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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Drawing the Landscape of Korean Historical Drama Through the 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국립극단을 통해 본 한국 역사극의 지형도*
  • 비영리 CC BY-NC
ABSTRACT
Drawing the Landscape of Korean Historical Drama Through the 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담론적 구성물인 역사극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이다. 본 연구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국립극단의 역사극을, 텍스트와 컨텍스트와의 상호텍스트성을 탐색하는 신역사주의적 방법론으로 고찰하였다. 역사극은 민족담론을 내장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이유는 과거를 호출하면서 민족의 동질성이란 코드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고, 민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연극양식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 국립극단의 창단작인 <원술랑>은 당대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역사를 소환하는 방식, 시각적 멜로드라마 양식이란 점에서 식민지 역사극과 연속성을 보인다. 분단체제의 고착화로, 삼국시대를 소환하는 역사극에선 신라가 ‘민족적인 것’의 기원으로 배치된다. 1960년대 이후엔 역사인식과 글쓰기방식의 다변화가 일어난다. 1960년대엔 전쟁기억을 재현한 작품들이 대다수를 이루는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행위에 작동하는 타자성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 공연된 도식적인 반공극들은 지배담론이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억압적 담론으로 기능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70년대 국립극단의 역사극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은 국난의 역사와 영웅을 호출하는 경향성이다. 그 중 한 갈래가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기념비의 정치학’이고, 또 한 갈래는 식민지시기의 독립투쟁 서사이다. 영웅호출의 역사극은 민족/국가담론을 내장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 동원의 주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70년대 역사극은 담론투쟁의 장이기도 했다. 국가담론과 민중담론의 제휴, 혹은 담론 투쟁 양상이 나타난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으로 민중, 여성 등 하위주체를 그린 역사극이 등장한다. <객사>(1979)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과 더불어 여성주체가 서사를 주도한다. 그러나 민족을 단일한 주체로 구성해내는 민족담론은 민족 내부의 이질적 집단들을 단일화시키는 지배담론으로 작동하면서 민족 내부의 다성성에 대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한다.

KEYWORD
historical drama , New Historicism , 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 state discourse , discourse of people , , , , , , , , , , subaltern
  • 1. 들어가며: 역사극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텍스트성

    한국 역사극의 역사에서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기는 제2기에 해당한다. 제1기는 1920년대에 발아하여 1930, 40년대에 전성했던 식민지시기 역사극이다. 식민지시기 역사극은 당대현실의 알레고리로서, 혹은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기 위해 역사를 소환한 경우였다. 일제의 검열과 통제로 현실비판을 할 수 없었던 작가들이 당대현실을 유비하는 역사를 소환하여 우회적으로 현실을 그리거나, 사회주의 이념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재구성했다. 내선일체담론과 국가동원담론이 지배했던 1940년대에 이르면 역사극 작가들은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식민지시기 역사극은 식민/민족 담론과 접속한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1), 저항과 순응이란 스펙트럼 사이에 위치했다.

    해방 이후 한국 역사극은 양적인 융성을 맞이했다. 제2기의 역사극은 식민지시기 역사극과 글쓰기방식 및 담론적 성격의 계승에 있어 연속성을 갖지만, 역사인식과 연극양식은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다. 1990년대 이후의 역사극은 제3기에 해당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거대담론의 해체라는 사상사적 전환에 따라 개인의 미시사, 일상이 강조된 역사극, 팩션이 등장하는 등 현격한 변화양상을 보인다.

    제2기 역사극이 식민지시기 역사극과 크게 갈라지는 지점은 소재로서의 역사 개념과 연극 양식의 다양화이다. 2기의 역사극은 역사에 참여한 집단체험으로서의 기억을 소환하거나, 공식 역사가 아닌 사적 기억, 공적 역사의 장에서 배제된 기억을 소환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방기에 발표된 함세덕, 박로아, 김남천, 유치진 등의 ‘3.1운동’ 소재 작품들2), 1960년대에 발표된 4.19민주항쟁, 한국전쟁 소재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동안 역사소설/역사극 연구자들은 역사극의 범주를 객관적․미학적 거리화가 가능한 두 세대 이전의 과거사를 다룬 작품들로 한정하는 플레시먼의 연대적 기준3)을 주로 수용해 왔었다. 그러나 본고는 역사극의 내용을 형성하는 역사 개념이 각 시대마다 변하는 유동적 성격을 갖는다는 신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당대 제작진이나 관객 모두에게 ‘역사효과’를 유발한 연극을 역사극으로 규정한다.

    제2기의 역사극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특성은 제1기와 비교할 때 연극 양식 및 연극미학의 다변화이다. 식민지시기 역사극이 유치진, 함세덕4)이 대표하듯 다채로운 스펙터클과 낭만적 플롯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2기에는 시각적 멜로드라마 외에도 ‘사실주의적 역사극’5) ‘기록극’6), ‘인물 역사극’7), 서사극 양식8), 민중, 여성 등 하위주체(subaltern)의 시각으로 공식 역사에서 배제된 기억을 소환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극’9),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대를 소환하고 교직시키는 혼종적 양식의 역사극10), 극중극 형식을 활용한 메타연극11), 민중사관을 바탕으로 한 체제저항적 마당극 등이 등장했다. 물론 이들 양식이나 미학은 한 작품에 혼종되어 있기도 하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전환과 국내적으론 군부독재정권의 몰락으로 요약되는 1980년대 말까지 포괄되는 제2기 역사극은 그 시대적 범주와 작품 양이 지나치게 광범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본고는 1970년대까지 국립극단에서 공연된 역사극 작품만으로 한정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950년에 창단된 국립극단은 국립극장 개관작으로 역사극 <원술랑>(유치진 작)을 공연한 이래 박정희정권이 막을 내리는 1979년까지 한국 역사극의 주된 산실이었다. 총 31편이 발표되었으며, 재공연작까지 포함하면 모두 34회 공연되었다.12) 이는 74회 정기공연 중 무려 46퍼센트에 해당하는 비중이다. 이 시기 국립극단이 공무원 극장장을 비롯한 관료들의 운영체제로 레퍼터리 선정의 자율성을 확보받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역사극 편중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희정권이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국가/민족주의 담론을 지배이데올로기로 내세운 1960년대 후반부터 국립극단의 역사극 편중이 시작된다. 유신체제인 1970년대, 특히 장충동 대극장으로 이전(1973)한 후부터는 연 3, 4회 정기공연을 거의 역사극으로 채우는 극심한 편중현상이 일어났다. 유신을 선포한 이후 박정권은 문예중흥선언(1973.10)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연극의 경우 국민총화, 민족번영을 이끄는 민족연극운동을 전개하고 이 분야에서의 창작극 공연을 집중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국립극단의 역사극은 이러한 문화정책의 반영인 셈이다.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담론적 구성물이자 대극장 무대에 적합한 대형 스펙타클, 이 두가지 요소를 다 충족하는 매체였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육성되었던 것이다. 창단작 <원술랑>의 대중적 성공은 역사극이 우파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국가만들기 프로젝트의 문화적 실천에 가장 효율적인 제도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례였다. 박정희정권은 국립극단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활용하면서, 지배담론을 역사 소재와 내러티브에 실어 정당화하는 문화정치 제도로 활용했던 것이다.

    1960~1970년대 역사극의 생산과 유통을 고찰하면 크게 4가지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관주도의 생산과 유통으로서 국립극단과 대한민국연극제가 주축이 되었다. 고증과 의상, 대형 무대, 연출력, 제작비나 출연자 수 등에 있어 현대극보다 제작비와 품이 현대극보다 훨씬 더 드는 역사극의 공연여건 상, 공공지원금을 받는 국립극단과 관주도 연극제가 유리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극은 그 자체가 담론 투쟁의 장이었다. 국립극단이 주로 국난의 위기를 강조하고 국난 극복의 영웅 주인공을 내세운 국책극 성격의 역사극들을 공연했다면, 대한민국연극제에 참여한 민간극단들은 체제저항적인 대항담론, 혹은 민중 주체의 역사극들을 공연했다. 희곡심사를 통해 선정되는 연극제 공연작을 보면 역사극의 비중이 높고 경연에서도 역사극의 수상 비중이 높았다. 이는 무거운 정치사회적 주제를 다룬 역사극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제도적 인식을 말해준다. 두 번째는 ‘전통의 현대화’ 연극운동의 갈래로 전통, 설화, 민속, 역사를 소재로 한 역사극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세 번째 갈래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담론을 내재한, 민중주체를 그린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이다. 네 번째 갈래는 재야 극단들이 벌인 사회문화운동으로서의 마당극으로서, 전통연희와 민속을 연극양식으로 차용하면서 민중해방담론을 역사 내러티브 속에 담아낸 연극이다. 이처럼 지배권력의 국가주의와 대항담론인 민중주의가 헤게모니 투쟁을 벌인 장이 곧 한국 역사극의 지형도였던 것이다.13)

    이 시기 국립극단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자율적 문화정책을 펼치는 문화선진국과는 달리 관료적 운영체제에 의한 통제를 받았다. 지배정권의 이데올로기 홍보와 정권 연장을 위한 문화정치제도,14)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였던 것이다. ‘역사적 재현에는 항상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는 포스트모던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의 말에 동의한다면, 역사극 연구는 단순히 텍스트 분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역사와 연극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극은 그자체가 담론적 구성물이자 메타담론이다. 역사는 다양한 담론행위로 구성되는 장이다. 역사극 텍스트는 역사의 담론을 반영하면서도 역사의 담론 형성과정에 다시 참여하는 ‘담론에 관한 담론’, 즉 메타담론이다. 역사극을 생산하는 작가나 소비하는 관객도 자신이 속한 문화의 산물이며, 텍스트 역시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담론행위의 반영이다.15) 그렇다면 역사극 텍스트 분석은 외연을 넓혀 그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당대의 담론과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를 참조해야만 그 함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신역사주의적 관점에서 국립극단의 역사극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텍스트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를 소환하거나 기억하는 주체(극작가)의 욕망과 글쓰기방식, 텍스트 생산과 유통에 관여하는 담론에 주로 초점을 맞춰 살펴 볼 것이다.

    1)김성희,「한국 역사극의 기원과 정착--역사소설/야담과의 교섭과 담론적 성격을 중심으로」, 『드라마연구』32호, 한국드라마학회, 2010.6 참조.  2)박로아의 <3.1운동과 만주영감>, 함세덕의 <기미년 3월 1일>은 좌파인 조선연극동맹과 서울신문사가 공동 개최한 제1회 3.1기념연극대회(1946)에서, 김남천의 <삼일운동>(1946)은 조선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우파 계열의 3.1운동 소재작은 유치진의 <조국>으로, 1947년에 공연되었다.  3)A. Fleishman, The English Historical Novel,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 Press, 1972, p.3.  4)유치진의 <개골산(마의태자)>(1937-38), 함세덕의 <낙화암>(1940) 등.  5)리얼리즘 기법으로 사적인 기억을 재현한 극으로, 특히 한국전쟁을 다룬 <산불>(차범석 작, 1962), <달집>(노경식 작, 1971) 등이 이에 속한다.  6)멜로드라마 극작술을 원숙하게 구사해왔던 함세덕이 <기미년 3월 1일>에서는 극적 재미를 포기하면서까지 독립선언서의 기초과정, 만세운동을 실증적 자료를 토대로 세밀하게 재현하는 기록극 양식을 사용한다. 이재현의 <포로들>(1972), <멀고 긴 터널>(1978), <적과백>(1983)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기록극 양식으로 그린다.  7)개인을 다룬 전기적 인물역사극보다는 주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조명하는 인물 중심의 역사극이 주를 이룬다. 이순신, 유성룡, 세종대왕, 최익현, 홍범도, 이강년, 이중섭, 한용운 등이 조명되었다. <이순신>(신명순, 1966), <성웅 이순신>(이재현, 1973), <징비록>(노경식, 1975), <함성> (김의경, 1976), <흑하>(노경식, 1978), <화가 이중섭>(이재현, 1979), <세종대왕>(이재현, 1981), <불타는 여울>(노경식, 1984), <님의 침묵>(김상열, 1984) 등.  8)<전하>(신명순, 1962), <증인>(신명순, 1964), <북간도>(신명순, 1968), <망나니>(윤대성, 1969), <포로들>(이재현, 1972), <노비문서>(윤대성, 1973), <멀고 긴 터널>(이재현, 1978), <게사니>(이근삼, 1983), <적과 백>(이재현, 1984), <지킴이>(정복근, 1987), <꿈하늘>(차범석, 1987) 등.  9)<산국>(황석영, 1978), <객사>(이태원 작, 안종관 각색, 1979), <무언가>(이병원, 1980),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오종우, 1982), <언챙이 곡마단>(김상열, 1982), <공녀 아실>(강추자, 1983), <게사니>(이근삼, 1983), <검은새>(정복근, 1985), <지킴이>(1987), <침묵의 바다>(노경식, 1987) 등.  10)<전하>와 <사추기>(오태석, 1979)에서 부분적으로 활용되었고, <카덴자>(이현화, 1978), <한만선>(오태석, 1981), <언챙이곡마단>(김상열, 1982),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근삼, 1985), <불가불가>(이현화, 1987) 등에서 본격 시도되었다.  11)<전하>, <망나니>, <노비문서>, <언챙이곡마단>, <카덴자>, <불가불가>, <내일 그리고 또 내일> 등.  12)개관 이후 1979년까지 국립극단의 역사극 31편을 소재별로 분류해 보면, 신라 소재작이 6편, 조선 중종시대 1편, 세조찬탈 2편, 한국전쟁 7편, 임진왜란 4편, 식민지시대 6편, 새마을운동 2편, 병자호란 1편, 최영과 이성계 1편, 원폭희생자 1편이다.  13)김성희,「한국역사극의 이념적 성격과 그 변모」,『연극영화연구』, 현대미학사, 1995(김성희, 『한국 현대극의 형성과 쟁점』, 연극과인간, 2007 재수록) 참조.  14)김성희,「국립극단 연구1」,『한국극예술연구』12호, 한국극예술학회, 2000, 「국립극단 연구」, 『한국연극연구』 3호, 한국연극사학회, 2000 참조.  15)김종환,「스티븐 그린브라트의 신역사주의 비평」, 『셰익스피어비평』 제25권, 한국셰익스피어학회, 1993, 204쪽.

    2. 1950년대 역사극의 연속성과 장르 관습의 형성

    국립극장은 ‘민족극 수립’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해방 직후 ‘민족’이란 용어는 식민지경험이란 트라우마를 치유할 판타지이자 욕망이었다. 근대문학의 출현이 민족국가, 국민국가의 형성과 관련 있듯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언어를 매개로 한 다양한 미학적 실천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중 역사극은 과거를 호출하면서 민족의 동질성이란 코드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짓고, 민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연극양식이므로 민족담론과 가장 쉽게 접속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기 역사극의 사례가 말해주듯, 해방 이후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극 역시 당대 정치적 현실과 지배적 담론을 담지하고 있으리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역사극을 민족담론으로 읽게 만드는 것은 텍스트 자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이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문화담론이 역사극의 글쓰기와 공연에 투영되고, 관객의 읽기나 해석 방식도 그 문화담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식민지 경험을 겪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수립한 남한 정부가 가장 주력한 과업은 곧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주입시키면서 국민으로 통합하는 일이었다. 학교 교육이나 언론매체, 관립 예술단체 등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동원한 민족담론의 내면화가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의 주요 사업이었다. 역사극이 민족담론을 내장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로 받아들여진 것은 소재로서의 역사가 곧 ‘민족의 역사’의 호명과 동일시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극의 생산-유통을 살펴볼 때, 제작주체는 현재와 관련 있는 과거를 소환하고 수용주체는 우리 시대의 관심사나 현재적 관점으로 역사를 읽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역사와 민족담론의 결합은 거대담론이 해체되었다고 하는 2000년대에도 작품 생산과 읽기 양면에서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16)

       2.1. ‘민족적인 것’의 기원, 신라

    극장의 창립기념작은 그 극장과 전속극단의 이념적․예술적 지향성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의미를 지닌다. 국립극장의 창립작은 초대 극장장인 유치진의 역사극 <원술랑>으로, 통일신라의 외세에 대한 투쟁을 그린다. ‘민족극 수립’이란 국립극장의 욕망은 바로 민족에 대한 상상으로서, 민족의 안과 밖을 구분함으로써 자주독립국가의 이미지를 만들고 동포애로 결속된 공동체를 꿈꾸게 하는 것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발생한 분단과 좌우 이념의 대립, 외세의 개입이란 문제에 맞서기 위해선 통일이 시대적 과제였던 과거 역사와 민족주체의 호명이, 그리고 외세와의 싸움에서의 승리 서사가 필요했다.

    <원술랑>(유치진 작, 허석 연출, 1950)은 해방기에 유치진이 발표한 <자명고>(1947), <별>(1948)과 역사인식이나 글쓰기방식,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방식 등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당대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역사를 소환한다는 점, 시각적 멜로드라마 형식, 민족담론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시기 역사극 <개골산>(1937)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자명고>는 민족 통일을 위해 낙랑을 정복하는 호동을 그리면서 분단체제의 역사적 과제인 ‘통일’과 민족국가 재건이란 담론을 표명한다. 낙랑과 고구려가 한 민족이란 사실과, 고구려가 한나라의 속국인 낙랑을 통합해야 한다는 명분이 강조된다. 이는 반탁운동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과 민족국가 건설이란 과제와 유비를 이루는 것이다. 극협의 최고 인기작이자 달러 박스였던 <별>은 붕당싸움에 희생되는 원수 가문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다. <개골산>이 이광수의 『마의태자』를 저본으로 창작된 것처럼, 유치진의 역사극 전반에 나타나는 역사인식이나 통속적, 감상적 서사구조는 이광수와 유사하다. 원수 가문 남녀의 비극적 사랑 서사와 감상적 파토스는 유치진 역사극의 특질이며 대중성 획득의 요인이다. <개골산>의 신라 태자와 고려공주의 사랑, <자명고>에서 낙랑공주와 고구려왕자 호동의 사랑, <별>의 정도령과 구슬아기의 사랑은 모두 원수 가문 남녀의 사랑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운명적 이끌림과 나라를 위한 충, 혹은 효에 대한 의무 사이의 갈등이란 주제, 거기서 파생되는 강렬한 열정과 비극적 파토스는 눈물과 감정과잉의 멜로드라마 규약과 대중의 욕망을 각각 충족시킨다. <별>의 소재를 이루는 조선 붕당싸움은 이광수가 ‘조선민족개조론’에서 갈파한 조선민족의 결점, 또는 식민사관이 조선 멸망의 필연적 이유 중 하나로 제시한 당파싸움이다. 유치진은 <별> 공연 팸플릿에서 “감투 바람에 자칫하면 민족의 대과업을 망각하려 드는 지금 사회 정세에 비추어 이 작품에서 나는 확실 이상으로 성격화된 우리 민족의 국민 도의의 하나의 결함을 지적”17)하려 했다고 밝힌다. 이 진술은 곧 그의 역사극이 당대 현실의 알레고리라는 점과, 그의 역사인식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및 식민담론이 유포한 민족의 결함론과 동궤의 것임을 시사한다. 민족성의 결함으로 인해 조선의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정체성론, 타율성론은 식민사관의 대표적 담론으로서, 이는 식민지시기 뿐 아니라 1980년대까지의 역사영화나 TV사극 같은 대중 역사물에도 계승되었다. 왜냐하면 식민담론을 내재한 식민지시기의 소설들이 해방 이후에도 사극영화나 방송사극 등의 저본을 이루는 등 매체간의 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18)

    <원술랑>은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즉 민족과 외세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설정함으로써 당대 현실을 비유한다. 식민지시기엔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망국사가 소환되었다면, 정부 수립 직후에는 (통일)신라가 ‘민족적인 것’의 기원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지정학적으로 북한과 일치하고, 백제는 내선일체의 성지로 소환되었던 문화적 기억으로 인해, 두 나라는 민족 재현의 기억에서 배제된다. 삼국시대 역사 중 신라만을 민족 재현의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소환함으로써 해방 이후 민족에 대한 상상은 신라가 독점하게 된다. 사회학자 스미스는 민족을 창조하는 것은 반복적 행위, 즉 주기적 재생이며, 끊임없는 재해석, 재발견, 재구성이라고 말한다.19) 국립극단의 역사극만 보더라도 삼국시대를 소환할 때 신라만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데, <원술랑>, <아리나의 승천>(하유상 작, 박진 연출, 1963,) <여왕과 기승>(오태석 작, 이진순 연출, 1969), <신라인>(김경옥 작, 이진순 연출, 1971), <초립동>(한로단 작, 임영웅연출, 1977), <에밀레종>(하유상 작, 이진순 연출, 1978) 6편에 달한다. 백제나 고구려는 배제의 대상이 되어 ‘민족적인 것’에서 망각된다. <원술랑>은 바로 신라를 민족정체성의 기원에 배치한 첫 번째 역사극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번에는 유치진의 욕망 혹은 무의식을 읽어볼 차례다. <원술랑>은 화랑 5계 중 ‘임전무퇴’를 어기고 살아 돌아온 원술의 속죄와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서사로 삼는다. 원술은 김유신에게 “아버지 한번만 용서하여 주소서. 소자는 맹세코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인제는 그런 실수 하지 않고 화랑의 오계 를 받들어 국토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사오니 부디 소자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3막)하고 간청한다. 원술이 말하는 ‘실수’와 죄의식은 작가 유치진의 친일행위를 연상시키며, ‘새 시대’에 속죄하기 위해 애국으로 국가 만들기에 기여하겠다는 결의가 읽혀진다. 원술은 김유신에게 끝내 용서를 받지 못하지만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운다. 원술은 왕의 포상을 거부하고 재야로 떠나겠다고 하고, 왕은 원술의 애국을 사기(史記)에 남기겠다고 한다. 그러나 원술은 ‘계율을 어긴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후세에 전해달라며 궁을 떠난다. 국가를 위해 죽지 못한 원술의 오욕은 아버지에게 용서받지 못할 뿐 아니라 나라 전역에 회자되는 역사로 남는다.20) 작가는 원술의 ‘계율을 어긴 죄’를 용서하고 애국을 역사 기록에 남기겠다는 왕의 마지막 전언을 통해, ‘회자되는 역사’인 작가 자신의 친일행위가 삭제되고, ‘기록되는 역사’에는 새 시대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실만이 등재되기를 바라는 무의식을 드러낸다. <원술랑>의 서사는 이처럼 당과 신라의 싸움이란 외면적 서사와 국가를 위해 죽은 자와 죽지 못한 자의 대립이란 내면적 서사가 교직되어 있다. 물론 내면적 서사가 더 강조됨으로 해서 작가의 욕망이 주제적 차원으로 부각된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외부를 통해 민족의 범위를 제한하고, 내부를 통해 민족의 개념을 결정한다. 당의 침략이라는 외부가 있기에 신라는 민족 통합의 이미지로 재현되며, 건국과 국가 만들기라는 당대 역사적 과제의 최종 심급이 애국임을 표명한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민족통합과 애국이란 매개를 통해 국가주의와 결합된다.

       2.2. 대중 역사물 장르의 관습

    한국전쟁 중 대구에서 재건된 국립극장은 서항석 극장장 체제로 개편되어 개관공연작 <야화>21)(윤백남 원작, 하유상 각색, 박진 연출, 1953)를 올렸다. 서울 환도 후엔 <야화> 재공연(1958), <대수양>(김동인 원작, 이광래 각색, 박진 연출, 1959), <여인천하>(박종화 원작, 차범석 각색, 박진 연출, 1960)를 연이어 공연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야화>나 <대수양>이 모두 세조를 다루고 있지만 세조의 형상화나 인물 해석은 완전히 판이하다는 점이다. <야화>의 세조는 단종 앞에서도 칼을 빼들어 직접 단종의 충신들을 죽이는 잔인한 무인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대수양>의 수양은 악의 화신이 아니라 국가를 크게 키워나갈 원대한 계획을 가진 영웅으로 재현된다.

    역사극을 허구라기보다는 ‘실재하는 역사’로 수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관중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각기 상반된 시각으로 재현한 역사극의 연이은 공연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극단 측도 이런 우려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밀고 나간 데에는 서항석의 유치진에 대한 라이벌의식이 작용했으리라 추론된다.22)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대한 비판으로 김동인이 <대수양>을 썼듯이, 유치진은 자신을 밀어내고 극장장이 된 서항석의 <야화> 공연에 반발하듯 <사육신>(1955)을 썼고, 이에 서항석은 다시 <대수양> 공연으로 대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악의 화신으로 세조를 재현한 <사육신>은 ‘제1회 전국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한국연극학회 주최)에 지정작으로 제시되는데, 이때 연극학회장이 유치진이었다. 이런 사실은 역사극이 연극계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자 담론 투쟁의 장이었음을 암시한다. 역사극의 해석에 있어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텍스트성을 읽어내는 게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인천하>(1960)는 박종화 소설(1958-59 한국일보 연재)의 각색극으로, 역사소설과 역사극과의 즉각적인 매체간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종화는 중종시대 당쟁과 궁중 후궁들의 음모와 암투를 그린 이 작품의 집필의도를 “과거 왕조시대에서 극히 드문 현상인 「非靜的」「非安分」의 여성군상을 그려서 현대여성과 은근히 대조를 주어보려는 시도”라고 밝힌다.23) 1950년대 후반은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감독, 1956)의 대히트와 ‘자유부인 담론’이 말해주듯 여성의 사회진출과 자유분방한 풍조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때였다. <여인천하>는 당쟁을 벌이는 왕과 대신 등 남성들의 공적 공간과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 질투가 이루어지는 궁중 내부의 사적 공간을 교차하며 진행한다. 여성들의 음모, 질투, 배신 등이 극적 재미를 고조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서사를 주도하는 것은 사적 공간이다. 남성이 역사의 주체로 재현되고 여성은 배제되거나 주변화, 타자화 시키는 경향이 지금까지의 역사극의 주도적 경향이므로, 궁중여인들이 권력 창출에 헤게모니를 갖고 남성을 지배하는 서사는 기존의 수동적 여성상을 전복하는 진일보로 보기 쉽다. 그러나 궁중여인들은 정치주체인 남성을 통해서만 개인적 야욕과 사적 영역의 권력을 획득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음모가 정치를 좌우한다는 담론은역사 자체를 이념이나 정책이 결여된 사적 영역으로 국한시킨다. 이광수의 <마의태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궁중 여인들의 음모와 질투를 그린 한상직의 <장야사>(1939)가 궁중여인비사의 원조라면,24) 연극 <여인천하>도 해방이후 소설-연극-역사영화-방송사극간의 상호교섭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5) 무대극작가들이 60년대 역사영화의 작가나 방송드라마 작가 등으로 옮겨가는 등 매체간 이동을 통해 방송사극의 내러티브 관습을 만들어낸 점도 주목할 만하다.26)

    16이를테면 2006년에 제작된 영화 <한반도>(강우석 감독)나 <괴물>(봉준호 감독)은 여전히 민족과 외세의 이중 대립구도를 바탕으로 민족담론을 전개한다.  17)유치진, «동랑 유치진 전집» 8, 서울예대 출판사, 382쪽.  18)이광수의 『단종애사』(1928-29)는 1956년과 1963년에 각각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유치진도 『단종애사』를 바탕으로 역사극 <사육신>(1955)을 발표했다. 박종화의 <다정불심>(1940)도 1967년에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60년대 초반 역사영화들의 원작은 이렇듯 역사소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 역사 영화의 각본가들이 방송국으로 옮겨 방송 사극대본을 썼다. 마의태자, 수양대군, 중종과 정난정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 연산군, 사도세자, 대원군 등의 이야기는 소설-연극-영화-방송사극 등 매체를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19)A. Smith, The Ethnic Origins of Nations, New York: Basil Blackwell, 2002, 175쪽.  20)전쟁에 동원된 어린 병정이 죽기 싫다며 두려워하자, 동장이 원술의 경우를 예로 들어 훈계한다. “몃해전 석문벌 싸움에 원술 화랑이 죽음의 유예를 얻으려다가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지 않았니? 우리에게는 후퇴란 말은 있을 수 없다.”라는 처사의 말은 곧 원술의 ‘죽지 않고 후퇴한 죄’는 신라 전역에 회자하는 역사로서 교훈을 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21)윤백남, <야화>, 차범석 편, ≪신한국문학전집≫ 41, 어문각, 1973.  22)국립극장이 설립될 때, 원래 국립극장 ‘운영위원회’ 안에는 초대 극장장으로 서항석이 지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교부가 내놓은 운영위원 안에서 유치진이 지명되었다. 그 후 두사람의 관계는 회복 불능의 라이벌이 되었다. 식민지시기 극예술연구회 동인이었던 유치진과 서항석은 해방 이후 연극계에서는 이광수와 김동인의 관계를 방불케 하는 라이벌이 되어 각기 계파를 형성했다. 차범석,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마지막회)」,『한국연극』, 2000.4, 58~59쪽.  23)박종화,「<여인천하> 作者의 辯」, 국립극단 제17회 공연 <여인천하> (1959.2.26~3.2)팸플릿.  24)김성희 「한국 역사극의 기원과 정착」참조.  25)<여인천하>는 2001년 SBS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방송사극이 평론가나 매체로부터 가장 비판을 많이 받은 내용은 정치사보다는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궁중여인들의 음모나 비사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궁중 여인 비사류 방송사극은 대부분 여성코드와 거대담론 코드를 접합하여 대중성을 만들어낸다. 정치사의 거대담론 코드는 왕, 대신, 민중 등 사회 각층의 남성들이 맡는 식으로 철저히 젠더의 역할 분담에 의해 서사가 진행된다.  26)1990년대까지의 방송사극의 경향을 볼 때, <용의 눈물>(1996) 같이 당대 정치적 현실을 비유한 정치적 드라마는 남성시청자도 끌어들였지만,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오가는 서사로 짜여진다. 그러나 서사의 중심은 극적 재미와 시청률 경쟁에 유리한 ‘궁중여인비사’에 놓여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한중록>,1988 등). 이러한 내러티브관습은 연극 <여인천하>가 첫 시도였다고 보겠다. 2000년대 이후 방송사극의 내러티브관습이나 재현방식은 거대담론의 해체와 개인성 강조, 팩션, 페미니즘 등의 경향을 반영하여 이전과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3. 1960∼70년대 역사극과 민족/국가/민중담론

       3.1. 전쟁기억과 재현의 정치학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에 국립극단은 일련의 한국전쟁 소재 작들을 여러 편 공연한다. <산불>(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 1962), <순교자>(김은국 원작, 김기팔 각색, 허규 연출, 1964), <밤과 같이 높은 벽>(전진호 작, 임영웅 연출, 1967),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윤조병 작, 서항석 연출, 1967), <달집>(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 1971), <포로들>(이재현작, 이기하 연출, 1972), <고랑포의 신화>(<이끼 낀 고향>과 동일작, 이진순 연출, 1975), <학살의 숲>(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 1977) 등 8편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들은 제작진이나 관객에게 매우 가까운 과거이자 집단경험인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재현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역사’극이 아닌 ‘현대’극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역사를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사적인 기억들의 재현 역시 공적인 역사 못지않게 ‘역사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역사극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동안 역사라는 공적 영역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사적인 기억들은 공적 역사의 허구성이나 틈새를 교정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록 역사의 대안이 될 수 있다.27) <밤과 같이 높은 벽>의 작가 전진호는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전쟁이 우리들에게 남긴 커다란 상처를. 이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우리들의 가슴에 먼저 죽어간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늘 일깨워주고 있음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28) 라면서, 전쟁 기억을 말하기가 전쟁 희생자에 대한 작가의 의무라고 술회한다.

    전쟁경험이나 기억은 한 개인의 특이한 서사를 넘어 한 시대의 집합적 경험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연극이나 영화는 기억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제도화된 형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억 행위에 작동하는 타자성이다. 경험을 기억하고 해석하는 주체는 개인이지만 그 해석의 틀을 제공하고 기억의 선택과 배제를 조건 짓는 것은 사회적 규범이나 이데올로기, 지배담론 같은 다층적 타자들이다.29) 푸코는 이러한 담론의 유통과 생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권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전쟁기억을 재현하는 작품들의 분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가 왜 그 사건과 경험을 기억하고 재현하는가, 그 기억은 어떤 시각으로 재현되고 해석되고 있는가, 기억과 재현에 나타나는 시각이 시대별로 차이를 보인다면 각각 어떤 지배담론과 접속되는가의 역사성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산불>(1962)은 분단과 전쟁,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거대사 및 거대담론을 집단기억의 형식으로 재현한다. 사회학자 알박스는 집단기억은 개념과 이미지가 결합한 양태를 보이며 특정한 공간을 통해서 실체화된다고 말한다. 집단기억은 공간의식에 의해 매개된 생생한 기억으로서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구체적 정체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30) <산불>의 무대는 1951년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리산자락 산골마을로,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징집되거나 희생되어 노망난 영감과 여자들만 남아있다. 주인공 점례와 옆집 사월도 남편이 각각 국군과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나갔고, 두 집안의 어머니들은 아들들의 입장 차이 때문에 심각하게 반목한다. 이 마을은 낮에는 국군의 지배를 받고 밤에는 빨치산 대원들의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산불>의 공간은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전쟁이란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상하는 공간으로 재현된다. 이 극의 서사는 빨치산 규복이 산에서 도망쳐 나와 점례의 도움으로 대숲에 숨고, 밀회를 나누고, 사월과도 관계를 맺다가 결국 국군의 소탕작전으로 죽는 결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플롯에서 강조되는 것은 점례와 규복의 원초적 사랑을 파멸로 끌고 가는 전쟁의 폭력성이다. 이 극이 전쟁기억을 재현하면서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적 표상공간으로 지리산 마을을 선택했듯이, 주요 인물들 역시 거대사를 표상하는 인물들로 재현된다. 서사의 핵을 이루는 규복과 점례가 각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깨닫는 빨치산 출신과 국군의 아내라는 점은 이 극이 반공코드와 접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가장 먼저 발표한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국립극단도 즉각 6월에 반공극 <여당원>(철오 작, 서항석 각색, 이진순 연출)을 공연하고 팸플릿에 혁명공약을 실었다. 이렇게 국립극단은 국가의 시책을 추종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노골적인 반공담론을 내장한 공연은 60년대 말까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박정희정권의 정책과 긴밀한 관련성을 보이는 바, 박정권은 60년대 후반부터 반공주의와 국가주의 정책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차범석은 전쟁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작가였다. 그래서 반공코드를 깔고 전쟁기억을 재현하지만, <산불>의 경우 노골화시키지는 않는다. 전쟁에 희생되는 인물들이 사상과는 무관한 민중이며, 규복의 죽음도 국군에 의한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좌우익에 대해 공정한 시각을 유지한다. 이는 작가가 반공담론에 포섭되지 않았음을 언표하는 것이다. 텍스트의 무의식은 마을에 아버지-남편이 부재하는31) 텅 빈 중심을 채워줄 표상으로 민족이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호명한다. 이웃 간의 반목과 분열을 봉합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상상적 해결책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적 이미지이다. 빨치산 규복이 국군이 놓은 산불에 죽고 점례가 절망하는 결말 장면은 인위적으로 민족을 나누고 대립시킨 ‘분단’의 비극성이 극적으로 구체화된 이미지이다.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원초적인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분단과 전쟁이라면, 이러한 모순과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이미지는 곧 민족통합이라는 것이다.

    <밤과 같이 높은 벽>32)(1967)은 4.19혁명 직전인 1959년 겨울부터 60년 4월까지의 시간 배경을 선택하여 전쟁의 상처로 인한 한 가정의 비극을 조명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아버지는 전쟁 중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딸이 인민군에게 강간당하는 걸 방조한다. 강간당한 딸은 시체처럼 살아가고, 큰아들 지섭은 전쟁 때 청력과 생식기능을 상실해서 고통 받다가 자살하며, 아이를 낳고 싶은 형수는 시동생과 관계해 아들을 낳는다. 숨겨져 왔던 아버지의 허위와 위선, 집안의 비밀이 셋째아들의 추적에 의해 밝혀진다는 추리극적 구조이다. 이 극은 역사학자의 비겁함과 진실의 은폐를 서사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록되는 역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표명한다. 또 인민군에 의한 성의 유린이란 기표로 반공코드를 연결시킨다. 전쟁은 희생과 수난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전쟁 중 저질러진 비윤리적 행위들이 전후 인물들의 삶을 억누르고, 또한 반복되고 있음을 그린다. 희생과 수난, 현실회피의 반복 고리를 끊는 일은 바로 무서운 진실과 직면하고 상처를 수술하는 일이다. 셋째 아들은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진실을 추적함으로써 집안의 상처를 ‘수술’하고, 형수와 시동생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을 ‘형제들의 아이’로 받아들인다. 사학자 아버지의 ‘거짓의 역사’에 맞서 ‘진실의 역사’를 다시 써나가는 셈이다. 진실의 추적과정에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큰아들은 자살하지만, 4월에 태어난 아이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희망으로 상징된다. 여기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을 ‘수술’한 젊은 세대 주동의 4.19시민항쟁이 분단과 전쟁의 상처라는 ‘밤과 같이 높은 벽’을 무너뜨릴 것으로 기대했던 작가의 좌절된 희망을 읽게 된다.33) 그런데 이 극의 서사는 성별에 의한 사회적 역할을 이념적으로 활용한다. 인민군에게 유린된 딸, 남편의 허위를 추인하며 살고 있는 어머니, 시동생과 불륜으로 임신한 형수 등 이들 여성은 행위 주체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진실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남성 주인공의 수술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가족의 분열을 통합하는 주체적 역할을 하는 남성은 민족/국가담론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가만들기라는 유토피아적 표상체계로 재현되고 여성들은 민족 수난의 기표로 재현되는, 서사장르에서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익숙한 패턴을 보게 된다.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34)(1967)는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반공극으로 공연되었는데, 이는 정부의 반공담론이 예술표현에 강제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국립극장 공모 당선작인 이 극은 휴전 직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서부전선 고랑포라는 마을의 성당을 무대로, 인민군 잔병이 숨어들어 수녀와 신부를 볼모로 잡고 성직자들을 지배하는 상황을 그린다. 작가는 이데올로기 대립과 생사가 달린 극한상황에서도 “남과 북이 대화로 화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고자 했다. 분단이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현실적 모순에 대한 서사의 상상적 해결책은 대체로 민족이라는 상상적 이미지이다. 그런데 공연은 남한 성직자와 인민군의 대립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현했고, 성직자의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맹종하는 인민군의 비인간적 소행으로 인해 전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말은 볼모로 잡은 신부와 수녀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군인이 서로 총을 쏘며 대치하는 장면이다. 작가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군사적 적대 시대에 좌우평형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다”35)고 술회하듯,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반공담론은 극의 내용을 지배하는 형식 논리로 자리 잡는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의 국립극단 공연목록을 보면, 박정희정권의 지배담론 및 문화정책과 연동하여 공연작 선정이나 기획이 이루어진 경향을 확인 할 수 있다. 박정희체제는 해방이후 지배담론이었던 민족주의 담론 속에 반공담론, 근대화담론, 민주주의, 군사주의, 국가주의담론을 각각 편입시켰다. 60년대 중반 이후 특히 군사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된 데에는 북한의 호전적 대남 정책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의 무장침투가 66년 말부터 증가했고, 68년에는 북한 무장게릴라의 청와대 피습과 미국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이 발생했다. 또 삼선개헌 반대 투쟁 등 학생, 시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국가주의를 강화했다.36) 이와 연계해서 국립극단도 70년대는 거의 창작극 공연에 치중하고, 민족/국가주의 담론 및 반공담론과 연동한 역사극들을 주로 공연했다.

    <달집>37)(1971)은 <산불>처럼 1951년 정월 대보름 즈음, 지리산 아래 남원읍 가까운 산골마을을 무대로 삼는다. 극은 억척스런 노파 간난이와 두 아들, 두 손주와 손주며느리 순덕을 중심으로 전쟁기억과 한국근대사를 소환한다. 텍스트의 서사를 주도하는 인물은 63세의 간난 노파이다. 간난노파의 남편은 일제 때 3.1만세사건에 가담하여 일경에게 고문당해 죽고, 자신은 면회 갔다가 가슴을 풀어헤치는 치욕을 당한다. 큰 아들은 북해도에 징용 갔다 죽고 며느리는 다른 남자와 눈맞아 달아난다. 노름빚을 지고 만주로 도망쳤던 둘째 아들은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아내가 로스께에게 겁탈당한다. 이 사실을 안 간난의 학대로 아내가 자살한 이후 둘째 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큰 손자 원식은 전쟁 중 국군으로 입대했다가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 중이고, 둘째 손자는 좌익에 가담, 빨치산이 되었다. 어느 날 빨치산부대가 내려와 소, 닭, 양식을 약탈해 가고, 첫 손주며느리 순덕을 겁탈한다. 빨치산 손주는 국군의 소탕으로 죽고, 국군 손주는 실명하여 돌아온다. 겁탈당한 순덕은 간난이 친정으로 축출하자 자살한다.

    이 극은 가족을 한 단위로 해서 식민지와 분단, 이데올로기 대립, 전쟁 같은 거대사를 민중계급의 개인적 삶 속에 교직시킨다. 간난의 가족사는 곧 민족의 수난사를 표상한다. 남성은 3.1운동, 징용,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등 거대사와 관련되고, 여성은 일상적 삶을 수행해 나가는 가운데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거나 혹은 남성을 대리하는 강한 어머니로 재현된다. 이처럼 민중계급 여성은 보통 민족의 정신적 강인성을 상징하거나, 또는 수동적인 희생자로 재현된다. 남성을 대리하는 강한 어머니로 재현된 간난이 민족의 강인성을 상징하는 기표라면, 로스께에 겁탈당하는 창보의 아내나 인민군에 겁탈당하는 순덕은 민족외부와 내부의 적이라는 이중의 적을 환기시키는 기표들이다. 일제시대 이후 여성은 문학이나 연극, 영화에서 정복자나 점령자에 의해 유린당하는 희생자로 재현되어 왔다. 이때, 사회적 트라우마를 표상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여성으로 재현되는 경우, 여성은 민족의 한이나 민족의 삶을 기의하는 기표가 된다.

    <달집>은 손주며느리를 죽음으로 몰고도 광기에 가까운 삶의 의지를 보이는 ‘강한 어머니’ 간난노파를 통해 어떤 수난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강인성을 언표한다. 서사와 결합하여 맥락화되는 민족담론은 이처럼 모순적 기표를 갖는다. 어떤 맥락에서는 희생자를 통해 민족의 수난을 표상하고, 어떤 맥락에서는 지배적인 능동적 주체를 통해 민족의 강인성을 표상하며, 또 어떤 맥락에서는 전통적인 것을 통해 진보적 해방의 서사를 표방한다. 빨치산이 내려와 소를 약탈하고 순덕을 겁탈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날이 대보름날이고, 동네에서는 달집 태우는 민속놀이가 행해진다. 이처럼 전통적인 것은 수난을 떨치고 일어서리라는 새로운 희망을 약속하는 해방의 서사로 역할하기도 한다.38)

    <포로들>39)(1972)은 전쟁기억을 다룬 여타의 작품들이 사실주의 양식인 것과 달리, 서사적 기록극 양식이다. 이재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무대로 3부작40)을 발표했는데, 그 첫 작품이 <포로들>이며, 서사적 기록극 양식은 한국창작극 최초의 시도로 공연 당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41) 기록극 양식은 해방직후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이나 김남천의 <3.1운동>에서 시도된 바 있다. 그런데 <포로들>은 서사극적 요소와 기록극적 요소를 교직하여 객관적 사실성과 소격효과를 동시에 의도한다.

    이 극은 ‘5.16민족상’ 공모당선작으로, 제작비 일체를 지원받아 ‘5.16 1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려졌다. 이는 박정희정권이 5.16쿠데타의 표상체계로 민족주의를 전유하고(5.16민족상), 그 내용으로는 반공담론을 구성하여(반공포로 소재작) 기념의 문화정치(5.16기념공연)를 구사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2부 20장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이 극은 1952년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난 공산포로의 무장 폭동, 제네바협정을 준수하는 수용소 측의 포로 장악능력의 부재, 공산포로 진압작전 등을 다룬다. 극은 다큐멘터리적 구성과 허구적 구성을 교직한다. 허구적 서사는 브라운 군목이 공산포로 수용소에 납치된 반공포로 영철을 구출하려 하나 영철이 공산포로에 의해 살해된다는 내용을 다룬다. <포로들>은 한국전쟁 기억에서 오랫동안 망각되고 재현에서 배제되었던 거제도포로수용소 문제를 호명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국시인 반공주의의 정당성을 재확인시킨다. 작가는 ‘5.16민족상’의 시행 의도에 맞추어 ‘반공의 역사’를 소환한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문제가 한국전쟁 기억에서 망각되고 배제된 이유는 반공포로가 다른 전쟁참여자와 달리 인민군과 중공군으로 참전한 이질적이고 분열적 주체였기 때문이다.42) 반공포로의 유일한 기념공간인 거제도포로수용소가 오랫동안 방치된 점은 반공포로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기념이 미약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43) 한국전쟁 중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난 공산포로의 폭동에 저항한 반공포로의 투쟁은 휴전 직후 반공포로가 반공투사로 기억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반공포로가 ‘국민’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반공투쟁, 송환심사에서의 송환 거부 외에도 결사적인 반공의지의 증명이 필요했다. 그 대표적 방식이 문신과 혈서였다. <포로들>에서, 왓트군의관과 브라운군목이 가장 감격적인 장면으로 꼽는 것이 반공포로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 북송 한사반대”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모습이다.

    극은 다큐멘터리적 구성과 허구적 구성을 교직한다. 서사의 한 축인 다큐멘터리 플롯은 수용소 내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공산포로 두목격인 박상현과 이학구 총좌는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수용소 측의 야만적 행위, 모욕, 강제혈서 항의 등을 중단하라는 억지 주장을 내세운다. 허구적 서사는 반공포로 영철이 고향의 부모 때문에 송환을 선택하고, 이후 공산포로에게 납치되어 희생양이 되는 과정, 영철을 구해내려는 브라운군목의 노력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공산포로와 반공포로 및 유엔군 측 인물이나 행위는 철저한 선악 이분법으로 재현된다. 영철은 악랄한 공산포로의 희생양으로 그려짐으로써 휴머니즘적 애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공산포로 대 반공포로 및 자유진영을 선악 이분법으로 그린 이재현의 시각은 당대의 총체적 진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반공담론에 의한 기억의 선택적 재현이다. 당시 반공포로의 입장은 공산포로의 희생양뿐 아니라 반공을 내세운 국가의 희생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공포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진영의 이념적 승리를 보증하는 전리품으로 인식되었다. 석방 후 국민으로 편입되기 위해선 ‘국군’ 입대가 필수적이었고, 국가동원대상이 되어 정치적 기념물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혈서와 문신, 극우 시위, 국가동원 의례 행위 등 극단적 존재증명으로 반공신화 못지 않게 ‘위험한 국민’으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포로들>은 반공포로의 분열된 정체성과 입장 중 공산포로의 희생양 이미지만을 선택적으로 재현했다. 그렇지만 이 극은 분단, 이데올로기대립, 유엔의 개입이란 거대사적 좌표 속에 포로들을 배치함으로써 객관적 거리화를 담보한 다큐멘터리 기법, 역사에 대한 성찰, 휴머니즘적 시각의 반공포로 재현 등으로 역사적 진실성을 확보했다. 공연 당시 반공극의 도식성과 선입견을 깨트린 휴머니즘 작품이라는 평44), 한국 근대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 작품이라는 관객의 반응45) 등 호평을 받았다.

    <학살의 숲>(1977)이나 <흑하>(노경식 작, 임영웅 연출, 1978)에 이르면, 반공담론에 의한 이분법적 구도나 인물 묘사의 도식성이 한층 두드러진다. 전자가 제2회 ‘반공문학상’ 수상작이고, 후자가 제4회 수상작이란 점에서도 짐작되듯, 유신체제에서 국립극단은 국가주의와 반공, 민족담론이 결합된 역사극들로 이데올로기 교육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산불>에서 휴머니스틱한 시각으로 전쟁의 비극을 조명했던 차범석은 <학살의 숲>46)에 이르면 휴머니즘의 매개 없이 빨치산 조직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을 서사의 중심에 배치한다. 작가는 이 극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했으며, <산불>이 이 극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록으로서의 현실이 예술적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47) 현실을 해석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눈이 작가의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담론의 추종으로 획일적인 것일 때, 작품은 프로퍼갠더적 메시지와 피상적 현실인식만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국립극단의 새마을극 2편 <송학정>(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 1972), <활화산>(차범석 작, 이해랑 연출, 1974)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물의 생동감과 역사적 진실성의 구현을 통해 감동을 살려냈던 <산불>과 <포로들>의 작가가 이 새마을극들에선 피상적 현실묘사와 죽은 인물을 그려내는 데 그침으로써 “「매우 중요한 것」을「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 오도된 리얼리즘기법 혹은 ‘공민교과서적 획일성’에 머물렀던 것이다.48)

    <흑하>49)는 홍범도 독립군을 중심으로 ‘자유시 사변’을 그린 작품으로, 러시아 공산군의 음모에 휘말려 무장해제 당하고 공산군 산하 조직으로 흡수되는 과정, 그리하여 민족해방 투쟁 목표가 좌절되는 내용을 그린다.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 지도자들이 단순하고 유형화된 인물로 그려져 있고, 자유시 사변의 전모가 피상적으로 묘사된 가운데 공산주의 비판이란 메시지만이 강조된다. 인물들의 개성의 결여, 인물간의 심층적 갈등이 결여된 평면적 구성, 소재에 대한 작가의 창의적 해석의 결여로 인해 극은 죽은 인물들과 현실의 모방에 머무르고 만다. <달집>의 작가가 <흑하>에서 보여준 이러한 실망스러운 변화, 즉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리얼리티를 주조해내지 못한 실패는 재능의 고갈문제만이 아닌, 당대 지배담론에의 지나친 추종이란 점에서도 연유했을 것이다. 이 극은 민족담론과 반공담론이 결합해서 작동한 당대 지배담론을 보여주는 실례이며, 동시에 지배담론이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억압적 담론으로 기능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상의 작품들에서 보았듯, 기억과 망각, 선택과 배제의 변증법으로 이루어지는 ‘기억’ 역시 공식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3.2. 국난과 영웅 호출의 정치학

    1960~1970년대 국립극단의 역사극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은 국난의 역사와 영웅을 호출하는 경향성이다. 60년대에 주로 한국전쟁의 기억을 재현하는 극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70년대 경향은 단연 국난의 역사와 영웅 호출이다. 이순신은 박정희정권의 표상으로 기표화되면서 <이순신>(신명순 작, 1966) <한산섬 달밝은 밤에>(이은상 원작, 신명순 각색, 1969) <성웅이순신>(이재현 작, 1973)에서 국난 극복의 영웅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그외에도 <신라인>(김경옥 작, 1971)의 김유신과 김춘추, <남한산성>의 최명길(김의경 작, 1974), <징비록>(노경식 작, 1975)의 유성룡, <함성>(김의경 작, 1976)의 의병장 최익현, <손탁호텔>(차범석 작, 1976)의 서재필, <북향묘>(이재현 작, 1976)의 최영과 이성계, <초립동>(한로단 작, 1977)의 관창 등이 국난극복의 영웅으로 호출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역사극은 담론투쟁의 장이기도 했다. 역사학계의 민중사관, 문학계의 민족문학담론, 연극계의 ‘전통의 현대화’담론, 마당극의 민중담론이관 주도의 전통담론 및 영웅담론과 투쟁을 벌였다. 70년대 국립극단 공연에서도 실존인물로서의 영웅 소환이 아닌, 허구적 인물들만이 등장하는 역사극들에서 담론투쟁의 양상이 나타난다. <북간도>(1968), <객사>(1979), <무언가>(1980)에서는 서사를 주도하고 재현의 주체가 되는 인물로서 민중, 여성 등의 하위주체가 등장한다.

    1970년대에 역사극이 대거 등장한 이유는 박정희정권의 문화정책 및 당대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관련이 있다. 유신체제 선포(1972) 이후 박정희정권은 국립극장을 문화정치 제도로 활용하면서 국가주의 담론을 홍보하는 국책극으로 역사극을 활용했다. 또 1973년 장충동 신축 국립극장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이전 명동국립극장 무대의 8배에 이르는 400여 평의 대극장 무대를 채우기 위해 대형사극이 필요했다. 물론 엄청난 규모의 국립극장을 신축한 것도 북한의 평양대극장과 대형 혁명가극 <피바다> 등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50)

    1970년대 국립극단 공연은 창작극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며, 국난극복을 다룬 역사극이나 새마을극51) 등 국책극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또한 기념의 표상 연극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공연이 3.1절, 한국전쟁, 8.15광복절, 개관기념, 이순신탄신기념 등 국가의 기념일에 공연되었다. 3.1절 기념연극인 <신라인>, <북간도>, <징비록>, <함성>, <초립동>, <에밀레종>, <객사> 등은 화랑정신, 독립운동, 민족문화 보존 등 민족과 외세와의 투쟁이란 대립구도로 민족주의를 고취한다. 특징은 국난 극복의 민족 승리 서사로, 민족 통합과 강력한 민족국가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6.25기념공연인 <남한산성>, <흑하>는 국난이나 독립군 소재를 통해 외세와의 투쟁을 소환하며 민족 굴욕서사를 구성한다. <광야>는 광복 30주년기념 특별 기획 공연답게 민족해방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투쟁을 서사적으로 그리면서 결말에 민족국가의 성립을 배치한다. 이와 같이 70년대에 집중된 국책극들은 국가의 기념일과 관련된 민족서사를 동원하여 민족에 대한 상상을 국가의 통합적 이미지로 활용하는 기념의 정치를 구사했다.

    1970년대에 국책극이 유독 집중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유신체제와 긴밀한 이념적 유사성을 지닌 문화정책과 관련이 있다. 1972년에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은 예술분야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정책 전환을 의미했다. 이어서 문예정책 시행 기구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1973)이 설립됐다. 1973년 10월에 발표된 ‘문예중흥선언’의 이념적 기조는 국가주의와 민족문화담론이었다. 문학 분야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온 민족의 저력이나, 경제개발, 새마을운동 등 현대사를 창조해나가는 새한국인상을 담은 문학을 ‘민족문학’의 방향으로 설정했다. 연극 분야는 국민총화, 민족번영을 이끄는 민족연극운동을 전개하고 이 분야에서의 창작극 공연을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경우엔 국난극복, 민족의 위대성, 오늘의 새한국인상을 소재로 한 민족영화를 영화진흥공사가 직접 제작하며, 국민교육 영화를 개발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52) 이처럼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무용 등 예술 전분야에 ‘민족’예술 수립이 목표로 설정되었고, 공통된 지침은 국난극복, 민족의 위대성, 국민총화, 오늘의 새 한국인상 수립이었다. 박정권이 내세운 ‘민족문화’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통해 상상되는 이미지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가주의 담론이 민족담론을 전유한 양상에 가까운 것이다.

    3.2.1. 화랑정신과 국가담론

    분단체제의 고착화 이후 ‘민족적인 것’의 기원은 <원술랑>에 이어 연속적으로 신라로 상상되었다. <신라인>53)(김경옥 작, 이진순 연출, 1971)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전쟁 상황을 배경으로, 신라를 민족의 중심 이미지로 재현하며 통일과 강력한 국가 건설을 주제로 삼는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전권을 쥐어 잔학한 정치를 펼치는 나라, 백제는 의자왕의 황음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나라로 묘사된다.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외교와 전쟁 양면에서 전략을 발휘한다. 김춘추는 통일싸움에 당나라의 출병을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전략으로 당나라의 연호와 의복, 문물제도를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진덕여왕이 손수 짠 비단에 오언태평송을 수놓아 당 황제에게 보낼 것을 설득한다. 화랑들의 목숨을 바치는 의기, 황산벌 싸움에서의 관창의 죽음 등이 사기를 북돋아 백제에 승리한다. 마지막 막에서 무열왕이 된 춘추는 당나라군과 합세해 고구려를 무찌를 것을 유신에게 당부한다. “우리에겐 우리 개인보다 신라라는 나라와 우리 동족이 더 중하오. 그들의 앞날을 위해 우린 한 평생을 바쳐왔고 또 우리의 소원을 위해 먼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요. 그러나 그 뜻을 이루는데는 이렇게 서루가 백이면 백 모두 믿는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중요하지 않겠오?”라는 말을 남긴다.

    이렇게 <신라인>의 서사는 아직 고구려를 통합하지 못한 시점에서 막을 내리며, 고구려의 흡수 통일이 남은 역사적 과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는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민족주의를 전유한 국가담론을 전달한다.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화랑들이 자진해서 전장으로 떠나고, 서민 아내가 남편을 군인으로 나가라고 권유하며, 화랑들은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친다. 국난 극복의 주체는 무엇보다 화랑정신임이 강조된다. 황산벌 싸움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관창을 아버지가 칼을 들어 죽이려 하거나, 관창랑이 다시 뛰어들어 죽어 돌아오는 에피소드는 부자간의 정이나 목숨보다 국가가 지고의 가치라는 전언, 곧 지극한 국가주의를 전달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파토스는 철저히 배제되고 그들의 숭고한 애국심만이 영광의 아우라로 채색된다.

    <신라인>은 ‘민족’을 상상하는 1970년대 방식을 보여준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만일 민족주의의 상상이 죽음이나 불멸에 관심이 있다면, 이것은 종교적 상상과 강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연관은 결코 우연하지 않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문화적 근원을 고려하는 데에 모든 불행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한 고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54)라고 갈파한다. 화랑들의 죽음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종교적 차원의 신성성으로 기억되고 찬미된다. 그들의 신성한 죽음을 매개로 애국심으로 통합된 공동체가 형성되고, 고구려나 백제, 혹은 당나라와 구분되는 신라라는 유일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 앤더슨이 민족주의적 상상의 기원으로 “이름 모를 병사들의 기념비나 무덤”을 들었듯이, <신라인>에는 많은 군사들, 화랑들의 죽음, 마지막 장면의 무열왕(김춘추)의 죽음이 배치되며, 화랑정신 중 유독 ‘임전무퇴’의 죽음에만 위계적 중심을 놓음으로써 통일과 강력한 국가 만들기 담론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 극의 민족담론은 모순과 분열의 양상을 보인다. 어느 장면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피를 나눈 동족’임을 강조하면서도, 두 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싫어도 당나라(외세)군사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표출한다. 동족간의 전쟁에서 죽고 부상당하는 사람들은 백성이며 군인이다. 실제로 극의 첫 장면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부상당한 ‘이름모를 병사들’을 보여준다. 학정으로 고통 받는 동족, 즉 고구려, 백제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메시지가 강조되는가 하면, 당나라에 대한 사대외교가 합리화되고, 당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쳐야 한다는 춘추의 전략이 강조된다. 이런 모순이 나온 이유는 이 극이 현재적 관점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당대현실을 은유적으로 투사했기 때문이다. 잔학한 연개소문이 통치하는 고구려는 북한을 은유한다. 당나라 문물제도의 모방이 곧 ‘근대화’를 의미하는 맥락과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쳐야 한다는 무열왕의 당부를 보면, 당나라는 명백히 미국을 은유한다. 당시 공연 평도 “이 무대를 지켜보는 뜻있는 관객의 마음속엔 우리의 현실이 자꾸만 겹쳐 보였”55)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립동>56)(한로단 작, 임영웅 연출, 1977)은 화랑 관창의 영웅적 애국과 화랑정신에 대한 찬미를 보여주는 내러티브에 노래와 춤이 가미된 ‘시각적 멜로드라마’이다. 극은 관창의 목을 제단에 놓고 왕이 전담사(傳談師)의 주재로 제의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창과 함께 백제로 갔던 낭도 무랑이 자결하며, 황산벌 싸움의 승리를 촉구한다. 이러한 제의장면은 앤더슨이 말한, 이른바 민족주의적 상상이 종교적 상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실증한다. 왕은 두 화랑의 애국을 치하하며, 전담사에게 관창랑과 무랑의 업적을 길이 남겨 놓아 후세의 거울이 되도록 기록하라고 한다. 전담사는 관창랑의 실록을 면밀히 기록해서 청사에 길이 남기겠다고 하고, 왕 역시 실록을 편찬해서 열사의 전기를 엮어 지어내라고 한다. 이후 서사는 전담사가 이미 망해버린 백제에 가서 망국의 백성을 만나 관창의 행적에 대해 듣는 장면과 관창 행적의 극화라는 과거 회상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극의 서사는 관창과 무랑을 제사지내는 제의장면으로 시작해서, <원술랑>처럼 ‘회자되는 역사’를 ‘기록되는 역사’로 정리하는 역사 서술로서의 메타역사 혹은 역사극 만들기에 관한 메타극을 구성한다.

    초립동으로 변장해서 백제에 간 관창은 미모 덕분에 의자왕의 딸 월선공주의 눈에 들어 의자왕 앞에서 검무를 추게 된다. 왕을 죽이려는 찰나에 계백이 등장하여 왕을 구하고, 관창이 죽음을 당하자 월선공주도 자결한다. 이렇게 <초립동>은 관창이 황산벌싸움에서 싸우다 죽은 사실(史實)에 입각한 기존 서사와는 다른 허구적 역사 서사를 구성한다. 이에 대해 연출은 “관창이 죽는 곳이 황산벌이 아닌 백제의 사비성으로 되어 있고, 또 검무에 뛰어난 화랑으로 그려져 있다. 역사극이란 史實에 충실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 (중략) 그러나 이 <초립동>에서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은 화랑 관창의 일대기가 아니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화랑도의 정신이요, 화랑들의 애국심”57)이라 피력한다. 그런데 작가는 검무의 유래를 화랑 관창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다는 의도를 밝힌다. 『東京雜記』 풍속조에 기록된 ‘黃昌郞’의 일화는 신라소년 황창랑이 백제에 잠입하여 검무를 추며 백제왕을 찌르고 피살된 서사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검무의 유래라는 것이다.58) 서항석은 작품론에서 황창이 관창의 와전이란 설도 있다는 사료의 기록을 전한다.59) 이와같이 소재에 대한 여러 견해를 팸플릿에 실은 것은, 역사극이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가, 아니면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중요한가에 대한 역사극의 해묵은 논쟁을 보여주는 것으로 70년대 역사극관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초립동>은 검무로 백제왕을 죽이려는 장면, 적국 공주와의 로맨스, 의자왕의 향락을 보여주는 노래와 춤 등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관창과 무랑이 대표하는 신라의 화랑정신과 백제의 퇴폐적 향락을 대조시킨다. 낭만화와 대중적 흥미위주의 서사를 축으로 하면서도, 애국을 고취하기 위해 자결하는 무랑이나, 노모에 대한 효보다 국가에의 충을 우선시하는60) 관창을 통해 개인-가족-국가의 위계에서 국가가 정점에 배치되는 국가주의를 강조한다. 또 이러한 애국행위는 후세의 거울로서 역사에 기록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초립동>의 화랑정신은 국민을 국가주의적 주체로 구성하는 유신체제의 국민동원담론을 은유한다는 데 있다. 박정희정권은 호국선현과 국방유적의 정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는데, 특히 신라 화랑도는 애국전통의 대표적인 정신으로 강조되었다.61)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화랑정신은 박정권이 국민총화이데올로기로 강조한 70년대의 군사주의와 겹쳐진다. 이 극에서 백제의 멸망은 성충이나 계백 같은 소수 충신을 제외하곤 모두 개인주의적 향락에 빠져 민족과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개인보다 국가를 우위에 놓는 신라의 화랑정신과 대조된다. 따라서 백제의 비참한 망국 상황의 장면은 강력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정당화한다. 나라를 위해 죽은 관창의 제의를 왕이 직접 주관하고 ‘기념비적 역사’로 만드는 신라는 ‘아버지-국가’로 재현됨으로써 국가주의에 개인을 포섭한다.

    3.2.2. 영웅 담론의 정치학

    1960~1970년대 관주도의 민족문화 담론은 교육기관과 매스컴이 행한 이념교육과 홍보, 표상물들을 통해 대중으로 하여금 민족과 국가, 역사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비단 박정권 시대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90년대까지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위기극복의 주체로서 국가와 민족을 부각시키는 역사서술을 통해 국가와 민족은 거부할 수 없는 초역사적이고 신성한 존재라는 역사인식을 정당화했다.62) 민족의 정체성 확립(민족주체성)의 강조는 일제 치하에서 강요받은 식민지 정체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곧 ‘국민화 프로젝트’의 과제에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1960~1970년대에는 관주도로 전통문화의 복원사업과 더불어 전통담론이 강조되었다. 전통이란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어 민족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는 욕망, 곧 현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상상된 문화의 총체이다. 따라서 어느 시기, 그리고 누구의 과거를 되살려 내느냐에 따라 상상되는 정체성의 성격이 달라진다. 선별하는 주체의 의도에 따라 정체성의 성격이 규정되고, 동시에 선택된 전통문화나 역사에 따라 주체가 상상하고 사유하게 된다는 점에서 전통과 역사는 주요한 담론으로 작동한다.63)

    국가기관인 국립극장은 민족정체성 확립을 위해 역사 중 신라를 선택적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국난 국복과 민족의 위대성을 상상하게 하는 서사로 특정의 역사를 선별하여 호출했다. 그중 한 갈래가 민족의 성웅 이순신과 세종대왕으로 대표되는 영웅 호출로서 ‘기념비의 정치학’64)이고, 또 한 갈래는 식민지시기의 독립투쟁 서사이다.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작인 <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허규 연출, 1973)은 유신체제의 역사극이 국가주의 담론, 대형 스펙터클, 기념의 정치, 이렇게 삼자의 결합관계로 형성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주지하듯 이순신은 박정희체제에서 가장 신격화된 영웅이자 박정희의 롤모델 이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했고, 5학년 때는 춘원이 쓴 책을 읽고 이순신을 숭배하게 되었으며, 6학년 때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숭배하게 되었음.”65)이라 기술한 바에서 짐작되듯, 박정희의 자아는 일본과 한국, 유럽의 국가주의 영웅을 숭배하며 형성되었다. 1966년에 박정희는 현충사 종합정화에 관한 지시를 내렸고, 현충사는 1975년까지 4차에 걸친 사업을 통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이순신 신격화 작업은 1965년 한일협약 체결로 박정권의 친일외교에 반대하는 민중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국립극단도 국책에 발맞추어 이순신을 호출한 첫 번째 역사극<이순신>(신명순 작, 이진순 연출, 1966)을 공연했다. 이 작품은 대본이 남아있지 않은데,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을 저본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66) 이후 박정희 못지 않게 이순신 숭배주의자인 이은상의 <한산섬 달밝은 밤에>67)(이은상 원작, 신명순각색, 1969)가 ‘충무공탄신기념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이순신이 반복적으로 호출된 이유는 박정희체제의 이순신 숭배 담론, 군인 출신 박정희와의 동일시 표상, 박정희의 친일이미지를 삭제하고자 하는 욕망 등이 중층적으로 혼합된 결과였다. 이광수의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조선 지배집단의 무능과 부패, 백성의 허약함을 강조한다. 소설의 대부분 분량이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는 대신들, 전쟁이 나자 싸워보기도 전에 첩들까지 대동하고 도망가는 나태하고 비겁한 수령과 장군들, 조선지배층과 왜군의 수탈로 빈궁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처참의 극치로 그린다. 오직 이순신만이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성웅’으로 백성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자, 나라를 위해선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나라를 생각함보다 제 몸을 생각함이 많고 공번된 마음보다 남의 잘함을 시기함이 많으니”68)라는 유성룡의 편지처럼, 의인 이순신과 탐욕, 부패, 시기,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조선지배층 및 백성과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소설적 구현이기도 하다.69)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왕조와 관료사회의 무능, 부패의 이미지, 비겁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백성 이미지에 대한 강조는 이순신의 영웅성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작의를 반영한 것이지만, 이러한 역사인식은 일본제국주의자의 식민사관과 동궤의 것이기도 하다.70) 이광수의 소설에 깊이 침윤된 박정희는 충무공 탄신기념사에서 ‘간악한 조신들’과 이순신의 관계를 현재의 야당세력과 박정희체제의 관계로 치환하기도 했다.71)

    <성웅이순신>72)은 박정희의 인식과 비슷하게,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강조하며 이로 인해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나라가 위태로워졌음을 부각시킨다. 2부 12장에 이르는 대작으로,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고도 서인의 모함을 받는 어전회의로부터 시작해서 고문과 백의종군, 왜군과의 싸움과 노량해전에서의 순국까지의 1년간을 그린다. 서사는 관념적 대사로 이루어진 조신들의 당파싸움, 이순신의 애국충정, 이순신과 그의 군관, 병사들과의 관계,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군의 횡포와 일본과의 유착관계, 해전의 스펙터클한 재현에 주력한다. 장면 나열식으로 치열한 전쟁상황과 이순신의 영웅성을 주도적으로 재현하는 만큼 극적 갈등이나 이순신의 내면, 인간적 면모는 배제된다. 대형무대를 채우기 위한 스펙터클과 영웅성 부각에 급급한 국책극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점은 당시 공연 평에서도 확인된다. “이순신을 정작 위인으로 만들어야 할 주위의 인물들을 살리지 못했고 이순신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민중을 다이너믹하게 처리하지 못했”73)다든지, “인간 이순신의 극화에 있어 서술적인 전기식이어서 극에서 필요한 인물과 인물간의 충돌이나 갈등이 없는, 다시 말하면 드라마가 없는 무대”74)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 극은 임진왜란을 겪는 백성의 경험이나 입장, 이순신과 백성과의 관계는 배제하고 오로지 지배층의 입장이나 사건만 선택적으로 조명하는 ‘위로부터의 역사’ 관점을 고수한다. 이순신은 ‘간악한 조신’이나 원균의 모함을 받아도, 모진 국문을 당해도, 명나라 장수들의 사리사욕을 보아도 진노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고 오로지 나라 걱정에만 여념이 없는 성인 이미지로, 지고의 국가주의자로 재현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군관들은 이순신의 숭고함은 우리 민족의 마음과 얼 속에 살아 만대에 유전할 것임을, ‘역사의 면류관’을 쓸 것이라는 말로 이순신의 불멸성과 성화를 선언한다. 죽었던 이순신도 다시 등장하여 ‘내 나라 내 강산을 내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숭고한 의지를 선언한다. 이때 관객은 해석의 틀을 결정하는 선행담론, 곧 유신체제의 주도 담론에 의해 연극 대사와 장면의 의미를 읽게 된다.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담론에 포획되어 관객은 이순신의 대사를 자주국방과 민족주체성의 메시지로 해석하게 된다.

    국난과 영웅의 호출은 1970년대 관제 역사극의 보편적 타입으로, 국난극복의 서사가 주로 극화되었다. 그러나 ‘굴욕의 서사’도 1편 극화되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75) <남한산성>(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 1974)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주전파와 주화파의 파쟁을 그린다. 그동안의 역사 기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민족적 저항을 주장한 주전파를 긍정적으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던 주화파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게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이 극은 명분보다는 백성의 고통을 이유로 청에 대한 항복을 권유한 주화파 최명길을 긍정적으로 그림으로써 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 때문에 이 극은 “한국사극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고, 사극이 가야 하는 방향에 귀중한 암시를 던져주었다.”76)라는 평을 받았으며, 한편으론 “경계해야 될 것은 고정된 낡은 편견을 깨트리려는 노력이 새로운 편견과 독단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역사의 왜곡이 될 수도 있다.”77)는 우려를 받기도 했다. 최명길은 “역사엔 죄인이며 역적으로 기록”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국권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화친을 주장하는 현실주의적 정치가로 재현된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 사대부들의 허위의식과 실리보다 명분만 따지는 유교적 명분론이 전란과 민중의 고통을 야기한 원인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굴욕의 서사를 소환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역사 이래 수없이 반복되어 온 강적의 침략 속에서 민족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단련을 그토록 받은 이 민족이건만 羞悔를 받지 않기 위한 준비엔 남달리 게으르다.”라면서, 민족적 굴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작가를 비롯한 제작진은 이 극을 ‘민족사극’으로 명명하며, 아무리 이민족에 굴욕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역사를 이어온 것은 바로 민족이라는 공동체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극은 인조의 항복을 이민족에 대한 굴욕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결단으로 의미부여 한다.

    위 인용은 인조로 하여금 항서를 쓰게끔 설득하는 최명길의 대사이다. 君父에겐 모든 것을 빼앗겨도 국가와 백성이 남아 있으며, 왕과 백성에게 공통으로 흐르는 것이 ‘민족의 피’라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과 국가는 초역사화, 신성화 된 것으로 상상된다. 극은 치밀한 사료 조사를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성에 중점을 두는데, 극의 전편에 작가의 계몽적인 민족담론이 울려 퍼진다. 극의 마지막 대사는 “우리의 소망은 우리 후손으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오이다. 전하,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죽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가슴을 크게 펴고 눈을 부릅뜨고 이 역사의 한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 역사의 심판 앞에 떳떳이 서십시오.”라는 최명길의 대사이다. 작가가 이 굴욕의 역사를 소환한 이유는 후손인 우리가 굴욕의 역사를 거울삼아 부강한 국가 만들기에 매진해야 한다는 민족/국가담론의 호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연은 ‘민족사극’이라는 명명으로, 또 팸플릿에 실린 역사학자의 해설이나 작가, 연출자의 글을 통해 관객에게 이 역사극 읽기의 틀을 민족담론으로 제시한다. 역사학자 최창규는 이 공연에 부쳐, “민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 앞에서 언제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 민족의 활력 때문에 역사에 시련이 있어 어려울 때마다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굳센 통합에의 활력이 나왔던 것”79)이라며, 남한산성의 굴욕을 민족의 생존과 긴 역사성, 통합이란 대전제를 위한 방편으로 수렴시킨다. 민족이 곧 민족국가를 의미하는 맥락에서 민족담론은 70년대 국가담론에 전유된다. 민족담론에 포획되어 극을 읽는 방식은 당대 평론가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산성을 쳐들어온 군사들은 얼마 안가서 멸망을 했지만 항복한 우리는 지금까지 끈질기게 소생하고 있다. 이 힘은 아무리 봐도 최명길의 현실주의 때문은 아닐 것이다.”80)라는 지적은 제작진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담론과 동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국가담론은 작품을 쓰고 제작하는 쪽이나 읽고 해석하는 쪽, 양자에게 똑같이 의미를 부여하고 상식화시키는 문화구조로서, 주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2.3. 영웅담론과 민중담론의 제휴

    1970년대 중반 이후 역사극에는 영웅 호출이 민중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하며 영웅과 민중이 손을 잡을 때 진정한 역사의 추동세력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이때 주인공은 영웅사극보다 영웅성이 훨씬 약화되어 재현되거나, 평범한 인간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1970년대 역사학계가 변혁운동의 주체로서 민중을 ‘발견’하고, ‘민중적 민족주의’의 가치에 주목81)한 이래 민중담론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영웅이 역사의 주체로 그려지던 일방적 시각이 교정되고 민중과의 관계가 부각되거나 민중주체가 역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바로 영웅담론과 민중담론의 제휴, 혹은 담론 투쟁 양상을 말해준다.

    <징비록>82)(노경식 작, 이해랑 연출, 1975)은 임진왜란을 유성룡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지만, 유성룡은 이순신처럼 지고의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에 타협하는 무기력한 영웅으로 재현된다. 전란 중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전장의 현장기록을 남긴 정치가, 명의 구원병을 청한 외교가, 이순신을 발탁하고 후원한 안목있는 정치가로서의 유성룡이 그의 회고록 『징비록』에 의거, 사실적으로 재현된다. 특히 정치가로서의 유성룡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유성룡, 두가지를 다 재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 극도 장면나열식 구성으로 극적 긴장과 충돌이 없고, 유성룡의 입체적 성격과 내면 형상화가 미흡하다는 점에서 <성웅이순신>류의 역사극 글쓰기와 큰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명대사와 소탈하게 우정을 나누는 장면, 벼슬을 버리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산골 집 장면 등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영웅주인공의 이미지는 민중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함성>83)(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 1976)은 1906년 의병장으로 투쟁하다가 1907년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절한 면암 최익현을 조명한다. 서사극적 기법을 사용하여 ‘무대를 통한 역사강의’84)를 펼치는데, 최익현의 고결한 선비정신과 애국심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최익현이 일제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송치되는 서사는 ‘민족 굴욕의 서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민중(‘흰옷 입은 무리들’)이 모여들어 치르는 최익현의 장례장면을 극의 시작과 결말장면에 배치하여 ‘민족 승리의 서사’로 치환한다. “선생님을 모신 우리들은 결단코 진 것이 아니올시다. 우리들은 이겼읍니다. 선생님 때문에 우리들은 이겼읍니다.”라는 대사는 영웅주인공과 민중의 연합으로 민족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작가의 전언을 함축한다. 마지막 장면은 다양한 계급의 민중들(선비, 상인, 종, 천기 등)이 최익현의 상여를 메고 조상하며 조사를 낭송한다. 면암의 죽음은 “민족의 수난과 고통”이 아니라 “그것들의 극복이며 영광”으로 찬미된다. 따라서 이 마지막 장면의 장례 제의는 첫 장면이 슬픔의 파토스로 재현되었던 것과는 달리 민중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활력과 희망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함성>은 면암의 애국심과 숭고한 인격, 일본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극단적인 충절의 재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민족영웅의 면모를 그려내는 동시에 민중과의 연계를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영웅사극과 다른 민중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최익현의 항일투쟁이 왕조에 대한 충으로서 봉건사대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85)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당대 국가담론과 접속된 관제 사극으로 읽혀지게 만든다.

       3.3. 허구적 인물, 하위주체와 민족/국가에 대한 상상

    역사극은 역사에 실재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도 하지만, 허구적 인물을 창조하여 역사를 조명하기도 한다. 연극의 구조 안에서 사실성과 허구성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극의 스펙트럼은 당연히 매우 광범하다. 사실성과 허구성을 어떤 비율로, 어떤 시각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역사극이 만들어진다. ‘사실적 역사극’, 사실적 역사배경 속에 허구적 인물과 사건을 재현한 ‘시대극’, 사실 역사를 전복하는 ‘대체 역사극’, 허구적 역사와 인물을 그린 ‘환상적 역사극’, 역사와 허구를 결합시켜 역사의 시뮬레이션을 시도하는 ‘팩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떤 종류의 역사극이든 공통점은 역사를 연극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여 ‘연극적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국립극단의 역사극 중 <북간도>, <광야>, <객사>는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식민지 기억을 재현하기도 하고, 민족 승리의 서사를 구성하기도 하고, 민중주체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그린다는 점에서 실존인물의 역사극과 구별된다.

    <북간도>86)(안수길 원작, 신명순 각색, 1968)는 만주국 기자를 역임했던 안수길의 체험이 바탕이 된 대하소설 『북간도』의 각색극으로, 공적 역사와 허구적 인물들의 사적 역사를 교직한다. 원작 소설은 전5부로 구성된 간도이민사로서, 이한복 일가의 4대에 걸친 가족사-연대기 형식을 취한다.87) 2부 19경으로 구성된 연극 <북간도>는, 1부는 간도의 비봉촌을 배경으로 이한복의 아들 창윤 중심의 서사, 2부는 20년과 30년 후의 용정을 배경으로 창윤의 아들 정수 중심의 서사를 보여준다. 1부의 서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에게 청인들이 변복과 변발, 귀화를 요구하는데, 이한복영감이 민족정신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한다. 손자 창윤이 되놈꼴로 머리를 깎여 돌아오자 충격 받아 이한복이 쓰러져 죽는다. 10년 후, 성인이 된 창윤은 비각을 불 지르고 도망쳐 용정 사포대에 입대한다. 이후 비봉촌으로 돌아와 사포대 발족에 앞장서고 청국 군대와 싸운다. 감옥에서 창윤은 청국 독립투사 왕수산으로부터 국제정세를 듣고 청국과 조선이 손을 잡고 일본을 물리쳐야 함을 깨닫는다. 조선이 주민들은 일본인들의 등쌀에 유랑민이 되어 떠난다. 2부의 서사는 다음과 같다. 20년후, 용정으로 이주해 냉면옥을 차린 창윤은 해설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조선인의 비극은 바로 못 배운 데 있다는 걸 깨달아서 아들 정수를 공부시킨다고 말한다. 정수에게 애인 영애가 찾아와 용정 학교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다. 청국군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만세군중에게 총을 쏘며 학살한다. 청국의 만행이 일본 정부의 조종에 따른 것이었음을 안 정수는 동지들과 일본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에 합류한다.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조선인을 학살한다. 10년 후 정수가 집에 돌아오자 창윤은 아들의 귀환을 나무라고, 엄마는 아들에게 자수를 강권한다. 창윤의 임종 때 5년간의 징역을 마치고 정수가 돌아온다. 정수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민족정신을 이어나갈 임무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자각한다.

    <북간도>는 원작의 복잡한 서사를 이한복의 손주 창윤과 그 아들 정수의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압축한다. 간도협약, 사포대 발족, 만세운동, 독립운동 등 공적 역사와 4대에 이르는 한복 일가의 사적 역사를 함경도 사투리와 생활풍속 재현으로 교직해 나간 구성은 흥미롭다. 그러나 문제는 이 극이 연극적 구성이 아닌, 소설을 연극으로 보여주는 차원에 머물고 만 각색극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스토리 전달에만 급급하고 극적 액션이나 생동감 있는 인물창조 및 극적 충돌을 형상화하지 못했다. 민족적 정체성, 민족주의적 투쟁 같은 담론이 인물 성격과 극적 액션 속에서 형상화되지 못하고 설명적 대사로 발화되기 때문에 연극적 감동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극은 만주를 ‘민족의 故土’, 즉 기원의 영토이며 조선민족이 개척한 땅이라는 걸 간도이주민의 삶 속에서 그려냄으로써 민족담론의 영역을 확장한다. 만주라는 기원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민사는 “영토와 주권의 상상적 확장을 기도”한 것이며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만들고 통합된 민족을 상상케 하는 민족이야기이다.88) 청인의 풍속을 따르고 귀화를 강요하는 청국과의 투쟁, 조선인이 개척한 땅을 삼키려는 일본인과의 투쟁 등, 극의 서사는 민족정체성을 지키려는 조선이주민의 수난과 굳은 의기, 항일투쟁사를 보여준다. 민중주체를 내세워,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만 만주를 ‘조선인이 개척한 잃어버린 영토’로 기억하고 재현하는 이 극은 ‘아래로부터의 역사’ 관점과 민중적 민족주의 담론을 보여준다. 4대의 가족서사는 ‘민족=가족’이라는 등식으로 구성되어 ‘가족-민족 로망스’구조를 만들어낸다. 국가가 부재한 현실과 고아의식을 대체할 상상적 아버지로 ‘민족’을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한복이 간도를 조선인의 땅으로 상상하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만주가 조선 땅이라적힌 ‘정계비’를 보았기 때문으로, 간도 이민 1세대인 한복의 민족의식은 기원의 아버지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간도이민들이 ‘되놈’되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이민족과 투쟁하는 동력은 ‘고아-국가가 없는 현실’을 대체하고 그들의 수난을 보상해줄 ‘좋은 아버지-민족’이란 판타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야>89)(김기팔 작, 이해랑 연출, 1975)는 ‘광복30주년 기념연극제’에서 공연된 작품으로, 한일합방 직후 백두산 아래 만주 땅으로 이주해온 이광석 일가의 독립운동을 그린다. 1918년 독립군이 일본군 주재소를 습격, 승리해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고, 이광석은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소나무를 심는다. 독립군이 군자금 난에 빠지자 아편 재배로 조달하자는 인물과 반대파 간에 충돌이 일어난다. 그러나 동포애를 일깨우는 이광석의 중재로 화해한다. 이광석이 군자금을 모으러 한국에 간 후, 마적떼가 아편을 뺏으러 쳐들어왔다가 독립군의 높은 뜻에 감복하여 탄약을 선물로 주고 간다. 이광석이 돌아와 3.1만세운동 소식과 김좌진장군의 광복군 소식을 전하자, 마을사람들은 광복군에 합류하러 떠난다. 2막은 13년 후의 시기로, 마을에 남은 여자들과 이광석 등은 일본 등쌀에 청국인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광복군에 합류했던 광석의 아들 영준과 손자 바위 등이 돌아온다. 광석의 딸 분례의 혼례날, 일본군이 습격해와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다. 3막은 14년 후의 시기로, 이광석은 이제 늙고 병들었고, 장성한 바위는 군사훈련에 열심이다. 광복군에 갔던 강나팔수가 돌아와 소식을 전한다. 광석의 아들 인준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있고, 동포들의 반목, 김좌진장군의 암살 등을 전한다. 그해 9월, 노환으로 누워있던 광석은 꿈에 계시를 받아 태극기를 들고 백두산 영봉으로 오른다. 이때 인준이 돌아와 조국 광복 소식을 전한다. 광석은 태극기를 흔들며 외친다. “그깟 서른 여섯해. 우리는 기다릴 수 있었어. 기다렸지 않은가. 우리는 기다렸지 않았오? 자, 이제 고향으로 가야지. 내 고향으로 가야지. 우리가 이겼으니까. 이겼어!”

    <광야>의 서사는 국권 상실 후 만주로 이주해온 민중의 독립투쟁과 수난사를 그리다가 결말에 민족의 승리를 배치한다. 그들이 정착한 공간은 ‘백두산 영봉 아래’의 만주땅으로서 <북간도>에서처럼 민족 기원의 영토로 상상된다. 작가는 독립투쟁을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민중극’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민중, 혹은 ‘한국인’은 모든 계급과 지식과 성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한국민족’과 동의어이다.

    <광야>는 애국지사들의 만주 망명, 마을 개척, 상해임시정부와의 연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청년들이 빠져드는 에피소드, 만주사변, 중일전쟁 발발, 상해임시정부와 장개석의 항일 공동 투쟁, 광복군 30만 양성계획 등 일제 강점기의 공적 역사와 이광석 일가를 비롯한 허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교직한다. 애국지사들의 민족혼과 독립의지는 지극히 영웅적으로 재현된다. 독립투사의 전형으로 재현된 이광석은 양반 출신이지만 만주 이주 후엔 궁핍과 수난을 겪는 민중이다. 이러한 인물 재현은 영웅담론과 민중담론의 제휴를 드러낸다. 결말장면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36년을 기다려서 결국 승리했다는 이광석의 부르짖음은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직설적인 행위인 동시에, 정부의 이데올로기인 민족/국가담론으로 반향하는 메시지이다.91) 36년간 기다리고 투쟁해서야 얻은 ‘민족 승리’의 감동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극의 서사는 애국지사들의 패배와 처절한 수난의 연속을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인간적 면모를 배제하고 민족혼의 화신으로 재현한 평면적 인물창조, 설명적 대사나 웅변으로 사건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야말로 이 극이 국책극이란 점을 입증한다. 당시 공연평은 “관객들에게 독립운동의 애환이 주는 깊은 감동을 안겨주지 못한 근본원인은 독립을 위한 혈투의기로보다는 그 혈투 끝에 오는 패배의 기록에 드라마의 중점을 둔 때문"92)이라 지적했다. 민중주체를 내세워 독립투쟁과 민족 수난사를 그렸지만 극적 액션과 생동감 있는 장면화가 아닌, 관념적 인물창조와 설명적 대사로 ‘광야의 초인’을 그렸다. 국책극을 공연해야만 했던 국립극단의 입장과 민족/국가담론이 연극의 창의력과 생명력을 억압한 사례인 것이다.

    <객사>93)(이태원 원작, 안종관 작, 이해랑 연출, 1979)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으로 하위주체, 특히 여성주체를 서사의 중심으로 삼는다. 영웅담론과 민중담론이 경합을 벌이다가 70년대 말에 이르면 민중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역사극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역사극에는 궁중여인비사를 그린 작품이나 <야화>, <산불>, <달집> 등 소수 작품을 제외하고는 여성주체가 등장하지 않는 극심한 젠더의 불균형을 보여 왔다.94) <객사>는 대감부인에서 하인의 부인으로 신분을 바꾸고 향교지기로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벽순이 서사를 주도한다. 동학운동에 참여해 죽은 최대감의 부인 현순은 벽순으로 이름을 바꾸고 하인 판돌과 위장부부가 된다. 자식들 이름도 모두 판돌의 자식들 이름을 따서 고친다. 극의 서사는 1920년을 전후한 몇 년간을 배경으로, 일제가 향교를 헐어 신사를 건립하려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벽순 가족과 일제와의 충돌을 핵으로 삼는다. 판돌의 딸 영달과 결혼한 안목수가 신사 건립에 협조하고, 벽순은 그 때문에 마을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향교에서 쫓겨나 객사로 옮긴다. 향교를 지키려던 판돌은 일경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자결한다. 영달은 친정식구들에게 닥친 비극이 자기 때문이라 자책하고, 신사 건립을 막기 위해 준공식 하루 전날 신사에 목매달아 죽는다. 일본인 경찰서장은 영달이 향교에서 죽었다고 위장하기 위해 벽순의 협조를 구하지만 벽순은 거부한다. 벽순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아들들은 죽거나 도망간다. 만신창이가 되어 벽순이 객사로 옮겨온 날, 신사가 불탄다. 벽순은 죽은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고, 딸 인달만이 남아 벽순을 지켜본다.

    <객사>의 서사는 향교와 신사의 대립으로 추동된다. 민족주의가 항상 ‘전통’ 혹은 ‘우리것 지키기’와 관련되어 상상되어 왔다는 점에서, 향교와 신사의 대립구도는 전형적인 민족담론의 반영이다. 향교지기 벽순 가족의 수난은 한국 민족의 수난을 상징한다. 이 극에도 가족=민족의 등식으로 전개되는 ‘가족-민족 로망스’구조가 작동한다. <북간도>보다는 훨씬 작은 이야기를 통해 민족수난사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극적 갈등과 액션이 비교적 뚜렷하다. 그러나 민족담론에 의해 서사가 추동되기 때문에 정작 문제적 인물인 여성주체 벽순의 성격과 신분 갈등, 내적 갈등이 형상화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양반 여성이 종과 결혼하여 천민으로 신분이 격하되는 사건은 봉건제도의 붕괴를 암시하는 극적 사건이다. 남편이 봉건적 질서와 계급모순을 타파하려 한 동학운동가였다는 사실이나 벽순이 양반 신분을 버리는 것은 계급문제로 나아갈 서사적 동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극은 벽순의 신분격하에 따른 갈등이나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 판돌과의 위장부부 생활에 내재한 계급문제는 배제하고, 오로지 향교를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여성으로 벽순을 그려내는 데만 집중한다. 이와 같이, 민족을 단일한 주체로 구성해내는 민족담론은 민족 내부의 이질적인 집단들을 단일화시키는 지배담론으로 작동하면서 민족 내부의 다성성에 대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95)

    27)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휴머니스트, 2005, 23쪽.  28)전진호,「作者의 辯」, 국립극단 제47회 공연 <밤과 같이 높은 벽> 공연(1967.3.1~7) 팸플릿.  29)김수진, 「시선의 정치로서 기억, 기억의 재현을 통해 쓰여지는 역사」, 문화사학회, 『역사와 문화』2호, 2000, 16쪽.  30)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49~50쪽.  31)이 마을에 남아있는 남성으로는 노망난 노인인 점례네 시할아버지가 유일하다.  32)전진호, <밤과 같이 높은 벽>, ≪인종자의 손≫, 연극과인간, 2005.  33)보다 자세한 분석은 김성희, 「전진호론--전쟁의 상처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한국희곡』, 한국희곡작가협회, 2007 가을호 참조.  34)윤조병,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윤조병 수상 희곡집≫ 2, 연극과인간, 2009.  35)윤조병, 「작가의 뒷소리--긴 보태기」, ≪윤조병 수상 희곡집≫ 2, 379쪽.  36)전재호, 「박정희 체제의 민족주의: 담론의 변화와 그 원인」, 『연례학술회의 논문집』, 한국정치학회, 1998, 95~103쪽 참조.  37)노경식, <달집>, 노경식 희곡집 1 , ≪달집≫, 연극과인간, 2004.  38)<포로들>에서도 반공포로들이 고향 생각을 할 때, 갑자기 농악이 울리며 포로들이 함께 농악놀이를 한다. 이 돌발적인 환상 장면은 수난을 떨치고 일어서는 해방의 의지나 희망을 상징한다.  39)이재현, <포로들>, ≪서울극작가 그룹 대표희곡선≫, 집현전, 1984.  40)<포로들>, <멀고 긴 터널>(1978) <적과 백>(1983)의 3편으로, <포로들>은 국립극단, 나머지 두 편은 제2회, 제8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공연되었다.  41)한상철, 「70년대의 연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연극의 쟁점과 반성』, 현대미학사, 1992, 263쪽.  42)반공포로는 18만 명 정도로, 북한군 출신 15만 명, 중공군 출신 2만 2천명이었다.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는 4만 8천명 정도였다.  43)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에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2년에 이르러서 유적공원으로 재단장 되었다. 그러나 반공포로의 반공투쟁을 기념하는 기념탑이나 조형물은 설치되지 않았다. 반공포로는 박정희정권 시절 두 번의 기념일과 각종 반공행사를 통해 기념 되었지만, 반공포로 자체에 대한 기념이 아니라 국가적 반공행사의 일환이었다. 반공포로를 비롯한 한국전쟁 포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반공담론이 약화되면서 통일, 내지 전쟁희생자 담론이 부각되었다. 반공포로에 대한 국가적 기념도 사라졌다. 이동헌, 「한국전쟁 후 ‘반공포로’에 대한 기억과 기념」, 『동아시아 문화 연구』,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06 참조.  44)김문환, 「국립극단: <포로들>」, 『서울신문』, 1972.5.19.  45)안경호, 「50」, 『국립극단 50년사』, 연극과인간, 2000, 130쪽.  46)차범석, <학살의 숲>, 차범석 제4희곡집 ≪학이여 사랑일레라≫, 어문각, 1982.  47)<산불>과 <학살의 숲>은 비슷한 공간(지리산 자락 산골마을)에서 벌어지지만 재현방식이나 주제의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학살의 숲>과 <산불>을 2부작처럼 거론한 것은 이 시기 반공담론을 내면화한 작가의식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48)이태주, 「<활화산>, 오도된 리얼리즘」, 『신동아』, 1974.4, 315쪽.  49)노경식, <흑하>, 노경식 희곡집 1 ≪달집≫, 연극과인간, 2004.  50)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준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북한의 평양대극장과 <피바다> 등의 대형 가극 공연을 보면서, 체제경쟁과 남북 문화교류를 위한 대형사극 계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1973)과 세종문화회관(1974)은 그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건립되었다. 국립극장에서는 대형 사극이,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전속단체 예그린악단을 통해 대형 역사 뮤지컬이 제작된다. 이들 사극, 뮤지컬은 국가주의 담론을 내장한 국책극이다. 예그린악단의 창립과 공연활동에 대해서는 김성희,「한국 최초의 뮤지컬단 예그린악단」, 『한국현대극의 형성과 쟁점』, 연극과인간, 2007 참조.  51)70년대 문화정책에서 강조한 ‘오늘의 새한국인상’ 창조는 곧 새마을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국립극단 연극의 경우 농촌근대화를 이루는 새마을운동의 실존인과 실화를 다룬 <송학정>(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 1972), <활화산>(차범석 작, 이해랑연출, 1974)에서 호출된다. <활화산>의 주인공은 실존인물 김정숙을 모델로 한 것으로, 새마을운동 대회에서 김정숙의 사례를 박대통령이 듣고 감동을 받아 연극으로 만들라는 지시에 의해 제작된 것이었다. 물론 작가와 연출, 배우들의 취재는 관의 지원을 받았다. (고설봉, 「국립극단과 나」, 『국립극단 50년사』, 169쪽.)  52)오명석,「1960-70년대의 문화정책과 민족문화담론」,『비교문화연구』제4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1998, 135~136쪽.  53)김경옥, <신라인>, ≪공연날≫, 금동재, 1976.  54)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출판, 2002, 30쪽.  55)김문환, 「국립극단: <신라인>」,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 『7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1)』, 화일, 1989, 101쪽.  56)한로단, <초립동>, 국립극장 소장 대본, 1977.  57)임영웅,「연출자의 말--史實과 극적인 현실」, 국립극단 제79회 공연 <초립동> 팸플릿(1977.3.2~3.6).  58)한로단, 「작가의 말--사실같은 거짓말은 연극이 될 수 있다」, <초립동> 팸플릿.  59)서항석, 「작품론--연극 “초립동”의 사료에 대하여」, <초립동> 팸플릿. 이두현도 검무가 일명 ‘黃昌郞戱’로 불린다며, 黃昌舞의 사료와 황창랑이 관창과 동일인물이라는 사료도 있다는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두현, 『한국연극사』, 학연사, 1973, 28~29쪽.  60)흥미롭게도 효보다 국가에 대한 충이 우선시되는 지고의 가치로서 국가주의담론은 식민지 말기 국민연극의 역사극들, 예컨대 이동규의 <낙화도>, 송영의 <신사임당> 등과 유사하다.  61)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99~104쪽.  62)지수걸,「근현대 국가․민족담론의 실상과 허상」,『내일을 여는 역사』2001 가을호, 65쪽.  63)진경환,「전통과 담론--전망적 요청을 겸한 단상」, 『어문논집』 61호, 민족어문학회, 2010, 401~405쪽.  64)‘기념비의 정치학’이란 식민주의자들이 노예 거래를 은페하기 위해 자신들의 공적을 미화하는 기념비를 세우는 위선을 비판하면서 벤야민이 동원한 용어이다. 진경환, 앞글, 405쪽.  65)박정희,「나의 소년시절」, 1970. 4. 26. 『월간조선』, 1984.6. 이준식,「박정희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 역사적 기원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박정희시대 연구』, 백산서당, 2002, 183쪽에서 재인용.  66)신명순과의 전화 인터뷰, 2011.4.12.  67)이 대본도 남아있지 않은데, 이은상의 기행문『태양이 비치는 길로』나,『성웅 이순신』등의 저작을 보면, 이은상의 이순신 서사도 민족영웅을 재현함으로써 민족/국가 담론을 담지하고 있다.  68)이광수, 『이순신』, 창현문화사, 2004, 21쪽.  69)김성희, 「한국역사극의 기원과 정착」, 78~79쪽 참조.  70)이상록, 「이순신: ‘민족의 수호신’만들기와 박정희체제의 대중규율화」, 권형진, 이종훈 엮음,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 2005, 318~319쪽.  71)박정희, 「충무공이순신장군 제420회 탄신기념사」, 대통령 비서실,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3, 1966, 전재호,「민족주의와 역사의 이용: 박정희체제의 전통문화정책」,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 1998, 96~97쪽에서 재인용.  72)이재현, <성웅 이순신>, 국립극장 소장 대본.  73)한상철,「국립극단 공연 <성웅 이순신>」, 『중앙일보』, 1973.10.22.  74)「뉴스와 화제-연극」, 『신동아』, 1973.12, 349쪽.  75)공연기획서를 써서 관료의 재가를 받는 극단 시스템상, 굴욕의 서사를 소환하는 데엔 한국전쟁과 병자호란을 동궤의 굴욕적 역사로 인식하는 논리가 동원된 듯하다. 이 공연이 6.25기념공연이라는 점, 작가 김의경이 당시 국립극장의 공연과장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이다.연출을 맡은 이진순은 “민족적 비극은 6.25가 시작이 아니라 이미 병자년의 <남한산성>에서 민족적 최대의 굴욕 케이스로 인조 스스로 삼전도에서 항복서를 올렸으니 말이다.”라고, 남한산성의 ‘굴욕의 서사와 한국전쟁을 연관시킨 바 있다. (이진순, 「잊지 못할 무대4-1974년 <남한산성>」,『한국연극』, 1981.4, 102쪽.  76)이태주, <남한산성>, 『신동아』, 1974.8, 325쪽.  77)한상철,「70년대의 연극을 어떻게 볼 것인가」,『한국연극의 쟁점과 반성』, 현대미학사, 1992, 263쪽.  78)김의경, <남한산성>, 김의경 희곡선집 ≪남한산성≫, 한국연극사, 1977, 66~67쪽.  79)최창규,「국난을 통해서 본 한국인의 항거--민족사극 <남한산성>에 붙여」, 김의경 희곡 선집 ≪남한산성≫, 한국연극사, 1977, 77~79쪽.  80)이태주, 앞글.  81)허영란, 「민중운동사 이후의 민중사--민중사 연구의 현재와 새로운 모색」, 『역사문제연구』, 제15호, 역사문제연구소, 2005, 308쪽.  82)노경식, <징비록>, 노경식 희곡집 1 ≪달집≫, 연극과인간, 2004.  83)김의경, <함성>, 김의경 희곡선집 ≪남한산성≫, 한국연극사, 1977.  84)정지창, 「극작을 통한 역사에 대한 끈질긴 관심」, ≪김의경 희곡선2: 길 떠나는 가족≫, 현대미학사, 1998, 392쪽.  85)정지창, 앞글, 392~393쪽.  86)신명순, <북간도>, 국립극장 소장 대본, 1968.  87)<북간도>는 안수길이 『사상계』에 1959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1967년에 전작 출판한 동명 대하소설의 각색 공연이다. <여인천하>, <순교자>, <북간도>, <객사> 등이 각색극인데, 국가 담론의 영향 하에 있었던 국립극단은 사회적 이슈가 된 소설을 매우 빠른 시기에 각색공연으로 기획하는 순발력을 보여주었다. 소설 『북간도』는 5부로 구성된다. 1부는 1870년부터 1904년까지, 간도 이주와 정착과정, 2부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간도협약 체결 이후 한인과 청인 사이의 갈등, 3부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유랑이주민이 되어 청인과 청국 관리의 횡포에 시달리는 조선인, 4부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배양, 무장투쟁준비 과정, 5부는 192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무장투쟁의 과정과 성과, 일본의 만행을 주로 그리고 있다. 임환모,「『북간도』의 서사전략」, 『현대문학이론연구』, 26호, 현대문학이론학회, 2009, 243쪽.  88)신형기,「민족이야기의 두 양상--안수길의 <북간도>와 이기영의 <두만강> 분석」,『한국학논집』제32집, 2005, 49~55쪽.  89)김기팔, <광야>, 국립극장 소장 대본, 1975.  90)김기팔, 「순수와 이성으로 지킨 민족혼」, 국립극단 73회 <광야> 공연 팸플릿(1975.8.6~11).  91)흥미롭게도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의 기쁨을 외치는 이 결말장면은 해방직후 함세덕과 김남천의 좌익계열, 유치진의 ‘3.1기념연극’과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점이다. ‘광복’과 ‘3.1운동’의 기념은 둘 다 동일하게 태극기와 민족승리의 선언과 감격이란 구조로 상상된 것이다.  92)이태주, 「패배의 드라머: 국립극단의 <광야>」, 『경향신문』, 1975.8.11.  93)안종관, <객사>, 국립극장 소장 대본, 1979.  94)과거 역사를 다루는 역사극의 경우 대부분 남성주체가 서사를 주도하며, 거의 남성인물들이 등장한다. <남한산성>의 경우엔 모든 등장인물이 다 남성이다.  95)김은실, 「민족담론과 여성--문화, 권력, 주체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한국여성학』10호, 한국여성학회, 1994, 24쪽

    4. 나가며

    역사의 재현에는 반드시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는 포스트모던 역사관은 보편적 개념이 되었다. 담론적 구성물인 역사극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이다. 당대의 담론이 역사극의 글쓰기와 공연 만들기에 투영되고, 관객의 읽기나 해석 방식도 그 담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국립극단의 역사극을, 텍스트와 컨텍스트와의 상호텍스트성을 탐색하는 신역사주의적 방법론으로 고찰하였다.

    식민지 경험을 겪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수립한 남한 정부가 가장 주력한 과업은 곧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주입시키면서 국민으로 통합하는 일이었다. 학교 교육이나 언론매체, 관립 예술단체 등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동원한 민족담론의 내면화가 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의 주요 사업이었다. 역사극은 민족담론을 내장하기에 가장 좋은 매체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이유는 과거를 호출하면서 민족의 동질성이란 코드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짓고, 민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연극양식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 국립극단의 창단작인 <원술랑>은 당대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역사를 소환하는 방식, 시각적 멜로드라마 양식이란 점에서 식민지 역사극과 연속성을 보인다. 분단체제의 고착화로, 삼국시대를 소환하는 역사극에서는 신라가 ‘민족적인 것’의 기원으로 배치된다.

    1960년대 이후엔 역사인식과 글쓰기방식의 다변화가 일어난다. 1960년대엔 전쟁기억을 재현한 작품들이 대다수를 이루는데, 공적 영역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사적인 기억들이 역사 효과를 산출하며 재현된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억 행위에 작동하는 타자성이다. 기억의 선택과 배제를 조건 짓고 해석의 틀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규범이나 이데올로기, 지배담론 같은 다층적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산불>, <달집>, <포로들> 등의 작품은 반공코드를 내장하고는 있지만 리얼리즘과 서사적 기록극 양식의 글쓰기로 전쟁경험의 역사 효과를 성공적으로 산출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엔 도식적인 반공극들이 공연되는데, 이는 지배담론이 총체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는 억압적 담론으로 기능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70년대 국립극단의 역사극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은 국난의 역사와 영웅을 호출하는 경향성이다. 그중 한 갈래가 이순신, 김춘추, 화랑 관창으로 대표되는 영웅 호출로서 ‘기념비의 정치학’이고, 또 한 갈래는 식민지시기의 독립투쟁 서사이다. 영웅호출의 역사극은 민족/국가담론을 내장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 동원의 주체를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70년대 역사극은 담론투쟁의 장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의 역사극에는 영웅이 역사의 주체로 그려지던 일방적 시각이 교정되고 민중과의 관계가 부각되거나 민중주체가 역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는 국가담론과 민중담론의 제휴, 혹은 담론 투쟁 양상을 말해준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으로 민중, 여성 등 하위주체를 그린 역사극이 등장한다. 공적 역사와 허구적 인물들의 사적 역사를 교직한 <북간도>, <광야>, <객사>는 흥미롭게도 ‘민족=가족’이라는 등식으로 구성된 가족사로, ‘가족-민족 로망스’구조를 만들어낸다. 국가가 부재한 현실과 고아의식을 대체할 상상적 아버지로 ‘민족’을 호출하는 것이다.

    궁중여인비사나 <산불>, <달집> 등 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역사극은 남성주체가 서사를 주도하는 심각한 젠더의 불균형을 보여 왔다. 그러나 1970년대 말 <객사>에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시각과 더불어 여성주체가 서사를 주도한다. 그러나 서사가 민족담론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정작 양반 신분에서 천민 신분으로 격하된 여성주체의 신분 갈등, 내적 갈등이 형상화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민족을 단일한 주체로 구성해내는 민족담론은 민족 내부의 이질적 집단들을 단일화시키는 지배담론으로 작동하면서 민족 내부의 다성성에 대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본 연구는 역사극에 나타나는 역사인식과 담론적 성격의 차이에 따라, 한국역사극의 역사를 3기로 나누었다. 제1기인 식민지시대의 역사극은 제국과 민족담론의 갈등, 제2기인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의 역사극은 국가담론과 민중담론의 경합, 제3기인 1990년대 이후의 역사극은 거대담론의 붕괴로 개인, 일상, 팩션이 대두한다. 본 연구는 지면 관계상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국립극단의 역사극만을 대상으로 한정해서 담론적 성격과 글쓰기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 보았다. 1980년대의 역사극 연구는 다음 논문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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