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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헨리 제임스 여성주의의 현대성 Modernity of Henry James’s Feminism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헨리 제임스 여성주의의 현대성

Art, which was understood as a male-dominated field in the early and mid-Victorian age, began to inspire feminist activists and sympathizers to establish women’s places and feminism-oriented tastes in late Victorian aestheticism. Henry James and John Singer Sargent were feminist sympathizers who brought modernity into the conventional Victorian art stream. They recognized and valued women’s passion for sensuality as well as their longing for conventional aestheticism. Through the comparison between Henry James’s major work, The Portrait of a Lady, and John Singer Sargent’s representative art works, this paper will reveal how human nature can be better understood as a common ground for two distinct but equally essential human desires: the conventional and the sensual. James achieved this harmony by creating characters who can bear the ordeal of consciousness to move forward to the future where they can continue to cultivate natural and sensual taste along with conventional value. Sargent likewise ideally combined the two seemingly contrasting features in his representative portraits and nude works. His original use of conventional perspective and unique liberal shading enabled him to be recognized as a modern feminist artist.

KEYWORD
관습적 아름다움 , 관능적 아름다움 , 인상 , 원근법 , 명암
  • I. 관습과 관능의 공존

    헨리 제임스(Henry James)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는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관습적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작품 속에 구현해낸 예술가들이다. 두 예술가는 남성들의 배타적 특권으로 여겨졌던 육체적 욕망의 영역을 여성들에게 확대시킴으로써, 여성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욕망을 금기시하던 빅토리아 조의 한 복판에 페미니즘 예술과 비평의 기틀을 마련했다.1) 본고에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2)을 동시대의 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대표적 초상화와 누드작품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관습과 관능이 성차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 공통의 열망임을 보여줬던 두 예술가의 페미니즘적 시각의 현대성을 밝혀보겠다.

    제임스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방법 중의 하나는 관습적 전통주의자로서의 제임스의 예술 주제와 관능적 현대주의자로서의 제임스의 예술 주제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관습적 전통주의자 제임스는 서구의 미학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Rowe 10), 청교주의와 호손(Nathaniel Hawthorne)에 근원을 두고 있는 자립적 개인주의의 “도덕성”을 계승한다(Matthiessen 151). 제임스 문학의 미학적 세계가 중산층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합법화한다(Rowe 10)는 맑스주의 비평 역시 관습적 전통주의자로서의 제임스를 말한다. 톰킨(Jane Tompkin)과 미쉘(Juliet Michelle) 중심으로, 제임스를 “남성 중심적 권위”를 옹호하는 전통주의자이면서도 여성의 입장과 관심사에 공감할 수 있었던 작가로 이해하는 온건한 페미니즘의 시각이나, 길버트(Susan Gilbert)와 하베거(Alfred Habegger) 등으로 대표되는, 제임스 문학이 지적인 여성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결국 여성을 희생양으로 만들며 유배와 죽음으로 내몬다는 극단적 페미니즘의 시각 역시 관습적 전통주의자로서의 제임스를 기반으로 한다(Rowe 11-12). 이들 비평의 단점은 제임스 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 본성의 관능적 가치를 읽어내지 못하고, 관습적 가치에 종속된 배타적이고 제한된 읽기를 한다는 데에 있다. 극단적으로 시어스(Sallie Sears)는 관습적 가치인 “도덕성의 힘”이 인간을 관능적 가치인 “쾌락에의 복종”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다(Sears 208)고 주장함으로써, 관습적 가치와 관능적 가치를 이분화하며, 한 인간 본성 안에서의 그 합일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한다. 제임스를 관능적 현대주의자로 이해하는 시각으로는, 말년의 제임스가 “절묘한 관계”를 유지했던 조슬린(Jocelyn)을 포함한 세 명의 젊은 남성들과의 교류3)를 들어 제임스 문학을 동성애적 시각4)으로 접근하거나, 제임스 문학을 열정적인 자기주장으로서의 인간의 “이기적인 육체적 욕망”(Fogel 115)의 성취에 집중하는 것으로 읽어내는 포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오류 역시 제임스 문학의 또 다른 가치인 관습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제한된 텍스트 읽기에서 비롯된다.

    에델(Leon Edel)이 얘기했듯이 제임스 문학의 힘은 그 “아이러니”에 있다(LHJ 1: 497).5) 제임스는 명백한 내부인으로서의 풍자 작가의 역할을 부정했으며, “관찰적 이방인”(LHJ 1: 497)으로서의 아이러니 작가의 역할을 자청했다. 아이러니는 제임스의 “아이러니”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힘(TF 35)”6)을 뜻하며, 인간의 삶과 인간 본성의 “양면성” 혹은 그 “상대성”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삶과 본성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며, “아이러니”의 소유자로서의 예술가는 두 가치를 공평히 지각하고 이를 예술 속에 표현해 내야 한다.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는 그 상대적 가치인 관능적 가치와 함께 인간 본성에 존재하며, 예술가는 “이방인”(LHJ 1: 496)으로서 자연히 상반된 가치를 인식하고 비교하지만, 어느 한 가치의 배타적 우월성을 인정함으로써, 나머지 다른 가치를 열등한 것으로 배제하는 주관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임스의 현대적 페미니즘의 시각이다.

    제임스는 빅토리아조 말기, 예술 비평의 실험적 발원지로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여성의 시각과 취향과 권위를 확립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그로스브너 갤러리(The Grosvenor Gallery)7)의 예술 경향을 주도하던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제임스는 당대 문화예술계의 관습적 시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예술 비평가로서의 시각은 관습적 기준과는 무관하게 제임스 자신의 심미안에 의해 결정되었다. 당시 예술 문화 유행의 중심지였던 본드가(Bond Street)의 화려함이 제임스에게는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업적 가치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였고, 화려한 금박 장식과 우아한 몸가짐 속에 가려져 있는 상업성을 그는 정확히 읽어냈다(PE 139).8) 제임스 예술비평이 당대 비평계의 주된 흐름을 뒤바꿔 놓을 정도의 파격적 실험성과 전문성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일관되게 제임스 개인의 취향에 근거한 “인상”(impression) 비평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인상이다.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전문가와 애호가 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밀레(John Everett Millais)에 대한 자신의 불만족을 표현함에 있어, “밀레는 유명인을 그리는 데에 치중 한다”(PE 211)는 정도의 논평에 그쳤다는 것은 비평가로서의 제임스의 한계를 보여주며, “회화의 형식적 특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Torgovnick 45)는 비판의 근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제임스가 상대적으로 세부적인 작품 형식이나 기법에 대한 논평에 관심을 덜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나, 특정 예술 주제가 특정 형식과 기법을 통해 완성되는 특정 순간의 종합적 “인상”에 작품 비평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형식과 기법 위주의 비평가들이 간파하지 못하는 작품 전체의 “인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은 전문적 가치가 있다. 일생동안 친구로서 예술가로서 제임스에게 의미를 남겼던 사전트의 작품에서 제임스를 만족시켰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격 묘사의 진실성”과 “놀라운 삶의 묘사”였다(PE 257). 장르를 넘어서서 예술가는 예술 작품이 전달하는 예술 주제의 특성과 내면을 표현함에 있어서의 진실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제임스의 예술 비평의 중심축이었다. 또한 예술가는 자신만의 시각을 통해 놀라운 삶의 표현을 완성해냄으로써 예술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제임스의 믿음이었다.

    이렇듯 주제를 선정하고 관찰과 숙고의 과정을 통해 그 주제를 예술적으로 변화시키는 예술가의 역할을 강조했던 제임스에게 있어 이상적인 예술가는, “자신의 주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체험하고, 흡입하며, 그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점들을 찾아내는 존재이다. 간단히 말해, 예술가는 삶을 예술 속에 재현하는 데서 오는 기술적인 어려움들에 고상함을 부여하고 그것들에 인간성을 불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PT 115).9) 제임스가 말하는 예술 창작 과정은 한 마디로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주제 탐색, 미학적 깨달음, 미학적 변용의 세 단계를 거친다. 주제 탐색, 미학적 깨달음, 미학적 변용 세 단계에서 관습과 관능, 두 상반된 가치를 하나의 완성된 “인상”으로 융합해내는 제임스의 페미니즘의 시각은 뚜렷하고 일관되며, 그의 이러한 시각은 이미 위대한 소설가의 반열에 올라 있던 제임스 예술의 현대성으로의 길을 열었다. 본고에서는 제임스의 예술의 현대적 페미니즘의 특성을 작가 제임스와 미술 비평가 제임스의 시각 양면에서 탐색하겠다.

    1)본고의 핵심 논점인 “관습적 아름다움”과 “관능적 아름다움”은 제임스와 사전트 작품을 감상하고 읽어내는 과정에서 필자가 이들의 예술 작품의 핵심적인 가치로 파악한 표현이다. “관습”은 에델(Leon Edel)이 제임스와 사전트 예술의 공통분모로 파악한 특질로서, 정신적 “완고함”의 흔적 즉 “양심”(conscience)으로 이해될 수 있다(LHJ 1: 715). “관능”은 제임스와 사전트의 “양심”이 에델의 표현을 빌자면 “부드러워지고 변화하는”(relax and change, LHJ 1: 715) 과정을 거쳐 탄생된 특질로서 “양심”의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제임스 작품에 쓰인 표현을 소개하자면, “관습적 아름다움”이란 “관습 자체”(convention itself, PL 265)인 오스몬드(Gilbert Osmond)로 대표되는 본성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적 교양인”(a very cultivated man, PL 293)이 추구하는 전통적 기준과 가치를 뜻한다. “관능적 아름다움”은 이사벨(Isabel Archer)을 대표하는 “자연적 취향”(a natural taste, PL 50)에 근거하는 가치로서, 인간의 “무한한 욕망”(infinite desires, PL 297)이나 “새로움에 대한 자극”(the stimulus of new, PL 297)과 “강렬한 충동들”(strong impulses, PL 154)에 충실함으로써 완성되는 “쾌락”(pleasures, PL 165)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제임스와 사전트 예술의 “관습”과 “관능”의 개념을 각각 “양심”과 “쾌락”으로 이해한다.  2)Henry James. The Portrait of a Lad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Inc., 1975):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PL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3)앤더슨(Anderson)은 27세에, 조슬린(Jocelyn)은 30세에, 휴(Hugh)는 24세에 각각 처음으로 50대 혹은 60대의 제임스를 만났고, 이들과의 교류에서 제임스가 정신적인 면 뿐 아니라, 육체적인 면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을 수용한 것은 사실이나, 제임스가 원했던 것은 이들과의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 형 윌리엄(William James)을 포함해 또래 남성들에게서 느꼈던 열등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안한 관계였으며, 우둔함이 자리하는 곳에서 밝은 광휘를 보고 지성을 깨닫는 그런 관계였다.(LHJ 2: 694)  4)1885년 영국의회가 동성애적 행위를 형법수정안에 포함시켜 통과시켰던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언급하며, 제임스가 직접적 동성애 묘사를 자제했어야 했음을 지적하는 그레이엄(Graham 179)은 제임스의 동성애적 열망이 작품 속에 제한된 상태로 묘사되어 있음을 얘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실제 제임스의 동성애적 경향을 더 강조하는 성급함을 보였다.  5)Leon Edel. The Life of Henry James, Vols 1,2. (Harmondsworth: Penguin Books Ltd., 1977):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LHJ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6)Henry James. The Theory of Fiction. Ed. James E. Miller. (Lincoln & London: U of Nebraska P, 1962):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TF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7)그로스브너를 방문하는 여성들은 예술 후원자였고 화가였으며 관람객이었고 비평가이기도 했으며, 특히 린제이부인(Lady Blanche Lindsay)은 그로스브너의 공동 설립자로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자연스럽게 그로스브너는 페미니즘 행동가들과,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며(Cherry, Beyond 155), 왕립미술원(Royal Academy)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예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Casteras 86),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이 빅토리아조 주류 속으로 진입하고, 다음 세기의 문화, 예술, 정치 분야에서 현대성의 한 축이 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877년부터 1890년까지 14년 동안 그로스브너는 당대 예술계의 한 중심축으로 영국 상류층의 예술 문화 전반에 대한 시각을 주도했다. 공들인 개막식과 저녁 정찬 행사, 전시 선전 방식, 음식점 문화, 음악회, 작품 설치 방식 등 오늘날의 박물관 문화는 사실 이 시기 그로스브너에 의해 이미 주도되고 있었다. 당시 영국 왕립 미술원은 물론이고 다른 미술관에서도 여전하던 천정부터 바닥까지 작품들을 가득 붙여 놓는 패치웍식의 작품 설치 관행이 막을 내린 것도 그로스브너의 힘이다. 미술 애호가로서 미적 감각을 키우며 미학적 예의에 따르고 드레스 문화와 차려 입는 상류층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그로스브너의 영향이었다(Newall 171).  8)Henry James. The Painter’s Eye. Ed. John L. Sweeney. (London: Rupert Hart-Davis, 1956):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PE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9)Henry James. Picture and Text. (New York: Harper, 1893):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PT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II. 제임스의 미술 비평

    미술 애호가이자 비평가로서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현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생 제임스의 예술적 신뢰를 받았던 화가 사전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태생이었지만 사실상 예술적 기반을 유럽에 두었던 화가 사전트10)는 제임스가 이상적 예술가로 인정했던 몇 안 되는 화가이다. 제임스는 자신의 예술 비평가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직접 그를 프랑스 화단에서 영국 사회로 소개했으며,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로서 평생을 함께 했다. 제임스는 사전트의 예술적 “숙고”의 깊이와 무게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꼈을 뿐, 그의 예술가로서의 “기민한 지각력”과 “눈부신 기교”를 높이 평가했다(PT 114). 이를 제임스의 세 가지 예술 창작 단계에 적용시켜보면, 사전트는 첫 단계에서 기민한 지각력으로 예술의 주제를 바라보며,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눈부신 기교를 통해 주제를 미적 변용의 과정을 완성시켜 예술 작품으로 창조해내는 대가로 해석된다. 제임스가 부족함을 얘기했던 숙고 부분은 주제 탐색 과정 이후 예술적 기교를 통해 창작이 완성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의 “깨달음”의 단계인데, 이는 예술가의 지각력을 통해 포착된 예술적 주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닫는 과정에서의 부족함을 뜻한다. 제임스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예술적 주제의 “새로운 점들”을 깨닫는 데에 있어서의 부족함이다. 이미 예술 작품으로 완성되어 현존하는 사전트의 회화작품 감상을 통해, 사전트가 선택했던 예술적 주제와 그의 예술적 기교를 통한 주제의 미적 변용 과정은 어렵지 않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초상화 전문 화가로서 사전트가 선택했던 인물들이, 그의 독특한 예술적 기교에 힘입어 어떻게 삶의 무대에서 화폭으로 옮겨져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제임스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서 작품의 “인상”에 집중했으며, 선정된 예술적 주제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되어 “제시되는 절차”를, 곧 그 제시되는 작품이 하나의 “인상”으로 완성되는 창조과정과 동일시했다.(CN 95). 즉 위에 언급된 예술 창작 과정의 세 단계의 결과물이 작품이 주는 인상으로 종합된다고 이해하면 된다. 제임스는 사전트 작품의 “인상”을 “기록적인 가치”를 지니며, 예술가적 “에너지의 가장 훌륭한 표현 형식”으로 높이 평가했다(PT 95). 문제는 제임스가 사전트 “인상”의 어떠한 점이 “기록적인 가치”를 뒷받침하며, “훌륭한 표현 형식”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특이한 점은 어휘 선택에 고도로 신중한 제임스가 좀처럼 쓰지 않는 “에너지”라는 표현을 쓰며 사전트 작품의 인상에 대한 그의 만족도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먼저 주제 선정 및 관찰, 미학적 깨달음, 미학적 변용으로 대표되는 제임스 예술 창작 과정의 세 단계를 사전트의 작품에 적용시킴으로써 제임스가 간파한 사전트의 현대성을 살펴보겠다. 다음 단계는 사전트 작품의 종합적 “인상”을 분석함으로써 제임스가 지각했던 예술적 “에너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 미술 비평이 설명해주지 않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읽어냄으로써, 편견 없이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선택했던 제임스의 페미니즘의 관점을 읽어내겠다.

    제임스의 예술 창작의 세 단계 중 첫째, 주제 선정 및 관찰에 대해 살펴보면, 상류층 인물들의 삶을 예술 주제로 선정함으로써 사전트는 서양의 보수적 회화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사전트의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과 르네상스의 대가 티시안(Titian)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와 17세기 스페인의 대표적 궁정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의 <시녀들>(Las Meninas)을 비교 관찰해보면 명확해진다. 예술성 면에서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에서 사전트는 예술 주제의 선택과 관찰 면에서 티시안과 벨라스케스와 동일한 상류사회 중심의 부르주아적 특성을 보인다. 작품의 주제를 선정하고 탐색함에 있어서 사전트는 제임스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만족시켰다. 영국과 미국 상류층의 초상화가로서 예술적 입지를 굳힌 사전트가 부르주아 인물들과 그들의 주변 환경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제임스는 이의가 없었다. 제임스가 특히 높이 평가했던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은 사전트의 선택과 관찰의 대상이 되었던 그 예술 주제의 특성을 설명한다. 로젠블럼(Rosenblum)과 젠슨(Janson)이 지적했듯이, 작품 소재의 내용적 특질과 상류층 인테리어의 빛나는 정교함과 복잡함, 특히 무대 세트와도 같은 열려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공간인 실내 벽 안에서 각자의 삶을 펼쳐나가는 인물들 속에 감추어진 미묘한 심리적인 특색들을 눈부시게 묘사한(Rosenblum and Janson 381) 점에서 사전트는 제임스를 매료시켰다.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전경, 중경, 원경의 명확한 전통적 구도”11) 속에 완벽한 대칭적 균형을 이루며,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상류층 집안의 딸들은 예술 작품의 주제 면에서 그대로 종합적 “인상” 창조에 의해 예술 작품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던 제임스의 예술 기준에 부합했다. 심지어 중경에 배치된 두 소녀를 가운데 두고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화병조차 마치 생명력을 갖고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듯 묘사되어있다. 티시안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경우, 비너스는 상류층을 넘어선 미의 여신으로 등장하지만 사실상 상류층의 실내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비너스의 발치에 자고 있는 강아지와 중경 속의 울고 있는 소녀와 부인, 정원을 보여주는 원경 모두 부르주아 계급의 삶의 배경과 일치한다. <시녀들>의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정 화가로 활약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의 예술의 주제가 상류층의 삶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전트의 부르주아 초상화가로서의 이력은 예술 주제 면에서 그를 앞선 대가들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예술 주제의 선택과 관찰의 첫 단계에서 사전트와 제임스는 관습적 예술 주제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관습적 전통주의자의 시각을 보인다.

    두 번째 미학적 깨달음의 단계를 살펴보면, 사전트는 이 단계에서 관습적 전통주의자로서의 시각과 거리를 두며 독창적인 현대성의 길을 선택한다. 티시안의 경우 비너스의 시선에서 표현되는 삶의 무료함은, 중경에서 뒷모습만을 보이며 울고 있는 소녀의 절실한 순수함과 대비를 이루며, 상대적으로 비너스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낸다. 울고 있는 소녀와 무료한 누드의 비너스를 통한 르네상스 화가의 관습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욕망은 여성의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관능적 욕망에의 탐닉은 곧 순수함의 상실을 뜻하며, 순수함을 잃어버린 삶은 소녀의 울음에서 보이듯 한탄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비너스의 시선에서 보이듯 조롱의 대상이 된다. 티시안의 미학적 깨달음은 관능적 열망이 아니라 순수함으로 기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는 예술 주제로서 전경 중앙에 배치된 왕녀의 순수함과 권위, 아름다움이 모두 돋보인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무에 충실한 주변의 성실한 시녀들과, 관습적 권위의 수호자들인 어른들로 다소 과장되게 왕녀를 둘러쌈으로써,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미학적 깨달음을 무엇보다도 왕녀의 고귀함으로 표현해냈다. 대조적으로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에서 사전트는 열 살 남짓한 소녀의 눈에 너무 일찍 여성의 관능적 욕망에 대한 경험과 지식의 가능성을 심어놓는다. 소녀라기에는 너무 어린 전경의 어린 아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왼 쪽 전경의 소녀와 그 뒤 중경의 두 명의 소녀의 눈빛과 자세에서 표현되는 미학적 깨달음은 “순수함”이나 “고귀함”이 아닌 “관능적 욕망”에의 지식이다. 제임스가 사전트의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했던 “어떤 숙고”의 깊이의 부족은 미학적 깨달음의 부족함을 뜻하는데,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에서 소녀의 눈에 너무 일찍 심어진 관능적 욕망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제임스에게는 예술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숙고의 부족에서 비롯된 단점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제임스와 사전트 모두 인간 본성으로서 남녀 모두에게 존재할 수 있는 관능적 욕망을 인정하는 부분에서는 페미니즘적 현대성을 보이지만, 어린 소녀를 그 예술 주제로 선정하여 관능적 욕망의 주제와 결합시키는 사전트의 시각이 제임스의 시각보다 인간 본성의 “관능”에의 열망 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에델이 제임스와 사전트를 결국 “부드러워지고 변화를 겪는 양심”(LHJ 1: 715)에 공통분모를 두고 있는 예술가로 이해하면서도, 화가로서의 사전트의 특성을 들어 그에게서 더 많은 “솔직성”을 보았던 근거로 이해될 수 있다.

    세 번째, 미학적 변용 단계에서 사전트의 현대성은 명확히 부각된다. “눈부신 기교”(PT 114)의 적용을 들어 사전트 예술 주제의 미학적 변용 과정을 극찬했던 제임스의 의도는 사전트 작품의 세부적 분석을 통해 명확해진다. 사전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벨라스케스는 이태리 르네상스의 뒷자락에서 끊임없이 앞선 선배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전통을 지켜나가려 했던 화가이다.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임스가 말한 사전트의 “눈부신 기교”는 무엇보다도 티시안에서 벨라스케스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예술 전통의 섬세한 붓놀림과 명확한 사실적 표현력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는 엘 그레코(El Greco)가 르네상스의 관습적 예술 전통과 거리를 두고, 작품 대상을 과감히 단순화하고 독창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예술 기법 면에서 현대성을 예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벨라스케스가 존경했던 르네상스 거장 티시안은 벨라스케스와 사전트와 헨리 제임스를 묶는 공통분모이다. 세 후배 예술가는 모두 티시안의 예술적 전통을 사랑했다. 물론 제임스가 언급했던 전통적 미술 기법인 섬세한 사실적 붓놀림이 세 대가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전통적 원근법 즉 “전경 중경 원경”의 화면 분할 방식이 티시안과 벨라스케스에 이어 사전트에게 계승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전트는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 명암을 사용함으로써 앞선 대가들과 구별되는 페미니즘적 현대성을 표현해냈다. 르네상스 전통 속의 대가들, 티시안과 벨라스케스가 선택하고 관찰했던 동일한 상류층 소녀와 여성들의 삶의 주제가 사전트에 의해 반복되지만, 티시안과 벨라스케스의 원경보다 훨씬 짙게 처리된 사전트 특유의 명암의 효과는 제임스가 추구했던 예술적 “인상”을 완성해 내는데 핵심적이다.

    특히 예술 주제의 미학적 변용을 완성하는 기교로서 사전트의 정확한 세부묘사와 원근법 그리고 독특한 명암처리 방식과 연관시켜, “인상”과 “에너지”의 문제를 명확히 설명하겠다. 제임스 비평은 사전트 작품의 “인상”을 언급하되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전트의 작가적 “에너지”에 명확한 수식어를 붙이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제임스의 “인상”과 “에너지”를 파악하는 데는 제임스 비평에서 조금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PT 115) 부분을 읽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필자가 볼 때 제임스가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던 사전트의 “인상”의 근원은 바로 화가의 극단적인 명암처리에 있다. 사전트는 원경의 앉아 있는 소녀와, 왼쪽으로 이동한 공간에 상류층 집안의 자녀답게 도도하게 서 있는 또 한 소녀에게 충분한 빛을 부여하는 반면, 중경 이후 원경의 공간들은 극단적으로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벨라스케스의 명암처리보다 훨씬 과감하고 인상적인 효과를 드러냈다. 놀고 있는 어린 아이의 순수한 모습으로 채워진 밝은 전경을 들여다보는 것도 잠시 감상자의 시각은 바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훨씬 성숙한 전경의 또 다른 소녀의 응시하는 듯 한 눈으로 옮겨 간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소녀의 눈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어두운 중경과 훨씬 더 짙은 원경 속의 또 다른 삶과 욕망이 존재함을 얘기한다. 사실상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의 네 명의 소녀들의 중심인물인 이 소녀에게로 이 작품의 인상은 집중 되고, 그녀가 작품 너머로 전달하는 “인상”은 바로 작품의 전경 중경 원경에 그려진 삶의 대한 소녀의 지식이다. 밝게 처리된 전경의 육체적 순수한 세계를 넘어서면, 중경의 어둠 속으로 막 진입하려는 듯한 두 소녀는 전경의 주인공 소녀보다 좀 더 육체적으로 성숙한 세계가 존재함을 그들도 알고 있음을 말한다. 이어 자연스럽게 감상자의 시선은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화면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원경의 세계로 공평하게 옮겨간다. 훨씬 어둡게 처리된 배경은 짙은 색을 썼지만 부드러운 붓터치로 인해 오히려 그 신비감은 배가되고, 중경의 소녀들이 경험하게 될 또 다른 세계 즉 관능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포함한 감각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즉 제임스를 만족시켰던 사전트의 예술적 기교란 그의 작품이 종합적으로 전달하는 인상으로 귀결되며,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의 페미니즘적 인상은, 어린 아이가 소녀가 되고 더 성장하고 여인이 되어 경험하게 되는 삶은 아이의 장난감을 비추는 빛처럼 언제나 순수한 것만은 아니며, 아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어둡고 칠흑 같은 삶도 존재함을 알게 될 것임을 소녀도 알고 있다는 페미니즘적 자각이다.

    마지막으로 제임스의 페미니즘의 시각 즉 현대성을 밝혀내기 위해 그의 “에너지”에 집중해보자. 위에 언급했듯이 사전트 작품에 구현된 “인상”을 일컬어 제임스는 예술가적 “에너지의 가장 훌륭한 표현 형식”으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제임스는 예술가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에너지 표현 형식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 본인의 에너지 유무를 문제 삼는 것은 제임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제임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미 존재하며 예술가의 섬세한 지각력에 의해 포착 가능한 에너지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에너지는 주제를 선정하고 미학적 깨달음의 단계를 거쳐 미학적 변용에 이르러 작품의 종합적 인상을 완성하기까지 작품 전반에 작용한다. 사전트 작품의 에너지는 그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어떠한 형식을 빌려 표현하느냐에 따라 예술 작품의 인상의 완성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전트와 제임스의 예술적 “에너지”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두 예술가의 예술적 공통 분모였던 베니스의 의미를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이들 “에너지”의 출처는 베니스이며, 베니스의 예술적 의미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 본연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의 발현장이라는 데에 있다. 사전트와 제임스 그리고 벨라스케스와 티시안은 모두 베니스라는 예술적 장소에 기거하거나 방문함으로써 그들의 예술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드러냈다. 사전트에게 예술적 주제를 제공했고, 제임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베니스의 고급 주택과 거리는 관능적 욕망과 개인적 자유를 열망했던 화가들과 작가들, 남성들이 “에너지”를 드러내고 포착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적 배경이었다. 사전트의 <베니스 거리> (Street in Venice)에서 보이듯, 베니스 거리는 여성이 바닥까지 끌리는 드레스에 어깨와 가슴을 완전히 덮는 숄을 걸치고 뭇 남성들의 시선에 무관심 한 듯 두 눈은 바닥을 향하고 말없이 천천히 걸음을 계속하는 곳이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망토를 두른 남성들이 여성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곳이다. 무관심 한 듯 내려져 있는 여인의 시선과 지나쳐 가버린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남성의 눈길은 그대로 제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전트 에너지의 “가장 훌륭한 표현 형식”이다. 제임스와 사전트에게 있어 베니스는 예술가의 “터치”(touch)에 의해 “사소한 야채들도 매혹적으로 색칠되어 지는” 곳이며, 거대해진 “진주알”처럼 진귀해지는 곳이다(PT 108-109). 사전트는 그의 작품에 자신의 “드러내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관능적 욕망을 표현했으며, 제임스는 여인의 내려진 시선과, 남성들이 응시하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사전트의 관능적 욕망 즉 에너지의 “드러내지 않는” 간접적 표현 형식을 간파했다. 사전트의 그림에서 제임스는 자신의 예술적 에너지의 분출 형식과의 유사성을 보았던 것이다. 즉 제임스에게 있어 예술적 에너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예술가에 의해, 미학적 형식을 통해 포착되고 표현될 때에만 하나의 “인상”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제임스와 사전트의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사생활 침해에 대한 그들의 극단적인 강박관념과 공존하며 이들의 예술 작품의 종합적인 “인상”의 완성도에 기여한다. 사전트는 공개적인 악평을 두려워하여 “거의 병적인 수준의 칩거”를 했으며,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불가항력적으로 혐오했다(Charteris 227). 제임스에게 있어 “사생활 방어”는 중요한 문제였으며, 그 스스로 많은 편지들을 불태워 없앴으며, 편지를 받았던 이들에게도 자신의 편지를 똑같이 불태워 없애주기를 요청했던 것도 사생활 침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Edel 223). 특히 관습적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개인적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사적인 공간 안에 제한시키며, 완전히 드러내거나 공개하는 것을 거부하는 제임스의 개인적 기질은 작가로서의 그의 시각과 비평가로서의 시각에 그대로 투영되어, 인물의 완성도와 작품의 완성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드러나지 않는” 회화 속의 “원경”과 같은 공간과 환경은 제임스에게 있어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한 필수적이며 또 최적의 장소였다. 제임스도 높이 평가 했으며 당대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던 사전트의 <베니스의 실내>(An Interior in Venice)역시 작품의 인상을 완성하는 데에 원경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전경의 노부부는 눈부신 샹들리에 밑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과, 특히 아내의 몸에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져 책을 향하고 있는 남편의 시선에서 느껴지듯, 삶의 에너지를 많이 소진한 상태이다. 반면에 중경의 젊은 아들 부부의 경우, 관능적이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테이블에 편안히 기대어 한 쪽 무릎을 길게 끌어 올린 자세로, 차를 따르는 아내를 바라보는 젊은 남편은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젊은 아들 부부 뒤로 원경을 차지하고 있는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회화 작품들은 눈에 띄게 어둡고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어, 마치 이들 젊은 부부에게 필요한 사생활의 보호막처럼 둘러 처져있다. 세밀화가로서 입지를 굳혔던 휘슬러가 이 작품을 들어 “회화적 명확성과 세밀성을 희생시켜 얻은 인상주의적 양식”(Pennell 39)이라며 비난한 근거는 무엇보다도 중경 이후의 원경이 만들어내는 “인상”의 의미를 읽지 못했거나, 그 의미를 폄하하여 해석한 데에 기인한다.

    10)제임스 말년 그의 7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기금 모금 행사를 취소하게 했던 제임스는 우정의 선물로 예술가 친구들로부터 초상화 선물 제의만은 받아들였는데, 평생 우정의 표시로 흔쾌히 무보수로, 제임스 사후, 영국 보수성의 심장부인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 걸리게 될 그의 초상화 제작을 담당했던 화가가 바로 사전트이다.  11)르네상스 시대에 본격화하여 20세기에 이르러 현대적 추상주의 화풍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일관되게 계승 발전된 서양 회화의 전통의 대표적 특질은, 화면을 전경, 중경, 원경으로 사실적으로 분할하는 원근법에 있다.

    III. 제임스의 텍스트와 사전트의 회화

    인간 육체의 감각적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제임스의 섬세한 인지력은 그의 작품 곳곳에 미학적이며 동시에 관능적인 아름다음을 발산하는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 지금부터는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을 사전트의 누드 작품들과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이 관습적 미학적 아름다움에의 열망과 공존하는 제임스와 사전트의 페미니즘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예술 기교를 추구했던 제임스의 현대성은 사전트 외의 다른 화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도의 섬세한 붓놀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를 제임스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섬세한 사실적 붓놀림을 통해 표현된 앵그르 예술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욕망을 제임스가 거부해서가 아니다. 감추거나 비틀기의 현대적 수법이 아닌 적나라한 드러내기 수법인 앵그르의 사실적 묘사 중심의 예술 기교와 인간의 관능적 욕망으로서의 예술 주제의 결합을 제임스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여성 모델의 관능적 아름다움은 그녀의 관능적 욕망에 근거한 것이고, 육체적 욕망은, 여성의 욕망이든 아니면 남성의 것이든, 정도의 차이와도 무관하게 사실적 묘사를 통해 상세히 겉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사전트의 과감한 명암 처리와 같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게” 하는 현대적 방식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 예술가로서 제임스의 입장이다.

    제임스의 인물들은 인간의 감각적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탁월한 인지력을 보이지만 결코 자신들의 섬세한 지각력에 포착되는 아름다움을 앵그르적인 사실적 묘사 기법을 통해 드러내는 법이 없다. 인간에게 욕망과 에너지는 존재하며, 인간은 이에 충실해야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욕망과 에너지는 이를 포착할 수 있는 인지력을 지닌 예술가적 인간들에 의해서 성별과는 관계없이 공유되는 것이다. 오스몬드(Gilbert Osmond)의 관능적 아름다움은 그의 역사적 지적 예술적 안목에 의해 가려져야 한다. 다시 말해 제임스적으로 회화화하자면 밝은 전경에 오스몬드의 예술적 안목이 배치되고, 중경에 그의 역사적 지적 안목이 등장하며, 원경의 짙은 어둠 속에 그의 관능적 아름다움과 그 욕망이 드러나야 한다. 제임스 작품의 이러한 회화성에 현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페미니즘적 시선의 힘이다. 『여인의 초상』의 이사벨(Isabel Archer)과 멀부인(Madame Merle)과 오스몬드의 관능적 본성을 차례대로 살펴봄으로써, 이사벨의 눈을 통해 조망되는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에 대한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시선을 밝혀보자.

    우선 제임스는 이사벨을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의 주체적인 소유자로 탄생시킴으로써, 예술 주제로서의 여성을 관습적 아름다움의 옹호자로 국한시키는 빅토리아조의 관습적 보수성에서 탈피한다. 청교도는 아니지만 청교도적인 “정절과 예의를 존중하는 이사벨”(PL 362)의 내면에 관능성이 공존할 수 있으며, 도덕성과 관능성은 서로 배타적이거나 상호 파괴적인 특성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제임스는 관습적 도덕적 기준이 여성의 사회적 평판을 좌우했던 19세기 빅토리아조 영국 예술계에 현대성의 도래를 앞당겼다. 이사벨의 경우 그녀의 전경에는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올버니(Albany)에서의 삶을 즐기는 숙녀가 존재하지만, 그녀의 원경에는 섬세한 관능적 욕망의 소유자인 여인이 존재한다. 모든 변화에 개방적이며 적극적인 이사벨은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처럼 익숙하게, 지난 일들을 내버려 두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PL 39)에 사로잡히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녀의 언니 이디스(Edith)보다도 더욱 “삶을 즐기고 싶은 꺼지지 않는 욕망”(PL 41)을 본성 안에 담고 있다. “비평지 런던 스펙테이터(The London Spectator)의 최신호를 읽는 그녀의 지적 능력과, 브라우닝(Browning)의 시를 읽고, 엘리엇(George Eloit)의 산문을 읽는 깊이 있는 문학성과, 구노(Gounod)의 음악을 듣는 예술성과, 부모에 서서 물려받은 이국적 낭만성”(PL 40-42)으로 채워진 전경과 중경 너머, 원경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함을 속삭이는 이사벨이 있다. 올버니에서 런던의 가든코트(Gardencourt)로 배경이 옮겨지면서 이사벨의 관습적 아름다움에의 열망 즉 전경도 더 확대되지만, 그녀의 본성 안의 원경으로서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며 성장한다. 경험의 잔을 “독이 든 음료”로 이해하며, “보고 싶을” 뿐, “만지고 싶은 생각”은 없음을 얘기하는 이사벨에게, “보고 싶긴 해도, 만지고 싶지는 않다는 거군요”(PL 134)라고 랄프가 다시 묻자 이사벨은 “지각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 차이를 구분 지을 것 같지 않은데요”(PL 134)라고 대답함으로써,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의 차이를 허물며, “보고 싶은” 욕망은 “만지고 싶은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만져서는” 안 되는 “독이 든” 경험의 잔의 상징은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이사벨의 욕망을 설명한다. 올버니의 이사벨이 듣던 음악이 구노인 점도 그녀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 제임스가 구체적인 곡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구노의 대표 오페라 작품인 『파우스트』(Faust) 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지력의 절정에 있는 노년의 학자 파우스트가 마시게 되는 독이 든 잔은 젊음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욕망을 상징한다.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시각은 노년의 남성 파우스트 박사를 젊은 여성 이사벨로 재탄생시켰으며, 이사벨은 파우스트 박사와 마찬가지로, 관습적 능력과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의 원경에 위치한 “독이 든” 잔을 마심으로써,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취향(PL 50)의 소유자인 이사벨은 교육이나 경험의 뒷받침 없이도 타고난 천성에 힘입어 인간의 관능적 아름다움 앞에서 기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한다.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연적 관능적 아름다움을 성별 구분 없이 타인에게서 그들의 다른 모든 특질에 앞서 간파하내는 그녀의 취향은 타고난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의 소유자로서의 이사벨을 설명한다. 멀부인의 경우, 그녀의 능숙한 사교적 매너, 예술적 안목과 더불어 이사벨의 압도적인 찬사를 자아내는 자질은 관능성이다. 멀부인과의 첫 대면에서 이사벨을 매혹시킨 것은 멀부인이 연주하는 슈베르트 곡(151)의 아름다움에 앞서 그녀의 육체에서 발산되는 관능적 아름다움이다.

    그 등을—풍만하고 잘 차려 입혀진 등이었는데—이사벨은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This back—an ample and well-dressed one—Isabel viewed for some moments with surprise.(PL 151)

    사전트 작품의 두 베니스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의 등을 연상시키는 멀부인의 육감적인 등을 쳐다보는 동안 이사벨의 모든 지력은 멀부인의 관능적 매력에 집중되어 있다. 가든코트 응접실 가장 깊숙한 안쪽 “원경”에 배치되어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멀부인의 육감적인 등은 그녀의 전경과 중경에 앞서 이사벨에게 절대적인 “인상”을 남긴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멀부인의 자연스런 “자유분방함”(153)과 풍부한 경험에서 오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매너(154)는 그녀 회화의 전경과 중경을 채우지만, 원경이 주는 충격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풍만한” 가슴이 아니라 “등”을 보여주는 제임스의 현대적 취향은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부분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은 다른 부분을 표현해야 한다는 “인상”주의 작가로서의 신념을 뒷받침한다.

    멀부인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은 그녀의 풍만한 등에서 뿐 아니라, 그녀의 관능적 촉각과 후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섬세한 촉각을 자극할 정도로 적은 양으로 내리는 영국의 비는, 맞는 이를 “절대로 젖게 하지는 않으며,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나서” 멀부인에게 “엄청난 냄새의 쾌락”(165)을 선물한다. 안개와 맥주와 숯 검댕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나는 영국의 냄새는 멀부인의 “콧구멍을 기분 좋게 자극하며” 급기야 멀부인이 자신의 영국식 코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녀의 코를 파묻고서 그 맑고 섬세한 “양털”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시게 한다(165). “코,” “콧구멍”으로 대표되는 육체 기관을 통해, “안개”와 “맥주”와 “숯 검댕”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육체의 냄새를 “코를 파묻고” “들이 마심으로써,” 멀부인 자신의 육체 자체가 결코 “젖게 되는” 경우까지 가지는 않지만 멀부인은 기분 좋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 이사벨의 즉각적인 반응은 “나도 미치도록 저렇게 되고 싶어!”(165)라는 외침이다. 멀부인에게서 그 관능적 쾌락을 본받아, 욕망의 분출에서 오는 쾌락을 직접 자신의 육체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게 되는 이사벨은 바로 다음 순간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PL 166)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인류의 어머니인 구약의 이브(Eve)12)가 여성으로서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알게 되고, 그 쾌락을 추구하면서, 금기시 된 쾌락에 탐닉하는 자신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시각을 적용할 경우, 이사벨의 부끄러움은 뒤에 다루게 될 오스몬드의 방대한 미학적 지식 앞에서 이사벨이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PL 227)이나 저속함(PL 228)과 동일한 종류의 감정으로, 상대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지각하고, 그 결핍을 충족시켜 나가려는 욕망과 의지를 불러오는 자기 계발적 감정이며 자기 파괴적 관습적 죄의식과는 다르다.

    멀부인은, 프랑스 상류층의 초상화가로 입지를 굳히려 했던 사전트를 사실상 프랑스 예술계에서 외면당하게 만든 스캔들의 당사자인 마담 엑스로 더 잘 알려진 고트로 부인(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을 연상시킨다. <마담엑스>(Madame X)에 대한 제임스의 개인적, 예술가적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그의 페미니즘적 시각에 대한 이해를 앞당긴다. 마담엑스는 미국 출신이지만 사실상 미국 국적 이탈자로서 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 피에르 고트로(Pierre Gautreau)와 결혼하여, 뛰어난 미모와 남편의 재력으로 파리 상류 사회 사교계의 핵심 인물이 되지만, 도덕적 문란함과 끊임없는 염문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사전트의 <마담 엑스>는 그 충격적 관능성과, 화가와 모델 사이의 스캔들로 인해 사전트를 파리 예술계에서 영원히 퇴출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사전트는 영국과 미국 예술계에서 명성을 얻지만 파리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한다. 특이한 점은 사전트의 <마담 엑스>에 대한 제임스의 반응이다. 제임스는 사실상 사전트의 스캔들과 스캔들의 원인이 된 작품을 모두 묵과한다. 사전트의 위험 요소를 그가 “사물의 추한 면”(EB 8)13)을 보는 데에 있다고 해석하고, “순박함이 부족한 파리”(EB 8)를 비난함으로써 제임스는 사전트를 마담 엑스와의 스캔들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마담엑스와의 스캔들로 인해 파리에서의 예술적 생명을 사실상 상실한 사전트를 영국으로 불러들이고, 영국 상류 사회와 예술계로 그를 소개하고, 영국 왕립 미술원과 그로스브너로의 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게다가 문제작 <마담 엑스>에 대해서는 “절반만 맘에 든다”(EB 8)는 온건한 비평을 함으로써, 제임스는 사실상 팜므파탈로서의 마담엑스의 인상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마담 엑스>는 사전트가 즐겨 그렸던 정면을 응시하며 전경을 가득 채우고 서 있는 자세의 모델을 보여준다. 작품 전경에 정면을 응시하며 서 있는 모델은 관능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냄으로써, 제임스가 기대했던 “보여주지 않음”에서 오는 종합적 “인상”은 완성되지 못한다. “관능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능성”의 인상을 이끌어 내는 것이 제임스가 원했던 현대적 예술 형식이다. 하지만 사전트는 모델의 몸은 정면을 향하게 한 상태에서, 모델의 목을 최대한 한 쪽으로 돌리게 하고, 둔부를 목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출시키는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모델의 목과 어깨, 팔, 가슴, 허리를 이용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관능적 곡선을 적나라하게 표현해냈다. 모델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재질이나 디자인, 관능적 피부 색채 자체만으로도 그 관능성은 충격적이지만, 모델의 자세를 통해 표현된 절대적 관능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제임스의 취향을 만족시켰던 <베니스의 실내>에서도 젊은 남편 랄프(Ralph Curtis)의 관능적 욕망이 드러나지만, 랄프의 경우, 정면이 아닌 측면을 향해 서 있으며, 전경의 노부부 뒤 중경에 위치하여 어두운 원경과 연결되는 구도 속에 배치됨으로써 제임스가 기대했던 “보여주지 않는” 부분에 대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며 종합적 인상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또한 제임스가 사전트의 걸작으로 인정했던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의 소녀들도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이 소녀들이 보여주는 것은 관능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자체가 아니라, 이들 뒤에 원경에 존재하는 관능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의식으로서의 인상이다.

    사전트의 <마담 엑스>에 대한 제임스의 태도가 그의 작가적 시각의 “현대성”을 설명한다면, <마담 엑스> 못지않은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Carnation, Lily, Lily, Rose)에 대한 제임스의 태도 역시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현대성을 보여준다. 영국 왕립 미술원에 의해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가장 영국적인 미술관인 테이트 미술관(Tate Gallery)에 의해 즉시 구입된 이 작품은 <마담 엑스>와는 믿을 수 없는 대조를 보이며, 영원할 것 같은 소녀들의 순수함과 평온함의 시적 세계를 구현해 낸다. 제임스는 이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제임스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이 자라날 수 없는, 육체적 열망의 불모지와도 같은 카네이션과 백합과 장미와 소녀와 중국식 등불로 가득 차 있는 정원의 예술적 주제로서의 가치이다. 이는 제임스가 『여인의 초상』에서 그려낸 관습적 아름다움에의 극치와 동일시되는 가치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관능적 열망을 질식시키는 팬지(Pansy Osmond)가 갇혀 있는 “수녀원”을 연상시킨다. 우아한 색의 조화와 절묘한 명암 표현에 의해, 예술적 주제로서의 꽃의 아름다움이 충분히 표현된 정원에서 행복해하는 순수한 소녀들은 또 다른 팬지로서, 인간 본성의 열망의 “절반”만을 표현할 뿐이다. 제임스는 인간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에 있어서 성 구별을 두지 않았다. 남녀 모두에게 육체적 욕망이 공통적으로 존재함을 명확히 함으로써 제임스는 빅토리아조의 보수적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현대적 시각에 기대어 관습적 보수주의의 배타적 영향력으로부터 선을 그었다.

    제임스의 시각은 이사벨의 관능적 열망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사실상 관능적 욕망의 주체적 소유자로서의 남성의 위치를 타자적 소유자로서의 여성과 완전히 뒤바꾸는 파격적 페미니즘을 보인다. 지금까지 제임스는 우선 이사벨을 통해 “여성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인간본성인 관능적 열망”을 증명했고, 다음으로 이사벨의 시각에 포착되는 멀부인을 통해 “타인인 여성에게 내재되어 있는 관능적 열망”을 주체화함으로써 본성으로서의 관능적 열망의 확장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사벨의 관능적 열망은 남성 “오스몬드”의 관능적 열망을 여성 주체로서의 이사벨이 간파하고 공유하며 소유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고 완성된다.

    방대한 역사적 지식에 근거한 미학적 안목, 탁월한 지적 능력, 전통적 양식에 대한 권위적이고 가부장적 태도 뒤에 가려져, 사실 작품 속의 이사벨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과 평자들이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오스몬드의 치명적 매력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학적 전문가이기에 앞서 이사벨의 눈에 포착되는 오스몬드의 매력은 그의 육체가 발산하는 감각적 관능적 아름다움이다. 오스몬드의 개인적 인상은 그의 누이 제미니 백작부인(Countess Gemini)에 의해, 군주로서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마키아벨리,” 르네상스의 천재화가 미켈란젤로의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이태리 귀족 가문 출신의 여류시인 “빅토리아 콜로나,” 헨델과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재탄생되는 악극을 써냈던 시인이자 극작가 “메타스타시오”(PL 222)에 의해 대표된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 하나를 직접 벽에서 내려 밝은 빛 속에서 이사벨에게 설명하는 오스몬드는 분명히 상당한 수준의 예술적인 안목을 지닌 미학적 인물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오스몬드의 예술 작품의 역사적 미학적 가치에 대한 해설에 이사벨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예술품에 대한 전문적인 안목 면에서 오스몬드와 견줄 만한 인물은 랄프(Ralph Touchett) 뿐이다. 초기 튜더 시대의 건물 가든코트(PL 28)는 오스몬드의 “언덕 위의 집”(PL 217)과 비교 했을 때, 역사적 예술적 가치에서 객관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점한다. 가든코트의 갤러리를 “자신이 직접 고른 수많은 예술 작품들로 채워 넣은”(49) 랄프의 심미안은, 제임스 자신이 전문적인 정확한 비교를 피하고 있긴 하지만, 오스몬드의 심미안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전문성을 지닌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예술품의 특성상, 전문적 심미안이 없는 부유한 상류층의 경우, 전문가의 조언을 듣거나, 당대의 미술비평에 기대게 마련인데, 랄프의 경우, 자신의 독자적 취향에 기대어 작품을 선정하고 구매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심미안의 깊이와 전문성을 설명한다. 오스몬드 역시 자신의 안목에 기대어 작품을 선택한다. 단지 오스몬드의 경우, 운 좋게 할인 판매장에서 오래된 은 십자가를 찾아내거나, 재능 없는 예술가의 서툰 작품들 사이에서 우연히 코레지오(Antonio Allegri da Correggio)의 스케치를 찾아내는 것처럼(PL 228), 자신의 심미안과 행운에 기대어 예술품을 수집한다. 랄프와 오스몬드의 차이라면 경제력인데, 이 두 예술 전문가에 대한 이사벨의 상반되는 태도는 이들의 경제력의 차이에서 보다는 다른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랄프의 경우, 가을비만 내리기 시작해도 마치 죄수처럼 집안에 칩거해야하는(PL 165), “병약한 육체를 가진 추남인(PL 19)” 반면, 오스몬드는 압도적인 육체적 매력을 이사벨 앞에 과시하는 관능적 매력의 소유자이다.

    오스몬드가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들이 상징하는 그의 예술적 심미안과 그의 메달들이 상징하는 역사적 혜안, 또 그의 태피스트리가 상징하는 이국성이 오스몬드라는 한 남성의 전경과 중경을 밝게 채우고 있지만, 이사벨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모든 예술적, 역사적, 이국적 매력을 뛰어넘어 “묵직하게” “돌출되어 있는” 오스몬드의 육체적 매력이다. 오스몬드의 그림들, 메달들, 태피스트리들, 그리고 오스몬드 자신이 모두 이사벨 앞에 전시되어있는 배경에서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술품들의 관습적 미학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스몬드의 육체가 주는 관능적 아름다움이다. 이사벨은 오스몬드가 안내해준 어떠한 예술품도 관심 있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짙은” 머리카락, “농익은 얼굴색,” “부드럽고 날렵한 체구,”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손가락”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이사벨이라는 여성 화가의 눈으로 남성 모델의 신체를 훑어보며, 그 섬세한 관능적 매력을 간파하고 감탄하며, 영원히 예술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예술가의 주체적 열망을 표현해냈다. 이 장면에서 이사벨은 옴므파탈(Homme Fatale)14)로서의 오스몬드의 관능적 매력을 주체적으로 섬세하게 지각함으로써, 인간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은 관습적 예술적 아름다움에의 열망과 공존할 수 있으며, 결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옴므파탈로서의 오스몬드의 파괴력은 이사벨의 다른 모든 열정을 “빨아들여버린다”(PL 297). 결국 이사벨의 “좀 더 근원적인 필요”인 “끝없는 욕망”은 그녀의 관습적 욕망 즉 모든 지적, 예술적 열망과 독립적 삶에의 의지를 남김없이 빼앗아 버렸다(PL 297). 오스몬드로 대변되는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이사벨을 창조함으로써 제임스는 인간 본성 안에 성별과는 무관하게 관습적 열망과 함께 공평히 관능적 열망이 존재한다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명확히 했다.

    옴므파탈로서의 오스몬드의 인상은 누드작품에 표현된 사전트의 옴므파탈과 동일시 될 수 있으며, 팜므파탈의 관습적 기준을 철저히 거부하는 예술가의 페미니즘의 시각을 표현한다. 구약성서의 이브(Ev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자신의 육체의 관능적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남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위험한 여성 팜므파탈(Femme Fatale)의 인상은 중세를 거쳐 19세기에도 여전히 관습적 힘을 발휘하는 여성적 이미지였다. 제임스와 더불어 사전트 역시 빅토리아조의 엄격했던 도덕적 관습에 의해 모든 여성에게 금기시되었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성별을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에너지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선구자적 예술가였다. 사전트가 20대 초반에 제작한 <몽상에 잠긴 청년>(Young Man in Reverie)에서 이미 그는 빅토리아조의 관습적인 보수성을 넘어서는 페미니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청년은 자신의 육체로 남성을 유혹하는 관습적 여성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두 눈을 감고 자신만의 “몽상”에 잠긴 청년이 한 쪽 가슴을 드러낸 채, 육감적인 화병들 옆에서 하얀 벽에 기대어 있다. 작품의 모델이 청년이 아니라 소녀로 바뀐다면, 그 몽상적 환희의 표정은 세레자 요한의 목을 얻기 위해 헤로데 왕 앞에서 일곱 베일을 하나씩 벗어가며 춤을 추는 살로메를 묘사한 스턱(Franz von Stuck)의 <살로메>(Salome)의 정확한 재현이다. 일곱 베일을 하나씩 모두 벗고 가슴을 드러내며 육감적 목을 드러내기 위해 과감하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고 몽상적 쾌락에 잠겨 춤을 추는 살로메는 사전트의 <몽상에 잠긴 청년>에서 남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화폭을 가든 메운 짙은 갈색의 망토는 앞가슴에 브로치로 고정되어 있어, 의도적으로 옷을 끌어 내리지 않는 한, 청년의 가슴이 보일 가능성은 없는 차림이다. 남성성의 상징인 근육으로 뒤덮인 마른 왼쪽 손은 허리춤에 갖다 대어져 있는데, 편안함을 위한 포즈라기보다는, 자신의 나머지 한 쪽 가슴과 육체를 가리기 위해 망토를 누르고 있는 듯 힘이 가해져 있다. 사전트의 페미니즘의 근거는 팜므파탈의 인상을 확장시켜 옴므파탈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사전트의 <이집트 소녀 누드>(Nude Egyptian Girl)와 같은 관습적인 여성누드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전트 예술의 주제는 관습에 의해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욕망의 지각과 분출 권리를 남성에게서 박탈하고 여성에게 전리품처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분출하는 권리는 남녀 모두의 동등한 권리임을 사전트는 관습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을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정면 자세 다음으로 사전트가 즐겨 그렸던 왼쪽 측면 자세로 제작된 <이집트 소녀 누드>는 관능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팜므파탈로서의 여성의 육체를 훌륭히 표현했다. 등을 보인 상태에서 왼쪽으로 머리와 상체를 완전히 돌린 채로 서 있는 이집트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델의 시선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육체의 가장 관능적인 부분인 왼쪽 가슴에 닿아 있으며, 소녀의 손끝에서 왼쪽 가슴으로 올려져서 가슴을 스치고 있는 풍부한 머리채는,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시선과 합작하여 관람자의 시선을 소녀의 관능적 아름다움의 절정인 가슴으로 끌어 모은다. 사전트의 <이집트 소녀 누드>의 인상은 티시안의 울고 있는 소녀에서와 같은 순수함의 희생양으로서의 두려움이나 회한이 아닌, 관능적 쾌락을 인지하고 있는 소녀의 주체적 열망이다.

    사전트의 남성 누드 모델들은 남성의 신체를 통해 남성적 관능미를 표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Little 141). <휴식을 취하는 남성 모델>(Male Model Resting)에서 남성 모델에게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사전트는 또 한 명의 옴므파탈을 창조해낸다. 티시안(Titian)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 고야(Francisco de Goya)의 <누워있는 마야 부인>(La maja desnuda),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 마네(Édouard Manet)의 <올랭피아>(Olympia), 세잔의(Cezanne)의 <현대판 올랭피아>(A Modern Olympia), 고갱(Paul Gauguin)의 <더 이상은 싫어요>(Nevermore) 등 누워 있는 관습적 팜므파탈 작품은 무수하며, 이들의 예술적 주제는 모두 팜므 즉 여성이다. 특히 고야와 고갱의 작품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는 사전트의 누워있는 남성 모델은 성이 바뀌었을 뿐 또 하나의 누워있는 마야 부인이며, <더 이상은 싫어요>의 여성 모델이다. 사전트는 관습에 따라 누워 있는 팜므파탈을 제작하는 대신, 누워 있는 옴므파탈을 예술의 주제로 선정한다. 인간의 육체에서 관능적 아름다움을 보고, 이에 대한 열망을 품는 것은 시대적 관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며, 성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열정임을 표현하려 했던 사전트의 페미니즘적 시각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선구적인 힘을 발휘한다. 사전트를 동성애자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만(Fairbrother 139), 그 근거가 확실치 않으므로 본고에서는 고려하지 않겠고, 1917-20년 사전트 말년에 제작된 남성 누드의 마지막 작품의 선구적 페미니즘 특성에 집중하겠다. 사전트의 마지막 남성 누드 작품 <토마스 맥켈러 누드 습작>(Nude Study of Thomas E. McKeller)은 <마담 엑스> 못지않게 충격적인데, 그 근원은 이전의 모두 누드 작품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 작품에서 사전트는 “희생양”으로서의 남성을 그려냈다. 사전트 말년, 제임스가 사망한 바로 다음해에 제작하기 시작한 <토마스 맥켈러 누드 습작>에서 사전트는 <마담 엑스>에서와 비슷하게 관능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모델에게 취하게 했다. 예술적 주제가 남성 모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마담 엑스>에서처럼 머리를 최대한 한 쪽으로 틀어 목의 곡선미를 구현함으로써 관능미를 표현하는 대신, 굵게 직선으로 위로 뻗은 원통형의 목을 그려냄으로써 남성의 상징적 기관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관능미를 최대한 과시하게 했다. 목을 탄탄히 지탱하고 있는 양 어깨에서 두 팔로 흘러내리는 곡선은 여성미와 남성미를 혼합한 듯 중성미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엉덩이 뒤로 감춰진 오른 팔을 곡선으로 처리하고, 중앙의 생식기를 사이에 두고 모델의 허벅지 근육을 상당히 압박하면서까지 안쪽으로 양 허벅지를 비틀게 함으로써, 마치 생식기를 보호하고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한 인상을 줌과 동시에 여성 모델에서나 있을 법한 다리 곡선을 표현해 냄으로써 사전트는 남성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인상을 완성해낸다.

    사전트를 동성애와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언급되는 이 누드 작품에서 사전트는 옴므파탈을 넘어서는, 관능적 욕망의 희생자로서의 남성을 그려내는 파격을 보임으로써, 양성을 넘어서는 인간 관능성에 대한 독창적인 페미니즘 시각을 제시했다. 사전트는 주문 받은 초상화 작품의 경우에도, 캔버스의 크기와 모델의 자세는 자신이 직접 정하는 초상화가였는데, <토마스 맥켈러 누드 습작>에서 그가 선정한 예술 주제로서의 모델의 자세는 궁극적인 작품의 인상으로서 남성의 관능성을 표현하기 위한 화가의 의도적 선택이었다. 유일하게 남성미 즉 남성의 육체적 힘을 강조하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인 모델의 완벽한 원통형 목 주위를 자세히 보자. 상대적으로 목을 강조하기 위해 작게 그려진 듯한 인상을 주는 머리는 불필요하게 얹어진 듯 전혀 시선을 끓지 못한다. 게다가 얼굴의 핵심인 모델의 눈은, 마치 눈으로서의 기능이 불필요한 듯 아무렇게나 허공을 향해 내버려져 있다. 방향 감각이 없는 모델의 시선은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 남성 모델은 관능적 아름다움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공할 뿐, 자신 스스로는 자신의 육체적 힘과 아름다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독점하거나 공유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이었던 관능적 욕망의 희생양의 역할을 사전트는 남성에게 할당한 것이다. 이 작품의 인상은 앵그르의 <안젤리카를 구출하는 로저>(Roger Freeing Angelica)의 희생양 안젤리카의 인상을 연상시킨다. 바다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질 안젤리카는, 앵그르가 자신의 섬세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완성해낸 관능미의 절정을 내뿜으며, 두 손은 바위에 묶인 채 육감적으로 위로 젖혀진 목을 내보이며 관능적 욕망의 희생양으로서의 무력함의 인상을 내보인다. 관능적 욕망의 희생양으로서 이들에게 필요한 아름다움은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발끝부터 목 끝에 걸쳐 이들은 최대한 관능적 아름다움을 내뿜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안젤리카의 경우 관능적 아름다움을 배가시키기 위해 머리카락 또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이들 자신의 주체적 관능적 쾌락 의지를 표현해 줄 수 있는 머리와 눈은 안젤리카의 경우 로저를 찾으려는 듯하지만, 시선이 정확치 않고, 토마스의 경우 그의 시선은 허공에서 방향을 잃은 채 희생양으로서의 무기력 그 자체를 부각시킨다. 남성 희생양으로서의 인상은 제임스 말년의 대작 『황금잔』(The Golden Bowl)의 아메리고(Prince Amerigo)에서 구현되는데, 듀삐(Dupee)가 이 작품을 제임스의 “대단한 문제아”(Dupee 258)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의 희생양으로서 남성의 인상은 인간의 관습적 가치와 공존하며 인간의 한 본성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빅토리아조 말기 여전히 상당히 파격적인 페미니즘 시각이었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은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왔으며, 곡선과 풍만함은 여성적 관능미를 대표하는 위험한 육체적 특질로 인식되어 왔다. 보수적 관습이 지배적이던 19세기 빅토리아조 영국에서 사전트가 보여준 페미니즘의 시선은 옴므파탈을 창조하고, 남성 희생양의 인상을 보여줌으로써, 특정 열망이 특정 성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예시했다.

    12)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브와, 작품 결말에서 미국으로 추방당하는 멀부인을 연결시킴으로써, 욕망의 소유자로서의 여성을 벌하는 제임스의 보수적인 태도를 부각시키려는 비평은 제한적인 텍스트 읽기에서 오는 오류이다. 멀부인이 미국으로 유배당하는 결말을 맞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과 타인에게서 인간 본연의 관능적 욕망을 지각하고 자유자재로 이를 분출한 데에 있지 않다. 제임스가 멀부인을 추방하는 이유는 오스몬드에 대한 관능적 열망을 완성을 위해 필수적인 관습적 열망에의 완성, 즉 자립적 개인주의와 도덕성의 장을 이사벨의 결혼 생활에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멀부인은 서로 공존해야 하는 그녀의 관능적 열망과 관습적 열망의 합일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유배되는 것이다.  13)Henry James. Letter to Elizabeth Boott Duveneck. 2 June 1884 (Houghton Lib., Cambridge, 1884): 이후 본 저서에서의 인용은 EB로 표기한 후 쪽수를 표시한다.  14)팜므파탈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남성을 일컫기 위해 필자가 선택한 표현이다.

    IV. 여성주의적 텍스트 읽기

    끝으로 오스몬드와의 결혼 이후, 그녀의 끝없는 “기대”와는 달리 관능적 욕망의 충족이 이뤄지지 않는 “암흑과 침묵과 질식”(PL 360)의 공간에서, 오스몬드와의 결혼 생활의 가치를 “옳음”과 “고귀함”과 “의무”(PL 361)에서 찾으려 노력하는 이사벨(PL 340-341)이 랄프의 죽음 이후 다시 오스몬드에게로 돌아가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현대성을 정리하겠다. 이사벨이 오스몬드와 결혼하는 이유와, 이사벨이 오스몬드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에 대한 비평가들의 견해는 시각에 따라 난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사벨의 오스몬드와의 결혼 이유에 대한 주요 해석은 크게 두 가지 시각, 도덕적 낙관주의와 에머슨적인 개인적 자유에의 열망(Bellinger 63, Meissner 108, Tanner 150-2)과 예술지상주의(Freedman 152, Krook 59)로 분류된다. 이러한 시각의 한계는 이사벨의 본성 속의 도덕성과, 자립적 개인주의,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와 공존하며, 이러한 특질보다 더 근원적이며 지속적이며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인간 육체에 근거한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벨이 오스몬드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결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이를 이사벨의 도덕 의식의 발현으로 지적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며(Cargill 100, Donoghue 182, Freedman 162), 자립적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에의 열망을 그 근거로 보는 시각(Lebowitz 69, Matthiessen 151, O’Neill 27, Richardson xxxviii, Ward 15, Tanner 159-160) 역시 또 다른 주류이다. 즉 도덕의식과 독립의식 두 관습적 가치에 집중하는 이러한 주류 해석은 관능적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한 이사벨의 각성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결혼 전 랄프에게 오스몬드를 변호하던 순간에도 이사벨은 “옳음”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드러내는 관습적 가치의 여성이었다. 랄프의 임종을 앞두고, 친구 헨리에타(Stackpole Henrietta)와의 대화에서, 팬지에게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보다 더 선량한 이유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약속만으로도 충분히 돌아갈 근거가 된다(PL 469)고 확신하는 이사벨은 분명히 절대적 “도덕 의식”의 소유자이다. 가든 코트에 남아있을 것을 유언하는 랄프에게 “그게 옳다고 생각되는 한”(PL 479) 머무르겠다고 얘기하는 이사벨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옳음”을 행하려는 도덕 의식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현실 속에서 창조적이고 의지적으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내재적 자유의 상태”에 도달한 인물로 변화했다(Tanner 150-2)는 또 다른 주류의 해석 역시 이사벨의 관습적 가치에의 성장에 배타적으로 집중한다.

    제임스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이사벨의 결말을 정의하자면, 이사벨이 오스몬드에게로 돌아가는 이유는 “관습”과 “사랑”의 대립에서 결국 “사랑”이 승리함을 보여준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주류 시각이 갖는 공통된 한계는 랄프의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젊음”과 “소중함”과 “힘”에 대한 이사벨의 자각(PL 466)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젊음”과 “소중함”과 “힘”은 랄프의 유언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된다. 랄프의 유언은 이사벨의 결혼 이후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의식에서 자취를 감춘 “젊음”과 “사랑”에의 일깨움이다. 오스몬드로 상징되는 “관습”(PL 265, 478)에 의해 짓밟혔지만, 이사벨은 아직 젊고, “혐오”의 감정은 결국 “사랑”의 감정임을 제임스는 랄프를 통해 이사벨에게 일깨운다(PL 479). 임종을 앞둔 랄프와의 대면이후 새벽녘 유령과의 대면에서 이사벨이 얻은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PL 479)는 자각으로, 이는 자신의 젊음과 사랑의 ‘힘“에 대한 믿음이며, 이를 통해 관습의 힘을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랄프가 이사벨에게 남긴 “사랑”과 “젊음”이라는 유언과, 가든코트에서 이사벨을 처음 봤던 순간에 그녀가 주는 인상에 감탄하며, 그녀를 “티시안” 작품(PL 63)으로 비유했던 인상을 연결시킴으로써, “사랑” 즉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되찾겠다는 이사벨의 페미니즘적 의지는 더 확고히 증명된다. 제임스가 구체적 작품을 지정하지 않았으므로, 티시안 여성 초상화의 보편적인 특질을 적용시켜 제임스가 의도했던 인상을 그려내야 한다. <살로메 혹은 주디스>(Salome or Judith), <우르비노의 비너스>, <참회하는 막달레나>(Penitent Magdalene) 등의 대표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티시안의 젊은 여성 모델들은 예외 없이 상당히 관능적이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거구의 소유자 들이다. 하지만 티시안은 여신들이거나, 신화 상의 여인들 혹은 목가적인 풍경 속의 여인, 심지어는 성서 속의 인물이라는 비현실적 바탕 위에 모델들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따라서 이들 여성들의 관능성은 신화, 목가적 세계, 성서의 세계라는 전경 뒤에 안전하게 가려지는 원경에 위치하는 효과를 누렸으며, 당대 유럽 왕가와 상류층뿐만 아니라, 이후 보수적 관습이 지배적이던 19세기에도 안전하게 르네상스 걸작으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제임스가 르네상스 대가들 중에서도 특히 티시안을 선택해서 이사벨과 연결시킨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전경에 강조되어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신화 속 여성들의 관습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이 그 하나이고, 다른 나머지 이유는 모델의 육체가 상징하는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으로 봐야 한다.

    이사벨이 오스몬드가 있는 로마로 돌아가는 결말을, 위에 소개했듯이 도덕 의식의 발현으로 보거나, 자립적 개인주의의 승리로 해석하는 견해는 모두 제임스가 선택한 티시안 작품의 관습적 아름다움만을 보는 제한된 텍스트 읽기에서 오는 한계를 보인다. 신화 혹은 성서상의 주제, 목가적 주제는 당시 티시안 개인에만 국한된 예술적 주제가 아니라 회화를 넘어선 모든 르네상스 예술 장르의 공통된 주제였다. 따라서 제임스가 티시안을 선택한 이유는 티시안 작품의 관습적 아름다움에만 배타적으로 근거한다고 볼 수 없다. 제임스는 티시안의 신화 속, 목가 속, 성서 속 여인들의 여신으로서의 관습성 뒤에 “가려진” 부분을 통해서, 관능적 욕망의 소유자로서의 인간, 즉 여성을 보았던 것이다. 제임스는 이사벨을 티시안 작품에 비유함으로써, 이사벨이 그녀의 “자연적 취향”(50)을 따르며, 관습적 아름다움에만 종속되지 않고, 공평히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키워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시각을 분명히 했다. 랄프의 죽음 이후 가든코트에서 오스몬드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이사벨은 도덕의식과 자립적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관습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사벨은 여성으로서 관능적 아름다움의 열망을 주체적으로 발현하며 살아가는 미래에의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오스몬드는 관습 그 자체(PL 265)이며, 또한 그 특유의 관능미로 인해 이사벨의 “원시적 필요와 끝없는 욕망”(PL 297) 즉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을 발현시켜줄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만의 사람이며, 그녀는 단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도 줘야 하는 것이다”(PL 297)라는 결혼을 앞둔 이사벨의 지각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사벨은 오스몬드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인간 본성의 관습적, 관능적 열망이 공존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의 이상적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외견상 이 작품의 결말은 이사벨 부부의 행복한 재결합을 완전히 부인하는 듯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문지방을 뛰어넘는 미래가 있음을 확신 할 수 있다”(29)라는 하비랜드(Beverly Haviland)의 시각도 이사벨의 미래를 관습적,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의 공평한 발현 장으로 해석하는 제임스의 페미니즘적 시각을 수용할 때 의미가 있다.

    제임스가 경제적 특권을 전혀 부여받지 못하고, 예술적 심미안 또한 철저히 결핍된 한 과격한 여성 운동가에 의해 자신의 초상화를 난도질당하는 비운을 겪은 일은, 공존하는 상반된 가치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이 초래하는 인간 삶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15) 일생동안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거장에게 바쳐진 우정 어린 친구들의 선물이 과격한 페미니스트에 의해 찢겨진 사건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앞서,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가치에 갇힌 채, 또 다른 세계의 존재와 그 세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반 페미니즘적 도그마에 지배당할 경우, 그 인간 본성이 불러올 수 있는 공멸의 비극적 결과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오스몬드에게로 돌아가는 이사벨의 열린 미래에서 관습적 아름다움의 열망 혹은 관능적 아름다움에의 열망 중 어느 하나 만을 배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여성의 정치적 자유를 예술품의 가치와 대척되는 것으로 이해한 과격한 여성운동가의 오류와 다를 바 없다.

    15)70회 생일을 맞는 문학계의 거장 제임스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기 위해 시도되었던 기부금 모금 행사가 제임스 자신의 완강한 거부로 무산되자, 제임스의 찬미자들 300여명이 함께 모여 제임스가 가까스로 수락한 일인당 5파운드를 넘지 않는 금액을 내어 놓아 마련한 선물은 50파운드 가량의 찰스 2세 시대의 은테 접시와 초상화였다. 사전트가 초상화 제작 사례금을 기꺼이 거부함에 따라, 결국 접시를 구입하고 남은 금액은 그의 흉상을 제작하는 데 쓰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초상화는 제임스의 뜻에 따라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벽을 장식하게 되었는데, 이듬해 5월, 노년의 희끗한 머리를 한 평온해 보이는 한 여인이 제임스의 초상화 앞에 나타났고, 전시되어있던 제임스의 초상화를 고기 자르는 큰 식칼로 순식간에 난도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제임스의 초상화는 머리 왼쪽 부분과 오른쪽 입가 그리고 오른쪽 어깨 아랫부분을 찢기는 불운을 겪었다. 현장에서 즉각 체포된 여인은 제임스를 전혀 알지 못하며, 화가 사전트의 명성 또한 들어본 바 없는 과격한 여성 운동가였다. 그녀의 진술은 이러했다. “모든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한 보장을 받을 수 없으며, 그들의 귀중한 예술품 또한 안전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다”(LHJ 2: 754-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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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림 1 ]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 1882), Museum of Fine Arts,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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