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에서 바라본 장률의 영화미학

Zhang Lu’s Film Aesthetics from the Viewpoint of Neo-realism’s Aesthetic Orie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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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attempts to look into filmmaker Zhang Lu’s aesthetics through Italian Neo-realism. Neo-realism tried to break from the narrative-centric strategy of Classical realism and place unedited real life on the screen. This orientation tends to remove mis-en-scène, interpretation(acting), and narrative from film. André Bazin called this aesthetic orientation of Neo-realism towards new reality phenomenological realism. It is here where Zhang Lu’s film aestheticsis located. Zhang Lu wants to present reality as it is through his film. This is why the paper attempts to research into Zhang Lu’s film aesthetics within the framework of Neo-realism’s aesthetic orientation.

    This paper looks through the space, character, camera, and narrative structure of Zhang Lu’s films. The space of Zhang Lu’s film is not just a background of events. It is the event itself. Space becomes a filmic entity that interacts with characters and camera in Zhang Lu’s film. To make space a filmic entity, Zhang Lu’s film use long take and long shot. Actors are not requested to act in Zhang Lu’s film. They are requested to be as they really are. They are in a form of the rhythm of motion and voice in Zhang Lu’s film. Zhang Lu’s camera has a kind of self-consciousness. And it also reflects characters’consciousness. So we can say Zhang Lu’s camera is a kind of a semi-subjective consciousness. Lastly the narrative of Zhang Lu’s films is not composed of cause and effect. It is composed of casual encounters. This gives each scene of Zhang Lu’s film greater autonomy in its life. From above discussion, we can find out that Zhang Lu’s film is not oriented towards narrative, but oriented towards experience of reality itself. And this is the reason why we can locate Zhang Lu’s film aesthetics in the aesthetic orientation of Neo-realism, phenomenological realism. There are differences not to be ignored between Zhang Lu’s film and Neo-realism as a historical trend of film. But from a viewpoint of aesthetic orientation, the two can communicate with each other.

  • KEYWORD

    장률 , 앙드레 바쟁 , 네오?리얼리즘 , 형식 , 공간 , 리듬 , 미학적 지향 , 현상학적 리얼리즘

  • 1. 문제 제기

    장률의 영화는 ‘타자’의 삶을 다룬다. 장률의 영화에는 언제나 조선족, 탈북자, 철거민, 지체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 등처럼 주류에 끼지 못하여 항상 소외 받고 억압 받는 사회적 타자들이 등장한다. 사회적 타자에 대한 이와 같은 장률의 관심은 그의 모든 영화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전형적 특징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타자는 장률 영화의 영원한 주제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장률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뚜렷한 주제 의식은 그의 영화에 대한 논의를 주로 주제적인 차원으로 흘러가게 한다. 왜냐하면 주제 의식이 너무 강렬하고 뚜렷하다 보면 형식이나 미학적 차원이 주제적 차원에 흡수되어 부수적인 위치로 물러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 중심적 관점에서 장률의 영화는 지금까지 디아스포라 담론으로, 또는 마이너리티 담론으로, 혹은 여성 담론으로 읽혀져 왔다.1) 이러한 흐름에선 형식이나 미학에 대한 조명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로 주제 의식의 효과적 표현을 위한 방법으로 다뤄지게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장률의 카메라를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 말이다.

    그러나 장률의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형식과 미학의 차원에 대한 독립된 검토가 따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장률 영화의 주제가 우리에게 남다른 호소력을 지닌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적 형식과 미학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그의 영화 미학이 주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어떤 보편적 지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이탈리아에서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을 때, 네오리얼리즘의 정체에 대한 견해는 여럿으로 갈렸다. 네오리얼리즘을 당시 사회의 문제적 현실에 대한 르포타주로 이해한 관점, 개인적 문제로 하여금 보편적 중요성을 얻게 만드는 그것의 도덕적 차원을 강조한 견해, 혹은 현지촬영, 비전문배우의 기용, 롱 테이크 등과 같이 당시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공유하고 있던 형식적 관습을 중시하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2) 그러나 체사레 자바티니(C. Zavattini)나 앙드레 바쟁(A. Bazin)같은 이들은 이와 같은 관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네오리얼리즘의 본질적 중요성이 극적 효과를 위해 현실을 선택하고 가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일상적 현실 그 자체를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미학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 네오리얼리즘이 르포타주로, 또는 도덕적 영화로, 혹은 하나의 관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네오리얼리즘의 현상적 특징만을 강조한 피상적 이해라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미학 중심적 관점은 네오리얼리즘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 되어 있다. 따라서 한 영화, 또는 한영화 사조를 이해할 때, 그것이 위치한 역사적 컨텍스트나, 그것이 추구한 주제의식, 혹은 그것의 관습화된 영화형식 등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그것의 미학적 본질과 그러한 미학적 본질이 드러나는 미학적 형식에 대한 독립된 검토가 함께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은 미학 중심적 관점에서 장률의 영화를 바라본다.

    장률의 영화는 서사 중심적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마치 객관적 다큐멘터리와 같아서 멀찌감치 물러서서 현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의 영화적 시점을 객관성을 지향하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장률의 영화적 시점에는 모종의 영화적 의식과 참여적 감정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의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은 당대 현실의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컨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몇몇의 이유로 장률의 영화는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미학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에서 발견되는 유사 다큐멘터리적 성격, 사회적 컨텍스트의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새로운 리얼리즘에 대한 지향등이 장률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여러모로 본보기 역할을 해준다. 말하자면 네오리얼리즘은 장률의 영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용한 창이 될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은 네오리얼리즘 미학이라는 창을 통해 장률의 영화 미학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장률의 영화를 사조로서의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한 형태로 규정한다거나, 장률의 영화와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총체적인 비교를 시도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이 시도하는 것은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미학적 지향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이념적 틀 내에서 장률의 영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네오리얼리즘 미학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앙드레 바쟁의 관점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디아스포라 담론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강성률, 「떠도는 인생, 지켜보는 카메라–장률 영화의 디아스포라」, 『현대영화연구』vol. 11, 2011. 과 육상효, 「침묵과 부재 : 장률영화 속의 디아스포라」, 『한국컨텐츠학회논문지』’09 vol. 9 no. 11, 2009. 연구 참조. 마이너리티 담론이나 여성 담론으로 보는 관점으로는 주진숙, 홍소인,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의 경계, 마이너리티, 그리고 여성」, 『영화연구』42호, 2009. 와 김지미, 「장률 영화에 나타난 육화된 ‘경계’로서의 여성 주체」, 『여성문학연구』vol. 22, 2011. 연구 참조.  2)Kristin Thompson, David Bordwell, Film history, hs media 번역팀 역, Hs Media, 2011, pp. 345-351.  3)André Bazin, Qu’est-ce que le cinéma?, Les éditions du cerf, 1985, p. 351.

    2.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았다. 그에게 네오리얼리즘은 무엇보다도 고전적 리얼리즘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미국의 영화감독인 그리피스(D.W. Griffith)로 부터 시작한 고전적 리얼리즘의 전통은 쇼트들의 유기적 배치를 통한 이야기의 효율적 제시를 추구한다. 그것은 모호한 현실로부터 명확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영화적 창안이었다. 고전적 리얼리즘이 발전시킨 유기적 몽타주에 대한 레프 쿨레쇼프(L. Kuleshov)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위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적 리얼리즘의 일차적 미덕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명확하고’‘이해하기 쉬운’하나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 앞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관객들은 감독이 친절하게 미리 정해놓은 절차를 통해 영화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 현실의 모호함은 사라지고 명확한 이야기가 그것을 대체한다. 명확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쉽기에 관객에게 진짜 현실 속에 있는 듯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닌 만들어진 현실, 즉 일종의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쟁이 고전적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쟁은 고전적 리얼리즘이 제공하는‘명확한 이야기’와‘환영으로서의 현실감’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바쟁이 보기에, 진정한 리얼리즘은 현실의 모호함을 훼손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고전적 리얼리즘은 극적 서사를 위해 이와 같은 점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호함이란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의미화 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현실, 말하자면‘현실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훼손하는 고전적 리얼리즘은 바쟁에겐 일종의 거짓말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바쟁에게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가장 이상적인 영화적 전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운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네오리얼리즘에 두드러진 특정 관습 때문이 아니었다.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관습들 즉, 스튜디오 촬영이 아닌 현장 로케, 직업배우가 아닌 비전문배우의 기용, 필연적 사건전개가 아닌 에피소드들의 느슨하고 상호 우연적인 배치, 폐쇄되지 않은 열린 결말, 그리고 상대적으로 길어진 쇼트의 시간적 길이 등은 중요성에 있어서 차라리 부차적인 것들이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서 바쟁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미학적 지향이다. 서사에 몰두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자 하는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 일종의 존재론적 리얼리즘5)이라 부를 수 있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적 예술의지 속에서 바쟁은 고전적 리얼리즘을 극복하는 진정한 리얼리즘을 발견한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해 사전적 규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네오리얼리즘에게 현실은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직접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현실의 제시는 선입견 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현실에 대한 인습적 가치평가는 철저히 배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서사화와 의미화의 습관적 충동을 억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 즉‘사태 그 자체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네오리얼리즘의 이러한 지향은 영화 속에서 사물들이나 사건들의 위계를 사라지게 하고, 인물들의 표현적 연기를 절제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인위적인 의도나 사전적 규정 없이 현실이 있는 그대로 제시되기에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동질적 존재가 되고, 인물들은 연기의 형태가 아닌 존재의 형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종 거론되는 비토리오 데 시카(V. De Sica) 감독의 < 자전거 도둑(The Bicycle Thief) > (1948)에서의 주인공 부자가 비를 피하는 장면, < 움베르트(D Umberto D) >(1952)에서의 하녀의 아침 일상 장면, 그리고 로셀리니(R. Rossellini) 감독의 < 독일 영년(Germany, Year Zero) >(1947)에서의 소년의 죽기 직전 마지막 배회 장면 등은 이와 같은 점을 잘 보여준다. 서사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하여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는 생략되었을, 혹은 제시되더라도 간략하게만 제시되었을 이 장면들은 이들 영화에서 서사적 중요성을 갖는 다른 장면들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큰 비중을 갖고 다뤄지고 있다. 더불어 인물들도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 연기를 하기보다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그저 존재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명확한 이야기가 아닌 모호한 현실을, 극적인 사건이 아닌 일상적 생활을, 연극적 연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제시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바쟁의 말대로 네오리얼리즘에 이르러 영화에서 배우와 연출과 이야기가 사라지고 현실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다.6) 이렇게 해서 현실을 조작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명확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고전적 리얼리즘과 대비되는, 그야말로 새로운 리얼리즘이 탄생하게 된다. 바쟁은 이와 같은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 즉 존재론적 리얼리즘을‘현실의 적분(integrale de la realite)’7) 혹은‘현상학적 리얼리즘(realisme phenomenologique)’8)이라 불렀다.9)

    장률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의 적분이요, 현상학적 리얼리즘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장률의 영화미학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자.

    4)벵상 아미엘, 『몽타주의 시학』, 동문선, 2009, 21쪽.에서 재인용.  5)André Bazin, op. cit., pp. 9-17.  6)Ibid., p. 307. 물론 이렇게 말한다 하여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연기와 연출과 서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쟁에 기대어 행한 본 논문의 네오리얼리즘 설명은 고전적 리얼리즘과 대비되는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적 이해이다.  7)Ibid., p. 309.  8)Ibid., p. 341.  9)이상에서 살펴본 바쟁의 네오리얼리즘 이해에 대해 들뢰즈는 진전된 이해를 제시한다. 그는 “(네오리얼리즘에서)문제는 오히려 정신적인 층위에서 사유의 용어로서 제기되어야만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며 바쟁이 주장한 바 현실 그 자체 혹은 사실 이미지로서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순수시각적 및 청각적 상황의 부상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한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이해를 사실의 차원이 아닌 지각의 차원(더 나아가 사유와 시간의 차원)으로 진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쟁이나 들뢰즈 모두 서사화나 의미화가 되기 이전의, 순수하게 체험되는 현실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둘의 네오리얼리즘 이해는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Gilles Deleuze, Cinéma2 : L’image-temps, Les éditions de Minuit, 1985. 1장 : “au-delà de l’image-mouvement”. 참고.

    3. 장률의 영화미학

    장률은 영화에 현실을 기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분명 리얼리스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장률의 이와 같은 기록 정신은 역사가의 그것이나, 루카치식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나 계급적 모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생활’과‘감정’이다. 장률은 영화 <이리>(2008)의 촬영 현장에서 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률의 영화는 이처럼 사람들의 생활과 그 속에서 묻어나는 감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률이 말하는 생활과 감정이‘일상적’ 생활과‘일상적’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는 연극적 이야기와 그로부터 발생되는 연극적 감정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일상성을 다룬다. 그 일상성이 장률을 감동시킨다.

    이는 영화 <망종>(2005)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유독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지적에 대한 장률의 설명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모습과 움직임 속에 장률이 생각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와 같은 진실을 기록하는 것, 역사 속에서 쉽게 잊혀지고, 의미화하기 어려워 모호한, 그와 같은 일상적 현실을 쌓아 올리는 것, 바쟁이 네오리얼리즘의 본질이라 규정한 바의 그것, 바로‘현실의 적분’이 장률 영화미학의 요체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1) 공간?시간적 실체로서의 리듬의 공간

    (1) 공간의 실체화

    장률에게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그가 평소 누구라도 영화를 만들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사실 그 주장 뒤엔 전제가 하나 붙어 있다. 그건 바로“공간에 민감해야 한다”13)는 것이다.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장률은 영화의 성립 여부를 공간의 확보에서 찾는다. 영화 <이리>의 주요 공간인 허름한 2층 건물을 두고 장률은 “여기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시나리오가 풀렸어요. 그리고 아, 이젠 됐다, 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14)라고 말한다. 또 영화 <망종>의 주요 공간인 베이징 변두리의 버려진 집을 두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공간은 장률 영화를 받쳐주는 뼈대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영화 속에서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고 영화를 이루는 실체로 격상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공간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닌 사건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들이나 사물들, 더 나아가서는 관객들과 상호 교류하는 주체로서의 공간이 되어야만 공간은 영화에서 뼈대로 기능하게 된다. 실제로 장률 영화의 모든 공간은 그와 같은 기능을 한다. 앞서 제시한 두 영화의 공간뿐만 아니라 <당시>(2004)의 아파트, <중경>(2007)의 철거촌, <경계>(2007)의 사막, <두만강>(2009)의 강변 마을 등 장률 영화의 모든 공간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따라서 장률은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공간의 시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률의 영화적 공간은 가스통 바슐라르(G. Bachelard)의 시적 공간처럼“우리들이 체험하는”,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체험하는”실체로서의 공간이다.17) 이를테면 영화 <경계>의 공간인 몽골 사막은 인물, 카메라, 그리고 의식을 지배하는 영화적 실체이다. 영화에서 몽골인 항가이는 자신의 거주처가 급속히 사막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광대하고 메마른 모래땅에 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그의 나무심기는 외롭고 부질없어 보인다. 심었던 나무들이 다 메말라 죽어버리고, 나무를 같이 심던 이웃들도 사막의 힘에 굴복하여 다들 이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항가이의 처마저도 딸아이의 병원 치료를 위해 도회지로 떠나기 때문에 항가이의 나무심기는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항가이의 외로움이나 무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서사적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경계>에서 항가이의 존재를 외로움이나 무력감으로 체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적 리듬을 벗어나 있는 사막의 현존 때문이다. 항가이를 품고 있는 사막의 광활함과 황량함, 그리고 영원함이 그의 존재를 외롭고 무력하게 만든다. 또한 카메라나 우리의 의식도 사막을 벗어날 수 없다. 카메라는 사막 위에 놓여야 하며, 우리는 그 카메라를 통해 영화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계>의 사막은 사건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인물을 감염시키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며, 카메라마저 통제하는 하나의 실체가 된다.

    그런데 이처럼 공간이 실체로 격상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지속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물이나 사건의 배경인 공간이 그 자체 존재감을 확보하면서 실체화되기 위해서는 부수적인 것(공간)과 주제적인 것(인물과 사건)의 관계가 역전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공간을 실체화하기 위해선 시간의 지속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이미지를 다시 고찰하게 만들고‘부차적인 것’으로 관객의 관심을 돌려, 이미지의 ‘주제’에 대한 관객의 평가를 변화시켜야”18)만 한다. 그럼으로써 지속으로서의 공간을, 시간적 실체로서의 공간을 체험케 할 수 있어야 한다. 장률이 원 씬–원 쇼트, 롱 테이크의 원칙을 비교적 잘 지키는 이유 중 하나엔 바로 이와 같은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더불어 장률 영화 특유의 롱 쇼트 또한 공간의 실체화와 관계가 있다. 장률은 클로즈업을 극도로 절제한다.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어쩔수 없을 때, 즉 <망종>에서 최순희가 아들 창호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이리>에서 진서가 할아버지의 자살에 대해 자책할 때와 같이 감정이 극단적으로 고조될 때에 한하여 제한적으로만 사용한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장률 영화의 대부분의 쇼트들은 모두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다. 그의 영화는 일종의 롱쇼트 영화이며, 그의 미장센은 일종의 거리의 미장센인 셈이다. 장률은 이러한 프레이밍의 거리확보가 감정의 문제이며, 자신의 시선의 문제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와 같은 거리 확보는 공간의 확보라는 차원을 갖는다. 대개 공간의 확보는 쇼트의 논리를 서사적 논리에서 공간의(혹은 리듬의) 논리로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거리에 의해 공간이 확보되면, 배경에 머무르기 쉬운 공간이 인물을 흡수하여 해당 쇼트의 논리를 인물 중심의 서사적 논리에서 공간 중심의 리듬의 논리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공간의 실체화이며, 다른 한 편으론 인물의 공간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의 지속에 의한 것이든 거리에 의한 것이든, 장률 영화의 공간의 실체화는 리듬과 관련을 맺는다. 리듬의 문제는 장률 영화에서 공간의 문제와 더불어 인물이나 카메라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논의의 진전을 위해 리듬에 대한 간략한 검토가 필요하다.

    (2) 리듬의 현전성

    베르그손(H. Bergson)에 따르면 리듬이란 질적 세계의 존재 근거이다. 베르그손은“질은 표면에서는 펼쳐져 있고 부동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층에서는 살아 있고, 진동하고 있다.”19) 고 말하여 질적 세계의 리듬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르그손에게 질적 세계란 지속(시간)으로 체험되는 것으로서, 지성에 의해 의미화 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순수 현전이다. 그것은 ‘지성’에 의해 양화(量化)된 상태를‘직관’에 의해 전환시켜야만 도달 가능한 세계이다. 따라서 리듬을 질적 세계의 존재 근거로 간주하는 베르그손의 이와 같은 리듬론은 현상학적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한편 앙리 르페브르(H. Lefebvre)는 리듬에 대한 논의를 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 진행시킨다. 르페브르에게 리듬은 우선 모든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그는 “사물들이란 없다. 느리거나 빠른, 매우 다양한 리듬들만이 있을 뿐”20)이라고 말하면서 리듬의 근본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결코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리듬들의 측정 기준이 되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몸과 비교해서만”21)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모든 것은 부단히 움직이는 리듬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렇다 하여 리듬이 형이상학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리듬은 자연과 문화의 모든 수준에서 발견되는 사실적 세계이기 때문이다.22) 리듬은 분자들과 원자들에서 시작하여, 조약돌 하나, 벽, 나무줄기 하나에도 있으며, 상품의 흐름과 같은 경제적인 영역, 이데올로기 조작과 같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리듬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그 현전성(présence)에 있다. 그 현전성은 단순히 상상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며, 도덕적”23)이기까지 한 현전성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감화시킬 수 있는 실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현전성이다. 따라서 르페브르에게 리듬을 체험한다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리듬을 체험한다는 것은 감각적, 정서적, 도덕적 차원을 포괄하는 총체적 현전의 경험인 것이다. 예컨대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체험을 생각해 보자. 아이는 쉬지 않고 호흡하고, 부단히 움직이며, 때에 따라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한 아이의 살아있음은 리듬으로 체험되는데, 그것은 감각적이면서, 정서적이고, 동시에 도덕적이기까지 한, 그야말로 총체적인 현전의 경험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현상인 리듬이 일상생활에선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표상이 ‘리듬의 현전’을 ‘모상으로서의 현재’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24) 르페브르는 현재(présnet)를 현전과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현전이 진짜라면 현재는 현전을 모사한 시뮬라크르, 즉 진짜인 것 같은 가짜이다. 앞서 예로 든 갓난아이가 우리에게 현전이 아닌 현재로 다가온다면, 그 아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예컨대, 단순한 귀여움으로, 때로는 분유값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짜증나는 소음으로만 의미화될 것이다. 따라서 르페브르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를 걷어내고 현전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된다. 리듬의 세계로의 입문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예술은 리듬의 세계로 입문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된다.

    장률의 영화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공간의 실체화가 서 있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공간이 정지된 사물의 세계가 아닌 지속하는 리듬의 세계로 격상되고, 현재의 거짓된 경험의 세계가 아닌 현전의 진실된 체험의 세계로 전환되는 과정이 바로 공간의 실체화인 것이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리듬의 관점에서 장률의 영화미학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리듬론은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전체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자 했던 네오리얼리즘은 서사나 의미가 제거된 후 현실에 남는 건 오직 리듬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로셀리니는 <독일영년>의 주인공 소년이 특별한 대사나 사건 없이 황폐한 거리를 그저 배회하기만 하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오직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자바티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비행기가 너무 자주 등장한다는 미국인 영화제작자의 지적25)에 대해 비행기는 아직 스무 번 더 등장해야 한다고 되받아쳤다. 이처럼 네오리얼리즘의 현실은 서사나 의미의 현실이 아닌 움직임과 진동의 현실, 곧 리듬의 현실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장률의 영화 미학과 소통하는 지점이다.

    이제 이러한 리듬론적 관점을 염두에 두고 장률 영화의 인물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도록 하자.

       2) 인물?움직임과 목소리로서의 인물

    장률은 배우들에게 연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배우들에게 “(무언가를) 만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그(영화) 안에‘있기’”를 요구한다.26) 영화 <두만강>에서의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장률의 설명이다.

    이렇게 보면 연기의 소멸이 곧 장률의 연기론인 셈이다. 그런데 연기가 소멸된 후 인물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존재하기’이다. 연기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연기가 소멸된 자리에서 인물은 움직임과 목소리로 존재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움직임과 목소리는 연기에 의한 표현적 움직임과 목소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습관적 움직임과 습관적 목소리를 뜻한다. 그것은 목적을 갖는 행동으로서의 움직임이나 내용을 갖는 대사로서의 목소리가 아닌 존재의 리듬으로서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말한다.

    영화 <중경>에서 주인공 쑤이의 아버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아래 사진1) 아버지가 자신의 집에서 여자를 사고 난 후 돈을 치르는 이 장면의 특징은 아무런 대사 없이 오로지 공간과 움직임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원 씬–원 쇼트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장면 내내 축 쳐진 어깨와 슬로모션과도 같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일관한다. 반면 젊은 창녀는 옷을 입고 화대를 챙겨 집을 나가기까지 유유한 걸음걸이로 공간을 오고 가면서 해당 장면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이들의 움직임은 서로 대조되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느낌은 이들을 둘러싼 공간의 황폐함에 의해 더욱 배가된다. 대사가 극소화되어 있는 아버지는 이후에도 계속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몸짓으로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한다. (아래 사진2-아버지와 딸의 식사장면) 이처럼 인물이 자신의 움직임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장률의 영화에서 너무나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는 영화 <자전거 도둑>의 아역 배우를 선발할 때 연기 테스트를 하지 않고 오직 걸음걸이 테스트만 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아버지 리치의 걸음걸이 옆에 그것과 어울릴만한 어린 아이의 종종 걸음을 붙여 놓은 다음, 이들이 온 종일 로마 시내를‘단순히’ 돌아다니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데 시카는 자신의 영화가 연기로 이루어진 연극적 영화가 되기를 원한 게 아니라, 바쟁의 말대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현상학적 영화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28) 장률 영화의 움직임의 미학 역시 이와 같은 현상학적 지향을 지니고 있다. 장률 영화의 인물들은 무엇보다도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빠르든 느리든, 움직임의 리듬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한편 목소리도 움직임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장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엘 버치(N. Burch)는 뤼미에르(L. Lumière)의 영화를 일컬어“행위를 사냥하는”30) 영화라고 말했다. 비슷하게 장률에게 영화는‘소리를 훔치는’미학적 작업이다. 인물과 관련해서는 목소리를 훔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여기서 목소리를 훔친다 함은 연기로서의 장식적 대사가 아닌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목소리를 영화에 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 목소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나 그것의 연극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자연스러운 뉘앙스, 즉 리듬이 된다. 말하자면 장률 영화의 목소리는 그 내용이나 표현성으로 우리에게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듬으로 우리에게 어필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률 영화에서 들려오는 약간 어색한 듯한 인물들의 목소리는 배우들의 연기의 미숙에서 나오는 부정적 사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장률 영화의 필연적 결과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컨대 영화 <두만강>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하나 같이 책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의 발성은 연극적 연기에 의해 가공된 감정적 발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투박하면서도 약간 어색한 이들의 발성은 수업 받지 않은 거친 연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속에서 우리는 아이들의 본래적인 리듬을 보다 더 잘 감지하게 된다. 이처럼 장률은 연기 주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목소리가 감정적으로 가공되는 것을 막고, 그것의 본래적인 리듬을 살려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의 리듬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주인공인 인물의 본질을 체험케 해 준다.

       3) 카메라?반주관적 의식으로서의 카메라

    장률은 현장중심주의자이다. 그는 시나리오로부터 되도록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그럼으로써 최대한 공백 상태로 현장에 가길 원한다.

    따라서 장률의 카메라는 현장에 가서야, 말하자면 현장의 감정과 리듬의 흐름을 감지하고 나서야, 그 움직임과 위치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리를 잡은 카메라, 즉 현장과 호흡을 하는 카메라는 현장에 참여하는 모종의 의식을 갖게 된다. 그 의식은 현장을 단순히 기록하는 객관적 관찰자의 의식은 아니다. 또 그렇다고 현장을 훔쳐보는 관음증자의 의식인 것도 아니다. 그 의식은 현장에 참여하되, 자신의 의도를 현장에 강요하지 않고, 현장의 감정과 리듬을 수용하는, 말하자면‘공존’의 의식이다.

    영화 <망종>을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망종>의 카메라는 주로 롱 쇼트와 롱 테이크로 일관하며 거의 고정되어 있다. 주인공 최순희가 등장하는 도입부만 보더라도 장률의 카메라는 그녀의 움직임을 전혀 따라가지 않는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로 최순희가 자전거를 끌고 느리게 걸어가는 모습, 나무그늘 아래 서서 땀을 식히는 모습, 기관차에 김치를 배달하는 모습, 그리고 무도행렬을 지켜보는 모습 등을 멀리서 무심히 응시할 뿐이다. 이와 같은 장률 카메라의 응시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마치 최순희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장률의 카메라워킹은 현장의 감정이나 리듬과 관계한다.32) 이는 두 차원을 갖는데 하나는 최순희의 공간(현장)에 대한 감정과 리듬이고, 다른 하나는 장률의 카메라의 현장에 대한 감정과 리듬이다. 즉 롱 쇼트, 롱 테이크, 그리고 고정쇼트 속에서 우리는 무심한 듯한 최순희의 생활 감정과 최순희와 현장에 조심스런 거리를 두면서도 애정을 지닌 장률의 카메라의식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의식의 ‘공존’이다.

    이러한 의식의 공존은 <망종>에서 매우 예외적인 카메라 워킹을 보이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면은 최순희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고, 이에 의한 충격으로 자신을 겁탈한 공안원에게 엄청난 복수33)를 감행한 후에 전개된다. 최순희는 집 옆의 기차역을 가로질러 근처의 보리밭으로 향하는데, 여기에서 장률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최순희를 바짝 쫓아가며 실성한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 최순희는 이 장면에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걷는다. 그 이전까지 자신의 감정을 거의 내보인 적이 없는 최순희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을 폭발시킨다. 장률의 카메라는 이러한 최순희에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격정적인 감정과 리듬을 우리에게 여실히 전달해준다. 또한 약 3분에 걸쳐 진행되는 원 씬–원 쇼트인 이 장면은 최순희의 감정과 리듬을 끊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최순희의 앞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만을 쫓아간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우면서도 걱정스러워하고, 또 불안해하는 장률의 카메라 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는 앞선 장면들과는 색깔이 전혀 다른 의식의 ‘공존’이다.

    관찰자의 의식과 관찰대상자의 의식이 공존하는 장으로서의 카메라. 이러한 경우 카메라는 인물과 혼동되지 않고, 또 그렇다고 인물과 분리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과 함께 있다. 순수 객관적이지도, 또 순수 주관적이지도 않은 이와 같은 카메라를 장 미트리(J. Mitry)는‘반 주관성’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34) 장률의 카메라는 분명 의식적이다. 남성의 나체는 보여주면서도 여성의 나체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든지, <두만강>의 강간 장면을 비가시화하는 것이라든지, <경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360도 패닝하는 것 등은 장률 카메라가 모종의 자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에게 감지케 한다. 더불어 장률의 카메라는 인물의 의식을 매개해 주기도 한다. 장률의 카메라가 폭발직전의 <중경>의 공간에서, 폭발 후의 <이리>의 공간에서, 그리고 몽골 사막의 <경계>의 공간에서 바라보고 있는 황량함은 실은 해당 영화의 인물들인 쑤이의, 최순희의, 그리고 태웅의 의식에 비친 황량함인 것이다. 장률 영화의 이와 같은 반주관적 의식으로서의 카메라는 체험되는 대로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적 지향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4) 서사 구조?필연성을 벗어난 결과들의 우연적 배치

    장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사건의 전개가 인과적 연쇄로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결과들의 우연적 배치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장률 영화에서 연쇄되는 각각의 장면들은 서로 간에 연결되어야만 하는 서사적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대개 한 쇼트로 이루어진 각각의 장면들은 원인 없는 결과들로만 보일 뿐이다. 예컨대 영화 <망종>에서 창호의 죽음은 그저 결과로서만 제시된다. 그에 대해 장률은 이렇게 말한다.

    바쟁은 영화의 서사 구조가 우연적으로 배치되면 각각의 장면이 서사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시될 여지가 더 넓어진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쟁에게 현실이란 본래부터 우연적 결과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필연적 인과관계로 조합하는 것은 인위적인 속임수에 불과하기에 필연성을 느슨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현실 구원의 확률은 더 높아진다. 바쟁은 서사구조의 이러한 우연적 배치가 현실을 구해내는 모범적 사례로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들고 있다.36)

    장률 영화의 장면들도 필연성의 법칙에 의해 조립되지 않는다. 일상의 각 장면들이 상호 우연적으로 배치될 뿐이다. 그렇다 보니 각 장면 하나 하나는 전후 장면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한다.37) 예컨대 영화 <중경>의 초반부 장면 연결을 생각해 보자.

    이상의 장면 연결 속에서는 뚜렷한 사건이 발견되지 않는다. 나아가 사건의 발단조차도 확인이 잘 안 된다. 그저 쑤이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상호 우연적인(혹은 분산적인) 배치만이 보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각 장면들은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독립성은 관객의 서사적 관심을 약화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각 장면을 비서사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장면은 분위기, 리듬, 그리고 인물들의 움직임, 목소리와 같은 현상학적 질로서 우리에게 체험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살펴본 공간, 인물, 카메라의 현상학적 지향성은 이와 같은 서사 구조의 우연적 배치에 의해 더욱 더 힘을 얻는다고 하겠다.

    10)연합뉴스, 2011. 3. 06. 인터뷰 기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944252)  11)정성일, 「장소, 두개의 방문」, 『필사의 탐독』, 바다출판사, 2010, 489쪽.(해당 글은 이하 정성일a로 표기)  12)정성일, 「장률과의 대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333쪽.(해당 글은 이하 정성일b로 표기)  13)국민일보, 2011. 03. 11. 인터뷰기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732309&cp=nv)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과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 장률의 생각이다.  14)정성일a, 앞의 책, 511쪽.  15)정성일b, 앞의 책, 330쪽.  16)정성일a, 앞의 책, 524쪽.  17)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역, 동문선, 2003, 69쪽. 물론 바슐라르의 시적공간과 장률의 영화적 공간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보다 영적인 공간을 의도하였다면 장률은 일상적 삶의 공간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의 실체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 둘의 공간론은 일정부분 상통한다.  18)엠마뉴엘 시에티, 『쇼트』, 심은진 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60쪽.  19)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역, 아카넷, 2005, 341쪽.  20)앙리 르페브르, 『리듬 분석』, 정기헌 역, 갈무리, 2013, 83쪽.  21)위의 책, 91쪽.  22)이러한 발상 위에서 르페브르는 물리, 생체, 심리, 사회를 포괄하는 모든 수준의 다양한 리듬들을 포괄적으로 사유하는 거대한 리듬 분석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지중해 도시들에 대한 리듬 분석 시도」와 같은 글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위의 책, 223-251쪽.  23)위의 책, 96쪽.  24)위의 책, 96쪽.  25)서사적 중요성이 별로 없는 일상적 현실을 너무 많이 영화에 담는다는 지적이다.  26)정성일a, 앞의 책, 525쪽.  27)연합뉴스, 2011. 3. 6. 인터뷰 기사.  28)André Bazin, op. cit., p. 303.  29)정성일a, 앞의 책, 510쪽.  30)엠마뉴엘 시에티, 앞의 책, 71쪽. 에서 재인용.  31)정성일a, 앞의 책, 513쪽.  32)영화 <망종>에서 카메라가 왜 움직이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해 장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메라가 가만히 있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뭔가 감정은 생기는데, 계속 참아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행동을 하지요. (⋯) 사람들이 최순희가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돌아와서 우리 옆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영화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건, 진짜 내 감정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정성일b, 앞의 책, 330-331쪽. 또한 영화 <망종>에서 최순희가 아들 창호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의 카메라워킹에 대해서 장률은 이렇게 말한다.“그것도 내 감정과 관계있습니다. (⋯) 그저 나도 최순희다. 내가 현장에 갔더니 창호가 죽었다, 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위의 책, 339쪽.  33)최순희는 공안원의 결혼식 피로연에 쥐약을 탄 김치를 배달한다.  34반주관성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Cinéma1 : L’image-mouvement, Les éditions de Minuit, 1983. pp. 105-111. 참조. 여기서 들뢰즈는 파졸리니의 자유간접담론(discour indirect libre)과 함께 반주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35)정성일b, 앞의 책, 330-331쪽.  36)André Bazin, op.cit., pp. 298-299.  37)이러한 논의는 물론 상대적인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것임을 밝혀둔다. 장률 영화엔 분명 서사가 있고, 장면들 사이에는 느슨하지만 모종의 인과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률 영화의 각 장면들 사이의 관계는 필연성과는 거리가 멀고 우연성에 가깝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4. 결론

    이상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자. 본 논문은 장률의 영화미학에 대한 검토를 목적으로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장률의 영화는 시간적 실체로서의 리듬의 공간, 움직임과 목소리로서의 인물, 반주관적 시선으로서의 카메라, 그리고 사건들의 상호 우연적 배치로서의 서사구조 등의 특징을 보인다. 이들 특징들이 만들어내는 영화미학은 사실 하나의 지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고전적 리얼리즘의 안티테제로서의 네오리얼리즘 미학이 추구했던 바, 즉 현상학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은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이념적 틀내에 장률의 영화 미학을 위치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장률의 영화 미학과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미학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둘은 그 지향에 있어서는 공유하는 바가 크지만 구체적인 영화형식이나 소재 선택, 그리고 주제 의식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장면의 데쿠파주만 살펴봐도 쉽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네오리얼리즘을 언급할 때 그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우선 역사적인 영화 사조로서의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의미하고, 다음으로는 고전적 리얼리즘에 반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그 중에서도 현상학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리얼리즘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 논문의 기획 취지에 비춰본다면, 이 중 두 번째 의미의 네오리얼리즘이 더 중요한 관점을 형성하고 있다 하겠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장률의 영화를 검토해 온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장률의 영화는 같은 동양계인 허우샤오시엔(侯孝賢)이나 지아장커(賈樟柯)의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그들 간에는 정서나 형식에 있어서 모종의 소통 지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적 리얼리즘에 반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첫 주자로서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갖는 상징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그 미학적 지향이라는 차원에서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본 논문은 장률의 영화 미학을 네오리얼리즘의 지형도 안에 위치시키게 됐다.

    장률의 영화 미학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리듬과 감정’이 될 것이다. 일견 서로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개념이 장률의 영화에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체험된다. 그러나 그 둘을 연관시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장률의 영화에서 체험되는 감정이 고전적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서사적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률 영화에서 체험되는 감정은 리듬에 의해 유발되는 감정이고, 리듬 그 자체인 감정이다. 예컨대 영화<망종>에서의 창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한다기 보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침범 당하고, 내부로부터 흔들린다. 따라서 우리는 거칠게나마 장률의 영화 미학을 리듬의 현전을 감정의 수준에서 체험시키는 ‘현상학적 리얼리즘’이라 칭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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