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ospitalite inconditionnelle et l’alterite Chez Derrida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와 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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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Cet article est une tentative de mettre en lumière l’hospitalité chez Derrida. Tout d’abord, notre recherche consiste à mener la comparaison entre Kant et Derrida autour du terme de l’hospitalité. Pourz Kant, l’hospitalité est un concept de commerce. Autrement dit, accueillir l’autre, c’est le laisser venir à la condition qu’il respecte l’ordre du pays accueillant et qu’il demeure pendant certaine periode au lieu de s’installer. Par contre, chez Derrida l’hospitalité est caractétisée par son exception: il faut accueillir les étranger sans le critère que le sujet hospitalier pour son tour impose en vue de les sélectionner. En tranférant tout le droit de souverainté à la main de l’Autre, le sujet devient démantelé. Par cette ouverture inconditionnelle sur l’autre, le sujet ne saurait garder le pouvoir souverain et se laisse ouvrir à l’autre sans protection et limite. Comme on l’ a vu, l’hospitalité inconditionnelle n’est pas le concept politique et institutionnel qui nous permet de réaliser l’acte hospitalier et qui s’étabit sur le fond du principe et de la raison. Au contraire, pour Derrida, l’hospitalité inconditionnelle est exposée à l’altérité qu’on ne saurait contrôler. En ce sens, cette hospitalité apparaît incapable de distinguer l’étranger digne de recevoir l’hospitalité et l’ennemi déguisé. Pour Derrida, cette indétermination veut dire que l’hospitalité ne serait pas considérée sans l’hostlité, et il faut risquer de tomber dans la perversion et la trahison sans se réferert à ma bonne volonté de l’hospitalité. Pour cette raison, Derrida, mettant à distance la position de Levinas à l’égard du statut du tiers, considére que l’hospitalité risque de se convertir toujours en perversité dans la proximité. Par contre, on doit remarquer que pour effectuer l’hospitalité le Moi n’a aucun appareil de la surveillance afin de se protéger. C’est pourquoi Derrida, lui-m̂eme, lorsqu’il décrit l’hospitalité, la caractérise comme un événement impossible. Et pourtant malgré cette impossibilité ou dans cette impossibilité, il y aura une possibilté de l’altérité qui ne se réduit pas à la prise du M̂ê me et au pouvoir souverain du sujet. Ainsi, le sujet, pour sa part, doit prendre le risque de tout perdre et de se laisser attaquer. C’est paradoxalement à travers ce risque que le sujet ayant tendance de se renfermer et de réapproprier l’altérité dans son pouvoir souverain peut se laisser ouvrir à l’autre sans retour sur sa propre noyau.


  • KEYWORD

    hospitalite inconditionnelle , le tiers , alterite , Deconstruction , Messianisme

  • 1. 들어가는 글

    세계화로 인해 인적, 물적 교류가 증가하면서 현대 사회는 타문화와 교류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이 때문에 근대적 국경선의 의미는 점차로 약화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계의 확산으로 인해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남반구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북반구로 이주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런데 이런 이주의 이면에는 상반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다. 먼저 극심한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을 피해서 좀 더 나은 삶이나 노동의 환경을 찾으려는 남반구 시민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있는가 하면, 북반구의 입장에서는 저개발국가의 국민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는 표면적 주장과 달리, 실상에 있어 선진국이 처한 여러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저임금의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 말하자면, 북반구의 노동인구가 급감함으로써 자국에서 노동인력을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부족분을 이민자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충하면서, 동시에 외국인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을 최대한 이용하여 저임금, 노동착취를 자행하곤 한다. 그래서 이주민은 자신의 고향과 그가 터하고 있던 생활공간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어려움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 정치적으로 거주자이나 시민권이 없다는 점에서 차별과 배제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민자들은 아감벤이 말했듯이 법치국가 내에서 ‘법의 보호 바깥에’ 있는 일종의 ‘벌거벗은 생’1) 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2)

    또한 세계화가 가져온 인적이거나 물적인 유동성의 확대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상호이해의 증진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는 더욱 더 적대적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9.11사태 이후에 나온 애국법처럼 이방인을 잠재적 범죄자로서 취급하여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실정이며, 안보나 치안이 정치의 중심 담론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방인들은 기껏해야 시민권을 갖고 있어도 이류시민으로 취급받는 실정이다.3) 이처럼 이방인이라는 지위는 늘 불안정하며, 사회적 정치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머물게 되어, 종종 정치적 희생양이 되곤 한다. 말하자면 이방인은 그 존재 자체에 있어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데리다의 타자론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전복적으로 사유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특히 근대국민국가가 갖는 주권성의 이념이 여러 문제를 드러내는 시점에 주권성의 한계너머에서 타자와 소수자 그리고 이방인등과 같은 존재를 그의 사유의 중심주제로 삼는 다는 점에서 현실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물론 그의 사유와 시대와 공명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이 시대의 반영물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는 기존의 철학적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좀 더 급진적으로 이방인 혹은 타자성에 대한 사유를 극한에 까지 밀고 나아간다. 이런 극단성의 형태가 바로 절대적 타자 개념이다. 그러기에 데리다의 타자는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사유해 오던 타자, 예컨대 다른 자아와 같은 주체중심적 사유의 틀 넘어서며, 동시에 시민권의 유무, 제도적 차별의 유무등의 정치-제도의 차원너머에서 타자를 사유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그의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의미하며, 이점에서 타자의 환대도 이런 절대적으로 다른 자, 주체로 환원불가능한 이질적인 것의 환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를 단지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질성의 출현의 가능성에 대한 초월론적인 차원에서 검토한다.

    이와 같은 데리다의 독창적인 사유를 따라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자는 그의 타자론에서 환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다른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지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왜 그가 타자를 절대적 타자로 규정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은 데리다 뿐 아니라 레비나스도 사용하고 있기에, 데리다는 어떤 점에서 레비나스와 사상적 유사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 두 사상가들이 의견의 불일치하는 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필자는 무엇이 데리다의 사유의 독창성인지 해명할 것이다.

    1)아감벤의 ‘벌거벗은 생’은 법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현대 법치주의 국가의 시민적 권리에서 배제된 이방인들, 좀 더 구체적으로 불법이민자들은 이미 ‘법의 외부’에 있는 자들이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 박진우역. 새물결, 2008.)  2)이런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최근에 나온 발리바르, 『우리, 유럽시민들의 유럽: 세계화와 유럽민주주의의 재발명』, 진태원역, 후마니타스, 2010을 참조할 수 있다.  3)양창렬, 「시테의 야만인」,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그린비, 2007, 2장에서 경찰들이 방리유에 사는 젊은이들의 시내중심부 접근을 금지하는 등 기본적인 통행권조차 박탈하거나 제지하는 것에서 시민증을 가진 청년들이라도 그들의 출신성분과 인종에 따라서 제일시민과 이류시민으로 차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데리다의 환대 개념

    데리다는 환대라는 주제를 통해서 타자에게 열림의 양상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의 사상적 궤적을 살펴보자면, 초기 데리다는 주로 전통철학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전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후기에 와서는 환대, 책임성, 그리고 도래하는 민주주의와 정의와 같이 내부의 해체라기보다 오히려 외부의 침입 혹은 내부가 외부에 열릴 가능성에 대해서 천착한다.

    그렇다면, 이 외부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는 그 자체로서 설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 타자로서 외부는 먼저 내부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차이로서 사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차이 자체가 현전화된다면, 이미 내부화된 외부이기에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타자는 그 자체로 현전되지 않는다.4) 대신에 현전되지 않기에, 차이는 동일자의 담론 내에서 포착되지 않지만, 담론이나 주체와 관련은 맺고 있다. 데리다는 이런 관련을 흔적(trace)이라고 부른다.5) 데리다는 『여백들Marges』의 「차연Différance」 장에서 비현전성에 대한 사유를 흔적과 연관 지어 발전시킨다. 즉 현전성 자체를 비판하기에, 차이도 그 자체로서 나타할 수 없다. 오히려 차이 자체가 그 자신과 차이를 가져야하며, 이런 차이의 차이는 비현전성으로 인해 흔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나아가 이런 흔적조차도 그 자체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일종의 차연(différance)과 같이 흔적의 흔적(la trace de la trace)이 되어, 그 자신의 지워짐 속에서 흔적(la trace de l’effacement de la trace)을 남기게 된다.6) 그래서 흔적은 고착화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덧입혀져서 흔적을 남기는 과정으로서 사유된다. 이처럼 차이와 차이의 흔적의 개념 등은 모든 절대적 외부, 타자 등이 그 자체로서 나타나기 보다 자신을 은폐하면서, 현전화되지 않는 흔적 속에서 알려짐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제시된다. 한편 현전화될 수 없는 절대적 외부가 이런 내부 혹은 동일자에 의해서 현상화되고 주제화되는 순간, 그것의 외재성은 동일자의 표상체계에 포섭되거나 동일자의 질서에 편입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동일성의 표상에 포섭되지 않는 절대적 외부와의 접면을 사유한 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인 사유의 모티브이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방식은 그의 환대라는 주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선 절대적 차이를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와 기존의 환대이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환대이론이 단지 조건부 환대와 명확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7) 기존의 환대이론은 환대하는 자 쪽에서 환대받는 자, 이방인을 수용할 때, 이런 환대를 받을만한 자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조건을 제시하시는 것이 통상적이다. 칸트의 환대이론이 그와 같다. 칸트는 본래 어떤 사람도 지구상의 특정 지역에 대해 남보다 특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국경을 무시한 자유로운 거주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별국가의 주권성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이방인이 다른 국가나 거주지를 방문할 권리만을 인정한다. 칸트는 이런 제약 아래에서 환대를 도입한다. 칸트의 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주권국가는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 위에서 공간을 점유하는 영토의 확립은 단지 역사적 산물이다. 그럼에도 일단 주권국가가 성립된 이상, 이들 국가들의 주권성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일정정도 방문을 통해 교역을 하는 수준에서 환대는 허용된다. 이 때문에 칸트의 환대는 타국가에 대한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무분별한 이주자체는 금지하면서도 일정 기간 내에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것만을 허용한다. 결국 칸트의 환대는 “낯선 땅에서 적대적으로 대우받지 않을 권리”8)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적극적으로 이방인을 받아들여 공존하기보다 그들을 억압하지 않으며, 적당한 한도에서 그들의 통행권을 보장하는 정도에서 허용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환대는 이방인이 이주하여 함께 공존해야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배제한다. 환대국가의 주권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언제나 환대의 권리는 환대자가 결정하게 되고, 결국 관용의 수준에서 환대는 다뤄진다.9)

    반면 데리다는 이와 같이 제한된 의미의 환대를 거부한다. 그는 환대를 절대적 타자의 수용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칸트식의 환대는 이미 환대하는 자 쪽에서 일정한 기준과 제한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이방인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러기에 환대의 권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환대받을 만한 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피환대자는 선택된 자에 불과하다. 즉 환대는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환대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을만한 자, 즉 환대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자로 한정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격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의 신분과 국적, 출신지 등등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에 반해 데리다는 이런 조건부의 환대를 넘어서는 절대적 환대를 제안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환대는 차이의 해체론이라고 할 만하다. 즉 차이를 말한다는 것은 A≠∼A와 같은 형식논리적 모순율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의미에서 차이는 ‘나’와 무한히 다르기에 그 다름의 의미를 완전히 고정할 수 없는 존재에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이 차이의 지속적인 운동을 초기에는 차연으로 설명했다면, 환대의 주제와 관련해서 좀 더 사회-정치적 입장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로서 설명한다. 그러기에 법과 제도가 제시하는 환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10) 일반적으로 환대는 환대의 법이나 규칙으로 한정되고, 이런 규칙이나 법은 환대를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환대가 함의하는 타자의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보편적인 범주 내에서 선택될 만한 자로 환대의 대상을 제한한다. 이는 주체가 결코 타자에 대한 자신의 주권성을 포기하지 않음을 뜻한다. 반면에 무조건적 환대는 이런 주권성에 대한 포기이며, 그러기에 타자의 정체성과 기원에 대해서는 일종의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내린다. “타자는 […] (체류증을 갖고 있건 없건 간에) 이민자이며, 망명자, 난민, 조국을 빼앗긴 자(sans patrie), 무국적자(sans-Etat) […] 등이다.”11) 이 때문에 환대는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넘어서는 윤리적 개념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무조건적 환대는 결국 주체의 주권성을 해체하기에, 주체는 자기 집에서 조차 주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된다.

    주인과 손님사이의 관계를 좀 더 심화하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어 hôte의 양의적 의미를 떠올려 봐야 한다. 이 단어는 어원상 주인(host)과 손님(guest)을 동시에 뜻하며, 그러기에 주인와 손님이 완전히 구분된 개별적 실체가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환대가 성립되기 위해서 주인은 언제나 동일하게 주인으로 머물러야 하며, 손님은 언제나 손님일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환대에서는,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의 집에서 완벽한 주인일 수 없다. 이것을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볼모(otage)로서의 주체성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다.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주체는 타자에 의해 호출당하고, 비판받고, 핍박당하고 고발당한다. 이렇게 타자에게 노출된 주체는 이미 타자의 볼모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체는 […] 언제나 집주인으로서 거주지를 선택하기 전에 자신의 집에서 선택된 자(élu à domicile avant d’être domicile)이다.”12)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서 타자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주권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3)

    역설적이게도 자기 집, 자기성(ipséité)을 내주거나, 자기의 주권(souverain), 혹은 자신의 권력(potesta)을 포기하고 열릴 때에만 환대는 가능하며, 이를 통해 자기중심적 주체는 환대의 주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듯 참된 환대는 손님과 주인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피환대자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상호성의 조건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타자의 환대는 환대받을만한 자, 환대에 맞게 자율적으로 행동해야 할 윤리적 주체 사이의 일종의 교환이 아니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환대는 타자에 대해 일체의 질문과 회의를 제기함으로써 이방인과 주인사이의 어떤 순환적 경제를 붕괴시킨다. 어떤 계산이나 판단이전에 이방인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환대의 주도권은 주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갖고 있으며, 주인은 타자에 대해서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환대의 주체가 갖는 주권을 축소시킴으로써, 주체는 주권성과 같은 권리나 앎을 통해 타인을 대상화하여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게 된다. 타자는 절대적으로 타자이며, 나에게 매번 낯선 자이다. 이런 타자의 타자성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환대, 즉 주체의 통제권 밖에서 주체의 내부로 이질성의 침입이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타자성은 한편에서 동일자의 통제권, 주권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동일자의 내부에 들어와야 한다.15) 그러기에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가 보여주는 주체와 타자의 차이는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모든 타자에 대한 해석은 이미 차이의 제거이고, 동일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권성의 상실은 주체와의 관계가 단지 호혜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적대적인 관계로 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16)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는 이처럼 극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데리다도 이런 위험자체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런 위험이 타자를 맞아들이는 데서 필수적임을 강조한다.17) 또한 환대의 특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환대의 일반적인 법과 환대의 절대적인 법 사이의 관계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환대를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상정한다면, 이런 수용은 모든 한도와 제약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해서 환대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법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환대는 일종의 아노미와 같은 법의 부재 혹은 법의 예외, 그리고 법의 외부로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법의 외부가 다른 법들, 즉 일반적이며 보편화될 수 있는 법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이런 법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이해되어야한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법, 혹은 법의 예외성은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반적인 법을 필요로 하며 이런 법을 통해서 측정된다. 그러기에 환대는 언제나 적대적 관계로 변할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무조건적인 환대가 이런 법이나 합리성과 완전히 단절한다면, 자기희생적인 이타성과 절대적 아노미만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환대와 적대적 관계의 가능성을 함께 말하기에, 법의 예외와 이런 예외가 초래할 위험의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고, 이 위험의 가능성에 대한 인지는 합리적 계산이나 법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점에서 법과 법의 예외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전제하면서 공속적으로 존재한다. 즉 법의 예외와 법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존립하게 된다. 물론 법의 외부는 법의 내부를 파열하고 그것에 균열을 가하면서 자신의 예외성을 주장한다. 또한 법의 제약이 있기에 법의 경계와 그 경계의 외부가 유의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외성은 법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요컨대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불가능한 절대적 명령, 요구를 통해 우리의 일반적인 이성과 합리성과 같은 법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경계의 체험은 우리에게 참된 의미에서 타자, 혹은 낯선 자와의 조우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기 위해서 선행해서 어떻게 타자의 타자성이 지속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심도 깊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서구의 철학이 원리에 대한 탐구, 그리고 보편적 법칙에 대한 탐구였다면, 이런 법칙은 사회정치적 의미에서 보편적 법과 제도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법과 제도를 통해서 근대국가들은 자신의 영토 내의 시민들을 통제하고 관리하였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근대적 법과 정치제도와 관련해서 “자기-집에 대한 자기의 지상권이 없으면 고전적 의미에서 환대란 없다”18) 라고 말한다. 역으로 동일한 이유에서 환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권성에 대한 해체가 필수적이다. 즉 절대적 환대는 이런 법이나 동일자의 주권성 너머로 가야 한다. 그래서 환대의 참된 의미를 갖는 것은 어떤 지평이나 통제가 없이, 언제나 나의 집을 열때이다. 이렇듯 환대는 우리의 개방이 하나의 위험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타자에게 열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를 말하면서 동시에 위험, 적대성을 전제하기에, 환대를 이상화하기보다 오히려 ‘불가능한 사건’19)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법과 법의 예외사이의 상관성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가 위험성과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성과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법의 관점, 보편성과 합리성의 관점에서 가능하게 된다.20) 요컨대 제도와 법과 같은 보편성,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환대는 불가능한 것이며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고, 해당 국가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21) 이런 절대적 타자에 대한 개방은 전통 형이상학을 급진적으로 해체하며, 주권성에 기반한 정치적-사회적 주체이론을 비판하고 절대적 타자에게 열린 주체의 가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22)

    4)“철학을 해체하는 것은 그 개념들의 구조화된 계보학을 가장 충실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이러한 역사가 어딘가에 이해관계가 걸린 어떤 억압에 의해 스스로를 역사로 자처하면서 무엇을 은폐하고 금지시켰는가를 철학에 의해 표현될 수 없고 명명될 수 없는 어떤 외부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데리다, 『입장들』, 박성창편역, 솔, 1992, 29쪽.(필자강조)  5)J. Derrida, Marges - 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22쪽. 데리다는 특히 레비나스와 하이데거를 참조하면서 자신의 ‘차연’개념을 구체화한다.  6)Marges - de la philosophie, 76-77쪽.  7)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역, 동문선, 2004, 107쪽.(이하 환대에 대하여라 표기함)  8)문성원,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117쪽 이하 참조.  9)O. Custer, ‘Making sense of derrida’s aporetic hospitality’, in Derrida: Critical Assessments of Leading Philosophers Ⅲ, edited by Len Lawlor and Zeynep Direk, Routledge, 201쪽.  10)Derrida-Roudinesco, De quoi demain... dialogue, Flammarion, 2004, 102쪽에서 데리다는 “법과 정치에서 이런 형태의 환대를 위한 장소는 없다”라고 주장한다.(이하 De quoi demain으로 표기함.)  11)J. Derrida, Adieu à Emmanuel Levinas, Galilée, 2003, 117-118쪽.(이하 Adieu 로 표기함.)  12)Adieu, 67쪽.  13)환대에 대하여, 104쪽.  14)환대에 대하여, 89쪽.  15)J. Derrida, Psyché: Invention de l’autre, Galilée, 1987, 53쪽에서 데리다는 타자의 도래는 주체나 대상이나, 자아나, 의식이나 무의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서 타자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은 바로 해체라고 불렀던 것이며, 결국 이때의 해체는 타자의 도래에서 타자와 도래사이를 연결하는 ~의는 두 가지 의미, 즉 타자가 도래하는 것과 타자에 대한 도래를 모두에 적용된다. 그래서 타자의 도래는 도래의 지평을 해체해야 하고 도래하는 타자를 해체하는 것이다.  16)데리다는 언어학자 방브니스트의 hosti라는 단어의 분석을 인용하면서 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가 동일하게 적(敵)에게도 적용됨을 상기시킨다.(환대에 대하여, 71쪽 이하를 참조할 것.)  17)환대와 적의(hostilité)는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데리다에게는 이 둘이 서로 결합되어서 분리되어 사유된다. 다시 말해서 환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적대적으로 될 가능성을 언제나 허용해야 한다. 이런 사유방식을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미결정성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환대에 대하여, 84쪽)  18)환대에 대하여, 89쪽.  19)J. Derrida, Apories, Galilée, 2003, 38-39쪽.  20)이점에서 데리다의 환대론이 단순한 아나키스트적인 정치이론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법과 예외사이의 이중구속(double bind)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21)이점에 대해 데리다는 환대와 환대의 타락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자세한 것은 환대에 대하여, 70, 141쪽을 참조할 것.)  22)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는 이미 친부살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서는 환대의 주체인 국가나 가족은 언제나 환대하는 자, 환대할 수 있는 자의 주권성과 독립성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대는 종종 부권중심의 가족(paterfamillia)에서 아버지의 역할과 주인을 등치시킨다는 점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환대에 대하여, 64쪽.)

    3. 제삼자의 해석-데리다와 레비나스

    앞 장에서 우리는 데리다의 환대론이 결국 모든 주권성에 대한 비판이며 해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체가 자신의 주권성을 상실하게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자의 절대적 외재성에 주목하지 않고 타자의 외재성을 미리 한계 짓거나 조건 지을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타자의 타자성을 통제하는 것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계산되고 통제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더 이상 윤리적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즉 모든 계산 너머에서 오는 절대적 타자가 없다면 주체의 참된 열림도 없고, 환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환대가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는 나에게 언제나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없고, 나의 기준에 의해서 선택할 수 없는 자로 남아있어야 한다.23) 타자의 타자성 혹은 이질성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타자는 나의 통제와 지배를 벗어나서 환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타자는 언제나 주체의 전유화를 벗어나는 타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데리다의 타자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 주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환대자가 피환대자를 통제할 수 없기에, 그가 적(敵)으로 돌변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이렇듯 환대는 호혜성이나 상호성에 기반하기보다 어떤 상실도 용인하지 방향으로 가기보다, 오히려 절대적 상실과 무의미의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점에서 데리다의 환대론은 인도주의적인 태도나 상호인정론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오히려 환대는 모든 인식적 계기들은 철저히 배제하기에, 모든 것에 열린다는 점에서 불가능성의 사유이다. 즉 환대를 한다는 것은 이미 나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나아가 나의 집에서 타자로 인해서 무장해제당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조건적인 환대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24)

    데리다는 자신의 환대론에서 타자의 이중적인 측면을 Adieu에서 언급하면서, 레비나스의 제삼자 개념과 환대의 위험성을 연결시켜 설명한다. 우선 레비나스의 제삼자 개념의 지위를 살펴보자면,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시론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25)에서는 제삼자는 타인의 이웃이다. 그러나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성 너머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26)에서처럼 아직은 윤리적 주체와 타자의 외부에서 이 둘의 관계를 측정하며, 타자를 의심하며 그에 대해 판단하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제삼자는 타인의 이웃이기에 나의 이웃의 이웃이라는 점에서, 타인과 같은 나의 이웃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체성과 무한』은 타인의 이웃이고 나의 이웃인 제삼자를 모든 인류의 차원으로 확대한다. 즉 제삼자를 통해 모든 인류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발견할 수 있다.27) 반면 『존재와 다르게, 존재성 너머 에서는 근접성(proximité)이나 대면(face-à-face)과 같은 윤리적 관계가 ‘존재 너머’나 ‘존재와 다르게’의 의미성으로 규정되고, 이런 의미성은 넘침(débordement), 과잉(surplus), 과도함(excès)28)등으로 설명되었다. 반면 근접성의 차원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의 볼모에 까지 이르는 책임”29)을 짊어지는 절대적으로 비대칭적 관계로 그려지고 있지만, 제삼자의 등장과 함께 비대칭적관계는 대칭적 관계로 역전된다. 그래서 “제삼자의 등장, 그것은 […] 의식, 존재 속에 불러 모음의 사태 그 자체”30)라고 말해진다. 요컨대, 제삼자의 출현과 함께 타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타자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 변하고, 이에 따라 타자는 의식의 빛에 의해서 가시화되어 여러 다른 이웃들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자로 바뀌게 된다.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의 비교”31)하게 되어 타자의 유일성은 상실되고 여러 이웃들 중 하나의 이웃으로 된다. 결국 “타자와 이웃, 타자에 대한 일자는 무엇인가? 이들은 일자가 타자에게 무엇을 행하는가? […] 타자와 제삼자,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현전하는 나의 이웃들은 나에게 타자와도 그리고 제삼자와도 거리를 두게 한다.”32) ‘나’와 타자 그리고 제삼자사이에는 대면적 관계가 아니라 판단과 회의를 위한 적절한 거리가 유지된다. 이를 통해 얼굴은 ‘나’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제삼자의 출현을 마치 대면의 직접성 속에 있던 자아가 갖던 타자에 대한 충실성을 배반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삼자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절대적인 신뢰성이 붕괴되며, 타자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회의는 타자가 할 수 있는 위증(parjure)33)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 여기서 위증은 데리다가 제삼자의 등장으로 인해 타자에 대한 회의 속에서 갖게 되는 문제 상황을 잘 드러낸다. 즉 타자의 얼굴은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이미 위증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얼굴의 표현에 대한 진실성을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타인의 얼굴은 이미 어떤 거짓 증언의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나’의 호의와 환대는 왜곡되고 이용당하여, 결국 환대의 대상은 적절한 상호교환의 원리에 따라 ‘나’에게 선(善)을 선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 의미에서 타자의 환대는 언제나 타락가능성(pervertibilité)34)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타자에 대한 충실성의 배반이다. 왜냐하면 만일 환대에서 타자에 대해 절대적 신뢰하여 그/그녀에게 질문하거나 의심하지 않고서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런 문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회의하고 의심하며, 판단하기에 환대가 타락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일단 이런 회의의 계기가 등장한 이상, 얼굴의 표현은 이미 거짓과 진실의 경계위에 있고, 위증의 가능성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차이를 비교적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타자와 주체사이의 윤리적 관계인 가까이 있음을 설명한 뒤 제삼자의 출현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이런 전개는 단지 임의적인 기술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가 맺는 책임의 관계가 모든 법이나 제도 등에 우선함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우선적으로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책임의 관계에 대한 기술이 선행한다. 달리말해서 근접성의 관계 즉 회의나 인식에 오염되지 않는 절대적으로 타자에게 열리는 윤리적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레비나스의 저서에서 제삼자가 논의되지만, 그의 출현이 타자를 객관화하고 대상화는 정도에 머물지 직접적으로 타자가 거짓증언을 할 가능성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35) 물론 데리다도 이 점을 염려해 직접 레비나스가 위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을 언급한다.36) 그렇다면 왜 레비나스는 위증이라는 문제를 다루지 않았을까? 우선 그에게 타자의 위증이나 거짓을 말할 가능성 자체가 중심적인 문제가 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레비나스는 타자를 주체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며, 주체와 같은 권능을 갖지 못한 자로 규정하는데 있다. 즉 레비나스의 타자는 이미 약자이다. 그리고 이런 규정은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가 공통적인 전제이다. 반면 데리다는 환대에서 타자의 미지성을 오히려 더 중시한다. 그러기에 타자에게 열린다는 것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은 오히려 경계를 통제하고, 결정하고, 규정하는 것의 불가능성이고, 경계에 머물기 위해서, 기준, 규범들 규칙들을 통해서 타락과 타락의 가능성을 구분하는 경계점을 위치지우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이런 불가능성, 그것이 필요하다. 이런 경계점은 일반적 앎이나 질서 잡힌 기술의 사용을 통해서 유지되지는 않는 것이 요구된다. 이런 경계점은 타락할 수 있는 이 위험에 열리기 위해서 질서 잡힌 절차들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 선한 환대가 기회를 갖기 위해서, 타자가 도래하게 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 그리고 타자에게 예(oui)라고 응답하는 것만큼이나 타자의 예(oui)를 갖기 위해서 최악의 사태를 환대할 가능성이 필요하다.”37)

    다시 말해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환대에서 타자는 주체에게 그의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종의 판단중지가 내려진다. 그래서 타자가 윤리적 주체에게 위증을 할 뿐 아니라 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위증에서 주체와 타자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제삼자 혹은 제삼자의 관점이 언제나 전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데리다에게는 타자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갈 가능성이 중심주제로 논의되는 것이다. 만일 레비나스와 같이 단지 약자로서의 타자를 전제한다면, 문제는 오히려 단순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비나스처럼 대면(對面)관계에서 주체는 언제나 약자인 타자에게 강박적으로 포로 된 상황(obsession)에 처해있다고 전제한다면, 상대적으로 환대에서 적대(敵對)로의 전환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기에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38)

    그러나 데리다와 같이 타자에 대한 회의와 판단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면, 위증의 문제나 환대의 타락가능성 문제는 출발점에서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제삼자는 대면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출현부터 개입하고 있다. 그러기에 위증과 타락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제삼자의 현존은 환대나 대면관계와 어떤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 이점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는 한편에서 언제나 무조건적인 열림이며 윤리적 관계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타자가 적이 될 수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과 같은 판단과 불신도 동반하고 있다. 즉 절대적 신뢰와 같은 원리나 규칙의 예외는 법과 판단의 계기와 함께 등장한다. 이 때문에 환대의 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변하고, 타자가 변장한 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에도 제삼자는 언제나 현존하고 있고, 이로 인해 데리다는 법의 예외로서의 무조건적 환대와는 타락가능성과 같은 회의와 판단, 나아가 법과 규칙의 계기들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결국 이 둘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존재한다.

    요컨대 데리다는 레비나스 후기의 저작에서 자신의 논거를 빌려오지만 윤리적 관계의 타락가능성과 판단과 의식의 계기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 중에 어느 한쪽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체의 전권성을 해체한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배반하는 것과 결합될 때에만, 그리고 이런 미결정성에 노출 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39) 다시 말해서 윤리적 관계는 절대적 타자에게 열리기에 선행적으로 보편적 앎이나 규칙을 통해서 타자를 통제나 지배할 수 없으며, 이런 불확정성에 열릴 때에만 참된 의미의 타자에 대한 열림이 가능하게 된다.

    23)이 때문에 데리다는 타자를 환대할 때, 그의 신분과 정체성 그리고 출신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말아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타자는 어떤 의미에서 익명성을 갖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환대에 대하여, 70쪽.)  24)같은 쪽.  25)E. Levinas,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 LaHaye, Martinus Nihoff, 1971. (이하 전체성과 무한으로 표기함.)  26)E.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LaHaye, Le livre de Poche, 1974. (이하 존재와 다르게로 표기함.)  27)제삼자는 타인의 눈을 통해서 나를 응시한다. 먼저 얼굴이 존재하고 난 뒤 그 다음에 얼굴이 현현(manifester)하거나 표현하는 존재가 정의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로서 [이런]얼굴의 에피파니가 인간성humanité을 연다. […] 얼굴의 현존-타자의 무한-은 궁핍이며, 삼자(우리를 응시하는 모든 인류의 차원)의 현존이다. [...] 얼굴은 나를 응시하는 눈을 통해서 삼자와 인류의 차원의 현존을 보증한다.” (전체성과 무한, 188쪽.)  28)전체성과 무한, 56, 78쪽.  29)E.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Le livre de Poche, 1993, 202쪽.  30)존재와 다르게, 246쪽.  31)존재와 다르게, 247쪽.  32)E.Levinas, ‘Paix et proximité’, in Emmanuel Levinas, Cahier de la nuit surveillée, 1984, 345쪽(Adieu, 65쪽에서 재인용).  33)Adieu, 68쪽.  34)Adieu, 69쪽.  35)제삼자의 논의는 『존재와 다르게』의 상당히 뒷부분에 등장한다. 초반부 중반부에서 주로 근접성, 신체성, 그리고 말함(le Dire)의 의미에서 대해서 논의한 뒤에, 말함과 말해진 것(le dit)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삼자의 탄생을 논하고 있다. 즉 제삼자는 근접성에서 발견된 타자와의 관계이후에 등장하게 된다. (존재와 다르게, 245쪽 이하참조.)  36)Adieu, 67쪽.  37)Adieu, 69쪽.  38)이는 포로된 상황에서 대면의 관계는 일단 타락의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는 열림의 측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서 제삼자와 함께 의식은 등장하고, 제삼자의 등장은 타자와의 근접성의 설명이 이후에 등장한다. 우리는 『존재와 다르게』의 전개방식에 있어 제삼자의 등장이 후반부에 위치하고 있음을 통해 일정정도 타자와 제삼자사이의 시간적 간격이나 구조적 간격이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39)“최악과 배반의 무한한 가능성만이 선, 진실성 그리고 맹세한 서약의 가능성을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 『불량배들』, 이경신역, 문학과 지성사, 2003, 309쪽, 필자수정)

    4. 타자의 환대와 사건의 환대

    레비나스는 이런 위증가능성을 주제화하지 않고, 윤리적 관계의 의의를 해명하는 것에 집중한다. 반면 데리다는 윤리적 가능성을 타자와의 관계인 한에서 윤리적으로 끝나지 않을 다른 가능성, 즉 적대적 관계로 추락할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데리다의 논증은 타자와의 관계가 약자와의 관계에만 한정하기보다 오히려 절대적 타자와의 열림과 환대를 사건의 측면에서 다루기 때문에 생긴 오해는 아닐까? 다시 말해서 데리다는 환대에서 타자를 단지 나그네와 이방인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규정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자들을 전체를 지시한다. 그러기에 환대는 타인의 환대이면서 동시에 사건에 대한 환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데리다는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이 유지되기 위해서 이런 애매성 자체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카푸토는 데리다 사유에서 이런 애매성을 중시하면서 「폭력과 형이상학」의 논문을 근거로 데리다의 불가능성과 타자 개념은 반드시 윤리적 차원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40) 즉 타자가 반드시 타인과 동일시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타자의 환대에서 그의 타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에포케를 친다.41) 이 때문에 타자는 미지의 존재로 남는다. 그 결과 타자는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즉 타자는 약자일 수 있지만, 미지성으로 인해서 그는 어떤 자인지 모른 채 맞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계의 불확정성이야말로 주체의 전권성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타자와의 조우가 언제나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낯선 자와 만나는 하나의 사건,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험이 되게끔 한다. 이점에서 데리다는 타자성을 굳이 윤리적 의미에 한정하기보다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재정위 한다. 즉 타자성의 방점을 타인보다 이방성, 미지성에 둔다. 그래서 타자의 성격에 대한 미결정성이 강조된다.

    반면에 레비나스에게는 타자는 나에게 무차별적인 어떤 미지의 것이 아니라, 결코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응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유일한 단독적인 존재가 바로 타자이다. 이점에서 레비나스의 차이는 비-무관심(Non-indifférence)42)을 의미한다. 반면에 데리다에게서 타자의 타자성은 한편에서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초기의 사상적 경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데리다에게 차이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열리는 체험이기에 타자의 정체성에 대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는 환대를 타자와의 관계인 한에서 윤리적으로 끝나지 않을 다른 가능성, 즉 적대적 관계뿐 아니라 유령과 같은 존재를 맞이할 수도 있다. 이런 데리다의 논증은 타자와의 관계가 약자와의 관계에만 한정하기보다 오히려 절대적 타자와의 열림과 환대를 사건의 측면에서 다루기 때문에 생긴 오해는 아닐까? 다시 말해서 데리다는 환대에서 타자를 단지 나그네와 이방인으로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규정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존재들을 지시하며, 절대적 타자자 체에 대한 규정을 언제나 유보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환대는 사건의 환대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예를 『법의 힘』에 발견하는데, 데리다는 이 책에서 법과 구분되는 정의를 설명하면서 ‘사건’의 측면을 강조한다. 이때의 정의는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는 것으로 “도래하는 것은 모든 결정론을 넘어서며 나의 지배, 나의 주권성 또는 자율성의 계산과 전략들 또한 넘어선”43)다고 말한다. 또한 타자로부터 긴급하게 나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절대적 타자성으로 인해 타자는 주체의 계산이나 예상, 혹은 기대의 지평을 파열하면서 도착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런 절대적 타자성이 갖는 이질적인 성격이 없다면, 이는 주체에게 일어난 것은 사건도 아니라 이미 주체의 영역 내에서 포섭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건(évenement)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으며, 사건일 수 있는 것, 혹은 사건이어야만 하는 것, 도래하는 것(arrivant)이다. [그리고] 이 도래는 나를 절대적으로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혹은 그에게, 그것에 관해서 그에 관해서 나는 응답하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도달하고 나를 급습하는 것, 그것에 나는 모든 지배력 너머로 노출된다.”44) 이 도래하는 존재가 ‘사건’으로 명명되는 한에서 반드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중립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데리다가 이런 타자의 도래의 가능조건과 그의 절대적 타자성을 강조하기에 인격적인 타인보다는 오히려 타인과 익명의 존재사이의 미결정이 강조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서 타자는 인격적 존재보다 오히려 나의 지배력의 외부에서 나에게 침입하는 낯선 것으로, 우리의 표상과 조망권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도래하는 것은 나의 지적이며, 의식적인 능력 밖에서 침입한다. 그래서 ‘타자가 누구/무엇인가’하는 인식적인 질문은 거부되며, 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타자가 곧 타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윤리적 영역에 한정되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되는 것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타자를 설명하면서 열거한 사건의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타자가 반드시 타인과 등치될 필요가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데리다의 제자 그룹에 속하는 야콥 로고진스키 같은 이는 사건과 타인사이의 구별을 반대하며 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사건의 우위성을 주장한다.46) 이에 대해 혹자들은 90년대에 나온 데리다의 저작들47)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이전과 달리 환대, 증여, 책임, 정의 등의 정치적-윤리적인 주제에 천착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저작에서 레비나스를 호의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그래서 데리다의 타자론은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상당부분 유사성을 갖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로고진스키는 비록 데리다의 타자론과 환대, 책임개념이 레비나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데리다의 타자론이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동일한 선상에서 말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48)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환대의 개념이나 책임의 개념의 배후에 신의 관념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타자의 얼굴은 단지 윤리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 특히 유대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사상은 윤리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의 교차점 위에 있다.

    반면 데리다는 메시아니즘과 같은 유대교적 전통을 참조하지만, 이와 함께 차이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차이의 원천으로서 코라(Khora)를 제시한다. 플라톤에서 빌려온 이 개념은 어떤 내용도 없는 빈공간이고, 거기로부터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마치 모태와 같은 공간을 의미한다.49)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자주 강조하는 비-무관심성(Non-indifférence)과 등치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차이는 레비나스가 자주 비판한 존재론적 성격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데리다는 환대론에서 환대할 타자가 이방인이라고 언급하지만, 코라와 같은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반드시 타자=이방인이라는 등식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범위를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다. 이는 절대적 환대는 반드시 윤리적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통제불가능한 존재와의 조우도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점에서 타락가능성은 단지 윤리적 관계에서 제도의 측면으로의 이동 뿐 아니라 이 보다 더한 이질적인 존재와의 조우를 내포하고 있다.50)

    동일한 맥락에서 로고진스키는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대비시킨다. 레비나스는 칸트와 후설의 전통을 잇는 근대적 타자관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51) 즉 타자는 인격적 존재이어야 하고 그와의 관계는 윤리적 관계여야 한다. 이와 달리 데리다의 타자는 타인뿐 아니라 밝혀질 수 없는 것, 익명의 것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 예를 데리다의 광기에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로고진스키는 데리다의 광기에 대한 관심에서 이질성의 환대의 첫 계기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의 내부에 있는 이질성의 체험으로 해석한다.52)

    하지만 로고진스키의 이런 해석은 해체론이 갖는 탈주체성의 의미에서 타자의 미결정성만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 후기의 데리다가 중시한 환대, 정의, 민주주의등과 같은 사회-정치적 주제와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얼마만큼 데리다의 타자론의 다양한 측면을 해명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오히려 우리는 데리다의 결정불가능성이 갖는 근본적인 애매성, 그리고 해결불가능한 아포리아의 측면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메시아니즘과 같은 기다림의 차원 또한 그만큼 그의 중요한 사유의 모티브가 아닐까?53)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니즘에서 데리다의 사유가 갖는 어떤 역동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제도화와 구조화를 벗어나서 모든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에게 적합한 정의를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가능한 형태의 정치와 윤리적 관계 너머의 유토피아적인 차원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니즘적인 정의는 계산이나 제도, 그리고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자로서의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성찰의 중심에 설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기에 데리다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인 해체를 “단지 지체나 지연, 연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54)라고 명백히 말한다. 오히려 환원될 수 없는 차이 안에서 ‘절대적 촉구’와 ‘긴급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타자의 긴급한 요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어지며, 어떤 결정이 이를 확증하기 이전에 주어진다. 그러기에 정의의 요구는 그 정의상 참을성 없고 비타협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이다.”55)

    이렇듯 타자에게 열려진 장으로서의 메시아니즘은 도래하는 타자의 사건성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니즘이 여전히 타자의 사건이나 사건으로서의 타자를 불가능성으로 사유하는 한다면, 그것들이 주체편에서 규정하거나 한정될 수 없다면, 이런 미결정성은 불가능한 것이 도래하는 것 조차도 미결정인 채로 두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좀 더 비판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발생하지 않을 사건을 기다리는 것, 오지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여전히 기다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물론 데리다도 이런 비판과 회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사건에 대해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동일함56)을 주장할 때, 그것에는 이미 불가능성한 것의 도래의 측면 뿐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불가능한 채로 있을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다. 이는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면서』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지 모르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의미한 기다림으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57) 아니면 좀 더 불가능한 사건의 발생이 타락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대에 대하여』의 말미에 데리다는 이웃에 대한 환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딸들을 소돔사람들에게 내주어 폭행을 당하게 하는 롯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환대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는 것, 그것은 윤리적 지평 너머의 종교적 신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 타자의 열림은 타자성이 갖는 낯섦을 매개하거나 중립화할 수 있는 의미의 최종 근거로서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절대적 타자의 타자성에 열린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열릴 수 있는 근본적인 애매성에 개방될 때에만, 동일자에 포섭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와의 조우가 가능해지게 된다.

    그럼에도 데리다 자신이 말하는 신앙이나 환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위험자체에 주목함과 동시에 오히려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도’58)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도래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도래는 절대적 타자성으로 인해 이런 위험을 가로질러야 하면, 근본적 애매성으로 인해 타락과 같은 심연을 가로질러야 하며, 마지막으로 ‘아마도’의 미미한 가능성이 망각될 위험도 견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의 횡단을 통해서만 주체는 자기중심성과 주권성을 벗어나 타자와의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40)Johhn D. Caputo, The prayers and tears of Jacques Derrida, Religion without relig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21쪽 이하.  41)인식의 계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중지하는 것은 두 철학자가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대면에서 타자에 대한 인식적 계기가 거부된다하더라도 여전히 타자는 미지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얼굴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기에 레비나스의 타자에게 미지성이 주제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42)E.Levinas, Dieu, la mort et le temps, 163쪽.  43)De quoi demain, 91쪽.  44)같은 쪽.  45)같은 쪽.  46)Jacob Rogozinski, Faire part-Cryptes de Derrida, Lignes, 2005.  47)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타자에 대한 질문을 광기와 과잉 그리고 문학적 체험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하지만 이후에 저작에서는 좀 더 윤리적-정치적 차원에 집중하게 된다. (책임과 정의에 대한 논의를 한 저작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Il faut bien manger ou le calcul du sujet’, Points de suspension-entretien avec Jacque Derrida, Galilée, 1992,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역, 이제이북스, 2007,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Donner la mort, Galilée, 1999.)  48)Faire part-Cryptes de Derrida, 148쪽.  49)Derrida, On the Name, Ed. Thomas Dutoi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124쪽에서 데리다는 “코라 는 인간학적 신학적 도식들과 모든 역사 그리고 계시와 진리를 밝혀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같은 의미에서 Rogozinski, Faire part, 122쪽을 참조할 수 있다.  50)현대의 타자론에 대한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리차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커니는 데리다의 직접적인 주장인 코라와 신을 대립하여서 절대적 타자를 설명한다. 또한 타자를 타인만이 아니라 괴물로서 그리고 유령과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이런 예들은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과 『정신에 관해서』에서 나오는 유령이나 망령(revenant)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리차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역, 개마고원, 2004, 6장, 9장을 참조할 것.)  51)Rogozinski, Faire part, 149쪽.  52)로고진스키는 데리다의 사상의 중요한 측면이 심연에 대한 탐구이며,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서의 죽음, 그리고 모든 담론의 외부에 위치하는 외재성의 극한으로서의 광기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의 사유의 중요한 주제임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Rogozinski, Faire part, 159쪽 이하를 볼 것.)  53)데리다의 메시아니즘은,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역, 이제이북스, 2007, 87쪽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메시아니즘과 유령론사이의 이상한 동거에 대해서 데리다의 미결정의 입장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어떤것에 방점을 둘 것인가는 결국 해석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하며, 이런 개입을 통해서 데리다의 사상전체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54)마르크스의 유령들, 76쪽.  55)마르크스의 유령들, 77쪽.(필자가 일부수정)  56)우리는 『법의 힘』의 진태원 해제를 참고할 수 있다. 여기서 역자는 가능성의 조건과 불가능성의 조건이 시간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구조적인 면에서도 동시적임을 지적한다.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역, 문학과 지성사, 2004, 188쪽.)  57)불가능하거나 불확실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발생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불량배들, 300쪽, 각주 24.)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한에서 일어날 것으로 확증하거나 보증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불가능성을 통해서 데리다는 자기동일성과 자기보호 속에 있는 근대적 주체와 근대적 제도의 약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타자의 예측불가능성에 아직 직면하거나 대항할 수 없거나 이미 더이상 직면하지도 대항하지도 않는 바로 그곳에서 노출되어 있는 어떤 취약성을 건드려야만 합니다.”(같은 책, 307쪽.)  58)법의 힘, 59쪽. (192쪽의 번역자의 용어해설을 참조할 것.)

    5. 나오는 글

    데리다의 환대론은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열림 없이는 환대는 불가능하기에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환대에서 주권성의 해체와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림이 강조된다. 이뿐 아니라 데리다는 타자의 환대를 일종의 이타주의쯤으로 간주하거나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으로 오해할 것에 대비해서, 무조건적 환대의 예외성과 일반적 환대의 법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강조한다. 법의 정지로서의 무조건적 환대의 예외는 결국 환대자로서의 주체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데리다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기에 불가능한 사건으로서 제시하지만 제도화와는 분명히 선을 끗는다. 이와 함께 환대가 갖는 위험성은 타자성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타자가 주체 혹은 동일자에게 포섭될 수 없는 자이고, 우리가 타자를 선택할 수 없다면, 이때의 타자는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최악의 상황을 항상 언급하면서 환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최악의 상황이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통해 주체의 전권성을 비판한다면, 다른 한편에서 이 타자성은 환대이론 자체를 미규정의 상태로 두는 것이다. 즉 환대이론은 언제나 이론이 적대이론으로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환대에 대한 담론 자체에서 피환대자를 규정할 개념적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타자성을 유지하는 것이 데리다의 전략이다.59) 하지만 여기서의 타자는 단지 애매하고 비규정적인 중립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애매성은 절대적 타자에 열리기 위해서 환대의 사유가 거쳐야할 일종의 시험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를 근거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타자에게 열린다는 점에서 환대이론은 모든 규정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체의 노력이 해체에 머물 수 없음은 데리다 자신이 말하는 해체 불가능한 것60)으로서의 정의의 이념을 말할 때 알 수 있다. 즉 해체는 단지 사변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타자성의 가장 어려운 지점을 탐구하는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에서 책임과 환대 그리고 증여와 같은 사회적-정치적 주제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59)Hent de Vries, Religion and Violence, Philosophical Perspectives From Kant to Derrida,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322쪽에서 드브리스는 환대이론 자체가 환대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즉 환대이론 자체가 이질적 요소를 받아들어야 하며, 결국 미결정의 상태에서 아포리와 같은 방식으로 남겨져야 함을 주장한다.  60)법의 힘,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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