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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창조적 예술 활동을 통한 여성 정체성의 새로운 길 찾기: 마가렛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 구슬』 The Restoration of Feminine Subjectivity through Creative Art Activity in Cat’s Eye
ABSTRACT
창조적 예술 활동을 통한 여성 정체성의 새로운 길 찾기: 마가렛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 구슬』

The object of this paper is to examine resistance against the ruling ideology as a means of true survival in the novel Cat’s Eye by the iconic Canadian writer Margaret Atwood. Canada was a British colony and has long been an economically weak country relative to its southern neighbor, the USA. For the Canadian people who have suffered traumas due to various kinds of suppressive elements, bare living has been survival. Cat’s Eye focuses on all kinds of power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parents and children, man and woman and, especially, same-sex friends. Those power relationships are often unfair and potentially violent. Focusing on Elaine Risley, the heroine in Cat’s Eye, this paper examines her as a victim of the contemporary power system and analyzes the process of her overcoming the system and achieving a new identity in Canada. Elaine is exposed to the gaze of her age group and bound to their rules, but she learns to expose herself to the world to cure her traumas from power relationships through her paintings and as a result, she restores a feminine subjectivity. Moreover, Elaine refuses to be stuck within Canada’s social and historical boundaries, as she attempts to recognize and estimate her limitations. This attempt leads her to positive situations in which she create arts. In addition, Elaine’s paintings show that various views and interpretations are possible. In this way, Atwood revises the pessimistic features of Canadian literature that she has criticized toward new, more positive features.

KEYWORD
Margaret Atwood , survival , Cat’s Eye , power relati onshi ps between women , trauma , painting , feminine subjectivity
  • Ⅰ. 들어가는 말

    1960년대 말의 캐나다는 미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국가적 정체성 확립을 선도할 작가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던 과도기였다. 캐나다 문학사에서 1960년대와 70년대는 캐나다 문학이 영연방의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캐나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였고, 또한 시민운동과 맞물리는 여성해방운동으로 여성작가의 세계시장 진출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 중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 1939-)는 1960년대 이후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애트우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국적과 젠더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국적과 젠더라는 범주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Howells, Margaret Atwood, 2nd ed. 2), 또한 그녀의 여러 작품에서 남성중심 사회에 도전하는 여성상을 강력하게 드러내보임으로써 정치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냈다 할 만하다.

    애트우드는 스스로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는 항상 여성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삶과 정체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트우드는 『두 번째 말』(Second Words)에서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 누가 권력을 원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작동되는가, 한마디로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하도록 허용되었는가, 누가 무엇을 누구로부터 얻는가, 누가 권력을 교묘히 잘 행사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등 권력이 곧 정치적인 것과 연결된다”(353)라고 말한다. 애트우드는 이 세상은 정치적인 권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정치에 대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정의는 애트우드의 주된 주제적 관심과 일치한다. 애트우드는 작품들에서 여성적 삶과 사회의 남성적 권력을 분석하고, 그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 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푸코(Michael Foucault)는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려면 지속적이고 철저하며 어디에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는 그러한 감시 수단을 감추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213). 독립한 나라이긴 하지만 캐나다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두 중심 문화의 그림자 혹은 감시체계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캐나다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아 인식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 과정은 이 논문에서 살펴볼 『고양이 눈 구슬』(Cat’s Eye)에서도 역시 진행되는데, 여주인공인 일레인(Elaine)은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고, 그 기억으로 인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처를 꺼내어 치료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상처를 파묻어버리려 하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처의 원인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눈 먼 상태를 보인다. 애트우드가 “캐나다의 문학작품에서 그려지는 주인공은 생존자로 살아남지만, 패배자 혹은 실패자로서 재현”(Survival 44)1)된다고 본 것처럼 일레인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일레인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기억들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그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1988년 발표된 『고양이 눈 구슬』은 자전적 경향이 강한 여성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일레인은 여러 면에서 작가인 애트우드와 비슷하다.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북부에서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애트우드처럼 일레인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성장하게 되며,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작가가 토론토에 정착했던 점도 그녀의 여주인공의 삶에서 재현된다. 그리고 애트우드가 토론토에서 문화적 충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힌 것처럼(Ingersoll 121), 일레인 역시 토론토에 머물게 되면서 비슷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다. 그녀가 지냈던 캐나다 북부에서의 유목민의 삶과 같았던 생활방식은 토론토에 정착한 이후 삶의 방식과 확연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레인이 또래 여자아이들로부터겪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작가가 제스(Jess)를 포함한 자신의 여자 친구들과가졌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쿡(Nathalia Cooke)이 밝히고 있듯(293), 여러 모로 일레인은 애트우드와 닮아있다.

    『고양이 눈 구슬』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간을 아우르고 있는데, 작품 속에 일레인의 성장과정과 더불어 캐나다의 영국계와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국가에서 다민족, 다문화적 국가로의 변모과정이 드러나 있다. 애트우드는 『고양이 눈 구슬』에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일레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일레인이 캐나다의 변모과정에서 어떻게 그 파편화된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애트우드의 자아인식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일레인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좁게는 일레인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그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지만, 넓게는 자신이 캐나다인이라는 것을 찾아가고자 하는 애트우드의 의도로 읽혀질 수 있다. 또한, 캐나다인에게 국가정체성 확립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면서 “캐나다의 주된 관심사는 가시성과 정체성의 추구”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캐나다가 스스로를 “여성적인 존재”로 보는 것과 연결된다. 무엇보다 강력한 유럽의 유산과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 사이에서 고뇌하고 저항하는 캐나다의 모습은 가부장적 전통과 남성위주 사회구조 사이에서 자신의 가시성과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여성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김성곤 21). 일레인은 『고양이 눈 구슬』에서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통해 슬퍼하고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의식하고 질문을 던지며 평가하는 자세를 보인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의 가시성과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양이 눈 구슬』에 나타난 억압과 상처의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일레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로 인한 자신의 파편화된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1972년 발표된 애트우드의 『생존: 캐나다 문학의 주제 연구』(Survival: A Thematic Guide to Canadian Literature, 이후 『생존』(Survival)으로 표기함)은 캐나다 내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각 나라 혹은 그 나라의 문화는 하나의 상징을 가지는데, 애트우드에게 있어서 캐나다 문화의 특징은 바로 “생존”(Survival 41)이다. 캐나다는 프랑스계 캐나다와 영국계 캐나다로 구분될 수 있는데 프랑스계 캐나다의 경우, 생존의 의미는 전혀 다른 정부 밑에서 종교와 언어를 지키기 위한 문화적 생존이 주를 이루었고, 영국계 캐나다의 경우는 미국인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이었다 할 수 있다. 캐나다인들은 병상을 지키는 의사들처럼 영원히 자연의 맥박을 짚어내야만 하는데, 그 목적은 환자가 얼마나 잘 살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환자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생존했다는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가지지 못했다(Survival 40-42). 이 책은 캐나다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과 옹호를 동시에 받았고,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캐나다 내에서 국가의 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Ⅱ. 파편화된 정체성과 그로 인한 상처

    『고양이 눈 구슬』은 화가로서 성공한 일레인이 회고전을 하기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토론토로 되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애트우드의 다른 작품, 『도둑 신부』(The Robber Bride), 『핸드메이드 이야기』(The Handmaid’s Tale), 『눈 먼 암살자』(The Blind Assassin)등이 주로 과거 회상을 통해서 전개되듯이, 이 소설 역시 일레인의 회상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앞서 언급했듯 『고양이 눈 구슬』은 여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소개하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볼 수 있다. 일레인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또래 집단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투쟁하는데, 그것은 어른들 세계에서 행해지는 폭력이 그대로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물론 일레인이 “의식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과거 속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오스본(Carol Osborne)의 지적대로(97), 이 소설의 결말은 일레인 자신의 재생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레인이 여전히 삶에 대해 혼동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보면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아헌(Stephen Ahern)은 일레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젠더뿐만 아니라 계층과 민족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점을 고려하여, 『고양이 눈 구슬』을 당시 캐나다 사회에서 “한 여성의 정체성 구성을 보여주는 병리학적 케이스 연구”(8)라고 보았다. 물론 계층, 문화, 젠더 등의 요소들이 일레인의 특별한 상황을 창조하는 데 유효하지만, 그녀의 성장과정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여성들과의 상호 작용이다. 이 소설은 여성적인 경험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그 초점은 바로 “남성의 성장과정과는 다른 여성의 성장 과정을 나타내는 여성들과의 관계, 우정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연대관계”(Osborne 98)에 맞추어져 있다. 일레인의 어린 시절의 주된 관심사는 여성 공동체에 관한 소망이었다. 일레인의 아버지는 곤충학자로서 늘 가족들을 데리고 곤충들이 사는 숲을 찾아 주로 야외에서 생활했다. 결국 일레인에게 있어서 그녀를 상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오로지 오빠뿐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늘 여자 친구들을 원했으며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항상 꿈꾸었다. 그러나 『고양이 눈 구슬』에서는 여성 공동체가 긍정적인 형태가 아닌 억압의 체계로 묘사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막상 일레인이 토론토에 와서 처음 접하게 된 여성 공동체에 대한 경험은 그녀를 지속적으로 고립되게 만든다.

    한편, 『고양이 눈 구슬』에서 묘사되는 동물들은 일레인의 파편적인 정체성을 명백히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일레인이 당한 폭력적 경험과 연결된다. 동물들은 대부분 희생물로 간주되며 자주 죽은 채로, 그리고 온전히 대상화된 채로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묘사된다. 이러한 점은 일레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의 동물학과 건물에서 열리는 주말 행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다. 이 행사에서 사람들은 살아 있는 거북, 즉 “양서류 동물의 심장이 몸의 다른 부분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는 생체 실험”(188)2)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거북의 죽어가는 심장은 스피커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거북의 뛰는 심장은 늙은 사람의 상태, 즉 속수무책이고 희망이 없으며 피곤한 상태에 비유된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고, 결국 소리와 죽음에서 탈출하기 위해 기절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그런데 주말 행사에 온 다른 사람들은 동물에 가하는 그러한 잔인성과 폭력에 직면해서 일레인이 왜 기절하게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주말 행사가 열릴 무렵 이미 일레인은 그녀의 친구들이 가하는 따돌림의 희생물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집단 따돌림과 학대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심리적으로 일레인은 생체실험 대상인 죽어가는 거북처럼 극도로 무기력한 상태에 놓이게 되며 기절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고양이 눈 구슬』에서 애트우드는 남성과 여성 사이, 혹은 사회와 인간의 관계가 아닌 특징적으로 소녀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권력의 정치학을 다룬다. 코딜리어(Cordelia)는 일레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인물이다. 다른 두 친구인 그레이스(Grace)와 캐롤(Carol)은 코딜리어의 공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코딜리어는 교묘하게 일레인이 스스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며, 그녀를 개선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녀에게 잔인하면서도 연출된 억압을 가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일레인이 그녀의 무력함과 심리학적 상처를 음식과의 관계에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코딜리어와 다른 친구들의 학대가 계속되면서 일레인은 아침마다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식사거부는 일레인이 먹는 것과 권력의 상호관계를 내면화한 데서 비롯되며, 파커(Emma Parker)의 지적처럼, 먹는 것과 권력의 관계가 일레인의 아버지를 통하여 전형적으로 드러난다(120)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레인의 아버지는 게걸스럽게 먹으며, 먹는 동안 그는 과학, 철학, 생태학, 그리고 문화에 관한 주제에 대해 권위적으로 이야기를 주도하면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권력을 먹는 것을 통해 투영한다.

    소외로 인해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처한 일레인은 한편으로 생체실험의 비참한 대상자인 거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으로서 소외와 무력감을 겪고 있는 바네르지 씨(Mr. Barnerji)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일레인은 바네르지 씨의 고립감과 이질감을 자신에게 투사하여 코딜리어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크리스마스 만찬에서 바네르지 씨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는 외국인으로 캐나다 사회에서 일레인과 똑같이 고립되고 소외감을 겪고 있으며, 일레인처럼 그의 이 무력함 역시 음식거부와 손가락 깨물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캐나다인이자 백인인 일레인은 캐나다 사회 속에서 외국인인 바네르지씨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극심한 일레인의 혼란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적으로는 다문화주의를 표방한 캐나다의 내부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레이스, 캐롤, 코딜리어는 일레인으로 하여금 문화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그대로 모방하게 만들어 더 나은 상태로 개선시키고자 한다. 그녀들은 다른 학생들이나 가족들 앞에서는 서로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며 친한 친구처럼 행동하지만 일레인이 겪고 있는 정서적 고통은 전적으로 이 소녀들로부터 비롯된다. 푸코는 “권력이 행사되려면 지속적이고 철저한 감시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213)하는데, 세 명의 친구들은 끊임없이 일레인을 감시하며 권력관계를 유지한다. 일레인은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세 명의 소녀들 때문에 자신의 생활 전반에 대해 걱정하기에 이른다. 결국 일레인은 자신이 “다른 소녀들과 같지 않은”, “정상이 아니다”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른다(159). 일레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친구들, 여자 친구들, 내 가장 친한 친구들”(131)이라 말하며 그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푸코가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보통 비정상인은 광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광기는 “인식되긴 했지만 즉각 억압되어버린 여성의 섹슈얼리티”처럼 “미리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분석과 치료를 통한 교정을 기다리는 것”(기든스 55)이다. 이것은 일레인을 “야생(wildness)”에 속한 것으로 보고 그레이스와 캐롤이 대표하는 그 당시 캐나다의 중산층의 “길들여진 상태”(tameness)와 은연중에 구분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Banerjee 516). 일레인은 즉 “야생”의 상태에서 벗어나 “길들여진 상태”로 들어가고 싶어 하고 이것은 일레인이 비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도록 스스로 교정하기를 혹은 교정받기를 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트우드는 이분법적 사상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를 일레인과 세 친구들과의 관계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코딜리어는 일레인의 친구 관계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심리적 가해자이다. 그녀는 일레인을 가장 심하게 억압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일레인의 기억과 생각에 늘 출몰하는, 일레인의 또 다른 자아이다. 하웰즈(Coral Ann Howells)는 일레인과 코딜리어 사이를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관계”(“Cat’s Eye: Creating” 179)라고 규정한다. 코딜리어는 일레인과 별개로 존재하지만일레인과 정신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존재인 것이다. 작품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끊임없이 일레인의 기억과 생각에 등장함으로써 그녀는 일레인의 삶에 지속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일레인은 코딜리어가 상징하는 “정상적”인 여성, 한 사회 내에서 인정받는 여성이 되기를 욕망한다. 『고양이 눈 구슬』에서 일레인에게 코딜리어의 시선은 감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코딜리어는 일레인에게 거울을 보여주면서 “너 자신을 좀 봐”(175)라고 소리치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평가하고, 자신이 볼 수 없는 모습들은 캐롤과 그레이스의 말을 듣고 평가한다. 그런데 일레인은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조용히 침묵하며 자책한다. 이러한 침묵과 자책은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여자 친구들에게 더욱 더 힘을 실어주고 그들의 가학적인 행위를 용인하는 결과를 빚는다. 일레인이 이처럼 친구들의 가학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묵묵히 수용하는 것은 여성 공동체에 대한 그녀의 이중심리를 반영한다. 그녀는 여성 공동체에 속하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그것을 욕망하는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애트우드가 “일레인으로 하여금 또래 여자 아이들의 혹독한 놀이에 수동적으로 굴복”(Goldblart 277)하게 하는 것은 여성이 어렸을 때부터 주변사람들이나 또래 여자 친구들에 의해 자신의 말과 행동양식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레인은 그녀 나름대로 그 괴롭힘을 이겨내는 여러 방안을 강구한다. 그녀는 되도록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와주거나 아프다고 하면서 집에 있으려 한다. 혹은 고양이 눈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그 구슬이 그녀 자신을 보호해주고 사람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그들의 폭력에서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다. 결국 일레인은 친구들의 억압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발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자신의 신체에 괴로움을 주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일레인은 “그 고통은 나에게 생각할 무언가를, 즉각적인 무언가를 제공했고 그것은 매달릴 만한 무엇이었다”(124)고 고백한다. 일레인에게 “자해는 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을 완화하려는 시도”이며,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자기 보존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이다(Herman 109). 집안에 있는 탈수기에 들어가거나, 세제를 마시거나 독초인 나이트 쉐이드를 먹어 보는 것에 대한 일레인의 공상에서 우리는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레인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억압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놀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폭력이다. 코딜리어는 친구 캐롤과 그레이스와 동조하여 일레인을 흙구덩이에 생매장시킨다. 참혹하게 처형당한 스코틀랜드 메리여왕 역할놀이를 하면서, 메리여왕 역할을 맡은 일레인은 흙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하이트(Molly Hite)는 일레인이 친구들의 이러한 놀이로 위장된 폭력에 의해 자아를 잃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일레인은 대리 희생자이며, ‘여자아이’라는 범주를 대변하는 다른 소녀들이 아버지의 권위로 인해 문자 그대로 자행되는 가부장제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자신들의 고통을 이전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그녀를 이용한다”(137)라고 보고 있다. 특히 코딜리어는 자신에게 가하는 아버지의 폭력과 힘을 그대로 일레인에게 되돌려 행사함으로써 그녀가 힘과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부장적 억압과 폭력에 이미 익숙해진 코딜리어는 그것을 친구인 일레인에게 양심의 가책이 없이 자연스럽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접시놀이3)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코딜리어는 아버지에게 받은 가부장적 폭력을 그대로 일레인에게 행사한다. 여자아이들의 놀이로 위장된 일레인에 대한 폭력은 계곡에 있는 다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일레인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또래들로부터 당하는 배척과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추운 겨울날 코딜리어는 일레인의 스카프를 계곡에 있는 다리 밑으로 던지고 그것을 주워오라고 일레인에게 명령한다. 이 다리 밑에는 예전부터 키 큰 남자가 여자아이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일레인은 어쩔 수 없이 다리 밑으로 내려가 스카프를 주우려다가 계곡의 얼음물에 빠지게 되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레인에게 충격적 트라우마로 남게 된 이 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트라우마를 탈출로 변화시키는 하나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Bouson 170).

    다리 밑에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후 일레인의 태도는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데 일레인은 그 동안 아이들이 자신에게 행했던 억압이 그저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일레인과 코딜리어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힘의 역학 구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때까지는 코딜리어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의 관계를 조종하고 일레인을 억압했지만, 이제 일레인이 더 이상 고분고분한 피해자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그 결과 그들 사이의 관계의 주도권이 일레인에게 넘어가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일레인은 코딜리어에게 자신이 실은 뱀파이어라고 말하며 코딜리어는 자신의 친구이므로 그녀의 피만큼은 먹지 않겠다고 놀린다(256). 그러면서 자신이 더 강해졌다고 느끼게 된다. 보우선(J. Brooks Bouson)은 이 소설이 여자아이들의 잠재적인 힘의 정치학을 제시함으로써 여성간의 유대 관계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페미니스트 관점에 도전한다고 언급한다(159). 여성이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 즉 여성의 사회화는 부모나 이웃어른들은 물론이고 특히 어른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는 또래집단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억압 상황에서는 코딜리어의 경우처럼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억압하며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환 상태를 나타낸다. 결국 일레인이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그녀가 힘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코딜리어처럼 그녀를 둘러싼 억압 상황을 내면화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좌절감과 심리적 상처로 가득 찬 일레인의 모습은 애트우드가 『생존』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희생자의 모습과 겹친다. 그리고 그 희생자의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같은 여성인 또래 친구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억압의 결과로 인해, 일레인은 하이트가 분석한 것처럼 여성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삶에서 벗어나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남성의 세계로 향하게 된다(133). 그녀는 맨 처음에는 이웃의 아버지들을 좋게 생각하며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남학생들과 어울린다. 그녀에게 여성들은 더 이상 어울릴 만한 존재가 아니다. 일레인은 고등학교에서 다른 여학생들이 “마치 유혹적이라고 생각하는 듯 머리를 흔들거나 작은 엉덩이를 흔들고”, 아니면 “생기가 없이 멍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261).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미술과 정물화 수업에서 만난 수지(Susie)에 대해서도 “대학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도 멍청하고 학교거리를 바보같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나 하는”(307) 여자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수지가 미술 대학 교수인 조세프(Josef)와 벌이는 애정 행각 때문에, 일레인이 생각하기에 수지는 “비열하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비굴하게 행동하는”(319) 종류의 인간이다. 일레인은 모든 동료 여학생들을 멸시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린 학생인 수지가 나이든 교수와 애정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비열하다고 생각했던 일레인 자신도 후에 조세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런 범주에 빠져드는 모순적인 행동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동들은 그녀에게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더욱더 강화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일레인은 “규율에서 벗어나 규정조차 되지 않은 존재”(306)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 일레인은 같은 여성의 집단에서도, 그리고 여성 집단을 빠져나와 남성 집단에 들어가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일레인의 고립과 소외감은 하웰즈의 지적대로 전적으로 그녀 책임이라 할 수 있다(“Cat’s Eye: Creating” 181). 그녀는 자신의 의식 안에 유폐된 상태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일레인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레인 자신이 “철제허파”(Iron Lung)에 갇힌 꿈을 꾸는 것은 그러한 철제허파가 다른 사람들이 뚫을 수 없는 껍질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일레인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의 평화와 안전을 택하는 것이다(Howells, “Cat’s Eye: Creating” 181). 즉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지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기까지 한다. “히브릭씨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나에게 더 이상 연민을 자아내지 않았고 오히려 비정하게 만들었다”(380)는 일레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철저히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일레인은 자신이 만든 껍질에 스스로를 닫아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2)Atwood, Margaret. Cat's Eye. New York: Anchor Books, 1988. 앞으로 이 소설의 본문은 여기에서 인용하며 쪽수만 표시함.  3)코딜리어가 일레인에게 행하는 놀이로 위장된 폭력 중 하나가 접시놀이이다. 즉, 코딜리어는 일레인에게 10개의 접시 더미가 있는데 일레인이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접시더미가 하나씩 무너지게 된다고 말하며, 접시더미들이 다 무너지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고 일레인을 위협한다.

    Ⅲ. 그림을 통한 통합된 자아 형성 및 희생자의 모습 벗어나기

    일레인은 성숙해감에 따라 그림을 업으로 삼으며 자신의 세계를 정립해 나간다. 『고양이 눈 구슬』에서 일레인은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기 위한, 나아가서 자신의 참된 내면 모습을 깨닫기 위한 수단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이라는 것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전통을 깨고 애트우드가 그 수단으로 그림이라는 예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1장 「철제 허파」(“Iron Lung”)4)라는 장만 제외하고 이 소설은 일레인의 그림 제목들이 각 장의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각각의 제목들은 그림의 이미지와 함께 그 그림이 나오게 된 이유와 배경을 함축한다. 소설의 각 장은 과거의 회상을 담은 그 그림의 내용 자체만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이 나오게 된 상세한 배경 설명을 첨가함으로써 각각의 그림들이 가지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각 장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레인의 현재와 그 그림을 통해 회상하게 되는 과거가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그렇기에 일레인의 그림의 분석은 『고양이 눈 구슬』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어디에도 일레인이 그린 그림이 삽화로 첨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애트우드가 일레인의 그림을 글로 설명하고 묘사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일레인의 그림들은 그녀가 과거 사회의 편견에 의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억압받아 왔는지 보여준다. 하웰즈가 “여주인공의 자아 확립에 있어서 일레인의 과거를 회고하는 예술 작품은 매우 중요하다”(“Cat’s Eye: Elain Risely’s” 205)고 주장하듯 이 소설은 물론 글로 이루어진 “담론적인” 서술이지만 그 속에는 그림으로 표현되는 “형상에 대한” 서술이 동시에 존재한다. “담론적인” 회고록 서술과 그녀의 그림을 통해 제시되는 “형상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진 그녀의 정교하게 이중적인 서술을 촉발하는 것은 이 회고전을 위한 일레인에게 트라우마의 장소인 토론토로의 귀향이다. 이 소설은 자서전의 형태로서 “담론적인” 것과 “형상에 대한” 것 사이의 관계를 통해 투사되는 일레인의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형상화라 할 수 있다(Howells, “Cat’s Eye: Elain Risely’s” 204-5). 일레인의 그림들은 주로 인물화, 정물화이지만 초사실주의 적이며, 그 속에 일레인의 과거의 정신적 상처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또한 회고전이 열리는 전시장의 이름이 “전-복”(Sub-Version)5)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그녀의 그림은 어린 시절의 폭력과 위협, 그것에 대한 인식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재평가하여 표현한 것으로, 결국 그러한 그림 그리기는 일레인의 삶을 전복시킴으로써 진정한 생존, 즉 자아인식에 이르게 되는 수단이 된다. 또한 이 전시장의 이름은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그 당시 캐나다 미술계를 전복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성장해가면서 어렸을 적 실패했던 여성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그리고 대상과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전략을 사용한다. 현재 회고전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그림은 이미지들을 이용해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예술적 표현물이다. 말키오디(Cathy A. Malchiodi)는 “미술이 우리의 공포, 두려움과 같은 힘겨운 감정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어루만져준다”고 보았다(28). 이런 말키오디의 설명은 일레인이 처음으로 그린 그림에서 잘 나타난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을 무렵, 일레인이 학교 미술 수업 시간에 그린 자신의 모습은 뛰어 노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자신의 방에만 있는 모습이며, 그것도 “온통 밤의 색깔”(180)인 검정색으로 색칠되어 있는 그림이다. 일레인이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그녀의 당시 경험이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어둠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을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처음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카루스(Cathy Caruth)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근거하여 트라우마의 특성으로 충격당시에는 상처받은 것을 모르고 지나가는데 “잠복기간”이 지나면 정신적 상처의 병적인 증상들이 나타남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사건당시에 그 경험이 충분히 인식되고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7-8). 일레인 역시 그 소녀들간의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고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상처는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그녀가 그린 그림으로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레인이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두 남성과의 관계는 “인체소묘”(Life Drawing)라는 그림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처음 만난 조세프는 그녀를 자신의 마음대로 변화시키려 한다. 조세프는 그녀에게 자신이 예뻐하는 바비인형처럼 “머리를 풀어야 되겠어”(331)라던가, “자줏빛 옷을 입도록 해”(331)라고 하며 그녀를 “재정립”(331)하려고 한다. 조세프는 일레인에게 영혼이 담겨 있는 실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며(298),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어 넣어주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조세프는 일레인과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일레인을 통제하며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조세프가 “여성을 힘없는 꽃이거나 다듬어서 감상해야 하는 존재”(347)라고 생각하는데 비해서 존(Jon)은 “여자들이란 똑똑하지 않으면 멍청하다”(347)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이다. “인체소묘”에서 조세프는 왼쪽에 그리고 존은 오른쪽에 서서 “옷을 완전히 벗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400). 두 남성의 그림은 다르지만 그들이 그리고 있는 모델은 반라의 상태이고 머리에는 푸른 유리공을 가지고 두 남자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일레인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에서 두 명의 남성은 똑같이 일레인을 그리고 있지만 각자가 그녀를 생각하는 방식대로 그린다. 결국 두 남성 모두 일레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레인이 변화하기를 바란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그림들이 일레인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면, 그녀에게 그림이란 그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고 언어 이상의 방법으로 다른 여성들과 의사소통하는 하나의 창조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선 코딜리어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얼굴 반쪽”(Half a Face)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그림의 제목은 “얼굴 반쪽”이지만 이 그림은 코딜리어의 전체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 뒤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는데, 이번에는 얼굴 반쪽이 어떤 천으로 가려져 있다. 일레인은 “이것의 효과는 연극적인 가면”(249)이라고 말한다. 하웰즈에 따르면 이 소설의 권두문 중 하나인 갈리아노(Eduardo Galeano)의 글6)은 소설 본문과 상호작용하여 몸을 포함한 여성의 정신 및 영혼이 억압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간 특히 여성의 몸과 영혼의 분리와 마력이라는 두 가지 중심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는 코딜리어와 일레인의 관계가 갈리아노의 작품에 나오는 “영혼과 몸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하며, 코딜리어는 “일레인의 보이지 않는 한쪽으로 서로는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Cat’s Eye: Creating” 173-89). 아헌 역시 일레인과 코딜리어가 각각 서로의 파편화된 정체성의 상이한 부분을 나타내는 도플 갱어라고 주장한다(15). 일레인은 자신의 자아의 그러한 파편화된 이중성을 그림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일단 코딜리어는 일레인에게 가해자의 입장이 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녀도 역시 그녀 아버지의 학대로 대표되는 사회적 억압의 피해자로 드러난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는 일레인의 도플 갱어로 인식될 수 있다. 즉 코딜리어도 어떤 면에서 일레인과 같은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일레인은 자신이 옛날 코딜리어에 의해 매장되었던 그 구덩이가 사실은 코딜리어가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파놓은 구덩이였던 것을 알게 된다. 일레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구덩이가 코딜리어를 지키는 생명의 구덩이였던 것이다. 코딜리어는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어떤 장소”(277)를 원했다. 즉 존스(Bethan Jones)의 말처럼 “코딜리어는 고통을 주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사실은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일레인에게 억압을 행했다”(277). 코딜리어를 그리면서 일레인은 코딜리어도 자신과 같은 희생자였음을 깨닫게 되며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일레인의 그림은 복수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일레인이 그린 그림 중 상당수에서 묘사 대상이 되는 스미스 부인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스미스 부인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거나 거의 벌거벗은 채 등장한다. “스미스 부인의 그림이 또 다른 그림을 낳는다”(368)는 일레인의 말처럼 그녀의 뇌리 속에는 코딜리어와 마찬가지로 스미스 부인이 항상 박혀있다. 화가로서 일레인은 독기어린 시선을 스미스 부인을 향해 던진다. 하웰즈는 스미스 부인을 “전형적인 캐나다 중산층을 나타내는 인물”(“Cat’s Eye: Creating” 182)로 보고 있는데, 그녀는 겉으로는 기독교를 믿으며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나 실은 멀리서 이사 온 일레인의 가족을 감싸 안지 않는 편협한 모습을 보인다. 즉 일레인에게 스미스 부인은 “토론토의 편협함과 청교도주의를 상징”(“Cat’s Eye: Creating” 182)한다. 실제로 스미스 부인은 코딜리어를 비롯한 그레이스와 캐롤이 일레인에게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묵과함으로써 일레인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일레인은 스미스 부인을 그녀의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아서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네 개의 화판으로 구성된 “하얀 선물”(White Gift)이라는 그림의 마지막 판에서 일레인은 “가랑이가 축 늘어진 속바지 차림에 단일한 커다란 젖가슴이 갈라져 심장을 드러내는”, “죽어가는 거북”의 “병든 검붉은 심장”(384)을 가진 비인간적 모습으로 스미스 부인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회고전에서 그녀는 벽에 걸린 자신의 그림에서 스미스 부인을 본다. 그림에서 스미스 부인은 누워 있기도 하고, 스미스 씨가 그녀의 등에 붙은 채로 교미하는 딱정벌레처럼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이 모든 모습들은 일레인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것들로 일레인의 마음속에 스미스 부인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미스 부인을 왜곡된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일레인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스미스 부인에게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속의 스미스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일레인은 “독선적이고 돼지 같고 철사테 안에서 잘난 체하는 눈”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제 그 눈이 “패배의 눈, 불확실하고 우울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의무에 눌린 눈”(443)이기도 함을 인식한다. 일레인은 더 나아가 그녀를 “과거의 자신과 같은 난민”(443)이라고 인식한다. 이제 일레인은 그녀 자신이 그린 스미스 부인의 그림을 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미스 부인 역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임을 인식하게 된다(Ahern 16).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복수에 사로잡혀 그녀 자신이 “눈 먼” 상태에 빠졌음을 인식하게 된 일레인은 이제 스미스 부인도 역시 같은 여성으로서 자신처럼 상처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일레인은 그녀 자신의 회고전을 통해 자신이 묻어버렸던 과거를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은 그녀의 분열되었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다. 말키오디는 “미술 활동과 같은 창조적 경험은 상호작용을 통해 다른 활동에서 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여러 부분들을 통합시키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28)이라 지적한다. 회고전에 걸리지 않은 그녀의 그림들이 그녀의 파편화된 그리고 분열되어 자신의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그녀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상징한다면, 이제 회고전에 걸린 다섯 점의 그림은 잃어버리고 묻힌 것들을 다시 기억하고 창조해 내며 파편화된 그녀의 정체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수단이 된다. 그 다섯 점의 그림은 죽은 부모에 관한 그림, 그녀처럼 고립되었던 세 명의 뮤즈들, 죽은 오빠, 자신의 자화상, 그리고 성모 마리아 그림이다. 일레인은 “피코초”(Picoseconds)라는 그림에서 그녀의 부모님을 그렸는데 이것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캐나다의 풍경에 대한 그림이다. “세 명의 뮤즈들”(Three Muses)이라는 그림은 “캐나다인이지만 이방인이었던 일레인에게 친절을 베푼 세 명의 외국인”(McCombs 13), 즉 핀스틴 부인, 스튜어트 선생, 바네르지 씨에 대한 그림이다. 그들은 이 그림에서 “그림 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듯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445). 아마도 이 선물은 일레인에게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 날개”(One Wing)라는 제목의 그림은 오빠인 스티븐을 묘사한 것이며 이것은 일레인의 “죽은 사람을 되돌리려는 시도”(McCombs 13)로 읽혀질 수 있다. 일레인은 이제 고립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되고, 더 나아가 그녀의 그림에서 그 당시 캐나다의 광활한 풍경과 더불어 진정한 다문화적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캐나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네 번째 및 다섯 번째 그림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 눈 구슬을 주제로 한 작품인데, 일레인에게 고양이 눈 구슬은 모든 것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볼 수 있게 해 주는 세 번째 눈이자 그녀에게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윌슨(Sharon R. Wilson)은 고양이 눈 구슬이 통합된 자아를 형성하는데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일레인이 이 고양이 눈 구슬의 비전을 가지고 계곡에서 살아남은 후 그녀 자신과 세계 사이에 벽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03). 반면 맥콤스(Judith MaCombs)와 하웰즈는 이 고양이 눈 구슬의 비전이 초래한 그녀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두기를 인정하면서도, 이후 그것이 그녀의 예술적 상상력과 비전이 발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맥콤스는 “열 살의 일레인은 화가는 아니지만 사물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나중에 생각해내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11). 고양이 눈 구슬은 그녀가 눈으로 직접 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도록 도움을 주는 물건이다. 그래서 그것은 하웰즈의 지적대로 일레인의 예술적 눈의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Cat’s Eye: Elain Risley’s” 210-12). 그녀의 의식을 넘어서 작동되는 보는 방식은 그녀가 실재 존재하지 않는 성모마리아의 화신을 볼 때에도 작동된다.

    그 의미심장한 물건은 일레인의 “고양이 눈 구슬”(Cat’s Eye) 이라는 그림에서 다시 한 번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일레인이 “일종의 자화상”(446)이라고 표현 했듯, 현재 오십대인 자신의 초상화이다. 여기에서 일레인이 고양이 눈 구슬을 지갑 속에 보관하고 다시는 꺼내지 않았던 것처럼, 묻힌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일레인의 얼굴은 오른쪽에 있고 큰 거울이 뒤에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고양이 눈 구슬로 표현된 그 거울에는 세 여자아이들의 모습이 비추어져 있다. 일레인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는 주름이 있는, 그리고 흰머리가 있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름과 흰 머리는 그녀가 겪은 고통을 상징한다. “고양이 눈 구슬” 그림에서 왜곡되어 묘사된 고양이 눈 구슬이 고통당한 일레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일레인에게 드러나는 것은 “통합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이라는 그림에서이다. 이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는 고양이 눈 구슬 같지만 크기가 커진 구슬을 들고 나타난다. 이 그림에는 일레인의 어린 시절 폭력을 가했던 친구들과 계곡의 다리가 나타난다. 하웰즈는 이 그림을 개인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은 완전함의 비전속에서 그녀의 전체적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일레인의 시도로 보는데, 이 전체성이란 바로 과거와 현재,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과학과 예술, 보편적인 것과 특별한 것 등의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공존하는 상태이다(Howells, “Cat’s Eye: Elain Risely’s” 215). 그녀의 상처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성모 마리아와 고양이 눈 구슬을 그림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일레인은 그녀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회고전에서 전시된 이 다섯 점의 그림은 “일레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만들어내고 모아 놓은 것이다”(McCombs 14). 그 전의 그림들이 『고양이 눈 구슬』에서 이리저리 흩어지며 정확한 시간대로 묘사되어 있지 않는 것에 반해 회고전의 그림들은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일레인이 이제 더 이상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와의 갈등을 겪고 있지 않다는 것과 고통을 겪고 난 후 그녀의 그림은 이제 과거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다시 저항의 그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이 스미스 부인, 코딜리어, 다른 남성들, 그리고 부모의 희생자가 아님을 깨닫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제 일레인은 코딜리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림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일레인은 오히려 코딜리어를 기다리며 보고 싶어 하는데, 그 이유는 이제 자신을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이제 “코딜리어로부터 그리고 코딜리어가 되고 싶었던 것으로부터 자유”(Banerjee 517)를 획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레인은 그녀에게 가장 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그 다리 밑의 계곡으로 가서 “괜찮아. 이제 집에 가도 좋단다”(459)라고 말하며 코딜리어와 상처 입은 자신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떠나보낸다. 이제 일레인은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 그 다리 및 계곡은 더이상 그녀의 상처가 남아있는 장소가 아니라 그저 “그냥 다리이고 그냥 강이며 그냥 하늘”(460)이기 때문이다. 일레인은 자신의 개인적ㆍ사회적 과거에 대한 여행을 통해 자신을 인지하고, 트라우마의 장소인 다리 밑 계곡으로 가서 상처를 치유한다.

    4)모든 장들의 제목은 일레인이 그린 그림제목이며 이 철제 허파는 일레인이 꾼 꿈을 기초로 한 듯 보인다. 일레인은 철제 허파에 갇혀 있는 꿈을 꾼다. “내가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꿈을 꾼다. 말도 할 수 없고 숨조차 쉬지 못한다. 나는 철제 허파에 갇혀 있다. 철로 된 통은 단단한 원통형 피부처럼 나를 옥죈다. 이 철제 피부가 나대신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해주는 것이다. 나는 육중하고 우둔하며, 이 묵직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철제 허파 끝에 내 머리가 나와 있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고 그 곳에는 누렇고 뿌연 얼음같이 보이는 조명이 달려있다”(274). 애트우드는 어렸을 적 일레인의 상황을 철제허파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비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일레인의 희생자적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5)“sub-version”은 단어를 합쳐 전복이라 해석할 수도 있고 따로 두 단어를 따로 해석해보면 대체-설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일레인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억압된 상황과 상처를 그림으로 대체하여 설명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의 회고전의 그림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과거와 그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레인은 자신의 삶의 대체-설명인 그림을 통해 그녀의 삶을 전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6)이 소설에 나타난 권두문 중 하나는 갈리아노(Eduardo Galeano)의 『불의 기억: 창세기』(Memory of Fire: Genesis)의 일부분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카나 사람들이 늙은 여자의 머리를 베자 그 여자는 두 손으로 피를 모아 태양을 향해 뿌렸다. “내 영혼이 너희들에게도 들어가리라!” 라고 그녀는 외쳤다. 그 때부터 살인자는 원하지도 않고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자신의 몸속에 희생자의 영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Ⅳ. 나가는 말

    애트우드는 일레인이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는 것만으로 작품을 끝내지 않는다. 물론 『고양이 눈 구슬』에서 여성 해방이나 여성 연대와 같은 정치적인 주제는 직접 다루어지지 않으며, 일레인은 코딜리어를 실제로 만나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두 여주인공인 일레인과 코딜리어는 서로 배반하고 서로를 희생자로 규정하고 희생시키면서도, 사실은 각자가 잃어버린 한쪽이 되는 상보적 관계에 놓여 있다. 또한 일레인은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은 피해자이고 상대는 가해자라는 단순한 해석에서 탈피한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그림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일레인의 작품들은 이제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그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녀의 그림들은 여전이 그녀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속에서 그녀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어렸을 적의 기억들을 불러낸다. 우리는 일레인의 그림인 “추락하는 여성들”(Falling Women)처럼 지배적 가치 기준에 순응하지 못하면 경계 밖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일레인은 바람직한 여자아이의 몸가짐에 대한 기준에 적응하지 못해 또래 집단으로부터 집단학대를 당하면서 죽음의 위기까지 이르게 되는 인물이다. 일레인은 소녀시절 매우 일방적인 감시체제로 인해 겪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그녀의 그림에 그대로 적용한다. 그녀는 도피처로 다른 남성들의 사회에 들어가고자 하지만 그것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일레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통해 이와 같은 자신의 상처를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창조와 분석의 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생존했음이 분명하다. 즉, 일레인은 상처 입은 사건들을 회상하고 진실에 직면하는 상상력을 창조해냄으로써 과거로부터의 그녀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이다. 애트우드가 “예술이란 진실의 대리인이자 진실과 직면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Rigney 2)이라고 말했듯이, 일레인도 그림 그리기와 감상하기라는 예술 행위를 통해 상처로 얼룩진 그녀 삶의 진실과 마주하면서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비전을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 애트우드는 과정이 힘들다 할지라도 일레인처럼 이제 캐나다 문학도 스스로의 가시성과 정체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으며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 있다. 『고양이 눈 구슬』에서는 『생존』에서 비판했던 다른 캐나다 문학 작품들처럼 비관적인 면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희생자에서 가시성을 획득한 인물로의 변모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캐나다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애트우드는 하나의 텍스트가 만약 “독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변화”할 수 있다면, 그 텍스트는 “생명력 있는” 것이라 밝히며 독자들의 창조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Negotiating 156). 즉 그녀의 작품은 일레인의 그림처럼, 애트우드 자신의 손을 벗어나 그 텍스트들을 읽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그 텍스트를 변화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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