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rs and Hospitality in Mary Shelley’s Frankenstein

메어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이방인과 환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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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issue of strangers and of hospitality in Mary Shelley’s Frankenstein, based on Kant’s concept of hospitality as “the right of a stranger” and on Derrida’s discussion of hospitality. It first examines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domestic relations within the Frankenstein family and Frankenstein’s relation to the monster: an effort to create unity out of a multiplicity of elements, and what can be called a “debt economy.” Then, reading the animation scene of the monster as a version of the advent of a stranger, it deals with the question of hospitality. More specifically, the arrival of Clerval immediately follows the animation of the monster because it effectively dramatizes the paradox that there is no hospitality without hostility. The opposition and the apposition between hospitality and hostility are also seen in the De Lacey family’s welcoming Safie and rejecting the monster. Frankenstein’s failure and the De Lacey family’s failure to welcome the monster show that hospitality as “right” exemplified by Kantian hospitality does not apply to a stranger like the monster who has neither name nor relation and who is categorized into what Derrida terms “an absolute other.” This paper also looks at Safie’s problematic subversion against her father, which loses its subversive charge in the context of racial relations between Turkish Mahometans and European Christians. Safie’s father looms large in the context of the issue of hospitality because his episode suggests that the category of race causes hospitality to malfunction.


  • KEYWORD

    Mary Shelley , Frankenstein , stranger , conditional hospitality , unconditional hospitality

  • I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영구적 평화: 철학적 소묘」(“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에서 인류가 영구적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예비 조항들과 확정 조항들, 추가 조항들을 제시하면서, 세 번째 확정 조항에서 이방인과 환대(hospitality)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조항에서 칸트는 환대를 박애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영토에 도착할 때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이방인의 권리”라고 정의한다(105). 칸트가 환대를 이방인의 권리로 정의하는 근거는 지구라는 인류의 거주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공간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서로의 교제를 허용해야만”한다는 것이다(106).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이 손님으로서 대접받을 권리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의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논평하듯이, 이방인의 권리로서의 환대는 다른 사람의 영역에 갈 수 있는“방문권”에 국한된 것일 뿐, 그 지역에 대한“거주권”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Cosmopolitanism 21). 그러므로 칸트의 환대 개념에는 이방인이 도착했을 때 그를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할특권은 바로 주인(host)에게 있다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1

    이방인이 도착했을 때, 주인은“그가 평화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한”그를 적대해서는 안 된다(Kant 106). 그러나 이방인을 손님으로 환대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재량에 달려 있고,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주인은 그의 영역에 나타난 이방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칸트의 시나리오에서 이방인의 도착은‘당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이방인의 정체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주인으로 하여금 묻게 만들고, 이 질문들은 주인이 환대할 이방인을 선택하고 골라내는 배제와 포함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제기하듯이, 환대는 주인이 이방인에게 그 이름을 묻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가, 아니면 이방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무조건적인 환영”과 함께 시작되는가?(Hospitality 29).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환대는“그 정체를 확인할수 있는 주체”에게 제공되는가, 아니면“그 정체를 확인하기 이전에”이방인에게 제공되는가?(Hospitality 29).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의 정체를 묻지않는 무조건적인 환영은 고려 대상이 아니며,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이방인만이 환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데리다는 환대를 칸트식의 권리 개념에 근거하는 조건적 환대와 그 범위를 벗어나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조건적 환대로 구분하여 고찰한다.

    외국인, 혹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이방인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xenos”는 “완전히 배제되고 이질적인”존재로 간주되는 야만인(barbarian)과 다르다는 구분에 기대어, 데리다는 이름을 통해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이방인과 이름이 없는 이방인을 구별한다(Hospitality 21). 칸트가 제시하는 이방인의 권리로서의 환대는 전자에게 제공되는 것일 뿐, 후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후자를“절대적 타자”로 분류하고, 그런 이방인에게 제공되는 환대를“절대적 혹은 무조건적 환대”로 분류하는데, 무조건적 환대는 권리 개념을 토대로 하는 환대, 즉 조건적 환대와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Hospitality 25). 무조건적 환대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절대적, 미지의, 익명의 타자”에게도 이름을 묻지 않고 그의 집 혹은 영역을 개방할 것을 주인에게 요구한다(Hospitality 25). 그것은 마치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데리다가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사이의 끊임없는 협상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이방인의 권리로서의 칸트의 환대 개념과 데리다의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메어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에 나타난 이방인과 환대의 문제를 고찰할 것이다. 먼저, 일종의 구출 형태를 통해서 이방인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프랑켄슈타인가족이 확장되는 방식과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이 서로 이질적인 신체 부분들을 모아서 괴물을 창조하는 방식 사이의 유사성을 검토할 것이다. 그 다음, 괴물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을‘이방인의 도착’이라는 사건의 한 변형태로 보고, 이방인으로서의 괴물에 대한 프랑켄슈타인의 반응과 예기치 않게 그를 찾아온 친구인 클레르발(Clerval)에 대한 그의 반응 사이의 차이를 통해 환대의 양상과 그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환대의 한계는 괴물과 사피(Safie)에 대한 드라세(De Lacey) 가족의 서로 상반되는 반응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괴물과 드라세 가족의 관계에서는 권리로서의 환대 개념이 간과하고 있는 감정적 애착의 요소를, 사피와 드 라세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젠더와 인종의 문제를 또한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사피의 아비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인종이라는 범주가 환대 행위에 가할 수 있는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1환대 논의에서 데리다는“주인”(host)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칸트는 이방인이 도착하는 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으며 그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공동체를 지칭할 때“주인”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고 있지는 않다. 대신에“누군가 다른사람”(someone else) 혹은“토착 가정”(the native household)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방인이 도착하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 개인 혹은 공동체를 지칭할 때 “주인”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쓰기로 한다.

    II

    『프랑켄슈타인』의 비평사에서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온 주요 문제들 중 하나는‘아름다운 신체 부분들만을 모아서 만든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 작업을 직접 기획하고 수행한 프랑켄슈타인 자신조차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추한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이다. 크리스 발딕(Chris Baldick)처럼 낭만주의적인 유기체 개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비평가들은 유기체의 아름다움이란 “[유기체] 내부에 있는 순수한 생명 원칙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것이지, 신체부분들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 부분들로 구성된 유기체 전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35). 반면에, 괴물을 다중을 형상화하고 있는 존재로 읽어내는 워렌 몬텍(Warren Montag)은 괴물이 추한 것은“그가 인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본다(387). 그러나 괴물의 추함은 젠더와 계급, 인종은 물론이고 심지어 종(species)을 나누는 경계선을 위반하면서 서로 다른 신체들로부터 가져온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부분들을 짜 맞춰 새로운 신체를 만들고, 그 신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저지르는 폭력에 기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인위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삶과 죽음의 자연적 순환 과정을 교란시킨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신체를 만들고 그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실제로 무덤들을 뒤지고“살아있는 동물을 고문”한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작업은 폭력적이다(54). 그의 창조 작업은 또한 신체를 구성할 부분들을 수집할 때 아름다운 것들만을 골라 선택하는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폭력적이고, 그 폭력성은 내부적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질적인 신체 부분들에 외부에서 강제로 통일성을 부과하려는 시도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새로운 신체를 구성할 부분들을 선별하여 모으는 과정에서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잘 작동하는 듯 보이지만, 이질적인 요소들의 조립물인 그 신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이 실패는 바로“그의 누런 피부 아래에 있는 근육들과 동맥들이 거의 다 드러나 보였고,”“윤나는 검은”머리카락들과“진주처럼 하얀”치아들이“회갈색이 도는 하얀 눈자위와 거의 같은 색깔의 축축한 눈”과 끔찍한 대비를 이루는 괴물의 외양으로 시각화 된다(57). 괴물의 피부는 신체의 내부 풍경을 덮어 가리지 못함으로써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신체부분들의 색깔들은 서로 맞지 않는 이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괴물의 복수성과 잡종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내부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너무 얇고 팽팽하게 잡아당겨 펴진 괴물의 피부를 강조하면서, 프랜시스 퍼거슨(Frances Ferguson)은“다양한 요소들에서 통일성을 창조해내려는 억지스러운 노력으로서의 팽팽함의 이미지(imagery of stretching)는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을 포함하려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관대한 노력들에서 반복된다”고 주장한다(9). 이방인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확장되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은 이질적인 요소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에 토대를 두고 있고, 다른 신체들로부터 가져온 이질적인 부분들을 조립하여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내려고 할 때 프랑켄슈타인은 동일한 종류의 노력을 시도한다. 또한,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그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점은,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신체를 이룰 부분들을 모을 때 작동하는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과 연결된다. 이것은 마치 부지불식간에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가족이 확장되는 방식들을 배우고, 그 방식들을 자신의 창조 작업에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맥에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한 변형태로 간주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한 실패한 변형태라는점이다. 만일 괴물이 형상 측면에서 프랑켄슈타인의“불결한 유형”이라면, 구조측면에서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불결한 유형이다(130). “내 형상은 . . . 닮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무시무시하다”고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말할 때, 그가 지시하는 닮음의 직접적인 대상은 프랑켄슈타인이지만,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130).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내부 관계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관계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은 둘 모두 일종의‘부채 경제’(debt economy)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해너 M. 스미스(Johanna M. Smith)가 지적하듯이, 프랑켄슈타인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애정에는“감사와 의무의 부기 사고방식”(bookkeeping mentality of gratitude and obligation)이 스며들어 있다(44). 프랑켄슈타인의 부모의 결혼은 고아이고 가난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나이가 많지만 부유한 남성 후견인에게 은혜를 갚는 보답의 행위로 읽을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부모의 보호와 관심은 부모로서“그들이 생명을 부여한 존재에게 진”“그들의 의무”로 기술되고(34), 자식으로서 프랑켄슈타인이 그들에게 느끼는 사랑은 변덕스러운 다른 가정의 부모들과는 달리 친절과 관대함으로 그를 돌보는 부모에 대한“감사”의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37). 고아가 되어 하층계급에 속하는 수양 가족과 살다가 캐롤린(Caroline)에 의해 프랑켄슈타인 가족에게 입양되는 엘리자베스(Elizabeth)와 친모에게 구박받다가 역시 캐롤린에 의해 프랑켄슈타인 가족 속으로 편입되는 저스틴(Justine)은 프랑켄슈타인 가족에게 헌신함으로써 캐롤린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쓴다. 이 와 유사하게, 프랑켄슈타인은 처음에는 그와 새로운 종 사이의 관계를 아비로서의 그가 자식으로서의 새로운 종에게 주장할 수 있는“감사”의 관점에서 상상한다(54). 비록 창조 작업의 결과물인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자식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창조해놓고는 유기해버린 것에 대한 복수로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의 주변 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이 둘의 관계는 적대관계로 바뀌지만, 그들이 서로에게서 받은 것을 서로에게 되갚아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관계는 여전히 부채 경제의 범위 내에 있다.

    프랑켄슈타인 가족에게서 나타나는 부채 경제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애정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소유욕이 강한 온정주의(paternalism)이다. 이 온정주의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이방인을 환대하여 그 일원으로 포용할 수 있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와 계급 위계질서를 재확립하는 데 일조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월튼(Walton)에게 들려주는 그의 가족 이야기는 계급 구분을 회복하는 행위, 즉“고아이자 거지”가 된 캐롤린이 하층계급으로 추락하는 것을 알폰소가 구해주는 행위로 시작된다(32). 엘리자베스를 가족의 일원으로 입양할 때 동일한 드라마가 재상연된다. 이 경우에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캐롤린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구조를 프랑켄슈타인 가족뿐만 아니라 캐롤린의 자기 확장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는 여러 면에서 캐롤린의 삶을 반복하는 복사본과 같은 인물이다. 캐롤린처럼 엘리자베스는 고귀한 신분 출신이지만 고아가 되어 하층계급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원래의 계급으로 구조된다. 캐롤린이 죽은 후에 엘리자베스는 프랑켄슈타인 가족 내에서 캐롤린이 담당했던 여성적 역할들을 떠맡음으로써 캐롤린을 실질적으로 대체하기까지 한다. 더구나,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남성 파트너가 소유권을 가지는 일종의 소유물로서 존재한다. 캐롤린이 정원사로서의 알폰소가 보살펴야 하는“아름다운 외래 식물”이라면(33), 엘리자베스는 말 그대로 “예쁜 선물”로서 프랑켄슈타인에게 주어진다(35). 이렇게 캐롤린과 엘리자베스의 사례에서 예시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온정주의는 계급 질서와 젠더 질서를 공고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명되고, 이 행위들은 소유 개념과 분리 불가하다.

    애정이 넘치지만 매우 계급편향적인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이방인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능력에 일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은 바로 저스틴이다. 친모에게 학대당하는 저스틴을 가엾게 여긴 캐롤린에 의해 저스틴은 프랑켄슈타인 가  족 속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엘리자베스와 달리 하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그녀를 원래의 계급으로 복귀시키는 것도 아니고, 더 높은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하층계급에 속해 있지만 그 어느 집단의 소  유물도 아니었던 저스틴이 하인 계급으로 떨어지는 몰락이다. 비록 엘리자베스는 제네바에서의 하인은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하인과 다르며, 그 처지는“인간의 존엄성을 희생시키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러한 변화를 호하지만(65), 저스틴의 사례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온정주의가 하층 계급 출신의 이방인을 그 구성원으로 완전히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포용력 있지 않다는 것을 예증한다. 캐롤린이 베푼 자선에 보답하기 위해서 저스틴은“그녀의 어투와 예의범절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캐롤린이 죽은 후에는 엘리자베스에게 캐롤린을 상기시키는 인물이 된다(65). 그러나,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그녀는 프랑켄슈타인 가족 속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하며, 캐롤린을 대신하지도 못한다. 그녀는 프랑켄슈타인 가족 속에서 일종의‘내부의 이방인’(a stranger within) 으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은 이방인에 대한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포용력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각자가 프랑켄슈타인 가족 속으로 통합되는 정도에 상관없이, 캐롤린과 엘리자베스, 저스틴의 통합은 프랑켄슈타인 가족을 이방인을 환대하는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소유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성이라는 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캐롤린과 엘리자베스가 각자의 남성 파트너의 소유물이라면, 하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저스틴은 프랑켄슈타인 가족 전체의 소유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비록 엘  리자베스가“아주 예쁘다”고 말하는 저스틴은 계급 구분을 가로지를 만큼 충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이 셋은 모두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들이 아름다운 대상의 형태로 올 때, 기존의 젠더와 계급 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소유 가능한 대상의 형태로 올 때, 프랑켄슈타인 가족은 그들을 환대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아름답지 않거나 소유 가능한 대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형태로 이방인이 등장할 때, 프랑켄슈타인 가족은 그 이방인을 환대하지 못하고 심지어 공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이방인의 출현으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바로 이 가능성은“괴물의 흐릿한 눈이 뜨이고, 괴물이 힘겹게 호흡을 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팔다리를 뒤흔드는”것을 프랑켄슈타인이 볼 때 현실화된다. 이 순간 프랑켄슈타인이 대면하는 것은 더 이상 생명 없는 재료들의 단순한 조합물이 아니라,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 예기치 않게 도착하는 이방인이다. 창조 작업의 기획자이자 실행자로서 프랑켄슈타인은 그가 생명 있는 존재로서 오리라는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분들을 조립하여 만든 신체가 생명을 부여받고 추한 괴물로 살아나는 순간, 그 이방인의 도착은 예기치 않은 도착으로 바뀌고, 이 예기치 않은 이방인과의 대면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친숙한 부분들이 갑자기 낯선 존재로 나타나고, 예상하고 있던 그 존재의 도착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발생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로서 그의 자손인 괴물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주인으로서 이 예상치 못한 이방인을 환대하는 데 실패한다.

    괴물이 생명을 부여받은 직후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프랑켄슈타인에게 클레르발이 찾아오고, 프랑켄슈타인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 그를 환영한다는 사실 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거부하지만 클레르발을 환대한  다는 것은 이방인의 권리로서의 칸트적 환대가 작동하는 방식과 데리다가 제기하는 환대와 적대의 관계 문제를 효과적으로 극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칸트는 이방인이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한 적대적인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가 갖는 환대에의 권리는 방문권에 국한된다고 본다. 따라서 주인은 이방인을 선별적으로 걸러내어 그를 환대하거나 적대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걸러내기는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거부하고 클레르발을 환대할 때 실행된다.  또한 클레르발을 그의 아파트 안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프랑켄슈타인이“소름끼칠 정도로 추한 손님인”괴물이 아직 거기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는 사실은 조건적 환대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패러독스, 즉 적대 없이는 환대도 없다는 패러독스를 예증한다(61). 피터 멜빌(Peter Melville)이 지적하듯이,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거주 영역에 괴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행하는 일종의“집안 대청소”로서“환대의 첫 행위”를 구성한다( “Monstrous”182). 프랑켄슈타인은 예기치 않은 추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온 괴물을 쫓아내지 않고서는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은 손님이지만 그의 친구인 클레르발을 환대할수 없다. 이 에피소드는 환대와 적대는“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것만큼 병치관계에 있을”뿐만 아니라 적대란 환대를 가능하게 하는 그 구성적 폭력이라는 점 을 시사한다(Melville, Romantic 87).2

    영구적 평화에 대한 칸트의 스케치에서 환대는 인류가“서로 평화적인 관계 들을 맺고”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에 점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것으로 제안된다(106). 그러나 적대와 환대의 병치 관계, 전자가 후자의 구성적 폭력이라는 점은 환대가 모두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신체 부분들을 모을 때 작동하는 것과 유사한 포함과 배제의 메커니즘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착하는 모든 이방인이 다 환대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클레르발처럼 어떤 이방인은 손님으로 환대를 받고, 괴물처럼 어떤 이방인은 철저하게 거부당한다. 앞서 살펴본 저스틴의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방인들이 환대 받는 경우에도 제공되는 환대의 정도는 불균등하다. 그리고 환대의 대상인지 적대의 대상인지를 판단하고, 제공되는 환대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재량에 달려 있다. 이 문맥에서 보면 괴물이 어떤 적대적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괴물을 처음 대면하자마자 프랑켄슈타인이 그를 거부하는 것은 주인이 자신의 영역에 대한 통치권(sovereignty)을 행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환대하지 못하는 것은 주인으로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방인성 자체를 위협적이거나 적대적인 것으로 읽었고, 이 읽기는 괴물이 이방인으로서 예기치 않게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수행되었음을 암시한다.

    환대가 제공되거나 보류되기 위해서 이방인은 먼저 판독되어야 하고, 이방인의 도착과 동시에 수행되는 이 판독 행위는 바로 이방인의 이방인성을 읽는 행위이다. 이 점에서 클레르발은 그의 이방인성이 먼저 판독되어야 하는 그러한  존재로서의 이방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로서 프랑켄슈타인의 사회 속으로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클레르발의 도착은 판독 행위를 수반하는 대신에 프랑켄슈타인에게“그의 기억에 그토록 소중한 집의 모든 광경들을”상기시키는 계기가 된다(60). 문제는 프랑켄슈타인이 이방인으로서의 괴물과의 대면에서 너무도 심한 정신적 외상을 입어서 회상된 집의 광경들도 클레르발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그를 예전 상태로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환대를 거부당하더라도 이방인은 일단 그가 도착하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추방될 수 없다. 비록 그는 거부당하고 추방되지만, “내가 창조해낸 괴물의 형상이 영원히 내 눈앞에 있었다”라는 프랑켄슈타인의 고백이 암시하듯이, 그 이방인의 이방인성은 영원히 잔존한다. 그리고 그 잔존하는 이방인성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이제 자신의 집에서도, 그 자신에게조차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62). 멜빌이 지적하듯이, 프랑켄슈타인은 이제“영원히 제자리를 벗어나 있다” (being perpetually out-of-place)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Monstrous”181).

    ‘권리’라는 용어가 암시하듯이, 칸트의 환대 개념은 감정에 관련된 요소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이성적인 사색에 입각해 있다. 그렇지만, 괴물과의 대면 이후에 프랑켄슈타인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환대가 이성에 근거한 관계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요소들도 수반하는 이방인과 주인 사이의 조우를 문제로 삼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또한 주인으로서 이방인을 받아들이지도 완전히 추방하지도 못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실패가 이방인 으로서의 괴물에 대한 감정적 관계를 처리하지 못한 그의 무능력에 있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마치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아기처럼 괴물이 웃으며 뭔가 불명확한 소리를 낼 때 프랑켄슈타인은 듣지 않으며, 괴물이 손을 내밀 때 그는 도망친다. 더 문제적인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이 감정적인 실패가 그와 괴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감정적인 반응 능력’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인 느낌들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인위적인 생명 창조 작업은 프랑켄슈타인으로 하여금“내 감정의 느낌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미루기를”원하도록 만들고, 실제로 제네바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음으로써 가족과의 감정적 소통을 소홀히 하게 만든다(55). 더구나 괴물과의 조우에서 얻은 정신적 외상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는 프랑켄슈타인은 가족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깊고, 어둡고, 죽음과 같은 고독”에서만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다(90).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그의 반응 능력은 회복 불가능하게 손상되어 버린다.

    괴물-프랑켄슈타인-클레르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이방인에 대한 환대와 추한 이방인에 대한 거부, 그리고 추한 이방인과의 조우에서 겪는 정신적 외상의 시나리오는 괴물-드 라세 가족-사피의 관계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앤 K. 멜러(Anne K. Mellor)나 케이트 퍼거슨 엘리스(Kate Ferguson Ellis)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드 라세 가족을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결함들을 극복한 대안적 가족 모델로 본다.3 그러나 적어도 이방인에게 반응하는 방식 측면에서 볼 때, 드 라세 가족은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대안이라기보다는 그 변형태에 더 가깝다. 알폰소와 캐롤린의 관계에서 예시되는 구원자로서의 남성과 구원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패턴은 펠릭스(Felix)와 사피의 관계에서 반복된다. 남성은 여성 혹은 그녀의 가족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수호천사처럼 나타난다. 알폰소와 캐롤린의 관계, 펠릭스와 사피의 관계 모두에서 여성은 그 소유권이 아비에게서 남편에게로 옮겨가는 소유 대상과도 같다. 캐롤린은 알폰소가 보호해야 하는 피후견인의 지위에 있고, 사피는 그녀의 아비를 구하기 위해 펠릭스가 감수하는“노력과 위험을 완전히 보상해줄 보물”로 간주된다(123).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여성 이방인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코스모폴리탄적이 되는 것처럼, 인종이 다른 사피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드 라세 가족은“코스모폴리탄적 특성”을 갖게 된다(Armstrong 70).4 그러나 프랑켄슈타인 가족처럼 드 라세 가족도 모든 이방인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만큼 충분히 포용력 있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드 라세 가족의 코스모폴리탄적 포용력의 한계는 괴물이 마침내 이 가족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나타난다. 드 라세 가족은“그들의 아름다운 손님”인 사피에게는 환대를 베풀지만, 추한 괴물에게는 격렬하게 폭력적으로 반응한다(117).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아름다운 이방인들만 그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드라세 가족도 아름다운 이방인만을 환대한다. 괴물에 대한 드 라세 가족의 반응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아름다움은 폭력이다”(Bohls 29). 괴물의 간청하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아가사(Agatha)는 기절했고, 사피는 . . . 오두막 밖으로뛰쳐나갔다. 펠릭스는 앞으로 돌진하여 초인 같은 힘을 발휘하여 그의 아비의 양쪽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던 나를 그에게서 떼어냈다. 분노로 넋을 잃은 상태에서, 그는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지팡이로 난폭하게 나를 때렸다”(135). 프랑켄슈타인의 클레르발에 대한 환대가 괴물에 대한 거부와 분리될 수 없듯이, 괴물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드 라세 가족의 온화하고 우호적인 삶의 방식은 이가족이 배제해야 하는 이방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분리될 수 없다. 드 라세 가족은 괴물을 환대할 만큼 충분히 코스모폴리탄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드 라세 가족으로 하여금 사피에게는 환대를 베풀면서 괴물은 거부하게 하는가? 사피의 외양과 괴물의 외양 사이의 차이들은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을 제공한다. 사피는“천사 같은 아름다움과 표정을 지닌 얼굴”로 오는 이방인인 반면에(116), 괴물의 외양은 괴물조차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쳐 뒷걸음질 칠 정도로 추하다. 그러나 드 라세 가족이 괴물을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은 드 라세 가족이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괴물의 이방인성 자체임을 암시한다. 사피의 이방인성이 위협적이지 않다면, 괴물의 이방인성은 너무도 위협적이어서 드 라세 가족은 그를 폭력적으로 내쫓지 않을 수 없다. 괴물은 드 라세 가족의 생활을 몰래 지켜보면서 그 가족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갖게 되고, 그 가족을 친구이자 보호자로 여기게된다. 그러나 드 라세 가족은 몰래 땔감을 구해다주거나 눈을 치워주는 괴물의 도움을“선한 정령”의 도움으로 여길 뿐 괴물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115). 괴물은“감정이 있고 친절한 친구”로서 드 라세 가족에게 다가가지만, 드 라세 가족은 그에게서“가증스러운 괴물의 모습만을 볼 뿐이다”(134). 환대를 간청하는 괴물의 몸짓은 인종이 다른 이방인을 이미 그 일원으로 받아들인 가족에게 적대감과 공포만을 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괴물과의 조우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것처럼, 전혀 예기치 않았던 괴물과의 조우에서 드 라세 가족도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사피와 괴물에 대한 드 라세 가족의 상반되는 반응은 또한 데리다가 제시하고 있는 기생(parasitism)과 환대의 구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손님과 기식자를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다음, 데리다는“그들이 환대에의 권리의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새로 도착한 모든 사람이 손님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 답한다(Hospitality 59-61). 이 문맥에서 보면 드 라세 가족이 한 이방인은 포용하지만, 다른 이방인은 내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드 라세 가족의 관점에서 보면, 사피는 환대와 보호를 청하는 이방인으로 올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구원자이자 재정적인 구원자”로 온다(Dickerson 88). 그녀의 존재는 드 라세 가족을 행복하게 하고, 그녀가 가지고 온 보석들과 돈은 드 라세 가족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5 이와 대조적으로 괴물은 드 라세 가족 몰래 도착하여 그들의 오두막에 딸려있는 광(hovel)에 숨어 지내며, 비록 드 라세 가족이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알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몰래 그들을 돕지만 처음에는 그들의 식량을 훔쳐 먹는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괴물은 드 라세 가족에게 기생함으로써 그 가족을 일종의 숙주(host)로 만든다. 그리고 숙주인 드 라세 가족에게 괴물은“기식자, 부적절한, 비합법적인, 몰래 와 있는, 추방되거나 구금될 수 있는 손님”일 뿐이다(Derrida, Hospitality 61). 드 라세가 괴물에게 묻는“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괴물의 정체를 묻는 질문은‘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우리 영역에 몰래 들어와 기생하고 있는가?’라는 괴물의 기생성에 대해 묻는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135).

    환대와 적대 사이의 역설적 관계처럼, 환대와 기생의 구분은 환대가 무조건적이지도 않고 무제한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프랑켄슈타인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부채 경제와 유사하게, 이방인의  도착이 주인에게 이로움을 주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의무 때문에 부채를 갚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괴물이 어떤 즉각적인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점이 드 라세 가족이 그를 환대  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드 라세 가족에게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외상을 입히는 이방인이고, 어떤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도 괴물이 주인 가족으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한 이방인은 환대받아야 한다는 칸트적 환대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맹인이어서 괴물의 외양을 볼 수 없는 드 라세와의 대화에서 괴물이 드 라세 가족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보호를 요청하기에 앞서 느끼는 두려움을 털어놓을 때, 드 라세는 괴물이 말하는 친구들이 자신의 가족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그 어떤 분명한 이기심에 의한 편견에 빠져 있지 않을 때, 인간의 마음은 형제애와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134). 그러나 드 라세 가족은 괴물을 환대하는 데 실패하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작동하는 그들의 감정적 반응 능력은 괴물과의 대면에서는 제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방인으로서의 괴물의 정체에 대해 묻는 드 라세의“당신은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괴물에게 대답 자체가 불가능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괴물은 과학적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서 자연적 태생의 문맥을 결여하고 있고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로서 사회적 문맥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상‘아무도 아닌 자’(nobody)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존재들로부터 가  져온 부분들을 강제로 결합하여 만든 그의 신체는“기괴한 만인”(a monstrous Everybody)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Eilenberg 182).

    젠더와 인종의 관점에서 이방인과 환대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인물은사피이다. 환대의 측면에서 볼 때, 사피는 괴물의 역전된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익을 가져다주는 이방인으로 주인 가족에  게 따뜻한 환대를 받고 성공적으로 그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괴물이 문제적인 존재인 만큼 그녀의 생물학적 혼혈성과 문화적 잡종성 때문에 사피 역시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가계를 따지면, 부계 쪽으로는 회교를 믿는 터키인  이고, 모계 쪽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녀는 모계쪽 유산을 받아들이고 부계 쪽 유산을 거부한다. 그녀는 모국인 터키 사회에서제자리를 벗어나 있다고 느끼고 기독교인의 삶을 갈망하는 일종의 내부의 이방  인으로서 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에게는 하렘에 갇힌 생활만 허용하는 “터키에서 사는 것을 질색했고, 그녀의 종교와 감정이 마찬가지로 터키에 사는 것을 반대했기”때문에 아비의 명령을 거부하고 펠릭스를 찾아간다(126). 이 문맥에서 우리는 기독교 사회가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사피의‘집’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녀가 드 라세 가족의 오두막에 도착하는 것을 일종의 귀향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기독교인과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드 라세 가족에게 오고, 이 기대는 펠릭스와의 결혼으로 곧 실현된다(124). 데이비드 케터러(David Ketterer)가 주장하듯이, 서로“닮은 요소들”때문에 사피는 펠릭스에게 이끌리며, 이것은 그녀가 이방인 그 자체라기보다는 주인을 이미 닮은 이방인으로서 드 라세 가족에게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55).

    그러나 아비와의 관계에서 전복적인 사피의 행위는 남편의 가족에게 순종적으로 적응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비의 명령을 거부하고 연인을 찾아감으로써 사피가 마침내 얻게 되는 것은, 윌리엄 비더(William Veeder)가 지적하듯이, “엘리자베스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엘리자베스가 이미 있는 곳”이다(189). 사피는 여성들이 하렘에 갇혀 살아야 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녀가 생각하기에는“여성들이 사회에서 지위를 갖는 것이 허용된”사회로 탈출한다(124). 그러나 사피가 도착한 사회 역시 젠더 위계질서에 토대를 둔 사회로, 그녀가 엘리자베스처럼 바깥 세계와의 사회적 교류 없이 가정 영역에 갇혀 살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문맥에서 볼 때, 억압적인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사피의 반란은 절반의 성공으로 그치는데, 이것은 여성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독립을 옹호하지만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어미에게서 받은 교육에 기인한다. 여성의 독립을 향한 사피의 강렬한 욕망은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을 선호하는 그녀의 인종적 편견과 분리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그 결과, 젠더 관계에서는 전복적인 사피의 행위가 회교를 신봉하는 터키인과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인 사이의 인종 관계에서는 그 전복력을 상실한다. 아버지의 사회에서 도망쳐서 연인을 찾아가는 사피의 여정은 독립을 추구하는 행위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자기부정, 즉 자신의 인종적 혈통을 부정하는 행위로 읽을 수도 있다. 사피의 자기부정은 펠릭스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유럽인화 되는 것, 특히 드 라세 가족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것은 드 라세 가족이 사피를 환대하는것은 그녀의 인종적 이방인성을 제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피의 문화적 잡종성은“그녀 자신의 언어”가 드 라세 가족의 언어로 대체됨에 따라서 점점 약화된다(117). 그러나 그녀의 인종적 이방인성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고, 바로 그녀가 새로 습득한 드 라세 가족의 언어 속에 잔존한다. 그녀의 골상학적 특징들과 함께, 드 라세 가족의 목소리와는“다른”그녀의 목소리와“불완전한 억양”이 계속해서 그녀의 인종적 이방인성을 표시한다(116, 119). 이러한 인종적 표시들은 목숨을 구해준 펠릭스에게 사피를 내줌으로써 그의 도움에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함으로써 드 라세 가족을 불행에 빠뜨린 회교도 터키인인 사피의 아비를 상기시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단지 부차적인 인물이었을 그는 환대와 이방인에 관한 논의의 문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 때문에 적대 받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 때문에, 그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그의 종교와 부가 그가 유죄선고를 받은 이유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프랑스 정부가 그를 적대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의 인종적 이방인성 때문이다(122).

    사피의 아비에게 유죄선고가 내려진 것에 펠릭스가 분개하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피의 아비를 구해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윤리적인 행위이다. 펠릭스는 이방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적대 행위를 개인 차원에서의 환대 행위로 보상하  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피의 등장은 보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없이 제공되어야 하는 펠릭스의 윤리적인 행위를 보상을 기대하고 수행하는 행위로 바꾸어 버린다. 이제 그의 환대는 그 무조건성을 상실하고, 변제되어야 하  는 부채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터키인이 펠릭스에게 약속한 보상, 즉 사피를 그에게 내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터키인을 적대 행위의 희생자에서 환대를 베풀어준 주인을 배반하는 가해자로 바꾸어 버린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딸이 기독교인과 맺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몹시 싫어했기”때문에 사피의 아비는 펠릭스가 그를 도와준 것 때문에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프랑스로부터 영구추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사피와 결혼시켜주겠다고 펠릭스에게 한 약속을 깨뜨린다는 점이다(124-25).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프랑스 정부와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적, 인종적 차이 때문에 펠릭스를 거부한다. 한때 자신의 이방인성 때문에 고초를 겪은 이방인이 이번에는 다른 이방인의 이방인성 때문에 그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에서는 희생자였던 사피의 아비는 펠릭스와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가해자가 된다. 인종적 이방인성 때문에 적대의 대상이 되었던 사피의 아비는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가로 환대를 약속했던 펠릭스를 그의 인종적 이방인성 때문에 적대한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누가 이방인의 위치에 있고 누가 주인의 위치에 있는가라는 것보다는 인종이라는 범주 자체가 더 문제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환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인종이라는 범주 자체이기 때문이다.

    2「기괴한 배은망덕」“( Monstrous Ingratitude”)에서 멜빌은“환대와 적대의 골치 아픈 관계”가『프랑켄슈타인』의 중심적 관심사라고 주장한다. 그는『프랑켄슈타인』이 적대없이는 환대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미리 형상화하고 있다고 보지만, 데리다의 환대 논의를 셸리의 작품 분석에 구체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 대신에 멜빌은 타자의 시선, 응시(gaze) 논의의 연장선에서 환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멜빌에 다르면, 괴물이 “제2의 주체성,”“타자성”으로 출현함에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은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원치 않는 손님을 맞이해야만 하는 주인이 되도록 강요받고, “괴물은 처리해버리거나 억압할 수 없는 깊은 불안감을 프랑켄슈타인에게 상기시킨다.”멜빌은 또한 괴물을 사피보다는 그녀의 터키인 아비와 비교하면서, 이 둘이 각각 드 라시 가족과 맺는 관계를 탈식민(decolonization)의 메커니즘에 견주어 읽고 있다. 환대에 대한 또 다른 연구 결과물인 『낭만주의적 환대와 적응에의 저항』(Romantic Hospitality and the Resistance to Accommodation)에서 멜빌은 루소와 칸트, 코울리지, 셸리의 작품들을 통해서 낭만주의적 환대를 특징짓는 조건들을 고찰한다. 그러나 이 저서에서는『프랑켄슈타인』이 직접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본 논문은『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환대의 문제를 다룬다는점에서 멜빌의 연구에 부분적으로 기대고 있지만, 멜빌과는 달리 칸트와 데리다의 환대 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아서 이방인의 문제를 전경화하고, 멜빌이 간과한 젠더 문제를 환대의 논의 문맥에서 고찰하려고 시도한다.   3멜러의 견해에 대해서는「자연을 소유하기」“( Possessing Nature”)를 참조하고, 엘리스의 견해에 대해서는『경쟁의 성』(The Contested Castle)의 5장을 참조할 것.   4칸트의「영구적 평화」와 셸리의『프랑켄슈타인』을 나란히 읽으면서, 낸시 암스트롱 (Nancy Armstrong)은“프랑켄슈타인 가족과 드 라세 가족의 코스모폴리탄적 특성은 유럽이 모두를 포함하는 국가로 가는 도중에 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암스트롱에 따르면 괴물은 환대의 법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원하지만, 그의 본성에는“소속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해버리는 무언가(something)”가 있다. 암스트롱은 이“무언가”를 괴물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의 개인주의의 양상들 중에서 공동체적 정체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들과 결부시키고 있다. 암스트롱은 괴물과 관련하여 칸트의 환대 개념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갈 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암스트롱의 자세한 논의에 관해서는『소설이 사유하는 방식』(How Novels Think)의 68-78면을 참조할 것.   5사피가 찾아오기 전, 드 라세 가족은 펠릭스와 아가사가 아버지를 위해 굶곤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사피가 오고 난 이후에는 물질적으로 더 넉넉해지고, “펠릭스와 아가사는 오락과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일에 있어서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괴물은 전하고 있다(131). 이러한 변화는,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사피가 가져온 보석들과 돈이 드 라세 가족의 빈곤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III

    프랑켄슈타인과의 조우와 드 라세 가족과의 조우 모두에서 괴물은 예기치 않게 도착하는, 그러므로 그의 도착과 함께 그의 이방인성이 판독되어야 하는 이방인의 위치에 있다. 반면에 클레르발과 사피는 괴물과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게  도착하지만, 낯선 이방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들을 맞이하는 주인 혹은 주인 가족과 이미 닮은 모습으로 온다. 어릴 적부터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인 클레르발은 이미 프랑켄슈타인 가족의 사회 속에 들어와 있는 인물이고, 사피는 인종적  으로는 비유럽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며 펠릭스와 결혼하여 유럽 사회에 살고자 하는 기대를 갖고 드 라세 가족에게로 오는 인물이다. 따라서 클레르발의 도착은 친구와의 재회 형태를 띠고, 사피의 도착은 연인과의 재회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갈망하던 유럽 사회로의 편입 형태를 띤다. 클레르발의 도착과 사피의 도착은 그들을 각각 맞이하는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의 환대 행위자체를 전경화하는 듯 보이지만, 이 환대 행위들 이면에는 이방인에 대한 적대  행위가 환대의 구성적 폭력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주인으로서 프랑켄슈타인은 손님인 클레르발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그가 주인으로 있는 영역에서 괴물을 먼저 쫓아내야 한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이 다시 그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괴물  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에 괴물을 쫓아내는 적대 행위가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괴물이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프랑켄슈타인의 행위는 클레르발에 대한 그의 환대가 괴물에 대한 적대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사피의 경우, 그녀가 펠릭스를 찾아 드 라세 가족의 오두막에 도착하는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펠릭스에 대한 그녀의 아비의 적대 행위이기 때문에, 사피에 대한 드라세 가족의 환대는 인종적 이방인성 때문에 발생하는 적대 행위와 함께 이야기 되어야 한다. 또한 사피를 환대한 드 라세 가족이 괴물을 적대한다는 것은 환대는 선별적으로 제공되며 이 선별 과정에서 걸러지는 이방인에게 가해지는 적대행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해준다.

    환대와 적대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관계는 방문권으로서의 칸트적 환대 개념, 즉 데리다가 조건적 환대로 구분하는 개념에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측면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이 도착하는 영역의 통치권은 이미 주인에게 있으며 환대는  그 통치권을 행사하는 한 형태로서,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걸러내고 선택함으로써만, 따라서 배제하고 폭력을 씀으로써만 행사될 수 있기”때문이다(Hospitality 55). 괴물과 사피의 아비는 바로 이 배제하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이방인들이다. 프랑켄슈타인과의 조우에서 그리고 드 라세 가족과의 조우에서 괴물은 도착하는 순간에 주인의 선별 행위에 의해 처음부터 걸러져 배제되는 이방인이라면,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에서 사피의 아비는 인종적 이방인성 때문에 후차적으로 배제되어 추방되는 이방인이다. 이 두 존재는 프랑켄슈타인 가족이 캐롤린과 엘리자베스, 저스틴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 프랑켄슈타인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 클레르발을 환영할 때, 드 라세 가족이 인종적 이방인성에 상관없이 사피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대 행위가 기능 장애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방인들이다.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이 모두 괴물을 환대하는 데 실패한다는 사실은 칸트적 환대는 이름이 없고 그 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는 절대적 타자인 괴물과 같은 이방인에게는 적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이방인이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한 적대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환대 규정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괴물이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에게서 구하는 것은 애정과 보호뿐이고 그들에게 어떤 적대적인 행위도 하  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환대하지 못하고 펠릭스는 폭력을 행사하여 그를 내쫓기 때문이다. 괴물을 적대하는 데 있어서 이방인인 그가 평화적으로 행동하는가 아닌가는 전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프랑스 정부와 사  피의 아비의 관계 역시 조건적 환대의 한계를 드러낸다. 프랑스 정부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기 전까지 사피의 아비는 이미 여러 해 동안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방문권으로서의 환대의 범위를 넘어서는  거주권까지 부여받은 이방인임을 말해준다. 칸트의 시나리오에서 거주권은 국가들 사이의 특정한 협정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환대가 거주권의 문제일 경우에 그것은“국가 통치권에 의존하고”“법과 국가경찰에 의해 관리된다”(Cosmopolitanism 22). 이 문맥에서 보면, 사피의 아비의 사례에서 환대를 위반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제공될 수 있는 거주권의 관리 역할을 담당하는 프랑스 국가이자 법정이다. 이 경우에도 사피의 아비가 이방인으로서 평화적으로 행동하는가 아닌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즉, 괴물과 사피의 아비에게 가해지는 적대 행위는 그들의 평화적 태도와는 무관하게 저질러진다.

    괴물과 사피의 아비에게 가해지는 적대 행위들은 환대의 실행 여부가 이방인의 태도가 평화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환대의 대상을 선별하는 주인의 결정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적대 행위는 조건적 환대가 실행되는  한 방식이며, 그것의 구성적 일부이다. 그러나 적대 행위는 또한 이방인에게 주인 공동체가 환대를 제공하는 데 실패하는 지점을 가시화함으로써 그 공동체가 자체의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허용하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배제  하는 요소들 사이의 차이들과 경계들을 확인하고 재확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사피의 아비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적대 행위와 펠릭스에 대한 사피의 아비의 적대 행위에서는 그것이 종교적 차이를 포함하는 인종적 이방인성의 문제로 나  타난다.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로서의 프랑스, 확대 해석하면 유럽과 회교도들의 공동체인 터키는 모두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다른 인종의 이방인을 배제하고 적대하는 공동체들이다. 따라서 인종이 다른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은 바로 각 공  동체를 떠받치고 있는 인종이라는 구분 범주를 교란시킬 위험성을 수반한다. 이 문맥에서 보면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이 괴물을 환대하는 데 실패할 뿐만아니라 괴물과의 대면에서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아무도 아닌 자이면서 동시에 만인인 괴물은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낸 육체를 지닌 존재이고, 젠더와 계급, 인종, 종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잡종적 존재이다. “인간에게 속하는 것보다 더 추한”기형적인 괴물의 육체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이 보는 것은 바로 인간의 공동체가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그러한 구분 범주들의 교란이다(76). 또한 괴물은 내부적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질적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항상 그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로 해체될 위험에 처해 있다” (Halberstam 37). 프랑켄슈타인 가족과 드 라세 가족이 이방인(들)을 그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코스모폴리탄적 공동체의 특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고려할때, 이질적인 부분들의 결합물로서의 괴물의 신체는 두 가족의 확장 방식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괴물이 그 구성 부분들로 해체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프랑켄슈타인 가족과 드 라세 가족도 마찬가지로 언제든 와해될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괴물은 공동체의 구분 범주들의 잠재적 교란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자체의 잠재적 와해 가능성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면하는 순간 프랑켄슈타인과 드라세 가족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며 즉각적으로 그를 적대하는 것이다.

    괴물은 칸트적 환대 개념, 특정 지역에 대한 주인의 통치권을 토대로 하여 행사되는 조건적 환대의 틀로는 설명 불가능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설사 환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를 환대하는 공동체 자체를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괴물은 이방인의 정체를 묻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되는 무조건적 환대가 허용될 때만 환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세 가족 모두 괴물과의 대면에서 치유 불가능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괴물은 그 어떤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인 혹은 주인 공동체에게 위협적인 이방인이다. 괴물과의 대면 이후 프랑켄슈타인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자체를 피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추방되고, 드 라세 가족은 괴물을 대면한 바로 그 다음날 공포에 사로잡힌 채 도망치듯 그들의 오두막을 서둘러 떠난다. 그러므로 괴물과 같은 이방인이 예기치 않게 도착할  때 그와 조우하게 되는 주인 혹은 주인 공동체는 그러한 위협적인 이방인을 걸러내기 위해서 조건적 환대를 행해야 한다. 이렇게 괴물은 무조건적 환대를 요청하면서도 동시에 실제로는 무조건적 환대가 아니라 조건적 환대가 행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이방인이다. 괴물이 처해 있는 이 모순적 상황은 칸트의 영구적 평화 논의에서 코스모폴리탄 공동체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지만 인류가 점진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규제적 이념인 것처럼, 무조건적 환  대는 이방인과 주인의 조우에서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조건적 환대가 점진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규제적 이념과 같은 것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 희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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