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Age as the Final Act of Life Play

인생 연극 종막(終幕)으로서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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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For the last 100 years, human beings have finally achieved their old dream to live long. Soon will human beings have the dream of becoming 100 years old realized. However, this realization is no blessing. Today, human beings face the coming of a 'grey new world.' The coming of unprecedently large elderly stratum in human history is not considered as a dawn of human civilization but as a disaster. Over the past one generation, Koreans achieved the extension of life expectancy within a short period of time. In a society like Korea, which has the world's lowest birth rate and is proceeding toward an aging society at the world's highest speed, solving elderly problem with welfare policy has a fundamental limitation. Faced with a unprecedented crisis of 'grey shock,' we eventually got to the time point to contemplate on what is living a humane life instead of unquestioningly pursuing a longevity. Departing from this question, I suggest 'human studies of old age' which thematize elderly problem as a human problem.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마침내 오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꿈을 성취했다. 머지않아 인류는 평균 기대 수명 100세라는 꿈을 현실로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꿈의 실현이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날 인류는 ‘회색빛신세계’의 도래를 앞두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노년층의 도래는 인류문명의 서광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인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대수명의 연장을 압축적으로 이뤄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고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속도는 세계 최고인 한국사회가 노년문제를 복지정책으로 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결국 ‘회색쇼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해서 인류는 무조건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 대신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필자는 노년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성찰하는 ‘노년의 인문학’을 제안한다.

  • KEYWORD

    old age , grey new world , aging society , grey shock , life play , human studies of old age.

  • 1. 아프니까 청춘이고, 불쌍하니까 노년인가

    우리사회 청춘은 아프다.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들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위로 받는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이에 비해 노인들은 어떠한가? 청년들은 노동생산 인구이기에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노인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잉여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전통사회 원로의 죽음은 공동체의 도서관이 없어지는 상실이었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 노인은 점점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과연 우리 시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일까?

    종로 파고다공원에 가보면, 거기는 그야말로 ‘노인 공화국’이다. 이 많은 노인들이 어디서 왔고, 밤이 되면 어디로 돌아갈까? 그리고 거기에 계신 어르신 대부분이 왜 할아버지들뿐일까? 통계적으로는 여성 노년인구가 훨씬 더 많은데, 그 많은 할머니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느 분께 물어보니, 할머니는 오라는 데가 많지만 할아버지는 갈 데가 없어서 거기로 출근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들집이 싫으면 딸집에 가서 집안일을 거들며 애들도 봐 줄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노숙자도 대부분이 남자고, 여자 노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어쩌다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로다”로 바뀌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아들보다 딸을 더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1)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아들 낳으려다가 딸만 줄줄이 낳은 딸 부잣집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들 이름은 ‘귀남’이로, 딸 이름은 ‘말순’이로 짓는 풍조가 있었다. 이제는 이 같은 웃지 못할 풍경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국무총리실 산하 육아정책연구소가 2008년 전국에서 태어난 2078명의 신생아 가구 부모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신생아 아버지들은 임신 중 원했던 자녀의 성별로 딸 37.4%, 아들 28.6%를 꼽았다. 나머지 34%는 '아들 딸 구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생아 어머니 역시 딸이길 바란 경우가 37.9%로 아들(31.3%)보다 많았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 풍조가 무너지고 여아가 환영받는 세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가치관의 변화를 인류가 오랫동안 지속해온 가부장사회를 청산하고 모계사회로 회귀하는 징조라고 보는 것은 아직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잠깐 사이에 생겨났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출생률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빚어낸 결과다. 아들을 낳아야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가 깨지면서 아들에 대한 선호도는 하락했다. 거기다가 점점 늘어가는 맞벌이 부부가 출생률 저하를 심화시켰다. 아내가 일하러 나가야 할 때, 아이는 많은 경우 친정에 맡겨진다. 그러면서 가정 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과 비례해서 아들보다는 딸에 의지하는 노부모들이 많아졌다. “딸 가진 부모는 외국여행 다니며 호사하지만, 아들 둔 부모는 서로 모시라고 밀어내는 탓에 객사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혼율 증가로 가족이 해체되면서 조부모 가정은 늘어가고, 고령화 사회에서 할머니는 새로운 엄마의 역할을 하는 가정이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늘어나고 있다.2) 사회가 고령화될수록 노인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가부장사회가 해체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가부장사회의 해체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권력관계의 전도가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고령화 사회를 맞이해서 노인과 아이의 가족 내의 위치 또한 역전되고 있다. 전통시대에서는 연장자 중심의 위계질서로 사회가 구성됐다. 온 식구가 밥상에 앉았을 때 할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셔야 식사가 시작되고 좋은 반찬은 그분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이 내가 어렸을 적에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의 중심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전도됐다. 가족 활동의 거의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진행됨으로써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이가 가족의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한다.

    1)테드 C. 피시먼, 안세민 옮김, 『회색쇼크: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반비, 2010, 414쪽.  2)위의 책, 357쪽.

    2. ‘노인을 위한 나라’에서 ‘어린이를 위한 나라’로의 전환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손순(孫順)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손순은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에게는 자식 하나가 있었는데, 늘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시기 어렵소.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저렇게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께서 얼마나 배고프시겠소. 차라리 아이를 묻어 어머니께서 굶으시지 않도록 해야겠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아이를 업고 산에 들어가 땅을 파는데 뜻밖에 기이한 돌 종이 나왔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얼른 나무에 매달고 쳐보았더니 은은한 소리가 났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이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지 맙시다.”

    남편도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들보에 달고 쳤더니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듣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니 범상치 않다. 속히 조사해 보라.” 왕이 보낸 사람이 그 집에 가서 자초지정을 듣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 하자 하늘에서 금 솥을 내리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돌 종이 솟아났다. 옛날의 효자와 오늘의 효자를 똑같이 하늘과 땅이 귀감으로 삼으신 것이다.” 왕이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지순한 효도를 숭상케 했다. 이에 손순은 자기 집을 절로 내놓아 홍효사(弘孝寺)라고 했으며, 절에다 돌 종을 안치했다.3)

    어머니가 아들보다 소중했던 전통시대는 ‘노인을 위한 나라’였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오직 한 분이지만, 자식은 또 낳을 수 있기에 어머니 봉양이 자식 부양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같은 가치관의 변화는 근대에 일어났다. 서구에서도 중세 말까지 아이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은 젖을 떼자마자 어른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경쟁하며 함께 일하며 노는 작은 성인(成人)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독립된 인격체로서 어린이에 대한 관념은 18~19세기에서야 비로소 생겨났다.4) 근대 핵가족이 되면서 가족은 애정공동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가족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성(城)과 같은 곳이고, 여기서 아이는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대상으로 부각됐다. 근대 핵가족화를 통해 가족의 주변부에 있던 어린이가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과 반비례해서 노인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났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효가 인륜의 최고 가치로 숭상될 때, 가족의 중심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근대에서는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이들 세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어린이’ 개념이다. 어린이의 어원은 세종대왕이 ‘어린 백성’이라 칭한 것처럼 ‘어리석다’다. 하지만 방정환은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 어린 사람을 ‘어린이’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나라의 새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어린이 개념의 의미변화에는 독일의 역사가 라인하크트 코젤렉(R. Koselleck)이 ‘말안장 시대(Sattelzeit)’ 또는 ‘문턱의 시대(Schwellenzeit)’라고 명명한 근대의 언어혁명이 내재해 있다.5) 근대의 언어혁명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것이 역사 개념의 의미변화다. 전근대에서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일 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만드는 역사 개념이 생겨났다. 만드는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이 같은 새로운 개념의 출현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서구인에게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역사를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만드는 역사 개념을 내면화한 근대의 진보주의자들은 과거의 낡은 역사를 극복하여 미래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회변혁 운동에 복무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설정했다. ‘역사는 생의 스승(historia magistra vitae)’이라는 전통적인 역사 담론에서는 노인과 기성세대가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혁명의 시대에서는 청년이 역사를 바꾸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특히 근대로의 이행이 뒤늦은 사회일수록 기성세대보다는 신세대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이 같은 기대를 갖고 개화기에 최남선은 『소년』과『청춘』과 같은 잡지를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일제 강점기에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이고, 가정의 꽃이 되었지만, 노인은 점점 퇴물로 취급되는 방향으로 근대의 문명화 과정은 진행됐다.

    3)일연, 이가원․허경진 옮김, 『삼국유사』, 한길사, 2006, 458-460쪽.  4)필립 아리에스, 문지영 옮김, 『아동의 탄생』, 새물결, 2003.  5)R. Koselleck, “Über die Theoriebedürftigkeit der Geschichtswissenschaft,” R. Koselleck, Zeitschichten. Studien zur Historik, Frankfurt/M., 2000, p.302.

    3. 회색빛 신세계

    탈근대(postmodern)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오늘날 우리는 근대 문명화 과정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인류의 기대수명은 대략 64세다. 하지만 1900년까지만 세계 평균 기대수명은 30세였다. 로마시대 기대수명은 25세였다.6) 거의 천 오백년 동안 평균 수명이 5살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은 셈이다.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 말씀을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로 수정할 만큼의 문명의 진보를 이룩했다.7)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마침내 오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꿈을 성취했다. 머지않아 인류는 평균 기대 수명 100세라는 꿈을 현실로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꿈의 실현이 축복만은 아니다. 오늘날 인류는 ‘회색빛 신세계’의 도래를 앞두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노년층의 도래는 인류문명의 서광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인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대수명의 연장을 압축적으로 이뤄냈다.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는 반만 년 역사의 꿈을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2010년 11월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42만 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11.3%를 차지한다. 전체 인구의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분류된다. 그런데 전국 230개 시·군·구 가운데 82개 지역은 이미 노인 인구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이에 반해 14세 이하 유소년 인구는 778만 7000명으로 5년 전보다 120만 명이나 감소했다. 당초 정부는 2010년 노인 인구를 535만 7000명으로 추정했지만 실제 결과는 이보다 6만 8000명이나 더 많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노인 인구 비중 14%를 넘는 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시점도 당초 예상했던 2018년보다 앞당겨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인구학적 비상사태를 타개할 대책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고령화는 점점 늘어나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일자리를 찾아서 사람들은 전 세계로 이동할 것이다. 이에 따라 다문화 사회와 이민자국가의 경향성은 더욱더 커져서 노르웨이 사태와 런던 폭동과 같은 일이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할 위험성은 상존한다. 특히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고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 시한폭탄은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것이다. 이 같은 위험을 예상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는 외국인 노동자를 유입하고 다문화 가정을 장려하는 것 이외에 점점 더 늘어나는 복지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부를 생산할 사람이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늘어나서 인구학적 불균형이 지금처럼 계속 심화된다면 연금 재정은 결국 파탄 나고야 말것이다.

    고령화 문제를 복지정책으로 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노인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계산해서 국가가 재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여기거나, 사회복지의 대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우리시대 노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늘날 노인문제는 점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투쟁처럼 세대 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했다.8) 하지만 고령화 시대를 맞이해서 이 테제는 “모든 지금까지 존재였던 사회의 역사는 세대 간의 투쟁의 역사였다.”로 수정돼야 하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아픈 청춘과 외로운 노인은 우리시대 대표적인 소외계층이다.9)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세대연대는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갈등세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노인문제를 사회복지 정책이나 연금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적인 개혁을 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결국 ‘회색쇼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해서 인류는 무조건적으로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 대신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6)테드 C. 피시먼, 앞의 책, 26쪽.  7)월리엄 맥닐, 홍욱희 옮김, 『20세기 환경의 역사』, 에코리브르, 2008.  8)K. Marx/F. Engels,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K. Marx und F. Engels, Ausgewählte Werke, Verlag Progress Moskau, 1987, p.31.  9)홍승표는 우리시대 노인이 가장 소외받고 있는 집단이라는 측면에서 노인을 우리시대의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비견되는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시대 노인은 노동과 욕망충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근대적 세계관을 바꾸고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혁명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홍승표, 『노인혁명』, 예문서원, 2007).

    4. 연극으로 보는 노년 문제

    모든 사람이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 그래서 각 시대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노인에 대한 상(像)을 사상과 미술 및 문학 등의 예술 장르를 통해 만들었다. 연극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고령화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기 이전에 노인문제를 주제로 한 연극은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늙음은 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개인의 문제로 인식됐다. 노년을 죽음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늙음 그 자체가 아니라 늙어가는 사람의 인생을 다룬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다가 고령화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면서 노인문제를 주제로 한 연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년이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서 노인 집단의 문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노년과 노인의 문제를 보는 관점의 차이와 그 전환을 보여주는 연극이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 <나두야 간다>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가 노년을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다루었다면, <나두야 간다>는 우리시대 특유의 개별적인 집단으로서 노인 문제를 무대에 올렸다.

    2010년 8월 신구와 손숙이 출연하고 윤호진 연출로 국내에서 초연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영화가 원작이다. 이 연극은 195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의 애틀랜타가 배경이다. 전직 여교사 출신의 72세 유태인 미망인 데이지는 백만장자지만 절제와 근검을 미덕으로 삼고 사는 자존심 강한 할머니다. 그녀가 운전을 하다 또 사고를 내자, 아들은 60대 흑인 운전사 호크를 고용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뭐든지 혼자 하겠노라 고집을 부리고 호크를 강하게 거부하며 냉대한다. 유태인과 흑인은 미국 주류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대표적인 두 집단이다. 차별은 언제나 중층적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의 뿌리는 같아서, 이 둘은 콤플렉스의 이중적 발로다. 데이지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열등한 집단과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전환시킨다. 이렇게 편견이 편견을 낳음으로써 차별의 위계질서는 성립한다. 데이지는 호크가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둑으로 몰거나 바보 같은 어린애로 취급한다. 이런 데이지를 향한 호크의 충직함과 인간미는 시간이라는 시금석이 진실을 밝혀낼 때까지 지속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인과 하인의 관계로 시작한 데이지와 호크의 만남은 2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우정으로 발전한다. 이런 관계의 전환을 만들어낸 기적은 늙음이다. 젊어서 이 둘이 만났다면 결코 계급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노년의 외로움은 얼어붙은 미스 데이지의 가슴을 열고, 호크를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연극이 끝난 후에도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치매에 걸린 데이지를 찾아온 호크가 케이크를 떠먹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아무런 대사도 없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호크가 케이크를 전하자, 데이지는 이를 묵묵히 받아 먹는다. 이제 둘 사이는 더 이상의 대화도 필요 없는 하나가 된 것이다.

    삶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워진 시점에서, 인간의 공감능력은 최대로 확장된다. 리프킨은 인간의 위대함은 공감하는 존재(homo empathicus)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말했다.10) 인간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끊임없이 증대시킴으로써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인류는 세계의 탈주술화를 통해 초월적인 것들과의 소통을 단절했다. 그렇게 해서 단절된 것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다. 노인의 신성한 능력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존재자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원시시대 노인은 하늘과 소통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근대의 탈주술화를 통한 문명화는 이 같은 노인의 초월적 소통 능력을 무시하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 결과 지식은 나날이 증대하지만 지혜는 부재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미스 데이지는 흑인 운전사 호크와 20년을 같이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어린왕자가 말하듯이 사랑이란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면서 아름다운 노년을 보냈다. 데이지와 호크 사이의 우정이 우리시대 노인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모법답안이 될 수 있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이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가까운 장래에 백년해로가 정말로 가능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꿈이 현실로 다가오면 올수록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는 것이 인생사다. 주위에 혼자가 된 노인들이 많다. 문제는 여자보다는 남자다. 이제는 몇 세부터가 노년인가를 생물학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노년을 정의하는 생물학적 나이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결국 노년이란 같이 살 사람이 아니라 같이 죽을 사람을 찾기 시작할 때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시대 특유의 노인문제를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는 다른 노년과 사랑의 방정식으로 풀어낸 연극이 2011년 8월에 공연된 <나두야 간다>(천정완작, 신유청 연출)다. <나두야 간다>는 우리시대의 새로운 경향성인 다문화사회까지 변수로 포함하여 노인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 연극은 가족에게 소외당한 70대 노인의 로맨스를 다룬다. 최덕구는 젊은 시절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고 쉴 나이가 되니 인생의 말년에 이르렀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가족에게 쏟아 부었지만, 이제는 외로운 노년이 된 것이다. 희망으로 키워온 자식들은 자신에게 돈 뜯어낼 궁리만 한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소일하고, 자신의 외로움을 애지중지하는 금붕어에 투영하며 달랠 뿐이다.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노인은 어느 날 자주 가던 다방 마담에게 키르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처녀 민자를 소개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민자와의 데이트가 그의 사막 같은 삶을 적시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노년에 찾아온 핑크빛 로맨스를 통해 그는 제2의 청춘을 맞이했다. 하지만 덕구의 변화를 눈치 챈 딸과 큰며느리는 그의 뒤를 캐면서 로맨스는 끝장났다. 며느리가 민자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해서 그녀는 고향으로 추방당했다. 방황하던 최 노인은 마침내 모든 것을 정리한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던 금붕어와 민자가 고향에서 부쳐온 그림엽서를 들고 그녀에게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우리사회 노인문제의 본질과 직접 대면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기획의도’가 그것을 잘 표현한다.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연지사다. 하지만 왜 머리가 하얘지고, 허리가 구부정해지면, 문제가 되는 건가? 왜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문제로 만드는 것인가? 노인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태도가 노인을 문젯거리로 만들고 있을 뿐. 연극 <나두야 간다>는 그러한 인식의 관점을 돌리고자 기획하였다.”11) 이 같은 진단을 통해 연극이 내린 처방은 “우리의 앞날이 문제가 아닌 자연스러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며, 희망을 가지고 우리 모두 살자. 인생을 즐겁게 꿈꾸자 그리고 사랑하자.”이다. 신유청 연출가는 “주인공인 무채색의 노인 최덕구에게 밝은 색동옷을 입히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12) 여기서 색동옷이란 ‘사랑’이다. “서럽던 어느 날, 그에게도 여름의 눈부신 햇살과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떨까? 그의 인생의 마지막 청춘!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는 그들의 삶의 끝자락에서 청춘예찬을 외쳐본다!” 하지만 색동옷이 일상복이 될 수 없듯이 노인이 회춘해서 청춘으로 살 수는 없다. 20대 춘자와 70대 노인의 사랑이 과연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혼을 한다 해도 얼마나 지속할지는 미지수다. 주위에 돈으로 나이 차를 넘어선 사랑과 결혼이 있음을 본다. 하지만 늙은 대기업 회장과 젊은 유명 아나운서의 결혼과 이혼처럼, 이것 역시 시간의 시금석을 통과하지 못한다. 이 연극에는 나이 차를 이어주는 또 다른 접착제가 있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한국인과 고려인이라는 다문화 코드다. 고려인은 어른을 공경하고 보살피는 한국인의 과거인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과거는 낯선 나라다.” 민자의 머릿속에는 현재의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가 있다. 실제 연극에서 덕구 노인은 잃어버린 전통과 엄마 품과 같은 고향의 따뜻함을 고려인 처녀를 통해 보상받는다. 과연 이 둘이 마침내 재회해서 사랑을 이루면 어떤 인생을 살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는 다른 결론이 상상된다.

    <나두야 간다>의 연극적 상상력의 한계는 고려인 처녀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봄날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시대 노인문제를 해결하는 일반적인 처방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최덕구처럼 돈 있는 노인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고려인 처녀와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너무나 예외적인 사례다. 적어도 연극이 미시사에서 말하는 ‘이례적 정상’의 이야기를 할 때,13) 우리시대 노인문제를 치유하는 처방으로 유효할 수 있다. 연극의 프로그램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인생은 청춘이다”라는 관점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 회춘하는 것이 노인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이건 우리시대 대부분의 노인들에게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나두야 간다>는 우리사회 노인문제의 현실은 잘 보여줬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기획의도’에서 썼듯이, 노인은 자연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노인문제 해결의 출발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처럼 정말로 늙음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가 노인 문제를 낳은 근본원인이라면, 그 같은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10)제러미 리프킨, 이경남 옮김, 『공감의 시대』, 민음사, 2010.  11)<나두야 간다> 공연 포털 사이트 http://www.otr.co.kr/play/view.htm?sid=8384&mdevide=01  12)위와 같은 곳.  13)미시사의 ‘이례적 정상’에 대해서는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0, 51쪽.

    5. 노년을 보는 관점의 전환

    노년의 불행은 나이 탓이 아니라 성격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역설한 고전이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다.14) 대화체 형식으로 집필된 이 책의 주인공은 84세인 카르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 대(大) 카토다. 그는 노년이 비참하게 보이는 이유를 네 가지로 열거했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한다. 둘째, 노년은 우리 몸을 허약하게 만든다. 셋째, 노년은 우리의 거의 모든 쾌락을 빼앗아간다. 넷째, 노년은 죽음에 가까이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은 지금도 원로원에 어떤 전쟁을 해야 할지 조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첫째 이유를 반박했다. 노년은 선원의 일은 할 수 없지만 선장의 역할은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노년에게 중요한 것은 체력이 아니라 경륜이라고 말했다. 노년은 조용하고 차분한 연설로 청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노년에 이르러 감각적 쾌락이 없어진다는 것을 그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임을 강조했다. 젊었을 때는 허망한 감각적 쾌락에 이끌려 인생을 낭비하지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년에서는 인생을 관조하면서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고, 또 죽음 이후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노년에 이르러 죽음에 임박해 있다는 것 때문에 비참해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젊은이에게 “그 나이는 내 나이보다 사고사(事故死)할 가능성이 더 많은 법이네. (…) 그래서 그들 중 소수만이 노년에 이른다네.”라고 충고했다.15) 인간 모두는 죽기에 충분히 늙었다. 노년과 죽음은 인간 삶의 여정에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이것을 아는 인간이 노년의 비참함과 싸울 수 있는 최선의 무기는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키케로는 말했다.16)

    물론 키케로의 노년이라는 병에 대한 처방은 보통사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높은 이상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누아는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구 노년의 역사를 연구한 후, 노인에 대한 높은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노년의 전형을 만들어서 그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으로는 현실로 존재하는 노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년에 대한 전형이 이상화되면 될수록 사회는 더 많은 것을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전형이 노인을 더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년에 대한 추상적인 모델을 상정하고 노인들을 그 이론적인 이미지와 비교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만, 노인들을 진정으로 전체 사회집단에 통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17)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노년의 현실을 직시할 때 노년문제를 해결할 수 방안이 비로소 모색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오늘날 문제는 고령화가 너무나 빠르게 진행돼서 현실의 변화를 국가 정책과 사회복지제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이상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월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초월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에서 나온다. 기형도 시인이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노래했듯이 인간은 “이미 늙은 것이다”.18) 인간은 이미 늙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시간을 거슬러가는 시계를 발명한 사람이 있다는 상상으로 이야기하는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19)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유년에서 시작해서 노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 순서를 역전시켜서 이미 늙어서 태어나서 점점 어려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소설이 이처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시간의 순서를 역행하는 플롯구성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존재한다. 유년으로 태어나든 노년으로 태어나든 주어진 수명은 같은 것처럼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에너지는 동일하기 때문에 에너지보존법칙이 작동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양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운명으로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어떻게 쓰다 가느냐다. 키케로는 그 사용법을 아는 것이 바로 미덕이라고 젊은이들에게 충고했다. “미덕이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해 그것을 잘 가꾸게 되면 오랜 세월을 산 뒤에 놀라운 결실을 가져다준다네. 왜냐하면 미덕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훌륭하게 살았다는 의식과 훌륭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기억은 가장 즐거운 것이 되기 때문이네.”20)

    미덕이 있는 자는 지혜를 가진 자다. 근대 과학은 지식은 비약적으로 축적했지만, 지혜는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과학의 문제점을 베버는 톨스토이 입을 빌어 지적했다. “과학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21)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과학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생의 목적을 성찰하는 지혜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추방했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추구했던 전통시대 학문이 근대 과학으로 대체되는 계기는 베버가 세계의 탈주술화라고 지칭한 합리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을 버리고 탈주술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전통시대로 복귀할 수는 없지만, 전통시대의 지혜를 현재화 시킬 방안은 모색해야 한다. 우리 시대 잃어버린 지혜를 되찾아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문학, 음악, 미술, 연극과 같은 예술이고 인문학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비슷하게 나이 듦에 대한 지혜를 한국의 전통사상과 연관해서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이청춘의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라는 동화다. 이 동화에서 은지라는 소녀는 가족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많은 할머니가 부모님보다 키가 작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키가 작아지는 이유를 할머니에게 묻는다. “그건 우리 은지가 이 할미의 나이를 빼앗아 먹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한다.22) 은지는 할머니의 나이 덕으로 자신의 키는 자라지만 할머니의 키가 작아지는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은지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워서 이제부터는 할머니 나이를 더 나눠 먹지 않겠다고 고집 부린다. 이런 은지를 아빠는 달랜다. “그럼 은지의 키가 더 자라지 않을 모양이구나. 키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도 싫고. 하지만 사람은 그게 싫더라도 누구나 어른이 되게 마련이란다. 할머니께서도 우리 은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고.”23) 어느 날 은지는 할머니가 나이를 나눠주신 만큼씩 키가 작아질 뿐 아니라 몸짓이나 말씀, 마음까지도 그 작아진 키만큼 옛날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유를 아빠에게 다시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 그것은 할머니께서 은지에게 나이를 덜어 주실 때 그 나이에 담긴 지혜도 함께 나눠 주시기 때문이지. 할머니의 나이 속에는 그 나이 시절의 여러 가지 기억들과 함께 많은 지혜가 담겨있는데, 그 나이를 누구에게 나눠 주면 할머니에게선 그런 기억들과 함께 그 시절의 지혜도 그 사람에게로 옮겨 가게 되거든. 그래서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나이만큼이나 키가 작아지실 뿐 아니라, 기억이나 지혜도 자꾸만 옛날 일들로 되돌아가시며 어린애처럼 되어 가시는 거란다.”24)

    이청준은 노년이란 온 산과 들녘에 푸른 생명의 봄 잔치가 어우러지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는 할미꽃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술래처럼 다음 세대를 잡아서 그에게 역할을 맡기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최근에 이 같은 지혜를 새로운 기술 창조의 에너지로 발전시키고 떠난 술래가 스티브잡스다. 그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강연에서 이 같은 술래잡기를 하는 인간 삶에서 “죽음은 삶이 만든 유일한 최고의 발명품이다(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라고 말했다. 죽음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 내는 매개체이며, 낡음을 청소하고 새로움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25)

    지식의 막다른 골목에서 인간을 초월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지혜다. 노년의 위대함은 지혜라는 미덕에서 나온다. 술래잡기 인생에서 술래의 역할을 하는 노년의 지혜가 없다는 것이 우리 삶의 위기다. 그렇다면 점점 고령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서 노년의 지혜를 재활용하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나는 노년의 인문학을 제안한다.

    14)키케로, 천병희 옮김,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숲, 2005,  15)앞의 책, 78쪽.  16)위의 책, 22-23쪽.  17)조르주 미누아, 박규현·김소라 옮김, 『노년의 역사: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양 역사에 나타난 노년』, 아모르문디, 2010, 543쪽.  18)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45쪽.  19)F. 스콧 피츠제럴드, 박찬원 옮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펭귄클래식코리아, 웅진, 2009.  20)키케로, 앞의 책, 22-23쪽.  21)M. Weber, “Wissenschaft als Beruf”,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Tübingen: Mohr, 1988, p.598.  22)이청준 글, 김중석 그림,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파랑새, 2006, 12쪽.  23)위의 책, 14-15쪽.  24)앞의 책, 19-20쪽.  25)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축사 영어 전문 http://latte4u.net/960.

    6. 노년의 인문학을 위하여

    생노병사(生老病死)는 필할 수 없는 인간 운명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은 생태계의 원리, 곧 순리다. 이 같은 순리를 거역하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유일한 존재자가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 같은 삶의 태도로부터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문화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문화란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오랫동안 수렵 채집시대를 살다가 약 만 년 전 쯤에야 비로소 농경시대를 맞이했다. 문화라는 말의 어원이 ‘경작하다’이듯이, 인간의 문화생활은 농업에서 비롯했다. 인류는 채집하던 식물을 농작물로 재배하고 숲 속의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짐승으로 길들이는 방식으로 자연에 따르기보다는 이용하는 삶의 노하우를 축적하는 지식 생산을 통해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가 됐다.

    근대 문명은 이 같은 인류문명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근대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지식을 비약적으로 발달시킨 시대다. 근대에서 인간은 세계를 신화와 종교에 의거해서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이성적으로 설명해 내고자 노력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사실 지향적 지식을 축적하여 자연 현상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크게 확장했다.

    늙고 죽는다는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부과된 자연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26) 근대 이전 인간이 죽음을 극복이 아닌 수용의 자세로 맞이하고 종교와 제의라는 형식을 통해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면, 근대 이후의 인간은 과학을 통해 죽음이라는 자연을 정복하는 현세 중심적 삶을 산다. 그 결과를 김열규는 “죽음이 죽었다.”27) 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인간만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를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을 죽여 버린 것이다. 개체생명은 죽지만, 장회익이 말하는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없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전이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지칭한다면, 개체생명이 죽은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은 존재한다.28) 내 존재 안에는 조상들의 삶 전체와 온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기에 온생명이 나의 본래다. 개체 생명의 죽음이란 본래로의 회귀, 곧 ‘돌아가심’이다.

    병들고 늙었다는 것은 돌아갈 때가 임박했다는 신호다. 그 신호를 수신했을 때, 인간은 먼저 온생명과의 소통을 통해 그 신호의 의미를 해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병원에 간 사람은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치유해야할 병을 가진 환자가 된다. 의사는 환자를 정상인이 아니라 비정상인으로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사람이 아니라 병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는 중환자실로 보내진다. 중환자실은 면회가 금지된 곳이다. 위생상의 이유로 그곳으로 격리된 환자는 결국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은 이별이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식이 있을 때 살아있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 있으며, 의식을 갖고 본래로 돌아갈 수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별을 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깨달으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깨친 것으로 인가한다. 명진 스님 말대로,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29)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죽으냐다. 죽을 줄 모르고 사는 존재에게는 사는 동안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갖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복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과학을 통해 노년과 죽음에 대한 지식의 총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킴으로써 평균 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이 같은 문명의 성과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한 죽음을 맞는 존재로 만들었다.

    오늘날 지식정보시대에서 최고의 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이 고(故) 스티브잡스다. 기술과 인문학을 융합시킨 그는 삶과 죽음도 접목시켰다. 그는 앞서 언급한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강연에서 자신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말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럼 당신은 정말로 잃을 게 없다”가 잡스가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 세대에게 남긴 메시지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을 읽어보면,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의 인생을 재미있고 의미 있는 드라마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이다. 그는 인생 드라마의 정점과 대미를 죽음으로 장식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말이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다. “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무대요. 남녀 모두는 한낱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제각각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해 버리기도 하지. 그리고 살아생전에 사람은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 하는데 연령에 따라 7막으로 나눌 수 있는바 … 우선 1막은 아기 역, … 파란 많고 기이한 인생살이의 마지막 7막은 제2막의 어린이랄까, 오직 망각이 있을 뿐, 이도 빠지고, 눈도 안 보이고, 입맛도 없고, 세상만사가 허무하다.”30) 꿈 속의 꿈같은 허무한 인생의 마지막 장을 나는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이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이 노년의 인문학이다.

    26)노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1, 12쪽.  27)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궁리, 2001, 160쪽.  28)장회익, 『삶과 온생명』, 솔출판사, 1998.  29)명진, 『스님은 사춘기』, 이솔, 2011.  30)셰익스피어, 신정옥 옮김, 『뜻대로 하세요』, 전예원, 1990, 2막 7장,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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