음으로써 공간을 구분 지었던 것이다.78)([그림10], [그림11] 참조) 전쟁 기간 중에 제작된 작품이어서 물자의 부족 등으로 인해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의 영화에서도 소품을 최소화하는 대신에 결정적인 소품으로 그 특징을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 것은 대비되는 것들을 강조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생략했던 그가 서양화가 시기부터 추구했던 표현 기법의 하나였다.

    6. 나오며

    영화미술가 윤상열의 삶은 영화미술가로만 묶어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삶의 지층을 보여준다. 근대 서양화가 중 한명이었고, 코프 조선협의회의 중요인물이었으며 194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미술가이자 해방공간 마지막까지 영화운동의 최전선에서 뛰었던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이다.

    윤상열의 삶을 정리한 이 논문을 통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화가에서 영화미술가로 진로를 바꾼 정황에 관한 사항이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무라야마의 <춘향전>을 제작을 기획하면서, 무라야마와 함께 도쿄에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동참했던 인물들이 대거 <춘향전>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로키노 출신의 이재명의 기획이었으며 윤상열도 이 기획에 따라 청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영화미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둘째, 해방이후 서울에서 조선영화동맹을 중심으로 한 영화운동에 활동 사항이다. 조선영화동맹을 이끌던 추민이 1946년 월북하면서 조선영화동맹은 이재명, 윤상열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윤상열은 미소공위에 참여할 사회단체의 대표로 추천되었으며, 1947년 8.15를 맞아 좌익진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당시 미군정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셋째, 윤상열의 영화미술의 특징에 관한 사항이다. 윤상열의 선전 출품작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두 가지 이질적 요소를 대비시키는 화법을 구사했다. 이를 위해 세부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기도 했다. 세트의 제작도 이와 마찬가의 특징이 보이는데,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이질적인 공간을 대비하는 전략을 취했다.

    윤상열의 삶을 규정짓는 흔적은 비교적 또렷하다. 하지만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북한에서의 숙청이라는 비참한 결말이 그 흔적을 온전한 모습으로 바라볼 없게 만들었다. 이 논문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는 윤상열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것으로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 윤상열이라는 인물의 윤곽만을 그린 것이다. 그의 삶이 어떠한 색으로 표현되었는지는 연극, 영화, 미술 분야의 후속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찾아야 할 몫이다.

    75)필름이 남아 있는 영화 중에서 <병정님>, <사랑과 맹세> 역시 윤상열이 미술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확인해주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76)손민정, 앞의 논문, 134쪽.  77)윤상렬, 위의 글, 47∼48쪽.  78)이러한 표현은 <지원병>에서 춘호 벽에 걸린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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