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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Le rire de Foucault et la pipe de Magritte 푸코의 ‘웃음’과 마그리트의 ‘파이프’
  • 비영리 CC BY-NC
ABSTRACT
Le rire de Foucault et la pipe de Magritte
KEYWORD
lieu commun , heterotopie , calligramme , ressemblance , affirmation representatif
  •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서문에 나오는 한 ‘동물분류법’에 관한 내용과 푸코가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에 대해 논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텍스트로 한다. 이 두 텍스트는 ‘공통장소lieu commun의 부재不在’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통한다. 즉 그로의 표현을 빌리면 “‘공통장소’라는 동일한 용어가 『말과 사물』의 서론과 마그리트에 관한 텍스트 안에서 붕괴의 동일한 공간”1)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 대하여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아주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파이프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아래에는 알파벳으로 구성된 짧은 문장이 한 줄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 그림은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마그리트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접하고 난후, 이 그림의 사본을 짧은 편지와 동봉하여 푸코에게 보냈다. 푸코는 이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마그리트와 몇 차례의 서신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이 그림에 대한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2)

    마그리트는 왜 이 그림의 사본을 푸코에게 보냈을까? 마그리트는 푸코에게 보낸 이 그림의 뒷면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제목이라고 한다면, 제목은 분명이 그림과 반대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림 속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자신이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그 아래에서는 ‘문자’가 동일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결국 동일한 사실이 이미지와 문자라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마그리트의 문제의식은 뚜렷해 보인다. 즉 실제 사물과 그것을 재현한 이미지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일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유사관계란 결국 우리의 정신, 즉 사유의 활동일 뿐이라는 것이다.4) 마그리트는 푸코에게 보낸 편지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마그리트가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는 ‘회화의 본래의 목적’은 바로 유사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재현’의 원리일 것이다. 마그리트에 의하면 이 유사와 재현의 결과는 사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사유의 결과이다. 따라서 마그리트 회화의 목적은 사물세계를 지배하는 구태의연하고 관습적이며 고정관념적인 사유체계를 벗겨내고 사물세계 자체의 신비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하여 관람자가 사물들에 대해 새로운 눈으로, 혹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마그리트의 전체 작품세계의 핵심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푸코가 이러한 마그리트의 편지와 그림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푸코의 철학적 사유의 어떤 지점과 만나는 것일까? 푸코 역시 마그리트와 비슷한 지점에 있다. ‘재현/표상représentation’의 문제, 즉 사물을 사유와 언어의 세계에 편입시켜서 질서를 부여하는 문제이다. 다음 장에서는 『말과 사물』 서문에 인용한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에서 푸코가 이끌어 내는 ‘공통장소’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 개념은 3장의 마그리트 그림에 대한 푸코의 분석에서도 유용한 개념으로 활용될 것이다.

    1)Frédéric Gros, De borges à Magritte, Michel Foucault, La littérature et les arts, Edition Kimé, Paris, 2004. p. 16.  2)이 그림에 대한 글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68년 Les cahiers du chemin 2 를 통해서이다. 후에 수정 보완하여 모르가나에서 1973년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3)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역, 민음사, 1996, p. 99.  4)1966년 5월 23일에 마그리트가 푸코에게 보낸 편지 참조. 미셸 푸코, op. cit., p. 93 참조.  5)Ibid., p. 95.

    2. 푸코의 ‘웃음’과 ‘공통장소’

    『말과 사물』의 서문은 매우 흥미로운 동물분류법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이것은 보르헤스가 자신의 텍스트6)에 인용한 어떤 중국백과사전의 동물분류법이다. 보르헤스는 이 텍스트에서 세계를 인간의 언어질서에 체계적으로 담아내려고 시도했던 존 윌킨스의 분석 작업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보기에 윌킨스의 작업은 ‘모호함과 중복과 결핍’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얼마나 ‘임의전횡’인지를 말하기 위해서 보르헤스는 바로 이 중국백과사전의 동물분류법을 유사한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7) 푸코는 보르헤스의 이 텍스트를 보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물분류법과 그것이 유발한 웃음이 바로 『말과 사물』의 탄생장소라고 고백한다. 그 동물분류는 다음과 같다.

    이 동물분류법이 유발한 ‘웃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그저 가벼운 웃음이 아니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어뜨리고....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지리地理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9)이다. 우리는 이 동물분류법 앞에서 우리가 가진 사유의 틀로서는 이 분류법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웃음’은 바로 이 사유의 ‘불가능성’이 초래한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이 ‘웃음’의 정체를 묻는 것은 바로 ‘사유의 불가능성’의 정체를 묻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사유의 불가능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이 동물분류법과 마주하여 우리는 우선, 이 분류의 기준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해답을 찾지 못하는 우리는 이 ‘불가능성’이 이질적인 동물들의 극단적이고 느닷없는 병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 분류법에는 그 보다 더 심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외스텐의 말10)을 인용한다. 외스텐은 각종 벌레와 독사와 개미 등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오늘은 더 이상 이것들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외스텐의 이 나열에서도 우리는 기이한 동물들의 느닷없는 인접과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에 의하면 보르헤스의 나열과 외스텐의 나열에는 차이가 있다. 외스텐이 나열하는 이 모든 것들은 “뭐든지 게걸스럽게 삼켜 대는 그러한 입안에서 이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공존의 궁전을 발견할 여지”11)가 있다. 비록 그 동물들의 관계가 기묘하고 엉뚱하지만 우리는 외스텐의 입속에서 그것들이 다 함께 침들과 섞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외스텐의 나열에는 그 동물들의 병치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장소”12)가 존재한다. 외스텐의 ‘입 속’이 바로 나열된 동물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공통장소’인 것이다.

    보르헤스 텍스트의 동물분류법은 어떠한가? 여기에서는 나열된 동물들이 병치될 만한 공통장소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통장소 규명의 불가능성’이란 구체적으로 동물들이 병치될 때 그 관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불가능성은 상상적인 동물, 혹은 전설상의 동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놓일 때 생기는 간격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즉 “모든 상상, 모든 가능한 사유를 벗어나는 것은 그저 이 각각의 범주를 서로 연결하는 알파벳순의 계열(a,b,c,d,..)”13)인 것이다. 결국 “불가능한 것은 사물들의 근접이 아니라,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을 장소”14)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공존의 궁전’도 ‘입속의 침’도 없다. 그리고 공통의 장소도 없다. 결국 ‘사유의 불가능성’이란 그 바탕에 공통장소가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이 바로 이 동물분류법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인 것이다.

    외스텐의 나열과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의 나열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공통 장소’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유의 바탕에 ‘공통장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통장소’는 우리 인식의 차원에서 발동되는 개념이다. 사물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정돈하는 우리의 사유와 그것을 구현하는 언어의 질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결국 ‘공통장소의 부재’가 ‘사유의 불가능성’을 나은 것이라면, ‘공통장소의 부재’는 사유가 사물의 세계를 자신의 질서 속에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사물 세계를 통사법적 언어의 질서에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푸코는 ‘헤테로토피아 hétérotopie’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헤테로토피아와 ‘공통장소’는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말과 사물』 서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그의 ‘공간 개념’에 대한 주제와 관련한 강연15)과 글16)에서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푸코는 ‘유토피아’가 실재하지 않고 공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공간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공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뒤집힌 형태로 한 사회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17) 반면에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달리 어느 세계이든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공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절대적으로 다른(absolument autre)”18)공간이다. 즉 완전히 ‘이질적인 공간’인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적 정상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와 같지만,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와 구분된다. 헤테로토피아는 이렇게 현실 공간 및 유토피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현실적인 동시에 신화적인’ 공간”19)인 것이다. 그래서 헤테로토피아는 더욱 불안을 야기한다. 이러한 ‘절대적으로 다른’공간에서는 이른바 ‘정상적인 공간’에서의 사유와 문법은 와해된다. 헤테로토피아는 “화제話題를 메마르게 하고 말문을 막고 문법의 가능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와해”20)시킨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우리는 ‘실어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마치 위에서 논의한 보르헤스 텍스트의 동물분류법에서처럼. 결국 헤테로토피아는 ‘공통장소의 부재’를 의미하므로, 공통장소는 헤테로토피아의 반대의 진영에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보르헤스 텍스트의 동물분류법이 초래한 웃음은 결국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혹은 ‘공통장소’가 부재한 상황이 만들어 내는 사유와 세계의 불화, 말과 사물의 불화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결국 ‘공통장소’가 부재한 상황은 ‘비非-장소’적 언표만을 초래하기 일쑤이다. 즉 이 동물분류법의 동물들이 서로 마주칠 수 있는 곳은 단지 그것을 열거하는 목소리, 혹은 열거하는 항목들이 기입되는 종이 위, 즉 언어의 ‘비-장소’뿐이다. 언어의 ‘비-장소’란 사물세계, 즉 현실공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언어만의 공허한 세계다. 사물세계와 관계없이 구축되는 언어의 세계, 즉 장소 없는 장소이다. 따라서 이 언어는 이것들을 늘어놓으면서, 오로지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열어 놓을 따름이다.21)이 동물분류법으로 인한 푸코의 웃음은 우리가 얼마나 인위적인 질서와 틀 속에서 인식과 사유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푸코가 이 동물분류법을 인용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사물세계에 대하여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언어가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돈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균열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과 사물』의 영어 본 제목은 『사물의 질서』이다. 이 둘은 결국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후자에서 ‘질서’란 우리가 만들어 낸 사유와 언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사물세계에 질서를 정립하고자 하는 인간 사유를 문제 삼는 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대상세계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푸코는 그러한 시도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이고 “언어의 횡포”22)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논의는 푸코의 ‘웃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논의의 중심에 ‘공통장소’라는 개념이 있고, 그것은 인간 사유와 언어체계가 인위적인 어떤 한정된 틀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이제는 현재 서구인들이 하고 있는 사유, 즉 대상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과 근거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대상을 사유와 언어로 ‘표상/재현’하는 그 원리와 근거를 묻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다음 장에서는 푸코의 마그리트論을 통해 대상과 대상에 대한 ‘재현’의 문제로 논의를 확장시켜 나가고자 한다.

    6)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이 글은 보르헤스의 글들을 엮은 『만리장성과 책들』, 정경원 역, 열린책들, 2008 에 실려 있음).  7)Ibid., pp. 189-190 참조. 보르헤스는 우리가 세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류는 모두 임의전횡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임의적이나마 인간의 체계를 확립하는 일을 결코 단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또한 하나의 가상한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보르헤스의 핵심은 이 세상 모든 언어는 하나같이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8)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주)민음사, p. 7.  9)미셸 푸코, op. cit., p. 7.  10)“이제 나는 배고프지 않다. 아스픽스, 암피스베네스, 아네루두테스, 아베데시몬스, 아이아르트라즈, 암모바테스, 아피나오스, 알라트라반스, 아락테스, 아스테리온사, 알카라테스, 아르게스, 라이네스, 아스칼라베스, 아텔라베스, 아스칼라 보테스, 아에로로이데스......가 내일까지는 내 침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Ibid., pp. 8-9.  11)미셸 푸코, op. cit., p. 9.  12)Ibid., p. 9.  13)Ibid., p. 8.  14)Ibid., p. 9.  15)1966년 12월 프랑스 라디오 방송 프랑스-뀔뛰르(France-Culture)에서의 강연 <헤테로토피아>. 이 강연은 다음과 같이 출판되었다. Michel Foucault, Le corps utopique suivie de Les heterotopies, Nouvelles Editions Lignes, 2009.  16)Michel Foucault, Des espaces autres, in Dits et ecrits 1954-1988, Collection ‘Quarto’, Gallimard, 2 vols., 2001, pp. 1571-1581.  17)허경,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초기 공간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 『도시인문학연구』 제3권 2호, p. 248.  18)Michel Foucault, Le corps utopique suivie de Les heterotopies, p.25. (허경, Ibid., p. 245에서 재인용).  19)Ibid., p. 250. 공간과 관련한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대해서는 허경의 이 논문이 자세히 밝히고 있다  20)미셸 푸코, 『말과 사물』, p. 12.  21)Ibid., p. 10 참조.

    3. 마그리트의 ‘파이프’

    앞 장에서 우리는 보르헤스 텍스트에 인용된 동물분류법이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세계와 사유, 사물과 언어 사이의 ‘공통장소 부재’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푸코의 마그리트論이라 할 수 있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의 문제도 그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따라서 3장에서는 푸코의 마그리트 그림에 대한 분석에서 ‘공통장소의 부재’라는 개념이 어떻게 드러나고 어떠한 의미로 작용하는지에 대하여 살핀다.

    화폭에는 명백하게 파이프로 보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렇게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이 그림 앞에서 푸코는 이 그림이 모순이 아닌 근거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송아지를 묘사한 그림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은 송아지다’라고 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오래된 관습과 같은 것들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실제사물과 동일시하는 관습이다. 그렇게 볼 때, 분명 ‘이것은 파이프이다.’ 마그리트는 이러한 통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쉬운 상황에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표현 하나를 개입시킴으로써 이 작품을 문제적 작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즉 대상과 그것에 대한 이미지적 재현과 언어적 표상 관계의 당연한 원리를 부정한 것이다.

    푸코는 이런 저런 탐색 끝에, 이 그림이 가진 애매성의 핵심이 “텍스트를 그림과 관련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 단언이 사실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모순된다라거나 등등을 말 할 수 있는 바탕을 결정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23)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보르헤스의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을 이해할만한 바탕이 없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이 그림을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다시 사유의 불가능성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푸코는 이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갔을까?

    푸코는 여기서 흥미로운 가정을 하나 제안한다. 그것은 마그리트의 이 그림은 이러한 구성으로 완성되기 전에 하나의 ‘칼리그람caligramme’으로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다는 가정이다. 칼리그람이란 ‘대상’의 이름으로 그대상의 형태를 그린 것이다. 예를 들면 pipe라는 단어를 파이프 형상을 그리는 선을 따라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하여 칼리그람은 ‘형상의 공간속에 언표를 거주시키며 그림이 <재현하는>것을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대상을 형상과 문자 둘 다를 통해 포획하려는 이중의 덫이되는 것이다.24)

    그런데 푸코는 마그리트의 것은 ‘풀린 칼리그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풀려서 마치 삽화가 있는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되었다. 즉 ‘텍스트’는 아래로 내려와 ‘그림 설명’이 되고, ‘그림’은 위로 올라갔다. 이제 ‘파이프 그림’은 실제 사물인 ‘파이프’를 지시하고, 아래의 텍스트는 그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사물과 그림 사이의 ‘유사관계’를 확언하고 재현의 임무를 완성하면 된다. 그런데 마그리트는 텍스트를 부정형으로 바꾸어 버렸다. 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일까?

    푸코에 의하면 그것은 칼리그람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어와 형상사이의 ‘회피’, ‘길항’, ‘배제’의 관계 때문이다. 즉 칼리그람은 칼리그람을 이루고 있는 형상과 단어가 각각 ‘상대방이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포개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25) 형상은 읽는 자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텍스트는 보는 자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바라보는 자가 텍스트를 읽는 순간 형상은 사라진다. 칼리그람은 비록 파이프 모양을 하고 있지만, 텍스트는 ‘이것은 파이프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게 되면 더이상 ‘이것은 파이프가 아닌’것이다. 따라서 원래는 칼리그람이었던 마그리트의 그림이 ‘풀려서’ 형상은 위로, 텍스트는 아래로 내려와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 둘은 ‘배제관계’라는 과거의 칼리그람적 속성을 버리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즉 “모든 칼리그람 안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관계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 안에서 부정의 형식으로 다시 취해진 것이다.”26)그래서 텍스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된 것이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풀린 칼리그람’이라는 가설에서 시작하여 그림 속 텍스트가 부정형인 근거에 대해 해명했다. ‘풀린 칼리그람’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푸코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효과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말과 사물,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언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칼리그람은 근원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리그람의 속성인 필연적인 배제관계를 전제로 푸코는 이 그림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배제관계’ 또한 하나의 관계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은>이라는 지시사이다. 이 지시사는 그림의 상단에 있는 ‘파이프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이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는 역할을 한다. 푸코는 이 가능성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분석한다.27)

    첫째, <이것은>이 가리키는 것은 <파이프 이미지>일 수 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이 <파이프 이미지>는 아래 텍스트에서 언급되는 <파이프(문자/말)>가 아니다. 즉 파이프 이미지는 파이프라는 문자가 아니다. 이미지는 말이 아니다.

    둘째, <이것은>이 가리키는 것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텍스트 전체>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이 텍스트>는 위에 있는 <파이프 이미지>가 아니다. 즉 이 텍스트(언표)는 파이프 이미지가 아니다. 언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 전체를 고려할 때, 마그리트 그림의 텍스트가 부정형인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결국 ‘파이프 이미지’와 그 파이프를 명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텍스트’의 직접적인 상호종속 체계를 주장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칼리그람적 흔적 때문에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호종속에 빠져들지 않고 동시에 회피되고 있다. 여기서 세 번째 경우가 나온다. 즉 <이것은>은 <이 작품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텍스트’와 ‘이미지 파이프’ 모두>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전체>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공통적인 대상이었던 <실제 파이프>가 아니다. 텍스트도 이미지도 실제 사물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파이프’라는 실제 대상 자체가 날아가 버렸다. 그 사실을 텍스트가 그림의 아래에서 확언하고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이상과 같은 푸코의 분석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이렇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은 ‘보여주는 것인 이미지’와 ‘말하는 것인 텍스트’ 사이의 상호 배제 관계를 보여준다. 그 결과 이미지와 텍스트는 그 둘이 원래의 대상으로 삼았던 실제 사물도 잃게 된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도미니크 샤또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맺음의 역사를 푸코의 고고학과 관련하여 정리한 바 있다. 즉 이미지에 대한 텍스트의 종속은 푸코의 고고학에서 말하는 유사의 시대와 통하고, 텍스트에 대한 이미지의 종속은 고전적 재현의 시대와 통한다. 그리고 마그리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호배제적 병존은 새로운 제3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28) 제3의 단계에서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일반적인 동화책에서라면, 그림과 텍스트들 사이에 있기 마련인 공간은 둘 사이의 ‘공통의 경계선’ 노릇을 하면서 지시나 분류 등의 관계를 맺어주는 ‘공통장소’로서 역할 한다. 칼리그람에서는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마그리트가 칼리그람을 풀어놓자 어떤 공간이 둘 사이에 다시 생겨났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앞의 경우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이 공간은 텍스트와 그림을 갈라놓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말들이 형상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림들이 어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 공간을 푸코는 “무색”, “허공”, “공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거기서는 아무런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공간 부재, 서체의 기호와 그림의 선들 사이의 ‘공통장소의 말소’”29)라고 하겠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동물분류법에서 보았던 ‘공통장소의 부재’를 여기서 다시 만난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의 경우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문제이다. 그것은 결국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 사이의 문제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공통장소의 붕괴’도 궁극적으로는 사물과 그것에 대한 질서 사이의 괴리가 문제 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은 이렇듯 사물과 그것에 대한 경험을 정돈하는 데에 끼어드는 우리의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사유방식의 작동을 끊어 놓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공통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것이며, ‘공통장소의 붕괴’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푸코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후반부에서 언급하는 ‘서양 그림의 전통’과 그것에 대한 파괴에 대한 내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이 끊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푸코는 15세기 이래 20세기까지 서양의 그림을 지배해왔던 두 개의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그 첫 번째 원칙은 “조형적 재현과 언어적 지시 사이의 분리를 단언”30)하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그림에서는 한 화면에서 이미지와 언어가 동일한 질서 아래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언제나 공통장소와 같은 질서가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종속되도록 위계화 한다. 두 번째 원칙은 “유사하다는 사실과 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31)이다. 예를 들어 파이프 그림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것은 실제 파이프에 대한 재현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체계는 언제나 ‘이것은 파이프이다’라는 언표가 무언중에 끼어들도록 허락한다. 이것이 바로 ‘공통장소’의 역할이다. 보기위한 이미지를 말하기위한 언어와 사유의 세계로 편입시킨다. 그렇게 하여 유사가 근거하고 있는 재현적 확언의 담론이 형성된다.

    푸코는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마그리트의 작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하여 반증한다.

    그런데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은 동일한 체계조직 속에 이미지적 재현과 기호에 의한 지시를 교차시키고 있다. 이 교차는 위계화된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통장소를 거부하면서 일종의 ‘무관계’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은 유사와 확언의 동등성도 깨어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그리트 파이프그림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재현의 대상으로 상정되었던 실제 파이프와의 끈도 끊어진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동물분류법이 사유의 불가능성을 초래했던 것처럼, 사물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인 재현과 표상의 원리가 작동되지 않도록 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은 이러한 것에 대한 명증적인 제시인 것이다.

    22)미셸 푸코, 『임상의학의 탄생』, 홍성민 역, 이매진, 2006, p. 27.  23)미셸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p. 33.  24)Ibid., pp. 34-35 참조.  25)미셸 푸코, op. cit., pp. 39-42 참조.  26)Frédéric Gros, op., cit., p. 18.  27)미셸 푸코, op. cit., pp. 42-45 참조.  28)Dominique Chateau, De la ressemblance:un dialogue Foucault-Magritte, L'image, Deuleuze, Foucault, Lyotard (Institut de Philosophie et de sciences morale, Paris, Librairie philosophique, J.VRIN, 2003), p. 104 참조.  29)미셸 푸코, op. cit., p. 46 참조.  30)미셸 푸코, op. cit., p. 51.  31)Ibid., p. 54.  32)미셸 푸코, op. cit., p. 87.

    4. 맺음말

    이상과 같이, 본 글은 푸코의 두 텍스트, 즉 『말과 사물』의 서문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공통장소’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분석해 보았다. ‘공통장소’란 우리가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위한 일종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질서가 흐르고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사물 세계에 대한 경험을 정돈하고 그것을 언어로 구현한다. 푸코의 웃음을 유발한 보르헤스의 텍스트 속의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사유가 얼마나 한정되고 인위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우리의 사유가 얼마나 사물 자체와 괴리된 상태로 작동하는지를 반증한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 역시 동일한 맥락에 있다. 그것 역시 사물과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미지적 재현과 언어적 기호)사이에 소통되는 일반적인 원리를 부정한다. 마그리트가 부정한 이 일반적인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바로 ‘공통장소’이다. 푸코의 두 텍스트를 통해서 밝혀 본 이상과 같은 점들이 푸코의 철학적 사유의 어느 지점과 만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피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중국백과사전의 동물분류법은 푸코의 『말과 사물』의 서문 중에서도 가장 서두에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동물분류법에 대한 언급이 이후 이 책 전체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푸코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과 사물』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에피스테메épistémé’33)와 그것의 역사인 고고학이다. 에피스테메란 한 시대의 인식과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시대는 각각의 상이한 에피스테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지층을 연구하는 작업과 같다는 의미에서 에피스테메 연구를 ‘고고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말과 사물』의 “주요한 주제는 유럽의 지식의 역사는 완벽하게 중단 없는 연속적 발전인 직선적인 전개가 아니라, 각각 고유의 에피스테메를 가진 근본적으로 상이한 순간들의 불연속적인 배열”34)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푸코는 역사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도그마를 부정하고 ‘인식론적 단절’을 주장한다. 인간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를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이 초래한 사유의 불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물분류법이 책서문의 서두에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후 이 책에서 전개될 모든 내용의 대전제로 역할 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이 행한 단절, 즉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인 재현과 표상의 원리를 부정하는 단절은 유사ressemblance에서 상사 similitude를 분리해 내는 결과로 나아간다. 푸코는 유사와 상사를 엄밀하게 구분한다. 즉 유사에게는 근원이 되는 주인이 있다.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모의를 순환시킨다.35) 그렇게 하여 상사는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캔버스의 표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손가락이 아니다.”36) 그것은 다른 것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대체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순수한 ‘가시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에서 파이프이미지는 유사를 배제함으로써 실제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을 전제할 필요가 없는 순수 가시물이 되었다. 그것은 아래에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만 그 텍스트의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순수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이 ‘공통장소를 붕괴’시키고 ‘무관계’로 함께 있다. ‘가시적인 것으로서의 형상’과 ‘언표적인 것으로서의 텍스트’, 이 두 개념은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에 대한 분석과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왜냐하면 이 둘은 푸코의 고고학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에피스테메의 역사인 고고학을 이루는 지층은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에 의해서 형성된다. 즉 한 시대의 지식은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상호 환원될 수없는 철저하게 자신에게만 고유한 방식으로, 마치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에서 형상과 텍스트가 공통장소 없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면서 특정 시대의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그리트의 파이프그림은 푸코 특유의 ‘지식과 권력에 대한 사유’37)를 이해하는 데에 바탕이 되는 개념들을 명백하게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33)『말과 사물』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사물들을 경험하고 질서를 정립하는 일’에서 출발하여 궁극에는 각 시대의 지식들이 어떻게 각기 그러한 모양으로 정립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양 극단, 즉 사물에 대한 경험적 질서와 그 질서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는 제반 이론과 지식들 사이에 그 둘을 매개하는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이 영역에서야 비로소 그러한 순수한 질서의 존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동시에, 이 중간 영역이 바로 사물의 배열과 관련한 이론과 지식이 세워지는 데에 확고한 토대로 작용한다. 어떤 문화에서건 질서 확립의 코드라 불릴 수 있을 것과 질서에 관한 성찰 사이에는 질서와 질서의 존재양태에 대한 맨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맨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 ‘맨 경험’에 대한 연구는 결국 무엇으로부터 인식과 이론과 지식이 가능했는지, 어떤 선험적 여건과 실증의 조건 속에서 사상과 과학이 구성되고 경험이 철학에 반영되고 합리성이 형성되었는지를 찾아내려는 연구이다. 그리고 특히 이 연구는 16세기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의 한가운데서 이 경험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크게 다른 세 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대의 지식을 가능하게 한 선험적인 인식적 조건을 밝힌다. 이 선험적 조건, 그것이 바로 푸코의 주요 개념인 ‘에피스테메’인 것이다. 미셸 푸코,『말과 사물』, pp. 15-17 참조.  34)Dominique Chateau, op. cit., p. 95.  35)미셸 푸코, op. cit., pp. 72-73 참조.  36)미셸 푸코, op. cit., p. 81.  37)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한 푸코의 분석과 푸코의 지식과 권력이론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본 인의 박사학위 논문인 「미셸 푸코의 그림읽기와 회화적 사유」 Ⅴ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전체적인 논문의 큰 주제에 맞추어 마그리트 그림과 푸코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넓게 주목하였고, 이번의 「푸코의 ‘웃음’과 마그리트의 ‘파이프’」에서는 푸코가 『말과 사물』 서문에서 인용한 중국백과사전 동물분류법과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중점적인 텍스트로 삼으면서 특히 ‘공통장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두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공통적인 관심에 집중했음을 밝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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