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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에 관한 연구*** International Exchange of South Korean Films in the 2000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에 관한 연구***

This study looks into the international exchange of South Korean films in the 2000s. First, it will look into the trend of holding the domestic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and sum up Korean directors who have been awarded in the overseas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Also, it will look into whether there is the Korean wave (Hallyu) in films abroad and what roles it plays if there is.

Even if the invigoration of the domestic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in the 2000s did not draw a single result, it is clear that it has led the overall invigoration of the domestic film industry. It provided the audience with chances to watch various quality films and places of interchange of film makers. Also, it has helped develop the art of the cinema and local cultural industry and promote cultural diversity. Thanks to these merits, provincial governments have made efforts to host a film festival since 1995. For a decade after that,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became saturated, and film festivals started to look back on themselves in the late 2000s. Film festivals except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re at a standstill, but the fundamental merits of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still persist, since it helps revitalize the local economy for the venue and becomes ‘a model of the reinforcement of local culture’ beyond a simple tourist product.

Korean films began to achieve good results in overseas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in the 2000s. Hong Sang-soo, Kim Ki-duk, Lee Chang-dong, Park Chanwook and Bong Joon-ho were praised for bringing about ‘nouvelle vague of Korean films’ in foreign countries. They received recognition through major overseas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Individual directors revealed South Korea’s singularities through an issue of space or substituted issues of time or synchronic problems in society for that. In addition, it should be noted that their activities, which are called ‘post-Korean nouvelle vague’ in the domestic academia, are mentioned removing ‘post-’in other countries.

The roles of Korean films as ‘a Hallyu content’ of various cultural contents are important as well. The Korean film craze in Asia brought about by Shiri completed in 1999 has remained after 2000. My Sassy Girl (Yeopgijeogin Geunyeo) is the representative product of Hallyu contents. However, it is regretful that this new cultural market cannot continuously show its power. Also, the zeal for the cinematic Hallyu is, in fact, slight in the U.S. or Europe. Therefore, in the future, Korean films should distinguish themselves with ‘diversity’ instead of specialized cultural products as a weapon in the world market.

KEYWORD
한국영화 국제교류 , 2000년대 한국영화 , 국제영화제 , 해외영화제 , 한국영화의 누벨바그 , 포스트 누벨바그 필름 , 세계 3대 영화제 , 영화의 한류
  • 1. 들어가며

    2000년대 한국영화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고 심층적 성과를 이루어갔다. 변화의 양산은 영화산업의 기초적 분야에서 간접적 문화의 차원을 거쳐, 영화창작에 이르는 실질적인 과정까지 영향을 미쳤다. 시기적으로는 제15대 대통령과 제16대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 영화진흥위원회의 출범 이후 제4기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여의 기간 동안 한국의 영화계에는 다이나믹한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영화 산업 전체가 다른 사회의 문화적 기반들과 연관 지어 발전했던 것이다. 이 시기 약 10년간의 한국영화의 국제교류 흐름에 관해 기술하려 한다. 국제 교류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1980년대에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에 할리우드 영화의 국내 직배 이후부터, 한국 영화시장은 ‘국가 간 공정거래’라는 자유경쟁체제로 변화되었다. 이 차이가 가지고 온 반향은 컸다. 이후 국내 영화정책 변모의 배경은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에는 ‘향후 영화산업이 국제적 경쟁이 가능한 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작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2000년대 제작된 영화들은 규모 면에서 여러모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을 닮아갔다. 거대 배급망의 구축에 따른 배급과 제작의 시스템 연계로 점차 제작시스템을 굳혀가기 시작한 것은 그러므로 80년대 후반부터라 할 수 있다. 당시 산업 변화의 흐름은 단지 국내 시장에만 국한되어있지 않았으며, 국내 영화제작자들은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렸다. 수출을 목표로 한 대작영화들이 국제적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국외의 관객들을 타겟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점점 더 커져갔다.

    본고는 이러한 경향에 기대어 세 가지 방향으로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교류에 관해 살피려 한다. 첫째, 국내에서의 국제영화제의 활성화 경향을 살필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과 더불어 국내 개최 국제 영화제의 수가 이 기간 동안 월등하게 많아졌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할 것이다. 둘째, 해외에서 일어난 한국의 작가 영화의 거센 흐름도 관찰하려 한다. 이 시기 해외영화제에서는 연일 한국영화의 승전보가 들려왔는데,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그 지속적 작가 영화의 승전보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200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를 장악한 ‘한류’의 경향에 관해 특히 ‘영화에서의 한류’를 살펴볼 것이다. 그 흐름이 거대하지 않더라도 영화 역시 중요한 대중문화 콘텐츠로서 한류의 기류에 편승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한국영화의 선전이 한국영화 세계화에 어떤 지표로 남을 것인지 다른 문화콘텐츠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의 국제영화제 활성화 경향

    1995년 지방자치제도의 시행 이후,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며 시행된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의 활성을 위해 지방 마케팅이 계기가 된 ‘부산국제영화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여파는 공공과 민간의 협력 사업으로 이어졌으며, 다른 도시에서도 각자 나름의 영화제들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1995년은 ‘키노’와 ‘씨네21’ 등 국내의 본격적 영화 전문지들이 출현한 시기이자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당시 강단에서 활동하던 영화이론가들이 비평 활동의 활성화를 전제로 국제영화제를 만들자고 결의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1995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개막으로 이어진 데에 이어, 1996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포문을 열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예상보다 더 많은 수의 18만 관객들이 몰리면서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영화제에 대한 관심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는데, 그 열광적 호응의 과정을 각종 신생 매체들은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러 신생 매체들 역시 영화제 성공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흥행을 도왔으며, 상호작용하며 영화제의 성공을 도모했다. 지금에 이르러 부산국제영화제는 지역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문화 창조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모티브로 우후죽순 지방의 여러 국제영화제들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인 1996년에는 인권영화제가 시작되었고, 1997년에는 서울여성영화제와 부산아시아나단편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서울국제노동영화제가 차례로 문을 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단기간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발돋움하면서, 희소한 영화제 성공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영화제 성공과 더불어 부산은 ‘기존 항구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영상문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1)는 평가를 듣게 됐다. 2007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제공하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를 대상으로 영화제들의 비교 평가’ 결과를 살펴보면,2) 불투명한 성격이나 중복적 성격을 지닌 다수의 국제영화제들에 비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여타의 영화제들보다 탁월한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과는 예산의 증액을 통해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사업비총액은 95억 수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금액은 여타 비슷한 규모의 해외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보면 비슷한 수준의 예산이다. 비록 당시의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비슷한 규모의 북경국제영화제 예산이 900억인 것과 비교해 다소 열악한 환경이라고 소개하지만,3) 엇비슷한 시기의 칸영화제의 전체 예산이 2000만 유로로 부산국제영화제의 2.5배 정도인 것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의 전체 예산이 880만 유로로 약 1.3배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4)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 수준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수준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아시아영화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은 사실 성공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가능하리라고 본다. 부산이라는 플랫폼의 성공 요인은 두 가지인데, 정치적인 측면과 한국 관객의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이루었다”5)고 자평하는데, 그의 말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평가는 일정부분 그 공로를 치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장르와 지역 영화들을 통해 세계영화의 흐름을 조망하게끔 하는 축제의 장이자,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아시아문화의 미래를 논의하게끔 만든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이며, 월드프리미어 상영이 가능한 경쟁력 있는 작품들을 끌어와서 경쟁부문을 포함한 국제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였다는 정도로 그 의의를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렇지만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한 나머지의 국제영화제들은 여전히 ‘이름에만 국제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뿐 실제로는 국제영화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영화제들이 다수’6)라는 평가를 듣는 형편이다. 2007년 <한국영화연감>에 의하면, 제7회 광주국제영화제의 경우는 “지난해에 이어 2007년에도 전국 7개 영화제 중 최하위로 평가 받으면서 퇴출 위기를”7) 맞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후 광주국제영화제 측은 이를 ‘2006년 외부에서 영화제에 대한 개혁요구가 있었고, 조직내부의 갈등도 존재했지만 개혁특위를 가동하여 개혁안을 마련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8)고 밝히지만, 여전히 그 노력에 대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 형편이다. 한편 2005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국제영화제 평가>에는 다수의 국내 개최 국제영화제들에 관한 평가들도 요약돼 담겨 있다. 이 조사가 보여주는 지표 역시 <한국영화연감>과 비슷한 수준이다. 국제영화제 평가는 세계 각국에는 진행되는 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들 중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공인한 국제영화제의 수가 100개 미만인 상황에 기인하여, 국제영화제 인증 관련 기관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을 충족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공인된 국제영화제로 국내 국제영화제들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진행된 사업으로, 국제 표준과 흡사하게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을 상향화 시키려는 의도로 시행됐다. 2007년 국제영화제 평가 발표에 따르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특성화되어 있고 관객층의 충성도가 높은데 반해, 집행조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9)있으며, 전주국제영화제는 ‘디지털영화제에서 대안영화제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나, 실질적 리더의 부재로 영화제 사업을 협조해 고민할 통로가 부족한’10) 형편이고, 부산국제영화제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영화제의 성격이 오히려 모호해지고, 경영관리 상의 문제가 있는 것’11)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국내에서 개최되는 다수의 국제영화제들이 국제영화제작자연맹 등지에서 제시하는 국제영화제로서 갖추어야 하는 요건에 적합하지 않거나, 혹은 운영 및 경영시스템의 합리성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지적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지표 지점들을 이후의 국제영화제들이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통계상으로 1997년 이후 국제영화제의 발생 빈도는 이전보다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1999년에는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가, 2000년에는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과 전주국제영화제가, 2001년에는 인디다큐페스티벌과 광주국제영화제가, 이어서 2003년에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2004년에는 서울환경영화제와 서울국제영화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와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그리고 대한민국국제청소년영화제가 연달아 개막되기 시작했다. 즉, 2004년에 시작된 국제영화제의 수만 무려 5개에 달한다. 뿐만 아니다. 이어서 2005년에도 무려 5개의 국제영화제가 첫 발을 딛는다.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와 재외동포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와 국제대학생평화영화제, 그리고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가 그 목록에 속한다. 따라서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동안 잠시의 휴지기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언급되는 다수의 국제영화제들이 부산영화제 이후의 기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부산영화제의 성공에 대한 포괄적 지표라 읽어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 충무로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시네마디지털서울 등이 첫 발을 내딛은 후로 국제영화제의 생성은 쇠퇴기에 돌입했다. 이미 국제영화제의 수가 포화된 수준에 이르렀단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개막했던 충무로국제영화제 경우는 2010년 4회를 마지막으로 2011년부터 잠정의 휴식 기간에 돌입했으며,12) 마찬가지로 2010년 4회까지 이어졌던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도 “정치적 배려가 있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13)는 평가와 함께 2011년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시네마디지털서울의 경우에는 CJ문화재단과 영화제사무국의 다른 방향성 때문에 결국 갑작스런 폐막을 알려,14) 예상보다 너무 짧은 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시작된 DMZ 다큐멘터리영화제 경우는 줄곧 경기콘텐츠진흥원 내 경기영상위원회에서 예산을 집행을 해왔지만, 2014년 6회째를 맞으면서 ‘사단법인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법인’을 설립을 계기로 예산에 대한 편성의 독립권을 얻게 됐다. 이를 통해 1997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던 국제영화제들의 사활을 건 승부가 몇 년 동안 더 치열해졌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얼마간의 경쟁 과정이 지난 후, 아마도 국내의 국제영화제 활동은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2007년 이후 국내의 국제영화제 활동이 쇠퇴기에 들어선 것은 정부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2007년 한국문화관광부이 발간한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에는 국내의 국제영화제 외에도 해외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가 담겨 있는데, 이 사례가 힌트가 되어준다.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는 세계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 베를린, 베니스’ 외 총 24개의 해외영화제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를 담는 조사이다.15) 해당 영화제들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분류하고 있는 A급 영화제 및 B급 영화제16)들의 목록과 다수 겹쳐지고, 또한 국제영화제작자연맹 공인 국제영화제의 목록과도 상당수 겹쳐진다. 다만 문화관광부의 조사는 다큐멘터리 관련 영화제가 대체로 제외되었으며,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가 단편영화제로서는 이례적으로 포함된 점만이 다르다. 따라서 이 선정 대상은 국제 공인 목록에 더불어, “개최시기와 작품 수, 관람객의 수를 중심으로”17) 해당 대상을 다시 구분한 결과라 여길 수 있다.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는 이밖에 해외의 성공적인 국제영화제들이 미국이나 라틴 대륙보다는 유럽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그리고 “미국 및 유럽에서 영화제에 대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은 극히 예외적”18)이라고도 명시하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 ‘영화제 사업 지원’에 대한 지적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연구는 다만 칸과 베를린이 프랑스와 독일정부의 지원을 50% 정도 직접 받는 것이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이외 유럽의 다수 영화제들이 ‘지방정부나 영화산업을 대표하는 기관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식으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하는 것’과 ‘미국의 경우는 지방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 지적들은 조금 오용된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 비교를 통해 정부는 국내의 국제영화제 지원에 대한 지표에 조금 수정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2007년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가 발간된 이후부터 국내의 국제영화제 지원에 대한 자세가 확연하게 소극적으로 변화했던 것이 그 증거다. 국제영화제에 대한 정부 지원정책과 상황조사는 당시 문화관광부의 조사와 2005년 이후 이어진 국내의 국제영화제 평가 시스템이 토대가 되어줬다. 문화관광부는 2007년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지원이 보다 까다로와진다”19)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2009년에는 전년에 비해 ‘서울국제영화제’와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등 2군데가 줄어든 지원목록이 발표되기도 했다. 당시 고정된 영화제 지원 목록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는 형편이다. 2009년 확정된 지원국제영화제의 목록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총 6개의 영화제들이 속해있었으며, 이들 영화제 목록을 결과적으로 국내의 국제영화제 열기를 이끈 주요한 영화제들이라 판단할 수 있다.

    국제영화제의 집행에 있어 가장 큰 장벽은 예산이다. 2007년 한국문화관광부의 조사 이후 국제영화제 정책은 실질적으로 예산을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를 증거로 국제영화제에 대한 국고보조금의 액수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제로 2010년을 기점으로 정부의 국제영화제의 지원액은 2009년의 42억에서 35억으로, 1년 새 17%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 차감됐다. 물론 국내 영화계는 반발하였다. 2010년에만 두 차례 ‘국제영화제의 지원 방향에 대한 토론’이 개최되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3월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주최의 토론회가 열린 데에 이어서, 4월에 연달아서 최문순 국회의원실과 공공미디어연구소,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가 공동주최한 ‘영화제 지원 발전방향’에 관한 토론회가 개최됐다.20) 그렇지만 일단 줄어든 예산의 비중이 다시 늘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문화관광부의 조사는 해외의 국제영화제들이 예산 확정을 ‘마켓사업의 확대와 자체의 펀딩 프로그램, 지역의 문화사업 활동, 관계자들이 중심이 된 모임 기구의 보조, 문화 콘텐츠 사업 등으로 유지되고 있다’21)는 점을 지적했는데, 현재에는 국내 국제영화제들의 조직위원회 역시 줄어든 예산의 확보를 위해 위의 지적과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부산영화제의 경우, 2010년 집행위원장 직에서 물러난 김동호 위원장은 자리에서 물러서며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가 안정적으로 서기 위해 지방 자치 단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재단법인화가 되어야 한다”22)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중앙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부터 독립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와 더불어 ‘지금껏 위원장 일인 중심의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비롯된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23) 역시 부산국제영화제의 또 다른 해결과제라 할 수 있다. 즉, 시스템의 내부적 혼란을 잠재우는 것이 외부와의 관계보다 중요하며, 이후 외부와의 관계 문제가 염려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에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부산국제영화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사례는 더 중요하다. 현재 부산은 독자적 행보를 위해 ‘케이블 TV를 인수해 그 채널을 통해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아시아의 영화를 1년 내내 방영한다’24)는 등의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산에 대한 해결과제는 무수한 영화제들 속에서 자리를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그리고 국제적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전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0년대에 급격하게 많아진 국내의 국제영화제들의 향후 행보는, 2007년의 조사를 기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행방은 오히려 2007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국제영화제의 활성화에 대한 반증이라 여길 수도 있다.

    1)박강미, 「국제영화제를 통한 지역활성화와 전략에 대한 연구」, 『글로벌문화콘텐츠』, 제7호, 2011, 29쪽.  2)옥성수 외, 『국제영화제 전략적 육성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07, 12-16쪽. 본고는 국제영화제를 ‘주제’에 따른 부산영화제 외의 7개의 영화제들, ‘장르’에 따른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외 9개의 영화제들, ‘기술력’에 따른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외 3개의 영화제들, ‘관객’에 따른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외 6개 영화제들, 불투명한 구분의 ‘광주국제영화제 등 총 26개의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3)김용언, <한류의 중심지? ‘강남’ 아니라 ‘영화의 도시’ 부산이다!>, ≪프레시안≫, 09/10/2013.  4)우석봉, 「국제영화제와 불꽃축제의 경제적 효과」, 『BDI포커스』, 제75호, 부산발전연구원, 2010, 3쪽.  5)김용언, 앞의 기사.  6)옥성수 외, 위의 책, 12쪽.  7)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연감』,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년, 282쪽.  8)오현진, 조아라, <평화를 향한 날개 짓 ‘광주국제영화제’>, ≪광주데일리뉴스≫, 20/06/2014.  9)김도학 외, ≪2006년 국제영화제 평가≫, 한국영상산업정책연구소, 2007, 37쪽.  10)김도학 외, 위의 연구, 50쪽.  11)김도학 외, 위의 연구, 61쪽.  12)김구철, <충무로영화제 ‘한류스타 축제’로 재탄생한다>, ≪문화일보≫, 08/04/2014 “2011년 중단됐던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가 대중문화 축제로 재탄생한다. (중략) 충무아트홀은 2016년부터는 행사를 본격적으로 열 예정이라며 (중략) 행사 전담 조직인 콘텐츠사업부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3)김형규, <인권⋅노동 영화제 지원금 현 정부 들어 대폭 줄었다>, ≪경향신문≫, 06/06/2011.  14)전종혁 외, 「흔들리는 영화제 이대로 좋은가?」, 영화진흥위원회, 2013, 4쪽.  15)옥성수 외, 같은 책, 29-30쪽. 칸, 안시애니메이션, 클레르몽페랑단편, 에딘버러, 런던, 베를린, 오버하우젠, 만하임, 선댄스, 뉴요그 로스앤젤레스, 동경, 도쿄 필멕스, 야마가타, 베니스, 로카르노, 산세바스찬, 카를로비 바리, 로테르담, 토론토, 벤쿠버, 모스크바, 상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24개.  16)국제사업부 글로벌마케팅팀, <국제영화제 참가지원 대상 목록>, 영화진흥위원회, 2014. A급 영화제(베를린, 베니스, 칸), B급 영화제(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로카르노, 산세바스찬, 시체스, 카를로비 바리, 안시 애니메이션, 선댄스, 토론토, 핫독, 야마가타 다큐멘터리) 외 나머지 다수의 C급 영화제들 포함.  17)옥성수 외, 같은 책, 29쪽.  18)옥성수 외, 같은 책, 30쪽.  19)문석, <국제영화제 정부 지원받기 어려워진다>, ≪씨네21≫, 03/04/2007.  20)김숙현, <문광부의 영화제 평가,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프레시안≫, 09/04/2010.  21)옥성수 외, 같은 책, 30∼40쪽.  22)이창수, <김동호 위원장 “PIFF, 제2의 인생 열어줬다”>, ≪스타뉴스≫, 15/10/2010.  23)전종혁 외, 같은 글, 7쪽.  24)김용언, 같은 기사.

    3. 해외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보인 성과들

    국내의 국제영화제 증가와 더불어, 국내 작가들의 해외영화제 진출 상황 역시 상향으로 증가되는 그래프를 그린다. 국내 영화연구에서 ‘코리안 뉴웨이브’라는 지칭은 대개 1980년대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 새롭게 등장한 사회파 한국영화의 기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익숙해진 이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처음에 저널리즘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1996년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제공된 영문 자료집 <코리안 뉴웨이브(Korean New Wave: Retrospective from 1980 to 1995)>의 발간25)이 계기가 되어 줬던 것이다. 이후 학계에서 ‘코리안 뉴웨이브’ 는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된다. 그렇지만 해외는 다르다. 흔히 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코리안 뉴웨이브 필름’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9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 언급되는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와 비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0년대 중반에서 시작해 80년대로 이어지는 영상시대를 지칭하는 단어인 ‘뉴웨이브’에 관한 논의를 우선 거쳐야 할 것이다.

    80년대 충무로 영화작업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영상시대의 경향은 이후 한국영화계에 역사적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당시 작품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작품들을 언급할 때에만 ‘예술화’에 가미된 ‘새로운 물결 만들기’ 의 운동을 언급할 수 있다.26) 다시 말해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박철수, 신승수, 박광수, 장길수, 장선우, 배용균, 정지영, 하명중, 이명세, 박종원, 김영빈, 장현수, 박종원, 황규덕, 박재호, 이정국, 김진해, 오병철, 이현승, 여균동, 김홍준, 이민용, 홍상수’27)에 이르는 90년대 초반 한국 영화담론을 주도했던 감독들의 호칭에 대한 논의를 거칠 때에야 그 이후의 세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해외의 학자들과 국내의 학계가 조금씩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코리안 뉴웨이브’란 용어는 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명확하게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온 용어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시점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해외 영화계에서 국내의 영화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해외 언론에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the Korean New Wave)’28) 혹은 ‘한국영화의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du cinéma coréen)’29)라는 용어를 언급하는 기사들이 조명하는 작품리스트는 국내와 다르다. 미국 ‘빌리지 보이즈’지의 경우, 1998년작인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을 시작으로, <박하사탕>(1999)과 <공동경비구역 JSA>(2000), 이창동의 2010년작 <시>에 이르기까지의 영화들을 ‘뉴웨이브’라 소개하고 있다. 서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는 김기덕의 2000년작 <섬>에서 시작해서 2002년작 <생활의 발견>과 <올드보이>(2003), <살인의 추억>(2003), <밀양>(2007)과 <시> 등을 언급하며 ‘누벨바그’란 명칭을 사용한다. 이처럼 국내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물결의 경향과 해외에서 언급되는 새로움의 경향이 다른 것은 이전 80년대 영화들에 대한 시각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영화학자들은 좀 더 세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90년대의 영화를 ‘르네상스 renaissance’라 진단한 반면에, 해외의 영화학자들은 1990년대 후반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서 한국의 작가들이 활약하던 시기를 ‘최초의’ 발견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프랑스 및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진영에서 한국영화는 주로 영화작품과 영화감독을 연결하는 ‘작가주의의 관점’에서 흥미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언급되었던 한국작가의 정리가 서로간의 퍼스펙티브 차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프랑스의 경우는 대체로 2000년 이후의 한국영화에 포커스를 맞춰 동양의 영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가가 바로 1998년 데뷔작 <강원도의 힘>을 시작으로 국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홍상수 감독이다. 2011년 3월 14일에서 28일까지,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욕망과 시간(Le désir et le temps)’을 테마로 한 홍상수 회고전(rétrospective Hong Sangsoo à la Cinémathèque française)을 개최했다. 당시 초청된 작품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극장전>(2005)과 <하하하>(2009), 그리고 <옥희의 영화>(2010)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필모그라피 전부를 아우르는 총 11편의 영화들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 장 프랑수아 로제는 홍상수를 가리켜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인물이며,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절망과 해학의 시선을 보여주는 감독”이란 언급과 더불어 “리얼리즘에 패러독스를 추가하고,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놀이를 즐기는 감독”30)이란 표현으로 그를 소개한다. 이외 평소 홍상수를 좋아한다고 언급하던 끌레어 드니의 경우는 ‘까이에 뒤 시네마’의 지면을 빌어, 폴 세잔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감각의 신체와 같은 동질성의 감상을 그의 영화가 감추고 있단 점을 통해31) 프랑스의 5,60년대 누벨바그 영화들의 현대화를 그의 작품들이 이루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홍상수라는 영화작가에 대한 실질적 언급은 국내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해외에서도 동시에 시작됐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감독들 역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라는 명분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들은 모두 해외영화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홍상수와 비슷한 시기에 언급된 다른 작가로는 임권택이 있다. 그가 국외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화 <서편제>(1993) 이후부터다. 이전 그의 작품들은 상하이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아시아의 몇몇 영화제에 머무는 수준이었지만 <서편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등지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 포문되었던 작품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던 <춘향뎐>(1999)이다. 포지티브지의 기자이자 한국영화에 대한 저서 <새로운 한국영화 원천, 서울 시네마>를 출간하기도 했던 아드리앙 공보는 임권택에 대한 노골적 존경을 전하기도 한다. 공보의 경우, 마찬가지로 당대 한국영화들을 ‘누벨바그’라는 명칭으로 묶는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쏟아져 나온 다양한 국제영화제급의 영화들 사이에 임권택을 넣는다. 그의 저서에서 임권택 감독은 “군국주의가 가져 온 한국 전통영화의 내력 안에서 새로운 물결을 시도한 장본인”32)이라 소개된다. 또한 그를 포함해 사회비판의 경향을 가진 다양한 작가들을 공보는 ‘한국의 누벨바그 세대’라 칭한다.33) 다만 그의 호칭이 다른 해외 필자들보다 더 세밀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새로운 물결에 속한 작가 리스트에 공보는 ‘장선우, 이광모, 임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등 1990년대 후반 다양한 한국의 영화감독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더불어 당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서울 시네마’라는 명칭으로 좁히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서울 시네마’란 독특한 명칭에는 이유가 있다. 아드리앙 공보는 일단 서울을 ‘공간’이란 특수성으로 인지했고, 그 공간의 정신이 한국의 영화 속에 담겼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人間’이란 한자를 예로 들며, 그는 이 글자가 ‘사람(人)과 공간(間)의 합’을 뜻한단 점,34) 그리고 결국 단어들의 결합이 ‘휴머니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리며 한국영화와 기타 다른 나라들의 영화적 차별점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즉, 동양의 공간과 시간 속에 포함된 ‘간격’의 의미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이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국 영화의 질적 편차가 다소 큰 상황, “어떤 감독이 훌륭한 데 비해, 어떤 감독들이 나쁜”35) 것 또한 이 새로운 흐름의 경향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다양한 차이들이 서울이란 공간에 대한 내부의 세밀한 변화를 미시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말이다. 예컨대 영화 <나쁜영화>(1997)나 <노랑머리>(1999), <실제상황>(2000)이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이 그리는 서울이란 도시의 황폐함은, 이 시기 완성된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번지 점프를 하다>(2000) 혹은 <아름다운 시절>(1998)이 그리는 노스텔지아와 정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36) 한국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반영하는 장소가 ‘서울’이라는 전제 하에, 공보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하더라도 내면적 의미의 연계가 서울을 여전히 ‘고향’ 삼아서 회귀적으로 영화에서 돌아오고 있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동물인 영화의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90년대 리얼리즘의 색채를 이어받아 다른 이들과 연관 지어 살고, 이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이들 캐릭터가 속한 풍경(paysage) 역시 무명의 장소(lieu d’anonymat)로서 그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37) 물론 이때 무명의 장소는 ‘서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보는 20세기 중반 서울이 급격한 성장으로 규모나 경제적으로 거대해지고, 따라서 이 공간이 정서의 스케치에 적합하지 않게 되자 한국영화가 이후 지방으로 눈을 돌린다고 지적한다.38) ‘부산’이나 ‘강원도’ 등 서울의 대체 공간이 영화에 드러난 예로 그가 드는 영화는 <강원도의 힘>(1998), <친구>(2001), <리베라메>(2000), <나비>(2003)와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이 지방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공보에 따르면 서울이 더 이상 ‘인간적인’ 공간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어느 특정 공간을 두고 언급된 것은 그만큼 이 시기 영화들이 지닌 콘텐츠의 내용이 해외에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심’과 함께 뻗어나간 증거라 볼 수 있다. 장 프랑수아 로제 역시 ‘르몽드’의 지면을 빌어 홍상수 영화에서 드러나는 서울이란 공간이 과거 누벨바그의 작가였던 에릭 로메르의 숨결을 이어받아 ‘현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조용한 아침의 공간 서울(Matins calmes à Séoul)”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39) 이러한 해외 연구자들의 언급들은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보여주는 다이나믹한 작업들이 결국 그 공간이 담은 사회적이고도 문화적인 상황과 맞물려 장소의 내면적 역사를 표현한다는 방증이 되어준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표 1. 참고)을 살펴보면,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세계적 스타로 부상한 한국의 작가는 홍상수 외에도 더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김기덕 감독이 있다. 그는 1996년의 <악어>부터 2012년작 <피에타>까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모든 필모그라피를 국제영화제를 통해 해외에 소개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김기덕의 경우, 해외의 필진들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교를 떠난 성장기에 대한 기록과 프랑스에서 1년간 체류했던 기록’과 같은 개인적 히스토리를 중요하게 언급한다.40) 주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영화를 관찰할 때에 필요한 지점들이다. 프랑스에서만 무려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그의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은 임권택의 <취화선>(2002)과 더불어 한국영화 최고의 스코어를 기록한 작품으로 기록되는데,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앞서 언급했던 홍상수나 임권택보다 더욱, 해외의 관객들은 김기덕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예측할 수 있다. 더불어 해외 필진들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사회에 대한 메시지에도 주목한다. 2004년 도빌아시아영화제에 <사마리아>(2004)가 초청되었을 당시도 마찬가지다. 김기덕은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를, “캐릭터들이 전적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존해 사건을 맞는다는 것, 그리고 특정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를 완성하였다 면”41)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사회를 겨냥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설명해 보인다.

    [<표 1>]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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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

    그리고 이창동 감독을 빠트릴 수 없다. 그의 다양한 경력들, 예를 들어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과거에 소설가로 활동하였던 것,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 경력, 심지어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것까지 해외의 다수 필진들은 그의 주요 약력으로 영화와 함께 언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2003년 2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제6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경력이 문학에 조예가 깊은 작가적 성향과 더불어 작품 해석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2005년 프랑스 국립 뤼미에르 영화학교가 그를 초청한 것에 이어, 2006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장관 레노 돈디유의 허락 하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한 것이 이창동의 독특한 경력으로 소개된다. 이는 공공연하게 그의 작가적 위상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해외의 필진들은 이창동의 작품 경향을 가리켜 ‘전형적인 한국식 멜로’를 드러내는 완성도 높은 ‘비극’이라 소개하는데,42) 이러한 작품의 예로 2007년작 <밀양>이나 2010년작 <시>가 주로 언급된다.

    한편, 박찬욱은 대학 시절 분석철학을 공부하며 더불어 영화미학이 아닌 ‘순수 미학’에 관심을 가진 것이 해외 보도자료에서 언급하는 그의 특이점 중 하나다. 그의 영화는 대표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현기증>(1958)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소개된다.43) 2009년 <박쥐>의 개봉 당시 감독은 직접 해외의 언론에서 이 같은 이야기들을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박찬욱의 경향은 가장 최근의 작품들까지도 이어진다. 심지어 그가 2013년에 미국에서 촬영을 진행한 영화 <스토커>의 경우, 이 작품은 멜로와 미스테리, 그리고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44)라는 명백한 언급으로 소개되고 있다. 박찬욱은 다른 한국영화 작가들과 다르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권보다 영어권에서 더 선호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절망에 따른 격노(La rage des désespérés)’와 ‘시적 야만성(Poétique de la sauvagerie)’, 그리고 ‘피로 물든 판타지(Fantaisies sanglantes)’의 성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간혹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16) 등 일부 작품에서 드러나는 ‘막간극(Entracte)’의 형식 역시 특별한 점이다.

    198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설립한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감독들 중에는 봉준호와 임상수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먼저 11기 졸업생인 봉준호의 경우, 이 시기 대표 연출작으로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 그리고 <마더>(2009) 등 3편을 소개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괴물>은 80년대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뿜어냈다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를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만들어진 가장 주목받을 만한 영화’ 전 세계 랭킹 4위에 올려놓기도 했다.45) 이밖에 봉준호는 2008년 완성된 옴니버스 영화 <도쿄!>에서 프랑스의 유명감독 ‘레오 까락스, 미셸 공드리’와 더불어 소개되었다는 이유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영화아카데미 5기 출신인 임상수 감독은 칸영화제 초청기록이 가장 중요한 프로필로 소개되는 작가다. 아드리안 공보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들에 도전적(provoquer) 경향이 있다고 언급하였고,46) <그때 그사람들>(2004)이나 <오래된 정원>(2007), <하녀>(2010)와 같은 작품들은 영화사적 측면에서 ‘역사를 용기 있게 말한다는 면이 중요하다’47)고 언급하기도 한다. 주로 박정희와 같은 정치적인 인물들, 혹은 당시의 역사를 그렸다는 점 자체, 그리고 한국의 초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오마주 등을 행했다는 점이 임상수의 특이점인 셈이다.

    한편, 해외 영화제의 한국영화 소개란에서 단연 돋보이는 역할은 도빌아시아영화제의 웹진이 맡는다. 도빌아시아영화제는 국외에서 진행되는 영화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한국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한 해외영화제다. 따라서 이 영화제에 초청되었거나, 혹은 회고전이 기획된 작가들 위주로 ‘한국영화의 해외영화제 진출 경향’을 살피는 것도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표 2. 참고) 가장 먼저 도빌아시아영화제의 최대 수혜자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작가로는 김지운이 있다. 유럽권에서 김지운 감독이 이름을 알린 것은 순전히 도빌아시아영화제의 공로가 크다. 2006년 도빌은 그를 ‘한국 영화계의 젊은 신동’이라 일컬으며 <달콤한 인생>(2005)을 필두로 한 필모그라피 전체를 언급하였는데,48)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를 바라보는 젊은 작가의 넓은 시야’에 있다. 시각적으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풀어갈 뿐 아니라, ‘복수’라는 테마에 있어서는 박찬욱 감독과 비슷한 지점에서 언급되는 ‘다채로운’ 인물이라는 점을 영화제는 꼬집는다. 도빌아시아영화제 이후 김지운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표 2>]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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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영화들

    허진호 역시 도빌아시아영화제를 통해 유럽에 소개된 작가 중 하나이다. 제8회 영화제의 파노라마 섹션에서 그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와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등 주요 작품들이 동시에 해외에 소개되었다. 당시의 영화제는 심은하와 한석규라는 한국 스타들의 열연을 언급하며, 이후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지적해 보인다.49) 이외 가장 최근 도빌이 언급한 작가로 ‘사회적인 소재를 스릴러로 풀어내는 감독’50)인 나홍진을 들 수 있다. 물론 나홍진의 영화들은 칸영화제 등 주요 영화제의 경로를 통해 해외에 소개되었기에, 도빌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외에 도빌아시아영화제는 1999년의 신상옥 감독, 2002년에 다시 신상옥 감독, 그리고 2004년의 김기덕, 2007년의 박찬욱, 2008년의 임권택, 2009년의 이창동과 이윤기, 2011년의 홍상수와 김지운 감독을 각각 ‘오마주 섹션’에 초청해서 특별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이어진 한국영화들의 해외 국제영화제에서의 선전은 도빌아시아영화제뿐 아니라 ‘칸영화제 경쟁부문’으로의 진출 역시 훌륭한 통로 역할을 했다. 도빌아시아영화제가 전문가들이나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는 것과 달리, 칸영화제는 국제적 도약 혹은 명성의 바로미터로 작용하기 때문에 국내 작가 영화 성장에 큰 몫을 했다. 주요한 사건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99년 52회 칸영화제에서 송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1999)이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후, 53회에 <춘향뎐>이 한국영화 최초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2002년 <취화선>이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 칸영화제와의 인연이 시작된 지점들이다. 그리고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2007년에는 이창동의 <밀양>을 통해 전도연이 여우주연상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박찬욱의 <박쥐>가 마침내 심사위원상을, 그리고 이창동의 2010년작 <시>가 각본상을 수상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의 영예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외 홍상수 감독은 <강원도의 힘>과 <다른 나라에서>(2012)에 이르기까지 총 8편을 칸영화제에 진입시키며 한국영화의 국제적 인지도 향상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장선우나 이명세, 임권택 등 감독들이 아시아태평양영화제나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국내의 해외영화제 진출의 전부였던 것을 감안하면 1999년 이후 해외국제영화에서 한국영화의 선전은 커다란 변화였음이 틀림없다.

    25)김소연, 「민족영화론의 변이와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담론의 형성」, 『대중서사연구』, 제15호, 대중서사학회, 2007, 291쪽.  26)문관규, 「한국영화운동사에서 ‘영상시대’의 등장 배경과 영화사적 의의」, 『씨네포럼』, 제14호,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2, 379쪽.  27)김소연, 앞의 논문, 294쪽.  28)Michael Atkinson, “Don’t Watch That, Watch This: Odd Man Out Blues”, New York Village Voice, 15/10/2014.  29)Yannick Vely, “La nouvelle vague coréenne”, Parismatch, 12/05/2009.  30)Jean-François Rauger, “LE DÉSIR ET LE TEMPS-RÉTROSPECTIVE HONG SANGSOO”, Communiqué de presse,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2011.  31)Claire Denis, “La sainte victoire de Hong Sang-soo”, Cahiers du cinéma no. 597, janvier 2005, p.37.  32)Adrien Gombeaud, Seoul cinéma: les origines du nouveau cinéma coréen, L’Harmattan, 2006, p.14.  33)Adrien Gombeaud, Ibid, p.14.  34)Adrien Gombeaud, Ibid, p.9.  35)Adrien Gombeaud, Ibid, p.13.  36)Adrien Gombeaud, Ibid, p.161.  37)Adrien Gombeaud, Ibid, p.62.  38)Adrien Gombeaud, Ibid, p.89  39)Jean-François Rauger, “The Day He Arrives. Matins calmes à Séoul : l’héritier d’Eric Rohmer est coréen”, Le Monde, 15/05/2012  40)StudioCineLive, “Kim Ki-Duk, l’insoumis”, L’express, 05/15/2007  41)Akatomy, “Kim Ki-Duk”,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23/03/2006.  42)http://www.20minutes.fr/cinema/589457-20100825-cinema-un-poeme-tres-inspire  43)http://twitchfilm.com/2009/07/thirst-bak-jwi-2009interview-with-park-chan-wook.html  44)Eric Neuhoff, “Stoker: l’hommage raté de Park Chan-wook à Hitchcock”, Le Figaro, 30/04/2013.  45)http://www.cineclubdecaen.com/analyse/listesdesmeilleursfilmsannees2000.htm  46)Adrien Gombeaud, op. cit, p.29.  47)http://www.lexpress.fr/culture/cinema/the-housemaid-de-im-sang-soo_886070.html  48)Akatomy, “Kim Jee-woon”,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18/03/2004.  49)Akatomy, “Hur Jin-ho”,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23/03/2006.  50)Kizushii, “Na Hong-jin”,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18/03/2009.

    4. 영화 분야에서의 한류

    한국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해외의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98년 제작된 <쉬리>는 2000년 일본에서 정식 개봉해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 기록은 기존 <서편제>(1993)의 일본 내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넘어선 것으로, 한국문화 자체에 대한 인식변화의 흐름과 함께 동반된 성과였다. 이처럼 한국 문화의 커다란 해외에서의 흐름을 ‘한류(韓流)’라 통칭한다. 한류는 한국의 대중문화, 즉 ‘영화, 방송, 대중음악, 패션’ 등 해외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식 용어이지만 한국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 한류의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 시장에서 한국영화의 위상 또한 높아지는 형편이다. 2010년 이후에는 한류의 부진에 의해 ‘제2의 한류’ 또는 ‘신한류(新韓流)’를 일으키자는 언론기사나 보고서가 다수 눈에 띄는데,51)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제1의 한류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신한류를 겨냥한 장르’라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제는 여러 모로 위태로운 한국영화의 한류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영화는 상업적 측면에서는 해외에서 명확한 성과를 언급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통상적으로 한류 연구가들은 1997년 중국에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시작되는 시기를 ‘한류 1기’라 칭한다.52) 당시의 예술 장르에는 드라마와 음악이 속해 있었을 뿐, 영화는 해당 대상이 아니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의 한류 심화기인 ‘한류 2기’의 시기에 게임과 함께 영화가 한류의 콘텐츠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만화, 캐릭터, 한글, 한식과 함께 한류의 다양화를 위한 ‘한류 3기’ 콘텐츠 상품으로 영화가 꾸준히 언급되는 형편이다. 한류의 시기 구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류는 드라마 중심으로 압도적 흐름을 보인다. K-pop 역시 2기에 이르러서 보아와 동방신기, 비 등의 가수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그러니 영화의 한류는 그 실체가 단독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여타 문화 콘텐츠의 흐름과 함께 부가적으로 편승되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위에 첨부된 표는 90년대 후반 한류의 흐름을 정리한 것으로, 각국에서 한류 콘텐츠가 된 중심 미디어들을 언급한다. 이 정리에 따르면 드라마와 음악, 온라인 게임 등이 속하는 문화 콘텐츠 영역에서 영화는 2기에 비로소 한류에 가입되기 시작한, 신생 한류 매체에 속하는 분야다.

    [<표 3>] 2000년대 중반까지 한류의 확산 과정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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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중반까지 한류의 확산 과정53)

    90년대 중반 드라마의 국외 성공에 힘입어, 그 문화의 흐름은 영화 분야까지 확산되었다. 영화 <쉬리>와 <엽기적인 그녀>(2001)는 그중 한류의 흐름을 선도했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언급된다. 시기는 대략 2000년대 초반 즈음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경우, <나의 야만스런 여자친구(我的野蠻女友)>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 개봉되던 당시 헐리우드 영화 <몬스터 주식회사>나 <오션스 일레븐>, <뷰티풀 마인드> 등 대작들을 제치고 연속 4주간 수익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당시 개봉되었던 다른 한국영화들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높은 수치였다. 예컨대 이전에 <쉬리>가 기록했던 성과보다도 훨씬 높았던 것이다. <쉬리>의 경우 70일 동안 597만 홍콩달러의 흥행수입을 개봉 4주 만에 달성하며54) 놀라움을 안겨준 적이 있지만, <엽기적인 그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류 콘텐츠 전체에 있어 <엽기적인 그녀>가 세운 기록은 소위 말하는 ‘니치마켓 Niche Market’이란 소규모 특화 시장에서 영화 콘텐츠가 공략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물론 영화에 앞서 ‘드라마’가 대기업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니치마켓의 성공 사례가 되어 이후 막강한 문화 콘텐츠로 성공하였다고 일부 연구자들은 언급한다.55) 영화 역시 2000년대 들어 해외수출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결과 예상치 못하게 <쉬리>와 <엽기적인 그녀>가 나타났는데, 이들을 비슷한 사례라 할 것이다. 홍콩에서 이 두 작품들이 성공한 이후, 당시 뒤이어 개봉된 한국영화는 무려 20여 편이 넘어서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다수의 작품들이 맥을 잃고 박스오피스에서 사라졌으며, 그 흐름은 눈에 보이는 한류로 연결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당시의 자료를 통해 특정 한국 영화의 인기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놓기는 곤란해 보인다. 다만 다음과 같은 간략한 정리는 가능하다. 2001년 수출된 <조폭마누라>나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이 조직폭력배나 남북분단문제를 다루는 영화들보다는 ‘평범한 일반인들의 웃음 가득한 일상’에 홍콩인들이 열광한다는 분석56)이 그 중 하나이다. 즉, 콘텐츠의 내용에 기반한 분석이다. 혹은 소재의 특이성이 홍콩 관객들의 취향에 맞았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2007년 당시 ‘한국 문화 교류의 해’를 앞두고 중국인 150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설문조사에서도 단일 작품이 선정된 것은 <엽기적인 그녀>가 유일하다.57) 그러니 명확하진 않더라도 이 작품이 해외 시장에서 한류로서 영화가 지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홍콩 뿐 대만에서도 이 영화는 ‘2002년 대만 박스오피스’ 15위에 오르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대만에서 성공한 한국영화도 <엽기적인 그녀>가 첫 번째 사례이다.

    한편 일본에서 한국영화의 흐름은 2000년 <쉬리>의 성공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2000년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쉬리>는 21위를 차지했는데, 이 기록은 한국영화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기대를 움트게 했다. 그 영향으로 “1998년에 1편, 1999년에 2편에 불과하던 한국영화의 극장개봉이 2000년에 14편, 2001년에 13편, 2002년에 10여편, 2003년 14편 등 급격히 증가”58)하는 경향을 보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수의 한국영화들이 다양성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미니씨어터’를 중심으로 개봉되었단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개봉 편수가 늘어난 채 선보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한류라는 명칭보다는 ‘일본에서 영화의 한류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정리하는 편이 나은 이유다. 일본에서 박스오피스는 대개 영화 자체의 품질보다는 여타 다른 이유들에 좌지우지된다. 예를 들어 2006년 수출되었던 <괴물>(2006)과 <왕의 남자> 같은 대작들은 예상한 만큼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와 <스캔들>(2003)은 각각 9억엔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또한 <4월의 눈(四月の雪)>이란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외출>(2005)도 23억엔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현지에 맞는 제목과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를 내세”59)웠다. 다시 말해 영화가 한류의 콘텐츠로 직접 작용했다기보다는, 드라마의 성공에 힘입어 탄생한 ‘배용준이나 최지우, 이병헌’ 등의 한류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일본 관객들의 관심을 빼앗았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은 해석이 될 것이다. 덧붙여 수출된 영화들의 주요 주제였던 ‘가족애와 사회 풍자’ 등 미시적 요인들 역시 한국영화의 원형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했다고도 이를 수 있다. 아직까지 일본에서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극히 미미한 이유는 어쩌면 한류라는 물결 속에서 무분별하게 수출한 영화들이 호응을 얻지 못하면서 낳은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한편 미국에서 한국영화는 통상적으로 “입지가 미미한 수준”60)으로 정리된다. 이는 제작과정에서 개봉 여부가 확정되지 않는 개봉 영화 대부분의 관례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영화 대부분은 미국에서 영화가 완성된 후 ‘마켓’을 통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드문 예외가 <디워>(2007)나 <박쥐> 정도다. 먼저 <디워>는 미국에서 개봉된 한국영화들 중 가장 많은 관심을 얻은 것으로 기록된 작품이다. “한국영화로는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하여 촬영되었고, 미국 내에서 2,277관 개봉 규모로 배급된”61) 작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개 액션 장르에 치우쳐 개봉되는 아시아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 선택을 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우위를 지닌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해 <디워>는 국내 업체 쇼박스의 투자로 제작된 이후 직배 형태로 개봉이 확정된 작품이기에 미국에서 직접 제작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미국의 스튜디오가 직접 투자에 참여했던 경우로는 2009년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제작에 참여했던 <박쥐>를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비견컨대 ‘<박쥐>가 기록한 극장 수입이 318,574달러이고, 이후 <디워>가 3배 이상인 10,977,621달러의 수입 수치를 올렸다는 점’62)에서 오히려 <디워>의 경우가 더 미국시장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경우라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디워>는 미국시장보다 국내에서 5배 더 많은 흥행수익을 올렸으며, 따라서 흥행성적으로 볼 때 두 영화 모두 한류 콘텐츠로 언급하기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비록 한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들이 미국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점은 약간의 한류에 대한 가능성이 될 수는 있다. 1999년 <텔미썸딩>을 필두로 2000년에는 <시월애>와 <공동경비구역 JSA>, 20001년에는 <조폭 마누라>와 <엽기적인 그녀>, 2002년에는 <가문의 영광>, <광복절 특사>, <중독>, <폰>이, 그리고 2003년에는 <선생 김봉두>, <올드보이>, <장화홍련>, <거울 속으로>, 2004년에는 <령>, 2006년에 <괴물>, 2008년에는 <추격자>와 <세븐 데이즈>, 그리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의 영화들이 미국 영화제작사에 저작권 판매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3) 이 사실을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의 입장에서 한국영화가 상업적으로 미국시장에서 성공할 여지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리메이크의 경우, 영화의 주제와 스타 마케팅, 혹은 감독의 연출력을 바탕으로 수익을 올리려는 ‘하이 콘셉트 high concept’에 기대는 경우가 많기에, 시나리오의 진출만으로 한류 가능성 여부를 언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끝으로 유럽에서 한국영화의 한류는 칸영화제를 중심으로 한 ‘예술영화시장’에 한정되어 작게나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언급한다. 2000년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이 이룩한 성과는 이후, 2001년 8월 31일에 한국영화 최초로 <춘향뎐>의 DVD가 프랑스 국내에서 출시되는 식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과를 이어왔다. 극장 개봉 역시 “2005년 한해에만 프랑스에 개봉된 한국영화 수가 총 11편”64)에 이를 정도로 그 수치가 증가했지만, 이런 경향을 ‘한류’라 이름붙일 만큼 대단한 상업적 성과라 부르기는 어렵다. 예술성을 중심에 둔 무거운 주제의 영화들이 대중들의 포괄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대중성의 측면에서 이런 영화들이 완전한 전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여타 국가들에 이어 유럽시장에서의 한국영화의 특징이다. 2011년 SM 타운이 주최하였던 한류콘서트의 경우도 마찬가지 예가 된다. 흔히 유럽에서 한류에 대한 바로미터로 국내는 이 SM타운 콘서트를 언급하지만, 음악에서의 한류가 존재하는지 또한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말하기는 이르다. 당시 “2011년 4월에 파리 공연에서 약 15분간 판매되었던 티켓 수만 5000장에 달하였다고 전해지며, 티켓 없이 수천 명의 청소년들이 콘서트장을 찾았다며”65) 프랑스 언론 역시 집중 보도를 전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후속 보도들이 이르듯 “이들의 평균 연령이 15세에서 25세 즈음으로 십대에 한정돼 있다는 점,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들이 K-pop 스타를 찾는 이유가 ‘아시아의 슈퍼스타’이기 때문인 점”66)은 이 흐름의 여전한 한계다. 이 때문에 음악적 한류 역시 유럽시장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한류라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론 K-pop스타일의 ‘뉴미디어’ 장르 개발을 통해 영화가 유투브 채널을 발판으로 ‘세계적 하이브리드 문화 상품’으로 연계될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유럽의 한국영화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영화 진영의 꾸준한 성과를 통해 명맥을 유지되고 있다고 정리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51)변미영, 「K-POP이 주도하는 신한류」, 『KOCCA 포커스』, 통권 31호, 한국콘텐츠진흥원, 2011, 1쪽.  52)변미영, 위의 논문, 4쪽.  53)고정민, 「한류 콘텐츠의 경쟁원천에 대한 연구」, 『문화산업연구』, 제5권 제2호, 한국문화산업학회, 2005, 9쪽 ‘<그림 1> 한류의 환산 과정’ 옮김.  54)손정호, <‘엽기적인 그녀’ 인기 폭발 - 홍콩 개봉 한국영화 최대 수입기록 갱신>, ≪홍콩수요저널≫, 03/03/2003.  55)고정민, 앞의 논문, 14쪽.  56)손정호, 앞의 기사.  57)신씨네 기획실, <2006 중국인 선정 ‘한국의 10대 상징’에 ‘엽기적인 그녀’>, ≪뉴스와이어≫, 01/11/2006.  58)서유정, 안성아, 황인석, 「일본에 수출된 한국영화 특성 분석」,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8호, 한국콘텐츠학회, 2008, 388쪽.  59)박은경, <일본 가는 한국 영화 마케팅의 법칙>, ≪경향신문≫, 11/06/2013.  60)민대진, 송영애, 「미국 개봉 한국영화의 문화 담론 연구」, 『영화연구』, 45호, 2010, 99쪽.  61)황동미, 한승희 외, ≪한국영화 미국시장 진출 유형 연구≫, 영화진흥위원회, 2009, 95쪽.  62)민대진, 송영애, 위의 논문, 100쪽.  63)민대진, 송영애, 위의 논문, 107쪽.  64)민지은, 최준, 「2000년 이후, 프랑스 영화 시장에서의 한국영화현황」, 『한국프랑스학논집』, 제76집, 2011, 2쪽.  65)Anne Demoulin, “La K-pop débarque au Zénith”, L’Express, 10/06/2011.  66)Ludmilla Intravaia, “TF1 News vous explique tout sur Girls’ Generation, le nouveau phénomène K-Pop”, TF1, 07/02/2012.

    5. 나오며

    2000년대 국내의 국제영화제 활성화가 어떠한 하나의 결과를 도출하진 못하였더라도, 그들이 여러 영화 산업과 어우러져 국내 영화산업 전체의 활성화를 이끌었단 점은 분명해 보인다. 관객들에게는 다양한 양질의 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주었으며, 영화인들 상호교류의 장 역할을 제공하였다. 영화예술 및 지역 문화산업의 발전, 문화의 다양성 증진 등 국제영화제의 활성화가 불러온 이점들은 1995년 이후 10년 동안 포화됐다. 그리하여 2000년 중반에 국내의 국제영화제들은 일차적 성과들을 얻은 이후 스스로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멈춰진 상태다. 대신 이들은 국제적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전략을 키우고 있다. 따라서 그렇지만 국제영화제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 장점은 여전하다고 보아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국제영화제는 개최지의 입장에서 많은 수의 방문자들로 인해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그리하여 단순한 관광 상품 이상의 ‘지역 문화 강화에 대한 표본’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내 작가들의 해외영화제 선전 역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대한 또 다른 지표가 되어준다.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임상수 등 다양한 감독들이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누벨바그’를 일으킨 것은 작품들의 수준과 더불어 이들이 공시적으로 일으킨 한국의 특이점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표출된 결과다. 공간의 문제에 대한 내면적 통찰이나 시간이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각자의 관찰 등이 이들 영화 속에 담겨 있다. 칸 영화제 등 세계 3대 영화제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이들 작가 다수가 도빌아시아영화제와 같은 아시아 영화의 창구를 통해 유럽에 소개된다는 점 역시 눈여겨 보아야한다. 도빌은 40년 전 도빌아메리칸영화제로 첫 막을 올린 이후, 지속적으로 특화된 영화제로의 행보를 이어왔다. 이 영화제가 아시아의 영화들을 섭렵했을 때, 그리고 그 주요 수상 명단에 한국영화가 속해 있을 때의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들은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에도 그 명성이 확대되었다. 더불어 국내 학계에서 ‘포스트 코리안 누벨바그’라 불리는 2000년대 작가들의 활동이 국내에서와 달리 해외에서 ‘포스트’가 제외된 채 언급된다는 점 또한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들 코리안 누벨바그 영화들을 통해,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국외 수용’이라는 문구의 사용이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더불어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에 대한 흐름에는 영화가 대중문화 사업의 카테고리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류 콘텐츠’로서의 역할 역시 빠트릴 수 없다. 비록 그 흐름의 높낮이는 달랐더라도 1999년 완성되었던 <쉬리>가 불러왔던 아시아에서의 한국영화 열풍은 2000년 이후 줄곧 이어져왔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열풍에는 블록버스터화된 제작 환경의 변화 역시 한몫했다. 시장 자체의 크기가 커지면서 영화산업 전반의 거대화가 이루어졌던 동시에, 이 두 교류가 상호작용해 결과적으로 서로를 더 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문화 마켓이 지속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점은 아쉽다. 마켓의 타겟이 정확하게 고려되지 않았기에 오발이 많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열기가 덜 전해진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영화적 한류는 미미했는데, 따라서 지금처럼 국제영화제를 통한 작가영화의 파급을 구상하는 편이 안정적 시장장악을 위한 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는 특화된 문화상품이 아니라, ‘다양성’을 무기로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부흥과 더불어 당대 영화 잡지의 흥행 등 1990년대 초기 씨네필들의 노력은 2000년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이 시기 한국영화가 이룩한 국제교류의 우월한 성적은 비단 국제적 시각에서만 빛을 발하였던 것은 아니다. 흥행 성적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정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향후 해외의 평단에서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릴 새로운 영화 세대의 출현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한류가 아닌, 뉴미디어 발전의 향방을 영화 매체가 수렴할 수 있기를 마찬가지로 기대하고 있다. 영화의 도약은 분명 국가 간의 장벽을 넘어 한국 문화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문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상호작용적 패러다임은 또 다시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끌 것이다.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 패러다임의 선두에 한국영화가 자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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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1> ]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
  • [ <표 2> ]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영화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영화들
  • [ <표 3> ]  2000년대 중반까지 한류의 확산 과정53)
    2000년대 중반까지 한류의 확산 과정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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