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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생각하는 일이 나의 싸움이다” "Thinking is my fighting":
ABSTRACT
“생각하는 일이 나의 싸움이다”

When Virginia Woolf writes, "thinking is my fighting" in her diary in 1940, her assertion of thinking as a kind of action is not a metaphor or a hasty negation of the distinction between thinking and action. Rather, it derives from a daunting reconceptualization of the questions of reality and possibility, anticipating Giorgio Agamben's philosophy of potentiality. Challenging the age-old prioritization of actuality over possibility in Western philosophy, Agamben seeks to redefine the latter as something that exceeds and survives historical realization by locating language, thing, Being as well as thinking itself in the realm of potentiality. At the heart of Woolf's feminist, pacifist, and anti-totalitarian politics lies such a radical rethinking of potentiality–a way of thinking that brings the contingent into view. The seemingly apolitical stories and essays, such as "The Mark on the Wall," "Solid Objects," "Mr. Bennett and Mrs. Brown," and "Craftsmanship," demonstrate that Woolf's feminism embodied in her famous expression "Shakespeare's sister" is profoundly entwined with her insight into beings and things in terms of potentiality. Woolf's thinking is a kind of action in that it constantly seeks to think the possible into existence while being wary of its own process, which is ironically in danger of subordinating itself to its own object in its tendency to privilege the actual over the possible.

KEYWORD
Virginia Woolf , Giorgio Agamben , feminism , potentiality , thinking , being , thing , language
  • 1. 들어가며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Ulysses)에서 역사수업을 하던 스티븐(Stephen)은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여기서 스티븐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가능성”과 “현실”(actuality)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이다. 이 구분에 기초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 속의 어떤 시점에 다음 순간을 향한 수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한 가지만 “현실”이 되며, 그 순간 존재하고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은 “추방된다”고 설명한다(Gifford 31). 이에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과연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스티븐의 물음은 ‘가능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 의식 속에서 봉착하는 모순과 이로 인한 가능성들의 철회 혹은 숙명론적 역사관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제 벌어진 것만을 유일한 현실로 인식하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은 망각/폐기하는 인식의 과정 속에서 ‘가능성’은 그 본뜻을 잃고 실제로 일어난 것에 복속됨으로써 가능성과 현실이라는 애초의 구분은 무화된다. 이미 벌어진 것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는 일어날 수도 있었을 가능성들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대상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조이스는 스티븐의 입을 빌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과 사유의 자기 성찰적 속성에 관한 논의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화두로 삼아 인간의 역사와 현실 인식을 점검하는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사유는 현실을 가능성보다 우위에 두고 후자를 망각하거나 폐기하는 성향이 있는데, 현실화된 “이해 가능한 대상”만 사유하는 한 그 자신이 “대상에 못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자신의 망각이나 배제를 인식할 줄 아는 사유의 자기 인식 능력,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의 총합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으며 (Durantaye 5), 이로써 사유는 이미 일어난 것을 넘어선 차원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위의 인용문에 뒤이어 스티븐이 “생각이란 생각에 대한 생각(Thought is the thought of thought 21)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Gifford 32)을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감벤은 “현실 속에서 무효화되는 것으로서의 잠재성이라는 전통적 개념”(the traditional idea of potentiality that is annulled in actuality)과는 다른, 현실로 수렴되지 않고 ‘달리 되었을 것들’로서의 잠재성, 즉 “현실에서 살아남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 구하는 잠재성”(a potentiality that conserves itself and saves itself in actuality)을 복원하는 사유를 모색한다(Potentialities 184). 『율리시스』가 그리고 있는 당시 아일랜드의 식민현실, 그리고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의 실각과 뒤이은 죽음에서 시저가 겪은 배신과 죽음을 떠올렸던 조이스의 어린 시절1)을 상기할 때, 스티븐에게 시저 암살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사유하는 일은 결코 사변적인 몽상이 아니라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사유―즉, 정치”(Durantaye 재인용 12)라는 단언에서 드러나듯 아감벤에게 사유는 곧 정치이다. 이는 정치적인 생각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현된 것을 우위에 두려는 인간 의식을 자의식으로 성찰함으로써 가능성이 사유와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려는 사유의 실천적 과정을 뜻한다.

    달리 되었을 가능성을 사유하는 일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수행한 작가라면 버지니아 울프를 빼놓을 수 없다. 가부장제 하에서 오직 잠재태로만 존재해온 여성의 삶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제국주의와 파시즘 비판의 근간을 이룬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재능을 지녔으되 시대의 한계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허구와 진실, 현실과 잠재성, 운명의 질곡과 유토피아의 경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허무는 아감벤의 통찰을 선취하는 단적인 예이다. 아감벤과 울프를 겹쳐 읽어 보면, 지금은 어느덧 비평적 상식이 된 울프 작품의 ‘정치성’을 되짚어볼 수 있게 된다.2)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모두 두 번의 세계대전 와중에 쓰였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논평을 담고 있지 않아 울프의 ‘정치적’ 글쓰기를 논할 때 보통 배제되는 몇 편의 글들을 살펴본다. 「벽 위의 자국」(“The Mark on the Wall”)과「단단한 물체들」(“Solid Objects”), 그리고 「솜씨」(“Craftsmanship”)는 가부장제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미시적, 거시적 갈등과 폭력을 겪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개진한 독특한 철학적, 문학적 사유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울프의 글쓰기는 그녀 작품의 형식적 혹은 내용적 측면을 넘어, 사물과 언어, 존재와 삶의 리얼리티가,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폐기될 수 없는 잠재성으로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유의 과정을 드러낸다.3)

    1)아홉 살 조이스는 아버지와 함께 파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그를 시저에 비유하는 시를 짓기도 함. 엘먼(Richard Ellmann) 33면 참조.  2)울프의『세월』(The Years)을 아감벤의 포함과 배제의 개념을 들여와 분석하는 논의로는 김영주(Youngjoo Kim) 참조. 아감벤과 울프의 페미니즘 문학과 모더니즘의 정치성을 논하는 대표적인 비평가로는 지아렉(Ewa Ptonowska Ziarek) 참조.  3)언어와 예술에 관한 아감벤의 초기 저작들에 대한 비평계의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Remnants of Auschwitz)과 같은 소위 ‘정치적’ 글쓰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한 듯하다. 평자들은 위의 두 저작을 대체로 언어와 예술에 관한 초기 저작들과 결별한 정치적 글쓰기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전작들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아감벤이 근본적으로 정치를 “미학화”하거나 “언어의 형이상학”에 수렴시킨다고 비판한다(Durantaye 14). 그런데 아감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문학과 정치를 별개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작업 자체와 상충할 뿐 아니라, 비평이 문학적 글쓰기의 상대적 빈곤을 기정사실화할 우려가 있다. 물론 아감벤의 사유의 정치성을 가늠하거나 그의 철학적 사유의 공과를 가리는 것이 본고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아감벤의 정치적 글쓰기가 거두는 일정한 성취는 언어와 예술에 대한 그의 통찰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 입장이다.

    2. 「벽 위의 자국」의 반전(反轉), 반전(反戰)

    아렌트(Hannah Arendt)는 1971년 강연문 「생각하기와 도덕적 숙고」(“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에서 생각하기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든 바 있다.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홀로코스트과 관련하여 생각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게 들리겠지만,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범죄는 근본적으로 “생각하기의 부재”([the] total absence of thinking)에서 연유한다는 점에서 생각하기의 중요성은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418). 생각이란 애초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 결과물을 입증할 수도 없지만, 생각의 부재가 가져오는 비극적 현실은 사유의 도덕적 정치적 실천성을 반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 그러나 생각의 과정이란 자의적이고 그 결과가 불분명하고 입증하기 어려운 탓에,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으로 인해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말해준 사상가는 거의 없으며 자신의 사유 경험을 서술하고 검토하려고 노력한 사상가는 더더욱 없다”(427)고 지적하면서, 소크라테스를 하나의 선례로 삼아 인간 사유의 도덕성과 실천성에 관해 논한다. 아렌트의 시야에 포착되지는 않았지만 울프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것이 바로 이 사유의 작동방식과 한계, 그리고 실천적 가능성이었다.

    런던 폭격이 목전의 현실이 된 1940년 10월 21일, 울프는 일기장에 “생각하는 일이 나의 싸움이다”(thinking is my fighting)라고 쓴다. 두 달 전 8월 여성 문제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강연문인 「공습 중에 든 평화에 관한 생각들」(“Thoughts on Peace in an Air Raid”)에서는 영국이 독일/적군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당장이라도 공중폭격이 개시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울프는 어떻게 하면 평화가 도래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평화는 적군을 단죄하고 그것이 자유든 정의든 ‘우리’의 전쟁의 정당성을 내세움으로써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남을 총으로 쏘는 것”이 영광이라는 믿음(246)과 그 이면에 놓인 “싸움의 본능”(fighting instinct 247), 그리고 군인과 민간인, 정치가나 선동가 할 것 없이 휩쓸려 있는 “잠재의식적 히틀러주의”(245)를 극복할 수 있는 “시류에 반하는 사유”(244)를 함으로써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함으로써 평화를 존재하게”(think peace into existence 243)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함으로써 평화를 존재하게 한다’는 사뭇 어색하고 낯선 울프의 표현은, 직역하면 ‘생각함으로써 없앤다’로 옮길 수 있는 영어의 ‘think away’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사유와 대상의 관계를 뒤집고 있다. 후자는 생각의 과정이 대상 (혹은 대상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의 상실을 수반함을 함축하는 반면, 전자는 사유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가능성들을 사유 속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존재하게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울프는 평화를 ‘생각’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생각만’ 하는 일, 즉 행동이나 실천과 별개의 일이라는 통념에 도전하는 동시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으로 인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은 사유할 수 없는 사유 본연의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 다시 말해 사유의 대상과 사유 자체의 지평을 각각, 그리고 동시에 넓히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울프에게 ‘무엇’을 생각하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생각에 ‘관한’ 생각을 하는 일, 즉 생각의 과정에 놓인 외적 · 내적, 혹은 의식적 · 잠재의식적인 덫들을 찾아내어, 사유 자체의 조건과 한계들을 메타적으로 사유하는 일인 것이다.

    일례로, 울프의 초기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인 「벽 위의 자국」을 보자. 이 이야기는 화자가 거실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벽에 있는 자국을 발견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생각을 하던 중 (아마도 남편이라 추정되는) 어떤 남자가 불쑥 들어와 전쟁을 저주하며 이 와중에 벽에 웬 달팽이냐며 짜증을 내는 바람에 그 자국이 달팽이였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단편에 대한 초기 비평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4) 벽 위의 자국이 알고 보니 달팽이였다는 막판의 반전이 경박하고 실망스럽다는 것이 주된 평가였다. 그러나 울프의 모더니즘 미학론, 혹은 페미니즘 및 반전·평화주의적 입장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이 작품에 대한 독법도 달라졌다. 작품이 진리 혹은 현실의 다면성, 가변성, 혹은 불확실성을 극화하고 있다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서사의 구조 즉 닫힌 결말이 전제하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혹은 정치적 전제들의 안일함에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것이 대체로 합의된 논평이다.5) 그런데 이 작품이 근본적으로 인간 사유의 조건과 한계,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사유의 자기 성찰적 특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논의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탐색하는 사유의 문제를 짚어보는 일은 이 작품의 독특한 형식적 특성과 역할, 그리고 페미니즘 및 반전·평화주의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 긴요하다.

    「벽 위의 자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쓰였다.6) 화자는 “아마도 올해 1월 중순께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 한다”는 문단으로 시작함으로써 독자에게 넌지시 시간적 배경을 환기시키고, “망할 놈의 전쟁”이라 뇌까리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이 에피소드가 전쟁 중에 일어났음을 주지시킨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가 시작되면 화자의 상념은 전쟁 대신 사회적 관습과 규칙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에 쏠린다. 가령 화자는 벽 위의 자국과 동시에 난로에서 이글거리는 석탄을 보다가, 문득 거의 “자동적”으로, 붉은 옷을 입은 기사들의 행렬과 성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과 같은 “해묵은 공상”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곧이어, “참 다행스럽게도 [벽 위의] 자국이 공상을 중단시켜주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떠올린 공상은 “오래된 공상, 아마도 어릴 적 만들어진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공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벽 위의 자국을 본 덕분에 공상이 중단되었다는 일견 뜬금없는 안도감은 사실 화자 자신의 생각의 움직임, 즉 어린 시절에 영문도 모른 채 만들어진 연상 작용, 모험과 영웅의 이미지인 깃발과 기사의 행렬 뒤에 살상과 폭력의 현실을 은폐하는 습관화된 사고 작용에 대한 거부감을 반증한다. 뒤이어 화자는 또 다시 생각에 관한 생각, 즉 “지푸라기 하나만 봐도 광적으로 옮기는 개미들처럼 [우리의 생각은] 새로운 대상만 보면 그것에 달라붙어 들어 올린 다음엔 내 버린다”(83)고 생각하다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포함해 진실이라고 믿는 많은 허상들에 관해 성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화자는 자기도 모르게 “일반화”에 빠졌음을 깨닫고, “이런 일반화들은 아주 무가치하다. 그 단어의 군사적인 소리만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일반화’(generalisation)라는 어휘에 숨은 ‘장군’(general)이란 단어를 두고 하는 말인데, 특히 이 작품이 환기하는 당시의 전쟁을 감안하면, ‘장군’과 ‘일반화’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화자는 이 ‘군사적인 소리’에서, “신문의 논설들과 각료들”에서부터 “형언키 어려운 저주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바로 그것(the thing itself), 표준(the standard thing), 진짜(the real thing),” 그리고 일상에 스며있는 “습관” 뿐 아니라 특정 시대에 쓰이는 식탁보의 재질과 디자인까지 정하는 “규칙”들을 떠올린다(86). 사유의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반화는 단순히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치담론과 정책에서부터 일상적 습관과 사물의 진위여부까지 규정하는 일종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울프가『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을 통해 지적한 바 있는, 여성의 지적 열등함을 기정 ‘사실화’하려는 가부장제의 현실, 그리고 실제로 가치 판단이 종종 진위 판단으로 탈바꿈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 현실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울프의 통찰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화자는 지금까지 표준이자 진짜라고 믿어왔던 것들, 예컨대 휘터커 연감에 포함된 영국 귀족 목록 등이 사실은 “절반은 환영(幻影)”임을 깨닫고 이것들이 “희망컨대 웃음거리가 되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우리 모두 “비합법적인 자유의 느낌”(a sense of illegitimate freedom)에 “도취”될 것이라고 전망한다(86). 이 순간 화자는 그 동안 여러 차례 느꼈던, 벽 위의 자국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충동을 다시 한 번 저지하면서 이렇게 자문한다. “내가 만일 이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벽 위의 자국이 뭔지 알게 된다면” “내가 얻는 게 뭘까? 지식? . . . 그런데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러고는, 참다운 지식이란 과거의 믿음을 계승하는 학자나 교수, 전문가의 권위를 “덜 존중”함으로써 얻을 수 있고 그럴 때 세상은 더 기분 좋고 조용하며 널찍해질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87).

    벽 위의 자국의 정체를 확인하는 일을 유예하고 화자가 선택한 생각하기는 결코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는 위험한 유아론(solipsism)이 아니라7) 용인되지 않은 자유의 만끽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의 생각하기가 위험스럽다면 그것이 현실과 단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 재구성의 동력이 될 투철한 현실 비판성 때문이다. 실제로 화자는 이러한 생각들이 위험하다 못해 사실 “위협적”이며, 그 이유는 이들이 이미 확립되어 있는 현실과 “충돌”하기 때문임을 의식하고 있다. “휘터커 연감만 없으면” 세상이 기분 좋은 곳이 될 거라는 불경스런 생각에 이르는 순간, “난 벌떡 일어나 벽 위의 자국이 뭔지 알아내야만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자국의 정체를 밝혀야겠다는 급작스런 결단은, 현실과 충돌하는 사유를 중단시키려는 자연8)의 해묵은 자기보존 법칙, 즉 내면화된 체제 순응적 자기 검열에 다름 아니다. 자국을 보러 가는 것은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 어진 것을 확인하는 일에 사유를 구속하는 일이자 불경스런 생각을 중단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자연의 게임”을 간파하고, 생각을 끝내고 행동하라는 자연의 명령을 거부한다. 화자가 보기에 자국을 확인하는 행동은 수상쩍은 생각을 중단하는 일이고, 전쟁은 바로 이러한 생각 없는 행동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자신의 생각이 위협적임을 의식하면서, 화자는 ‘행동하는 남자들’과 싸우기 위해 벽 위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을 유예하고 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사유는 벽 위의 이 달팽이는 대체 뭐냐며 짜증을 내는 한 남자의 출현으로 중단된다. “아, 벽 위의 자국! 그것은 달팽이였다”는 화자의 외침은 그저 싱겁고 경박한 반전이 아니라,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기”(85)를 원했던 화자가 원치 않은 방식으로 생각을 중단당한 데서 오는 허탈감과 분노의 표출이다.

    요컨대 「벽 위의 자국」은 습관과 규칙에 젖은 맹목적 신념이 ‘행동하는 남자들’에 의해 폭력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사유의 조건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자기 성찰적인 사유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행동하는 남자들에 맞서는 실천으로서의 생각하기를 제시한다. 벽 위의 자국은 이미 벌어진 어떤 일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이다. 그리고 이 때 화자가 당면하고 있는 ‘벌어진 어떤 일’은 바로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명시하고 있는 세계 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일어나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기”(once a t hing ’s d one, n o one ever k nows h ow i t happened) (84) 때문에, 화자는 이미 발생한 결과물을 확인하는 대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화자는 이미 벌어진 것에 국한된 협의의 리얼리티, 그리고 그러한 협의의 리얼리티를 확인하는 데서 멈추는 앎을 거부하는 방식으로서의 생각하기를 택한다. 물론 그러한 생각의 과정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도 하고, 전쟁의 토대가 되는 규칙과 습관을 내면화한 자기검열이나 본능에 휘둘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하기는 ‘일반화’라는 일견 중립적이고 추상적인 언어 속에 내재된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인식구조를 간파하고 전쟁이 그것의 외적 표출임을 인식해내며, 나아가 사유의 작동 방식과 한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그러한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갖는다. 전쟁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며, 이들과 싸우기 위해 울프는 ‘생각하기’를 결단한 것이다.

    4)Guiquet, Gorky 등의 논의 참조.  5)Rosenbaum, DuPlessis, Naremore, Cyr, Wing-chi Ki 등의 논의 참조.  6)1921년에 Monday or Tuesday에 수록되어 출판됨.  7)예컨대 뱅크스(Joanne Trautmann Banks)는 울프가 공상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유아론에 빠져 표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고, 벽 위의 자국이 달팽이라는 사실은 화자를 이러한 위험에서 구하는 외적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8)맥락상 이 때의 ‘자연’이란 자연의 법칙인 양 군림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온 규칙들, 혹은 그러한 규칙들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을 내면화한 인간의 본성 혹은 욕구들을 지칭한다.

    3. 사물과 사유:「단단한 물체들」읽기

    “대체 벽에 달팽이는 또 뭐냐”고 짜증을 내는 남자는, 고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화자의 생각을 난폭하게 중단시킨다. 따라서 달팽이는 화자가 결국 대면하게 되는 진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를 벽 위의 자국이 무엇인가―달팽이든 아니면 작가의 현실관 혹은 예술관을 이루는 현실/앎의 불확실성, 혹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든 간에―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독법은 이 남성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은 결국 의식주체의 내적 인식이 벽 위의 자국이라는 객관적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식의, 모더니즘에 관한 낯익은 독법이 더 타당하다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시각들은 모두 사물을 사유와 별개의 대상으로 전제하는 탓에, 그러한 전제 자체를 문제시하는 울프의 입장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울프는『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에 관한 에세이에서 크루소가 만든 “평범한 질그릇”에 대해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이 소설은 평범한 질그릇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외딴 섬들과 인간 영혼의 고독을 볼 수 있게 하는 걸작이라는 것이다. 커디-킨(Melba Cuddy-Keane)은 질그릇에 대한 울프의 이 같은 관심을 “일상적 삶의 가치”(69) 존중이라는 측면으로 풀이한다.9) 그러나「현대 소설」(“Modern Fiction”)에서 울프가 당대에 유행하는 코트단추와 같은 지극히 “중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묘사하는 “물질주의자들”(materialists)을 비판한다는 사실만 떠올리더라도, 울프가 단지 일상적이라는 이유로 물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물체와 사물에 대한 울프의 관심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활발하다. 예컨대 마오(Douglas Mao)는 울프의 단편 제목을 빌린 『단단한 물체들』에서 모더니즘은 사물을 외면하기는커녕 오히려 끈덕지고 집요하며 불투명한 사물의 타자성에 매혹되면서도 그것이 미학적으로 생산되는 과정에서 타자성이 훼손되는 역설에 불안해한다고 주장한다. 심리적 리얼리즘, 혹은 모더니즘의 ‘내면으로의 전환’(an inward turn)이라는 비평적 틀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 난 물체들에 온당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물체에 대한 울프의 관심을 내면 혹은 사유와 대비되는 외적 현실이나, 주관주의에 대비되는 객체의 타자성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울프에게 물체는 주관적 · 심리적 인식보다 열등하다는 이유로 경시되거나 부정되지 않으며, 사유나 인식과는 별개인 객관적 현실과 동일시되는 것도 아니다. 울프에게 (사유의) 대상은 사유와 전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후자에 복속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영원히 접근 혹은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로운 타자성을 가진다고 하기도 어렵다.10) 무엇보다 울프는 사유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대상화 혹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 자체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울프의 입장이 여성의 삶, 그리고 나아가 인간의 삶과 존재에 관한 그녀의 통찰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벽 위의 자국」을 쓴 이듬해인 1918년,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 울프는「단단한 물체들」이라는 또 한 편의 특이한 단편 소설을 쓴다.11)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정치적 삶에 환멸을 느낀 존이라는 한 남자가 친구 찰스와 함께 바닷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깨진 유리조각에 매료된다. 그는 점차 깨진 도자기와 버려진 철물 수집에 심취하여 고립된 삶을 살아가며 마침내 찰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린다. 세상과 고립된 존을 예술가의 전형으로 보는 데는 왓슨(Robert Watson)을 위시한 많은 평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존에 대한 울프의 입장에 관해서는 비평가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예컨대 레비(Michelle Levy)는 울프가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술가가 사물에 집착할 때 생기는 위험성, 즉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하고 객관적 현실을 버리면 결국 현실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주체와 대상/사물 간의 균형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144)한다고 본다.12) 반면 브라운은 울프의 「단단한 물체들」을 “사물들의 비밀스런 삶”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다. 소위 쓸모없는 유리나 철 조각들에서 용도와 쓰임에 입각한 사물의 가치로는 포섭되지 않는 존재적 ‘경이’와 ‘비밀스런 삶’을 발견하는 존에게는 “이질적 존재/사물을 병합하려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아도르노적인 “윤리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12).

    한편 김성호는 “단단한 물체들에 대한 존의 관심과 작가로서의 울프의 의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교감을 전기적 사실을 들어 무작정 부정하고 볼 일은 아니”라며(2), 이 작품에 대한 좀 더 입체적이고 진전된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김성호가 지적한 존과 울프의 ‘교감’은 궁극적으로 모더니스트로서의 울프의 ‘페티시즘’의 한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즉, 물체에 대한 울프의 관심이 제아무리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고 “삶의 내면성에 대한 통찰과 연관”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물체와 의식의 새로운 관계맺음”이 “일상의 삶에서 분리된 순간으로서, 또 그런 분리를 전제로 하여 제시된다는 점에서”(11), 결국 물체의 세계와 인간의 역사적 현존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울프에게 물체와 의식의 관계가 일상의 삶에서 분리된 순간으로서, 또 그런 분리를 전제로 제시되며, 물체의 세계와 인간의 역사적 현존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담아내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예컨대 화가 씨커트(Walter Sickert)의 그림에 관한 울프의 에세이「월터 씨커트」(“Walter Sickert”)를 보면, 오히려 울프는 물체와 인간의 삶 간의 분리를 문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프는 씨커트가 귀족보다는 중하류 계급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물건들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손수 번 돈으로 거리의 손수레에서 물건들을 사는 사람들에 비해” 자기 소유물들과의 관계가 훨씬 느슨하기 때문이리라는 것이다. 울프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에는 열정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물에 아주 가깝다. 그래서 씨커트의 그림 속의 사람들과 그들이 있는 방 사이에는 친밀함이 존재하는 것 같다. 침대와 서랍장들 . . . 이 모두 그 소유주를 표현해준다.” 값싼 가구들은 적절한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비싼 가구에는 없는 표현력을 갖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195). 요컨대 씨커트가 그린 물건들은 물건과 인간 간의 참다운 관계 뿐 아니라 참다운 인간 삶을 포착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울프에 따르면, 씨커트는 “일하는 몸”과 “일하는 손”을, 일하느라 주름진 얼굴을 좋아한다. 그 속엔 “아주 세련된 사람들”에게는 없는 “무의식적인” 몸짓과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195). 그런 의미에서 씨커트는 디킨스에 근접하는 “리얼리스트”요(194), 영국에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202)라는 것이다.13)

    물론 「단단한 물체들」에서 존의 수집행위는 씨커트 그림에 나오는 노동과 소비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존의 수집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읽는 것은 곤란하다. 평자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단단한 물체들’을 존의 수집물과 동일시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첫머리를 보면 ‘단단한 물체들’은 멀리서 보았을 때 ‘단단한 물체들’처럼 보이는 존과 찰스를 가리킨다. 익명의 화자는 “거대한 반원형의 해변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작고 검은 점 하나뿐이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후 이내 그 점이 “가느다래지면서 네 개의 다리를 갖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고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의 청년임이 더욱 분명해졌다”면서, “수 마일의 바다와 모래둔덕이 펼쳐진 이곳에 이 두 사람 몸뚱이만큼 확실하고(solid) 생기 있고 튼튼하고(hard) 붉고 털 많고 정력 넘치는 것은 없었다”(102)고 서술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아득히 먼 곳에서 점차 지상에 가까워지는 어떤 시선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하는 동시에, 등장인물을 독특한 방식으로, 즉 작은 점에서 단단한 물체를 거쳐 인간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작품은 처음부터 존 뿐 아니라 찰스도 함께 볼 것을 권하고 있고, 실제로 이 이야기는 존 뿐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찰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찰스를 보지 못하고 존만 본다면 결국 찰스의 눈으로 존을 보는 데 동의하는 셈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무의식적 동의를 절묘하게 문제 삼는다.

    예컨대 “망할 놈의 정치!”라고 외친 후 무심결에 모래 속을 뒤지기 시작하는 존의 얼굴에는 “성인의 눈에 불가해한 깊이를 부여하는 사고와 경험의 배경” 대신 사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담은 어린 아이의 눈빛이 떠오른다. 어린애 같거나 혹은 유치한 존의 옆에는, 물수제비를 뜰 돌만 찾다 더 이상 적당한 돌이 없자 곧장 싫증을 내는―존보다 더 성숙하다고 보기는 힘든―찰스가 있다. 존이 온갖 상상을 하며 들여다보는 유리 조각이 찰스에게는 “납작하지 않”아 물수제비뜨기에는 무용지물이다. 사물을 쓸모 여부로만 판단하는 찰스가 곧이어 하는 일은 “바보 같은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정치 얘기로 돌아가는 것이다(105). 쓸모없는 물건들에 무관심한 찰스는 쓸데없는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특성은 다른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무관심, 나아가 쓸모없는 사람을 내버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존이 발견한 유리 조각을 호주머니에 슬쩍 집어넣는 것을 찰스는 “보지 못했다, 아니 봤더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103). 사회적으로 주어진 “의무”를 게을리 하고(105)점점 더 버려진 물건수집에 골몰하는 존은 마침내 정치생활을 완전히 마감한다. 한편 찰스는 존이 모아둔 것들에 대해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없는 존도 내버린다. 그것이 존과 달리 사회적 ‘의무를 다 하는’ 정치가 찰스의 삶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는 존과 찰스를 같이 보지 않고 존의 고립과 소통 불가능성만 주목한 후 이를 존 혹은 작가의 한계나 독특한 취향으로 돌린다면, 작품이 제기하는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 즉 사물과 존재의 ‘다른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는 찰스 식의 맹목과 무관심이 저지르는 기본적인 의무방기의 죄를 묵과할 우려가 있다.14)

    브라운은 이 작품이 나름의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소환한다고 본다. 유리조각과 철물에 대한 존의 열정은 전시 군수품 조달로 인한 유리부족 및 고철수집과 같은 역사적 상황을 환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성호가 비판하듯, 브라운이 주목하는 이 작품의 역사적 상황이 “작품의 배경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하”(8)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브라운의 한계이지, 작품의 한계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작품의 역사적 상황은 고철수집이나 유리부족으로 환기되는 전시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벽 위의 자국」이 탐구한 바 있는, 사물과 존재에 대한 습관적 사유와 전쟁과의 연관성이라는 좀 더 깊은 차원의 역사적 현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존의 ‘폐물’ 수집은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분리될 수 없고, 사물의 가치를 근대 산업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쓸모 여부로만 판별하는 찰스가 성공적인 정치가로 살아남는 세상에서 존은 고립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작품은 지극히 울프다운 방식으로 전쟁을 해부하고 있다.

    한 세대의 영국 청년들을 전부 앗아갔다고 할 정도의 사상자를 낸 1차 세계대전은 일상을 깊숙이 뒤흔드는 현실이었고, 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15) 1915년 친구였던 시인 브룩(Rupert Brooke)이 전사했고, 1916년 레너드 울프가 강제 징집을 당할 뻔했으며, 1917년에는 사촌 둘이 전사했다. 이 시기 울프의 일기와 편지는 애국주의에 호소하며 전쟁의 대의를 강조하는 정치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16) 이러한 맥락에서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두 정치가의 상이한 행보를 보여주는 「단단한 물체들」은 물체들에 대한 비관습적, 비습관적 사유를 시도함으로써 반전·평화 주의적 행위로서의 생각하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는 그 어떤 물체/대상도 결국은 주체의 의식으로 수렴하는 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한계를 우회적으로 인정하는 것과도, 혹은 반대로 의식에 복속되지 않는 물체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모더니즘의 윤리적 가능성을 강변하는 것과도 다르다. 이 작품은 사물의 존재론적 경이를 발견하는 존의 윤리적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수집물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는 존의 운명의 아이러니, 달리 말해 존과 존의 수집물을 똑같이 대우하는 사회의 진면모를 파헤치는 일에 초점이 가 있다. 작품에서 어떤 물체 혹은 인간이 일반적 통념이나 기대와 전적으로 ‘다를 가능성’이 시사되지만 그 가능성은 인정되기보다는 무시되고 도태되며 병적인 집착의 사례로 간주되고 격리된다. 이로써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부과된 용도를 벗어난, 존재의 ‘다른’ 가능성을 용인하는 사유를 더더욱 위험한 ‘비합법적 자유’로 간주하는 지배체제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전쟁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17)

    이렇게 보면 크루소의 질그릇에 대한 울프의 언급도 그 의미가 한결 분명해진다. 울프에 따르면, 디포는 “사실의 진실”(the truth of fact)에 근거하여 썼다고 공언하지만, 그는 “자잘한 것들”에 몰두한 “문자 그대로의 사실 기록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Defoe” 67, 68) “옳은 사실”(the right fact)을 사용함으로써 “현실감”(a sense of reality)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Robinson Crusoe” 74). 예컨대『로빈슨 크루소』가 성취하는 현실감이란 무엇보다 독특한 ‘관점’(perspective), 즉 “신이나 자연 혹은 죽음”과 같은 추상적이거나 관습적 개념들 대신 무인도에 던져진 한 남자가 빚은 질그릇들을 중심으로 삶과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뜻한다. 울프에 따르면 위대한 작가일수록 우리의 습관화된 “균형감각을 바꾸”기 때문에(71) 그의 시선을 따라 사물/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기존의 질서가 뒤집어져 우리의 허영심은 상처받고 오랜 버팀대가 뽑혀나가기 때문에 두렵”고 “고통스럽다”(71). 디포 역시 종교나 자연 혹은 인간에 관한 거대 담론에 기대는 대신, 만물의 무게중심을 바꾸어 크루소가 숱한 시행 착오를 겪으며 만들어낸 다양한 형태와 용도의 질그릇들을 중심에 놓고 그의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타성화된 사유로는 포착할 길 없는 사물, 배경에 나뒹굴고 있던 그 질그릇에 꽂힌 작가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이 새롭게 엮어내는 사물과 인간,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기대와 예상은 매순간 흔들리고 뒤집히며, 마침내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커다란 질그릇”을 마주하게 된다”(71, 72).18)

    작가로서 울프에게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중대하게” 그리고 “시시해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사물과 현실을 다른 기준과 가치의 관점에서 보게 하며, 궁극적으로 “확립된 가치들을 바꾸”기 때문이다(“Women and Fiction” 146). 신과 자연이 아니라 질그릇을 전면에 내세운 디포는 울프에게, 벤야민(Walter Benjamin)이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을 빌어 말한,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진정한 역사가”(Heller-Roazen 재인용 1)에 근접하며, 그러한 디포의 관점을 포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질그릇과 응시를 교환하게 하는 울프 자신 또한 그러한 역사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울프의 궁극적 제안은, 독자 스스로가 외롭고 고통스런 사유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점은 울프가 말하는 작가의 ‘관점’은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울프에 따르면, 디포의 통찰력은 디포 자신의 “확고히 사실에 입각한 지성”(solidly matter-of-fact intelligence)을 넘어선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탁월성은 작가 자신의 의도나 기호를 뛰어넘으며, 그런 면에서 디포는 자신의 의식적 견해나 의도를 넘어서는 성취를 이루는, “복되게도 무의식적인”(blessedly unconscious) 작가라는 것이다(“Defoe” 67). 사물에 대한 울프의 사유에 ‘관점’의 문제가 개입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19) 사물에 대한 울프의 관심은 인식의 과정에서 주체가 대상과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규정하려 하는가, 다시 말해 인식 과정에서 주체와 대상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놓여있다. 이를 통해 울프는 인식주체가 대상을 대상화 혹은 전유/지배하지 않는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다시 말해, 울프는 인식 주체가 대상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경계 지으려 하는가를 자의식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식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력구조와 그 작용을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20)

    9)물론 커디-킨과 같은 입장은 외적 현실과 구체적 사물에 대한 울프의 관심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 울프는 객관적 현실/사물보다는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더 중시한다는 오랜 비평적 입장에 맞서 울프의 글쓰기는 결코 현실세계를 외면한 적이 없음을 역설한 즈워들링(Alex Zwerdling) 이후의 중요한 비평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10)비평가 브라운(Bill Brown)이 이름을 붙인 「물(物)이론」(thing theory)을 위시한 물체/사물에 대한 영문학계 안팎의 활발한 논의를 떠올린다면 울프에게 물체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일은 물론 상론을 요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유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볼 때 물체에 관한 울프의 관점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에 국한하여 논한다.  11)1920년『애서니엄』(Athenaeum)에 수록되어 출판됨.  12)울프와 친분이 있던 화가 거틀러(Mark Gertler)는 인간만 다루는 문학은 열등하다면서 물건들에 집착했다고 하며, 그에 관한 일화는 자전적 에세이「지난날의 소묘」(“A Sketch of the Past”)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13)이 에세이는 씨커트의 그림에 관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작가와 동일시할 수 있는 화자의 견해를 단정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상 리얼리스트로서의 씨커트의 성취에 대한 평가에 작가가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볼 근거는 거의 없다.  14)우리말로는 잘 옮겨지지 않지만 이 ‘단단한 물체들’이라는 말 속에는 ‘물체들’(objects)이란 말 외에 ‘solid’라는 말도 들어있는데, 이것은 단단함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인 견고함, (물리적, 개념적 기반의) 탄탄함, 확실함 등을 내포한다. 바꾸어 말해 이 작품은 ‘solid objects’가 과연 ‘solid’한지도 함께 묻는다. 사물과 개념의 solidity는 서양 철학사의 핵심 개념일 뿐 아니라 방사선과 파동(waves) 등의 발견으로 근대 과학의 주요 쟁점이기도 했다. 울프는 특히 후자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막간』에서는 마을 사람 하나가 과학은 “사물들을 . . . 더 정신적이 되게 하고 있어 . . . 내가 듣기로, 제일 최근 개념에 따르면 확고한 건 없다는 거야” (is making things . . . more spiritual. . . . The very latest notion, so I’m told is, nothing is solid)(179)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과학에 대한 울프의 관심에 관한 논의로는 특히 Henry와 Whitworth 참조.  15)울프와 전쟁에 관한 대표적인 논문 모음집으로 허시(Mark Hussey)가 편집한 『버지니아 울프와 전쟁: 허구, 실재, 그리고 신화』(Virginia Woolf and War: Fiction, Reality, and Myth) 참조.  16)울프의 에세이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 와 니콜슨(Nigel Nicolson)과 트라웃만(Joanne Trautmann)이 편집한 편지 모음집(Letters) 참조.  17)「월터 씨커트」에도 밤낮 사무실에서 나날을 보내 눈이 멀어 버린 정치가와 사업들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18)여기서 울프는 질그릇을 시선의 대상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시선을 던지는 사물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흥미롭게도 하이데거의 “제대로 된 읽기”(proper reading)개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특정 개념이나 정의에 갇히게 되면 우리의 사유는 제대로 된 읽기를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읽기란 해독력이나 해석능력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대상에 대한 “주의/관심을 기울임”(attentiveness)을 뜻한다. 이러한 제대로 된 읽기 없이는 존재/대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응시를 알아보지 못한다”(Maly 재인용 236).  19)「단단한 물체들」의 서두에서 제시되는, 아득한 상공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망원경적인 관점에서부터 「큐가든」(“Kew Gardens”)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달팽이의 눈과 같은 현미경적인 관점에 이르기까지 울프는 사물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탐색한다. 그런데 관점에 대한 울프의 관심은 예컨대 모더니즘 미학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이 있을 뿐”이라는 니체적인 관점주의(perspectivism)나 현실인식에 다양한 관점의 공존을 드러내는 큐비즘과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우선 울프가 주목하는 관점은 대상과의 다양한 ‘거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울프는 일반적으로 ‘관점’을 말할 때 전제되는 인식 주체 혹은 그 주체의 자리 자체를 허물어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의 여성의 자아와 주체의 문제 및 여성의 익명성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울프의 관점을 아울러 논해야 하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20)여기서 상론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사물에 대한 울프의 사유는,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 주체의 지배가 가져온 인간 소외라는 서구 근대화의 역설을 극복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짐멜(Georg Simmel)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물건들에 대한 접근성의 증가와 이에 따른 물건의 물다움의 상실을 근대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는다. 근대성과 주체, 물체, 그리고 물화에 대한 짐멜, 루카치, 벤야민, 하이데거 등에 관한 간명한 소개로는 브라운의 논문 가운데 특히「물(物)이론」과 「사물들의 비밀스런 삶」(“The Secret Life of Things”) 참조.

    4. 사유와 언어

    울프의 사유와 언어 문제를 논하기 위해 약간 우회하기로 하자. 아감벤은 주권자에 대한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의, 즉 주권자란 법질서가 예외 상태를 선포하고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람이라는 정의에 내포된 주권의 역설, 즉 자신은 법의 외부에 있으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하는 주권자가 법의 외부와 내부 동시에 위치하는 역설에 주목한다. 주권의 역설은, 예외가 자신에 선행하는 규칙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스스로의 효력을 정지시킴으로써 예외를 창출”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법질서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규칙은 “예외와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을 규칙으로 만들 수 있”(61)으며, 법적, 정치적 질서는 외부를 구축하여 배제시켜 예외라는 이름으로 내부화하려는, 즉 “배제된 것을 포함하는 구조”를 갖는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내적으로 결탁”되어 있을 가능성(Homo Sacer 13)은 바로 이러한 역설에 근거하며, 아감벤의 작업은 이러한 주권의 진정한 바깥, 혹은 주권권력의 형태를 벗어난 곳에서 인간의 삶을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주권의 역설이 드러내는 법적 질서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언어의 구조에 기반한다. 언어란 영원한 예외 상태에서 자신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언어는 언제나 “자신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주권자”이다. 언어는 비언어(사물)를 배제함으로써 포함하는 구조이자 굴레인 것이다(Homo Sacer 20). 아감벤에게 주권의 역설에 대한 사유는 주권이 “법질서의 경계를 어느 지점에 설정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Homo Sacer 17) 주권의 권력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듯이, 언어의 역설에 대한 사유는 모든 것을 언어로 귀속시키려는 언어의 구조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굴레로서의 언어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21) 아감벤은 “인간 언어의 유한성과 다의성이야말로 ‘사유의 변증법적 여행’을 위한 통로가 된다”([P]recisely the finitude and polysemy of human language becomes the path opened for the ‘dialectical voyage’ of thought)고 말한다(Potentialities 46). 즉, 아감벤에게 언어에 대한 사유는 실천적 가능성을 가지며, 이러한 사유는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읽기, 혹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능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기울이기”(Durantaye 25)와 직결되어 있다.

    울프 역시 언어와 정치 양자가 모두 “배제된 것을 포함하는” 구조를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권력구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유를 수행한다. 가령 1939년 6월 영국의 어느 외딴 마을에서 벌어지는 야외극을 소재로 가부장제와 군국주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뒤얽힌 끔찍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막간』(Between the Acts)이 좋은 예이다.22) 야외극과 마을 사람들의 대화를 동시에 관통하는 ‘우리’라는 말을 통해 울프는 “배제된 것을 포함하는” 구조가 일상 언어와 보통 사람들의 생각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언어와 사고의 습관이야말로 이 군중을 끔찍스런 폭력의 공모자로 변모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수사는 동질적 집단정체성을 단순히 반영 혹은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정체성이 작동하는 경계, 즉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 포함과 배제가 발생하는 지점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이로써 이 작품은 ‘우리’를 핵심어로 하는 정치 담론의 폭력성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토대를 약화시킨다.

    울프는 언어 본연의 가능성, 즉 스스로 이념적 굴레를 벗어날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1937년 4월 BBC 라디오 강연 시리즈「말문이 막힌다」(“Words fail me”)에서 울프가 강연한 강연문인「솜씨」(“Craftsmanship”)를 보자. 울프는, 자신은 작가이니 작가로서의 솜씨, 즉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 관해 말해야 할 터이지만, 사전에 정의된 바에 따르면 ‘솜씨’라는 단어는 언어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말문을 연다. 그녀에 따르면, ‘솜씨’에 들어 있는 ‘craft’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 즉 “단단한 물체로 유용한 물건들을 만드는 일”(making useful objects out of solid matter)이라는 의미와 “감언이설, 간계, 속임수”(cajolery, cunning, deceit)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데 언어는 쓸모와는 거리가 멀뿐더러 속임수가 아니라 ‘진리’를 전한다는 점에서 언어 혹은 작가와 ‘솜씨’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솜씨’라는 말을 언어에 적용할 경우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한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러한 언급은, 사실 언어가 솜씨로 전락하면, 다시 말해 언어가 쓸모에 휘둘리게 되면, 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간계와 속임수의 도구가 된다는 주제로 나아가기 위한 의미심장한 서론이다.

    이듬해 8월에 출간된 『세 닢의 기니』(Three Guineas)에서 울프가 개진하는 히틀러/독재자의 기만적인 정치적 수사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상기한다면, 이 강연문이 지적하는 언어의 도구화나 속임수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이 강연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수사와 담론을 거론하는 대신 울프는 안내표지판에서부터 여행서적, 그리고 예술 비평문에 이르는 언어들이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247)하는 기호로 전락함으로써 당대의 정치적 수사와 닮은꼴이 되어가는 현실을 폭로한다.23) 이로써 울프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우리의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짚어보지 않으면 전쟁을 비롯한 역사적 참극은 근절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강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울프는 언어란 본래 “쓸모 있기를 싫어”하고(246), “쓸모가 있지 않으며”(247), “한 가지 진술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을 표현”(246)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언어 내부에 있는 저항과 반동의 씨앗을 강조하고 이를 되살릴 것을 촉구한다.24)

    그 뿐 아니라 울프는, 언어가 가진 가능성들을 배제하고 언어를 한 가지 의미로 환원하거나 몇 가지 암시적 의미로 고정시킬 경우, 언어 자체가 “비현실적”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읽는 주체 자신도 참다운 “독자”가 아닌, 전문용어만 쓰는 전문가나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쓰는 사람 혹은 기계적으로 말뜻만 찾는 사람이 된다(248)고 지적한다. 바꾸어 말하면, 수많은 가능성들을 잉태한 언어 본래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는 일은, 기표의 투명성, 기표와 기의의 일체성을 기정사실화하고 언어를 길들여 기호화함으로써 사유 자체를 차단하려는 정치적 수사에 맞서는 일이자, 현실을 제대로 읽지도 사유하지도 못하는 비현실적인 주체로 전락하기를 거부하는 일이며, 나아가 위계적 질서와 억압적 구조에 근간한 제국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저항하는 일이 된다. 요컨대 울프는 언어를 제대로 쓰고 읽는 일은 그 어떤 이념이나 폭력의 허수아비로 전락하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토대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울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교수와 비평가가 문학을 논하고 젊은 이들이 문학시험을 보고 있지만 “4백 년 전보다 우리가 더 잘 쓰고 더 잘 읽는”다고 하기 어려운 데는(249), 자유분방한 언어를 억압하고 도구화한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언어의 도구화는 참다운 사고를 방해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과 공존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의 존재방식과 직결되어 있다. 울프에 따르면, 언어도 “인간처럼” 다채롭고 서로 낯선 방식으로 여기저기서, 사랑하고 짝지으며 살아간다. 아니 오히려 인간보다 “의식과 관례에 덜 속박된다”(250). 이처럼 자유로운 “방랑자”인 언어에게 “그 어떤 법칙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본래 변화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한 가지 의미로 낙인찍거나 하나의 태도로 제한한다는 것을 증오한다 . . .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면 . . . 언어는 날개를 접고 죽는다”(251).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꼭 “우리 자신과 같다”는 것이다(251).

    여기서 언어가 인간과 닮았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이는 언어와 사유, 그리고 주체와 자유로운 삶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꿰뚫어보는 탁월한 통찰에 기인한다. 지면 관계상 길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아감벤과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스승인 하이데거 역시 존재와 사유, 그리고 언어에 관해 울프와 매우 유사한 견해를 내놓는다. 이들 모두 “현실을 통해 가능성을 배척”하는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지향하며, 이러한 사유는 궁극적으로 자유로운 삶의 실현, 참다운 존재의 발현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참다운 존재의 발현은 관습적 언어의 굴레를 넘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25) 하이데거에게 현존재(Dasein)는 “언제나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현실(actuality)이 아니라 잠재성(potentiality)으로서 정의된다. “‘존재’(Being)는 결코 현실(reality) 혹은 분명히 결정된 현실(actuality)이 아니다.” 그리고 “사유란 . . . 그저 존재하는 어떤 것(some existent thing)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성취하는 실천의 한 형태이다(Durantaye 재인용25). 이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언어는 기존의 전제들을 반복하려는 관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장애가 되지만, 동시에, 울프가 이미 간파했듯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본연의 속성으로 인해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21)헬러-로우젠(Heller-Roazen)이 지적하듯이 아감벤에게 언어에 대한 사유는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내재하는 아포리아, 문자 그대로의 ‘길 없음’(lack of way)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포리아(euporia)―“절묘하게 적절한 방식”(a felicitous way)―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Potentialities 5; Durantaye 134). 아감벤은, 언어에 대한 사유가 아포리아에서 멈춘다면 추정(presuppositions)을 제거함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철학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Potentialities 45).  22)아감벤과 연관 짓지는 않았지만 『막간』의 ‘우리’의 수사에 관해서는 졸고 「“우리는 변하는 걸까요?”:『막간』의 야외극과 문학적 실천」에서 논의한 바가 있다.  23)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익명의 대중을 향한 라디오 방송 강연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일상으로 교묘히 파고든 정치적 담론의 작동방식을 들추어내는 작업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이라는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24)이와 유사하게 아감벤 역시 언어는 항상 실제로 외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감추고 있으며, 의미와 외시 사이에는 도저히 환원 불가능한 간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Homo Sacer 20-21면 참조.  25)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현실성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현실(있음, 본질 혹은 실체로서의)의 면에서 해석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이 때문에 창조적인 종류의 사유인 잠재성을 사유하려고 하면, 우린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서투르고 능력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W]e are all too accustomed to thinking purely and simply in terms of actualities, to interpreting in terms of the actual (as presence, ousia). For this reason we are still unprepared, we feel awkward and inadequate, when it comes to thinking potentiality, a kind of thinking that is always creative.)(Durantaye 재인용 24). 하이데거가 철학적 사유를 독특하고 난해한 문체와 어휘를 통해 전달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나가며: 브라운 부인과 셰익스피어의 누이

    베넷(Arnold Bennett)이 울프의『제이콥의 방』(Jacob’s Room)을 가리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독창적이고 영리한 디테일에 대한 강박 때문에 도무지 살아있는 인물들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하자 울프는 베넷식의 디테일이야말로 인물을 죽인다고 반박한다. 가령 브라운 부인이라는 여성의 아버지가 누군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그녀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전할 뿐이며 인물을 그려내는 “그러한 도구들은 죽음”일 뿐이라는 것이다(“Mr. Bennett and Mrs. Brown” 110). 울프가 디포의 세세한 묘사의 성취를 “옳은 사실들”이라 부르는 데에는, 베넷식의 묘사는 한 인간의 삶을 충실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타성적 견해―즉 가족, 경제, 계급을 근거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분류하는―를 반복하는 ‘틀린’ 사실의 나열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다. 울프에 따르면, 베네트 같은 작가는, 역사를 통해 내내 도처에서 살아온 브라운 부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102). 브라운 부인이 제 아무리 자신은 “다르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정말 다 르다고 항의”해도 베넷은 기차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결코 본 적이 없으며, 애초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브라운 부인은 억압되고 누락되고 망각된 여성의 삶이자, 동시에 “우리가 사는 정신이요 삶 그 자체”(119)이다. “자아가 없이 본 세상”(the world seen without a self)(The Waves 287)을 담기 위한 울프의 필생의 고투는 베네트의 눈 대신 크루소의 질그릇을 보는 디포의, 혹은 중하류계급의 값싼 가구들을 그려내는 씨커트의 시선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울프는 가부장제를 비롯한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체제에 물든 인식과 의식, 그리고 기록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물과 존재, 나아가 리얼리티 자체를 가시권으로 끌어내려 했다. 이러한 작업은 아감벤적인 탈창조(decreation), 즉 “가능했으나 실현되지 않은 것을 . . . 보이게 하는” (brings . . . ‘what could have been but was not’ into view)(Durantaye 23) 과정, 바꿔 말하자면, 벤야민이 요청하는 사유, 즉 “결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의지적 기억”(an involuntary memory)을 경험하는, 그럼으로써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것”을 읽어내는 사유(Heller-Roazen 5)의 과정과 맞닿아 있다. 울프가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평생을 천착한 리얼리티는 인식과 재현에 선행하는 협의의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실현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아감벤적인 잠재성(Ewa Ptonowska Ziarek 107)과 상통한다. 아감벤에게 물 자체란 “존재하는 것”(an extant thing)이 아니라 “‘가능성의 형식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something that “exists in the mode of possibility”)(Heller-Roazen 13)이듯이, 울프의 브라운 부인은 “어디든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으며 무엇이든 말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과 끝없는 다양성”을 가진 여인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삶 그 자체”(119)이기 때문이다.

    『세 닢의 기니』에서 가부장제와 군국주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결국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울프의 예리한 통찰은 그러한 현실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추적을 통해 울프는 결국 인간 역사는 이러한 현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비극적 반복은 “달리 되었을 수 있었던 것들”(things could have been different)(Durantaye 16)의 배제와 도태, 그리고 망각이라는 지배 체제의 자기보존/재생산의 메커니즘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울프는 우리가 “자유의 습관을 갖게 될”(113) 때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몸을 입고” 태어날 것(114) 이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누이’라는 리얼리티는, 셰익스피어라는 리얼리티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를 추적하고, 그것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밀려난 무수한 다른 가능성들을 역사와 인식 속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구현된다. 다시 말해, 벽 위의 자국‘을’ 아는 일 대신 그 자국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물적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것들에 우위를 부여하려는 인간 사유의 조건과 한계를 직시함으로써 인식과 역사에서 추방되어 온 달리 되었을 가능성들을 ‘존재하게’ 하는 실천이 된다.

    아감벤은 역사가는 “일어난 것”을, 그리고 시인은 “일어날 법한 종류의 것”을 다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의 이면에 깔린 시와 역사, 그리고 철학의 분리를 문제 삼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26) 가능성과 실제 현실의 관계에 대한 아감벤의 발본적인 사유는, 생각하기를 싸움의 일환으로 택한 울프의 글쓰기에서 이미 놀라우리만치 집요하고 철저하게 개진된 바 있다. 역사적 실현을 능가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사물과 존재, 그리고 언어에 대한 울프의 사유는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의 아포리아가 노정하는 결정주의와 ‘아직’(not yet) (그러나 끝끝내 오지 않는)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를 모두 극복할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26)듀란테이가 지적하듯 아감벤은 정치가 본래 철학적인 것처럼 사유도 본래 정치적이라고 본다. “생각한다는 것은 . . . 사유의 순수한 잠재성을 경험”하는 것이며 잠재성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합리성, 알고 말하는 우리 존재의 토대”(Durantaye 재인용 14)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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