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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Study on Khai Du Club as an Experimental Filmmaking Club in 1970s and Director Han, Ok-hee 1970년대 실험영화집단 카이두 클럽과 한옥희 감독 연구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 Study on Khai Du Club as an Experimental Filmmaking Club in 1970s and Director Han, Ok-hee
KEYWORD
Han Ok-hee , Khai Du Club , Experimental Film , Yu Hyun-mok , Ha Gil-jong , , , , Oblique Angle , Flicker
  • 1. 들어가는 말

    한 시대의 문화는 이전 시대의 영향과 외부에서 유입된 사조가 뒤섞여 형성된다. 1970년대는 정치적 억압과 통제의 분위기가 지배했지만 한 편에서는 반작용으로 청년문화가 태동하여 격랑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었다. 충무로 영화는 시대의 분위기에 편승한 국책영화와 멜로영화가 지배력을 더해가고 있었으며 충무로 밖은 소형영화에 대한 집단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예술로서 영화에 대한 자각이 꿈틀거렸다. 충무로 밖의 열기는 영상시대의 출범과 대안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충무로의 변화를 촉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형영화인의 저변확대와 실험영화집단의 활동을 통한 한국적 아방가르드의 토양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격변의 연대이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영화사는 유신체제기의 국책영화와 흥행성적에 지배된 장르영화 그리고 영상시대의 활동으로 1970년대를 채워왔다. 해방 후 한국영화 정체성의 모색이라는 책무와 아방가르드 영화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에 청년영화 혹은 청년 문화의 자장 속에서 영화적 화답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하여 충무로 밖에서 실험영화 집단의 활동이 촉발되었으며 사회적 파장과 구체적인 궤적을 남기면서 작업을 수행해온 대표적인 실험영화 집단이 한옥희, 김점선, 이정희로 대표되는 카이두 클럽이다.

    이 글은 카이두 클럽의 등장 배경과 1970년대 청년문화와 관련성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카이두의 등장은 한국 소형영화동호회의 활동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단편실험영화 집단과 외국 실험영화의 접촉으로 촉발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아울러 하길종 감독과 영상시대와의 연동된 맥락에서 카이두 클럽의 활동을 검토할 계획이다. 카이두 클럽의 등장은 동시대의 지배적인 문화토양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한 영화적 참여로서 여성실험영화집단의 활동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이두 클럽의 작품 경향은 대표적인 인물인 한옥희 감독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 살펴 볼 계획이다.

    2. 실험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의 등장 배경과 활동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가 유신헌법과 반공이데올로기 그리고 경제 발전이데올로기로 국가적 통제를 강화하던 억압의 시대였다. 영화적으로도 보호와 육성이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 영화진흥공사를 통한 제작의 개입과 검열을 통한 창작 의욕의 꺾었던 시절이었다. 어둠이 깊으면 빛에 대한 더 깊은 열망이 치밀어 올라오듯이 국책영화의 장려와 외화수입권을 통한 탈 정치적 영화제작의 방향을 잡아가던 충무로와 다르게 소형영화 운동과 실험영화 제작이 충무로 밖에서 이루어지면서 대중영화의 획일성에 대해 철퇴를 가하면서 저항해 갔다. 이와 같은 충무로 안팎의 분위기는 억압이라는 시대고를 영화로 돌파해내는 숭고한 시대적 책무에 부응한 행적을 요구했다.

    일제 강점기의 국책영화의 시련을 겪었던 영화인들은 순응과 저항의 변증법을 체득하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풍미한 청년문화의 한국 상륙과 서양의 영화운동을 도입한 유현목의 역할 그리고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세례를 받은 하길종 감독의 귀국, 뉴저먼 시네마, 프랑스 누벨바그를 전파한 외국문화원의 시네 클럽의 활동은 1970년대 한국영화인의 잠을 깨우는 촉진제였다. 당시 관객은 국내의 개봉관과 재개봉관의 국책영화와 멜로드라마에 몰입하는 다수의 시민관객과 문화원 시사실과 소형영화 동호회의 감상회를 통해 대안영화를 접했던 영화 애호가로 양분된다. 후자는 소형영화 동호회와 영상연구회, 시네클럽, 카이두 클럽 등으로 집단결성으로 영화적 실천 행보를 가시화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1970년대 한국영화의 지형을 비옥하게 하면서 유신체제 기의 얼룩진 영화계에 정화의 물길을 끌어왔으며 1980년대 영화 운동세대의 출현에 가교 역할을 말없이 수행해갔다. 역사는 지속과 단절이 반복되지만 늘 큰 흐름에서 보자면 연대하여 미래로 향하는 거대한 강물이다. 카이두 클럽은 이와 같은 1970년대의 문화적 토양에서 출현하여 영화적 실천을 통해 시대적 요청에 응답했던 것이다.

    한옥희 감독은 ‘청년문화의 한국 상륙,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제한, ‘영상연구회’등 대학 영화 모임의 활성화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뉴저먼 시네마의 영향, 그리고 저질 문화에 대한 반기를 든 여성의 움직임’이 카이두 클럽 출현의 문화적 토양이었다고 말했다. 한옥희감독은 영화집단인 영상연구회에서 활동하다가 카이두 클럽을 결성하 였다. 영상연구회는 1971년 결성된 단체로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을 중심으로 20여 편의 16mm 영화를 제작하고 신문회관 등에서 6차례에 걸쳐 영화제를 개최하였다.1) 영상연구회에서 활동은 실험영화작업에 대한 갈증과 여성영화집단의 결성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출범한 단체가 바로 카이 두 클럽이며 1974년 창립된 한국여성실험영화집단이다. 카이두 클럽은 작품 감상회에서 ‘실험영화 페스티벌’로 명명했으며 심포지움 자료집에서 ‘카이두 실험영화 연구회’로 명기하여 실험영화를 중심에 둔 활동을 표방하였다. 해방 후 한국영화사에서 ‘실험영화’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영화집단이 카이두 클럽이다. 한국실험영화사 맥락에서 고찰할 때 1960년대 시네포엠 그룹과 하길종의 졸업작품 그리고 1970년대에 영상연구회의 작품에서 비롯되었지만 실험영화의 이름으로 활동한 집단의 효시는 카이두 클럽인 셈이다.

    구성원은 “대학에서 문학, 미학, 연극 영화, 미술, 매스컴, 시청각 교육 등을 전공한 여성들”로 이루어졌으며 1974년 7월 27일부터 31일까지 저녁 8시에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서 실험영화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상영된 작품은 한옥희의 <밧줄>(10분), <중복>(4분)과 김점선의 (12분) (5분), 이정희의 (8분)과 한순애의 (6분) 그리고 공동제작 한<몰살의 노래>(5분), <엘레베이터>(3분) 으로 총 8편이며 동시에 상영 된 프로그램은 한국 소형영화동호회의 8mm 작품과 이화여대 시청각교육원 16mm 작품이었다.

    카이두 클럽은 1970년대 대학생 중심의 영화집단이며 여기에 실험영화와 여성이 공집합을 이루고 있다. 초창기 회원은 한옥희(韓玉姬), 김점선(金点善), 이정희(李廷姬), 한순애(韓順愛), 정묘숙(鄭妙淑), 왕규원(王圭媛)이다. 뒤에 유연희와 연극평론가 김방옥도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옥희는 회장을 맡았으며 이화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졸업 논문은 “영화 속에서의 미학 특히 시적인 표현”이며 왕규원은 이화여대 신문 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2) 김점선은 이화여대 시청각 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이정희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사회의식이 가장 집중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묘숙은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하였으며 카이두 작품의 안무를 맡았다.3) 카이두 클럽의 구성원은 모두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국어국문학과와 시청각 교육학과가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활동은 한옥희, 김점선, 이정희, 한순애가 지속하였으며 한옥희와 이정희, 김점선은 제 2회 작품 발표회에서도 신작을 상영하였다.

    카이두의 명칭은 “몽고족 왕실의 전설적인 여걸 카이두의 이름을 딴 것”4)으로 되어있다. 카이두를 이끌었던 한옥희 감독의 구술 증언 에 의하면 카이두는 “몽고의 전설적인 여걸의 이름이며 그녀는 징기스칸의 외손녀로서 어떠한 남성도 그녀를 능가하지 못해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몽고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피를 이어받은 남성을 넘어선 여걸의 이름을 영화집단의 이름으로 표방한 것은 남성중심주의 영화계에 대한 전복의 의지가 엿보인다5).

    카이두 클럽의 작업 방식은 “회원 각자가 제작, 극본, 감독, 배우를 몽땅 겸해, 각자 작품을 만들어 만나는 것”6)이었다. 하지만 영화 작업 을 일인 다역으로 수행하기는 한계가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함께 카메라를 들고 서로 연기자가, 스테프가 되기도”했던 공동참여 방식을 병행했다. 카이두의 지향점은 “기성영화에는 두 가지 편견이 있다. 남자의 직업이라는 관념과 흥행성과의 관련이 그것이다. 우리는 아웃사이더로서 이 두 가지 고정 관념을 깨뜨릴 것이다7)”라고 피력했다.

    1975년 4월 19일에 미공보원에서 “여성과 영화세계‘라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심포지엄에서 이어령 선생은 ‘문학과 영상 속의 여성 이마쥬, 그 명암’을 발표하였으며 영화평론가 변인식은 ‘영화예술에 있어서의 여성 참여도의 확대는 가능한가?’, 여성영화감독 홍은원과 박남옥은‘한국영화계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발표했다. 카이두 클럽은 취지문에서 “한국영화에는 여성이 없다. <경아>가 우리시대의 잃어버린 꿈의 여인상이라고 아무리 애교를 부려 보아도 한국영화에는 여자 가 없다. 目下 <영자>가 전성 시대를 기차게 구가한다손 치더라도 한국영화에는 여자가 없다. <女ㆍ女ㆍ女>의 옴니버스 영화를 검열하는 사람이<女ㆍ女ㆍ女>를 합하면 姦(간사할 간)이 되니 타이틀을 바꾸라고 호령했던 기억이 있는 한 한국영화에는 여자가 없다”8)라고 선언한다. 당시 성공한 대중영화와 실험적 옴니버스 영화에 모두 여성이 부재한다고 선언하면서 여성영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 2회 작품 발표회는 1975년 5월 23일과 5월 27일에 남산 독일 문화원에서 열렸다. 이 발표회에서 상영된 작품은 “이정희의 <그러나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한다>(흑백 15분), 한옥희의 <세 개의 거울>(흑백30분), 김점선의 <75-13>(파트. 컬러 40분)”9)이었다. 변인식은 이정희의 작품에 대해 “무녀가 갖는 의식 과정을 낱낱이 발가벗기고 있다”고 평가하고 한옥희의 <세 개의 거울>은“한 여인이 갖는 욕구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표현”했으며 “초현실주의적인 화면구성과 심볼라이즈된 촛불의 이미지, 나상의 여체와 질식할 것 같은 현실의 벽을 깨뜨리려는 일상의 의지가 영상의 흐름 속에 통렬하게 비쳐진다”고 평가한다. 김점선의 <75-13>은 “기성의 필름 들을 빠른 템포의 음악과 더불어 칼 끝으로 이리저리 그어서 소위 <듣는 미술, 보는 음악>을 앞세워 시각의 고정관념을 파괴”하였다고 극찬한다. 카이두 클럽은 지속적으로 작품발표회와 제작을 통해 1970년대 한국실험영화운동을 펼쳐갔다. 제3회 작품 발표회는 독일문화원에서 1975년 여름에 열렸으며 제4회 작품 발표회는 공간 <사랑> 개막 축하프로그램의 일부로 1977년 봄에 열렸다. 제 4회 작품 발표 이후의 활동과 행적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미하다.

    한옥희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77년 이후에 카이두 클럽 회원들은 개인적으로 작품활동들을 계속했으며, 김점선은 본격적인 미술작업과 해프닝(홍씨 喪家) 작업 등을 꾸준히 이어갔고 저(한옥희-인용자 주)시 ‘거리 굿’ 등 이색적인 이벤트를 새로운 카이두 클럽 회원들(유연희, 정묘숙) 들과 함께 계속”했다고 한다. 카이두 클럽의 활동은 1974년에서 1977년까지 작품발표회를 통해 펼쳐갔으며 그 이후는 집단적인 활동보다 개인적인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해 갔으며 유학과 개인적 활동 분야로 확산되면서 이름은 잔존했지만 단체 활동은 중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카이두 클럽은 1970년대 등장한 영상연구회와 더불어 한국 실험영화를 개척해 갔다는 점과 유신체제기의 충무로에 대항한 영화적 실천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사적 의의와 무게를 획득하였다. 이후 권중운의 한국실험영화연구소 활동과 유학생 중심의 실험영화 작업 그리고 서울국제실험영화 페스티벌의 개 최는 1970년대 실험영화 작품발표회와 실천적 운동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실험영화의 발원지로서 1970년대 실험영화집단의 활동은 영화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

    1)『한국독립영화의 모든 것 1970-2000, 2000년 특별호』, 8쪽. 한옥희 감독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김현주회장 구성원은 김현주 회장(서강대. 프랑스유학), 이익태(서울예대, 미국이민, 화가), 이경업(이황림감독. 쵤영 담당). 박상천(미국이민, 연기자로 활동). 그밖에 최윤 (서강대교수) 등이 영상연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그 당시 외국의 전위영화 등을 소개하고 영화계인사들을 초청해서 세미니 등도 열었고, 회원들의 영상과 연극을 모은 작품발표회”를 가졌다고 증언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외국 전위영화와 만남과 작품발표회를 통한 전위영화 운동의 전개라는 회원들의 활동이다.  2)<이 실험영화 페스티벌>, ≪선데이 서울≫, 74년 7월 21일, 제 300호, 30쪽.  3)<女優는 입고 女監독督은 누드>, ≪주간여성≫, 1975년 2월 9일, 70쪽.  4)<실험영화 페스티벌 카이두 클럽 작품 발표회>, ≪서울신문≫, 1974년 8월 2일.  5)카이두 클럽은 두 가지 이름이 혼용되어 사용된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이름인 ‘카이두ㆍ클럽’은 실험영화 페스티벌 자료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있다. 언론의 보도에도 카이두 클럽으로 사용했으며 한옥희 감독도 자신의 저서에 카이두 클럽으로 명시했다. 하지만 1975년 미공보원에서 영화 심포지움을 개최한 자료집에 주최가 카이두 실험영화연구회로 명시되어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한옥희 감독은 다음과 같은 이메일 답변을 보내주었다. “‘카이두 클럽’과 ‘카이두실험영화연구회’는 그 당시 카이두 회원들 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작품발표회 등에서는 ‘카이두 클럽’을 사용했고, 학술적 세미나 등에서는 ‘카이두실험영화연구회’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걸로 기억합니다.”(한옥희, 이메일, 2011,3.31) 카이두 클럽은 작품발표회에서 사용한 명칭이며 카이두 실험영화연구회 는 학술적 세미나에 사용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6)<女優는 입고 女監독督은 누드>, 앞의 글, 70쪽.  7)<실험영화 만든 카이두 후예들>, ≪조선일보≫, 1974년 7월 29일.  8)카이두 실험영화연구회, <여성과 영화 세계>, ≪심포지움 자료집≫, 1974.  9)변인식, <순수영화의 동정을 지킨다. 실험영화 여성 클럽 [카이두]>, ≪한국일보≫, 1975년 5월 25일.

    3. 유현목과 하길종 그리고 청년 문화와 카이두 클럽의 관련성

       1) 1970년대 영화운동 집단의 태동과 유현목의 존재

    1980년대에 영화의 정치 참여가 전면화되었으며 1970년대는 영화의 예술적 자각과 실천이 보다 강조되는 가치였다. 1980년대의 영화 동아리의 활동과 오프 충무로를 지향하는 노력들이 코리안 뉴웨이브로 결실을 맺었다면 1970년대의 영화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은 1980년 정치지향적 영화에 동력을 부여했으며, 충무로 대안영화로서 영화적 자의식과 자양분을 생성했다.

    하지만 그동안 1980년대 이후 영화 운동에 대한 조명과 평가가 강조되면서 1970년대의 영화집단의 자생적 노력과 열기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1970년대 영화운동은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홍파, 변인식으로 대변되는 영상시대의 활동이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하지만 영상시대의 토양이 된 한국소형영화 동호회가 창립된 것은 1970년 7월 23일이다. 소형영화는 “35mm, 70mm 영화를 표준 또는 대형영화라고 하는데 대해 8mm와 16mm영화”10)를 지칭한 용어이다. 미국공보원 강당에서 열린 한국소형영화동호회의 창립 준비위원장은 유현목 감독이며 총무는 영화평론가 변인식이 맡았으며 운영위원은 “유현목, 모기성, 최일수, 변인식, 이경식, 하길종, 이상현, 박상호, 권옥연, 정일성, 유영길, 한재수”였다.11)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하길종과 변인식은 영상시대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유현목 감독은 영상시대의 후원자였다. 소형영화 동호회는 강좌와 실기지도, 촬영대회, 필름 페스티벌, 우수 소형영화 감상회, 회지발간, 기재 공동사용, 해외 소형영화 그룹과의 교류 등을 내용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다. 우수 소형영화 감상회와 해외 소형영화 그룹과의 교류 계획은 국내외의 소형영화 /실험영화가 한국에서 상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의 유현목 감독은 1963년 이미 ‘시네포엠 클럽‘을 창립하였으며 스스로도 실험영화인 <선>, <손> 등을 제작하였다. 유현목 감독의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은 작품 제작과 영화 동호회 결성으로 구체화되어 해방 후 척박했던 한국실험영화계에 씨뿌리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유현목은 <시네 포엠>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시적 영화, 실험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시네포엠>에는 “초침소리는 가속도로, 바늘은 역전한다. ...(중략)...사나이는 주축을 잃고 수백 개의 영상이 되어 진폭한다”12)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며 이는 영화적 이미지와 음향을 결합하는 실험영화의 콘티를 방불케 한다.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의 유현목 감독은 1963년 이미 ‘시네포엠 클럽‘을 창립하였으며 스스로도 실험영화인 <선>, <손> 등을 제작하였다. 유현목 감독의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은 작품 제작과 영화 동호회 결성으로 구체화되어 해방 후 척박했던 한국실험영화계에 씨뿌리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유현목은 <시네 포엠>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시적 영화, 실험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시네포엠>에는 “초침소리는 가속도로, 바늘은 역전한다. ...(중략)...사나이는 주축을 잃고 수백 개의 영상이 되어 진폭한다”12)와 같은 구절이 등장하며 이는 영화적 이미지와 음향을 결합하는 실험영화의 콘티를 방불케 한다.년대 뉴욕이 아방가르드의 절정기였다면 유럽도 아방가르드의 개화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형식적으로 혁신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인 양상13)”을 보였다. 또한 1960년대 대항문화와 예술가의 자율성이 결합하여 아방가르드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와 같은 문화적 분위기를 유현목은 해외 순방을 통해 접했으며 유학생 하길종은 문화적 충격과 수혈을 체험했을 것이다.

    유현목은 “60년대 초, 70년대 초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을 순방하는 길에 젊은 대학생들의 이른바 실험영화 활동의 상황을 눈여겨 본 바가 있었다.14)”고 밝혔다. 시기는 1960년 초와 1970년 초로 되어있지만<유현목의 영화인생>에 기록된 행적에는 1969년에 해외 순방으로 되어있으며 하길종의 서간에도 두 감독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유현목은 몇 차례 해외 순방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해왔으며 이 경험을 통해 한국의 실험영화운동 혹은 소형영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그 결실이 바로 한국소형영화동호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특히 유현목 감독의 1969년 미국방문은 영화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귀국 후 기성 영화인을 결집하여 한국소형영화동호회를 창립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하길종과의 만남이다. 하길종 감독의 서간에 유현목 감독의 미국방문과 만남의 기록이 남아있다. 하길종 감독은 1969년 12월 2일 곽광수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현목 감독이 부인되는 화가 박근자 씨와 10일 전에 이곳에 들러 줄곧 같이 다녔다. 여러 곳을 소개해 주고 특히 이곳 감독, 영화비평가, 배우들을 만나게 해주었다.15)”고 기술한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대목은 같은 편지에서 “내 작품이 끝나는 대로 곧 귀국하기를 그분도(유현목 감독-인용자 주) 권하고 있고, 나도 차근 차근이 준비하고 있는 단계”라는 심정의 피력이다. 미국에서 유현목 감독은 하길종 감독의 안내로 영화인과 현대영화를 접할 수 있었으며 귀국 후 한국소형영화 동호회의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영상시대의 활동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집단과 운동의 구심점이 된 두 감독의 미국에서 만남은 한국 충무로 안 밖에서 야기될 변화를 준비하는 상 견례였다.

    해외 영화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유현목은 국내에서 영화모임의 결성에 착수한다. 변인식에 의하면 1970년 5월 23일 서울 중구청 앞에 위치한 명성여관 특호실에서 여섯 명의 영화인이 모였다고 한다. 영화인은 유현목, 하길종, 시나리오 작가 이상현, 촬영감독 유영길 그리고 영화 평론가 변인식과 한재수였다. 유현목 감독은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 여행담을 하던 끝에 이땅에서도 8밀리 16밀리를 통한 <소형영화운동>의 전개할 때가 왔음을 역설”16)했다. 여기에 하길종 감독이 적극 참여하고 지지한 형국이었다. 영화인 6인의 회동은 두 달 후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의 창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때 잠정적으로 결의한 부분은 한 부류에서는 소형영화를 제작하고 다른 부류에서는 기성 영화인과 연대하여 실험영화를 제작한다는 입장이었다. 소형영화 동호회는 작명 과정에서 그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세 가지 안은 “유현목안인 <한국 소형영화동우회>와 하길종 안인<한국소형실험영화그룹> 그리고 변인식 안인 <한국 아마추어영화동우회>”였다. 결국 <한국소형영화동호회>로 명칭을 결정하였다. 한국소형영화 동호회는 출범과 정을 반추해 볼 때 영화인의 저변확대, 소형영화운동의 필요성과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침체된 한국영화계는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과 저변을 확대할 여유가 없었다. 1960년대에 촉발되어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소형영화 동호회에 참여하고 창립한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실험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상영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한국 실험영화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카이두 클럽의 한옥희 감독은 한국소형영화 동호회에서 활동한 이력을 통해 카이두 클럽과 소형영화 동호회와 관련성을 입증해준다. 물론 카이두 클럽은 1971년에 출범한 영상연구회에서 탈퇴하여 결성한 여성 실험영화단체이다. 하지만 1970년대의 문화적 지형도에서 살펴볼 때 카이두 클럽에 자양분을 일정정도 제공했던 것은 1970년대 청년문화라는 분위기와 함께 소형영화동호회에서 상영한 소형영화 감상회와 영화인들의 역할도 간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옥희 감독은 1974년 5월 18일 인하대에서 열린 <소형영화강연회 및 영사회>에 참여했다는 활동 기록이 남아있다. 카이두 클럽의 제 1회 실험영화 페스티벌에 소형영화동호회의 8mm 작품도 초청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카이두 클럽과 소형영화 동호회의 뿌리 깊은 관련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국소형영화 동호회는 지속적으로 상영회와 제작발표회를 개최하였으며 충무로 밖의 영화 열기를 이어갔다. 1970년대 서울에서 시작된 소형영화 동호회는 같은 해 10월 20일 부산의 미국문화원에서 부산소형영화동호회 창립 총회를 필두로 하여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17)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 아마추어 영화연구회>(1978), <서울 시네클럽>(1977), 부산에는 <부산 8mm 영화연구회>(1980), <부산 S-8 소형영화연구회>, 그리고 <진주소형영화동호회>(1980), <광주소형영화동호회>(1978), <순천소형영화동호회>(1979)18)”가 발족하여 전국적인 단체결성이 완결된다. 1970년대 한국소형영화동호회는 전국적으로 관심이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70년대는 유현목 감독을 중심으로 점화된 소형영화 운동이 충무로 밖에서 전국적 조직의 결성으로 확산되어 소형영화와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 촉발과 관객층 형성에 일조하였다.

    또 다른 부류는 충무로 내에서 편입한 영상시대 동인들과 영화인과 영화애호가가 결합된 한국소형영화동호회와 대학생 중심의 영상연구회(1971), 영상미학반(1974), 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시네클럽 서울(1977)과 동서영화동호회(1978), 그리고 여성 실험영화 집단인 카이두 클럽이다. 카이두 클럽은 영화인 중심의 소형영화동호회와 문화원 중심의 시네클럽과 대학생 중심의 영화집단으로 삼분된 충무로 밖의 구획 짓기에서 대학생 중심의 집단이다. 차별화 되는 지점은 남성 중심에 대항한 여성 중심, 극영화 중심이 아닌 실험 영화 지향하고 있는 점이다. 카이두 클럽의 출현은 1960년대의 실험영화 모임의 태동 그리고 유현목 감독이 1970년대 초에 주창한 소형영화 동호회와 대학생중심의 영화집단의 결성이라는 문화적 토양에서 개화한 것이다. 다음 장은 하길종 감독과 영상시대라는 충무로의 새로운 물결이 카이두 클럽과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2) 하길종 감독과 <영상시대> 그리고 한옥희의 활동

    하길종 감독은 귀국 후 한국소형영화 동호회의 창립에 관여하였다. 그의 관심은 소형영화 제작 보다 한국에서 실험영화운동에 가까이 가있었다. 한국소형영화동호회의 작명 당시 하길종 감독이 제시한 단체명은 <한국소형실험영화그룹>이었다. 소형 영화보다 실험영화에 부등호가 그어져있다.

    하길종 감독은 1962년에 이미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초현실주의적 시집을 자비출판한 적이 있으며 1969년 연출한 <병사의 제전>도 실험영화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영화적으로 수용한 실험영화의 작업을 이미 수행해왔으며 한국영화계에도 실험 정신과 대안영화의 열기가 수혈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하길종 감독 스스로도 새로운영화 언어에 대한 탐구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실험적 영화 작업을 실천한 영화인이었다. 하길종의 실험화에 대한 관심은 영상연구회의 활동과 더불어 한국실험영화 운동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70년 한국소형영화동호회 창립식 때 상영한 작품이 하길종 감독의 <병사의 제전>이라는 사실이다. <병사의 제전>은 1970년대 한국 영화인들에게 한편의 실험영화 이상의 상징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하길종 감독이 강의한 서라벌 예대와 서울예전의 학생들은 하길종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해진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발견의 충격과 실험영화에 대한 대면이라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소형영화 동호회의 상영회와 함께 충무로 대안 영화에 대한 관심실천의 분위기를 형성해 갔을 것이다. 하길종 감독은 한국 영화의 방향모색과 실험영화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일종의 촉매제였다.

    하길종 감독이 충무로 영화계와 대면하는 행보는 영상시대의 결성이었다. 한국소형영화동호회에서 활동이 충무로 밖의 영화적 자극이었다면 두 번째 행보는 1975년 7월 18일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김호선, 신필름 출신의 이장호, 영화평론가 변인식 그리고 이원세와 시나리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인 홍파와 더불어 영상시대를 출범으로 이어갔다. 영상시대는 “당대의 주류 영화계에 대한 대안(또는 대항)으로서 자신들의 활동”과 “‘한국 영화의 예술화’라는 순수 영화 예술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목적19)”을 지니고 출범하여 활동하여 한국영화계에 자극을 주었다.

    한옥희 감독은 한국소형영화동호회에서 부터 영상시대 동인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의 주축인 영화평론가 변인식과 하길종 감독이 영상시대 산파 역할을 하면서 한국소형영화동호회와 영상시대는 태생적 뿌리를 함께하게 된 셈이다. 한옥희 감독도 영상시대동인으로 참여하지만 않았지만 늘 지근거리에서 활동하였다. 변인식은 “‘영상시대’ 동인은 아니었지만 동인 이상으로 활약한 젊은이로 ‘카이두클럽’의 실험영화 감독 한옥희”를 언급하였으며 “한옥희는‘영상시 대’ 동인 모집 포스터의 디자인”했다고 기술하였다. 한옥희 감독은 영상시대와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의 활동으로 실험영화의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하고 1970년대 청년문화의 분위기에서 영화적 실천 방식으로 카이두 클럽의 결성을 감행 한 셈이다. 즉 카이두 클럽의 작업은 1970년대의 대항문화에 대한 열기와 유현목과 하길종을 구심점으로 한 영화인들의 영화적 실천이라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등장한 실험영화의 맹아이며 구체적인 결실이었다.

    3) 청년 문화의 토양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유신의 시대이며 문화적으로는 청년문화가 도래하였으며 영화적으로는 국책영화의 시기이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은 청년 문화의 대표적인 영화이며 이는 생맥주, 청바지, 대학생, 시대에 대한 저항과 우울이 주조음을 이룬다. 한 세대를 구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주창윤은 와이엇(wyatt)의 세대문화 형성에 관한 다섯 가지 요소의 개념을 참조하여 전후 한국사회의 세대문화성격을 규정하여 청년문화에 대해 체계적인 규정을 내렸다.20)1970년대 청년문화세대는 역사적 사건은 1972년 유신이 있으며 공론 시점은 1974년, 계기적 사건은 <별들의 고향>의 영화와 소설의 영향과 민청학련사건, 주체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이며 장소는 명동, 종로, 대학가이며 의례는 통키타, 청바지, 생맥주, 고고, 포크송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인호, 김민기, 양희은, 이장호 등이며 이념지향은 자유주의이다.21) 1970년대 청년 문화가 형성되는 사회적인 맥락은 “근대화와 동시에 진행된 매스미디어의 확대, 국가 권력의 생활세계 식민화, 소비 주체로서 대학생의 증가, 미국과 서구의 청년문화의 영향력”22)에서 비롯되었다.

    한완상은 한 사회 내에 집단과 계층에 문화를 ‘부분문화(subculture)와 대항문화’로 양분하였다. 부분문화는 전체 주류문화나 기성문화에 도전하기보다 문화의 한 부분으로 복속된 문화이며 대항문화는 다른 대안의 창구를 모색하고 찾는 문화이다. 청년문화는 “단순한 대항이라기보다 나은 구조의 창조를 위한 문화”23)로 규정하였다. 한국 청년문화의 특징은 서구와 비교하여 볼 때 “정체의 국제화가 아닌 정체의 민족주의화, 부조리한 정치 사회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반응, 욕구적 성격 즉 결핍문화에의 경도, 반사회와 반국가 간의 미분화에서 오는 제약의식, 민족주의와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화24)”등을 특색으로 들었다. 한완상은 표피적인 구미 청년문화의 유입과 대항정신의 부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영화계에서 청년 문화의 영향은 국책영화와 대중영화의 시장 지배력에 대한 저항으로 예술로서 영화를 표방한 영상시대의 출범과 오프 충무로에서 소형영화와 실험영화를 통해 탈 상업주의 노선을 지향한 한국소형영화동호회와 카이두 클럽, 영상연구회 등의 활동으로 가시화된다. 변인식은 “이 당시의 청년 문화는 ‘영상시대’ 동인들의 숨결이 자 반항의 기폭제”였다고 기술하였으며 “청년 문화의 상징인 통키타와 생맥주와 청바지는 경직된 정치체제 속에서나마 청년들의 살아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영상시대’의 영화 속에서도 ‘현대적 우화’가되어 하나의 메시지로 재탄생했던 것”25)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기술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저항성은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철이 동해 바다로 투신자살하는 장면을 통해 우회적으로 “4.19 혁명의 이상이 현실에서 좌절되어버린 것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26)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한옥희 감독은 카이두의 출현 배경으로 청년문화의 도래를 언급한 바 있다. 카이두 클럽은 대학생 주도의 탈 충무로 영화 활동과 억압에 저항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로 1970년대 청년문화의 전위에 서 있게 된다. 대학생 중심의 자유주의적인 전위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은 한국 청년문화의 토양에서 발원하여 청년문화의 앞 줄에서 문화의 방향타 역할을 수행해간 셈이다.

    10)하한수, <8미리영화는 어떤 것인가>, ≪영화≫ 통권 69권 1981년 1ㆍ2월호, 104쪽.  11)변인식, <한국소형영화20년약사>,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소형영화의 모든 것과 상아탑의 본모습』, 1996.  12)유현목, 『유현목 영화인생』, 혜화당, 1995, 109쪽.  13)마이클 오프레이 지음, 양민수ㆍ 장민용 옮김, 『아방가르드 영화. 다양한 형식과 주제, 열정의 발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156쪽.  14)유현목, <대학생 영화제작활동, 제 8회 한국청소년영화제 개최에 즈음하여>, ≪영화≫, 77호. 1982년 5월 6일. 44쪽.  15)한국영상자료원. 부산국제영화제 기획, 『하길종 전집 3 자료편』, 2009, 170쪽.  16)변인식, 앞의 글, 111쪽.  17)이형탁, <17년 전 순수 8mm 애호가로 결성 부산소형영화동호회>, ≪영화≫, 1987년 9월호. 131쪽.  18)변인식, 앞의 글, 135쪽. <서울 시네 클럽>은 소형영화 동호회 성격 보다는 예술영화 감상모임의 성격이 더 강한 편이다. 출발은 프랑스 문화원에서 정기 작품 감상회와 토론회에서 출발하였다.  19)안재석, 「청년영화운동으로서의 ‘영상시대’에 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1, 95쪽.  20)와이엇은 외상적 사건, 선도자의 중요성, 인구학적 변화,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구별하는 특권적 간격, 세대가 문화를 마느는 특정 장소를 세대문화의 형성에 관련된 다섯 요소로 제시했다. 주창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세대담론의 정치학」, 『언론과 사회』, 2006년 가을호, 제 14권 3호, 76쪽 참조.  21)주창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세대담론의 정치학」, 『언론과 사회』, 2006년 가을호, 제14권 3호. 79쪽.  22)주창윤, 위의 글, 81쪽.  23)한완상, 「현대 청년문화의 제 문제」 이중한 책임편집, 『청년문화론』, 현암사, 1981, 225-226쪽.  24)한완상, 위의 글, 235-236쪽  25)김미현 책임편집, 『한국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235쪽.  26)김미현 책임편집, 위의 책, 232쪽.

    4. 한옥희 감독의 작품 세계와 영화 스타일

       1) 초현실주의와 실험 영화의 영향

    한옥희 감독은 1971년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후 여성잡지사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잡지사 사직 후 우연히 다방에서 실험영화를 감상한 다음 실험영화 감독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한옥희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체험에 대해 ‘1970년대 중반 이화여대 입구의 파리 다방에서 ‘영상연구회 발표회’에서 ‘세편의 전위영화를 참관하고 나서 영화적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한옥희 감독은 영상연구회에 가입하여 1970년대 영화집단의 실천적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영상연구회는 외국의 실험영화에 대한 소개와 자국의 소형영화와 실험영화 제작품에 대한 감상으로 대안영화운동을 실천한 집단이다. 외국의 실험영화와 만남과 제작에 참여는 시작활동을 해온 한옥희 감독에게 초현실주의적 경향과 실험영화의 표현 방식의 접맥에 대한 강한 창작 의욕을 북돋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 감상회에서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은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영화인 이익태의 <빛의 향방>이었다. 한옥희 감독에 의하면 ‘그작품은 한 여자의 잠재의식의 흐름을 반복되는 빛과 소리로 그로테스크하게 그렸다’고 한다. 이익태의 작품인 <저녁에서 아침 사이>에도 여성의 무의식과 남성의 일상이 교차되며 이미지와 사운드의 부조화 와 플리커 효과 등으로 기괴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영상연구회의 작품과 하길종의 <병사의 제전>은 죄수의 의식 흐름을 추적하는 한옥희감독의 <밧줄>과 <구멍>과 유사한 초현실주의적 실험영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영향관계에 놓여있다.

    한옥희 감독의 세계는 초현실주의적 경향과 실험영화의 다양한 기법의 활용 그리고 197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영화적 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한옥희 감독은 시작(詩作)에서 시작하여 시네포엠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이는 이익태의 초현실주의적 작품과 하길종의 <병사의 제전>과 연관해서 살펴 볼 수 있다. 한옥희 감독의 석사 논문은 “영화 속에서의 미학 특히 시적인 표현”이며 영화의 시적표현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익태의 <빛의 향방>과 <저녁에서 아침사이>에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 되는 이미지와 주인공의 꿈의 세계를 몽환적으로 처리하여 초현실주의 영화의 미학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구멍>은 제작이 영상연구회로 되어있어 영상연구회의 실험영화 분위기의 영향 하에서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주제 의식과 이미지의 서사화 방식은 한옥희 스타일의 독창적낙인이 존재하며 다만 실험영화적 표현 기법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외국의 실험영화와 자생적인 한국의 실험영화 집단인 영상연구회의 작품은 영향의 자장 안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1919에서 1939 사이에 발흥한 경향으로 1차 세계 대전 이후, 루이 아라공, 앙드레 부르통 등이 이시도르 뒤까스가 발표한 <말도로르의 노래>에 매혹되어 정신 분석적 고백에 따른 해방의 효과, 도덕적 사회적 금기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자동 기술(automatic writing)법을 내세웠다.27) 초현실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완전한 해방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유럽의 아방가르드에도 영향을 주어 의식의 흐름과 자동기술, 꿈의 세계의 재현 등 표현의 확장과 내면의 해방에 적극기여하였다.

    1970년대 한국의 실험영화는 초현실주의적 경향과 표현주의적 경향이 혼재하지만 꿈 모티프와 의식의 흐름을 통해 이미지가 서사를 써내려가는 것과 어항 속에 금붕어와 시계의 꼴라쥬 등은 초현실주의적 기법이 돋보인다. 한옥희 감독의 작품 <구멍>과 <밧줄>은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전면에 내세웠으며, 이에 반해 <무제>와 <색동>은 이미지 의 중첩과 애니메이션 기법의 적극 도입으로 초현실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실험영화의 언어적 확장이 돋보인다.

       2) 이미지의 서사화와 사각 앵글 그리고 몽타쥬의 변형

    한옥희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구멍>(1974, 10분). <밧줄>(1974, 15분)<2분 40초>(1975, 2분 40초), <색동>(1976년) 등이 있다. 초창기 작품인 <구멍>와 <밧줄>에 대해 “<구멍>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열린 세계로 탈출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과 시도를 그린 것이고, <밧줄>은 복날 끌려가는 개의 모습, 개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것으로, 탯줄에서 시작해서 삶의 온갖 파노라마를 거쳐 교수형의 밧줄로 이어지는 줄의 이미지를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촬영한 것”28)이라고 연출 의도를 밝힌 바 있다. <2분 40초>는 “통일을 염원하는 종소리의 여운(2분 40초)에 담아낸,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이미지와 통일을 기원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와 몽타쥬 수법에 의해 제작한 실험영화”29)이며 <색동>은 “이중 인화의 기법을 이용 하여 한국의 갖가지 색과 문화를 담아내며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넘어 현대사의 모습까지 표현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한옥희 감독의 스타일은 다양한 실험영화의 기법이 혼재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이미지의 서사화와 사각 앵글, 안과 밖의 교차 편집을 통한 변증법적 몽타쥬와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 혹은 사운드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몽타쥬가 두드러진다. 이와 같은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 스타일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인 <구멍>과 <무제> 그리고 <중복>이다.

    <구멍>은 제작을 영상연구회에서 담당하였으며 실험영화적 기법이 풍부하게 등장하며 이익태의 <아침에서 저녁사이>에서 보여준 플리커효과, 사각 앵글, 안과 밖의 교차편집 그리고 슬로우 모션같은 실험영화 언어의 중첩을 엿볼 수 있다. 한옥희 감독은 <구멍>의 이미지 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구멍>은 죄수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이미지가 펼쳐지면서 다시 출발한 공간으로 돌아오는 서사다. 아모스 보겔은 ‘현대예술의 지배적인 경향은 관습적 내러티브와 직선적 리얼리즘의 희석’이라고 천명하였다. 현대 예술의 가장 전위에 있는 실험영화는 사건의 연대기적 전개와 직선적 플롯과 해독가능한 이미지의 나열에 대해 완 강하게 거절한다. 서사적 대안으로 직선적 서사의 거부인 비내러티브가 부각된 것이다. 한옥희의 <구멍>도 서사의 거부를 채택하지만 이미지의 흐름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의 줄기를 따라 가면 이미지가 하나의 서사로 구성되고 완결된다. 처음 장면에서 끝장면으로 되돌아오는 순환구조는 2000년대 단편영화의 서사적 실험의 성과인 이진우의 <모 퉁이의 남자>와 정용주의 <처용의 다도>에도 반복되어 등장한다. 필자는 이 구조를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한국식 고리구조로 명명한 바 있다.31) 한옥희의 구멍은 내러티브의 거부와 이미지의 서사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한국 대안 서사인 고리구조의 원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구멍>은 첫 컷에서 로 앵글로 나무를 역광으로 잡아내며 새소리가 들리며 카메라가 팬하고 틸 업하여 오르면 벽의 구멍과 창문이 등장한다. 일종의 설정화면의 이미지다. 다음 컷에서 감옥의 귀퉁이에 죄수가 앉아있다. 다음 컷은 로 앵글로 벽을 타고 넘어오는 손이 포착된다. 손은 살아있는 생명이 굴레에서 탈출하려는 자유의지를 표상한다. 손의 이미지는 이익태의 <아침에서 저녁 사이>와 실험영화 동호회 유현목의 작품과 고창수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오브제로 활용된다. 다음 컷은 벽을 오르는 발이 클로즈업된 다음 컷되면 죄수는 다시 모퉁이에 앉아있고 전경에서 백열등 좌우로 흔들리며 음악은 불안을 증폭시킨다. 백열등의 흔들림은 히치콕의 <싸이코>의 지하실 장면을 연상시킨다. 다음 컷은 창문으로 나오려는 손으로 줌인 된다. 그 다음 컷의 이미지를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 팬티 입은 남자 전경으로 다가온다. # 여자는 벽을 보고 벽의 스크린에는 그림자극처럼 남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장면은 표현주의 영화의 기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 갇힌 여자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남자의 움직임에서 빠르게 컷 된다. # 시내의 버스안의 풍경과 경쾌한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남자 죄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 극 부감으로 거리 이미지가 보여진다. 급브레이크 소리와 음화(陰畵) 이미지가 인서트된다. # 철창에 갇힌 거리의 풍경이 등장하며 후경에서 포커스 아웃된 인물들이 포커스 인되며 갇힌 프레임이 형성된다. 철조망의 이미지는 억압과 갇힌 세대의 이미지로 반복되어 변주된다. # 계단을 내려오는 그림자와 기하학적인 계단 선이 조화를 이룬다. # 도시의 건물을 로 앵글과 극단적인 사선앵글(oblique angle)로 보여주며 소음대신 고양이 소리와 동물 소리가 사운드로 삽입되어 이미지와 사운드가 충돌한다. # 시내의 걷는 행인들이 하체만 보여지며 경쾌한 현장음이 들린다. # 감옥 안의 죄수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여기서부터 안과 밖의 교차편집이 시작된다. #거리와 쇼윈도우의 양주병이 등장하고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펼쳐보는 남 자의 모습이 보인다. 경쾌한 음악에서 줌 아웃되어 롱쇼트로 카메라가 물러나면 승용차가 도착하고 거리 걷는 남자의 트렁크에서 서류가 쏟아진다. # 심한 소음과 흩어지는 삐라들. # 삐라와 서류 더미가 거리에 날리고 비명소리가 삽입된다. # 남자가 클로즈업된다. # 계단에 앉아있는 남자와 잡음으로 가득 찬 사운드에서 컷된다. # 광란의 축제현장에서 춤을 추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줌인 아웃의 빠른 반복으로 플리커 효과를 낸다. # 경마장에서 달리는 경주마들의 장면이 축제의 장과 교차된다. 1970년대 댄스음악과 광란의 소리가 축제의 장이자 사형대와 경마장 이미지에 덧붙여진다. # 춤추는 젊은이들 줌 인 아웃으로 잡아내면 갇힌 여자의 비명소리가 뒤섞이고 사다리를 타고 올가미에 목을 매는 인물에서 컷된다. # 숲속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나무 사이로 달리는 남자가 마스킹으로 처리되고 슬로 모션으로 움직인다. # 숲속에서 달리던 남자가 정면으로 달려온다. # 양복입은 남자가 맨홀로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난다. # 맨홀로 빠진 남자는 맨홀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 컷되면 감옥의 죄수가 등장한다. #거리에서 삐라와 서류 종이가 굴러다닌다.

    <구멍>은 내러티브적인 측면에서 관습적 서사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서사화를 통한 고리구조가 두드러졌다면 실험영화적 스타일에는 줌 인아웃을 통한 공간의 왜곡, 플리커 효과(flicker effect)와 극단적인 사각앵글,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안과 밖의 교차 편집 그리고 슬로우 모션과 패스트 모션을 통한 동작의 왜곡이 현저하게 부각된다.

    특히 <구멍>이 가장 극명하게 채택한 전략은 초현실주의적 의식 흐름의 기법이다. 초현실주의의 목표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인간의 원초적 욕망, 무정부주의적 그리고 ‘놀라운’ 충동을 해방하는 것”32) 이다. <구멍>에서 갇힌 죄수의 욕망과 충동에 분출에 의지하여 이미지를 이끌어 간다. 욕망과 억압된 것의 분출과 해방의 방식은 ‘비합리와 꿈의 마술로 복귀’하거나 ‘시나 무의식을 지식과 정복의 최고의 수단’으로 채택했다. 이와 같은 실천 강령으로 “‘의식의 흐름’, 환각 상태, ‘자동기술’, ‘불합리한 놀이’”33)를 강조했다. <구멍>은 죄수의 의식의 흐름 에 맞추어 안과 밖으로 이미지가 왕래하며 여자에게 다가가거나 손이 창문을 벗어나거나 교수대에 오르는 ‘환각 상태’의 이미지를 통해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잘 보여준다.

    의식의 흐름과 환각 상태는 현실의 장까지 확장된다. 카메라는 거리의 극 부감과 사각 앵글을 통한 극단적 이미지를 포착한다. 축제의 장에서 춤추는 인물을 빠른 줌 인과 줌 아웃으로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감옥 안과 밖의 교차와 현실과 환각의 교차, 축제의 장과 경마장의 교차는 시공간의 넘나듦과 동시에 현실과 꿈의 혼재 양상을 몽타쥬를 통해 이미지화로 귀결된다. 동작은 슬로우 모션과 패스트 모션으로 왜곡을 시도한다. 빠른 줌 인 아웃과 사각앵글, 슬로우 모션과 패스트 모션, 이미지의서사화는 모두 기존의 관습적 인식에 대한 전복과 거부이며 왜곡이라는 일치점에 도달한다.

    <무제>는 편집실의 편집자를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검열에 대한 영화적 항의이자 퍼포먼스이다. 첫 쇼트는 편집실에서 스텐백에서 필름 감기는 기계음이 들리며 편집하고 있는 클로즈 업된 여자가 서서히 줌 아웃된다. 다음은 편집실에서 필름을 보거나 자르는 여자의 바스트가 바스트 쇼트로 넘어간다. 가 등장한다. 그 후 편집실의 여자와 거리에서 촬영하는 감독이 교차 편집되면서 편집자의 고뇌와 여성 영화감독의 자의식을 부각시킨다. 편집실 안과 거리라는 두 가지 공간과 시간이 동시적으로 몽타쥬되면서 한옥희 감독의 특유의 안과 밖의 변 증법적 몽타쥬가 반복된다. 우리 시대를 영화의 시대로 규정한 예술사가 하우저는 “영화에서 시간의 참된 공간화는 평행하는 플롯들의 동시성이 묘사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34)고 했다. 또한 영화 형식의 기본 요소는 바로 두 가지 사건의 동시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사건전개의 이중성과 대립되는 행동의 동시성이다. 한옥희의 작품은 사건의 동시성을 더 미분화하여 안과 밖, 경험의 현실과 내면의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동시성 을 교차편집과 이를 통한 컷의 몽타쥬를 통해 실현하고 있다. 편집실안의 편집자는 영화 찍는 현장과 동시적으로 결합되면서 영화인의 성찰과 고뇌가 개입해 들어오고 가위가 클로즈업되고 배경의 이미지와 이중인화되며 가위가 날아가서 흰 스크린에 박히면서 검열의 문제로 확장된다. 가위의 자르는 행위는 클로즈업과 줌인 아웃의 결합으로 가위의 불온함과 폭력성이 부각된다. 동시에 줌을 통한 플리커 효과로 수렴된다. 가위가 흰 스크린에 박혀 스크린이 피를 흘리는 장면은 영화적 퍼포먼스로 승화되어 예술혼의 피흘림 혹은 검열로 인한 작품의순결 상실을 표상한다.

    가위의 폭력성은 스크린에 박힌 가위와 동시에 가위의 자름과 교차되어 진흙으로 된 인체의 신체 절단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직유된다. 거리의 극부감과 편집실의 사각앵글과 회전하는 앵글은 질서와 평온을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이미지의 재현이다.

    마지막 장면은 다시 편집실로 되돌아오며 여자가 줌 아웃되어 소실점 밖으로 밀려간다. 이 장면은 첫 장면과 호응되어 일종의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고리구조를 보여준다. 동시에 한옥희 감독이 등장하여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나누고 가위로 컷을 부른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영화적 퍼포먼스임을 알려주는 자기반영적 방식이며 연극 공연이 끝난 다음 무대 인사를 하는 연출자의 모습을 연기한 연극적 요소의 도입이다.

    <무제>는 편집실에서 편집자의 고뇌를 통해 당시의 검열과 억압을 몽타쥬와 이중인화, 줌인 아웃을 통한 플리커효과, 사각앵글과 극부감이라는 앵글의 왜곡을 통해 전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검열에 대한 영화적 저항을 실험영화의 언어를 통해 우회하거나 보다 공격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한국 실험영화의 미학적 아방가르드와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연동이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중복>은 프레임 촬영을 하여 밧줄의 여러 형상과 여름의 중복 이미지와 삶의 단편적인 풍경을 담아낸다. 프레임에 내던져진 밧줄은 여러 형상을 보여주며 소도구들이 개입해 들어오고 빠져 나가면서 하나의 삶의 파노라마를 구성한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컷아웃 기법을 통한 움직임을 구현하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에 의존35)”하여 표현을 극대화하는 메타포모스(metamorphosis)를 적극 활용한다. 메타포모시스는 탁자와 의자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모양을 바꾸어 춤추게 하거나 밧줄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형상을 만들어낸다.

    <중복>은 밧줄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오고 여름날 중복의 강아지가 인서트로 들어온다. 컷은 프레임 개념으로 뚝뚝 끊기는 단절감을 부여하면서 밧줄이 다양한 형상으로 풀어헤쳐지고 그 프레임 안으로 탁구라켓과 축구공과 우산이 삽입되어 이미지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밧줄의 프레임과 거리의 행인들과 거리의 풍경이 교차되어 몽타쥬를 이룬다.

    밧줄은 탯줄에서 시작되어 삶의 일대기를 축약하고 그 속으로 인간이 들어와서 장독의 깨진 파편과 그물이 들어와 삶의 필수 품목이 다전시된다. 거리의 인물은 저속촬영되어 빠르게 움직이며 밧줄의 장면은 플리커 효과를 내고 속도를 왜곡한다. <중복>은 밧줄을 오브제로 하여 삶을 축약하며 강아지의 인서트를 통해 한국사회의 중복 이미지를 부각하고 프레임 촬영을 통해 컷 아웃 효과로 밧줄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살아나고 밧줄 프레임과 거리의 풍경과 개의 인서트가 서로교차되어 시공간의 동시성을 표현한다. 동시에 패스트 모션과 플리커 효과로 시각적 왜곡을 통해 실험영화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구멍>과 <밧줄>과 <무제>가 실험영화의 언어적 표현 확장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치적 억압과 예술적 검열에 대해 저항하고 폭로하고 공격하였다면 <중복>은 정치적 제스처 보다 프레임 촬영을 통한 미학적 언어의 탐구와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작품이다. 아방가르드는 늘 정치적 저항과 미학적 전복의 자장에서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거나 통일한다는 사실을 한옥희 감독도 작품을 통해 입증한다.

    27)호세 피에르, 박순철 옮김, 『초현실주의』, 열화당, 1990, 5쪽.  28)한옥희, 『영화에 미친 사람은 아름답다』, 이웃사람, 1998, 25쪽.  29)한옥희, 위의 책, 83쪽.  30)한옥희, 위의 책, 81-82쪽.  31)고리구조는 김지하 선생이 주창한 탈춤의 미학원리인 고리(環)의 미학을 필자가 수용한 용어이다. 원리는 천“원환으로 된 구리구조는 이중교호를 통한 무질서 속의 질서와 시작과 끝의 원환적 결합과 꿈과 현실, 이야기와 이야기속 이야기의 만남과 뒤섞임을 통한 예술적 긴장과 해방감을 고양시키는 동아시아 미학의 원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한국적서사다. (문관규, 『한국독립영화감독연구』, 부산대 출판부, 2011, 65쪽.)  32)아모스 보겔, 권중운ㆍ한국 실험영화 연구소 공역, 『전위영화의 세계』, 예전사. 1996, 87쪽.  33)아모스 보갤, 위의 책, 90쪽.  34)아놀트 하우저, 백낙청ㆍ염무웅 옮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창작과 비평사, 2010, 305쪽.  35)모린 퍼니스 지음, 한창완 외 옮김, 『움직임의 미학, 애니메이션의 이론ㆍ역사ㆍ논쟁』, 한울아카데미, 2001, 125쪽.

    5. 맺는 말

    1970년대 한국영화는 국책영화의 강압과 이를 벗어나려는 영상시대와 한국소형영화동호회 그리고 실험영화 집단의 활동으로 양립된다. 충무로의 대항영화로써 한국 소형영화동호회는 영상시대와 카이두 클럽의 출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영상시대가 충무로 제도권 내에서 대중영화를 통한 한국영화 혁신운동을 수행해갔다면 카이두 클럽은 충무로 제도권 밖에서 한국 실험영화 운동을 펼쳐나갔다. 카이두클럽의 활동은 남성주도적인 충무로 질서에 대한 여성의 도전이면서 동시에 대중영화가 지배하는 한국영화계에서 실험영화라는 전위적인 영화 장르를 추구하는 대항적 행보로 집약된다. 카이두 클럽은 1970년대에 대두한 청년 문화의 물결 속에서 영상시대와 영화적으로 참여했으며 그 전위에 서 있었다. 또한 소형영화동호회를 이끈 유현목과 영상시대의 동인들과 연대하여 청년 영화운동의 삼두마차가 되어 정치적 통제로 위축된 1970년대 한국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1980년대 영화운동과 19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로 나아가는 발원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의를 지닌다.

    카이두 클럽의 대표성을 지닌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는 카이두 클럽의 영화 세계를 보여준다. 초현실주의는 한옥희의 영화 세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시에서 출발하여 시네포엠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해간 감독 개인적 성향에 기인한다. 아울러 영상연구회의 감상회에서 상영된 이익태의 작품과 하길종의 <병사의 제전>은 1970년대 한 국실험영화와 카이두 클럽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의 스타일은 이미지로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이미지의 서사화와 사각 앵글,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이 빚은 몽타쥬, 슬로 모션과 패스트 모션의 반복 등이 두드러진다. 대표작인 <구멍>은 플리커 효과, 사각 앵글, 현실과 환상의 교차편집을 통해 갇힌 인간의 내면과 해방에 대한 열망이 표현되었다. 한옥희 감독의 <구멍>과 <밧줄>과 <무제>는 실험영화의 표현 형식의 확장과 1970년대 한국사회의 억압과 검열에 대한 예술적 대항을 수행했다. 이에 비해 <중복>은 정치적 문제의식 보다는 시적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기법을 통한 미학적 실험에 더 치중하였다. 한옥희 감독은 미학적 아방가르드와 정치적 아방가르드를 넘나들면서 초창기 한국 실험영화의 영토를 확장하고 비옥하게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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