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narism, Memories, and Controversies over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머나 먼 대나무 숲』의 논란을 통해서 본 이분법과 기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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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Since 2006, heated debates have taken place on both sides of the Pacific over the historical accuracy of Yoko Kawashima Watkins’s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the “historical novel” that depicts the author’s painful escape from the just-liberated Korean peninsula to Japan. This study re-visits the controversies that fired up not only the whole Korean society but also not a few Americans and the American press. However, unlike most previous Korean studies on this novel, this study mostly focuses on both the responses of Korean feminists and those of Americans and the American press to the issue. This paper argues that the Korean feminists, who criticized their male compatriots for their feverish reaction, have the same problem as their compatriots, that is, the problem of seeing through a binary perspective that drowns or blurs individual differences. A similar framework is found operating in the Boston Globe’s articles on the same issue. This study proceeds to discuss the pitfalls of liberalism underlying the American parents’ and the American civil organizations’ defence of Watkins and analyzes their poor historical awareness.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is that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dictated by an ideological prolepsis, erroneously inscribes the Cold War in the geographical space of the pre-Cold-War Korean peninsula and, as a result, symptomatically participates in the United States’ anti-Communist world view.


  • KEYWORD

    Yoko Watkins ,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 ideological prolepsis , history , memories

  • I. 서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소녀의 피난 경험을 담은 요코 왓킨스(Yoko Kawashima Watkins)의『머나 먼 대나무 숲』(So Far from the Bamboo Grove)1은 미국에서 1986년에 첫 발간되었다.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 바 있듯, 이 책은 보스턴, 뉴욕 및 LA 지역의 6-7 학년생들을 위한 권장도서 목록에 10여년 넘게 포함되었다가 재미 한인 학부모들에 의해 퇴출 운동 대상이 된다. 2006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도버-셔본(Dover-Sherborn) 중학교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결과로, 그 해 11월에 이 중학교의 도서심의 위원회는 이 소설을 권장도서 목록에서 탈락시키기로 결정하며, 그 후 퇴출 운동은 다른 주로도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 일이 있은 그 다음 해인 2007년 1월 2일 도버-셔본 지역학교 위원회는 이 소설의 역사적 맥락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 주도록 교과과정을 바꾼다는 결정과 함께 왓킨스의 책을 권장도서로 다시 지정한다. 결정이 이처럼 번복되는 과정에는 한인 학부모들의 애초의 이의 못지않게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압력도 거셌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 소설은 우리말로 번역된 후 국내 비평계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때 국내 비평가들이 제기한 찬반론은 미국에서 일어난 논란과는 다른성격을 띠게 된다. 2005년에 문학 동네에서‘요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다가, 2007년 한 대중 매체에서 조선인에 대한 소설의 묘사를 문제 삼으면서 국내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다. 국내 독자들과 비평가들의 초기 대응은,매사추세츠 주 지역의 한인 학부모들의 경우처럼, 이 소설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하여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더불어 저자와 그 가족의 과거 경력에 대한 조사가 주로 이루어졌다.2 국내에서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파장이 점점 커지자, 왓킨스는 2007년 2월 3일자『중앙일보』에 자신과 소설에 대해 제기된 의혹에 대하여 해명하는 글을 싣기도 했으며, 같은 달 15일에는 보스턴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저자 일문일답」). 그렇지만 왓킨스의 해명은 그녀의 소설이 역사의 왜곡이라는 의혹도, 이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한 듯하다.

    본 연구는 재미 한인 학부모들과 한국 언론, 그리고 미국의 일부 단체와 언론이 보여 준 반응이 서로 다른 것에 주목한다. 본 연구의 전제는 이들이 보여주는 상이한 태도가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기억의 차이, 더 나아가서 미국사회가 표방하는 다문화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근원적인 질문을 동반하는 이슈라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국내의 평자들이 보여 준 반응도 사실 하나의 목소리로 요약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논란에 불을 지핀 대중매체나 이에 반응한 국내 독자들과는 또다른 목소리가 국내 페미니스트 비평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머나 먼 대나무 숲』을 둘러싼 국내·외의 대응이‘역사의 재현’이나‘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각기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소설의 내용이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그간의 국내 언론과 연구가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한 바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본 연구에서는 이를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한다. 대신 본 연구는, 국내 언론과 독자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였는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하여 국내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이어서 미국 언론과 시민 단체들의 반응 또한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국내의 논쟁을 미국에서 있었던 논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두 논쟁이 상당히 다른 사회적 배경에서 전개되었고, 상이한 이 유와 철학에 입장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이 논쟁의 참가자들이‘이분법적인 시각’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본 논문은, 왓킨스의 소설이 공교재로 채택된 데에는 미국 사회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택적 기억이나 망각이 자리 잡고 있음을 논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이 소설이 이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재현하는 한반도의 상황은 사실‘전쟁 후의’지정학적 인식이 각인된 것임을 주장한다. 이처럼 미래를 현재에 소급 투사하는 예변법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본 연구는 이 소설이 소수민족의 역사에 대한 미국 시민사회의 불감증뿐만 아니라 냉전 체제의 한 축인 미국의 세계 인식을 징후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윤현주는 번역본에서 소설의 제목을‘요코 이야기’로 옮겼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기출간된 역서의 제목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나, 이 글에서는 원 저자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원어 제목에 좀 더 충실하게 번역하여 쓰기로 한다.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오역의 논란도 있고 해서, 이 글에서는 역서가 아닌 원서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울러, 논문의 완성을 위해 비판적 제언을 해주신 한국영어영문학회 편집진에 이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2국내 평자들이 제기한 초기의 비판은 신주백의「『요코이야기』에 관한 진실」에 잘 요약되어 있다. 외에도 손종업의「『요코 이야기』가 불편한 몇가지 이유」, 그리고 이주영의「역사를 다루는 어린이문학의 책무성」가 있다.

    II.“ 피해자 내셔널리즘”과 기억의 비대칭성

    먼저 왓킨스의 소설과 관련하여 일어난 국내의 논쟁을 살펴보자. 국내의 평자들은 작가의 글을 반박하는 증거로 세 가지, 나남(오늘날의 청진)에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점, 1945년 7월에는 나남 지역에 미 공군의 폭격이 없었다는점, 그리고 1948년 이전에는 인민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왓킨스의 소설에 대하게 격하게 반응한 국내 네티즌들은 이 소설에서 그려진 것과 달리, 조선인 남성들이 전시 성폭력의 가해자였을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일제 패망 이후에도 한 동안 일본군이 치안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조선인 남성이 일본인 여성을 성폭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3 이러한 비판에 대해 왓킨스는 중앙일보에 실린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첫째, 아버지가 고향 아오모리에서 노란 대나무를 구해 와서 심은 것이 10년이 지나면서 좁다란 대나무밭을 이루었으며, 둘째 자신은 미군이 나남을 폭격하였다는 말은하지 않았고,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본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였다고 말했으며, 이는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셋째“조선인 공산군”(Korean communist army)이라는 표현은 별 의미 없이 사용한 것이며, 자신이 목격한“북한 민병대”(North Korean militia)가 누군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이 대담에서 왓킨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근무한 일본인 관리가 아니라 악명 높은 731부대의 고위관리라는 의혹에 대해, 두 인물 모두 가와시마인 것은 같지만 출생지와 이름의 표기가 다르다고 밝혔다.4 중앙일보의 지면 인터뷰와 보스턴에서 열린 기자회견 모두에서 왓킨스는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를 하였다. 기자회견에서는 새로운 서문과 역사적 맥락을 더 추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출판사에 알아보겠다는‘전향적인’진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불러일으킨‘역사적 진실’의 문제는 가라앉지 않았다. 보스턴에서의 기자회견 직후, 연합뉴스는 731부대가 당시 생체실험 대상을 수송하는 특별수송부대로 통하였으며 만주철도회사로 가장하였다는 사실과 호적상의 가족 사실과 소설의 내용이 불일치함을 지적하며, 왓킨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5

    번역서의 출판이후 역사 문제로 비화하자,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 있듯, 국내학자들도 즉시 이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점에서는’좀 더 성찰적인 성격의 글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6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왓킨스의 소설에 대한 국내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정애의 요약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진보든 보수든 왓킨스가 겪은 개인적인 고통에 관심이 없는데, 그 이유는“피해자 내셔널리즘”에 빠져 있는 이들로서는 한국인이 가해자일 수 있는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285). 같은 글에서, 개인의 고통보다는 역사적 사실과의 부합성에 관심이 더 컸던 국내의 독자들은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료적 증거를 내놓으라고 따지는 일본의 우익실증주의자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 비평에 의하면, 국내에서 있었던 이 논란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집단적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 즉, 한국인들이 요코를 전시 폭력의 희생자로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는, 일본인은 가해자요, 한국인은 피해자라는 집단적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사유는 전체주의에 가깝다. 개인의 특수성을 집단의 보편적 속성에 함몰시킬 때, ‘주체’로서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의 낙인이 찍힌 동일자들만이 남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머나 먼 대나무 숲』에 대해 한국의 언론매체와 일부 독자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에는 우려할 만 부분이 없지않다. 일부의 대응에서 요코의 경험적 특수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단정적인 발언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대중적인 기억이 어떤 특정한 망각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자성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즉, 식민 시대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이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 기억에 일치하지 않는 다른 사실들은 잊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한국의 민족 정체성이‘한국=피해자’라는 집단적 수난의식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준 계기였다”(임우경115)는 비평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왓킨스의 소설에 관한 한국 사회의 초기 대응에 대하여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비판은 다른 점에서도 곱씹어 볼 만한 것이다. 국내 독자들이 이 소설에 집요하게 질문을 제기하거나 반박을 하게 된 연유는 이미 지적된 대로, 식민 시대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에게“한국인=가해자”라는 담론이 낯설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점이 설명해 주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를 전제로 함과 동시에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유의 성찰적 비평이 눈을 감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개인의 기억을 서사화하는 방식 자체에, 읽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왓킨스가 서사화하는 특정한 역사적 사실의 기억이 ‘다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망각을 동반하고 있음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영이 주장하듯, 특정한 기억을 되살려 내는 행위는 단순히 과거사를 복구하는 결과 외에도, ‘다른 과거’를 삭제하거나 특정한‘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91).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무엇을 망각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왓킨스는 자신이 겪었던 전시 폭력의 위협을 기억하기 위해, 일본 제국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상시적인 폭력’을 망각해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소설과 기억, 허구와 역사는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허구를 역사의 자리에 세웠다는 비판에서도 왓킨스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 비평가가 지적하듯, 자전적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그녀의 안일한 태도도 그렇지만, 수십 년간 이루어진 학교 강연과 기타 그녀의 공식적인 행적을 통해 자신의 소설에‘체험의 진정성’을 부여해왔음을 고려할 때 그렇다(Lee 87).

    이처럼 기이한‘기억의 비대칭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피해자 내셔널리즘”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페미니스트 비평이 그간 경계해 온 것과 다르지 않은 오류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다. 이진화의 표현을 빌자면, 민족주의적 분노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모든 것을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의 논리로 치환시켜서 개인경험의 여러 층위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폭력의 문제를 묻어버리게”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다양한 경험이나 목소리를 거대한 단일집단의 목소리로 포괄해버리는 폭력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다르지 않는 현상이 국내 페미니스트 비평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분명 다양한 이유와 배경에서‘왓킨스 논란’에 참여했을 수많은 독자들이 저급한 황색 저널리즘이나“피해자 내셔널리즘”에 함몰되어 움직이는 집단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국내 독자들이 왓킨스의 소설에 격하게 반응한 데에는, 이소설이 재현하는 특정한 사실, 즉‘일본인 여성이 입은 피해’가 식민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을 뒤흔든 부분도 있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한반도의 역사를 바라보는 소설의 시각이 일종의‘터널 시야’(tunnel vision)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특정한 개인의 고통에만 맞춰져 있다는 데도 그 이유가 있다. 그런점에서 국내 독자들의 초기 대응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뛰어난 성찰에도 불구하고 공정성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왓킨스를 비판한 국내 독자들을“피해자 내셔널리즘”에 경도된 집단으로 몰아세우는 담론은, 한 개인의 언술의 권리를 지켜주었을는지도 몰라도 또다른 이분법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족주의적 히스테리로‘눈을 감은 남성들’과 이로부터 자유로운‘눈뜬 페미니스트 비평가’라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 피해자와 일본인 가해자라는 이분법도 문제지만, 이 이분법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이분법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두 이분법에서 조선인 피해자와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둘 다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쪽은 도덕적 특권을, 다른 한쪽은 인식론적 특권을 갖는 것이다.

    3「‘요코이야기’어이없다」2007년 1월 17일자 연합뉴스 참조. 현재까지도 이러한 반박을 싣고 있는 블로그로는 http://blog.naver.com/angles96?Redirect=Log&logNo=110121405791을 참조할 것.  4「‘요코이야기’저자 일문일답」에 의하면 아버지 가와시마 요시오(1897~1968)는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나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남만주에서 공무원으로 일했고, 가와시마 기요시(川島淸,1893~1989)는 731부대 의무소장이자 생화학무기 생산부장으로 일본 지바현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두 사람의 이름 중‘시마’의 철자도 다른데, 왓킨스의 아버지는‘산(山)’과‘새(鳥)’가 합쳐진 자를 사용했고, 731부대 소장은‘산(山)’이 빠진‘섬(島)’자를 썼다고 한다.  52007년 1월 18일자 연합뉴스「‘요코’아버지 731부대 최고위간부 의혹」을 참조. 연합뉴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왓킨스는 실제로 둘째 딸이 아니라 넷째 딸이었으나 호적을 고쳐 셋째 딸로 되어 있었다. 또한 어머니가 1945년 일본 귀국 후 곧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1952년의 호적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생존해 있었다. 연합 뉴스는 또한 왓킨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두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호적을 조작하였다는 혐의를 걸은 바 있다.  6대표적인 경우가 임우경의「『요코이야기』와 기억의 전쟁」과 박정애의「『요코 이야기』와『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의‘기억’문제 비교 연구」, 이진화의「평화의 관점으로 읽는‘요코이야기’」, 유제분의「제국의 혼동과 고통의 분담」을 들 수 있다. 이 중 유제분은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집중한다.

    III. 보스턴 발 기사에 나타난 또다른 이분법

    국내 비평으로부터 눈을 돌려 이 사건을 취재한 대표적인 미국 언론을 보자. 애석하게도 국내 독자들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한 연구에서 미국 언론의 반응을 자세히 분석한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미국 현지의 언론을 살펴보면, 일견, 이사건에 대해 차분하고 절제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왓킨스의 회견을 다룬 보스턴 글로브(Boston Globe)지의 기사를 보면 역사적 왜곡 (혹은 그 시비)의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리사 코션(Lisa Kocian)이 작성한 이 기사는이 소설이 한국인들을 강간범과 살인범으로 그려냈다는 한 문장으로 한인들의 비판을 요약하고 있을 뿐이다. 대신 이 기사는 소설을 강의실에서 퇴출하려는 한인들의 대응과 더불어 왓킨스에 동조적인 현지인들의 반응을 소개하는데 대 부분의 지면을 할애하였다.「 저자가 한국에 대한 회고록을 옹호하다」“( Author defends memoir on Korea”)라는 제목을 단 이 기사의 마지막 몇 단락은, 좀 길기는 해도 기획 의도를 논의하기 위해서 인용할 만하다.

    언뜻 이 인용문은 특정한 편을 비판하거나 동조하는 바가 없이 사실만을 기록한‘객관적인’기사인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이 기사에서 무엇보다 ‘역사소설’이‘회고록’으로 둔갑한 것은, 사실 확인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언론의 자세에 비추어 볼 때 문제적이다.

    이 기사에서 주미 한국 영사관들은 미국 주정부와 행정기관이 보호하려는 교육의 자율성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한국 영사관의 이러한 노력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다름 아닌, 국제적인 룰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로‘공인된’북한을 기사화 한 것도 흥미롭다. 강연을 위해 학교들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일본 정부를 대신해 학생들에게 사과를 한다는 왓킨스의 진술과 대비하여 읽혔을 때, 왓킨스의 책을 끝내 퇴출하려고 하는 한인 학부형 아그네스 안은 이러한 반복적인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인물로, 교장의‘중 립적’발언도“선전”으로 비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평화운동가”로 소개된 왓킨스와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여 교육의 자율성을 지키려 하는 미국 교육청이 세워진다. 이 편에는 교장 도리아도 발견되는데, 그는 이 기사에서 수행하는 역할 때문에라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 교장의 의견은 기사의 모두(冒頭)에서, 어느 개인의 의견보다도 앞서 인용되었다. “요코는 일본과 한국 간의 문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이 진술은 기사에서 배치된 위치나 그 내용을 고려할 때, 회견장에 모여든 청중 중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발언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한·일 간의 역사논쟁에—선행하여 그 내용을‘액자’처럼 테두리 짓는 논평이자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 기사 내용의 전개에 이처럼 실질적인 역할을 허락받았다는 점에서 도리아는 여느 취재원과는 다른 특권적인 위치에 선다. 이러한 인물이, 그녀만한 교육경력과 사회적 위치를 지닌 인물이 왓킨스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여느 개인과는 다른 객관성의 무게를 갖는다. 이 정도의 인물과 대립각을 세운 한인 학부형 아그네스 안의 의견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이 대중매체 서사의 스크립트에 의하면, 아그네스에게는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역할이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또한 끝 부분에 아그네스의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하는 다수의 선생님들의 짧은 대화를 위치시킴으로써, 상황을 오해한쪽이 실은 한국인이라고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즉, 현지의 교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재미 한인 학부형들과 한국 정부가—북한과 함께—이 지역 교사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기자 회견에 대한 기사가 어떤 점에서는 이처럼 방청객들의 대화까지 자세히 제공하는 친절을 베푸는가 하면, 또 어떤 점에서는 회견장에서 있었던 일의 적지 않은 부분을 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의 현장 재현에서 빠진 목소리 중의 하나는 백인 방청객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왓킨스를 비판한 다니엘 배런블랏(Daniel Barenblatt)이다. 731부대에 관한 연구서인『인류의 역병』(A Plague upon Humanity)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왓킨스에게 역사적 오류의 가능성을 두고 신랄하게 따졌다고 한다. 그는 왓킨스의 아버지의 직업이 무 엇인지를 질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을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쓴『제 노아 저 너머』(So Far from Genoa)와 비교하며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 참석자에 의하면, 그의 질문 세례는 왓킨스를 당황하게 하였고, 그곳에 모여든 그녀의 지지자들이 그를 조롱하며 질문을 빨리 끝내기를 요구하였다.7 기사에서 이런 비판적인 백인의 목소리를 제외함으로써 기자는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을 분노한 한인과 절제할 줄 아는 비(非)한인의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명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은 윤리적인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본 논문은, 『보스턴 글로브』지가 소설에 관한 논쟁을 단순히 한·일 간의 충돌로 환원시킴으로써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인종주의를 덮어버린다는 요네야마의 주장이나 이를 인용하는 국내의 연구8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 논하겠지만 적지 않은 미국인 학부형들과 단체들이 왓킨스가 처한 문제에 ‘자신의 일처럼’반응하였기 때문이다.

    7기사화되지 않은 기자회견의 정황은 왓킨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다음의 블로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Yoko Watkins Defends Memoir Amid Angry Crowd,” Occidentalism. 블로그에서 인용되는 관련 기사 중 하나는 2007년 2월 17일자 중앙일보기사「‘요코 이야기’의 가장 큰 잘못은 피해자와 가해자 뒤바꿔 묘사한 것」이다.  8리사 요네야마의「아시아계 미국인과 일본의 전쟁범죄」과 임우경의「『요코이야기』와 기억의 전쟁」을 볼 것.

    IV. 표현의 자유와 계몽된 이성

    왓킨스의 소설을 퇴출시키자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은 미국인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혹은 어떠한 신념에 따라서 그러는 것인가. 요네야마의 주장처럼 이 논쟁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이것이 궁극적으로 한·일 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인가. 미국 현지인들의 반응은 2006년 11월 12일자『보스턴 글로브』지와 2007년 1월 4일자 미국서점협회 뉴스에서 잘 드러난다. 후자의 보도에 의하면, 도버-셔본 중학교 도서심의 위원회가 내린 애초의 결정이 번복된 데에는 적지않은 시민단체들의 항의가 작용하였다. 이 단체들의 목록에는“표현의 자유를 위한 미국 서점 재단,”“검열을 반대하는 국민연대,”“어린이를 위한 서점협회,”18세 미만 청소년들의 언론자유모임인“피스파이어,”“표현의 자유를 위한 페미니스트,”“매사추세츠 시민자유연맹”등이 발견된다( “School Reinstates”). 왓킨스의 소설이 우리 사회에 일으킨 파문 못지않게, 이 소설의 퇴출 결정이 미국 시민 사회를 들쑤셔 놓은 형국이다. 이 문제에 개입한 미국의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요네야마의 주장과 달리, 이 문제를 두고 미국 시민 사회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한·일 문제로 사태를 인식하거나 호도한 것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는 쪽과 검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진영으로 전선(戰線)을 가르고 이 중 자유 진영을 선택하여 열렬히 지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지 미국인들의 반응은 2006년 11월 12일자『보스턴 글로브』지의 기사에 비교적 잘 드러난다. 코션이 작성한 이 기사에 등장하는 도버-셔본의 교사들은 한결같이 왓킨스를 옹호한다. 일례로, 교사 캐런 매스터슨(Karen Masterson)은 이 책을 연전에 읽은 자신의 아이들이 이 소설을“최상의 교육적 경험 중의 하나”로 기억하며, 특히 이 책이“딸에게 독서에 대한 사랑을 불붙였다”고 진술한다. 그녀는“감정이 복받쳐 떠는 목소리로‘책 한 권이 모든 사실을 다 전달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왓킨스를 변호한다. 6학년 영어를 가르쳐 온 교사 스콧워커(Scott Walker)도 왓킨스와 그녀의 책이 모두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진술한다. 그에 의하면, “그녀는 수업 시간을 넘어 오래오래 청소년들이 아끼게 되는 선물이다.”코션은 기사에서 매사추세츠 도서관 연합 회장인 캐시 글릭-웨일(Kathy Glick-Weil)과 미국 도서관 연합 소속의 지적 자유 진흥실(Office for Intellectual Freedom) 부책임자인 데보라 콜드웰-스톤(Deborah Caldwell-Stone)의 발언을 제일 마지막에 소개한다. 위에 소개된 중학교 교사들의 변호가 개인적인 선호와 평가를 근거로 든다면, 도서관 연합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변론은 훨씬 더 그 전망이 큰 것이다. 이 인사들의 의견을 차례로 인용하면,

    앞서 박정현의 글에서 인용된 임지현의 논평—“많은 한국인들이 요코가 겪은 전시 폭력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이 평가가 사실이라면, 이에 못지않게 미국인들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역사 왜곡의 시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코션의 기사에 인용된 인사들은 미국 사회의 현안, 혹은 자신이 속한 단체의 현안인‘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글릭-웨일과 콜드웰의 의견은, 일견 도서 퇴출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이로부터 생산적인 결말을 내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옳고 그른지에 대한 토론을 위해서라도 그 책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의견이나, 문제가 되는 책을 검열할 것이 아니라 토론의 장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의견이 그 예이다. 이러한 주장은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주장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이성적 소통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미국을 지탱해 온‘자유주의’사유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토론을 통해“모든 공동체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콜드웰의 주장을 곰곰 생각해보면, 표현의 자유가 확보된다면, 그리고 개인의 이성이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면, 한 공동체가 내리는 결론이 그릇될 수 없을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항상 지켜져야 하는것이지만, 동시에 표현의 자유와 토론이 개인과 공동체를 항상 최선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현실에서 항상 유효하지는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에 대하여 제기된 강력한 비판 중의 하나가, ‘권리의 정치학’만으로,즉 개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공동체의 선(善)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렇다. 토론과 소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절차적 과정을 주관하는 기능들이‘먼저’깨어 있어야 한다. 즉, ‘계몽된’ 이성을 전제로 하였을 때, 토론과 논쟁과 소통이 바른 길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 나치즘의 출현이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 독재자의 책임으로 오롯이 돌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피해자 민족주의”라는 말과 함께 “대중독재”의 표현을 유행시킨 임지현의 주장에 따르면, 독재 정권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정권이 내걸었던 구호가 국민 개개인의 욕망에, 대중의 소망과 희망에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즉“동의의 정치”를 통해 서 독재주의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31-33).

    이러한 주장이 미국 시민 사회가 비이성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을 하는 바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모든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시민 사회도 어떤 면에서는 이성이 덜 깨어 있다는 뜻이다. 도버-셔본 학교 위원회의 2007년 1월 2일의 결정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위원회는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시민 단체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 후, 교과과정을 수정한다는 보완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도서심의 위원회의 이전의 결정을 번복한다. 어찌 보면 논쟁과 토론의 결과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퇴출 찬성과 퇴출 반대 양 진영의 만남에 서 양쪽의 의견이 모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양쪽이 모두 승리한 결과인가? 아니면 역사나 재현의 공정성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공방은 뒤로 하고, 누구에게나 말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의 맹목적인 승리인가? 동아시아의 한 국가에 관한 재현의 진정성 문제가, 애초의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상실하고 미국 시민 사회의 현안인 사수해야 할‘표현의 자유’와‘그에 대한 위협’간의 대결로 재구성된 것인가? 코션의 기사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이분법도실은 이러한 대결 구도에 의해 추동된 것인가? 울프강 펄라버(Wolfgang Palaver)는“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의의 실현은 사실 정의로운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상주의적”(par. 4)이라는 표현으로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글릭-웨일과 콜드웰이 믿는 소통과 토론의 민주적 기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공동체의 역사인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동아시아에 대한 이 특정한 공동체의 역사 인식이 극히 낮다는 현실이다. 이 소설과 관련하여 역사적 재현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까지, 그것도 한인 교포에 의해서 제기되기까지, 십삼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한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식으로든 보호되어야 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해서 역사적 진실이나 재현의 공정성이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을 너무 순진하게 본 것이 아닌가싶다. 현실의 정치권력이 개인이 현실을 조망하는 창(窓)의 방향을 권력의 유지 나 강화에 유리하게 바꾸어 놓으려고 한 적이 역사상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V. 소수민족 역사와 기억의 문제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합리적인 민주 사회로 가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었다고 해서 모두의 목소리가‘현실’에서 들리는 것은 아니며, 또 설사 들린다고 하더라도 같은 무게감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왈 아마르팔(Dhaliwal K. Amarpal)이 주장한 바 있듯, “하위주체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귀 기울여 듣는 자의 존재가 보장되지는 않는”(57) 것이다.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권력이나 문화 권력에 동일한 지분을 가지고 참여하지 않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목소리가 갖는‘울림’의 정도는 다르다. 먼저, 미국의 역사 교육에 있어 아시아의 지분을 보자. 이차세계대전에 대한 미국 교육이 유럽 전선에 치중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테면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은 알아도 난징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미국 교육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역사교육이나 이에 따른 역사인식의 빈곤이 아니라 역사인식이 빈곤하다는‘인식의 부재’이다.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보스턴 지역의 중학교 도서심의 위원회가 권장도서로 왓킨스의 소설을 채택했을 때, 이 소설이 생존 서사(survival story)로서 청소년들에게 미칠 교육적인 영향력도 고려되었겠지만, 미국 주류 집단이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에 대하여 보여주는 문화적 배려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 면‘아시아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서『머나 먼 대나무 숲』이 선정되었는가. 아니면‘아시아계 이민자 문화’의 대표적 사례로서 이 소설이 선정되었는가. 이두 질문은 성격이 상당히 다른 것이지만 이러한 질문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전자의 질문이 맞다면, 소위 태평양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시점에 아시아 문화와 미국 청소년들의 관계 맺기가 시도된 것이요, 후자의 질문이 맞는다면, 소수민족의 문화가 미국 교육 체제 내에서 자리를 잡고 주류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임을 증명하고 싶었으리라. 어느 질문이 맞든지,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그려온 역사적 궤적이나 문화적 특수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심사위원이 애초부터 참가하였거나 이들로부터 전문적인 자문을 받았더라면 애당초 신중하고 균형 잡힌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캘리포니아 주교육청의 권장도서 웹사이트는 해당 도서가 관련된 문화별로, 혹은 장르별로, 혹은 학년별로 찾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머나 먼 대나무 숲』을 주교육청 웹사이트에서 문화별로 찾아보면 한국/한국계 미국인 문화와 동시에 일본/일본계 미국인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장르별로 찾아보면 역사소설로, 유관한 교과목으로는 역사/사회로 분류되어 있다.9 한국 역사에 관한 도서를 선정하면서 한인들의 문제 제기를 예상하지 못한 데에는, 아시아의 역사, 특히 이차세계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미국 시민사회의 선택적인 기억이, 달리 표현하면 기억상실이 그 근원에 있다. 이 기억상실에는 일본과 미국이 제국주의적 이익을 서로 지켜주기로 한 1905년 7월 29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뿐만 아니라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이 포함된다.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후자의 협약에서 연합국 48개국은 전쟁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고, 전쟁피해국인 중국과 한국을 협약 당사국으로부터 배제시켰다. 한국은 1965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경제협력을 받게 되지만, 민간인들이 전범국에게 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국제법으로 막은 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이다. 미국이 전범국 중 유독 일본에게 이렇게 관대했던 이유는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예상되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태평양 전 쟁의 결말에 대한 미국의 기억이다. 물론 일본의 전쟁 범죄가 미국 사회에서 완전히 잊혔다고 보지는 않는다. 요네야마가 전하듯,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톰헤이든(Tom Hayden)이 전쟁배상 청구권을 발의하자 미국 언론이 이에 반응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전쟁에 대한 선택적 기억이 작동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99년에 발의된 이 법안은 이차세계대전 전범(戰犯)의 범주를 나치 정권뿐만 아니라 나치의 동맹국 및 이들이 점령한 곳에서 활동한 기업들로까지 확대함으로써, 개인의 피해 배상 청구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미쓰비시나 미쓰이 같은 기업들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튼 이 법안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될 집단은 물론, 태평양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일 터이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 언론이 대서특필한 이 법안의 미래 수혜자들은 다름 아닌,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미군들이었다. 즉, 태평양 전쟁에 관한 한 미국 사회가 기억하는 것은, 미국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점, 그리고 그 전쟁의 피해자는 백인 미군 포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요네야마의 논평은 인용할만하다. “주류 언론이 미군 포로와 아시아 피해자들을 합쳐 버렸기에, 이 주류 언론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식민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쟁점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주류 언론의 재현은 이 전쟁에 대한 미국의 핵심적인 기억인 백인 미국인이 피해자라는 기존의 담론을 재생산하게 되었다”(65). 앞서 왓킨스의 기자회견을 다룬『보스턴 글로브』지의 기사나, 더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미국의 주류 시민사회에 인식에는 망각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에 대한 선택적인 기억이 그것을 반증한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이 냉전 구도에서의 미국의 이익과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피해당사국을 제외하였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왓킨스의 소설이 미국의 교육 시장에서 롱런의 인기를 누리게 된 연유도 이러한 냉전구도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머나 먼 대나무 숲』의 가장 중요한 사건, 즉 생존을 위한 요코 가족의 투쟁이 바로 이 냉전구도 하에서 벌어지며, 또한 이 냉전 구도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썼다는 저자의 주장대로, 소설에서는 일본 제국과 그 전쟁에 대한 비판도 살짝 언급이 되기는 한다. 요코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반전 메시지를 들어보면, “도조 내각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나빠. 너의 아버지께서는 일본 정부와 뜻을 같이 하지않으셔”(17). 요코의 어머니는 일본의 미국 공습을 옳지 못한 행동으로 비판한다.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는 그녀의 가족을 서사에서 반전(反戰)주의자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요코 어머니의 비판적인 이성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요코의 입을 통해 독자가 듣게 되는 일 제국과 조선의 관계는,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의 일부였지만 일본인을 증오했고 전쟁을 싫어했어요”(9)로 요약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해서는 요코 가족 어느 누구도 명시적인 가치 판단을 유보하는 셈이다. 이 문장은 읽기에 따라서는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배은망덕한 것으로 읽혀질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요코 가족의 반전주의는 미국에 대한 공격에만 적용되는 선택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미국과‘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9웹사이트 참조.

    VI. 결론을 대신하여

    『머나 먼 대나무 숲』이 당시 요코의 조국과 교전하였던 적성국 미국과 맺는 ‘보통 이상의’관계는, 전후에 미국 및 기타 서방 국가들이 직면한 공산주의 확산의 위협을 주인공이 몸으로 체감한다는 점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공산주의에 대한 요코 가족의 공포는“소련군이 상륙하였다”(21)는 소식에 배가된다. 공산주의에 대한 소설의 입장은, 적군을“찌르고”그 시신을 강에 버리거나 참호로 끌고 오는 연습을 하는“조선인 공산군”들을 목격한 후 요코가 구토하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미 문제가 제기된 바 있듯, 이 가족이 피난을 떠나는 날이 1945년 7월 29일인데 반해, 소련군의 참전 선언은 8월 6일에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대목의 역사적 충실성은 사실 의문스럽다. 소설을 관통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일제 패망 직후 요코 가족의 신임을 얻었던 조선인들이 살해당한 모습을 본 오빠 히데요(Hideyo)가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의 부역자 처형이었을 수도 있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60). 당시 조선인 항일 공산군이나 소련의‘해방군’이 이 시점에 한반도 어디에서도 활동하지 않았다는 연구를 참고한다면(신주백, 이주영), 히데요의 진술은 성격이 모호한 사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한 후 이를 미래의 적대 세력에게, 즉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공산군에게 떠넘기는 꼴이다.

    소설이 그려내는 지정학적 공간에는, 요코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하듯, 전범국인 일본 제국이 간 데 없다. 대신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노략질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선량한 민간인들만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취약한 제국의 시민이 위기에 처할 때 이를 구출해주는 측은 다름 아닌 미군이다. 소설이 그려내는 유일한 미군 폭격기의 활약이 일본군이나 일본 군수기지에 대한 공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요코의 언니 코(Ko)의 몸을 성적으로 유린하려는 미래의(?) 공산군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미군이 일본인 코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구한다는 스토리는, 전후 수습 과정에서 미국이 무장해제 당한 일본에게 베푼 관대함을, 훗날 있게 되는 두 국가 간의 동맹관계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기록함에 있어, 『머나 먼 대나무 숲』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는 미국의 입장과, 냉전 체제를 준비하는 미국의 세계인식과 상통한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제대로 시작하기도전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공간에 공산주의와의 대립 구도를 각인하였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는‘이데올로기적인 예변법’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진정성에 대하여 질문한 국내의 반응에 대하여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우려와 질타가 제기된 바 있음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의 날은 심지어 도버-셔본의 한인 학부형들도 용서하지 않는데, 이들이 여성의 공동 현안을 저버리고, 개인의 목소리를 억누른 편협한 민족주의에 공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우려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본 논문이 참조로 하는 논란 초기의 연구들 대부분이 일본인 여성이 전시폭력의 희생이 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한국의 독자들과 보스턴의 한인 학부형들을 비판한 페미니스트들도, 그들의 비판에 높이 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개인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비판의 상대를 모두 또다른 이분법적 구도에 가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할 점이 있다. 집단의 목소리가 개인의 목소리를 틀어막아서는 안 되겠지만, 어느 목소리든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하는 한, ‘역사 인식의 균형’이나‘사료적 정확성’에 관한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라고 해서 윤리적 특권을 갖지는 않는다는 주장은 옳다. 이 비판이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한국의 언론에 동조한 독자들에게도 적용되려면, 일본인 피해자로 스스로를 재현한 왓킨스에게도 똑 같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미국 시민사회의 저조한 인식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역사에 대한 서사가 미국 교사와 학생들에게 어떠한 비중으로 다가왔을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라난 독서 주체들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아시아나 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작품을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도버-셔본의 한인 학부형 십삼 인이 왓킨스의 소설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어두운 미국 교육계가 자신의 계몽을 위해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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