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Blake and the Network of Knowledge: Centering on the Communication of Poetry and Science

윌리엄 블레이크와 지식의 네트워크 ―시와 과학의 소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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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Although his mythic poetry deals with the fall and resurrection of Albion as the origin of humankind, William Blake (1757-1827) simultaneously links it to the professionalization and unification of disciplinary knowledge itself. He particularly takes a great interest in the cross-referential relation of poetry to science. He argues for the communication of poetry and science on equal footing with each other without the former’s prioritization over the latter, or vice versa. In his works Vala, or The Four Zoas (1797-1807) and Jerusalem: The Emanation of the Giant Albion (1804-1820), on which I focus in this essay, Blake’s primary problematic is to display strong conflicts among different systems of knowledge. I approach this issue in light of the ideological clash of Newtonian thought, Romantic thought, and postmodern thought. In his poetry, Blake thematizes the very clashes of these different thought patterns. From the standpoint of Romantic thought, first of all, Blake problematizes Newtonian Enlightenment. He criticizes abstract universalization both in poetry and science, which Urizen, one of four Zoas, propagates. Protesting against Urizen’s Newtonism, Los values “living form.” Thus, Blake demonstrates, through this figure, that poetic imagination and scientific organicism are discursively communicative. Blake, however, also questions the network of Romantic science and Romantic poetry so as to suggest what current critics would call postmodern thought. Blakean postmodernism pursues the self-similarity of organic structure in science and poetry. Precisely, Blake sees polypus as a proliferation of organic body; he arranges four Zoas’ self-repetitive stories in a non-linear way. Blake aspires for the conflicting coexistence of different thought patterns.


  • KEYWORD

    chain , fiber , polypus , minute particulars , Newtonian science , sweet science , postmodern thought

  • I. 들어가는 말

    근대사회가 도래하면서 지식체계가 정치경제, 문학, 그리고 자연과학 등으로 전문화되기 시작하면서, 낭만주의자들은 문학과 경제 못지않게 문학과 과학의 상호 연관 관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1 그 어떤 낭만주의 시인보다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문학과 과학이 학문적 장벽을 서로 두텁게 쌓아 나가기 시작하는 근대시기에 이 두 영역이 역설적이게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21세기 들어서 더욱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인문학과 과학이라는 두 지식체계 사이에 가로놓인 지적 장벽과 교류의 문제는 그 계보학적 기원을 쫓아가면 낭만주의자들이 직면했던 인문학과 과학의 전문화와 소통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레이크는 “예술과 과학을 제외하면 인간의 삶엔 무엇이 남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사회 구성의 기본 토대로서의 예술과 과학” (613)2 사이의 소통의 문제를 화두로 삼는다.

    시와 과학이라는 두 지식체계의 네트워크를 다룰 때, 블레이크는 시가 과학을 구원한다는 낭만주의적 지식 서열화를 비판한다. 적지 않은 비평가들이 시적 상상력이 뉴턴 과학을 구원한다는 낭만주의적 이분법에 근거하여 블레이크 시를 독해한다. 예컨대『계시적 물리학』(Visionary Physics)에서 도날드 얼트(Donald Ault)는 유리즌(Urizen)이 대변하는 뉴턴 과학은 보편적, 논리적, 분석적 체계이고 이에 맞서는 새로운 대항시스템인 로스(Los)의 시적 체계는 계시적, 상상적, 역동적, 유기적 비전을 추구한다고 규정한다(24-56). 얼트는 자연을 비활성화된 물리적 체계라고 전제하고 이런 죽은 자연에 작동하는 추상적이고, 결정론적이며, 불변하는 법칙을 탐구하는 뉴턴 과학을 극복하는 획기적 인식전환은 시적 상상력이라는 역동적, 통합적 사유능력의 회복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43). 문학도 새로운 형태의 지식체계임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옳지만, 아쉽게도 얼트는 과학은 보편적, 논리적, 분석적 지식이며 시는 주관적, 통합적, 상상적 지식이라고 이원화하여 후자가 전자보다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우위에 있다는 낭만주의 지식서열화에 빠진다. 프레드릭 버위크(Frederick Burwick) 또한 이런 논리에 동참한다. 버위크가 보기에, 블레이크는 과학은 자연의 물리적 현상만을 탐구하기에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 속성이 강한 지식 체계라고 여긴다(8) 버위크가 블레이크의 과학관을 이렇게 유물론적으로 못 박은 것은 여전히 과학은 물질세계를, 시는 정신세계를 다루거나, 또는 과학은 감각의 세계를, 시는 지적 사유의 세계를 탐구한다고 하는 이원론을 전제한 것이다. 과학을 자연의 현상을 분석하는 지식으로, 시를 정신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지식으로 규정해 버리고 과학과 시의 융합을 제시했기에, 버위크의 비평적 시각 또한 결국 시가 과학을 구원한다는 지식의 낭만주의적 서열화를 반복하는 결과를 낳는다. 얼트나 버위크 같은 비평가들은 과학은 본래 비활성화된 물질의 법칙을 다루는 죽은 지식이고, 반면에 시는 항상 인간 존재의 역동적 생명력을 다루는 생동하는 지식이라고 블레이크가 단정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서열화를 주장한다기보다는 블레이크는 사실 시와 과학이라는 두 지식체계가 수평적으로 네트워크화가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예컨대 유기적, 통합적 지식인 시에 상응하는 유기주의 과학 담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를 경과하면서 뉴턴 과학과는 구분되는 유기주의 과학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유기주의 과학이 규명하고자하는 유기적 생명과 시적 상상력이 추구하는 통합적 비전이란 두 개념이 인식적으로 소통하게 된다. 블레이크는 역동적 에너지나 창조적 생명력 같이 보이지 않는 유동적 실체를 탐구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오직 물리적 자연에 작동하는 불변의 법칙만을 탐구하는 것만 이 과학이라 고집하는 뉴턴적 “이신론적 과학” (deist science, 776)과 구분되는 “감미로운 과학” (sweet science, 379)을 제안한다. 블레이크 신화체계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하게 되면서 창조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기에 과학은 뉴턴 과학으로 전락한다고 보는데, 다시 구원을 얻으면 “감미로운 과학” 즉 생명을 추구하는 과학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이 단일한 인식 패러다임을 지닌 지식 구성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복수의 패러다임들로 이뤄진 사유체계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예술이 과학을 구원한다는 의미에서의 과학의 낭만화가 아니라 과학영역에서 뉴턴적 인식모델을 생명과학 방법론 같은 역동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 과학적 사유의 혁신적 전환을 이뤄야 한다는 면에서 과학의 낭만화를 주창한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낭만주의 과학 패러다임과 당시 부상하고 있던 낭만주의 시학은 서로 인식론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유기주의 과학과 낭만주의 시학은 모두 생명, 에너지, 또는 유기적 구조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과 시라는 두 사유체계 모두를 가로지르는 지식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토대로 하여 블레이크는 서로 상이한 인식 패러다임 사이의 갈등을 시화하는데 대단한 열정을 보인다. 이 에세이에서는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서 등장하는 인물 간 갈등을 상이한 지식 체계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인류의 기원이 되는 인물인 알비온이 분화하여 네 조아들이 생기고 다시 이들이 여성적 분신으로 재분열되면서 야기되는 성적 대립을 다루는 블레이크의 대표적인 시인『발라 또는 네 조아들』(Vala, or The Four Zoas, 1797-1807)과『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Jerusalem: The Emanation of the Giant Albion, 1804-1820)을 주된 텍스트로 삼아, 시와 과학 모두를 관통하는 지식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을 부각하고자 한다. 논의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이시들에서 표출되는 서로 대립하는 사유형태를 뉴턴적 사유, 낭만주의적 사유, 포스트모던적 사유로 유형화하여 이 개념들을 먼저 간단히 정의를 할 필요가 있다. 뉴턴적 사유는 뉴턴의『프린키피아』(Principia, 1687)에 잘 집약되었듯이 질적 특수성을 지닌 물리적 대상을 추상화된 질량으로 통일하여 서로 상이한 질량을 지닌 물질사이의 보편적 운동법칙을 수학적 공식으로 추상화한다. 차이를 제거하고 동질화하는 지식체계라고 할 수 있다. 문학영역에 적용되면, 뉴턴적 서사는 선험적으로 결정된 플롯과 정형화된 인물에 기초하여 보편적 진실을 전달하는 서사방식이 된다. 뉴턴주의가 보편주의적 지식을 추구한다면 낭만주의적 사유는 구체적 보편, 유기적 발전, 다양성의 통일, 주변을 수렴하는 중심, 차별적 자기반복, 역동적 균형 같은 개념을 내포한다. 블레이크는 “예술과 과학을 일반화하면 소멸” (673) 될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일반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과 접맥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부분적인 것과 총체적인 것,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차별화하는 것과 동질화하는 것,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 변하는 것과 지속되는 것, 또는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상호매개적 관계를 권장한다. 유기체를 예로 들면, 유기체는 공시적 시각에서 보면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하는 구조를 띠고 통시적 시각으로 보며 자기발전(self-development)하는 존재인데, 끝없이 자기를 차별화면서 동시에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문학에 적용된다면, 유기적 형식은 낭만주의 시학의 핵심적 개념이 된다. 블레이크는 낭만주의적 사유와 뉴턴주의를 이원적으로 단순히 대립시켜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낭만주의적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 블레이크는 보편적 특수를 지향하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 보편주의만을 강조하는 뉴턴주의를 비판하지만, 낭만주의적 사유형태 또한 다양한 것들을 수렴하는 구심적 중심이란 총체화하는 원리가 엄연히 존재하여 보편주의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인지한다. 그래서 낭만주의적 인식 프레임이 자기반복적(self-similar)으로 연속분화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낭만주의적 총체화/중심화를 탈중심화하는 인식모델을 제시하는데, 필자는 이런 사유를 블레이크식 포스트모던 사유라고 부르기로 한다.3 비가역적이고 반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유기적 구조가 연속 분화되어 탈중심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유기체가 자기복제되어 형성된 폴립은 유일무이하여 반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유기체가 연속적으로 분화된 포스트모던 생명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포스트모던 과학과 함께『발라 또는 네 조아들』과『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서는 구원과 타락이라는 테마는 동일하지만 각각 독자적인 기원과 목적을 지닌 여러 에피소드들이 비선형적이고 탈중심적인 형태로 연결된 포스트모던 서사형태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블레이크에게 있어 지식사이의 네트워크는 뉴턴 과학과 뉴턴적 서사, 낭만주의 과학과 낭만주의 서사,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과학과 포스트모던 서사 사이의 상호지시적 관계를 의미한다. 블레이크는 과학적 지식이 뉴턴적 인식모델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뉴턴 과학과 유기과학, 더나가 포스트모던 과학이라는 다원적 과학 패러다임이 가능함을 보여 주듯이, 문학 영역에서도 뉴턴적 서사 뿐 아니라 낭만주의 서사,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 서사라는 복수의 서사전략을 펼쳐보인다.

    먼저 이 에세이의 제 2장에서는 알비온에게서 분화된 네 조아들 중 하나인 유리즌의 뉴턴적 계몽과학과 여기에 대항하는 로스의 유기주의 과학을 다뤄 과학적 지배의 두 양상, 즉 보편적-거시적 지배와 개별적-미시적 지배에 대해 다루겠다. 3장에서는 문학영역에서 뉴턴적 서사와 구분되는 낭만주의 서사전략의 등장을 탐구한다. 4장에서는 유기과학과 낭만주의 시학이라는 두 지식체계 사이의 인식론적 소통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5장에서는 블레이크가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어떻게 낭만주의적 패러다임을 재조명하는 지를 다루겠다. 궁극적으로 이 에세이에서는 블레이크가 서로 다른 사유형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식론적 갈등 그 자체를 시의 핵심적 주제를 삼고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1낭만주의 시학과 경제의 관계에 대해선,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예를 중심으로 다룬 졸고 이성범 117-44쪽 참조.   2William Blake, Blake: Complete Writings with Variant Readings. Ed. Geoffrey Keynes(Oxford: Oxford UP, 1966) 717쪽. 앞으로 블레이크가 쓴 시와 산문인용은 이 판본에 근거해서 괄호 안에 쪽수로만 표기한다.   3줄 반 리즈하우트(Jules van Lieshout)는 블레이크 시에는 식물화된 생명창조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가 대립한다고 전제하며 후자를 자기반복적(self-similar), 프랙탈적(fractal) 세계라고 규정한다. 골고누자의 자기 반복적 도시구조, “한 순간 안에 아주 긴 기간”(period within a moment), 즉 순간과 영원이 반복되는 시간관, “바퀴안의 바퀴,” “반투명“(translucence) 등의 개념들은 이런 자기반복적 세계의 여러 양상들이다. 특히 114-59쪽 참조. 리즈하우트는 자기반복이란 개념을 포스트모던 사유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필자가 제시한 뉴턴적, 낭만주의적,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유라는 세 가지 패러다임 중에는 포스트모던 사유에 가장 가깝다. 프랙탈적 차별적 반복을 좀 더 체계적으로 논하면서 블레이크 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한 글은 Livingston 69-84 참조.

    II. 유리즌의 뉴턴 과학과 로스의 유기과학―거시적-보편주의적 과학권력와 미시적-개별주의적 과학권력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서 인간의 기원이 되는 원초적 인물을 알비온이라 부르는데, 그가 뉴턴적 사상에 물드는 것을 블레이크는 인식론적 타락이라고 규정한다.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서 화자는“베이컨, 뉴턴이 싸늘한 강철로 된 철갑을 두른 채 그들의 공포를 걸어 놓아”(635) 고통스러워하는 알비온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로크와 뉴턴의 사유체계는 반복해서 돌아가는 수차나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베틀의 북과 같다. “로크의 베틀”(Loom of Locke)과 “뉴턴의 수레바퀴”(Water-wheels of Newton)는 마치 뻑뻑하게 움직이며“서로 외곽에서 맞물리는 바퀴”(wheel without wheel)처럼 돌아가는 형국이라 할수 있는데, 바퀴들이 서로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도는“바퀴 안의 바퀴” (wheel within wheel)인“에덴에서 보던 것과 사뭇 다르다”(636) 에스겔서 1장에서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계시적 비전에 나타난 바퀴와 유사한“바퀴안의 바퀴”라는 표현은4 새 국제판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의 번역처럼 바퀴들이“서로 교차하면서 맞물려 있는 바퀴”(a wheel intersecting a wheel) 모양새이다(Ezekiel 1:16). 한 바퀴가 다른 바퀴 속으로 서로 교차하면서 가로지르기 때문에 바퀴 하나하나는 각각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러 방향으로 향하는 구조이다.5 다양한 방향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는“바퀴안의 바퀴”라는 이미지는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단일한 세계를 상징하는“서로 외곽에서 맞물리는 바퀴”와는 대조되는 이미지이다. “서로 외곽에서 맞물리는 바퀴”는 외부에서 강제로 어떤 틀에 맞추어 자연을 획일적으로 재편하는 사유방식을 비유한 것으로“바퀴안의 바퀴”로 대표되는 다중적 세계관과 대치된다.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선 알비온에서 분화된 네 조아 중 하나인 유리즌이 이러한 뉴턴주의적 지배를 주도한다.

    『발라 또는 네 조아들』과『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 보면 유리즌이 실세가 되면서 자연이 비활성화된 물리적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양상이 드러난다. 세상은 창조적 생명력과 신성함이 제거되고 계몽이성이 행사하는 추상적 일반화, 추론, 실험으로 넘쳐난다. 예컨대,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서 유리즌의 유령은 타락한 알비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리즌은 종교적 신앙이 없이 “의심하고,” “실험하는” 인간의 “합리적 사유능력” 그 자체로서, 이젠 “빛의 왕자” (Prince of Light, 273)가 되어 우주를 전지적으로 지배하려 욕망하는 계몽신이다. 베이컨, 뉴턴, 로크, 볼테르, 루소 등이 내세우는 계몽이성, 즉 자연을 아무런 목적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물리적 공간으로 환원시킨 뉴턴주의, 인간의식을 타블라 라사(tabula rasa)로 보아 창조적 능력이 없는 기억과 경험의 집합으로 봄으로써 지극히 수동적으로만 자아를 규정한 베이컨, 로크 등의 영국경험주의 그리고 초월적 영역을 형이상학으로 규정하여 이성적 인식 밖으로 밀어내는 볼테르, 루소 등의 프랑스 무신론적 계몽주의 철학이 결합하여 유리즌이란 인물에 집약되는데, 그는 물리세계의 추상적 법칙만을 무작위로 강요하는 계몽과학 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합리적 추론을 통해 보편적 법칙을 입증” (generalizing Demonstrations of the Rational Power, 687)하는 데만 혈안이 된다. 유리즌은 안하무인격으로 역동적인 생명의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인 예수를 비웃으며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고 조롱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유리즌의 과학은 측량가능한 보편적 기준을 예외없이 모든 사물에 적용하는 지식권력이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끝없이 “상처를 주는 빛” (sickening light, 280)의 화신이다. 구석구석 밝게 비추지만 역설적이게도 억압이라는 어둠을 드리운다. 유리즌이 지배하는 세상은 역동적 에너지가 사라져 단지 “움직임이 없는 고체” (a solid without fluctuation)로 구성된 물리적 공간이 되어 그 “단단한 고체들이 끝없이 앞을 가로막아 버리는 세계” (a wide world of solid obstruction)이다(224). 사물의 질적 특수성이 사라지고 질량이라는 추상적 무게를 지닌 물질들 간의 기계적 역학관계만이 존재하여 “단하나의 무게단위, 단하나의 측정기준” (one weight, one measure)만으로 사물의 질서가 재편된다(224). 유리즌은 새로운 틀을 만드는 “위대한 장인” (great Work master, 280)이라도 된 듯이 모루, 베틀, 써레, 콤파스, 사분의, 저울, 용광로(281)와 같은 생산도구나 측량기구를 사용해 사물을 자신의 의지대로 재구조화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부정형 공간을 분할하는 권력이라 할 수있다. 공간은 추상화되고, 시간도 년, 월, 일로 표준화되고 분절화된다. 유리즌이 지배하는 유한의 세계에선 타락하기 전인 무한의 세계를 기억하는 로스조차도 유리즌의 논리에 물든다. “영원의 예언자” 로스는 일괄적으로 측량단위인 “링크나, 시간, 날, 년도 등으로 숫자를 매기는 아주 새로운 사슬” (chains new & new, numb’ring with links, hours, days & years, 227)로 얽인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한다. “유리즌의 아들은 심연을 콤파스를 사용해 나누고, 타락한 알비온의 맥빠진 심장을 떼어내서 저울의 눈금을 만들고, 커다란 부피를 지닌 물체의 무게를 단다” (283). 유리즌처럼 알비온에게서 분화된 또다른 조아인 루바(Luvah)는 분노와 죽음의 왕(King of rage & death)이 되어 빛의 왕자 유리즌에 맞서보지만(290), 유리즌이 행사하는 보편적 측정의 권세에 대적하기엔 역부족이다. 로스와 에니사먼의 아들 옥(Orc)에게도 유리즌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법칙을 담은 “강철같이 확고한 지침” (book of iron, 320)을 펼쳐 보이며 위세를 떤다. 알비온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끔직한 형상” (dread form of Certainty)과 “차디찬 추상의 잠” (Slumbers of thy cold abstraction)으로 표현되는 유리즌의 과학에서 깨어나길 열망하게 된다(360). 블레이크는 이처럼 뉴턴적 계몽과학에 잠재되어 있는 추상적 보편주의가 유발하는 문제를 심혈을 기울여 비판한다.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서 유리즌이 뉴턴주의 과학을 주관한다면, 알비온에서 분리된 또다른 조아인 로스는 생명과학의 핵심적 원리인 창조적 생명력 또는 역동적 에너지를 타락한 후에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유리즌은 기계, 분석, 반복, 정량적 측정, 물리학주의, 고체성을 기본 원리로 한다. 반면에 로스는 창조, 통합, 변화, 유기주의, 유동적 에너지를 추구한다. 블레이크 신화에는 골고누자(Golgonooza)라고 일컫는 창조와 상상력의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로스의 용광로(Los’s furnaces)가 있어서 물질에 창조적 형식을 부여한다. 유리즌의 과학이 가역적이며 반복적인 메커니즘을 추구한다면 로스의 과학은 비가역적이며 자기발전하는 생명의 역동적 힘을 탐구한다. 블레이크가 활동하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당시 자연철학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학문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유기주의 과학에서는 스스로 변화하고 조직화하는 유기체의 작동방식에 주목한다. 블레이크는 뉴턴 과학과 새롭게 부상하는 유기주의 과학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지만, 과학영역에서 뉴턴적 패러다임과는 다른 역동적 패러다임이 가능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생명(life) 또는 살아있는 형식(living form)이라는 새로운 분류기준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는 신흥 과학담론을 시화한다. 화석화된(petrified) 또는 뼈처럼 굳은(bonified)6 물질, 식물화된(vegetated) 존재, 곤충화된(worm-like) 존재, 동물처럼 생동감을 주는(animated) 존재, 생명력을 극대화한 신성한 인간 형태(human form divine)라는 기준에 기초하여 자연대상을 덜 생동감 있는 것과 더 생동감이 있는 것들로 재분류한다. 블레이크가 이처럼 창조적 생명력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18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본격화되는 자연사 연구의 새 패러다임, 즉 유기체를 “동물적 생동감 정도에 따라 재배열하는” 과학 연구 방법론의 변화를 반영한다(Ishizuka 79).

    그런데 주목할 일은 블레이크가 유기적 형식도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임을 분명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턴적 “시스템과 싸워 거기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630), 타락한 세계에서 로스는 자신도 결국 나름의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시스템과 싸워 거기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싶어 하지만(631), 로스는 그 시스템을 스스로 닮아가는 역설적 현실에 대해 갈등한다. “모든 존재의 질적 특수성을 부정하면서 사물을 추상화” 하는 뉴턴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신이 “할 일은 창조하는 것” 이라고 차별화하지만, 로스는 자기도 나름대로 창조의 “체계” (system)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629). 골고누자에서는 모든 견고한 고체들을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로스의 용광로와 인간의 몸을 섬유조직으로 잣는 로스의 여성적 분신인 에니사먼의 베틀(Enithamon’s loom)이 있는데, 이들은 로크의 베틀이나 뉴턴의 물레바퀴와 구분되는 창조와 생산을 위한 도구이다.

    블레이크는 타락한 세상에선 유기적 신체 시스템도 유리즌의 권력이 개별화되고 미시화되는 매개체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블레이크가 활동하던 당시에 인간 과학(Science of Man)의 일환으로 행해진 섬유질 연구에서 섬유질이란 유기조직은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이루는 기본 단위” 로 규정되었다(Hilton, Literal Imagination 80 재인용). 이 미세한 섬유조직으로 구성된 유기적 신체가 권력이 작용하는 미시적 장소가 된다. 넬슨 힐턴(Nelson Hilton)은 블레이크의 신화체계에서 타락 후 벌어지는 억압의 양상을 “사슬에 매인 존재”(Chains of Being)와 “섬유질로 얽힌 존재”(Fibres of Being)로 설명하는데(Literal Imagination 57-101), 힐턴은 섬유질이라는 유기조직이 쇠사슬처럼 억압적 틀이 될 수 있다는 블레이크의 통찰력을 부각한다. 그런데 힐턴은 섬유질을 매개로 한 억압이 사슬을 통한 억압과 어떤 결정적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슬을 통한 억압은 유리즌이라는 계몽권력이 우주에 추상적인 뉴턴적 물리법칙을 강제로 부여하는 거시적 과학권력이고, 섬유질을 통한 지배라 하면 유리즌의 과학권력이 유기체를 통해 실현되어 지배 방식이 개별화되고 미시화됨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란 시에 보면 예루살렘이란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겪는 고초를 사슬을 통한 억압과 섬유질을 통한 억압이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시에서 알비온의 분신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아내로 묘사되는 예루살렘은 구원과 자유를 간직한 인물이다. 이런 예루살렘이 알비온이 타락하면서 유리즌이 득세하자 엄청난 고통에 신음한다. 유리즌의 계몽이성을 체화한 알비온과 그 아들과 딸들로부터 당하는 상처는 “얼어붙은 그물망와 몸속깊이 박힌 나무뿌리에 둘러싸여” 있다는 그녀의 발언에 집약되어 있다(721). 외부에서 덧씌워진 “그물망”은 자기 의지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어떤 기준이 강요된다는 의미에서 보편주의적, 거시적 억압이라 할 수 있고, “내 몸에 박힌 나무뿌리”는 육체 속으로 파고드는 개별주의적, 미시적 억압으로 볼 수 있다. 알비온의 아들 핸드(Hand)와 하일(Hyle)은 계시적 비전을 지닌 예루살렘의 몸 속 깊숙이 “처절한 복수의 실”(a fibre of strong revenge)을 심는다(635). 핸드는 자기의 여성적 분신인 캠벌(Cambel)의 사주를 받고 카데론의 베틀로 실을 한올 한올 짜서 예루살렘에게 역겨운 몸뚱이 하나를 만들어 준다(723). 결국 섬유조직으로 구성된 유기체를 만드는 것은 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사슬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로스와 에니사먼 그리고 옥 사이에 벌어지는 애증의 삼각관계를 설명할 때도 블레이크는 사슬(chain)이란 용어를 외부로부터 강제로 부여되는 구속과 유기체라는 개별적 육체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자발적 구속이란 의미로 동시에 사용한다. 로스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에 휩싸인 아들 옥을 산 정상으로 끌고 가 사슬로 결박한다. 옥은 “분노에 찬 아이”(309)가 되어 아버지 로스의 처사에 격분하는데, 그런 증오심으로 인해 옥은 자기 몸 안에 자생적으로 생긴 섬유질의 그물망에 휘감기게 된다. “질투의 사슬로부터 생기는 질긴 섬유조직이 스스로 실을 잣듯이 빠르게 자라 바위와 동굴 주변을 감싸고 분노에 찬 아이가 지닌 불멸의 사지를 휘감는다”(309). 결국 섬유질로 휘감긴 옥의 육체 자체가 “살아있는 사슬”(a living chain, 309)이 된다.

    유기체를 매개로 한 억압은 신체의 아주 미세한 정보를 투명하게 드러내 미시적 통제를 위해 활용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아홉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발라 또는 네 조아들』에서 첫 째 이야기는 알비온에서 분화된 네 조아들 중 하나인 타마즈와 그의 여성적 분신인 에니온과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에니온이 타마즈에게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이 둘은 서로 지배욕에 불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성 대결을 벌인다. 에니온은 타마즈의 신체기관들을 재료로 일종의 유기적 직물을 짠다. “식물화시키는 베틀”(loom of vegetation, 267)로 짜내는 “얇은 날 실그물”(filmic Woof, 266)에 타마즈가 걸려들자 에니온은 그의 “신경,” “혈관, 유미관” 같은 유기조직을 하나하나 세고 “그것들을 엮어 무서운 실잣기를 한다”(266). 타마즈의 신체조직에 대한 정보가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21세기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본격화되는 생체인식기술(예컨대 홍채인식 시스템), 유전자 질병 정보 관리 등 유기체 지식을 통해 인간을 제어하는 현상을 블레이크는 근대의 태동기에 이미 신화적 이야기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블레이크가 섬유질을 비판한 것은 당대 프랑스에서 유행한 유물론적 계몽주의 생명관에 대한 그의 거부감을 반영한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비가시적이지만 생명을 관리하는 원동력이 가시적이고 물질화된 특정 신체 기관에 내장되어 있다고 여기기에, 유기적 신체기관이라는 물질적 실체를 보이지 않는 생명에너지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영혼과 육체를 분리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블레이크가 보기에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물질인 섬유질 자체에는 창조적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살아있지만 죽은 존재일 뿐이다. 현재적 영생을 열망하지 않는 “유한한 발생”(mortal vegetations, 508)이고 여성의 자궁이라는 베틀에서 생산되는 “식물화된 직조물”(Vegetated Mortals, 509)일 뿐이다. 블레이크는 아무리 미세한 섬유조직을 들여다봐도 가시화된 유기물질로서의 신체 조직 자체에는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성장을 주도하는 생명의 역동적 동력이 무조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유기체를 탐구할 때에 “미세한 특질들”(minute particulars, 738)을 총체적 원리에 매개시키는 자신의 낭만주의 과학 방법론을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이 방법론은 간단히 말하면, 보편이 특수에 내재하고 전체가 부분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유형태이다. 유기체를 예로 든다면, 블레이크는 신체의 여러 유기적 기관들에는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는 생명이라는 총괄적 원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에서 전체를, 특수에서 보편을, 차이에서 동질성을 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서 개별적 특질을 제거하고 보편주의적 질서를 자연에 부여하는 뉴턴 과학에 대한 블레이크의 비판을 검토하였다. 블레이크는 특수를 고려하지 않는 보편주의를 비판했지만 동시에 보편적 원리를 보지 못하고 특수한 것에만 집착하는 특수주의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여긴다. 블레이크가 유기체의 최소단위라고 할 수 있는 섬유질을 비판한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구체적이고 미세한 유기조직도 유기적 신체 전체를 조율하는 역동적 생명원리에 매개되지 않으면 활성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죽은 생명일 뿐이다. “완벽한 전체로서의 비전을 보고자하는 자는 그것을 미세한 특질을 통해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말한다(738). 하지만 동시에 “일반적 형식들이 특수자들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면 그 특수자들은 그저 “비유기적”으로 “축적(aggregate)된 원자 같은 존재” 이다(738). 여기서 “전체”라는 개념은 신체조직과 관련하여서는 몸을 총괄적으로 조율하는 역동적 원리가 된다. 블레이크가 살던 당시 뉴턴주의자들이 신뢰한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여겼던 원자와 유기체의 최소단위라고 여겼던 섬유조직은 모두 특수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의 대상인데 이는 보편주의와 함께 타락한 지식이다.7 블레이크가 제시한 “미세한 특질들” 을 포착하는 전략은 미시적이고 특수한 것이 반드시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것과 매개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 특수 또는 구체적 보편을 지향한다.

    정리하면, 인간의 인식이 타락하면 계몽과학과 유기과학 모두 인간을 억압하는 지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측정하고 무게를 다는 보편적 측량도구들(예컨대 “콤파스, 사분의, 눈금자”), 기계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생산도구(예컨대 “베틀,” “물렛가락”)를 통해 유리즌은 자신의 지배를 견고히 하는데(281, 284), 현상적으로는 “어둠을 밝게 비추는” 계몽의 세상을 만드나 자연에 충만한 “강렬한 에너지를 자그마한 콤파스로 압축”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많은 그물망”을 널리 드리워 새로운 억압의 틀을 만든다(284). 블레이크는 유리즌의 이러한 보편주의적-거시적 지배와 함께 개별적 육체에 자신의 권력을 각인시키는 유기주의적-미시적 지배도 부각한다. 유리즌의 과학 권력은 콤파스, 눈금자 등에도 있지만 “식물의 씨앗,” “구근처럼 생긴 뿌리” 속으로도 스며든다고 말한다(284). 즉 유리즌의 지배가 보편적 틀을 만들면서 지배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씨앗,” “뿌리”와 같이 유기체에 각인된 미시적 유기조직을 통해서도 작용한다는 말이다. 유리즌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계에선 로스의 생명창조 활동도 이처럼 지배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방식의 과학적 지배를 통해 과학적 지식 자체가 단일한 패러다임이 아닌 복수의 패러다임을 지닌 지식권력 체계임을 알 수 있다.

    4“바퀴안의 바퀴” 는 초기 유대 신비주의인 메카바 신비주의(merkabah mysticism) 또는 전차 신비주의(chariot mysticism)의 영향을 받은 에스겔이 에스겔서 1장에서 묘사하는 예언적 비전에 등장하는 바퀴의 이미지이다. 에스겔의 전차 신비주의와 블레이크시와의 관계는 Rowland 232-43 참조. 에스겔은 불길의 중앙에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네 인물이 각각 네 가지 형상(사람, 사자, 소, 독수리)을 하고 그 옆엔 바퀴가 놓여 있는 환영을 보는데, 그는 크기가 서로 같은 바퀴 안에 바퀴를 본다. 그런데 일단 움직이면 네개의 바퀴는 제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전진한다.   5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Pope Saint Gregory)는 “바퀴안의 바퀴” 구조를 둘레가 큰 바퀴가 그보다 작은 바퀴를 안쪽에 품은 구조로 해석하여 바깥에 있는 바퀴는 구약, 안의 것은 신약을 상징한다고 이해하는데, 프라 엔젤리코(Fra Angelico)는 이를 발전시켜 1455년에「에스겔의 신비한 바퀴의 비전」(Ezekiel’s Vision of the Mystic Weel)이라는 제목으로 패널화를 그려 그 모양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세와 안젤리코가 해석한 “바퀴안의 바퀴” 라는 개념은 둘레가 큰 바퀴가 작은 바퀴를 품는다는 의미이기에 바퀴를 크고 작은 것으로 서열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다중적, 다방향적 세계관을 표현하고자 한 블레이크의 의도에는 못 미치는 설명방식이다. 게다가 에스겔의 환영에 등장하는 바퀴들이 그 크기가 서로 같다는 점에서도 “바퀴안의 바퀴” 를 바퀴가 교차하면서 맞물려 있는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제임스 네프(James Neff)는 바퀴가 서로 교차하는 모양을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한다. 에스겔의 바퀴에 대한 성 그레고리오 1세와 엔젤리코의 해석에 대해선 리차드 맥고우(Richard McGough)의 글 March 3, 2012 http://www.biblewheel.com/wheel/ezekiel_wheels.asp 참조. 엔젤리코가 그린 패널화는 March 3, 2012http://www.abcgallery.com/A/angelico/angelico71.html 참조. 네프의 바퀴 이미지는 March 20, 2012http://www.rense.com/submissions/ezek.html 참조. 바퀴가 서로 교차한다는 해석을 전제로 하여 에스겔이 당시 UFO를 체험했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Allison 248-52 참조.   6블레이크는 다양한 조어들을 만들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뼈처럼 굳은” 을 뜻하는 “bonified” 라는 말은 자연이나 마음이 역동적 생명력을 상실하여 뉴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예컨대 프랑스 계몽주의와 추상철학의 화신인 라합의 심장은 “뼈처럼 굳어있다” 고 말한다(709).   7빛의 입자설에서 보듯이, 뉴턴은 통과할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비활성화된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가 원자라는 가설을 신뢰하는데, 이런 뉴턴식 원자주의(atomism)에 반대하여 블레이크는 배터리, 에너지, 파동이란 개념에서 보듯이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서로 관통하는 힘들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당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동참한다(Johnson 105-24).

    III. 블레이크의 낭만주의 서사와 “깨어남”의 시학―문학적 뉴턴주의 비판

    과학영역에서 낭만주의적 관점으로 뉴턴주의를 비판했듯이, 블레이크는 문학영역에서도 낭만주의 서사의 측면에서 뉴턴주의 서사방식을 비판한다. 얼트의 표현을 빌자면 뉴턴적 서사는 기원, 단선적 인과관계, 인물의 고정된 정형화에 기초하여 “서사하는 세계의 일관성과 완벽성,” “이미 정해져” “변하지 않는” 폐쇄적 “목적”을 지향한다(Narrative Unbound 4-5). 즉 뉴턴주의 서사는 정형화된 인물이 이미 정해진 텔로스를 향해 나가기 때문에, 인물들의 개별적 특질과 그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을 추상화함으로써 단 하나의 보편적 진실만을 권하는 서사방식이다. 블레이크는 낭만주의적 서사방식을 제안하며 이런 뉴턴주의적 서사를 비판한다.

    과학영역에서 낭만주의 과학 연구 방법론을 제안한 블레이크는 시의 영역에서도 블레이크식 낭만주의 서사를 권장한다. 구체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뉴턴적 서사와는 달리,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미세한 것에 보편적 총체성을 매개하는 낭만주의 서사방식은 18세기 말 이래로 크게 유행한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자아와 타자,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 차이와 동일성, 부분과 전체, 그리고 자아에 내재한 신과 인간의식 밖에 존재하는 유일신 사이의 대립같은 낭만주의적 갈등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시적 상상력은 이런 대립된 개념들을 상호매개하는 지적 능력이 된다. 신앙을 저버리고 “추상철학을 품고 상상력을 파괴하려는” 계몽이성의 신봉자가 된 바벨론의 창녀 라합은 가슴이 “뼈처럼 굳어”(bonified) “음침하고 형체 없이 떠도는 구름처럼 명확한 형체를 띠길 거부하면서” “모든 구체적 형식을 없애려 한다”(723). 블레이크는 에니사먼의 입을 통해 상상적 비전이 결여되면 “삶의 미세한 특질들이 사라지게 된다” (want all the Minute particulars of Life, 734)고 말한다. “영원의 세계에선 모든 특수한 형식은 자신만의 특별한 빛을 띠거나 발현”한다거나(684), “무한자는 규정되고 확정된 정체성 속에만 머무른다”(The infinite alone resides in Definite or Determinate Identity, 687)는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추상하고, 일반화하고, 분류하는” 예술가를 예찬하는 죠수아 레이놀드 경(Sir Joshua Reynolds)의 예술관을 비판하면서 블레이크는 “일반화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특수화하는 것이 유일하게 칭찬할 일이다” 라고 말하면서(451), “진정한 예술”은 “개별적 특질,” “가장 세심하게 차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the most Minutely Discriminate & Determinate)것, 또는 “미세한 명료함”(Minute neatness)(452, 453, 457)을 드러내야 한다고 여긴다. “부분을 희생하게 되면” “전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462). 낭만주의 서사를 종교적 차원에 적용하면, 블레이크는 신을 인간의식 밖으로 밀어내 외적 존재로 대상화하여 보편자인 신성과 특수자인 인간성을 완전히 분리한 자연종교(이신론)를 비판한다. 신을 뉴턴 물리학에서처럼 그저 “뉴턴적 최초의 원동력”(Newtonian prime mover)으로 추상화하는 자연종교에 반대하여, “개체에 구현된 신/그리스도” 라는 “반율법적” (antinomian)사상을 보여준다(Thompson 111). “신은 인간이 돼서 우리에게 내재하고 우리도 그 안에 존재 해야한다”(775). 로스는 에니사먼에게 예수의 현현을 갈구하며 예수는 “단일자이면서도 모든 사람이 되어야 자신 속에 작은 것과 거대한 것 모두를 포용할 수있게 된다”고 말한다(272).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보편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편과 특수를 서로 매개적으로 소통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하면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는 모두 인식론적인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로스가 지적하듯, 타락한 눈으로 보면 “모든 보편적 형식은 황량한 산맥같은 도덕률로 전락하고, 모든 미세한 특질들도 모래알로 굳어진다”(657). 이처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양극단을 부정하고 보편적 특수 또는 특수적 보편을 지향하는 서사가 블레이크식 낭만주의 서사이다.

    뉴턴적 사유에서 낭만주의 사유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전환을 촉발하는 것이 시가 해야 할 역할이다. 블레이크 시를 읽다보면 가장 많이 쓰인 단어들이 ‘깨어나라’(awake) 또는 ‘일어나라’(arise)라는 말이다. 인간의 몸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식물화시키는 베틀(loom of vegetation, 267)이나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생식의 베틀”(Looms of Generation, 483)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마음도 정신적 갱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시는 “뇌성같이 울리는 획기적인 사유 전환”(thunder of thought)을 달성하기 위한“놀라운 글쓰기 예술”이 되어야 한다(621).

    정신적 갱생을 위해선 뉴턴화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마음을 얽어매는 족쇄”(mind-forg’d manacles, 216)를 끊어내야 한다. 보편적 기준을 획일적으로 들이대는 유리슨의 사슬은 내면화되어 “마음을 얽어매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심리는 프로이드식 표현으로 “심리적 장치”(psychic apparatus)인데, 그 나름의 메커니즘이 있다는 면에서 “철저히 뉴턴적 엔진”(a thoroughly Newtonian engine)이라 할 수 있다(Yankelovich and Barrett 56).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유기적 자아”가 역설적이게도 고정된 메커니즘이 있다는 말이다(Yankelovich and Barrett 56).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서는 인간이 타락하면 욕망의 역동적 흐름도 억압적 틀에 갇히게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는 성적 분화가 야기하는 뒤틀린 욕망의 작용을 “질투의 사슬”(chain of jealousy, 307, 309)이라 부른다. 인간의 마음이 “질투의 사슬”이라는 성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그 마음은 뉴턴화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타락하면서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주체로 분화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성적 분화가 지배욕을 유발하여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는 사슬이 된다. 성애는 마음속에 들어 온 “쇠사슬”(iron chain, 685)로 작용한다. 로스와 에니사먼의 자식으로서 욕망과 분노의 화신인 옥은 유리즌에게 자신이 “분노하면 할수록 옭아 매인 사슬에 더 옥죄인다”고 말한다(323). 루바의 여성적 분신이지만 알비온이 임신시켜 유리즌을 낳게 되는 발라는 고통스럽게 루바를 향해 “끝없이 증오하고 끝없이 사랑한다고 공언한다”(286). 특히 블레이크는 훗날 프로이드라면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라 명명했을 그런 욕망구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알비온은 아내 발라에게서 그들의 딸이기도 한“예루살렘의 이미지를 본다”고 술회하는데, 이런 “용납되지 않는 쾌락”(unlawful pleasure)의 대상자인 예루살렘에게 알비온은 적반하장 격으로 가학적 파멸 운운하며 윽박지른다(645). 발라는 그녀 나름대로 자기 자식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한다(644). 이정도면 인간의 “최대의 적은 바로 그의 가족”이라 할 수 있다(676). 블레이크는 오이디푸스적 욕망구도 자체를 인간 내면의 욕망으로 들어온 유리즌 권력으로 여긴다. 유리즌은 자연에 추상적, 보편적 법칙이란 족쇄를 채워듯이 인간의 내면도 오이디푸스적 메커니즘에 갇히게 한다. 블레이크는 이런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혀 생명 창조를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획기적인 갱생이 수반되지 않는 탄생은 남성과 여성으로 “성적으로 조직화되어, 생명이 만들어지지만, 이미 식물화된 상태에서 태어나는” (becomes Sexual & Created and Vegetated and Born) 꼴이 되는데,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성적 기계” (Sexual Machine)로 전락하게 되어 속물적 생명만이 반복되는 것과 같다(674). 성적 지배욕에 갇히게 되면 개개인의 마음을 성적 타자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마음을 감시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유리즌이 주도하는 뉴턴적 계몽권력의 개별화, 미시화라고 할 수 있다. 발라는 알비온의 “감시하는 눈”(searching eyes) 때문에 옥죄인다고 하소연하는데, 그녀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알비온의 “은밀한 영혼을 탐색한 후 그 후미진 곳에서 죄를 발견하여 되돌아가지 못하겠다”고 푸념하면서 그의 마음 구석구석을 훔쳐본다(645). 인간의 마음이 서로 환하게 비춰지면서 상대방에게 읽혀지기에 그 자체가 파놉틱한 시선이 되어 상호 감시하는 매개체로 이용된다. 예루살렘은 상상력을 버리고 “도덕률의 장벽을 쳐서”(646) 처벌하고 심판하는 자가 돼버린 아버지 알비온에게 그가 자기 영혼을 “세세한 결까지 세는 것”에 항변하는데, 마치 영혼을 “태양아래 펼쳐놓아서 그 아래 말리기 위해 내놓은 아마섬유 줄기신세 같다고”괴로워한다(645). 로스는 유리즌과 그 추종자들은 “인간의 두뇌”에 “영속적으로 램프로 매달아 놓아” 세상이 밝아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둠의 고통에 더욱 시달리게 한다고 말한다(272).

    블레이크는 마음이 “질투의 사슬”이라는 뉴턴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인식론적 통합능력을 이루도록 촉발하는 것이 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라고 여긴다. 인간 내면 자체가 성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갇히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통합적 비전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자가 알비온에게 타락의 잠에서 깨어나 “인간과 인간을 섬유조직처럼 촘촘하게 맺어주는 결속력”(fibres of love from man to man)을 이루고 신과 인간이 사실은 “하나”(one)임을 받아들여 “영혼의 병”에서 깨어나라고 권하자, 알비온은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 (We are not One; we are Many, 622)라고 고집하며 다양성 속의 통합을 부정한다. 그는 구원자가 권유하는 통합적 비전, 예컨대 인본주의적 유대감이나 신성과 인성의 결합 같은 것을 “과도하게 활성화된 두뇌의 가장 거짓된 환영”(the most simulative Phantom of the over heated brain)이므로 “위선적 친선”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다(622). 타락한 상태에 있는 알비온은 파편화된 다원화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찬양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적 상상력을 꾸준히 간직하고 있는 로스는 “횃불을 들고 알비온의 내면으로 들어가” 도대체 어떤 “유혹자”가 알비온을 자연종교, 이신론, 그리고 뉴턴식 추상철학에 물들게 했는지 탐구하기 시작한다(656). 로스는 타락 후 추상과 보편주의적 논리에 빠진 알비온에게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개별적 특질이 죽어 있음을 발견한다. 유리즌이 비추는 빛이 개인의 마음을 오히려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면, 로스의 횃불은 알비온의 경우와 같이 절망에 빠진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는 기능을 한다. 마음이라는 내적 공간은 유리즌의 계몽권력이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통합적 상상력을 통해 뉴턴화된 마음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로스에겐 자각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IV. 시와 과학 그리고 낭만주의 지식 네트워크

    블레이크의 위대함은 과학이 시보다 우월하다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시적 비전이 과학적 논리보다 우선하다거나 하는 지식의 서열화를 추구하는 대신 지식사이에 수평적 교류관계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는 시와 과학 중 어느 하나에 절대적인 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실 블레이크의 작품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술적 상상력이 뉴턴적, 죽은 과학을 구원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예술은 선이고 과학은 악이라고 하는 낭만주의적 과학 저주를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8

    블레이크는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지식체계가 서로 학문적 경계를 넘어 상호지시적으로 교류함을 보여주는 서사전략을 즐겨 사용한다.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서 타락 후에 알비온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를 묘사하는 대목을 예로 들어 보자. 알비온이 종교적으론 신성과 인성, 계시적 비전과 이성을 분리하는 이신론자가 되고 도덕적으로는 선과 악을 절대적로 이원화한 윤리체계를 만들어 스스로 “처벌하고 심판하는 자”로 군림하자, 자연 또한 “견고한 바위”(solid rocks)로 대변되는 비활성화된 물리적 자연, 즉 “자명한 사실과 증명이 가능한 진실” (certainty and demonstrative truth, 652)을 발견하기 위한 물리적 공간으로 변질된다고 블레이크는 안타까워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윤리적으로는 선과 악,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독선적인 도덕률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자연 또한 딱딱한 물질들로만 구성된 뉴턴적 공간으로 재편된다. 인간의 안과 밖이 모두 “돌처럼 굳어버리는”(rocky, 652, 656, 658) 상태가 돼버린다. 시 또한 상상적 비전 대신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도식적인 규율 예컨대 “단조로운 운율”로 이루어진 “족쇄로 묶인 시”(Poetry Fetter’s, 621)가 된다.블레이크는 “돌처럼 굳은”이란 용어를 다층적 의미로 사용하여, 과학과 종교윤리 그리고 문학에서 유리즌이 주도하는 뉴턴적 이데올로기 네트워크가 형성됨을 보여준다. 그는 역동적 생명력이 제거된 물리적 자연과 계시적 비전을 부정하여 비활성화된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신을 따르는 이신론적 종교윤리, 그리고 시적 상상력을 거부하고 형식적 규율만을 강요하는 시가 인식론적 밀월관계에 있다고 본다.

    이런 뉴턴적 지배 네트워크와 병행하여 블레이크는 유기주의적 지배 블록을 형상화하는 데도 관심을 가진다.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4장에 보면 로스가 에니사먼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에니사먼이 그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대목이 있다. 블레이크는 이 둘의 성 대결을 묘사할 때 “섬유질”이란 용어를 다층적으로 사용하면서 유기과학이 다루는 몸의 세계와 시가 다루는 욕망의 세계가 서로 연루됨을 보여준다. 에니사먼에 대한 욕망이 깊어지자 로스의 몸은 “몹시 흥분한 섬유질이 혈관에서 싹터 사지의 신경조직으로 뻗어나가면서 번식한다”(732). 섬유질이 자기 번식하여 여러 유기적 조직들을 빠르게 연결한다는 이런 생물학적 표현은 로스가 에니사먼을 성적으로 지배하고자하는 욕구가 지나침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스가 에니사먼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의 섬유질이 몸 속 깊은 곳에 박힌 채 폴립처럼 자기번식하여 “과도하게 자라니까”(overgrown) 에니사먼은 로스의 그런 사랑에 “지친”(overwoven) 상태가 된다(732). 로스는 남성과 여성이 “섬유질처럼 촘촘히 연결된 형제애”(Fibres of Brotherhood)에 기반을 둔 사랑, 즉 “섬유질처럼 촘촘히 결속된 사랑”(Fibres of Love, 622)을 이루어야 한다고 관념적으론 알고 있으나, 타락한 세상에서는 이와는 달리 남성은 여성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결속을 추구하거나 여성이 남성의 “지배의 그물망”(fibres of dominion) 속으로 편입되길 바란다(733). 블레이크는 섬유질이란 개념을 통해 그것이 과도하게 성장하면 무질서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기체가 지닌 위험성을 드러내고 더불어 자제력을 잃은 성적 지배욕의 과잉 또한 표현한다. 그래서 섬유질은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도덕적-성적 의미를 띤다. 이처럼 블레이크가 실, 천, 베틀 같은 용어들을 통해 “다층적으로 짜인 상호 긴밀한 환유적 의미망” (multi-seamed fabric of interwoven metonymies)을 만드는 것은 “환유와 은유, 기표와 기의, 보조관념과 원관념,”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객관적 실재와 그것의 언어적 재현,” “존재와 사유”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효과를 유발한다(Essick 255-57). 지식의 네트워크라는 측면에서 보면 섬유질이란 말의 다층적 언어 사용은 블레이크가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지식의 상호지시적 관계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블레이크는 뉴턴주의적-거시적 지배망과 유기주의적-미시적 지배망에 대항하여 진정한 생명의 네트워크를 원한다. 그는 아홉 가지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발라 또는 네 조아들』에서 첫 번째 부터 여덟 번째 에피소드까지는 주로 네 조아들에게 나타난 타락의 양상들을 묘사하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아홉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들에게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 일어나 구원에 이르는 사건을 묘사한다. 그런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블레이크는 자신이 구상하는 진정한 낭만주의 시학과 낭만주의 과학 네트워크가 어떠한 것인가가 잘 드러낸다. 옥의 열정, 타마즈의 분노, 로스와 에니사먼의 자유에 대한 동경을 수용하면서 유리즌은 계몽 권력을 가차 없이 휘둘렀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자기갱신적 비전”(selfrenewing vision, 362)에 도달한다. 우소나는 그의 여성적 분신인 에니사먼과 화해하고 자신의 유령이었던 로스와도 재결합하면서 다시 상상적 힘을 발휘한다. 유리즌과 우소나/로스가 이처럼 통합적 비전을 발휘하여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 전환을 이루는 것은 뉴턴 과학에서 “감미로운 과학”(sweet science, 379)이라는 낭만주의 과학 패러다임으로 이전하는 것과 병행한다. 타마즈가 자기 아들 로스에게 유리즌이 조성하는 죽음의 세계, 즉 “뼈처럼 굳게 하고” (bonify, 299), “화석화하며”(petrify, 301), “돌처럼 딱딱하게 만드는”(stonify, 305) 타락한 뉴턴적 세상에 맞서 생명의 용광로를 건설하도록 제안할 때(301), 그의 제안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체성의 저변에 흐르는 유동적 에너지나 유기적 생명력을 탐구하는 “감미로운 과학”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타락했을 때는 로스도 “시간, 요일, 년” 등 수학적 시간 분할에 동참하고 “제분소,” “바퀴”(302)로 대변되는 기계적 재생산 도구 생산 등 뉴턴적 기계주의를 오히려 조장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로스의 통합적 사유능력이 회복되자 “감미로운 과학”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그의 시적 상상력 또한 활성화된다. 이때 로스가 추구하는 감미로운 과학과 시적 상상력은 서로 소통하게 된다. 일반화하여 말하면, 낭만주의 과학과 낭만주의 시학은 서로 전문화의 길을 밟지만 각 지식체계에 고유한 언어로 반뉴턴적 낭만주의 지식을 인코딩하면서 서로 교류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블레이크는 시와 과학을 관통하는 낭만주의 지식 네트워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예술과 과학을 일반화하는”것(Generalizing ART & Science, 673)은 “나쁜 예술과 나쁜 과학”(Bad Art & Science, 671)에 빠지는 것이므로, “미세한 특질”을 보편에 매개시키는 연구방법론을 통해 시와 과학 모두가 반뉴턴적 낭만주의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영역에서 물리적 세계가 활성화(animated)되어야 함은 시의 영역에서 깨어남(awake), 일어남(arise), 또는 갱생(regeneration)의 메시지로 나타나 서로 네트워크화된다. 현대 과학에서 쓰는 용어로 표현한다면 우리 몸에서 생명의 성장을 총괄적으로 기획하는 DNA “프로그램”과 통합적 비전을 주도하는 시적 “상상력”이 인식론적으로 공모적 관계에 있다(Hilton, “Being Prolific”(419). 이처럼 유기적, 통합적 사유방식은 문학의 전유물만이 아니라 유기과학에서도 핵심적 화두이다. 따라서 문학이 추구하는 시적 상상력과 생명과학이 추구하는 유기적 신체 탐구는 서로 낭만주의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8블레이크가 뉴턴 과학을 저주한다고 보는 관점은 마조리 홉 니콜슨(Majorie Hope Nicolson)이 쓴『뉴턴은 뮤즈를 원한다』(Newton Demands the Muse)라는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니콜슨은 18세기 초, 중반기에 문학가들이 뉴턴의 빛이론과 색채론을 얼마나 신성시하였는지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논증하고 있다. 「아이작 뉴턴 경에 대해」(“On Sir Isaac Newton”)라는 시에서 당시 시인인 리처드 글로버(Richard Glover)는 “뉴턴은 뮤즈가 필요하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기꺼이 자연에 대해 놀랄만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고 여긴 뉴턴의 사상을 알리는 전파자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이처럼 낭만주의 시대 이전에는 과학과 문학은 대체로 잘 어울렸다. 그런데 니콜슨은 블레이크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낭만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뉴턴의 이러한 신격화가 그에 대한 저주로 바뀌기 시작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는「에필로그: 뉴턴에 대한 시적 저주」(Epilogue: The Poetic Damnation of Newton)에서 블레이크의 뉴턴비판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165-74 참조.

    V. 블레이크와 포스트모던주의―낭만주의 네트워크를 넘어서

    이전 장에서는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뉴턴주의를 비판했는데, 이번 장에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낭만주의적 지식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블레이크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뉴턴주의를 비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을 통해 낭만주의적 사유를 비평할 수 있게 하는 인식 틀 또한 제시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그는 코울리지(S.T. Coleridge) 같은 낭만주의자와 구분된다. 코울리지는 유기적 형식이 기계주의적 형식보다 우월하다고 하면서 유기 주의를 찬양한다.9 유기적 형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뉴턴과학 같은 기계주의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면에서는 코울리지와 유사하지만, 블레이크는 그와는 달리 낭만주의 사유체계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상대화시킨다. 블레이크 시의 포스트모던적 속성에 대한 논의는 적지 않은 비평가에 의해 논의되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가 뉴턴주의와 포스트모던주의의 대립이라는 이원적 비평모델에 기초하여 뉴턴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각이 어떻게 낭만주의 사유를 비판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10『발라 또는 네 조아들』과『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분화』에서 블레이크가 염두에 둔 포스트모던 사유를 필자는 낭만주의 사유구조 자체가 반복적으로 분화된 결과라는 관점에서 접근 하고자 한다. 낭만주의 사유구조는 특수가 보편을 닮고, 부분이 전체를 닮으며, 차이 속에서 동일성이 내재하는 유기적 형식이다. 그런데 반복이 불가능하고 유일무이하다고 간주되는 이런 유기적 구조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낭만주의적 사유에 내재한 구심적 중심 자체가 다원화된다. 이와 같이 비가역적 유기구조가 연속하여 분화된 사유체계를 뉴턴주의와 낭만주의 모두로부터 차별화하여 포스트모던 사유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포스트모던 시각에서 낭만주의 사유체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어떤 것인 지에 대해 먼저 과학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해 보자. 블레이크는 생명과학이 태동하는 근대 시기에 이미 포스트모던형 생명에 대해 주목한다. 폴립이란 생명체를 비판하면서 유기체는 언제든지 통제 불능의 기형체로 변질될 수 있다고 본다. 폴립은 “히드라 같아서, 수천가지 조각으로 나뉘고 다양한 각도로 절단해도 생존할 수 있으면서 절단된 각 파편은 그 자체로 독립된 동물”이다(Hilton 87에서 재인용). 반복 불가능하여 유일무이하다고 간주되는 생명체가 연속 분화되니 역설적이게도 폴립의 경우처럼 마치 기계적으로 그것도 대량으로 자기 복제되듯이 무수한 유기체 다발이 만들어진다. 블레이크는 자기복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유기체와 폴립처럼 무한증식이 가능한 유기체를 범주적으로 구별한다. 이러한 구분은 그가 포스트모던 과학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지만 유기주의 과학과 구분되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 패러다임으로서 포스트모던 과학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유기체의 자기복제라는 개념은 20세기 말 이후 생명과학의 쟁점 중 하나인데, 유기과학이 등장하는 근대 초기에 블레이크는 이미 이런 현상에 주목했다는 면에서 시대를 앞서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블레이크는 포스트모던 과학 패러다임을 무턱대고 찬양하지는 않는다.

    뉴턴적 계몽주의, 섬유질로 구성된 유기적 신체, 폴립같은 자기복제형 기형체는 블레이크 신화체계에선 역동적 생명력이 결여된 존재들의 여러 양상들이다. 블레이크 시에는 유독 사슬(chain), 섬유질(fibre), 폴리포스(polypus) 같은 용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사슬이란 단어는 자연에 보편주의적 질서를 사슬처럼 얽어매는 뉴턴적 계몽과학 체계를 상징하고, 섬유질이란 개념에는 섬유질로 구성된 유기체를 통제함으로써 유리즌의 권력이 개별화되고 미시화되는 현상을 함축하며, 폴립은 유기체의 생명력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자기통제력을 잃고 무한 번식하는 기형체로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폴 마이너(Paul Miner)의 표현을 빌자면, 생명체는 언제든지 잘 짜인 유기적 구성물인 “섬뜩한 균형”(fearful symmetry)에서 “섬뜩한 불균형을 유발하며 자기증식하는 괴물” (proliferating monster of fearful asymmetry, 198)로 갑작스레 변형될 수 있다. 유기체의 최소단위인 섬유조직도 역동적 생명력과 결합되지 않으면 식물같이 죽은 유기조직일 뿐이듯이, 폴립도 현상적으로는 아무리 번식이 왕성하다고 하더라도 유기체가 갖추어야 할 자기 조절 능력이 결여된 문제적 생명체이다. 오프레이 드 라 메트리(Offray de La Mettrie) 같은 유물론적인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폴립처럼 자기조직화와 자기변화 능력을 가진 생명체가 다수로 분화되고 그 분리체 각각이 독자적 생명체가 된다는 것은 생명체가 새로 형성될 때 마다 새로운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생명의 원동력이 육체에 물질화됨을 입증한 것으로 여긴다(Vartanian 261-78).11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무한복제되는 폴립을 정신이 육체에 종속됨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환호하지만, 블레이크는 이와는 반대로 폴립은 생명체가 갖추어야 할 자기조율 능력이 결여된 식물화된 육체로서 기계적으로 무한 반복되는 기형체라고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블레이크는 폴립을 뉴턴주의적 계몽과학이 구현하는 기계적 반복의 논리와 겹치게 만든다.

    블레이크는 타락한 여성을 대변하는 라합(Rahab)과 터자(Tirzah) 그리고 알비온의 딸들을 통해 뉴턴주의적 계몽 이성과 생명력이 결여된 섬유조직, 그리고 통제불능의 폴립이 서로 깊이 연루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라합은 바벨론의 창녀이고 터자는 그녀의 딸이다. 블레이크는 “라합은 볼테르를 만들고 터자는 루소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506) 라합과 터자를 계몽주의 사유체계와 깊이 관련 시킨다. 이들은 또한 유기체의 각 기관들을 구성하는 섬유조직을 기계적으로 연결만 하면 유기체가 만들어진다고 여긴다. 예컨대, 터자는 “신경섬유다발을 흰두뇌에 연결하고,” “혈관을 붉게 뛰는 심장에 연결만하면”(501) 생명이 탄생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유물론적 생명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라합과 터자의 조종을 받는 알비온의 딸들도 그들처럼 계몽과학적 인식 프레임에 갇혀 있다. 알비온의 딸들은 “황량한 벌판 같은 뉴턴과 로크의 사상을 토대로 무게재고 거리 측정”(Weight & Distance in the Wilds of Newton & Locke)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661). 그런데 흥미롭게도 블레이크는 계몽이성을 구현하는 알비온의 딸들을 폴립의 이미지와 겹치게 한다. 그들은 바윗돌에서 섬유질을 잣고, 각자의 남자 짝을 만들어 번식하는데, 블레이크는 그들의 결합을 “생식이라는 거대한 용종”(Mighty Polypus of Generation, 704)과 같다고 비판한다. 블레이크에게 폴립이란 존재는 무한 번식하는 유기체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용종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폴리퍼스”를 기형적 유기체를 지칭하면서도 동시에 “용종”이나 암 덩어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 알비온이 그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은 또다시 그 후손을 낳는 일은 식물화된 죽은 신체가 무수히 생산되는 과정인데, 이런 종족 번식은 무의미한 “생식”의 연속이기 때문에 용종처럼 불필요하고 파괴적일 뿐이다.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게 하거나 숫자로 추상화하여 자연을 재편하는 뉴턴적 계몽과학과 역동적 생명에너지가 결여된 식물화된 섬유질, 그리고 폴립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생명체의 위험성은 인식론적으로 서로 교류한다.

    블레이크는 과학영역 뿐만 아니라 시의 플롯을 전개할 때도 낭만주의 서사형태가 미분화된 포스트모던적 서사를 구사한다. 폴립의 자기 분화와 유사하게,『발라 또는 네 조아들』에 보면 알비온의 타락으로 촉발된 네 조아들의 이야기들이 성적 분화과 화해라는 테마가 같음에도 차별적 반복의 이야기를 만들어 결과적으로 비선형적이며 탈중심화된 서사형태를 낳는다. 그래서 블레이크 시의 탈중심화의 문제 또한 낭만주의 서사의 미분화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12 폴립이 유기체가 미분화된 결과라는 면에서 포스트모던 생명으로 규정할 수 있듯이, 시에 나타난 탈중심적 서사방식도 낭만주의적 서사의 미분화의 결과로 나타난 포스트모던 서사로 볼 수 있다. 블레이크는 네 조아들과 그들의 여성적 분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적 갈등을 전개할 때, 갈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알비온의 이야기를 주된 플롯으로 하고 로스와 에니사먼, 타마즈와 에니온 등 네 조아들과 그 여성적 분신들과의 성 전쟁을 부차적 줄거리로 주변화하여 이 이야기들을 알비온이 주가 되는 중심플롯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에피소드들 사이에 수직적 서열구조를 만들지 않는다. 예컨대, 시의 첫 번째 밤이라고 부르는 첫 째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알비온의 타락에서 플롯을 시작하지 않고 타마즈와 에니온의 갈등으로 시작하여 사건의 기원이 되는 알비온의 권위에서 벗어난다. 더 나아가 블레이크는 알비온의 타락이라는 공통 테마를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 짓지 않고 유리즌과 로스 등 서로 대립하는 조아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주제를 반복하도록 하는 서사형태를 취하여, 에피소드들이 서열화되는 대신 수평적으로 연상 고리를 이루며 연결되도록 하였다. 타마즈/에니온, 로스/에니서먼, 유리즌/아하니아 에피소드들은 사실 알비온의 타락이라는 사건에서 촉발되어 나온 이야기들이지만, 블레이크는 이 에피소드들이 각각 독자적인 목적을 지녀 다방향적으로 나가도록 기획한다.

    플롯 전개 뿐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기분화 전략을 통해 자아를 탈중심화한다. 로스는 끝없이 스스로 분화되어 수많은 자식들로 번창하는데 이처럼 자식들이 “다수로 다원화”(multiplication of their multitudes)되는 것은 근심과 걱정의 근원이기도 하지만(350), 동시에 억압적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타마즈는 유리즌의 유령을 제거하려고 “그를 뿔뿔이 분리시킨다”(332). 우소나의 유령은 죽은 자들의 유령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며 이를 중지하기 위해선 그들을 분리하여 대립자(counterparts)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330). “신의 왕관을 찬탈하려고”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알비온은 그들을 “남성적 형태와 여성적 형태로 분화한다”(719). 블레이크의 인물분화 방식은 알비온이 네 조아들로 분화되고 다시 그 여성적 분신들로 재분화되는 예에서 보듯이 타락이 깊어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자아라는 중심화된 실체를 분산시켜 억압적 상황을 극복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자아를 연속적으로 분화시켜 인물의 독자적 정체성 형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것은 타락에서 구원으로, 반대로 구원에서 타락이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역동적 과정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블레이크 인물재현 전략의 일환이다. 블레이크는 마지막 심판의 의미를 성찰하며 “인간은 그 누구든 잘못된 인식을 거부하고 진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마지막 심판은 그에게 다가온다” (Whenever any Individual Rejects Error & Embraces Truth a Last Judgment passes upon that Individual, 613)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언제든지”(whenever)라는 말은 구원이 “이번이 마지막”(once and for all)이란 의미가 아니라 “계속 반복하여”(over and over again) 일어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Damrosch 344). 이런 주장에는 반대로 구원에서 타락으로 변질되는 사건도 “계속 반복하여”일어날 수 있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인물들이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는 것은 구원과 타락이 연속하여 반복되는 과정과 병행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차별적으로 반복되는 에피소드와 더불어 인물들의 자기분화는 블레이크식 포스트모던 서사전략이라 볼 수 있다.

    블레이크는 궁극적으로 뉴턴적 사유와 낭만주의 사유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유가 서로 모순적 공존을 이루는 과학-시학의 지식 네트워크를 꿈꾼다. 뉴턴적사유는 특수를 제거하고 보편적 법칙만을 수립하려 들기 때문에 차이를 억압하고 동질화시키는 인식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낭만주의 사유는 부분과 전체, 구체와 보편, 차이와 동일성을 상호매개적으로 본다. 반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유기적 구조 자체가 연속 분열되어 자기반복적, 프랙탈 구조가 형성될때는 포스트모던 사유라고 부를 수 있다. 뉴턴주의에서 낭만주의, 그 다음 포스트모던주의로 이전하면서 보편적 형식이 개별화되고 미시화되는 정도가 깊어진다. 그런데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뉴턴주의를 비판하고, 포스트모던 시각에서 낭만주의 사유를 재조명하면서 블레이크는 인식론적 보편주의를 비판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하여 포스트모던주의를 다른 패러다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는 인간이 인식론적 타락에서 벗어나면 서로 상이한 비전을 제시하는 지식체계들이 실은 사물을 구성하는 다층적 양상들 중의 한 측면을 재현한 것이므로, 특정 사유체계를 범주적으로 거부하기 보다는 이들 사이에 모순적 공존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9코울리지의 유기체관은 1848년에 출간된 그의 역작『생명에 관한 좀 더 포괄적 이론 형성을 위한 제안』(Hints towards the Formation of a More Comprehensive Theory of Life)에서 심도있게 논의되는데, 이에 대한 비평은 졸고 Lee 191-98쪽 참조.   10얼트는 뉴턴적 서사(Newtonian narrative) 와 반(反)뉴턴적 서사”(anti-Newtonian narrative)라는 이원화된 분석 패러다임으로『발라 또는 네 조아들』을 비평한다. 뉴턴적서사는 기계적 인과성에 기초하여 이미 정해진 단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서사방식이다. 반면에 반뉴턴적 서사는 뉴턴적 서사가 지닌 “단일 비전”에서 벗어나 “기원의 허구,” “단선적 인과성의 허구“를 드러내면서 탈중심적, 탈단선적, 다층적 비전을 제시하는 서사방식이다(Narrative Unbound 6-7). 데이빗 벌취(David M. Baulch) 또한 얼트의 분석 모델을 반복한다. 벌취는 과학 분야에서 뉴턴적 단일세계에 도전하여 다중 우주(multiverse) 또는 평행 우주(parallel universe) 라는 개념이 생겼듯이, 문학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는 뉴턴적 서사구조에 대항하여 “다원적 세계관”(a many worlds viewpoint)을 펼치는 “포스트-뉴턴 서사”(post-newtonian narrative)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56-63; 68-73).“ 뉴턴적,” “반뉴턴적”이란 말은 쓰지 않지만, 캐스린 프리먼(Kathryn S. Freeman)과 조지 앤소니 로소(George Anthony Rosso)같은 비평가들도 블레이크 시는 기원과 종결이 존재하는 단선적 플롯과 논리적 인과관계등 획일적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음을 부각한다(Freeman 35-65; Rosso 64-92). 그런데 이들 비평가들의 분석모델이 전제로 하는 “뉴턴적” vs “반뉴턴적” 이라는 이원적 구도에서는 낭만주의 서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 그것이 뉴턴적 서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포스트모던 서사와는 또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블레이크가 그려내는 세 가지 패러다임의 충돌이란 테마를 잘 포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반뉴턴적 서사“나 ”포스트-뉴턴적 서사“ 라는 개념은 이 글에서 낭만주의 총체성이 미분화된 결과로 정의되는 포스트모던 사유의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므로 포스트모던 서사라는 범주에 포함하겠다.   11아브라함 트렘블리(Abraham Trembley)가 1740년 폴립을 발견한 이래 히드라처럼 자기 증식하는 이 생명체는 라 메트리, 볼테르, 디드로를 포함한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적 계몽주의자의 생명관을 논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면서 “1740년대 자연사 연구 분야에서 가장 매혹적인 둘도 없는 호기심”이 된다(Vartanian 260).   12블레이크 시의 탈중심적 서사구조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석 10 참조.

    VI. 나가는 말

    블레이크는 지식이 전문화되기 시작하는 근대 사회 태동기에 이미 서로 다른 지식체계사이에 네트워크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사슬(chain), 식물같은 상태(vegetation), 돌같이 굳은(rocky), 섬유질(fibres), 살아있는 형식(living form), 폴리퍼스(polypus) 같은 용어들을 과학적이며 동시에 문학적 의미를 지닌 말로 다원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다중적 의미화는 전문화된 지식체계 사이의 상호지시적 교류관계가 있음을 부각하고자 하는 블레이크식 언어 전략이다.

    시와 과학이라는 두 지식체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소통에 기초하여 블레이크는 서로 상이한 지식 패러다임들 간의 충돌을 시화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뉴턴적 사유, 낭만주의 사유, 포스트모던 사유라는 세 가지 프레임으로 이들 지식 패러다임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논하였다. 블레이크는 뉴턴적 계몽과학이 부여하는 단일적인 비전만이 강요되면 이런 획일화는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뉴턴의 추상적 보편주의에 맞서 낭만주의 인식모델을 제안한다. 보편과 특수, 부분과 전체, 변화와 지속, 그리고 차이와 동일성 사이의 갈등을 통합하여 구체적 보편, 유기적 총체성, 역동적 균형, 그리고 차별적 반복을 추구하는 사유형태이다. 유기주의 과학과 낭만시학은 현상적으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두 지식체계 모두 이런 낭만주의적 모순에 기초하기에 서로 인식론적으로 통한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낭만주의적 사유양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포스트모던 관점에서 낭만주의 사유를 재평가한다. 과학영역에서 폴립이라는 자기번식하는 유기체를 부각하고, 문학영역에선 차별적으로 자기반복하는 네 조아들의 이야기들을 서로 비선형적이며 탈중심적인 형태로 배열한다. 블레이크의 시에는 이처럼 뉴턴적, 낭만주의적, 포스트모던적 사유라는 다양한 지식체계들이 충돌하고 공존한다.

    블레이크는 뉴턴주의의 문제를 유기주의적 관점에서 보고 또 유기주의를 포스트모던적 시각에 바라보지만 이들 사이에 모순적 공존관계가 있기를 바라기에 어느 사유방식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보지는 않는다. 뉴턴주의와 유기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던주의라는 패러다임들이 제각기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는 지식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이한 지식체계들이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보기에 블레이크는 시와 과학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서로 다른 인식 패러다임의 벽을 넘나드는 지적 여행을 끝없이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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