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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 Features of the Community in the South Korean Movie Welcome to DongMakGol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

Many human communities throughout history have emphasized social and cultural homogeneity to achieve common goals and preserve solidarity. However, this approach has also revealed limits, such as exclusivity and obstructiveness to outsiders. Rethinking the notion of community, Jean-Luc Nancy formulated the concept of “the inoperative community” to overcome these limits and present a new principle that does not assume homogeneity or unity. The inoperative community is the community that regards just “being together” itself as the primary value, so that relationships can exist even by virtue of doing nothing; these new or newly recognized relationships can then create changes in human existence.

This paper examines characteristics of the community depicted in the South Korean film Welcome to DongMakGol(Directed by Park Kwang-hyun and produced by Jang Jin·Lee Eun-ha·Ji Sang-yong, 2005) from the perspective of Nancy’s inoperative community. First, it discusses the nature of totalitarian communities and the way the inoperative community deconstructs such traditional notions of communities. Then, it analyzes the community presented in DongMakGol as an inoperative community by analyzing characters and events in the movie. DongMakGol is a place in which a variety of racial, linguistic, ideological, and national identities collide, intersect, and conflict with one another. Since the DongMakGol community does not assume the possibility of a “pure” identity, it doesn’t require people to assimilate into any homogeneous social body and instead transforms itself when newcomers arrive, fostering a “being-together” with them. In particular, the treatment of minorities and “death” in this movie makes cracks in the solidity of immanence, so that these tropes perform a huge role in formulating a “being-together” community.

Even though it is unrealistic to build an inoperative community like DongMakGol in real life, it is still meaningful to consider the model of the community we should pursue that it represents.

KEYWORD
<웰컴 투 동막골> , 무위의 공동체 , 공동체 , 장 뤽 낭시 , 함께 있음 , 동질성 , 죽음 , 배타성
  • 1. 들어가기

    인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필요에 의해 수많은 공동체를 만들어 왔고, 그 공동체는 개인과 단체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민족, 사상, 혈연, 종교, 국가 등 소위 ‘신화적 통합체’라 불리는 공동체는 과도하게 일반화되고 추상적인 공통성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투사시켜 왔으며 이를 통해 구성원 간에 강한 결집력을 도모해왔다. 즉 공동체는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를, 동질성을 지닌 하나의 사회적 집단체로 결속시키는 정치적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인간이 형성해 온 대부분의 공동체는 단일한 정체성을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명령해왔으며, 제도적인 틀과 권력을 유지하고 생산하는 연합을 우선시하였다. 개개인의 다름을 도외시하고 공동체가 표방하는 통일된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합하려는 시도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 고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전체성(全體性)’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

    그러나 이런 공동체의 가장 위험한 점은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에 도사리고 있는 배타성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구분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분리는 ‘우리’라는 테두리에 속해있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근간이 된다.

    20세기 후반 이후, 이러한 전통적 공동체 개념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 논리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는 ‘무위의 공동체’라는 급진적인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 논의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해주었다.2)

    한편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이 공동체를 주요 소재로 삼아왔는데, 이런 영화들은 특정 공동체를 미화하거나 비판하고,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서 일방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특히 적군과 아군이 확연히 구분되는 전쟁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3) 더군다나 자의든 타의든 이념으로 인해 갈라져 서로가 전쟁까지 치르고 반세기를 넘기도록 분단되어 살아온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다루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여타의 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4)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6·25 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에 고립된 인민군들, 상관의 불합리한 명령에 환멸을 느끼고 탈영한 국군들 그리고 추락한 전투기 조종사인 미군 등이 강원도 산골 오지마을인 동막골에서 조우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외부인들이 들어오면서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 차버린 동막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도저히 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국 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 영화에 나오는 동막골 공동체의 모습이 낭시가 말한 ‘무위의 공동체’의 특징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하고, 동막골 공동체를 통해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의 특징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전체주의적 공동체의 특성을 짚어본 후, 낭시가 주장한 ‘무위의 공동체’ 개념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이어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을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가 갖고 있는 특징과 비교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첫번째로 등장인물의 특징을, 두 번째로 공동체의 모습을, 세 번째로 공동체 내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낭시가 말하는 ‘무위의 공동체’의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논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성찰적 의미가 무엇인지 제안하고자 한다.

    1)장 뤽 낭시, 박준상 역,『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25쪽. 이를 낭시는 전체주의 또는 내재주의라 부른다.  2)권미원, 김인규·우정아·이영욱 역,『장소 특정적 미술』, 현실문화, 2013, 249쪽.  3)전쟁영화 뿐만 아니라 교도소, 전체주의국가, 학교, 수도원 등을 소재로 하는 다른 영화에서도 공동체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어서 이를 분석하면 낭시가 반대하는 영화 속 다양한 공동체를 비교할 수 있어 그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작품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또한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분량의 한계상, 영화<웰컴 투 동막골>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4)김은주, 「<웰컴 투 동막골>의 카니발적 요소에 대한 분석과 그것의 긍정적인 정치사회적 함의」, 『씨네포럼』통권7호, 2006, 40쪽.

    2. 전체주의적인 공동체

    일반적으로 공동체란 구성원들 사이의 고유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한편 공동체는 개인주의적 지향과 반대되는 모든 실천적 성향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5) 개체들이 모여서 스스로 강한 귀속감을 갖게 되는 이 공동체에는 고향과도 같은 친밀하고 동질적인 세계를 내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가족이나 지역공동체 그리고 크게는 국가공동체 등이 이에 속한다. 개인들은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고, 공동체의 집단적 경험이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다. 낭시가 바라보는 인간의 공동체들도 비슷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세상의 수많은 공동체들은 “마치 하나의 단일성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단일한 본질을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6)

    그러나 이런 공동체에는 폭력적인 형태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외부인에 대한 배제, 즉 배타성이다. 친숙함, 친밀함, 내밀함, 편안함 등의 감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내부성과 동질성은 결국 외부에서 끼어드는 친숙하지 않은 요소에 대해 강하게 배척하고 반발하는 모습을 띄게 된다.7) 그래서 만일 친숙하고 내밀한 자신들의 동질적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자기 주변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온 외부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공동(共同)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의미에 전혀 반(反)하는 태도, 즉 격리, 감금, 배제와 같은 폭압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즉 전체주의적인 공동체에서는 대부분 외부의 이질적 요소들에 대해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가시적으로는 이질적 요소들의 유입을 차단하여 동질성을 유지하려 하고, 외부자를 배제하여 친숙하고 친밀한 자기들만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내부와 외부의 차이를 인식하는 공동체는 정체성과 변이, 존재와 생성의 차이를 또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내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로 부터든 내부로 부터든 어떠한 변화의 요인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가리고 봉합하고, 그래도 터져 나오면 외부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데, 이러한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이상(理想)은 어떠한 변화도 없이 순수한 어떤 상태에 멈추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내재성을 이상이자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폭압적 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의 집단 또는 하나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조직과 체계를 통해 강한 결속을 이루려하기 때문이다.8) 이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낭시는 “인간 존재들의 하나여야 한다고 가정된 공동체는 결국 그 자신의 본질에 영향을 주거나 완전하게 영향을 주어야한다고 가정하며, 그 자체로 인간성의 본질이 된다.”고 말한다.9)

    이렇게 되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도 공동체의 목표에 사로잡혀 이성이 작동하지 않게 되며,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이라면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10) 이와 같은 공동체들은 결국 붕괴, 와해 그리고 분란을 초래하게 되며 그러한 공동체가 존재하는 사회는 분열되고, 자유와 행복은 ‘사유화(私有化)’라는 배타적 질서에 종속되며 퇴색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11)

    5)최수임, 「공동체의 장소, 상상의 공동체: 마리오 가르시아 토레스 <당신은 눈을 본 적이 있나요?>, 박솔뫼 <을>, 배수아 <북쪽 거실>」, 『인문과학』 제99집, 2013, 34쪽.  6)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박준상 역,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문학과 지성사, 2005, 107쪽.  7)이진경,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그린비, 2007, 553쪽.  8)장 뤽 낭시, 앞의 책, 25~26쪽, 41~42쪽. 개인은 일반적으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 그래서 인간 삶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은 한계없는 자신의 벽에 둘러싸인 안전한 근거로서 이를 ‘개인의 절대적 내재성’이라 한다. 내재주의(內在主義)는 바깥이 없다. 오직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이 그렇게 분리되어 고립될 때 결국 개인의 죽음을 낳는다. 이것은 결국 전체주의와 의미가 같다. 다수가 모여 있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낭시는 나치즘을 그렇게 본다. 이질적인 것들의 추방, 동질화된 개인들의 구축. 그러나 그로 인해 자국민들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내재성이다.  9)Jean-Luc Nancy, The Inoperative Communit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p.3.  10)위의 책, 41~42쪽. 이러한 예를 우리는 인류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을 통해 볼 수 있다. 멀게는 십자군의 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기치 아래 가미가제로 적에게 돌진했던 일본군, 가깝게는 베트남 전쟁, 인종청소를 표방한 세르비아-보스니아 내전 그리고 5·18 민주항쟁에서도 이런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인간의 수많은 전쟁은 결국 전체의 신념으로 고유한 인간성 자체를 말살시키는 행위이다. 종교, 이념, 국가, 민족공동체라는 대의명분은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과 남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을 다루며 지적한 바 있다.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77쪽.)  11)장 뤽 낭시, 앞의 책, 21쪽.

    3.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공동체가 차이보다는 단결을, 다양성보다는 전체성을 공동체의 이상으로 지향(指向)할 때 제기되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 대안적 방법을 고민했던 낭시는 ‘작동하지 않는(un-working)’ 공동체, ‘무위의(inoperative)’ 공동체를 제안하였다. 이는 고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통일성의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차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불안정한 공동체를 의미한다.12)

    공동체를 규정짓는 일반적 잣대로는 내부성과 외부성이라는 공간성의 차이, 동질성과 이질성, 순수성과 혼혈성, 정체와 변이, 존재와 생성의 차이 등이 있다.13) 그러나 낭시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외부적인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해 열려 있는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변화에 대해 열려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공동체는 지켜야 할 어떤 정체성도 없기에, 외부적인 또는 이질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켜 그들을 받아들인다.

    즉 낭시가 제안하는 공동체는 어떤 원리, 기준, 이념, 즉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의 이유와 목적이 ‘함께 있음’ 바로 그 자체이며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이라는 것이다. 그 무엇이나 어떤 것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를 나눈다는 것이다.14) 그리고 이렇게 ‘함께 있음’으로 인한 ‘함께 함’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無爲),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그들을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화시켜가는 과정이다.15) 다시 말하면 ‘무위(無爲, 비-행동)’라는 것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비(非)-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낭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너’와 ‘나’는 ‘우리’가 서로 닮았다고, 이해한다고, 같은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너’와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서로가 가깝다고 한다 해도 사실 우리는 서로에게 가 닿고 있지 않다. 하지만 ‘너’나 ‘나’나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기울어 있고,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옆에 살 수 있는 것이다.17) 이러한 공존에서는 그 무엇도 ‘나’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즉 낭시가 말하는 공동체는 결국 ‘나’와 ‘우리’가 공존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는 주변부와 중심부를 나누지 않고, 타자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인 자체가 공동체의 목적이나 이상이 될 수는 없다. 개인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내세울 때, 결국 개인은 파괴되고 죽음에 이른다. 이 개인의 ‘내재성’(內在性)을 허물자는 것이 낭시의 주장이다.18) 개인의 바깥을 열고 각자가 내재성의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외존(外存, exposition)’ 또는 ‘탈자태(脫自態, extase)’라 하는데, 이는 개인들의 한계를 직시하고 개인들이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19) 여기서 말하는 한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깥이고 한계이다. 그 바깥과 한계를 공유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실존이자 공동체이다. 그래서 실존은 ‘공동-내-존재’이다. 즉 존재가 곧 공동체인 것이다.

    이런 탈자태의 의식은 스스로의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서만 형성되며, 공동체는 탈자태의 지난한 몸부림으로 나의 한계인 바깥과 타자의 바깥이 ‘계속해서’ 만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공동체는 어떠한 시공간에서 고정된 형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낭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공동체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식한다. 그래서 그가 주장한 것은 바로 ‘공동-내의-존재(being-in-common)’이며 ‘존재의 공동체(community of being)’인 것이다.20)

    한편 ‘무위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는 죽음이다. 모든 인간은 육체를 가진 생물로서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런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육체’야말로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죽음은 인간들의 절대적 공통점이자 절대적 실존이다.21)

    ‘무위의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한 모든 단일화에 실패하는 공동체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항상 타자(他者)이며, 매순간 동일성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그런 구성원들이 모여 살게 하는 원동력은, 각 사람은 모두 죽을 존재라는 것을 서로가 인식하는 것이다. 죽음은 개개인에게 나의 한계와 타인의 한계를 보게 한다. 죽음과 고통은 각 사람이 서로 공유할 수 없는 동일성의 한계이며, 건널 수 없는 심연이다. 그것들이 그들을 공동체이게 하는 것이다.22)

    결국 낭시가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불가능성의 길’, ‘부재의 길’을 가야 하는 공동체이지만 그런 불가능성과 부재로부터 비로소 발원하는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공동체이다.

    12)권미원, 앞의 책, 249, 251쪽.  13)이진경, 앞의 책, 557쪽.  14)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앞의 책, 141쪽.  15)장 뤽 낭시, 앞의 책, 79쪽. ‘무위’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생산과 완성을 위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는 그들이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며, 그들이 만들어낸 성과물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16)Jean-Luc Nancy, op. cit., p.31.  17)장 뤽 낭시, 앞의 책, 26쪽.  18)장 뤽 낭시, 앞의 책, 24쪽., 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앞의 책, 13쪽. 여기서 말하는 내재성(內在性)이란 한 개인의 자아(ego)가 모든 판단과 사유의 근거가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공동체에 투사되면, 한 특정 개인의 자아를 공동체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설정하고, 공동체 내에서 자아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가정해버린다. 내재성은 안과 밖이 모두 자아로 채워져(결국 밖도 안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없으며, 자신 또한 타인을 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내재성이 충만한 사람은 오직 자신 말고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고유의 자기 동일성과 자기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을 내재성에 사로잡힌 인간이라 보았다.  19)장 뤽 낭시, 앞의 책, 29~30쪽., 박준상, 「무위의 공동체의 몇몇 개념들에 대하여」,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46집, 2010, 74~77쪽.  20)어떤 공동체가 가시적인 ‘무엇’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함께-있음’ 즉 실존의 나눔 외에는 그 어떤 무엇도 공동체의 목적일 수 없음이 바로‘존재의 공동체’이다.  21)알폰소 링기스, 김성균 역,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바다출판사, 2013, 261쪽.  22)뤽 낭시, 앞의 책, 98쪽. 낭시는 “매순간 우리 단수적 존재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분유하며, 자신들의 한계 위에서 서로를 분유한다”고 말한다.

    4.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무위의 공동체’

    ‘무위의 공동체’는 지켜야 할 어떠한 정체성도 없으며, 외부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다. 자신들을 규정짓는 상태나 순수성,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무언가 추가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이 이 공동체의 특징이다.

    이러한 공동체를 만약 ‘삼각형’의 공동체라 가정해본다면, 외부자들이 들어 왔을 때 그들은 공동체의 형태를 진동시키고 바꿔서 사각형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역으로 삼각형의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빠지게 된다고 했을 때, 그 공동체는 와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선이든 무엇이든 또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그 경계선을 허물며 탈바꿈해간다.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구심점이나 경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23)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무위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특징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소외된 자들이다. 그들은 힘없고, 실패하고, 버림받은 이들로 나온다. 마치 알폰소 링기스(Alphonso Lingis)가 이야기한 합리주의에 희생된 ‘타자(他者)’를 보는 듯하다.24)

    극중 인물인 인민군 상위 리수화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이후, 본부의 지원이 끊겨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부상병들을 인솔하고 북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기동력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전투나 피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게 된다. 군대에서의 명령 수행 의무와 인간으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마침 매복해있던 국군에 발각되어 결국 부하들을 대부분 잃게 되고 살아남은 2명을 데리고 허겁지겁 산속으로 도망가게 된다. 쫒기는 신세가 된 그는 본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적지에 눌러 앉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끌던 부하들이 떼죽음을 당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괴로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는 인물이다. 한편, 국군의 표현철 소위는 한강다리 폭파를 지시받고 수많은 피난민들을 같이 죽여야 하는 갈등 속에서 상관에게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 명령에 따라 다리를 폭파한다. 그러나 죽어간 수많은 피난민들을 생각하며 그 역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탈영하여 자살까지 시도하게 된다. 또 한명의 인물인 연합군 소속 미군 전투기 조종사 스미스는 극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25) 그는 전투기 추락 후 부상을 입고 동막골이라는 너무나 낯선 환경에 흘러 들어오게 된다. 동막골 주민들은 간호를 해주려 애쓰나 스미스는 피부색과 언어, 문화가 달라 섞이지 못하고 어린이들에게까지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리수화, 표현철, 스미스 모두 하나같이 소외당하고 아파하는 인물들이다.

    동막골 주민들 또한 대부분 약자들이다. 미쳐서 항상 행복해하고, 그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인 여일이라는 소녀, 약자의 대명사인 어린이 동구와 노인,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주민들. 이들은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자신들을 지킬만한 어떠한 방어력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26) 그동안 그들을 지켜준 것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아준 산골오지라는 지리적 환경 뿐이었다. 이들은 통념화된 공동체에서라면 자신들의 내재성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6·25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전쟁 당사자들의 관점에서는 승리를 위해서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이렇듯 동막골을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는 폭력적인 외부공동체의 침입에 너무 취약하게 보인다.

    동막골에 들어온 외부자들과 동막골 주민들의 면면을 보면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하나의 공동체로 섞일 수 없는 자들이다.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막골에 추락한 스미스는 언어때문에 주민들과 소통하지 못하며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표현철의 국군들과 리수화의 인민군 사이에는 적이라는 관계와 이념적 차이로 서로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은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다. 한편 외부자들과 주민들은 바깥의 세상 물정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빚어지는 문화적 차이로 갈등한다. 서로 섞일 수 없는 이러한 이질성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극심한 이질성으로 인해 깨질 것 같지 않던 갈등의 벽에 미세한 균열과 틈새를 내는 이들은 다름 아닌 기존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천하다고 간주되어 왔던 이들이다. 미친 소녀 여일의 순진무구한 웃음과 어린이들의 철없는 행동, 총부리와 수류탄 앞에서도 무심한 노인의 대응 등은 외부자들이 일으키는 첨예한 대립과 극심한 갈등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갈등, 분열 그리고 파괴의 도구들이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여일에게는 수류탄 안전핀이 가락지로 여겨지고, 살상무기인 폭격기와 전투기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며, 살생의 총부리는 동막골 사람들에게 그저 작대기에 불과했다. 이런 그들로 인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외부자들의 내재성에 균열이 만들어진다. 동막골 공동체가 견고한 경계로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배타성 안으로 갇혀있던 외부인들의 벽에 조금씩 틈새를 낸 것이다. 외부자들의 확고한 자신들만의 내재성이 흔들리는 과정은 영화의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동막골에서 처음 조우한 인민군과 국군이 적개심으로 가득 찬 채 극렬히 대치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주민들의 무심한 반응이다. 양쪽의 군인들이 총과 수류탄으로 살해의 위협을 가해도 그들은 주관심사인 마을의 식량이야기로 소란스럽다. 미친 소녀인 여일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외부인들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그들에게 상식과 예상을 벗어나는 황당한 질문을 던져 놀라게 한다. 꼼짝하지 말라는 외부인들의 겁박에도 어린이와 노인은 화장실에 일을 보러 가버린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념이 외부인들과는 다른 이들에 의해 외부인들의 견고한 내재성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은 무장해제 당한다.

    두 번째는 미친 소녀 여일이 인민군 서택기에게 낸 틈새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벌이는 극렬한 대치의 상황 하에 여일은 버선을 벗어 서택기의 얼굴을 닦아준다. 이 일로 인해 인민군 서택기는 여일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동안 갖고 있었던 전쟁의 참혹함과 자신만의 이념으로 굳어졌던 그의 내재성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후로도 여일은 서택기에게 일련의 행동으로 계속 균열과 틈새를 내게 된다.27)

    세 번째는 촌장의 어머니인 노인이 국군 표현철에게 내는 틈새이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자기로 인해 저질러진 한강다리 폭파로 죽어간 피난민들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풀썰매를 타고 노는 시간에도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그런 그를 놀이로 끌어들이는 사람은 노인이다. 노인은 그에게 풀썰매를 던져주며 손짓으로 타라고 권한다. 그런 그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주는 동막골 주민들은 외부인들과 조금씩 조금씩 섞여가며, 그들 사이를 확연하게 구분 지었던 확고한 정체성을 엷게 만들고 마침내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28) 이것의 정점을 이루는 모습이 영화에서는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의 형태로 나타난다.29) 순박하다 못해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공동체가 적대적이었던 외부인들과 ‘함께 함’이 된 것이다.

    네 번째는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고립된 스미스에게 다가가는 어린이 동구가 내는 틈새이다. 스미스는 원래부터 동막골과는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 어떤 것도 연관이 없는 자였다. 하늘에서 전투기를 모는 그에게 아래의 땅은 명령대로 폭탄을 투하하고 되돌아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밑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든, 어떤 사람이 죽어가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에게 불시착한 동네 동막골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부상당한 몸에다가 언어도, 음식도, 사고방식도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그러나 공통점 하나 없는 그에게 계속 다가가는 어린이 동구는 그가 갖고 있던 내재성에 균열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구에게는 언어도, 문화도, 인종도 스미스에게 다가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스미스는 이 땅을 폭격의 표적으로만 보았다가 동구로 인해 동막골 사람들과 함께 함이 되면서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인간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후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동막골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일에 기꺼이 나서게 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6·25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외부인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국가 권력에 부름을 받은 군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반대로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념을 저버리면 그는 공동체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그들이 동막골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군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념의 갈등으로 반목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외부인들 사이에 틈새를 내는 동막골 사람들에게는 언어도, 사상도, 생김새도, 그리고 감정도 구분과 차별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모두를 감싸 안으며 그들의 공동체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동막골 공동체에게는 이 무례한 외부자들을 배제시킬 만한 구분과 차별의 척도가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안으로 들어오기를 권유하지도, 설득하지도, 교화시키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외부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뿐이었으나 외부자들은 결국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외부인들이 볼 때 이런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규율과 지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동막골 공동체는 그런 방식이 작동하지 않고도 유지되는 공동체였다. 이는 촌장과 인민군 리수화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한편 동막골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무위의 공동체’의 특징으로 죽음을 들 수 있다. 옆에서 죽어가는 타인을 볼 때, 죽음이라는 사건앞에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될 때, 그 앞에서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감 속에 주체는 소실되고 모든 계획이나 유위(有爲)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30) 그리고 결국 공동체는 타인의 죽음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그 이유는 죽음을 통해 서로간의 한계를 직시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서로 나눔으로써 공동체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만큼은 서로가 사회적 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게 되며, ‘무위’에 처해 공동체 가운데 놓여 개별적인 ‘자아(ego)’들이 아닌 ‘나(I)’들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31)

    무위의 공동체에서 죽음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다. 즉 모두가 공유하는 죽음-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이것이 공동체의 출발이 된다. 비록 영화에서 그려진 죽음이 존재론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죽음이라 해도 그 의미는 반감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의 죽음을 보면 위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첫 번째는 여일의 죽음이다. 미친 소녀 여일은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뛰어다니고, 비 맞고, 춤추고, 산속을 돌아다니는 것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동막골 공동체는 어떠한 차별도 가하지 않았다. 그 여일이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같이 공유할 수 없는 그녀의 죽음 앞에서 모두는 슬퍼한다. 그녀의 죽음을 통해 기존의 동막골 사람들과 그들과 같이 공동체가 된 외부자들은 여일이 ‘여기 함께 있었음’을 인식하고, 동시에 ‘여기 함께 없음’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해 낭시는 “죽음은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공동체는 죽음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32) 그들 모두는 여일의 죽음을 통해 미친 소녀에 불과해보였던 그녀를 한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녀와 모두는 공동체적 존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외부인이었던 리수화와 표현철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죽음이다. 축제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스미스를 구하기 위해 연합군이 동막골에 출현하게 되면서 동막골 공동체에는 다시 대립과 분리의 상태로 되돌아가라는 현실 세계의 명령이 발동된다. 그러나 그들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33) 그리고 동막골이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해를 당할까봐 스스로 자신들에게로 폭격을 유도하며 하나 둘씩 죽어간다. 영화의 초반에서 이념적 차이로 극한 대립의 관계에 놓여있던 그들이 공동체로서 함께 함이 되면서, 이제 그들은 서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들 자신도 또한 죽어간다. 한 존재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그 존재와 함께였고, 그 존재 또한 자신과 함께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죽음은 사람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킨다. 죽음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자신 이외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행위할 수 없는 상태로의 이행이다. 주체로서 나는 도중에 소멸해버리는 것이기에 죽음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반면 오히려 죽음을 사건으로 완결시키는 것은 죽음을 보고 알아차리는 타자이다.

    이 영화에서 여일의 죽음으로 인민군, 국군, 미군은 그들이 동막골 주민들과 공동체임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공동체를 살리려는 새로운 결심-이 결심은 여일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차원이 아니었다-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떠나고, 스스로 기꺼이 죽음을 맞는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국가도, 이데올로기도, 신념도 아니었다. 그저 소박한 작은 공동체였다. 그 공동체를 폭격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자신들에게로 폭격을 유도하고 웃으며 죽어갔다. 그들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동막골을 통해 결국 자신들이 공동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나눈 대화를 통해 부지불식간 서로가 공동체가 되었음을 영화는 잘 말해주고 있다.

    그들이 죽음을 맞기 직전, 말없이 웃으며 서로의 눈빛을 응시했던 마지막 장면은 죽음을 통해서 그들이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죽음이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공동체를 드러낼 수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34) 결국 공동의 실존에 끈질기게 집착하도록 만드는 가치를 가져오는 감정적 요소는 바로 죽음이었다.35)

    여일이 죽었다. 그리고 처음 외부인으로 왔던 이들도 죽었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공동체가 남았다. 죽음을 통해 그들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공동체를 결국 이루었고, 그 공동체가 남았다. 여일의 죽음이 그리고 외부자였던 그들의 죽음(희생)이 동막골 공동체를 존재의 공동체로 드러나게 하였다. 죽음으로 완성한 그들의 공동체 안에는 이념도, 국가도, 민족도 그 어떤 것도 그들을 갈라놓을 척도는 없었다. 이는 낭시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상통된다. “만일 공동체가 타인의 죽음에 의해 드러난다면 그것은 죽음 그 자체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음은 그들의 불가능한 연합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36)

    23)물론 동막골 공동체에 촌장이라는 지도자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일방적인 엄숙함, 권위, 독단주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부락사람들을 배부르게 잘 먹이는 일이 그의 가장 큰 임무이다.  24)알폰소 링기스, 앞의 책, 199~221쪽.  25)김정란, 「웰컴 투 동막골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의 분석」, 『프랑스문화연구』제15집, 2007, 357, 359쪽.  26)이는 ‘동막골’이라는 이름의 뜻을 국군 표현철 등에게 설명하는 주민의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아이들처럼 막 살아라’라고 해서 동(童)막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즉 동막골은 사회화된 규범보다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인간의 본성을 더 추구하는 공동체임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중국어판 영화에서는 동막골을 東莫村이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주민의 대사나 전체적 맥락에서는 동(童)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27)여일은 자고 있는 서택기의 머리에 몰래 꽃을 꼽아주거나, 문상상, 서택기등과 들판에서 같이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한다. 한번은 멧돼지에 쫒기는 여일을 서택기가 자기 몸을 던져 구해주게 되는데, 그런 일들을 겪으며 서택기는 여일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여일은 서택기의 내재성(이데올로기에 가장 충성스러움)을 허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 상징적인 모습으로, 어느 날 마을 한가운데서 비를 맞고 서있는 여일에게 서택기가 자신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인민군 깃발을 얼굴을 닦으라고 내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28)극도로 대치하던 인민군과 국군 양측이 대립을 풀고 난 후, 이념이라는 각자의 내재성을 상징하는 젖은 군복을 빨랫줄에 말리고 그들이 마을 사람들과 같은 복장을 하게 되는 장면은 서로가 점점 ‘함께 함’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29)이 축제가 영화에서 갖는 의미는 스미스가 할머니를 업고 집으로 가며 하는 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스미스는 “Look at them. Such a good time. That’s life”라고 말한다. 외부인이었던 스미스가 동막골 공동체와 함께 하며 드디어 그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사라 할 수 있다.  30)이진경, 「코뮨주의에서 공동성과 특이성」, 『탈경계 인문학』 제3권 제2호, 2010, 293쪽.  31)장 뤽 낭시, 앞의 책, 47, 98쪽.  32)Jean-Luc Nancy, op. cit., p.14.  33)권정희, 「이데올로기는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계간 <논>』 2009년 겨울호(통권 31호), 2009, 261쪽.  34)이 장면을 김은주(2006)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들이 죽음의 순간에 서로를 돌아보며 웃을 수 있던 것은 바로 진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35)장 뤽 낭시, 앞의 책, 85쪽.  36)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앞의 책, 17쪽.

    5. 나가기

    지금까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을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막골은 인종, 언어, 문화, 사상, 이념이 부딪히고 개인적 특성들이 충돌하는, 철저한 갈등의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무수히 많은 법칙과 일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 동막골 바깥의 세상과, 권위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나 이분법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 동막골과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적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결속, 편안함, 친숙함이 중요하며 그것을 지켜내려 외부인들을 강하게 배척할 수 있겠지만, 동막골 공동체에게는 친숙함을 뜻하는 내부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친숙함이란 그때마다 새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었으며, 아무리 가까워져도 새로운 외부자가 끼어들 여백과 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 가까운 사람과 덜 가까운 사람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순수한 내부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동막골 공동체에게는 외부자들을 배척하거나 구분 짓고 차별할 어떤 척도도 없었던 것이다.37)

    동막골에서 펼쳐지는 공동체는, 굳이 자신들이 어떤 공동체인가를 인식하려 하지도, 유지하려 하지도 않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켜야 할 어떤 정체성이 없기에, 새로운 외부자가 들어오면 그들은 그에 맞춰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켰다. 민족성, 위계질서, 사상, 심지어 감정이라 불리는 어떤 지녀야 할 또 다른 순수성,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어떤 외부자도 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내재성으로 똘똘 뭉쳐있던 외부자들까지 변화시켰다.

    낭시가 반대하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사회’38) 와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적, 전체주의적 시도이다.39) 반대로 낭시가 주장한 공동체는 ‘공동-내-존재’로서 ‘나’와 타인이 함께 있는 것은 무엇을 나누고 공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있기 위한 공동체이다. 그것은 다른 목적이 없는 실존의 문제로서, ‘나’처럼 되기를 강요하지 않고 ‘너’처럼 되기를 강요받지 않고, ‘너’와 ‘내’가 그냥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도 좋은, 어떤 기준에 맞추라고 동질성을 강요받지 않는 그런 공동체이다. 즉 전체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전통적 공동체나 구조화된 폐쇄적 공동체 대신에, 동일한 이념이나 목적을 상정하지 않으며, 제약 없는 관계 중심의 소통을 지향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낭시가 말하는 ‘구조 밖의 공동체’, ‘공동체 밖의 공동체’, ‘공동체를 부정하는 공동체’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타자와 동일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만나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자신과 타자, 자신과 공동체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한계와 만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편안함이나 만족을 느끼지만, 그러한 방식의 관계 맺기는 우리가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계에서는 타자로부터 자기의 한계를 볼 수 없다.

    재산, 종교, 이념, 믿음과 같은 실체적인 ‘무엇’의 공유를 자기 근거로 삼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사라짐을 두려워하는 이들만이 ‘공동체’를 ‘공동의 무엇을 위해 나누는’ 집단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지 않는, ‘무엇’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모든 가치들로부터의 뿌리 뽑힘을 감수하고서라도 혹은 우리의 믿음, 신념의 급진적 박탈을 감수하고 서라도 미완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공동체는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합일(合一)이 아니라, 합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 구성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진정한 공동체는 어떤 것이며,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영상으로 그리고 낭시의 주장은 이 영상의 자막처럼 답해주고 있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권력과 부를 쥔 자가 나머지를 착취하거나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비본질적 공동체, 아무것도 쟁취하려 들지 않는 공동체, 누군가의 실존을 그의 가능성이나 잠재성에 두고 다른 사람과 차별되지 않게 함께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타자와 구분되지 않고 모호한 채로, 바로 그 모호성을 공유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권력을 잡지 않으면서 세계를 변화시켜가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관념, 이념,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본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처럼 현실에서는 어쩌면 실현불가능한 공동체를 보여줬을지라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37)이진경, 앞의 책, 556쪽.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의 『파라다이스』라는 소설 속의 내용을 가지고 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38)여기서 ‘사회’는 힘들, 욕구들, 기호들에 따라 분리되는 결합체로서 소위 게젤샤프트(Gesellschaft)를 말한다.(장 뤽 낭시, 앞의 책, 40쪽)  39)박준상, <21세기 사유들 ⑨장 뤽 낭시-무위의 공동체>,《서울대학신문》, 200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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