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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공연예술의 시노그라피(Scenography) 고찰 A Study on the scenography of Achim Freyer's Theater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현대 공연예술의 시노그라피(Scenography) 고찰

In 2011 September, as the opening performance of the World Festival of National Theater, Mr. Rabbit and the Dragon King(Sugungga) known as the korean Pansori tradition was staged in the form of “Pansori-Opera” under the directorship of the German stage director Achim Freyer in Seoul. His stage directing strategy is so- called scenography(visual dramaturgy) which belongs to new theater or postdramatic theater. As visual dramaturgy, his stage directing in Mr. Rabbit and the Dragon King(Sugungga) is like this ; including costumes in Handhok(korean traditional dress) color and texture, paper mask, a stage floor reminicent of eastern landscape, and the bold, black-color lined curve backdrop extending beyond the left and right rings to the audience seats, the pictorial stage like a 2-dimensional picture was presented. In the center of the stage was built a spectacular structure on which a singer-commentator(played by Ahn Suk-seon), unlike the characters with flat masks, was the only one who appears in a real, 3-dimensional face. She was performed a kind of Frame, correctly speaking, as a “Parergon”. Parergon is located in and out of the work(Ergon) at the same time. And its scenography strategy is to present space time in a new mode.

KEYWORD
아힘 프라이어 , 시노그라피 , 시각적 극작법 , 파레르곤 , 시공간 , 포스트드라마 연극
  • 1. 시각적 극작법으로서 시노그라피(Scenography)

    시노그라피(scenography, architecture on stage)는 그리스어 ‘스케노그라피아 (skènographia)’에서 파생된 라틴어 ‘세노그라피아(scenografia)’에서 비롯되었다.1) 무대를 뜻하는 ‘스케네(skene)’와 쓰기 혹은 그리기를 의미하는 ‘그라페노 (grapho)’가 합성된 시노그라피는 무대장치, 소리, 조명 등의 요소로 극적 환경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간단히 정리하면 “무대에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 이다.2) 의미를 구축하여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함축하는 장면의 기술을 뜻하는 미장센과 시노그라피의 관계에 대해 파비스는 시노그라피를 미장센의 수단이자 재료로 설명했다.3) 한편 현대 공연예술에서 시노그라피는 단순한 무대 장식 미술을 뛰어넘는 시각적 극작법으로 이해되며 시노그라피를 구성하는 작업은 드라마투르기의 작업과 유사한 것으로 수용된다. 시노그라피를 통해 ‘연출된 장면’ 혹은 ‘함의된 이미지’는 일종의 무대미술적 드라마투르기이자 동시에 미장센과 동일한 표현이다. 미장센은 공연 텍스트와 종속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등가적 관계를 맺는다4)는 언급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노그라피의 함의와 내용은, 실내극장의 등장과 함께 원근법과 무대전환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던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대별로 지각의 변화와 시각적 표현 관습5)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6) 특히 20세기 이후 연극 무대에서 텍스트의 언어-로고스 이외의 요소들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시노그라피는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부각되었고, 극적 효과를 창출하는 드라마 텍스트의 극작법에 대응하는 시각적 극작법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경우 90년대 텍스트가 귀환할 때까지 시노그라피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연극 무대를 절대적으로 지배했다.7)

    본 논문의 목적은 현대 공연예술의 시노그라피 전략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현대 공연예술의 시노그라피는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데서 나아가, 독 자적 의미를 구성하는 표현 방식으로 변환되고 있다. 현대 공연예술에서 시노 그라피의 구현 방식은 연출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소리와 빛을 연극에 도입한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8), 정지된 회화적 이미지로 무대를 풍경처럼 구성한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9), 극행동을 증폭시키고 투사하여 극행동이 함축하고 있는 잠재력의 폭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반향실로 연극 무대를 이해한 리차드 포먼(Richard Foreman)10) 등은 각각 독자적인 재료와 표현 방식으로 무대의 시각적 극작, 곧 시노그라피를 구현한 예가 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1980년대와 90년대 오페라와 연극에서 시노그라피를 주요 표현 방식으로 구현한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의 시노그라피 전략을 일종의 시각적 극작법으로 이해하고 살펴보려 한다. 특히 “희곡은 읽거나 듣거나 보는 것”11)이라고 주장했던 거트루드 슈타인(Gertrude stein)의 “풍경희곡(Landscape Play)”의 개념처럼, 희곡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나아가 듣거나 보는 것으로 전환하여 희곡텍스트의 극행동을 시각적 은유와 상징의 이미지로 구성하고 시공간의 흐름을 미세한 변성(變性)으로 표현한 점을 분석해보려 한다. 이런 경우 시노그라피로 구현되는 인간의 신체는 은유 혹은 상징이 되고, 신체 움직임은 감지하기는 어려워도 미세하게 움직이며 변화하여 스토리텔링을 전달해주는 활자로 기능한다.12)

    무대 미술가이자 연출가인 아힘 프라이어는 1934년 베를린 출생으로 1954년 브레히트의 제자로 무대 디자인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56년 브레히트가 죽자 크게 낙담하여 화가로 전향했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가 브레히트와 작업을 함께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브레히트가 당대의 재현적 드라마 연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 없이는 재현적 드라마를 거부하는 연극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브레히트의 죽음 이후 기꺼이 연극 무대를 떠났던 것이다. 1956년 이후 그는 동독의 엄격한 통제를 피해 자신만의 예술관을 정립해 나간다. 그것은 패턴과 형식을 해체하여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질서의 파괴야말로 새로운 질서에 다름 아니다”라는 진술은 아힘 프라이어의 예술관을 잘 드러낸다. 아힘 프라이어는 1972년 서독에 정착한 후, 무대 미술가로서 ‘독일의 로버트 윌슨’이라 불릴 만한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13) “마치 화랑을 방문한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14)는 아힘 프라이어의 무대를 한국의 관객들은 2011년 9월 국립극장 <수궁가> 공연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수궁가>를 한 예로 들어 아힘 프라이어의 시각적 극작법 곧 시노그라피 전략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한다.

    1)안 쉬르제, 송민숙 옮김, 『서양 연극의 무대 장식 기술』, 동문선, 2005, 13-14쪽.  2)김제민, 「요셉 스보보다의 시노그라피에서 확장된 현대공연예술의 영상 표현 연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1, 20쪽.  3)김중효, 「연극의 은유적 표현과 시각화에 관한 연구-『시학』의 ‘미메시스’와 ‘메타포’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51호, 한국연극학회, 2013, 130쪽.  4)위의 글, 118쪽.  5)위의 글, 130쪽.  6)이에 대한 연구로는 안 쉬르제, 송민숙 옮김, 『서양 연극의 무대 장식 기술』, 동문선, 2005 참조.  7)한스-티스 레만, 김기란 옮김, 『포스트드라마 연극』, 현대미학사, 2013, 173쪽.  8)신정아, 「일인극 『안데르센 프로젝트』를 통해 본 총체적 작가 로베르 르빠주의 연극 세계」, 『외국문학연구』 29호, 2008, 229쪽.  9)한스 티스–레만, 김기란 옮김, 앞의 책, 145쪽.  10)리차드 포먼, 김철리 옮김, 「연극의 시각적 구성에 관하여」, 김태원 편, 『서구 현대극의 미학과 실천』, 현대미학사, 2003, 456쪽.  11)거트루드 슈타인, 김기란 옮김, 「연극(Play)」, 『공연과 리뷰』 51호, 현대미학사, 2005 겨울호, 254쪽.  12)한스-티스 레만, 김기란 옮김, 앞의 책, 74쪽.  13)Sven Neumann(Hs.), Freyer-TheaterⅢ(Berlin : Alexander Verlag Berlin, 2007).  14)Inge Zeppenfeld, Anti-illusionistische Spielräume. Die ästhetischen Konzepte des Surrealismus, Symbolismus und der abstrakten Kunst im Spiegel der Theaterarbeit Achim Freyers und Axel Mantheys(Tübingen : Niemeyer, 1998), p. 114.

    2. 텍스트의 극작법에서 시각적 극작법으로,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표현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초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매체, 영화의 등장은 연극의 변화를 추동했다. 영화는 등장 초기 한동안 “촬영된 연극”에 머물렀다. 초기 무성영화는 무대 위 연극에게는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던 시공간의 표현 방식을 상당히 확장시켰지만, 여전히 영화를 특징짓는 것은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뿐이었다. 줄거리도 연극적으로 구현되었고, 촬영된 장면은 연극 무대처럼 전체 그림으로서 통째로 영사되었다.15) 하지만 영화는 곧 단편적 조각들을 예술적으로 배치한 몽타주 기법을 통해 다양한 시공간 표현에 도전했고, 클로즈업 촬영을 통해 섬세한 몸짓 표현이나 세부 묘사를 제시할 수 있었다.

    반면 연극은 볼거리와 생생한 언어는 지니지만, 객관적 현실을 시공간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을 지니는 예술 장르에 머물러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놀드 하우저는 20세기의 새로운 예술 장르인 영화를 설명하며 “영화 시간 개념의 특징은 동시성이며 그 본질은 시간의 공간화”16)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간명한 진술에 압축된 설명을 통해 그는 영화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새롭게 정립한 장면의 구성에 있으며, 그것이 행동을 재현하는 당시의 드라마 연극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우저는 “연극은 여러 면에서 영화와 가장 유사한 예술 매체로, 특히 공간적인 형식들과 시간적인 형식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영화의 유일한 실제적 유사물을 구현”하지만, 무대 위 극행동은 부분적으로는 공간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시간적이며, 영화의 사건들처럼 시공간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또한 “연극의 공간은 정적이고 변화하지 않으며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렇게 남겨지며, 특히 드라마의 시간은 정돈된 순서”를 이룬다고 했다. 때문에 영화의 등장과 함께 드라마 극작법에 순서대로 구현되었던 “공간과 시간의 범주들은 영화에서 근본적으로 그 특색과 기능을 바꾸어”, “영화의 공간은 드라마의 정적인 특성과 그 수동성을 버리고 동적인 성격을 얻게 된다.”고 했다.17)

    20세기 초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드라마 형식은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을 기본 구성 범주로 하여, 1차원의 선형성18)으로 세계를 구축한다. 드라마 형식을 연극 무대 위에 구현할 경우 무대 위 허구적 현실은 3차원으로 제시된다. 드라마 형식의 선형적 1차원의 세계는 방향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지만, 대개는 앞으로 진행되는 변증법적 발전의 형식을 취한다. 조화를 이룬 세계의 균형이 깨진 후 균형을 이루려는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앞으로 진행되는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드라마 형식은 삶의 총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고 믿어져왔다. 삶의 총체성을 담지한 완결된 드라마 형식을 재현한 드라마 연극은 입체적 3차원 무대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의 표현에서는 여전히 선형적인 단선적 진행을 표현하거나 보조할 뿐이다. 소위 드라마의 삼일치 법칙은 바로 이러한 드라마 형식의 시공간 표현 방식이 집약된 것이다.

    이처럼 무대 위 선형적 시간 속에 동일한 공간을 일치시켰던 드라마 연극은, 영화의 새로운 시공간 표현 방식에 비해 정적이고 평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한 입체화의 시도가 화면을 입체로 만드는 방식으로 귀결될 수 없었던 것처럼, 연극 역시 과학기술을 빌려 영화처럼 시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구현하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비유컨대 지상에서 멋지게 달리는 최고의 자동차에 날개와 프로펠러를 매단다고 해서 날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공연예술인 연극이 영상예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 회화는 삼차원적 공간, 즉 입체의 환영 대신, 회화의 평면이 지니는 이차원적 실재성 과 회화의 자율적 속성에 해당하는 색감의 리얼리티를 화면 구성의 요소로 선택19)하여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했다. 마찬가지로 현대 공연예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무대 위 시공간의 표현 방식을 재연극화하여 영화의 시공간 표현에 필적하는 연극적 표현을 얻어내고자 했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시대 등 장했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시성(詩性)을 지닌 서정적 극, 서사극은 바로 그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연극사적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들의 다양한 양태를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드라마 형식의 선형성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은 분명하다. 시간과 공간의 일치에 의해 제약받는 극행동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연극적인 입체적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려는 시도로부터 현대 공연예술의 시노그라피 미학도 본격화될 수 있었다. 곧 드라마 텍스트의 평면적 극작법을 무대 위 시각적 극작법, 입체적인 시노그라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 것이다.

    15)카르스텐 비테 편, 박흥식·이준서 옮김, 『매체로서의 영화』, 이론과 실천, 1996, 149쪽.  16)“공간이 활성화되면 동시에 시간적인 특징들을 취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시간적 연관들도 공간적인 것과 다름없는 성격, 다시 말해서 배열 순서에서 일종의 자유를 획득한다. 시간은 연속성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린다. 영화 속에서 그것은 클로즈업으로 정지될 수도 있고, 과거장면(flash-back)으로 되돌릴 수도 있고, 과거장면이 반복될 수도 있으며, 미래장면으로 비약될 수도 있다. 병행하는 동시적인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상영될 수도 있고 시간적으로 대치되는 사건들이 디졸브나 교차편집으로 동시에 상영될 수도 있다. 앞의 것이 나중에 나올 수도 있고 나중의 것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카르스텐 비테 편(박흥식·이준서 옮김), 위의 책, 130쪽.)  17)카르스텐 비테 편, 박흥식·이준서 옮김, 위의 책, 129-130쪽.  18)시공간의 차원을 구성할 때, 0차원인 점이 모이면 1차원인 선이 되고, 선이 모이면 2차원인 면이 되고, 면이 모이면 3차원인 입체가 된다. 0차원에는 방향이 없지만, 1차원 선에는 앞과 뒤라는 방향이 생긴다. 2차원 면에서는 앞과 뒤뿐만 아니라 왼편과 오른편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입체에서는 위와 아래라는 방향이 추가된다. 우리가 경험할 수는 없지만 4차원이란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 결합된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차원, 시공으로 이해된다. 4차원에서는 다른 차원의 방향이 과거와 미래로 이해된다. 4차원에서 물체는 3차원으로 보이지만 그 물체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한스-티스 레만, 김기란 옮김, 『포스트드라마 연극』, 현대미학사, 2013, 25쪽.

    3. 아힘 프라이어의 시노그라피의 한 예, <수궁가>

       3.1. 청각의 시각화

    2011년 9월 아힘 프라이어는 한국의 창극 <수궁가>를 국립극장의 해오름 극장 무대에 올렸다. <수궁가>의 무대는 가면, 선의 구성을 통한 평면성, 미세 한 변성이 내재된 반복 등 70-80년대 정점을 이루었던 그의 시노그라피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된 무대였다. 아힘 프라이어는 <수궁가> 개막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의 전통 창극을 오페라로 전제했다. 오페라 무대 연출로 명성을 쌓은 아힘 프라이어는 시각적으로 구성된 오페라의 무대가 오페라의 청각적 효과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작과 색채, 빛의 교환, 음향과 단어는 모두 함께 어울려 음악이 그려내는 사건이 된다. 보통 언어로 그려내는 사건이 전체를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작은 색채, 형상은 언어와 같이 활용될 수 있다”20)는 것이다.

    하지만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를 접한 당시 한국 관객들의 반응은 당황 그 자체였다. 전통 창극에서는 창이라는 ‘소리’가 전경화되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관객들의 지각은 아힘 프라이어가 선보인 “판소리-오페라” <수궁가>의, 소리를 대신하는 시각적 볼거리가 낯설었던 것이다.21)

    공연된 <수궁가>의 무대를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수궁가>의 무대는 무대 정면에 노출된 선이 바닥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무대의 깊이 대신 높이를 살려 관객들의 시선을 3미터 이상 끌어올렸다. 지상에서 바다 속으로 여행하는 극의 내용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또한 손으로 그려 넣은 듯한 무늬로 장식된 투박한 질감의 종이 의상과 아이들이 그린 듯 천진하고 단순한 동물 형상의 거대한 종이 결이 살아있는 가면 등 장식적 배경만 존재했던 기존의 창극 무대를 평면적 선이 부각된 동양화같은 회화적 무대로 바뀌어 놓았다.

    이러한 무대는 “기존의 무대 공간은 잘 설명될 뿐 잘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아힘 프라이어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결과이다. 창극에서 스토리텔링은 주로 ‘창’ 곧 소리로 설명된다. 근대계몽기 일인 판소리가 역할을 나누어 분창하는 창극의 형식으로 발전하면서, 창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다. 역할이 분명한 창자의 소리는 인물 각각의 입장을 대비적으로 전달하여 스토리라인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는 소리꾼들의 얼굴을 가면으로 덮어, 인물들이 소리로 스토리텔링하거나 성격을 드러 내는 대신 가면이 인물의 성격을 상징하도록 했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인물들의 가면은 공연이 진행되며 시각적 상징이나 은유로 기능하고, 얼굴을 감싸는 각양각색의 종이 가면을 쓰고 어깨춤을 추는 인물들은 추상화된 상징과 은유의 동양화처럼 흑백 주조의 선으로 강조된 전체 무대그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창자들은 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유사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구성한다. 회화의 선처럼 패턴을 이룬 인물들의 동작은 무대벽과 바닥에 그려진 선과 연결되고, 동선과 인물들의 배열 역시 이 선을 이어 나가22) 무대 위 거대한 평면의 그림을 구성한다. 언어가 담긴 소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요소로 전체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때 청자에 다름 아닌 인물들은 소리로 ‘스토리를 텔링(telling)’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무대그림의 시각적 한 요소로서 무대 연출의 개념을 ‘보여줄(showing)’ 뿐이다.

    이는 그림연극(Bildtheater)을 제시한 로버트 윌슨이 자신의 이상적 연극을 무성영화와 청취극의 통합이라고 말한 지점을 상기시킨다. 로버트 윌슨은 청취극을 상상을 통해 보고, 무성영화를 상상을 통해 듣는, 경계 없이 개방된 공간을 꿈꾸었다. (무성영화를) 볼 때 청각적 공간은 무한히 열리고, (청취극)을 들을 때 시각적 공간 또한 무한히 열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목소리를 상상하고, 청취극을 들을 때 관객들은 몸이 없는 목소리에 대해 얼굴, 몸의 형태, 몸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23) 다시 말하자면 무대의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어 무대와 관객석을 포함하는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는 상호 교환되며 양자를 포괄하는 새로운 연상공간을 구성한다. 물론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관객들이며, 그들은 확장되는 연상 공간을 능동적으로 구성해낸다. 아힘 프라이어 역시 <수궁가>에서 스토리를 ‘창’을 통해 청각적으로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창 소리에 담긴 스토리를 상징과 은유로 시각화하여 제시하고 관객들에게 그것을 해석하는 능동성을 요구한 것이다.

       3.2. 극행동의 시각화, 파레르곤이라는 프레임

    ‘설명되지 않고 제시되는’ 시노그라피를 위해 아힘 프라이어는 무대 위에 프레임을 설정하는 방식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서사 장르의 일반적 디에게시스 방식의 프레임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종의 액자 효과를 창출하는 프레임의 유무는 사건을 전달하는 장르의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의 전달(혹은 제시) 방식을 구분한다. 미메시스 방식은 프레임이 없이 행위자들이 직접 행위를 보여준다(showing). 프레임이 있는 디에게시스는 하나의 시선 혹은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말해주는(telling) 방식이다.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를 대상이나 내용의 층위에서 이해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대상을 전달하는 방식, 곧 장르의 형식적인 측면은 간과되기 싶다. 그러나 내용이나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은 예술 장르의 형식을 규정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로, 실제 예술 장르의 진화를 추동한다.24)

    이를 반영하듯 이미 플라톤은 『국가』 3권에서 사건을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러티브를 디에게시스(diegesis), 미메시스(mimesis), 그리고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가 혼합된 방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즉 디에게시스는 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서정시, 미메시스는 등장인물을 빌어 재현하는 극, 그리고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의 혼합은 시인이 영웅을 기려 말하는 서사시로 대표된다고 했다. 내러티브의 세 양식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이르면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의 두 양식으로 축약, 재규정된다.25)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은 수단, 대상, 방식의 세 측면에서 구분할 수 있다”26)고 했다.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의 구분은 이중 모방의 대상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른 구분이다. 『시학』에서는 모방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첫째, 호메로스의 시에서처럼 이야기와 극적 제시를 번갈아 하기, 둘째,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셋째, 행위자들을 전부 극적으로 제시하기이다. 여기서 첫 번째의 경우는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의 혼합인 서사시에 해당하고, 두 번째는 디에게시스로 서정시, 세 번째는 미메시스로 극에 해당된다.

    극 장르는 미메시스의 전달(혹은 제시) 방식을 통해 규정된다. 극 장르의 미메시스 방식에 아힘 프라이어는 프레임을 설정하여 인물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극행동을 액자 속 그림처럼 시각화한다. 하지만 <수궁가>의 프레임은 전달(혹 은 제시)하는 서술자의 경계와 시점이 분명히 구분되는 디에게시스 방식의 프레임이 아니라, “파레르곤(Parergon)”에 가까운 프레임이다. 불문학자 박정자의 설명에 따르면, 파레르곤은 단순히 에르곤(Ergon, 작품)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작품의 한 옆에서 작품에 반(反)하여 작용하는 어떤 것이다. 가령 조각상이 걸치고 있는 옷은 조각상의 전체적 재현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작품에 속하는 내부가 아니라, 추가, 첨가, 보완이라는 외부적 요소로만 조각상에 속한다. 조각상의 옷은 재현의 중심에는 속하지 않는 작품의 외부이다. 조각상에 덧붙여진 옷은 재현의 본질에 비해 부수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 이차적인 것이 다. 하지만 조각상의 재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조각상에 덧붙여진 옷은 재현의 중심과 전체,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로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파레르곤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의심받기도 하며, 하여 파레르 곤은 재현의 본질, 본질에 속하는 내부와 그렇지 않은 외부의 문제, 그것을 경계짓는 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모호함과 불확정성, 이것이 파레르곤의 존재 방식이다.27)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수궁가>의 경우, 무대 위 3미터 높이의 구조물에 올라서 구조물을 거대한 치마로 감싸고 스토리텔링의 서술자(판소리 사설, 창 극의 도창) 역할을 맡은 안숙선 명창이 파레르곤에 해당된다. “무대 제일 앞쪽의 가장자리를 무대 위에 창조된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이해한다. 무대 위 세계를 바라보는 일종의 프레임인 셈이다.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같은 역할도 한다.”28)는 아힘 프라이어의 진술을 통해 이해하자면, 안숙선 명창은 무대 위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창)문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무대 전체를 내려다보는 높이, 평면적인 종이 가면을 쓴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입체적으로 분장한 맨 얼굴도 안숙선 명창의 이러한 극적 기능을 명시하는 장치이다.

    하지만 안숙선 명창의 거대한 치마 속에서 인물들이 튀어 나오며 공연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서술자 안숙선 명창은 작품과 분리될 수 없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숙선 명창은 <수궁가>의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중심이나, 자신이 창조한 허구적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다. 작품 외부에 존재하지만 작품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첫 장면에서 높이 솟으며 등장한 안숙선 명창은 허구적 세계를 시각적 요소로 동시에 전환되는 소리로 창조한다. 안숙선 명창의 창에 따라 별과 달이 무대 위에 시각적으로 제시된다. 실제 공연에서 절묘했던 것은 소리(창)와 시각적 제시의 ‘타이밍’이다. 창보다 먼저 혹은 나중이 아니라 정확히 소리와 동시에 시각적 제시가 이루어졌다.29) 안숙선 명 창의 ‘소리’를 통해 바다 속 신비한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녀의 거대한 치마 속에서는 인물들이 튀어나온다. 인물들의 극행동은 안숙선 명창의 시선과 ‘치마’ 라는 시각적 오브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며, 그들은 작고 왜소하게 축소된 평면 위에서 반복되는 패턴처럼 움직인다. 이는 음악극의 속성과 부합한다. 보통 드라마 형식에서 인물의 극행동을 통해 사건이 추동되는 것과 달리, 음악극에서는 청각적 요소(선율, 음색, 리듬 등등)가 사건과 긴장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얼핏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가 소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리를 통해 허구적 세계가 창조되고 진행되는 음악극의 속성에 충실했던 것 이다.

    파레르곤은 디에게시스의 프레임과는 다르다. 가령 영화는 카메라의 눈이라는 프레임을 지닌다. 영화의 프레임은 두루마기로 된 셀룰로이드 필름 표면에 규칙적으로 나뉜 4각형의 화면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 프레임은 미장센의 틀이 자 편집의 구성단위가 된다. 하나의 시각적 틀을 제공하는 프레임은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자 영화 미의식의 출발점이다. 영화관 속의 관객은 영화 줄 거리의 인물들을 그가 앉아 있는 의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로미오를 바라보는 것이다. 관객들의 눈은 카메라가 바라보는 프레임이라는 시각적 틀 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30) 전체에서 개별적인 것을 끄집어내어 강조하는 ‘클로즈업(close up)’의 경우에도 영화관 속 관객들은 끄집어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눈 속으로 스스로 다가서는 것이다. 영화의 프레임은 독립적인 공간의 폐쇄성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을 허물고 앞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내포한다. 회화의 프레임이 그림 내부의 공간을 현실의 공간과 확실하게 구분해 주는 공간물리적 틀인 반면, 영화 프레임은 포착한 현실 세계의 일부는 보여주고 그 나머지는 가림으로써31) 영화 프레임 안 세계에서 작동하는 시공간을 임의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오롯이 보장한다.

    파레르곤은 영화의 프레임과 회화의 프레임의 경계에 걸쳐 있다. 그것은 회화처럼 내부의 공간을 현실의 공간과 구분하는 물리적 틀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포착된 독특한 공간 속의 시간을 경험케 한다. 미메시스의 극 장르에서 인물이 직접 보여주던 극행동은 파레르곤이 프레임으로 기능하며 설정하는 독특한 시공간 속에 유예되고 반복된다. 극 속 인물들의 행동은 파레르곤이 설정한 시공간 속에 오롯이 보지(保持)되는 한편, 그 안에서 반복되며 시각적으로 패턴화된다. 관객들은 그것을 패턴화된 시각적 이미지로 지각한다. 또한 작품과의 경계가 불명확한 파레르곤은 작품 내부뿐만 아니라 그 외부도 동시에 제시한다. 곧 파레르곤을 통해 관객들은 작품 내부의 독특한 시공간과 그것이 현실화 하는 작품 외부를 이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32)

    파레르곤이라는 프레임의 설정은 지금, 여기 현실의 시간과 허구 세계의 시간을 동시에 시각화 하여 시공간의 동시성을 경험케 하려는 전략이다. 연극 무대 위에 서로 다른 시공간을 동시에 설정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무대의 위아래 높이와 좌우의 면을 분할하여 무대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장면의 두 개의 그림일 뿐 동시적인 것은 아니다. 안숙선 명창의 위치를 통한 높이와 좌우로 움직이며 등퇴장하는 인물들의 평면적인 좌우 동선을 동시에 활용하여 아힘 프라이어는 <수궁가>에서 시공간의 동시성을 구현했다. 안숙선 명창이 <수궁가>에서 작품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파레르곤인 것은 그 때문이다.

       3.3. 시간과 공간의 시각화, 반복 속 차이를 통한 변성(變性)

    아힘 프라이어가 시노그라피를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 표현이다. 아힘 프라이어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오비드의 변성(變性)>(1987)은 시간 자체를 주제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1987년 초연 당시의 현지 리뷰를 살펴보자. “초. 분. 이번 공연의 개념은 다음을 포함한다. 흘러가버린 물리적 분과 초를 크게 알려준다. 실제시간과 체험시간은 점점 서로 거리를 두게 된다. 지각할 수 있는 속도뿐만 아니라 느림도 존재한다. 풍성하게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며, 경과한 15분을 확신하기 위해 종종 팔뚝 위 시계에 눈길을 던지게 된다. 그 속에서 나는 보는 대신, 그 일분을 실제 지속하는 것이다.”33) 이 작품에서 아힘 프라이어는 ‘변성(變性)’의 모티브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변성(變性)’의 모티브는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형상의 미세한 차이를 통해 표현되는데, 이때의 반복은 단순히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시간이 흐른 후 이미 이전과는 달라진 미세한 차이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얼핏 동일해 보이지만 이미 시간이 흘러 달라진 새로운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반복의 제시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포착하는 시노그라피의 전략이다. 미세한 차이를 지닌 여러 개의 표정이 담긴 가면을 인물들의 얼굴 위아래, 양 옆으로 부착시켰던 그의 초기 작품(사진 1. 참조)34)도 인물 의 고정된 성격을 거부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의 가능성을 시각화한 전략을 보여준다. 이는 그에게 영향을 미친 러시아 절대주의 회화의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순수한 무대‘미술’적 도구를 통해 구현하려는 근원적 절대주의와 상통한다. 곧 전통적 표현 도구와 수단을 변경하지 않은 채,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mode)을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면, 인형, 오브제라는 전통적 연극 도구들은 아힘 프라이어의 무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되며 새로운 연극 기호로 창조된다.

    아힘 프라이어는 인물의 극행동이 시간에 따라 진행되며 사건으로 확장되는 드라마 형식의 시간 표현을 거부하고, 미세한 시간의 변화를 동시에 시각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변성(變性)의 모티브를 즐겨 사용한다. 이를 위해 부조와 같은 느낌을 주는 평면적 형상들이 즐겨 선택된다. 입체의 형상을, 반복되며 미세하게 변화하는, 그래서 얼핏 2차원의 평면부조처럼 보이는 형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수궁가>의 경우 청자들은 살아 움직이는 입체적 형상이지만, 그들이 구현하는 동작에서 입체감을 느끼기는 힘들었는데, 그것은 평면 가면이 객석을 향한 청자들의 얼굴을 정면성(frontality)으로 제한하고 발의 움직임보다 손의 움직임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3차원 입체를 회화적 평면으로 전환하는 전략은, 무대 공간은 공간으로 실존할 때보다 회화처럼 평면 위의 그림으로 존재할 때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아힘 프라이어의 생각을 반영한 결과이다. 또한 높이의 차이로 구성된 지상과 바다 속, 여기에 앞뒤가 아니라 양옆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연극의 시간 흐름을 낯설게 만들어 초현실적 설화의 세계라는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관객 각자가 스스로 조합해야 하는 것이다.”고 말한 바 있는 아힘 프라이어는 텍스트의 극행동을 정지에 가까운 느림의 반복, 미세한 차이를 지닌 반복으로 제시한다. 아래의 사진 235)는 그러한 전략을 보여주는 그의 연출 노트이다. 시간을 분 단위로 세분하여 꼼꼼히 무대 위 오브제의 변화를 표시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각적 오브제가 무대 위에 나타나는 ‘타이밍’이다. 연출 노트에서 지시하고 있듯이, 분초가 정확하게 바로 그 순간에 무대 위에 현시(現時)되어야만 한다. 시각적 오브제는 그 자체 독자적인 기호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시(現時)되는 타이밍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변성(變性)을 담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힘 프라이어가 제시하는 느린 진행 속 미세한 차이는 물론 모방되거나 재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 시공간 속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연 예술로서의 정체성을 오롯이 보존한다. 모든 차이와 반복들을 동시에 작동시키되, 이때의 차이는 모든 성질의 차이를 포함하며 전위(轉位)되고 탈중심화하여 사방으로 확장된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바 현대 예술의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곧 “예술은 모방하지 않는다. 바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힘의 기반 위에서 모든 반복은 반복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항상 다른 반복과의 관계 속에서 전위(轉位)된다. 다른 반복에 대한 차이를 예술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천천히 흐르면서 미세한 차이를 보여주는 연극 무대는 재현된 이야기를 공유하는 장소가 아니라, 진행되는 극행동의 시간을 관찰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실의 시공성을 초월하는 독특한 연극시간을 체험하는 장소가 된다. 이것이 과학기술을 통해 시공간의 동시성을 구현한 영화가 도달할 수 없는, 연극만의 시공성(4차원성)이다.

    20)위의 책, 25쪽.  21)이미원, 「전통장르의 새로운 실험 : 창극의 세계화와 정가(正歌)의 사랑노래 <수궁가>, <이생규장전>」, 『연극평론』 63호,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11, 겨울호.  22)김형기, 「창극 <수궁가>의 포스트-드라마적 변신과 그 함의-혹은 아힘 프라이어의 그림연극의 미학」, 국제 학술 심포지움 “포스트 아방가르드 이후 연극의 방향성”, 2012, 144쪽.  23)위의 책, 289쪽.  24)이런 맥락에서 극 장르의 분석이나 해석이 내용의 측면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25)류은영,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문학에서 문화콘텐츠로」, 『인문콘텐츠』 14호, 2009.  26)아리스토텔레스, 이상섭 옮김, 『시학』, 문학과 지성사, 20쪽.  27)박정자, 『빈세트의 구두』, 기파랑 에크리, 2005, 216-217쪽.  28)Inge Zeppenfeld, op.cit., p. 105.  29)실제로 이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아힘 프라이어는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이 첫 장면을 연습했다고 한다.  30)카르스텐 비테 편, 박흥식·이준서 옮김, 『매체로서의 영화』, 이론과 실천, 1996, 157쪽.  31)박정자, 앞의 책, 224쪽.  32)2013년 김현탁의 <혈맥> 공연에서는 ‘컵라면’이라는 오브제를 파레르곤으로 활용하여 원전 텍스트와 각색된 공연 작품 내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이중적인 시공간의 경험을 제공했다. 현대인의 대표적 먹거리인 컵라면을 대하는 제의적 숭고함이 반어적으로 경건하게 표현된 장면이 그것이다. 털보(김정석 분)는 기러기아빠처럼 거북을 보내고 혼자 컵라면을 끓여 먹는다.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붓고 털보는 고개 숙여 경건한 묵념의 자세를 취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무대 위에는 정적이 감돈다.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 <3분 44초>처럼, 대략 3분 후 땡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털보는 컵라면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컵라면이 익기까지 3분의 기다림을 관객들도 간절하게 함께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대 위 정적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대 위에서 라면이 익어가는 ‘실제’ 시간을 관객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간편식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삶의 고달픔이 인스턴트 음식을 숭고한 먹거리로 대하는 경건한 묵념 속에 반어적으로 드러난다.(김기란,「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계열체 <혈맥>」,『연극평론』70호,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13년 가을호, 25쪽.)  33)Sven Neumann(Hs.), Freyer-TheaterⅢ(Berlin : Alexander Verlag Berlin, 2007).  34)Sven Neumann(Hs.), Freyer-TheaterⅡ(Berlin : Alexander Verlag Berlin, 2007), p. 45.  35)Sven Neumann(Hs.), Freyer-TheaterⅢ(Berlin : Alexander Verlag Berlin, 2007), p. 123.

    4.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계열체, 시노그라프의 전략

    거트루드 슈타인은 20세기 피카소와 입체파의 예술적 혁신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비행기를 타고 본 대지는 자동차를 타고 본 대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자동차는 대지 위를 달리는 가장 진보된 기기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빠른 속도를 항상 유지할 수 있지만 자동차에서 본 경치는 승용차나 기차, 짐수레 등 온갖 탈것들을 타고 본 경치와 다름없다. 비행기를 타고 본 대지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그래서 20세기는 다시 한 번 19세기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비행기를 타고 한 번도 대지를 본 적이 없었던 피카소가 더 이상 19세기의 대지가 아닌 20세기의 대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그는 이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입증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을 창조했다.”36)

    20세기 초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가 직면했던 위기는 회화적인 도구와 수단을 포기하지 않고도 극복될 수 있었다. 그것은 도구와 수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 방식을 새로운 시각에서 성찰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이후 현대 공연예술은 새로운 세계상을 무대 위에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 연극 도구와 수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 표현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성찰했고, 시노그라피는 그 중 하나의 가능성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스-티스 레만은 시노그라피를 연극적 표현 도구와 방법을 확장시킨 새로운 연극 곧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계열체로 이해했다.37)

    본 논문에서 살펴본 아힘 프라이어는 2011년 한국의 <수궁가> 공연을 통해 자신의 시노그라피 전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즉 그는 연극적 도구와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 극행동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여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시공성을 연극 무대 위에 표현했다.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시노그라퍼(scenographer)는 많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들의 작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브레히트의 마지막 제자이자 ‘독일의 로버트 윌슨’이라는 아힘 프라이어의 작업을, 더욱이 한국의 창극 공연을 통해 직접 경험한 것은 소중한 문화적 경험이다. 아힘 프라이어가 연출한 <수궁가>는 그 자체 ‘무엇’이 아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집중한 장르형식적 실험을 보여주었는바, 새로운 형식의 실험은 대개 처음에는 피곤한 무력감, 당황, 극단적으로 거부를 동반하며 실패할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결코 지각하기 쉽다고 할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의 모형이야말로 예술 장르의 발전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다. 아힘 프라이어를 21세기 전위적 시노그라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36)거트르드 슈타인, 염명순 옮김, 『피카소』, 시각과 언어, 1994, 108쪽.  37)위의 책,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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