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est of Family-Plot in Korean Theatre of 2000s and Family-Identification

한국 현대 연극의 가족이야기와 가족정체성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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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dissertation intends to examine the family-plot in the korean theatre of 2000s when the deconstruction of the traditional family-ideology and construction of new family-identification in the family-plot is appearing with the postdramatic strategy. Family-plot which has arranged patricentric order in the family is the modern narrative, but in the postmodern the patricentric order in the family has been doubtful as the kind of suppression like the demand for self-sacrifice of individuals. The korean theatre has staged the family-plot in two ways in 2000s ; the consolidating of family-ideology and the deconstruction of the traditional family-ideology. This dissertation notices that the latter intends to deconstruct the traditional family-ideology and construct the new family-identification with the postdramatic strategy of making “Familienbühne”. The postdramatic strategies can be analyzed juxtaposition and standstill of time and refusal of making family, which are proper to reveal the problem of family-identification and -ideology. In this dissertation examines the three stages of Kim Nack-Hyung, Kim Hyun-Tack, and Choi Chi-Ahn. They concentrate on the deconstruction the traditional family-ideology to make the new Familienbühne.


    본 논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공연된 한국 연극 중 가족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중심으로, 가족무대(Familienbühne) 구성 과정의 변화를 포스트드라마적(postdramatic)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다문화시대에 돌입한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어 온 혈연 중심의 가족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전략은 바로 그 지점을 유의미한 문제제기로 환기시킨다. 가족은 인류의 삶에서 절대적 정당성과 자연성을 가지는 초역사적인 고정된 실체라는 본질주의적 입장은 “가족은 그것이 없는 곳에서 가족을 발명해낸다”는 문제의식을 통해 해체될 수 있다. 가족 그 자체의 내용은 보수적이거나 봉건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이 발명되고 구성되는 사회적 역학 관계에 따라 가족 혹은 가족중심주의는 보수적이거나 봉건적인 성격의 가족이데올로기를 내장하게 되므로 가족 혹은 가족중심주의의 발명 과정 자체를 문제시하는 태도를 통해 폭력적 가족이데올로기는 해체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2000년대 이후 본질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전략을 포스트드라마적 실험 형식을 통해 구현한 공연에 주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이야기를 무대화하는 방식이 드라마(drama) 형식에 의지할 경우, 그것은 흔히 가족과 사회 현실을 대립시키는 경직된 이분법적 도식 속에 구축된다. 난폭한 현실(사회)과 그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대적 희생이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항으로 설정되고, 난폭한 사회 현실을 재현한 사건이 극적으로 추동되며, 난폭한 사회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써 가족관계를 긍정하는 결말을 통해 드라마 형식은 기존의 가족관계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반해 “연극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모드)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형식으로 드라마 형식을 해체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전략은 “과정으로서 연극,비-텍스트성, 모든 장소성, 반-미메시스, 몸짓성(Gestualität), 빈 공간” 등의 요소를 통해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 혹은 가족중심주의의 발명 과정 자체를 문제시하는데 효과적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분석틀로 활용한 “가족무대(Familienbühne)” 개념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연극의 가족이야기 속 가족정체성의 변화를 포스트드라마적 전략과 관련시켜 분석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가족무대는 본래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가족을 구성하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특정 집단이 가족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 문화인류학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인간 행동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가족무대라는 개념은 “현실의 세계는 그 자체 항상 공연을 통해서 연극적으로 구성된다”는 요시미 슌야의 조언을 떠올릴 때, 가족이야기를 다룬 연극 무대 위 극행동의 분석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곧 가족이야기를 구성하는 무대 위 극행동은 현실에서 가족무대를 구성하기 위해 수행되는 일련의 의식적 행위와 유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연극 무대에서 가족무대를 구성하는 과정을 분석하여 전통적 가족무대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무대의 구성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고찰하면 가족정체성의 변화와 그로 인한 가족관계의 균열과 틈을 특히 선험적으로 작동하는 가족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가족무대의 구성과 해체의 과정을 무대 위에 제시할 때, 포스트드라마적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2000년대 한국 연극에서 포착된 포스트 드라마적 형식은 전통적인 규범으로 규정된 가족 관계를 묻는 방식을 변화시켜 가족 관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 KEYWORD

    Family-Identification , postdramatic Theatre , Family-Plot , Familienbuhne , KimNack-Hyung , Kim Hyun-Tack , Lee Sung-Yul , Choi , Chi-Ahn , Deconstruction of Familienbuhne , Juxtaposition and Standstill of Time , Refusal of making Family

  • 1. 서론 - “가족무대(Familienbuhne)” 구성의 무대화

    문학평론가 강유정이 “집과 성장은 한국 문학사의 역사적 전이를 규정할 만한 기준점”1)이라고 평가했을 때, 그것은 근대 소설에서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구축되는 가족이야기(family plot)2)가 차지하는 위상을 간명하게 설명한 것이었다. 근대(modern) 소설의 일반적 플롯으로 고착된 가족이야기에 내장된 본질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에서 의심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인 것의 변증법적 권리 주장에 저항하려 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정신이 발효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3) 1990년대 한국 소설은 전경린, 서하진, 은희경 등의 여성 소설가들을 내세워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며 억압의 다른 이름인 가족을 해체하고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제도가 지닌 정치적 억압을 문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성(Modernity)이 작동시키는 근대적 메타서사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IMF의 경제 위기 속에서 <국화꽃 향기>, <아버지>, <가시고기>, <아들과 함께 걷는 길>과 같은 상업화된 베스트셀러는 아버지를 가족의 품으로 귀환시켰고, 불안과 무기력에 빠진 대중들은 귀환한 아버지의 집에서 위안을 제공받고자 했다. 이처럼 본질적 가족이데올로기의 낭만적 도래와 고통스러웠지만 달콤했던 과거의 향수를 통해 문학의 재보수화가 진행되었다.4)

    한국 연극의 사정도 이로부터 멀리 있지 않았다. 1997년 IMF 이후 난폭한 사회 현실에 대한 안식처로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애를 일깨우는 스위트 홈(Sweet Home)의 환상이 제시되는 가운데 한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로 한국 연극무대 위에 소환되었다. 부성애와 모성애로 무장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전달되는 가족이야기는 가족 관계에 속한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을 반영한 강도와 진정성이 높은 것으로 수용되었고 상대적으로 쉽게 대중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2004), <가시고기>(2006), <아버지>(2006), <친정엄마>(2007), <민들레 바람 되어>(2008), <길 떠나는 가족>(1991/2009) 등이 그 예로 이들 공연은 공통적으로 일상적 가족이야기를 다루되, 가족과 사회라는 대립항의 단선적 갈등 속에 가족구성원의 일방적 헌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본질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5)를 재현했다. 이들 공연에서 부모의 희생은 가족 관계의 선험적 전제이자 가족의 신성함을 구축하는 견고한 전제로 구축되며 가족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을 본질적인 것으로 강화하기 위해 선택되는 극적 요소였다.

    그런데 가족은 인류의 삶에서 절대적 정당성과 자연성을 가지는 초역사적인 고정된 실체라는 본질주의적 입장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변형하자면 “가족은 그것이 없는 곳에서 가족을 발명해낸다”6)는 문제의식을 통해 해체될 수 있다. 가족 그 자체의 내용은 보수적이거나 봉건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개념이 발명되고 구성되는 사회적 역학 관계에 따라 가족 혹은 가족중심주의는 보수적이거나 봉건적인 성격의 가족이데올로기를 내장하게 되므로 가족 혹은 가족중심주의의 발명 과정 자체를 문제시하는 태도를 통해 폭력적 가족이데올로기는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2000년대 이후 본질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전략을 포스트드라마적(postdramatic) 실험 형식을 통해 구현한 공연에 주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이야기를 무대화하는 방식이 드라마(drama) 형식에 의지할 경우, 그것은 흔히 가족과 사회 현실을 대립시키는 경직된 이분법적 도식 속에 구축된다. 난폭한 현실(사회)과 그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대적 희생이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항으로 설정되고, 난폭한 사회 현실을 재현한 사건이 극적으로 추동되며, 난폭한 사회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써 가 족관계를 긍정하는 결말을 통해 드라마 형식은 기존의 가족관계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드라마 형식은 본질적으로 무대 위에 허구적 우주를 구성하여 무대가 현실을 의미하거나 현실 자체가 되려고 하고, 관객들은 그러한 무대를 보며 추상화된 환상과 감정이입을 통해 환영(Illusion)을 전달받는다.7) 드라마 형식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연극은 현실을 재현하는 모델로서 전체성을 주장하고, 이처럼 전체성을 지닌 세계 자체를 의미하도록 기획된 드라마 연극이 연극 무대로 구현될 때, 그것은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기보다는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따라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희생을 보여주는 드라마 연극은 황폐한 사회 현실에 대해 가족이 지니는 초월적 사랑의 힘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의 보수적 윤리의식을 정서적으로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당연히 전제되는 부모의 희생에 대해서는 성찰적 자의식을 내보이지는 못한다. 가족 관계의 문제적 현실이 무대 위에 재현될 경우 그것이 대개 진부한 가족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연극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모드)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형식으로 드라마 형식을 해체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전략은 “과정으로서 연극, 비-텍스트성, 모든 장소성, 반-미메시스, 몸짓성(Gestualität), 빈 공간” 등의 요소를 통해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 혹은 가족중심주의의 발명 과정 자체를 문제시하는데 효과적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분석틀로 활용한 “가족무대(Familienbühne)”8) 개념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연극의 가족이야기 속 가족정체성의 변화를 포스트드라마적 전략과 관련시켜 분석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가족무대는 본래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가족을 구성하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특정 집단이 가족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 문화인류학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인간 행동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가족무대라는 개념은 “현실의 세계는 그 자체 항상 공연을 통해서 연극적으로 구성된다”9)는 요시미 슌야의 조언을 떠올릴 때, 가족이야기를 다룬 연극 무대 위 극행동의 분석에도 유효하다. 곧 가족이야기를 구성하는 무대 위 극행동은 현실에서 가족무대를 구성하기 위해 수행되는 일련의 의식적 행위와 유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연극 무대에서 가족무대를 구성하는 과정을 분석하여 전통적 가족무대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무대의 구성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고찰하면, 가족정체성의 변화와 그로 인한 가족관계의 균열과 틈을 특히 선험적으로 작동하는 가족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2000년대 이후 공연된 한국 연극 중 가족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중심으로,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이를 담아내기 위한 연극 형식적 실험이 포스트드라마적으로 구현된 작품들을 고찰하려 한다. 특히 무대 위 가족무대 해체와 구성 과정을 포스트드라마적 형식으로 제시한 공연을 분석하여 일상극이라는 모호한 범주로 특징지워진 가족이야기 공연의 의미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1)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 문학』 제34권, 민음사, 2009년 봄호, 314-315쪽.  2)이 글에서 사용된 가족이야기라는 개념은 근대 소설의 플롯을 일반화한 개념인 “패밀리 플롯(family plot)”을 말한다. 패밀리 플롯은 근대(modern)의 새로운 질서를 구성해낸 부르주아의 질서를 새로운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라는 질서로 플롯화한 근대 소설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 2000, 145쪽).  3)김미도는 1995년 연극평론 「오태석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1990년 초연된 오태석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와 1993년 오태석이 김매자 창무회와 함께 만든 <아침 한 때 눈이나 비>를 대상으로 한국 연극계의 변화의 양상을 포스트모더니즘적 징후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열적/개방적, 유희, 우연, 무질서, 과정/공연/해프닝, 부재, 텍스트/상호텍스트성. 병렬적 구문, 환유, 반해석/오독, 시니피앙, 반내러티브/사소한 사건, 돌연변이, 정신분열증, 아이러니, 불확정성”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징후를 드러내는 키워드이며, “오태석의 연극은 대부분 논리적 인과성을 결여한 대신 부분의 유희성을 강조하며 복잡한 환유체계가 관객들을 끊임없는 오독의 미로에 빠뜨린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정신분열증의 세계는 오히려 세기말의 광기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첩경이며 미지의 심리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로운 탐험이 된다”고 적고 있다. 김미도의 논의는 당시 문학, 예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힘입은 바 크고 오태석의 작품만을 그 전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연극계 전반의 현상을 설명함에 부족함은 있지만, 분명 한국 연극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는 타당한 지점들을 지적하고 있고 그 내용은 레만이 정리한 유럽의 포스트모던 연극의 특징과 일정 부분에서 일치한다(김미도, 「오태석과 포스트모더니즘」, 『공연과 리뷰』, 현대미학사, 1995년 여름호).  4)강유정, 앞의 글, 330쪽.  5)기존의 연구에서는 가족 중심주의(familism)과 가족이데올로기(familialism)라는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했다. 가족 중심주의가 가족을 옹호하거나 강화하려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이라면, 가족이데올로기란 가족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즉 모든 사람은 가족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국가 정책상으로도 기본 수혜 단위가 가족으로 상정되어 가족의 유지와 보호가 주요 방향이 된다(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 2000, 15쪽).  6)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옮김, 『상상의 공동체』, 나남출판, 2002, 25쪽.  7)Hans-Thies Lehmann. Postdramatisches Theater(Frankfurt am Main : Verlag der Autoren, 1999), pp. 21-22.  8)Christoph Wulf, Jörg Zirfas, Die performative Bildung von Gemeinschaften-zur Hervorbringung des Sozialen in Ritualen und Ritualisierungen, Paragrana-Internationale Zeitschrift für Historische Anthropologie, 10(Berlin : Akademie Verlag, 2001), pp. 96-97.  9)吉見俊哉, 『都市のドラマトウルギー』, 弘文堂, 1987, 16쪽.

    2. 2000년대 한국연극의 가족무대와 변화의 지점들

    이혼이라는 결말을 선택한 윤대성 작 <두 여자 두 남자>(1992)나 여성의 입장에서 결혼의 의미를 성찰한 정우숙 작 <구멍의 둘레>(1994)도 한국 연극의 가족이야기의 맥락에서는 문제적이었지만, 1994년 민중극단 윤광진의 연출로 공연된 재일 작가 유미리의 <물고기의 축제>는 가족을 위한 일방적 희생을 거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등장만으로도 공연 당시 일종의 문화적 충격으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2007년 극단 백수광부의 이성열 연출은 <물고기의 축제>가 구현하는 기괴한 가족 관계를 더 이상 충격이 아닌 우리들의 현실로 해석해냈다. 막내 휴유오의 죽음이 지니는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온통 무채색의 건조한 색감의 무대로 구성되었던 윤광진의 1997년 초연과는 달리, 이성열 연출은 오브제와 무대 의상을 활기찬 원색으로 채웠다. 특히 생과일 수박의 빨간 속살과 수박을 파는 익살스런 남자의 울긋불긋한 원색의 옷차림은 일상의 삶이 지닌 생명력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화려한 화장에 빨간 원피스를 입는 어머니와 장례를 남부끄럽지 않게 성대히 치루는 데만 관심을 갖는 아버지는 아들의 관 앞에서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잘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오랜만에 함께 모인 휴유오의 형제들은 장례식을 앞두고 게임을 하며 즐거워한다. 이런 가족구성원들의 모습은 일견 이기적이고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이 보여 주는 극행동은 ‘상상된’ 허구적 가족관계가 아닌 자신들의 실제 삶에 충실한 가족 구성원의 개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곧 이성열의 작품 해석이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함께 모인 가족들의 가족애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를 구성하는 구성원 각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내며 전통적 가족 관계를 그 근원에서부터 해체한 것이다.

    무대 위 리얼리티가 불편하면 할수록 관객들은 자신들이 상상해왔던 가족 관계 속에 내재한 기만적 허위의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2007년 공연된 <물고기의 축제>는 바로 그러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전통적 가족관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2007년 이성열이 <물고기의 축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등장한 박근형의 작품10)이 주목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처럼 박근형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한국 사회에 내면화된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를 부정, 해체하고 유사가족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되고 있는 가족의 관념과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박근형은 새로운 유사가족의 구성 과정을 드라마 형식의 비사실주의적 재현 방식으로 무대화하는 연출 전략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박근형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가족 관계가 해체된 후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동기를 통해 새로운 유사가족이 구성되는 과정을 관찰하고, 새로운 가족무대의 구성 과정 곧 공연의 진행 과정을 통해 유사가족 구성의 우연적이고 편의적인 요소들이 관습적인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와 불편하게 충돌함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유사가족 구성 과정의 이질적이고 비(非)가족적 요소들 즉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를 거부하거나 전복하는 극행동은 이질적인 차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정체성의 실체를 폭로하는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하여 관객들에게 가족정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한다.11) 곧 박근형의 작품에서 관객들은 공연 과정에 다름 아닌 새로운 가족무대 구성 과정을 통해 기존의 가족정체성이나 가족이데올로기의 원래의 맥락을 제거하고 새로운 맥락을 구성하는 재맥락화와 그에 대한 새로운 관념들과 의미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박근형은 “글쓰기가 공연의 수단으로 발전하는 단계의 공연을 위한 글쓰기 혹은 수행적 글쓰기”12)라는 창작 과정의 특이점 이외에도 본질론으로 환원되는 근대적 가족이데올로기의 해체라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통해 2000년대 한국 연극의 변화된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연출가로 평가된다.

    물론 박근형 이전에도 조광화 작· 연출의 <남자충동>(1997)처럼 전통적 가족이야기를 문제시한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최근 공연된 김영하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오빠가 돌아왔다>(2010)와 역시 천명관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연극 <고령화 가족>(2010), 배봉기 작, 심재찬 연출의 <사랑이 온다>(2010)도 가족이야기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드라마 형식의 가족이야기가 지니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 가령 2010년 동숭아트센터에서 고선웅 연출로 공연된 <오빠가 돌아왔다>는 강력한 남성성을 희구했던 <남자충동>의 주인공 장정과 다르면서도 같은 오빠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연극 <오빠가 돌아왔다>는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아버지보다 더욱 강력한 ‘가장’이 되어 돌아온 오빠와 그 후 오빠를 중심으로 새로 구성되는 가족무대를 보여준다. 연극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오빠는 성장과정에서 경험한 비천한 아버지를 부정하려는 이 땅의 아들이 자신의 가정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상상한 아버지’13), 곧 전통적 남성성을 지닌 강력하고 가부장적인 또 다른 아버지로 재림하는 극행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빠가 아빠가 되는 과정을 희화화된 가족들을 통해 그려낸 연극 <오빠가 돌아왔다>는 그러나 사건-갈등-해결의 드라마 형식이 추동시키는 과정이 따뜻한 가족애의 확인으로 귀결되며 원작 소설이 내장한 마초적 남성성을 비판하려는 문제의식을 살려내지 못했다. 극단 뚱딴지의 문삼화가 연출한 <고령화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고령화 가족>에는 조카의 가출 사건을 해결하는 막장 가족들이 등장한다. 조카의 가출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합한 가족들은 결말에서 가족애를 확인하게 되고 그들의 가족 내 갈등은 봉합된다. <오빠가 돌아왔다>와 <고령화 가족>에서 갈등이 증폭되는 극적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드라마가 종결되었을 때 발견된 가족의 의미란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가족 관계의 긍정에 다름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한편 배봉기가 쓰고 극단 전망의 심재찬이 연출한 <사랑이 온다>는 조광화의 <남자충동>처럼 전통적 남성성에 내재되고 용인되어 온 폭력의 양상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에 가출한 아들이 성장한 후 아버지를 찾아와 폭력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어머니의 살인과 자살을 통해 아들이 성공하지 못한 가정 폭력에 대한 “정산”이 대신 실행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가족 관계 내에서 작동하는 가정폭력은 화해하거나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확인시킨다. 흔히 가정폭력의 문제는 일방적 가해자인 남성과 일방적 피해자인 여성의 문제로 도식화되고 특히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작품화되는데 비해,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들의 문제로 가정폭력을 성찰하고 있는 <사랑이 온다>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가족관계를 다루는 남성 작가의 시선이 지닌 한계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사랑이 온다>에서는 가정폭력의 해결 가능성으로 남성의 변화를, 그리고 그런 남성의 변화가 가족 내 여성(혹은 여성의 사랑)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력적 남성성의 내용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피해자로 만드는 것처럼, 가정폭력에 관한 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가정폭력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가족관계에 대한 상상된 관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폭력을 포함한 가족의 문제는 기존의 가족 관계를 뛰어넘는 대안적 가정의 구성을 메타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인데, <사랑이 온다>에서는 그것이 사랑을 통한 해결이라는 방식으로 봉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이 온다>의 아들의 고통이 해소되는 과정 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사랑이 온다>에서 아들이 가정폭력으로 겪는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은 고통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가정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라는 점을 확인시키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들은 자신과 동일한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을 선택해 자신의 가정을 구성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가정과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가정의 가장이 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해결은 아니더라도 봉합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의 강유정은 2000년대 한국 소설계에 등장한 젊은 소설가들의 가족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그들 작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무릇 전위란 우리가 문학이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관습화된 권력이자 구조에 결과임을 입증하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새로운 소설들은 우리가 소설 혹은 문학이라고 믿어 왔던 외연들을 확장하거나 파괴하고 해체했다. 거절은 상징화된 권력으로 이뤄진 사회에 진입하는 성장에 대한 질문과 헤게모니가 된 가족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14)

    가족 문제는 기존의 가족 관계를 뛰어넘는 대안적 가정의 구성을 메타적으로 성찰함으로써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는 강유정이 지적한 “소설 혹은 문학이라고 믿어 왔던 외연들을 확장하거나 파괴하고 해체” 하는 창작의 태도와 동궤를 이루며, 한국 연극의 경우 그것은 가족무대를 구성하는 과정의 외연을 확장하거나 파괴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형식의 파격을 통한 해체가 없다면 가족이야기의 새로운 구성은 가능하지 않다.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하도록 기획된 드라마 형식은 본질적으로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기보다는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무대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드라마 형식이 아닌 새로운 무대화 형식을 요구된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장에서 살펴 볼 2000년대 이후 본질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전략을 포스트드라마적 실험 형식으로 보여주는 공연들은 주목을 요한다고 하겠다.

    10)<쥐>(1998), <대대손손>(2000), <선착장에서>(2005),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2006)  11)김기란, 「가족무대를 통한 새로운 가족정체성의 탐구-박근형의 작품을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21호, 대중서사학회, 2009, 306쪽.  12)최영주, 「박근형의 <청춘예찬>에서의 현실주의 상상력과 일상의 재현」, 한국연극학회 편, 『퍼포먼스 연구와 연극』, 연극과 인간, 2010, 196쪽.  13)‘가족로망스’ 개념은 “낮게 평가하게 된 자신의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대체적으로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고자 하는” 신경증 환자들의 환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부모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느낀 남자 아이는(프로이트는 소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훨씬 미약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자기 부모들이 실제 부모가 아니며 진짜 부모는 중요한 영주, 귀족 혹은 왕이나 왕비라고 상상함으로써 부모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가족로망스를 엄격히 개인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이해했지만 본 논문에서는 현실의 부모를 이상적인 어떤 형질의 부모로 상상하는 가족로망스의 메커니즘을 가족적 질서에 대한 한 사회의 집단적이고도 무의식적인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사용했다. 곧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가족로망스란 개념은 우리 사회 가족 관계에 대한 혹은 가족 관계를 서사로 다룬 가족이야기에 틀 지워진 상상적, 집단적, 이상적 무의식을 의미한다.(린 헌트, 조한욱 옮김,『프랑스 혁명의 가족로망스』, 새물결, 1999.)  14)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 문학』제34권, 민음사, 2009년 봄호, 310-311쪽.

    3. 새로운 가족무대 구성과 포스트드라마적 전략

       3-1. 동작 속에 갇힌 시공간, 가족무대의 균열

      >  -김낙형의 <토란-극(土亂-劇)>

    76극단의 실험정신에 뿌리를 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낙형은 “공감받기 힘든 리얼리즘의 정석에 기대기보다는 남루한 일상의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15)을 보여준다. 2009년 공연된 <토란-극(土亂-劇)> 역시 내용상으로는 한 가족의 남루한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공연 형식으로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배우들의 몸동작과 몸에 밀착된 오브제를 통한 에피소드식 장면을 선택하여 발화와 함께 의미가 확정되는 언어가 대신할 수 없는 긴 여운을 드라마 형식이 아닌 새로운 연극 형식으로 보여주었다.

    연출가 김낙형은 <토란-극>에서 가족구성원들의 내면이라는 서사의 질서속에 편입될 수 없는 재료를 다루기 위해 드라마의 진부한 구성 형식을 미련없이 폐기하고 포스트드라마적 연극 기호를 활용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postdramatisches Theater)”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텍스트를 ‘더 이상 드라마적이지 않은(nicht mehr dramatischer)’ 텍스트16), 본질적으로 드라마 형식의 전통으로부터 탈피한 텍스트라고 설명한다. 세상 자체를 하나의 전체성으로 의미하도록 기획된 드라마 형식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기보다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할 때, 기존의 가족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 위해 드라마 형식을 창발적으로 구성한 포스트드라마적 텍스트로 가족무대 구성의 과정을 무대화한 것은 김낙형의 효과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토란-극>에서 김낙형은 한 가족공동체의 평범한 일상과 대비되는 개인의 어두운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낮과 밤의 장면을 교차시켜 구성했고, 드라마 형식으로 환원되려는 대화를 분절시켜 그 여백을 동작으로 채웠다. 또한 의미화를 향해 진행되는 드라마를 구성하는 극행동 즉 배우들의 동작을 완성시키지 않고 이질적으로 흩어지게 나열했다. 가족과 가족 안의 개인이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뒤바뀜과 함께 구성되고 해체되는 장면을 교차시킴으로써, 일종의 조각난 가족관계를 형상화하려 한 것이다. 낮과 대비되도록 교 차 편집된 밤의 시공간에서는 모든 동작이 불분명하고 느리게 유영하며 의미화 할 수 없는 낯선 동작들은 흩어진다. 밤과 대비되는 낮의 일상은 단조롭고 냉랭한 기계적인 움직임 속에 점점 빠르게 반복된다. 의자 위에 윗옷을 걸어놓기, 신발 벗고 신기, 손으로 신발 신기, 텔레비전이나 전자렌즈를 끌어 앉고 자신의 영역에 불편하게 앉아 있기, 아버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의자 위를 옮겨 다니는 어머니의 흔들리는 불안한 걸음걸이 등은 일상의 지리멸렬함과 가족관계가 강요하는 부담을 가시화한다. 충분히 정형화된 흉내내기를 연상시키 는 기계적인 동작은 기계적으로 유지되는 가족관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그것은 가부장적 아버지가 강조하는 규율에 복속된 가족구성원들의 모습이다. 살아 생전 근엄하게 규율과 책임을 강조하던 가부장적 권위의 아버지는 관을 연상시키는 널빤지를 등에 짊어지고 무대 위를 서성거리며 남은 가족들의 내면에 보이지 않게 개입한다.

    <토란-극>의 공연은 시간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체적인 조각상으로 치환되는 “시간의 조각상”을 무대 위에 배우들의 몸을 통해 가시화한다. 때로는 시적으로 때로는 기능적으로 해체되었다 구체적 형상으로 구성되는 무대 위의 시각적 물질들은 그 안에 기억된 시간을 배우의 몸 안에 불러오고 저장하기 위해 사용된다. 거트루드 슈타인(Gertrude stein)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나가는 시간들을 “계속되는 현재” 속에 응집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무대 위 시각적 물질들의 이동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중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보편과 특수, 개별과 구체를 동시에 보여주는 환유적 공간을 구성한다. 여기에 배우들의 몸은 고통 속에 내면 혹은 기억을 끌어올리는 매개물로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배우들은 자신의 몸을 두드리는 느린 행동을 통해 움직이는 시공간의 조각상으로 치환되고, 이를 통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 가족관계가 이야기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슬로우 모션의 동작 속에 관계 자체가 담긴다. 시공간의 조각상으로 의미화된 배우들의 몸동작이 연극 기호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가령 아버지의 외도를 표현하는 장면을 보자. 아버지의 몸 뒤에 찰싹 달라붙은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몸을 더듬는다. 근엄한 아버지는 권위를 실어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지만, 들리는 말이 배반하는 진실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를 응축하며 아버지와 한 몸이 된 여성의 존재와 관계를 재현된 이야기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쇼핑 중독과 섹스 중독을 고백하는 임신한 넷째, 아버지의 여자 집에 불을 지르고 요양원에 감금된 셋째, 동물을 해부하며 가학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막내, 동성애적 욕망으로 뒤얽긴 첫째와 둘째, 홀로 독백을 쏟아내는 개별적 자아로 보이는 이들을 가족으로 호출하는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홀로 죽음을 맞은 셋째다. 이들은 셋째의 죽음을 수습하기 위해 모인다. 이들을 가족으로 호명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은 가족의 생산성을 전복하는 극적계기다. 여기에 이들의 만남이 가족의 아름다운 화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셋 째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행동에서 드러난다. 죽은 후 오랫동안 방치된 셋째의 사체를 외면하는 이들 사이에서 동물 해부로 피비린내를 풍기는 막내만이 셋째의 시신을 보듬어 앉는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한다고 말했던 셋째와 가학적 망상을 줄기는 막내는 이해할 수 없는 교감을 나눈다. 이들의 교감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벗어나 있다. 곧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강요된 교감을 거부하는 것이다. 가족을 ‘상상된’ 관계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계로 반영한 결과다. 그렇기에 셋째가 죽어간 작은 방을 무대 위에 순식간에 재구성한 가족구성원들이 그 방안에서 찾아낸 것은 셋째의 일상을 함께 했던 소주병 속에 든 담배꽁초였다. 셋째의 가장 고독했던 순간을 함께 했던 것은 가족이 아니라 소주와 담배였다.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하는 가족관계가 실상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무대 위 가족관계의 해체와 재구성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가족관계의 균열과 틈, 가족관계가 선험적으로 작동시키는 가족이데올로기로부터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진부한 드라마의 형식이 아니라 김낙형이 찾아낸 포스트드라마적 연극 기호, 그것이 작동시키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효과였다.

       3-2. 현재화된 과거, 가족무대의 해체

      >  -김현탁의 <세일즈맨의 죽음>

    김현탁17)은 잘 알려진 고전 작품을 적극적으로 해체하여 재창작하며 창작극의 범위를 확장시킨 극작가이자 그렇게 재창작된 텍스트를 동시대 감각의 전위적 방식으로 무대화하는 연출가다. “데리다나 다른 탈구조주의자들이 모든 해석은 재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 어떤 매개 행위도 또 다른 많은 매개 행위들에 의존하는 재매개”18)인 것처럼 김현탁은 원전과 각색이라는 글쓰기를 횡단하며 재해석하고 연극기호의 의미들을 환유적으로 재매개하여 드라마의 형식에 이야기를 삽입하여 주제를 드러내는 대신 드라마의 주제가 감각을 통해 체험되도록 재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공연과 글쓰기’, ‘공연을 위한 글쓰기’, ‘수행적 글쓰기’라는 태도만으로도 김현탁의 작품은 앨솝(Ric Allsopp)이 지적한 바, “시대와 연극 일반에 대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술로서, 글쓰기 행위에 대한 이론적 관심에서, 아방가르드 실천 행위의 분명한 특징으로서, 예술 장르의 상호소통에서, 퍼포먼스란 개념의 확산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 행위에 대한 이해의 척도로서” 포스트모던한 실천19)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김현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원작에서 스스로 자신을 찾아 온 하나의 관념, 상황, 대사를 남기고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 후, 다시 살을 붙여 나가는 텍스트의 해체와 콜라쥬 작업을 통해 작품을 재창조한다. 이렇게 생성된 텍스트는 원작의 문제의식, 상황, 대사는 동시대적 문제의식, 상황, 대사와 유비적으로 나란히 병렬되는 장면들을 통해 무대화된다. 마치 코올리지와 발레리가 지적한 “정신 활동의 내용을 망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형식의 중요한 기능”20)이라는 점을 의식한 듯 해체되어 재창작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발견에 김현탁은 집중하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포스트드라마적 연극기호에 다름 아니다.

    앞서의 레만은 포스트드라마적(postdramatisch)이라는 표현은 “연극적 기호를사용하는 방식(모드)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연극에 적용할 수 있다고 했고, 그 구체적인 표현 태도 혹은 방식으로 “과정으로서 연극, 비-텍스트성, 모든 장소성, 반-미메시스, 몸짓성(Gestualität), 빈 공간” 등을 제시했다.21) 아서밀러의 원작을 남김없이 해체하여, 지하실이라는 장소가 환기하는 분위기와 쉼 없이 달리는 러닝머신이라는 오브제만으로 재구성한 김현탁의 <세일즈맨의 죽음>(2011) 공연은 레만이 지적한 포스트드라마적 연극 기호의 활용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김현탁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서 밀러 원작의 텍스트를 80분 남짓의 공연으로 농축했다. 주인공 월리 로만을 “쉼 없이 달린다”는 동작으로 규정하고 달리는 동작 속에 그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병치시켰기에 가능한 압축이었다. 가족에게 보험금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자살하는 중년 남성 월리 로만은 1997년 IMF 이후 위축된 이 땅의 아버지들을 연상시키며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공감케 한다. 여기에 조명기구 하나 없는 키 낮은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노출된 남루하고 퀘퀘한 지하실이라는 공연 공간은 그 자체 작품의 메시지를 환기하는 강력한 매체로 재매개된다. 이제는 쓸모없게 된 잡동사니들이 뒹굴고 있는 지하실은 정리 해고되어 불안한 노년을 보내야 하는 월리 로만의 처지 그 자체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치열하게 살아 온 한 가정의 가장을 소진시키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은 20여명 남짓한 관객들이 체감하는 콘크리트 지하실의 냉기 속에서 냉정하게 전달된다. 또한 실제 작동하며 70분 내내 내달리는 러닝머신은 시간이 인공적으로 통제되고 조직되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을 실제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월리 로만역의 이진성은 공연 내내(단 한 번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온다) 달리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쉼 없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땀을 쏟아냈다. 그 위에 선 사람을 쉴 틈 없이 뛰게 하는 러닝머신은 달리는 휴식이 곧 도태를 의미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전쟁터에서 열심히 달렸던 가장 월리 로만의 삶을 가시화하는데도 효과적이었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하는 월리의 이야기가 파벨(스토리)의 질서 속에서 재현되었다면, 분명 이 작품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눈물겨운 부성애를 다룬 진부한 가족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연출가 김현탁 역시 이를 의식한 듯 “단순히 내용적이고 드라마적인 접근이 아닌 파격적인 형식적 접근을 택한다.” 곧 실제 러닝머신 위에서 월리 역을 맡은 배우를 쉼 없이 달리게 하여 그가 지쳐가는 모습을 수행적 과정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동시에 관객들을 공연 관람 과정에서 공동저자로 만들어버리는 수행적 체험의 과정을 가능케 한다.

    공연 내내 러닝머신 앞에 놓인 조명등은 쉼 없이 달리는 월리를 채근하고 괴롭힌다. 두 대의 스탠딩 조명기구가 비추는 한 줄기 빛은 영사기 속에서 살아나온 낡은 흑백 영화 필름처럼 월리의 기억을 자극하고 끌어낸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영화 속 장면을 통해 되돌려보는 듯,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월리는 간간히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매우 자연스럽게 끌려나오는 월리의 과거와 그것을 대면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러닝머신 위 현재의 월리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아서 밀러의 원작 텍스트를 절묘하게 구현한다. “문제는 시간이야, 윌리”라는 수수께끼 같았던 원작의 대사는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상황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오버랩시키며 시간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스스로 피폐해져가는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으로 구현된다.

    김현탁은 자살을 앞둔 월리의 과거를 지금, 여기로 소환하여 과거와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공연은 월리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치 플래시백처럼 지나간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소환된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과거는 계속 현재화된다. 현재로 소화된 과거라도 연극 무대에서는 늘 현재진행 중인 것으로 인지되기에 현재로 소환된 과거는 현재와 나란히 병치되어 대비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놓임으로써 관객들은 월리가 꿈꾸었던 가족 관계와 지금, 여기 현실 속 가족 관계의 균열과 그것이 해체되는 상황을 시간의 차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월리가 기억을 통해 과거로부터 소환한 가족 관계는 기억된 과거가 그렇듯 월리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월리의 가족들은 월리의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월리의 자살 이후)의 모습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성격, 그에 따른 선택과 극행동을 다양한 음색과 동작을 통해 보여준다. 실제 작동되는 러닝머신의 기계음은 시간 차에 따라 변화되고 균열되는 가족관계를 생생히 청각화한다. 과거의 가족들은 월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다시 현재 가족의 모습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월리의 안간힘 속 에 다시 평화롭게 구성된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월리가 꿈꾸는 완벽한 스위트 홈(sweet home)에 대한 환상은 원작의 월리가 한탕주의로 도달하고자 했던 사회적 성공만큼이나 터무니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현재화된 과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켜 무대화하는 포스트드라마적 연출 전략을 통해 관객들은 <세일즈맨의 죽음>을 관람하는 과정에서 가족무대의 해체 과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3-3. 시공간의 교착(膠着), 가족무대 구성의 거부

      >  -최치언 작, 이성열 연출의 <언니들>

    최치언 작가가 그려낸 여성들의 판타지를 이성열이 연출한 연극 <언니들>(2011)은 비현실적 상황과 이야기를 극중극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성장을 거부하는 세 자매의 이야기는 무대 위에서 때로는 기억인 듯, 때로는 꾸며낸 이야기인 듯, 때로는 말놀이 같기도 하고, 때로는 들켜버려서는 안 되는 알 수 없는 무의식처럼 현실성 없이 제시된다. 마치 ‘더 이상 드라마적이지 않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서사를 형상화하는 원칙’이 해체되면서 ‘파벨(이야기)’의 질서가 사라지고 그 질서로부터 풀려나온 ‘언어의 독립’22)이 전개되는 것처럼 소녀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늙어버린 <언니들>의 세 자매는 아줌마들에게나 걸맞을 듯한 걸직한 욕설과 되직한 성적(性的) 농담을 파편적으로 주고 받으며 극중극 놀이에 골몰할 뿐이다. 세 자매의 대사는 서사를 형상화하기 위한 극행동을 추동하지 않는다. 역할 놀이를 한다는 상황만이 제시되고 반복될 뿐이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까닭에 분절될 수밖에 없는 의미와 유예되는 상황이 무대 위를 부유한다. 부유하는 상황과 의미, 곧 성장을 거부한 채 늙어가는 소녀로 남아있으려는 세 자매의 기괴한 상황과 확정할 수 없는 그녀들의 정체성이 바로 <언니들>이 환기하려는 문제적 상황이다.

    소녀처럼 깔깔대며 웃어대던 세 자매가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출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소리와 기괴한 웃음소리, 까마귀 소리와 같은 음향은 그녀들의 수다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세 자매는 귀를 쫑긋 세우며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도 옥수수가 길게 늘어진 황량한 곳, 버려진 가구들로 가득찬 옥수수 밭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극중극 놀이를 계속한다. 엄마에게 발각될까봐 겁내며 계속되는 세 자매의 놀이는 엄마가 금지한 성적(性的)인 것들에 대한 억압된 동경과 왜곡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총잡이 허수아비의 무기를 발기된 성기로 표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자매의 성적 욕망은 동시에 성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성적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의식에 휩싸이는 그녀들은 스스로를 소녀라고 우김으로써 그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소녀가 성장하여 여성이 된다는 것이 환기하는 두려움이 세 자매를 늙은 소녀로 남아있게 한다. 그러므로 세 자매가 역할을 바꿔가며 놀이를 계속하면서 유예시키는 것은 성적(性的)으로 여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가정을 이룬다는 여성의 운명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어린소녀 시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던 거부하고 싶었던 무서운 사실, 초경을 하면 여자는 곧 엄마가 될 준비가 된 것이라는 사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니들>의 역할놀이로 교착되는 시공간 속에서 거부된다.

    가령 서로를 채근하며 허수아비와 ‘통정’을 했는지 확인하던 세 자매 중 앙숙 같은 첫째와 둘째가 서로의 배를 갈라 완두콩알 만한 아기를 꺼내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배를 가르고 피투성이가 된 언니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혼자 남게 된 셋째는 얼거린다. “언니들은 죽었어. 이제 나는 혼자야. 혼자 아기를 낳고 혼자 엄마가 되는 거야.” 자신을 사랑의 상징이라고 자신해 온 셋째는 언니들과는 달리 엄마가 되려는 비장한 결의를 밝히지만 그것은 곧 무의미해진다. 암전 후 밝아진 장면에서 첫째는 셋째가 되고 둘째는 첫째가 되며 셋 째는 둘째가 되어 다시 역할놀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장을 거부한 그녀들의 언니로 남기 놀이는 계속된다.

    여성이 되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족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보다 성장을 거부한 소녀로 남고 싶은 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소녀로 살아가는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그녀들이 시간의 흐름에 맞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거부하고 엄마도, 고모도 이모도 아닌 언니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 자매가 셋째가 끌고 들어 온 허수아비를 호들갑스럽게 거부하면서도 내심 내다버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줄 놀이감이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남성이 투영된 허수아비는 그녀들의 놀이에 초대된다. 허수아비는 초대받지 못한 동창파티에서 만날 뻔한 동창생일 수도 있고, 공모하여 물 속에 처박아버린 삼촌일 수도 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 정확히 말하면 남근을 지닌 모든 것들일 수 있는 허수아비는 과장되게 부풀어 오른 성기로 그녀들을 설레게 한다.

    언니들은 출산의 고통에 대한 여성들의 무의식적 거부를 상징하듯, 아이를 꺼내다 죽고, 언니들의 폭력적인 출산의 과정을 지켜본 셋째는 여성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치루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언니들과 만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언니들이 가져 갔어”라고 속삭이며 혼자 남겨진 무대에서 셋째에게 여성이 되는 삶이란 “난 이제 언니들 없이 끝없는 시간을 혼자 살아야 돼”라고 예감되는 고독한 삶이다.

    왜곡되고 억압된 성적(性的) 욕망과 그로 인한 죄의식을 통과의례처럼 경험하는 세 자매의 그로테스크한 일상은 비현실적 시공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이러한 시공간의 교착을 통해 성장, 나아가 가족무대 구성을 거부하는 늙은 소녀들의 연극놀이는 계속된다. 일상을 역할놀이로 소비하는 세 자매의 상황, 그로부터 파생되는 허무주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극행동과 언술은 가족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가정에 대한 문제적 시선을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전략이다. 곧 성장을 거부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통해 성장-결혼-가정의 구성이라는 전제를 성찰케 하는 것이다.

    15)<그 여인숙>(2000), <지상의 모든 밤들>(2000), <나의 교실>(2003)  16)Hans-Thies Lehmann, op. cit., p. 14.  17)김현탁은 방송작가 노희경의 인기 단막극 <엄마의 치자꽃>을 각색 공연한 2001년의 <엄마의 치자꽃> 공연 이후, 탄츠테아터를 연상케 한 <김현탁의 산불>(2008)과 언어 장애가 있는 어린이를 햄릿으로 내세워 삼촌과 엄마의 성적 관계를 관찰하게 한 <김현탁의 햄릿>(2009)에서 처럼 잘 알려진 고전의 서사를 재창작하는 작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2011년 한 해 동안 조선 시대 억압된 춘향의 섹슈얼리티를 찾아내어 발산시킨 , 21세기의 왕따로 소환된 메디아를 매스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형상화한 <메디아>, 전통적 드라마 연극을 메타적으로 성찰한 <하녀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18)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 이재현 옮김, 『재매개-뉴미디어의 계보학』, 커뮤니케이션북스, 1998, 67쪽.  19)최영주, 「박근형의 <청춘예찬>에서의 현실주의 상상력과 일상의 재현」, 한국연극학회 편, 『퍼포먼스 연구와 연극』, 연극과 인간, 2010, 196쪽.  20)수잔 손탁,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7, 64쪽.  21)Hans-Thies Lehmann. op. cit., p. 27.  22)Ibid, p. 30.

    4. 결론-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던 연극, 포스트드라마 연극

    1999년 출간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저자인 한스 티즈-레만은 거칠게 잡아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포스트모던 연극(postmodernes Theater)’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작품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했다고 했다. 레만은 포스트모던 연극의 텍스트가 드라마 형식의 전통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스트모던 연극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여타의 포스트모던 예술처럼 근본적으로 “분석, 이론, 성찰(Reflexion)과 자기성찰”을 담아내는 포스트모던의 속성을 공유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그러므로 이미 규정된 ‘그렇고 그런’ 인간의 이미지를 아쉬워하기보다는 개별적 인간 주체를 사유하고 표상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질문23)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던의 자기 성찰 가능성은 전통적 가족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성찰하고자 한 2000년대 한국 연극의 형식적 실험 속에서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으로 구체화된다. “드라마 형식을 구현한 연극은 환영, 전체성으로서의 세계의 재현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원칙으로 규정되지 못하고 연극예술의 가능한 변형으로 표현될 때, 종말을 고한다.”24) 2000년대 한국 연극에서 진부한 가족이 데올로기의 확인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21세기 다문화 시대 변화된 가족정체성을 성찰하려 한 일련의 작품들이 포스트드라마적 전략을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연극 공연에서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 힘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연극미학으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포스트드라마적 전략을 통해 1997년 IMF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된 가족관계를 성찰한 공연들을 가족무대의 구성과 해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전략은 전통적인 규범으로 규정된 가족 관계를 묻는 방식을 변화시켜 가족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본 논문에서 고찰한 공연들은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가 급격히 해체된 2000년대, 대안적 가족무대의 구성을 제시하는 전망보다는 해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 공연이 가족구성원의 희생을 통해 광폭 한 현실에 맞선 가족의 사랑을 강조하고 가족의 사랑과 보호에 대한 기대를 담은 가족 역할의 신성화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성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전통적 가족이데 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위압적, 폭력적 양상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3)Ibid, p. 28.  24)Ibid,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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