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Representation Process of Time in Hou Hsiao Hsien’s Films

허우 샤오시엔 영화에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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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origins of the Taiwanese are very diverse. The island was then occupied by the Dutch, the Japanese and the Kuomintang government. In the 1950s, Taiwan is not concerned with politics, there was no relationship between cinema and society. It was in the 1970s that artists have begun to talk about the reality of their country. But this time, the film was commercial and was not interested in reality. It was not until the 1980s and the emergence of the French new wave films that evoke the problems of ordinary people. At that time, Hou Hsiao Hsien was the representative of Taiwanese new wave cinema(1982–1990). His film was delayed compared to the literature. Since 1983, one of Taiwan’s most prominent writers, Chu Tien-wen has been Hou Hsiao-hsien’s most faithful creative partner. In 1980s, the subject matters of Hou Hsiao-hsien’s films is the family, friends, society and everyday life. But internal subjects are different. He follows the definition of modernism related to concepts of the cinematic time. To achieve this, his films approach the representation of history as the concept of singularity in Gilles Deleuze’s theory. As Deleuze suggests, the present is situated in relation to past and future. Hsiao-hsien gives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Taiwanese history involved. However the subject of thinking is not for a director but for each audience. This study opposes that Hou Hsiao-hsien’s films are over-analyzed for historical ideology. Modern progressivism ideology and notion of the linear time collapse in his cinema. In 6 examples, A City Of Sadness(1989), The Puppetmaster(1993), Good Men Good Women(1995), Flowers Of Shanghai(1998), Millennium Mambo(2001), Flight of the Red Balloon(2007), this paper analyzes the concepts of the Hou Hsiao-hsien’s cinematic time.


  • KEYWORD

    Hou Hsiao-hsien , Chu Tien-wen , Deleuze , Taiwanese new wave cinema , modernist film , flash back , mise en abyme

  • 1. 서론

    80년대 대만영화의 누벨바그 ‘신랑차오(新浪潮)’의 대표자 허우 샤오시엔(侯孝賢)을 이야기할 때 ‘시적 정감이 가득한 화면에 평범하고 순박한 대만인의 일상을 그리는 감독’, ‘일상의 무기력과 분노에서부터 대만 현대사의 그늘,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담아내는 시네아스트’1)란 표현을 쓴다. 데뷔작인 <귀여운 여인 就是溜溜的她>(1980)에서부터 대만 뉴웨이브의 수작으로 불리는 성장영화 4부작 <풍구이에서 온 소년 風櫃來的人>(1983), <동동의 여름방학 冬冬的期>(1984), <동년왕사 童年往事>(1985), <연연풍진 戀戀風塵>(1987)에 이르기까지, 허우 샤오시엔은 자전적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서정성이 짙게 베어나는 현실 묘사를 통해 자신만의 섬세한 연출세계를 키워왔다. 제2차 국공내전 중인 1947년 중국의 광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대만으로 건너가면서, 태어난 지 1년 만에 고향을 떠나 북대만의 신주현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 치하에서 대만은 여타 아시아의 다른 나라가 그러했듯 가변적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훗날 이러한 성장과정은 그의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의 집 집 근처에 있던 ‘도교사찰’이나 ‘인형극’을 관람할 수 있었던 ‘경극 극장’은 나중에 영화 소재로도 활용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제대 후 타이페이에 있는 국립예술전문학교의 영화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까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를 통해 군에 머물던 2년 동안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으며, 1969년 제대 직후 영화학교에 진학했다고 그는 밝힌다.2) 1973년 학교를 졸업한 후로 짧은 동안 세일즈맨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내 영화계로 돌아왔다. 영화 <귀여운 여인>으로 정식 데뷔하기 전에 그가 리싱(李行), 천쿤허우(陳坤厚), 라이청잉(賴成英) 감독의 조연출 및 각색가로 일하면서 기반을 닦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허우 샤오시엔이 각본에 참여한 작품으로 <취호한 翠湖寒>(1976), <연파강상 煙波江上>(1978), <굿모닝 타이페이 早安台北>(1980) 등 여섯 편을 들 수 있는데,3) 이때의 작업을 통해 주요 스텝들과도 조우했다. 촬영감독이자 연출자인 첸 쿤호후가 대표적인데, <풍구이에서 온 소년>과 <샌드위치맨 兒子的大玩偶>(1983), <동동의 여름방학>과 같은 허우 샤오시엔 초기작에서 그는 촬영감독으로 활약하였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주티엔원(朱天文)과는 <풍구이에서 온 소년>을 통해 연을 맺은 후 2005년의 <쓰리타임즈 最好的時光>에 이르기까지 총 12편4)의 각본을 함께 썼다. 80년대 샤오시엔의 왕성한 활동의 바탕에 주티엔원과의 협업이 깔려있다. 2007년 10월 ‘파리 이국 문화주간(la Semaine des Cultures étrangères à Paris)’의 게스트로 초청된 쥬티엔원은 당시 ≪크리티카 critikat≫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만영화의 컨텐츠의 발전은 분명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끄는 데 도움을 줬다. 그 전방에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있다. 90년대에 이르러 샤오시엔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계무대에 알리는데, 열 번째 장편영화 <비정성시 悲情城市>(1989)가 46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 주요한 계기였다. 해외의 대만영화 연구자들은 90년대의 허우 샤오시엔을 칭해 ‘그의 이름은 곧 대만영화와 동의어(synonym)’6)라 말하기도 하고, 프랑스의 라셉뜨(La Sept) 채널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조망해 살피기도 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우리 시대의 영화(Cinéma, de notre temps)’7)를 통해서다. 세계적 거장들의 영화 만들기에 관해 다루는 이 프로그램은 샤오시엔을 유일한 대만감독으로 포함시켰다. 이 작품이 ‘HHH’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가 연출을 맡은 다큐멘터리 <허우 샤오시엔의 초상 HHH, portrait de Hou Hsiao-Hsien> (1996)이다. 총 90분 분량의 TV방송용 영화로, 이를 통해 아사야스는 허우 샤오시엔에 대한 오마주를 취하는데, 이를테면 <희몽인생 戱夢人生>(1993)에 출연한 인형제작자를 통하여 샤오시엔의 연출 방식을 듣거나, 어린 허우가 자란 곳을 찾아가 친구들의 증언을 듣는 등으로 그는 존경심을 표하였다. 이 다큐는 이후 유럽에서 샤오시엔에 관한 다양한 논문과 에세이집, 서적 등이 출간간 기폭제가 됐다.

    이상의 개요를 바탕으로 본고는 ‘대만 3부작’8)이라 불리는 <비정성시>와 <희몽인생>, <호남호녀 好男好女>(1995)을 시작으로 2007년작 <빨간 풍선 Le voyage du ballon rouge>까지의 연출작을 통해 그의 영화적 경향을 살피려 한다.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질감은 때로 ‘리얼리즘의 느낌을 담은 이미지’9)로 읽히고, 때로는 ‘자국의 문화적이고도 역사적인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한 서사전략’10)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차이는 결국 역사 재현의 문제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른 관점에 상이함에서 온다. 같은 재현의 문제를 논의하더라도 논자마다 입장이 다르고, 사회적 견지에서 영화를 분석할 때에 더욱 그렇다. 고현철의 경우 대만3부작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대만인의 인식과 태도가 드러나는 통로’11)라 해석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대적 특성을 ‘헤게모니’의 틀로 엮는다. 이런 식의 해석은 분명 흥미롭지만 영화적 해석의 맥락에서 놓치기 쉬운 점들이 생긴다. 영화의 내적 암시를 편향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샤오시엔이 아니라 주티엔원의 소설을 해석할 때에라도 이 관점은 유효하다. 즉, 영화의 작가로서가 아니라 서사의 방식을 해석하는 데 머무르기 쉽다. 게다가 직접적 시대 배경이 아닐지라도 캐릭터의 개념 자체를 식민지와 연관해 해석하는 것은 범주상 오류라 볼 수 있다. 역사성을 떼어 놓고 영화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역사 해석의 관점보다 표현 방식의 설명이 더 중요한 감독들이 있다. 본고는 이전의 논문들에서 샤오시엔을 다루던 재현의 개념이 아니라, 재현의 방식에 집중할 것이다. 특히 영화의 감각 요소 중 ‘시간’에 관한 샤오시엔의 생각과 연출양식을 파헤치는 데 주력할 것이며, 이를 위해 철학자 질 들뢰즈를 비롯한 그의 동지들의 견해를 빌리려 한다.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허우 샤오시엔 영화의 창작 방식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사유 방식은 차용될 것이다.

    소쉬르 이후 의미를 결정하는 선험적 구조를 사유한 구조주의는 세계를 주도하는 사유의 흐름이 되었다. 이가 바로 언어적 구조주의(structuralisme en linguistique)다. 야콥슨을 비롯하여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 그리고 롤랑바르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 구조주의에는 합리주의(rationalism)의 이성적 측면이 뒷받침된다. 하지만 언어적 구조주의는 후기에 이를수록 구조주의의 합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두고,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벗어난 ‘비합리성’ 또한 수용하려고 하였다.12) 본고에서 다루려는 들뢰즈의 구조주의적 사고는 따라서 정확히는 ‘탈구조주의’적 해체가 아닌 ‘후기 구조주의’,13) 즉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측면에서이고 이는 인간 감각의 해석에 유리한 측면을 지닌다. 구조주의를 뛰어넘는 들뢰즈의 비합리적 속성을 영합하는 능력은 영화를, 그중에서도 특히 정서가 전체를 장악하는 경우에 속하는 영화텍스트를 분석하는 데 적합하다. 물론 들뢰즈 자신이 스스로 비합리성에 대한 근간을 메우기 위해 끌어들였던 베르그송 역시 우리가 참고하여야 할 영역이다.

    동일성의 테두리에 갇힌 영화 속 질료의 분석을 통해, 정신적이며 감성적인 허우 샤오시엔의 작품세계를 더 넓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1)씨네21, 『영화감독사전』, 한겨레신문사, 2002, p.620  2)Jean-Michel Frodon, Alain Bergala, 『Hou Hsiao-hsien』, Cahiers du cinéma, 1999, p. 59  3)데뷔 전 각본에만 참여한 작품의 목록은 <翠湖寒, 1976>, <煙波江上, 1978>, <西風的故鄉, 1979>, <天涼好個秋, 1979>, <我踏浪而來 , 1980>, <早安台北, 1980>의 여섯 편이다.  4)크레딧에 오른 장편은 총 12편으로 <風櫃來的人 1983>, <冬冬的假期 1984>, <童年往事 1985>, <戀戀風塵 1986>, <尼羅河的女兒 1987>, <悲情城市 1988>, <戲夢人生 1993>, <好男好女 1995>, <南國再見,南國 1996>, <海上花 1998>, <千禧曼波之薔薇的名字 2001>, <最好的時光 2005>이다. 첸 쿤호후 연출의 <小畢的故事 1983>에는 허우 샤오시엔과 함께 작가로 참여했으며, 이외 에드워드 양의 <青梅竹馬 1985> 역시 그녀가 쓴 대표적 시나리오로 꼽을 수 있다.  5)Marion Pasquier, , critikat, 02. 10. 2007.  6)Emilie Yueh-yu Yeh, Darrell William 공저, 『Taiwan film directors, a treasure island』, Columbia Univ. Press, 2005, p.133  7)1992년에 라 셉트는 ‘아르떼 Arte’로 채널의 이름을 바꾼다. 1964년 ‘까이에 뒤 씨네마’의 구성원들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들 Cinéastes de notre temps>이란 타이틀로 중요 감독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이는 72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이후 아르떼 체널은 1989년 ‘데이빗 린치’ 감독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와 동일한 구성으로 <우리 시대의 영화>라는 제목을 단 TV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동양인 감독 최초로 ‘허우 샤오시엔’이 포함됐다. 1999년 Jean-Pierre Limosin이 연출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 편이 있긴 하지만, 동양인 연출자는 아직까지 이 둘이 전부다. 이 프로그램은 단기 포맷이 아니라, 장기적 예술영화 프로젝트의 리스트로 관객들에게 인지되는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  8)Edward Lawrence Davis,『Encyclopedia of contemporary Chinese culture』, Routledge, 2005,p.148  9)박성수, 「미적 장치와 역사에의 접근」, 문화비평, 1995, p.239  10)안정훈, 「영화 <비정성시>에서 나타난 대만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고찰」, 중국소설논총 제28집, 2008, p.320  11)고현철, 「허우샤오시엔 ‘근대사 3부작’의 탈식민주의적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28집, 2011, p.368  12)이 때문에 들뢰즈의 경우, 그 유명한 표현 ‘반플라톤주의 l’anti-platonisme’란 수식을 받기도 한다.  13)도표 1. 참조  14)Keith W. Faulkne, 『Deleuze and the three syntheses of time』, Peter Lang Publishing, 2006, p.1

    2. 역사의 서사 - <비정성시>, <희몽인생>, <쓰리 타임즈>

    영화 <비정성시>와 <희몽인생>은 일제점령기 치하(1895-1945)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대만이 중국으로 반환된 후에 일어난 1947년 2월 28일의 ‘피의 228 사건’15)은 이 영화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인식의 초석이 되는 사건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의 권력을 장악했던 국민당 정부는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섬 전체를 강경한 반공독재정치로 가두었다. <비정성시>에 등장하는 언어 장애가 있는 주인공, 문청의 친구인 ‘관영 패거리’가 모인 회합 장면에서의 배경이 바로 이 사건이다. 따라서 228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주요 캐릭터들의 향후 방향을 이해하는 주요키워드가 된다. 한편 <희몽인생>의 경우에 국민당의 횡포는 일제 치하보다 어쩌면 더 비정한 것인 양 그려진다. 이 영화는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일제통치 이후 50년간의 내용을 담는다. 역사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사전지식이 있는 편이 좋지만, 이 두 작품에서 당시의 국민당 정부를 바라보는 샤오시엔의 관점이 긍정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두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그려낸 연출의 방식이 좀 특별하다.

    <비정성시>의 도입부에서 ‘소화 20년 11월 8일’을 알리는 내레이션은 훗날 문청의 부인이 되는 ‘관미’의 목소리이다. 관미는 극 속에서 주로 주인공 문청과만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 그녀를 중심으로 영화의 화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원거리에서 딥포커스로 프레임이 잡힐 때 사용되는 ‘내레이션’이 첫 번째 방식이고, 다음으로 그녀가 문청과 나누는 ‘손 글씨’가 두 번째의 소통 방식이다. 인물들이 쓴 수첩이 화면에 표현되는 방식은 까만 화면에 흰색으로 찍힌 ‘인서트’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때 글씨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 사물화 시키면서, 감독은 몽타주의 리듬감을 살리는 부수적 효과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일상적 대화’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대사가 배치되는 세 가지 방식에 따라 각자 고유의 운율이 영화 전체를 통해 쌓인다. 이때 발생하는 의사소통의 리듬은 시나리오나 촬영의 단계가 아니라 편집의 과정에서 다듬어진 결과이다. 즉, 순간의 몽타주를 통해 <비정성시> 속 재현의 시간은 결정된다. 로베르 브레송의 말처럼 “리듬 속에 붙잡힌 것만이 지속될 수 있으며, 이때 ‘내용’은 형식에 맞추고 ‘의미’는 리듬에 따른다.”16)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도 꼭 맞는다. 영화 속 모든 지속은 리듬과 직결되고, 또한 내적 의미를 위해 형식을 선택했다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희몽인생>의 롱테이크와 실제 인물인 화자의 목소리 교차 역시 마찬가지로 설명가능하다. 이 영화에서도 전체 리듬은 지속의 몽타주에 의해 결정되고, 이는 시나리오나 프러덕션의 과정이 아니라 후반과정 중 감독이 선택한 결과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쓰리 타임즈>에는 세 가지의 에피소드가 담긴 영화이다. 각 파트의 시대적 배경은 각각 ‘감독의 젊은 시절인 1966년, 과거 격변기 1911년과 현재인 2005년’이다. 이들 세 이야기는 각각 ‘같은 인물이 연기한 다른 캐릭터, 그리고 연출적 의도에서 비롯된 구성’ 등으로 연결된다. 배우 장첸이 연기한 남성 캐릭터 3명은 차례로, ‘자전거, 통로,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 공간을 가로지르고 이동한다. 그리고 그가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나머지의 배경 속에서 여자의 캐릭터는 대개 한곳에, 예를 들어 ‘당구장과 유곽, 클럽이나 자신의 방’에 머무르도록 구성됐다. 그리고 <비정성시>와 다르게, 이 영화는 몽타주가 리듬을 잡지 않는다. 대신 세 에피소드의 균형은 커팅보다는 그 ‘구성’ 자체에 있다. 이는 후반작업의 결과가 아니기에 신중히 관찰 돼야 한다. 앞의 영화들에 비해 <쓰리 타임즈>는 포괄적인, 전체의 리듬감을 확보하는 데 더 열중하는 작품이다. 배경으로 제시되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감독의 역사관을 해석할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를테면 앞선 영화 <비정성시>의 문청과 <희몽인생>의 리 티엔루는 역사 속의 인물로 설정되어 개인사를 통해 역사를 방증하였다. 그러나 <쓰리 타임즈>의 장첸 역할은 이보다 더 간접적이다. 그는 다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등장하지만, 인물과 구도의 반복만으로 세상사를 압축한다. 사건은 일어나고 누군가는 남는다(마치 <비정성시>의 결말처럼). 그리고 그 남은 누군가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톱니바퀴처럼 살아간다(<쓰리 타임즈>의 구성). <비정성시>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던 샤오시엔의 거시적 역사관은 이렇듯 <쓰리 타임즈>를 거치면서 좀 더 명확해진다. 베냐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우 샤오시엔은 ‘원래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그의 거시적 시각은 역사적 유물론(historischer materialismus)17)의 의미에 더 가깝다. 경과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간이 멈추고 정지해버린 ‘현재’라는 개념을 이 역사적 유물론자는 포기하지 못한다.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을 중시하는 연출자, 영화 <쓰리 타임즈>에 담긴 세 시기의 순환은 그의 웅변처럼 들린다.

    <비정성시>에서처럼 리듬을 살려서 영화에 사건이 아닌 ‘의미’를 담는 것, 그리고 <쓰리 타임즈>처럼 (역사주의에서처럼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의 반복이 아니라) 역사적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샤오시엔 작품의 세계관이 플라톤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과 맥락상 일치함을 알려준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역사가 재현되는 순간의 환상은 들뢰즈가 언급하는 ‘순수 사건’에 더 가까워졌다. 이때의 환각은 능동이나 수동이 아니라,현실적인가 상상적인가라는 물음조차 적합하지 않은 그저 그 사건(un des singuliers)일 따름이다. 이렇게 형성된 순수 사건은 ‘시간의 두 계열(시간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접촉하게 만들 것’18)이다. 만일 누군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려 한다면, 일단 영화에서 벌어진 일을 순수사건으로 받아들인 이후가 되어야 한다. 이후 벌어지는 이차적인 환상의 작용 ‘승화, 그리고 상징의 예술’19)로서의 가치를 그의 작품들은 지닌다. 그 자체로 역사가 되거나, 혹은 역사적 사건이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새겨지는 경우 모두, 역사의 서사보다 캐릭터의 확립이 더 중요한 과정임은 인지되어야 할 것이다. 푸코가 재현된 예술을 언급하며 ‘유사성(ressemblance)’과 ‘상사성(similitude)’을 구분하였던 것처럼,20)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해석할 때에도 역사성이나 그에 대한 직유, 비유에 대해 엄정해질 필요가 있다.

    15)James Udden, 『No man an island, the cinema of Hou Hsiao-hsien』, Hongkong univ., 2009, p.10  16)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동문선, 2003, p.81  17)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도서출판 길, 2009, p.334  18)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2003, p.347-348  19)질 들뢰즈, 위의 책, p.350  20)푸코에게 ‘유사(類似, ressemblance)’란 본래적인 것, 원본을 전제하는 한에서 그 원본과의 가까움을 말한다. 전통적인 회화를 지배해 온 개념으로, 원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와 그 원본을 얼마나 나누어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다. 반면 상사(相似, similitude)는 원본이 없는 경우에 성립한다.

    3. 내레이션의 효과 - <희몽인생>, <밀레니엄 맘보>

    <희몽인생>에서는 실존인물인 리 티엔루(李天祿)가 직접 내레이션 목소리를 맡았다. 이 영화를 만들며 허우 샤오시엔은 편집기사에게 “이 작품은 내레이터의 표현과 잘 부합되게 편집되어야만 합니다.”21)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때문에 마치 실재를 재현한 듯 실존인물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배우가 각각 각기 다른 시간에 배치된다. 연출자는 영화의 중심이 목소리란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롱테이크의 원경 쇼트를 두고 티엔루의 목소리를 자주 보이스-오프로 들려준다. 그리하여 완성된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아무리 실존 인물이 연기한다 하더라도 관객 어느 누구도 이 영화를 다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어떤 사건은 목소리가 들린 후에 이어서 화면이 나오고, 어떤 때는 목소리와 사건이 겹치는데, 앞서 살핀 것처럼 몽타주에 있어 리듬이나 운율문제로 이를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정성시>의 경우와 다르게, 리 티엔루의 목소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을 ‘재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원인은 모두 몽타주에 있다.

    뱅상 아미엘은 “모든 몽타주의 ‘개입’은 시선의 지속과 스토리의 지속을 통해 두 배로 측정된 흐름과 연관되어 이루어진다”22)고 설명한다. 특정한 방식을 통해 하나의 모티브가 반복되고, 이를 관객이 인지한다면 결국 내포된 의미가 강조 혹은 반복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를테면 평행편집이나 교차편집 같은 것들이 그런 예다. 만일 필름이 커팅되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관객들의 지각이 절단되지는 않는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앞서 일어난 사건은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인지될 것이고, 그러니 과정에 ‘개입’된 다른 몽타주 역시 ‘비등한 입장에서’ 다른 차원에 놓이게 될 것이다. 영화 <희몽인생>의 내레이션을 통한 재진술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교차편집의 효과를 준다. 이 영화에서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의 방식(내레이션과 재현)은 아무리 내용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현재의 늙은 화자’와 ‘과거의 그의 기억’으로 층위가 나누어져 관객의 머릿속에 들어온다. 물론 교차편집과 다르게, 이때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교차된 점이 다르다. 즉, 관객들은 <희몽인생>을 보며 픽션과 다큐를 오간다. 현재 장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과거 그의 인생을 보는데, 이는 온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 千禧蔓波>(2001)에도 내레이션은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반복되지 않는 순수한 ‘설명의 내레이션’이다. 들리는 목소리가 눈앞에서 재현되지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용의 주인공과 다르지도 않다. 내레이션의 본질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 역시 평범하지는 않다. 여주인공 비키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의 관계에 관련된 이야기를 웅얼거리는 어조로 외화면(hors-champ)의 위치에서 말한다. 오프닝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속되는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서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 화면을 배경으로 선택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즉, 목소리와 배경이 분리된다. 내용상 내레이션은 남자와 여자의 과거사를 관객에게 알리고, 여자의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토로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고 이 속마음이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감독은 목소리를 통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 펼쳐지는 화면 내에서 증식되도록 연출하였는데, 영화가 전개될 내용(주인공들의 관계)에 대해 내레이션의 영향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헐리웃 영화에서처럼 이때의 내레이션은 스토리의 당락을 좌우할만한 해결의 열쇠가 되지 못한다. 애초 의도에서 이는 ‘현재 상황에서의 일상성’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내용에 지장은 없다. 하오하오가 비키의 고등학교 기말시험을 막은 것은 현재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전체 스토리에는 영향이 없는 서브플롯(sub plot)이다.

    스토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서브플롯의 등장, 이때 내레이션의 역할은 내용이 아니라 관객의 사고 층위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희몽인생> 속 재진술의 내레이션이 시간의 층위에 대한 사고를 하게 만들었다면, 영화 <밀레니엄 맘보>의 내레이션은 그 자체로 시간이 된다. 두개의 사건이 내레이션을 통해 동시에 진행되고, 이들 각각은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닌다. <희몽인생>이 과거와 현재, 가상과 진실 간의 평행편집 효과를 주었다면, <밀레니엄 맘보>에서 내레이션은 그 자체로 평행편집의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목소리는 그 자체로 ‘개입된 몽타주’가 되고, 시선의 지속과 스토리(보이지는 않지만 들리는 내레이션)의 지속은 결과적으로 시간을 두 배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아미엘의 말처럼 의식적인 시간의 지속이 영화의 시간을 장악했다. 영화 속에서 단순히 지각의 대상이었던 ‘시간’은 이렇듯 허우 샤오시엔을 통해 ‘사고의 소재’로 도약한다.

    21)Tonglin Lu, 『Confronting Modernity in the Cinemas of Taiwan and Mainland China』, Cambridge univ., 2002, p.109  22)뱅상 아미엘, 『몽타주의 미학』, 동문선, 2009, p.141

    4. 플래시백의 사용 - <호남호녀>

    들뢰즈는 영화의 플래시백(flash-back)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플래시백은 현재에 속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야기의 방식이다.”23)라고. 대개의 영화에서 플래시백 속의 이야기는 현재에 종속된다. 예외 없이 플래시백은 현재로부터 자신이 존재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의 존재 가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과거보다는 현재에 무게중심이 있으며, 현재는 플래시백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 받는다. 그렇지만 이때 무조건 과거가 현재에 종속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 논의는 영화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모든 효과들에 확대시켜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밀레니엄 맘보>의 내레이션은 종속 여부를 떠나 독립적이다. <희몽인생>에서의 내레이션 역시 현재의 인물이 과거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플래시백의 효과를 유도하지만, 이때 장인의 내레이션은 일종의 ‘플래시백을 부르는 장치’라 보는 편이 더 맞다. 즉, 과거라 하더라도 앞서의 경우들은 현재와 상보적인 관계를 보인다. 물론 ‘보이스 오프’ 효과를 제외한, 순수한 플래시백의 예시를 이 단락에선 살필 것이다. 영화 <호남호녀>의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에서 샤오시엔은 세 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한 데로 엮는데, 이때 이야기의 배경이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과거의 이야기는 (종속성과 관계없이) 플래시백인 양 취급된다.

    영화 <호남호녀>는 ‘리앙 칭을 주인공으로 한 현재의 이야기, 그녀의 과거 연애스토리, 그리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속의 이야기’의 세 시점으로 구성된다. 영화의 처음과 끝이 미장아빔(mise-en-abîme)24)의 형식으로 서로 괄호치고 있으며, 현재의 이야기가 시점의 우세 때문에 조금 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이를 딱히 알맹이라 상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영화 속의 영화는 흑백처리가 되는데, 직접 스토리로써 현재의 이야기와 관련을 맺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때의 흑백을 컬러에 종속되는 장치로 읽어서는 안 된다. ‘사건’의 측면에서 보면, 세 이야기는 각각 독립적이다. 기존의 이야기 패턴에 익숙한 관객들이 보기에 이 영화의 구성은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때의 모호한 감상이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이 특징은 미장아빔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소설에서 작가들이 미장아빔 기법을 사용할 때 목적은 주로 자기반성적(self-reflective)25)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두 개의 거울 사이에 놓인 하나의 실체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추어 판단하는데, 이때 ‘끊임없는’이란 수식이 가능한 것은 실체가 자기를 보거나, 혹은 독자나 관객이 가운데에 놓인 실체에 자신을 대입했기 때문이다. 즉, 관객이 있기 때문에 이 구조는 성립가능하며, 영화 속의 이야기가 관객을 상정하자마자 미장아빔의 기법은 시작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플롯이 열려있다는 측면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오픈된 결말, 즉 ‘이야기의 끝이 열려있는 것’은 유럽 모더니스트 필름의 특징이지만 허우 샤오시엔 경우 이러한 열린 결말의 효과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1959)에서 주인공 소년은 탈출에 성공하지만 나아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프리즈 프레임 되는데, <호남호녀>는 현실상 추측 가능한 상태에서의 열린 결말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추측을 통한 ‘현실에서의 답답함’이나 그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책임감 있는 결말이 그의 작품에는 없다. 그저 한없이 들어가고 또 들어갈 뿐이다. 그러니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미장아빔이 사용된 이유는 차라리 열린 결말의 형식보다는, 자기유사성(self-similarity)을 통해 현실의 매우 불규칙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통로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형식의 문제를 시간으로 치환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대개의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달리, <호남호녀>는 어느 쪽이 메인 콘텐츠인지의 구분이 애매하게 두성됐다. 이 영화는 심지어 시민케인의 작가로 유명한 조셉 맨케비츠(Joseph L. Mankiewicz)의 영화보다 더 애매한 수준으로 꼬여있다. 이를테면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이나 플래시백 사용의 측면에서, 멘케비츠는 과거와 현재를 적어도 직선의 형태로는 인지하고 활용한다. 하지만 샤오시엔의 인물들은 과거가 과거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지도, 그리고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그는 일직선상의 시간을 아예 뭉개버리며 영화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즉, <호남호녀>의 과거 장면은 ‘인과성(causalité)과 선형성(linéarité) 같은 것들을 뒤로 미룬 채’,26) 그대로 현상을 뛰어넘는 태도를 취한다. 선행되는 시간이 사건의 앞뒤로 현재와 연결되지도 않고, 원인과 결과로 묶이지도 않는다. 다만 과거엔 어떤 일이 있었고, 또 현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 시간의 모형을 우리는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을 통해 보르헤스에게서 본 적이 있다.

    시간을 만약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주관적인 카이로스(kairos)로 나누어 논한다면, 후자는 네그리의 표현대로 ‘매순간 존재가 만들어지는’27) 인생의 호기와 기회, 그리고 개인의 리듬 같은 것들을 포함한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단편이 후자에 속한다. 보르헤스 작품에서 시간의 특성은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의 매개,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경험적 삶을 조건 짓는’28) 통로처럼 느껴진다. 이는 직선뿐 아니라 순환적 의미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그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로로 새어 들어가기도 한다. 보르헤스가 생각한 우주의 모형은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의 그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고, 우리의 삶 역시도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맥락을 지닌다. 즉, “현재의 삶, 현재의 사건은 필연적인 결정물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공존하고 있던 다양한 시간 계열들 중 하나가 현실화된 우연의 산물”29)이라는 것을 보르헤스의 작품은 알린다. 영화 <호남호녀>의 시간 역시 이를 구체적으로 실제화 시킨 모델 중 하나다. 대개 영화 속의 영화를 다룰 때, 영화는 현실을 프레임으로 다른 영화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샤오시엔은 아니다. 그는 세 갈래의 이야기들을 중요도에서 서로 비등하게 엮어 주인공 캐릭터가 갈라선 길을 ‘동시에’ 걷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보르헤스가 끝없이 갈라지는 것이라 칭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임을, 허우 샤오시엔은 플래시백조차 종속되지 않는 시간으로 연출하는 감독임을, 우리는 이 단락에서 염두에 두어야 한다.

    23)G. Deleuze, 『L’image-Temps』, Les éditions de Minuit, 2002, p.67  24)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일기 Journal>에 적용하며 유명해진 이 말은, 문장학에서 방패의 모양과 방패 안에 그려진 모양이 같은 경우를 일컫는다. 말 그대로 심연(abîme)으로 끌어당기는 중첩되는 구도. 하지만 이때의 구도는 닫히지 않고 ‘열린’ 구조다. 마치 양측으로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에 있는 인물을 비춘 카메라처럼, 미장아빔이 적용된 작품의 내용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한없이 뻗어나간다.  25)윤지영, 「미장아빔 근대와 탈근대의 미로」, 한국시학연구 26호, 2009, p. 41  26)G. Deleuze, op. cit, p.68  27)안또니오 네그리, 『귀환』, 이학사, 2006, p.139  28)김재희, 「보르헤스 작품에 나타난 시간의 철학적 의미」, 철학연구 74호, 2006, p.44  29)김재희, 위의 논문, p.48

    5. 상기할 수 없는 회상 - <빨간 풍선>

    역사의 서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샤오시엔이 ‘개인이 (역사에서 모티브를 빌려) 재현한 (다큐가 아닌) 환각’을 그 자체로 역사로 부른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캐릭터가 그 자체로 역사가 될 수 있음도 확인했다. 이 경우에 ‘재현 혹은 (역사에 대한) 환상’은 기억에 의존한다. 실제로 일어났지만 다른 갈래로 재현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인정하는 수준에서의 기억이다. 그런데 2007년작 <빨간 풍선>에 등장하는 ‘풍선’은 기존 재현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현실에서의 환상’이며, 이때의 환상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단정할 수가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과 함께하는 환상인 ‘풍선’은 처음엔 주요하게 등장해서, 이후 주인공을 따라 이동하고,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에서 비키의 내레이션처럼, 이는 영화 안에 존재하지만 주요 플롯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호남호녀>의 과거 이야기처럼, 풍선은 주요인물의 에피소드와 연계되지도 않는다. 영화 속 또 다른 미로를 파는 것처럼, 풍선은 그저 영화를 헤집고 다닐 뿐이다.

    이 영화에서 샤오시엔은 풍선의 물리적 이동을 위해 <쓰리 타임즈>에서 사용했던 방식을 다시 썼다. 당시 장첸을 담은 카메라의 움직임처럼, 풍선이 이동하면 관객의 시선도 같이 움직이고 이는 꽤 길게, 그리고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리와 풍선아, 내 말 안 들리니? 네가 내게 오면 상상하지도 못할 것을 줄게.”란 대사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다. 이 말은 일종의 주문처럼 작용해, 아이가 이를 외자마자 풍선은 아이와 연관되고, 이후 둘의 동선이 겹쳐진다. 이렇게 두 시간의 층위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다닌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 ‘영화 속의 영화’라는 형태로 시간은 한 겹 더 겹친다. 만일 <빨간 풍선>에서 시몽의 일을 ‘현재’라고 이름 붙인다면, 풍선이 보이는 동선은 ‘또 다른 현재(혹은 환상)’이라 부를 수 있다. 프랑스어 원제 ‘빨간 풍선의 여행 Le voyage du ballon rouge’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듯이 풍선이 그리는 동선은 감독이 의도한 경로를 충실하게 따라다닌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단편영화를 만드는 등장인물’의 작업이 끝난다면, 영화는 현재의 환영을 기록한 미래의 시간 하나를 더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빨간 풍선>의 시간 층위는 지금까지 허유 샤오시엔의 영화 세계를 압축한 듯 보인다. ‘현재, 환상 같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은 현재’까지 이렇게 세 종류의 시간이 한 영화에 모였다.30) 그렇다면 이 속에 풍선, 즉 ‘환영’은 왜 존재하는? 사실 풍선에 대한 이야기는 관객들이 알고 있을 뿐, 정작 주인공 시몽은 후에 기억하지 못할 스토리이다. <밀레니엄 맘보>나 <호남호녀>에서처럼 서브플롯의 종속성 여부를 따지는 것도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 동시대적인 과거와 미래, 우리가 지금 보는 현재의 영화 주인공은 ‘소년’이지만, 훗날 완성될 미래의 영화 속 주인공은 아마 ‘풍선’이 될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를 차용하려 한다. 현재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너무도 당연한 듯 여기는 우리에게, 과거라 하더라도 과거에 그것이었던 현재와 ‘동시대적’31)이란 들뢰즈의 논리는 여기에 너무 잘 맞다. 그의 정리대로라면 시간은 연속성의 테두리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사건의 내재적 시간(temps intérieur)인 ‘미래의 현재, 현재의 현재, 과거의 현재’32)가 겹치며 발산될 뿐이다. 이렇듯 사건이 ‘내재적 시간’으로부터 발산된다는 것은 결국 정서(affect)로부터 시간 개념이 도래된다는 것을 역설해준다.

    만일 어떤 실체가 예술로서 표현된다면, 이때 표현된 실체는 사물들의 상태와는 구별되는 의미를 나타내는 복합체(complexe significabile)33)이다. 표현의 방법으로서의 ‘감정’이 복합적이란 의미이다. 이 복합체를 유용하게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프레임의 크기를 다양하게 구분하는 전략을 취했다. 클로즈업부터 미디엄 쇼트까지, 다양하게 크기를 넓혀가며 정감과 화면의 사이즈를 이으려고 감독들은 부단히 노력하였다. 들뢰즈에 따르면 클로즈업(gros-plan)이 목표된 이미지를 위해 프레이밍과 커팅, 편집을 사용해서 내면적인 구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과 다르게, 미디움 쇼트(plan moyen)는 그에 배당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34) 이때 공간은 ‘사운드와 이야기, 화면 속 인물과 그의 관계 등’의 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는 모든 감상의 요소를 포함한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다. 즉, 스크린의 공간은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감성을 담는 툴이 된다. 들뢰즈는 파스칼 오제의 표현을 빌려 이를 무규정적 공간(espace quelcinque)35)이라 표현하였다. 이렇듯 공간을 무규정적으로 상정한 들뢰즈의 영화관 속 공간에 대한 정리는 ‘인과성과 선형성을 뛰어넘어야 할 것으로 본’ 허우 샤오시엔의 시간관과 잘 맞아 떨어진다. 샤오시엔의 영화마다 적어도 한 번쯤은 등장하는 ‘인물을 따라 이동하는 롱테이크의 카메라 팔로우’가 대표적 사례다.

    <빨간 풍선>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풍선과 함께 달리는 시몽의 트래킹 쇼트에서 카메라는 풍선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허우 샤오시엔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재의 행동(action)과 감정(affection)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이들 트래킹 쇼트를 사용하였다. 이번에는 풍선이 주인공이다. 공간을 가로질러 보이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는 풍선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영화 <빨간 풍선>의 대표적 정감이 된다.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모든 관념들이 풍선의 개별적 상태로 녹아든다. 마침내 영화의 후반부, 상영 내내 주요 모티프였던 ‘빨간 풍선’이 마침내 ‘영화 속의 영화’가 되면서 관객들은 혼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풍선을 통해 마지막의 단편영화가 바로, 극장에 앉은 자신들이 보는 영화 <빨간 풍선>이 되었단 사실을. 풍선이 장악하고 있던 공간이 실은 감정이었단 것을 마지막 쇼트에서 날아가는 풍선은 일깨워준다. 이 영화는 풍선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어가면, 그와 동시에 극장에 앉은 관객들도 눈앞의 스크린과 현실의 선을 넘는 구조를 취한다. 즉, 영화를 통해 관객의 기억이 조작될 수 있음을 이 마지막 시퀀스는 일깨워준다. ‘고전영화가 행동하는 자들의 영화라면, 현대영화는 보는 자들의 영화다’36)란 현대영화의 테제가 증명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지금껏 보았던 허상이 기억이 되고, 이가 다시 정서가 되어 관객들을 장악하면, 경험하지 않아서 상기할 수조차 없었던 환상들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역사’로 기록된다.

    30)도표 2. 참조  31)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6, p.78  32)G. Deleuze, op. cit, p.132  33)G. Deleuze, 『L’image-Mouvement』, Les éditions de Minuit, 1999, p.149  34)G. Deleuze, Ibid, p.147  35)G. Deleuze, Ibid, p.154  36)이찬웅, 「들뢰즈의 영화 미학에서 정서의 문제」, 미학 69집, 2012, p.173

    6. 공간과 시간의 상관성 - <해상화>

    보르헤스에서처럼 공간이 시간으로 치환되는 것, 그리고 ‘감정-이미지’를 통해 공간이 감정으로 치환되는 것은 결국 “감정을 담은 공간이 시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해답을 던져줄 것이다. “하나의 지속인가? 여러 개의 지속인가?”37)를 두고 들뢰즈는 이렇게 답했다.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의심할 바 없이 지속이란 리듬의 복수성(mulitiplicite)이다.”38) 잠재적인(virtuel) 것은 현실적(actuel) 양태를 통해 드러나지만, 만일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이들은 실재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우리가 정서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방출하는 기반에 바로 그 시간이 있다. 이때의 “시간은 변용 내지는 정서를 생산하는 힘 자체”39)를 뜻한다. 즉, 정서의 문제는 공간이란 영화적 표현의 방식을 거치지만, 유일하게 주체적인 것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이때 주체적인 것은 곧 시간이고, 따라서 우리는 영화의 공간을 통해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해상화 海上花>(1998)는 총 23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의 플랑세캉스(plan-séquence)라서 컷 수가 많지는 않다. 인서트 쇼트도 단 둘만이 등장하는데, 이는 클로즈업이라기보다 시점쇼트이라고 보아야 한다. 슈팅 장소 역시 한정됐다. ‘유곽의 홀과 마담의 방, 소홍과 취봉, 그리고 혜정의 방’ 정도가 영화에 드러나는 전부이다.40) 그리고 장면 전환은 모두 다 페이드인과 아웃으로 이루어진다. 유곽의 홀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각 매춘부의 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피는 식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카메라는 이들의 방을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관찰한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시점쇼트를 제외하고는 거의 미디엄 이상의 롱쇼트이다. 와이드스크린에서 카메라가 트래킹하기 때문에, 화면의 사이즈도 카메라의 위치에 따라 한 쇼트 안에서도 조금씩 변화한다. 상황이 이러니 2시간여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긴 침묵이나 빈 공간에 자주 의지하게 된다. 대신 인물의 수는 최소한만 배치되고, 사건 또한 간략하게 축소되는 전략을 감독은 취했다. 주인공은 외교관리인 ‘왕’인데, 그는 소홍과 혜정의 방을 오락가락하다 결국 어느 누구와도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그 외의 인물들은 유곽의 상황을 설명하는 부수적 캐릭터들이다. 이들의 관계를 지금까지처럼 세 가지의 입장으로 구분한다면, ‘왕을 중심으로 한 애정 관계(현재)’와 ‘취봉의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유곽의 생태(시대배경의 설명)’, 그리고 ‘유곽의 주인장 딸이 알리는 상황의 정리(관찰자 시점)’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이야기들은 특정 공간과 인물과의 거리, 그리고 간략한 구성 때문에 미묘하게 비슷한 듯 느껴진다. 스토리가 매끈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대신 시대 배경인 19세기 말의 상하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끔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시대물이 시대를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은 이 작품의 특징이다. 절대 밖에서 전경을 내보이지 않는 유곽은 이렇듯 특이한 구성 때문에 마치 세상의 표본인양 관객들에게 노출된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지 않는 시퀀스들이 있다. 총 4번에 걸쳐 전개되는 ‘유곽 홀’ 장면이 그렇다. 특히 거의 10분에 걸쳐 진행되는 ‘인트로에서의 홀 시퀀스’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정교해서 눈이 간다. 하지만 샤오시엔은 이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특정한 사건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풍경과도 같이 전체를 드러내는 데서 만족하고 멈춘다. 그러니 이 장면들은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꽤나 긴 롱테이크를 거치면서도 화면은 절대 인물의 디테일을 잡지 않고 마치 풍경화처럼만 머문다. 매번 카메라의 시선은 탁자를 둘러싼 이들의 어깨너머에 머무르고, 끝까지 이 선은 무너지지 않는다. 따라서 유곽에 들른 인물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논다는 것만을 관객은 인지하게 된다. 관객들은 ‘누구 하나 빠져도 상관이 없고, 바깥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별 탈 없이 지속되는’ 노름판을 바라볼 뿐이다. 앞서 정리한대로 유곽홀 장면을 분석하면 이는 (두 번째 챕터 「역사의 서사」에서 살핀 것처럼) ‘역사의 재현처럼 보이는 순수 사건’이며, (세 번째 챕터 「내레이션의 효과」에서 살핀 것과 같이)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소재’가 된 시간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따라서 (다섯 번째 챕터 「상기할 수 없는 회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물들의 상태와는 구별되는 ‘의미를 나타내는 복합체’라 말할 수 있다.

    흐릿한 윤곽으로 인물을 그린 이러한 쇼트들을 빗대어 질 들뢰즈는 “정물(nature morte)과도 같다.”41)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해상화>의 유곽홀 장면에서 나는 정물화를 떠올린다. 이는 노엘 버치가 설명하는 플랑 꾸쟁(plan-coussin)42)과 비슷한 의미에서다. 플랑 꾸쟁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사물이나 풍경을 담은 무심한 쇼트, ‘근원적인 불확실성’이 핵심에 놓이는 쇼트를 이른다. 하지만 샤오시엔을 이야기할 때의 ‘정물’은 빈 공간(espace vide)이나 텅 빈 풍경(paysage vide)을 칭하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기술적 인서트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세잔느 그림에서 사과가 세상을 품는 것처럼,43) <해상화>의 홀 시퀀스가 플랑 꾸쟁이라 말할 때는 이가 ‘정물과 같은 화면을 사용해 세상을 품는 쇼트’란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고 보면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자주 본 ‘인물을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의 트래킹 쇼트’는 <해상화>에서 ‘유곽의 홀’ 장면으로 치환되었다. 즉, 이들 홀 시퀀스를 보며 관객들은 역사를 ‘사유’하고, 화면에 비친 놀이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물 중 하나가 된다. 이는 샤오시엔의 영화야말로 ‘보는 자들의 영화’란 것을 방증한다.

    37)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6, p.99  38)질 들뢰즈, 위의 책, p.104  39)이찬웅, 앞의 논문, p.174  40)도표 3. 참조  41)G. Deleuze, op. cit, I.T., p.27  42)Noël Burch, 『Pour un observateur lointain』, Gallimard, Cahiers du cinéma, 1983, p.167 -‘플랑 꾸쟁’은 영어에서는 ‘필로우 쇼트(pillow shot)’로 번역된다. 불어에서 ‘쿠션’을 뜻하는 꾸쟁은 ‘여유’의 의미 역시 포함한다.  43)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p.47

    7. 결론

    이상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허우 샤오시엔이 자신만의 모더니티 테제44)에 훌쩍 다가갔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그가 ‘현대적 시간의 모형에 부합하는 사유를 영화를 통해 완성시켰다’는 데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샤오시엔이 사용했던 방식은, 예컨대 알랭 로브그리예가 보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로브그리예의 경우 ‘이미지의 생산 원칙을 통해 거짓의 역량을 증언’45)하려 했다면, 샤오시엔은 역사적 진실에 바탕을 뒀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시작점은 다르지만 그들의 진실에 대한 인식은 동등해 보인다. 로브그리예가 영화 속 과거를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도록 만들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 역시 허상으로 만들어버렸다면, 샤오시엔은 역사적 사실 위에 허상을 쌓은 것만이 다를 뿐이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영화는 영화인 것으로, 그리하여 영화는 영화일 뿐 더 이상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영화를 통해 ‘주체적인 것은 오직 시간 뿐’46)임을, 그리하여 시간을 담는 영화가 얼마나 훌륭한 예술인지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일깨워준다. 다만 영화 속 순수사건을 역사적 이데올로기로 확대하는 것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역사의 재현을 통해 각각의 단독자들(événements singuliers)을 탄생시키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역사를 사유하게 만들며, 동시에 그 사유를 관객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애초 그의 목표였다.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샤오시엔의 영화 안에서 무너진다. 본고는 그의 영화를 환영의 예술로서 바라보고, 그가 역사를 영화에 활용한 예술가임을 밝히려 하였다. 만일 누군가 샤오시엔의 영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석하려 한다면, 일단 영화 속 사건을 순수사건으로 받아들인 이후가 되어야 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됐다. 목소리가 스토리가 되고, 목소리의 스토리가 끝내 시간이 되고 마는 영화, 허우 샤오시엔은 플래시백마저도 ‘종속되지 않는 시간’으로 취급하는 연출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44)보들레르의 모더니티(modernité)는 시간성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중요도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어왔다. 본고는 이를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le fugitif, le transitoire, le contingent)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 Charles Baudelaire,『Le Peintre de la vie modern』, 1863  45)G. Deleuze, op. cit, I.T., p.172  46)이찬웅, 앞의 논문,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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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상화> 시퀀스 분석표 (타이틀 제외, 130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