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politics of Manchurian Western

만주 웨스턴의 지정학적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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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Manchurian Western exemplified through The Good, The Bad, The Weird(2008) throws questions as to the organization of time and space in cinematic texts, opening up issues of the geopolitics of Korea. Replacing the American west typified in such films as The Stagecoach (1939) and Red River (1948) to symbolize the frontier on expansion, Machuria sheds its geographical confines and bcomes an imaginary space where the colonial past and the neo-liberal present of Korea collide. As a product of genre hybridization, the wilderness of Manchuria depicted in the film becomes un-grounded and uncertain to be a floating signifier free from the role of representing the real. Polysemous post-modern phenomenon has arrived on the locality to re-locate Manchuria on the map of power, capital, competition, sustainable reproduction and consumption pattern. In this sense, the textual space of the post-modern flexibility is a reflection of neo-liberal capitalism which, according to David Harvey, reproduces itself through uneven geographical development where an absolute border between the nations yields to the imaginary sections divided to fit the need of the late capitalism. However, it does not mean that the text solely contributes to depicting the change in the geopolitics of Manchuria caused by the shift in economic infrastructure. As Scott Lash points, postmodernism is figural as well, demanding psychological energy rather than intelligent signification to forestall its close link with the economy. It means that the Manchuria connects to the past of dictatorial development of industrialization in the 1960 in Korea, on the basis of analogy that works in the realm of psychological energy, since it was also a backdrop of the films categorized as a genre simply known as the Continental genre. The Manchuria explodes to become an analogical metaphor of the forced development, repression, and the marginalized identities. In the end, it holds back the Manchuria as a space imagined for the need of the late capitalism. The post-modern text is two folds, one reflecting the demand of the economic infrastructure, and the other exploding to become a metaphor, which compete, rather than co-exist in harmony, to dominate the text.


  • KEYWORD

    Manchurian Western , Postmodernism , Figural , Neoliberalism , Geopolitics , David Harvey

  • 1. 서론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이하 원제 혹은 ‘놈놈놈’)이 제시하는 문제는 바로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것이다. 장르 변용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불가능한 시간대와 공간의 공존은 텍스트 독해를 매우 어려운 작업으로 만든다. 심지어 해독 노력이 이와 같은 다양한 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정당한 방법인가에 대한 의문마저 들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텍스트도 어떤 유의미한 단위가 된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의 특징이 있으며,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다. 텍스트가 유의미한 단위가 된다는 것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유의미는 전통적 혹은 근대적인 차원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지시 혹은 상징이나 은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실재나 상징, 은유가 아닌 것을 의미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또 그러한 과정에 기반 하지 않은 의미화가 가능한 것인지를 논증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아마도 실재나 상징이 연루되지 않은 의미를 들으면서, 호미 바바의 경계성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정확한 연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텍스트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구성에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경계성에 머무를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의 문제는 근대와 후기근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은 사물, 진리, 해석, 의미와 현실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는가는 텍스트가 재현의 매체로서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텍스트 안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으로부터 구분 짓는 특징이 되고, 그러한 특징은 텍스트가 정치적, 역사적 차원에서 어떤 구조물(construction)인가를 결정하는 인자가 된다. 그러므로 본 글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각도에서 만주 웨스턴이라고 일컬어지는 <놈놈놈>에 접근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포스트모던 텍스트가 갖는 정치적 의미의 실효성의 범위를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다음 논의가 핵심적이다. 만약 텍스트가 기호학적 체계이며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러한 특징은 역사적 구체성 위에서만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단위로서 기호학적 체계가 역사적 구체성이라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한가 하는 것은, 기호학적 체계의 참조점이 어디에 있는가, 즉 의미 발생의 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핵심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는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 즉 유희(遊戱)의 텍스트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정치적 현실을 지향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회귀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제작자로서 감독이 갖고 있는 발화의 근원으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 정체를 정의하려는 듯 서부극이라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서부극의 광활하고 건조한 서부는 거의 그만큼 광활하고 건조한 만주로 대체되었고, 기병대는 제국주의 일본군으로, 위기에 처한 무원고립의 마을은 출신이나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온갖 잡동사니들로 넘쳐나는 시장으로 바뀌어 있다. 이와 같은 혼종성은 스파게티 웨스턴이 시도했던 것처럼, 공간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만약에 이 영화가 <매드 맥스>(1979)처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암울한 미래에 관한 공상과학 영화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 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만주 웨스턴은, 스파게티 웨스턴처럼, 한 시간대를 통하여 다른 시간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서사론적 인과관계나 단순한 연대기적 순서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중첩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에서 전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중첩은 기호학적 시스템으로서 현실과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게 정치 경제학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러한 현실을 희화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가 의미의 체계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 제도로서의 현실, 인위적 사실로서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의 정치적 힘은 현실의 위상을 변경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본 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탐구의 초점이다.

    2. 기호학 체계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형학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으로부터 가르는 기준의 하나는 의미를 획득하는 방법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의미를 어떻게 생성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 때문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기한다.1) 포스트모더니즘은 음악, 건축, 문학, 영화, 패션 등을 아우르는 매우 광범위한 현상이다. 광범위하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초점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또 그런 다양성, 즉 초점 없음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몇 개의 유명한 건축물이나 영화 텍스트를 벗어나는, 철학적 입장이며, 인문학적 이론이고, 사회학적 진단이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상에 대한 설명에 그치지 않는, 그와 같은 현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정의하려는 의도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배경을 갖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완전하게 함몰되는 것도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성과 비역사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체가 의미를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측면 모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성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적인 측면이 후기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면, 비역사적인 측면은 스타일 혹은 형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스타일이나 형식 역시 역사적인 것은 사실이다. 영화로 논의를 좁혀 표현주의를 예로 들자면, 그러한 스타일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과 심지어는 지리적 공간까지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2002)에서 ‘스타일이라는 관념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2) 그러나 스타일의 모든 측면이 정치적, 사회적인 요인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맥락을 넘어서는 지점은 형식주의자들이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이라고 명명했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 과잉 혹은 의미의 진공지대 또는 제3의 의미라는3) 것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 같이 스타일이 갖고 있는 비역사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측면과도 맞닿아 있으며, 그것은 역사적인 축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이와 같은 비역사적인 측면은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성, 즉 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배경과의 상관관계는 데이비드 하비와 프레드릭 제임슨이 분명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비나 제임슨의 이론은 그들이 특정한 현상을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하고 그 현상에 대한 원인을 정치 경제학적 배경에서 찾으면서 암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 경제학의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이론 안에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제와 거기서 비롯하는 현상 규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어’라는 것은 하비가 말하는 ‘언어에 대한 집착’, 즉 모더니즘의 등장과 함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부적절한 것이 되면서 나타난 자기 지시적 구성물로서의 문학적 실체와 가깝다.4) 사실주의나 자연주의가 말하는 영속하는 진리에 대한 대안으로서 언어, 즉 자기 지시적 구성물로서의 문학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를 반영하는 최종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고, 스스로 자족적이다. 따라서 언어는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구성 원리이다. 모더니즘을 분화로 규정한 래쉬도 베버의 자기 입법화(self legislating)를 인용하면서, 종교로부터 윤리, 윤리로부터 정치, 정치로부터 문화, 문화로부터 사회가 분리되고, 각각의 영역은 스스로의 규칙, 즉 언어를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5) 각각의 영역의 작동원리, 즉 언어에 대한 이해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화 시대의 분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설명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 경제학의 언어를 이용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분명히 경제의 프리즘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한 것이다. (이런 시도 자체가 오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 안에서는 어떤 원인들의 조합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설명은 어느 정도 연역적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학적 근간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현상으로 어떤 네트워크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하비의 포스트모더니즘 규명 과정을 추적하자면, 그는 우선 푸코를 인용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분절성과 변화의 무질서한 흐름을 탐닉하며’,6) 그 중심이 국가에 있지 않고, 국지적이며 지배는 체계적이지 않고 분산되어 있다고7) 설명하다. 그는 나아가 리오타르를 빌려 ‘사회적인 것들이 무수한 언어 게임으로 쪼개져있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정의한다.8) 그리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인을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9)으로의 변화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변화라는 틀 안으로 넣으면서 논리적으로 그 일부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후기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심층구조를 문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 역시10) 논리적으로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후기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조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화나 음악 또는 건축 등을 넘어서 지리적인 공간 그리고 시간을 재해석하는 것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또 그와 같은 분야에서 정치, 경제학적인 차원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초국적 글로벌 기업의 등장, 전통적 의미의 국경을 무색하게 하는 생산과 소비의 전지구화, 민족국가 단위가 경계로서 갖는 의미의 변화와 전 세계적인 힘의 지형의 변화는 생산, 계급, 주체 등 고전적인 정치, 경제 구조의 붕괴와 결부되어 있는 현상이다. 11) 제임슨은 이와 같은 변화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식의 지도를 요구함과 동시에 이전에 통용되던 의미 생성의 법칙, 혹은 재현의 법칙을 위기로 내몬다고 주장한다.12) 이런 위기는 의미 생성을 가능하게 한 고전적인 차이와 구분의 논리를 예민하게 각성하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새로운 우화의 등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화는 세계적 차원의 단일한 공간적 구분과 그것을 구성하는 민족국가가 분열되고 파편화된 현상을 의미화하는 체계이다.

    제임슨의 주장에 있어 두드러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로 인한 지리적 공간의 파편화가 재현의 위기로 이어지며, 또 우화에 대한요구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차이의 구조와 계급, 국가와 같은 총체성의 붕괴와 맞닿아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약 의미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붕괴에 대한 우화 이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 경제학의 언어로 재구성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미화 과정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그것이 고전적인 근대 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는 우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미화 과정으로서 역사적인 측면 외에도 그렇지 않은 측면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형식의 차원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

    포스트모던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것의 정치 경제학적인 배경을 고려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지시의 연쇄적인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이후의 정치 경제학적인 근거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결국은 다시 그러한 정치 경제학적인 배경을 지시하는 것으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접근은 분열적이고, 절충적이라는 문화 현상을,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이분법으로 분할하고 그 안에 머물게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혹은 관료체제나 권위주의의 쇠락과 동형이기 때문에, 혹은 파편화되고, 조직화할 수 없는 개인을 표상하기 때문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함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함의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데, 그것은 이 복잡한 문화 현상이 어떤 재료들로 이루어져있으며, 또 그러한 재료들은 특정한 구성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형식이며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을 지시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형식은 재현을 자각하는 순간 명확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현의 방식 자체에 주목하는 순간에 형식이 형식으로서 부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재현의 위기라고 한정하면 형식의 정치 경제적 구성에 주목하고, 그 기호학적 작용에 관해서는 간과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형식은 그 의미화 작용이 무력해져서, 위기에 도달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재현의 방식과 다른 재현의 방식이 혼재되어 있을 때도 경험할 수 있다. 언어와 이미지가 혼재하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두 재현의 방식이 공존하는 것은 상호 보완적이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회의하게 만들기 때문에 재현 형식이 형식으로 선명해진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비화된 재현의 자연스러움이 베일을 벗는 것이다. 언어적인 것과 이미지적인 것 모두 재현 방식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리고 탈규범화 한다는 설명 역시,13) 다른 종류의 재현이 만날 때 상보적인 역학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재현의 혼종적 결합은 보편성 혹은 영속성 뒤에 가려져 있는 재현의 역학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재현의 권위와 신비가 사라지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진리주장이 불가능한 순수 형식의 지점에는 표현형상(figural)이 자리 한다.14) 표현형상은 시각적인 감수성이며, 합리적이거나 교훈적인 견해들을 무시하고, 텍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는 무엇을 하는가를 질문하며, 관객의 몰입과 심리적 투자를 통하여 작동한다.15) 언어적 규칙을 바탕으로 한 담론이 외부 세계의 변형을 통해 에너지를 방출한다면 표현형상은 심리적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방출되는 것이다.16) 이미지라는 표현형상 기표를 가정한다면, 이것은 이미지와 심리적인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합일의 순간에 다다르면서 기존의 의미 체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의 체계는 기표와 기의의 관습적인 결합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여기서 심리적인 에너지는 의미의 체계를 통해서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표의 의미를 조작하는 행위를 거쳐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의 체계를 우회하는 직접적인 심리적 에너지의 방출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자아(ego)의 형성과 표상 체계의 내재화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표 자체를 현저하게 만들고 나아가 구경거리의 기표 즉 볼거리를 양산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형상은 “세속적인 트임”을 만들면서 “대치”와 “응축”의 알레고리를 낳는다.17) 세속적인 트임이란 의미의 체계와 체계의 사이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체계들이 재조직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에서 알레고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도상성 때문이다. 래쉬는 표현형상 이미지가 현실과의 유사성, 즉 도상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18) 알레고리 형성의 배경으로 전제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영화와 같은 텍스트에서 하나의 표현형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표현형상 이미지가 다른 표현형상 이미지와 더불어 그러한 이미지들의 시각적인 측면을 뛰어 넘는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주장은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미지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상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표로서 이미지가 도상성을 바탕으로 알레고리를 구성한다면, 표현형상 이미지가 제시한다고 하는 이미지에 대한 실존, 그리고 그런 실존의 의미를 고려하는 주체를 어떤 지점에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알레고리를 통해 시각적 요인을 초월하고 있는 이미지에 그 실존에 대한 고민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도상성이 알레고리로 발전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도상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알레고리를 생산하는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영화 텍스트를 예로 들면, 표현형상은 욕망의 가부장적인 경제구조가 직조하는 서사에서 벗어나 있으며, 언어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의미화의 영역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실주의 영화에서와 같이 자아-이상(ego-ideal)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서 달성할 수 없다. 그러한 자아-이상은 가부장적인 욕망의 경제학에 종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출하는 심리적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이미지 표현형상은 스펙터클의 유인처럼 관객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유목민적인 방식으로 설정한다.19) 관객 주체가 유목민적이라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들의 위치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점을 옮긴다는 것이다. 자아-이상처럼 특권화되어 있는 시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특권화 되어 있는 시점을 거부하면서 여러 가지 시점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욕망, 가부장 제도가 허락하지 않는 다양한 욕망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20) 가부장제의 이성애적 욕망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주체는 텍스트의 언어적 규칙을 넘어서는 힘이 있으며, 그러한 힘은 텍스트를 일정한 의미화 작용의 속박으로부터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알레고리가, 도상성을 바탕으로 한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 특히 언어적 규칙의 붕괴에 대한 자기 지시적 상징이 아니고, 지배적인 의미화 작용의 범주를 벗어나는 새로운 의미라면, 표현형상 이미지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적 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화 작용에 대한 해답이 유목적 주체 안에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역사적이라는 조건에 초점을 맞춘다면 호미 바바가 국민과 서사라는 표제 아래서 제시하는 기표의 미끄러짐이 주목할 만 하다. 바바는 국민 개념이 문화적 구성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역사성보다는 시간성을 둘러싸고 존재한다고 설명한다.21) 민족 혹은 국민의 개념은 역사적 전개의 단일한 경로 위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한 범주, 즉, 성, 계급, 영토, 문화적 차이 같은 범주를 미끄러지며 다닌다.22) 하나의 정체성, 혹은 개념이 범주들의 가로지르기를 하는데, 이러한 가로지르기에는 중심적인 인과율이 없고 움직이는 표상 체계의 시간성만이 남는다.23) 다시 말하면 가로지르기가 만들어 놓은 시간의 흔적이 발생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일정한 흐름으로서의 시간이 범주들 속에서 움직이는 기표들을 아우르는 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 역사주의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근대 국가주의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는 차이와 지배의 구조를 부정하는 효과를 갖는다. 바바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시간성은 상징적이고 수사학적인 것과 관련되며, 중심화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대립 관계를 이항적, 위계 구조로 보지 않고, 혼성적으로 본다.24)

    범주의 가로지르기는 하나의 지배적인 관점을 거부하는 유목적 주체와 같은 운동 방식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축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의미화 작용이라는 특징을 갖지만, 주체의 위치라는 차원에서 유목적 주체와 절연한다. 이것은 범주의 가로지르기가 단순히 다른 종류의 욕망들, 즉 다른 종류의 주체들을 가시화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로지르기가 데리다가 말하는 현존의 부정에 가까운지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 가까운 것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데리다는 기호가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도 지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특정한 기표와 기의의 지배적인 관계도 없고, 독립적인 기의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 현존이란 있을 수 없다.25) 기존의 기호학적 관점에서 주장하는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질서를 부정하는 데리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의 부정에 다다르고, 결국은 그러한 중심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규칙의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도 부정한다.26) 그러므로 만약에 가로지르기가 데리다의 현존의 부정이라면, 그것은 주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고, 정치적으로 그러한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27) 하지만 범주간의 이동을 지칭하는 가로지르기는 한정적으로 주체를 부정할지언정, 주체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 계급 등의 범주 이동이 결국은 어떤 의미화 작용의 생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 작용 뒤에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의 주체는 자아와 타자의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구분에 의존하는 단위가 아니고, 좀 더 유연한, 다시 말하면 자아의 경계가 좀 더 자유로운 주체인 것이다.

    범주의 가로지르기가 시간의 흔적을 갖고 있고, 또 그러한 시간의 흔적이 역사주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의미 생산의 프레임이 되는 것은 단선적이지 않은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가 성과계급 같이,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른 범주들을 왕래하는 것은, 주체가성이나 계급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고, 계급의 관점에서 성을 혹은 성의 관점에서 계급을 객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과도 비슷한 측면을 갖는데, 객체화 안에서는 한 언어가, 즉 성이나 계급이 지배적인 우세함을 갖지 못하고, 단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조합이라는 성격을 갖는다.28) 예를 들면, 계급, 인종, 지역과 같이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 통합되지 않은 범주들은 하나의 언어가 다른 하나를 객체화하는 과정 혹은 괄호 치는 과정을 거쳐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인종은 때로 지역과 결합하고, 성은 국가와 결합하기도 하면서, 지역이 인종을, 국가가 성을 객체화하는데, 이것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의미는 이분법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는 근대적 기획과 관련된 가치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의미인데, 이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가 단순한 역사주의적 한계를 넘어, 후기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그에 따른 지배 관계를 재현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지점이다.

    1)스콧 래쉬,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학』, 한신문화사, 1993.  2)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40쪽.  3)롤랑 바르트, 『신화론』, 현대미학사, 1995.  4)데이비드 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2009, 39쪽.  5)스콧 래쉬, 앞의 책, 6쪽.  6)데이비드 하비, 앞의 책, 68쪽.  7)위의 책, 69쪽.  8)위의 책, 71쪽.  9)유연적 축적(flexible accumulation)은 포디즘의 경직성에 대한 대응으로 생산과정, 노동, 시장, 소비패턴이 유연해지면서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생산과 금융 서비스, 시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동화나 로봇 같은 새로운 생산 기술이 도입되고, 시장은 작아지고 전문화되며, 자본의 회전주기는 급속하게 짧아진다. 소비의 주기 역시 짧아지면서 5년이나 7년 정도 되던 전형적인 포디스트 제품의 반감기가 18개월로 짧아진다(위의 책, 193, 209쪽).  10)위의 책, 184쪽.  11)프레드릭 제임슨, 『지정학적 미학: 세계 체제에서의 영화와 공간』, 현대미학사, 2007, 23쪽.  12)위의 책, 25쪽.  13)론다 허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전략』, 현대, 1998, 201쪽.  14)스콧 래쉬, 앞의 책, 215쪽.  15)위의 책, 216쪽.  16)위의 책, 219쪽.  17)위의 책, 227쪽.  18)위의 책, 235쪽.  19)위의 책, 235쪽.  20)로지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우리시대 페미니즘 이론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 여이연, 2004.  21)호미 바바,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 소명, 2002, 279쪽.  22)위의 책, 280쪽.  23)위의 책, 281쪽.  24)위의 책, 279쪽.  25)마단 사럽,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조형교육, 2005.  26)위의 책, 69쪽.  27)앤 브룩스, 『포스트페미니즘과 문화이론』, 한나래, 2003, 189쪽.  28)마단사럽, 앞의 책, 245-246쪽.

    3. 만주 웨스턴과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의 수행

    만주 웨스턴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오승욱의 『한국 액션영화』(2003)를 통해서이다.29) 1960년대부터 1970년 초반까지 등장한 액션 영화이며 주로 만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시에는 대륙물, 대륙활극 또는 만주물이라는 별칭으로 통용되었던 영화를 만주 웨스턴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은 저자가 “그냥 내가 붙인 것이다”라고 밝히는 것처럼 다소 자발적인 즉흥성 때문이다.30)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도상학적 연구나, 스파게티 웨스턴과 같은 장르 변용에 대한 사회적 관찰이 부재한 가운데서 새로운 장르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5년 후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라는 영화가 만주 웨스턴이라는 부제를 달고 등장한 것은 자의적이며 자발적인 현상은 아니다. (아마도 장르에 대한 명칭이 먼저 나타나고 그 뒤를 따라서 영화 텍스트가 등장한 것은 <놈놈놈>이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 유일할 것이다.) 물론 같은 해에 개봉한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 외에는 같은 장르의 후속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놈놈놈>은 다소 우발적인 현상 같지만, 사실은 텍스트, 평론, 그리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아우르는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다. 또 영화가 대표적인 대륙물이라고 할 수 있는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 흠모와 경외를 표현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놈놈놈>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 즉 텍스트와 평론의 관계, 그리고 텍스트와 선행하는 텍스트의 관계에서 상호 텍스트적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텍스트가 정치 경제적인 맥락을 갖지만 또 그것만으로 완전하게 회귀할 수 없는 측면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 지정학적 공간과 역사주의

    만주를 배경으로 한 활극이면서 부분적으로 서부극의 장르 양식을 차용하며 발전한 대륙물에서의 만주는 독립운동이 가능한 공간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6-70년대에 제작된 대륙물이 만주를 그렇게 상상한 것은 서부극이 제시하는 모험과 자유, 개척의 공간으로서의 서부가 만주로 이입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31) 당시 정권이 강조하던 개척정신과 협동정신 식민지 잔재 청산을 통한 정통성 확립이라는 당면 과제 역시 서부극이 대륙물을 통해 한국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을 수 있다.32) 자연스럽게 서부극의 명확한 선악의 이분법, 영웅주의, 인디언 등과 같은 주변부 인종의 타자화가 만주를 한국의 서부로 만들면서, 독립과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을 서부 개척의 모험극으로 변환했다. 장르의 문법을 차용하여 특정한 공간을 상상하는 대륙물에서의 만주는 19세기 개척시대, 더 정확하게는 20세기 산업화의 절정에 있는 미국의 눈으로 본 서부가 한국의 식민 경험과 근대 국가 성립에 대한 열망이 만나서 낳은 결과인 것이다.

    영화 <놈놈놈>은 대륙물 활극에 대한 패러디이면서 동시에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만들어 놓은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이기 때문에, 그 안의 만주는 대륙물에서 나타난 국가주의적인 만주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가 강요하는 경쟁과 분업에 대한 압력의 내재화를 반영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와 지리학적 불균등 발전 이론에 기반한 분석들은 만주가 근대, 국가, 후기 자본주의의 힘의 역학이 지렛대로 작용하는 공간이라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만주는 기원이 다른 텍스트들이 단선적인 서사의 일괄적인 인과의 법칙을 넘어 한 장소를 점유하면서 발생하는 효과처럼, 시간을 뛰어 넘는 이질적인 텍스트와 그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효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주는 형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의미화 과정의 특징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주는 다시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적 추동력으로 중층 결정된다. 형식으로서, 혼종성으로서 만주는 경제적 추동력의 결정체로서의 만주와 공존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조화보다는 긴장을 유발하는 관계를 갖는다.

    만주를 정치 경제학적으로 중층 결정하는 신자유주의를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2008)에서 부의 창조보다는 재분배를 위한 체제라고 설명 한다.33) 전력, 수도와 같은 공공설비나 주택, 의료 연금과 같은 사회 복지 제도를 사유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 역사, 지적인 창의력까지 상품화하여 부의 집중을 촉진하기 때문이다.34) 신자유주의는 또한 금융 시스템을 강조하므로, 기업은 합병 및 인수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기업인은 스톡옵션과 같은 관리 방법을 통하여 이익을 취하는데, 이러한 막대한 이익의 창출 뒤에는 엔론사 붕괴가 초래한 것 같은 연금 수령 강탈 같은 개인 자산 몰수가 있다.35)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국가는 자본 축적을 방해하는 사회적 연대나, 국가 중심 사업 등에 대해 적대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는 신자유주의의 이익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기업의 몫이다.36) 국가는 신자유의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부문 등에 투자하고, 국유 시설의 사유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며, 금융 자본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부의 재분배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만, 실재로 그 이익은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본의 이익과 국민 복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자발적인 보호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 감시 통제 등을 위한 기구 등은 무력해진다.37)

    또한 지역은 생산과 소비의 고유한 패턴을 갖는 공간으로서 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지가 된다. 한 지역은 자원, 노동조건, 시장, 기반 시설, 조세제도 등의 차원에서 다른 지역과의 차별 점을 갖는데, 이것은 지역 분화, 즉 지역적 불균등 발전의 기반이 된다.38) 한 지역은 특화된 노등 때문에 다른 지역과 구별되지만, 또 그러한 구별 점은 두 지역의 발전을 한계 짓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두 지역 간에서 발생하는 격차 때문에 그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지역에서 자본 축적의 위기가 발생했을 경우, 그것은 공간적인 조정, 즉 다른 지역으로의 자본과 노동의 수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또 특화된 노동력을 가진 지역이 있다면 다른 지역의 자본이나 노동의 부족분을 흡수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지역 간의 보호주의가 없어야 하고,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흐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지역은 국가와 경계를 공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경계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므로 그 안에 거주하는 구성원은 국민국가의 시민권 자격자라는 인식을 갖기 힘들다. 오히려 그들은 경제적인 주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화된 기술을 수행하는 노동자로서의 자아를 우선적으로 경험한다. 만약에 국가와의 관계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상징적인 영역을 통해서이다. 특정한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위원회”가 된 국가는 노동을 강요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새로운 가치 체계를 생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근대 국가 형성의 과거 이데올로기를 재활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국가가 개인을 호명하는 것은 과거의 특정 지점으로 개인을 재소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독도와 만주 그리고 간도 문제가 계속 등장하는 것은, 그 지역들이 갖고 있는 실제적이며 현재적인 정치적인 함의보다도 역사적 참조점으로서의 기능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은 과거의 한 지점에서 국가를 상상하지만,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은 세계 경제 분업 구조 안에서 특화된 노동, 생산, 소비의 패턴을 가진 지역들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있는 양상을 띠며, 또 그러한 지역 안에서는 노동, 지적자원은 물론이고 그 지역들의 문화적 가치조차 교환의 대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두 가지 다른 관념은 하비의 주장에 의하면 상대적 공간성과 관계적 공간성이 변증법적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절대적 공간이 영토, 경계, 건물, 도시와 같이 변하지 않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개념화라면 상대적 공간은 에너지, 화폐, 자본, 사람 등의 흐름이 창조하는 역할에 의해 발생하는 공간 개념이다.39) 반면 관계적 공간은 어떤 공간이 갖고 있는 잠재적 가치, 기억이나, 꿈, 환상 등의 작용에 의해 다른 공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념으로, 다르게 표현하자면, 과정으로서의 공간, 시간과 분리할 수 없는 공간이다.40) 예를 들면 도시 형성에 있어 집합적인 정치적 기억이 갖는 역할은 공간이 갖는 관계성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41) 그런데 한 공간의 상대성이나 관계성은 서로 분리하여 존재할 수 없고, 하나가 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화폐나 자본의 흐름이 생산하는 상대적인 가치가 없다면, 공간의 관계적인 측면도 상상할 수 없으며, 또 물리적인 경계로서 공간이 없다면 재화의 흐름 등을 통해 형성되는 상대적인 가치도 생각할 수 없다.42) 이것은 한국의 식민 과거의 소환을 통한 지역 인식이 세계 경제 구조에서의 지역적 특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국이 반도체 등의 분야에 있어 세계 공급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공간의 상대적인 가치 때문이라면, 그러한 상대성은 식민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두가지는 독립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은 관계적이고, 관계적인 것은 상대적이다.

    보물 지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세 캐릭터의 갈등은 마지막으로 만주 벌판에서 벌어지는 추격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지도를 갖고 있던 이상한 놈 태구가 정체불명의 보물이 있는 곳을 향해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하자, 마적단이 그의 뒤를 따르고 곧이어 일본군도 가세한다. 일본군의 뒤를 이어 나쁜 놈 창이가 이상한 놈의 추격에 가세하자, 일본군은 기관총을 발사한다. 이때 좋은 놈 도원이 나타나고, 추격은 일본군과 나머지의 대결 구도가 된다. 도원의 백발백중 사격으로 일본군과 그들의 기관총은 교란에 빠지고, 일본군의 가차 없는 포화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태구와 마적단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보물지도를 놓고 갈등 관계에 있던 세 인물의 대립 구도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치환되는 것은 중심인물들과 만주라는 지정학적 공간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지형학이며, 하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의 상대성과 관계성이 공존하는, 더 정확하게는 관계성이 상대성으로 응축하며, 만주가 신자유주의 지역 불균등 발전의 지표가 되는 과정이다.

    좋은 놈 도원의 정체는 비교적 처음부터 명확하다. 현상금 사냥꾼이지만 도원은 광복군과 연합하여 지도를 이미 손에 넣은 태구의 뒤를 쫓는다. 한국 임시정부의 무력 기구였던 광복군은 독립의 실질적 추진력이며, 한국이라는 근대 국가의 발생 초기를 짐작하게 하는 조직이다. 물론 도원은 광복군과 완벽하게 하나는 아니다. 도원은 광복군이 갖고 있는 이념적 배경, 즉 독립에의 열망을 결핍하고 있다. 그가 태구를 추격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지도가 무엇인가 대단한 것, 경제적인 이익을 악속 하는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의 전 세를 바꿀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지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광복군 장교가 힘주어 말하지만 도원은 국제 정세와 그것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편 태구는 ‘귀시장’이라는 다국적 특별 상업 지역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역시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점,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고 싶어 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가 목가적이며 어느 정도 이상화된 고향, 즉 식민 이전의 조선을 표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나쁜 놈 창이는 조선을 일본에 판 매국노 기업가의 사주를 받고 지도를 찾고 있다. 영화의 중반에 창이는 매국노 기업가를 죽임으로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지만 특별한 이념이나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지도 때문에 가능한 모든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세 중심인물의 공통점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식민 통치가 아직 유효한 상황에서 민족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그러한 구조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국가개념이 공백 상태에 가깝다. 그들에게 피지배 타자로서의 국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추격 장면에서 드러나듯, 분출하는 폭력과 함께 세 인물과 일본군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

    도원과 태구를 통해 희미하게 배경에 자리 잡고 있던 국가가 일본군과의 폭력적인 대립을 통해 전면으로 부상하는 데, 이것은 내재하고 있던 관계성이 분출하는 것이며, 국가적 자각이 이분법을 통해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분법을 식민과 피식민,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이라고 한다면, 도원과 태구의 연합, 즉 독립국가 건설과 식민 이전의 이상향 회복이라는 복합적 명제는 이분법의 어느 축 위에서 구체화되는 것인가? 도원과 태구의 국가적 자각은 피지배 사실의 깨달음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지배, 즉 국가적 주체의 자리로 격상 하는 도약적 깨달음인가? 폭력을 동반하는 정체성의 구조 변동이라는 이론을 고려한다면,43) 이것은 라캉을 원용한 파농의 이상적 자아 인식처럼, 피식민 객체가 국가적 주체로 자신의 에고(ego)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을 억압하던 식민 주체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과도 흡사한 이 작용은 이분법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주체의 자리를 탈환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폭력이 뒤따른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추구하던 대동아공영권의 핵심부인 만주가 도원과 태구, 즉 한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자아 발견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이 한국의 독립국가 열망과 겹쳐지면서. 탈식민을 통한 독립국가의 열망은 제국주의와도 흡사한 경제적 이윤 추구의 목표와 겹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윤 추구 욕망은 항일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지역 불균등 발전을 통한 자본 이익 추구에 대한 정당화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의 활동을 국가 이데올로기를 통해 보장하려는 노력이 과거를 전유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공간의 관계는 재생산의 필연성을 매개로 한다. 초기자본주의는 공간의 확장을 통해 원료와 노동력을 수급하면서 재생산의 동력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의 종언과 함께 공간확장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 재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더이상의 새로운 생산기지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재생산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현재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비가 설명한 절대적, 상대적, 관계적이라는 세 지표를 이용하여 설명하자면, 초기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절대적 공간의 부족 때문이지만, 이러한 부족은 관계적인 역사나 기억을 통한 상대성의 회복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절대적 공간은 상대적이며, 관계적인 지표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본주의의 재생산 구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본주의가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재생산의 구조로 포섭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계속해서 ‘절대적’ 공간을 재구조화하는 것이다.44)

    한국은 20세기 말 민주화와 동시에 세계화를 경험하면서 발전국가 체제가 위기를 겪는 것 같았으나, 곧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빠르게 답습하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자본의 이익 확장에 기여하는 체제로 재정비해나갔다.45) 경제 성장의 초점은 70년대의 국가 중심에서 기업 중심으로 이동하고, 경제 발전이 국가의 발전이며 그것은 곧 개인에게도 이익이라는 개발독재의 환상은 개인의 자유와 혁신 그리고 기업가 정신 등을 옹호하는 새로운 체제로 변태하며 한국을 신자유주의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지속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의 재구조화에 대한 요구가 발생했다. 그러므로 만주의 전유는 관계성을 통한 공간의 재구조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계성을 통한 공간의 재구조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탈식민)민족주의를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결과가 만주의 전유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유의 노력은 만주 자체를 공간 확장의 대상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만주라는 공간과 관련된 기억을 재조정하려는 것에 가깝다. 만주를 통해 식민의 기억을 비틀어 국가 비호하의 자본주의가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공간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실학사상과 동학 농민 운동을 거쳐 배양되었으며 열강의 침략에 맞서는 주체의식 함양과 직결되어 세계화 시대에도 유효한 개념이라는 류(類)의 주장은,46) 정치 경제학적 현실과 다소 거리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의 공간을 관계성으로 재창조하는 기반이 된다. 그런데 세계화를 통해 무력해진 국가는 민영화와 사유화 추진에 앞장서면서,47) 민족주의의 기표로 작용할 수 있는 동력도 점차 상실한다. 자연스럽게 민족주의는 영화 텍스트와 같은 상징 작용의 영역으로 동화되고, 문화가 처한 상품 자본주의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문화는 소비에 가치를 부여하고,48) 그러한 가치는 세계적으로 평준화된 (미국적) 가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49) 국가라는 포괄적인 존재의 부재 아래에서, 상품으로서 문화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는 용이하게 신자유주의의 공간 창조 담론과 결합하면서, (만주) 지역의 대상화와 불균등한 지역 발전을 옹호하는 이론이 되는 것이다. 결국 만주 웨스턴의 만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한국이 겪고 있는 현재-계급적 불평등, 공공 영역의 축소, 대의 민주주의 제도의 소멸 등-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의 재구조화를 형상화 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민족주의의 과거가 현재와 만나는 가역적(Liminal) 공간이 탄생한다.50) 만주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과 민족주의가 세계 자본주의의 공간적 필요성과 시간의 축을 넘어 조우하는 것이다.

       2) 형식으로서의 지형-괄호 치기의 메커니즘

    장르와 상호텍스트성의 관점에서, 경제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의 밖에 존재하는 만주는, 단순하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대립항으로 만나는 구조라기보다는, 시간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복잡한 곳이다. 미국 서부극의 영감을 받은 대륙물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고 있는 <놈놈놈>의 만주에 나타난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자면 그 안에는 1)19세기 서부에 대한 기억 2)19세기 서부를 기억하는 20세기의 미국 3)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항일 민족주의와 독립국가 건설 열망에 대한 기억 4)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의 압축 성장과 개발 독재 5)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경쟁 체제가 공존하고 있다. 대립항으로마저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 이런 다양한 시간대가 정연한 시간의 체계를 구성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류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시간과 비시간이라는 구분의 적용을 시도할 수 있다. 영화에서 기억은 재현, 그리고 재현이 지시하는 특정한 과거의 시점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만주가 환기하는 시간은 항일 민족주의처럼 재현의 효과인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효과가 통제하지 못하는,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런 시간들 사이로 스며드는 비시간적 시간들이 있다. 비시간적 시간이라는 것은 소환의 대상으로서의 특정한 시점이, 핍진성과 같은 재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 연상, 트라우마, 강박증, 유비, 메타포어 등의 기재를 통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칠게 말하자면, 만주의 시간은 재현으로서 과거인 시간과 그렇지 않은 비시간들로 나누어진다.

    도원과 태구의 공간으로서 만주가 재현의 법칙을 통해서 지시하지 않는 비시간들인 ‘미국이 기억하는 19세기의 서부’나 ‘한국의 1950년대 근대화 압축 성장’은 심리적인 에너지의 직접적인 투자의 결과이다. 기표를 조작하여 에너지를 구조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트라우마,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상태를 스크린으로 직접 투사하여 생긴 현상이다. 서부극은-만주 웨스턴 역시 서부극의 하나이다-공간과 공간에 부여한 가치의 구조에 대한 드라마이다.51) 그러나 그 가치들은 실제 역사 보다는 대중의 기억, 문화적 신화 등과 친연성을 갖는다.52) 그러므로 서부극은 사실의 기록이나 증언에 대한 의무를 갖지 않는다.53) 기표를 구조화하고 하나의 이야기 체계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서부극의 공간은 기억, 신화, 상상력의 발현과 함께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심리적인 에너지를 직접 투자한다는 것, 그러므로 <놈놈놈>의 만주에서 근대화 압축성장이나, 할리우드 서부극을 읽는 것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어떤 신화를 끄집어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충돌하는 언어들을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 붙들어 놓는 것과 유사한 과정이다.

    영화에는 주목해야 할 부감(aerial view)이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독수리의 관점이다. 태양이 뜨겁게 빛나고 있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독수리가 지상으로 급강하하면서, 철로 위에 죽어 있는 토끼를 잡아채고는 다시 고공으로 비상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철로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독수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기차의 진행 방향으로 비행하자, 카메라는 점점 낮아지며 기차 안으로 들어간다. 독수리의 토끼 사냥 동선을 축으로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강렬한 태양 그리고 하늘과 결합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시선은 개별적인 인물이 갖는 시선의 한계를 뛰어 넘으면서,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관점을 제공한다.54) 그러나 독수리, 태양, 하늘의 조합을 통한 부감 설정은 그 장르적 혼용의 과도함, 다시 말하면, 서부극의 상투적인 도상 이미지들의 혼용으로, 일괄적인 체계를 거부하는 기억의 소용돌이로 발전한다. <대열차 강도 The Great Train Robbery>(1903)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부극의 전통이 축조한 자연과 도시, 이성과 야만, 국경 개척과 원주민 정복(식민화)의 이분법이 텍스트 사이로 스며들고, 만주와 고전 서부극의 서부가 하나의 지평 위에 도열한다. 이것은 도상 이미지가 환기하는 기억이기도 하고, 또 심리적인 이미지와 텍스트 이미지의 중첩이기도 하다. 지역과 시간대를 초월하는 유비의 메커니즘을 통해, ‘서부 개척과’, ‘근대화 압축 성장‘이 하나의 담론의 장 안에서, 국가 형성과 영토 확장이라는 개념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그 발생학적이며, 따라서 역사 사실주의적인 계통을 초월한, 서사적 구조로 완성되는 것이다.

    서부 개척과 근대화의 과거를 하나로 묶는 것은 만주를 정서적으로 특이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것과 같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만주는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서부 개척의 시간이 환기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자성(磁性)을 갖는다. 미국 역사 발전의 한 국면이 만주에 대한 유비의 소실점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만주의 지정학적 성격이 미국 세력의 영향권 안에서, 미지의 영역, 가능성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근대화의 경험이 이러한 지정학적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동부/서부, 역사/신화, 문명/야만, 남성/여성 등 서부극이 강조한 틀짓기’55) 안에서의 신화적이며 상징적이고 탈역사적인 경험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근대화의 경험이 해방과 군사 독재로 이어지는 중간지대라는 시간의 인과적인 전개의 축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적 가치를 통한 재구조화를 겪는 것이다.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 받은 만주는 그 지리학적 경계를 벗어나면서, 근대화의 과거를 불러내고, 곧 서부 신화의 영역-개척, 소외, 저항-으로 들어간다.

    최근 고구려 역사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일제 강점 이후 만주는 한국에게 있어 지정 학적으로 가장 논쟁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조선 이주민과 간도 명동학교, 광복군 등의 존재는 만주를 항일, 탈식민에 대한 염원의 공간으로 정의하려고 하지만, 정반대 쪽에서는 일본 식민주의를 확장하고, 조선인을 그러한 정책의 대리인으로 축조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대동아공영의 담론은 조선인을 식민 주체가 아닌 식민의 모방자로 만들면서 제국의 확장을 일본인의 눈을 통해 인식하도록 종용했다.56) 일제강점 기간 동안 만주는 동아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개척의 대상이었고, 만주국 창설 이후에는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식민 지배 정당화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공간이었다.57) 제국 확장의 직접적인 대상이며 또 그러한 확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시험 무대이기도 했던 만주를 바라보는 조선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논리 안에서 서구를 뛰어넘는 동아의 발견이라는 주장으로 위장한 제국주의를 내재화하고, 민족이나 전통을 넘어 만주를 포함하는 탈영토화 된 새로운 정체성 구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58)

    압축적 근대화의 1960년대에 등장한 대륙물에서 드러나듯, 식민 지배를 통해 억압되어 있던 항일, 탈식민의 담론은 만주를 통해 분출한다. 식민 주체의 눈을 통해서 보았던 만주를 근대 국가의 형성이라는 이념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탈식민의 공간으로 확립되어있는 만주는 <놈놈놈> 에 이르러 서부극의 틀짓기라는 신화적 프레임과 만나면서, 근대국가 형성의 국가 지상주의 이념이 억압하던, 혹은 포함할 수 없던, 다국적 혹은 무국적의 개인, 가정 밖의 여성, 남성 또는 그들의 섹슈얼리티 등 변방의 정체성을 전면으로 끌어낸다. 한편으로는 유비의 메커니즘을 통해 동시태가 된 서부극의 서부와 만주라는 공간이 갖는 모순 때문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공간이 갖는 뿌리 없음 때문에, 대안 정체성은 등장한다. 여기서 만주가 전유, 영토 확장의 상징, 국가 정체성 전이의 기표 기능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바뀌는 비천시(abjection), 즉 크리스테바가 모성이 숭배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는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 과정 때문이다.59) 메타포어적 상상을 통한 지정학적 변용은 만주를 이질적인 것들이 혼재하는 낯선 공간으로 만들고 그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기표로 발전하는 것을 유예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서부극의 서부, 또 그것을 원용한 서부로서의 만주를 차용하면서도 그들과 긴장관계를 만드는 <놈놈놈>의 만주는 내셔널 시네마의 ‘자기 목소리 찾기’라는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며,60)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초국가적 문화코드의 영향의 결과이기도 하다.61) 어떤 설명이 되었건, 만주는 영화 속의 ‘귀시장’처럼, 온갖 다양한 것들, 범주화하기 힘든 것들의 집합장소가 되며, 그것은 현실보다는 꿈, 구조보다는 해체, 상투성보다는 전위성, 연대기적 시간보다는 분열된 시간을 표방하면서,62) 정치경제학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온전함과 안전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 다르게 표현하자면, 유비의 주체와도 동일한 의미의 시스템은 두 번째 등장하는 부감이 제시하는 이야기 구조(주체)를 객체화(괄호 치기)한다. 두 번째 부감은 일본군과의 대결 구도를 통해 도원과 태구가 연합을 형성하는 장면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군과의 전투 장면은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체제라는 정치, 경제학적인 기초를 갖는다. 도원의 도움으로 일본군을 따돌린 태구가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질주하는 장면을 잡은 부감 샷은 전 장면에서 발생한 의미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처럼 태구에 게 경제적 동기를 투사한다. 물론 경제적 동기는 과거의 항일 민족주의의 역사적 발전의 귀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는 특정한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호명에 응하면서-부감 카메라가 시선이 부여하는 정치적 맥락의 특수한 힘을 위임 받아-태구를 바라보고, 또 그와 동일시를 기도한다. 하지만 두 번째 부감으로 발생하는 주체는 첫 번째 부감으로 발생한 주체를 대체하지 않는다. 처음 장면의 의미화 작용을 신화적 주체라고 명명하고, 두 번째 부감과 연속하는 장면의 의미화를 국가적 주체라고 명명한다면, 신화적 주체와 국가적 주체는 상호 보완하거나, 수직적인 종속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집단적 기억의 상징적인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화적 주체가 국가적 주체를 만날 때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작용을 객체화한다. 바바는 식민 주체의 형성이 근본적으로 열린 과정이라는 주장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완벽한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분법이 언제든지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아의 주체와 타자의 주체의 자리바꿈이 가능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실 신화적 주체와 국가적 주체는 그런 관계를 갖지 않는다. 두 체계는 다른 종류의 언어구조이기 때문에 자리바꿈을 가능하게 할 만큼 유사하지 않다. 대신 신화적 주체는 국가적 주체를 신화화면서 신자유주의 국가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동원한 재현의 규칙과 요소들을 신화적인 것으로 만든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신화가 국가를 그 괄호 안에 넣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태구의 경제적 동기와 계급적 이윤 추구가 집단적인 상상과 상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즉각적인 정치적 효과를 상실한다. 이것이 또한 형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정치적 효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사실주의의 정치 경제학적 기초 위에 서 있는 주체에 상상과 기억의 요소를 덧입힘으로, 그러한 주체 담론이 갖는 실질적 효력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첫 번째 부감이 끝나고, 카메라가 기차 안으로 들어가자 태구는 떡 장사로 위장하고 지도를 가진 일본군 장교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두 번째 부감 이후 보물을 향해 질주하는 태구는 결국 집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르적 상상으로서의 악당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적 주체가 신화를 재구조화하는 정반대의 작용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정치, 경제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용이다. 그러한 범위를 벗어나는 형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 경제 사실주의가 갖고 있는 재현의 연결 고리들을, 유비의 기억을 통해 소환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상상의 신화로 분해하면서, 전혀 다른 정치적 효과를 낳는 것이다.

    29)박유희, 「만주웨스턴 연구」, 『대중서사연구』, 제20호, 2008. 11쪽.  30)오승욱, 『한국 액션영화』, 살림, 2003, 43쪽.  31)박유희, 앞의 논문, 18-19쪽.  32)위의 논문, 40쪽.  33)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세게화의 공간들: 지리적 불균등 발전론』, 문화과학사, 2012, 67쪽.  34)위의 책, 69쪽.  35)위의 책, 71쪽.  36)위의 책, 41쪽.  37)위의 책, 43쪽.  38)위의 책, 161쪽.  39)위의 책, 217쪽.  40)위의 책, 197쪽.  41)위의 책, 200쪽.  42)위의 책, 227쪽.  43)김영일, 「남자, 몸, 폭력 그리고 이산(離散)정체성의 정치학」, 『영화연구』, 50호, 2011.  44)Herod, Andrew, “From a Geography of Labor to a Labor Geography: Labor’s Spatial Fix and the Geography of Capitalism”, Antipode, 29:1, 1997, p.10.  45)신광영, 「한국의 세계화」, 『문화/과학』, 통권47호, 2006, 212쪽.  46)김혜승, 「세계화와 한국의 민족주의」, 『韓國政治外交史論叢』, 제25집 제2호, 2004, 267쪽.  47)닐 라자러스, 「초국가주의와 이른바 민족국가의 사멸」, 『실천문학』, 봄호(통권 57호), 2000, 324쪽.  48)이득재, 「공간, 계급, 그리고 로컬리티의 문화」, 『로컬리티 인문학』, 제6호, 2011, 217쪽.  49)이동연, 「문화의 세계화와 문화자본의 논리」, 『문화/과학』, 가을호(통권47호), 2006, 67쪽.  50)샤론 주킨, 「탈현대적 도시조형: 문화와 권력의 지도 그리기」, 『현대성과 정체성』, 스콧 래쉬 외 편, 현대미학사, 1997, 269쪽.  51)베리 랭포드,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 한나래, 2010, 114쪽.  52)위의 책, 118쪽.  53)위의 책, 120쪽.  54)프레드릭 제임슨, 앞의 책, 137쪽.  55)전기순, 「할리우드 웨스턴과 치카노 웨스턴」, 『세계문학비교연구』, 제17집, 2006, 361쪽.  56)홍순애, 「총력전체제하 대동아공영권과 식민정치의 재현」,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53집, 2011, 311쪽.  57)김재용, 「내선일체의 연장으로서의 만주국 인식」, 『한국근대문학연구』, 제6권 제1호, 2005, 310쪽.  58)곽은희, 「만몽문화(滿蒙文化)의 친일적 해석과 제국 국민의 창출: 최남선의 「滿蒙文化」와 「滿洲建國의 歷史的 由來」를 중심으로」, 『한민족어문학』, 제47집, 2005, 11쪽.  59)서인숙,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본 [괴물]의 영화적 모방과 번역의 의미」,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제11권 제2호, 2011, 207쪽.  60)전평국, 「지구화 속에서 기로에 선 한국영화의 정체성」, 『영화연구』, 20호, 2002, 290쪽.  61)위의 논문, 292쪽.  62)윤선희,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탈영토화: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 시간 이미지의 개념을 중심으로」, 『韓國言論學報』, 제48권 2호, 2004, 313쪽.

    4. 결론

    만주 웨스턴은 서부극과 한국의 액션 영화가 만나면서 발생한 장르이고, 또 다양한 시간대와 공간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기원을 가진 텍스트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라고 할 만하다. 영화 <놈놈놈>의 만주라는 관점에서 다시 표현하자면, 그 공간은 고전 서부극과 한국의 대륙물, 미국의 서부에 대한 기억과 한국의 근대화 압축 성장 역사, 신자유주의 세계 경쟁 체제 등을 포괄하는 분열적이며, 동시에 다층적인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지역 특화와 노동 분업을 통해 특정 계급의 이익을 보 호하는 국가/다국적 기업 공조 체제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이미 지역 간의 물리적 거리가 시간의 축과 만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신화적 혹은 집단적 상상력을 유도하는 분출하는 심리적 에너지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호명과 사실주의 재현이 규칙이 신화적으로 해체되기도 한다. 이것이 형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갖는 특징이며, 과거가 집단적 상상이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재현의 텍스트 사이로 스며들면서 현재와 그 공간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재현의 텍스트가 갖는 정치적 효과를 멈추는 결과를 낳는데,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갖는 문화적 기능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가치의 생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문화적 기능은 다음 연구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그것이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는 <놈놈놈>과 같은 영화가 B급 블록버스터라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2000년 이후 문화 산업론이 팽배한 한국 영화계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 특히 해외 영화제 중심의 예술 영화 관객들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한류 담론과 결합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할만한 문화상품 생산의 필요성이라는 논리를 아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는 장르이면서, 유럽 예술 영화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애착을 가진 영화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박찬욱의 영화처럼 <놈놈놈> 역시 B 영화의 정서와 블록버스터 장르 구조를 결합한 영화들이 어떤 가치 생산에 기여하는가는 그 영화들이 처한 문화 산업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만주라는 공간을 상상의 신화로 이해하고, 고전 서부극이 제시하는 과거를 소환하면서 재구성하는가는, 그러한 텍스트가 처한 현재를 이해할 때만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수행 (가치 생산)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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