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통계와 국가형성

Population Statistics and State 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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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논문은 1960년대에 시행된 두 차례의 인구센서스를 통해 한국의 국가형성 과정에 접근한다. 인구센서스는 통치에 필수적인 앎의 장치이자 근대적 행정체계의 일부로서 국가형성의 중요한 요소다. 특정 시점에 완료되는 것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국가형성은 근대적 국가통계로서 인구센서스가 체계화되고 제도화되는 역사적 과정과 긴밀히 결합된다.

    1960년과 1966년의 인구센서스는 발전된 통계기법과 자료처리 기술의 도입, 통계업무를 관장하는 강력한 중앙집중적 행정기구 등 근대국가의 통치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면서 발전하였다. 이 과정은 일제 식민 지배가 남긴 잔영 위에서 미국과 국제 원조기구의 개입을 통해 전개된 것이었으며, 당시 대한민국에 가해지던 인구조절의 압력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가형성의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의 측면을 드러낸다.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하나의 완결적 정체(polity)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인구센서스는 정치적 공동체 및 그 구성원의 범주에 대한 상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에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센서스는 인구를 노동력의 차원에서 포착함으로써 경제발전 및 근대화와 인구를 결합시켰고, ʻ풍부한 인구ʼ가 아닌 정확한 계측의 차원에서 인구를 국력의 원천으로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인구센서스를 비롯한 근대적 국가통계의 확립은 ʻ읽히는ʼ 대상인 사회와 ʻ읽는ʼ 주체인 국가의 분리를 가져왔다. 국가와 독립적인 ʻ사회ʼ, 사회의 실제를 파악하고자 하는 ʻ국가ʼ를 실재적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인구센서스를 비롯한 통치화의 효과이며, 이런 점에서 인구센서스는 근대국가의 통치와 테크놀로지를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의 관계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development of South Korean population statistics that is connected to state formation, with the cases of population censuses that were implemented in the 1960s. The modern state, which is centralized, exercises coercion and has hegemony in a given territory, is not completed at a specific moment. It is formed through a continuing structural transformation. The population census is a crucial factor that constitutes a part of the modern administrative and knowledge systems necessary for government.

    Population censuses in 1960 and 1966 show the historical process in which modern governmental statistics was systemized and institutionalized. They also show the process and the characteristics of establishment as a complete polity of the Republic of Korea that experienced liberation from colonial rule, division, government establishment and the Korean War. The population began to be approached as a labor power for economic activities and recognized as the root of state power, not through the quantitative property of ‘populousness’ but through the accuracy of a ‘precise’ population.

    Contributing to bureaucratic practices of a modern state and the establishment of organizations and institutions, the population census was combined with introducing and implementing modern technology. It was deployed on the traces of colonial history and, moreover, involved with direct and indirect intervening of the West, especially the US, on which appeared the characteristics of postcolonial state formation.

  • KEYWORD

    인구 , 통계 , 센서스 , 포스트식민 국가형성 , 통치화

  • Ⅰ. 들어가며

    사회과학자들은 일상적으로 통계를 분석의 수단(means)으로 사용하지만, 그것을 분석의 대상(object)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Starr, 1987: 7). 그러나 통계는 그 자체로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현상이다. 특히 근대국가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에서 볼 때, 통계 체계와 근대국가의 등장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통계 또는 통계학(statistics)이라는 용어는 독일에서 국가(state)에 관한 사실들의 수집을 의미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계량적인 접근과 무관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계산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다(Hacking, 1990: 24). 1860년대 말에 ‘statistics’ 개념이 소개된 후 일본에서 통계(학)라는 단어가 정착하기 전까지 그 번역어로 정표/정표학(政表學), 경국학(經國學), 국세학(國勢學) 등 여러 어휘가 경합하였던 것도 그 같은 까닭에서다(박명규·서호철, 2003: 19-23). 국가학으로서의 통계학이 17-18세기 유럽의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과 결합하고, 이어 19세기 중엽 프랑스 확률론과 합류하면서 근대 통계학이 탄생하게 되었다(Irvine, Miles and Evans, 1979; Alonso and Starr, 1987; Porter, 1988, 1996; Cohen, 1999).

    통계의 등장은 국가의 실제(reality)를 묘사하는 기술적 지식(technical knowledge)이 주권자에게 긴요한 지식으로 대두하였음을 보여준다. 인구와 국부(國富)를 읽어내는 능력과 의지에 대한 요구는 역사적으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서유럽의 경우 17세기를 거치며 군주에게 필요한 덕목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푸코(Michel Foucault)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법에 관한 지식(knowledge of the law)”에서 “사물에 관한 지식(knowledge of things)”으로의 전환이었다. 17세기 초까지 주권자(the sovereign)는 근본적으로 지혜롭고 사려 깊을(wise and prudent) 것이 요구되었다. 여기서 ‘지혜로움’이란 법―그 나라의 실정법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부여된 자연법, 그리고 신(神)의 법과 명령―에 대한 앎을 뜻하며, 이러한 앎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사려 깊음’이 의미하는 바였다. 반면, 17세기부터 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 통치자에게 요구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곧 사물(things)―국가의 현실 자체―에 대한 지식으로, ‘국가에 대한 앎’을 어원으로 하는 통계(학)와 연관된다(Foucault, 2007: 273-274). 18세기말에 이르러 수를 헤아리는 것(enumeration)을 핵심적인 테크닉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강력한 국가로 생존할 수 없다는 관념이 유럽 국가들에 확고하게 뿌리내렸고(Appadurai, 1996: 117), 19세기가 되면 계수(計數)는 사회를 통제하거나 개혁하는 것과 분리불가능한 문제가 되었다(Appadurai, 1996: 126).

    통계는 근대 이전의 신민(subjects)이나 근대의 시민(citizen)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주인 인구(population) 개념의 부상과 결합되었다. 인구는 정치의 영역이 아닌 앎의 영역, 과학적 지식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사고되었고, 따라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면서도 자유주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게 만드는 독특한 개념적 도구가 되었다(백영경, 2013: 11). 일종의 역사적 구성물로서 인구 개념이 가지는 독특한 속성과 ‘국가에 대한 앎’으로서 통계가 가지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구센서스다.1) 인구센서스는 다른 직접적인 목적과 무관하게,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계수(計數)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즉 인구에 대한 지식 그 자체를 얻기 위한 장치로 등장하였다(박명규·서호철, 2003: 61-62; Appadurai 1996: 121). 근대 이전의 인구조사는 조세, 징병, 부역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과 무관한 대상―대표적으로 여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를 헤아리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인구센서스는 근대국가의 통치화(governmentalization)(Foucault, 2007: 109-110)의 핵심적 양식(modality)이 되었다. 센서스에서 드러나는 이 같은 객관성(objectivity)의 추구(Porter, 1996)는 통치화의 과정을 “탈정치화(de-politicization)”(Rose, 1991: 674)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종류의 통계를 누가 수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두가 인구의 조절 및 책임(accountability)의 기술, 그리고 집단 정체성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Gupta, 2001). 일례로 미국에서 센서스의 구축과정은 유색인종의 확대에 대한 백인의 인종적 공포와 결합되었으며(Hannah, 2000), 센서스의 집계 누락이 소수민족을 과소집계하는 문제는 최근까지도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다(전광희, 2008: 102). 통계가 집계되는 방식 또한 역사적으로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해당 국가와 사회의 성격, 역사적 경험, 국가의 행정력, 중앙정부와 지역 사이의 세력관계, 전통 및 관습 등에 따라 국가별로 서로 다른 방식의 통계제도가 정착되었다(서호철, 2007a: 15). 이 같은 차이는 한 국가 내에서도 발생했다. 가령 캐나다에서 센서스가 도입되고 시행되는 과정은 불어권(francophone) 지역과 영어권(anglophone) 지역에서 상이하게 전개되었다(Curtis, 200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통계가 가지는 이질적이고 다층적인(versatile) 속성, 통계적 실천이 권력과 맺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관계(Paik, 2007: 141)를 환기시킨다.

    통계와 통계체계, 특히 센서스의 전개에 관한 역사적 연구들은 센서스의 이러한 사회(학)적 의미에 주목해왔다(Alonso and Starr, 1987; Porter, 1988, 1996; Cohen, 1999; Hannah, 2000; Curtis, 2001). 이 연구는 통치에 필수적인 앎의 장치로서 인구센서스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지식사회학적 관심에서 출발한다. 1960년대 한국에서 인구센서스가 확립되는 과정을 통해 이 연구는 특정 시점에 완료되고 완성되는 국가 건설(state building, nation building)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국가형성(state formation)에 주목한다. 주어진 영토 내에서 중앙집중적이고 강제력을 행사하며 동시에 헤게모니를 가진 조직이 “창조”되는 일종의 “신화적인 최초의 순간”을 상정하는 경우, 이 시원적(始原的) 시대(original era)를 지난 후 전개되는 모든 활동은 국가형성과 무관한 “정책수립(policymaking)”의 차원으로 기술된다(Steinmetz, 1999: 8-9). 그러나 국가는 특정 시점에 만들어지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폭력수단의 독점적 통제, 영토권, 주권, 입헌성, 비인격적 권력, 공적 관료제, 권위와 정당성, 시민권(citizenship), 징세 등 근대국가의 고유한 속성들(Pierson, 2011)은 특정 시점에 완료되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센서스는 바로 이 같은 국가형성 과정의 중요한 요소다. 특히 인구센서스는 정치적 주체들을 확정(identifying)하고, 지식을 중앙으로 집적하며,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선택적으로 분해 가능한 ‘인구’의 범주를 만들어낸다. 또한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적 등가성(social equivalencies)을 창조해내며, 사회관계에 대한 권위 있는 재현을 만들어낸다(Curtis, 2001: 3-4, 36-38).

    그렇다면 한국에서 근대적 통계체계로서 인구센서스는 언제, 어떻게, 왜 확립되고 제도화되었으며, 이는 한국에서 전개된 근대 국가형성의 과정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 이러한 질문에 바탕하여 이 연구는 1960년대에 시행된 두 번의 인구센서스―1960년과 1966년 센서스―를 살펴본다.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하나의 국민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19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연구는 대한민국이 근대적 정체(政體, polity)로 확립되는 국가형성의 과정이 근대적 국가통계가 체계화되는 역사적 과정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1960년과 1966년 인구센서스를 통해 그 역사적 조건과 효과에 접근하고자 한다.

    1)인구통계는 인구를 일정 시점의 정지상태에서 관찰하여 파악하는 정태통계(static statistics)와 출생, 사망, 이혼, 혼인, 이동 등 그 변동요인을 파악하는 동태통계(vital statistics)로 구분된다. 생정통계(biostatistics)로 불리기도 하는 동태통계가 인구동태신고나 주민등록부 등 인구등록자료(population register)를 자료원으로 삼는 반면, 정태통계인 센서스는 주로 직접 조사에 의해 수집, 작성되어 왔다(김민경·김성수·이기재, 2000: 58-61; 권태환·김두섭, 2002: 17-22). 여러 종류의 표본조사에 대한 모집단 틀(population frame)을 제공하는 통계라는 점에서 센서스는 국가통계 체계의 핵심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현지실사에 입각한 전수(全數)조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현지실사에 의한 센서스에서 행정자료에 기반한 등록센서스(register-based census)로의 이행이 북유럽국가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포르투갈 등 여러 국가들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조순기·최은영, 2008; 전광희, 2011). 또한 2000년대 프랑스와 미국에 도입된 순환센서스(rolling census) 역시 대안적인 센서스 형태로 간주되고 있다(김민경, 2008: 43-46). 한국에서는 2015년 센서스부터 등록센서스가 시행 예정이나, 이 논문에서 다루는 범위는 한국에서 이른바 전통적 센서스(traditional census)가 확립되었던 과정에 관한 것이므로 최근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Ⅱ. 1960년대 이전의 인구통계와 인구센서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통계는 식민권력에 의해 근대적 행정체계의 일부로서 조선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의미의 통계활동이 시작된 것은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해서였다(김경중, 1987; 최봉호, 1997; 박명규·서호철, 2003; 서호철, 2007a; 유홍림·김경태, 2008). 1909년 ‘민적법’에 이어 1922년 ‘조선호적령’이 시행되면서 출생 및 사망, 혼인, 이혼 등 인구동태통계가 작성되었으며, 1937년에는 ‘조선인구동태조사규칙’이, 1942년에는 ‘기류령(寄留令)’이 제정되었다. 인구센서스 역시 식민지시기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총독부는 1920년 10월 1일에 실시하기로 되어있었던 제1회 국세조사를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취소한 후, 1925년 최초의 근대적 인구센서스가 된 간이국세조사를 시작으로 1930년 국세조사, 1935년의 간이국세조사, 1940년 국세조사를 실시하였다. 1944년에는 정례 국세조사보다 한해 앞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이 인구조사는 ‘국세 조사에 관한 법률’이 아니라 1929년에 제정된 ‘자원조사법’에 근거하여 시행된 것으로 전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센서스 중 마지막 두 차례가 된 1940년의 국세조사와 1944년 인구조사는 그 결과가 공표되지 않았다(최봉호, 1997; 박명규·서호철, 2003).

    일본이 1920년 첫 국세조사부터 “내지”와 “외지”, 즉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아우르는 “‘제국판도’ 전체에 걸친 조사”를 기획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박명규·서호철, 2003: 98).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을 일본제국의 한 지방으로, 한반도의 주민(population)을 일본 ‘국민’으로 통합하려 했고, 또 식민지 조선의 인구(population)를 근대적 방법으로 조사하고자 했다”(박명규·서호철, 2003: 63)는 점을 드러낸다. 통계청이 발간한 『한국통계발전사』는 “일제하의 인구조사는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인구조사로서의 그 기본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으며(통계청, 1992a: 296, 강조는 인용자), 역시 통계청에서 발간한 『한국의 인구 1』에도 식민지 시기 다섯 차례의 인구센서스의 주요 목적이 “노동력 착취와 경제수탈”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김민경, 2002: 26,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일제하에서 이루어진 국세조사가 식민지 ‘수탈’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되어 있었는지 이야기하기는 쉽지가 않다. 오히려 식민지기의 국세조사는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선전하고자 했던 총독부의 의지에 더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세조사는 “일대 문명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그 자체가 “일본근대국가가 직접 국민 앞에 임재하여 그들의 삶을 파악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박명규·서호철, 2003: 113). 이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식민지라는 조건 자체가, 조선에서 ‘근대적’ 통계체계와 ‘근대적’ 센서스가 총독부 측이 선전했던 그런 ‘근대’에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박명규·서호철, 2003: 128)다는 역설에 주목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근대적 인구조사로서 인구센서스의 이 같은 식민지적 조건을 변화시켰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은 15세 이상 국민을 국민 등록표에 등록시켜 집계하기 시작했고, 해외귀환 동포와 월남동포, 그리고 일본인 귀환자 수에 관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유홍림·김경태, 2008: 2-3). 이어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신생국 설계에 필요한 인적자원 파악 등” “경제재건을 위한 기본조사”의 필요에 따라 1950년 실시예정이던 총인구조사를 1년 앞당겨 1949년 5월 1일을 기해 실시하였다(통계청, 1992b: 41). 이 총인구조사는 1948년 12월 13일에 공포된 ‘제1회 총인구조사 시행령’(대통령령 제39호)과 1949년 1월 27일에 공포된 ‘인구조사법’(법률 제18호)에 근거한 것이었다. 1949년의 센서스는 “제1회 총인구조사”로 공표되었는데, 이는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다섯 차례의 센서스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루어진 총인구조사의 전사(前史)로 승인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실제로 해방과 정부수립 이후의 센서스는 식민지시기 센서스와의 완전한 단절 하에서 전개될 수 없었다. 이는 비단 1949년 총인구조사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된 문제였다. 경제기획원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1930년 국세조사 보고서 『昭和五年 朝鮮 國勢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34)를 1971년에 사진 복사판으로 재발간 하면서 그 머리말에서 “총독부 시절에 발간한 국세조사(인구센서스) 자료가 거의 소실되어 인구 통계의 연구활동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던바 당국에서는 그동안 이와 같은 자료를 구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왔”으며,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잇는 1930년 국세조사보고서(전국 및 각 도편) 전 15권을 사진 복사판으로 발간하여 이용자 여러분의 연구활동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하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과거의 자료를 정비하는데 경주 하겠으니 여러분의 많은 이용과 조언이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 마지 않”2)는다고 밝히고 있다(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71: 머리말).

    뿐만 아니라 1949년 총인구조사는 조사 대상인 인구의 범주와 관련하여 불가피한 혼란에 직면해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는 물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조선인(미군정 당시) 혹은 대한민국 국민(정부수립 후)의 범주는 적잖이 혼란스러웠다.3) 인구센서스는 특정 영토 내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범주를 규정하는 문제는 일견 ‘국민’ 개념의 곤란과 혼동에 비할 때 훨씬 단순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인구조사법’ 제1조는 “대한민국 영역 내에서 총인구 및 인구동태에 관한 조사를 행하여 시정의 기본인 자료를 작성 발표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1회 총인구조사 시행령’ 제2조는 “조사는 전조(前條) 기일[단기 4282년 5월 1일 오전 0시 현재]에 영역 내에 현재한 자를 가구단위로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물론 1949년의 센서스가 실시된 지역과 포괄한 인구는 남한에 한정되었다. 이는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그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제4조)로 하고 있는 것과 명백한 모순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1949년 총인구조사의 의미는 단순히 해방 후 최초의 센서스였다는 점에 있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식민지 시기의 인구센서스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했던 반면, 1949년 ‘제1회 총인구조사’는 그 대상 영역이 남한으로 한정된 최초의 센서스였다. 헌법의 하위법으로서 인구조사법이 대한민국의 영토에 관한 헌법 조항과 충돌하는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1949년 총인구조사는 인구와 영토, 국민의 범주 및 규정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1949년 총인구조사를 두고 “현재 지구상에 있는 문명국가로서 총인구조사를 하지 아니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읍니다”(대한민국공보처, 1949: 1)라고 한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총인구조사를 통해 근대국가의 면모와 위상을 확립해야 하는 신생국이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개념과 그 구성원의 범주는 그 자체가 문제적이었다. 이 같은 혼란은 1950년대까지 한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엇물리면서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구를 집계하는데 필요한 행정 체계 자체가 미비한 신생국의 입장에서 인구의 전수조사란 버거운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수립 후 초기의 상황은 원활한 통계활동이 이루어지기 힘든 조건이었고(통계청, 1992b: 40), 전쟁은 특히 이 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949년 총인구조사의 경우 한국전쟁으로 인해 속보자료를 제외한 일체의 자료가 소실되었다(최봉호, 1997: 14).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5년 9월 1일을 기해 ‘간이총인구조사’가 내무부 산하 지방행정기관을 동원하여 실시되었고, 인구센서스가 현재와 같은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이 1955년 간이총인구조사부터라고 서술되기도 한다(최봉호, 1997: 14). 전쟁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극심한 인구 유동으로 인해 조사의 실시계획 및 운영관리 면에서 1955년 센서스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김민경, 2002: 26), 이 조사를 통해 전국의 인구가 대략 파악되었으며 이 결과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장래인구가 추계되기도 하였다.

    2)이 논문에서 원자료를 따옴표로 직접 인용할 때에는 원자료의 맞춤법 표기를 수정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실었다.  3)해방 후 조선인 또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 규정은 미군정기인 1948년 5월 11일에 공표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군정법률 제11호)로, 실질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국적법 제정의 기초가 되었다. 미군정은 적산(敵産)의 처리와 재산권의 확립을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분명한 구분을 필요로 하였고, 1945년 10월 8일의 ‘일본인 등기’반포, 1946년 10월 23일 ‘조선성명복구령’ 이후 진행된 창씨(創氏)의 철폐 및 조선인 성명의 복구 등은 모두 이를 위한 조처였다(김성호·최명호, 2008: 97; 김수자, 2009: 116-119). 그러나 실제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이에 관한 분쟁 역시 해방 후 2년여가 지나도록 지속되었다. 따라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국적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근대적 재산권과 시민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적법 제정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는 그 과도기적 조처였다(김수자, 2009: 120-121). 정부수립 후인 같은 해 12월 20일에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국적법’(법률 제16호)을 제정하였으되, 이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의 범주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었다(김수자, 2009: 129-141). 또한 흥미로운 것은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정된 국적법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재산권과 시민권의 주체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범주를 실정법적으로 확정하는 중요한 기초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공포된 ‘조선호적령’이었다는 점이다(김성호·최명호, 2008: 97-101; 김수자, 2009: 119-120).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 이후의 정치적 주체로서 국민에 대한 규정의 근거가 식민지 시기의 법령으로 귀결하고 있다는 점도 역설적이지만, 기존의 국가질서 또는 헌정질서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민법상 호적이 공법상 국적에 선행하고 있다는 점(김성호·최명호, 2008: 102) 역시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볼 수 있다.

    Ⅲ. 1960년과 1966년 인구센서스 개관

    1960년대 이전까지 인구센서스는 일제 식민지시기에 시행된 5회의 센서스와 해방 후 1949년과 1955년 센서스 등 총 일곱 차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같은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인구의 범위나 개념상의 혼란은 불가피했다. 센서스의 ‘성공적인’ 수행은 행정 하부구조(infrastructures), 조사대상에 대한 사전적 재현(workable prior representation), 센서스의 질문 및 분석에 관한 기술(techniques)의 정교화 등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나아가 대중교육의 확산, 문자해독 및 산술 능력, 시장관계의 확산, 과학의 혜택에 대한 대중적 인식 등 사람들의 이해(understanding)와 경험, 사회관계의 표준화 같은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Curtis, 2001: 11-13). 1960년대 초 “한국 내 통계 활동의 수준은 통계조사의 객체도 정립되지 못했던 초보적인 단계나 다름이 없었”(유홍림·김경태, 2008: 9)다거나 “[통계활동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그 활동도 미미할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영향으로 여러 기관에서 산발적으로 수행되면서 체계적인 조정없이 작성”(김경중, 1987: 2)되고 있었다는 평가는 통계의 “수준”에 대한 언급 이전에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드러내는 서술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1960년에 시행된 인구주택국세조사는 “통계제도가 획기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정착되”고 “통계조사요원의 훈련을 비롯하여 전문 통계인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 “계기”(송문섭, 2001: 22)이자 “진정한 근대적인 인구센서스를 시작하는 분수령이 되었”(김민경, 2008: 27)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중요하게 평가된다. 1960년 센서스는 유엔(UN)의 세계 센서스 계획(World Census Programme)에 따라 실시된 것이기도 했다. 경제기획원이 발간한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 보고서는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가 “우리의 역사상 최대규모의 것”으로 “우리나라의 국세조사를 본 궤도에 올려 놓”았으며 “지금까지의 어느 조사보다도 조사사항, 집계, 결과표등이 모두 우리 나라로서는 처음이며 또 가장 큰 정성과 노력을 경주한 대규모의 조사”라고 역설하고 있다(경제기획원, 1963: 9).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 결과는 1961년 4월 27일에 『국세조사결과인구수속보』, 1961년 6월 27일에 『국세조사결과주택수속보』, 1961년 7월 16일에 『인구주택국세조사속보』로 공표되었고, 자료처리가 전부 완료된 후 1963년에는 『인구주택국세조사보고』 전국편과 특별시 및 각도별로 1차분과 2차분이 나누어 공표되었다.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부터 당시 대부분의 국가에서와 같이 현주(現住, de facto) 인구가 아닌 상주(常住, de jure) 인구를 적용하여 조사하기 시작했다(김민경, 2002: 27-28).4) 뿐만 아니라 조사원면접을 통한 조사방법이 처음 시작된 것이 1960년 센서스였다. 식민지 시기의 센서스는 가구주(또는 조사원이 지정한 가구원)가 소속가구원에 관한 사항을 신고서(조사표)에 기재하는 자기기입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공무원이나 공공단체 직원 등으로 구성된 조사원은 신고서(조사표)를 배부, 수집하고 검사, 정리, 제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보수를 받지 않는 명예직이었다. 1949년과 1955년 센서스 역시 자기기입방법을 따랐고, 조사원이 신고서(조사표)를 작성하는 경우 신고의무자 성명 아래 “대서(代書)”라고 기재하게 되어있었다(김민경, 2002: 33). 이와 같이 이전까지의 센서스가 조사대상자가 직접 항목을 기입하는 자계식이었던 반면, 1960년 센서스부터 조사원이 질문하고 응답을 기입하는 타계식 조사가 시작되었다(김태헌, 1997: 31).

    1960년 센서스에서는 또한 주택조사가 처음으로 포함되었고, 집계단계에 20%의 표본집계방법이 도입되었으며, 총조사의 정확도를 평가하기 위한 사후조사(post enumeration survey, PES)가 실시되었다(김민경, 2002: 28). 주택부문 조사를 포함하게 되면서 조사항목 역시 증가했는데, 가구에 관한 8개항, 취학여부, 교육정도에 관한 3개항, 경제활동에 관한 문항 등 18개항으로 된 인구 관련 조사항목과 주택에 관한 18개 문항을 포함, 전체 조사 항목은 총 36개항으로 이루어졌다(<표 1> 참조).

    1966년 인구센서스는 원래 1965년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예산 문제로 1년 연기되어 1966년 10월 1일을 기준으로 실시되었다. 예산 문제로 인해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 당시 약 6만개에 달했던 조사구를 3만 9천개 수준으로 줄여 시행하였으며(경제기획원, 1968: 2), 전체 항목을 전수조사하지 못하고 총 14개 문항 중 6개 항목에 대해 전체 조사구의 10%를 표본조사하였다. 표본조사는 예산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발전된 통계기법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1966년 센서스의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되었다. 1966년 센서스에 관한 보고서는 “이번에 실시된 센서스는 기본항목은 전수조사로 기타항목 특히 경제활동현황에 관해서는 표본조사를 하였다는 것이 그 특성”이며, 따라서 “이용자 제위께서는 조사의 개요 및 표본추출방법 등을 충분히 이해하신 다음에 이용하시기”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경제기획원, 1968: 머리말). 조사 결과는 1967년 2월에 『인구센서스속보』를 간행한 후 1968년에 전국편과 특별시, 각도별 『인구센서스보고』로 공표되었으며, 1970년에는 『1966년 인구센서스 종합분석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예산 문제로 조사문항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동태통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년간 출생아수’를 처음으로 조사했으며(김민경, 2008: 40), 인구동태 자료를 위해 사후조사(PES)로 인구 특별조사(Special Demographic Survey)를 실시하였다(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70: 8).

    연령보고 방식의 변화는 1966년 센서스의 중요한 특징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의 센서스는 호적 나이나 ‘만’ 나이 개념을 사용하였으며 연령 계산은 거의 음력 개념을 따르고 있었다(김태헌, 1997: 35; 권태환·김두섭, 2002: 29-30). 1960년 센서스에서는 한국의 연령계산 방법인 ‘세는 나이’를 사용하였으며(김민경, 2000: 126-127; 김민경, 2002: 28), 1세와 2세의 유아에 한해 생년월일을 기입하도록 하였다. 반면 1966년 센서스는 세는 나이와 출생년월일, 사용 달력(양력/음력), 띠를 모두 조사하였다. 이러한 연령보고 방식의 변화는 196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연령자료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확한 나이와 생년월일을 파악하는 것은 인구에 대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상상의 기술(techniques)이며, 따라서 개인의 생애사와 시간의 경과를 교차시켜 기록하는 서로 다른 양식과 방법들은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Gupta, 2001: 86). 이전까지 평범한 사람들이 나이를 세던 평범한 방식은 “세계 어느 국가와도 다른 독특한 연령 계산방법”이자 “정확한 연령”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문제적인 습성으로 인식되었고, 양력과 음력을 혼용하는 나이 계산의 관습 역시 통계자료의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한국의 연령 계산방법은 “외국 자료와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시되었다(김민경, 2000: 126). 반면 서구의 그레고리안 양력은 1년의 길이가 다양하고 편차가 많은 음력에 비해 365-366일로 일정하여 인구분석에 유용한 것으로 서술되었다(권태환·김두섭, 2002: 29). 1966년 센서스에서 나타난 연령보고 방식의 변화는 연령자료의 정확성을 증대시켰다고 평가되지만(김민경, 2000: 127), 엄밀히 말해서 정확성(accuracy)이라는 개념은 센서스의 대상(실재)와 그 결과물(재현) 사이의 상응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구를 관찰 가능한 자명한 대상이자 경험적 실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는 선험적 실재나 객관적 대상이라기보다 사회적 관찰을 조직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Curtis, 2001: 24-35).

    1960년과 1966년 센서스의 명칭 역시 흥미로운 요소다. 해방 후 처음 실시된 1949년의 총인구조사가 식민지시기에 사용되던 ‘국세조사’ 대신 ‘총인구조사’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식민지 시기와의 단절을 표방했다면, 1955년까지 두 차례 센서스에 사용된 ‘총인구조사’라는 이 명칭은 1960년 센서스에 와서 일제시대의 ‘국세조사’라는 명칭으로 다시 바뀐다. ‘국세조사’라는 명칭은 1960년 센서스에 한하였고 1966년 센서스는 다시 ‘인구센서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었지만, 1966년 센서스를 앞두고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하고 공보부 제공으로 배포한 센서스 홍보영상 『인구 센서스―총인구조사』에서 1966년 인구센서스는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맞는” 센서스로 지칭된다(국립영화제작소, 1966). 1949년 센서스 명칭이 ‘제1회 총인구조사’였던 것과 비교해보자면 이는 의미심장한 변화로 읽힐 수 있다. 실제 1966년 센서스에 대한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인구조사는 이조시대인 1395년부터 1904년까지 3년간격으로 실시한 호구조사가 그 효시”였으나 “통계가 생명으로 하는 신뢰성과 효용성이 전제되고 현대적인 방법과 개념밑에 인구에 관한 여러가지 속성을 동시에 조사한 것은 1925년부터 대개 5년 간격으로 국세조사, 인구조사 또는 인구센서스등의 명칭으로 9회에 걸처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였다고 밝힘으로써(경제기획원, 1968: 2)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국세조사와의 연속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인구조사에서 ‘상주주의’가 개개인이 통상 거주하는 지역에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방법이라면, ‘현주주의’는 조사 시점에 개개인이 위치한 지역에서 조사하는 방법이다. 인구이동이 증가하고 개인의 경제활동과 정부행정이 상주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조사기간 동안 거주장소의 변동이 잦아지면서, 한국의 센서스는 유엔의 권고에 따라 상주 개념을 채택하게 되었다(김태헌, 1997: 31)

    Ⅳ. 인구센서스와 근대국가의 테크놀로지

    센서스는 근대국가의 통치와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키는 중요한 기제다. 센서스를 통해 수집되는 자료는 단순한 집계만을 위해서도 상당한 기술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술적인 자료처리의 능력은 센서스의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단순집계를 넘어서는 분석이 요구되고 특히 자료 활용의 시기가 중요해지면서 자료처리의 기술이 주요한 문제로 부상하였고(통계청, 1992b: 55), 1960년대 인구센서스는 해외 원조기구의 지원하에 당시의 발전된 테크놀로지를 국내에 도입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1960년 센서스 자료 처리를 위해 미국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의 전신인 미국 대외원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의 후원으로 IBM사의 펀치카드시스템(Punch Card System, PCS)이 1961년 3월에 도입되었는데, 이 펀치카드시스템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전산처리 방식”으로서 “자료처리기간의 단축과 더불어 각 분야의 통계분석이 시도”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406).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에 대한 보고서는 이 조사가 인구 및 주택 부문에 걸쳐 역대 최대 규모인 36개 조사항목에 관한 조사를 실시했다는 점과 함께, “전자계산기5)(IBM)를 갖고도 주야교대하여 2년6개월이라는 집계기간이 소요”될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처리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입이 “집계과정의 기계화”(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63: 9)를 통해 소요기간을 “종전의 예에 비추어 최소로 단축”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63: 머리말).

    그러나 통계청이 약 30년 후에 발간한 『한국통계발전사』는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의 펀치카드시스템(PCS)이 계산시간을 단축하는 것일 뿐 “계산능력의 차원에서는 수집계(手集計)와 다름이 없었”다고 평가하면서, 자료의 분석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자료처리의 속도와 능력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온 것은 1966년 인구센서스의 자료처리를 위해 도입된 컴퓨터였다고 었다고 강조한다(통계청, 1992b: 55). 한국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진 IBM 14016)은 실제로 1966년 인구센서스 자료의 처리를 위해 1967년 4월에 도입되었으며, 설치하는 데만 약 3개월이 소요된 후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967년 6월 24일 낮 12시 30분부터 가동되었다. 컴퓨터의 도입은 “인구센서스 발전사 뿐만아니라 컴퓨터 발전사에도 커다란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고 서술된다(김민경, 2002: 28). 1966년 센서스에 관한 경제기획원의 여러 간행물들은 이전까지 센서스가 제대로 분석되지 못했으며 “이를 종합분석하여 다각적으로 이용하지 못하였음은 심히 애석한 일이었”다고 평하면서(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70: 머리말), 1966년 센서스는 “최신형의 전자계산기(IBM1401형)를 도입, 자료처리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하였”으며(경제기획원, 1968: 머리말), “결과 표의 항목을 한층 풍부” 하였음을 역설하고 있다(경제기획원, 1968: 2). 「동아일보」는 1966년 인구조사 결과를 완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450명의 인력과 14년 반의 시간이 걸리는데, 컴퓨터의 도입으로 시간을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7)

    센서스는 이와 같이 방대한 자료를 처리하기 위한 테크놀로지와 결합되었으며, 그럼으로써 그 자체가 과학과 기술, 문명의 발전을 전시하는 장이 되었다. 1966년 센서스에 관한 홍보동영상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국가 정책은 세분화되고 기술적이며 과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 센서스를 위해 정부가 “막대한 예산과 수많은 인원을 동원”한 것은 물론 “학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를 망라”하여 “세심한 연구와 검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총인구조사의 결과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최신 전자식 통계기계를 추가 도입”했다는 말과 함께 IBM의 각종 기기를 화면에 비추어 보여주고, “인구센서스의 결과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전자계산기에 의해서 집계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국립영화제작소, 1966).

    인구의 공간성 역시 인구센서스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논하는데 있어 주목해야 할 요소다. 센서스를 수행하는데 있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가의 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자료를 지리적 영역과 얼마나 잘 연결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자료 수집과 처리를 위해서는 거처를 공간단위에 할당하고, 할당된 지역을 집계단위로 분류하는 기본적인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조사원(enumerator)들이 가구방문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조사의 중복과 누락을 피하기 위해 조사원들의 업무 할당을 지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김감영·최은영, 2011: 54-55). 따라서 인구센서스의 첫 단계는 조사구(enumeration district)를 설정하여 조사원의 담당 조사구역을 명백히 하고 전국을 일정한 구역으로 분할하는 작업인데, 이를 위해서는 전국의 상세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김민경, 2008: 29). 1960년 당시 조사구는 약 67,000여 개에 달했고, 조사원의 수는 전국적으로 약 10만 명에 달했다. 1966년 센서스에서는 예산 문제로 인해 조사구가 39,000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지방 공무원이나 통장, 반장 등을 활용했던 과거 센서스와 달리 행정조직과 무관한 일반 조사원을 채용하여 조사요령서(manual)를 활용한 “과학적인 훈련”을 실시했고(김민경, 2000: 33), 이렇게 채용된 연인원 4,650여명이 각 시·동, 읍면 단위까지 세밀하게 알 수 있는 3,776매의 지도를 만들어 조사구를 설정하여 센서스를 준비했다(국립영화제작소, 19608), 1966; 통계청, 1992b: 53). 이처럼 센서스를 통해 전국(the country)을 수량적으로 순차화된 단위(numerically sequential units) 안에 배치함으로써 생겨나는 행정적 공간은 국가의 영토라는 물리적 공간과 매우 유사하면서도, 이를 행정적으로 적절한 형태로 재조직화한 결과물이다(Curtis, 2001: 306).

    센서스를 비롯한 각종 통계의 발전은 공적인 관료적 질서와 기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통계의 수집이 만들어낸 관료적 기구(machinery)들은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근대 국가권력의 테크놀로지의 일부가 되었다(Hacking, 1991: 184). 1961년 5월 경제기획원의 설립 직후인 1961년 7월에 내무부 산하의 통계국이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었고(안정용·이은정, 2005), 1962년 1월 15일에는 통계에 관한 기본법령으로 ‘통계법’(법률 제980호)이 제정되어 이전까지 각 기관이 분산적으로 수행해온 통계업무를 조정,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권한을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부여하였다.9) 이것은 경제기획원 산하의 조사통계국을 통계의 생산만이 아니라 국내의 모든 통계활동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체계화하는 기관으로 만드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였다. 1963년 12월에는 조사통계국이 “통계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기획원의 외국(外局)으로 독립하였고(김경중, 1987: 2), 이후 1991년 1월에 통계청으로 격상되기까지 30년간 통계활동은 경제기획원 산하에서 이루어졌다(<표 2> 참조). 인구센서스 역시 해당 시기별로 1949년 센서스는 공보처 통계국, 1955년과 1960년 센서스는 내무부 통계국, 1966년부터 1990년 센서스까지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실시하였다(김민경, 2002: 29),

    통계는 계산하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관료주의적 실천이 국가의 실천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게 했으며, 관료주의적 통치, 국가적 상상력의 영역 속에 수(數)의 관념이 깊이 침투하도록 만들었다(Appadurai, 1996: 117). 19세기에 프로이센에서 최초의 독자적인 통계기구가 출범하던 당시, 국가에 관한 모든 자료의 완전한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의 존재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하며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같은 정부기구는 이내 근대국가의 행정체계에 주요한 요소로 확산되었다. 통계자료의 출간이 중앙에서 관리되기 시작했고, 다른 모든 부처들의 업무를 묶기 위한 별도의 통계 기구가 설립되었다. 수치 그 자체에만 전념하는 중앙부서의 존재는 특별한 유형의 지식, 새로운 유형의 기술, 계량화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는 새로운 종류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관료, 새로운 종류의 권한, 새로운 유형의 권위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Hacking, 1990: 29-33). 한국에서 인구통계, 특히 센서스가 근대국가의 기술 및 행정체계의 주요한 요소로 제도화되는 과정 역시 새로운 종류의 지식과 기술, 새로운 유형의 전문가와 관료집단, 새로운 권한과 권위가 등장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일제 식민지배의 종식 ‘이후’ 전개된 이른바 포스트식민(postcolonial)10)의 조건, 다시 말해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는 일종의 식민성의 조건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5)‘전자계산기’는 전산처리장치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으며, 본문에서 살펴본 펀치카드시스템(PCS)나 컴퓨터(IBM 1401) 모두 당시에는 전자계산기로 지칭되었다.  6)IBM 1401은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는 2세대 컴퓨터로, 당시 최신 모델이 아니었으나 신형인 IBMS/370이 주문 후 1년 반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먼저 도입되어 인구통계 자료를 처리하는데 이용되었다(김중태, 2009). IBM 1401이 국내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1960년 센서스 분석을 위해 1961년 3월에 도입한 IBM사의 PCS를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한 1961년 일본 후지쯔가 개발한 파콤(FACOM) 222의 통관허가일은 1967년 5월 12일로, IBM 1401과 17일 간격을 두고 있었다(서현진, 1997).  7)「동아일보」 1967년 6월 24일자. “IBM 電子 計算機 등장기획원에서 처음으로 시동”.  8)국립영화제작소는 1948년 11월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로 시작하여 1956년 2월 공보실 소속 선전국 영화과, 1960년 7월 국무원사무처 공보국 영화과를 거쳐 1961년 6월에 ‘국립영화제작소 설치법’에 따라 설립되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의 홍보영상이 제작된 시점은 국립영화제작소 설립 이전으로, 1949년에 국무총리령에 따라 설치된 ‘대한영화사’(함충범·정대훈, 2013: 189)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국가기록원이 자료의 생산기관을 ‘국립영화제작소’로 명기하고 있어 이 논문에서의 표기는 국가기록원의 것을 따랐다.  9)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를 앞두고 1959년 2월 10일에 ‘국세조사위원회규정’(대통령령 제1449호)이 제정되면서 국세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60년 11월 3일에는 ‘국세조사령’(국무원령 제91호)이 제정되었다. 1962년 1월에 ‘통계법’이 제정되고 같은 해 3월 10일에 ‘통계법시행령’(각령 제512호)과 ‘통계위원회규정’(각령 제513호)이 제정되면서 앞의 국세조사위원회 관련 규정은 폐지되었으며 대학 및 연구기관의 통계전문가로 구성된 통계위원회가 설치, 운영되었다.  10)영어 단어 ‘postcolonial’은 ‘탈식민’, ‘후기식민’,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식민’ 등으로 번역되어 왔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번역어는 ‘탈식민’이지만, 이 번역어는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decolonized’와 혼동의 우려가 있으며 접두어 ‘post’의 의미를 확연히 제한하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포스트콜로니얼’이나 ‘포스트식민’ 등 단어 전체 혹은 일부를 음차하는 번역어 역시 종종 사용되고 있다. 비록 단어의 일부를 음차하는 번역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나, 같은 이유에서 이 논문 역시 ‘postcolonial’의 번역어로 ‘탈식민’ 대신 ‘포스트식민’을 사용한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번역의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해당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영어 단어를 괄호 안에 병기하였다. 이 같은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논의로 이경원(2003: 29-30) 참조.

    Ⅴ. 1960년대 인구통계 발전의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11)

    센서스와 식민주의의 역사적 관계는 센서스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접근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요소다. 근대의 인구조사는 본국보다 식민지에서 활발히 행해진 업무였다. 1548년 페루에서, 1576년 북미의 식민지에서 스페인에 의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으며, 주기적인 근대 인구조사의 시초는 1660년대 북미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였다고 이야기된다. 1679년에는 아일랜드에서 토지와 건물, 주민, 가축에 대한 조사가 잉글랜드에 의해 실시되었고, 뉴욕과 코네티컷, 매사추세츠에서는 1698년과 1756년, 1764년에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 미국은 10년 주기 인구조사의 시행을 헌법의 첫 번째 조항에 명시함으로써 “식민지적 실천을 지속”하는 한편, 이후 제국주의적 팽창과 더불어 인구조사를 식민지로 확대해갔다. 영국의 식민지 인구조사는 인도의 통계 관료체계를 발전시켰고, 인도를 이론이나 실무 차원에서 통계의 중심지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다(Hacking, 1990: 16-17). 식민지에서의 인구통계는 제국에서와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가령 영국 식민지 캐나다의 센서스는 영국에서와 상이하게 나타났다(Curtis, 2001). 영국은 또한 인도를 통치함에 있어 18세기 영국에서 실행한 방식과도, 인도의 이전 국가들―예를 들어 방대한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 정교한 계산(counting)과 분류, 통제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던 무굴(Mughals)―과도 다른 수량화(quantification)를 전개했다(Appadurai, 1996: 115-116). 같은 제국의 식민지들이라 하더라도 다른 방식이 적용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선에서 국세조사의 내용과 성격은 달랐는데, 조선에서의 국세조사 항목은 간단했지만 대만의 경우 식민지 인구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이 반영되어 일본 본토보다 조사항목이 더 상세했다(박명규·서호철, 2003: 107-108).

    식민지배의 종식 이후에도 식민주의의 영향은 전지구적으로 “지속적인 문화적·정치적 파생 효과”를 가져왔다. 센서스를 비롯한 인구통계 역시 식민주의 이후 이른바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의 문제(Young, 2005: 26)를 내포하게 되었다. 1960년 센서스를 앞두고 1958년에 설치된 미국의 주한 통계고문단(Statistical Advisory Group) 활동은 이러한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의 차원을 잘 드러낸다. 미국 대외원조처(ICA)는 미국의 통계자문회사인 서베이스앤리서치사(Surveys & Research Corporation)와 한국 통계의 개선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동시에 이 회사가 설치·운영하는 통계고문단의 활동에 협조토록 하는 계약을 한국 정부와 체결하면서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였다. 주한통계고문단은 1958년에 설치되어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의 계획 및 준비과정에 참여하면서 각종 통계개선안을 정부에 제출하였고, 2년으로 예정되었던 기간을 5년으로 연장하면서 1963년까지 한국 통계 전반에 걸쳐 활동하였다.

    한국에서 통계의 발전과정이 1960년대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는 평가(김경중, 1987: 1)가 있을 정도로 1960년대는 통계의 질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1960년 인구센서스 결과를 기초로 1964년에 처음으로 추계인구가 작성되었으며 장단기 발전계획 수립 및 각종 경제·사회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통계업무가 경제기획원 산하에 집중되었고,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통계조사가 시작되었다(유홍림·김경태, 2008). 이 시기 통계 발전을 가져온 통계법 제정을 비롯해 통계의 집중, 통계조정 및 관리 권한 강화, 통계국 내 표본조사기법의 도입을 위한 전문 표본조사기구와 통계자료처리소의 설립, 농림통계 기구의 확대강화, 국세조사위원회의 권한 강화 및 통계위원회로의 개편, 총조사에 대한 사후조사, 각 대학 통계학과 신설 및 통계공무원 훈련 강화 등은 모두 통계고문단의 통계개선안에 따른 변화였다. 통계고문단이 한국 통계 전반에 걸쳐 평가한 내용이나 건의 사항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 보고서는 그 머리말에서 특별히 “주한미국통계고문단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는 바”(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63)임을 밝히고 있으며, 통계청이 발간한 『한국통계발전사』는 “이들[통계고문단]의 자문에 따라 조사결과는 단순한 숫적 사실을 결합한데 그치지 않고 상호간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표시하여 정부수립 후 10개년간의 국가발전의 구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통계청, 1992a: 298-299).

    1960년 11월 2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한 중간보고서에서 통계고문단은 “통계작성과 통계도표작성의 습관은 한국정부의 행정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으나” 통계훈련을 받지 못하고 이에 대해 “분별”도 없는 직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개 면사무소에서조차 연간 수백종의 통계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나 이는 “방문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채색된 통계도표”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러한 태도가 성행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일본의 통치에 의해서 얻어진 유산물임이 틀림이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통계고문단이 한국 통계의 현황을 기술하고 설명하기 위해 한국 통계의 식민지적 기원과 맥락을 지적하고 있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보고서는 “주한통계고문단은 한국통계의 역사를 세밀히 연구하지는 아니하였다”고 밝히면서도, “일본통치자들은 그들이 구득(求得)하려는 통계정보를 원했던 이유를 갖고 있었으나 그 이유를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한 한국인들에게는 대부분 설명하지 안했을 것이”며, 따라서 “아직도 한국에서 요구하고 있는 보고서가 한국인의 이익에 실제로 배치되고 또한 왜정 당시의 엄폐된 목적에 필요한 정보의 수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의 여부를 살펴 본다는것도 자미있는 일일 것”이라면서 한국 통계의 식민지적 기원과 습성을 지적하고 있다(주한통계고문단, 1960: 9, 강조는 인용자).12)

    한국 통계의 후진성과 식민지배의 유산에 대한 주한통계고문단의 지적은 근대적 통계체계의 확립과정이 포스트식민(postcolonial)의 역사적 맥락과 분리 불가능했음을 환기시킨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으나 서방국가들과 국제기구, 각종 사설재단들에 의한 식민주의적 응시는 비서구의 신생독립국들이 경험한 ‘근대화’ 궤적에 더욱 깊이 착근되었다. 특히 일본 식민지배의 후진적인 유산에 대한 ‘서구적’ 응시는 일본의 비서구 제국주의를 경험하고 이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으로서 대한민국이 처해있던 식민지적 조건의 중층성을 드러낸다. 또한 1960년대가 한국에서 인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는 시기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 인구센서스의 발전을 포스트식민(postcolonial)의 맥락에서 접근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가족계획 사업으로 대표되는 인구조절(population control)의 시도와 인구통계의 발전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국 통계에 대한 각종 지원은 인구조절을 위한 원조 프로그램과 내용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제1세계’가 주도하는 ‘제3세계’ 발전 및 근대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가족계획 사업의 핵심 지원처였던 미국 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는 미국의 저명한 인구학자들을 한국에 보내 경제기획원과 보건사회부를 적극 후원하기로 하고 한국의 인구현황을 분석했다. 서울사무소를 개소하여 인구협회의 전문가를 상주시켰으며, 인구 분야의 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포드재단(Ford Foundation) 및 록 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의 지원을 활용하여 한국인들의 유학을 후원하는 한편13) 1965년에는 서울대학교에 인구연구소(현 사회발전연구소) 설립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기획원의 인구분석 기능을 강화하도록 하고 1960년 인구센서스 자료에 대한 분석사업을 지원했으며, 인구동태신고 자료의 현황을 파악하고, 센서스자료의 신빙성을 검토하며 인구추계를 위한 기본 자료를 정비하는 등 인구통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407).

    미국 인구협회 인사인 마샬 밸포어(Marshall C. Balfour)의 한국 방문시에는 대한 가족계획협회의 핵심 인사들이었던 양재모나 방숙 등과 스튜어트 라이스(Stuart A. Rice), 벤자민 테핑(Benjamin J. Tepping) 등 주한통계고문단 인물들이 함께 회합하고 인구 관련 각종 통계의 표본 설계(sampling design)나 데이터 처리과정 등에 대하여 논했다.14) 주한통계고문단과 서베이스앤리서치사의 대표 스튜어트 라이스는 인구문제연구소 주최의 강연 등을 통해 산아제한이 긴요한 문제임을 역설했으며,15) 1964년 9월에 내한한 미국 인구협회 회장이자 저명한 인구학자 프랭크 노트스틴(Frank S. Notestein)과 통계학자 프레드릭 스테판(Frederick F. Stephan) 등 미국 인구협회 사절단은 통계국을 방문하고 한국 정부에 “통계와 인구조절(population control) 계획의 긴밀한 관계가 인구조절 계획의 성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16)

    비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 인구조절과 인구통계의 구축은 이처럼 동시적으로 전개되었다(Gupta, 2001).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에서 가족계획이 마가렛 생어(Margeret Sanger)나 매리 스톱스(Mary Stopes) 등 여성들이 주도한 출산조절운동과 우생학이 결합한 형태로 전개되었다면, 제3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 가족계획 사업은 2차 대전 이후 부흥한 신맬서스주의가 우생학 및 출산조절운동과 합류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발전 프로그램으로 확립된 결과였다(조은주, 2013: 126-127). 인구의 통제를 위해 정확한 인구의 파악이 긴요한 과제로 대두되었고, 역으로 정확한 인구집계를 위해서도 산아제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출산률과 영아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는 출생신고가 지연되고 이 같은 지연신고는 출생신고의 누락으로 이어져 “인구 동태자료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점이 강조되었고(권태환, 1997: 16), 전국적인 가족구성의 통계를 얻어 국가시책에 반영하고, 출산력 통계를 통해 가족계획을 적절히 수립하는데 인구센서스가 핵심적이라는 점이 선전되었다(국립영화제작소, 1966). 가족계획 사업의 ‘목표량제도’는 정확한 인구조사와 인구조절 사이의 연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17)

    ‘제3세계’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신생독립국들에 대한 인구학적 기술이었던 데에서 보듯, 인구는 20세기 중반 이래 서구가 비서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경유하게 되는 개념이자 이와 공명하며 비서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기제였다(조은주, 2013). 더욱이 인구폭증에 대한 이 시기의 불안은 통계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측면이 강했다. 가족계획 사업이 시작된 1962년 당시 “사업실시 이전의 현황에 관한 분석자료는 전무”(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407)하였고, “전국적인 가족계획 관련자료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결과에 의한 인구성장률 등 인구분석자료 외에는 거의 전무한 상태”(홍문식, 1998: 198)였으며, 출산력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나 전국 규모의 출산력 조사 역시 없었다는 지적(권태환, 1997)에 주목해볼 만하다. 1960년대 인구과잉에 대한 위기의식은 “단지 높은 출산율에서 기인하는 문제는 아니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출산율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백영경, 2013: 15). 인구조절을 위해 필요한 통계자료의 취약은 역설적이지만 인구과잉에 대한 불안 담론이 증가하면서 비로소 문제화된 것이었다.

    과잉인구에 대한 불안과 인구규모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인구를 체계적으로 집계하고 측정, 분석하는 실천을 낳았다. 인구에 대한 지식의 확립, 국가통계의 제도화, 그리고 과잉인구에 대한 통제는 “인구학적 타자(the demographic Other)”인 ‘제3세계’를 ‘제1세계’과 유사하게 변형시켜내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로의 일환이었다(Greenhalgh, 1996: 27). 센서스는 이미 19세기부터 이 세계를 인식 가능한 공간(knowable place)로 바꿔내기 위한 일종의 국제적인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통계국제주의(statistical internationalism)”와 연계된 것이었다(Curtis, 2001: 17-19). 이 때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란 식민주의와 분리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 같은 식민주의적 응시는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신생독립국들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도 포스트식민(postcolonial)의 변형된 조건 하에서 지속되었다.

    11)포스트식민(postcolonial)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보자면 식민주의 이후를 뜻하지만, 단순히 어떤 역사적 시기의 완결과 새로운 시기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식민(postcolonial)은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되 식민주의의 역사적 영향력이 식민 이후의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하는 용어로, 여러 문화권에서 발전해온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사상 및 실천’을 통합하는 한편(Young, 2005: 122), 특히 지식의 형성과 실천 전반에 걸쳐 식민주의가 가지는 의미와 효과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Mitchell, 2002: 7; Childs and Williams, 2004: 17). 포스트식민(postcolonial)과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등의 용어는 구별하여 사용되기도 하는데(Young, 2005: 112-113), 가령 스피박은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라는 말은 완전한 날조(bogus)이며,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가 단순한 식민주의의 연속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Spivak, 1991).  12)주한통계고문단의 여러 보고서와 간행물들은 영어로 그 원본이 작성되었으며 이에 대한 국역본을 함께 게재하고 있다. 본문의 인용문들은 모두 국역본에 따른 것이다.  13)통계자료를 분석하기 위한 전문적인 한국인 인력의 문제는 1950년대부터 외원지원 기관에 의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가령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자금으로 통계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해 수명을 외국에 연수시키는 문제가 1954년에 이미 건의되고 있었고(통계청, 1992b: 43), 미국 인구협회와 포드재단, 록펠러재단을 비롯한 기관들에 의해 통계학과 인구학, 사회학 분야의 장단기 연수 및 학위과정에 대한 지원이 수십 년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407).  14)록펠러 아카이브 센터(Rockefeller Archive Center)가 소장하고 있는 마샬 밸포어의 일기에 이 같은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MCB Diary, November 9, 1962, Rockefeller Archive Center, PC Acc.2 FC, Box 108, Folder 1037.  15)「조선일보」. 1960.3.29. “적절한 산아제한이 긴요―라이스 박사 강연회에서.”  16)“U.S. Population Group Praises Local Bureau,” The Korean Republic. 1964.9.9.  17)한국 가족계획 사업의 특징적인 제도 중 하나인 목표량제도는 1964년 도입되어 매년 피임방법별 목표량을 정하여 각 지역 보건소 단위로 사업목표량을 배정한 후 이를 다시 가족계획요원별로 할당하는 제도로,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손애리, 2000; 배은경, 2012). 이 목표량제도에서 각 시도 단위와 보건소, 읍면동 단위의 가족계획 계몽원에 걸쳐 피임방법별 목표량을 배정하는 기준이 바로 인구센서스 자료였다. 1960년 인구센서스 자료에 따라 가족계획 사업의 대상 부인 수가 추정되었고, 이를 토대로 피임에 대한 수요가 ‘추정’되었다. 이 목표량은 예산확보와 사업진도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되므로 일선 보건소나 가족계획요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 인구센서스 자료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실제 가임 부인 수와 목표량이 불일치한 채 주어진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게 피임술이 보급되었고, 그 결과 피임술의 부작용과 피임 중단율을 비롯한 문제가 극대화된 것으로 평가되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182-183).

    Ⅵ. 인구센서스와 국가형성

    인구를 측정하는 것은 기술적 차원에서 인구의 수를 세는 계수(計數)의 테크놀로지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범주의 인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하고 사유하는 심성(mentality) 혹은 습성(habit)은 인구의 측정, 특히 인구센서스의 전제이자 그 효과다. 그 공동체란 바로 근대국가이며, 따라서 인구를 계수하는 장치로서 근대적 인구조사, 특히 센서스는 근대국가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확한 인구를 측정하고 이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을 그가 속한 주소지에서 똑같이 한 사람으로 헤아리는 관념, 인간 개인을 대체가능한 추상적 노동력으로 파악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필요하다.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국민’의 형성을 가로막는 전근대적 사회제도들이 사라져야 하며, 국가가 직접 ‘국민’ 개개인의 삶을 포착하고 그것을 전국적 수준에서 통합해야 한다는 관념과 이를 반영하여 시행하는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요구된다(박명규·서호철, 2003: 63; 서호철, 2007a: 20; Curtis, 2001: 11-13).

    이런 점에서 1960년대의 인구센서스는 국가형성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시행된 1949년과 1955년 두 차례의 센서스는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을 깊이 반영하고 있었다. 정부가 수립되기는 했으되 대한민국은 하나의 완결된 정체(polity)로 사고되고 있지 못했는데,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인구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이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양차대전 후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과 사설 재단들은 제3세계 신생독립국의 국가적 인구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으며(조은주, 2013: 125-129), 그 영향 하에서 미국 유학을 마친 엘리트들이 이승만 정권시기에 가족계획의 국책화를 수차례 건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건의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106-107;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한국가족계획십년사편찬위원회, 1975). 오히려 식민지 시기 시작된 다산(多産)에 대한 표창(소현숙, 2000)이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계속되었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357). 이런 점에서, 당시 이승만이 산아제한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점은 뜻밖의 사실로 여겨진다. 그는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은 나라의 살림살이를 위해서도 안되는, 수치로운 일”이며 가족계획에 대하여 “나도 대찬성”이라는 분명한 견해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뭐든지 시기가 있는 법”이라면서 “머지 않아 남북이 하나로 되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인구가 줄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김학묵, 1991: 350; 윤석우, 1991: 357).

    이것은 이승만이 가졌던 인구에 대한 관점이 그가 재임기간 내내 상상했던 정치적 공동체와 분리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에게 있어 남북의 통일과 뒤이은 총선거는 그에게 줄곧 ‘임박한 현실’이었다. 그가 상정한 궁극적 정치공동체 역시 남북이 통일된 정체(polity)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북한에 대한 남한의 입장은 완전히 전환된다. 박정희에게 대한민국은 유일한 국가였으며, 남한은 이제 통일 후의 총선거가 아니라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통해 북한을 압도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구의 수적 우세는 그 정치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Paik, 2010: 54-59; 조은주, 2012: 37-38; 백영경, 2013: 17).

    물론 이 같은 전환이 일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남한을 완결된 정체로 사유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경제적 이유에서 인구조절에 반대하는 입장이 여전히 존재했다. 1961년에 가족계획 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의결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도,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며 특히 남한 군대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가족계획에 반대하는 견해가 있었다(Donaldson, 1981: 227). 또한 연소자 인구의 사망률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인구 증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노동력인구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산적인 노동력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산아제한에 반대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이선환, 1961).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의 가능성이나 경제발전의 잠재적 장애물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현재의 정체―대한민국―를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곧 도래할 통일이나 총선거를 대비하여 인구조절을 반대한 이전의 시각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인구에 대한 인식과 사유는 이처럼 정치적 공동체 및 정체에 대한 관념, 상상, 정치적 실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근대적 인구조사가 인구의 개념을 ‘국민’이나 ‘민족’의 관념과 결합시킨다는 점(板垣龍太, 2002)은 인구센서스의 대대적인 홍보와 선전을 통해 생산되는 담론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국세조사가 근대국가로서의 일본의 위상을 선전하는 장이었듯이(박명규·서호철, 2003: 63), 정부 수립 이후의 인구센서스는 새롭게 건설된 독립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선전하고, 이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그 구성원됨(membership)을 확인시키는 장이었다. 특히 인구의 중요성의 차원이 시기적으로 변화해가는 양상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표 3>의 1949년 센서스 표어들은 “번성하는 인구”나 “인구수는 국력” 등 인구의 수를 국력과 연결시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 사유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1960년대 센서스에서는 “번성”하는 풍부한 인구에 대한 강조는 사라지고 인구의 정확한 파악과 집계가 본격적으로 부각된다. 1966년 센서스 표어는 1949년과 달리 누락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인구조사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확한 인구조사”가 “경제개발”과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정확한 인구조사”와 “경제개발”의 결합은 1960년대를 거치며 인구에 대한 사유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1963년에 발간된 1960년 센서스에 관한 보고서는 이 센서스가 “인구의 자연적 속성 및 사회적 속성은 물론, 인구의 통계적 속성과 아울러 주택에 관한 사항까지 포함하여 조사하였으며 특히 직업과 산업의 명확한 구분이라던가 경제활동력(노동력)이란 개념의 채택 등은 경제적 속성을 조사하는데 있어 하나의 전기점(轉機點)이 될 것”(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63: 9)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인구가 그 “자연적 속성”이나 “사회적 속성”에 더해 “경제적 속성”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집계된 것이 1960년 센서스부터이며, 이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직업과 산업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졌고, 인구가 명시적으로 “경제활동력(노동력)”의 차원에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인구에 대한 사유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통계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연관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함께 통계는 경제발전의 전제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수정되는 과정에서 애초의 계획이 가지는 문제점으로 “통계자료의 미비와 계획작성기법의 미숙”이 지적되었으며, “경제발전의 추진에 있어 계획과 실정평가 및 통계 간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통계를 개선발전시켜 합리적 토대 위에서 개발행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인식, 당시의 통계자료가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개발행정”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통계청, 1992b: 47-48). “센서스의 근본목적” 역시 “국가가 요구하는 통계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이 국가의 종합적 계획 즉 경제, 사회 및 보건 등의 제반 정책결정의 기본자료와 기타 인구에 관한 다각적인 연구자료로서 이용코자 하는데 잇는 것”(경제기획원, 1968: 머리말)으로 이야기되었으며, “총인구조사로 지금까지 발전해온 산업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보다 더 확실한 경제개발정책을 수립해서 조국근대화의 조속한 성취를 꾀할 수 있는 것”(국립영화제작소, 1966)이라고 선전되었다.

    센서스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총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식량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하며, 문맹퇴치를 위해 “문맹자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의무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할 어린이들의 실태”를 알기 위한 것으로, 공공시설의 확충, 실업자 수의 파악,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고 홍보되었다(국립영화제작소, 1960). 또한 식량이나 주택, 교육, 실업정책 뿐만 아니라 선거구의 법정인을 확정해서 선거인의 수를 정하고, 전국적인 가족구성의 통계를 얻어 국가시책에 반영하며, 출산력 통계를 통해 가족계획을 적절히 수립하고, 도시계획과 상하수도 시설 확장, 교통난 해소, 보건향상을 위한 공공복지시설과 공공의료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선전되었다(국립영화제작소, 1966). 인구통계는 “국가 업무 수행에나 사회 활동을 위해 필요한 기본 자료”이자 “국가의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일반 활동, 수도, 교통, 통신시설이나 도로, 학교, 병원의 건설 또는 동력이나 여러 자원의 개발 등의 장기 혹은 단기 계획을 수립하는데”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70: 27).

    이것은 경제발전과 근대화가 가져올 청사진 그 자체였다. 인구센서스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튼튼하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튼튼한 토전”에 비유되었다. “통계야말로 나라 문명의 정도를 헤아리는 척도”(국립영화제작소, 1960)이며, “모든 국가의 시책은 통계로 이루어지고, 이러한 통계는 기본통계가 되는 인구조사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되었다(국립영화제작소, 1966). “한국 경제가 날로 발전함에 따라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들의 행정이나 경영을 합리화하고 개량화”하기 위하여 “모든 부문에서 가장 필요한 기본 자료”인 인구통계자료의 “수요가 격증”하고 있음이 강조되었으며(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70: 머리말), “기획과 통계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합리적” 개발행정을 위해서는 “통계의 개선발전”이 필요하다는 인식(김경중, 1987: 2)이 1960년대를 거치면서 부상하였다.

    이와 같은 통계와 발전의 결합은 새로운 사유의 스타일(the style of reasoning)(Hacking, 1990), 새로운 에토스를 불러일으켰다. 인구, 출생, 사망, 질병을 집계하는 것은 통치의 표현과 정당화에 본질적인 것이 되었으며(Rose, 1991: 673-674), 연령분포, 직업, 출산율, 문맹률, 자산소유권, 준법성 등 인구통계 지식의 생산은 국가관료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인구의 특징을 기술하도록 만들어주었다(Hacking, 1991). 이와 같이 인구의 가독성(legibility)(Scott, 1998)18)을 높이기 위한 표준적인 인식의 격자(grid)들이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국가의 하부구조적 권력(infrastructural power)(Mann, 2012: 59)이 증대되었다. 인간과 인간활동에 대한 근대적 범주들이 대부분 숫자 데이터를 수집하는 시도에 의해 만들어졌듯이(Hacking, 1991), 산업이나 직업, 행정구역 등의 통계적 분류가 체계화되고 표준화됨에 따라 직업이나 산업, 공간 등에 대한 관념이 점차 일관성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과정은 결코 독립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양차대전 후의 복구과정과 제3세계 신생독립국들의 대거 등장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통계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1960년 2월 5일에 한국에서 제정, 시행된 ‘국제통계연구위원회규정’(내무부령 제66호)은 ‘국제통계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통계자료에 대한 해외의 요청이나 통계자료의 국제적 교환 및 국제비교나 국제적 표준분류 기준에 관한 사항 등을 다루도록 하였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인 통계업무가 긴요해지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특히 ‘국제통계연구위원회규정’이 통계에 관한 기본법령인 ‘통계법’이나 ‘통계위원회규정’에 2년이나 앞서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신생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통계활동이 이른바 “통계국제주의(statistical internationalism)”(Curtis, 2001: 17-19)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공통의 인식의 격자 역시 단지 국민국가 내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1963년에 처음 제정된 표준직업분류는 국제노동기구(ILO)의 국제표준직업분류(International Standard Classifications of Occupation: ISCO)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김민경·김성수·이기재, 2000: 50-51). 1958년에 유엔은 센서스자료의 국가 간 비교성을 높이기 위해 「1960년 인구주택센서스 실시에 관한 원칙과 권고」를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이후 10년마다 각종 용어의 개념과 정의, 조사방법, 조사항목 등에 대한 원칙과 기준에 관한 권고안을 마련하여 각국에서 적용하도록 하였다(김민경, 2000: 37). 한국의 1960년 센서스 역시 유엔의 세계 센서스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1966년 센서스 보고서는 “국제간의 통계비교성”이 “날로 점고(漸高)하는 통계자료의 이용”과 함께 센서스의 중요성을 가져오는 요인임을 명시하고 있다(경제기획원, 1968: 머리말).

    결국 국민국가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공통의 인식의 격자는 국민국가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근대 국가 규범의 확산과 조응하면서, 그 동형화(isomorphism)의 압력에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고 또한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한통계고문단이 한국통계의 개선책에 관한 건의서에서 대한민국이 “현대국가로서 세계의 국가가족의 일원으로 참여할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통계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주한통계고문단, 1960: 머리말)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통계가 국가를 구성하는 힘을 해독하는 원칙이라고 할 때, 이 때 통계를 통해 해독되는 것은 자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인구, 군대, 자원, 생산, 통상, 통화 순환이기도 하다. 국가에 관한 국가의 지식(the state’s knowledge of the state)으로서 통계는 자국에 관한 지식이면서 또한 다른 국가에 관한 지식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이런 점에서 통계란 자국과 타국에 관한 서로 다른 기술적 집합들(technological assemblages)의 접합점(hinge)이라고 할 수 있다(Foucault, 2007: 315).

    이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역할은 매우 핵심적이었으되, 인구조절과 경제 개발 계획, 통계발전 전반에 걸쳐 확인되는 이들의 영향력은 단지 외인(外因)의 차원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가 인구를 경유해 인식하는 비서구 세계의 상(象)은 비서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양식과 공명하였으며(조은주, 2013), 이러한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의 문제는 인구센서스 발전과 결합된 국가형성 과정에 긴요하게 내장되어 있었다.

    18)스캇(Scott, 1998)은 국가능력의 출발점이 국가가 사회를 ‘읽는’ 것에 있으며, 사회의 가독성을 증진시키는 것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단순화(simplification)가 근대 국가의 통치술의 핵심 문제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근대 국가에서 정교하게 발전한 통치의 기술에 대한 대단히 단순한 평가이며, 특히 이 같은 가독성과 단순화의 시도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고 보는 스캇의 견해는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무엇보다도 ‘사회’를 ‘읽기’ 위해 가독성을 높이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가독성의 부상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현상이 국가형성의 효과를 낳는다고 보는 이 연구의 관점과 상반된다.

    Ⅶ. 맺음말

    다른 모든 지식체계와 마찬가지로 통계 역시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다. 통계는 근대 국가와 함께 등장한 통치의 양식과 결합하여 발전하였으며, 인구센서스는 이 같은 통계의 속성과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근대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통치에 필요한 덕목은 지혜로움이나 사려 깊음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에 있다고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며, 통치 대상이 되는 인구의 정확한 계수(enumeration)는 근대 국가의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사회에 대한 지식이 더 많은, 그리고 더욱 정확한 통계적 사실(자료)의 수집을 통해 확보되리라는 것은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근대의 특유한 사유방식이었다(Hacking, 1990). 더욱이 당대의 국가적, 정치적 사안에 대한 기술이었던 통계를 통해 대량적 사회현상의 규칙에 주목하는 것은 19세기에 사회학이 탄생한 중요한 한 뿌리이기도 했다(서호철, 2007b: 285).

    이 연구는 1960년대 한국에서 인구센서스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국가형성과 그 특징에 접근하였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두 차례의 인구센서스는 발전된 통계기법과 방대한 자료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테크놀로지의 도입, 센서스를 비롯해 통계업무를 관장하는 강력한 중앙집중적 행정기구 등 이전과는 새로운 종류의 질서 및 기술과 결합되어 있었다. 통계기법 및 통계학, 발전된 컴퓨터 테크놀로지, 통계업무의 중앙집중화를 위한 행정체계의 도입 등 이 모든 요소들은 일제 식민 지배가 남긴 잔영 위에서 미국과 국제 원조기구의 영향 하에 전개된 것이었다. 1960년대 인구센서스를 비롯한 통계의 발전이 당시 대한민국에 가해지던 인구조절의 압력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 역시 당시 인구통계 발전의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의 측면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인구의 개념은 정치적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범주가 인식되는 맥락, 정체(polity)에 대한 관념 등과 분리될 수 없다.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은 1960년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자기완결적인 정체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인구의 정치적 의미 역시 ‘더 많은 인구’, ‘풍부한 인구’를 국력의 원천으로 간주하던 것에서 ‘정확하게 파악되는 인구’가 국가의 근간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1960년대 센서스를 통해 인구는 자연적, 사회적 속성에 더해 경제적 속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간주되게 되었으며 경제활동과 노동력의 차원에서 포착되었다. 이로써 경제발전과 근대화는 인구의 개념이나 인구에 대한 사고와 분리불가능하게 결합되었다.

    근대국가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의 근원적인 속성이 “국가에 의한 사회의 장악(state's takeover of society)”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화”일 것이라는 지적(Foucault, 2007: 109)은 근대국가와 통계 사이의 연관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국가에 의한 사회의 장악”은 선재(先在)하는 실체로서 ‘국가’와 ‘사회’를 상정하지만, ‘국가’ 또는 ‘사회’를 실재적 실체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구성물이자 통치화의 효과였다. 통계의 부상은 인구를 국가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사회적 삶의 독립된 영역이자 힘이 되도록 만들었고, 인구는 그 고유의 리듬과 규칙성을 가지며 경제와 국민(nation)에 대해 고유한 효과를 행사하는 실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Gupta, 2001). 이렇게 근대국가에서 통계―특히 인구통계―의 발전은 ‘읽히는’ 대상으로서의 사회와 ‘읽는’ 주체로서의 국가의 분리를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존재하지 않던 ‘사회’를 통계학이 창조”(Jo, 2003: 814)했다는 어느 통계학자의 언급은 절묘하다. 국가와 사회의 분리, 즉 국가와 독립적인 ‘사회’와 사회의 실제를 파악하고자 하는 ‘국가’의 분리란 근대적 인구통계 체계의 확립을 가져온 맥락이면서 동시에 그 효과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통치화란 통치를 일종의 “형성(formation)”으로 보기 위한 개념이며, 권력의 형태로서 통치가 주권으로부터 분리되고, 통치의 합리성과 테크닉이 발전하고 확산되며, 통치의 실천과 합리성이 주권과 그 도구들을 변형시키고, 정치영역과 비정치영역 사이의 구별이 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Dean, 1999: 102-111). 1960년대 한국의 인구통계 발전과 결합된 국가형성의 차원들은 1960년대 이래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국가의 통치화, 나아가 통치체계의 합리화라는 미묘한 역설에 주목하도록, 그 모순에 천착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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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1925-1975년 센서스 조사항목 (인구부문)
    1925-1975년 센서스 조사항목 (인구부문)
  • [<표 2>] 해방 후 통계주무부서의 변천
    해방 후 통계주무부서의 변천
  • [<표 3>] 1949년과 1966년 인구센서스 표어
    1949년과 1966년 인구센서스 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