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hanical Perception and Cinema-Focusing on the Theory of Bergson, Benjamin and Epstein

근대 기계적 지각과 영화 매체-짐멜, 베르그손, 벤야민의 이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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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attempts to look into the concept of “Mechanical Perception” in Early film theory, specifically focusing on the theory of Henri Bergson, Walter Benjamin and Jean Epstein. For Simmel, moving through the traffic of a big city involves the individual in a series of shocks and collisions. At dangerous intersections, nervous impulses flow through him in rapid succession, like the energy from a battery. Circumscribing the experience of the shock, he calls this man “a kaleidoscope equipped with consciousness.” Thus, technology has subjected the human sensorium to a complex kind of training. It is precisely this potential for retraining human perception and responses that explains the importance that Benjamin attaches to the experience of shocks and therefore to the processes of mechanization and technology-including cinema-that are its basis. In several essays, Bergson employs what he calls the “cinematographical apparatus” as an analogy for how the intellect approaches reality. According to Bergson, the intellect is by nature a spatializing mechanism, which means that to acquire knowledge it employs concepts, symbols, abstraction, analysis, and fragmentation. The camera begins with a real movement, breaks it down mechanically into a series of static single frames and then returns the movement through the projecting apparatus. The movement that we see is a reconstituted illusion. We may sum up that the mechanism of our ordinary knowledge is of a cinematographical kind. Benjamin argues that the collective mass, one example of which can be found in the crowds of the modern city, is defined not only by its diffusion, but by its constant and unconscious appropriation of images. Indeed, the mass state of distraction is defined by its ability to take up these images in much the same way that the film apparatus does. For Benjamin, this diffused, unconscious appropriation is also figured as a bodily, tactile absorption. This collectivity is a kind of diffused, technologized body that, as it continually absorbs the stimuli, the images, that jolt it (and that alter its perceptions and responses), can no longer be entirely separated from the space of images. This is not simply a body affected by moving images, but a truly cinematic body in which, or through which, images move. Here, there is no longer a fixed boundary between the perceiving subject and images, for these images have become part of this dispersed body’s tactile experience.


  • KEYWORD

    Mechanical Perception , Georg Simmel , Henri Bergson , Walter Benjamin , early film theory , filmic image , Bela Balazs , Jean Epstein

  • 1. 들어가는 말

    대도시의 등장과 화폐 경제의 정착, 기계 문명의 발전 등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 근대 사회의 외적 변화는 근대인들의 내적 상태의 변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1) 산업화 이후 가속화된 외부 환경의 전면적인 변화는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근대인들의 정신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그러한 외부 환경에 대한 지각 양식에도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다. 나아가 외부 환경의 변화는 근대 예술의 창작 양식과 수용 양식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특히 근대 기계주의적 사유와 지각 구조를 근간으로 탄생한 기계복제 예술의 등장은 예술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관점에 전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본 논문에서는 서구 근대 문명과 근대적 지각 양식 및 영화 매체에 대해 독창적이고 깊은 사유를 제시했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과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논의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이들의 논의들 간의 영향 관계와 차이점 및 공통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학자들은 모두 이러한 근대의 문화적 전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각자 예리하고 깊은 사유를 펼쳐나간 이론가들이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는 짐멜과 베르그손의 경우,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제시하진 않았지만 영화로 대변되는 영상 매체의 도래를 예상하고 그러한 영상 매체의 특성과 본성, 구조 등에 대해 전망했다. 또 이미 영화에 익숙하고 영상 문화를 충분히 경험한 벤야민은 두 선구자의 논저들에서 영화에 대한 선구적인 전망과 사유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간추려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유로 발전시켰다. 요컨대, 본 논문에서는 근대 외부 환경의 변화와 내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주요 학자들의 사유를 살펴보고, 특히 근대적 지각 양식의 특징에 대한 이들의 논의를 비교, 검토할 것이다. 나아가 근대적 지각 양식의 발전이 영화 매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들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기계 매체로서의 영화적 지각 구조의 본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탐구해볼 것이다.

    1)주지하다시피, ‘근대’에 대한 정의와 관점은 이론가들과 학파에 띠라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는 통상적 의미의 근대, 즉 산업 문명과 기계 문명, 도시 문명, 시민 사회의 발달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의 서구 근대 문명을 전제로 한다. 한편 주요 이론가들의 논저와 관련해, 국내에 역서가 출간된 경우 가급적 역서를 언급하고 인용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만 원서를 참조할 것이다.

    2. 짐멜: 대도시의 이미지와 지각 양식의 변화-신경과민증에서 둔감증으로

    19세기 유럽에 본격적으로 대도시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대도시에 관한 사유와 진단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짐멜은 대도시에 관한 통상적인 관점과 이론에서 벗어나 독자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고, 특히 냉철한 사회학적 분석과 심오한 심미주의적 예술관을 결합한 독특한 글들을 발표했다.

    먼저,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 Die Großstädte und das Geistesleben」(1903)이라는 글에서 도시 환경의 변화가, 즉 대도시의 등장과 비약적인 발전이 인간의 지각작용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짐멜에 따르면, 이미 19세기 말의 대도시인들은 빠르게 밀려들면서 부단히 변화하는 이미지들의 홍수를 겪고 있었다. 즉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은 외적 자극과 내적 자극들이 급속히,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으로 인해 일종의 “신경과민증상”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대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ㆍ직업적ㆍ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개인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오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2)

    이처럼, 이미지들의 홍수와 부단한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대도시의 개인들은 신경과민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심리적 기제를 찾게 된다. 먼저, 대도시인들은 이미지의 홍수 등과 같은 외적 자극들에 대해 정서적 반응보다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으로 대응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각 개인 내부에서 “외부 현상들에 대한 반응은 가장 덜 민감하면서도 인격의 심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신적 기관에 이양된다.”3) 이성적 관계는 사물과 사람 등과 같은 각각의 존재들을 모두 개체성이 배제된 균질적 요소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가치를 교환가치에 따라 계산하는 이성적 태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짐멜은 이러한 이성적 관계 혹은 태도가 다양한 시각적 자극의 쇄도에 대한 방어적 수단일 뿐 아니라, 대도시의 발전과 맞물려 이루어진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되는 근대인들의 행태 양식이라고도 설명한다.4) 화폐 경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현상들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성질들과 특성을 단지 수량적인 문제로 평준화시키는 교환 가치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5) 이는 무엇보다 화폐 자체의 “무특징성”으로부터, 즉 “사물들의 가치관계의 기계적 반영이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유용한” 수단인 화폐 자체의 근본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6) 즉 화폐 경제의 논리는 각 대상의 개별성과 독자성, 특수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각 대상의 가치를 무엇보다 교환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도시인들은 시각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수단으로 이성적 태도를 찾았고, 동시에 대도시의 정치, 경제 구조를 지배하는 화폐경제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추구하기 위해서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짐멜에 따르면, 부단한 시각적 자극들에 대한 방어와 화폐 경제체제의 수용을 위해 이성적 태도를 택한 대도시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극단적인 증세를 보이게 된다. 초기의 ‘신경과민증’과 정반대되는 증세라 할 수 있는 “둔감증”이 바로 그것이다. 둔감증이란 본질적으로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둔감증에 걸린 대도시인들은 “사물의 차이들이 지닌 의미나 가치,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증상에 급속도로 빠져들게 된다.7)

    그런데 짐멜은 이 같은 이성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만으로 당대 유럽 대도시인들의 정신 구조를 규정지울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물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태도가 대도시의 시각적 환경에 대한 근대인들의 지각 구조를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태도가 대도시의 삶을 지배할수록 각 개인은 그에 반하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공간을 찾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삶의 모든 내용과 형식이 객관화, 비인격화, 이성화될수록, 그러한 과정에 속할 수 없는 나머지 부분들은 그만큼 더 개인화되고 주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도시의 문화에서 실제로 지배권을 쥐고 있는 것은 객관적 문화이기 때문에 주관적 문화는 보다 은밀하고 내적인 곳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즉 객관적 문화에 의해 외적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는 주관적 문화는 내적 세계의 강화와 지배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회복하려 하는 것이다. 대도시의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인격적 특이성과 질적 유일성을 펼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내적 세계 혹은 영혼의 세계이며, 자신의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더 침잠하게 된다.8) 그리고 이에 따라 예술은 이러한 근대인들의 모습을, 즉 외적으로는 계량적이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인 삶의 양식을 수용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주관적이고 독자적이며 정서적인 삶의 양식을 더욱 치열하게 추구하는 근대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근대 개인의 내면 세계는 결코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상태가 아니라 온갖 욕망과 열정이 발생하고 서로 충동하다가 다시 내면화되는 지속적인 ‘운동’의 상태이며, 치열하고 복합적인 운동에 지배되는 근대 인간의 영혼은 르네상스 인간의 영혼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고 훨씬 더 변화무쌍한 영혼”이기 때문이다.9)

    따라서 이 같은 내적 지향성과 주관적 세계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짐멜은 서구 근대인들의 지각 구조가 크게 ‘신경과민증’과 ‘둔감증’이라는 성향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서구 대도시인들은 외부 시각적 환경의 변화와 화폐 경제체제의 정착에 대한 일종의 모순적 반응으로 신경과민증과 이성적 태도를 보이고, 종국에는 둔감증이라는 보다 극단적인 정신현상을 보인 것이다. 근대 서구 대도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신경과민증’과 ‘둔감증’은 이후 벤야민에게서 다시 재론된다. 벤야민은 짐멜의 사유로부터 영향을 받아 근대인들의 ‘정신분산적’ 성향과 ‘기계적’ 성향에 대해 탐구하며, 그러한 이중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매체가 바로 ‘영화’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2)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윤미애 역, 「대도시와 정신적 삶」,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p. 36.  3)Ibid., p. 37.  4)윤미애는 이점에서 짐멜이 대도시에 대한 19세기적 시각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즉 짐멜에게 있어 대도시는 “교통과 기술에 의해 구조화된 가시적 공간이거나 외부의 움직임과 순간적 인상이 교차되는 만화경 같은 세계”일 뿐 아니라, “개인들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자 무엇보다 “화폐경제에 의해 지배되는 추상적 공간”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윤미애, 「대도시와 거리 산보자-짐멜과 벤야민의 도시 문화 읽기」, 』독일문학』, 제85집, 2003, pp. 391-392 참조.  5)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p. 38.  6)게오르그 짐멜, 안준섭, 장영배, 조희연 역,『돈의 철학』, 한길사, 1976, p. 540.  7)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 p. 41  8)윤미애는 짐멜의 이 같은 내면적 개인주의, 주관적 개인주의가 슈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의 유미주의적 예술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며, 이상면은 짐멜, 베르그손, 발라즈 등으로 이어지는 정신성의 추구가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경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관해서는 윤미애, 「대도시와 거리 산보자-짐멜과 벤야민의 도시 문화 읽기」, pp. 395-396와 이상면, 「영상철학의 시초-베르그손ㆍ발라즈ㆍ벤야민의 영상이론에 대해」, 』미학』, 47집, 2006, p. 130을 참조할 것.  9)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역, 「로댕의 예술과 조각에서의 운동 모티프」,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길, 2007, p. 186. 참고로, 짐멜이 로댕의 조각에서 발견한 근대의 정신으로서의 ‘내적 운동성’은 이후 카누도(Ricciotto Canudo), 뮌스터베르크(Hugo Münsterberg), 델뤽(Louis Delluc) 등 초창기 영화이론가들의 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기본적으로 영화 이미지가 ‘정신성’의 발현이라고 본 이들은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관성’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렌즈, 필름, 영사기 등을 사용하는 지극히 물리적인 매체인 영화가 인간의 ‘내적 동요’와 ‘정신적 운동’ 등을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근대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관해서는 김수환,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 다시 읽기 : 영화기호학의 기원과 한계에 관하여」, 』슬라보학보』, 제21권 4호, 2006와 김호영, 「초기 영화이론에서의 비결정적 의미들 :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론을 중심으로」, 』탈경계인문학』, 제1호, 2008 참조.

    3. 베르그손: 근대 기계주의적 지각 구조와 영화적 환영

       1) 일상적 지각 구조와 근대 기계주의적 지각 구조

    짐멜이 대도시의 발전으로 인해 야기된 이미지들의 홍수에서 근대 서구인들의 새로운 지각 양식을 파악했다면, 베르그손은 근대의 과학적 객관주의와 기계주의적 사고가 고착, 발전시킨 인간의 지각 구조를 분석하고 진단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근대의 과학 및 철학이 고착 시킨 지각 구조는 한마디로 ‘영화적 지각 구조’와 매우 유사하며, 이러한 지각 구조는 사물과 세계, 그리고 모든 생성과정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한다.

    그런데 베르그손이 영화적 지각 구조라 지칭하며 설명하는 근대적 지각 구조는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 통상적으로 작동되는 ‘일상적 지각 양식’이기도 하다. 인간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지성의 역할은 행동을 이끌고 주관하는 것이며 지성은 행동의 필요성에 따라 행동의 결과와 목적에만, 즉 행동을 이루는 무수한 운동들의 “끝점”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성은 인간의 “활동에서 도달해야 할 목적, 즉 정지점들만을 재현”하며, 따라서 지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지각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운동에서 가능한 돌아서서 완성된 운동의 예상된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10) 우리의 지각 방식은 ‘행동’에서 운동이 아니라 ‘정지점들’, 즉 ‘정지된 순간의 이미지들’만을 취하며, ‘물질’과 ‘생성’ 등에 관련해서도 유사하게 작동된다. 우리는 영원한 흐름이자 지속인 물질로부터 매순간 ‘상태’만을 포착하며, 매순간 변화하는 사물에게서도 순간적으로 고체화된 형태 또는 불연속적 이미지만을 취하고, 다양한 생성과정에 대해서도 생성 일반의 단일한 현상만을 취한다. 요컨대 우리의 지성은 물질의 생성과 관련해 “순간적인 외관, 즉 부동적 외관들을 취하는데” 머물며, “생성으로부터 상태들만을, 지속으로부터 순간들만을” 파악하고, 심지어 “지속과 생성에 관해 말할 때라도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11)

    이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물질의 세계로부터 고정되고 순간적인 형태만을 취하는 우리의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지각 양식은 결국 안정적인 것을 통해 불안정적인 것을, 고정된 것을 통해 움직이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심각한 착각에 근거한다. 그런데 베르그손은 근대 과학 및 근대 기계주의적 사고가 이러한 우리의 지각 양식을, 즉 우리의 착각을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키고 고착시켰다고 주장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과학은 ‘시간’을 독립변수로 취급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운동과 변화보다 (정지된) 순간과 상태에 더 몰두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과학이 대상의 ‘특권적 순간’들에 주목했던 것과 달리, 근대 과학은 대상의 ‘임의적 순간’들을 고찰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 생성의 유동적 측면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시간을 거대한 흐름 내지는 규정 불가능한 개념이 아닌, 규칙적으로 절단할 수 있는 임의 정지된 순간들로 인식하고자 했다. 근대 과학이 고려했던 것은 항상 ‘순간들’이고 ‘잠재적 정지들’이자 ‘부동의 절편’들이며, “흐름으로 고려된 실재적 시간, 또는 다시 말해 존재의 운동성 자체로 고려된 실재적 시간”은 언제나 근대 “과학적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12)

    이처럼, “발명으로서의 시간에 길이로서의 시간을 대체하는” 근대 과학은 ‘운동’에 대해서도 동일한 사유 양식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13) 근본적으로 법칙들, 즉 변화하는 크기들 간의 합리적 관계들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는 근대 과학적 사고에는 운동 역시 정확히 규칙적으로 분할할 수 있는 지각 대상에 해당한다. 즉 법칙의 도출을 위해 근대 과학은 “모든 변화를 상태들로 재구성하려” 하며, 이에 따라 운동이 간격 속으로 흡수되면서 모든 운동 역시 부동성들로 만들어졌다는 부조리한 명제가 파생된다.14) 베르그손에 따르면, 유일한 운동은 기본적으로 두 정지들 사이의 운동이고 “모든 운동은 정지에서 정지로 가는 과정인 한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인데, 근대 과학의 논리에서 운동은 무수한 정지 상태들로 분해된 후 다시 재구성되는 것이다.15) 생성으로서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분할할 수 없는 불가분의 도약이지만, 근대 과학에서 운동은 무수한 내적 분절을 갖는 분할 가능한 지각대상일 뿐이다.

    요컨대, 부단한 지속인 시간과 운동을 분할 가능한 대상으로 전제하는 근대 과학의 지각 구조는 생성으로부터 정지된 상태들만을, 지속으로부터 순간적 현상들만을 파악하는 우리의 일상적 지각 구조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근대 과학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일상적 지각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심화, 고착시켰을 뿐이다. 베르그손은 이처럼 근대 과학과 기계주의적 사고에 의해 더욱 공고해진 우리의 지각 양식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영화적 지각 구조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2) 영화적 지각 구조와 기계론적 환영

    베르그손에 따르면, 영화적 지각은 “모든 형태들에 고유한 운동들로부터 비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단순한 운동, 말하자면 운동 일반을 추출하고, 그것을 사진기 속에 넣어 이 익명의 운동을 개인적인 자세들로 구성하여 특수한 각 운동의 개별성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16) 즉 영화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각 대상들의 고유하고 부단한 운동을 일반적이고 분할 가능한 운동으로 전환해 일정한 리듬으로 절단하고, 그것을 다시 각 대상의 실제 운동을 모방한 유사 운동으로 탈바꿈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의 지속적인 흐름인 운동이 이처럼 무수한 정지된 순간들로 분할되고 다시 재결합되는 과정에서, 각 운동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게 되고 운동 자체의 본성인 지속과 생성의 특질도 사라진다.17)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영화적 지각 양식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지속 중인 실재에 대해 거의 순간적인 외관들만을 취하며, 이 외관들이 어느 정도 실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의 인식 기관의 근간을 이루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며 균일한 생성을 따라 이 순간적 외관들을 차례대로 재배열한다. 즉 “생성을 사유하거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제되건, 또는 심지어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되건, 우리는 일종의 내적인 영화를 작동시키는 일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18) 베르그손은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 지각 양식을 만화경(萬華鏡, kaleidoscope)적 지각 양식에 비교하기도 한다.19) 만화경에서처럼 우리의 지각과정에서도 하나의 배열에서 재배열로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지만, 우리의 지각의 관심 대상은 그러한 움직임이 아닌 ‘새로운 형태’일 뿐이다. 한마디로, “사물에 대한 우리 인식의 영화적 특성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만화경적인 성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0)

    따라서 영화적 지각 구조는 우리의 일상적 지각 양식과 근대 과학의 기계주의적 사유가 결합된 형태를, 혹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 양식이 근대 과학적 사유에 의해 심화된 형태를 충실히 반영한다. 즉 영화라는 근대적 기계의 지각 구조는 지속 중이고 변화 중이며 운동 중인 모든 실재를 단속적이고 순간적이며 정지된 상태들의 합으로 이해하려는, 즉 모든 실재가 규칙적이고 보편적인 법칙들로 구성된다고 바라보는 근대 기계주의적 사고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집약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바로 이러한 영화적 지각 구조 내지는 사유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근대의 기계론적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적 사유 구조란 움직이는 것을 부동의 것에 의해, 지속하는 것을 순간적인 것에 의해 사유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착각에 근거하는 것이며, 영화가 만들어내는 운동은 실재 대상의 고유한 특질을 상실한 ‘거짓 운동(faux mouvement)’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베르그손은 영화 매체의 가장 중요하고 변별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운동성’ 자체를 거짓 운동이라 간주하면서 인정하지 않는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모든 실재는 항구적인 생성이자 운동일 뿐이며, 그러한 실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기계주의가 낳은 영화적 지각 구조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적 지각 구조에 대한 이러한 베르그손의 사유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베르그손이 다루는 영화는 엄밀히 말해 복합적 매체로서의 영화라기보다 촬영과 영사의 기능이 거의 전부였던 영화사 초창기의 ‘영화-기계’, 즉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즉 베르그손이 근대적 지각 양식과 영화적 지각 구조를 중점적으로 비교, 분석한 저서『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가 1907년에 출간되었고 실제로 그 내용이 1902년에서 1903년 사이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의 강연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 같은 베르그손의 관점은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기도 하다. 당대 영화의 수준 상, 베르그손은 시네마토그래프로서의 영화를 ‘기계화된 시간’과 ‘물화된 운동’의 합 이상으로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창기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했던 베르그손의 논의의 한계가 이후 전개되는 ‘내러티브’ 영화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보는 로도윅(David Rodowick)의 주장에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21) 초창기 영화가 운동과 시간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스스로의 한계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단지 내러티브의 도입 때문만이 아니라, “영사와 분리된 몽타주, 움직이는 카메라, 시점의 해방”22) 등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즉 시각적 차원에서 변화와 혁신이, 종합 매체이기 이전에 시각 매체로서의 영화에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가령, 1920년대 무성 영화들은 이미 슬로우 모션과 퀵 모션의 다양한 사용을 통해 자유롭게 시간을 확대하고 단축할 수 있게 되며, 클로즈업의 효율적 사용과 다채로운 카메라 이동을 통해 인간의 시선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시선을 제시하기도 한다.

    요컨대, 베르그손의 논의에서 단지 기계화된 시간과 물화된 운동만을 재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영화의 지각 구조는 불과 20여년 만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확대 및 축소를 통해 전혀 다른 성격의 시간과 운동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일상적인 지각 양식으로 파악할 수 없고 근대의 기계론적 사고로도 파악할 수 없는 증폭되거나 압축된 시간을 사유할 수 있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확장되거나 축소된 운동을 통해 부동적 단면들의 연속으로서의 운동이 아닌, 지속적인 흐름으로서의 운동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즉 영화는 탄생 후 불과 사반 세기만에 베르그손이 원했던 바로 그 ‘시간’과 ‘운동’의 실재를, 즉 규칙적인 길이로 재단할 수 없고 고정적 단면들로 환원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간과 운동의 실재를 구현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10)앙리 베르그손, 황수영 역, 』창조적 진화』, 아카넷, 2005, p. 444.  11)Ibid., p. 406.  12)Ibid., p. 494.  13)Ibid., p. 501. 이와 관련해 베르그손의 다음과 같은 명제를 상기해보라 : “시간은 발명품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Ibid.).  14)Ibid., p. 455.  15)앙리 베르그손, 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p. 314.  16)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p. 452.  17)따라서 베르그손의 이론을 따르면, 영화에서 ‘시간’은 항상 공간 속에서 실행되는 ‘운동’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재현된다. 즉 영화가 재현해내는 운동-이미지는 시간의 경과 및 각 현재들의 순차적 연결에 의거하면서 시간을 경험적인 형식으로 구성해낸다. 이 때, 숏들 사이의 혹은 시퀀스들 사이의 연결은 언제나 유리수적인 컷(découpage rational)에 의해 연결되고, 이렇게 연결되는 이미지들은 전체 속에 내면화되고 전체는 다시 각 부분들로 분화되는 유기적 조직을 이룬다. 다시 말해, 시간은 철저하게 운동에 종속되는 것이다.  18)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p. 452.  19)베르그손의 ‘만화경’ 개념은 훗날 벤야민에 의해 그대로 차용된다.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p. 143 참조.  20)Ibid., p. 453.  21)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김지훈 역,『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그린비, 2005, p. 63.  22)질 들뢰즈, 주은우, 정원 역, 』영화 1』, 새길, 1996, p. 26.

    4. 벤야민: 기계적 지각과 기계적 눈으로서의 영화

       1) 도시 이미지와 기계적 지각 양식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서구의 대도시들은 벤야민이 자신의 평생 연구 주제로 삼을 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대상이다. 벤야민은 대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도 특히 ‘군중’과 ‘거리 산보자’의 존재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으며, 여러 글들을 통해 양자 사이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탐구했다. 그의 언급처럼, ‘군중’은 19세기 서구의 문인들이 가장 관심을 나타냈던 대상이었으며 ‘거리 산보자’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에서, 특히 보들레르의 작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탐구된다. 19세기 문학작품들에서 ‘군중 속의 행인’과 ‘거리 산보자’는 경우에 따라 가끔씩 동일하게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등의 글을 통해 양자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중 속 행인이 단순히 대도시의 거리를 오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면, 거리 산보자는 “공간을 필요로 하고 사적 생활을 그대로 갖고 싶어하는”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23) 급속도로 변화하는 대도시의 거리들을 떠돌며 주변의 모든 대상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거리 산보자는 일종의 예술가적 능력을 갖춘 특별한 인물 유형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19세기 중반 보들레르의 문학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이후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는다.24)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중 속 행인과 거리 산보자의 구별보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지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이 예로 든 19세기의 여러 문학작품들에서, 군중 또는 거리 산보자는 모두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 환경에 충격을 받으면서 사방으로 불안하고 불안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1984)에서 쏜살같은 템포로 서로 스쳐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은 일종의 거리산보자인 작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며, 포우(Edgar Allan Poe)의 』군중 속의 사람(The Man of the Crowd)』(1840)에서도 “음울하고 넋 나간 듯한 모습”으로 사방에 시선을 던지는 군중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보들레르의 작품들 속의 거리 산보자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도시의 풍경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전기적 에너지가 축적된 곳 속으로 뛰어들 듯”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 충격을 온몸으로 겪어낸다.25)

    이처럼, 19세기 대도시와 그와 관련된 문헌들의 연구를 통해 벤야민이 발견한 것은 일찍이 짐멜이 지적했던 대도시에서의 시각적 충격과 그에 따른 지각 양식의 변화이다. 벤야민은 앞서 살펴보았던 짐멜의 논의와 매우 유사한 논의를 펼치면서, 대도시에서의 시지각 양식의 변화를 설명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대도시 교통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개개인으로 하여금 일련의 충격과 충돌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위험한 교차로에서는 신경의 자극들이 마치 건전지에서 나오는 에너지처럼 잇달아 그의 몸속을 관통한다.”26) 여기서 ‘충격’과 ‘충돌’이란 시각적 충격과 충돌을 가리키며, 더 자세히 말하면 대도시를 채우는 다종다양한 이미지들의 충돌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충격을 가리킨다. 짐멜과 마찬가지로 벤야민 역시 이 같은 시각적 충격으로 인해 대도시인들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다고 보며, 대도시인들은 그 같은 ‘신경과민증’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감정의 무력화와 ‘둔화’를 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대도시의 각 개인은 자신의 눈을 응답하지도 않고 응답을 찾지도 않는, “방어적”이고 “둔감한” 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27)

    요컨대, 급속히 쏟아지는 이미지들의 홍수로 인해 대도시인들이 시각적 충격을 겪고 나아가 신경과민증세에 시달리며 그에 대한 방어 혹은 탈피를 위해 감정의 둔화를 택한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명백하게 짐멜의 사유로부터 영향을 받이다. 그런데 짐멜의 고찰이 대도시인들의 둔감화 내지는 이성화에 관한 사유에서 그친 것에 비해, 벤야민은 그와 같은 대도시인들의 성향이 좀 더 발전되어 일종의 ‘지각의 기계화(또는 의식의 기계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즉 충격에 대한 대도시인의 반응은 이성적, 객관적 행동을 넘어 ‘기계적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기계적 행동은 결국 인간의 지각 메커니즘이 ‘기계적 메커니즘’을 모방하고 학습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지각기관이 복합적 성격을 띤 어떤 훈련을 받도록 강요”하며28), 이에 따라 인간의 지각 양식은 기계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스스로를 조절해간다.

    나아가 베르그손과 마찬가지로, 벤야민 역시 ‘영화’가 이 같이 기계화된 인간의 지각 양식을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매체라고 주장한다.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에서 필요한 이미지만을 포착해 재구성하는 영화적 지각방식은, 이미지의 홍수로 인한 시각적 충격 속에서 단순한 외관들만을 취해 지각하는 현대 대도시인들의 지각방식을 그대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대도시 거리에서) “충격의 형식을 띤 지각이 일종의 형식적 원리”가 되며29), 컨베이어 벨트의 생산 리듬이 정확하게 계산(분할, 재구성)된 연속성에 근거하듯이 영화에서나 대도시 거리에서의 이미지 수용 리듬 역시 기계적으로 계산(분할, 재구성)된 연속성에 의거하게 된다. 이처럼, 기계적 메커니즘이 인간의 지각 양식에 깊은 영향을 주고 지각의 메커니즘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근대 과학의 기계주의적 사유구조가 인간의 사유 방식의 기계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고착시켰다는 베르그손의 주장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그러한 인간의 지각 구조의 기계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주장 역시 베르그손의 글과 벤야민의 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결론적으로, 벤야민은 ‘대도시의 등장과 근대인의 지각 양식의 변화’라는 주제와 관련해 전 세대의 두 사상가인 짐멜과 베르그손의 사유를 골고루 차용해 발전시켰다. 대도시에서의 이미지의 홍수가 주는 시각적 충격이 신경과민증세와 감정의 둔감화(이성화)를 차례로 유발한다는 논의와 관련해서는 짐멜의 사유를 계승했고, 그러한 둔감화로부터 비롯된 기계적 행동이 인간의 지각 구조에 영향을 미쳐 인간의 지각의 기계화를 낳는다는 주장은 베르그손의 사유를 재론한 것이다. 나아가, 인위적인 연속성에 근거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영화와 현실에서의 이미지 수용양식을 결정짓는다는 주장과 영화야말로 근대인의 지각 구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주장 또한 베르그손의 사유를 그대로 이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2) 기계복제 예술-지속성의 소멸과 지각 구조의 기계화

    인간의 지각 양식의 기계화에 대해 주목했던 벤야민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당대 새로운 매체 혹은 예술양식으로 주목받던 기계복제 예술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한마디로,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로 대변되는 기계복제 예술이 전통 예술작품이 유지해온 고유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따라서 관객에게 예술작품과 관련해 전혀 다른 지각과 수용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벤야민은 모든 복제 예술작품에서 누락되는 것은 무엇보다 예술작품의 ‘진품성’이라고 강조한다. “원작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진품성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 즉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현존성’을 보증해준다.30) 또한 예술작품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진품성은 각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한다.31) 대량 생산과 영구적 현재화를 목표로 하는 기계복제 예술의 경우, 당연히 이러한 일회적 현존성과 지속성 및 역사적 증언가치를 포함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통 예술에서 예술작품의 필수조건이 되었던 진품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기계 복제 예술에서는 예술작품의 진품성 뿐 아니라 ‘제의성’도 추출된다. 벤야민에 따르면, 모든 예술작품의 시초는 본래 주술적 혹은 종교적 ‘의식(儀式)’을 위한 용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예술작품의 ‘아우라적 존재방식’도 바로 그러한 종교 의식적 기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진정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예술작품이 그 속에서 원래적이고 최초의 사용가치를 가졌었던 제의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32) 그러나 기계복제 예술은 인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예술작품을 그 같은 종교적 의식에서, 즉 제의적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기술복제를 통한 대량 생산과 대량 보급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아우라를 벗겨놓았을 뿐 아니라, 특정 공간과 특정 유형의 수용자로 한정되던 예술작품의 ‘제의가치(祭儀價値, Kultwert)’를 가능한 모든 공간과 모든 수용자에 개방하는 ‘전시가치(展示價値, Ausstellungswert)’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33)

    그런데 기술복제 예술에서 사라지는 진품성과 제의성은 ‘아우라(Aura)’ 개념에 의해 보다 명확히 설명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자신의 근현대 예술론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아우라에 대해 여러 차례 정의를 내린 바 있다.34) 그런데 실제로 벤야민이 어떤 사물이나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지속성’이다.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라는 아우라의 정의에서, ‘멀리 떨어진 것’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속성의 중요성은 최초로 아우라의 개념을 제시했던 「사진의 작은 역사(Kleine Geschichte der Photographie)」(1931)에서도 잘 드러난다. 벤야민은 초창기 사진만이 유일하게 아우라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초창기 사진은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긴 ‘시간의 지속’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초창기 사진판은 감광도가 낮아 햇빛에 장시간 노출시켜야 했고, 그에 따라 모델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 부동의 자세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35) 그 덕분에 마치 메조틴트 판화에서처럼 초창기 사진은 명암의 변화와 연속을 담아낼 수 있었고, 그 명암의 연속체는 시간의 지속의 흔적을 표현하면서 사진에 “예전에 한번도 이루어낸 적이 없는 귀중한 인상”을 부여하게 된다.36) 이후 집광도 높은 렌즈 등 다양한 사진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같은 음영은 사진에서 사라지게 되고, 아우라 역시 사진 자체에서 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Ü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1939) 에서 제시한,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지각 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는 아우라의 정의에서도 ‘지속성’은 아우라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지각 대상’이 연상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도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에, 즉 무의지적 기억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르그손, 프루스트, 보들레르 등을 언급하면서 이 같은 사물의 지속성 및 지속의 현재화가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제거시킨다고 주장하며 과거와 현재, 무의식과 의식, 주체와 대상 사이에 교감을 낳는다고 본다. 바로 이러한 교감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 “향기”, “우리의 눈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어떤 것” 등이 발생하는데37), 아우라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창기 사진 이후 모든 기술복제 예술은 이러한 지속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복제 기계들이 무의지적 기억의 영역이 아닌 의지적 기억의 영역의 확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며, 과거로부터 진행되어온 시간의 지속이 새겨지고 현재화 되는 방식보다 일시적인 ‘현재’가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고정되고 항구화되는 양식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부여하는 영역’은 배제되고, 가시적이고 설명과 추리가 가능한 의식의 영역만이 기록될 뿐이다.

    따라서 벤야민은 기계복제 예술에 나타나는 이 같은 지속성의 소멸이 결국 인간의 지각 양식의 변화를 낳았다고 본다. 사진과 영화 등 모든 기계복제 예술이 아우라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인간으로부터 아우라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고 인간의 지각 양식 자체를 의식의 영역, 즉 의지적 기억에 의존하는 단순한 지각으로 변모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기계복제 예술은 우리의 의식을 사물의 지속성을 보지 못하고 사물의 순간적인 외관만을 취해 지각하도록 이끌면서 우리의 지각 구조 자체를 기계적인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로 인해,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이 근대인의 지각의 특징이 되며, 이러한 근대인의 지각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추출”하려 하고 모든 일회적인 것과 멀리 떨어진 것을 복제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38) 한 마디로, 기계복제 예술에서 행해지는 진품성, 제의성, 지속성의 제거는 인간의 지각 양식을 가시적이고, 일시적이며, 반복적인 것에 의거하는 단순한 기계주의적 구조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3) 영화와 시지각의 외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벤야민은 기계복제 예술이 진품성, 제의성, 지속성을 상실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예술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진과 영화로 대표되는 기계복제 예술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는 ‘지각의 심화 및 확대’를 가져오면서 우리에게 일종의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일깨워주는 혁명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39)

    먼저, 영화는 클로즈업을 통해 일상의 공간 속에 숨겨져 있던 미세한 세부를 보여주고, 나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필연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의 지대를 보여준다. “우리는 확대촬영을 통해 어차피 불분명하게 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혀 새로운 물질의 구조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40) 또한 클로즈업의 확대 기능은 공간의 확대 뿐 아니라 시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성은 영화의 확대 기능을 통해 공간적 차원을 넘어 시간적 차원으로까지, 즉 4차원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게 된다.41) 영화는 고속촬영을 통해 “이미 알려진 움직임의 모티프들” 뿐 아니라 “이러한 알려진 모티프들 속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모티프들, 다시 말해 빠른 움직임을 천천히 진행시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듯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그리고 세상 밖에 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42). 요컨대, 영화 카메라는 “그것이 가지는 보조 수단, 즉 추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연장과 단축, 확대와 축소 등을 통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확대, 심화시켜준다.43)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포착하고 보여주는 영화의 특별한 지각능력에 대한 벤야민의 이 같은 사유는 전 세대의 짐멜이나 베르그손의 논의를 계승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시대의 유럽 영화예술가들 및 영화 이론가들의 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시지각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영화카메라의 시지각 능력은 당대 영화예술가들 및 영화이론가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고 탐구되던 화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유럽의 영화이론가들은 영화 이미지 내부에 존재하는 비결정적 의미들 혹은 ‘의미론적 외부’ 외에도 영화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선의 외부’, 즉 인간적 ‘시지각의 외부’에 깊은 주의를 표한다. 즉 이들은 ‘기계-눈’으로서의 영화 카메라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도 주목한 것이다. 인간의 시지각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기계적 눈’으로서의 영화 카메라는 당대 유럽 영화인들의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었는데, 프랑스에서는 뒬락(Germaine Dullac), 엡슈타인(Jean Epstein), 강스(Abel Gance) 등이, 독일어권에서는 발라즈(Béla Balázs), 크라카우어(Siegfired Kracauer), 벤야민 등이,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베로토프(Dziga Vertov) 등이 모두 ‘기계적 눈’으로서의 영화 카메라의 독자적 기능과 관련해 유사한 사고를 발전시킨다. 가령, 엡슈타인은 영화카메라가 인간의 동작들을 거의 모든 각도, 거리, 측면에서 절단해 보여줄 수 있고 상시가변적인 시선의 축을 따라 이동하면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영화 카메라의 눈을 가리켜 인간의 눈의 지각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일종의 “비인간적인 눈(un oeil inhumain)”이라고 명명했고44), 베르토프(Dziga Vertov)는 인간의 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상들을 모으고 기록하며 인간의 눈보다 더 많이, 더 잘 지각하는 ‘영화-눈(kino-eye/kino-glaz)’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45) 요컨대, 1920-30년대 유럽의 영화인들(특히 무성영화인들)은 ‘비인간적 눈’ 혹은 ‘기계-눈’으로서의 영화 카메라가 인간의 시선을 전제적인 자아중심주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인간 자신의 시선의 중심이 아닌 또 다른 시선의 중심을 축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이끈다고 간주한 것이다.46)

    이와 같이, 엡슈타인과 베르토프가 주목한 영화 카메라의 ‘기계적 눈’ 개념은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성(das Optisch-Unbewußte)’ 개념과 연결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벤야민 역시 영화 카메라가 일상의 공간 속에 숨겨져 있는 미세한 세부를 확대해 우리의 거대한 ‘시각적 무의식의 지대’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즉 벤야민은 영화 카메라가 클로즈업 등 집중적인 세부 묘사를 통해 시각적, 청각적 지각의 세계를 확장시켜주고, 그에 따라 우리의 “통각의 심화”를 가져다준다고 본 것이다.47) 그런데 이와 같이 영화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시선의 외부’는 우리의 통상적인 시지각의 경험에서 벗어나 쉽게 그 의미를 규정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원의 ‘의미론적 외부’라 할 수 있다. 즉 엡슈타인의 ‘포토제니(photogénie)’, 발라즈의 ‘피지오노미크(相, physiognomik)’, 에이헨바움(Boris Mikhailovich Eikhenbaum)의 ‘자움(zaum)’이 모두 영화의 의미화과정에서 일탈하는 어떤 비결정적 의미를 가리킨다면48), 엡슈타인의 ‘비인간적 눈’, 베르토프의 ‘영화-눈’,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성’ 역시 영화적 재현을 통해 지각되는 현실의 어떤 비결정적 의미 영역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기계적 눈’으로서의 영화 카메라에 대한 벤야민의 찬탄은 사실상 그 자체로 일종의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벤야민은 위의 논의와 관련해 “우리가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적 무의식[광학적 무의식, das Optisch-Unbewußte]의 세계를 알게 된다”고 주장했는데49), 이러한 주장은 결국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와 ‘시선의 무의식적 세계’가 서로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있어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란 실제로 아우라가 작동하고 발생하는 영역이다. 앞서 고찰한 것처럼, 아우라는 인간의 ‘무의지적 기억’에서 일어나는 연상작용과 관련되는데, 무의지적 기억이란 벤야민이 프루스트에게서 빌어온 개념으로 인간의 의지적 기억에 대립되는 기억영역을 가리킨다. 또한 벤야민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이 무의지적 기억이라는 용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영역’과 유사한 특성을 갖으며, 나아가 무의지적 기억과 무의식 영역 모두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에 그 개념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벤야민이 말하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라는 개념은 비록 ‘시각적’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에서부터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 프루스트의 ‘무의지적 기억’으로 이어지는 어떤 영역, 즉 이성과 과학적 합리주의가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본질적인 영역의 특성을 계승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손, 프로이트, 프루스트 모두 그들의 개념들을 기계주의적 지각 구조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또 다른 지각 영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반면, 벤야민은 영화 카메라라는 ‘기계’의 특별한 능력을 찬양하기 위해 사용했다. 요컨대, 벤야민은 한편으로 영화 카메라의 지각과 관련해 일종의 반-기계주의적(탈-기계주의적) 사유를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지각능력을 넘어서는 영화 카메라의 초-인간적 능력을 찬양하면서 일종의 기계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벤야민은 인간의 지각능력을 넘어서는 영화 카메라(영화 기계)의 특별한 지각능력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동시대 영화이론가들 및 영화인들과 유사한 면을 보이지만, 영화 기계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는다. 특히 발라즈와 엡슈타인 등 일부 영화이론가들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모인 동시대 아방가르드 영화인들이 영화 기계에 예술성, 제의성, 아우라 등을 부여하면서 영화 혹은 영화 이미지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나타내준다고 본 것에 반해50), 벤야민은 영화 기계의 그러한 특성들을 모두 부인한다. 발라즈와 엡슈타인이 영화 기계의 초-인간적인 특별한 능력을 믿으면서 거기에 예술성과 정신성(제의성)까지 부여하는, 일종의 ‘기계예술주의’를 지향했다면, 벤야민은 영화의 예술성 및 제의성 등을 철저하게 부인하면서 단지 인간의 시각적 무의식의 지대를 밝혀주는 영화의 독자적인 능력에만 주목하는, 일종의 ‘기계지상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벤야민에게 있어, 영화는 아우라를 표현할 수 없는 이상 진정한 의미의 (혹은 전통적 의미의) 예술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정치적 도구로 더 유용한 가치를 얻는다.

    23)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 민음사, 1983, p. 140.  24)윤미애, 「대도시와 거리 산보자-짐멜과 벤야민의 도시 문화 읽기」, p. 390.  25)자세한 내용은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pp. 132-143 참조.  26)Ibid., p. 143.  27)Ibid., pp. 160-161.  28)Ibid., p. 143.  29)Ibid.,  30)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발터 벤야민 선집 2』, 도서출판 길, 2007, p. 103.  31)Ibid., p. 105.  32)Ibid., pp. 110-111.  33)벤야민은 기계복제 예술 중 인간의 얼굴을 담은 일부 ‘초기 사진’들만이 제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후 사진들에서부터 이미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밀어내버렸다고 주장한다. 즉 아벨 강스(Abel Gance)나 생모리스(Saint-Maurice) 같은 초기 영화이론가들이 영화 이미지를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면서 영화에 일종의 제의적 혹은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34)먼저,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으로 정의하며 이러한 정의는 이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제2판과 제3판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사진의 작은 역사」, 』발터 벤야민 선집 2』, 도서출판 길, 2007, p. 184). 한편,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에서는 이와 다소 상이하게 아우라를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지각 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p. 155).  35)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p. 170-171.  36)Ibid., p. 180.  37)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pp. 156-157.  38)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 184.  39)이상면에 따르면, 시각적 무의식성을 사진과 영화의 동질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벤야민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크라카우어(Siegfired Kracauer)의 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상면, 「영상철학의 시초-베르그손ㆍ발라즈ㆍ벤야민의 영상이론에 대해」, 125-128쪽 참조.  40)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p. 138.  41)벤야민 뿐 아니라 1920-30년대 모든 유럽의 무성 영화인들에게 있어 ‘클로즈업’은 ‘공간의 확대’ 뿐 아니라 ‘시간의 확대’를 의미했다. 가령, 엡슈타인은 자신이 연출한 영화들에서 클로즈업과 감속(슬로모션)을 결합한 이미지들, 즉 공간적 확대와 시간적 확대가 동시에 행해진 이미지들을 자주 삽입하면서 “시간의 경험까지 포함하는 우리가 지닌 모든 감각적 경험의 확대”를 도모하기도 했다(자크 오몽,『영화 속의 얼굴』, pp. 156-177 참조). 그밖에도 무성 영화에 있어서 ‘시간적 확대’로서의 클로즈업의 의미에 관해서는 Jean Epstein, “Grossissement”(1921), in Écrits sur le cinéma, Editions Seghers, 1974 ; Germaine Dullac, “The Expressive Techniques of the Cinema”(1924), trans. by S. Liebman, French Film Theory and Criticism. 1907-1939, selected by Richard Abel. vol I. Princeton UP. 1988. 305-14 ; Mary Ann Doane, “The Close-up: Scale and Detail in the Cinema”, in difference: A journal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volume 14, No. 3, Fall 2003을 참조할 것.  42)Ibid.  43)Ibid., p. 139.  44)J. Epstein, “L’objectif lui-même”(1926), in Écrits sur le cinéma. Editions Seghers, 1974, p. 128.  45)지가 베르토프, 김영란 역, 』KINO-EYE.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 이매진, 2006, p. 75.  46)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영화 카메라의 기계적 시각에 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김지훈ㆍ박제철ㆍ이성민 역,『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 도서출판 b, 2006, 289-291쪽과 김지훈, 「1920년대 전후 유럽 영화와 시각문화의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eology): ‘기계적 시각(mechanical vision)’의 중요성 및 이후 미디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76-86쪽을 참조할 것.  47)이상면, 「영상철학의 시초-베르그손ㆍ발라즈ㆍ벤야민의 영상이론에 대해」, p. 122.  48)엡슈타인의 ‘포토제니’ 개념에 관해서는 김호영, 「영화 이미지와 포토제니-장 엡슈타인의 이론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제36호, 2008와 Jean Epstein, “De quelques conditions de la photogénie”(1923) et “L’élément photogénique”(1924), in Écrits sur le cinéma, Editions Seghers, 1974을, 발라즈의 ‘피지오노미크’ 개념에 관해서는 Béla Balázs, L’homme visible ou la culture des films(1924). traduit par Jacques Ducent. Séghers. 1971와 Gertrud Koch, “Béla Balázs: The Physiognomy of Things”, trans. by M. Hasen, in New German Critique, 40 Winter, 1987을, 에이헨바움의 ‘자움’ 개념에 관해서는 김수환,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 다시 읽기 : 영화기호학의 기원과 한계에 관하여」, 』슬라보학보』, 제21권 4호, 2006을 참조할 것.  49)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p. 139.  50)김호영, 「초기 영화이론에서의 비결정적 의미들 :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론을 중심으로」, pp. 122-127.

    5. 맺음말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문학, 미술, 음악, 건축 등 주요 예술 영역에서는 급격한 단절 및 전면적인 전복의 시도가 일어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개별 장르 차원의 변화와 혁신을 넘어 문화사 전체 차원에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총체적인 전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사진의 기계복제술을 계승, 발전시킨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문화의 패러다임 자체가 오랫동안 인류를 지배해온 활자 중심의 문화에서 영상 중심의 문화로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활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로, 언어에서 이미지로, 전통적 창작방식에서 기계복제방식으로 문화의 패러다임이 이동하는 일종의 거시적 차원의 문화적 전환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베르그손, 짐멜, 벤야민은 모두 이러한 문화적 전환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 그에 관한 깊고 선구적인 사유를 보여주었다. 짐멜은 산업 사회의 성장과 대도시의 발달로 인한 이미지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그러한 이미지 홍수 시대에 근대인들이 겪는 다양한 증상(신경과민증, 둔감증)들에 대해 지적했다. 또 베르그손은 영화야말로 근대 기계주의적 사유구조와 지각 양식을 대변하는 매체라고 주장하면서, 기계화된 시간과 물화된 운동을 재현하는 ‘영화-기계’는 부단한 지속으로서의 시간과 운동을 표현할 수 없는 매체, 즉 일종의 기계론적 환영을 제시하는 매체라고 강조했다. 두 경우 모두, 영화로 대변되는 영상 매체의 도래를 예감하고 영상 매체의 특성과 구조의 본질을 탐구한 선구적 사유라 할 수 있다. 한편, 대중 매체로서 혹은 예술 장르로서의 영화를 충분히 경험한 벤야민은 두 선구자들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계승하면서 영화 매체의 본질과 특징을 조명했다. (짐멜의 사유를 계승해) 대도시에서 이미지의 홍수가 주는 시각적 충격이 신경과민증세와 둔감증을 차례로 유발하는 현상에 주목했고, (베르그손의 사유를 이어받아) 과도한 이성화로부터 비롯되는 기계적 행동이 인간의 지각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인간의 지각 양식의 기계화를 낳는 것에 대해 강조했다. 특히 영화야말로 근대인의 기계적 지각 구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주장은 베르그손의 사유를 그대로 계승해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영화이론가들은 베르그송에서 벤야민으로 이어지는, 영화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기계주의적 입장과 정반대되는 의견들을 내놓는다. 엡슈타인, 뒬락, 발라즈 등은 기계 매체로서의 영화가 그것이 재현해내는 이미지에 ‘정신성’과 인격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아가 영화 이미지에는 균등하게 분할하고 재구성할 수 없는 ‘운동성(mobilité)’이 내포되어 있다고 간주한다.51) 뿐만 아니라, 영화는 기존의 어떤 매체도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을, 즉 실제 시간보다 빠르거나 느린 시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즉 영화는 가속과 감속의 발명 등을 통해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전까지 확고한 원칙으로 인식되어오던 시간의 불가역성, 불변성, 절대성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정신성 뿐 아니라 운동성과 시간성을 포함하는 영화 이미지는 ‘재현된 그 무엇’이 아니라 ‘현전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지속 중이며 운동 중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베르그손과 벤야민의 논의가 이와 유사한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베르그손과 벤야민의 논의가 ‘기계 복제매체’로서의 영화의 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러한 논의에서 영화 이미지는 단지 지속중이고 운동중인 실재에 대한 단속적이고 정지된 절편들의 합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논의에는 이미 영화 이미지를 운동중이고 지속적으로 변화중인 이미지로 바라 보려는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에 관한 베르그손의 논의가 단지 영화-기계가 만들어내는 ‘기계론적 환영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로서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52)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우리에게 추상적 시간의 추가가 불가피한 일련의 ‘움직일 수 없는 단편’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단편’들로서의 운동-이미지들을 제시히는데, 이는 물질, 이미지, 운동에 관한 베르그손의 사유에 이미 예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베르그손에게 있어 ‘물질’은 고정되고 단편적이며 균등분할할 수 있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운동중이고 변화하며 분할할 수 없는 열린 전체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이처럼 내적으로 끊임없이 진동하고 변화하는 ‘물질’의 상태를 가리키며, 따라서 ‘운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논의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따라) 영화 이미지를 단순한 프레임 이미지들의 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일종의 ‘즉각적 소여’로서의 매개적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간주하면, 영화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운동 중인 물질 그 자체, 즉 ‘운동’이자 ‘이미지’인 ‘물질’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벤야민의 논의에서도 영화 이미지가 시간과 운동을, 그것도 단순한 연대기적 시간이나 기계적 운동이 아닌 순수하고 절대적인 차원의 시간과 운동을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벤야민은 영화의 확대 기능이 공간적 차원을 넘어 시간적 차원에도 관계한다고 보았으며, 영화가 이와 같은 공간적, 시간적 확대를 통해 이미 알려진 움직임의 모티프들 속에 숨어 있는 미지의 모티프들을, 즉 “세상 밖에 있는 듯한 움직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영화는 비록 기계복제 매체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다양한 수단과 기능을 통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확대, 심화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고, 실재에 대한 단순한 절편들의 합으로서의 운동이나 추상적 시간이 아닌, 다시 말해 인간의 인위적 규정 영역을 넘어서는 순수한 운동과 시간을 보여줄 수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탄생시기부터 무성영화 시대까지, 영화적 지각 양식 및 영화 이미지의 본질과 관련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손에서 벤야민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영화적 지각 구조는 근대의 기계적 지각 구조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영화 이미지는 기계화된 시간과 물화된 운동을 재현하는 단순한 절편들의 합에 가깝다. 반면 엡슈타인이나 발라즈 같은 이론가들의 논의에서, 영화적 지각은 인간의 지각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초인간적 지각에 해당하고, 영화 이미지는 인간의 정신과 순수 차원의 운동 및 시간을 보여줄 수 있는 ‘현전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르그손과 벤야민의 논의에도 단순한 기계적 재현 이미지가 아닌, 순수 운동과 순수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 현전 이미지로서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영화적 지각 역시 단순한 기계적 지각을 넘어 다양한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지각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혹은 적어도, 이들의 논의에는 당시 단순한 기계적 재현매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영화가 다양한 기술적 가능성을 통해 초-기계적이며 초-인간적인 지각능력과 표현능력을 갖추기를 바라는 일종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1)J. Epstein,L’intelligence d’une machine, Editions Jacques Melot, 1946, pp. 40-51.  52)자세한 논의는 질 들뢰즈, 』영화 1』, pp. 23-39과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의 제1장 및 제4장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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