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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린 비글로우의 ‘자기self’ 반영적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분석*-<블루 스틸>, <웨이트 오브 워터>, <제로 다크 서티>를 중심으로- Analysis of ‘Self’- represented Female Protagonists by Kathryn Bigelow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캐스린 비글로우의 ‘자기self’ 반영적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분석*-<블루 스틸>, <웨이트 오브 워터>, <제로 다크 서티>를 중심으로-

The cinematic character is the bridge to connect audiences and stories as well as the messenger to represent the visions by a creator. In this reason, the character inevitably represents author’s present ‘ego’ or unconscious ‘self’. Kathryn Bigelow has created female protagonists who try to overcome social prejudices and hardships from their sexual identities, to follow the oedipal trajectory in action, war, crime thriller, and spy movies. In Blue Steel(1989), The Weight of Water(2000), and Zero Dark Thirty(2013), female protagonists have developed with the Bigelow’s experience through her career. Therefore, the study on the change of female protagonists in Bigelow’s films might light on how Bigelow has established her identity as a woman director in Hollywood considered as a typically male-dominated industry.

Kathryn Bigelow started with ‘Megan’ in Blue Steel to feature defiant attitudes against a patriarchal society. Megan even refuses to accept her sexual identity and longs for the masculine power symbolized by a gun, a ‘blue steel’. In The Weight of Water, ‘Jean’ appear as a woman who witnesses her ‘self-image’ through another female protagonist, ‘Maren’ through a murder case a hundred years ago. In stead of showing the resistant desire toward an androcentric system, Jean suffers from conflicts between the distorted femininity with men’s view points and her conscious denial of it. And ‘Maya’ in Zero Dark Thirty seems to ignore her sexual identity without any motive and just performs her duty with strong responsibility as an intelligence agent. Like Maya, Kathryn Bigelow had quit the predominant attitude of radical feminist, and had acknowledged her difference from other directors and tried to adopt stories and images in her own.

Eventually, Bigelow’s female protagonists have reflected her development from the stage of a ‘woman’ director to the one of a woman ‘director’. After the murder, Maren in The Weight of Water speaks in the ending, “I also prayed for myself who did not understand the vision God had given me.”Maren’s pray has continued in Begelow’s film works. Begelow already found the given vision, and now she is in the process of searching for it. This is why we expect how she will tell her ‘self-narrative’ story through her characters in her next work.

KEYWORD
Cinematic Character , Kathryn Bigelow , female protagonists , Blue Steel , The Weight of Water , Zero Dark Thirty , woman director , self-narrative
  • 1. 서론

    캐스린 비글로우(Kathryn Bigelow) 감독의 작품에 나타나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1)의 특징 중 하나는 그(녀)의 욕망이 주로 기존 체제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일탈적이며 저항적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그(녀)가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거나 고난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영화가 엘리트, 혹은 폐쇄된 그룹을 대상화하고 그들이 모두 ‘초월(transcendence)’과 ‘기쁨(exaltation)’이라는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현실도피를 하듯 사회 규범 위에서 존재하려 드는 이유에 대해 비글로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글로우의 작품 속에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는 도전과 위반을 통해 기쁨을 추구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양상을 보인다. 남성들에 비해 사회적, 도덕적 제약이 많은 여성이 프로타고니트로 등장할 경우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 강도 높은 갈등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 중 여성을 프로타고니스트로 설정한 장편 영화는 <블루 스틸>, <웨이트 오브 워터>(The Weight Of Water, 2000),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 2012) 단세 편뿐이다. 이것은 캐스린 비글로우가 할리우드에서 범죄와 액션, 전쟁영화 장르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유일한 여성감독이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비글로우는‘힘’의 대결이라는 주제를 내세워 ‘고도의 충격을 담은 영화(high impact movies)’를 추구하며, 이를 위해 폭력과 로맨스라는 장치도 적극 활용한다. 이러한 영화 장르는 일반적으로 제작과 소비의 모든 측면에서 남성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어 왔으며, 남성과 여성, 강인함과 연약함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3) 그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주로 주인공의 연인이나 악당의 정부와 같은 남자 주인공의 부속물로 설정되어 왔다.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두려운 상황에서 소리만 질러대거나 힘없이 목숨을 빼앗기는 무력한 존재, 남자 주인공에게 마땅히 보호받아야 될 존재, 그러므로 남자의 탈출이나 성공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성이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The Texas Chainsaw Massacre, 2003), <언 데드>(The Unborn, 2009) 등의 영화에서조차 여성은 관능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을 입고 사투(死鬪)하며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캐스린 비글로우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는 그녀가 주변인이든 주인공이든 남성적 장르영화의 일반적 캐릭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타자화되어 주체적인 사고와 적극적 행동이 불가능해 보였던 여성 캐릭터들은 캐스린 비글로우의 초기 영화 <블루스틸>에서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가는 ‘욕망의 화신’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는 일과 사랑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발견해가는 ‘여성 작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제로 다크 서티>에서는 남성 중심의 체제 속에서 당당하게 능력을 펼치는 ‘사회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 속에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는 가부장적 질서와 통념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메간), 그 과정에서 잠재되었던 ‘자기’를 발견하고(진Jean과 마렌Maren), 드디어 욕망을 달성하는 것이다(마야Maya).

    페미니즘 시각의 영화연구는 여성의 ‘부재’ 혹은 ‘왜곡’에서 출발해 ‘여성적 욕망의 재현’에 대한 논의로 진행되었다. 멀비(Laura Mulvey)의 영화와 관객에 대한 논의 이후,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연구자들 사이에서 여성영화나 멜로영화 같은 장르들을 대상으로 여성적 오이디푸스 궤적의 생산과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해졌다. 특히 라캉주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여성적 서사의 가능성과 여성의 오이디푸스 궤적을 적극적으로 탐색해 왔다. 도앤(Mary Anne Doane)은 주류 영화에서 여성적 욕망의 실현이 제한적으로 남성성을 매개로만 가능하며, 여성영화에서 조차 여성 정체성의 표출이 피학증적 성격을 갖게 된다고 본다. 반면, 모들스키(Tania Modleski)는 멜로영화 같은 장르가 왜곡된 여성상만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장르임을 설명하고 있다.4) 윌리암스(Linda Williams)도 주류영화 내에서 여성 주체성을 발견하는데 역점을 두면서, 멜로영화가 여성적 담론을 생산하고 모성을 통한 여성 간의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장르임을 주장한다.5)

    캐서린 비글로우는 멜로영화의 범위를 벗어나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액션과 범죄스릴러, 전쟁 및 첩보영화를 통해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가는 여성 캐릭터들을 묘사함으로써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논쟁적인 ‘평등’과 ‘차이’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비글로우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은 기존의 페미니즘 영화 연구에 차별적 시각을 제공하고, 동시대 다른 여성감독의 영화나‘칙릿(Chick-lit)’영화, 혹은 멜로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과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6) 이것은 <줄리 & 줄리아>(Julie & Julia, 2009)를 연출한 노라 애프론(Nora Ephron), <신데렐라 맨>(Cinderella Man, 2005) 의 페니 마샬(Penny Marshall), <로맨틱 홀리데이>(The Holiday, 2006)로 익숙한 낸시 마이어스(Nancy Meyers)등의 할리우드 여성감독들과 성향이 다른 비글로우의 작품서사 때문이다. 영화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를 창조하고 자기의 내면의식을 표출하는 ‘자기서사’방식의 내러티브로 작품서사를 구성한다.7) 비글로우가 다른 여성감독들의 작품과 차별화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온 것은 그녀를 지배하는 ‘자기서사’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객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끼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작가의 삶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과 경험에 의해 창조되고 변화한다. 캐스린 비글로우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 역시 감독 자신의 경험과 궤적을 같이해 변모해왔다. 그러므로 이들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비글로우가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 영화 산업 현장에서 여성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진화해 온 과정을 조명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가부장적 질서에 도전하는 여성캐릭터 창조에서 시작해 젠더(gender)와 섹스(sex)를 뛰어 넘은 듯 보이는 현실적 여성 캐릭 터를 완성하기까지 여성 정체성의 표상화와 ‘자기’반영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여성캐릭터의 변화가 영화 작가의 존재론적 가치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1)서사구조에서 스토리의 중심인물을 지칭하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주인공(focal character)은 관객의 심리를 자극하는 범위와 정도에서 차별화된 속성을 지닌다. 주인공은 스토리의 흥미진진한 진행을 위해 관객의 ‘관심’이 가장 많이 집중된 캐릭터이지만 그(녀)의 야망과 감정까지 관객의 동감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 즉, 주인공은 ‘행동과 반응으로 스크린을 지배하는 인물’이지만 관객이 감정적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Swain, Dwight V., Techniques of the Selling Writer,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65, pp. 320–323 참조) 이에 비해 프로타고니스트는 선인이건 악인이건 상관없이 그(녀)의 목적과 정서에 관객이 필연적으로 공감하도록 고안되므로 보다 특화된 종류의 주인공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비글로우의 영화에서 중심인물은 그(녀)의 욕망과 감정에 관객들이 동화되도록 창조되었다고 판단되므로 이 논문에서는 ‘주인공’ 대신 ‘프로타고니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2)Smith, Garvin, Momentum and Design: Interview with Kathryn Bigelow (1995), Kathryn Bigelow Interviews, Edited by Peter Keough, MS: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2013, p. 76 참조  3)Tasker, Yuvonne, Spectacular Bodies: Gender, Genre, and the Action Cinema,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3, p.16, p.153 참조.  4)Mulvey, Laura.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Screen, Vol. 16(3), 1975, pp.6∼18 참조; 이희승, “위의 논문”, 354쪽.  5)Williams, Linda, “Something else beside a mother: “Stella Dallas” and the maternal melodrama”, Cinema journal, 24(1), pp. 2∼27, 1984; 이희승, “위의 논문”, 354쪽 재인용.  6)‘젊은 여성(chick)’과 ‘문학(literature)의 합성어인 ‘칙릿’은 20-30대 싱글 커리어우먼의 삶과 사랑을 담은 소설을 뜻한다. 일과 사랑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성장로맨스라는 플롯, 트렌드를 반영하는 감각적 스타일, 그리고 내레이션(narration)과 수다를 통해 여성의 욕망과 자의식을 드러내는 화법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이 계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등의 영화가 여기에 속한다. 이정연, 이기형, 「‘칙릿’ 소설, 포스트페미니즘, 그리고 소자본주의 사회의 초상」,언론과 사회 17권 2호, 2009, 88-89쪽 참조.  7)문학치료학에서는 인간관계의 형성과 위기,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서사’라고 한다. 이러한 서사가 한 사람의 인생을 운영하는 것을 ‘자기서사’, 작품의 저변에 있는 것을 ‘작품서사’라 한다. 작품서사는 자기서사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자기서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정운채, 「문학치료학의 서사이론」, 『문학치료연구』9집, 한구문학치료학회, 2008, 247-278쪽 참조.

    2. 캐스린 비글로우의 ‘자기self’ 반영적 여성 캐릭터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 곧 이야기 형식으로 자기의 삶을 정리하는 동시에, 어떤 욕망과 특질을 지닌 인물로 살아가는 자기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다.8) 이처럼 인간은 각자의 삶이 있고, 그 삶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그 이야기를 운영하는 ‘자기서사’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자기서사’는 작가라는 한 인간을 통해 예술이나 문학작품 속의‘작품서사’로 나타난다. 작가는 과거에 경험한 핵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뚜렷한 개성과 욕망을 지닌 특정한 ‘화자’를 설정해 ‘작품서사’를 운영하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따라서 화자는 주네트(Gerard Genette)의 설명대로 서사구조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ideological function)을 수행하게 된다.9) 주네트는 또한 현재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 즉, ‘인식(경험)의 자아’가 과거의 ‘자기’이며, 사건을 진술하고 있는 서술적 자아는 현재의 ‘자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이때 현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체인 ‘나’는 화자(narrator)가 되고, 과거 사건을 체험하고 재현 하는 ‘나’는 ‘초점화자(focalizer)’가 되는 것이다.10) 영화에서 화자는 인식과 서술의 단일한 주체, 다시 말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진술하는 프로타고니스트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작가나 감독의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자기’를 조명해 만들어낸 ‘초점화자’이며, 작품 속 허구의 세계에서 그들을 대신해 행동하는 분신(avatar)과 같은 존재이다.

    융(Carl Gustav Jung)의 이론에 따르면‘자기(self)’는 의식과 분별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는 ‘자아(ego)’와는 달리, 이성적 사고의 경계를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융은 인간의 의식적인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응시하고 그것을 받아 들여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이라고 정의 했다.11) 오랜 시간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들을 살펴보면, 이야기를 서술하는 ‘인식의 자아’가 그 이야기를 재현하는‘무의식의 자기’와 합체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 작품서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토리 진행과 주제 진술을 담당하는 프로타고니스트는 작가나 감독의 ‘자기’와 ‘자아’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대변하기 때문에 보다 선명하게 그(녀)의‘자기’ 반영 과정을 보여준다.

    캐스린 비글로우는 첫 장편영화 <죽음의 키스>이후 <폭풍 속으로>, (K-19: The Widowmaker, 2001), <스트레인지 데이즈>(Strange Days, 1995),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2008)에 이르기까지 남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과 자신감을 보인 반면,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를 내세운 작품은 모두 세 편으로 여성을 내러티브의 주체로 내세우는데 다소 인색해 보인다. 하지만 <블루 스틸>의 메간과 그녀 이후 11년이 지나서야 등장한 <웨이트 오브 워터>의 진과 마렌, 그 후로 13년의 간극을 깨고 세상에 나온 <제로 타크 서티>의 마야를 ‘자기’ 반영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그들이 비글로우의 ‘자기실현’과정 속에서 서서히 진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의 역사는 1978년 단편영화 <셋업>(The set-up)으로 데뷔한 이래 2013년 <제로 다크 서티>까지 비글로우가 ‘성(gender)’과 ‘일(career)’이란 두 가지 과제들에서‘자기’를 찾아 가는 정체성 탐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1) <블루 스틸>의 메간 - ‘페미니스트적 자아’로서의 캐스린 비글로우

    새내기 경찰 메간(제이미 리 커티스Jamie Lee Curtis분)은 순찰 도중 강도를 사살하지만, 범인의 총이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과잉 대응을 했다는 혐의로 자격정지를 당한다. 그 후 원인모를 살인 사건들이 발생하고, 피해자들의 시체에서는 메간의 이름이 새겨진 탄피들이 발견된다. 메간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되어 궁지에 몰리고, 그동안 호감을 느껴왔던 증권 브로커 유진(Eugene, 론 실버Ron Silver 분)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결국 메간은 살인을 고백한 유진을 체포하지만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석방한다. 유진에 의해 유일한 친구 트레이시(Tracy)가 살해되고, 자신을 도와주던 동료 닉(Nick) 마저 중상을 입자, 메간은 유진을 처단하기위해 직접 나선다.

    여성과 남성의 ‘힘 싸움’이라는 과감한 성대결을 소재로 취하고 있는 <블루 스틸>은 비글로우가 독립영화 <죽음의 키스>로 주목 받은 뒤 할리우드 영화계에 진출해 처음으로 만든 장편상업영화이다. 할리 우드라는 메인스트림(mainstream)에 갓 편입한 신인감독으로서 그녀의 패기와 열정은 남달랐고, 재능과 미모, 근성까지 겸비한 젊은 여성감독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관심 또한 적지 않았다. 연륜보다 순수함이 무기였던 비글로우의 자의식은 <블루 스틸>의 작품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메간이라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말과 행동,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블루 스틸>에서 감독의 ‘자기서사’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층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12)

    따라서 <표 1>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와 주변 캐릭터들, 특정 소품의 이미지, 모호한 해피엔딩까지 두루 분석해보면 비글로우의 ‘자기’ 투사(投射)적 작품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표 1>] 메간과 캐스린 비글로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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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간과 캐스린 비글로우 비교

    먼저 영화의 제목‘블루 스틸’이 지칭하는 압도적인 소품, ‘권총’과 그것이 상징하는 ‘욕망’의 상관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권총, 즉, ‘차갑고 우울한 강철’을 의미하는 ‘블루 스틸’은 메간이 일생토록 갈망했던 남성 권력의 표지(標識)이자, 강철로 만들어져 결코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가부장적 주류세계에 대한 메간의 ‘욕망’이며, 할리우드 영화 산업, 특히, 남성 감독과 배우 위주로 정비된 ‘액션영화’를 향한 캐스린 비글로우의 ‘도전’이었다. 이들의 욕망과 도전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credit sequence)에서 유혹적으로 빛나는 권총의 클로즈업(close-up) 쇼트(shot)들로 ‘친근하고 가깝게’ 시작해,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의자 위로 떨어지는 권총의 슬로우 모션(slow motion) 풀 쇼트(full shot)로 ‘안타깝게 멀어지며’끝난다.

    ‘권총’을 주요 피사체로 사용하는 이 시퀀스들은 감독의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적인‘자기’가 동시에 투영된 주요 장면이다. 오프닝에서는 수동적인 여성의 삶을 부추기는 가부장적 관습에 공격적 태도와 방식으로 맞서는 비글로우의 ‘페미니스트(feminist)적 자아’가 남성적 힘의 증표(證票)인 권총을 합법적으로 소유한 메간의 탐닉적 시선에 투사되고 있으며, 엔딩에서는 그러한 반항이 결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감독의 회의적‘자기’가 관찰자적 시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각기 다른 스크린 사이즈(screen size)로 구성된 권총의 이미지는 비글로우의 초점화자인 메간과 감독 자신의 욕망을 상징하고, 그것을 획득하였으나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한 여성의 한계적 상황을 표현한다.

    다음으로 <블루 스틸>의 작품서사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할리우드영화의 전통적 서사구조를 따라가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창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서사는 대부분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난과 시련을 감수하고, 일과 사랑을 쟁취해 금의환향하는 영웅신화의 원형을 따른다.13)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이와 같은 영화 서사의 반복이 남성적 서사 욕망에 의한 남성 주인공의 오이디푸스 궤적(oedipal trajectory)을 따라 완성되는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밝힌다. 남자 아이는 ‘거세’의 공포를 상징하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권력을 가진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주류영화는 프로이트(Sigmund Freud)나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들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남성적 오이디푸스 궤적의 서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확대에 기여해왔다. 이때 여성은 이러한 궤적을 완수하는 주체에서 배제되고 대상화된다. 여성은 남성 주체를 돕는 보조자 역할을 하거나 이를 방해하는 팜므파탈(femme fatal)로 전락하여, 남성의 정체성 확인과 오이디프스 궤적의 완수를 위해 희생하는 역할을 수행 하게 된다. 이처럼 타자화된 여성은 오이디푸스 궤적의 주체인 남성들의 욕망과 시각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객체가 될 뿐이다.14)

    <블루 스틸>의 메간은 남성의 오이디푸스 궤적을 보조하거나 방해하는 타자화된 여성이 아니라 그 궤적을 따라가는 여성 주체로 등장한다. 메간은 사회 정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찰의 신분으로 약한자를 괴롭히는‘사회악’을 제거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가부장적 권위를 획득하고자하는 오이디푸스 궤적을 밟아간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궤적의 서사에서 남성 프로타고니스트가 사회적 관습과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습관적 폭행을 지켜보며 성장한 메간은 가부장적 사회가 제도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순종적 여성의 삶을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향을 보이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녀가 경찰이 된 이유도 경찰이 남성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sex)적 정체성을 무시하고 남성과 똑같은 위치에서 통념적인 권력을 쟁취하려드는 메간의 태도는 당시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캐스린 비글로우의 저돌적 욕망을 대신하고, 이러한 욕망에 부정적 시각을 지녔던 내재된 ‘자기’의식을 반영한다.

    <블루 스틸>에서는 메간이라는 여성이 영웅서사의 주체이므로 남성이 그녀의 궤적 완성을 위한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거나 희생된다. 물론 우호적인 여성 캐릭터, 트레이시도 희생되지만, 메간이 직접 유진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조력자 닉의 희생이다. 이와 같이 캐스린 비글로우는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가는 남성 프로 타고니스트를 여성으로 대체해 기존 할리우드 주류영화의 주체와 객체를 전복시키는 획기적인 장치를 고안했지만, 메간이라는 여성 프로 타고니스트를 ‘차이’와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 없이 성적 정체성을 부인하고, 권총으로 상징되는 ‘남근’의 존재에 집착하는 캐릭터로 설정함에 따라, 메간을 통한 비글로우의 오이디푸스 궤적은 완성되지 못하고, 그녀의 존재가 남성의 욕망과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도 피하지 못한다. 메간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혹은 여성이라는 선천적 정체성 때문에 남성 권력의 상징계에 속하는 경찰서 안에서 번번이 남성의 성적 유희 대상이 된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왜 경찰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아무도 경찰과 섹스를 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대답하는 메간의 모습은 모델 활동을 했을 정도로 미모를 인정받은 비글로우 감독이 남성이 주류인 할리우드 영화 현장에서 유사한 질문과 편견을 받아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작품서사의 내용은 메간이 결국 남성의 전능함과 사회악을 대표하는 ‘유진’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고전적 해피엔딩이 주는 통쾌함과 개운함을 빼앗겨버린 모호한 해피엔딩이다. <블루 스틸>의 상처뿐인 해피엔딩은 할리우드 현장에 야심차게 첫 발을 내디딘 캐스린 비글로우의 페미니스트적 의도가 충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그 이유는 할리우드 고전 서사를 답습하고 있는 식상한 내러티브 구조와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시련과 장애를 극복한 주인공이 ‘권선징악’의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전형적인 스토리, 적대적이 아니면 우호적인 유형화된 캐릭터(stock character) 창조, 실험성이나 독창성보다는 안정성과 친절함을 구현한 할리우드식 카메라 워크(camera work)와 편집, 메간의 불안한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블루’색감의 의식적 사용 등은 기존 체제의 불합리함을 토로하고자 했던 비글로우의 자아를 배반한‘자기’의 형식적 표출이며, 할리우드 고전 서사의 권력을 무시하지 못한 의식의‘자아’가 만들어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허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 스틸>의 엔딩은 비글로우가 메간을 통해 투영한 ‘자기’의 모습, 즉, 체제 전복을 꿈꾸면서도 그것에 일정 부분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감독이 교묘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의 남성적 서사에 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인을 응징한 후 허망한 표정으로 총을 떨어뜨리는 메간의 마지막 행위는 자아실현에 실패한 주인공이 느끼는 허무함과 상실감을 묘사하고 있지만, 메간이 자발적으로 ‘차가운 총’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비글로우가 앞으로 남성적 체제에 도전하는 자세와 방법을 바꿀 것임을 암시한다.

    이후 캐스린 비글로우는 남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을 내세운 액션영화 <폭풍 속으로>를 연출하며 기존 체제의 기대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녀에게 대중적인 인지도와 ‘액션’이라는 남성 장르에 도전해 성공한 독보적인 여성감독이라는 호평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비글로우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를 포기했을지라도 남성의 영역으로 분류됐던 액션 영화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타일러(Tyler, 로리 페티Lori Petty 분)라는 여성 캐릭터를 일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남성들의 대결 구도에서 힘의 균형을 중재하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며 부조리한 관습에 대한 저항과 완전한 자기 실현을 향한 도전을 계속할 것임을 예고했다.

       2) <웨이트 오브 워터>의 진 - ‘자기’를 찾아가는 ‘작가’로서의 캐스린 비글로우

    1873년, 미국 뉴햄프셔(New Hampshire) 해안가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외딴 섬 쇼울스(Shoals)에서 노르웨이 이민자인 아네트(Anethe)와 카렌(Karen)이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다. 카렌의 동생이자 아네트의 시누이였던 마렌(사라 폴리Sarah Polley 분)은 바닷가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구출된다. 마렌은 범인으로 잠시 그녀의 집에 머물렀던 루이스 와그너(Louis Wagner, 시아란 힌즈Ciaran Hinds 분)를 지목하고 그는 결국 교수형을 당한다. 그리고 100년 후, 진(Catherine McCormack 분)과 그녀의 남편 토마스(Thomas, 숀 펜Sean Penn 분)와 그의 동생 리치(Rich, 조쉬 루카스Josh Lucas 분), 리치의 연인 애덜라인(Adaline, 엘리자베스 헐리Elizabeth Hurley 분)이 섬에 도착한다. 사진기자인 진은 사건을 조사하면서 루이스 와그너가 진짜 범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진이 취재하는 동안 토마스는 애덜라인의 끊임없는 유혹에 흔들리고 이를 알게 된 진은 배신감과 질투심에 괴로워한다. 복잡한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이 유일한 생존자 마렌에게 점점 빠져 들어 가던 중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바다에 빠진 애덜라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토마스는 죽음을 맞고, 토마스를 살리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진은 마렌과 아네트를 조우한다.

    여성 프로타고니스트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도 캐스린 비글로우는 남성과 여성의 대치와 화해 국면을 다루는 몇 가지 공통된 세팅(setting)을 배치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세팅은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오이디푸스 궤적의 희생물로 남성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블루 스틸>의 닉처럼 <웨이트 오브 워터>의 토마스(Thomas, 숀 펜 Sean Penn 분)도 여성의 오이디푸스 궤적을 위해 희생된다. 남성이 여성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세팅은 헐리우드 서사 구조를 존중하는 캐스린 비글로우의 의식적 제스처이기도 하지만 전작 <블루 스틸>에서 부터 시도한 할리우드 고전 서사의 ‘주도적 남성’과 ‘보조적 여성’의 역할을 전복시키고자 한 비글로우의 의도가 담긴 내러티브 장치이기도 하다.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는 남성의 희생에 관련해 진일보한 내러티브 구조를 선보이는데, 자신의 살해 행각을 자백한 마렌을 무시하는 남성검사들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지 못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에 의해 남성은 위험에 빠지지만 남성에 의해 중요한 진실은 묵과된다. 비글로우는“여자는 동요되기 쉬워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되지. (Women are unstable... not always to be believed)”라고 말하는 남성들의 잘못된 생각이 오랜 세월 진실을 숨기고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불행은 더 이상 <블루 스틸>에서처럼 ‘선천적으로 거세된 여성’의 실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메간의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에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특별한 원인 규명 없이 <블루 스틸>에서 지속적으로 묘사되는 가부장 체제의 부조리와 불평등은 <웨이트 오브 워터>에 이르러서 편협적인 남성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며 그 책임을 남성들에게 묻고 있다.

    두 번째 세팅은 ‘적대적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블루 스틸>의 메간이 폭력 남편을 제압하는 훈련에서 그의 아내 역할을 맡은 여성 요원이 메간에게 총을 겨눈 것처럼,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는 ‘보호와 관심만을 갈구하는’왜곡된 여성성을 과도하게 표출하며 여성 프로 타고니트의 사랑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로 과거의 아네트와 현재의 애덜라인이 등장하고, 이들보다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마렌의 언니 카렌이 설정되었다. 카렌은 마렌이 오빠와 근친상간의 관계임을 폭로해 마렌의 결혼을 서두르게 하고 결국 가족과 떨어져 살게 만드는 존재이다. 두 부류의 적대적 여성은 각기 다른 이유로 여성 프로타고 니스트의 삶과 욕망에 위협적인 존재이며, 비글로우가 결코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상을 대표한다. 특히, 진을 통해 애덜라인의 매혹적인 몸매를 응시하는 비글로우의 영화적 시선은 지나치게 남성적이라 모욕감마저 느끼게 하며, 마렌을 통해 카렌의 죽음을 주도하는 비글로 우의 영화적 행동은 남성적 폭력성이 다분해 정당방위의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마지막으로 교차편집과 평행편집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블루 스틸>의 교차편집이 액션의 긴장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채택된 것이라면, <웨이트 오브 워터>의 평행편집은 한 사람의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의 실체를 발견하기기까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현재의 진과 과거의 마렌이 각기 다른 죽음을 진술하는 장면이 평행을 이루며 편집되어 있다. 토마스가 죽은 뒤 진은 남편의 죽음을 예상했다는 태도로 과거를 진술하고, 과거의 마렌은 자신이 두 여자를 죽인 과정과 그 후에 바위 밑에서 기도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퀀스는 현재와 현재의 과거, 과거와 과거의 대과거라는 가장 복잡하고 넓은 범위의 시간을 포함하는 평행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평행편집은 과거와 현재의 자연스러운 교차를 위해 스크린 사이즈와 피사체의 액션, 시점쇼트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계속된다. 선행 컷 (cut)이 다음 컷을 견인하는 몽타주(montage)는 영화 내적으로는 현재의 진과 과거의 마렌을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키려는 미학적 표현이고, 그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 캐스린 비글로우의 ‘경험의 자아’와 ‘잠재된 자기’를 합체시키려는 영화적 시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나의 자기로 연결되는 두 명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를 평행선에 배치한 내러티브 구조는 스미스(Smith)와의 인터뷰에서 캐스린 비글로우가 언급한 내용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을 전복시키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없다. 항상 가변적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쁨에서 파멸, 그리고 다시 기쁨으로 연결된다.”모든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가장 잘 반영된 영화가 <웨이트 오브 워터>이다. 100년 전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는 보트 위의‘진’은 과거 외딴 섬 바위 위에 서 있던 ‘마렌’의 모습과 겹쳐진다. 진이 마렌과 아넷을 조우하는 바다 속 장면은 이러한 비글로우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정적인 장면이다. 아네트는 죽어 있지만 마렌은 살아서 진을 응시한다. 융의 표현 그대로 심연의 바다에서 진이 내면의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남편 토마스를 유혹하는 애덜라인이 사라지길 바랐던 그녀의 숨겨진 진심이 사랑하는 오빠의 여자 아네트를 향한 질투와 사랑을 중첩시켜 드러냈던 마렌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되는 장면이다. 또한 죽은 아네트의 목격은 애덜라인을 통해 무의식에서 깨어난 남성적 시각의 여성성이 진 자신이 우려했던 대로 이미 죽어버렸음을 의미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캐스린 비글로우는 결국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과거의 그것, 또는 미래의 그것, 혹은 우주 저편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진은 죽은 아네트의 몸에는 손을 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마렌에게는 끝내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녀의 ‘자아’가 ‘자기’를 표상화한 마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진은 자신이 토마스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며 지냈던 것처럼 자기 자신과 욕망의 실체를 잊고 살아 왔고, 그것을 일깨우는데 ‘토마스의 죽음’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진은 메간이 품고 있었던 반체제적 욕망보다 존재와 사랑의 가치가 인생살이에 더 치명적임을 깨달으며 진화한 여성의 모습을 보이지만, 너무 늦게 그것을 터득하고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자기실현에 실패하고 만다. 아니타 쉬레브(Anita Shreve)의 원작 소설 『웨이트 오브 워터』를 각색해 영화로 만든 이 작품에서 비글로우는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블루 스틸>에서 드러난 문제, 작가 자신과 영화 속 인물들의 일체감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지양하고 중립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해서 남성권력에 도전하는 메간의 전투적 모습으로 표상화 되었던 비글로우는 100년 전 사건을 매개로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는 사진작가 진을 통해 어느 정도 순화된 영화 ‘작가’의 모습으로 거듭나지만, 그녀의 초점화자로 형상화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를 통해 ‘자기’를 흡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다.

       3)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 - ‘자아실현’ 단계의 캐스린 비글로우

    <제로 다크 서티>는 풍요로운 땅 미국에서 성장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마야(제시카 차스테인Jessica Chastain 분)가 죽음의 땅 사막에서 은신하고 있는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Al Qaeda)의 수장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잡기 위해 벌이는 10년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미 정보부(CIA)요원 마야는 정보수집과 분석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파키스탄으로 파견된다. 마야는 열정적으로 테러조직 검거에 임하지만 한동안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카에다 소속 의사에게 정보를 입수할 기회가 찾아오고, 거래에 나섰던 동료 제시카(Jessica)가 테러리스트(terrorist)의 보복으로 목숨을 잃는다. 마야 또한 적들의 살생부에 올라 공격을 받게 되지만 그녀는 결코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선배 댄과 동료 요원들의 도움으로 빈라덴의 은신처를 찾아낸 마야는 끈질긴 기다림과 설득 끝에 ‘제로 다크 서티’라는 빈 라덴 제거 작전에 임한다.

    캐스린 비글로우의 영화에서 바다와 사막의 이미지는 특별한 감성을 자극한다. <폭풍 속으로>, ,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 바다의 이미지는 <제로 다크 서티>와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2008)에 이르러서는 사막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바다가 풍성한 생명과 본능적 욕망의 원천이라면 사막은 끝없는 죽음과 정제된 욕망의 보고로 그려진다. 영화 작업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기위한 그녀 삶의 현장 역시 바다와 같이 변화무쌍한 무대에서 사막처럼 철저한 준비와 경험으로 사전 대응이 가능한 무대로 옮겨진 것이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바다에서 사막으로 바뀐 것처럼 소재 역시 개인적 욕망과 사랑의 서사에서 인류적 전쟁과 공포의 서사로 전환된다. 이제 캐스린 비글로우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는 사적 모티브(motive)를 넘어 국가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제로 다크 서티>에서 찾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변화는 <블루 스틸>과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의 공통된 작품서사 방식들과 비교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 설정의 변화는 프로타고니스트의 변모된 모습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작품서사의 가장 큰 차별성은 캐릭터와 스토리의 구조적 변화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남성 캐릭터를 찾아 볼 수 없고, 따라서 여성의 오이디푸스 궤적을 완성시키기 위해 우호적 남성을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남성의 희생은 마야를 돕기 위해 그녀의 직장 선배 댄(Dan, 제이슨 클라크Jason Clarke 분)이 부당한 처벌을 수용하는 정도로 약화된다.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는 더 이상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며, 더불어 위험에 빠진 여성을 구하기 위해 남성 프로타고니스트가 영웅적 면모를 과시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전통적 세팅은 필요 없어지고,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남성 캐릭터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겁한 결과 역시 무용지물이 된다.

    이것은 기존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필수적이었던 ‘로맨스(romance)’를 과감히 생략한 비글로우의 일탈적 서사 구성에서 그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색, 계>(色, 戒, 2007)를 비롯해 팜므 파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대부분의 영화에서도 여성은 항상 사랑 앞에 이성을 상실한 채 공적인 목적을 져버리고 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감성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제로 다크 시티>에서는 결정적 선택을 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여성 캐릭터의 무분별한 판단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랑’과 ‘연애’라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감초 같은 세팅을 제거했다. 1995년 스미스와 인터뷰를 할 당시에도 액션영화에 로맨스가 빠진다면 영화는 그저 빠른 속도의 편집과 시끄러운 사운드, 그리고 거친 이미지로 구성된 대결 시퀀스 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비글로우는 <웨이트 오브 워터> 이후로 여성이 로맨스를 쫓는 행위 자체를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해서 <제로 다크 시티>의 마야는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테러와 암살의 공포, 동료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극복하고 자신의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기존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남성 프로타고니스트와 동일한 자격을 획득한다.

    메간과 진처럼 마야 역시 예쁜 외모를 소유하고 있어 남성들에게 주목 받는다. 그러나 <블루 스틸>에서 메간의 미모가 그녀가 추구했던 삶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장애가 됐다면, <제로 다크 서티>에서 마야의 유리한 외적 조건은 오이디푸스 궤적을 완수하는데 더 이상 방해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정보원으로 활동하기에 어린 나이를 걱정하는 댄에게 지부장이 ‘킬러(killer)’라 그녀를 지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야는 외모나 나이 등의 외적 조건에 앞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여성 요원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블루 스틸>의 신인감독이 창조한 메간은 실력을 검증받지 못한 신참내기 경찰이었지만, <제로 다크 서티>의 노련한 중견감독이 만든 마야는 이미 내공과 경력을 갖춘 캐릭터인 것이다.

    마야의 남성 동료들 역시 그녀의 외모나 성의 정체성을 농락거리로 삼지 않을 만큼 진지하다. 스미스의 지적대로 비글로우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속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경찰(<블루 스틸>)에서 작가와 시인(<웨이트 오브 워터)>, CIA 요원까지 그녀의 캐릭터는 계급이 높아진 만큼 사회적으로 성숙하고 성적으로 평등한 인물들로 등장한다. 여성 캐릭터의 사회적 지위와 욕망의 대상이 변한 것처럼 주변 인물들도 사적인 욕망보다 공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상식적 인간 유형으로 제시된다. 이상적으로 사회화된 남성 캐릭터는 존재하지만 같은 여성에게 적대적인 여성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마야의 캐릭터가 획기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유는 그녀 자신이 성적 정체성에서 오는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야는 부정페미니스트들의 지적처럼 ‘통계학적으로는 다수지만, 법과 관습상 명백히 소수라는 의식’15) 을 지닌 ‘소수의 여성’으로서의 부당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캐릭터처럼 보이고, 그러므로 그녀가 지도자격 남성과 대립하는 이유는 오로지 작전 수행이라는 공적인 분야에 한정된다. 심지어 그녀는 파키스탄에서 지부장에게 작전 수행 인원을 확보해달라고 요청할 때에도, 또 CIA 본부에서 국장에게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도 ‘다수의 남성’들이 취하는 저돌적인 자세와 야비한 협박까지 모두 섭렵한 모습을 보인다.

    마야는 또한 외적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사랑에 목말라하는 일반적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녀는 CIA 고위 관리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해서 자신이 바로 빈 라덴의 은신처를 발견한 ‘mother fucker’라고 소개한다. 영어에는 다른 언어들과 마찬가지고 성별이 확실한 욕언(辱言)과 중성적인 욕언이 존재한다. ‘폐륜아’, ‘도덕적 수치심이 없는 자’를 의미하는 극악한 욕설 중 하나인 ‘mother fucker’는 ‘bitch’나 ‘whore’가 여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주로 남성에게 사용하는 욕설이다. 마야가 여성용 욕설이나 ‘asshole’, ‘shit’등의 중성적인 욕설을 사용하는 대신 자신에게 ‘mother fucker’라는 남성용 욕언을 사용한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성적 차별성과 성적 소수 계층에 속하는 본인의 신분을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마야의 모습은 댄이 고문현장으로 들어가며 복면을 쓰라고 말하자 “선배도 안 썼잖아요.”하며 복면을 벗어 던지는 행위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마야는 성적 차별을 인정하거나 그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 해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어떤 특혜와 보호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야라는 캐릭터는 학력의 차이, 성별의 차이, 직업 환경의 차이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열등감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마야는 자신이‘못하는 것’이나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남성 요원들이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확신 있는 대답을 피할 때 “그것이 빈 라덴일 확률은 100%”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정보 요원으로서 자신의 열정과 판단을 믿는다. ‘제로 다크 서티’ 작전 명령이 내려지기 전, CIA 국장은 마야에게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직후 부터 오랜 시간 CIA 요원으로 활동한 것을 확인시키며 “자네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다. 마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대답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빈 라덴을 쫓으며 살아 온 인생을 되짚어 보는 순간의 깨달음과 허무함이 담겨 있으며, 사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직 영화만을 만들어 온 비글로우의 고백도 포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마야라는 캐릭터는 메간과 진, 마렌과 달리, 융이 제시한 무의식의 세계 ‘자기’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수용하는 단계를 이미 지나서 장르영화에 적합한 주체적 프로타고니스트로 등장한다.16) 캐서린 비글로우는 마야가 어떻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 자신의 그림자를 수용할 수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설명하느라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동반된 사회적 약자의 방황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노출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마야의 작전과 임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외의 삶은 철저히 외면한 채 진행된다.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 그녀가 CIA 요원이 된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녀를 초인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욕망은 동료가 폭탄 테러를 당한 후에 강화되지만, 애초에 왜 그녀가 그곳에 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없다.

    그러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마야가 수송기에 앉아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156분 동안 생략되었던 마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 느낄 수 있다. 그녀가 환호와 기쁨 대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알 카에다를 상대해 온 세월동안 반복됐던 희망과 좌절을 되새기며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때까지 그녀 삶을 지탱했던 단 하나의 목표였던 ‘빈 라덴’이 소멸됨에 따라 그녀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존재의 목적이 함께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전작들의 실패를 곱씹으며 <허트 로커>라는 저예산 예술 영화로 재기한 후, 여성감독으로서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영화 작가로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명예롭게 보상받았지만, 그 후 허탈함과 상실감, 향후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동시에 느꼈을 캐스린 비글로우의 과거 속 ‘자기’를 현재의 ‘자아’가 재현해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두 번째 변화는 시각적 형식미의 추구가 <제로 타크 서티>에서는 보다 여유롭고 느슨해졌다는 것이다. 첩보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추적과 대치의 긴박감을 살리기 위한 교차 편집의 사용은 필수적이었지만 매끄러운 컷의 연결을 위한 미장센(mise-en-scène)과 몽타주는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교차편집을 사용하는 빈도나 횟수도 줄고 광범위한 시간의 교차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지의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 사건의 사실적 묘사에 주력하려는 비글로우의 미학적 태도 변화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보다 현실적인 세팅을 위해 색감의 인위적인 조작 또한 피하고 있는데, <블루 스틸>의 차가운 블루, <웨이트 오브 워터>의 과거 속 블루와 흑백 칼라등 영화 별로 테마를 이뤘던 색상 배치는 <제로 다크 서티>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감독은 인공적인 색감 대신 육안으로 보기에 가장 근접한 색상을 스크린에 구현하면서 현실감을 증폭시킨다. 사실적 이미지 창출에 대한 비글로우의 욕망은 관객에게 친절한 할리우드 영화의 전통을 존중하며 고정 쇼트(fixed shot)들을 기본으로 사용했던 <블루 스틸>과 <웨이트 오브 워터>와 달리,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핸드 헬드(hand-held)’ 쇼트들로만 구성된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시티>의 이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현실적이며 감각적인 클로즈업의 사용도 현저히 감소했다. <블루 스틸>과 <웨이트 오브 워터>의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했던 감각적인 클로즈 업 쇼트들은 <제로 다크 서티>에서 미드 쇼트(mid-shot)나 풀 쇼트, 또는 롱쇼트(Long-shot)로 대체되었다. 영화가 개인적 욕망에 치중하지 않음으로써 카메라와 피사체도 친근하고 가까운 거리보다는 적당한 감정의 거리를 두게끔 배치되었다. 이러한 쇼트들은 관객들이 여성 프로타고니스트의 감정에 동화되는 정도와 속도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그녀가 지닌 여성으로서의 상대적 불리함을 경시하게 만든다.

    ‘제로 다크 서티’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 자정에서 30분이 지난 시각’을 뜻하는 군사용어로 타겟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침투한다는 작전 원칙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40분 분량의 작전 시퀀스는 피사체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게 구성되었다. 오로지 군인들의 야간투시경을 통해서만 작전 수행 과정을 엿볼 수 있어 긴박하지만 답답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것은 작전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마야가 시계와 무전 소식에만 의지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한 심경을 효과적으로 그려내는데, 캐스린 비글로우는 영화의 클라이막스(climax)에서 프로타고니스트가 가장 적게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취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걸쳐 묻혀 있었던 진실, 결정적인 순간 소외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입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작전 시퀀스와 엔딩 장면은 캐서린 비글로우의 영화 여정도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 새로운 비전(vision)을 향해 나아갈 때가 됐다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그녀가 개인적으로는 ‘자기실현’의 유사 단계까지 도달했지만 제도와 관습의 틀이 바뀌지 않는 이상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음을 시사한다. 비글로우 영화의 주된 배경인 바다와 사막이 인간이 통제하기 힘든 거대하고 위협적인 대자연의 상징인 것처럼 비글로우가 속한 삶의 현장 역시 만만하게 정복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8)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야기의 이론과 해석』, 문학과지성사, 2010, 27쪽.  9)화자는 스토리(story)를 이야기하는 ‘서술적인 기능(narrative function)’, 스토리의 연결과 관계를 (희곡)지문처럼 지시해 주는‘지시적 기능(directing function)’, 인물의 의견을 전달하는‘소통의 기능(conative function)’, 감정을 드러내거나 불러일으키는‘정서적인 기능 (emotive function)’, 행위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증언의 기능(testimonial function)’, 혹은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한다. Gérard Genette, Narrative Discourse:An Essay in Method, Translated by C. K. Scott Moncrieff,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3, pp. 255-256.  10)화자는 스토리를 인식하고 서술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인물의 시점을 활용해 사건을 관찰하고 묘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스토리 인식의 주체(P. O. V, 초점화자)와 서술의 주체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서정남, 『영화 서사학』, 생각의 나무, 2004, 304쪽 참조.  11)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p.85.  12)이 논문에서 사용하는 ‘자기서사(self-narrative)’는 작가가 자신의 내면의식(자아정체감, 자아의식)을 표출한 이야기, 즉, 작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서사를 가리킨다. 정운채, 『문학치료의 이론적 기초』, 도서출판 문학과 치료, 2006, 330쪽, 400쪽 참조 ; 고미영, 『이야기치료와 이야기의 세계』, 청목출판사, 2004, 54-67쪽 참조.  13)조셉 캠벨(Joseph Campbell),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 이윤기역, 『천의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2007, 50쪽 참조.  14)이희승, 「최근 TV가정드라마 텍스트의 젠더 폴리틱과 여성 수용자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8권2호, 2008, 353쪽 참조.  15)Bruno Vercier, Jacques Lecarme, La Littérature en France depuis 1968, Paris: Bordas, 1982, p. 12.  16)융은 무의식의 일각에 존재하는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그림자(Schatten)’로 정의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나약한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지킬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에서 점잖은 지킬 박사의 그림자는 포악한 괴물 하이드이며, 이들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개의 모습이다. 이부영, 『분석 심리학』, 일조각, 1998, 123쪽 참조; 이부영, 『그림자-분석심리학 탐구 1』, 한길사, 1999, 41쪽 참조

    3. 결론

    <블루 스틸>, <웨이트 오브 워터>, <제로 다크 서티>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전된 사회적 역경과 과제를 극복해 가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욕망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가부장적 관습에 격렬히 대항하기도 하고, 완곡하게 한계의 범위를 벗어나려 노력하면서 ‘자기’의 실체를 찾고 ‘자아’를 실현해 간다. 세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은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 체제에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해 온 캐서린 비글로우의 ‘자기서사’를 운영하며, 여성으로서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적 시각과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캐서린 비글로우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들의 서사적 패러다임(paradigm)을 비교해 보면 그들이 작품을 만들 당시의 비글로우의 ‘자기’가 반영된 페르소나(persona)들이며, 감독 자신이 변해 온 모습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 프로 타고니스트의 속성과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는 비글로우 감독의 커리어와 자아실현 단계를 반영하며 변화와 발전을 계속해 온 것이다.

    <표 2>에서 정리한대로, 비글로우의 여성판 오이디푸스 궤적의 서사에서 여성캐릭터의 존재가치는 외모보다는 신분으로, 자아실현방식은 행운이 아닌 스스로의 자기변신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여성캐릭터의 사회성은 순종적인 수동성에서 탈피하여 자립적인 능동성을 띠며, 남성과의 관계도 종속적인 관계에서 자기주체적인(상호주체적인) 관계로 변화한다.17)

    [<표 2>] 캐스린 비글로우의 작품 속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서사 패러다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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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스린 비글로우의 작품 속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서사 패러다임 비교

    비글로우는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논쟁적인 ‘평등’과 ‘차이’의 문제를 여성 캐릭터를 매개로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녀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는 남성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성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모습으로 시작해, 남성적 시각의 여성성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던 내면의 ‘자기’와 이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훈련된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면서, 결국 관습화된 성적 역할의 차이를 특별한 동기나 설득 없이 무시하고, 주어진 임무를 무던히 수행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로 거듭난다. 이러한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은 ‘여성’ 감독도 여성 ‘감독’도 아닌, 한 명의 ‘영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 비글로우의 ‘자기’ 표상의 변화를 반영한다.18)

    현재까지 비글로우와 가장 유사해 보이는 캐릭터의 표상은 마야이다. 마야는 ‘차이’와 ‘불평등’ 에 대처하는 일관된 자세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진보적 시각과 타이밍에서 뿐만 아니라, 욕망을 실현한 후에 취하는 성숙한 자숙의 태도에서 볼 때, 지금까지 창조된 비글로우의 여성 프로타고니스트 중에서 가장 진화된 존재이다. 비글로우는 마야처럼 남성이 수적 우위에 있는 경쟁 세계에서‘가지지 못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차이’와 ‘조건’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으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간다. 그러나 마야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정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잔인한 고문과 작전의 주체가 되어 그녀가 속한 조직의 폭력성에 동조한 것처럼 비글로우 역시 그녀의 목적 달성을 위해 현 체제가 지닌 불평등한 차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선으로 <제로 다크 서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야가 흘리는 눈물을 조명해보면 비글로우가 자신의 작품서사에 남아 있는 의심과 과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가지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강조할 수 있다면, 페미니즘 작품도 즐겁고 유쾌할 수 있다. 페미니즘 작품에도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영광의 상처’가 필요하다. 그래야 ‘피해자 페미니즘(victim feminism)’에서 벗어나 ‘파워 페미니즘(power feminism)’을 실현할 수 있다.”19) ‘상처뿐인 영광’을 안고 남성 경찰의 부축을 받으며 쓸쓸하게 퇴장했던 메간이 ‘영광의 상처’를 가슴에 새긴 채 홀로 감정을 정화하는 마야가 되기까지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 <블루 스틸>의 메간은 유진을 죽인 뒤에 아무 말도 못했지만, <웨이트 오브 워터>의 마렌은 살인을 저지른 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 나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20) 마렌의 기도는 비글로우의 영화작업을 통해 일관되게 지속된다. 그리고 이제 비글로우는 마렌과 진이 놓쳤던 비전을 명확하게 이해한 후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비글로우의 ‘자기’는 영화의 캐릭터 안에 존재해 왔고, 그와 함께 독창적인 ‘작품서사’를 완성하며 영화작가로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증명해 왔다. “작품서사는 인생살이에 의하여 형성된 건강하지 못한 자기서사를 건강한 자기서사로 변화시키고, 인생살이를 재해석하게 함으로써 트라우마가 된 불합리한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21) 비글로우의 영화에서 작품서사를 운용(運用)하고 있는 여성 프로타고 니스트들이 바람직한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비글로우 또한 데뷔 (début) 초기 지니고 있었던 여성감독으로서의 불평등한 상황과 반체제적인 신념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다. 더불어 그녀는 할리우드 체제에서 생존하기위해 철저한 자기 관리로 여성으로서의 체력적 한계를 극복했고, 이상적이며 로맨틱한 할리우드의 남성적 서사 방식에서 벗어나 여성이기에 십분 유리한 효율적 내러티브 전개와 사실적 이미지 구현에 성공했다. 이미 ‘이순(耳順)’(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무엇을 접하든 곧 이해가 가능한 나이)을 넘어선 비글로우는 여성으 로서의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제공하는 유불리(有不利)를 충분히 체험 하고 이를 극복하거나 이용할 줄 아는 연륜과 내공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유형의 프로타고니스트를 내세워 어떤 양상으로 ‘자기’ 재현적인 작품서사를 발전시킬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류은영, 「신데렐라 서사의 현대적 패러다임」, 『세계문학비교연구』 제42집, 2013, 280쪽.  18)허은희, 「여성 캐릭터를 보는 새로운 시각」, 『디지털영상학술지』제8권 2호, 한국디지털 영상학회, 2011, 158쪽 참조.  19)김미현, 『젠더 프리즘』, 민음사, 2008 15-16쪽 참조.  20)“I also prayed for myself who did not understand the vision God had given me”, The Weight of Water, Dir. Kathryn Bigelow, LA: Studio Canal, 2000.  21)정운채, 「문학치료학과 역사적 트라우마」 『통일인문학논총』제55집, 201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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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1> ]  메간과 캐스린 비글로우 비교
    메간과 캐스린 비글로우 비교
  • [ <표 2> ]  캐스린 비글로우의 작품 속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서사 패러다임 비교
    캐스린 비글로우의 작품 속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의 서사 패러다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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