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후 한국희곡에 나타난 위험사회의 징후

The symptoms of the dangerous society reflected in korean dramas aft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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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각층에서 표출되고 있는 집단 간, 이념 간 갈등은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문제적 상황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이념적 대립, 그리고 그로 인해 현대사의 문제적 시기들을 제대로 청산, 극복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까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당 간, 계층 간, 지역 간의 생산적인 대화와 논쟁이 부재한 가운데 거듭 되풀이된 반목은 결국 청산되지 못한 과거에 대한 지독한 후유증을 현재에 남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류가 수정되지 않은 역사는 현재에 하나의 외상적 기억으로 작동하고 있다. 제대로 기억되지도, 애도되지도 못한 역사의 흔적은 이제 한국사회가 그 어떤 미래적 대안을 마련함에 있어서도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본 논문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총체적 무력감과 상실감을 문화학의 기억의 문제와 연결지어 살펴보고, 특히 2010년 이후 발표된 몇몇 희곡을 분석하고자 한다. 문화학에서 기억은 역사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역사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단순한 수집 내지 재현에 불과한 것으로서 현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사료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기억은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활성화되며 움직이고 있는 과거의 현상이다. 즉 기억은 현재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현재적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행위로서 과거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현재의 에너지다. 그러나 이 기억의 생산적 행위가 이루어지지 못할 때, 그것은 왜곡되고 고착된 기억으로서 더 커다란 억압과 불안의 원인이 된다. 한국사회의 과거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분석대상으로 삼은 희곡은 박근형의 <너무 놀라지마라>, 기국서의 <햄릿6-삼양동 국화옆에서>, 박상현의 <싸이코패스>, 고연옥의 <칼집 속에 아버지>, 백하룡의 <전명출 평전>이다. 2011년 대선을 전후로 거의 일년 사이에 발표된 이들 희곡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기화되지 못한 과거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이들 희곡에서 그 트라우마의 대부분은 아버지로 구현되고 있다. 아버지라는 과거는 그들의 아들들인 주인공들에게 때로는 자신들의 한(恨)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거나, 자신들의 가치를 강제적으로 이행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강제가 되었건 호소가 되었건, 현재로 대변되는 그들의 아들들에게는 그 모든것이 지극히 곤혹스러운 억압으로 작용한다. 그로 인한 아들들의 대응은 제각각이지만, 무관심과 회피로 일관하거나 자기 오인이나 무기력, 우울의 증세를 보인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그가 속한 집단기억의 고착된 논리는 그러한 애도의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2010년 이후, 특히 2011년 대선을 전후로 짧은 시기에 발표된 희곡들에서 아버지에 대한 억압된 기억에 시달리는 아들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수많은 기억의 행위 가운데에서도 문화적 매체들에 의해 추동되는 문화적 기억은 텍스트나 제의, 기념비와 같은 문화적인 형상화를 통해 집단 및 개인에게 그들의 과거의 운명적 사건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만든다. 그렇게 볼 때 이들 희곡은 정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공약들이 쏟아지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집단 간의 이념갈등, 특히 그 기저에 놓인 해묵은 반목과 상처들이 청산되지 않는 한, 새로운 시대는 요원할 것이라는 작가들의 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causes of conflicts that have been widespreaded into our society with the help of the memory discussed in the Cultural Studies. And it analyses how these conflicts are reflected on characters of dramas produced after 2010. The Cultural Studies distinguishes the memory from history, stressing the positive and energetic sides of the memory that make groups adjust their identities with their presence and future in mind. If a group or a society is not able to reconstruct their momories such way, it’s thought and behaviour have no choice but to become stiff and so there are no positive communications within groups any more.

    The characters discussed in this study are people who are suffered from the the traumas caused from the unsolved ideological problems in the past. Fathers who appear unceasingly in their son’s dreams or unconsciousness after dying mean the cause of their traumas. But sons are in total lethargy and depression or avoid facing to their unsolved problems in the past. Their ways of thinking are all unrealistic and grotesk. If dramas reflect the sociey that their writers belongs to, they are all the self-portraits of us who can not memory our past and pains in it. And it is very meaningful that these dramas are produced last and this year when conflicts between social groups became more and more increased.

    With this writing realated to the memory, especially to the incapacity of memory, writers try to give warnig us about the dangers caused from it. In this context, these dramas are the places of cultural memory that give us the chance of retrospective contemplativeness.

  • KEYWORD

    한국사회의 갈등 , 기억 , 트라우마 , 문화적 기억 , 박근형 , 기국서 , 박상현 , 백하룡 , 고연옥 , 김은성

  • 1. 서론

    박근형의 <너무 놀라지마라>(2009)에서 보여지는 가족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아버지는 “너무 놀라지 마라”라는 말만 남기고 화장실 천장에 목을 매달았다. 둘째 아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은둔형 외톨이다. 남편인 큰 아들을 대신해 노래방 도우미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며느리는 생활에 지쳐 만신창이가 되었다. 죽은 아버지의 시체 썪는 냄새가 집안에 진동하지만 그 누구도 시체를 치우려들지 않는다. 간만에 집에 들어 온 장남은 인류 구원에 관한 SF 영화를 찍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을 뿐 가족의 현실은 철저하게 나몰라라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며느리는 그녀 가슴에 잔뜩 서려있는 분노와 원망을 남편을 향해 이렇게 쏟아낸다.

    며느리는 절망에 몸부림치다 끝내 칼로 자기 배를 찌른다. 그러나 장남은 그런 아내를 밀쳐내고 다시 집을 나선다. 박근형의 희곡 속에 등장하는 남성인물들은 대부분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채 공허한 명분에만 매달리는 참 대책 없는 족속들이다. 겉으로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탄탄한 비호를 받는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아들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이나 아들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모두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이고, 자기 앞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왜곡된 우리의 과거를, 그 과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무기력을, 그리고 현재에 흩뿌려진 우울한 상처의 잔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최근 한국희곡에서 이처럼 현실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기를 쓰고 외면해버리는 인물들은 박근형 희곡에서 말고도 많다. 그런가 하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상흔을 마치 원죄처럼 안고 사는 인물들도 많다. 모름지기 동시대의 사회적 지평 속에서 깨어있고자 하는 희곡이라면, 그로부터 독자가 그 희곡을 통해 일상적 시선으로는 깨닫지 못했던 사회의 이면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희곡 속에서 나타나는 우울과 절망, 비틀어진 왜곡은 곧 우리 시대의 우울이자 절망, 그리고 비틀어진 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희곡 속에서 인물들이 대면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절박한 문제는 무엇이며, 왜 이들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이 매번 엉뚱한 환상이 아니면 지독한 우울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를 가로지르는 문제들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2) 수십 년간 이어져 왔던 성장동력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간의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 남긴 후유증은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용불안, 실직, 청년실업 등의 문제는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계층적 위화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이명박 정부는 갈등을 조장하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서서 창조적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민통합의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싼 촛불집회, 용산참사, 미디어법 처리,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천안함, 종북논란, 역사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학계의 이념갈등, 무상급식 및 반값 등록금 논란 등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과 균열은 전보다 더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8대 대선을 앞두고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적 갈등은 더더욱 거세졌는데, 이는 경제정책 및 사회복지정책을 둘러싼 공약에서도 양진영 간에 뚜렷한 시각차를 보였다. 그뿐 아니다.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터져나온 NLL 논란 및 국정원 댓글사건 또한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면서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갈등과 균열의 원인을 하나로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과 전쟁, 그리고 권위주의적이었던 독재정권 및 압축된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국민들 사이에 이념적 대립 및 양극화가 진행되어 왔던 것, 그리고 여기에다 정치엘리트와 정당 간의 이념적 양극화가 얹어지면서 한국사회의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3)

    본 논문은 이처럼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집단 간의 이념적 갈등의 주요원인을 정치이념적 이데올로기의 대립 및 그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시기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그 부정적 여파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그것이 특히 2010년 이후 발표된 몇몇 한국희곡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굳이 이 시기를 연구대상 희곡을 선별하는 시점으로 삼은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축적되었던 이념적 갈등이 이 시기에 한층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고, 희곡들 역시 어느 때보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소환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 우선 본 논문은 오래 전부터 문화학의 주요 화두가 된 기억의 문제를 집단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기억은 역사와 달리 능동적이고 반성적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에너지다. 그러나 기억이 지닌 이같은 순기능이 외적 요인에 의해 차단될 때, 그것은 고착된 기억, 즉 외상적 기억이 되어 현재와 미래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화학에서 이야기되는 기억의 문제는 한국사회의 집단적 기억이 얼마나 고착된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트라우마의 징후가 되어 갈등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집단기억과 집단갈등, 그리고 트라우마의 문제를 2009년 발표된 박근형의 <너무 놀라지 마라> 및 2010년 이후 발표된 몇몇 희곡들에서 보여지는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가족서사, 그리고 아들들의 무기력한 삶의 태도와 연결지을 것이다. 이들 희곡 속의 인물 대부분은 아버지 등으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해 아예 무지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여러가지 현실적 이유를 내세워 의도적으로 외면해버린다. 때로는 서로에게 무턱대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엉뚱한 환상 속으로 도피해버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외상기억으로 인해 강박과 해리에 시달리기도 한다. 흔히 많은 작품 속에서 가족이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압축적인 상징으로 통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희곡 속의 가족서사로부터 한국사회의 한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이들 희곡들이 주로 18대 대선을 전후로 한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점과 관련지어, 이 희곡들이 결국은 현실 속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는 기억의 문제가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평에 드리우는 부정적 그림자를 성찰하는 반성적 기억의 문화적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1)박근형, <너무 놀라지 마라>, 『한국연극 』, 2009.03, p.105-117, p.117.  2)한 예로 박준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2013년 8월 21일 전경련 주최로 열린 제 2차 국민대통합 심포지엄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의 원인이 원만히 관리되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념갈등 뿐 아니라 분배갈등 까지도 갈등의 목표가 비현실적이고(unrealistic), 목표의 분할이 불가능한(nondivisible) 양상으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준, 「한국 사회갈등의 현주소」, 『전경련: 제2차 국민대통합 심포지엄 자료집』(2013. 8.21) 참조.  3)이내영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다양한 여론조사자료를 경험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 한 논문에서, 한국사회에서 이념갈등이 심화되는 주요 이유는 일반국민들 사이에 이념 대립과 양극화가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정당 소속 의원들 사이의 이념적 거리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낸 바 있다. 즉 정치제도가 이념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요 정당의 이념적 거리를 줄이려는 지속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내영, 「한국사회 이념갈등의 원인: 국민들의 양극화인가, 정치엘리트의 양극화인가?」, 『한국정당학회보』 제10권 2호, 한국정당학회, 2011, pp251-287 참조.

    2. 기억의 기능-과거에 대한 현상적 재구성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는 한마디로 수십 억 지구 인구의 개인적 욕망에 의해 작동되는 시스템이다. 이처럼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세계화의 흐름은 이제 국가 내지 민족과 같은 공동체의 개념 또한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유기적인 통일체로서의 사회적 단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하더라도 예전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이제 우리가 공동체, 집단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단자화된 어떤 하위 집단들의 모임이 아니면 저마다 다른 성향과 가치를 지향하는 개인들의 집합체에 더 가깝다. 이런 현대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선적으로 연결해주는 결속력을 갖춘 공통서사를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아주 오래된 정체성의 끈이 끊어져 나가고 역사=기억이라는 등식을 당연시하던 삶이 이제 종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4)

    오늘날 문화학에서 기억은 역사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예컨대 역사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단순한 수집 내지 재현에 불과한 것으로서 현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사료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기억은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활성화되며 움직이고 있는 과거의 현상이다. 그래서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과 역사는 동의어이기는 커녕 정반대”임을 강조하면서, 기억이 갖고 있는 구성적이고 운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처럼 기억에 내재된 생산성, 즉 구성주의적 측면은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에 의해 “기능기억”, “활성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한층 더 강조된다.6) 반대로 그는 역사를 “저장기억”, “비활성적 기억”이라고 말하며 기억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처럼 그가 역사와 기억을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은 그것이 현재와 얼마만큼 역동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에 있다. 아스만에게 있어 기억, 즉 기능기억은 현재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현재적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행위다. 즉 기억은 과거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현재의 에너지 그 자체다. 피에르 노라가 기억이란 내용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틀(un cadre)”이며, “언제나 가변적인 쟁점이고, 전략들의 집합이며, 존재하는 것으로서 보다는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더욱 가치가 있는 어떤 실재”라고 이야기한 것도 기억이 갖고 있는 이러한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다.7)

    그런데 이처럼 우리사회의 각각 다른 계층을 상징하는 각 인물들이 과거의 동일한 순간을 현재의 지평 속에서 재구성하는 기억의 행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기억이 참과 거짓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저장된 사실이 아니라, 누가, 언제, 어떻게 회상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변형, 구성되며, 심지어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12년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되었던 박상현의 희곡 <싸이코패스>는 이처럼 과거의 사건이 각기 다른 인물들에 의해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명보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찾아오겠다며 길을 나선 뒤 아무 소식이 없는 어머니, 그리고 세상 한가운데 버려진 어린 남매 등, 이 희곡은 처음부터 어린 명보의 암울했던 가족사를 통해 현대사의 격랑 속에 내동댕이쳐 휩쓸려왔던 우리의 지난 역사를 상징화한다. 무엇보다 유일한 위안이었던 자신의 누이가 ‘보육원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던 장면은, 명보가 성장한 이후로도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날 늦은 저녁을 찾아먹기 위해 살그머니 부엌문을 열었을 때의 충격적인 순간을 명보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누이를 좋아했던 박회장(두식)이 그날에 대해 기억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는 보육원 아버지가 혜숙을 성폭행한 것에 대해서는 명보와 기억하는 바가 같지만, 당시 명보는 부엌문 틈으로 누나가 성폭행당하는 모습을 엿보고 있었고, 그런 명보를 문 앞에서 끌어내고 자신이 “부엌으로 들어가 벽돌로 곤대 뒤통수를 찍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10) 이에 대해 정작 성폭행의 당사자였던 누이(혜숙)가 기억하는 당시의 상황은 또 다르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언어가 개인의 기억을 안정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념 또한 중요한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기억을 지배하는 한 요소로서의 정념은 개인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절대 수정할 수 없다. 기억은 “자신의 수정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ㆍ신체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12) 명보와 혜숙, 두식의 기억이 각각 다르다 못해 서로 상반되기까지한 것도, 그 상황에 대해 그들의 정신과 신체 속에 각인된 경험에 의해 기억의 과정 속에 참여하는 방식, 현재의 입장, 그리고 그로 인해 소환하는 시간의 폭과 강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실제 사건이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예 기억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르게 변형되어 서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 인물의 기억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실제 일어난 일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과거에 대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13) 그리고 기억이 구성되는 과정에 어떤 요인들이 어떻게 개입하는지, 즉 그것들이 개인의 현재 속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유연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무엇보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게 하는가하는 것이다.

    4)피에르 노라, 『기억의 장소』, 김인중ㆍ유희수 외 옮김, 나남, 2010, p.33.  5)위의 책, p. 35.  6)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변학수ㆍ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p. 177 이하 참조.  7)피에르 노라, 앞의 책, p. 14.  8)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p.34.  9)박상현, <싸이코패스>, 남산예술센터 공연대본(2012.09), p.4.  10)박상현, p.6.  11)박상현, p.36~37.  12)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 p.343.  13)Jean Starobinski, Rousseau: Eine Welt von Wiederstaenden, München, 1988, p.294.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p.343에서 재인용.)

    3. 고착된 기억과 현재 속의 흔적들

       3.1. 한국사회의 집단기억?기억의 고착과 반복되는 외상기억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 과거에 대한 개인의 기억, 그 기억이 구성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가 속한 크고 작은 집단의 가치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와 연결되어 있고, 바로 이 ‘우리’가 개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14) 그런 점에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성장하면서 속하게 되는 집단의 정체성이 기억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이 다시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는 순환적이다.”15) 이 과정에서 모든 집단은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들의 의지나 욕구, 이익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과거로부터 특정한 이미지들을 선별해내고 영향력 있는 서사들을 찾아내 그것을 각각 그들의 상징적 아이콘이나 신화로 만든다. 이 모두가 그들의 결속력,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함인데, 그렇게 집단의 욕망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집단적 기억은 상당부분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적 결속을 위해 구성원 내지 다른 집단이 갖고 있는 기억의 차이나 다름은 가능한 한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집단적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관점을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개인 내지 다른 집단의 기억 내지 정체성과 불가피하게 충돌하거나, 개인이 그 집단기억에 대해 부담을 갖게 되는 경우다. 집단의 정체성이 건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집단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강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기억의 내용이 현재 및 다른 집단기억과 지속적으로 연관을 맺으면서 현재의 지평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경우에 따라 시각의 방향을 바꾸며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기억은 본래의 역동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고착된 담론, 지식, 이데올로기의 강압적인 수행도구가 되기 쉽다. 이처럼 다른 집단에 대해,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에 대해 유기적이고 윤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고착된 기억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고틀에 따라 편향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 과정에서 집단은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2013년 발표된 고연옥의 <칼집 속에 아버지>는 경직된 집단 정체성이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어긋날 경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억압이자 구속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 갈매의 주변 인물들은 갈매에게 무사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을 계속해서 강요한다. 그러나 칼은 집어들었으나 정작 무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인정할 수 없는 갈매는, 자기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로서는 “칼을 차고 걷는 것”이 더없이 끔찍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진 세상에서 둘도 없는 무사”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싸우는 게 싫고,” “누굴 해쳐야 하는 게 싫고”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다른 걸 배우고 싶다”로 간청한다. 그러나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인 찬솔아비가 하는 대답은 단 한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는 것.

    적에 대한 증오와 맹목적인 복수만을 거듭 강조하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억의 절대화와 원리주의”18)에 맞서, 갈매는 그에게 강제된 정체성에 부담을 느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가 속한 집단의 논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자기 안의 의심과 반감이 모두 ‘자신이 어리석은 탓’이라 생각하고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뭔가에 등 떠밀리듯 적을 찾아 무의미하게 사방을 떠돌게 된다. 물론 그는 강요된 기억에 의지해 싸울 뿐, 자기 안의 의심과 무기력, 그리고 절망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지만 사실 그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의지와 어긋나는 이런 집단적 기억의 논리 앞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 결과 갈매는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대한 어떤 주체적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한편으로는 극도의 무기력, 무감각 상태에 빠져들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과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이처럼 개인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재구성 자체를 거부하는 집단기억은 문화학에서 말하는 능동적이고 활력적인 에너지로서 기억의 과정에 생산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 자네(P. Janet)는 그처럼 자기화되지 못하는 기억, 재구성되지 못하는 기억을 ‘외상기억’이라 정의하며, 알라이다 아스만이 강조했던 활성적이고 기능적인 기억과 구분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억의 한 연장으로서 망각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기억의 문제가 문화학의 화두로 부상하면서, 기억의 연장선에서 함께 논의된 것이 바로 망각이다. 문화학에서 말하는 망각은 기억의 고착이나 왜곡을 막고 기억의 과정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전제조건이자 동반요소로 간주된다. 니체 역시 망각을 기억능력의 부재나 결핍과 같은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의 행위를 원활하게 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보았던 대표적 철학자다. 그는 인간이, 사회가 망각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억이 과부화되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21) 즉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강박이 오히려 개인과 집단을 극도의 피로 속으로 몰아간다. 이와 달리 망각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 망각은 개인이나 집단이 기억을 통해 형성된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모든 시선을 절대화하고 고착화시키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행위다.

    기억의 한 방식으로서의 망각은 강박으로 인해 왜곡된 기억의 틀을 벗는다는 의미에서 매우 구성적인 힘을 갖는 에너지다. 동시에 이것은 기억의 주체로 하여금 비로소 다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경직된, 경직될 가능성이 있는 기억의 틀들을 유연하게 수정하고, 타자와의 대면을 마다하지 않는 윤리적 행위다. 그것이 바로 기억의 다른 이름, 즉 망각의 핵심이다. “망각은 저장의 적이지만 회상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23)

    그러나 망각이 기억의 한 과정으로서 활성화되어 윤리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즉 한 집단이나 개인이 현재의 지평 속에서, 그리고 다른 기억과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오류로 증명된 것을 과감히 잊고 재구성하는 힘이 없다면, 그들의 기억은 본연의 활력을 잃고 특정 사건, 특정 시간 안에 고착된 상태로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집단의 무의식 속에 남아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대해 계속해서 억압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계속해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꿈들이 언제든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때로는 스스로 보호막을 치고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려들지 않게 된다. 이처럼 집단의 무의식 속에 꼭꼭 눌려진 상태로 갇혀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억압’된 기억이 바로 외상, 즉 트라우마다.

    그 어떤 저항도 탈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인간의 자기 방어체계는 압도당하고 와해될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는 어떤 격렬한 충격에 의해 주체의 무의식 속에 갇혀버린 기억이다.24) 그것은 언어 등을 통해 타자화, 상징화도 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전혀 객관화될 수 없는 억압된 상태로 몸에 달라붙어 개인을 극도의 우울과 무기력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과거와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기억의 지연과 분열을 가져와 정체성이 완전히 파괴되는 지점으로 개인을 몰아간다. 그로 말미암아 개인에게는 과거를 기억하려드는 행위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자 강박이 된다. 기껏해야 과거의 상흔을 동일한 패턴으로 지속적으로 반복하거나 필사적으로 외면해버릴 뿐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려들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고립은 심화되고 급기야 정체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른다.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이러한 트라마우의 증상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즉 언제건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계속해서 예상하는 가운데 수면장애를 앓거나 과민하게 반응하고 필요 이상의 화를 낸다거나, 과도하게 경계하고 놀라며 집중력이 떨어지는 “과각성(hyperarousal)”, 외상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는 “침투(intrusion)”, 그리고 트라우마와 연관되는 생각, 느낌, 상황을 지속적으로 회피하여 외상의 중요한 부분을 회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둔감해지는 “억제(constriction)”가 그것이다.25)

    이런 집단기억 및 집단정체성의 맥락에서 한국사회 전반을 놓고 볼 때 가장 아쉬운 점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집단의 정체성이 윤리적이고 활성적 차원을 획득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경제성장과 군부독재라는 두 얼굴이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적 징후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제도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탓이다. 그로 인해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왜곡된 현대사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히고, 이를 통해 피해자의 고통 및 그에 대한 가해자의 책임을 정확히 규명할 수 있는 공적인 장 또한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억눌린 목소리들, 특히 그때그때 권력의 장 바깥에 있던 정치적 타자들과 그 집단의 불만과 분노는 더 커져갔고, 이에 대한 반대편의 다른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화와 생산적 논쟁이 부재한 가운데 거듭 되풀이 되는 집단 간, 계층 간 대립은 현재의 지평 위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거듭 점검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외상을 ‘망각’하는 힘을 스스로 차단했다. 이처럼 대립적인 이념적 갈등 속에 가둬진 과거의 문제들은, 최근에 들어 갈등의 양상이 단순히 보수-진보라는 일관된 틀이 아니라, 정책과 경제,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다차원적이고 다면적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현실사회에 더 커다란 무력감과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최근 한국희곡 속에서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독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주로 ‘가계(家系), ‘가족’ 내지 ‘아버지’로 상징되는 극복되지 못한 과거에 대한 부담, 즉 역사적 외상으로 말미암아, 자기라는 심리적 구조 뿐 아니라 그와 공동체를 연결하는 애착 및 의미의 체계에 있어서도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는 기형적 인물들이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턱대고 상대방에게 떠넘기거나, 엉뚱한 자기환상 내지 변명 속으로 도망가버리는 등, 많은 인물들의 모습은 앞서 주디스 허먼이 말한 트라우마의 양상들과 상당부분 중첩된다.

       3.2. 과거로부터의 도피, 의도적으로 외면하기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책에서 역사적 외상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선택은 그것을 기억하느냐 잊느냐에 대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기억할 준비가 되지 못할 때, 그 해결되지 않는 외상이 현재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이야기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유신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수많은 질곡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집단적 논리에 휩쓸려, 때로는 침묵과 외면 속에서 기억하려 들지 않았던 그 질곡들은 시간 속에서 가책과 후회, 부담으로 축척되면서 갈수록 우리의 의식 속에 심각한 외상의 징후들을 남기고 있다. 2012년 발표된 기국서의 <햄릿 6>의 아버지 유령이나 앞서 언급한 박근형의 2009년 작품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화장실에 매달린 아버지는 자식들을 향해 끊임없이 고통을 호소한다. 자식들에게 이런 아버지는 그 자체로 버겁기 짝이 없는 역사의 외상이다.

    문제는 아들들이 자신들의 가계(家系)에 얽혀있는 과거의 서사를 그토록 필사적으로 외면해버리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내 완전하게 떨쳐내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역사적 외상을 “제대로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제대로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한다.29)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로 체현된 역사적 외상을 제대로 기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현재의 아들들에게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들로 형상화되는 과거는 그냥 잊혀져 “역사(책)으로 남았거나”, 그저 한때 있었다 사라진 어떤 것에 불과할 뿐, 다시 불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존재들이다. <햄릿 6>의 햄릿은 자신 앞에 나타난 아버지를, 그 아버지가 체현하는 문제투성이의 가계와 거기에 얽힌 서사를 떠올려보려 하지만 끝내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의 의식 속에서 아버지의 서사, 역사의 외상은 이미 오래 전에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과거의 외상이 연상되는 어떠한 상황도 회피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하는 것과 관련된 어떤 주도성도 포기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꾸 자신의 의식 밖으로 밀어내고 단절시킨다. 하지만 그럴수록 외상기억은 그때마다 새롭게 그들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며 더 커다란 무기력과 우울을 조장한다. 그는 자신이 계속해서 느끼는 불안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이 두 불안 사이에서 그는 계속해서 분노하고 공포와 무력감에 시달린다.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아버지의 시체와 현실로 대변되는 망가진 환풍기, 그로 인해 “똥냄새, 송장냄새” 때문에 “숨도 못 쉴” 희곡의 공간은 인물들이 처한 더없이 문제적인 상황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즉 이것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외상이 계속해서 축적되어 또 다른 현실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공간적 형상화다. 무엇보다 죽은 아버지의 시체는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희곡의 인물들은 과거건 현재건 그 모든 외상들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자신의 의식영역을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억제하며 회피와 부인의 태도로 일관한다. 장남인 형은 죽어 썩어가는 아버지 시체에 대고 영화를 다 찍을 때까지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그 과거, 즉 목이 매달린 채 간청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상징하는 외상의 서사를 깨끗이 덜어내고픈 것은 둘째도 매한가지다.

    이처럼 한사코 과거의 외상과 직면하려들지 않는 인물들의 태도는 급기야 상대방을 무턱대고 비난하면서 과거에 대한 부담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지경으로 이어진다. 둘째는 ‘형이 이 집 장남이니까’ 아버지 장례는 고사하고 환풍기라도 고쳐야 한다고 다그치고, 장남은 그런 둘째에게 그런 너는 스스로 “밖에도 못 나가는 병신”이라면서 ‘왜 허구헌날 자기 마누라 뒤에서 훔쳐보며 초등학생 수준의, 아니 뽀르노 수준의 일기만 끄적대며 스토커 같은 짓거리만 해대고 있느냐’고 거세게 맞받아쳐버린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들의 현실, 특히 과거의 문제와 연결된 현재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한, 이들이 아무리 ‘악취 나는 세상을 구원할 제 3의 방랑자’에 대한 SF 영화를 찍어댄다 한들, 아무리 “창조적 영감이 담긴 수십 편의 소설과 동화, 수백 편의 시와 수백 개의 마법의 발병품”이 담긴 일기를 쓰고 있다 한들 그 모든 서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상대를 탓하며 정작 자신의 책임은 외면해버리는 이 극단의 대립 후에 인물들에게 남는 것은 다시금 더 커다란 절망과 무기력이다.

    그런가 하면 2013년 박근형이 발표한 또 다른 희곡 <피리 부는 사나이>에는 현실적 욕망에 사로잡혀 과거를 외면하고 급기야 과거를 자기들 입맛에 꼭 맞게 안일하고 상투적인 서사의 형식으로 만들고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엄마가 아들 친구이자 아빠가 모시는 회장의 아들(완규)의 아이를 임신했다. 가족들은 이에 대해 한결 같이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이내 이러저러한 각자의 이해관계와 명분 속에서 증발되어 버린다. 오랜 세월 회장의 종으로 살아왔던 아빠에게는 이미 회장이란 인물은 그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그에게는 그간 지켜온 회장과의 ‘의리’가 우선이고 얼마 남지 않은 환갑이 중요하다. 딸과 사위에게는 회장이 호텔에서 치러주겠다 약속한 자신들의 결혼식이 더 중요하다. 엄마의 임신에 펄펄 뛰던 아들은 회장이 손에 쥐어준 징집면제 통지서 한 장으로 단번에 누그러진다. 결국 엄마의 임신은 하필 그날 내렸던 “비” 또는 “중년의 우울” 탓으로 가족들에 의해 어이없이 희석되어 버린다. 문제가 되는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들 가족이 이 모든 사건 내지 기형적인 가족서사의 궁극적 원인제공자인 회장, 그리고 그의 아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안도하는 아빠의 모습에서는 사내로서의 자존심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아빠의 “피리”에 스며있는 과거, 그 과거 속에 존재하는 외상의 흔적은 어이없이 증발되어 버린다.

    그들에게는 현재 어떻게 잘 먹고, 편안하게, 남이 보기에 얼마나 그럴듯하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현실적인 명분과 실리를 쫓으며 역사를 묵인하고 회피한다. 이처럼 과거 자체를 아예 기억하려들지 않는 인물들에게 지난 시간은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낯선 것, 추상적인 것, 그리고 현재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 아니면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한 낭만적인 회상 정도로 그칠 뿐이다. 이들에게 과거, 과거의 외상은 현재와의 연관성을 잃은 채 미래로부터도 분리된, 그래서 죽어있거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되어 있다. 무엇보다 과거가, 심지어 과거의 그 많은 외상들까지 이처럼 감상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윤색되고 있다는 것은 심각히 우려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햄릿 6>에서 유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기억하려들지 않는 현재의 우리를 향한 역사적 외상들의 호소인 듯하여 매우 아이러니하다.

       3.3. 강박의 반복과 그 변형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건 그 원천이 되는 사건으로부터 단절되어 제 스스로 살아남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의식은 전체적이고도 통합적인 맥락을 잃고 파편화된 감각과 맥락 없는 심상에만 집중한다. 그 결과 그들의 의식의 공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지게 된다. 최근 한국희곡에는 그러한 트라우마의 한 양상으로서, 끊임없이 악몽과 환각에 시달리며 과거의 경험들에 대한 강박을 기형적으로 반복하거나 비트는 인물들 또한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흔히 아버지들로 대변되는 역사적 외상에 대한 죄의식과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로 인해 현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한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의 기본 구성(basic structures of the self)”36)에 손상을 입은 이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우울증이 아니면 무기력, 부정과 회피로 일관한다. 최근 희곡 속에서 이러한 인물들 대부분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인물들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과거, 달리말해 제대로 망각되지 못한 과거의 무게로 인한 지독한 트라우마에 대한 몸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외상, 그리고 그로 인한 강박은 희곡의 인물로 하여금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로서 자기도취적인 합리화 아니면 기형적인 자화상 속으로 빠져버리게 만드는데, <너무 놀라지 마라>의 둘째는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늘어날대로 늘어난 내복차림으로 몇 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온종일 틀어박혀 게살만 먹어대는 그는 그런 자신을 게살을 녹여먹으며 바다를 군림하는 절대자 문어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면서, 둘째라는 이유로, 병신이라는 이유로 자기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그가, 그까짓 게맛살 하나로 자신을 바닷 속 제왕인 문어와 동일시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이러한 비현실감, 즉 자기 환상은 현실 속의 무능력과 무기력, 즉 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을 완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자, 또 다른 자기보존의 방식이다. 그러나 환상 속의 자기와 현실 속의 자기가 이처럼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 대립되면서 현실에 대한 그의 의식은 점점 더 마비, 변형될 수밖에 없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기국서의 <햄릿 6>의 햄릿 또한 객관화, 상징화되지 못한 과거, 자기화되지 못한 과거를 신체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다. 의식의 파편화는 지식, 기억, 정서상태, 그리고 신체경험이 건강하게 통합되는 것을 방해하는 바, 그런 차원에서 그 또한 자신이 “살아서 기어야하는지, 제자리에서 기어야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총체적인 무력증에 사로잡혀 있다. 끊임없는 악몽 속에서 햄릿은 아버지를 포함해서 동학노인, 광주, 용산, 성폭행 등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수많은 유령들과 부딪힌다. 그리고 부딪힐 때마다 완강하게 유령의 존재를 뿌리친다.

    지속적인 강박은 햄릿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변형시켰다. 그는 신체적인 평온이나 평안함의 상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마치 몸이 자신을 계속해서 거역하는 것만 같은 불편함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초조해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체화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신체에 대한 이미지, 다른 이에 대한 내적 심상, 그에게 한때 일관성과 목적성을 부여했던 모든 심리적 구조는 파괴되었고 하나씩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극복되지 못한 채 억압된 상태로 남아있는 과거의 외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인물은 2012년 발표된 김은성의 <목란언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희곡에서 조대자의 망치는 박근형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가보(家寶)인 피리처럼 과거를 함의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예컨대 그 망치는 “왜정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시던 태산이 할아버지”가 “김구 선생의 비밀아지트를 만들고”, “일본 놈들 대갈통을 박살내던” 유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들, 즉 ‘사우디 노가다 판’에서 죽은 조대자의 남편을 거쳐, 현재 룸살롱을 경영하며 강국식으로 대변되는 외국자본에 기생해 그의 돈을 관리해주고 있는 조대자에게 물려졌다. 이처럼 망치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한 가족의 가계도는 조대자라는 인물과 그녀의 룸살롱으로 이어지면서 경제성장과 실적 중심의 기형화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주에서 사우디까지 이 역사적인 망치”를 품에 안고, 조대자가 “몸 팔아서” 키운 그녀의 자식들은 정작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있다. 한때 한국사 박사였던 큰 아들(허태산)은 실연을 당한 후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의 우울의 정도는 “이모셜소매티제이션, 감정의 신체화가 심각해 자살지수가 위험수위를 넘어서 범람한 상태”다.39) 스스로를 “돼지새끼”, “쥐새끼”라 부르며 극단적인 자기혐오감을 표출하는가 하면, 피자와 치킨을 게걸스레 쑤셔넣고 토하기를 반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때운다. 조대자는 이런 큰 아들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그를 위해 나머지 자식들이 도움을 줄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나머지 자식들도 온전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둘째 아들(허태강)은 철학교수이지만 학과가 폐과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고, 소설가인 막내(허태양)는 작가로서 심한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선배로부터 배신까지 당한다. 그 어느 누구도 조대자의 역사적 망치를 물려받을 능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대자는 그녀 자식들의 우울과 무기력으로 대변되는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로 이어지는 외상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이때 조대자의 망치가 결국 그녀의 자식들이 아닌 조목란에게로 물려지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탈북여성인 조목란은 애초 조대자와 그녀의 자식들이 자신들의 무기력과 위선과 대면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타자적 존재였다. 그러나 조목란 역시 이들의 무기력과 우울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조선호가 연신 무대 한쪽에서 그리고 있는 김일성 초상화는 조목란에게는 애초부터 벗어나고 싶은 트라우마였다. 그녀의 탈북은 조목란이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했던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월경(越境)은 조대자 가족의 또다른 트라우마에 부딪히며 더 이상 타자로서의 능동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희곡의 마지막 장면은 중국 뒷골목의 싸구려 가수로 전락한 조목란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는 조선호, 한국사 책들이 쌓여진 옆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허태산, 그리고 한 복판에 놓여있는 역사적 망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남북분단이라는 외상을 포함해 여전히 우리들을 얽매고 있는 트라우 마의 존재성을 공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인간은 그것의 동기가 된 사건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무의식적으로 계속 반복해 재연(reactment)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강박적인 증상과 꿈은 원인과 발달, 단계와 같은 선형적 시간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형되는 가운데 기형적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억압된 것의 회귀(the turn of the repressed)”라고 말할 수 있다.42)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었던 요소들이 그 원인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그에 대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상현의 <싸이코패스>의 주인공 명보다. 명보의 기억 속에는 누나에 대한 기억은 극복되지 못한 하나의 외상이다. 그 외상은 한번도 제대로 망각되지도 애도되지도 못한 채 억압된 상태로 그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어린 소녀들로 그 대상이 전이되어 재연된다.

    명보에게 있어 누나로 상징화된 역사적 외상은 그에게서 주체로서의 힘을 앗아갔다. 과거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의 무게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이 같은 괴리로 말미암아 그 벌려진 틈 사이로 온갖 부인과 왜곡이 진행된다. 그가 어린 소녀들의 몸 안 구석구석을 도려내고 잘라내고 만져보며 다시금 ‘누나’를 기억하려는 이 반복적인 ‘학습’은 바로 그 외상의 재연이자 반복적인 침투를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고착된 기억은 점차 절대적인 악(惡)이 되어간다. 어린 소녀들의 조각난 시체들은 바로 그 악의 희생물이자 또 다른 외상의 흔적들이다. 명보는 그 시체들을 “부패하지 말라고” “면사무소 정계장네 고조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여흥 민씨네, 조목사님네, 그리고 삼몽그룹 회장님 외조부님 무덤 위에” 올려놓는다.44) 그렇게 해서 명보의 억압된 기억과 트라우마는 그것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주도해 온 권력들의 면면 속으로 흡수되어 반복되면서 현재로 잠입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덤덤하게, 때로는 능글거리며, 그리고 때로는 짐짓 자랑스럽게 자신의 살인, 즉 누나 찾기의 과정을 서술하는 명보의 모습은 실로 소름이 끼친다. 그런 그에게서는 어떤 망각도, 애도도, 타자화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희곡에 등장하는 정치인, 재벌, 검사, 형사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마을주민들 등 현재의 인물들 모두가 이 명보의 모습을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명보와 같은 방에 수감되었던 1004와 4001은 명보를 죽여 자신들이 명보가 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 모두는 또다른 명보들이다. <싸이코패스>에서 명보는 기억되지 않은 외상 그 자체로서, 희곡 속에 등장하는 모든 기형적인 싸이코패스들을 하나로 합친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3.4. 애도의 부재, 반복되는 오류

    라카프라(D. LaCapra)는 두가지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가지고 역사적 외상에 대해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행동화(acting out)”와 “성찰적 극복하기(working through)”가 그것이다.45) 우선 ‘행동화’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개인이 회상이나 악몽, 내지 반복적인 주문의 형태로 자신의 상처들을 아무런 중간단계 없이 직접적으로 표출시키는 행위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정상적인 기억으로 떠올릴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을 몸으로 쓰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희생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과거의 사건이 있는 그대로 되살려지기 보다는 일종의 변형이 가해진 형태로 재경험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행동화’는 동일한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희생자들은 장차 자신의 상처를 성찰적으로 극복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성찰적인 극복으로 나가지 못할 경우에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래를 위한 계획이나 희망을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며, 우울증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라카프라가 역사에 대응하는 긍정적 방식으로 제시하는 ‘성찰적 극복하기’란 희생자가 과거와 정면으로 대면하여 트라마우마가 된 기억을 타자화시킴으로써 자신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진화된 상태를 말한다. 이 단계에 놓일 경우, 희생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를 혼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의 흉터와 생채기에 직면할 수 있는 단호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이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련의 절차를 프로이드는 ‘애도’라고 이야기한다. 애도란 죽어버린, 혹은 상실한 그 어떤 대상으로부터 자아가 건강하고도 성공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서, 바로 이 애도를 통해서만 개인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삶에 대한 흥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애도가 과거와 무조건적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과거의 상처를 깨끗이 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찰적 극복은 희생자 스스로가 과거를 기억하되 그 과거에 고착되지 않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그것은 불편한 것,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윤리적 소통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희생자를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 대한 성찰적 극복은 앞서 언급한 망각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백하룡은 2012년 발표한 희곡 <전명출 평전>을 통해 애도하지 못하는 한 인간을 보여준다. 전명출은 유신정권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근 40여년 간의 한국현대사를 몸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새마을 운동시절 마늘을 빼돌렸다가 동네 이장인 친구에게 매질을 당하고 홧김에 고향을 떠났다. 그 후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한때는 공사장 물품을 빼돌린 소장을 ‘정의’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이를 계기로 그의 삶은 완전히 돌변한다. 한때 그가 비리를 지목해 고발했던 선임자를 능가하는 발빠른 꼼수로 건설업과 땅투기를 통해 돈을 벌고, IMF가 터지자 냅다 줄행랑을 친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는 소위 ‘4대강 특수’를 노리고 고향친구들과 처남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인다. 이런 전명출은 한마디로 현재의 찰나적인 욕망에 빠져 ‘기형적인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는’ 인간일 뿐 더러,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기 이익을 구하는 비겁한 인물이다. 이런 그에게 순심은 환기시키는 것은 그 옛날 ‘아이스께끼 하나 먹고 싶어 하던 자신을 남편인 전명출이 가엽게 바라보던’ 순수의 시간이다. 욕망과 아집으로 일그러지기 전의 원초적인 그 시간을 통해 남편이 왜곡된 시대 속에서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분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으로 말하자면 이런 순심은 전명출에게는 그를 트라우마로부터 치유해줄, 즉 과거에 대한 일정한 애도의 절차를 거쳐 현재 자신의 모습과 생산적으로 대면하게 해줄 수 있는 일종의 치료사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전명출이 한때의 순수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연출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소위 애도의 절차를 밟기를 원한다. 순심은 다시 말한다. “그냥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깁니까. 어떤 과거를 사느냐에 따라 지금의 얼굴을 바꿀 수 있습니다〔…〕”47) 하지만 전명출은 이러한 애도의 기회를 단번에 거부한다. 과거의 반복적인 실패를 통해서 오로지 “사람은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하나만 배운 그에게, 그 이전의 순수했던 순간은 그때그때의 욕망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래서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인식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전명출의 이러한 모습은 과거에 대한 애도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그래서 과거 속의 오류를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다.

    반면 고연옥의 <칼집 속에 아버지>의 갈매는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되는 무사로서의 정체성에 맞서 자신의 현재를 바탕으로 아버지라는 과거와 끊임없이 대면하려 한다는 점에서, 앞선 희곡의 인물들과 비교할 때 스스로 애도를 위한 주체적 능력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현실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자기 정체성을 놓고 갈등하던 갈매는 그의 무의식 속에 하나의 강박처럼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가운데 이렇게 항변한다.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하는 사람은 깊이 있고 완전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재구성 작업을 통해 그는 트라우마를 전환시켜 자기 삶의 이야기로 통합하는 것이다. 갈매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었던 아버지 역시 그 이전의 아버지들이 만들어놓은 오류로 인해 자기 못지않은 회의와 혼란 속에 싸여 있었다는 것을, 하여 그의 아버지 역시 무사라는 공허한 담론 속에 갇혀버린 허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아버지로 대변되는 과거의 오류, 그리고 그 허상을 인식한 갈매는 비로소 그것을 자기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이야기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모두가 그에게 검은등을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상황에서 갈매는 자신의 칼집에서 칼을 꺼낸다. 그러나 이제 갈매가 칼집 속에서 꺼낸 칼은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심지어 동시대의 모든 인물들이 습관적으로 반복했던 복수와 살인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기 위한 도구는 더 이상 아니다. 갈매는 악을 위해 싸우건, 용서를 하건 이제는 밖으로부터 강요된 집단적 논리의 틀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할 것을 비로소 다짐한다. 그러나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복수와 싸움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의 모습 앞에서 갈매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의 죽음은 집단적 논리에 대한 무기력한 패배와 좌절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애도, 그를 통해 과거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거듭되는 복수와 반복, 갈등으로 점철된 아버지들의 싸움, 그 숱한 외상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분리해낸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애도가,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의 분리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사실은, 기억의 강박이 얼마나 강하고 벗어나기 힘든 것인가를 역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14)모리스 알브박스(Maurice Halbachs)가 말하는 “기억의 사회적 틀(social framework)”은 이처럼 한 개인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내지 집단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되는 것임을 강조한 대표적 예 가운데 하나다.  15)Aleida Assman, “Soziales und kollektives Gedächtnis”, in: www.bpb.de/system/files/pdf/0FW1JZ.pdf, S.2.  16)Peter Novick, Nach dem Holocuast, Frankfurt a.M. 2003, S. 14. (Aleida Assman, “Soziales und kollektives Gedaechtnis”, S. 2에서 재인용)  17)고연옥, <칼집 속에 아버지>, 한국연극 2013.05. p.68-83. p.69.  18)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p.189.  19)고연옥, p.73.  20)P.Janet, L’Automatisme Psychologique, Paris: Felix Alcan, 1889, p.457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최현정 옮김, 열린책들 2012. p. 75에서 재인용).  21)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p.293.  22)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ㆍ도덕의 계보』,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p.395~396.  23)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p.34.  24)이를테면 범죄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던가, 물리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은 경우에도 발생하며, 의식을 압도할 정도로 위협적인 자극이나 흥분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주목을 받는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전쟁의 후유증이다.  25)주디스 허먼, 『트라우마–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최현정 옮김, 열린책들 2012. p.71.  26)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선 것을 환영합니다』, 이현우ㆍ김희진 옮김, 자음과 모음 2011. p.38.  27)기국서, <햄릿 6–삼양동 국화 옆에서>, 남산예술센터 공연대본(2012.11), p.14.  28)박근형, <너무 놀라지 마라>, p. 107.  29)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p.37.  30)기국서, p.11.  31)기국서, p.30.  32)박근형, <너무 놀라지 마라>, p.109.  33)박근형, <너무 놀라지 마라>, p.112.  34)박근형, <피리부는 사나이>, 선돌극장 공연대본(2013.07), p.32.  35)기국서, p.13-14.  36)주디스 허먼, p.106.  37)박근형, <너무 놀라지 마라>, p.108)  38)기국서, p.14.  39)김은성, <목란언니>,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공연대본(2012.03), p.11.  40)김은성, p.19.  41)김은성, p.57.  42)Dominick LaCapra, Soundings in Critical Theory,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p.57.  43)박상현, p.28.  44)박상현, p.15.  45)‘행동화’와 ‘성찰적 극복하기’에 대한 라카프라의 견해는 육영수,「기억, 트라우마, 정신분석학 : 도미니크 라카프라와 홀로코스트」(<미국학논집>(2004. 겨울) 172~196)를 참조했음.  46)백하룡, <전명출 평전>, 남산예술센터 공연대본(2012.07), p.37.  47)백하룡, p.37.  48)고연옥, p.80.  49)고연옥, p.83.

    4. 결론-성찰적 공간으로서 희곡과 문화적 기억

    노라가 ‘기억의 장’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듯이, 과거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상이한 복수의 기억들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관여하는 바, 이념적으로 같은 담론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은 기억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의 대상과 내용은 그때그때 특정한 정치ㆍ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대로 존속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재구성되기도 하고, 억압되거나 심지어 폐기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은 복수로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이면에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간의 역학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논쟁적이다. 그러나 기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와 얼마만큼 역동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의 여부다. 문화적 지평 위에서 논의되는 기억은 현재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과거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현재의 에너지이고 이 에너지는 끊임없이 기억의 내용을 재구성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지평을 확장시켜준다.

    그런데 이처럼 기억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주체인 개인 및 그 개인들이 모여 공유하는 집단의 가치와 정체성이 건강해야 한다. 아니 반대로 개인 및 집단의 가치와 정체성이 건강해야 기억의 행위 또한 건강하다. 기억과 정체성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다른 가치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며, 열린 지평 위에서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윤리적 힘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특정 집단, 특정 계층의 정체성만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다른 집단과 계층, 타자들의 기억에 대해 폐쇄적인 기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억이 아니다. 그러한 기억은 역사에 대한 닫힌 시각으로 인해 역사를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않다. 그로 인해 역사의 외상들은 계속해서 축적되면서 현재에까지 지독한 트라우마의 징후들을 남길 뿐이다.

    본 논문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희곡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기력하거나 뻔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독한 강박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비틀어져 있다. 희곡의 인물과 사건이 동시대 사회적 지평 위에서 구성되는 것이라면, 바로 이들 건강하지 못한 인물들과 그들의 서사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우울하고도 위험한 트라우마를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로 불완전하고 기형적인 가계(家系)에 관한 이들 서사들은, 이념을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모든 민족적, 국가적 현안을 흑과 백, 참과 거짓이라는 명백한 이분법적 틀에 가둬 단순화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실 그 자체가 남긴 후유증이다.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모습 속에서 “‘잊힌 행위’라기 보다 ‘행동하지 못한’ 잊힌 실패, 사회의 ‘타자’들과의 연대행위를 제지하는 사회적 결속의 힘을 중지하지 못한 실패”의 징후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50)

    일찍이 얀 야스만(Jan Assman)은 이들 문화적 매체들에 의해 추동되는 문화적 기억은 “과거의 운명적이었던 사건들(fateful events of the past)”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토대로 텍스트나 제의, 기념비와 같은 문화적인 형상화를 통해 그에 대한 집단의 기억을 지속시켜나간다고 이야기한다.51) 그러면서 그는 이 “기억의 형상들(figures of memory)”은 계속해서 일상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회상적인 성찰(retrospective contemplativeness)”52)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볼 때, 문화적 기억은 과거를 현재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집단의 기억 및 정체성을 건강하게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희곡들이 특히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기억과 외상의 문제를 둘러싼 이 같은 일련의 트라우마를 다뤘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희곡은 정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공약들이 쏟아지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집단 간의 이념갈등, 특히 그 기저에 놓인 해묵은 반목과 상처들이 청산되지 않는 한, 새로운 시대는 요원할 것이라는 작가들의 인식의 결과다. 그렇게 볼 때 <햄릿6>에서 햄릿의 저 마지막 독백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과거의 상흔 앞에서 던지는 한 개인의 진지한 자기고민이며, 궁극적으로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희곡의 경고다.

    이들 희곡은 인물과 상황을 의도적으로 일그러뜨리는 가운데, 작가들은 이제라도 과거에 대한 생산적이고도 열린 토론의 장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과거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절차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현재는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들 것임을 경고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 희곡은 그 자체로서 성찰의 공간이자 문화적 기억의 장소가 된다.

    50)슬라보예 지젝, p.38.  51)Jan Assman, Collective Memory and Cultural Identify, in: New German Critique, No.65, Cultural History/ Cultural Studies(Spring-Summer, 1995), pp. 123-133, p.129.  52)이는 Aby Warbug가 한 말로서 Jan Assman, Collective Memory and Cultural Identify, p.129를 참조했음.  53)기국서,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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