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와 유목적 삶*

Social Media and Nomad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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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본 논문은 오늘날 다양한 소셜 미디어 이용현상의 의미를 욕망론의 관점에서 해명해 보았다. 특히, 들뢰즈·가타리의 무의식적 욕망론에 입각하여 소셜 미디어 이용현상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무의식적 욕망론의 특징은 소셜 미디어를 ‘주체(인간)-대상(기계)’이라는 이원적 구도에서 ‘누가’ ‘무엇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라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인간 연속체’라는 일원적 구도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일원적 구도에서는 인간도 기계도 자연도 없이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접속하고 생산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소셜 미디어에 대한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매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관점을 배제한 채 무관심하고 초연한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 문화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주위에서 목격되는 다양한 소셜 미디어 이용행위를 몇 가지 유형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가능하며 각 유형의 문화적 의미를 그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욕망의 배치로 설명하였다.


    This paper explores the cultural phenomenon of social media in the light of desire theory. To do this, this paper adopts the perspective which consider social media in terms of the 'machine-human continuum' instead of as a 'subject (human) - object (Machine)' dualistic composition. The dualist focus on the function of the instrument on the base of 'Who', 'What', 'for what purpose' and 'by how' problematic. But the unitarist considers neither human nor machine without relationship. They see only process of production that are connected to it in terms of access to the unconscious desire. This approach is not by way of a particular interest in social media bounded to the perspective of the parties, but indifferent and detached perspective position. I intended to explain the cultural phenomenon of social media through Deleuze & Guattari's theory of desire.

  • KEYWORD

    소셜 미디어 , 욕망이론 , 도구 , 무기 , 국가기구 , 전쟁기계 , 유목적 삶

  • 1. 문제의 제기

    현대인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으며, 소셜 미디어의 이용이 이용자들에게는 어떤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이용자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또 사회는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가 사람들의 정보 접근성과 소통 능력을 높임으로써 사회참여의 기회 확대와 사회 민주화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최남수, 2010). 반면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는 현대인은, 알게 모르게 거대한 ‘디지털 통제 사회’ 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한다(한병철, 2014).

    사실, 모든 매체가 새로 등장할 때마다 그 매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 했다. 문자가 처음 등장할 때도 그랬고 인쇄된 책이 등장할 때도 그랬다. 따라서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따른 기대와 우려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식으로 평가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각각의 매체는 그 고유의 편향성으로 사람들의 사유방식과 사회체제 그리고 문명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고, 많은 매체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체 각각의 고유한 편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예컨대 이니스(Innis)는 그것을 시간편향성과 공간편향성에서 찾고자 했으며, 맥클루언(McLuhan)은 시각편향성과 청각편향성 등 감각편향성에서 찾고자 했다.

    본 논문 역시 기본적으로 매체철학의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의 의미를 고찰 해보고자 한다. 몰론 이러한 연구목적은 매우 막연하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용어 자체가 내포하는 모호성 때문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의미는 개인이나 집단의 문제일수 있고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 역사의 문제일 수 있다. 또 기술적 의미, 심리적 의미, 정책적 의미 등등 입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소셜 미디어의 의미를 논하기에 앞서 의미에 대해 본 논문이 취하는 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 논문이 취하는 것은 소셜 미디어 이용의 문화적 관점, 즉 문화적 의미에 대한 것이다. 문화적 관점 중에서도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 Guattari)의 기계적 욕망이론을 적용하여 소셜 미디어의 이용현상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매체철학자인 맥클루언도 이야기했듯이, 매체는 단순히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하는 당사자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 나아가 역사를 변화시키는 적극적 힘을 갖는다. 그러한 힘은 매체가 갖고 있는 단기적이고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힘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비가시적이며 간접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문화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인 힘의 특징은 저력(potential energy)이라는데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고사가 알려주듯이, 문화는 귤을 탱자로 바꾸어 놓는 숨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매체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체가 갖고 있는 그 숨은 힘의 성격과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매체환경인 소셜 미디어의 현실은 어떠한가? 2014년 1월 기준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 이용자 수 12억 명, 트위터 이용자수 약 2억3천 명 등 전 세계 약 30억 인구가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global digital statistics 2014). 한국에서도 싸이월드, 블로그를 시작으로 소셜 미디어가 계속 진화해 트위터, 페이스북 등으로 거듭 확장하고 있으며, 최근 천 만 이용자를 돌파한 카카오톡(kakaotalk)과 같은 모바일 메시징 서비스 역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매일 680만 명의 한국인이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주간경향. 2014. 02. 25).

    이제 소셜 미디어는 현대인들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커뮤니케이션의 주체와 내용을 변형시킨다는 것이다.1) 매체 환경이란 단순히 유기체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그릇이 아니다. 환경이 유기체를 변화시키고 또 유기체가 환경을 변화시키는 식으로 유기체와 환경은 서로 규정하면서 공진화한다. 이런 점에서 매체환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매체환경에 예속된 채로 일방적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체환경의 변화에 순응하여 따라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미세한 편차(clinamen)2) 를 유도함으로써 인간과 매체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의미가 있다.

    문화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매체는 단지 하나의 기술 혹은 기계가 아니다. 즉, 소셜 미디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소셜 미디어의 기술적 기능에 대한 규정을 넘어선다.3) 다시 말해서 소셜 미디어의 기술적 기능은 그것의 생산자가 의식적으로 정해놓은 용도이자 매뉴얼로서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소셜 미디어의 의미는 소셜 미디어의 등장 및 사용이 그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조직 그리고 사회전체에 미치는 '무의식적이고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뜻한다. 사실 인류의 많은 기계적 발명이 처음에 그것을 고안했던 의도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진화의 길을 갔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예컨대 재레드 다이아몬드(Diamond, Jared, 1998/2013)의 주장에 따르면 에디슨은 처음에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녹음하거나 시각 장애인을 위해 책을 녹음하고, 심지어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로 축음기를 발명했지만 나중에 축음기는 주로 음악을 재생하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 진화했다.

    한편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영향으로서의 의미(sense)는 개인 심리적인 내용을 갖는 의미(meaning)와 달리 어떤 주체의 의도나 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대상의 개념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전-개체적인) 사회적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메시지나 사물 혹은 사실과 같이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변용역량으로 정의되는 신체와 신체의 만남과 접속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상황변화 즉 국면(conjuncture)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전-의식적인) 역사적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개별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극단적으로 유기체로서의 인간학적 의미가 제거된 신체의 분자적 입자들의 자유운동에 의해 강밀도가 변주되는 기계적인 것(the machinic)이다.4)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러한 기계적인 의미가 곧 욕망의 다른 얼굴이라고 말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계적 욕망, 다른 말로 감응(affect)이라는 것이다5) . 감응, 그것은 인간과 동물은 물론 물질과 정신을 나누는 것도 무의미한 생명 에너지의 순환에 따르는 정서로서 들뢰즈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가 아니라 자연-인간 연속체의 구도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갖 형태의 오묘한 생명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그리고 식물들과 사귀는 마음을 갖는 것, 마치 꽃들이 달이 차고 이지러짐에 따라 대기를 빨아들이듯 꿈꾸듯 자연의 모든 것을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무한한 생성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Deleuze & Guattari, 1983. p.4). 거기엔 인간도 없고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접속하고 생산하는 과정, 즉 기계적인 욕망이 있을 뿐이다.

    결국 소셜 미디어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은 무의식적 욕망의 관점에서 소셜 미디어와 그 미디어 이용자 간의 상호 변용적 관계의 양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일찍이 쇼펜하우어(Schopenhauer)가 우리가 경험하는 표상의 세계는 기실 뒤편에 있는 맹목적 의지가 조화를 부린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처럼 비인칭적, 전개체적 존재로서의 기계적 욕망이 소셜 미디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탄생된 소셜 미디어가 사람들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일의적이지 않다. 욕망의 질에 따라 부정적이고, 파괴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일 수도 있다. 생명력을 신장시키고 삶을 기쁨과 행복의 정서로 채우는 방향으로 욕망이 배치되는 구도가 있는가 하면, 생명력을 위축시키고 삶을 슬픔과 불행의 정서로 채우는 방향으로 욕망이 배치되는 구도가 있을 수 있다.

    새로 등장하는 소셜 미디어는 인간관계의 유지 및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교사나 학생들에게는 교육 자료와 정보에의 접근성을 높여주며, 평범한 개인도 정치인이나 유명인사 못지않게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며, 빠른 정보 유통과 현장 중계를 통해서 긴급 상황 발생 시에 구호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소셜 미디어는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외면하게 만들고, 하찮은 활동에 시간을 낭비하게 하며, 어린이들의 두뇌와 행위에 영향을 미쳐 주의력결핍과 과잉행동장애(ADHD)를 유발하며, 이용자들을 각종 범죄자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으며, 거짓되고 위험한 정보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하게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소셜 미디어 그 자체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라는 하나의 욕망기계가 어떤 욕망의 질 즉,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도주의 선을 타는가 아니면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배치로 탈주의 선을 타는가 하는 욕망 배치의 양상이 문제다. 욕망은 국가나 자본의 일차적 관심사이다. 뿐만 아니라 욕망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과 모든 꿈꾸는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이들이 욕망을 바라보는 관점이 각각 다르고 또 욕망을 펼치는 양상이 서로 다르다. 즉 서로 다른 다양한 욕망의 배치가 존재한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소셜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가 형성하는 다양한 욕망적 배치 양태를 보여주면서 현대인들에게 소셜 미디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의 구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1)라투어(Bruno Latour)는 미디어가 인간 외부에 동떨어져 존재하는 독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연결되어 역동적으로 변이하고 있는 행위자(Actant)라고 한다. 김병선의 논문(2013). 189쪽 재인용.  2)‘클리나멘’은,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쓴 말로 원래는 '원자이탈'이란 뜻이다.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는 물체는 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운동은 '당연한 힘'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에 저항하며 멈춰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3)매체의 이용을 의미의 차원에서 숙고한다는 것은 문화연구의 핵심 포인트이다. 예컨대 문화연구가인 원용진은 소비란 의미 생성이라는 문화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원용진(1996),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35쪽 참조.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본 논문은 의미의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을 포괄하는 광의로 ‘의미’(sense)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의식적 차원의 의미에 대해 말할 때는 ‘의미’(meaning)라고 명기하고 있다.  4)의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스피노자의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에 대해 비판적인 스피노자는 모든 물체들이 고유한 법칙을 따르듯이,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따르는 기계와 같다. 물질의 운동이 있듯이, 사유의 운동이 존재하며, 그리하여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유의 운동이 나라는 개체에 표현되고 있는 것을 의미할 뿐, 주체로서의 ‘내’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입장을 발전시켜 사유의 본질을 정신적 자동기계(spiritual authomaton)라고 말한다. Deleuze(1989). cinema 2. p. 156.  5)감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창호(2014), 감응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이론』. 10권 2호. 참조.

    2. 소셜 미디어 문화현상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 매체에 대해 갖는 일차적 관심은 도대체 이 매체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매체의 기능을 가지고 그 매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예컨대 위키백과에서는 소셜 미디어에 대해 “개방, 참여, 공유의 가치로 요약되는 웹 2.0시대의 도래에 따라 소셜 네트워크의 기반 위에서 개인의 생각이나 의견, 경험, 정보 등을 서로 공유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생성 또는 확장시킬 수 있는 개방화된 온라인 플랫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이인희(2012)는 소셜 미디어를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ocial networking service, SNS)에 가입한 이용자들이 서로 정보와 의견을 공유하면서 대인관계망을 넓힐 수 있는 플랫폼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좀 더 부연해서 정의하면 TV, 신문, 잡지, 라디오 등과 같은 대중매체가 일대다(one-to-many)의 일방적 관계형에 기초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을 가진 반면 소셜 미디어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다양한 이용자들에 의해 생성되고 공유되는 다대다(many-to-many)의 쌍방향적 관계성을 토대로 하는 1인 미디어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소셜 미디어를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소셜 미디어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그 매체에 대해 갖는 또 다른 관심은 이 매체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관심은 새로운 매체가 바꾸어 놓는 세상에 발 빠르게 적응해야 할 긴급 성과 새로운 사회 변화의 흐름을 각자의 처지에서 이롭게 활용하고자 하는 생존욕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서는 강력한 정보망을 갖고 있는 소셜 미디어를 마케팅 전략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언론사들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의 참여와 협력을 끌어들여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이 사건사고의 현장에서 취재한 생생한 현장담이나 사진, 동영상 자료 등을 활용하고, 나아가 독자들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설진아. 2012). 또 정치인들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서 유권자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층을 정치에 참여시킬 수 있는 여러 방도에 대해 고민한다(금혜성. 2011).

    그런데 이러한 관심 혹은 접근은 소셜 미디어를 어떤 특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인 트위터는 PR, 마케팅, 광고 등 다양한 목적에 따라 기업에게는 유명인을 기용한 마케팅 도구가 되고, 유명인에게는 자신의 PR도구가 되며, 트위터 이용자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사의 기호와 특정 상품 브랜드를 파악할수 있는 강력한 검색 도구가 된다(심홍진, 2010). 이와 같이 소셜 미디어를 하나의 도구적 관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도구를 가지고 구체적인 어떤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입장은 소셜 미디어, 그 자체의 능력(virtuality, 존재론)보다는 그것의 수단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구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체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라는 구도 속에서 매체를 사유한다. 즉,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용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유용성이 있는지 하는 이해 타산적 관점에서 매체를 사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이용자와 관련된 정보 즉, 이용자들의 인구학적 속성이나 정치적, 심리적 특성 따위이고, 다음으로는 이용자들의 이용실태나 이용방식이다. 즉, 이용정도나 이용장소, 이용하는 서비스와 같이 이용자들이 실제로 매체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관한 정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사람들이 매체를 이용하는 목적(동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6)

    이처럼 매체를 도구적 관점에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라는 구도에서 수행하는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기대고 있는 대표적인 이론이 ‘이용과 충족의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은 매체이용자의 심리적 특성과 사회적 특성, 그리고 매체의 기능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용자들의 매체 선택 및 이용행위를 설명하는 유용한 틀이다. 이 패러다임은 매체 이용자들은 매체 이용의 특정한 욕구가 있고 그러한 욕구를 매체 이용을 통해서 충족시킨다는 논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양혜승•김진희•서미혜. 2012. 271쪽). 여기서 이러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욕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동기 (motivation)라는 개념이다. 즉, 매체 이용자는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특정 매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소비한다고 가정한다(심홍진‧황유선. 2010. 202쪽).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동기란 행동을 활성화하고 어떤 목표를 향하도록 행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욕구 또는 욕망이다(David-G Myers, 1998/2007. 254쪽). 물론 학자들마다 구체적인 관심에 따라 동기를 분류하는 방식도 다르고 동기 의 원인을 바라보는 입장도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행위를 개시하고, 선택하고 지속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어떤 학자들은 동기의 기원을 본능(instinct)이나 욕구(needs)와 같은 내부적 요인에서 찾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타인과의 관계나 명예심, 돈 그리고 성공의 보상(incentive) 따위의 외부적 요인에서 찾기도 한다. 그런데 동기의 원인을 본능이나 욕구와 같은 내적 요소나 보상과 처벌 같은 외적 요소에서 찾는 입장의 문제점은 동물의 동기와 다른 인간의 동기의 특성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이다.7)

    이점에서 ‘미국 인간주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슬로우(Maslow)는 동물적 분위기가 있는 동기라는 말보다는 동기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욕구(needs)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그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 단계로 나누어 욕구의 가장 낮은 단계인 ‘생리적 욕구’, 그 위로 ‘안전에 대한 욕구’, 그 다음은 ‘사회적 욕구’, ‘자존감에 대한 욕구’,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로 설명하고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은 인간 욕구의 다양한 측면, 즉 본능적 욕구나 생리적 욕구, 그리고 사회적 욕구 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8)

    그런데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은 철학적으로 보면 몇 가지 검토되어야할 사항들이 있다. 우선, 매슬로우는 동물과는 구분되는 인간의 심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인간주의 심리학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그의 이론에는 여전히 동물 심리 학의 그림자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욕구의 가장 낮은 단계인 ‘생리적 욕구’는 음식과 물을 먹고, 성관계를 갖고, 잠을 자며, 배설하는 등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사실상 본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윗 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 도 일차적으로는 추위나 질병, 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동물적 본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동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욕구와 인간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욕구를 이렇게 혼합시켜서 단계화시키는 것은 암암리에 그 역시 진화생물학의 전통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인간을 동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동물이 ‘같으면서 다른’ 지대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특한 인간의 위상을 심리이론의 관점에서 적절하게 반영한 이론으로서 라깡(Lacan)의 욕망이론을 들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라깡은 생물 학적인 욕구(needs)와 인간적인 요구(demand) 그리고 무의식적인 욕망(desire)을 개념적으로 구분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접면, 즉 인간과 동물의 ‘같으면서도 다른’(apart and together) 욕망에 대해 말한다. 그는 욕망을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어떠한 개인이 ‘인간의 자식’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점(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 그로 하여금 인간의 질서 아래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본다(이진경, 2006. 51쪽).

    라깡의 주장을 요약해서 말하면, 욕구(needs)는 생리적 차원의 것이고, 요구 (demand)는 인간의 의식적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욕망(desire)은 인간의 무의식적 차원의 것이다. 욕구가 생리적인 현상으로서 신체가 반응하는 충동(drive)이 라고 한다면, 요구는 신체적 충동이 언어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표출된 것이 고, 욕망은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간의 메울 수 없는 심연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적 소여의 욕구를 문화적으로 충족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생리적 욕구를 문화적으로 충족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동물적 존재가 인간적 존재로 성숙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에 관한 이론은 욕구의 차원이 아니라 욕망의 차원에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무의식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에 의식적 욕망이 있고 무의식적 욕망이 있는가? 사실 라깡이 무의식적 욕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Freud)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도 동물과 다름없는 본능적 욕망이 있으나 인간은 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이러한 욕망을 억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욕망 중에는 동물적 존재가 인간존재로, 자연적 존재가 문화적 존재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억압해야 할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문화 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욕망, 특히 성적 충동(drive)의 에너지가 억압되어 무의 식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렇게 금지된 욕망은 사회문화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어 무의식적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의 위대한 공헌이 무의식, 즉 욕망을 발견한 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Deleuze & Guattari. 1983, p.24). 그런데 그들은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이라는 것을 의식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즉, 의식이란 현재화한 기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고, 현재화하지 않는 기억은 곧 무의식이 된다는 것이다(황수영, 2006, 215쪽). 무의식이란 의식을 다른 의식으로 변환시키려는 욕망의 흐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자, 의식의 형태로 습관화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가타리에게 무의식은 우리가 해석해야 할 알 수 없는 어떤 증상이나 비현실적인 공상 내지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생산하고 변혁하는 문제이고, 또한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변환시키는 문제이다(이진경, 2002.167쪽).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은 의식적 욕망은 물론 무의식적 욕망도 아닌 기계적 욕망이다.

    기계적 욕망은 동물과 인간 심지어 물질과 같은 사물조차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계적 욕망은 인간과 동물, 식물, 사물, 기계 등등을 횡단하며 흐르는 일종의 생명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욕망은 어떤 모양이나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적인 객체가 갖고 있는 어떤 에너지라기보다는 이러 저러한 조건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할 수 있는 순수질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탈인간적인고 탈유기체적인 순수질료로서 기계적 욕망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란 바로 우리가 그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고,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 하는 수단이며, 그것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342).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기계적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의식적/무의식적인 구도가 아니라 현실적(the actual)/잠재적(the virtual)인 구도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현실적인 것은 흔히 욕망에 대한 상식적 이해로서, 예컨대 ‘주체와 대상’의 구도 속에서 파악되는 욕망-나는 밥을 먹고 싶다. 나는 여행을 가고 싶다 따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잠재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을 생산하고 변환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것의 모양과 기능을 끊임없이 어긋나게 하는 공백이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것을 재배열하는 창조적 공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인 것이란 프로이트가 비유적으로 설명한 빙산의 잠겨있는 나머지 부분, 즉 무의식과 달리 빙산을 감싸고 있는 바다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문화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를 욕망하는 이유에 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소셜 미디어 이용양태의 현실태와 잠재태의 지형을 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태와 잠재태는 마치 빙산과 바다와 같이 ‘서로 별개는 아니지만 구분되는’ 관계로 잠재태가 현실태를 감싸고 있다. 게다가 바다에 일정한 조건이 가해짐으로써 빙산의 형태가 정해지듯이 잠재성의 장에 문턱 (threshold)과 구배(gradient)가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현실태가 출현 한다.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심리를 다루는 것과 다르다. 그 심리가 내적인 본능에 따른 것이든 외적인 자극에 따른 것이든 심리는 결국 개인의 심리이다. 하지만 욕망은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 욕망에 내외의 구별은 없다. 그것은 마치 물결치는 바다가 지리적 조건과 열적 불균형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이러 저러한 조건에 따라 다양한 소셜 미디어 이용양태를 연출한다고 할 수 있다.

    6)예컨대, 권상희 등(2005), 김영주(2006), 김경희‧배진아(2006) 등은 블로그의 주 이용동기가 ‘사회상호적 동기’, ‘자아추구적 동기’, ‘정보추구 및 도피휴식적 동기’ 등임을 밝혔다. Bumgarner, B.(2007)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이용동기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혹은 오락과 관련된 기분전환’(diversion), ‘정체성 형성 및 표현과 관련된 개인적 표출’(personal expression), 사회관계망 확보 및 조직과 관련된 수집과 연결(collection and connection), 여러 상황에서 참조할 수 있는 디렉토리(directory), 관계 맺기, 다른 사람의 근황을 지켜보는 것과 관련된 관음증, 그리고 친구와의 사회 활동이나 특정 주제에 대한 대화와 연관된 사회적 유용성,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따라하기 (herd instinct) 등이 있음을 밝혔다. 심홍진‧황유선(2010)은 트위터의 이용동기로 ‘정보교환을 통한 사회이슈참여’,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팔로우어 그룹 형성’, ‘편리한 소통기능’, ‘정보전달의 용이성’, ‘휴식 및 오락’, ‘사적 기록 공간’, ‘140자 글쓰기의 유용성’, ‘트위터의 이용량에 따라 공적 미디어의 영역과 사적 미디어의 영역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음’ 등이 있음을 밝혔다.  7)사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서구의 대부분의 심리이론이 동물실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고전적 조건화이론을 제시한 파블로프(Pavlov)의 실험뿐만 아니라 손다이크(Thorndike), 스키너(Skinner) 등의 실험이 모두 동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8)이상 동기 및 매슬로우에 대한 내용은 Encyclopedia of Psychology(2000).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참조.

    3. 매체, 도구인가 무기인가

    김병선(2013)은 소셜 미디어의 계보 추적을 통해 소셜 미디어를 '이용자의 사회적 관계 유지 및 확장에 활용되는 미디어'로 규정한 바 있다(195 쪽).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여 이용자는 물리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손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으며, 또 이용자의 사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이용자가 ‘알 수도 있는’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추천된다. 그는 소셜 미디어의 이러한 기능을 중심으로 봤을 때, 페이스북 기술은 이용자들 간의 상호적 관계를 목적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가 관계 맺기의 과정을 자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트위터와 같은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는 사회적 친분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팔로워(Follower)를 늘임으로써 이용자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데 주로 활용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트위터는 일반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 유지가 아니라 유명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폭시키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200 쪽). 누군가가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려면 지지자 들을 끌어 모아야 되고, 또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려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개장이 필요하다. 트위터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마이 크로-블로그의 내용이 되는 블로그(Blog)가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PC통신의 BBS(Bulletin Board System), 그리고 90년대 중반 등장한 웹(World Wide Web)환경에서의 게시판이 진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블로그와 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공적인 토론 사이트를 표방하고 있는 <다음 아고라>나 <네이트 판>과 같은 포털 사이트 서비스 역시 80년대 초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등장한 <대자보>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한다.

    소셜 미디어가 주로 사회적 친분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한, 또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대중매체의 이용 동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중매체는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이해된 것이 사실이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언론의 기능은 정확한 정보를 대중에게 신속히 전달함으로써 올바른 여론형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물론 부가적으로 오락제공이나 사회유산의 전수 기능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정보를 대중에게 전함으로써 대중이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궁극적으로 국민의 일반의지가 반영된 민주국가를 건설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중매체는 비공식적인 국가기구인 셈이고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정확성이나 신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소셜 미디어는 전혀 국가기구가 아니다. 따라서 대중매체에 있는 언론의 사명과 같은 것이 소셜 미디어에는 전혀 없다. 물론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정보추구의 수단이나 편리한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병선이 주장했듯이 소셜 미디어의 주요 기능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구축을 통한 인맥 쌓기와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의 정확성이나 신뢰성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소셜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9) .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맺고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 정보(메시지)를 추구하거나 전달함으로써 의사소통 하려는 욕망과 인맥을 쌓고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려는 욕망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를 검토함에 있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유용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했는데, ‘포획과 통제의 욕망’과 ‘탈주와 자유의 욕망’이 그것이다. 포획과 통제의 욕망이 무방향적이고, 불규칙하며, 혼돈스러운 리비도적 욕망의 흐름에 어떤 방향을 부여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특정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조직하는 욕망이라면 탈주와 자유의 욕망은 주체나 법, 제도 등 일체의 초월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실행되는 생명의 흐름이며 생산하는 힘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욕망에 대해 각각 국가기구(State apparatus)와 전쟁기계(war machine)를 할당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기구는 ‘마술 사-왕’과 ‘판관-사제’라는 서로 대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두 개의 머리 혹은 극을 갖는데, 이들은 각각 ‘외눈박이 인간’(One-Eyed men)이자 ‘외팔이 인간’(One-Armed men)으로서 언제나 결핍된 자신의 반쪽을 열망하는 배고픈 존재이자 불구자들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 424). 마술사-왕이 무기 없이 마법적으로 포획하는 방식으로 욕망의 흐름을 하나로 묵는 자이자 포섭하는 자라면, 판관-사제는 욕망의 흐름을 국가 기구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입법자 이자 거대한 조직자이다. 이 두 극이 연합해서 법, 제도, 규정과 같은 내부성의 형식(form of interiority)으로 욕망의 흐름을 포획하고 제도한다.

    반면 전쟁기계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선을 그리는 욕망의 배치를 말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외부를 만나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변용하면서 창조적 모험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욕망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국가기구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전쟁기계를 뜻한다. 이러한 전쟁기계는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아무런 동일성도 없이 이웃항과의 연결 접속의 양상에 따라 그리고 연속되는 사건들의 계열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는 무규정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외부성의 형식(form of exteriority)을 갖는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360).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내부성의 형식으로 말미암아 국가기구라는 욕망의 배치 속에서 기술은 일종의 도구(tool)가 되고, 전쟁기계의 배치 속에서는 외부성의 형식으로 말미암아 무기(weapon)가 된다고 말한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기술이 그 자체의 내재적인(intrinsic) 속성에 의해 도구나 무기로 엄격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즉 도구의 본질 혹은 무기의 본질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도구나 무기가 그것의 외재적인 (extrinsic) 용도 - 예컨대 인간을 살상하느냐 아니면 재화를 생산하느냐 -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Deleuze & Guattari. 1987, p.395).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구와 무기는 많은 내적인(internal) 차이를 갖는다고 주장한다.10)

    우선, 무기는 투사(projection)와 도구는 내사(introjective)와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밖으로 던지거나 던져지는 것은 전부 무기로서 무기의 본질은 추진의 순간에 나타난다. 투사의 메카니즘을 포함하면 할수록 하나의 도구는 점점 무기처럼 작용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395). 반면에 도구는 기본적으로 내사적이어서 물질을 균형 상태로 이끌며, 자신이 갖고 있는 투사 메커니즘 조차 계속해서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거나 다른 목적에 맞게 적응 시키려 한다. 거리를 둔 행위는 무기와 도구에 모두 존재하지만 무기의 경우에는 원심적인 반면, 도구의 경우에는 구심적이다. 또 도구는 극복 또는 이용해야 할 저항에 직면하는 반면 무기는 반격에 직면해 이를 피하거나 새로운 것을 창안 한다.

    또한 무기와 도구는 운동이나 속도와 경향적으로 사로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릴리오(P. Virilio)의 주장을 수용하여 무기가 속도 (speed)를 필수 성분으로 갖고 있는 반면, 도구는 중력(gravity)을 이겨내는 것을 필수 성분으로 갖는다고 말한다. 어떤 물건이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대상이 갖고 있는 강도나 중력의 저항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도구는 쓸모없는 것이 되 버린다. 반면 던지거나 쏘는 무기에서 속도는 결정적이다. 던지는 것은 속도 때문이며, 만약 속도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건네주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운동(이동)이 빨라진다고 속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이동)은 연장적(extensive)이고 속도는 강도적(intensive)이다. 또 운동(이동)이 외파적(explosive)이라면 속도는 내파적(implosive)이다. 운동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선형적으로 옮겨가는 상대적 속도라면, 속도는 공간상의 두 지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의 궤적상의 매 순간속도에 따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예측이 불가능한 소용돌이 운동 혹은 회전 운동은 본질적으로 무기에 속하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381).

    뿐만 아니라 도구가 이동과 관련되어 있고 무기가 속도와 관련되어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도구는 노동(work)과 관련되어 있고 무기는 자유행동(free action) 과 관련되어 있다(Deleuze & Guattari. 1987, p.397). 맥클루언의 표현방식으로 말한다면 도구는 임금노동(labour)과 관련되어 있고 무기는 자유노동(work)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이란 저항에 부딪치면서 외부에 작용해 결과를 창출하고 소비 또는 소진되는 동력원으로서 매 순간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 반면 자유행동은 극복해야 하는 저항에 부딪치는 일도 없으며, 오직 동력 자체에만 작용하며, 따라서 결과를 창출하기 위해 소진되는 일이 없는 연속적인 동력원이다. 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임금노동은 임금을 주는 중심에 언제나 종속되어 있는 언젠가 끝내야 할 고통스런 일정인 반면에 자유노동은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끝없는 열정이다.

    무기의 일차적 목적은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 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틈을 내고 적진을 무너뜨려 새로운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기가 함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움을 구속하고 감금하는 금기, 울타리, 제도 등등의 홈 패인 공간(striated space)에 구멍을 내고 이를 내파시킴으로써 매끈한 공간(smooth space)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의 목적은 물론 이렇게 매끈한 공간을 만드는 것 그 자체는 아니다. 전사는 이렇게 매끈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구축한다. 영토화와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의 끝없는 반복과 차이 가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도구와 무기는 절대적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도구가 무기로 쓰일 수 있고, 역으로 무기가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한 다면 무기적 요소와 도구적 요소는 혼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체의 속도가 가속할수록 매체는 무기로 변해 간다. 매체의 속도는 단순히 계량기 상에 나타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매체에 IT기술이 접목되면서 각종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졌는데, 이러한 속도 또한 매체를 무기화하는 요소이다. 현대인들은 각종 전자기기가 장착된 매체를 무기로 삼고 다양한 전쟁을 치루며 살아가고 있다. 각종 무술에서 발차기의 속도를 익힘으로써 발이 중요한 무기가 되는 것처럼 발의 연장으로써 매체 역시 속도를 얻으면서 무기가 되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395).

    환언하면, 도구가 노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이 도구를 규정한다. 즉 도구는 노동을 전제한다. 기술적 요소(technical element)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배치물과 관련되지 않는 한 추상적일 뿐이며, 전혀 무규정적인 것으로 그치고 만다. 기술적 요소보다 우선하는 것은 기계(machine)이다. 마찬 가지로 도구나 무기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배치(assemblage)이다. 기술적 요소들의 집합인 기술적 기계가 아니라 사회적 또는 집단적 기계, 즉 특정한 시기에 무엇이 기술적 요소인가, 용도와 내용과 적용 범위는 어떠한가를 규정하는 기계적 배치물이 중요한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398). 따라서 무기나 도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이것들이 전제하고 또 진입하는 구성적 배치물들을 먼저 규정해야 한다.

    9)트위터 비즈니스 컨설7턴트인 신호철은 SNS의 유형을 1)지식 공유형, 2)인생 공유형, 3)인맥 구축형, 4)커뮤니티 구축형 등으로 분류했다. 신호철. 『트위터비즈니스』, 아라크네. 2010.  10)들뢰즈‧가타리는 무기와 도구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방향(투사-내향), 벡터(속도-중력), 모델(자유로운 활동-노동), 표현(보석-기호), 정념이나 욕망의 음조(감응-감정). Deleuze & Guattari. 1987, p.402.

    4. 수목형 배치와 리좀형 배치

    배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고 접합하는 양상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배치에 대해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추출되고 선별되어 어떤 일관 성있는 방식으로 수렴되는 욕망의 질적 특이성과 표현의 특질의 성좌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406). 다양한 배치가 욕망을 절단하고 접합하는 다양한 선 즉, 분할선, 절속선, 영토화의 선, 지층화의 선, 탈주선, 탈영토화의 선, 탈지층화의 선 등등의 선과 그 선위를 달리는 흐름의 서로 다른 속도들이 어울려 만들어진다(Deleuze & Guattari. 1987, p.4).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배치를 크게 수목형 배치와 리좀형 배치로 나눈다. 수목적 배치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즉, 대립물의 통합형식인 하나-둘의 공식을 따라 욕망을 배치하는 체계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352). 예컨대 대표적인 대립물의 통합형식의 하나인 흑백논리에 따를 때 흑과 백은 대립하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보완적 관계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흑이 백으로, 혹은 백이 흑으로 변화하는 되기(becoming)나 생성, 창조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런 수목적 배치에서는 그 배치가 아무리 분화하고 발전하더라도 하나가 둘이 되고, 그 둘이 다시 각각 둘이 되는 과정이 되풀이될 뿐이다.

    반면 리좀적 배치란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처럼 수평으로 자라면서 덩굴들을 뻗고 그것이 새로운 식물로 자라나는 배치를 말한다. 수목형 배치의 이항적 가지치기의 배치와 달리 어떤 통일적인 중심이나 깊이가 없이 불연속적인 표면에서 증식하는 뿌리들의 망이다. 각각의 식물은 독립적으로 분절된 가운데 다른 식물들에 연결되어 때로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하는 방식으로 접속(connection)하고, 때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것이든 저것이든’하는 방식으로 이접(disjunction)하고, 또 때로는 ‘그리하여’하는 방식으로 통접(conjunction)하는 동적인 네트워킹이다. 리좀적 배치에서는 어떤 ‘상태’(state)들의 이항적 배분의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수목적 배치와 달리 상태들 사이, 중간 혹은 과정의 창조성에 주목하고, 그 과정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성능력을 가능한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목형 배치와 리좀형 배치를 욕망의 문제와 결부해서 생각해 보면, 수목형 배치의 욕망은 불구적 욕망이자 결핍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항대립의 관계에서 각 항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이항대립의 관계에서 각 항은 명료하고 선명한 분할선으로 나뉘어져 있음과 동시에 서로의 항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이 실선의 가름에 의해 포용되지 못하는 욕망의 지대는 폭력적으로 잘려나간다. 다시 말해 수목형 배치는 이와 같은 하나-둘의 메커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결핍의 욕망을 생산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조작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목형 배치가 제공하는 보상의 체제에 경쟁적으로 합류한다.11) 그리고 이 경쟁은 복종해야 할 중심이 없는 자유경쟁이 아니라 모든 욕망은 결국 중앙집중적인 권력으로 합류하게 되는 충성경쟁이 된다.

    한편, 이러한 수목형 배치에서 욕망에 대한 인간의 정서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쾌락/고통의 원리이다. 기본적으로 충성경쟁은 나의 승리는 상대의 패배가 되는 제로섬게임이다. 승리자에게는 쾌락이 보상으로 돌아가고 패배자에게는 고통이 보상으로 배분된다. 경쟁에서 상을 줄 만한 공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고, 죄과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신상필벌의 엄정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에 따라 욕망은 통제되고 관리된다. 뿐만 아니라 승리의 그 날을 위해서 현재의 욕망은 금지되고 억압되어야 한다. 아니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고 지연되기 때문에 수목형 배치 안에서 욕망은 철저히 부정, 통제, 억압, 지연 그리고 금욕의 대상이 된다.

    반면 리좀형 배치에서 욕망은 생산적이고 자유롭다. 들뢰즈‧가타리는 “생명 속에 가장 깊이 침잠하여, 생명 그대로 살고, 생명 자체였던 사람들은 거의 먹지도 않았고, 거의 자지도 않았으며, 재산을 가졌다 해도 아주 적게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는 밀러(H. Miller)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욕망은 그 순수한 모습에서 결핍이나 결여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Deleuze & Guattari. 1983, p.27). 그것은 우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변혁하고 또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고자 노력하는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적 흐름, 즉 욕망 기계이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고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며 (부유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리좀형 배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을,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탈주선을 그리는 욕망의 배치이다.

    한편, 이러한 리좀형 배치에서 욕망에 대한 인간의 정서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기쁨/슬픔의 원리이다. 수목형 배치에서 경쟁하고 비교하는 욕망과 달리 리좀형 배치에서의 자유롭고 절대적인 욕망의 순수한 모습은 자기 보존에 있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순수한 모습은 이런 자기 보존의 능력을 키우고 강화 하는데 있기 때문에 욕망이 외부와 접촉할 때 그 접촉이 자신의 능력을 강화 하는데 기여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가에 따라 정서의 질도 달라진다. 들뢰즈‧가타리는 스피노자의 주장에 따라 능력을 강화하는 접촉에서는 기쁨(joy)의 정동이, 반대로 능력을 약화시키는 접촉에서는 슬픔(sorrow)의 정동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리좀적 배치에서 생산은 결코 욕구의 결핍이나 결여를 기초로 해서 조직되지 않는다(Deleuze & Guattari. 1983, p.28). 오히려 결여는 사회적 생산을 통해서, 사회적 생산 속에서 창조되고, 계획되고 조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결여의 의도적인 창조는 시장경제의 기능이고, 이는 지배계급의 기술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28).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능력은 풍요한 가운데서 끊임없이 결핍이나 욕구 즉, 일찍이 마르쿠제(Marcuse. 1964)가 갈파했던 허위 욕구(false desire)를 만들어 내는데 있다. 자본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마치 인간의 본능 이나 되는 것처럼 욕구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지도 모른 다는 위기감을 조성하고 이를 제물로 각종 상품을 만들어낸다. 즉 환상적 욕구의 창출이 곧 시장이다. 반면에 리좀적 배치에서 욕망은 환상이 아니다. 욕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가 생산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원하고 실현시키는 욕망에 대해 절정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며, 어떤 외적 종결에 의해 중단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지속적인 강밀도의 지역이요, 어떠한 가시적인 형상이나 형태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질료적(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96). 그것은 끊임없이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 새로운 이웃 지대에 이르고자 하나 끝내 이를 수 없는 극한(limit)이라는 점에서 긴장을 그 속성으로 한다. 또한 그것은 여러 힘들이 밀고 당기는 장(field)으로서, 그 장에서 강밀도의 분포와 배분에 따라 때로는 그것이 기관(organs)이 되고 때로는 그것이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가 되기도 한다.12)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의 최대치로서의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 혹은 일관성의 평면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들 배치는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는 선의 성격 즉, 선의 등급이나 농도에 따라, 그리고 이들 선들이 일관성의 평면에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4). 예컨대, 같은 수목형 배치에서도 전형적인 하나-둘의 공식이 적용되는 나무형 배치(dichotomous root)가 있는가 하면, 뿌리나 잎이 마치 한군데에서 나온 것처럼 무더기로 나오는 총생뿌리(radicle)형 배치가 있다. 총생뿌리형 배치는 본 뿌리는 퇴화되고, 그 자리에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 형태다. 비록 본 뿌리는 퇴화되었지만 뿌리의 통일성은 가능성으로 여전히 존재 한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는 형태이다.

    반면 리좀형 배치 역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리좀형 배치에서 욕망은 기본적으로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할 수 있는데,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기관 없는 신체는 두 가지 얼굴을 갖는다(Deleuze & Guattari. 1987, pp. 201~202). 한 가지 얼굴은 욕망에 따라 속성을 달리하는 기관 없는 신체들이 하나의 충만한 내재성의 장을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긍정적인 기관 없는 신체, 즉 충만한 신체이고 다른 또 하나의 얼굴은 창조와 생성이 아니라 지배와 파괴, 파멸,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기관 없는 신체이다. 첫째 긍정적인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충만한 신체는 욕망의 긍정적이고 내재적인 장을 다양하게 펼쳐가는 생산적인 능력을 갖춘 그런 신체를 뜻한다. 그것은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로서 무엇보다도 다양한 잠재성을 가진 신체이다,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규정성, 다양한 양상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기관 없는 신체로서 그것은 수용하거나 포용할 수 있는 이질성의 폭이 매우 큰 신체이며, 스스로 펼쳐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웃 항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관대한 신체이다.

    둘째 부정적인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욕망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텅 빈 신체’와 ‘암적인 신체’를 제시한다. 이 신체는 수목형 배치의 유기적 신체의 배면을 이루고 있는 신체로서, 유기적 신체의 규율과 폭력성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무능력한 신체 혹은 이에 저항하고 복수를 염원하는 병든 신체이다. 텅 빈 신체는 욕망의 흐름을 가두고 이를 고정시키는 일체의 벽이나 형상을 파괴해 버렸지만 어떤 다른 양상으로도 펼쳐질 능력, 즉 변용능력을 소진한 신체이다. 그것은 텅 빈 만큼 빈약하고 빈곤한 신체이며, 따라서 다가오는 이 웃 항들에게 나누어줄 것도 없고, 다가오는 이웃 항들의 이질성을 담아내고 수용할 폭이 극소화된 신체이다. 예컨대 기관들은 이미 파괴되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울증의 신체가 이런 신체이다.

    그리고 암적인 신체란 벽이나 형상을 파괴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며, 모든 기관을 유기체의 기관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기관으로 대체하는 신체를 말한다. 그것은 텅 빈 신체와 달리 무능력한 신체가 아니라, 강력한 파괴능 력을 갖고 있는 부정적인 신체이며, 이웃 항들을 끌어 들여 자신의 일부로 만들면서 서로의 파괴능력을 키워가는 신체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163).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암적인 신체로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배자의 편이 아니라 항상 소수자의 편에서는 것, 순수가 아니라 언제나 잡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 379). 수목형 배치의 유기적 조직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불평과 불만, 피해의식에 물든 저항적 주체로서 사상적 순수성이나 지배를 지향할 때,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북한정권의 사례와 같이) 그 신체는 암적인 신체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11)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하고 또 그 결핍을 메꾸어줄 상품을 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핍을 생산하는 메카니즘은 바로 (상대적인) 비교다. 이 점에 있어서 국가기구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인력을 충원하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탈락자를 양성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12)들뢰즈에게 신체(the body)란 어떤 힘들의 장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신체(human body)에 대해서는 물론 사회에도 적용하여 사회체(social body)를 생각할 수 있다. 신체로서의 장은 여러 영역(region)과 경로, 전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5. 소셜 미디어와 다양한 욕망의 배치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스피노자(Spinoza)는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종(種)이나 유(類)라는 범주를 통해서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보편 개념’(universal concept)을 통한 인식과 형태나 기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신체 부분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의 체계를 고려한 ‘공통관념’(notion commune)을 통한 인식이 그것이다. 보편 개념을 추구하는 틀은 ‘동일성’의 지반에서 사물들의 구체적인 차이를 ‘추상적으로’ 결합시켜 구체성을 배제한다. 예컨대 보편 개념은 말과 소를 구분하고, 말의 경우에도 일하는 말이나 경주용 말을 모두 똑 같이 말이라고 본다. 그러나 공통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일하는 말과 경주용 말 사이에는 소와 일하는 말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경주용 말과 일하는 말을 전혀 다르게 분류하는 이유가 각기 서로 다른 감응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Deleuze, 2003/2012, 64쪽).

    욕망의 배치, 이는 달리 말하면 이와 같은 감응적 관계의 양상을 말한다.13) 욕망하는 신체가 순수한 질료적 흐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질량이 곧 에너지요 에너지가 곧 질량’(E=mc2)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들뢰즈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신체(身)는 물론 말(口)과 생각(意)조 차도 에너지(業)이다. 바꿔 말하면 이 세계는 여러 힘들이 밀고 당기는 전자 기적 장(electromagnetic field)으로서, 욕망은 파동(wave)의 형태로 퍼져 나간다고할 수 있다. 결국 미디어를 배치의 문제로 검토한다는 것은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과 그 성질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앞서 살폈던 수목형 배치나 리좀형 배치 등등은 에너지 흐름의 대표적인 양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전통적인 대중매체의 커뮤니케이션 욕망은 대표적인 수목형 배치인 국가기구(장치)에 의해 포획되어 있다. 국가기구라는 배치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욕망은 ‘하나-둘’이라는 이항대립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어지는 홈을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근대 국가의 언론자유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던 밀턴(Milton)이 이야기했듯이, 근대 국가는 참/거짓, 진실/위선, 좋음/나쁨, 정의/불의와 같은 선명한 분할선에서 자유롭게 경쟁했을 때 결국 진리, 진실, 선, 정의가 승리하게 되어있다는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근대 국가는 커뮤니케이션이 과정에서 숫한 오해와 곡해, 잡음과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전달하고, 공유하며, 설득하고, 합의하며,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근대국가에서 대중매체는 얼핏 보면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권력의 제4부라는 것이다. 대중매체의 대표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환경감시기능이라는 것도 정부와 적대적으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균형과 견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알뛰세(Althusser. 1970)는 대중매체를 국가기구, 특히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주장한 바 있다(p.142). 알뛰세에 따르면, 국가는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나뉠 수 있는데, 대중매체는 교회, 교육기관, 가정, 법률기구, 정치 단체, 노동 단체, 예술, 스포츠 등과 더불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속한다. 대중매체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와 달리 일상성과 편재성 그리고 반복성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억압을 정당화하고, 지배계급의 특수이익을 일반이익으로 위장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창출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중매체와 달리 시작도 끝도 없이 복잡한 미로처럼 얽힌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리좀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트워크 조직으로 되어 있는 복잡한 연결망에서 커뮤니케이션 욕망은 사방 어디로도 흘러갈 수 있고, 욕망의 흐름이 새로운 분기점을 만나 분화되기도 하고, 또 여러 욕망의 흐름이 만나 융합하기도 한다. 이 커뮤니케이션 욕망의 흐름은 무엇보다도 ‘하나-둘’이라는 이항대립 메카니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닌’(不二) 논리 즉, 사이(between)의 존재 론에 따르기 때문에 국가기구의 포획을 빠져나가는 특징이 있다.14) 예컨대 참과 거짓은 하나가 아니지만 둘도 아닌 관계, 환언해서 참과 거짓은 같은 것이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닌 관계가 된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리좀형 배치의 전쟁기계는 국가기구와 외부적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긍정과 부정의 사이, 낮과 밤의 사이, 삶과 죽음의 사이 등등 일체의 이항적 구도를 거부하는 전쟁기계로서 무기는 무엇보다도 이항의 상식(공통감) 혹은 진실을 파괴하는 능력, 즉 거짓의 역량을 갖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상식 혹은 진실은 재현 혹은 동일성의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15)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상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A = A'라는 동일률과 ‘A ≠ non A'라는 모순률, 그리고 ’A = A 이거나 non A'라는 배중률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식의 논리에 따를 때, 살고자 하는 이는 살고 죽고자 하는 이는 죽게 된다. 그러나 기호의 세계에 시간의 범주가 개입하여 ‘x = dx’가 되는 차이의 논리에 따르면, 살고자 하는 이는 죽고 죽고자 하는 이는 살게 된다.16)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살고자 하는 이는 살 수도 있지만 죽을 확률이 높고, 죽고자 하는 이는 죽을 수도 있지만 살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잠재적 차원을 감지할 수 있는 미세 지각(micro-perception)을 하게 되면 그 실상은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지각불가능, 규정불가능, 식별불가능한 지대를 만나게 되는데, 상식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거짓의 역량이 된다.

    사실, 소셜 미디어는 엄청난 거짓의 역량을 갖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세월호 사건은 소셜 미디어가 갖고 있는 거짓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문과 방송 등 전통적인 대중 매체는 “탑승객 477명 중 368명을 구조했다”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발표를 단순히 받아 쓴 기사를 보도했다. 그리고 17일에는 산소공급장치가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SBS가 “해경은 아침 7시 정도부터 전문업체가 세월호 선체에 산소공급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18일에는 YTN을 포함해서 다른 언론들이 “잠수부들이 선내 진입에 성공했다”는 보도를 쏟아 내기도 했었는데 중대본이 곧바로 “선내진입이 성공한 게 아니라 실패했 다”고 발표하자 정정 보도를 했다. 이 외에도 이번 사건에서 중대본은 재난상 황을 통제하기 위해 수시로 뉴스 브리핑을 했고, 대중매체는 이 사건이 가져올 사회적 혼란과 사실 보도 사이에서 보도 수위를 조절하는 게이트키핑을 충실히 했는데 이것이 대중매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만약 소셜 미디어가 없었다면 무난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국민들은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진실로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대중매체가 내보내는 침몰하는 세월호의 조용한 바깥모습과 달리 세월호 속에 있는 학생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불안하고, 안타깝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배안의 진실을 촬영해서 바깥 가족들에게 내보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체육관을 찾았을 때 지상파 방송에서는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여 유족들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지시하는 등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현장에서 찍어 올린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2014. 4. 17)에는 유가족들의 비난과 분노가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의 조문 영상에서도 MBC, KBS 등 지상파 방송들은 차분하고 경건하게 조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유튜브에 올라 있는 ‘박근혜 대통령 조문 실제 장면’(2014. 4. 30)이라는 영상에서는 유가족들의 야유와 고성이 쏟아졌다.

    ‘진도체육관실종자 어머니 인터뷰1’라는 한 유튜부 동영상(2014. 4. 17)의 한 실종자 가족의 어머니는 대중매체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다음과 같이 표출하고 있다. “제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편집 하나도 안 하구요. 그대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싶구요. 생방송 아니면 나 안 하려고 했는데, 나갈 수가 없으니까 지금 이런 거 하는 거예요. .. 지금 제일 답답한 건 지금 저기 방송 나가는 것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저 지금 이틀간 조용히 있다가 도저히 못 참아서 삼일 째 하는 건데, 저기 지금 방송 나가나는 것 저희 엄마들 저기서 앉아가지고 전부다 저거 보고 믿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근대 지금 저기 나가는 건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다 필요 없어요. 저거 도대체 누구 위해 나가는 거예요?...” 방송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이냐는 이 어머니의 절규는 국가기구로서의 방송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약간 다른 형식이지만 또 다른 소셜 미디어로 팟 캐스트인 <뉴스타파>의 2014년 5월 2일자 방송분 “세월호 선장이나 보도국장이나 똑 같다”에서는 세 월호 참사의 유족인 박종대씨의 인터뷰를 내 보냈다. 그 역시 방송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더불어 유언비어의 유포를 근거로 한 소셜 미디어 처벌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번 사건은 시작에서부터 시작하는 날 아주 하루 종일 거짓말을 했고, 구조하는 날 밤새도록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정부가) 카톡이라든가 그런 것은 유언비어라든가 허위 사실 유포로 해가지고 처벌하는 것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카톡에 대한 부분을 처벌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전에 허위 또는 오보를 한 언론부터 처벌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국가기구 로서의 대중매체의 허위성에 대한 적대감과 더불어 전쟁기계로서의 소셜미디어가 갖고 있는 거짓의 역량에 대한 옹호가 잘 드러나고 있다.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대중매체에서 취재의 방향과 보도의 상식을 유지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한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 진실을 가리는 거짓 장치 혹은 보도 통제로 둔갑했다. 사고 초기의 잇따른 오보와 현장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편향된 보도, 그리고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보도로 참사 현장에서 외면당하고 거부당하고 기레기(기자 쓰레기의 준말)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던 입사한지 1~2년 밖에 안 된 방송사의 신참내기 기자들이 마침내 방송의 베테랑 간부들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현장의 기자들은 현장의 유가족들의 요구와 의견을 받아서 취재해서 방송에 내보내고자 했으나, 본부의 간부들은 ‘가족들이 격앙돼 있으니까 그 얘기는 온전히 받을 수 없다’고 편집할 것을 지시했다. KBS보도국장은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들에게 검은 옷을 입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고 KBS 언론노조가 폭로했고, MBC보도국장은 유가 족이 우는 장면은 보도화면에 사용하지 말라는 압력을 행사했다고 MBC 언론 노조가 폭로했다. 이 모든 사례가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대중매체가 직면한 게이트키핑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지금까지 대중매체가 무시하거나 외면했던 현실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대중매체처럼 신문지면이나 방송시간의 제약, 뉴스의 생명선이라고할 수 있는 마감시간(deadline)과 같은 명료한 분할선에 의해 뉴스가 취사선택 되는 것이 아니라 길이도 다르고 형식도 다른 현실의 다양한 파편적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우리 주위를 선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이미지가 보여주는 세계는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좌표화 가능한 원거리(medium shot) 이미지의 세 계가 아니라 좌표화가 불가능한 근거리(close-up shot) 이미지의 세계이다. 그러한 근거리 이미지의 미시세계에서 상식은 깨어지고,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분할선은 사라진다.

    앞서도 보았듯이, 리좀형 배치에서 전쟁기계는 의미작용과 무관하고, 의식적 주체의 의지와도 무관하기 때문에 허무주의(nihilism)의 정조가 있다. 선/악, 정/사, 미/추 등등의 모든 이항적 구분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유의미한 세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리고 순응이나 저항 혹은 변혁적 행위의 원인담지자로서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에는 행위의 주체도 행위의 방향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와 같이 리좀형 배치에서 전쟁기계가 일체의 전망을 잃은 채 자신의 변용은 물론 이웃을 변용시킬 의욕도 능력도 상실한 무기력(impotence)한 신체를 텅 빈 신체로 표현했다. 이를 소셜 미디어에 적용해 볼 경우 이용자가 소셜 미디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벗어났으나 그것이 탈주를 위한 무기로 전환되지 못하고 현실도피적인 도주의 선을 타면서 심한 경우 오히려 소셜 미디어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텅 빈 신체란 기본적으로 무기력한 신체이며 소모적인 병리적 신체라고 할수 있다. 예컨대 오프라인세계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온라인 세계에 집착하는 경우나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과도하게 민감한 나머지 심한 우울증을 겪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흔히 소셜 미디어는 자주 만나기 힘든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친구의 친구로 인간관계의 폭도 넓힐 수 있어 사람들의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페이스북에 있는 댓글이나 ‘좋아요’ 추천 버튼은 정서적 공감을 바라는 이용자 들의 감성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소셜 미디어가 현대인들의 외로움이나 우울 증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양혜승 등(2012)이 밝힌 바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페이스북 이용 행위가 사회적 지지 인식을 강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적 지지 인식을 저해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91쪽).

    자신이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있다는 감정은 그 자체로 치유 받아야 할 감정이다. 사회적 지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 ‘공감-지지’ 의 느낌을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하나의 집착 현상으로서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유아기 아이의 엄마의 정서적 공감과 지지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소셜 미디어 이용자는 자신이 주도가 되어 소셜 미디어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신체가 되어 소셜 미디어에 끌려간다. 이와 같은 텅 빈 신체의 극단적 사례로 소셜 미디어 중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것인데, 미디어 중독이란 “사람들이 미디어에 의존해 상대적으로 자주 사용하고, 내성이 생겨 이용시간이 늘어나며, 이용하지 않을 때에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는 강박적 심리로, 개인의 내외적 활동에 장애를 유발하는 것”을 말한다(김형지 외. 2012. 59쪽). 다시 말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반복 이용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지나치게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번번이 스마트폰을 계속 이용하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 골치 아픈 생각을 잊기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 한다“ 등등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개발한 스마트폰 중독척도(KS)를 구성하는 항목들을 보면, 미디어 중독척도란 결국 미디어 이용자들의 무능력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리좀형 배치의 전쟁기계가 빠지기 쉬운 두 번째 유형의 위험이 있다. 즉 암적인 신체이다. 이 신체는 수목형 배치의 한 축인 ‘하나-둘’의 원리가 반복하면서 증식되는 의미작용의 순환적 고리를 부수고 탈주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구의 또 다른 한 축, 즉 주체화의 축을 고집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종속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주체화의 함정은 자신의 고유성 혹은 유일 성을 내세움에 따른 주위와의 갈등과 대결, 그리고 불협화, 즉 배반이다. 주체 화를 통해서 신체는 국가기구에 대항하면서도 새로운 중심을 세우고 저항세력을 규합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한 중심을 어떤 법률적, 제도적 장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중의 분노와 적개심이라는 정념(passion)에 기대어 세운다. 그것은 또한 수난의 길이기도 하다. 이 탈주선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색깔로 채색된 채 국가기구에 저항하는 가운데 극단적으로 희생양이 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는 ‘정념적 주체화의 직선’ 혹은 ‘권위적인 정념적 체제’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24). 그것은 바로 소셜 미디어의 전쟁기계가 기관 없는 신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암적인 신체로 추락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런 암적인 신체의 대표적인 사례로 몇 년 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팟캐스트(Podcast) <나는 꼼수다>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나꼼수> 현상에 대해 연구했던 이기형 등(2012)은 <나꼼수>에 대해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정치적인 울분과 실망감, 그리고 비판과 항의를 결집시킨 대표적인 매개자였고, 구체적인 분노의 지점들을 표출하는데 기여한 촉발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94쪽). 주류언론이나 제도언론(보수언론뿐 아니라 진보언론도)이 권력에 순치된 모습으로 정치권의 동향과 정부의 정책들을 제대로 비판 견제하지 못하고, 여론과 민의를 전달하는 데도 매우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으로 <나꼼수> 가 크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확실히 <나꼼수>는 ‘사실만을 말하 라’는 제도언론의 저널리즘 원칙을 무시하고 조롱했다. <나꼼수>는 권력의 이면과 관련된 복잡한 사안이나 스캔들을 구체적인 사실과 가설, 그리고 유추와 추리적 상상력이 혼합된 내러티브와 개입적인 관점으로 풀어냈다(이기형 외. 2012. 77쪽). 강력한 비판의 언설, 저항의 정조 그리고 비판과 풍자로 대중을 전염시켰다.

    <나꼼수>는 한 때 회당 700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가 이루어지면서 조‧ 중‧동을 뛰어넘는 여론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의도적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나꼼수>는 청취자 각자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는 <나꼼수> 팬덤 현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들은 특정 대상을 향해 맹목적인 지지와 찬성을 보이고,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거나 반대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적대하는 <나꼼수> 팬덤현상에 대해 시사평론가 진중권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들을 전부 적으로 규정해서 공격하는 파시스트라고 비판했다. 세상의 다양한 현실을 회피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자신만이 옳고 다른 세계는 부정하는 나머지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머니투데이. 2012. 4. 28).

    이처럼 <나꼼수>가 대중들의 원한의 감정에의 비이성적인 호소(이기형 외. 2012. 99쪽) 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이 전쟁기계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세계로 이끌지 못한다. 철학자 니체(Nietzsche)에 따르면 원한과 복수 심으로 응어리진 감정, 즉 르상티망(ressentiment)은 약자의 질투 혹은 패배자의 시기심을 의미한다. 승자를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내가 더 우월하다는 약자의 자기 정당화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긍정의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관심을 실현시키기보다는 타인의 의지를 꺾는데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노예적 삶은 원한의 감정에 발목이 잡혀 남에게 이끌려 다니는 삶이며, 그렇게 인생을 자기 스스로 주도하지 못하고 허비하는 삶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전쟁기계, 이것이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한가? 여기서 들뢰즈식의 처방을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중심적 요체는 머물지 않는 삶, 즉 유목적 삶 (nomadology)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런 걸림 없이 삶의 순간순간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는 삶이다. 유목적 삶은 우선 정주적 삶과 대비된다. 물론 정주민도 이동할 수 있고 유목민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정주민의 이동은 어떤 목적지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유목민의 멈춤은 이동에 종속되어 있다. 또 유목적 삶은 이주적 삶과도 대비된다. 이주적 삶은 어느 영토에 이주하여 그 영토를 이용하며 살지만 그 영토가 불모지가 되면 버리고 떠난다. 반면 유목적 삶은 불모지가 된 땅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p.409~410).

    따라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로 무장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정보를 검색 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삶을 산다고 유목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직장일의 연장이라든가 상품 마케팅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혹은 정치적 캠페인을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노동의 연장이자 권력행위의 연장일 수 있다. 그러한 행위가 유목적인 삶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수단으로서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함이 없이 활용해야 한다. 선불교의 용어를 빌어 표현한다면 소셜 미디어 이용행위가 ‘함이 없는 함’(doing without doing)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함’과 ‘함이 없는 함’은 외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함이 없는 함’은 노동이나 권력(지배/저항)과 같은 심각한 아폴론(Apollon)의 모델이 아니라 유희나 광기 같은 유머러스한 디오니소스(Dionysos)의 모델과 가깝다.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고,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의 모델을 현실 속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지 만,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TV를 이용하는 모습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엿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TV를 일상적인 기능이나 역할을 초월하는 하나의 오브제(object), 즉 기관 없는 신체로 여기고 이에 대한 무한한 변형을 시도한다. 그래서 그에게 TV는 첼로(TV첼로), 브라(TV브라), 의자(TV의자), 시계 (TV시계), 정원(TV정원) 등등으로 무한 변신한다. 또 그에게 TV는 참선수행의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조명도구가 되기도 하며, 침대, 심지어 식물이 자라는 화분이 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TV에 대한 일상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무한한 의미 생성의 긍정적이고 창조적 길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셜 미디어 이용이 창조적 생산과 기쁨이 결여된 채 주어진 세계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정조에 머문다면, 소셜 미디어는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적 전쟁기계가 될 뿐이다.

    13)감응적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오창호(2014), 감응의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 이론』 참조.  14)불이의 논리는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은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공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용수(龍樹)가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김형효 (2006). 『원효의 대승철학』 참조.  15)들뢰즈는 상식을 보편적 본성의 사유(Cogitatio natura universalis)라고 규정한다. Deleuze. 1994, p.131.  16)dx는 x의 미분이다. 들뢰즈는 dx와 non-A를 대립시킨다. non-A라고 하면 여전히 A의 동일성을 가정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차이의 논리는 어떤 사물도 시간이 개입하게 되면 매 순간 달라진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베르그송의 지속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베르그송에 따르면 시간이 어떤 물체에 개입되었을 때,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시‧ 공연속체로서 존재하게 될 때, 지속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것’이 된다. Deleuze, 1994. p.170.

    6. 결 론

    소셜 미디어 문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루 24시간 내내 스마트 미디어를 끼고 살고 있는 소셜 미디어 매체 환경은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소셜 미디어 문화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나아가서 그 문화적 지형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이론적 전망은 어떤 것인가? 특정 기술이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는 기술결정론(determinism)이나 기술은 단지 사용자가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주의주의(voluntarism)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기술과 인간이 공존, 공생, 공진화하는 문화주의 (culturalism)의 관점에서 현대인들의 소셜 미디어 이용 행태를 분석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즉, 인간과 미디어는 한 편으로 인간이 미디어 환경을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미디어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는 방식으로 공존, 공생, 공진화한다.

    본 논문은 그것을 ‘주체(인간)-대상(기계)’이라는 이원적 구도에서 ‘누가’ ‘무 엇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라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대신에 ‘기계-인간 연속체’라는 일원적 구도에서 인간도 기계도 자연도 없이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접속하고 생산하는 과정이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것은 소셜 미디어에 대한 특정한 이해관 계에 얽매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관점을 배제한 채 무관심하고 초연한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 문화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접근법을 들뢰즈의 욕망이론에서 발견하고 그의 욕망이론을 검토하는 가운데 그의 이론을 통해서 소셜 미디어 문화현상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 기획 하에 본 논문은 크게 두 가지 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하나는 소셜 미디어 문화 현상을 해명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으로서 욕망이론을 정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이론을 응용하여 소셜 미디어 문화 현상을 나름대로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론의 정초는 세 가지 주제에 맞추어 순서대로 진행했다. 첫째는 소셜 미디어에 대한 욕망이론적 접근의 성격과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왜 소셜 미디어를 욕망하는가?’하는 질문으로 요약되는 바. 여기서 과제는 미디어에 대한 기능적 접근을 극복하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의 기능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공학자들의 일차적 관심이지만 그것의 구체적 활용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사회과학자들 에게도 보편적인 관심사항이다. 때로 기능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도 매체의 구입이나 이용의 동기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이들이 구사하는 욕구(needs)나 동기(motivation) 등등이 욕망(desire)과 어떻게 다른지를 프로이트, 라깡, 들뢰즈, 카타리의 주장을 근거로 규명했다.

    둘째는 들뢰즈‧가타리의 욕망론의 관점에서 매체를 바라보았을 때, 매체의 모습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은 크게 두 가지 유형, 즉 ‘포획과 통제의 욕망’과 ‘탈주와 자유의 욕망’으로 나뉜다. 포획과 통제의 욕망은 무방향적이고, 불규칙하며, 혼돈스러운 리비도적 욕망의 흐름에 어떤 방향을 부여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특정의 목적에 부합 하도록 조직하는 욕망이라면 탈주와 자유의 욕망은 주체나 법, 제도 등 일체의 초월적 질서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실행되는 생명의 흐름이며 생산하는 힘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욕망에 대해 각각 국가기구와 전쟁기계를 할당하고, 국가기구라는 욕망의 배치 속에서 매체는 도구가 되고, 전쟁기계의 배치 속에서는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논문에서는 도구와 무기의 차이와 특징에 대해 살펴보는 가운데, 이러한 특성이 사실상 욕망적 배치의 효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는 욕망적 배치의 다양한 유형을 분류하고, 각각의 배치의 특성을 살펴 보는 것이다. 욕망적 배치의 유형은 크게 수목형 배치와 리좀형 배치로 나뉘고, 또 리좀형 배치는 ‘텅 빈 신체적 배치’와 ‘암적 신체적 배치’ 그리고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적 배치’로 나뉜다. 수목형 배치는 ‘하나-둘’의 메커니즘을 통해 풍요로운 가운데 끊임없이 결핍이나 욕구, 즉 허위욕구를 만들어 마치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나 되는 것처럼 조장하고 그렇게 조작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목형 배치가 제공하는 보상의 체제에 경쟁적으로 합류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욕망을 포획하는 장치가 바로 국가기구이다. 반면 리좀형 배치에서 욕망은 생산적이고 자유로운 것으로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을 변혁하고 또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을 변혁시키고자 노력하는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적 흐름, 즉 욕망기계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유형의 욕망의 배치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구도를 응용하여 소셜 미디어 문화현상을 해명해 보았다. 먼저 수목형의 욕망의 배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구체적인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공유하고자 하며 진실/거짓, 정의/불의와 같은 선명한 분할선에 관심이 많고 결국 진실이나 정의와 같은 선의지가 승리하여 합의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나 기대는 사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미약하고 전통적인 대중매체에서 매우 선명히 드러난다. 1인 미디어로서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전쟁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대중매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ISA)라고 말했던 알뛰세의 통찰력은 매우 빼어나다고 하겠다.

    한편 수목형의 욕망의 배치에서는 벗어났으나 그것이 충만한 신체로 나아 가지 못하고 텅 빈 신체로 추락한 사람들은 강한 허무주의의 정념에 휩싸이게 된다. 선/악, 정/사, 미/추 등등의 모든 이항적 구분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유의미한 세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리고 순응이나 저항 혹은 변혁적 행위의 원인담지자로서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에는 행위의 주체도 행위의 방향도 없기 때문이다. 논문에서는 소셜 미디어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사례로 들었는데,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셜 미디어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변용은 물론 이웃을 변용시킬 의욕도 능력도 상실한 무기력(impotence)한 신체가 되기 때문이다.

    수목형 배치에서는 벗어났으나 충만한 신체로 나아가지 못한 또 하나의 경로는 암적인 신체로 추락하는 길이다. 이 신체는 수목형 배치의 한 축인 ‘하나-둘’의 원리가 반복하면서 증식되는 의미작용의 순환적 고리를 부수고 탈주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구의 또 다른 한 축, 즉 주체화의 축을 고집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종속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주체화를 통해서 신체는 국가기구에 대항하면서도 대중의 분노와 적개심이라는 정념(passion)에 기대어 새로운 중심을 세우고 저항세력을 규합한다. 논문에서는 그런 암적인 신체의 대표적인 사례로 몇 년 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팟캐스트(Podcast) <나는 꼼수다>의 경우를 들었다. <나꼼수>가 대중들의 원한과 복 수심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 한 이 전쟁기계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세계로 이끌지 못하고 고난과 수난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삶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전쟁기계가 되기 위해서는 리좀형 배치가 충만한 신체로 상승해야 한다. 본 논문은 그런 충만한 신체에 대해 들뢰즈‧가타리의 처방에 따라 머물지 않는 삶, 즉 유목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삶의 순간순간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는 삶이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로 무장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정보를 검색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삶을 산다고 유목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직장일의 연장이라든가 상품 마케팅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혹은 정치적 캠페인을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노동의 연장이자 권력행위의 연장일 뿐이다. 진정한 유목민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쾌락/고통)이나 권력(지배/저항)과 같은 아폴론의 모델이 아니라 유희나 광기 같은 디오니소스의 모델이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 문화현상이 제대로 설명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문화를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연구가 옳고 그름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이 문제는 문화연구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구체적인 문화 현상을 자료수집이나 참여관찰의 방식으로 분석하는 실증연구가 아니라 매우 이론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관념적 정조를 부정할 수 없다. 이 논문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데 따르는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즉 문화연구의 한 접근법으로서 욕망론에 근거한 문화론을 제시하는 것이 한 마리의 토끼라고 한다면, 욕망론에 근거한 문화론에 입각하여 소셜 미디어 이용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또 다른 토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을 별도의 논문으로 구성하는 것도 매우 필요한 일이겠으나 소셜 미디어 이용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들뢰즈•가타리의 욕망론의 가능성과 적합성을 탐색해보는 본 논문의 의도로서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쫓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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