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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Japanese Movie in Postwar Period and the Pasts of Militarism Japan 전후 일본영화와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Japanese Movie in Postwar Period and the Pasts of Militarism Japan
KEYWORD
Japan , Japanese Movie , There is not Regret in Our Youth , Kurosawa Akira , the Pacific War , Postwar Reform , Militarism , Demilitarization , Democratization , History , GHQ
  • 1. 서론

    태평양전쟁이 종결된 1945년 8월부터 패전국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변화의 바람을 경험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인의 삶과 가치관은 격동하기 시작하였다. 영화 부문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화는 인지도 높고 영향력 있는 독보적인 대중 영상 오락이자 매체였다.1) 한편으로 일본영화는 끊임없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당대 일본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일본인이 지닌 시대에 대한 의식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해온 터였다. 이에 따라, 전후 일본영화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을 반영하게 된다.

    그렇다면, 전후 일본영화의 시대 반영 양상은 어떠하였을까. 물론 동시기 일본에서의 영화 정책 및 제작 경향에 대한 내용을 폭넓게 들여다본다면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당시 일본영화의 시대반영 양상을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시기 만들어진 모든 영화를 일일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개별 작품에 대한 접근 및 해독에 분명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패전 직후 일본영화중에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현실적인 제약 또한 고려되어야할 부분이다.

    여기서, 경우에 따라서는 어떠한 작품 하나가 특정 시기 영화 제작상의 특징적 경향을 대변할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비록 한 편의 영화라 하더라도, 거기에 자신이 속한 국가나 사회의 시대상이나 시대정신이 뚜렷하게 내포되어 있고 그것들이 동일시기에 있어서는 보편성을 띠면서도 여타시기에 대해서는 특수성을 띠는 것이라면, 그 작품은 충분히 분석될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사적 측면에서 동시기를 대표하는 동시에 연구를 위한 접근이 가능한 특정 작품을 중심으로 전후 일본영화의 시대반영 양상을 고찰하는 일은 관련 연구에 방법론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당시 제작된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패전 다음해인 1946년 10월 29일 개봉된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わが靑春に悔なし)>(1946)2)는 갑자기 밀려들던 수입 외국영화의 물결 속에 흥행 위주의 오락영화가 수적으로 영화 제작의 흐름을 주도하던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테마 영화(テ?マ映?)’3), ‘아이디어 영화’4) 등의 이름으로 시대성을 견지한 작품군의 대표작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었다.5)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흔히 동시기 미국의 대일본 점령정책 기조인 ‘비군사화’ 또는 ‘민주화’를 주제화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는 필연적으로 개별 작품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주의로 발현된, 만주사변 발발(1931)에서 태평양전쟁 종결(1945) 시기에 이르는 이른바 ‘15년 전쟁’기간을 아우르며 설정되어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제작사, 각본가, 연출가는 태평양전쟁 시기 공통적으로 국책영화 제작에 가담한 전력도 있었는데, 제작사인 도호(東寶)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줄곧 일본의 유력 극영화 제작사로 군림하던 회사였고6) 각본을 담당한 히사이타 에이지로(久板栄二郎)와 연출을 담당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는 각각 패전 직후 가장 괄목할만한 활약을 펼치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 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는 전후 일본영화에 당대 일본의 시대상과 일본인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프리즘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이에, 본고는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가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즉, 이 작품에서 그것이 어느 부분에, 어떠한 모습으로, 무슨 이유로 등장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개입된 동시기 일본 사회 및 영화계와의 영향관계를 도출한다. 아울러 그 양상이 일본영화의 제작 경향의 흐름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고찰한다. 그럼으로써, 전후 일본영화의 시대반영양상을 더욱 심층적이고 다각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1)일본에서 텔레비전 방송 시대가 개막된 것은 동년 2월 1일 공영방송사인 NHK가 본방송을, 8월 28일 민간방송사인 니혼테레비(日本テレビ)가 방송을 시작한 1953년의 일이었다. 정현숙ㆍ최영철, 『일본대중문화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6, 72쪽.  2)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이미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DVD타이틀로도 제작된 바 있으며, 201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7.1∼7.25), 필름포럼(7.24∼8.4), 시네마테크부산(8.10∼29) 등의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서 공개상영되기도 하였다.  3)岩崎昶, 『映画史』, 東洋経済新報社, 1961, 218쪽.  4)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박전열 역, 『일본 영화의 이해』, 현암사, 2001, 147쪽.  5)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잡지 키네마 준포(キネマ旬報, 1919년 창간)가 매년 선정하는 ‘베스트 텐’에서, 1946년도 일본영화 부문 1위로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오소네가의 아침>이, 2위로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가 뽑혔는데, 두 작품 모두 여기에 속하는 영화였다. 키네마준포 베스트 텐(キネマ旬報 ベストテン) 홈페이지 http://wonderland02.web.fc2.com/movie/cinema/cinemabest11.html 참조. / 또한,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가 개봉하기 전인 1946년 8월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의 영화 콩쿠르에서는 <오소네가의 아침>이 우수각본상과 우수기술상을, 이마이 다다시 감독의 <민중의 적>이 우수감독상을 수상하였는데, <민중의 적> 역시 그러한 영화들 중에 하나였다. 筈見恒夫, 『映画五十年史』, 創元社, 1951, 368쪽.  6)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극영화의 경우 도호, 쇼치쿠(松竹), 다이에(大映) 등의 3사로, 기록영화와 과학영화를 합친 문화영화의 경우 니혼(日本), 리켄(理究), 덴쓰(電通) 등의 3사로 제작사를 통합한 바 있었으나, 패전 이후 이러한 독과점 형태의 체제가 와해되고 태평양전쟁 이전에 존립하던 회사들이 재설립되는 등 제작사의 구도 변화가 일어났다.

    2. 전후 일본영화에서의 역사적 과거

       1) 전후개혁에 따른 일본의 변화와 일본영화의 과거 소환

    1945년 8월의 시점에서, 일본의 전쟁 패배 인정은 그때까지의 모든 국가적 가치와 수단을 포기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동년 7월 26일 발표된 일본에 대한 연합국 측의 ‘최후통첩’이라 할 수 있는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의 13개 항목은 전쟁종결에 관한 군사적 차원의 내용들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평화적 경향의 정부 수립 및 전쟁 범죄인의 처벌, 민주주의 경향의 부활 강화, 언론ㆍ종교ㆍ사상의 자유, 기본적 인권의 존중 등 향후 일본에서의 새로운 통치세력 및 질서 구축을 예고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8 월 14일 밤에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측에 전달되고 8월 15일 정오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공포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종전조서(終戰の詔書)’의 핵심은 “미ㆍ영ㆍ중ㆍ소 4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데 있었으며, 이에 따라 패전 직후부터 일본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의 대대적인 개혁 작업이 착수되었다.

    물론 일련의 변화 과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패전의 의미를 ‘종전(終戰)’이라는 말로 희석시키며 어떻게든 기존의 천황제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를 위해 “국민들 스스로가 전쟁의 과정을 재검토하는 것을 봉쇄”함으로써 “‘종전(終戰)’이라는 상징으로부터 ‘개전(開戰)’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원인’을 ‘책임’ 고찰의 입장에서 추궁하는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이다.7) 전후 최초의 내각 총리 히가시구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의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창된 것이었는데8) 실제로 이에 대한 당시 언론계나 독자층의 반발은 거의 없었다.

    일본이 제국주의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다수의 일본인은 국가 권력이 제시하는 집단주의 이념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수행하는 침략주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주입된 사상의 틀 속에 갇혀 국가 정책이나 전략 방향에 반하는 어떠한 비판적 언행도 행사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은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입되었던 총력전이었던 만큼, 비록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할지라도 전쟁 종결 직후 일본 국민들이 곧바로 국가 권력의 역사적 선택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재)평가를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전역을 강타한 전후개혁의 파급력은 사회 규범과 제도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까지도 변화시켰다.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SCAP, 이하 GHQ)9)에 의해 실행된 전후 일본에서의 점령정책 기조는 ‘비군사화’와 ‘민주화’였다. 즉, 일본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단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군사적 위협 요소를 일소하는 일이 전후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되고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전쟁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체포지령’(1945.9.11) 및 전쟁 협력자를 대상으로 한 ‘공직추방령’(1946.1.4)의 발포, 대동아성, 군수성, 농상성(이상 1945.8.25) 및 육군성, 해군성(이상 1945.12.1)의 해체, 그리고 ‘인권지령’(1945.10.4)에 의한 치안유지법, 국방보안법, 종교단체법, 특수경찰제의 폐지 등은 그 일환으로서 비교적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들이었다. 특히, 1946년 1월 1일 발표된 히로히토의 ‘천황의 인간선언’ 및 동년 11월 3일 공포된 ‘일본국헌법’(1947년 5월 3일 시행)을 계기로 과거 ‘제국주의’ 일본은 ‘평화주의’ 일본으로, ‘신민’으로서의 일본인은 ‘국민’으로서의 일본인으로 공표되었다.

    GHQ의 강력한 개혁적 지배체제를 경험하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전쟁 시기 일본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그 궤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 패배의 충격과 죄책감, 아픔의 정도는 무뎌진 반면 전후개혁의 성과는 가시화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점차 과거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보다 세밀한 기억과 대담한 접근을 통한 정확한 판단과 진지한 성찰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기 문학, 예술, 사상 분야에서도 강하게 나타났고, 영화 부문에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GHQ 산하 민간정보교육부(CIE, 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는 1945년 9월 22일 군국주의 및 국수주의의 철폐, 자유주의적 경향 및 운동의 촉진, 일본이 다시금 세계 평화 및 안전을 위협하지 못하는 것을 보증하는 모든 조건의 설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제작 방침지시’를 내렸고, 1945년 11월 16일에는 ‘비민주주의적 영화, 연극 제거 방침에 관한 각서’를 교부하였으며, 11월 19일에는 초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봉건주의적 사상을 담은 영화에 대한 소각 및 상영금지를 명령하는 한편 영화제작에 관한 총 13개 항목의 금지규정 리스트를 작성하여 각 영화사에 전달하였다.10)

    이에 따라 전후 일본영화의 제작 경향은 다음과 같이 전반적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첫째, 과거 일본영화는 감소한 반면 수입 미국영화는 크게 증가하였다. 둘째, 시대극의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셋째, 산업적인 차원에서 흥행 위주의 오락영화가 제작 부문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11)

    이러한 가운데 “전쟁 반대의 자유주의 정치가의 고난을 묘사한”12)다나카 시게오(田中重雄) 감독의 <범죄자는 누구인가(犯罪者は誰か)>(다이에 제작, 1945년 12월 27일 개봉)를 시작으로, 1946년에 들어서면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 이외에도 패전 전후 시기에 걸친 재벌과 군벌의 비리를 폭로한 이마이 다다시(今井正) 감독의 <민중의 적(民衆の敵)>(도호 제작, 4월 25일 개봉)이나 이기적인 퇴역군인의 모습을 통해 군국주의의 속성을 고발한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오소네가의 아침(大曾根の家朝)>(쇼치쿠 제작, 2월 21일 개봉) 등과 같이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작품들이 동시기 일본영화 제작 경향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패전 직후부터 일본에서는 전후개혁이 단행되었고 이에 따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그런데 당시 점령정책의 기조가 비군사화와 민주화였던 바, 전후개혁 실시 과정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는 자연스레 (재)평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는 당시 미국의 강력한 통제 하에 놓여 있던 영화계로도 이어져, ‘테마 영화’ 또는 ‘아이디어 영화’로서 동시기 일본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일련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과거가 영화의 내면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작으로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가 있었다.

       2) 역사적 과거를 통한 시간적 배경의 구축 및 주제적 성격의 강화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야기바라(八木原, 大河内傳次郎 분) 교수의 딸 유키에(幸枝, 原節子 분)가 아버지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노게(野毛, 藤田進 분)를 사랑하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획득하며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낸다는 줄거리의 작품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의 축은 유키에-노게의 관계와 이별, 재회와 결혼, 노게의 죽음과 유키에의 생활 등으로 세워져 있는데, 이를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구조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1930∼40년대 일본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 상의 내재적(diegetic) 시간은 1933년, 1938년, 1941년, 1945년 등 크게 네 시기로 나뉘어져 있고 이를 토대로 각각의 시퀀스가 배열되어 있는데, 이들 시기의 시간적 경계는 대표적인 외재적(nondiegetic) 표현 형식인 자막을 통해 분절되어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타이틀 자막 및 엔딩 자막을 제외한 중간 자막은 시간적 배경 뿐 아니라 공간적 배경, 시대 상황, 주제 의식 등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영화의 가장 처음 부분에 위치한 첫 번째 자막은 프롤로그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벌, 재벌, 관료는 제국주의 침략의 야망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의 사상통일을 목적으로 우리들의 침략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사상을 적색분자로서 탄압하였다. 교토대학사건(京大事件, 1933)도 그 하나였다.”라며 시대적 환경에 대해 설명한다. 또한 이 작품이 교토대학 사건으로 소개하는 다키가와 사건(滝川事件, 1933)13)을 모티프로 만들어졌으되 등장인물은 작가의 창작 활동에 의한 허구적 인물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첫 번째 자막으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京都(교토)”라는 두 번째 자막은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지시하는 동시에 관객을 스토리 안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두 번째 자막 다음에는 요시다산(吉田山)에서의 소풍 시퀀스가 나오고 그것이 끝나면 세 번째 자막이 뜬다. 세 번째 자막은 “昭和 8년(1933년)”이라는 단순한 시간적 정보만을 제공한다. 요시다산 시퀀스의 시간적 배경은,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세 번째 자막 이후 시퀀스들의 그것과 동일한 1933년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두 번째 자막과 세 번째 자막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세 번째 자막이 다키가와 사건의 극중 버전인 ‘야기바라 교수 사건’을 강조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서 고안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한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각각 “昭和 13년(1938년)”, “昭和 16년(1941년)”으로 두번째 자막처럼 단지 연도만을 표기한다. 다섯 번째 자막 다음에는 야기바라 교수와 과거 그의 동료 교수의 대화 장면이 잠시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 여섯 번째 “東京(도쿄)”라는 자막이 나오면서 등장인물들의 활동 영역이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의 경우는 “심판의 날 -패전- 그리고 자유 소생하는 날”로 패전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듯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는 모두 일곱 번의 중간 자막 삽입을 통해 일차적으로 내러티브 상의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특히 시간적 배경을 구축한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자막은 연도 표시를 통해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첫 번째, 일곱 번째 자막은 다키가와 사건과 패전 등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유도하며 작품 전체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적 구조의 기본 골격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패전(1945)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일련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들 사건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영상, 편집, 자막, 소리(대사, 음향, 음악) 등 다양한 영화적 형식으로 암시한다. 이로 인해, 관객의 입장에서 만주사변은 첫 번째 자막을 비롯하여 요시다산에서의 쓰러진 군인의 모습과 총 소리 및 야기바라 교수의 집에서 유키에와 이토가와(糸川, 河野秋武 분)를 앞에 두고 펼쳐지는 노게의 대사를 통해, 중일전쟁은 야기바라 교수 사건이 야기바라 교수 및 학생 측의 패배로 마무리된 이후 교토제국대학 학생들의 모습과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5년의 세월이 지난 뒤 군인들의 모습과 그들이 부르는 군가로 디졸브(dissolve)되면서, 태평양전쟁은 노게 사건에 연루된 유키에가 형사들에게 심문을 받던 경찰서의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 및 12월 8일을 가리키는 달력을 통해 시청각적으로 인식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과거가 영화 내에서 단지 내러티브 상의 시간적 배경을 구축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작품 전체의 성격을 드러내거나 주제를 표출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 개입되어 있는 과거 일본의 시대적, 역사적 층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일본의 파시즘화 및 패전 등의 시대적 배경과 노게 및 유키에의 학생운동, 반전운동, 농촌문화운동 등의 공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역사가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이야기 구조의 논리를 강화하고 관찰자 의식의 흐름을 주도한다. 이 작품이 멜로드라마의 외양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분류될 수 없는 이유이다.

    7)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연구공간 ‘수유+너머’ 일본근대사상팀 역, 『근대 일본사상사』, 소명, 2006, 396∼397쪽.  8)1945년 8월 25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내각을 구성한 황족 출신 히가시구니노미야 나루히코는 “군사력의 부족, 과학의 낙후, 행정의 실패와 더불어 ‘국민도의(國民道義)의 저하’”를 패전의 이유로 들며 “전쟁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고 획일적인 ‘총참회’를 주창함으로써, 그룹 단위의 책임 추궁을 회피하”였다. 위의 책, 395∼396쪽.  9)General Headquarters/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의 약자이며, 1945년 10월 2일 설치되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간접통치 방식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미국 정부의 정책 방침에 따라 GHQ/SCAP이 일본 정부에 지령을 하달하여 실행시키는 형태였다. 이때 일본 정부에 대한 GHQ/SCAP의 명령은 1945년 9월 20일 발포된 ‘포츠담선언 수락에 수반하여 행하는 명령에 관한’(일명 ‘포츠담 명령, 신헌법 시행 후부터는 정령)에 의거하여 초법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GHQ/SCAP은 일본의 각 지방에 군정부를 설치하여 일본 정부의 명령 수행 상황을 체크하기도 하였다.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노길호 역, 『일본 현대사』, 구월, 1993, 18쪽.  10)금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것, 2. 복수에 관한 것, 3. 국가주의적인 것, 4. 애국주의 또는 배타적인 것, 5.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는 것, 6. 인종적 또는 종교적 차별을 시인한 것, 7. 봉건적 충성심 또는 생명의 경시를 옳은 일 또는 명예 로운 것으로 한 것, 8. 직간접을 불문하고 자살을 시인하는 것, 9. 부인에의 압제 또는 부인의 타락을 취급하는 일, 10. 잔인비정폭행(殘忍非情暴行)을 구가(謳歌)한 것, 11.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것, 12. 아동 착취를 시인하는 것, 13. 포츠담 선언 또는 연합군총 사령부의 지령에 어긋나는 것. 田中純一郞, 『日本映画発達史 Ⅲ』, 中央公論社, 1980, 233쪽.  11)함충범, 「전후개혁에 따른 일본영화계의 변화 양상 연구 (1945∼1948)」, 『인문과학연구』 27집,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0, 530∼531쪽.  12)瓜生忠夫, 『戦後日本映画小史』, 法政大学出版局, 1981, 23쪽.  13)다키가와는 당시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교수였으며,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서는 야기바라 교수의 실존 모델이기도 하다. 다키가와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 일본에서 군부 파시즘이 성행하는 가운데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때 극우단체 및 문부성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의 다키가와 유키도키(滝川幸辰)를 ‘적화 교수’라고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1932년 10월 다키가와의 강연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타난 형벌사상」을 문제 삼아, 국가 비판적 언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문부성이 교토제국대학에 시정을 요구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제64의회에서 정우회(政友會)의 미야자와 유타카(宮澤裕)가 다키가와의 저서 『형법독본』를 예로 들며 당시 문부성 대신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에게 적화 교수에 대한 단속 결의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동년4월 10일 다키가와의 『형법독본』과 『형법강의』가 내무 대신에 의해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고, 문부성은 이를 이유로 다키가와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교수회는 이것을 거부하였으나, 문부성은 5월 25일 다키가와의 휴직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법학부 교수회는 학문적 자유와 대학 자치의 유린 행위에 대해 항의한 후 일동으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법학부를 비롯한 각 학부의 학생들 역시 교수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여타 대학생 및 시민에 호소하는 한편 문부성에 항의하는 등 적극적인 학생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6월14일 고니시(小西重直) 총장이 사직한 후, 결국 새로운 총장 마쓰이(松井元興) 체제 하에서 7명의 교수가 잔류하고 다키가와를 비롯한 7명의 교수, 4명의 조교수, 8명의 강사 및 조교가 사직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학생 운동의 조직 또한 당국의 탄압에 의해 와해되었다. 이후 다키가와는 영화에서처럼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고(1939) 전후에는 교토대학으로 복귀하였으며(1946) 1953년에는 교토대학 총장에 오르기도 하였다. 야후 재팬 백과사전(http://100.yahoo.co.jp/) 참조.

    3. 영화 속 과거와 영화 밖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서 노게와 이토가와는 만주사변 이후 발생한 1933년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와 야기바라 교수 사건을 겪으며 삶의 노선과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는데,14) 그들 사이에서 유키에의 마음은 이토가와보다는 노게에게 향한다. 그러다가 중일 전쟁을 거치며 이토가와는 검사로 출세하고 노게는 좌익 활동을 지속 하지만, 유키에는 노게와 결혼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노게는 체포되고 유키에 역시 심문을 받는다. 태평양전쟁의 발발 직후 유키에는 풀려나지만 노게는 옥사한다. 이를 계기로 유키에는 노게의 고향으로 가서 그의 노부모와 함께 밭을 개간한다. 결국 패전의 날이 온 후 야기바라 교수는 복직하고 노게의 전력(前歷)은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유키에는 다시 노게의 고향에서 농촌문화 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과거 일본의 집단적 역사가 극중 등장인물들로 대변되는 개개인의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내비춘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삶이 마치 과거 일본의 역사적 궤적에 종속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등장인물 누구라도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은 그야말로 주어진 상황일 뿐이며, 인간 본연의 사고와 의지까지 지배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몸은 고단하지만 정의로움을 지닌 노게도, 생활은 안정적이나 떳떳하지 못한 이토가와도 인생의 결단의 책임은 결국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유키에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게를 좋아하고 그를 찾아가고 그와 결혼하고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과정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유키에의 자기성찰 및 자아실현의 과정을 그린 성장영화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 영화가 동시기 일본인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거의 인물형을 통해 현재의 대중에게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둘을 잇는 특별한 의미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에, 영화는 전전(戰前)‘군국주의 일본’의 과거와 전후(戰後) ‘민주주의 일본’의 현재의 시간적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이에 대해, 자막에 의해 분절되어 있는 주요 시기의 시퀀스 내용 별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야기바라 교수 사건 이전의 1933년. 어느 화창한 날 야기바라교수 부부와 유키에, 그리고 일곱 명의 청년 제자들이 교토의 요시다산에 오른다. 발랄한 성격의 스무 살 처녀 유키에는 노게와 이토가와로부터 관심을 받는다. 노게는 적극적이고 대담한 반면 이토가와는 다소 소극적이고 소심하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시냇물 신에서 대비되며 묘사된다. 건너편에서 둘은 모두 유키에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녀는 선뜻 손을 잡지 못한다. 이때 노게는 주저 없이 물에 발을 담그며 유키에를 손에 안고 시내를 건너간다. 이를 본 다른 학생들은 노게에 게 박수를 보내고 이토가와는 무안해 한다. 이때 유키에가 의기소침해 있는 이토가와에게 장난을 걸고 산 정상으로 달려간다. 나머지 학생들도 그녀를 따라 올라간다. 산 정상에 오른 젊은이들은 한가로이 교토시내를 바라본다. 그 중 한 학생이 교토제국대학을 가리키며 격앙된 목소리로 “자유, 자유의 학원 교토제국대학, 빛나는 상아탑, 학문의 메카, 자유의...”를 외치는데, 이때 어디서인가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려온다. 노게는 입버릇처럼 만주사변 이후 시대는 변하고 있고 이제 자유를 외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걱정한다. 이러는 그 에게 면박을 주며 산 밑 작게 보이는 군인들을 발견한 유키에는 총소리가 듣기 좋다며 숲 쪽으로 다가가고, 거기서 사경을 헤매며 쓰러져있는 군인을 발견한다. 한편, 자신의 딸과 제자들을 뒤따라 산으로 올라가던 야기바라 교수 부부 또한 산 중턱에서 총소리를 듣는다.

    비록 영화의 물리적 시간 및 스토리 시간 양면에서 다소 짤막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러한 내용의 요시다산 시퀀스는 영화 초반부에 위치하며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선, 극의 전체적인 방향과 흐름에 대한 복선의 기능을 담당한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군인들의 총소리에 파묻혀 버리는 장면은 향후 일본에서의 군국주의적 파시즘의 대두를, 쓰러진 군인의 모습은 일본의 전쟁 패배를 암시한다. 아울러 시냇물 신은 유키에가 이토가와가 아닌 노게와 동고동락하며 이 둘이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일을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시사한다. 다음으로, 평화와 자유의 마지막 시기로 상징된다. 극중에서 유키에와 노게 부부는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숲 속 꽃밭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이 장면은 노게가 부는 휘파람 소리의 리듬과 더불어 영화의 처음 부분과 연결된다. 중요한 점은 이를 통해 당시 관객들이 특별한 연상 작용을 경험하였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즉, 전쟁과 패전을 경험한 일본인이라면 15년 전쟁 이전 평화의 시기란 곧 (극중에서 학생들이 교토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듯이) 제한적이나마 군국주의적 파시즘과 침략주의적 팽창정책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가능하던 시기에 다름 아니었다는 고찰을 계기로, 또 다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치 노게 또는 유키에처럼) 일본 국민으로서 무엇보다 자유를 부르짖고 그 권리를 행사해야 함을 무의식적으로나마 공감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보다 다양한 시퀀스를 통한 내러티브 전개 과정을 거치며 갈수록 짙어지게 된다.

    둘째, 야기바라 교수 사건 이후의 1933년. 문부성의 야기바라 교수퇴임 조치를 다룬 신문 기사 장면을 시작으로 야기바라 교수 사건의 전말이 공개된다. 야기바라 교수 사건의 본질이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에 있다고 주장하던 노게는 학문 및 언론의 자유와 파시즘 반대를 슬로건으로 걸고 학교에서 학우들과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그러는 와중에 야기바라 교수 사건 역시 당국의 탄압과 문부성의 회유책, 일부 교수들의 굴복이 겹치며 야기바라 교수의 사직으로 일단락된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다양한 다큐멘터리 화면과 신문 지 면을 통해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사건 종결 이후 야기바라교수의 집에서는 야기바라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향후 학생들의 행동 방향에 대해 토론하는데, 여기에서 야기바라 교수는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다. 이 자리에는 유치장에서나와 본격적인 좌익운동을 도모하던 노게와 집에서 어머니의 눈치를 보던 이토가와는 참석하지 않는데, 이를 통해 노게와 이토가와의 성격 및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대비된다.15)

    눈에 띄는 부분은 유키에의 마음이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이토가와보다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노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야기바라 교수 사건 초기 그의 집에서 유키에와 이토가와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16) 노게와의 설전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유키에는, 노게가 돌아간 뒤 담배를 입에 무는 등 안절부절 못하다가 남아 있던 이토가와에게 이유없이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이토가와는 결국 그렇게 하고 만다. 그를 일으켜 세운 후 괴로워하는 유키에는, 누구한테든 심한 말을 일삼는 노게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하는 이토가와에게 “괜찮지 않나요? 노게 씨는 진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당신은 그 정도의 말은 할 수 없어요.”라며 오히려 그의 말을 반박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유키에, 노게, 이토가와의 모습과 과거 전쟁에 대처한 일본 국민들의 모습에 알레고리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이 작품이 나온 시기로도 확장된다. 자신들을 지배하던 일본적 가치를 상실한 채 아노미를 경험하던 당시 일본인의 입장에서, 노게로 대변되는 사회 모순을 파헤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형과 이토가와로 대변되는 불의에 눈감고 개인적 안위와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형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그들이 당면한 가장 중요하고 당위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셋째, 1938년. 학원의 자치와 자유가 없는 시대를 자조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던 교토제국대학 학생들의 모습이 “꼭 이기겠다고 씩씩하게 맹세하고 나라를 떠난 이상 공을 세우지 않고 죽을 수 있나...”라는 가사의 군가를 부르는 군인들의 행진 모습으로 바뀌고, 그 길을 스물다섯 살이 된 유키에가 지나간다. 유키에는 타자(打字)를 배우고 꽃꽂이를 하며 피아노를 치기도 하지만 왠지 그녀의 생활에는 생기가 넘치지 않는다. 한편 검사가 되어 꾸준히 야기바라교수의 집에 드나들던 이토가와는, 어느 날 자신의 보증으로 1년 전 전향을 위장한 채(이는 나중에 노게의 반전 활동을 통해 밝혀진다) 출옥한 노게를 야기바라 교수의 집에 데려간다. 그런데, 오랜만에 노게를 만난 유키에는 계속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의 방에서 괴로워 한 후 어색한 인사로 그를 돌려보내고 만다. 그러다가 결국 집을 나가 도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짐을 싼다. 아버지의 만류에 울음을 터트린 그녀는 “지금의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적어도 세상 속에 들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스스로가 확인해 보고 싶어요.”라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이에, 야기바라 교수는 “자기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유키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겠지?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힘든 희생과 책임이 있다 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라며 딸의 결정을 존중한다.

    시간 상 많은 양을 차지하거나 스토리 상 비중 있는 사건이 배치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제적으로는 영화 전체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온실의 화초와 같이 생활하던 유키에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세상으로 나가서 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로 다짐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모든 과정 및 결과가 자기 스스로의 고뇌와 결심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토가와에게 그와 결혼한다면 평온하지만 지루한 생활을 할 것 같은 반면 노게와 결혼한다면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생활을 할 것 같다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구로사와 아키라는 유키에의 고민과 고통의 모습을, 노게의 방문 시 자신의 방 장면에서는 다섯 쇼트의 빠른 디졸브로 처리하고 있으며, 아버지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극도의 긴장감이 넘치며, 심정의 변화는 비약적으로까지 격하게 표현”17)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눌려온 외부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생활을 자기 스스로가 꾸려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패전 직후의 시점에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덕목이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전쟁과 패전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잃게 하였지만 동시에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계기로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자유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야기바라 교수의 대사에 권위가 실려 들려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8)

    넷째, 태평양전쟁 이전의 1941년. 도쿄 길거리에서 유키에와 이토가와가 우연히 마주친다. 이미 가정을 꾸린 이토가와는 유키에에게 식사를 권하고, 레스토랑에서 그는 노게의 글이 실린 잡지를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노게의 소식을 알려준다. 이후 유키에는 노게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서성이다 노게와 재회한다. 사무실에서 유키에는 노게에게 몸도 마음도 무엇이든 내던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그의 비밀을 자신에게 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노게는 자신의 일은 위험하다며 만류한다. 그는 ‘동아정치경제문제연구소’에서 반 전 활동을 벌여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노게의 사물실 장면에서 이러한 내용을 두 인물의 모습과 행동을 그림자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암시한다. 그러나 유키에의 의지 또한 확고하다. 결국 노게는 그녀의 진심을 확인하고, 둘은 조촐하나마 가정을 꾸린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해 보이나, 남편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키에의 마음은 항상 초초하고 불안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방해 대 음모 사건’19)의 주범으로 노게가 체포되고, 이어 유키에도 경찰서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는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유키에와 노게의 애정이 결실을 보이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여성인 유키에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그것보다 낮았었고, 이는 메이지이신(明治維新, 1968) 이래 급속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1898년 도입된 이에제도(家制度)는 여성과 남성의 차별을 당연시하였다.20) 따라서 전후 일본에서 미국은 여성의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로 치환하며 법과 제도로서 그것을 개선하려 하였다.21) 그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 바로 1945년 12월 17일 선거법 개정을 통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과 1947년 12월 27일 민법 개정을 통한 이에제도의 폐지였다.22) 이렇게 볼 때, 노게와의 결혼 전후 시점에서 유키에의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적극적인 모습은 다분히 이 작품이 제작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진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부분 한계도 노정되어 있다. 노게가 있는 곳을 찾아간 이도, 그에게 손을 내민 이도 유키에이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남성인 노게라는 점이 그것이다. 결혼 후에도 유키에는 노게의 반전 활동을 묵묵히 격려하며 그를 지탱한다. 이러한 그녀의 이미지는 오히려 과거의 여성상과 흡사하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에의 언행에 새로움이 묻어나는 것은, 비록 그것이 남성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따르는 세상의 가치가 노게의 대사에서처럼 “10년 후에 진상이 알려져 일본 국민으로부터 감사받을 만한 그런 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후 노게가 없더라도 그녀는 홀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선봉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태평양전쟁 이후부터 패전까지. 유치장에서 풀려난 유키에는 아버지를 따라 교토의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야기바라 교수는 노게를 변호하기 위해24) 도쿄의 이토가와를 찾아가지만 그로부터 노게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급사(急死)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를 알게된 유키에는 잠시 충격에 휩싸였으나 정신을 차리고 짐을 꾸려 노게의 고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그의 노부모가 ‘스파이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짊어진 채 사람들을 피해 밤에만 농사일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유키에는 그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심하고 노게의 모친을 따라 농기구를 들어 밭을 간다. 어느 날은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굴하지 않은 채 집 대문을 가로막던 나무판을 치우고 당당히 밝은 대낮에도 밭에 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유키에의 주관적 시점 쇼트로서 카메라에 담긴다. 이후 유키에는 노게의 모친과 함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고달픈 몸을 이끌고 밭을 갈고, 드디어 모내기를 완료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어렵게 일군 밭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망쳐지고 거기에는 ‘매국노’, ‘스파이’ 등이 적힌 깃발이 꽂혀진다. 망연자실해 있는 노게의 모친을 뒤로 하고 유키에는 깃발을 뽑아내며 밭을 복구한다. 곧이어 노게의 모친도 일을 거둔다. 그리고 이때, 그동안 집에서 아무런 반응없이 앉아만 있던 노게의 부친이 달려와 말문을 열고 쓰러진 모종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노게의 마을에 이토가와가 방문한다. 밭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그를 만난 유키에는 노게가 길을 잘못 들어 불행하게 되었다는 이토가와의 말에 어느 길이 과연 정당한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라고 대답하며 노게의 묘의 위치라도 가르쳐달라는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에 이토가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간다.

    노게의 죽음은 유키에를 ‘스파이’로 낙인찍힌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오히려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자각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기도 하였다. 유키에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남자에게 맡기는 가녀린 여성이 아니다. 열악한 환경도, 궂은 날씨도, 특히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따돌림도 그녀의 신념과 의지를 꺾을 수 없다. 그런데 개봉 당시 관객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유키에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비추어졌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동화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속삭임이 타자화되어 재생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전쟁 시기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유키에보다는 그들에 가까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키에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의 작가도, 감독도, 배우들도거의 모두 전쟁협력자들이었고 그래서 이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동질감이 생겼다는 데 있다. 어쨌든 유키에의 성격이 변화하고 그녀가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관객과 그녀 간의 심리적인 거리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녀가 후반부에서 갑자기 노게의 고향인 시골로 가서 농사일을 하는 설정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25)라는 내러티브 관련 비평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표현에 관해서는 “200커트에 달하는 굉장한 영상 표현의 작렬”26)과 격동적인 카메라워크로 인해 ‘エキセントリック(eccentric)’, ‘アブノ?マル(abnormal)’ 등의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27) 실제로 영화에서 이 부분은 다큐멘터리 양식의 분위기가 풍기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노게의 학생운동 장면보다도 오히려 더욱 거칠고 과격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부분이 무엇보다 “일본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데에는 여성도 자아를 갖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28)는 주제적 측면에 있는 이상, 그것이 비록 생소할지라도 유키에의 성격과 행동은 변해야 하고 또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였을 때 비로소, 영화에서처럼 유키에의 모습이 이토가와의 경우와는 반대로 당당하고 곧을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1945년 패전 이후. 교토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야기바라 교수는 학교의 자유 및 일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써 ‘학교의 자랑’이 된 노게의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 교단 복귀를 결의하였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오랜만에 교토의 부모님 집에 돌아온 유키에는, 노게의 부모가 그를 이해하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냐며 유키에에게 노게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어머니를, 자신은 이미 그곳에 뿌리를 내렸고 열악한 마을 사람들(특히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지금부터의 삶의 보람이라는 말로 설득한다. 그리고 12년 전 노게와 함께 건넜던 요시다산의 시냇가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잠시 옛일을 회상한 뒤 노게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노게의 고향에 이르렀을 때 마침 지나가던 트럭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유키에를 알아보고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하며 차에 태운다. 트럭은 농촌문화운동의 지도자인 유키에와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힘차게 시골의 오솔길을 달려간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첫 장면에서의 교토대학의 종소리는 (영화 첫 부분의 총소리와는 반대로) 전쟁의 종결로 학원의 자유와 세상의 평화가 회복되었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모두 예전으로 돌아왔지만 그들 사이에 노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키에의 입장에서 노게의 고향에 돌아가 계속하여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뒤돌아봐도 후회 없는 생활’을 하자는 노게의 뜻에 따르는 삶이야말로 그와 함께 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뒤돌아봐도 후회 없을, 의미 있는 삶은 어떠한 것인가. 유키에는 그것을 당시 시대 상황에 맞게 농촌에서 찾고 있다. 패전 직후 전후개혁 과제 중에서도 경제 분야에서의 그것은 GHQ의 중요 관심사 중에 하나였다. 경제 문제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팽창주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에서 의 민주주의 정착의 토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취해진 일이 재벌 해체 및 노동 개혁에 관한 일련의 조치들이었다.29)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농촌에서는 농지개혁이 단행되었다. 1945년 12월 29일 농지조정법 개정안에 따른 제1차 농지개혁과 1946년 10월 21일 농지조정법 재개정안 및 자작농창설특별법에 따른 제2차 농지개혁은 농가의 토지소유 분배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는데30) 공교롭게도 제2차 농지개혁 관련 법안이 공포된 시점이 이 작품의 개봉일과 거의 비슷하다. 때문에, 영화는 유키에의 농촌문화운동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내러티브에서도, 현실세계에서도 그것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닌 동시기의 현재이자 미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31)

    이와 같이,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간의 시대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각각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를 보는 관객들은 과거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등장인물에 동화되거나 거부감을 느끼거나 또는 그(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거나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영화 속 과거는 영화 밖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게 되고, 영화를 둘러싼 현실은 작품에 반영되거나 그 안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개봉 년도인 1946년 시점에서 패전국 일본 국민이 자국의 역사와 자신의 개인사를 돌아보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중대한 가치인 자유와 평화를 위해 매진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32)라는 E. H. 카(Carr, EdwardHallett)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전후 일본에서도 영화는 여전히 역사를 기록하고 수정하며 또 다른 현실을 역사에 기입하는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쓰즈키 마사아키(都築政昭)는 이들을 “전시 하에 살던 인텔리의 두 전형”으로 보고 있다. 都築政昭, 『黒澤明-全作品全生涯』, 東京書籍, 2010, 135쪽.  15)결국 이토가와는 다른 학생들이 돌아간 뒤에서야 야기바라 교수의 집에 방문하는데, 거기에서 유키에로부터 야기바라 교수가 자신의 제자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학생운동을 펼치는 것에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한다. 이때 유키에는 이토가와에게 다른 학생들이 그를 배신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 말을 들은 이토가와는 힘없이 밖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와 유키에에게 자신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며 변명한다.  16)노게는 문부성 대신의 반성을 요구하던 야기바라 교수의 처사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님을 지적하는데, 유키에는 이를 무시하고자 이토가와를 데리고 피아노 앞으로 간다. 이에 노게는 유키에에게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며 쓴 소리를 한다. 그러다가 노게는 유키에의 피아노 소리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현관에서 마주친 이토가와 교수에게 자신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후 집을 나선다.  17)山田和夫, 『黒澤明-人と芸術』, 新日本出版社, 1999, 68쪽.  18)야기바라 교수의 말은 이후 플래시백 사운드 형태로 보이스 오버되어 유키에의 입과 뇌리에서 재생되기도 한다.  19)이 사건은 실제로 1941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조르게 사건(Richard Sorge)’으로 알려져 있는 전쟁 시기 최대의 국제적 스파이 사건을 연상시킨다. 조르게는 독일 공산당 출신의 소련의 스파이였는데, 그는 1933년부터 일본에서 첩보 활동을 벌였다. 당시 일본에서 그에게 협력한 일본인으로는 아시히(朝日)신문사 기자 출신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実), 화가 출신 미야기 요도쿠(宮城与徳)등이 있었다. 이들은 1941년 10월 10일 미야기가 검거된 후 차례로 체포되었고, 1943년 국방보안법, 군기보호법,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다. 결국 조르게와 오자키는 1943년 9월 사형이 판결, 1944년 11월 7일 집행되었고, 미야기는 옥사하였다. 야후 재팬 백과사전(http://100.yahoo.co.jp/) 참조. / 고바야시 노부히코(小林信彦)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노게는 초고까지만 해도 오자키를 모델로 하여 창조된 캐릭터였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위주로 이루어진 도호의 각본심의회에서 당시 공산당원이자 노동조합의 실세였던 우메다 기요시(梅田清) 감독의 <생명있는 한(命ある限り)>라는 작품 또한 조르게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양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압력을 받은 후, 시나리오 후반부가 바뀌었다. 小林信彦, 『黒澤明という時代』, 文藝春秋, 2009, 39쪽.  20)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나가노(長野)현의 어느 중학교에서 있었던 육군성의 식량연구 특수부대 부대장의 연설문에는 “미국은 우리 제국과 달리 여성에 의해 여론이 형성되는 연약한 국가 체질이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井出孫六, 「前後史」, 『世界』, 1988.8 / 김필동, 『일본적 가치로 본 현대일본』, 제이앤씨, 2007, 17쪽에서 재인용) 이는 당시 일본의 국가 권력부터가 노골적으로 남성성을 표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단적인 예가 된다.  21)패전 직후 일본의 학계에서는 이에제도의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시도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와시마 다케요시(川島武宜)의 「일본사회의 가족적 구성(日本社會の家族的構成」(1946)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권위에 의한 지배와 권위에의 무조건적 복종, 이로 인한 개인적 행동 및 책임감의 결여, 자주적 비판 및 반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규범, 위계적 가족관계와 배타성 등을 이에제도가 낳은 비근대적인 가족 원리로 규정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근대적 가족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2)선거법의 개정을 통해 여성참정권이 부여된 이후 1946년 4월 25일 최초로 치루어진 중의원 선거에서는 여성 의원이 39명이나 배출되었으며, 민법의 개정을 통한 이에제도의 폐지로 호적의 단위는 이에에서 부부 및 자녀로 바뀌었고 호주권 및 장남의 가독 상속이 부정되었다. 정현숙ㆍ김응렬, 『현대일본사회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5, 18, 21쪽.  23)이는 전쟁 시기 국가권력이 여성에게 강요한 ‘군국의 어머니(軍國の母)’의 잔상으로도 비추어진다. 더욱이 이 작품의 주인공 하라 세쓰코(原節子)는 전쟁 시기 가장 대표적인 여배우로서 수많은 군국주의 국책영화에서 전장에 출정하는 군인을 후방에서 보좌하는 여성의 역할을 맡은 바 있었다.  24)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야기바라 교수는, 이토가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집에 법률사무소를 차려놓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25)이정국, 『구로사와 아키라』, 지인, 1994, 96쪽.  26)山田和夫, 앞의 책, 69쪽.  27)小林信彦, 앞의 책, 38쪽.  28)사토 다다오(佐藤忠男), 유현목 역, 『일본영화 이야기』, 다보문화, 1993, 284쪽.  29)GHQ는 1945년 11월 2일 재벌의 재산 동결 및 해체를, 1946년 8월 22일 이를 위한 지주회사정리위원회(持株會社整理委員會)의 설립을 지시하였다. 1947년에 4월 14일에는 독점금지법(獨占禁止法)이, 동년 12월 18일에는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過度經濟力集中排除法)이 공포, 시행되었다. 한편, 1945년 12월 22일 단결권, 단체교섭권, 쟁의권 등을 보장하는 노동조합법이, 1946년 9월 27일 노동위원회를 통한 노동쟁의의 해결 및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의 구제 등을 다룬 노동관계조정법이, 1947년 4월 7일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에 따른 노동조건을 명시한 노동기준법이 공포되었다. 함충범, 앞의 논문, 519쪽.  30)위의 논문, 같은 쪽.  31)농지개혁은 1949년경에 거의 완료되었는데, 그 결과 소작지의 비율은 46%에서 13%로, 소작농의 비율은 28%에서 8%로 하락한 반면 자작농의 비율은 28%에서 55%로 상승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지주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후지와라 아키라 외, 앞의 책, 43쪽.  32)E. H. 카(Carr, Edward Hallett), 권오석 역, 『역사란 무엇인가』, 홍신문화사, 1994, 38쪽.

    4. 전후 일본-일본영화, 과거에 대한 부정 및 청산의 시도와 한계

       1) 과거부정에 있어서의 이중적 태도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서 등장인물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이는 유키에이지만, 그녀가 영화의 배경과 주제의 토대가 되는 역사적 사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살펴본 바처럼, 다키가와 사건을 모태로 하는 교토대학 사건의 핵심인물은 그녀의 아버지인 야기바라 교수이고 조르게 사건을 모태로 하는 전쟁방해 대 음모 사건의 핵심인물은 그녀의 남편인 노게이다. 그들은 각각 전쟁 시기 일본 군국주의와 반대편에 섰던 대표적인 자유주의자 다키가와 교수와 사회주의자 오자키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키에의 모습에 영화의 메시지가 집중적으로 발산되는 이유는 그녀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키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비교적 확실히 표현하는, 전통적인 일본의 여성과는 대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생의 가치에 대한 확신의 부재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에, 영화 초반부에는 삶에 대한 목표가 불확실하고 시비(是非)에 대한 분별력이 미약한 나약하고 의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점차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강인하고 자기주체적인 인물로 변모되며, 결국에는 야기바라 교수와 노게를 잇는 모범적 인간형으로 거듭난다.

    그 과정에서 유키에의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과거 일본인의 모습과 대비된다. 여기서 그녀를 심문하는 경찰서의 담당 형사들이나 그녀를 따돌리는 노게의 고향 마을의 주민들, 특히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이토가와의 모습은 과거 일본인의 모습을 대변하며, 이때 일본인의 모습은 시대 상황을 암시하는 영화적 장치와의 결합을 통해 군국주의 일본의 단면으로 치환된다. 요컨대, 이 작품에서 과거 일본의 모습은 개개인의 보편적인 일본인의 모습이 집단화된 채 상대적인 위치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는 이 영화가 제작되 던 당시의 현실적 환경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GHQ의 전후개혁은 일본이 재차 세계 평화와 안전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두어졌다. 굳이 나누자면 비군사화는 이를 위한 단기적인 측면의, 민주화는 장기적인 측면의 정책기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과거 일본과의 절연을 통해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과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본의 과거를 냉철하게 (재)평가하는 일이었다. GHQ가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등 대중매체 분야에서만큼은 간접통지 방식이 아닌 직접통치 방식을 취하였던 이유도 이것들을 통제하고 이용하여 당 시 일본인들로 하여금 일본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것과의 단절을 꾀하도록 유도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전후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과거에 대한 비판적 통찰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문학계의 경우, 1946년에 발표된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新潮』, 1946.4)이나 기다 미노루(きだ みのる)의 「미치광이 부락 주유기행(気違い部落周游紀行)」(『世界』, 1946) 등이, 아오키다모쓰(靑木保)의 표현대로 과거 일본에 대한 당시 일본인의 “부정적 특수성의 인식”33)의 소산이라 할만하다.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여서, 특히 전쟁 시기 국책영화의 자리는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거나 그것들을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한 일련의 작품들과 과거 일본에 존재하였던 민주화 관련 인물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삼으며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작품들”34)로 채워졌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에 가장 민첩하게 반응하고 그 변화를 주도한 쪽은 바로 좌익 계열, 그 중에서도 정치 분야에서의 일본공산당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재건되고 10월 19일 합법화되어 12월 1일부터 정당 활동을 시작한 공산당은, 12월 8일 전쟁 범죄자 추궁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여 사회당 간부와 대중소설 작가가 비롯한 전쟁범죄자 제1차 리스트를 발표하였다. 당시 정부 및 일본진보당, 일본자유당 등 보수정당은 물론 일본사회당까지도 이에 대한 정면 돌파를 꺼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에나가 사부로의 언급대로 이러한 행동은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 내적인 사상 원리에서 출발해야 마땅했던 전쟁 책임 문제가 여기서는 인명 리스트로 실체화되고, 게다가 그것이 전쟁 ‘범죄자’라는 선인ㆍ악인의 구별에 근거하여 제시되었던 것은” 오히려 “국민의 반감을 샀고, 전쟁 범죄자에 대한 동정조차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35) 이는 앞서 설명한 ‘일억총참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진영의 행동과는 표면 상 극단에 위치하는 것이었지만, 과거를 되돌아보는 데 있어 역사적 비판정신과 책임의식을 통한 진심어린 자각과 통감의 농도가 진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공산당에 동조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 동인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신일본문학회(新日本文學會)의 기관지 『신일본문학(新日本文學)』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나가노 시게하루(中野重治)가 「문학자의 전쟁 책임 추궁(文学者の戦争責任追及)」(창간호, 1946.3)을 통해 보여준 문학자의 자기비판 및 자기반성의 태도는 얼마 되지 않아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의 「문학에 있어 전쟁 책임의 추구(文学における戦争責任の追求)」(3호, 1946.6)에서 전쟁 책임자 25명을 고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이렇듯 전쟁의 근본 원인 및 책임 소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뒷받침되지 못한 어떠한 주장도 정치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국민들과 독자들로부터 정당성과 타당성을 인정받는 데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와 한계는 동시기 문학예술 작품들 속에서도 존재하였다. 특히 비교적 집단적인 창작 및 제작 과정을 거치며 대중적인 작용-반작용을 경험하는 영화에 있어서는 그러할 소지가 보다 농후하였다.

    각본가, 연출가, 제작자 모두 과거 좌익 활동 경험이 있던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히사이타 에이지로는 1930년대 연극 부문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 및 작품 활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른 전력이 있었고,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 또한 영화계 입문 전에 일본프롤레타리아 미술가동맹에 참가한 이력이 있었으며, 프로듀서인 마쓰자키 게이지(松崎啓次) 역시 전전 일본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日本プロレタリア映画同盟, プロキノ) 출신이었다.36)

    이 작품은 패전의 시점에서 일본의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전후 일본이 추구해야할 가치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지니지만,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첫째로,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근본적, 구조적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초반 부분에서 만주사변의 책임이 일부 군부, 관료, 재벌 등에 있다는 점을 피상적으로 암시만 할 뿐,37) 이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연결시키고 이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다. 둘째로, 전쟁의 책임 소재 판별 및 관련자 처벌 문제에 심도 있게 접근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중간자막에는 ‘심판의 날’이라는 단어가 기재되어 있으나, 전쟁으로 점철된 군국주의 과거의 역사적 책임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심판 되어야할지 또는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일본의 과거에 대한 자아비판과 자기반성의 흔적이 녹아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다소 제한적인 성격을 지닌다. 오히려 영화는 과거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부정’의 의미를 양가적으로 취한다. 즉, 과거의 일 자체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 동의하면서도(不正) 그것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서는 비판의 초점을 뚜렷이 맞추지 않는다.(不定) 이에 따라 영화가 지니는 과거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이는 향후 일본인이 자기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자아비판 및 자기반성의 이유와 필요성을 부정(否定)하는 방법론적 요인으로 작용되었다는 측면에서 분명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2) 과거청산 및 전후개혁 방향 수정의 원인과 양상

    그렇다면,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이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그것을 부정함에 있어 전쟁의 근본 원인 및 책임소재에 대한 고찰 및 통찰의 과정을 통해 그 본질과 층위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중적 태도를 보이며 자기방어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영화의 제작주체 대다수가 국책성 영화의 제작 참여를 통한 전쟁 협력자로서의 경력을 지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히사이타 에이지로는 요시무라 고자부로(吉村公三郎) 감독의 <결전(決戰)>(1944),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의 <간첩 바다의 장미(間諜海の薔薇)>(1945) 등 전의앙양을 주제로 한 군사물의 각본을 담당한 바 있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도 생산정책을 반영한 <가장 아름답게(一番美しく)>(1944)와 충성심을 강조한 시대극 <호랑이 꼬리를 밟은 남자들(虎の尾を踏む男達)>(1945년 9월 제작, 1952년 공개)38) 등을 각본, 연출한 바 있었다. 하라 세쓰코(原節子, 유키에 역), 후지타스스무(藤田進, 노게 역), 고노 아키다케(河野秋武, 이토가와 역), 오고우치 덴지로(大河内傳次郎, 야기바라 교수 역) 등 주연 배우들 역시 많은 국책영화에서 배역을 맡은 바 있었다.39) 아울러 제작사인 도호부터가 극영화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한 회사였으니, 나머지 제작 참여자들 역시 모두 크건 작건 전쟁 협력자라는 명찰을 달고있었던 셈이다. 이를 사회 전 분야로 확대하면, 패전 당시 전쟁 협력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사회적 공신력을 확보한 상태로 전쟁 원인의 본질을 명확하게 규명하고 그 책임의 소재를 공정하게 따질 수 있는 개인과 집단은 적었으며,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전후 일본에서의 과거부정은 사회 각 분야 및 계층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일정한 선과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것은 다분히 자기변호적 차원에 머무르며 과거청산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관행은 당시 대중문화 분야에서 현실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던 영화 부문에도 적용되었고,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 등에 내재화되어 사실을 바탕으로 주제를 부각시키는 지점에서 균열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과거에 대한 확실한 절연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전후개혁의 취지와 방향이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취약하여 상황에 따라 변경 될 여지도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새로운 일본의 모습을 기대하던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냉전시대의 도래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즉, 미국의 반공 정책이 차츰 노골성을 띠면서, 사실 상 전쟁의 근원적인 원인이던 집단주의적 군국주의의 온상인 천황제 권위주의 체제가 상징적으로나마 보존되었으며 극히 일부를 제외한 전쟁 책임자들이 면죄부를 부여받고 일상으로 복귀하였다.40) 그리하여 1948년을 지나면서 GHQ의 대 일본 점령정책의 기조는 비군사화와 민주화에서 ‘경제재건’과 ‘재무장화’로 대체되었고, 이로써 자유주의, 평화주의 등 패전 직후 일본에서 중요시되던 이념 및 가치 또한 자본주의, 패권주의 등 예전의 그것으로 서서히 탈바꿈하였다.

    이로 인해 상실감이 컸던 쪽은 다름 아닌 좌익 진영이었다. 패전 직후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상정하며 GHQ의 민주화 정책 기조에 편승하여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치던 그들은, 1947년 GHQ의 중지 명령으로 이른바 ‘2.1총파업’41)의 좌절을 맛보았고 1948년 역코스(逆コース, reverse course)를 겪으며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보다 심화되었다.42)

    영화 부문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산업 전 분야에서 활기차게 전개되던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아 영화계에서도 좌익 계열의 영화인을 중심으로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어 인금인상과 경영참가를 요구하며 투쟁하기도 하였는데,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회에 걸쳐 발생한 이른바 ‘도호쟁의(東寶爭議)’43)에 대한 GHQ의 처리 과정을 목도하며 패전 직후 영화인들, 특히 좌익 계열 출신 영화인들의 과거에 대한 입장과 현실에 대한 대처가 얼마나 모호하고 안일한 것이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청산을 수반하지 못한 현실 개혁 및 미래 설계의 불합리성 또는 불가능성에 대한 비현실적, 비논리적 징후는 이미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포착된다. 유키에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문화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침으로써 새로운 농촌사회를 건설할 것을 암시하는 영화와는 달리,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농지개혁은 GHQ나 그 자문기관인 대일이사회(對日理事會, Allied Council for Japan)를 통한 연합국의 요구와 주도로 실행되었고,44) 농지개혁이 일단락된 1949년 이후 농민조합 및 농민운동은 와해된 반면 농민들은 점차 보수성을 띠어 갔다.

    영화와 실제 간의 유리(遊離)는 비슷한 시기 유사한 유형의 영화로서 개봉된 <민중의 적>이나 <오소네가의 아침>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과거 군벌, 재벌, 관료들은 1948년 11월 12일 극동국제군사재판 폐정45) 이후 복권되어 차츰 전쟁 시기의 영향력을 회복하여 갔던 것이다.46) 이들 영화 역시 좌익 활동을 경험한 연출가와 각본가의 작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47) 새로운 일본의 모습에 대한 그들의 지향과 현실 간의 간극이 피점령 시기를 통과하며 갈수록 벌어지게 되었음이 짐작 가능하다. 그러는 사이에 과거 일본사회의 성격이 서서히 회생되어 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33)아오키 다모쓰(靑木保), 최경국 역, 『일본 문화론의 변용』, 1997, 57쪽.  34)함충범, 앞의 논문, 531쪽.  35)이에나가 사부로, 앞의 책, 400∼401쪽.  36)이 영화는 다키가와 교수 사건 발생 당시 교토대학 의학부에 재학하고 있었던 마쓰자키 게이지의 발상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小林信彦, 앞의 책, 39쪽.  37)영상으로 묘사된 것으로는 (노게의) 학생운동 시퀀스에 삽입된 관료와 재벌의 골프 회동 장면이 유일하다.  38)이 작품은 전쟁 중에 제작되어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완성되었으나, ‘주군에의 충성’이라는 봉건적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GHQ에 의해 상영이 금지된 채 있다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이후인 1952년 2월 24일 개봉되었다.  39)일례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계 스승인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郎) 감독의 연출로 태평양전쟁 발발 1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하와이 말레이 해전(ハワイマレ-沖海戦)>(1942)에서, 이들은 각각 극중에서 소년 비행병에 지원하여 진주만 공습에 참가하는 주인공 도모타 요시카즈(友田義一, 伊東薫 분)를 격려하는 친누나(하라 세쓰코), 그를 교육하는 비행병 훈련소의 교관(후지타 스스무) 및 반장(고노 아키다케), 그가 소속된 전함의 함장(오고우치 덴지로) 역으로 출연하였다.  40)이러한 징조는 이미 1946년 8월에 영화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좌익 계열의 가메이 후 미오(亀井文夫) 감독이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드러내고자 중일전쟁 시기부터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의 뉴스영화를 재편집하여 만든 <일본의 비극(日本の悲劇)>이라는 기록영화가 검열에 통과하여 상영되던 중에,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GHQ에 상영중지를 요청함으로써 개봉 1주일이 지난 후 필름이 압수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41)1947년 1월 15일 산별회의(産別會議), 총동맹(總同盟) 등 33개 단체 600여만 명이 참여하는 전국노동조합공동투쟁위원회(全國勞動組合共同鬪爭委員會, 전투(全鬪)가 발족되어 경제문제 해결,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퇴진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1월 18일 전투는 2월 1일 대대적인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1월 31일 GHQ가 총파업 중지를 명령하였고 결국 총파업은 좌절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대한 GHQ의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노동운동의 흐름도 변화를 맞이하였다. 함충범, 앞의 논문, 526쪽.  42)특히, 제2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1950년 6월 6일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년 공산주의자 추방을 가리키는 레드퍼지(レッドパージ, Red purge)를 단행하였는데, 이는 동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점차 확대되어 연말까지 대상 인원은 10,972명에 달하였다. 김장권ㆍ하종문, 『근현대일본정치사』,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2006, 157쪽.  43)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함충범, 앞의 논문, 534∼525쪽을 참조 바람.  44)예를 들면, 제2차 농지개혁은 대일이사회에서 영국, 소련 등의 요구로 시작된 것이었고, 농지조정법 재개정안은 영국안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었다. 후지와라 아키라 외, 앞의 책, 42쪽.  45)이른바 ‘도쿄재판(東京裁判)’으로 불리며 1946년 5월 3일 개정된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이날 28명의 피고인 가운데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대신 등 A급 전범 7명이 교수형을,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전 육군대신 등 16명이 종신금고형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46)이러한 영향은 영화계로도 이어져, 공직추방령에 따라 1947년 10월 영화계를 떠났던 쇼치쿠의 기도 시로(城戶四郞), 도호의 모리 이와오(森岩雄) 등의 전쟁 시기 유력 영화인들이 3년 만인 “1950년 10월에 해제가 되어” 이전의 “지도적 지위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佐藤忠男, 『日本映画史 2』, 岩波書店, 2006, 188쪽.  47)<민중의 적>의 감독 이마이 다다시 또한 좌익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오소네가의 아침>의 시나리오 작가는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와 같은 히사이타 에이지로였다.

    5. 결론

    세계영화사를 훑어보다 보면 국가 별로 특징적인 양상이 발견되는 시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본영화사의 경우, 이전 시기에 비해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이는 특수한 시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1940년대 후반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특수성은 동시기 일본영화의 제작경향으로도 이어져, 당시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들의 내면에 스며들어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패전 이후 일본영화는 ‘전후개혁’으로 대변되는 동시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의 변화상을 반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를 비롯한 일련의 영화들이 당시 미국의 점령정책의 기조인 비군사화 및 민주화를 다루면서 전후 일본영화의 제작 경향을 새롭게 이끌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는 자연스레 영화 속으로 내재화되었다.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는 일본의 역사적 과거를 통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구축하고 주제적 성격을 강화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자막, 영상, 편집, 소리 등의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활용한다. 이 작품에 개입되어 있는 과거 일본의 시대적, 역사적 층위는 복잡다단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때문에 영화에서 일본의 과거는 일본의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의미를 생성한다. 그럼으로써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는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거부정에 있어 이중적 태도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여러 가지 한계를 노정하고 있던 전후 일본에서의 과거청산 및 전후개혁 방향 변경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동시기 개봉된 비슷한 유형의 여타 영화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어차피 전후개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의 용인 하에서만 추진될 수 있는, 구조적으로 타율성을 지니는 제한적인 것이었다면,48)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냉철한 역사의식을 통해 과거를 재단하고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함으로써 주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였고, 결국 점령정책 전환에 따른 전후개혁의 취지 및 방향 변화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계에서는 CIE와 민간검열대(CCD)49)의 극심한 간섭 속에 과거 일본을 부정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또 다른 ‘국책영화’로서 ‘출시’된 바 있었으나,50) 그것들은 잠시 시류를 이루었을 뿐 지속적으로 특정한 경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GHQ의 변화된 점령정책 기조가 확고해짐에 따라 1948년 7월 CIE와 CCD에 의한 사전ㆍ사후 검열제도가 사후검열제도로 전환되고 1949년 10월에는 그것마저 폐지되면서, 일본영화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다루는 비중은 줄어들었으며 그것을 대하는 자세와 방식도 달라졌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과거는 소재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시대적 배경을 거세당하거나 선택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51)

    다시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로 돌아가 보자. 영화 작가론의 영역에서 이 작품에는 “구로사와의 일상적 사진을 초월하는 새로운 영화 리얼리즘에의 도전”,52)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영화적 자아 확립의제일보”,53) “구로사와 아키라의 본격적인 전후 작품”,54) “처음으로……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55)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하지만 배경 설정, 인물구성, 표현기법 등의 측면에서 엄밀히 따져보면, 새롭거나 특별한 점은 그리 많지 않다.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배경으로 삼거나 이를 강조하기 위해 시간적 정보를 자막으로 표시한 예는 전쟁 시기 국책영화에도 이미 존재하던 일이었고,56) 여자 주인공을 부각시키거나57)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인물 움직임, 화면의 구도, 카메라 워크, 장면의 전환, 편집의 속도, 음악과 음향 등을 활용하는 방식의 연출법 또한 이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58)

    이렇게 볼 때, 아마도 이 작품에 영화사적 가치가 부여될만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 여기에 이전에는 포함시킬 수 없었던 과거 군국주의 일본의 암울한 시대상이 비교적 자유롭게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정서와 풍조로 인해 영화는 다키가와 교수 사건이나 조르게 사건과 같은 ‘반국가적 사건’으로 왜곡되던 역사적 사건을 주요 에피소드로, 야기바라 교수나 노게로 대표되는 ‘반국민적 인물’로 치부되던 반파시즘, 반전 사상가나 운동가를 주요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의도적으로) 잊히거나 무시되어 왔던 사건과 인물을 영화의 중앙에 위치시킨다. 동시에 이토가와나 형사나 노게의 마을 사람들처럼 비교적 부정적인 인물형을 제시하며 개봉 당시인 패전 직후 일본인 관객의 반성적 공감을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작품의 명성에 비해 다소 무디고 미지근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 그들이 군국주의 일본에 협조하거나 동조하거나 침묵하였는지에 대해 영화는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주인공의 성격, 행동, 존재성에 있어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유키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기주체적인 인물로 변모하고 있으나, 영화는 그녀가 어떠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에 있어 자아정체성이 부재한 독립은 제대로 된 독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반영된 듯, 유키에의 모습에는 이따금 과잉이 묻어난다. 사실, 이는 과거 일본의 역사적 과거를 작품의 내면으로 끌어오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인물형이 도안된 영화 기획 단계에서부터 파생되는 태생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서는 노게의 인물 설정 방식에서 발견된다. 노게의 실존 모델로 알려진 오자키의 인생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 노게는 (비록 거기에 ‘위장’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전향을 하고 이후에는 옥중에서 자연사한다. 유키에의 모범적 인물인 노게의 전향과 옥사는, 실제로 전쟁협력의 경험을 지니고 있던 영화인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면죄부를 제공하고 완충작용을 유도할만하다. 이 지점에서 과거 전쟁 협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영화 제작 주체와 관객 간의 암묵적 공모가 이루어졌던 것 은 아닐까.

    이렇게 영화는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다루면서도 그것에 역사적 평가의 잣대를 확실하게 들이대지 아니한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내용과 비중이 조절 또는 조작되고 일상의 인물이 과장되게 영웅화되며, 이로 인해 일본의 과거는 평가나 비판의 대상에서 교묘하게 회상이나 추억의 대상으로 전도된다. 이는 역사적 사건 및 인물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합리적, 객관적 판단이 상황논리와 개인감정에 접합될 여지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고 연합국의 일본 점령을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 日本国との平和条約)’ 체결 60주년이 되는 2011년에도, 현재 일본인들이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점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에게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주변국들에게는 변치 않는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서 발견되는 전후 일본인들의 군국주의 일본의 과거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떠올릴 때마다, 당시 영화계에 도래한 자유가 진정 ‘후회’ 없이 작품에 투영 되었는지에 대해 되묻고 싶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48)전후 일본에서는 1946년 2월 28일 <퀴리부인(キュリー夫人, Madame Curie)>과 <봄의 서곡(春の序曲, His Butler’s Sister)>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과 함께 금지되었던 미국영화의 배급이 재개되어 그 해 총 39편의 미국영화가 일본에 수입되었는데,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바로 이들 영화의 헤로인(ヒロイン, heroine)이 자아내는 것이었다.” 塩田長和, 『日本映画五十年史』, 藤原書店, 1992, 52쪽.  49)CCD(Civil Censorship Detachment)는 GHQ 산하 참모 제2부(G-2)에 배속되어 있던, 구성원을 군무원으로 하는 군사 검열기관이다.  50)대표적인 예로 ‘신헌법공포 기념영화’를 들 수 있다. 전후 일본에서 신헌법은 1946년 11월 3일 공포되고 1947년 5월 3일 시행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GHQ는 주요 메이저 영화사에 관련 영화를 제작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도호에서는 전쟁포기를 주제로 <전쟁과 평화(戦争と平和)>(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야마모토 사쓰오(山本薩夫)감독)를, 다이에에서는 민주주의 및 언론자유를 주제로 <장사극장(莊士劇場)>(이나가키히로시(稲垣浩) 감독)을, 쇼치쿠에서는 여성해방을 주제로 <정염(情炎)>(시부야 미노루(渋谷実) 감독)을 만들었다. 사토 다다오, 앞의 책, 241쪽.  51)이러한 경향은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의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들개(野良犬)>(1949)와 <추문(醜聞)>(1950)은 더럽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위기에 대항하는 개개인을 그리며 <주정뱅이 천사(醉いどれ天使)>(1948)와 <살다(生きる)>(1952)는 암울한 현실에 존재하는 올바른 인간형 및 그로 인한 세상의 신뢰를 드러낸다. 이들 영화의 배경은 현재로 보이는데, 상황 자체는 어둡게 설정되어 있으나 그것의 원인이 되는 과거는 베일에 싸여 있다. 물론, 현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내러티브 상에 과거 전쟁 시기를 개입시킨 영화도 있었다. <멋진 일요일>(素睛らしき日曜日)>(1947)은 패전의 일상에 피어나는 희망을 나타내고 <조용한 결투(静かなる決闘)>(1949)와 <백치(白雉)>(1951)는 전쟁의 후유증을 안은 채 관계를 맺어가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이들 작품에서는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에서보다도 과거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태도나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전쟁의 원인과 책임 소재는 보다 불투명해져 있고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어 있다.  52)山田和夫, 『日本映畵 101年』, 新日本出版社, 1997, 97쪽.  53)山田和夫, 『黒澤明-人と芸術』, 新日本出版社, 1999, 67쪽.  54)小林信彦, 앞의 책, 37쪽.  55)都築政昭, 앞의 책, 136쪽.  56)앞서 소개한 <하와이 말레이 해전>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발견된다.  57)<가장 아름답게>의 경우가 그러하다.  58)배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후지타 스스무(노게 역), 고노 아키다케(이토가와 역), 오고우치 덴지로(야기바라 교수 역) 등 <우리 청춘에 후회 없다>의 주요 남자배우 3인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전작인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1943)-3인, <가장 아름답게>(1944)-고노 아키다케, <속(續) 스가타 산시로>(1945)-3인, <호랑이 꼬리를 밟은 남자들>(1945)-3인에 출연하였는데, 특히 <가장 아름답게>를 제외한 작품에서 주연급 배역을 맡은 후지타 스스무와 오고우치 덴지로는 이미 <스가타 산시로>와 <속 스가타 산시로>에서 제자와 스승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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