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Law/Superego to Love: Law, Violence, and the Possibility of Love in Herman Melville’s Billy Budd, Sailor

법/초자아에서 사랑으로―허먼 멜빌의『빌리 버드』에 나타나는 법, 폭력,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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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essay aims to explore Herman Melville’s recognition and resolution of the vicious link between law and violence in his posthumous Billy Budd, Sailor (1924). In order to investigate the issues, this essay refers to Freud, Benjamin, Derrida, Lacan, and Žižek, all perceptive to the uncanny affinity of law and violence. specially, Žižek’s arguments of “superego” as an embodiment of cruel and destructive violence supplementing the official law and of “love” as an ethical possibility beyond the limit of the problematic law are introduced in this study to make Melville’s reflection of the inseparableness between law and violence much clearer. John Claggart and Captain Vere embody the legal (superegoic) violence. Claggart even procurs secret enjoyment, in the name of maintaining positive law. Billy Budd discloses another violence defending his justness according to natural law. However, Melville suggests the possibility of suspending the problematic tie of law/violence through “love,” as portrayed at the last part of the story. The two final words from Billy and Vere, as a sort of delayed dialogue between them after the event of their secret interview before Billy’s hanging, suggest that they finally distance from the obscene nightly law of superego—respectively from outward punitiveness toward Vere and from inward punishment for Vere’s excessive enforcement of Billy’s hanging—and identify each other’s lack as their own. Their love implicated in the last words is for the real other — in Lacan’s sense — who discloses the constitutive lack or incompleteness of beings and aporia of the law. This essay’s examination of Melville’s representations about the superegoic violence as the (im-)possible condition of law and the possibility of withdrawing from it would help us recognize Billy Budd, Sailor as the author’s own last word for the possible vision of love cutting the vicious knot of law/violence.


  • KEYWORD

    law , violence , superego , love , Melville , Lacan , ?i?ek

  • I. 서론

    1867년 9월 10일 말콤(Malcolm)은 자정이 넘도록 귀가하지 않다가 이튿날 새벽 세 시에야 들어온다.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는 그 시각까지 한 숨도 자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고, 이에 아들은 앞으로는 더 이상 늦게 귀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모습을 감춘다. 아침에 가족들은 그를 부르고, 그는 곧 내려간다고 말하지만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다. 저녁에 아버지가 들어와 아들의 방문을 열려 했으나 잠겨 있기에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침대엔 말콤이 죽은 채 누워 있고 그의 손에는 권총 한 자루가 굳게 쥐어져 있다.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열여덟 살 젊은 아들의 이런 비극을 목격한 아버지가 바로 미국의 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중 하나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다.

    헤닉 코헨(Henig Cohen)과 도날드 예넬라(Donald Yannella)는『말콤에 대한 허먼 멜빌의 편지』(Herman Melville’s Malcolm Letter)에서 말콤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데, 이 저자들에 따르면 당시에 이 사건은 자살인지 아니면 우발적인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60-61). 코헨과 예넬라에 따르면, 자경단원이었던 말콤이 총의 조작법에 미숙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말콤의 죽음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자살”을 의미했고, 그렇다면 그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지니는데, 하나는 정신착란, 둘째는 가족들과의 어떤 마찰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다. 당시 검시관의 배심에 따르면, 말콤은 일시적인 정신착란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Leyda 2: 688). 그러나 멜빌의 가족과 상당히 친했고 또 이들의 사정을 많이 알고 있던 멜빌의 외사촌 캐서린 갠스부어트(Catherine Gansevoort)는 말콤이 가족들과의 어떤 마찰에 의해 자살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녀가 오빠에게 말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들의 내용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녀의 언급에 따르면, 멜빌은 아들 말콤에게 상당히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였다.1 멜빌의 권위적인 부분과 엄격함을 고려하면, 그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초자아적인 아버지상”(superegoic father-figure)과 같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2 캐서린 갠스부어트의 진술에 따르면, 말콤은 아버지가 세관원에 일을 나가던 시간에 죽었다. 아버지가 나간 후 아들의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멜빌이 밤늦게 귀가한 아들을 몹시 꾸짖음으로 말미암아 말콤이 자살을 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화이트 재킷』을 읽은 독자들은 멜빌이 초자아적 아버지였다는 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화이트 재킷』에서 폭군적 아버지상으로 그려지는 선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빌이 아버지와 지녔던 관계를 고려하면 우리는 어떤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슈네이드만(Shneidman)에 따르면, 멜빌의 아버지 알란(Allan)은 상당히 엄했으므로 아들허먼은 심리적으로 학대받은 아이였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허먼 멜빌 역시 그의 아들에게 그런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었을 수 있다는 슈네이드만의 지적에 수긍할 수 있다(Shneidman 233).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전자전”처럼 멜빌은 아버지의 엄한 모습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들에게 동일하게 반복해서 보여주었을 수 있다.

    만약 멜빌이 스스로 엄한 아버지라고 느꼈고, 그것이 말콤의 자살의 한 원인일 수 있다고 여겼다면, 그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과 죄책감을 느꼈을 수 있다. 이런 마음속의 죄책감은 정신분석의 용어로 “초자아”의 압력인데, 멜빌은 아들을 그의 가슴 속에 묻으면서, 어쩌면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더불어 초자아의 죄의식, 그리고 아버지의 엄격함, 권위—혹은 더 나아가 법의 엄격함—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고했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멜빌의 그런 경험과 사색의 결과물이 그의 유작『빌리 버드』(Billy Budd, Sailor)(1924)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주장컨대, 이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멜빌은 초자아적 죄의식, 권위와 법을 반추해보고 그것이 지닌 문제점을 넘어설 어떤“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빌리 버드』에서 클래거트(Claggart), 비어(Vere) 선장, 빌리(Billy) 모두 초자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클래거트는 처벌적이고 가혹한 법의 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빌리에 대한 증오, 질투의 감정을 뒤틀린 방식으로 만족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의 법의 행사 이면엔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초자아의 도착적 외설성이 존재한다. 비어는 법을 자의적으로 무리하게 적용시켜 빌리를 처형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빌리는 정의의 법 이면에 내재된 폭력으로서의 초자아를 보여준다. 이 인물들 속에 드러나는 법과 초자아의 긴밀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빌리 버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자끄 라깡(Jacques Lacan)과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정신분석적 사유를 고려하는 것이 유용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논의는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법 혹은 상징계 영역의 문제점을 “초자아”라는 정신기제에 초점을 맞추어 사유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하기 때문이  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들의 이론적 작업이『빌리 버드』에서 멜빌이 암시하고자 했던 어떤 비전에 보다 명확한 언어를 제공해 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코헨과 예넬라는 멜빌이 아들 말콤과 딸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들을 예로 들면서, 그가 자식들에게 의무를 다하고 복종적일 것을 강요하면서 엄하게 훈육을 했다고 지적한다(51-53).   2마이클 폴 로긴(Michael Paul Rogin)이 세관원에서 일할 당시의 멜빌을 “검사관 초자아”(inspector superego)라고 묘사한 것도 시사적이다(Subversive Genealogy 293). 그에 따르면, 세관원에서의 멜빌은 도덕적 규약과 의무에 지극히 충실하던 초자아적인 모습을 지녔다. 이런 점에 비추어, 말콤이 자살하던 시기의 멜빌은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엄한 초자아적 아버지의 모습을 지녔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II. 클래거트, 비어, 그리고 빌리에게서 나타나는 법과 초자아의 기이한 친밀성

    멜빌이 『빌리 버드』에서 클래거트, 비어, 그리고 빌리라는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주제가 바로 “법과 폭력의 친밀성”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점이 『빌리 버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폭력과 법의 기이한 친밀관계에 대해 정신분석과 철학의 영역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논의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그리고 지젝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법이 폭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법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기 충족적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지녔음을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법의 기원이 바로 폭력임을 지적하며 법/폭력의 친밀성을 지적한다. 그는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에서 인간 사회의 초기 단계인 원시부족에 대한 다윈의 이론을 참조해서 토템의 발생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41-46). 폭군적이고 질투심 많은 아버지가 원시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존재했는데, 그는 주변의 여자들을 오로지 자신만 소유하려 했고 그의 아들들이 성장하자 그들을 축출해버린다. 어느날 이 축출된 형제들이 무리를 이루어 단합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잡아먹는다. 식인 야만인이었던 이들은 아버지를 죽여 잡아먹음으로서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의 힘을 그들의 것으로 내면화한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증오/존경의 양가적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죽이자 첫 번째 감정은 충족되었지만, 이제 두 번째 감정인 존경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것이 이들의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자극한다. 아버지를 죽인 죄의식 때문에 아들들은 두 가지의 타부를 만들어낸다. 첫째는 토템동물 보호의 법이고, 둘째는 근친상간 금지이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대체물로서의 토템을 만들고, 그 토템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그동안 얻으려 했던 여자들을 소유했지만, 이제 그 권리를 포기한다. 이로서 죽은 아버지는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토템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면서, 법의 기원이 부친살해와 같은 죄의 “폭력,”그리고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벤야민은「폭력에 관한 비판」(“Critique of Violence”)에서 법과 폭력이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법의 정초로서의 폭력(lawmaking violence)과 법유지의 폭력(law-preserving violence)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는 예컨대 쟁의의 권리,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할 권리가 의존하는 정의, 자연법이 폭력을 그 수단으로 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법을 정초하는 과정에 폭력이 개입함을 본다. 더불어 법을 유지시키는 과정에서도, 예컨대 군사주의(militarism)가 폭력과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277-300). 데리다는 이 벤야민의 논의를 그의「법의 힘」(“Force of Law”)에서 인용하면서, 정의와 법이 늘 폭력을 기반으로 하고있음을 재차 확인하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벤야민이 논의한「폭력에 관한 비판」에서 그 “폭력”(Gewalt)의 독일어가 이미 자체로 (1) 정당화된 권위와 합법적인 힘 그리고 (2) “폭력”(violence)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Derrida 6). 데리다는 이 글에서 법과 정의가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궁지, 즉 법의 불가능성에 봉착하는 난국, 혹은 아포리아(aporia)에 이르러, 주체가 그 불가능성을 경험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16).

    데리다가 벤야민의 논의를 반복하듯, 지젝은 프로이트의 논의를 반복하면서 법의 은폐된 핵으로서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 인용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지젝은 법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바로 법의 외상적 치부로서의 폭력성임을 지적한다. 지젝은 우리가 만약 도덕과 법에서 그 순수한 도덕과 법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폭력을 말끔히 제거해버린다면, 오히려 우리는 “도덕”과 “법”자체를 잃게 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즉 순수한 도덕과 법을 타락시키는 그 문제적 요소로서의 폭력이 바로 도덕과 법의 환상적 지지물로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The Plague of Fantasies 72).3 폭력은 도덕과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지젝은 이것이 마치 데리다가 말한 “보충”(supplement)의 논리와 같다고 말한다(PF 73).

    지젝은 더 나아가 폭력을 기초로 하는 법은 공식적인 법을 보충하는 “외설적인 밤의 법”으로서의 “초자아”와 같다고 지적하고, 이 초자아에 내재하는 법의 궁지를 일종의 악순환의 고리로 설명한다. 즉 지젝의 논의에 따르면, 부친살해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초자아는 법의 수립을 낳고, 그것은 이번엔 그 법을 위반 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욕망에서 비롯된 법의 위반은 또다시 죄책감을 낳아 초자아를 더욱 비대하게 만들고 법을 강화하며 지지해준다. 즉, 법의 위반으로서의 욕망이 법을 지지해주는 역설에 봉착한다(PF 77). 환언하면, 죄의식, 법, 욕망의 발생, 위반, 죄의식, 법의 악순환적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젝이 지적하는 법의 궁지이고 법이 지닌 근원적 결함이며, 데리다의 용어로 법이 품은 “아포리아”이다.

    위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법과 폭력의 친화관계—좀 더 자세히 말하면, 도덕과 법을 지지해주는 기저의 외설적인 지지대로서의 (초자아적) 폭력—를 염두에 두고 멜빌의『빌리 버드』를 읽는다면, 우리는 멜빌이 문학적으로 재현하고자했던 법의 문제점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 『빌리 버드』에서 멜빌이 법/폭력의 문제점을 어떻게 재현해내는지 클래거트, 비어 선장, 빌리라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멜빌의 서술에 따르면, 문명은 그것의 부정적인 덕을 마치 “묵시적인 부가물(silent auxiliaries)”4처럼 지니는데, 그것이 “자연적 타락(natural depravity)”(75)이다. 따라서 이성의 법(the law of reason)의 이면엔 이성과 무관해 보이는 비이성적인 것이 존재하고, 냉정한 이성적 판단 이면에 포악함(atrocity)이 은폐되어 있으며, 온전한 정신 속에 광기가 은밀하게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악덕과 타락은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자연적 타락”을 잘 보여주는 예가 존 클래거트(John Claggart)이다. 여기에서 그는 과거에 사기꾼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군인이 된 이후 상관에게 아첨을 해서 진급을 했다는 이야기도있다(65-67). H.M.S. 벨리포텐트호(H.M.S. Bellipotent) 군함의 선임 위병 하사관이면서 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헌병대장(Chief of police) 신분인 클래거트는 자신은 도덕적 결함을 지니면서도 선원들을 감시하는 일을 주임무로 한다(93). 그는 법의 대리인으로서 군대라는 한 공동체의 선(the Good)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타자를 “폭력적으로”징벌한다. 빌리는 벨리포텐트호로 징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으로 배의 현문에서 벌어지는 공식적 형벌을 목격하고 그만 공포에 질려버린다(68). 빌리가 이 태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태형의 “과도함”(excessiveness) 때문이다. 빌리는 직무태만의 죄를 범한 선원들이 공개적으로 무자비하게 태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이런 법의 폭력은 이 배의 헌병 하사관들에 의해 자행된다. 이들은 선원들을 잔인하게 매질할 기회를 잡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이런 헌병 하사관들의 수장이 바로 헌병대장 클래거트인 것이다. 클래거트는 선원들의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에 벤야민의 논의에서 지적이 되듯이 법 유지의 폭력(law-preserving violence)을 보여준다. 벤야민은 법 자체가 지닌 가장 문제적인 부분으로서 이 폭력성을 비판한다(“Critique of Violence”287). 클래거트는 늘 “감시”하고 “처벌”하는 징벌적 초자아의 폭력성을 상징한다.5 중요한 점은 그가 법을 명분으로 타자를 잔혹하게 처벌하는 가운데 그 “과도한” 처벌을 통해 가학적으로 은밀한 즐거움(enjoyment)을 누린다는 점이다.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타자에 대한 과도한 처벌은 법의 이름으로 그 이면에서 은밀히 즐거움을 얻는 새디즘을 드러낸다. 클래거트의 법의 행사는 법의 외설적 과잉(obscene excess)인데, 초자아가 바로 이런 모습을 지닌다. 클래거트의 초자아는 멜빌의 서술에서 보듯이 이성의 부가물—혹은 데리다의 용어로 이성의 “보충”(supplement)—로서 광기의 타락일수 있고, 지젝이 자주 언급하는 표현을 빌면, 공식적인 법의 어두운 이면으로서 외설적인 밤의 법이다.

    더불어, 클래거트의 초자아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내밀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외에도, 법의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개인적인 질투와 증오심의 감정을 해소하고 보상받는다. 그는 빌리의 잘 생긴 외모, 건강함, 삶을 즐기는 태도, 그리고 다른 선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을 시기와 질투, 그리고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77-78). 여기에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법의 권위, 즉 선원들을 감시하고 정찰하는 임무를 아무런 사심 없이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방식으로 행사한다. 그는 빌리가 선상 반란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어 선장에게 거짓 보고를 함으로써 빌리를 곤경에 빠뜨린다. 사실 여부의 확인을 위해서 비어 선장 앞에서 클래거트와 빌리는 대면을 하게 된다. 이때 멜빌은 빌리를 바라보는 클래거트의 시선을 뱀의 최면적인 마력을 지닌 시선, 즉 사악한 시선이라고 서술한다(98). 공정한 법의 대리인이 아닌 사악한 시선을 지닌 클래거트는 빌리를 궁지로 몰며 빌리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을 해소하고, 은밀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  다. 서술자에 따르면, 클래거트의 시기와 반감(antipathy)은 이성과 화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지만 이 시기심과 반감은 이성과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77). 클래거트는 지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빌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감정적으로 광기에 가까운 집요함을 보여준다. 멜빌은 그가 표면적으로는 “이성적인 태도(rational demeanor)”(90)를 지니지만, 그 이면엔“지하의 불”과 같은 편집광(monomania)이 도사리고 있다고 언급한다(90). 이 병적인 편집광은 이성 배후의 “괴물”로서의 초자아이다. 클래거트에 대한 인물화를 통해 멜빌은 마치 초자아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그의 초자아는 공정하게 법을 이행한다는 명분으로, 타자에 대한 공격성과 질투를 해소함으로써 외설적인 즐거움(jouissance)을 누린다.6

    클래거트가 법의 얼룩으로서의 초자아를 구현하듯이 비어 선장도 법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형식적 법치주의(legal formalism), 즉“자로 잰 듯 반듯한 형태(measured forms)”(128)로서의 공정한 법을 구현해보려는 비어 선장은 정의를 온전히 포용하지 못한다. 그가 구현하고 수호하는 실정법(positive law)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비어 선장은 스핏헤드(Spithead)와  노어(Nore)의 선상반란 같은 혁명적 봉기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빌리 버드』의 배경이 되는 1797년 스핏헤드와 노어의 선상반란은 선원들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낮은 임금에서 비롯된 사건들이다. 임금을 인상해달라는 요구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노어의 선상반란에서 폭동을 일으킨 자들은 군법의 수정을 요구했다. 노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함대 파견단 대표 리처드 파커(Richard Parker)는 부제독 찰스 버크너(Charles Buckner)에게 8개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는데, 이 중 맨 마지막 요구사항이 군법의 수정에 관한 것이었다(Manwaring and Dobrèe 143). 이 요구는 선원들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선원들의 자유를 위한 요구는 한편으로 무서운 양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봉기가 진행되는 동안, 선상반란 가담자들은 상선들이 템스 강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런던을 봉쇄했다. 이는 당시 해군 제독 뿐 아니라 영국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Manwaring and Dobrèe 186). 결과적으로 이 봉쇄는 영국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빌리 버드』에서 비어 선장은 폭동자들의 이런 저항이 프랑스 혁명처럼 더 광범하고 드센 봉기를 위한 동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영국에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멜빌은 폭동에 대해 영국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불안과 공포를 비어 선장이 빌리를 성급히 처형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약식 재판(summary court)을 통해 빌리의 처형을 서둘렀던 그는 상관을 살해한 빌리를 관대하게 봐주면 그것이 군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선상반란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에 정당한 법 처리의 절차를 생략하고 빌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수잔 웨이너(Susan Weiner)는 빌리가 클래거트를 죽인 순간 “천사는 교수형을 당해야만 한다”는 말을 비어 선장이 곧바로 내뱉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이런 점은 비어 선장이 빌리의 법적인 죄를 미리 확신으로 굳히는 것이기에 법적 체계가 심각하게 결점을 안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145). 비어 선장의 이런 측면은 라깡의 용어를 빌면“상징적 대타자의 결핍”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법이 공평무사하다는 형식적 법치주의의 이상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법이 행사되는 비일관성의 현실과 심각한 불일치를 드러낸다. 이런 비어 선장의 법, 혹은 그 법의 실천이 지닌 비일관성과 궁지는 법이 자체로 내부에 온전히 메울 수 없는 결손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주목할 만한 점은 비어 선장 자신도 클래거트처럼 법 유지에 수반되는 폭력성, 그리고 초자아의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빌리가 클래거트를 주먹으로 쳐서 죽이자, 그가 교수형을 당해야만 한다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단언한다(101). 그는 빌리가 클래거트를 죽이게 된 동기나 의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살해라는 결과에만 치중하는 실정법을 따르고 지지한다. 그는 엄한 규율을 강요하는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100), 동시에 그가 강요하는 법이 온전히 적절한 것도 아님을 스스로 드러낸다. 비어 선장이 서둘러서 즉결 군사재판(drumhead court)을 소집하는 것에 대해, 군의관은 그것이 “무분별한”(impolitic) 조치라고 여긴다(101). 군의관은 이 사건이 제독에게 보고가 되고 이송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여타의 다른 군 간부들도 군의관과 의견을 같이 한다(102). 하지만 비어 선장은 이 간부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이들의 의견을 뭉개버린다. 즉, 그는 독단적  으로 자신의 법적 의무를 내세워 빌리를 서둘러 처형하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비어 선장이 빌리의 사형집행을 강요하는 부분은 벤야민과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군사주의(militarism)에서 나타나는 법 유지의 폭력성을 상기시킨다(Benjamin 284; Derrida 40). 멜빌이 제정신/광기의 경계가 모호함을 무지개 색깔의 흐릿한 경계선에 비유하는 것은 비어 선장의 이성의 (군)법 이면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멜빌은 그가 정신적으로 “일탈”(102)의 상태에 있다고 서술한다. 즉결 재판의 구성원들은 빌리가 선상 반란의 음모를 품지 않았음을 알고 그의 형을 완화시켜 주길 원하지만(112), 비어 선장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한다. 여기에서 그는 법의 이름으로 “지나친 명령”을 행사한다. 이것은 법의 과잉(excess)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멜빌은 비어 선장을 통해 법의 명령에 내재하는 법의 과잉으로서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7 이 법의 과잉은 비어 선장의 법을 구성하는 어두운 이면이며, 이 어두운 이면으로서의 초자아의 폭력성이 그의 법을 (불)가능하게 하는 역설이자 법의 구성적인 결핍과 궁지(아포리아)이다.

    멜빌의 전기적 사실을 고려하면, 비어 선장은 저자 자신을 상당부분 반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멜빌은 아들 말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다. 비어 선장이 빌리가 상관을 폭행해 죽임으로써 “군의 규율을 위반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않는”(60) 것처럼, 멜빌은 아들에게 엄하게 규율을 강조했었다. 그리고 그런 엄격하고 규율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말콤의 자살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어 선장과 빌리의 관계는 바로 아들에게 엄한 초자아로 남아 있던 아버지로서의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저자가 자의식적으로 그리고 반성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빌리 버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가운데 빌리도 초자아와 연관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래거트와 비어 선장은 실정법과 폭력의 친화성을 통해 초자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면, 빌리는 자연법 혹은 정의가 폭력과 갖는 동질성을 보여주면서, 초자아를 구현한다. 우선 빌리는 멜빌이 가장 이상적으로 그리는 인물이다. 그는 외면적으로는 장밋빛의 안색을 가진 “아름다운 선원”(44)이다. 그는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성격도 좋다. 그는 “타락 이전의 젊은 아담”(94)처럼 순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는 동료 선원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다. 때로 그는 자신의 도덕적 순수함 때문에 다른 선원들로부터 “아기 버드”(44)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서술자는 그를 “아폴로”(48)라 부르기도 하고 비어 선장은 그를 “신의 천사”(101)라고 부른다. 따라서 빌리는 이상 혹은 이상적 도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밀턴 알 스턴(Milton R. Stern)은 빌리가 현실세계의 토양에서는 온전히 유지될 수 없는 초월적 이상주의와 절대적 도덕성을 구현한다고 본다(212).

    그러나 빌리의 이상적인 면모, 혹은 그의“절대적 도덕성”은 자신의 “폭력성”에 의해 의미가 상쇄된다. 물론 그가 평화의 화신 같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평화는 자유, 평등 같은 가치와 더불어 현실의 법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가치라는 점에서 천상의 법으로서의 정의라 할 수 있다. 빌리는 일차적으로 이 천상의 법을 구현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빌리가 “H.M.S. 벨리포텐트”군함으로 차출되기 이전에 그는 “인간의 권리”(the Rights-of-Man)라는 이름의 상선에서 일을 했다. 빌리가 새 배로 옮겨가던 때, “인간의 권리”호의 선장은 빌리를 “평화를 지키는 자”(peacemaker)라고 불렀다(47). 그에 따르면, “인간의 권리”호에서 빌리가 일을 하기 위해 승선하기 전까지는 선원들 사이에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빌리는 선원들의 싸움을 잠재우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해주는 놀라운 덕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엔 커다란 아이러니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평화를 가져오는 방식 대부분이 “폭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스턴(Stern)은 빌리의 이런 아이러니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빌리는 자신의 주먹을 사용할 필요성을 없애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주먹을 이용한다”(217).  레드 휘스커즈(the Red Whiskers)가 빌리의 옆구리를 쳤을 때, 빌리는 가차 없이 “자신의 주먹을 날린다”(47). 놀랍게도, 여기에서 빌리가 갖추지 못한 것은 어떤 위협을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다.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을 통한 빌리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복수는 “평화를 지키는 자”로서의 그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레드 휘스커즈의 일격은 빌리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이다. 빌리는 그런 부당한 폭력을 잠재울 때, 그 역시 동일하게 “폭력”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멜빌은 빌리의 폭력이 그의 정의로운 행위에 드리운 어둔 그림자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빌리의 폭력은 벤야민의 논의를 고려하면, 평화를 수립할 목적과 의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법을 정초하는 폭력”이다(Benjamin 295). 데리다는 법을 정초할 목적이든 아니면 법을 유지시킬 목적이든 그 법에 수반되는 폭력은 거부되어져야 할 문제적 요소라고 비판한다(Derrida 57).

    빌리에 대한 멜빌의 재현을 고려하면, 우리는 빌리가 단순히 순수한 이상의 상징적 인물이라기보다 이상/현실 혹은 빛/어둠의 경계를 명백히 그릴 수 없는 “모호함”을 구현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8 분명, 빌리의 폭력은 그의 이상의 어두운 이면이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빌리의 진정한 결점이 그의 “말더듬”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폭력성”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면모의 빌리가 지닌 얼룩으로서의 폭력성은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초자아”와 다르지 않다. 라깡에 따르면, 초자아는 모든 폭력의 저장소로서, 법이면서도 동시에 그 법을 와해하려 위협한다(McGowan,The End of Dissatisfaction? 29-30). 초자아가 법과 폭력의 낯선 친밀함을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빌리는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성, 혹은 도덕적 정의 이면의 어둔 그림자로서 폭력성을 드러낸다. 빌리는 레드 휘스커즈 뿐만 아니라 클래거트에게도 주먹을 휘두를 때 그것이 정의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에게 징벌적이고 가차 없이 복수를 가하는 초자아를 구현한다.9 즉 그는 자연법이나 정의와 폭력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억울하게 선상반란의 음모에 가담하는 자라는 모함에 빠져 곤경에 처하자,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바로잡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클래거트를 물리적 힘으로 처벌한다. 이 보복적인 정의는 이면의 폭력성과 분리될 수 없다. 벤야민의 논의에 따르면, 정의와 자연법을 강조하는 이들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자연법과 정의가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상당히 문제적이며 해로운 일이다(Benjamin 293, 300). 폭력으로 상관을 죽였기에 “군사범죄 가운데 가장 악독한 것”(103)을 저지른 빌리는 초자아적 폭력에 연루된다. 이분법적으로 보면, 빌리는 순수를 상징하고 클래거트는 사악함을 상징하지만, 빌리의 폭력은 클래거트의 초자아와 동전의 양면관계를 지닌다. 따라서 빌리와 클래거트에 관한 이분법적 해석은 빌리의 순수와 정의 이면에 폭력적 초자아가 있음을 밝히는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독자는 빌리의 폭력이 일정부분 그 정당성을 지닌다고 생각해볼 수 도 있다. 예컨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빌리의 폭력을 “절대적 순수의 폭력”(the violence of absolute innocence)이라고 옹호한다(On Revolution 79). 아렌트에 따르면, 즉각적인 행위가 요구되는 상황에 몰려 빌리는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기에 그것은 합당한 것이며, “비이성적인”  (irrational) 것이 아니다( “Reflections on Violence”28).10 이처럼 빌리의 폭력은 자신을 위기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클래거트의 사악함을 처벌 혹은 응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폭력이라고 간주될 수도 있다. 빌리의 일격이 폭력을 막기 위한 정당한 폭력이라는 생각은 마치 칸트가 평화와 자유의 수호를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의의 수호를 위해 행하는 폭력의 정당성이란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잠시 칸트의 주장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도덕 형이상학』(The Metaphysics of Morals)에서, 칸트는 분명하게 영구적 평화를 인류의 이상으로서 옹호한다. 따라서 어떤 독자들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폭력에 대해 암묵적으로 승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의아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저작에서 칸트는 국가의 권리에 대해 논하면서 전쟁의 정당성을 언급한다. 한편으로 그는 세계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전쟁을 혐오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영구적 평화의 이상을 성취하는 데 있어 암묵적으로 전쟁을 지지한다. 칸트가 보기에, 전쟁은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서 지양되어야할 악이지만, 정당하지 못한 이웃 나라에 대해 제제를 가할 다른 바람직한 방법이 없을 때 전쟁은 불가피하게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16).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 의해 부당하게 처우를 받았을 때 적극적인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이 독려되기까지 한다. 영구적 평화 혹은 영구적 정의를 위한 무력의 무한한 행사가 칸트에게서 정당화되는 것이다(118-19). 여기에서 칸트는 영구 평화가 영구적 전쟁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영구 평화는 “국가의 전체 권리들의 궁극적 목표”(119)이며, 그런 이상적 목표는 오직 국제적 평화를 위협하는 “정의롭지 못한 적”이 모조리 이 세상에서 제거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논리 안에서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목적이라면 “정의롭지 못한 적”과 전쟁을 하는 것은 적어도 용인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다.11

    칸트는 자유를 수호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폭력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그는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유의 절대적 우선성을 “유일하게 근원적인 권리”(30), 즉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확언한다. 따라서 칸트가 보기에 이 자유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모든 수단은 그것이 비록 폭력적이라 하더라도 용납된다(25). 칸트는 폭력이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합법적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칸트의 정당한 전쟁 이론」(“Kant’s Just War Theory”)에서, 브라이언 오렌드(Brian Orend)는 “무장한 군사력과 강제력은 칸트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자유를 막는 것을 저지시키는 것이라면 정당화된다”(341)고 지적한다. 이처럼 정치와 법에 관한 칸트의 사유에서 자유수호의 정의와 전쟁의 폭력은 “언캐니”(uncanny)한 친화관계를 보여준다. 벤야민이 자연법, 정의, 평화를 위해 법을 정초하는 폭력성을 고발한 점이나, 라깡이 그의 일곱 번째 세미나『정신분석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에서 칸트의 도덕법이 사드적인 초자아의 파괴성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지적한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12

    칸트에 의해 제시된 정당한 전쟁이론을 고려하면, 우리는『빌리 버드』에서 빌리가 보여준 정의와 폭력의 기이한 친밀성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빌리 버드』에서 서술자는 천상의 법(자연법)을 추구하는 혁신자들이 전쟁과 폭력을 초래하는 것을 언급한다(62-63). 이것은 빌리의 정의/폭력의 양가적이고 모호한 측면과 병치된다. 멜빌은 빌리의 내면의 법(혹은 정의)과 클래거트의 실정법 모두가 초자아의 어두운 이면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빌리의 폭력은 전쟁의 필요성에 대한 칸트의 주장처럼 어떤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 하더라도 방식적인 면에서 얼룩과 오점을 피할 수 없다. 결국, 멜빌은 클래거트, 비어 선장, 빌리의 삼자 관계를 그리면서, 그 속에서 현실의 법, 자연법 혹은 정의 이면에 얼룩으로서 초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3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약어 PF로 표기하겠다.   4Herman Melville, Billy Budd, Sailor (An Inside Narrative), ed. Harrison Hayford and Merton M. Sealts, Jr. (Chicago and London: U of Chicago P, 1962)  76.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 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51962년 피터 우스티노프(Peter Ustinov)의 감독 아래 제작된 영화『빌리 버드』는 선원들을 가혹하게 매질하는 클래거트를 통해 법/폭력의 친화관계를 잘 부각시킨다.   6법의 얼룩으로서 무자비한 폭력과 증오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저자 멜빌의 인식은『빌리 버드』보다 훨씬 이전의 작품『타이피』(Typee), 『화이트 재킷』(White-Jacket)에서도 드러난다.   7신문수는『허만 멜빌: 탈색된 진실의 추구자』에서 비어 선장이 드러내는 법의 과잉으로서의 폭력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실 군의관도 지적하는 것처럼, 비어의 임시 군법회의의 소집과 거기에서 빌리의 사형 결정을 끌어낸 것은 월권이었다”(102).   8신문수는 “빌리를 예수에, 클래거트를 사탄에, 비어를 중재하는 신에”(98) 견주는 도덕적 알레고리 독법이『빌리 버드』에 내재하는 애매성을 간과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빌리가 “순진성과 함께 클래거트의 치사로 상징되는 폭력을 내포하는 입체적 인물임을 망각해선 안 된다”(99)고 강조한다.   9빌리가“반복해서”레드 휘스커즈 뿐 아니라 클래거트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빌리가 레드 휘스커즈에게 가한 “끔찍한 구타(terrible drubbing)”(47)를 클래거트에게도 동일하게 가하는 것은 그의 폭력이 단순히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빌리가 그것을 바로잡고자 취하는 중요한 해결방식이자 패턴임을 입증한다.   10토마스 클레비에즈(Thomas Claviez)는 아렌트의 이런 해석을 비판하면서 빌리가 비어 선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야만적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33, 43).   11이와 관련해 루이기 카란티(Luigi Caranti)는 칸트의 이론이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적인 십자군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45).   12지젝은 이런 기이한 친밀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나의 자긍심이란 감정이 나를 굴욕적이게 만드는 도덕법의 압력에 의해 뭉개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만 나의 병리적인 자연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자족적인 주체가 된다”(Tarrying with the Negative 47). 지젝의 이 언급에서 드러나듯이, 칸트의 도덕법은 자아가 그 이상적인 도덕에 부합하지 못하는 데 따른 굴욕감(shame), 고통(pain)을 수반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칸트와 사드는 닮은 부분이 존재한다. 칸트의 도덕법과 사드의 쾌락추구의 준칙이 갖는 유사성과 차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논고「윤리와 충동: 칸트와 사드에 관한 라깡의 논의를 중심으로」197-220을 참조하라.

    III.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법은 자신의 얼룩으로서의 초자아와 분리될 수 없이 결속되어, 탈출구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멜빌은 이런 법과 그것의 얼룩으로서의 초자아가 결속되어 있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 법의 어둠으로부터 물러설 가능성을 모색한다. 빌리의 교수형이 결정된 후, 비어 선장은 빌리가 감금되어 있는 특등실에서 그와 면담을 한다. 서술자는 이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114). 서술자는 다만 이 특등실에서 둘이 서로 인간의 본질이나 세상에 대한 아주 진귀한 특성을 근본적으로 공유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술자에 따르면, 비어 선장은 빌리에게 왜 그가 빌리를 교수형으로 몰고 갔는지의 이유와 즉결심판에서 자신이 가졌던 영향력을 솔직하게 빌리에게 털어놓았을 수 있고, 빌리도 비어 선장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115). 특등실에서 비어 선장과 빌리가 갖는 비밀스러운 면담은 그 내용이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공백으로 남지만 이 작품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비어 선장은 서술자가 암시하듯이 혁명적 반란에 대한 자신의 공포가 결국엔 빌리를 사형으로 몰아넣는 데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아마 그런 내용을 빌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비어 선장 스스로 자신이 지지하고 집행하는 법이 온전하지 못하고 권력자 개인의 불안과 공포, 주관적 감정에 의해 법적 결과가 상당히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칸트적 용어로 표현하면 비어는 “병리적인”(pathological) 어떤 감정이 법의 냉엄한 실천에 보이지 않게 개입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뉴턴 아빈(Newton Arvin)은 특등실에서 비어 선장과 빌리가 “가장 완전한 화해(the most complete reconcilement)”(406)를 했다고 해석한다.13 아빈의 해석처럼 특등실에서의 면담이 비어 선장과 빌리에게 서로에 대한 심오한 공감과 이해를 가져오는 계기였다면, 우리는 비어 선장 뿐 아니라 빌리도 면담을 통해 자신이 클래거트를 죽인 것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가졌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빌리는 비어 선장과의 면담 이후, 그의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날 밤 마치 요람에서 잠이든 아이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119). 서술자에 따르면 그는 비어 선장과의 면담 이후로, “고뇌”(agony)에서 벗어나게 된다(119). 이“고뇌”는 자신을 모함한 클래거트에 대한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 혹은 다른 한편으로 클래거트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고, 또 더불어 자신을 서둘러 법의 심판대에 올려 온전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심판으로 교수형시키는 비어 선장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만약 빌리가 자신만 옳고 비어 선장이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여겼다면, 빌리는 죽는 순간까지 증오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빌리가 비어 선장과의 면담이후 자신의 고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가 내면의 죄책감이나 분노 같은 초자아적인 압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빌리가 그런 고뇌와 초자아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추측컨대 그가 비어 선장과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비어 선장이 그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떠난 후 다음날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빌리는 밤새 어쩌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비어 선장이 자신의 현실의 법이 결핍과 구멍을 지녔음을 인정하듯, 빌리는 어쩌면 자신의 정당함과 정의도 결코 온전하지 못하고 폭력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지녔음을 깊이 자각했을 수 있다.

    특등실에서 빌리와 비어 선장의 면담이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이 갖는 진기한 성격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둘이 서로 대변해오던 천상의 법과 지상의 법이 그것의 과잉으로서의 폭력 같은 어둠과 온전히 분리되지 못한다는 점을 자각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순간은 라깡의 표현을 빌면 빌리와 비어가 자신들의 법(대타자)이 온전하지 않고 결손을 지녔다는 것을 자각하는 “환상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fantasy)의 순간이다. 이런 계기는 둘이“법에서 사랑으로”전환하는 순간이다. 주체의 결핍 뿐만 아니라 대타자의 결핍을 깨달음으로써 대타자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는 환상 가로지르기는 법의 짝인 초자아를 벗어나 사랑에 이르는 중요한 사건이다(Kotsko 80-81; O’Dwyer 139).

    “법에서 사랑으로”전환되는 순간은 빌리와 비어 선장의 “지연된 대화”속에 깊이 함축되어 있다. 먼저 빌리의 경우를 고려해보자. 처형당하는 순간의 빌리는 “비어 선장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123)이라는 심금을 울리면서도 심오한 최후 진술을 남긴다. 멜빌은 빌리의 이 말이 마치 새가 아름답게 노래를 하는 것과 같다고 서술한다. 빌리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는 비어 선장에게 “앙심”(resentment)을 품지 않는다. 빌리가 만약 비어에게 깊은 앙심을 품었다면 그것은 초자아의 복수에서 나오는 것이다. 빌리가 보여준 은총(mercy)은 라깡의 표현을 따르면, “법의 한계 바깥에 있는 무한한 사랑(a limitless love . . . outside the limits of the law)”과 같다(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274). 빌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행위의 적법/위법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법의 석연치 않는 처리절차에 희생되는 것에 대해 분노나 앙심을 품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사형의 판결을 내린 비어를 포용한다. 빌리의 마지막 고별사는 그의 “관용(forgiveness)”을 입증한다(Rogin, Fathers and Children 311). “관용”이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자에게 원한을 품거나 앙갚음하길 그만두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고려하면, 빌리는 비어에 대한 포용과 사랑을 통해 최후의 순간 법/초자아의 악순환적 고리, 혹은 죄와 벌 그리고 보복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빌리의 최후 진술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이, 비어 선장은 죽어가며 “빌리 버드”라고 외친다. 이 최후 진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물음에 어떤 독자는 다음과 같이 직관적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다: “비어는 빌리 버드를 처형한 이후 마음속에 빌리 버드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강하게 느낀다. 왜냐하면, 비어 선장은 빌리의 죽음이 애초에 클래거트의 부당한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잘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빌리가 비어 자신의 자의적인 군법의 엄격한 강요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어 선장은 다만 자신이 상관을 살해한 빌리를 용서하면 전시에 선상반란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두려움, 혹은 군의 질서라는 공공선을 위해서 빌리를 처형했기에, 그 공공선의 추구에서 희생된 빌리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어의 최후 진술에 대한 서술자의 실제 서술은 독자가 직관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앞의 이야기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서술자에 따르면, 비어는 죽는 순간 자신의 죄의식(초자아)으로 환원되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빌리 버드, 빌리 버드.’이 말이 양심의 가책(remorse)에서 나온 말투가 아니었음은 비어 선장의 임종을 지켜본 이가 벨리포텐트호의 선임하사관에게 말한 것으로 미루어 분명해보였다”(129, 필자의 강조). 여기에서 비어 선장이 빌리 버드의 이름을 부른것은 그의 “죄책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멜빌은 비어의 최후 진술이 빌리에 대한 죄의식에서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메시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비어 선장의 진술이 그저 죄책감에서 비롯된 후회와 양심의 가책이었다면, 여전히 비어는 초자아의 악순환적 고리에 얽매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멜빌은 비어 선장이 이 초자아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비어의 마지막 말은 빌리의 최후의 언급에 대한 일종의“지연된 응답”이며, 이 지연된 대화 속에서 독자는 이들이 초자아로부터 거리를 두는 가능성, 상호간의 포용(mutual embrace), 사랑을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법과 초자아는 일종의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해서 주체를 구속한다. 초자아에서 비롯된 “법”은 그 법에 대한 “위반,” 혹은 위반의 욕망, 그리고 “죄”를 초래한다. 그래서 자아는 또 다시 자신의 위반적 행위에 따른 초자아의 “죄의식”에 시달린다. 초자아, 법(그리고 그 법을 위반하고픈 욕망의 발생), 위반(죄), 그리고 또 다시 초자아(죄의식)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113).14 지젝은 이런 법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통해서이다. 지젝의 논의 속에서 사랑은“초자아의 압력으로부터 주체를 해방시켜줄”수 있다(Sharpe and Boucher 205). 이 사랑이 가능하려면 주체는 자신의 대타자가 결핍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 인정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상징적대타자로서의 법이 구성적으로 결핍이라는 인식에 이르거나, 자신의 이웃으로서의 타자가 주체처럼 역시 결핍의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사랑이 가능하다. 『지젝 리더』 (The Žižek Reader)에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저 타자의 아갈마(agalma)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해 덧없고 상실된 대상임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이 이 상실을 극복할 때,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164). 이처럼 결핍에 대한 인정과 수용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조건이다(Žižek, PD 115). The Žižek Reader)에서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저 타자의 아갈마(agalma)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그것’을 갖고 있지 못해 덧없고 상실된 대상임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이 이 상실을 극복할 때,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164). 이처럼 결핍에 대한 인정과 수용은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조건이다(ZΔizΔek, PD 115).

    라깡과 지젝에 따르면, “법”의 기원은 초자아—가혹하며, 비합리적이고, 외설적인 명령—이다. 이 초자아는 법의 형태를 띠면서도 은밀하고 외설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내면의 명령으로서 법의 얼룩이자 보충이다. 이 초자아(죄의식)가 배후로 물러서면 법은 공식적으로 법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한다. 바꿔 말해서, 초자아는 법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법과 “외밀한”(extimate) 관계를 이룬다. 법이 구조적으로 그것의 얼룩, 오염으로서의 초자아와 뗄 수 없는관계에 있다는 점과 관련하여, 지젝은 법이“남성적/남근적”특징을 지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체(The All)의 보편적인 법으로서 작용하려면, 반드시 그것의 구성적 예외에 기초하기 때문이다(Žižek, PD 116). 이 구성적 예외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외적인 초자아적 위반, 죄, 예외적 폭력과 같은 것이다. 이 후자의 예외성들이 배후로 사라져주면 법이 그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법은 늘 자신의 내부에 이물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법은 “비(非)전체이다”(Not-All). 이것을 우리는 대타자의 결핍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온전한 사랑이 가능하려면, 이런 대타자의 결핍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사랑은 법/초자아의 악순환적 고리가 입증해 보이는 대타자의 결핍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라깡은 그의 열한 번째 세미나의 맨 마지막에서 법의 한계를 넘어선 사랑을 언급한다(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276). 지젝은 이런 사랑이 법의 한계, 법의 결핍을 인정해야 도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PD 113). 라깡과 지젝의 언급처럼, 멜빌은 자연법, 정의, 혹은 천상의 법으로서의 빌리의 법, 그리고 현실적인 실정법으로서의 비어의 법(지상의 법) 모두 결핍임을 보여준다. 빌리와 비어도 서로의 지연된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지지해왔던 법이 비전체(Not-All)로서의 법임을 자각한다.

    또한 사랑은 상징적 대타자로서의 법의 결핍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주체의 이웃(타자) 역시 결핍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이웃(타자)에 대한 사랑은 그 이웃(타자)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 이웃(타자)의 결핍을 타자의 실재로서 인정하고 감싸 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캐스린 오드와이어(Kathleen O’Dwyer)는 라깡이 인간 존재와 인간관계의 이상주의를 거부하고 사랑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가능성이라 여겼음을 강조한다(122). 이 때의 사랑은 상상적 타자—자아가 판타지 속에서 그리는 이상을 구현하는 타자—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상징적 타자—상징적 의미의 그물망 안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는 타자—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이것은 실재적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 실재적 타자에 대한 사랑이란 상상적 타자나 상징적 타자와의 동일시를 벗어나서, 그런 상상적 타자나 상징적 타자가 구성적으로 결핍을 지닐수밖에 없다는 실재를 드러내는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실재  적 타자에 대한 사랑은 주체가 배제하려는 이질적 타자가 주체 안에 들어와 더이상 그 주체가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그런 타자를 인정하는 “아가페”이다(민승기 251). 이것은 타자의 결핍과의 동일시라고 말할 수 있다. 빌리가 최후의 순간 비어 선장을 축복하는 것은 실재를 드러내는 타자로서의 비어 선장을 인정하고 그의 결핍과 자신의 결핍을 동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젝은 우리가 이웃의 “물”(the Thing)을 사랑해야 그것이 법의 한계를 벗어난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웃의“물”에 대한 사랑은 곧 이웃이 지닌 외상적인 “공백”과 “결핍”의 부정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멜빌은 그런 사랑을 최후의 순간의 빌리를 통해 형상화한다.

    결국 우리는 빌리와 비어가 초자아를 넘어설 사랑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최후의 순간 이들은 더 이상 초자아에 얽매여 있지 않다. 빌리는 외부적 대상(비어)에 대한 처벌의 집착에서 해방되고, 비어는 빌리를 처형한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서의 내면적 처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최후의 진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술들로 미루어 우리는 이들이 법의 한계—좀더 정확히 말하면 법의 한계이자 그 법을 가능케 하는 조건—로서의 초자아로부터 거리를 두고 사랑으로 향하고 있음을 본다. 바꿔 말하면, 빌리와 비어는 그들의 타자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 타자의 결핍을 자신의 내부에 지닌 결핍과 동일시하는 주체의 윤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라깡의 용어를 빌면, 빌리와 비어는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중첩되는 곳에 위치하는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 순간“사랑”이 발생한다. 빌리와 비어는 그들이 각각 관계를 맺고 있던 정의와 법이라는 대타자가 더 이상 완벽한 대 타자가 아니라는 인식에 이르는 순간, 사회-상징적 체계와 가치의 결핍을 입증하는 잉여물, 즉 “오브제 쁘띠 아”가 됨으로써 사랑을 구현한다.

    법의 결핍에 대한 인식, 그리고 법이라는 대타자로부터의 분리를 보여주는 빌리와 비어의 변화를 고려하면, 기존에 이 두 인물을 해석하는 입장들은 충분치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해석들은 크게 두 편으로 갈라지는데, 한편에서는 멜빌이 빌리가 구현하는 정의 혹은 내면의 법을 옹호한다고 해석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저자가 비어 선장이 지지하는 현실의 법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입장을 잘 보여주는 비평가는 수잔 웨이너(Susan Weiner)이다. 웨이너는 『빌리 버드』에서 멜빌이 비어 선장의 법체계가 문제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폭로  함으로써 현실의 법이 빌리를 통해 대변되는 자연법, 혹은 정의를 포괄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웨이너가 비어 선장의 법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상당히 적절하다. 하지만 그녀는 빌리를 너무 이상화시키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녀는 빌리가 오로지 정의를 구현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라고만 평가한다(139, 142, 150). 따라서 그녀는 빌리의 “폭력성”에 대해 침묵한다. 그녀는 클래거트를 향한 빌리의 일격을 빌리의“마음”이 클래거트의 “머리”를 압도하는 것으로만 해석한다: “위대한 마음인 빌리는 클래거트의 이마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마음이 머리를 정복한다”(159). 그녀가 바라보는 빌리는 클래거트의 사악함과 철저히 대비되는 이상과 순수의 상징이며, 그의 일격은 그가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이다. 하지만 주장컨대 빌리도 정의 혹은 자연법이라는 이상적인 법을 구현하는 가운데 그 이면의 어둠으로서 폭력성과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법 이면의 폭력성을 구현하는 클래거트와 경계가 불  분명하다. 『빌리 버드』에서 멜빌은 이런 경계의 모호함을 말하지만, 웨이너는 이런 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두 번째의 비평적 입장은, 저자가 외부적 권위로서의 현실법을 수용하고 순응한다는 입장이다. 『전복적 계보학』(Subversive Genealogy)에서 마이클 폴 로긴(Michael Paul Rogin)은 빌리의 죽음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에 비유하지만『빌리 버드』에는 예수의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314). 그는 멜빌이 결국 자연법보다 현실의 법과 권위를 수용했다고 해석한다(315). 브룩토마스(Brook Thomas)는 로긴과는 약간 다른 해석을 하면서도 멜빌이 현실법을 수용한다는 입장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르면, 멜빌은 단순히 현실법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형식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멜빌이 현실의 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대안도 자연법과 같은 초월적 영역에서 상상해낼 수 없었기에 그 법에 순응하는 보수적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한다(222, 236, 248, 249). 토마스는 비어 선장에 대한 빌리의 최후의 축복을 현실법에 대한 그의 순응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빌리의 순응은 저자가 비판해왔던“억압적인 법질서에 대해 맞서길 멜빌 스스로 거부하는 것”(222)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토마스는 멜빌에게 비판적이다. 하지만 멜빌이 궁극적으로 현실법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택하는 로긴이나 토마스 모두『빌리 버드』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멜빌은 현실의 법의 문제점과 결핍을 지적하면서 그 현실의 법을 넘어설 방법을『빌리버드』에서 암시적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법의 결핍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가능성”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빌리와 비어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런 알레고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등실에서 비어와 비밀스런 면담을 한 이후, 최후의 진술을 하는 빌리는 애초에 레드 휘스커즈와 클래거트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빌리와 동일하지 않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 빌리를 외치는 비어는 허둥지둥 빌리를 처형하는 법의 판결을 주장하던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의 균열과 불일치를 통해서 멜빌은 법에 대한 이들의 태도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멜빌은 비어의 법과 빌리의 법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지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며, 이“대안 없는 이분구조”속에서 독자들에게 역시 그런 선택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을 비어의 법/빌리의 법(정의)의 문제로만 읽으려는 것은 허위적 딜레마의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멜빌은 오랫동안 법의 문제점을 자신의 문학을 통해 재현했지만, 그 해결방안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멜빌의 이 유  고작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두 인물의 최후 진술을 통해서 법의 문제점을 넘어설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가능성이란 밤의 법으로서의 초자아가 공식적인 법을 보충하고 폭력과 외설적 쾌락이 법에 밀착해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는 대안으로서의 사랑이다.

    13랜달 스튜어트(Randall Stewart)도 역시 이 면담이 빌리와 비어의 “화해”(reconciliation)의 장면이라고 해석한다(Stewart 285).   14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약어 PD로 표기하겠다.

    IV. 결론

    클래거트가 구현하는 외설적 초자아를 극복하는 윤리적 대안은 빌리의 정의(폭력이라는 과잉을 수반하는 것)에서 얻어질 수 없다. 비어 선장의 법도 초자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어는 빌리를 성급히 처형하는 폭력으로서의 초자아를 보여준다. 멜빌은 그의 유고작『빌리 버드』에서 비어의 현실법과 빌리의 자연법이 수반하는 초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사랑임을 시사한다. 빌리와 비어의 최후의 진술들은 과거 이들이 수반했던 초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가는 것임을 시사한다. 죽기 전의 빌리는 클래거트를 살해하던 빌리가 아니며, 빌리의 최후진술은 타자에 대한 앙심이나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포용이다. 죽기 전의 비어의 진술도 빌리의 최후 진술의 또 다른 반복과 긍정—혹은 빌리의 최후 진술에 대한 지연된 응답—으로서 타자에 대한사랑에서 비롯된다. 유언 같은 그의 진술은 자신의 죄의식, 자기책망, 자기처벌적 초자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법과 그것의 끈질긴 짝으로서의 초자아라는 탈출구 없는 이분구조를 “탈출”하는 그 무엇, 즉 “사랑”이다. 『빌리버드』에서 멜빌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가정의 비극, 즉 아들 말콤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초자아적 아버지에서 사랑의 아버지로 변모하고 싶었던 자신의 바램을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결국, 『빌리 버드』는 법/초자아(폭력)의 밀월관계를 폭로하는 작가적 통  찰과 숙고의 깊이를 잘 반영하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법의 궁지에 대한 탈출구의 비전을 사랑의 윤리를 통해 제시해주는 멜빌의“최후 진술”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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