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Male Sexual Liberalism: How Should Feminists Deal with Pornography?

성 보수주의와 남성 성 자유주의를 넘어: 페미니스트는 포르노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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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Pornography has been a heated issue for American feminists, dividing them into two opposite camps, whereas Korean feminists kept silent during the pornography debate in the 1990s when the event of Jang Jungil, a Korean male novelist who wrote a sexually explicit novel and got imprisoned for that, took place. In the Korean sexual debate male sexual liberals and radicals fought against legal authority whose ideological position was based on moral conservatism; they advocated the right of writing and enjoying pornography, and criticized feminists for colluding with sexual conservatives. During that period Korean feminists belatedly exposed the sexual violence in Korean progressive movements in the 80s and early 90s, arguing for women’s rights of sexual self-determination. This article attempts to map out the topography of sexual ideology in Korea since late 1990s, and examine how to tackle the issue of pornography. First, it critically examines several definitions of pornography, both Korean and American, and then attempts to explain the tempting power of pornography on men, borrowing Drucilla Cornell’s psychoanalytic interpretation. Pornography reflects men’s sexual fantasy where lie their desire for and dread of the phallic mother; once the fantasized mother/infant dyad is broken, the phallic mother remains, in its unconscious, powerful and threatening; she at once gives and takes back life. In order to compensate for her power, the infant attempts to penetrate and destroy her through the father’s imaginary penis. It is the biological penis, the simplistic conflation of the penis with the phallus, that is portrayed in pornography. This ever-erect prick is just a fantasy, yet it exerts a powerful influence on men. Pornography as a representation of this masculine fantasy, I argue, harms women’s imaginary domain, a term coined by Cornell for indicating “psychic and moral space” in which one imagines who one is and who one seeks to become. I argue for feminist’s response to pornography shifting from legal regulation to political intervention. Legal regulation on pornography limits not only men’s but also women’s freedom of sexual expression, pivotal for women’s exploration of their selves. However, pornograph’s curtailment of women’s equal right for imaginary domain should be countered in political and cultural dimension. In conclusion, I argue for the responsibility for our desire as well as the demand for its right in order to live together.


  • KEYWORD

    pornography , pleasure , desire , fantasy , sexual conservatism , sexual liberalism , censorship , phallic mother , imaginary domain , the right of sexual determination

  • 1. 성 보수주의와 남성 성 자유주의를 넘어

    내가 아는 한 서구 논쟁사의 정리나 산발적 논의를 제외할 경우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 문제를 전면에 걸고 논쟁하거나 투쟁한 사건은 없었다. 몇 년 전 산부인과 의사들이 불법적으로 시술되어오던 낙태를 자율적으로 규제하자는 제안을 하여 논란이 된 경우를 제외하면 낙태문제가 한국 페미니즘에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포르노도 일종의 공백으로 남아있다. 가족을 위협하고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남성의 무분별한 성적 방임행위를 국가가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간통죄 존폐를 둘러싼 논쟁은 있었지만, 한국에서 포르노문제는 남성 성자유주의자들이 성보수주의자, 혹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법적 권력과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90년대 이후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었다. 마광수사건, 장정일 사건 등 예술적 표현과 외설의 경계를 넘는 예술창작행위가 사법적 권력에 의해 처벌될 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남성 성자유주의들과 성보수주의자, 그리고 이들의 세계관을 대리하는 국가 사이에 대립이 형성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대립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지 않았다. 양쪽 모두와 다른 입장이었지만, 그것을 표현하거나 의제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그럴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 페미니즘이 포르노 문제를 딜렘마로 여기기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역사적 이유도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화가 일정정도 성취되고 성, 육체, 쾌락, 욕망, 소비 등 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욕구가 터져 나오면서 성과 쾌락의 향유를 둘러싼 문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94년 현실문화연구 출판사에서 펴낸 『섹스, 포르노, 에로티시즘: 쾌락의 악몽을 넘어서』는 한국 진보운동의 한계로 존재해왔던 ‘성정치학’(sexual politics)을 수면 위로 떠올린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지식인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시도하고 동성애담론이 제도적 매체에서 표현되면서,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를 동시에 지배했던 강고한 이성애주의와 성보수주의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1997년 장정일 사건이 터지면서 검열 철폐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흐름 속에는 성적 욕망의 해방과 성적 권리에 대한 급진적 요구가 있었다. 비록 전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 요구 속에는 포르노 문제도 내재되어 있었다. 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남성이) 포르노적 텍스트를 ‘쓸’ 자유 뿐 아니라 포르노를 ‘즐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그동안 죄책감을 느끼며 은밀하게 즐겨오던 ‘포르노적 쾌락의 생산과 향유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시기 한국페미니즘에서는 사회민주화와 여성의 해방을 동시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80년대 여성운동에 대한 이른바 ‘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일면서 진보운동 내의 남성중심성과 성폭력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뒤늦었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민중해방과 여성해방을 동시적으로 이루기 위한 민족민주운동 내부의 ‘성폭력’ 문제를 말해야 한다는 자각, 여성도 성을 말하는 주체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이 자각은 이른바 ‘100인위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피해자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란 긴 이름을 가진 이 비타협적 조직은 성폭력이 ‘정치적’ 문제이며 젠더의 권력관계를 함축하는 갈등의 현장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남성 성자유주의자들과 동성애주의자들이 성적 쾌락과 성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나오던 시기 페미니스트들은 그동안 묻혀있던 성폭력의 문제를 폭로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100인위 사건을 둘러싼 당시 대립전선이 보수주의와 페미니즘의 갈등이 아니라 프리 섹스를 옹호하는 남성 성 자유주의와 성폭력 피해자 여성의 입장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의 마찰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100인위가 공개한 사례들 가운데 다수는 성적 자유를 표방하는 남성들이 동지적 관계와 친밀성을 매개로 일으킨 사건이었다.1)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성 보수주의는 경향적으로 퇴조하고 있는 반면 자유주의가 성담론과 법담론에 미치는 영향력은 늘고 있다. 성보수주의 담론은 여성의 성적 욕망과 쾌락을 부정한 채 순결과 모성을 강조함으로써 재생산의 기능을 전유하고자 하지만, 성적 자유주의자들은 성해방을 이루지 못한 여성들을 성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함으로써 쾌락의 권리를 전유하고자 한다. 개인의 성적 자유를 절대화함으로써 상호관계의 규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유주의의 영향력 확대 속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면서도 성폭력을 규제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입지는 좁아진다.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성적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에 대응할 것인가? 반성폭력운동은 성폭력을 여성의 성적 자율성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고 사회적 억압과 남성적 폭력에 맞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요한 권리로 주장했다. 남성권력의 지배와 폭력의 위협 없이 성적 쾌락을 향유할 권리가 여성 주체성의 기초를 이룬다는 생각은 이후 성적 쾌락과 성폭력을 대립시키지 않고 사유할 길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성폭력이라는 어두운 문제를 대면하지 않는 성의 자유가 공허한 것이듯, 성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성적 자유를 포기하는 것 역시 퇴행적이다. 이 이분법을 넘어서는 이론과 실천의 개발이 필요하다.

    포르노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개입도 결국 폭력/욕망, 피해/권리, 위험/쾌락, 남성권력/여성의 자율성이라는 대립구도에 갇히지 않으면서 여성의 쾌락의 자유를 확장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 급진주의를 자처하는 남성들이 페미니스트들에게 가하는 비판,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들은 “섹스란 본질적으로 부끄러운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고 죄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도덕적 성 개념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포르노가 “페미니즘의 발목”이라는 비판(김수기 127, 124)은 어느 정도 맞는 지적이지만 폭력에 대한 체감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이성애주의가 할당한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성적 수줍음”에 빠져있다는 지적 역시 현실적 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서동진 25), 여성들이 보이는 이런 소극적 반응은 쾌락의 자유를 포기한 데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바로 그 자유를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응의 성격을 지닌다고 봐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란 페미니즘의 모태적 슬로건은 개인적인 것의 구성영역을 성으로까지 확장하는 급진적 도전이었고, 그것은 협소하게 규정된 기존 정치 관념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제기한 ‘성의 정치학’이란 문제설정은 정치성을 국가와 같은 거시적이고 공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개인의 성이라는 사적이고 미시적이며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영역에 적용하도록 재정의했다. 그것은 성해방에 대한 급진적 요구이면서 성의 억압을 지속시키는 사회·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물적 토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1997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포르노 문제가 한국사회에 불거졌을 때 이재현은 “왜 한국의 페미니스트 언니들은 섹시하지 않은가?”(8)라는 반대심문을 던지며 “한국사회에서 포르노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10)고 주장한다. 포르노 논의에 참여하려면 자기 몸을 즐길 줄 알아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자들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도 자기 몸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페미니스트가 몸을 향유하기 위해 스스로 포르노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종류의 포르노를 보라는 진심어린 충고까지 아끼지 않는다. 나는 몸의 향유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졸지에 섹시하지 못한 집단으로 분류된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성폭력과 성욕망의 이중구속에서 페미니스트들 역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의 말마따나 남성의 욕망과 환상만이 아니라 “여성의 욕망이나 환상, 그리고 쾌락 역시도 가부장제적이고 남근적인 헤게모니 안에서, 그것도 특정한 내용과 방식으로 가정된 지식-권력의 틀 안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주조되어왔다. 따라서 여성의 욕망이나 환상, 쾌락에 대해 제대로 사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10). 이 불가능한 작업을 위해 포르노 실험을 감행하라는 그의 주장에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재현의 충고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성해방의 진보성을 이기적이고 착종된 방식으로 전유하는 일부(다수?) 남성들이 성적 자유와 프리섹스를 앞세우며 성해방을 성폭력의 현장으로 만드는데 활용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며, 이런 폭력적이고 여성 비하적인 현실구성에 포르노적 성의 향유와 소비가 기여하고 있는 현상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적 훼손을 ‘살인의 추억’으로 기억하는 문화에서 여성들이 ‘밤길 되찾기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 착오적 현실 역시 나의 고려사항 속에 들어있다. 우리사회에서 ‘두려움 없이 즐기라’는 명령을 따르기에는 여성들은 고위험사회에 살고 있다. 위험을 과장해서 쫄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쫄지 마 씨바”라는 해방적 욕설을 유포시키며 권력에 쫄지 않는 거침없는 아이들이 공론장을 활보하는 동안에도 여성의 몸은 남성 쾌락의 대상으로 전유되어 SNS를 타고 흐른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성자유주의 담론은 남성의 무제한적 성적 자유를 위한 전제이자 알리바이로 여성의 성해방을 거론한 측면이 없지 않다. 금기를 말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도처에 성이 넘쳐나고 ‘즐기라’는 명령이 또다른 형태의 외설적 억압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성을 말한다는 것은 더 이상 금기를 깨는 위반도 해방도 아니다. 이중적 성규범이라는 말조차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온 나라가 섹시함을 신종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문화에서 포르노의 위반성을 말한다는 것은 위선적이다. 한국은 음란사이트 세계 2위 국가라는 국가순위에 걸맞게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포르노성 스팸메일과 이와 연결된 무수한 포르노 사이트, 포르노성 만화와 게임에 이르기까지 포르노의 공습을 피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 정도로 포르노에 나포된 나라에 살고 있다. 포르노의 정치성을 찾기 위해 프랑스대혁명 시절의 정치적 포르노로 올라가는 논자들도 있지만, 우리사회에서 포르노는 린 헌트(Lynn Hunt)가 “진정하게 현대적인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르는 것, 즉 “성적 도발을 야기시키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성기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378)에 가깝다. 정치적 혁명성이 거세되고 쾌락에 대한 도착적 집착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어떤 성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고려 없이 성적 자유 그 자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페미니스트는 이재현의 반대심문에 섹시함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남성의 성적 행동이 과연 타자와 상호주관적 이해를 지향하는 것인지, 또 그 이해에 이르기 위한 감정적, 육체적, 인지적, 윤리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성적 자유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즐긴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가’란 질문을 생략할 때, 주체의 (자유주의적) 권리의 정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가해자의 권리와 피해자의 권리가 충돌하고 국가가 개인의 권리에 개입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식의 자유주의적 틀 속에 갇히게 된다. 페미니스트는 자유주의에서 상정하는 젠더 중립적 개인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그 개인의 권리주장이 불균형한 권력관계라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개인들을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의 정치화가 개인적인 것의 소멸을 위한 정치화가 아니듯, 반성폭력운동은 여성들의 다양한 성적 욕망과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다양한 정체성과 욕망의 기획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인정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한 여성학자의 주장은 비단 반성폭력운동만이 아니라 ‘포르노현상’을 논의하는 데에도 정당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신상숙 41-2). 이제 우리는 포르노 찬반, 혹은 검열/자유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 포르노가 어떻게 주체의 성적 욕망과 환상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포르노적 사회에서 우리들 각자는 각기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어떻게 추구해야 옳은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1)100인위의 활동과 파장에 대해서는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 「쥐는 언제나 고양이를 물어서는 안된다?」 『경제화사회』 (2001년 봄)와 같은 책에 실린 황정미 「성폭력의 정치에서 젠더정치를」 참조

    2. 포르노 정의와 규제

    지금까지 포르노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은 지나치게 법적 문제에 갇혀온 감이 없지 않다. 포르노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혹은 규제하는 것이 실효성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에 과도하게 몰입했다. 법적 규제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과잉 대표되면서 불필요한 적대감을 촉발하고 페미니즘 전체에 대한 희화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그 실천이다”는 로빈 모건(Robin Morgan)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를 재현과 행위를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폄하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포르노의 법적 규제는 검열과 국가의 개입이라는 또다른 문제를 끌어 들였고, 이는 페미니즘의 내분을 자초했다.2)

    나는 포르노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개입을 법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포르노 비판을 검열 옹호와 곧바로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포르노장르를 통해 지속되는 남성적 쾌락향유방식을 문제 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 시각적 재현체계인 포르노에서 남성의 ‘행위’를 끌어내고, 그 행동의 직접적 ‘결과’로 여성의 ‘피해’를 곧장 도출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이런 논의는 재현과 행위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와 영향관계, 시간적 선후관계를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인과적 논리에 대한 비판이 재현체계 자체가 현실구성력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김수기는 로빈의 앞서 주장을 이렇게 비판한다.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그 실천이다’라는 주장에서 이제 우리는 이 말의 전반부가 정확히 맞는 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사실 포르노는 이론일 뿐이다. 포르노는 성과 성적 쾌락에 대해 다양하게 사고하고 말할 뿐이다”(132). 이론은 이론일 뿐 현실적 실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이런 주장은 포르노의 유해성을 입증함으로써 검열을 옹호하고자 하는 논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가장 흔히 채택되는 방식이다. ‘폭력적 포르노가 성폭력범을 낳고 폭력적 게임이 폭력적 아이들을 낳는다. 따라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식의 논의가 현실의 폭력성을 재현 탓으로 돌림으로써 현실을 회피하는 손쉬운 기제로 활용되어온 측면을 부인할 수도 없다. 포르노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재현물로서 포르노만을 비판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단선적 인과론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재현의 현실구성력을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지만은 아니다”는 주장은 이미지를 행위와 곧장 연결시키지만 않는다면 옳다. 행태주의 이론에서 전제하듯 인간의 행위는 외부 환경이나 자극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면서 주체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주체적 선택의 몫을 남겨두면서도 사회문화적 재현체계가 주체의 행위에 미치는 구성적 효과를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불능(不能)을 인정하면서 책임을 면죄 받고자 하는 태도는 비겁하다. 그것은 재현이 지닌 구성적 힘(constituting power)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재현은 현실과 무관한 이미지만의, 언어만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고 생산한다. 재현이 지닌 구성적 힘이 문제적일 때 법적 차원의 검열과 규제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지적하고, 비판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3)

    직설적으로 물어보자. 왜 남성들은 포르노를 그렇게 많이, 열심히, 오랫동안 보는가? 한 일본 연구자에 의해 ‘15조원의 육체산업’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거대 다국적 산업을 먹여 살리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이노우에 세쓰코 책 제목) 물론 여자들도 포르노를 본다. 하지만 굳이 통계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포르노 소비자의 다수가 남성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는 없다. 포르노 소비자의 75%가 남성이고 돈을 주고 구매하는 적극적 소비자의 98%가 남성들이다.4) 포르노 비판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 즉 남성들을 끌어들이는 포르노의 매혹의 실체를 해명하는 일이다.

    이 매혹의 실체를 해명하기 전에 먼저 수행해야 하는 것이 포르노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이다. 하지만 포르노 문제의 어려움은 그 정의의 어려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포르노를 단일하고 깔끔하게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의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관점과 지식을 전제한다. 특히 포르노처럼 그 범주 속으로 들어갈 경우 검열과 규제, 정치적·도덕적·문화적 억압과 배제가 동반되는 경우 누가 어떻게 정의하는가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만이 아닌 법적·정치적 문제가 된다. 법적 규제는 규제 대상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고, 시민권은 그 침해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다. 포르노의 정치적, 문화적 의미는 그것이 사유와 표현, 통제의 범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분리할 수 없다.

    포르노의 근대적 발명을 역사적으로 점검한 린 헌트가 지적하듯이, 포르노의 의미는 국가와 작가/예술가, 성직자들 간의 대립과 충돌을 통해 규정되어 왔으며, 정의와 통제의 기준은 사회가 변화하고 권력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바뀌어왔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포르노그래피라는 단어가 프랑스어 사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69년이었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수록된 것이 1857년이다(헌트 16). 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포르노적 표현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의 어원이 ‘매춘부의 그림’이라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듯이, 성표현물로서 포르노는 고대 서양의 그리스 시대에도, 그리고 춘화라는 이름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욕망, 관능, 에로티시즘, 그리고 노골적인 성기묘사는 대부분의 시대와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음란한(obscene) 글이나 그림’이란 의미에서의 포르노그래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법적, 정치적 통제 및 검열은 서구 근대성과 함께 출현했다.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서구 근대시기에 포르노그래피는 구체제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연관되었던 자유사상, 인쇄문화, 물질주의 철학 등 민주주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헌트의 지적처럼 당시 포르노에서 여성의 육체는 “모든 남성에 의해 동등하게 구입이 가능한 대상으로 상정되었다는 의미에서 민주화되었지만” 이것이 “여성의 해방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과 여성의 물건화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형제애”(53)를 낳았다. 이 형제애는 “사회적 평준화라는 의미에서 민주적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대부분 남성들만을 위한 평준화였다”(53). 따라서 근대 포르노그래피의 출현 속에는 남성 형제애에 기초한 근대 민주주의의 젠더 모순이 깊이 새겨져 있다.

    법적, 정치적, 도덕적 규제와 검열의 대상으로서 음란물이라는 근대적 정의는 이후 포르노의 핵심적 성격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그 기준은 역사적 변화를 겪는다. 1868년 영국의 히클린 사건(Hicklin Case)에서는5) 부도덕한 영향을 쉽게 받는 자를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이 판단기준으로 등장한다. 1957년 로스사건(Roth Case)은6) ‘사회의 평균인’에게 호색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것으로, 그리고 1973년 밀러사건(Miller Case)7)은 성적으로 노골적이어도 혐오감을 주지 않는 것은 음란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보면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학문적 가치의 존재 여부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제시한다(이나영 282).

    현재 우리나라에서 포르노의 법률적 의미는 ‘성적 수치심이나 성적 욕망을 유발하거나 만족’시키는 음란물로서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된다. 이는 형법, 음란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청소년보호법, 성폭력 특별법, 정보통신망 이용에 관한 법률 등에 산포되어있고, 위법 시 부과되는 형량 역시 일관되지 않다. 음란성에 대해서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다른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대법원은 음란물을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8)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음란성의 판단기준은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 “일반인의 성적 수치심과 도의심”이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음란에 이르지 않는 성표현물인 저속을 음란과 구분하고 저속은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반면 음란은 그렇지 못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음란의 기준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 표현으로서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정도까지 이른 것 2) 성적 흥미유발의 목적만 있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구조상 문학, 예술, 학문 혹은 정치적 가치를 갖지 않는 것 3)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크게 훼손하되 사상의 경쟁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그 해악이 해소되지 못할 만큼 노골성을 지닌 것. 전체적으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각기 미국의 로스판결과 밀러판결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법원의 판단기준이 보수적이라면 헌법재판소는 조금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성 도덕주의적 관점에 기초해 음란을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고,” “성도덕을 크게 훼손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포르노에 관한 한국 법담론을 분석한 한 법학자의 발언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반인의 성적 도의 관념이라는 기준 자체가 극히 모호하고 자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한국의 성 보수주의적 법 담론은 “기존의 법적 강제가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울 때 새로운 사회공포와 자기계몽의 근거를 한층 강화하려는 스스로의 규범적 핑계”(박종성 334)였을 뿐이다. 자신을 위한 규범적 정당화란 결국 성보다는 성을 규정하는 권력이, 그리고 권력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회통제가 성에 관한 법 담론의 핵심적 관건이었음을 말해준다.

    페미니스트의 포르노 정의는 성 도덕주의적, 보수주의적 관점과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포르노가 여성의 시민권을 침해한다고 규정하여 포르노 규제 법안을 발의한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과 캐서린 맥키논(Catharine MacKinnon)에 따르면, 포르노란 “말이나 그림을 통해 여성을 종속시키는 사실적이고 성적으로 노골적인 표현물”(graphic sexually explicit materials that subordinate women through pictures or words)이다(MacKinnon, Only 22). 여기서 관건은 성적 노골성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을 종속시킨다는 사실이다. 맥키논에 따르면, 포르노는 지배와 권력의 차이를 성애화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표상체계이다. 맥키논 자신은 9개의 기준을 제시하여 여성의 종속성을 규정하는데,9) 이 기준 자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된다. 보는 관점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르노를 ‘음란’으로 규정함으로써 성 도덕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고 ‘여성의 종속’이라는 시각을 취한 것은 9가지 기준의 적실성을 여부를 떠나 맥키논이 포르노 논의에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정의가 포르노의 전부에 적용될 수는 없지만, 현재 포르노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류 이성애 포르노에 한정할 경우 그 포괄적 유효성을 인정할 수는 있다.

    2)포르노를 둘러싼 미국 페미니즘 진영 내의 찬반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소개된 바 있어 더 이상의 요약이나 해설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주유신, 최성희, 이나영의 글을 참조할 것.  3)이미 국내에서도 잘 알려졌듯이, 포르노의 제조와 유통을 법적으로 규제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시도는 미국의 미니애폴리스(1983년)와 인디애나폴리스(1984년)에서 포르노 규제 법안을 제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포르노가 여성의 민권에 해악을 미친다는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르노 규제 법안은 미국 수정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85년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위헌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미국에서 포르노의 제조와 유통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 대법원은 1992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기는 하지만 여성에게 해로운 포르노를 불법화하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캐나다는 포르노가 여성에게 해를 준다고 말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형법 243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청소년보호법, 성폭력 특별법, 등등 여러 법을 통해 음란물을 규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서윤호의 「포르노를 허하라? 포르노 규제 법리에 대한 고찰」 85-93면을 볼 것.  4)국내에 번역된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에 따르면, 미국의 성인 동영상 유료 웹 사이트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의 고객 75% 정도가 남성이라고 한다. 방문객의 25%는 여자라는 이야기이다. 넷 중 하나가 여자라면 적은 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노를 보려고 실제로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로 들어가면 남녀 간의 격차는 끝도 없이 벌어진다. 포르노 사이트 전체 회원 중에서 여자이름의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경우는 단 2%에 불과하다고 한다(66). 위 책의 저자들인 오기 오가스(Ogi Ogas)와 사이 가담(Sai Gaddam)은 포르노 수용에 나타나는 남녀의 차이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남성=포르노 관람자, 여성=로맨스 독자라는 등식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생물학적 시각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보아 포르노가 남성적 쾌락장르인 것은 분명하다.  5)영국의 히클린이 음란 간행물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으로 포르노의 사회적 유해성을 판단한 최초의 판결로 유명하다.  6)미국의 로스가 상업적 목적으로 섹스 잡지 및 도서를 운송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이 사건에 적용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서윤호의 앞의 글 94면 참조.  7)밀러가 남녀의 성행위 장면이 묘사된 사진과 그림을 게재한 섹스 도서 4종과 영화를 선전하는 광고책자를 발송하여 고발당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통해 미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 음란물의 기준을 제시했다.  8)대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서윤호의 앞의 글 90-3을 참조했다.  9)참고로 맥키논이 제시한 9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여성을 성적 대상, 물건, 또는 상품으로 비인간화하는 것 2) 고통이나 굴욕을 즐기는 것 3)강간을 즐기는 것 4)결박되거나, 잘리거나, 절단되거나, 멍이 들거나, 신체적으로 다치는 것 5) 성적 복종이나 노예상태, 예속이나 전시의 자세로 있는 것 6) 신체의 부분으로 환원에 의해 제시되는 것, 더럽거나 열등하다고 보여지는 것, 피를 흘리거나 멍이 들거나 다치고 그것 때문에 맥락이 성적으로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 등이다.” MacKinnon, Feminism Unmodified. 176면.

    3. 남성적 쾌락장르로서의 주류 이성애 포르노

    말이나 그림은 재현(representation)이다. 어떻게 여성을 비하하고 종속시키는 재현물이 남성 수용자들을 그토록 매혹시키는가? 포르노적 재현체계의 특성은 무엇인가? 성적으로 노골적이고 명시적인 장면, 이를테면 생식기의 전시나 성행위 장면의 묘사도 그 자체 포르노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되었을 때 포르노적이 된다. 관건이 되는 것은 ‘얼마나 벗었느냐 혹은 성행위 장면이 있느냐 없느냐’라기보다는 ‘어떻게 그려지는가’이다. 전라와 성행위 장면의 노출 그 자체가 포르노의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로스 카워드(Ros Coward)의 지적대로, 포르노적 재현은 “몸(보통 벗은 몸)이나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정한 규약에 따라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사회에 의해 포르노적인 것으로 해석되게 만든다”(310). 여기서 관건은 포르노적 재현양식이 특정한 해석과 의미화 양식에 기초해있다는 사실이다.

    포르노는 나름의 재현규칙을 가진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 장르이다. 특정 장르가 관객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어필할 때는 나름의 설득력과 소구력을 지닌다. 이런 장르적 규약 속에는 오랜 세월 지속되는 공통적 특성과 관객의 취향과 감수성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가변적 속성이 공존한다. 포르노 장르 안에는 주류 이성애 포르노, 게이와 레즈비안 포르노,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 포르노 등등 하위 장르가 존재하며, 수간, 아동성애, 사도마조히즘 등 성 도착적 유형들이 존재한다.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성적 표현물로서 포르노 장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변이가 아니라 주류 이성애 포르노의 관습적 규약과 그 효과이다.

    주류 이성애 포르노의 관습적 규약은 ‘만남-흥분-사정’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이성애 남성의 환상을 부추기는 장치로서 일시성과 반복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직선코스가 너무 노골적이라 환상이 작동하지 않을 때 내러티브가 삽입된다. 하지만 포르노에서 내러티브는 성적 합체를 위해 언제든지 멈춰서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 포르노에서 내러티브는 성행위의 개연성을 보완하기 위해 들어오지만 성행위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뒤로 물러선다. 포르노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성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이 때문이다. 스티븐 마커스(Steven Marcus)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포르노에서 언어는 거추장스러운 필요이고 그 기능은 일련의 비언어적 이미지들을 촉발하는 것인 만큼 부차적이다. 포르노의 서사는 남성독자의 자위행위에 필요한 만큼의 길이로 지속되는 성행위 장면의 반복일 뿐이다”(268). 포르노에서 쾌락은 너무 나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비포르노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면 이미지는 흐려지고 카메라는 시선을 돌린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말처럼 “장면은 차단되고 우리는 결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한다”(222). 하지만 포르노는 재현의 한계를 넘어 기어이 “그것”을 보여준다. 내러티브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위장일 뿐이다.

    그러나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것”의 직접적 제시가 포르노를 환상이 작동하지 않는 실재의 현시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포르노에 나타나는 성과 성행위의 노골적 전시는 종종 포르노가 환상의 외피를 찢어내고 실재에 접근하는 것으로 읽게 만든다. 이를테면 김종갑은 현대사회에서 포르노를 향한 열정을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 읽어내고 이를 “실재가 사라진 사회에 대한 증상적 발현”으로 해석한다(59). 그에 따르면 근대사회에서 존재는 그 의미에서 분리되고 성은 탈맥락화된다. “포르노는 낭만화된 여성성에 대한 반발로서 동물화된 여성의 상을 제공한다. 여기서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물처럼 교미하는 탈인격적 존재이다. 이 외피를 벗고서 진짜 섹스의 핵심으로 단박에 진입하려는 욕망이 포르노이다”(70). 문제는 지젝이 “그것”이라 부르고 김종갑이 “진짜 섹스”라 부르는 것이 환상이 벗겨진 실재 그 자체와의 대면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결핍을 감추기 위해 불러낸 허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포르노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대한 교정으로서 “진짜 섹스”에 진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그러나 진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가짜섹스에 대한 열정적 애착이고 그것에 대한 환상이다. 나중에 김종갑 자신이 인정하듯이, 진짜 섹스에 다가가는 것으로 보였던 포르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과잉 섹스이자, 이 과잉을 위해 “최후의 알갱이마저 가짜의 질서에 편입시켜버리는” “주체의 욕망”(68)에 다름 아니다. 김종갑이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은 과잉에 매달리는 이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지젝은 앞서 문장의 “그것” 옆에 괄호를 치고 “성기의 삽입 등”이라는 표현을 넣고 있다(222). 문제는 “어디로” 삽입되는 “어떤” 성기인가이다. 주류 이성애 포르노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성기는 여성의 구멍 속으로 삽입된 발기된 남성성기이다. 물론 여성의 구멍은 입일 수도 항문일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여럿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변이 아래 놓인 공통성은 바로 과잉 팽창된 남성 성기이다. 맥키논은 포르노가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물건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 지적은 옳다. 포르노에서 남성은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인격적 자아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는 몸의 한 부분, 욕망의 시각적 언어로 그려진 성기일 뿐이다. ‘해부학이 운명이다’는 프로이트의 지적은 포르노에 그려진 남성에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남자라는 존재에 맞서 자지가 솟아오른다. 물론 그 자지를 찔러 넣는 여성도 당연히 보지로 환원된다.

    자지는 남근(phallus)과 같지 않다. 남근이 남성을 특권적 존재로 만드는 사회적·상징적 권위의 표상이라면 자지는 남성의 신체적 기관이다. 페미니스트의 포르노 비판에 대한 남성들의 역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 즉 페미니스트들이 자지와 남근을 혼동하면서 남근비판을 자지비판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김수기의 다음 지적이 겨냥하는 바가 이것이다.

    김수기의 비판과 달리 페미니스트가 포르노를 비판하는 것은 포르노가 성기와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 아니다. 남성의 권력이 생물학적 기관에 불과한 자지에서 나온다고 순진하게 믿어서도 아니고 성적 수줍음에 사로잡혀 적나라한 성 묘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삼는 것은 포르노에 그려진 자지와 남근 사이에 결코 뗄 수 없는 환유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포르노에 재현된 자지는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남성 권력의 육체적 축소판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권력관계 일반으로 확장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포르노 장르에서 남근과 자지 사이엔 환유적(metonymic) 관계가 있다. 그것은 전체를 대리하는 부분으로 기능한다. 김수기의 주장과는 달리 포르노는 자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가리지 않았다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인정하듯이 포르노가 “성에 관한 진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면, 그 진실은 성관계에서 남성의 파워와 우월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의적’(arbitrary) 관계를 '자연화'(naturalize)함으로써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포르노에 그려진 자지는 남성 권력을 자연화하는 육체적 수단이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이 거짓 단순화이다. 포르노는 성행위가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도 성행위를 주관하는 행위자도 무시한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추상화된 허구적 성기이다. 안젤라 카터(Angela Carter)가 포르노를 “성교를 위한 프로파겐다”(536)라 부르며 그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반동적”(537)이라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이것, 즉 포르노는 발기된 자지의 재현을 통해 성적 지배를 자연화한다는 사실이다.

    포르노에서 발기에 실패하는 자지를 본 적이 있는가? 그 자지의 삽입에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않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짓밟히고 모욕을 당해도 여성은 쾌락의 절정을 경험하고 괴성을 지른다. 여성의 향유가 포르노의 페티시가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는 희열에 찬 여성의 얼굴, 그것을 즐기지 않을 남성 관객이 어디 있을까? 포르노에서 자지는 언제나 발기해있고, 언제 어디서고 즉각 솟아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남자를 지배하는 발기된 자지,’ 이것이 포르노가 남성을 유혹하는 정체이다.

    이는 물론 환상이다. 현실에서 그런 자지는 없다. 문제는 이 불가능성이 환상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고 거듭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최소한 현재 포르노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류 이성애 포르노는 포르노를 만드는 남성, 포르노 안에 재현된 남성, 포르노 밖 남성 관객의 욕망이 소통하는 재현방식이다. 생산-재현-소비를 연결 짓는 이 회로에서 남성들은 불가능에 도달하려는 꿈을 꾼다.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매달리는 매혹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심리적 원천은 무엇일까?

    4. 포르노적 환상기제: 남근적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초월의 환상

    포르노가 남성들을 끌어들이는 유혹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출된 여러 해석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은 드루실라 코넬(Drucilla Cornell)의 것이다. 코넬이 포르노의 발기된 자지에서 역 추적해 들어가 찾아낸 것은 거대한 남근적 어머니(phallic mother) 앞에서 거세위협에 떨고 꼬마 남자아이이다. 그 꼬마의 모습을 요약하자면 이렇다.10)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으로 느꼈던 엄마에게 자신이 더 이상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순간 아이는 트라우마에 빠진다. 나는 엄마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서기 위해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나의 욕구(need)를 넘어서는 엄마의 욕망(desire)의 발견은 내가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순간 발견한 엄마는 여자이다. 욕망하는 엄마의 발견 이전에 엄마는 여자가 아니다. 그저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젖가슴일 뿐이다. 엄마와 맺고 있던 이자적(二者的) 관계를 깨뜨리는 존재는 상징적 아버지이다. 포르노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아이가 경험하는 나르시시즘의 상처이다. 이 상처가 트라우마로 불릴 만큼 엄청난 것은 아이가 어머니-타자에게 갖는 절대적 의존성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취약한 아이는 욕구의 충족을 위해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아이의 상상 속에서 엄마는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이다.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전부이고 자신이 엄마의 전부라고 상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가 되는 절대적 관계가 깨어질 때 아이는 트라우마에 빠진다. 아이는 이 상처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저항한다. 자신의 안전을 빼앗아간 것은 바로 엄마의 욕망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절대적 안전성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그리고 이 환상과 조응하는 것이 엄마가 상처입지 않은 완전한 존재, 거세되지 않는 존재라는 환상이다. 그녀가 ‘남근적 어머니’(phallic mother)라 불리는 이유다. 남근적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의 성기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결핍이 없는, 말하자면 모든 것을 가진 전능한 존재이다. 어머니/아이의 충만한 이자적 관계라는 환상이 깨어지면 남근적 어머니는 아이의 상상 속에서 생명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남는다. 이 남근적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그녀를 무의식 속에 억압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남근적 어머니를 잃어버리는 것이 상실감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상실 못지않게 얻는 것이 있다. 아이는 엄마를 잃는 대신 사회적 상징질서 속에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다. 이 사회적 위치를 얻게 해주는 존재가 다름아닌 상징적 아버지이다. 아버지-대타자가 어머니-타자를 통제함으로써 아이에게 정체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근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에 그려지는 자지가 바로 이 남근을 가진 자지, 남근적 어머니를 통제할 수 있는 아버지의 상상적 자지이다. 남자는 거대하게 발기된 자지를 통해 거세공포에서 벗어난다. 상상적 자지의 환상은 아이로 하여금 자지와 남근을 분리시키지 않아도 되게 한다. 자지와 남근의 차이를 인정하고 결핍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세를 수용하는 것이라면, 양자를 분리하지 않는 것은 거세를 회피하는 것이다. 환상화된 아버지의 자지를 통해 남아는 자신의 거세를 받아들이는 대신 어머니를 통제하고 해체한다. 포르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성적 폭력은 남근적 어머니를 방어하는 무기이다. 아이는 어머니를 찢고 부수고 버려야 한다. 그러나 환상으로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근적 어머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Psycho)에 등장하는 연쇄 살인범처럼 아이는 계속해서 남근적 어머니를 죽여야 하지만, 죽은 후에도 그녀는 다시 살아난다. 연쇄 살인범이 훼손된 여성의 육체를 살인의 추억으로 남기며 걸어간 행로는 이 무의식적 환상이 얼마나 질기고 무서운지 생생히 입증한다. 남성들이 포르노로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은 남근적 어머니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결코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반복행위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근적 어머니를 없애려면 그녀를 지배할 수 있는 상상적 아버지의 위치에 올라서야 한다. 하지만 현실 속 남성은 그 누구도 이 예외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 현실 속 여성들 역시 파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포르노에서 여성들은 신체의 한 부분, 남성의 성기가 뚫고 들어가는 텅 빈 구멍으로 존재한다. 포르노에서 남성은 찌르고 부수고 뚫는다. 남성들이 포르노에서 경험하는 짜릿한 흥분과 전율은 육체적 쾌락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 초월의 환상에서 나온다. 비록 그 초월의 끝이 자위라는 혼자만의 무력한 행위라 할지라도. 살인이 초월의 최종적 행위라고 주장할 때 사드는 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사드에게 가장 육체적 행위라 할 수 있는 섹스는 육체를 초월하는 행위이다. 물론 남성들은 초월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월 뒤에 공포가 놓여있다는 것도 안다. 알면서 부인하는 것이 페티시즘(fetishism)의 심리적 논리라면 포르노 보는 남자들은 근원적으로 페티시스트이다.

    10)Drucilla Cornell, Abortion, Pornography and Sexual Harassment. 122-40. 남근적 어머니의 환상에 대한 이 부분의 설명은 코넬의 논의를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5. 성적 평등의 요구와 욕망에 대한 책임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이 환상을 다룰 것인가이다. 환상 속에서 여성들이 찢기고 부서진다고 해서 환상에 법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적 규제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 적 환상을 교정할 수 있다면 포르노 문제를 풀기는 의외로 쉽다. 환상의 힘은 그것이 금기되면 될수록 더욱 더 강해진다는 역설에 있다. 성을 둘러싼 금기와 규제는 결코 넘지 못할 경계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쾌락의 끝없는 나선형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환상이 환상으로 그치지 않고 주체의 심리에 영향을 미쳐 현실적 힘을 행사한다면 환상에 대한 책임은 필요하다. 금기에 대한 억압이 문제라 해서 모든 것을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욕망의 자유 못지않게 욕망에 대한 책임도 필요하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절대적 자유를 행사하는 이른바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한 개인의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무한정 침탈할 수 있다. 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에서는 사실상 어떤 자유나 권리도 존재할 수 없다. 주류 포르노에서 그려지는 폭력과 남성지배는 그것이 특정 성범죄와 인과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여성에게 피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포르노가 성폭력을 유발했다고 해도 그것을 입증할 도리는 없다. 또 여성 관객들이 포르노적 환상에 대해 어떤 협상력도 갖지 못하는 일방적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종속시키고 비하시키는 위치와만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위치들과 동일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포르노에 흔히 등장하는 사도-마조히즘적 장면에서 여성 감상자들은 지배당하는 마조히즘적 위치와 동일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배하는 사디즘적 위치와도 동일시할 수 있으며, 가학과 피학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위치이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성 감상자들이 전복적 수용을 포함하여 포르노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여성을 비하하는 재현물이자 남성적 환상으로서 포르노가 여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개인의 권리를 포괄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다시 말해 자율성과 더불어 인식적, 감성적, 미적, 도덕적 능력들의 균형 있는 발휘, 그리고 친밀한 인간관계의 참여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다수 포르노에 그려진 종속적인 성 자체가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

    드루실라 코넬은 성적 존재로서 한 인간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개인’(individual)이 되려면 최소한의 조건을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개인화를 위한 최소조건’(minimum conditions for individuation, 5)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평등한 시민으로서 공적 · 정치적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적 개인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는 데 필수적이다. 코넬은 이 조건이 다음 세 가지를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신체적 보전(physical integrity), 둘째,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주는 언어적 기술을 습득하기에 충분한 상징형식에 대한 접근성, 셋째, 상상적 영역이다(4). 코넬이 ‘상상적 영역’(imaginary domain)이라 부르는 것은 “감정적 문제에 깊이 연루된 성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재현하는 “심리적 · 도덕적 공간”(5)을 가리킨다. 이런 상상적 영역 개념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인격체로서 개인(the person)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 과정 중에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은 미래적 가능성이자 지향성이다. 코넬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논의를 원용하여 인간이 거울 속에서 만나는 상상적 이미지가 자아의 형성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을 되비춰주는 상상적 이미지가 적절히 공급되지 않거나 심각하게 훼손될 때 자아는 상처를 입는다. 상상적 영역의 침해는 가장 깊은 수위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가하는 잘못이자 피해이다. 포르노가 여성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포르노가 남성들에게 성범죄를 유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한 인격체로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상상적 이미지를 훼손하고 비하하기 때문이다.

    성적 자율권은 한 개인이 자신의 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법 권리적 표현이다. 문제는 남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추구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와 갈등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법학자들이 젠더 중립적인 합리적 개인이라는 관점이 보편성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남성의 관점이라고 비판하면서 피해자의 관점이나 합리적 여성의 관점을 모색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의 관점은 피해자가 놓여있는 관력관계의 맥락에 대한 이해와 고려, 그리고 구체적인 타자의 윤리적 관점에 대한 인정과 배려를 필요로 한다. 이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에서 상정하는 소유권으로서의 자기결정권이나 중립적 공정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시각이다.

    하지만 주관적 시각에 불과한 남성적 시각이 보편성으로 군림해온 남성중심주의가 문제라고 해서 보편성을 버리고 주관성으로 도피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하나의 보편성을 주관적 이해관계를 가진 복수의 기준들로 대체하는 것이 법을 더 정의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차이’(difference)의 이름으로 주장되는 주관적 기준들이 경합할 때 그 어떤 것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고 모두가 옳다는 상대주의나 힘이 곧 정의라는 권력 투쟁론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한 존재라는 자유주의적 시각에 내장된 가능성을 그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평등 속의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각자 다 다르다. 단 그것은 우리가 동등한 개인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조건에 한해서이다. 고유한 개체적 존재로서 각자의 차이가 살아날 수 있는 이런 ‘조건의 평등성’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평등 속의 차이’ 혹은 ‘보편적 다양성’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530). 페미니즘 논의에서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던 ‘평등과 차이’의 문제 역시 보편적 차이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양성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차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성의 이름으로 여성적 성의 평등한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남성적 성(masculine sexuality)에 특권적 가치를 부여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적 성(feminine sexuality)을 비하하거나 가치절하 해 왔다면, 이는 개인성을 형성하기 위한 평등한 조건을 부인해 왔음을 의미한다. 여성이 차이를 지닌 자율적 개인으로 존재하려면 이런 차이가 살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인정되어야 한다. 평등은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결조건이다. 평등의 주장은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강요된 성규범과 성차별적 관행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지 성차를 무화시키거나 젠더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철폐와 기회균등은 다양한 차이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다. 페미니즘은 이 보편적 조건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고, 이 싸움을 통해 여성 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간적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포르노 문제는 포르노가 여성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최소조건으로서 신체적 보전과 상상적 영역을 제한하고 훼손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내에서 포르노 찬반론자들은 각기 성적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다. 포르노 옹호론자들은 포르노 규제가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판했고, 반대론자들은 포르노가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되는 가치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최소한 주류 이성애 포르노 속에서 여성들이 남성의 성적 환상의 대상으로만 그려져 있다면 이는 여성들의 상상적 이미지에 제한으로 작용한다. 맥키논은 포르노가 여성 차별이라는 현실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강요된 언어행위’(coercive speech act)라고 주장한다(Only 13-25). 그가 포르노를 여성의 종속과 차별을 일으키는 수행적 행위로서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보는 이유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성적 환상에 의해 그 존재가 규정당할 만큼 취약하지는 않다. 여성들이 남성의 재현행위 때문에 얼마나 희생당해왔는지 주장함으로써 그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이른바 ‘피해자화’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포르노에 너무 큰 권능을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남성적 환상의 재현으로서 포르노가 그런 강력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포르노가 여성이 자신의 신체와 성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고 축소시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 개개인이 자존감을 지닌 인격적 개체가 되려면 자신의 신체적 욕구와 성적 욕망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포르노는 이런 상상의 영역을 제한하고 축소시킴으로써 개인성의 최소조건을 침해한다. 특히 신체를 훼손 없이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은 개인성의 기획에 필수적이다.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파괴하는 폭력적 포르노는 성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성적 도의심에 반하는 수치심과 불쾌감을 조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적 존엄성을 훼손하고 여성의 성을 비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포르노 규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권리나 그 표현물을 보고자 하는 권리를 막을 법적 강제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자의 권리, 혹은 보고 싶지 않은 자의 권리 보호라는 차원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보고 싶지 않은 자들에게까지 포르노를 살포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면, 이는 포르노적 성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다.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포르노 관람을 허용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살포행위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 휴대폰, 이메일, 인터넷 등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혹은 의사에 반하여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포르노물은 규제되어야 한다. 생산이 아닌 전시와 관람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규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는 남성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필요하다. 여성이 자신의 성을 상상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이고 또 누구여야 하는지 실험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포르노를 새로운 의미 구성의 가능성에 열어놓아야 한다. 여성들이 성에 관한 대안적 표현물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면 남성적 환상을 반영하는 현재의 포르노들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시각은 우리 문화 전반의 상징적 코드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포르노만 공격할 수는 없다.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의 성은 성애화와 사물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포르노 역시 여성억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사회문화의 반영이자 그것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한 형태이다. 포르노 생산을 규제하고 포르노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것으로 여성억압의 원인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남성적 환상을 교정할 수도 없다. 감시와 비판을 넘어 성에 대한 다른 상상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포르노 문화는 계속될 것이다.

    이 다른 상상에 굳이 포르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포르노라는 말 속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통용된 너무 많은 의미층위와 관습적 규약들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시도한 ‘포르나’(남성적 포르노를 전복하는 여성적 포르노를 부르는 이름)가 남성적 포르노를 대체하는 적절한 길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남녀의 위치를 단순히 뒤집기만 해서는 포르노적 환상구조를 해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성을 하나의 물건이자 도구로 환원하는 시각을 넘어 감성의 충족을 동반하는 성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여성 소비자들의 감각을 열 수는 없을 것이고 그녀들의 쾌락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포르노적 환상구조 자체를 넘어서는 상상을 요구한다. 타인을 비하하거나 물상화하지 않는 욕망, 이성애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각본에 매이지 않는 환상, 아직 탐사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이자 잠재력으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여성주의 철학자 루스 이리거레이(Luce Irigaray)는 여성의 질을 남성의 성기가 뚫고 들어가는 ‘구멍’이 아니라 서로 접촉하고 애무하는 “두 입술”(two lips)이라 불렀다. 두 입술은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비유이자 남성적 동일성의 논리에 견인당하지 않는 여성적 성에 대한 윤리적 지향을 담고 있다. 이리거레이가 이론적 언어로 담론화한 두 입술이 새로운 시각적 · 언어적 표현을 만날 때 포르노를 넘어서는 성적 재현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2012년 한국사회는 이루지 못한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심한 아저씨들의 고백으로 뜨겁다. 지금까지 과잉의 규제력을 발휘한 ‘계’(戒)의 명령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색’(色)의 욕망을 인정하자는 한 남성 법학 교수의 고백은 많은 남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 욕망은 학위를 위조하여 대학교수가 된 여성 큐레이터와 사랑에 빠진 고위 공직자에서 중국인 브로커 여성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외교관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 끝자락에는 친구 집에서 『플레이보이』 잡지를 몰래 훔쳐보던 까까머리 중학생이 놓여 있다. 저자 김두식은 안식년 기간 동안 체류한 미국의 한 대학에서 동성애자 목사의 강연을 듣고 선 하나를 넘었다고 고백한다. 성에 관한 금기의 선 하나를 넘고 난후 그가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이 이제 우리 모두 몸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그가 유포한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는 금기와 죄의식에 시달려온 한국 남성들에게 안도와 위로를 선사한다.

    인간은 살의 존재이기 때문에 살의 소통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옳다. 문제는 『플레이보이』에 그려진 살들의 관계가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의 감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망이 괜찮은 것은 아니다. 눈 밝은 한 서평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모든 욕망이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모든 욕망과 그 욕망의 관계 역시 전적으로 순수할 수는 없다. (…) 저자는 자신의 욕망에 최대한 접근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 욕망을 오직 반성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 욕망끼리의 함수관계나 욕망의 사회적 형성과정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최수태 9). 이제 우리는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를 반성하면서 ‘욕망해도 괜찮아’를 주장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 갈등하는 욕망들이 부딪칠 때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주도적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남성들의 성 자유주의는 성적 욕망과 표현의 권리에는 민감했지만 상이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포르노적 성에 만연한 폭력성이 여성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주장도 그들의 욕망의 권리 앞에선 침묵당하기 일쑤였다. 남성들의 성적 욕망이 괜찮은 것이 되려면 그들이 살을 맞대는 사람들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과 다양한 젠더의 성적 소수자들은 그들이 살을 나누는 파트너이자 감정을 교류하는 이웃이다. 욕망의 권리가 이웃의 억압으로 이어지기 않으려면 욕망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 이는 포르노 논의에도 유효한 윤리적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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