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텀 멀카니의 『런던스태니』(Londonstani)에 나타난 “블링블링 경제학”과 창조적 남성성 비판*

“Bling Bling Economics” and Creative Masculinities in Gautam Malkani’s Londonstani

  • ABSTRACT

    Gautam Malkani’s debut novel, Londonstani, revolves around a group of 19-year-old South Asian rudeboys based in Hounslow: Hardjit, Ravi, and Amit, along with Jas, who joins the group to become a “ hard man” and who narrate s the novel. While Malkani’s entertaining novel is successful in portraying the “bling bling” urban youth culture, the masculinist and fashion-forward lifestyle of the rudeboys, maintained by misogyny and homophobia and enhanced by their hiphop ethnic identities, remains highly problematic.

    This essay has two goals. First, it investig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ling bling economics,” a term for luxury consumption, and the “cool” creative masculinities invented and performed by Hardjit’s lot. Despite Malkani’s liberatory notion that identities and masculinities are a “cut-and-paste” invention, the masculine bravado embodied in Hardjit’s rudeboy group, made up of violence, abusive slang, and designer brands, has little to do with a thoughtful critique of gender division. Rather, what Londonstani reveals vividly is the extent to which gender identity ― becoming masculine ― is now defined by the consumption of “masculine” commodities, such as a Porsche 911 GT3, Gillette Mach 3 blades, and a Dolce & Gabana suit.

    The latter part of the essay hones in on Jas’s “choice,” which leads the white Jason to live a life of an Indian rudeboy, speaking Hinglish and mimicking Hardjit’s machismo behaviors. Borrowing from Irvine Welsh and Philip Goodchild, I argue that Jas’s “choice,” albeit seemingly voluntary and independent, is an illusion fabricated by consumerist society. This is because in a late-capitalist society where real political oppositions are no longer possible, an endless catalogue of commodities with seemingly diverse yet highly limited options (size, color, and so on) concocts an illusion of “freedom of choice.” This freedom of choice, however, assumes an oppressive perimeter of choices given by global corporations and does not allow for real creative choices outside that perimeter.

  • KEYWORD

    Gautam Malkani , Londonstani , Masculinities , Contemporary British Fiction , Diaspora Literature , South Asian Rudeboy , Consumerism

  • I.

    멀카니(Gautam Malkani)의 데뷔소설 『런던스태니』1)는 런던 서쪽 외곽 하운즐로(Hounslow) 지역의 열아홉 살 난 문제아들을 소재로 한, 제목부터 창의적인 작품이다. 근육질 몸매를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시크교도(Sikh) 하짓(Hardjit), 그를 따르는 힌두교도 라비(Ravi)와 아밋(Amit)으로 이루어진 아시아계 이민2세대 “루드보이”(rudeboy) 무리에 소심한 모범생 자스(Jas)가 합류하며 루드보이세계의 은어와 행동양식을 배우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1부에서는 어머니의 BMW를 몰고 다니며 싸움질과 사소한 범죄―부모님의 최신 휴대폰에 내장된 비밀코드를 풀어 자신의 유심카드를 넣음으로써 새 폰도 갖고 자신의 번호도 유지하고픈 이들을 위해 코드 풀어주기―를 일삼는 네 재수생의 ‘간지 나는’ 일상이 거침없는 비속어를 통해 전달된다. 2부에서는 하운즐로-케임브리지 출신의 젊은 갑부 산제이(Sanjay)가 등장해 “블링블링2) 경제학”(Bling Bling Economics)을 설파하며 하짓과 친구들을 한층 더 화려하고 부정한 삶으로 이끈다. “부유함이 [죄가 아니라] 주류가 되는 것을 숭배하는 하위문화,” “네스카페보다 스타벅스”(164)로 요약되는 산제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하짓의 패거리는 매달 수백 대의 도난당한 휴대폰을 산제이에게 팔고 연예인들이 드나드는 런던클럽을 전전하며 블링블링한 삶을 맛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자스가 하짓·라비·아미, 산제이, 그리고 몰래 사귀던 이슬람 여자 친구 사미라에게 동시에 버림받으며 자스에 관한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자스가 자스빈더(Jaswinder)같은 인도 이름이 아닌, 제이슨(Jason Cliveden-Bartholomew)이라는 이름의 백인이었던 것이다.

    남성성이나 민족정체성도 “수행”과 “창조물”(Brandes 17)에 불과한 것임을 보이고 싶었다는 멀카니의 이 기발한 소설은, 스미스(Zadie Smith)의 『하얀 이빨』(White Teeth, 2000) 이후 영국소설의 가장 뜨거운 소재로 떠오른 다문화주의의 또 다른 성공작으로 칭송받았다. 멀카니 역시 하운즐로-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인도계 이민2세대 청소년에 관한 석사논문을 쓰기위해 모은 자료를 토대로 『런던스태니』를 썼다는 점, 소설 속 등장하는 힝글리시(Hinglish)3)와 길거리 언어, 힙합용어 등의 해설집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이 다문화소설임을 입증하였고, 멀카니의 원고가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수백만 파운드에 계약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런던스태니』의 성공은 이국적인 소재만큼이나 익숙함에도 기인한다. ‘그들만의 은어를 사용하는 네 청년으로 이루어진 폭력집단’이란 유사성 때문에 『런던스태니』는 영국남성성연구의 핵심텍스트인 버지스(Anthony Burgess)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62)와 웰시(Irvine Welsh)의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1993)에 종종 비교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제껏 ‘영국’소설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아시아계 루드보이들의 일상을 그리되, 어른이 되고 싶은 마마보이들의 남성성 경연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은『런던스태니』는 어느새 대학수업에서도 읽히는 정전이 되었다. 젠더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행적이라는 버틀러(Judith Butler)의 이론을 피상적으로 연상시키는 지적 요소 역시 소설의 성공에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블링블링 경제학”이 하짓무리에게 대량의 휴대폰을 갈취해올 것을 설득하기 위해 산제이가 늘어놓는 매력적인 궤변인 것처럼, 『런던스태니』의 블링블링한 성공 역시 의구심을 일으킨다. 멀카니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해설에서 소설의 주인공을 “남자가 되려하는 19살 중산층 마마보이들”이라 규정하며 그들의 치기어린 남성성이 과도기적인 것임을 시사한다.4) 나아가 단면적 인물인 하짓, 라비, 아밋과 달리 내면의 깊이를 지닌 자스의 선택을 강조하며, 자스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루드보이란 정체성이 고정된 성·인종정체성을 초월하는 해방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멀카니의 표현에 의하면 “스위치를 껐다 켰다하듯” 백인도 쉽사리 드러내거나 숨길 수 있는 루드보이 남성성은 고착화된 젠더이분법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창조적 남성성은 기존의 지배적 남성성―가부장제, 제국주의 남성성, 1990년대 영국사회에 등장한 두 유형의 신남성(New Man, New Laddism)등―에 함의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긍정적인 새 모델을 만들어내는 작업과 별 연관이 없다.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소수인종으로서의 특권, 무력, 경제력)은 적극 취하고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연약한 자, 주류백인문화에 편승한 자)은 혐오함으로써만 유지되는 『런던스태니』의 남성성은 정체성의 범주와 경계에 아무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백인)남성뿐 아니라 여성에 의해서도 착용될 수 있을 루드보이 남성성은, 영국남성성서사의 계보를 통해서보다 루드보이 창조에 가장 핵심적인 소비지상주의의 틀을 통해 더 잘 분석될 수 있다. 즉 『런던스태니』는 반체제문화(counterculture)를 이끄는 젊은이들의 정치적 남성성을 다룬 소설이라기보다, “블링블링 경제학”으로 통칭되는 소비사회에서 어떻게 ‘남자다운 남자’가 ‘남성전용상품의 소비자’로 재정의 되는지 보여주는 소설로서 더 가치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의 주장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소설 속 일상을 지배하는 “블링블링 경제”와 작가가 개인취향에 따른 “오려붙이기”(cut-and-paste) 정체성임을 주장하는 창조적 남성성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왜 블링블링해 보이는 창의적 남성성이 정작 창의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으며 남성만의 전유물도 아닌지 살펴보려한다. 소비주의에 물든 하짓패거리는 창조와 발명이란 미명하에 다양한 스타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전시하지만, 몸을 가꾸고 쇼핑에 집착하는 것이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잘 발달된 근육과 비싼 힙합의상으로 표상되는 그들의 과잉남성성(hyper-masculinity)은 역설적으로 전혀 남성적이지 못하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런던스태니』를 10대의 일탈이야기로 읽고 있지만 20대인 산제이와 하짓무리의 부모들 역시 블링블링한 삶과 과시욕에 사로잡혀있다는 점에서 창조적 남성성은 소비자를 끌기 위한 문구일 뿐, 진정한 창의성이나 젠더탐구와는 거리가 멀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유일하게 자기반성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자스의 선택마저 “블링블링 경제”가 빚어내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본문의 후반부에는 철학자 굳차일드(Phillip Goodchild)와 소설가 웰시의 생각을 빌려, 어떻게 더 이상의 정치적 대안이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무의미한 상품의 목록을 늘어놓음으로써 개인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이라는 환상이 탄생되는지 간략히 살펴본다.

    1)“런던스태니”는 인도계영국청소년들의 은어로 “런던사람”이란 뜻이다. 2005년 7월 근본주의 이슬람교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런던폭발 사건 이후 등장한 “런더니스탠”(Londonistan)과 달리 부정적 함의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런던의 다문화사회를 예찬하고 있다. www.gautammalkani.com/about_londonstani.htm 참조.  2)래퍼(rapper)들이 즐겨 착용하는 번쩍거리는 귀금속(bling)에서 유래된 말로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을 뜻하는 명사 혹은 형용사.  3)힌두어, 펀자브어, 우르두어, 영어의 혼합.  4)본 논문에서 면수가 표기되지 않은 멀카니의 말은 모두 작가가 홈페이지에 올린 소설의 해설에서 인용된 것이다. www.gautammalkani.com/about_londonstani.htm 참조.

    II.

    하짓과 친구들이 수행하는 남성성은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사회적 성역할을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는, 그야말로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이다. 타리크(Tariq)와의 싸움에서 이러한 구경거리(spectacle)로서의 남성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하짓은, 이슬람교인 타리크가 시크교도 소녀를 사귀었기에 혼쭐을 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점, 오히려 그 소녀가 타리크를 유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하짓의 종교적 명분은 한판 ‘뜨기’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한판 싸움을 벌이려는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남성적 몸매와 부티 나는 싸움용 옷차림을 과시하기 위해서란 것이다. 따라서 하짓은 싸움에 입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극적으로” 보이게 신경을 쓰고, “하이힐밖에 신지 않은 체코 수퍼모델에 의해 베일이 벗겨지길 기다리는 제네바 모터쇼의 새아우디 컨셉트 카”같이 멋진 몸을 “헐렁한 긴팔 아디다스 추리닝”과 “오렌지색 두건”으로 가리고 싸움에 임한다(82-83). 소설의 화자인 자스는 이런 하짓의 모습을 “고급창녀”에 비유하며, “너무 빨리 노출해버릴 만큼 조금은 아니지만 벗어버리기에 딱 충분한 만큼만 차려입었다”(83)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관객”(83)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들에게 짜릿한 쇼를 보여주려는 하짓의 계획적인 몸짓은, 사나이들의 거칠고 무작위적인 주먹질보다 “발리우드 싸움장면을 위한 음향효과”(103)가 더 중시되는 공연의 성격을 지닌다.

    이렇듯 루드보이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강조되는 것은 강인한 남성성의 분출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세련된 루드보이의 ‘여성성’이다. 하짓의 자태를 섹시한 창녀에 비유하는 자스의 논평 외에도, 하짓무리의 과장된 남성성을 유치하고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표현한 예는 『런던스태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짓이 한 마디 하면 나머지 세 명이 “별 거지같은 소년 밴드”(3)처럼 하짓의 말을 합창한다던지, 한창 욕설을 내뱉으며 터프한 남자를 연기하던 아밋이 엄마의 전화를 받고 “밀가루랑 달걀이요. 방목된 닭의 것으로요. 사 갈게요 엄마”(16)라고 말하며 아직 미성년자임을 보이는 장면이 그 예이다. 멀카니는 한 인터뷰에서 “근육을 뽐내는 것”이 사실은 “허영심에 가득 찬 여성스러운(queeny)” 행동에 가깝다며, 이러한 종류의 마초근성을 마마보이가 흔히 갖는 “여성스러운 남자다움”(a queeny type of machismo)(Brandes 18)이라고 부른다. 하짓과 친구들의 폭력적이고 과시적인 ‘어른남자 흉내’가 어머니와의 답답한 관계, 즉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부모가 제공하는 유복한 중산층생활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멀카니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필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하짓패거리의 유치하고 호들갑스러운 남성성을 여성스러운 것으로, 그것도 굳이 남성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단어로도 쓰이는 “호모 같은”(queeny)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하짓무리의 창조적 남성성이 새롭기는커녕 남성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남성성이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닌 젠더구별보다 소비지상주의에 너무나도 철저히 종속되어 있어 굳이 남성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지, 그들의 희화화된 남성성이 여성스러워서, 따라서 열등해보여서가 아니다. 폭력과 어리석음, 크고 작은 범법행위로 얼룩진 하짓패거리의 마초 경연을 멀카니는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으레 겪는 것으로 여기며 그들을 우습고도 여성스러운 어린애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가벼운 태도와 달리 『런던스태니』가 남성성에 관해 드러내는 섬뜩한 진실은 소비지상주의가 어떻게 남녀와 인종의 유의미한 구분마저 지워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런던스태니』에서 소비지상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하짓과 세 친구들, 산제이뿐이 아니다. 네 주인공의 어머니들 역시 아들들이 과장되게 연기하는 뒤죽박죽 남성성의 반대역할, 즉 창조적이지 못한 창조적·수행적 여성성을 온 몸에 걸치고 있다. 창조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잡식의 요소를 한데 묶어주는 고리가 명품이듯, 창조적 여성성 역시 종교와 인종을 불문하고 사치품의 치장으로 귀결된다. 하짓의 어머니는 집에 놀러온 아들친구들이 장물 휴대폰을 숨겨놓은 지도 모른 체 “침대시트 구기지 마라. 진짜 정말 실크로 된 거야”(67)라며 호들갑을 떤다. 종교적 사교모임인 사챙(satsang)을 주관하는 아룬의 엄마는 “남편의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급 가구와 포크,” “별 거지같은 플라스틱 이케아 대신…자신의 황금색 숄에 매치되는 힐[디자이너브랜드] 테이블”(79)을 통해 손님들을 기죽이려 한다. 손님들 역시 “하늘나라에 주차공간을 확보해두기 위해” 자신의 소형차 대신 남편의 “벤츠, BMW, 혹은 아우디”(80)를 보란 듯이 주차해놓는다. 이외에도 웃기다 못해 서글픈 엉터리 영어로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 아들이 항상 옆길로 새는지도 모르고 학원 늦겠다고 구박하는 엄마, 터무니없는 인도연속극이나 보고, 화내기가 올림픽 종목이었으면 금메달을 따 주름투성이 몸을 꾸몄을 거라는 엄마를 향한 신랄하다 못해 여성혐오적인 풍자가 소설 속에 가득하다. 현대여성이기에 사리대신 베르사체 드레스를 입어야한다면서도 아들이 “BMW”(black, muslim, white)(326)인 여성을 사귀면 죽어버리겠다는 편협한 어머니의 모습은, “과시적 소비가 곧 성공”(Tomczak 439)이 되어버린 이민1세대의 안타까운 초상이기도 하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하짓무리가 어머니세대를 끔찍하게 혐오하면서도 기성세대의 소비자, 자본주의자 정신만큼은 아무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같은 아버지”(309)라고 일만 하는 소심한 아버지를 흉보면서도 남자가 되는 것은 곧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라고 믿기에, 하짓 무리들은 불법휴대폰조작에 대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말한다: “우린 서비스를 제공했을 뿐이야. 우린 사업가라구”(40). 또 다른 예로 인도연속극속의 삶을 부러워하는 어머니를 가차 없이 비꼬면서도, 그들 역시 방을 인도여배우 아이슈와라 라이(Aishwarya Rai)의 포스터로 도배하고 영화 「저수지의 개들」속 같은 폼 나는 삶을 꿈꾼다. 이런 의미에서 하짓패거리가 간간히 터뜨리는 부모에 대한 상투적 분노―“[엄마들은] 다 똑같아. 우리를 통해 자기 꿈을 이루려고 우리를 항상 지배하려 들지”(189)―는 그들의 과장된 남성성 연기만큼이나 공허하다. 라나시나(Ruvani Ranashinha)는 『런던스태니』가 기존의 디아스포라문학에서 중시되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대신 어머니의 역할을 부각시키며, “여성이 곧 남성성의 소비자이자 생산자”(302)임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파키스탄계 영국작가 쿠레이시(Hanif Kureishi)의 작품에서 유독 1세대 이민자 어머니들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점을 생각해볼 때 『런던스태니』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이 보다 영향력 있게 보일법도 하다.5) 그러나 멀카니가 작품해설에서 “아들이 소년으로 남기를 바라는…전형적으로 위압적인 어머니들”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이 소설 속 어머니상은 쿠레이시의 침묵하는 어머니상만큼이나 단면적이다. 『런던스태니』속 어머니의 주요역할이라면, 아들의 남성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기보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각각 남성소비자와 여성소비자를 겨냥한 상품구별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멀카니의 소설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고, 남성 중에서도 블링블링한 상남자를 결정짓는 것은 호사스러운 남성전용상품의 목록이다. 하짓과 세 친구가 백인동급생을 이유 없이 흠씬 패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하는 부분은 루드보이를 루드보이로 만드는 사치품의 나열이다. 따라서 주먹을 휘두르는 하짓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돌체앤 가바나 상의”와 “나이키 에어포스 원 운동화”에 피가 튀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스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하짓의 싸움 실력보다 “[미국흑인래퍼] P. 디디와 쇼핑한 듯 완벽한 옷차림”(4)이다. 가끔씩 휘두르는 폭력은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기위한 수단이자 너무나 완벽한 패션센스로 인해 “호모”처럼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즉 근육을 만드는 이유가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가아니라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서인 것이다. 한편 루드보이의 필수품은 지극히 남성적인 것―휴대폰, 게임기, 자동차―인데, 반드시 최신형·최고급형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세속적 기준에 무례해(rude) 보이는 루드보이의 세계가 온갖 속물적 규칙으로 유지되는 상류층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루드보이들의 “타고난 권리”(40)인 블링블링한 휴대폰은 “모토롤라 V300,” “소니 에릭슨 T630,” “노키아 8310,” 혹은 “삼성 E700s”(68)이어야 하며, 침실에는 “플레이스테이션2,” “닌텐도 게임큐브,” “애플 iMac”과 “바디빌딩용 단백질셰이크를 위한 작은 냉장고”(69)를 구비해놓아야 한다. 단순히 비싼 외제차가 아니라 “포르셰 911 GT3 Type 996”(132)를 소유한 성공한 남자 산제이는, “여자는 [남자가] 차를 다루는걸 보고 자기 몸을 어떻게 다룰지 판단하지”(132)라고 자스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자동차에 비유하는 것을 딱히 여성혐오로만 보기 힘든 것이, 하짓 역시 “페라리가 4x4 SUV를 만들면”(17) 똑같았을 몸을 가진 것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결국 『런던스태니』의 세계에서 남자다운 남자와 여성스러운 여자의 구별은 남성용 명품(“D&G 콜로뉴,” “질레트 마하3 면도날,” “FCUK 데오도런트,” 64미리짜리 특대형 “듀렉스 아반티[콘돔브랜드]”(92))와 여성용품(“림멜 007 장밋빛 립스틱,” “날개형 생리대,” “핑크색 안드렉스 휴지”(89))의 차이로 이분화 된다.

    이와 같이 소비지상주의에 침잠되어 남성용품을 통해서만 남성성을 표현할 수 있는 『런던스태니』의 주인공들이, 변모해가는 남성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쇠락해가는 영국에 대한 다양한 반응과 위기의식, 극복의 노력을 반영해온 영국남성성서사의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남성간의 유대, 혹은 경쟁이 특히 강조되는 영국문학의 전통에서 2차 대전 이후 영국문학·영화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추락하는 남성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에 정치적 대의를 잃고 여성적 소비사회에 위협받는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가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제임스 본드와 비틀즈를 통해 영국남성성이 일시적으로 ‘쿨’함을 되찾기도 하였다. 긴 공황의 70년대를 지나고 80년대에는 철의 여인 대처의 보수당 집권 하에 노동자가장의 실직, 이민2세대의 사회진출, 아일랜드문제 등으로 다양한 인종과 계층, 성적취향의 남성이 등장하였고, 이와 반대로 지극히 이상화된 향수를 담은 백인엘리트남성상이 유산산업(heritage industry)의 융성 속에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60년대의 “활기찬 런던”(Swinging London)을 연상시키는 90년대의 “멋진 영국”(Cool Britannia) 캠페인과 97년 취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의 국가이미지 브랜딩 전략에 힘입어 90년대는 부드럽고 매력적인 남성상이 젊고 진취적인 새 영국의 이미지로 포장되어 양산되었다. 휴 그랜트로 대표되는 “신남성”의 이미지가 그 예일 것이다. 2000년대 영국문학의 지형도를 벌써 그려보기는 힘들겠지만, 이전의 영국남성성이 계층이나 인종, 성정체성이나 가족·지역·직장공동체의 ‘구분’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면, 2000년대 작품에서는 후기 자본주의와 세계화라는 절대원칙아래 차이와 구별이 ‘흡수’되는 면모를 보인다. 그렇다면 전쟁이나 경제공황, 부모님세대의 인종차별이나 경제적 빈곤을 겪어보지 못한 하짓무리가 그들만의 갈등을 창조하고 패거리 규칙을 만들어 인위적인 남성성을 연기하는 것 역시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아쉽게도 『런던스태니』의 작가는 자스를 제외한 모든 인물을 성적, 인종적, 계층적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평면적이고 희화화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블링블링한 루드보이의 생활상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재미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창조하고 연기하는 남성성은 후기자본주의사회라는 시대조건, 19살의 “이유 없는 반항”이란 이유 외에 어떤 구체적 동기도, 역사적 고찰이나 정치적 맥락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런던스태니』가 한 평자의 표현에 따르면 “유아적인 디즈니랜드 같은 하운즐로의 인도랜드(desiland)6)”(Tomczak 440)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모든 등장인물이 드러내는 편협한 역사관과 다름에 대한 태도는 우려스러울 정도이다. 원체 다양한 민족과 종교인, 다른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하기에 얼핏 보면 오늘날 런던의 생생한 혼종성을 예찬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은 사실 철저한 반목과 불관용으로 점철되어있다. 루드보이는 자신의 극도로 폭력적인 성향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는 대부분의 남자를 “호모(batty)”와 “기집애 같은(poncey)”이로 매도하고, 표준영어를 쓰고 정상적 교육과정을 거쳐 취업한 유색영국인을 겉은 갈색이고 속은 흰 “코코넛”이라며 경멸한다. 소설의 초반, 하짓패거리는 한 평범한 “코코넛”을 곡예운전으로 추월하고 민족반역자라며 길 한복판에서 이유 없이 괴롭힌다. 하짓의 이유는 자신들이 최신 BMW를 타고 미국힙합을 귀가 먹도록 크게 틀어놓은데 반해, 그 “코코넛”은 겨우 “푸조 305”를 몰고 “U2”나 “R.E.M.”같은 정통영국밴드를 듣고 있다는 것이다(20-22). 즉 “코코넛”을 배척하는 기준이 루드보이의 민족의식이나 역사인식을 반영한다기보다 사치품과 최신문화의 섭렵, 그로인해 결정되는 블링블링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모르”면서 “시크교 경전을 인용해 아빠를 말싸움에서 이겨버린”(78) 하짓에게 그의 종교나 피부색은 루드보이의 반항아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 선생님 애시우드(Ashwood)의 문화통합주의 역시 아시아계학생을 향한 백인선생님의 시혜의식에 불과하다. 라비가 자신의 휴대폰을 훔친 것을 눈감아주는 대신 졸업생 산제이가 귀감이 될 거라고 착각하며 산제이에게 하짓무리를 보내는 애시우드는 영(Gary Younge)의 혹평대로 “형편없이 그려진 백인자유주의의 모방품(pastiche)”(38)일 뿐이다. 특히 하짓무리의 “동성애혐오”(118)와 “역겨운 여성혐오”(120)에 신물이 난다며, “통합(integrate)되고 싶지 않다면 왜 여기[영국]에 왔니?”라고 묻는 애시우드의 질문은, “우린 빌어먹을 여기서 태어났다구요”(122)라는 라비의 답과 맞물려 학생만큼이나 부족한 백인선생의 역사관을 드러낸다.

    한편 명품과 최신미국문화를 향유하는 루드보이라고 인종·종교적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런던스태니』에서 자스의 비밀 다음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밋의 형 아룬(Arun)의 자살일 것이다. 루드보이 합류라는 자스의 극단적인 선택을 비롯해 하짓무리의 다양한 일탈의 동기가 억압적 부모에 대한 반항인 것으로 소설은 전제하고 있지만, “복잡한 가족관련 문제(shit)”라는 모호한 구절로 묘사할 뿐 독자가 납득할만한 구체적 내용은 제시되지 않는다. 아룬이 자살한 근본적 이유는, 아룬의 약혼녀가 의사이고 힌두전통에 큰 관심이 없는데 반해 아룬의 어머니는 “그렇지만 아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88)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약혼녀와 그 가족에게 엄청난 존경과 대우와 지참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룬의 어머니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을 정도로 속물적이고 완고한 인물이어서 아룬의 자살이란 결과 역시 신빙성 있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룬의 비극은 『런던스태니』속 남성성이 작가의 바람처럼 해방적이고 창의적인 발명품일 수만은 없으며, 전통이나 젠더역학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아시아계이민1세대 부모와 서구화된 자식 간의 도식적 갈등의 예를 넘어 아룬의 죽음이 진정 비극인 이유는, 어머니에게 맞서도록 아룬을 부추긴 자스의 ‘합리적’ 충고가 진정성을 결여한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전통에는 아무 합당한 이유가 없으니 맞서 싸우라는 자스의 유창한 연설은 아룬의 마음에 큰 동요를 일으키나,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멋진 대사를 도용한데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사미라에게 강한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자스의 충고는 진정 아룬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룬에게 네 정신을 해방시키고 시스템과 맞서고 인류를 구하라는 나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빌어먹을 모피어스다”(229)라고 스스로의 영웅적 모습에 도취된 자스는, 할 말이 없을 때 래퍼 아이스 큐브의 노래가사를 대신 중얼거리며 강한 척하는 하짓과 더불어 대중문화에 의한 자율적 사고능력의 상실을 보여준다. 음악 채널 MTV에 등장하는 집과 똑같이 꾸미기 위해 바닥을 수족관으로 만들고, “일곱 개의 입체음향 스피커를 단 뱅 앤 올룹슨의 최신 베오비젼”과 최신 에어컨, 이태리제 커피메이커, 한정판 냉동고를 구비한 산제이의 “블링블링한 아파트”(145-148)는 세트장이 현실에 들어오는, 이제는 상용어가 된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복제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예라 하겠다. 하짓을 향한 친구들의 선망을 “배트맨에게 보내는 고담시의 신호”(78)로, 산제이의 보디가드를 “인도판 슈렉”(149)으로 표현하는 등 『런던스태니』에 등장하는 미국대중문화명칭은 셀 수없이 많다. 이 무수한 영화제목, 텔레비전시리즈, 배우, 힙합스타가 블링블링한 루드보이 남성성의 구석구석을 대변하고 있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막 루드보이세계에 입문한 자스는, “맹세코 그들 [하짓·라비·아밋]만큼 MTV와 저기 D[인도계영국팝가수] 비디오를 많이 봤지만 아직도 딱 적정수준의 진짜 루드보이에 이르지 못했다”(6)라고 푸념한다. 그러나 이제껏 살펴봤듯 하짓무리의 남성성은 명품과 대중문화코드를 통해 연기되는 대체정체성, 즉 하이퍼리얼리티와도 같은 것이어서 “진짜”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배우가 분장을 하고 외계인연기를 진짜처럼 잘해낸다할지라도 배우의 정체성이 외계인이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멀카니가 『런던스태니』를 통해 생생히 전해주는 런던의 다국적·다문화적 풍경 역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바람직한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 홈페이지의 작품해설에서 멀카니는 90년대 이후 아시아계가 런던의 밤 문화, 특히 런던 클럽가를 주름잡게 되었다며 “더 이상 100퍼센트 런던인이 되기 위해 백인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런던의 가장 ‘핫’한 클럽 “배가본드”에 하짓무리를 데려다놓고 산제이가 전도하는 것은 여자를 ‘후리는’ “남자가 되는 기술”(137)과 루드보이의 허세를 부추기는 “블링블링 경제학”같은 달콤한 사기술이다. 이슬람교인 사미라에게 연정을 품은 자스에게 산제이는 “너는 리나도 디캐프리오도 아니고 이건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야…지금은 21세기이고 사람들은 1948년 일[인도분리·독립]은 다 잊었다구”(203)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산제이가 관용적인 코즈모폴리턴이어서가 아니라 자스의 약점을 잡음으로써 훗날 그를 이용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다국적인 최고급 레스토랑들 역시 멀카니가 자랑하고픈 런던의 다문화적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하카산, 아이비, 르 카프리스, 아시아 드 쿠바, 노부”(241)라는 식당목록이 산제이의 불법사업(몇 달 전에 미리 예약을 잡아놓고 필요한 이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파는 것)에 쓰인다는 점이 천민자본주의의 씁쓸한 예를 보여준다. 즉 멀카니를 포함하여 아시아계가 런던의 주류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재력, 세련된 언행, 명품 같은 후기자본주의의 고급문화코드를 습득했기 때문이지 런던이 인종과 종교, 계층을 초월한 평화로운 다문화도시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7)

    5)영화로 각색되어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쿠레이시의 대표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1985)에서도 주인공 오마(Omar)의 어머니는 자살한지 오래고, 오마의 삼촌인 성공한 사업가 나세르(Nasser)는 매력적인 백인 레이철(Rachael)에 빠져 무뚝뚝하고 전통적인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역시 영화화된 단편소설 「내 아들 광신도」(“My Son the Fanatic,” 1997)에서도 아버지 파베즈(Parvez)와 아들 파리드(Farid), 파베즈의 친구인 백인창녀 베티나(Bettina)와의 관계가 중심이고, 파베즈의 부인은 영어를 거의 못해서 남편과 아들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인물이다.  6)『런던스태니』에 부록으로 포함되어있는 해설집에 따르면 “데지”(desi)는 “사람들 및 문화를 일컫는 인도 디아스포라에 대한 그들만의 용어”(337)이다.  7)스미스나 멀카니가 예찬하는 런던의 다문화주의는 2001년 뉴욕 9/11 테러, 2005년 런던 7/7 테러이후 지나친 낙관론으로 지적받게 된다. 특히 토마스(Susie Thomas)는 『하얀 이빨』에 등장하는 놀이터 장면―백인소녀 시타(Sita)와 파키스탄계 섀론(Sharon)이 함께 노는 장면―을 예로 들며, 스미스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귀여운 찬양”이 “유치하고 얼빠진 것(fatuousness)”이라고 혹평한다. 이 놀이터 장면은 『런던스태니』속 타리크와의 싸움을 연상시키는데, 이 싸움이 스미스의 놀이터장면만큼이나 이상적으로 중국인 와이 콱-호(Wai Qwok-Ho)와 소말리아관객, 태권도의 “반대찌르기”(bandae jurugi)를 이용하는 하짓과 친구들의 다문화놀이터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III.

    『런던스태니』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민족·젠더의 전형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과장된 언행으로 희화화되고 있는 반면, 유일하게 내면성을 보이는 인물이 자스이다. 비록 하짓의 리더십과 말솜씨를 부러워하지만, 양복을 차려입은 하짓무리의 뽐내는 걸음걸이를 “갱스터 펭귄”(97)에 재치있게 비유하기도 하고, 헬스클럽에서 동성애자를 대놓고 비웃는 라비와 아밋을 보며 자신은 차마 그들만큼 “동성애혐오적”일 수는 없다고 고백하기도 한다(186). 또한 “완전한 인도계(desi) 루드보이”(183)가 되는 과정 중 최악이 바디빌딩이라며, 미인대회에 나가는 것 같으니 차라리 지방흡입의 반대과정으로 실리콘근육을 가슴과 팔에 심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욕을 섞어 한탄하기도 한다(186). 애초에 인도계도 아니면서 인도계 루드보이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자스이므로 그의 불만에 큰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여성비하적인 대화가 난무하는 이 소설에서 자스의 존재는 소중하다. 예를 들면 하짓의 아버지가 여자를 고를 때 뚱뚱한 배를 봐야 나중에 끼니를 얻어먹을 수 있다고 하자, 자스는 “조할씨, 날씬한 게 잘못된 건 아니죠 […] 날씬하다고 다 마약을 하는 건 아니랍니다”(57)라며 상식의 소리를 대변해준다. 성공한 회계사 혹은 사업가인 하짓무리의 아버지들은 “요리를 못하는 여자는 도대체 무엇에 쓰느냐”(56)는 고루한 가부장이고, 산제이의 인도계미국인친구 디네시(Dinesh) 역시겉으로는 코즈모폴리턴의 세련됨을 가졌지만 “뉴욕과 달리 보톡스를 맞지 않은 [영국여자들]을 보니 진짜 고기가 먼저 먹고 싶어졌다”(206)며 여자를 고깃덩이에 비유하는 악랄한 인물이다. 여자를 열등한 동물이나 정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런던스태니』속 어른남자들은 성공한 남자는 일도 여자도 ‘정복’한 남자라는 문제적 남성성을 보여준다.

    이런 기성세대의 마초적 남성성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19살 청소년이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남녀관계에 대해 들어봤을 리가 없다. 하짓무리의 대화는 (주로 상상 속에서) 누구누구와 잤다는 허세, 성기와 자위에 관한 농담, “한번 해달라는 미니스커트와 롱부츠”(fuck-me miniskirts an fuck-me-harder knee-high boots)(18)를 걸친 여학생에 관한 저급한 품평으로 가득 차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여성“내면의 아름다움”(63)을 언급하는 자스는 화자로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자스는, 예쁘지만 이슬람교여서 어차피 먹지 못할 떡으로 하짓무리의 비방을 받던 사미라를 몰래 사귀게 되고 소설의 끝에 사미라 역시 버릇없는 ”여자판 루드보이”(282)에 지나지 않음을 속 시원히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신뢰를 얻는다. 얌전만 빼는 다른 인도계소녀들과 달리 국제사면위원회에 관심을 가졌으며 여자들도 성에 대해 솔직해야 한다는 사미라의 당돌한 모습은 자스를 매료시킨다. 그러나 아룬의 자살이후 하짓·라비·아밋에게 버림받은 자스를 두고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 여성“(247)임을 주장하며 다른 남자와 놀러 다니는 사미라는 현대여성이란 블링블링한 여성성을 연기하는 “루드걸”(282)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미라가 항상 읊는 대사―“엄마가 나를 공주 취급하기 때문에 내가 창녀처럼 구는 거야”(278)―는 루드보이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엄마에 반항하기위해 방탕하게 행동한다는 것과 똑같은 핑계이다. 루드보이가 되기 위해 자스도 하짓·라비·아밋 만큼이나 저속한 욕설과 여성비하에 참여한다는 점, 산제이의 블링블링한 삶이 부정부패의 결과인줄 알면서도 부러워한다는 점에서 자스가 전혀 결백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사미라의 본질을 꿰뚫는 자스의 통찰력, 『런던스태니』 곳곳에 비치는 그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이 소설이 완전한 소극(farce)으로 전락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스의 화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또 마지막에 밝혀지는 그의 비밀 때문에 대부분의 평자들이 『런던스태니』의 주인공을 자스로 보고, “소년 모험이야기 혹은 교양성장소설(Bildungsroman)”(Goh 340)로 이 작품을 읽는다. 해리슨(Sophie Harrison)은 『런던스태니』의 허술한 “십대용 플롯구성”을 지적하며, “짜증나고 혼란스럽고 과장되었지만 재밌다”(11)라고 너그러이 평한다. 그러나 멀카니가 스스로 인정하듯 너무 늦게 등장한 결말의 반전(333면 중 331면에 밝혀지는 자스의 본명과 인종)이 과연 그의 성장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작가는 작품 내내 숨겨뒀던 자스가 백인이란 사실이, “이 소설이 인종이나 민족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정체성들이 어떻게 더욱 남자답게 되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되는지에 관한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연히 자스를 인도계로 생각하다 막판에 백인이란 것을 알게 되는 독자는, 순식간에 인종적 선입견을 가진 이가 되어버려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억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작품의 초반에 동급생 자스빈더보다 자기가 더 먼저 자스란 이름을 차지했다고 한다든지, 자스를 자연스레 하짓·라비·아밋과 같은 인도계로 볼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스가 백인팝스타 저스틴 팀벌레이크를 닮았다는 등 단서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왜 백인소년이 인도계 루드보이가 되려고 했는지 소설 속에서 전혀 설득되고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유일한 동기로 짐작되는 것이 부모를 혐오하는 나약한 모범생이었다는 것인데, “엄마만 보면 항상 구역질이 나”(33)고, “아빠엄마와 저녁을 먹느니 굶거나 개의 설사똥을 먹겠다”(195)는 분노에 찬 말들뿐, 가게를 운영하고 파시미나 숄을 사랑하는 평범해 보이는 자스의 부모가 아들의 극단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스는 산제이의 협박에 아버지의 물류창고를 털다 정체불명의 삼인조에게 구타당하고 화염에 휩싸인 창고에서 정신을 잃는다. 병원에서 깬 자스에게, 자스의 아버지는 자신이 보험을 타기위해 화재를 저질렀다고 아들의 죄를 덮어쓸 것임을 밝히고, 어리둥절해하는 아들에게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가 뭐 이상한거냐”(329)라고 반문한다. 그제야 “죄송해요”(330)라고 말하는 자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소설이 끝났더라면 자스의 성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을 터인데, 멀카니는 굳이 자스가 인도계 미녀간호사에게 펀자브어로 “감사합니다”(Shukriya)(333)라며 짓궂게 수작을 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멀카니의 주장대로 민족이나 인종정체성이 피부색이나 모태종교와 분리되어 오롯이 남성성을 강화하는 도구로만 쓰일 수 있는지, 소설의 결말에 만신창이가 되어 아버지와 화해한 자스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지,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해 『런던스태니』의 당혹스러운 결말은 답을 주지 않는다. 수행적 정체성과 창조적 남성성에 관한 멀카니의 소설 속 실험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평론가들이 함구한 가운데, 브루예트(Sarah Brouillette)는 자스와 멀카니를 동일시하며 『런던스태니』‘밖’의 성공에 대해 분석한다. 브루예트에 따르면, 1980년대 미국에서 기업이 다문화주의를 적극 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목적은 소수인종을 중요 소비자층으로 끌어들여 자본주의에 적합한 주체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브루예트는 그 결과로 과거 “문화산업”이라고 불렸던 영역이 “창의 경제”라는 더 포괄적이고 신선한 명칭으로 재탄생하였고, “창의계층”(creative class)이라는 엘리트집단에 의해 주도되어왔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작가나 예술가가 이 계층에 속할 텐데, 이들의 가장 큰 임무는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매력적인 집단을 “상징적 자본”으로 만들어 지적재산권을 가진 상품으로 변모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한층 더 다양한 관객과 독자를 소비의 그물망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다(6-7). 창의경제의 물결은 1990년대 영국에도 이르렀으며, 이후 다문화예술상품에 대한 적극적 후원과 육성 속에 때맞춰 등장한 것이 『런던스태니』이다. 브루예트는, 흥미진진한 루드보이집단에 속하기 위해 그 집단의 규칙을 익히면서도 관찰자로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자스의 모습이, 하운즐로 출신이지만 이제는 작가의 입장에서 하운즐로 루드보이를 “상징적 자본화”한 멀카니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즉 『런던스태니』의 성공은 소설 속 자스의 성장이라기보다, 자스 같은 내부인-관찰자의 이중위치를 이용하여 독특한 루드보이소설을 출판함으로써 “창의계층”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멀카니의 몫이란 결론이다.

    브루예트는 소설 속 화자와 멀카니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느라 자스의 관찰력이나 학습능력, 내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면모는 자스의 일부분일 뿐이다. 본 논문을 끝맺기 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생각마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제어되고 유통되는 『런던스태니』속 소비사회에서 자스의 선택권은 자스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루드보이란 ‘인도 옷’을 선택해 입으려는 것은 자스의 자유의지요 취향처럼 보이지만, 개인취향마저 상품의 세부모델과 옵션에 의해 창조되고 조직되는 소비사회에서 자스는 루드보이를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루드보이란 이색상품을 선택의 자유란 착각 속에 강매당한 것에 가깝다. 이러한 과정은 굳차일드가 주장하는 “생각의 시장화”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위의 인용에 의하면, 대중의 세속적 욕구를 자극해서 소비를 부추기되 비판적 입장은 원천봉쇄하는 생각이 가장 잘 팔리는 생각이요, 인기상품이다. 『런던스태니』가 예찬하는 다문화주의야말로 누구도 쉽게 반대할 수 없는 21세기 최고의 상품이 아닌가한다. 다문화주의의 다양성과 소수존중이라는 핵심개념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다양하면서도 특화된 상품으로 비주류소비자를 공략하게하고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선택권과 관용적인 주류소비자로의 편입이라는 기분 좋은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자스의 창조적 남성성을 이루는 “오려붙이기” 정체성들, 산제이의 “블링블링 경제학”이 끝없이 늘어놓는 사치품목록은 진열된 상품 ‘안’에서의 제한된 선택만을 허용한다. 선택의 범주와 상품의 종류가 이미 시장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상황에서 진열장 속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며, 진열장 밖의 가능성을 고민할 수 없게 만드는 수동적인 행위이다. 80년대 대처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반하여 일어났던 영국 반문화의 물결이 90년대 들어 어떻게 문화연구에 귀속되며 그 급진성과 혁명성을 잃고 학계의 상품으로 전락했는지 누구보다 절절하게 작품 속에 기록해온 웰시는, 현대소비사회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선택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역설한다. 오늘날처럼 “진정한 정치적 대립이 부재한 상황,” 좌파와 우파 모두 포퓰리즘과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진짜 긴장감이나 역동성이 없”어진 사회에서 유일한 탐구거리로 남은 것은 “인터넷, 패션, 스타일같이 하찮은 것들의 목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더욱 새롭고 색다른 것, 의미 없는 선택권”(Redhead에서 재인용 145)의 양산만이 거짓 활기를 불어넣게 된 현실에서, 유일한 저항법은 선택의 자유가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임을 깨닫고 선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 즉 선택권 ‘너머’의 세상에 대해 고뇌하는 것이다.

    IV.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웰시의 『트레인스포팅』이 소비사회에 점차 매몰되어가는 제도 밖 대안문화를 지키기 위한 시도라면, 2000년대 초반을 다룬 『런던스태니』에서 소비시장의 밖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이 현실이 되어버린 하운즐로의 “인도랜드”에서, 19살 소년이 속물적 기성세대에 대한 염증을 생산적이고 건강하게 표출할 해방구는 남아있지 않다.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인도계루드보이가 되기로 하고, 양심에 찔려하면서도 하짓처럼 욕설을 퍼붓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불법사업에 뛰어드는 백인소년 제이슨을 통해 멀카니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남성성은 민족정체성을 오려다 붙임으로써 창조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는 멀카니의 주장은, 자신의 소설이 19살 마마보이들의 과도기적 일탈일 뿐이라는 그의 또 다른 주장과 배치된다. 신기한 힝글리시 비속어의 향연, 이름만으로 독자를 설레게 하는 글로벌명품브랜드, 어처구니없을 만큼 우스운 인물군상과 결말의 반전까지 갖춘 『런던스태니』가 블링블링한 성공작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런던스태니』의 핵심이라고 할 자스의 루드보이선택은 블링블링이란 매혹적 원칙 아래 성·민족 정체성들의 다름을 개의치 않는 분별없는 소비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멀카니의 소설은, 진열장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예술작품이라기보다 대중과 현상에 영합하는 대박상품이기를 택하고 있다.

  • 1. Brandes Blake (2012) “‘Our Lives Are Constructed with Symbols’: An Interview with Gautam Malkani.” [Wasafiri] Vol.27 P.17-18 google d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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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 Redhead Steve 2000 Interview with Irvine Welsh. “Post-Punk Junk.” Repetitive Beat Generation. P.137-50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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