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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마술로서의 영화 Filmic Magic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마술로서의 영화

This paper explores the magical realism in the films of the 2000s. Magical Realism appears as the psychological representative mode in the contemporary cinema. It represents the state of mind of the protagonist in the films. This works in the way how the unreal and the impossible are presented as the real and the possible and the magical reality germinates from that. The recipient takes it for acceptable and can understand the protagonist better through that.

Magical realism uses the spatial and temporal manipulation. Die innere Sicherheit directed by Christian Petzold manipulates the space in order to represent the mind of a homeless girl, the protagonist in the film. The german film takes her into a luxurious house and lets her stay there one night long in the way of magical realism. Le Temps qui reste directed by François Ozon manipulates the time in order to represent the mind of an seriously ill young man, the protagonist in the film. The french film gives him the time of his boyhood back in the way of magical realism.

This cinematical way can be called as “filmic magic”, because the film acts like the magician, while it fulfills the wish of the protagonist. This makes the cinematical solution to the troubles that the protagonists confront.

This magical realist camera identifies at the same time the mind of the film audience, who is sympathetic to the protagonists and wants to help them.

Magical Realism in the Films of the 2000s makes the new way of reality through integration of the real and the unreal.

Mircea Eliade’s religious philosophy explains this way of magical realism in the films very well, while the process of “Hierophanie” is equivalent to the process of the magical realism.

KEYWORD
마술적 리얼리즘 , 2000년대 영화 , 시공간 , 사실성 , 미르치아 엘리아데 , 내적 안정 , 남아있는 시간 , 마술로서의 영화
  • 1. 서론: 심리적 재현양식으로서의 마술적 리얼리즘

    2000년대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심리적 재현양식으로서 자주 발견된다. 비사실적 요소를 실제적 사건으로 제시하면서 그로부터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도록 하는 독특한 새로운 사실성을 만들어내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이미 1980년대 이후 문학을 비롯해 세계문화의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1) 영화에서는 2000년대 이후에 특히 그 양상을 자주 살펴볼 수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이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은 1923년에 발표된 독일 미술비평가 프란츠 로의 글2)이다. 예술 격주간지에 기고한 유럽 후기표현주의 회화 비평문에서 그는 당시 회화에 나타난 특정한 경향인 일상적 사물, 인물, 풍경화가 지닌 마술적 분위기를 이용어로 묘사했다. 세계문화에 마술적 리얼리즘이 보다 잘 알려진 계기는 196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번성했던, 비사실적이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건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태연하게 서술되는 문학양식을 통해서였다.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 문학을 통해, 마술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뒤섞인 새로운 이야기양식으로 세계문화에 각인되었다.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이러한 세계문화의 흐름의 일부인 동시에, 이와 별도로 영화 매체 자체의 역사에서도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영화들인 뤼미에르의 기록영화(<기차의 도착>)와 멜리에스의 판타지영화(<달나라 여행>) 이래 영화는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해 왔으며, 2000년대 이후 영화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마술적 리얼리티는 영화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두 상반된 경향이 하나의 스타일 속에 결합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현재 문예학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판타지를 날것의 물리적 혹은 사회적 리얼리티와 연결시켜, 일상적 삶의 표면에서 포착 가능한 것을 넘어서는 진실을 찾는 픽션 기법”3)으로 통용된다.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비사실적 요소는 사실적인 것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사실주의적 (혹은 판타지가 아닌) 영화들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개입된,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이라 할 만한 쇼트나 장면, 시퀀스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마술적 리얼리티로서 나타나는 것들은 초현실주의에서와는 달리 꿈이나 환각, 상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석될지라도, 영화의 재현에 있어서는) 실제의 물리적 사건처럼 그려지고, 그럼에도 극중 인물들에게나 관객들에게나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치유적인 마술적 리얼리즘 특유의 심리적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주관적 이미지의 시각화와는 구별된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리얼리티의 영역에 비사실성non-reality을 끌어들인다기보다는 거꾸로 비사실성에 사실성을 끌어들임으로써 리얼리티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독특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비사실적인 것을 실제 일어난 일로 제시하는 것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문예학자 헤거펠트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가리켜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4)이라 일컬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이러한 속성은 주관적 이미지의 시각화로 특징지어진 초현실주의와의 대조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초현실주의에서는 환상이나 꿈, 상상, 환각 등 주관적 이미지를 시각화해 보여주지만, 그것이 환상이나 꿈, 상상, 환각, 즉 주관적 이미지임을 명확히 한다. 오히려 강조해 드러낸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이와 반대로, 주관적 이미지를 ‘실재’로서 제시하기 위해 주관성을 최대한 지운다. 비사실을 가능한 한 사실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술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이 사실적 사건을 그리는 방식 그대로, 즉 사실적으로 비사실적 사건을 그려 보인다. 이것이 리얼리즘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티가 이질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자주 등장하고 더 큰 효과를 내는 이유이다. 또한 마술적 리얼리티는 간접적인 내면의 시각적 표현과도 구분된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영화의 이미지들은 (표정이나 풍경에 다양한 정조를 드리움으로써) 인물이나 상황의 내면이나 정서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 시각화 작업과 마술적 리얼리티의 영화적 실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마술적 리얼리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함으로써 사실성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영화이론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물리적 실재의 구원”을 논하며 “영화는 우리가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한다”5)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일어난다. 크라카우어에게 있어 영화가 “자연적 현실” 혹은 “물리적 실재”6)를 매체–기계의 눈을 통해 보아내는 것이라면,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영화는 ‘비현실’로서 보이지 않는 것, 인물이나 상황의 내부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물리적 실재로 바꾸는 매체–마술을 실행하는 것이다. 종합해 볼 때, 마술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의 방식을 이용해 리얼리즘을 깨뜨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리얼리티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시적 사실주의, 네오리얼리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고전적 리얼리즘 등 영화에서의 다른 리얼리즘 양식들과 비교될 때, 보다 분명히 그 속성을 드러낸다. 시적 사실주의(장 비고의 <품행 제로>의 베개 깃털 놀이 장면을 예로 생각해보자)에서는 시적 풍미가 가득 깃들어 리얼리티의 경계를 살짝 벗어나는 분위기가 생기기는 하지만, 그려지는 사건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적으로 고양시켜 그려낼 뿐이다. 전후 이탈리아 영화가 발전시킨 독보적 리얼리즘 양식인 네오리얼리즘(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려 보자)은 리얼리티를 극단까지 추구해,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연기하게 하는 등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투명에 가까운 리얼리티에 다가가고, 그를 통해 사회적 리얼리티를 담아낸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보다 뚜렷하게 사회주의 이념이 전달되도록 노동계급이나 하층민들의 생활상을 여실히 그려내는 노선을 취한다. 고전적 리얼리즘은 이와 달리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을 극적으로 재구성해 현실의 단면이 아로새겨진 전형적 리얼리티를 구현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네오리얼리즘에서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나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나 리얼리티에의 판타지의 개입은 없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이들 다른 ‘리얼리즘들’과 다른 것은, 리얼리티에 판타지가 개입해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로 재탄생하는 과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작용이다.

    본 논문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들이 동시대 영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크리스티안 펫촐트Christian Petzold의 <내적 안정 Die innere Sicherheit>(2000)프랑소와 오종François Ozon의 <남아있는 시간Le Temps qui reste>(2005)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 두 편의 영화는 2000년대 초중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유럽영화들로서 공통의 시대적 문화적 기반에 있으며, 리얼리즘과 표현주의의 경향이 고루 발달해 온 독일의 영화전통과 영화의 발상지이자 다양한 실험적 리얼리티를 시적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통해 시도해 온 프랑스의 영화풍토에서 각각 어떠한 영화적 마술적 리얼리즘이 시도되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동시에 이 두 편의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작품들로서, 2000년대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한 대표적 예시작품으로 많은 영화들 가운데 주의 깊게 선별되었다.7)

    본 논문에서는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티가 어떻게 생성되며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내고, 동시대 영화에 나타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실행과정과 작용을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2000년대 영화에 나타나는 마술적 리얼리티가 삶과 인물의 내면을 재현하는 방식을 탐구하고자 한다.

    1)Maggie Ann Bowers, Magic(al) Realism, Routledge, New York, 2004, p.1-19 참조.  2)Franz Roh, “Zur Interpretation Karl Haiders. Eine Bemerkung auch zum Nachexpressionismus”, in: Der Cicerone. Halbmonatsschrift für Künstler, Kunstfreunde und Sammler, 15, 1923, p.598-602.  3)Joan Mellen, Magic Realism, Gale, Detroit, 2000, p.1; “Magic realism is a fictional technique that combines fantasy with raw physical reality or social reality in a search for truth beyond that available from the surface of everyday life.”  4)Anne C. Hegerfeldt, Lies that Tell the Truth. Magic Realism Seen through Contemporary Fiction from Britain, Rodopi, Amsterdam and New York, 2005.  5)Siegfried Krakauer, Theorie des Films. Die Erretung der physischen Realität,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85 참조.  6)Ibid.  7)한국, 일본, 태국 등 아시아 문화권의 동시대 영화들에서도 마술적 리얼리티로 아우를수 있는 장면들이 다수 발견되며, 이들 역시 연구할 가치가 높다. 이 논문에서 유럽영화를 탐구대상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아시아 문화권의 영화들에 나타나는 마술적 리얼리티를 논할 때에는 아시아 고유의 정신적 문화를 같이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같이 다루지 않지만, 아시아의 동시대 영화들에 나타나는 마술적 리얼리티 또한 동시대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의 중요한 한 계보이며, 보다 자세한 논의 속에서 함께 논할 수 있을 것이다.

    2. 떠도는 소녀를 집안으로 데려다주기: <내적 안정> (2000)

    <내적 안정>은 이른바 “베를린 학파 Berliner Schule”8) 에 속하는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펫촐트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서, 몇몇 마술적 리얼리즘의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극사실주의적 스타일을 따른다. 주인공은 급진적 정치활동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부모를 따라 국외로 떠도는 도피생활을 하며 불안정한 삶을 사는 십대 소녀 쟌느이다. 카메라는 메마르고 거친 가족의 도피생활의 일상을 건조하게 담으며 대상과 거리를 유지한다.

    주인공 쟌느에게는 ‘집’으로 대표되는 ‘내적 안정’이 결핍되어 있다. 그녀의 가족은 늘 ‘집 밖’을 떠돌며, ‘길 위’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다 움직이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러던 중 일시적 도피지인 포르투갈의 한 해안도시의 바닷가에서 쟌느는 하인리히라는 친구를 사귀며 작은 안식처를 발견한다. 그는 쟌느에게 함부르크에 있다는 어느 ‘꿈의 집’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그 집은 매우 크고 안락해, 떠돌이소녀 쟌느에게나 부랑소년 하인리히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꿈의 집’이다.

    포르투갈의 바닷가에서 쟌느가 하인리히로부터 함부르크의 ‘꿈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사용해 ‘꿈의 집’시퀀스를 만든다. 바닷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하인리히의 내레이션으로 바뀌어 들리고, 그와 동시에 바닷가에 마주앉은 십대 소년소녀를 비추던 카메라는 바로 다음 쇼트에서 어떤 망설임도 극적 연결신호도 없이 그때까지와 똑같은 사실주의적 스타일로 ‘꿈의 집’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십대 소년소녀를 보여준다. 두 쇼트(바닷가–꿈의집 현관)의 연결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사실성과 비사실성 사이의 ‘문턱’이 사라지는 효과를 내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장소 및 리얼리티 층위의 급격한 변화를 관객이 담담히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게 마술적 리얼리티가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폐쇄회로TV(CCTV)와 같이 작동한다. 카메라는 ‘꿈의 집’ 안쪽에 자리한 채 집안으로 들어오는 두 인물을 관찰한다. 하인리히는 쟌느를 집안으로 안내하고, 카메라는 쟌느가 아직 와본 적 없는 집안에 ‘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본다.’ 마술적 리얼리티의 주된 발생경로인, 불가능한 사건을 응시하는‘시선’이 여기에서 작동한다. ‘시선’은 마술적 리얼리티의 주된 발생경로이다.9) 누군가에게 목격되고 기억될 때 사건은 일어난 일로서의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선’의 매체로서 마술적 리얼리티 생성에 탁월한 매체이며, ‘꿈의 집’시퀀스에서는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내적 안정>의 카메라는 이어서 하인리히와 쟌느가 이층 침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담아낸다. 쟌느는 하인리히의 안내를 받으며 방안에 들어와 방을 구경한다. 카메라는 방의 한쪽 벽에서, 왼쪽의 방문쪽으로부터 오른쪽의 창문 쪽으로 서서히 시선을 움직이며 침실 속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들을 바라본다. 방 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쇼트에 이어 방의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정원 수영장이 쟌느의 시점쇼트에 담겨 보인다. 이어지는 쇼트에는 창턱에 기대 키스하는 쟌느와 하인리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렇게 단 몇 개의 단순한 쇼트로 ‘꿈의 집’장면은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앞뒤로 포르투갈의 바닷가 쇼트가 붙으며 ‘꿈의 집’이야기의 시퀀스가 완성된다. ‘꿈의 집’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내내 목격자의 태도를 취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거기에는 어떤 꾸밈도, 이것이 상상의 장면이라는 암시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그를 통해 ‘꿈의 집’ 시퀀스는 리얼리티 또는 리얼리티와 유사한 어떤 것, 마술적 리얼리티를 얻는다.

    하인리히의 이야기–내레이션이 끝날 무렵, 그와 동시에 ‘꿈의 집’ 장면도 끝나고 카메라는 포르투갈의 바닷가로 돌아온다. 이 쇼트에서 두 소년소녀는 포르투갈의 바닷가에서 키스하고 있고, 바닷가의 시간은 밤에서 동이 튼 새벽으로 흘러 있다. ‘꿈의 집’시퀀스 전체를 통해 <내적 안정>은 하룻밤 동안 쟌느가 하인리히와 함께 그 집 안에 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낸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그들은 그 밤 동안 포르투갈의 해변에 있었고, 단지 함부르크의 저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곳을 상상했을 뿐이라고 논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석 이전에, 영화는 이들이 그 집에 들어가 머무는 장면을 ‘사실’로서 보여줌으로써 상상을 현실화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실현한다. 그렇게 인물이 자신 내면의 집–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장소에 머물 수 있게 한다.

    이 ‘꿈의 집’은 주인공 쟌느에게 엘리아데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한 공간”10)으로 작용한다. 그곳은 단순한 주거의 현실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욕구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여타의 현실의 공간과 구분되는 특별한 장소이다. ‘내적 안정’을 느끼게 해주는 그곳에서 쟌느는 일종의 “근원체험”11)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뒷부분에서 보다 상세히 논한다.)

    이 마술적 리얼리즘의 시퀀스에서 영화의 카메라가 하는 역할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목격자’의 역할로, 이는 집안에서 이들을 관찰하며 관객에게 증명하는 카메라의 관점을 통해 실현된다. 둘째는 마술을 실행하는 ‘마술사’의 역할로서, 이는 카메라의 공간이동과 상이한 공간을 기록한 쇼트들의 동시성 내의 연속을 통해 실현된다. 그리고 이 두 역할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이 하나로 엮여 있다. 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마술을 행하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목격해 전한다. 마술의 목격자이자 마술사라는 두 역할이 동시에 가능한 것은, 영화 매체가 지닌 두 가지 상반된 속성, 즉 앙드레 바쟁이 훌륭히 논한 바 있는,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리얼리티의 속성12)과 자유자재로 상상을 영상의 물질성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판타지의 속성13)이 이곳에서 동시에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 안정>에서 ‘집’의 마술적 리얼리티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금 이어지는 것은, 이후 이 가족이 실제로 함부르크로 도피처를 옮기면서다. 마침 가족이 함부르크로 피신하게 되었을 때, 쟌느는 숨을 만한 곳으로 그 집을 떠올리고, 실재하는 그 집을 발견한다. 쟌느의 가족은 쟌느의 안내로 비어 있는 그 집에 들어가 그곳에서 한동안 숨어 지낸다. 현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앞서 나온 마술적 리얼리즘의 장면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한다. 상상적 체험의 공간이었던 대저택이 실제로 이야기에서와 똑같은 모습으로 현실 속에 존재함으로써,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것이다.14) 상상과 현실은 이 영화에서 이처럼 서로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고,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쟌느가 남자친구 하인리히로부터 그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공간은 이미 영화적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실재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쟌느를 이야기 속의 집 안에 데려가줌으로써, 그런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소녀의 소망을 카메라가 충족시켜준다. 이후에 현실에서 쟌느가 실제로 가족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갈 때,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그 집에 비현실적 인상이 덧씌워지며,15) 한 공간의 두 이질적 시퀀스가 맞닿아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사실의 층위와 비사실의 층위가 서로 만난다.

    이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실행되는 방식은 공간도약이다. 카메라는 인물들이 여전히 포르투갈의 밤바다에 있을 때, 그들을 싣고 독일 함부르크로 이동한다. 쇼트와 쇼트 사이 먼 거리를 순간이동해 잠시나마 쟌느에게 멋진 집을 체험시켜 준다. 이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실행하는 공간도약의 카메라는 인물과의 정서적 유대로부터 작동한다. 인물의 정서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 카메라는 인물과 공감하며 인물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옮겨 간다. <내적 안정>에서 이같은 행보는 상당히 예외적이다. 다른 인물들에게는 냉정하리만큼 차가운 외적 기록만을 행하던 카메라가, 쟌느에게는 내면의 결핍을 영상을 통해 채워주고자 하는 적극적인 정서적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내적 안정>은 한 소녀의 성장기로 이해될 수 있다. 영화의 끝에서 쟌느는 혼자 남는다. 영화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쟌느의 얼굴을 매우 가까이에서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쇼트로 끝난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살아남은 소녀 쟌느의 어두우면서도 결연한 표정을 보여주는 이 마지막 쇼트는 그녀가 여전히 불안 속에 있지만 이제는 혼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히 강해져 있음을 암시한다. 마지막 쇼트에 이르러 (관객의 자리에서) 혼자 남은 소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까이 한참 동안 응시하는 카메라는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존재’16)로서 그녀와 다시금 함께 있어주며, 관객 역시 그녀를 카메라를 통해 마주하게 한다. 이때 관객은 자신이 카메라와 같은 자리에 있(어 왔)음을 깨닫는다. 인물의 심리를 재현하며 영상으로 결핍을 채워주고자 한 <내적 안정>의 카메라는 결국 관객의 마음을 따라 움직인 것임을, 마술적 리얼리티는 인물과 카메라의 정서적 유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물과 관객 사이의 ‘우정’17)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8)Stefanie Hofer, “…von der Unmöglichkeit der Gegenwart: Geschlecht, Generation und Nation in Petzolds Die Innere Sicherheit und Sanders-Brahms Deutschland, Bleiche Mutter”, German Life and Letters, Volume 62/Issue 2, April 2009, p.174 ff.: “크리스티안 펫촐트는 독일의 상업영화에 대한 반대운동을 이끌며 뉴저먼시네마와 평행노선을 가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린 학파에 속한다. 상업영화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베를린 학파 영화 는 독일에서 1990년대 말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으며, […] 주제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1970-80년대의 작가주의 영화들과 연결점을 만들고 있다. […] 상대적으로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고-12만 관객동원-2001년도 그해의 영화상도 수상한 크리스티안 펫촐트의 <내적 안정>은 이 새로운 독일 영화운동의 이정표이다.”; Thomas Schick, “A ‘Nouvelle Vague Allemande’? Thomas Arslan’s films in the context of the Berlin School”, Film and Media Studies 3, Acta Univ. Sapientiae, 2010, p.143: “Since the beginning of the 1990s the directors Christian Petzold, Angela Schanelec and Thomas Arslan tried to break new ground within the German cinema by telling simple stories from everyday life with very little dramatic emphasis. Other filmmakers like Christoph Hochhausler, Benjamin Heisenberg or Valeska Grisebach continued to follow that path and searched for new cinematic means to depict contemporary everyday life. Film criticism labelled this group of young German directors with the term “Berlin School” (“Berliner Schule”). The filmmakers of the Berlin School don’t pursue a naive notion of realism, their films rather try to detect the core of reality. One important source of inspiration for them is the movements of auteur filmmaking, somehow founded by the directors of the Nouvelle Vague. It is no coincidence that the Berlin School is called“Nouvelle Vague Allemande”in France.”; Rüdiger Suchsland, “Langsames Leben, schöne Tage. Annäherungen an die ‘Berliner Schule’”, Film-Dienst, 13, 2005, p.7 ff. http://film-dienst.kim-info.de/artikel.php?nr=151062&dest=frei&pos=artikel; Michael Baute/ Ekkehard Knörer/ Volker Pantenburg/ Stefan Pethke/ Simon Rothöhler, “‘Berliner Schule’-Eine Collage”, kolik.film, Sonderheft 6, Oktober 2006, p.7-14. http://www.kolikfilm.at/sonderheft.php?edition=20066&content=texte&text=1.  9)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소설 <칼리Kali>에도 이와 비슷한 마술적 리얼리티가 실현되어 있다. 이 소설은 원래 영화시나리오로 쓰인 텍스트로, 모든 서술이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인 오페라여가수가 어느 게스트하우스 침대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보던 화자 ‘나’는 순간 그녀가 다른 마을의 산꼭대기에 누워 있는 것을 ‘본다.’ 모든 사건을 전달하는 주체로서 화자가 ‘본’ 것은 사실과 다름없이 간주된다. 페터 한트케는 빔 벤더스와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하는 등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고 문학에서 영상적 시도 역시 능숙하게 하는 작가로, <칼리>의 그 ‘장면’은 ‘영화적’ 마술적 리얼리티가 텍스트 매체에 변용된 인상적 예이다.  10)Mircea Eliade, Das Heilige und das Profane, p.23.  11)Ibid.  12)앙드레 바쟁,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시각과언어, 13-24쪽 참조.  13)영화는 상상의 이미지를 영상화함으로써 본질적으로 마술적 리얼리티에 능숙한 매체이다.  14)이때 그 ‘흐트러짐’을 감지하는 것은 쟌느, 그리고 카메라와 더불어 모든 것을 목격한 관객의 몫이다.  15)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의 공간이 현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비사실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16)이점에서 ‘타자의 얼굴’을 마주볼 때 갖게 되는 윤리적 감정,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face à face)’ 관계”를 논한 레비나스도 떠올릴 수 있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04, 31쪽 참조.  17)“우정으로서의 예술”, “우정의 정치politique de l’amitié”가 여기서 연관될 수 있다-Jacques Derrida, Politique de l’amitié, Editions Galilée, Paris, 1994; Jacques Derrida, The Politics of Friendship, Verso Books, London and New York, 2006; 조르조 아감벤, “친구”,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난장, 2010, 49-68쪽;심보선, “우정으로서의 예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21-34쪽 참조.

    3. 죽음을 맞는 청년에게 소년의 시간 되돌려주기: <남아있는 시간> (2005)

    프랑소와 오종의 <남아있는 시간>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한 청년의 마지막 시간을 마술적 리얼리티로 그려낸다. 영화의 대부분은 재능 있는 상업사진가인 로맹이 자신에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들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마을을 찾아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조건 없는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는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고, 우연히 만난 어느 불임부부에게 대리부 역할을 해줌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후손을 남기는 일을 하며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바쳐져 있다.

    이 영화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에 자리한다. 남은 시간이 거의 다 흐른 어느 날, 죽음을 예감한 그는 바닷가를 찾는다. 피서객들로 붐비는 해변에서 그는 혼자 자리를 잡고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한 소년이 갖고 놀던 비치볼이 그 앞으로 굴러오고,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소년에게 건네준다. 그와 소년은 서로를 마주 본다. 영화는 서로를 보는 청년과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각각의 쇼트로 보여준다. 순간 소년의 얼굴을 보는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 소년이 바로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인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을 접하고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대신, 알아보는 순간 이해한다.18) 관객 역시 동시에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데, 왜냐하면 영화의 중반부 회고장면에서 이미 영화가 그의 소년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 아름답고 불가해한 사건의 의미를 관객 역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로써 마술적 리얼리티가 성립한다.

    청년 로맹이 소년 로맹의 존재를 알아본 후 영화는 이 둘을 하나의 그림 안에 담는다. 비치볼을 맞잡은 채 두 로맹이 한 프레임 안에서 서로를 본다. 어떻게 소년 로맹이 죽어가는 청년 로맹과 같은 시간대에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영화는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주지 않는다. 혹시 이것은 청년 로맹의 환시일까? 논리를 중시하는 해석자는 그렇게 해석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이것을 환시로 그리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장면’을 ‘실재’로서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 속에 (로맹에게 그러했듯) 관객에게 즉각적으로 이해되며, 그럼으로써 마술적 리얼리즘이 실현된다.

    파란 비치볼이 로맹의 발 앞으로 굴러오는 것으로 시작해 청년 로맹과 소년 로맹이 공을 함께 잡은 채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것에서 정점을 이루는 이 장면에서, 비치볼은 ‘마술’의 중요한 소도구로서 기능한다. 비치볼을 통해 두 ‘로맹’의 만남이 성사된다. 청년 로맹과 관객이 동시에 비치볼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이 마술이 벌어진다. 카메라는 비치볼로 시선을 사로잡는 ‘눈속임’을 통해 다른 두 시간대를 감쪽같이 연결시킨다. 이는 다음과 같은 쇼트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모래사장 위에 앉아있는 로맹–그의 발치로 굴러오는 비치볼–비치볼을 집어 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년을 보는 로맹–소년을 바라보는 청년 로맹의 얼굴–미소 짓는 청년 로맹의 얼굴–로맹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얼굴–비치볼을 건네주는 청년 로맹–비치볼을 내려다보는 소년 로맹–비치볼을 맞잡은 채 서로를 마주보는 청년 로맹과 소년 로맹. 두 인물의 시선의 연결점으로 기능하는 비치볼을 따라 영화적 움직임으로 마술적 리얼리티를 만드는 <남아있는 시간>의 카메라는, 빨간 풍선을 따라 관객의 시선을 자유자재로 이끌며 ‘마술적’으로 움직이는 알베르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Le Ballon Rouge>(1956)의 카메라를 언뜻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비치볼을 건네받은 소년 로맹이 모래사장에서 즐겁게 공놀이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난 얼마 뒤, 그로 인한 평화로운 기분 속에 이 해변에서 죽음을 맞는 청년 로맹을 보여준다. 청년 로맹과 소년 로맹의 공존을 통해 <남아있는 시간>은 시간에서의 마술적 리얼리티를 만든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의 시간과 성인이 된 후의 시간이같은 시간대에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장면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형적 방식대로 초자연적이며 불가능한 사건을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바로 그 “자연스러움 Matter-of-factness”19)으로부터 타자화가 배제된,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겨난다. 죽음을 앞둔 청년이 생의 마지막 날 바닷가에서 가지려 하는 것은 평화롭게 바닷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의 마음일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그러한 정서를 사건화해 리얼리티로 만들어냄으로써, 현실의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치유에 도달한다. 그는 곧 죽지만, 소년 로맹은 여전히 언제까지나 그 해변에서 공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고 있을 것이라는, 머물러 있는 시간성을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생명체의 시간적 유한성을 예술적 장치를 통해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시도이며, 원시 예술에서부터 인간이 추구해 온 정신적 경향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간은 다했지만, 다른 의미로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그의 시간을 소년시절로 되돌려줌으로써, 그에게 여전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남아있는 시간”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청년 로맹에게 얼마 되지 않는 남아있는 시간을 뜻하는 한편, 소년 로맹을 통해 여전히 남아있는 시간도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시간의 중첩’으로 실현된다. 이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한자리에 있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삶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주는 독특한 효과를 낸다.

    공간적으로 이 바닷가는 <내적 안정>의 포르투갈 해변과 마찬가지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장소로 기능한다. <남아있는 시간>의 바닷가는 다른 시간들이 한데 공존할 수 있는 장소로서, 미르치아 엘리아데적 의미에서 “시간으로부터 걸어 나와”20) “영원한 현재”21) 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 논문의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소년을 만난 뒤 청년 로맹은 해변에 홀로 누워 죽음을 맞는다. 다른 피서객들은 해가 지자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텅 빈 해질녘의 넓은 바닷가에 움직이지 않고 오직 그만이 작디작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오래도록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새로이 떠올리게 된다. 영화의 끝이 영화의 시작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시간>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인지 몰랐으나, 후에 소년 로맹임을 관객이 알게 되는, 한 소년이 바닷가에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소년은 어느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남아있는 시간>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 소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시선은 이제 청년 로맹의 것으로 이해된다. 엔딩 시퀀스에서 이 소년은 청년 로맹과 함께 같은 바닷가에 있게 되고, 이로써 영화의 끝과 시작이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이 영화의 시간구조는 순환하는 구조를 띠게 되고, 엘리아데적 의미에서 “영원 회귀”22)가 이루어진다. (엘리아데와 관련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한다.)

    <남아있는 시간>에서 카메라는 이처럼 마술적 시계장치로서, ‘볼 수 없는 것’으로서의 인물의 내면에 자리하는 시간의 중첩을 보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사실적인 스타일 속에서 실현되며, 그 점에서 “사진적 영상”23)이라는 기본적인 영화적 기능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불가능한 것이 일어나게 하는 심리적 재현양식으로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현실을 묘사하는 카메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18)이러한 즉각적인 인지와 이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중요한 특질이다.  19)Anne C. Hegerfeldt, Lies that Tell the Truth, p.53.  20)Eliade, Ewige Bilder und Sinnbilder, p.94 참조.  21)Ibid., p92.  22)Mircea Eliade, Kosmos und Geschichte. Der Mythos der ewigen Wiederkehr, Eugen Diederichs, Düsseldorf, 1966 참조.  23)앙드레 바쟁, 앞의 책, 13-24쪽.

    4. 진정한 공간과 영원한 현재: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의 특정 경향을 분석함에 있어 종교철학에 기대는 것은 다소 생소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은 많은 점에서 동시대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이해를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엘리아데가 인간의 삶을 바라본 관점을 동시대 영화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접목시켜, 보다 심화된 양식 연구를 해보고자 한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종교철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장기간의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현대인 역시 일종의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24) 이라는 인식을 내놓았다. 현대인들 역시 일상적 삶속에서 많은 종교적 경험들을 하며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어떤 성스러운 것에의 욕구를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오로지 세속적이기만 한 삶은 없으며, 모든 삶들은 일상적 영역에서 종교적 경험들을 내포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을을 찾는 것은 그 개인에게 있어 일종의 성지순례와 같은 것이며, 소중히 아끼는 사물에 대한 태도 역시 종교적 심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에게도 원시인이 자연과 세계에 대해 갖고 있었던 감성이 일부 남아 있다는 “원시적 존재론archaische Ontologie”25)을 논하게 되며,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깊은 현실과 사물의 파악”26)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은밀한 형태를 발설”27)한다.

    엘리아데의 이러한 근본테제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본적 입장과 유사하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하고 비사실적인, 그러나 깊은 정서적 유대에 있어 자연스레 이해되는, 일상의 시공간에서 벗어나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고 특별한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마술적 리얼리티에 대한 철학적 바탕으로서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을 읽을 수 있다.

    『미로의 시험Die Prüfung des Labyrinths』이라는 책에 실린 대담에서 엘리아데는 “나에게는 성스러운 것이 언제나 사실적인 것의 발현, 즉 우리의 현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리를 구하는 것과의 마주침이다.”28)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그대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속성 및 작용에 상응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비사실적인 것을 현실 속에 집어넣어 묘사함으로써 외적 현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적 사실성을 그려내고, 깊은 현실을 드러낸다. 이것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양식에 그것만의 독특한 미적 힘과 치유의 능력을 부여한다.

    이 과정은 의례rite와 같이 일어난다. 의례에서는 세속적 시간의 지양이 가능하며, 그를 통해 성스러운 시간이 체험된다.29) 그의 책 『성과 속Das Heilige und das Profane』의 첫째 장은 “성스러운 것은 스스로를 드러낸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을 엘리아데는 “히에로파니Hierophanie”라고 일컫는다. 이는 “성스러운 것의 발현방식”30)을 가리킨다. “성스러운 것은 언제나 ‘자연적’ 사실성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실성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며”,31) “인간은 성스러운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것이 세속적인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에 관한 앎을 얻는다. 이러한 성스러운 것의 드러남을 우리는 히에로파니라고 칭한다.”32)

    엘리아데가 ‘속’안에서 ‘성’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하는 설명을 리얼리티 속에서 비사실적 사건이 일어남을 묘사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적용해 보자. 마술적 리얼리티 또한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접한 관객들은 그것이 사실적으로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내용에 있어 사실적인 것과는 완전히 구분되기 때문에(=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사건임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것을 마술적 리얼리티로서 인지할 수 있다. 그 결과 보통의 리얼리티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되고, 그로부터 독특한 층위의 정서적 공감과 인식이 생겨난다.

    마술적 리얼리즘에서는 이처럼 비사실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이 공존하며 서로에게 녹아든다. 엘리아데는 ‘성과 속’의 그러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제나 같은 은밀한 과정이 실행된다. ‘완전히 다른 것’, 우리의 세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 사실성이 우리의 ‘자연적인’ ‘세속의’ 세상의 구성요소들과 통합되면서 사물들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33) 성스러운 것은 우리의 세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 사실성, 즉 무엇인가 완전히 다른 것,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세속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형적 과정에 상응한다. 마술적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 “완전히 다른” 것이며, 우리의 일상적 삶에 들어온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철학의 바탕 위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마술적 리얼리티의 요소들이 기본적으로 초월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것의 속성들은 마술적 리얼리티의 속성과 거의 동일하다. 마술적 리얼리티가 동시대 영화들에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삶에서 성스러운 것이 체험되는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때, 마술적 리얼리즘은 엘리아데가 말하는 종교적 경험의 성격 또한 가진다. “무한한 시간”34) 또는 “진정한 공간”35)을 경험케 함으로써 “인식의 도구이자 해방의 수단”36)으로서 작용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앞서 살펴본 프랑소와 오종의 <남아있는 시간>에서 주인공 로맹이 해변에서 자기 자신인 소년을 만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이점을 인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크리스티안 펫촐트의 <내적 안정>에서 현실과 상상 양쪽에 공존하며 내적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공간으로 체험되는 함부르크의 꿈의 집이 소녀 쟌느에게 주는 심리적 치유의 작용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이 두 편의 영화 내에서 ‘마술적 시간과 공간’은 거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게 ‘일상적 시간과 공간’과 이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종교적 경험으로서의 ‘기적’체험과 같이 생생한 현실 가운데 불현듯 일어나고 곧바로 일상적 리얼리티 속에 스며든다.37)

    크리스티안 펫촐트의 <내적 안정>은 엘리아데적 의미에서의 마술적 리얼리티의 공간성을 잘 드러낸다.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공간은 일상성과 특이성을 겸비하며 마술적 리얼리티의 계기를 마련한다. 쟌느가 하인리히의 이야기를 들으며 체험하는 ‘꿈의 집’은 실제 있는 공간이자 인물의 심리적 결핍과 관련된 상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성과 속』에 실린 글 “공간의 동종성과 히에로파니”에서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동종적homogen이지 않다고 쓴다. “공간의 비동종성”38)은 여타의 공간들과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공간이 일상적 공간들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종교적 인간은 “진정한 공간wirklichen Raum”39)을 체험하며 “근원체험Ur-Erfahrung”40)을 한다. 내면에 자리한 무엇인가의 결핍으로 특별한 어떤 것을 갈구하는 이는 종교적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간을 체험한다고 볼 수 있으며, <내적 안정>의 주인공 쟌느에게‘꿈의 집’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작용함을 살펴볼 수 있다.

    프랑소와 오종의 <남아있는 시간>에서 잘 볼 수 있듯,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시간은 ‘무시간적zeitlos; timeless’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간적 초월은 공간과 결합하여 발생하며 (“공간의 침입과 시간흐름의 파격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41) 이러한 시간이 존재하는 장소는 마술적 리얼리즘적 공간이 된다. <남아있는 시간>의 해변이 소년 로맹과 청년 로맹이라는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장소가 됨으로써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과, <내적 안정>의 함부르크의 집이 짧은 시간의 ‘방문’ 동안 밤이 한꺼번에 지나버리는 시간적 축약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특히 시간은 결정적 역할을 하여, 마술적 리얼리즘에서의 시간은 “머무름, 영원하며, 무시간적인 현재die stasis, die ewige, zeitlose Gegenwart”42)의 상태를 이룬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경험은 인간을 기억으로 부터 치유한다. 그 안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서적 작용, 즉 심리적 기능이 작동한다. 엘리아데는 이 과정을 “시간작업을 무화시키는, 기억으로부터의 해방”43)이라고 말한다. “시간으로부터의 벗어남”44)을 통해 인간은 “완전한, 영원한 현재”45)를 체험하며 그와 더불어 “무지에서 깨달음으로”46) 가닿는다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한 순간 안에 일어나는 깨달음과 시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역설적 도약”47)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화관객이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티를 만날 때 하게 되는 미적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시간의 강을 잔잔하게 만드는”48) 마술적 리얼리즘은 “가장 오래된 장소”49)로서의 스크린을 만든다.

    24)Eliade, Das Heilige und das Profane, p.17.  25)Eliade, Kosmos und Geschichte, p.8.  26)Ibid., p.16.  27)Eliade, Ewige Bilder und Sinnbilder, p.14.  28)Eliade, Die Prüfung des Labyrinths. Gespräche mit Claude-Henri Rocquet, Frankfurt am Main, Insel, 1987, p.189.  29)Eliade, Kosmos und Geschichte, p.35.  30)Reschika, Mircea Eliade zur Einführung, p.62.  31)Ibid.  32)Ibid., p.14.  33)Ibid., p.14 f.  34)Eliade, Ewige Bilder und Sinnbilder, p.77.  35)Eliade, Das Heilige und das Profane, p.23.  36)Eliade, Ewige Bilder und Sinnbilder, p.77.  37)이점에서 마술적 리얼리티가 지닌 ‘현현epiphany’적 속성을 감지할 수 있다.  38)Eliade, Das Heilige und das Profane, p.23.  39)Ibid.  40)Ibid.  41)Eliade, Ewige Bilder und Sinnbilder, p.87.  42)Ibid.  43)Ibid., p.102.  44)Ibid., p.94.  45)Ibid., p.92.  46)Ibid., p.97.  47)Ibid., p.94.  48)Ibid.  49)Ibid., p.88.

    5. 결론: 마술로서의 영화

    요컨대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사건들은 엘리아데적 관점에서 보아 성스러운 것의 속성들을 지니며, “상반된 것들의 초월”50)로서 사실적인 것과 비사실적인 것의 융합을 일으킨다. 현실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삶을 그리는 영화들에서 인물이 맞닥뜨린 극적인 위기의 순간에 인물의 결핍과 소망을 이해하고 충족해주고자 하는 영화적 장치로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자주 사용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인물의 현실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engagement’한다.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고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공간도약이나 시간중첩을 통해 인물의 삶을 도와주려고 한다. <내적 안정>의 소녀 쟌느와 <남아있는 시간>의 청년 로맹에게 안정된 좋은 집과 넉넉히 남아있는 삶의 시간을 영화적 방식을 통해 선사해주는 이 영화양식은, 동시대 세계문화의 흐름을 함께 하며 (사실주의와 더불어) 영화사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마술로서의 영화’를 새롭게 되살리는 오늘날 영화 매체의 진심어린 자화상이다.

    50)Ibid.,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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