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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영웅의 대중적 호출과 역사적 상상력 A Public Call for a Hero and a Historical Imagination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영웅의 대중적 호출과 역사적 상상력

This article aims at figuring out and signifying cause of the success of the movie Myeong-ryang released in 2014 in the perspective of ‘public’s subjective determination and writing history’ not ‘leadership’. Though the movie Myeong-ryang shows leadership of Admiral Yi Sun-sin but this essential requirement beyond the time cannot be new one to reveal sufficiently the cause of the success of Myeong-ryang. More importantly, the process that ‘people’ represented in the film, escaping from abandonment and fear, have been in the place of historical agents, are well described in the film. Yi Sun-sin is a helper for growth of people as historical agents. The fact that the movie Myeong-ryang rewrites a history focusing on people not on Yi Sun-sin and creates a utopian time and space is related to this. As he is described not as a simply deific ideological hero but one of people, who has faced and challenged against agonies and difficulties, it becomes possible. In 2014, the contemporary public was identified with people who came into the center of the Battle of Myeong-ryang, and they could have a vicarious experience to become historical agents, escaping from abandonment and fear of the reality.

KEYWORD
<명량> , 리더십 , 역사적 주체 , 유토피아의 시공간 , 백성의 주체적 결단 , 역사 쓰기 , 이순신 중심의 역사 , 백성 중심의 역사
  • 1. 이순신, 대중 그리고 영화

    왜 대중은 영화 <명량>에 그토록 열광했는가. 영화 <명량>이 영화 관람객수 176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작년 한 해 한국영화의 한 획을 그었을 때, 영화 관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남겨진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개봉 당시 일부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평가1), 특히 해전의 스펙타클에 가려진 ‘캐릭터와 서사’의 미흡함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오히려 ‘캐릭터’와 ‘서사’를 통해 주목받았다.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이순신 이외의 다른 캐릭터들의 특징이 두드러지거나 서사가 입체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변적 캐릭터들의 생명이 축소되고 서사의 입체성이 다소 결여된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중심에 놓은 단순 명료한 서사 속에 주름잡힌 채 가려져 있는 세밀한 인물의 구체성과 서사의 입체성이 그만큼 생산적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을 새롭게 펼쳐 보일 필요성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해전의 스펙타클에 가려진 인물의 구체성과 서사의 입체성, 이것은 영화 안의 인물과 서사를 대하는(관람하는) 대중(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구현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의미의 구현이다. “이 영화가 굉장히 밀도감이 있게, 결말부까지 어떤 정서를 채워 가면서 상승한다고 생각”2)한다는 감독의 말은 이순신과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특정한 정서로 이끌어 가는 의도와 역량의 한 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떤 정서”는 바로 이순신과 백성의 혼연일체 과정의 구체성 속에서 비로소 구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이순신’과 ‘백성’, ‘혼연일체의 과정’과 그것에 의해 추동되는 고양된 ‘정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몇 가지 키워드에는 세심하게 따져 보아야 할 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순신’과 ‘백성’의 관계를 살필 때, 우리가 <명량>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백성’의 새로운 출현이다.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이순신’과 ‘백성’의 출현이 동일선상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게 가능했는가.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로 이순신을 다뤘다고 할 수 있는 이용민 감독의 1955년작 <성웅 이순신>3)은 우상화된 탁월한 영웅을 다룬다. 이후 1962년 유현목이 감독한 <임진란과 성웅 이순신> 또한 이순신을 너무 신격화하고4), 충무공의 가정 주변 이야기를 겨우 드러냈다고 평가됨으로써5) ‘이순신’이 ‘구국의 영웅’으로 신격화·우상화되는 영화적 재현의 역사적 상황을 보여 준다. 이렇듯 패턴화된 재현의 양상은 이후의 이순신 영화6)에서 반복 재생산됨으로써 구국의 영웅이자 위대한 지도자인 이순신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대중적 심급으로 작용해 왔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사실 2014년 <명량> 흥행에 대한 평가의 중심에 놓인 ‘리더십’이라는 키워드는 그다지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7) 백성이 훌륭한 리더를 원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적 요구이다. 게다가 ‘리더에의 요구’라는 평가의 이면에는 ‘백성의 수동적 추종’, ‘타자화된 백성’ 혹은 ‘백성-리더’ 간의 명백한 경계선’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백성’의 새로운 출현은 바로 이 경계와 일방적 추종의 관계를 허무는 과정이다. 영화 <명량>에서 ‘백성’의 출현을 새롭게 읽어야 할 필요성과 의미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혼연일체의 과정’ 자체가 지닌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개인의 탁월한 영웅성을 삭제한다. 혹자는 “국난 극복의 리더십을 메시아적 영웅에서 찾는 대중심리가 팽배해지며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다”8)고 하지만, 사실 ‘이순신의 무인으로서의 전략과 지략가로서의 모습이 패착일 수 있다는 점, 해전에서 정신적인 것, 정신적 요체를 보여 주고자 했다는’9) 감독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순신의 능력은 ‘정신적인 것’에 맞춰져 있다. 핵심은 무인으로서의 전략과 지략을 통해 나라를 구한 영웅보다는 ‘정신적 요체’라는 심리적·정서적 특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영화에서 61분을 할애한 해전은 화려한 스펙타클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순신과 백성들의 불굴의 의지와 인내의 서사를 새로 쓴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표면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시각화된 스펙타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순신과 백성들의 치열한 투쟁의 표정과 몸짓은 이순신 개인의 탁월한 영웅성을 희석하고 백성과 혼연일체가 된 한 개인의 표정을 보여 주는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명량>의 혼연일체 과정은 개인적 영웅성을 희석함으로써, 백성과 리더의 경계를 허물고 ‘주체-타자’의 고정된 관계를 허물어 버린다. 여기에서 바로 역사적 주체로서의 백성의 출현이 가능해진다.

    비로소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 등극하게 된 백성, 이순신이라는 정신적 요체의 자리에 함께 하는 이들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어떤 정서”를 환기하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순신의 개인적 탁월한 능력을 재현한 기존의 영화와 2014년 <명량>이 갈라서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또한 이 맥락 안에서 ‘대중’과 ‘영화’가 맺는 고유한 관계에 대한 성찰 또한 가능해진다. 개인화된 영웅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는 백성을 다룰 때, 영화는 새로운 역사 쓰기의 대중적 판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동떨어진 구국의 영웅은 2014년 현재, 대중의 욕망과 부합할 수 없다. 대중의 역사적 실존과 삶 전체의 맥락과 함께 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그 인물이 나의 삶과 부합된 혹은 나의 삶 속에 녹아든 그 무엇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 담론의 수준에서 회자되는 영화의 ‘작품성’과는 상관 없이 영화가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데는 그와 같은 현재 대중의 삶과 부합된 무엇을 제시하고 있다는 공통의 정서적 공감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실 따져 봐야 할 것은 영화 <명량>에 재현된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혹은 리더십이라는 시대적 초월성에 기반한 역사적 당위성이 아니다. 대중이 영웅을 호출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실존을 어떻게 써 나가고 있는가 혹은 욕망을 어떻게 구현하는가, 영화 <명량>의 역사적 소거와 복원을 통해 대중이 주체가 되는 어떠한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대중적 역사 쓰기의 판본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1)영화 전문 잡지 『씨네21』에 영화 평론가들이 게재한 평가들, “폭발해야 했던 건 배가 아니라 이야기(정지혜)”, “전투에 앞서 침몰하는 캐릭터들(박평식)”, “해전 신을 꽤 볼만하다(김성훈)”, “해상전의 제물이 된 인물과 이야기(장영업)”, “인물은 흐릿하고 해전만 요란하다(이용철)”, “해전의 치열함 속에 묻혀버린 캐릭터(이화정)”(「전문가들의 영화 20자평」, 『씨네21』966호, 한겨레신문사, 2014. 8.12) 등은 모두 스펙타클한 해전에 묻혀 버린 서사와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영화 <명량>을 완성도가 미흡한 영화로 평가했다.  2)「영화 <명량>연출 김한민 감독 독점 인터뷰」, 『월간중앙』466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9, 144쪽.  3)이용민 감독의 영화 <성웅 이순신>은 한국교재영화연구소에서 제작하고 충무공기념사업회의 검정을 받았으며 문교부와 국방부의 추천을 받은 영화이다. 이은상의 원작을 이용민이 감독한 것으로, 영화는 그림을 필름의 형태로 제작하여 한컷씩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한컷마다 나레이션이 삽입되어 이순신의 탄생과 죽음까지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4)이와 관련된 내용은 <【신영화】너무 신격화된 느낌 <임진란과 성웅 이순신>>, 《동아일보》, 1962. 4. 18자 기사 참조.  5)<【새영화】국민적인 사극물 임진난과 성웅 이순신>, 《경향신문》, 1962. 4. 24.  6)이규웅 감독의 1971년 작품 <성웅 이순신>과 김성칠 감독의 1981년 작품<구국의 영웅 성웅 이순신> 등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 재생산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7)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평가로 다음의 글들을 참고할 수 있다. 「1760만 백성이 그를 그리워하다」, 『시사저널』1314호, 시사저널사, 2014. 12. 23. 황진미, 「명량 가까운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한겨레21』1024호, 한겨레신문사, 2014. 8. 18. 구희언, 「리더 갈증 시대가 이순신을 다시 불렀다」, 『주간동아』951호, 동아일보사, 2014. 8. 13. 고재열, 「‘명량 열풍’ 누구냐, 넌」, 『시사in』362호, 참언론, 2014. 8. 23. 박성민, 「희생과 소통의 리더십에 목 말랐다」, 『이코노미스트』1266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12. 22. 강유정, 「영화가 역사를 부르는 까닭」, 『월간중앙』466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9. 위의 평가들의 중심에 있는 ‘리더십’은 영화 <명량>이 반영하는 주제를 충분히 드러내 준다. 다만, 이러한 ‘리더십’에 고정된 일관된 평가는 <명량>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다양성을 획일화할 수 있는 평이하고 안일한 해석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8)고재열, 위의 글, 14쪽.  9)「영화 <명량>연출 김한민 감독 독점 인터뷰」, 『월간중앙』466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9, 143쪽 참조.

    2. 소환된 영웅, 대중의 역사적 실존과 욕망의 문제

    영화 <명량>이 개봉될 즈음, 세 편의 사극 영화가 개봉했다. <명량>이 개봉한 7월 30일보다 조금 앞서 <군도: 민란의 시대>가 7월 23일에 개봉했고,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8월 6일로 조금 늦게 개봉했다. 이 세 편의 영화는 개봉 시기도 비슷했지만,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 설정도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군도: 민란의 시대>가 조선시대 민초들의 반란을 중심으로 그들의 자생적 ‘영웅담’을 재현했다면, <해적:바다로 간 산적>은 ‘해적’이라는 타자화된 인물을 소환하여 ‘영웅담’을 전개해 나갔다.

    세 영화의 ‘영웅담’에만 초점을 맞출 때, 왜 하필 <명량>의 그것이 가장 흥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순신’이 특화된 혹은 가장 대표적인 영웅 서사의 역사적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두 영화와 비해 ‘이순신’은 실존하는 역사적 존재이다. 그런 인물이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고문을 당하는 시련과 고난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고정된 역사적 사실의 재현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축소된 사실을 극적으로 극대화하여 재현하는 이 방식 안에는 대중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역사적 사실 판단을 전복하고 이순신을 신화적 영웅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와 현실적 인물로 재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개인 및 집단이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나 영웅적 인물들의 쉴 새 없는 교체 속에서 민족이나 계급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는 점에 비춰 보면,10) 신격화된 영웅의 자리에서 벗어나 현실의 실존적 인물로 위치 변경된 이순신의 모습은 ‘민족’이나 ‘계급’ 정체성이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전복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민족이나 계급 이데올로기의 구축 중심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이순신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의 ‘수난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이순신이 영화 <명량>의 살아 있는 인물이다.11)

    더 이상 민족과 계급의 집단 이데올로기의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지 않은 채, ‘수난자’로서의 정체성으로 현실의 자리로 내려온 이순신은 이제 대중의 역사적 실존과 맞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12)

    영화의 이채롭고 인상적인 이순신의 꿈 장면에서 그것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일종의 ‘제의’를 표방함으로써 이순신과 백성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지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영화적 해석이 가해진 장면이라는 점에서 대중이 영웅을 호출하는 방식의 일단을 잘 보여 준다.13) 아들이 회와 술을 마시면서 백성의 ‘두려움’에 대한 말을 나누던 이순신은 잠결에 이순신을 찾아온 부하들의 망령과 만난다. 억울하다며 눈물을 보이는 세 장수를 앞에 두고 이순신은 잘 왔다며 술을 따라 권하려고 한다. 산발을 한 채 초췌한 얼굴로 눈물을 보이는 이순신의 모습은 억울하게 전장에서 죽어 나간 망령들의 모습과 인상적으로 겹친다. 억울한 장수의 망령을 달래고자 하는 이순신과 그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망령 사이에는 ‘전쟁’이 가져온 ‘고통’, ‘상처’, ‘슬픔’과 갖은 온갖 감정적 기류가 넘나든다. 이 장면은 이순신과 망령의 심정적 거리를 삭제함으로써, 이순신을 초연한 영웅적 개인으로서가 아닌, 억울한 망령의 혼을 달래고 그들의 억울함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전유하는 그들의 삶에 결박된 실존적 자아로 형상화한다. 타자가 공감에 의해, 또 다른 내 자신으로, 다른 자아로서 인식되는 것처럼14), 이순신은 찾아온 부하들과의 심정적 거리를 메꾸고 술을 건넴으로써 그들과 한 몸이 된다. 동시에 이 장면은 제의적 형태를 취함으로써 부하의 망령을 위로하고 달래야 할 주인공이자 ‘주체’의 자리에 놓는다. 술을 따라 망자에게 건네는 이순신이 주변부로 위치하는 이 역전의 현장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이 현 시대 대중의 역사적 실존과 욕망을 투영하는 어떤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서사를 관류하고 있는 이순신과 백성들의 실존적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버림받고 육군의 지원도 없이, 병든 몸으로 부하들과 백성들의 불신임과 두려움 속에서 12척의 배로 일본의 330척 배와 해전을 벌여야 한다. 표면적으로 이순신의 문제는 도움을 받거나 의지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순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백성의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과 장군으로서의 명예 혹은 개인의 안위를 뛰어넘는 것은 바로 이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백성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일이다. 요컨대,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백성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행위’가 영화 속 이순신의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한 주체는 바로 백성이 되는 논리이다. 백성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기를 가짐으로써 원한을 풀고 억울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측면에서 실존적 문제는 ‘두려움’과 ‘공포’로 초점화되어 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지 못한 열악한 환경이 조성한 죽음에의 두려움과 공포는 백성들의 실존을 극도로 위협한다. 그런데 이렇게 있다가는 결국 다 죽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는 실상 무기력과 체념의 또다른 변명이다. 백성은 무기력한 체념의 상태에서 두려움과 공포의 확산을 지켜본다. 이것이 백성의 타자화된 수동성의 한 면이다.

    이순신이 백성 스스로 주체로서 발돋움하기를 요구하는 반면, 백성은 체념이 가져온 두려움과 공포에 놓여 있다면, 영화 <명량>의 서사 전개 속에서 궁극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백성 스스로의 결단과 능력이다.

    여기에서 영화 <명량>의 대중적 열광을 따져 보자면, 그 열광의 핵심에는 바로 이러한 ‘스스로의 결단과 능력’에의 욕망, 즉 ‘주체적 결단’에의 대중적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 시대의 아픔들, 그것이 세월호이든 정치·사회적 제 문제이든 타자화되고 파편화된 채 체념의 상태에 놓인 대중의 실존적 고민은 2014년 대중들이 영화<명량>의 이순신과 백성의 서사에 그토록 열광하게 만드는 중요한 불씨로서 작용한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단순히 탁월한 지략과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구국의 영웅이나 탁월한 신화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망자들에게 술을 따라 줌으로써 그들의 원한을 풀고 백성 스스로 두려움을 용기로 치환함으로써 죽음의 숨막히는 위협에서 벗어나 역사적 주체로서 새롭게 일어설 것을 주문하는 조력자이다.

    또한 이순신은 스스로 수난자로서 재현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선봉장으로서 구현되기보다는 고통과 상처의 또다른 역사적 개인이자 현실의 실존적 개인으로서 우리 앞에 새롭게 다가선다. 대중이 호출한 영웅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또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또다른 형상으로 출현하는 이 대중적 영웅의 모습은 비단 ‘이순신’이라는 특정한 개인성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중으로서의 우리가 스스로 영웅으로서 새롭게 재탄생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지니고 억울한 원한을 풀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주체로서 말이다.

    10)정진성, 「트라우마의 귀환」, 『기억과 전쟁』, 휴머니스트, 2009, 22쪽 참조.  11)이런 점에서 “애국주의 마케팅에 의지한 국뽕영화(애국주의로 마취시키는 영화)라는 비난도 나왔다. SNS에 올려진 <명량>에 대한 비난을 보면 한국사회에 ‘애국주의 포비아(애국주의에 대한 공포증)’가 심각하게 형성 중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순신 신드롬이 파시즘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재열, 앞의 글 16쪽)라는 평가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애국주의’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논쟁은 그것이 어떤 관점에서 나온 주장이든 영화를 이분법적 도식 속에서 아전인수격으로 도구화하는 문제를 노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영화에의 관심과 열광을 지나치게 단순·도식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다.  12)신원선은 <명량>을 분석한 논문에서 이순신과 백성을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선조를 기득권의 자리에 놓고, 기득권자들에게 버림받은 이순신과 백성들의 연대를 논의한다.(신원선, 「<명량>을 보는 세 가지 방식」, 『현대영화연구』19, 현대영화연구소, 2014.11 참조) 물론, 이순신과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아웃사이더와 기득권자의 이분법적 도식 안에서는 이순신과 백성들의 연대의 매커니즘에 대한 세세한 분석을 놓칠 우려가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논의는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순신 또한 백성과 수군을 통제하는 기득권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놓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성에게 또다른 기득권자로 보이는 이순신이 왜 어떻게 백성과 연대할 수 있었는가 그 맥락을 살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대중의 영화에 대한 호응과 직결될 수 있었는가의 매커니즘을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13)김한민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한 감독의 의도가 나타난다. 영화 전반부 꿈 속에 나타난 유령들에게 술을 건네는 장면에 대해 질문하자 김한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순신에게 가해졌던 외적, 내적 압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적 압력이라고 한다면 엄청난 수의 왜구가 오고 있다는 것이고, 내적 압력은 수하 장수들이 분열하고 뭔가 전쟁 수행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는 분위기다.”(심영섭, 「이순신, 통합·화합의 아이콘으로 부활하길」, 『이코노미스트』1251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9. 1) 김한민 감독의 말처럼 영화 전반부가 이순신의 내적·외적 압력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를 배치한 것이라면, 이 유령들과의 꿈 장면은 이 압력들에 대한 이순신의 고뇌를 보여 주기 위한 효과적 영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막막함과 두려움과 고뇌 등의 복합적 감정을 한껏 고양한 인간 이순신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14)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04, 100쪽.

    3. 역사의 소거와 복원, 새로운 시공간의 창출과 ‘주체’의 문제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더 이상 신화화된 역사적 영웅이 아닐때, 여기서 만나는 사실은 ‘영웅의 역사’가 발산하는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상당히 희석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영화에 ‘이데올로기적 잔재’가 스며 있지 않다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좀더 근본적으로 이는 ‘역사’의 문제, 즉 ‘역사의 서술’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내세우지 않기 위해서는 영웅의 역사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그것이 아닌 다른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역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이는 영화 <명량>에서 61분 동안 전개되는 ‘해전’의 스펙타클 속에 관류하는 서사의 맥을 짚어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김한민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위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한민 감독은 ‘이름 없는 격군’들이 겪은 명량해전을 다루기 위해 영화 <명량>을 기획했다. 영화의 탄생이 ‘이순신’이라는 개인적 영웅보다는 ‘이름 없는 격군들’로부터 가능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순신의 역사’를 과감히 삭제하고 그를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이유 전체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관람객이 ‘명량해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리얼리티 추구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이름 없는 격군들의 해전’과 ‘관객들이 해전의 리얼리티를 실감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두 언술을 나란히 놓으면, 영화 <명량>의 해전이 단순히 시각화된 스펙타클을 전시하는 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치밀한 계획 하에 화려한 시각적 스펙타클 속에서 이름 없는 격군들이 겪은 해전을 중심적 사건으로 삽입하고 그것을 대중들이 마치 ‘나의 그것’으로 실감하도록 장치해 놓았다. 이런 과정에서 비로소 대중이 명량해전의 격군들과 동일시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의 효과 속에서 대중은 61분 동안의 명량해전에 녹아 있는 서사의 전개를 좀더 나의 그것으로 온전히 전유할 수 있게 된다.

    명량해전을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눠서 서사 전개의 의미를 분석해 볼 수 있다.

    우선, 임준영과 정씨 부인을 중심으로 한 서사이다. 해전 당시 대장선을 향해 돌진하는 화약선에 격군으로 승선한 임준영이 위험을 알리기 위해 몸을 던져 희생하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하는 정씨 부인.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알면서도 절규하며 치맛자락을 흔들어 대장선의 위험을 알리는 극적인 장면까지 이 두 사람의 역할은 해전에 스며 있는 백성들의 희생적 일면을 대표적으로 시각화한다. 이순신과 대장선은 임준영의 죽음과 정씨 부인을 비롯한 이름 없는 백성들의 절규와 경고를 통해서 위기의 순간을 넘긴다. 임준영은 적의 주둔지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정씨 부인과 함께 이순신을 살려낸다. 이순신의 전략적 기지와 전술과는 전혀 상관 없이 위기의 순간, 그를 구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여기에는 치열한 격전의 장에서 ‘생명’을 건지는 주체가 누구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거나 죽음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자가 전쟁의 승자라면, ‘승자’의 편에 선 자는 임준영과 정씨부인으로 대표되는 백성들인 것이다. 구루지마까지 처단한 이순신의 대장선이 파도의 회오리에 휘말려 침몰이 예견되었을 때조차 그 절망의 순간을 희망으로 전환시킨 자들은 바로 목숨을 걸고 대장선을 회오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백성들이었다. 여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명량해전’의 중심에 과연 이순신만이 존재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생명을 내걸고 싸운 이순신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생명을 구한 백성들이 해전의 여기저기에 삽입되어 구심점이 되는 역전의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백병전의 시각화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백병전을 시각화할 때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 미디엄롱숏등은 이순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일본군과 뒤엉켜 피범벅이 된 채 치열하게 싸우는 수많은 부하들의 모습은 백병전의 현장을 대중들이 천천히 그리고 밀도 있게 사고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백병전 과정에서 이순신은 독립되어 카메라 앵글에 잡히기보다는 다른 군사들과의 뒤엉킴 속에서 미디엄롱숏으로 잡히기 일쑤다. 이로써 이순신의 정체성은 탁월한 영웅이 아닌 수많은 군인의 그것과 뒤섞인다. 백병전의 카메라 워크가 야기하는 이러한 전술적 효과는 그 전장을 그저, 적과 싸우는 하나의 난장으로 만들고, 대중들로 하여금 명량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나갔는가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게끔 한다.

    혹자는 이 백병전의 백미인 이순신과 구루지마의 대결이 싱겁게 끝난 점을 아쉽게 여기면서 “강성해 보이던 구루지마는 실상 취약했고 이순신은 너무 쉽게 그의 목을 거둔다”16)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 백병전이 이순신의 영웅적 카리스마와 능력을 전시하는 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이순신을 지우고, 백성의 한 사람으로, 군인의 한 사람으로 싸우는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을 형상화했다면 오히려 영화적 선택은 구루지마와의 대결을 부각시킬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백병전이 이순신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경연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노를 젓는 이름 없는 격군들의 서사이다. 그들은 명량해전에서 단순히 노를 젓는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들이 아니다. 격군으로 해전에 참전하는 수봉의 이야기는 이름 없는 격군들에게도 나름의 사정과 질곡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특히, 이순신의 진두 지휘하에 배를 조종하고 일본배를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이들 격군이라는 점을 해전 장면에서 시각화된 이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의 지휘에 따라 노를 젓다가도 상황에 따라 대포를 쏘고,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는 이들은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치열하게 소리 없이 싸우는 백성들의 격전을 잘 형상화한다. 대장선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진두지휘를 하는 이순신과 이들 격군들은 사실 한 몸이다. 유기체로서의 한 몸, 대장선에 몸을 실은 격군을 비롯한 군사들과 이순신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혼연일체가 된다.

    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은 아들 이 회가 해전을 승리를 이끈 주요한 요인에 대해 묻자 “천행”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 “천행”을 가능케 한 자들이 바로 “백성”이라는 말로 해전의 승리를 ‘백성’에게 돌린다. 해전의 백병전과 격군들의 헌신, 임준영과 정씨 부인을 비롯한 백성들의 희생적 노력이 해전의 승리에 기여한 주요인이었다면, 해전의 승리는 분명 ‘백성’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이 새롭게 의미화된다. ‘명량해전’이 ‘백성’의 것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명량해전’과 ‘이순신’이라는 밀접한 연결고리는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로서 회자되어 왔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 중심에 서 있는 이순신 대신 백성을 중심에 놓은 명량해전을 새롭게 재현한다. 이는 차라리 이순신이라는 서술자를 통해 새로 쓰는 명량해전과 백성의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를 통해 얻는 효과는 과연 무엇인가.

    영화는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영웅 중심의 이데올로기적 거대 담론을 철회하고 잊혀진 존재들을 중심으로 쓰는 미시적 서사를 따라간다. 이는 비단 영화 <명량>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2014년에 개봉한 사극 <역린>과 2012년 개봉작 <광해> 등에서도 ‘정조’와 ‘광해군’이라는 ‘왕’ 중심의 역사적 사실을 모티프로 하되, 그를 둘러싼 백성들과의 관계를 사건의 중심으로 소환하는 일련의 전복을 꾀한다. 이는 2011년에 개봉하여 흥행한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양상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신궁이 있었다는 설정 하에 전개되는 영화의 서사는 왕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밖에 서 있던 백성을 사건의 중심으로 소환한다. 이러한 뚜렷한 방향성은 2014년에 개봉한 <군도:민란의 시대>와 <해적:바다로 간 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아예 왕을 중심으로 한 영웅적 서사를 삭제하는 데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민초들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 설정으로의 변화는 그것이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명량>이 이러한 최근 사극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면,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 사유되는 ‘역사’의 ‘소거’와 ‘복원’의 문제로 귀결된다. 왕과 걸출한 영웅의 서사가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바로 현재라는 사실이 최근 일련의 사극 영화의 변화 양상과 영화 <명량>의 흥행을 통해 반증되는 것이다.

    특히 영화 <명량>은 서사의 복잡한 잔가지를 과감하게 쳐 버리고, 그 자리에 ‘이순신’을 ‘백성’과 특별히 다를 것 없는 고뇌하는 인간형으로 소환하여 영웅 서사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삭제한다. 삭제된 공백을 채우는 것은 바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로서의 ‘백성’과 그들을 통해 새롭게 쓰여지는 이순신이라는 개인의 새로운 역사이다. 따지고 보면, 명량해전은 두 가지 방향의 새로운 역사를 쓴다. 하나는 영웅 서사의 이면에서 잊혀졌던 백성의 역사를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의 이름으로 그들과 혼연일체가 되는 이순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역사가 어떤 시공간을 그 전제로 하는 것일 때, 영화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시공간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어떤 효과와 의미를 구현하는가. 사실, 영화 <명량>의 시공간은 유토피아적인 비현실의 공간이다. 푸코의 말처럼 유토피아가 실제 장소를 갖지 않는 배치이고, 사회의 실제 공간과 직접적인 또는 전도된 유비 관계를 맺으면서 그 자체로 완벽한 사회이거나 사회에 반하는 것이라면,17) 영화 <명량>의 시공간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의미화할 수 있다. 완벽하지만 동시에 사회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영화 속의 시공간은 백성을 중심으로 쓰여지는 새로운 역사 쓰기의 유일한 매체가 된다.

    이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서사를 대중이 소비하고 유통하는 방식의 일단을 보여 준다. 대중은 ‘역사’를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유통함으로써 대중이 요구하는 시대의 근본적인 욕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체념을 요구하는 시대 혹은 그것이 일상화된 시대의 수동적 존재로서 구석진 자리로 자꾸만 몰리는 대중들이 왜 하필이면 명량해전이라는 치열한 격전의 시공간에 그토록 열광했는가. 그것은 바로 스스로의 체념을 떨쳐 버리고 결단의 주체로서 혹은 행동하는 주체로서 나서고자 하는 대중의 억압된 심리적 열망과 욕망을 영화 속의 백성과 이순신이, 명량해전이 한꺼번에 소환해 주기 때문이다. 고통과 상처, 죽음에의 압박과 피 터지는 격전의 전장이 유토피아의 시공간으로 새롭게 창출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15)「영화 <명량>연출 김한민 감독 독점 인터뷰」, 『월간중앙』466호, 중앙일보시사미디어, 2014. 9, 143-144쪽.  16)「<씨네21> 기자들이 본 사극 세편의 ‘생각보다’ 좋았던, ‘생각보다’ 나빴던 점 비교」, 『씨네21』, 한겨레신문사, 2014. 8. 12일자 <명량>에 대한 정한석의 평가 참조.  17)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47쪽.

    4. <명량>, 영화의 역사적 상상력과 대중 욕망의 시대적 요구

    영화 <명량>을 통해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2014년의 뜨거운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놓인 ‘이순신’이 과연 어떤 존재로서 대중에게 호명되고 있는가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관찰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리더십’의 표상으로 등극하는 ‘이순신’은 정치·사회의 역사적 과정에서 항상 특정 지배층의 모델로서 자리매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백성들과 맺고 있는 긴밀한 연결고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명량>은 이순신을 국가주의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왕이 아닌 민을 바라봐야 한다는 충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18)는 지적은 ‘리더십’과 ‘국가주의’를 표방하면서 ‘이순신’을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적극 전유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재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리더십’이라는 수식어는 ‘이순신’을 신화적 영웅으로 환원하는 기존의 역사적 해석을 반복 재생산하는 위험한 표어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면서 영화 <명량>에 재현된 이순신을 백성의 자리에 함께 하는 현실의 실존적 인물로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을 달래며 감정적으로 그들과 공명하는 초췌한 한 인물로서 재현되는 이순신은 탁월한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와 수많은 백성들의 생사를 자신의 그것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혼연일체가 되는 역사적 개인이 된다. 이럴 때 영웅은 나와 동떨어져 있는 어떤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는 혹은 나와 동일시된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자로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다. 이순신과 백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들을 함께 싸우는 자로서 재현하는 <명량>의 상상력은 바로 여기에 핵심이 놓여 있다.

    영화 <명량>이 내세우는 역사적 상상력도 이와 연장선상에 있다. 61분 동안 계속되는 명량해전의 시각적 스펙타클은 자칫 그 안에 관류하는 서사의 맥을 놓치게 하는 함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 해전은 격군을 비롯하여 싸우는 군사들, 임준영과 정씨 부인을 비롯한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세밀한 서사의 결들이 녹아 있는 중요한 장면이다. 이순신의 영웅적 전략과 능력만을 중심에 놓는 서사의 전개를 과감하게 삭제한 자리에 이순신의 생명을 구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결단과 행동이 그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는 영웅 중심으로 쓰여지던 기존의 낡은 이데올로기적 역사 서술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잊혀진 백성을 중심으로 미시적인 역사의 서술을 감행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최근 사극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영화 <명량>의 서사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영화 <명량>은 백성의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 죽음의 위기에서 수동적 체념 상태에 놓여 있는 백성을 어떻게 주체적 결단의 주인공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현 시대의 대중들이 처한 상황과 억눌린 대중적 욕망을 건드리는 효과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주체적 결단의 주인공으로 스스로의 억압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이순신과 백성의 혼연일체가 되는 과정은 영화의 시공간을 역사적 상상력이 총동원된 유토피아적 시공간으로 변화시킨다.

    현 시대의 대중은 바로 이러한 영화의 역사적 상상력과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유통시킴으로써, 영화 속에 재현된 유토피아적 시공간의 새로운 창출과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한다. 이것은 곧 체념이 일상화되는 시대 혹은 체념을 요구하는 시대의 대중들에게 억압되어 있는 결단의 욕망과 상상력을 승인하고 그것에 공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중은 메시아적 영웅 혹은 신화적 영웅을 기대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역사적 주체로서 거듭나는 어떤 특별한 계기 혹은 매개체를 원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떤 동떨어진 곳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으로 함께 호흡하면서 함께 전진할 수 있다면, 그 이름이 굳이 이순신으로 호명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8)황진미, 앞의 글,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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