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ation of Korean modern theatre aesthetics as modern views of the art

근대적 예술관으로서의 한국연극미학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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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e problem of ‘reality’ and ‘theatre art’ as its representation is one of the important issues in Korean modern theatre. The modern art, which is related to the values of ‘beauty’, ‘personality’, ‘originality’, ‘creativity’ and connected with the concepts of ‘nationality’, ‘education’, ‘enlightenment’, ‘civilization’, ‘truth’, ‘reality’, ‘society’ has had its new significance after modern period. Yun BaekNam, Hyun Chul, Kim WooJin, Hong HaeSung, the all early theatrical activists found a new relationship between arts(or artworks) and society(as a reality) in the modern theatre so called “SinGug”, the new theatre arts. Also they thought that it is the difference from the old theatre and that is the demands of the times, the meaning of new theatre arts. Instead of agreement of all theatrical activists that the new theatre has to say about social problem and to reveal a hidden social vice, however, there are the disagreement that what kind of realities have to be revealed in theatre and how they are actualized on the stage. That is the problem which is examined in this study, how they understand the problem about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theatre arts and what is the essentiality of theatre. This work could be a reappraisal of realism in 20-30s, the period of formation of modern theatre in Korea and also could be a fundamental work for the further study about the meaning and role of realism in Korean modern theatre.


    한국근대연극에서 ‘현실’과 ‘연극예술’의 문제는 ‘진실’의 문제와 맞물려 매우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이다. 근대로 들어와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예술’은 ‘심미성’, ‘개성’, ‘독창성’, ‘창조성’ 등의 개념에 대한 발견 혹은 재평가와 더불어 ‘민족성’, ‘교육’, ‘계몽’, ‘교화’, ‘진실’, ‘사상’, ‘현실’, ‘사회’ 등의 개념과 관련을 맺으며 등장했다. 윤백남, 현철, 김우진, 홍해성 등, 초기 연극인들이 자신들의 연극론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새로움’으로서의 ‘연극’은 ‘연극예술’과 ‘현실세계’와의 관계 맺기가 전근대적 예술과 다르다는 점에 있었으며, 나아가 바로 그 관계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진실’이 전근대적 예술의 ‘관념적 진실’과 다르다는 점에 핵심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로서의 연극의 의미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적 연극예술이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하여도, 그 현실이 어떤 종류의 것이며 그것이 연극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는 것인가, 즉 어떤 사실성이며 어떤 진실인가의 문제에 부딪히면 서로 상이한 관점과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본 연구가 한국근대연극미학 형성기의 ‘연극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재검토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근대의 연극론을 검토하여 각 논자들이 연극예술의 본질의 문제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함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근대연극인들이 지닌 저마다의 관점과 입장의 차이를 밝혀 그들의 연극관의 핵심을 드러내고 내고자 함이며, 나아가 이후 1970년대의 리얼리즘 재론, 2000년대 초의 재현적 연기론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연극의 리얼리즘과 무대재현성의 문제의 출발 지점을 살핌으로써 논의의 맥락을 시작점에서 재정리해보고자 함이다. 이러한 연구는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의 쟁점을 정리하고 그 세계관적 미학적 차이를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 KEYWORD

    Realism , Representation , Reality , Romanticity , New Theatre , Yu Chi-Jin , Romantic Realism

  • 1. 서론

    한국근대연극에서 ‘실재로서의 현실’과 ‘연극예술’의 문제는 ‘진실’의 문제와 맞물려 매우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이다. 근대로 들어와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예술’은 ‘심미성’, ‘순수성’, ‘독립성’, ‘개성’, ‘독창성’, ‘창조성’ 등의 개념에 대한 발견 혹은 재평가와 더불어 ‘민족예술’, ‘교육과 계몽’, ‘교화’, ‘진실’, ‘사상’, ‘현실’, ‘사회’ 등의 개념과 관련을 맺으며 등장했다. 윤백남, 현철, 김우진, 홍해성 등, 초기 연극인들이 소개하고자 했던 ‘근대연극’의 ‘새로움’은 ‘연극예술’과 ‘현실세계’와의 관계 맺기가 전근대적 예술과 다르다는 점에 있었으며, 나아가 바로 그 관계를 통해 작품이 말하는 ‘진실’이 전근대적 예술의 ‘관념적 진실’과 다르다는 점에 핵심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로서의 연극의 의미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적 연극예술이란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일치한다 하여도, 그 현실이 어떤 종류의 것이며 그것이 연극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는 것인가, 즉 어떤 사실성이며 어떤 진실인가의 문제에 부딪히면 연극인들 상호간에 상이한 관점과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사실,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현실과 그것의 모방 혹은 재현으로서의 예술(예술작품), 그리고 그 작품이 말하는 진실의 문제는 서양 예술사에 있어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의 오랜 쟁점 중 하나였다. 특히 이 문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더욱 첨예해지기 시작하는데, 예컨대 1864년 콩쿠르 형제는 자신들의 소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자들은 거짓 많은 소설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소설이다.”1) 콩쿠르 형제의 이러한 선언은 일차적으로 19세기 서양예술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예술에게 과학적 태도와 사회적 연구의 자세를 요구했던 이 시기에 있어서 소설이 경험적 현실과 관련하여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무이자 당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예술의 오랜 질문이었던 재현과 진실의 문제에 있어 하나의 정점을 찍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제 역사적 사조로서의 리얼리즘의 등장과 함께 이제 ‘현실의 모방’, ‘인생의 축도’, ‘삶의 단면’, ‘반영’, ‘재현’, ‘진실’, ‘진정’ 등의 용어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된다. 그리고 이후 예술과 현실 사회와의 관계 문제는 비단 사조로서의 사실주의뿐 아니라 이어서 등장하는 모든 근대문예사조와 경향의 중요한 쟁점이 된다.

    한국근대연극의 장에는 이러한 개념들과 생각들이 혼재되어 등장한다. 식민지 현실과 서구적 근대화라는 두 가지의 조건 하에서 예술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진지함에 대한 욕망은 강렬해 갔지만, 그 진실이 미학적 형식과 사회적 예술적 관습 속에서 필연적으로 굴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논자들의 사이에, 또 그들의 주장과 실천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 특히 전근대적 동아시아와 근대적 서구라는 이분법적 구도와 서구의 근대극을 수용, 확립해야 한다는 일방적 관계 속에서 서구연극과 근대극의 개념의 혼재는 이러한 혼란과 모순을 더욱 가중시켰다. 여기에 더해서 근대의 문학 담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눈앞에서 재현되는 공연예술로서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연극의 경우, 배우론, 연출론 등 무대 예술의 관점에서의 ‘현실’(‘리얼리티’, ‘실재’)의 문제가 문학에서의 ‘현실’의 문제와 거리를 지니며 나타나면서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본 연구가 한국근대연극미학 형성기의 ‘연극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재검토 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근대연극론 특히 리얼리즘 연극론을 검토하여, 각 논자들이 ‘현실’과 ‘예술’의 개념과 그 상호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들에게 연극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고자 함이다. 더불어 이러한 작업은, 이후 1970년대의 리얼리즘 재론, 2000년대 초의 재현적 연기론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연극의 리얼리즘과 무대재현성의 문제의 출발 지점을 살핌으로써 논의의 맥락을 시작점에서 재정리해보고자 함이기도 하다.

    이를 위하여 우선 연극사 내에서 현실과 연극예술, 그리고 진실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쟁점을 정리한다. 이는 동일한 용어와 개념이 시기 마다 다르게 이해되고 정의되는 이유를 살핌으로써 개념의 흐름과 변화를 파악하고자 함이다. 특히 근대예술 안에서 ‘현실’ 개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후 한국근대연극계의 담론들을 재검토한다.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 중점적으로 살필 논의는 1930년대 연극의 리얼리즘론이다. 우리 근대 연극사에서 30년대는 리얼리즘의 확립기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30년대에 들어서면 연극에서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이론과 비평에 등장한다. 이는 프로 진영에서 논의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과 맞물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기 논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상호간에 유사한 용어와 수사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상으로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사용된 언어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주장하는 자의 의도와 그의 정치 사회적 맥락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럴 때라야 사용된 용어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고 논자들의 진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신극, 즉 근대극이 곧 리얼리즘 연극이며, 때문에 리얼리즘 연극의 확립이 곧 근대극의 확립이라는 전제 역시 조심스레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제는 근대연극인들의 진의를 예정된 결론을 위해 재단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제기 하에 1930년대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를 살핌으로써 근대 연극인들에게 있어서 근대극, 혹은 리얼리즘극의 개념은 무엇이었는가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1)콩쿠르 형제는 자신들의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뜨(Germinie Lacerteux)』를 간행하면서 위와 같은 선언이 든 서문을 발표한다. 그들은 서문 안에서 자신들의 소설을 ‘연구’라고 지칭한다. 더불어 자신의 시대의 소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문학적 연구와 사회조사의 크고 진지하고 열렬한 형태’, ‘분석과 심리탐구를 통한 현재 정신의 역사’, ‘연구와 과학의 의무를 떠맡고 있는 소설’이라고도 말한다. 에리히 아우허바흐, 김우창, 유종호 역, 『미메시스 - 서구문학에 나타난 현실 묘사』, 민음사, 1999. 204~206쪽 참조.

    2. ‘현실’ ‘재현’ ‘진실’의 개념과 가치 해석의 문제

    연극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연구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연극예술’과 ‘현실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거나 반영한다는 모방론의 관점이든,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순수한 추상, 예술의 절대성으로서의 표현을 주장하든, 혹은 예술을 결과물인 작품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부정하며 예술제도론을 주장하든, 결국 모든 문제는 예술과 현실세계의 관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 예술사에서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논의되고 성찰되어온 문제였는데, 모방과 재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중심에는 진실의 문제, 즉 예술은 진실한가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2) 물론 이때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진실은 대부분의 근대미학이 말하는 진실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으나 당시에도 예술과 진실간의 관계에 대한 서로 상반된 두 개의이론이 존재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예술이 진실을 말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환영을 낳는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던 중 예술을 실재에 대한 모방이라 정의한 대표적 고전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였는데 그의 이러한 정의에는 ‘예술의 목적이 진실이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 예술이 실재를 모방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서양예술사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3)

    서구 예술, 특히 문학 속에서의 재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저서 중 하나는 1946년 출간된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미메시스(mimesis)』일 것이다. ‘서구 문학에 나타난 현실 재현’4)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우어 바흐의 저서는 고대의 고전주의 문학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메시스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밝힘으로써 예술작품과 현실의 문제를 다룬다. 그가 서구 문학사를 미메시스라는 키워드를 통해 주목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관습과 이에 따른 스타일이다.5) 예술의 장르적 관습, 시대의 관습, 문화 집단의 관습이 바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 안에서 그려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때문에 문학 안에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 하는 소재 선택의 문제조차도 바로 작가 개인의 비전이 아닌 이러한 관습에 제약을 받게 된다고 지적 한다.6) 때문에 고전주의의 시대나 신고전주의의 시대처럼 스타일의 엄격함과 장르적 분할이 중요했던 시기에는 문학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계급이나 특징, 작품의 배경 등이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인위적이고 제한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습으로는 그것이 작위적이고 진실답지 않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 시기의 예술의 진실다움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17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의 모방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실제 가시적 경험적 현실의 모방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17세기의 예술 역시 실재를 모방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보편적이고 완전한 면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고전주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이상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신고전주의 연극의 데코럼(decorum)7)은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칙이다. 이 시대는 ‘사실’과 ‘사실임직함’이 구별된 시기로, 유명한 부알로(N.Boileau)와 꼬르네이유(P.Corneille) 사이의 <르 시드> 논쟁이나 오비냐크(F.H. abbe d'Aubignac)의 지적8)에서 알 수 있듯, 경험적 역사적 사실 그 자체는 때로는 연극에서 구현될 수 없는 것이며 실제의 사실보다는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임직함의 핵심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관객이 보기에 적절하고 진실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일의 엄격함이 무너지게 되는 근대의 리얼리즘에 다가가게 되면, 스타일은 혼합되며 그 동안 예술 안에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던 ‘일상생활’의 영역, ‘구체적’인 현실의 영역이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모방의 개념도 진실의 개념도 고전 시학과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변화에 있어 정점을 찍는 것이 19세기의 리얼리즘 문학이다.9)

    아우어바흐는 일상생활의 영역을 진지한 태도로 다루고, 엄격하게 분리되었던 스타일, 즉 장르적 구분이나 문체적 특징들이 한 작품 안에서 혼합되어 나타나며, 그 어떤 계급이나 그 어떤 환경도 문학 안에 묘사하는 것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것(특히 그동안의 문학에서 등장할 권리를 갖지 못했던 하층계급들), 그러면서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 안에서 일관된 흐름을 이루는 것이 바로 현대 리얼리즘 문학이 드러내는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아우어바흐가 무엇보다 스타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한없이 견고해 보였던 17세기의 고전주의 이론을 뒤엎은 19세기 초의 혁명이 그런 종류로 최초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잘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는 “중세 리얼리즘과 현대 리얼리즘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이 기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었다.”11) “스타일의 고전적 규칙을 정복한 것은, 일상적 현실과 가장 높고 가장 숭고한 비극을 가차 없이 섞어놓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였다”12)라고 설명한다. 스타일의 문제로 본다면 현실과 예술과의 관계에 있어 근대는 고전주의 이전의 세계, 즉 중세와 더 유사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반영된 실재와 예술의 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전 시대들과 비교해 매우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되는데, 고대 그리스 미학 및 이를 계승한 17세기 미학에서 중요했던 ‘이념적 형상’으로서의 ‘실재’를 상정해 왔던 개념이 이제 근대로 들어서면서 경험적 대상일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일상적 현실’로서의 ‘실재’로 그 개념이 변화하고, 이에 따라 연극예술 역시 바로 이러한 구체적 현실로서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고 그 안에 감추어진 진실(특히 사회적 문제의 폭로)을 드러내는 문제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문예사조로서의 리얼리즘의 등장 시기는 이러한 열정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시기이다.13) 이러한 분위기에 좀 더 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뉘앙스를 부과한 자연주의자 졸라와 꽁꾸르 형제 같은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설명할 때에 종종 ‘기록’, ‘조사’, ‘연구’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가 역사주의의 시대이자 과학의 시대, 실증주의의 시대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기록’이라 주장한다 하여도, 이 시기의 리얼리즘 역시 수용자가 예술작품이 재현한 그것을 경험적 현실과 동일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기법이 있었다. 아우어바흐가 자신의 저서에서 19세기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세밀한 독서를 통해 증명해 낸 그들의 스타일이 바로 그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글이 진실한 기록문서이자 삶 그 자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사용한, 때로는 모든 인물과 사물에 논리를 제공하고 사실임직하지 않은 것을 피하며 이야기가 자의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지운 노력 등이 그것이다. 무대위 연출의 리얼리즘, 배우술의 리얼리즘을 확립했다고 여겨지는 스타니슬랍스키 역시 이러한 지점을 고백했는데, 그는 항상 무대 위에 현실을 구현하고 그 삶이 진실 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짜 현실 그 자체가 무대 위에 제시되는 순간 무대 위 현실, 무대 위 진실은 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을 올리면서 깨닫는다.14) 일상이 일상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구체적 현실이 구체적 현실로 여기지기 위해서는, 진실이 진실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목표와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리얼리즘은 그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결렬한 반대급부, 혹은 수정에 부딪히게 된다. 즉 확고하게 보였던 객관적 실체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개인의 경험, 개인의 의식, 개인의 주관이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표준적 의식보다 과학적 통제나 인식을 벗어나는 ‘더 고도의 의식’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강조되었는데, 이러한 주의들과 주장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 역시 역사적 사조로서의 리얼리즘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인물과 구체적인 사물들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다. 스타일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닌, 근대적 정신으로서, 즉 구체적 일상적 현실에 대한 탐구로서의 리얼리즘 정신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도 여전히 적응하고 살아남은 것은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였다. 리얼리즘은 이제 그 역사적 문맥, 역사적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예술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주목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다소는 모호한 미학적 용어가 되어갔다.

    한편, 우리가 역사적 리얼리즘 사조를 설명할 때 가장 적절한 작가라고 언급하는 이들조차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재현의 개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리얼리즘 지지자들이 언급하는 발자크에 대하여 바르베리스(P. Barberis)가 “만일 사람들이 리얼리즘을 통해서 집의 묘사와 요리사의 급료를 이해한다면, 발자크의 모든 부분은 리얼리즘에서 벗어난다.”15)고 한 지적은 그것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그는 “그들은 역시 진실로 발자크가 아닌 무언가를 위해, 즉 같은 의미에 접근하고 내적 경험에 공동의 시련의 정당화를 부여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이야기한다. 자아는 인물에게로 옮겨가며, 인물은 자아를 이야기하는데 소용된다. 이것은 아마 모든 리얼리즘의 토대일 것이다”16)라고 설명한다. 작품은 세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세기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후의 모든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자료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마르크시즘에서도 역시 사실주의를 구체적 현실, 일상적 삶의 반영으로 이해하는데, 단 이때의 반영이란 참되고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이해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유용하며 진보에 기여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타타르케비치는 이것을 ‘실천적 의미의 리얼리즘’17)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엥겔스가 발자크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 즉 그의 <인간희극>을 “리얼리즘의 위대한 승리”18)라고 이야기한 것이 중요한 계기이자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카프 해소기 많은 논자들의 전향의 논리가 되기도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바로 그 정치적이고 실천적 성격으로 인하여 특히 더 현실과 재현의 문제에 대한 많은 논쟁점을 안겨주었다. 이제 근대의 ‘리얼리즘들’은 실재하는 구체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개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바로 그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 현실을 작가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의 문제, 문학작품에 반영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의 형식적 창작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 상호간의 대립과 모순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리얼리스트들이 말하는 실재로서의 현실, 나아가 경험적 현실이란 것이 그 자체로서 모호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떠한 질문을 가지고 현실을 보느냐에 따라 실재하는 현실은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에서 현실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창작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야 할 대상’이며, 여기에 더해서 “예술작품은 거의 언제나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과는 다른 재료로 이루어지며 다른 목적에 기여하기에, 사실 예술작품에서는 그것이 모방한 실재에서 중요한 것과는 다른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19) 것이다. 나아가 많은 학자들은 리얼리즘이란 용어가 오늘날에는 그 용어를 알지조차 못했던 예술 및 문학구조에까지 사용되면서, 하나의 일반적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이면서도 동시에 애매모호한 용어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리얼리즘이 하나의 문학적 양심, 혹은 진리의 탐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도 무엇이 진실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

    현실에 대한 예술적 인식, 그 관계, 그리고 사조로서의 리얼리즘이 지니는 이러한 모호성은 근대극의 수립을 위해 분투하던 한국근대연극사에 그대로 혼란과 모순이 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논자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예술의 현실이라는 것이 기실 실재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 내에서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견지하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을 논하고 예술에서의 재현을 논하는 논자들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즉 그들이 어떤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일 것이다.

    2)예술에 있어서 진실이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에 있어서 진실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타타르케비치는 이것은 고대 철학에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에 이르러 뚜렷이 나타나는 고전적 개념이라 말한다. 플라톤이 인정한 진실은 객관적 진실이었는데, 이것을 해석하는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개별적 방법으로 사물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우연하거나 일시적인 특징까지도 포함해서 어떤 것도 삭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도록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편적 방법으로 예술가들에게 본질적이고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것만 남기고, 보는 이의 주관을 포함하여 우연하고 변하기 쉬운 모든 것은 제거한 채 사물을 재현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적 진실이자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진실이라 생각했고,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예술가에게 요구한 진실이었다. 이러한 플라톤의 진실은 물론 대부분의 근대미학자들의 진실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타타르케비츠(W. Tatarkiewicz), 손효주 역, 『미학의 기본 개념사』, 미진사, 1990. 48~354쪽 참조.  3)특히 진실의 문제는 고대 시학에서 문학예술, 즉 시와 관련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는 예술에서의 ‘진실’의 개념 변화에 대해서는 타타르케비츠(W. Tatarkiewicz)의 앞의 책, 346~356쪽 참조.  4)Mimesis :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의 우리말 번역본의 부제는 ‘서구 문학에 나타난 현실 묘사’이지만, 현실(실재)의 예술작품 내 ‘재현’의 문제와 그에 대한 시대적 철학적 해석의 문제를 중요히 다루고 있는 아우어바흐의 주제를 생각하여 ‘재현’으로 번역한다.  5)아우어바흐가 자신의 저서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스타일의 관습, 즉 문체이다. 이것은 그 사회의 관습과 철학, 세계관의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비극, 희극 등의 장르 구분이 엄격했던 고전주의 시대에는 장르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보다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중세시대의 세계관에서는 지체가 낮은 사람들의 숭고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거나 문학의 장르가 구분되는 일 역시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만나고 17세기 프랑스 미학에서 다시 고전주의가 부활하면서 스타일의 분리가 다시 나타났다. 때문에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도 진지한 장르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큰 변화였다. 예컨대 라신느의 작품에서 ‘눈물 몇 방울’은 한정된 양, 즉 절제와 고귀한 신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18세기 문학의 눈물은 가련한 주인공이 ‘흘리고’ ‘떨구고’ 있는 것으로, 위로를 요구하는 의미이다. 18세기 문학에서는 그 이전의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직업과 신분의 인물들이 문학에 등장하며 구체적인 거리의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우어바흐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로 이러한 스타일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구문학의 재현을 살피며 그 관점으로 현대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길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6)17세기의 미학이 고전 시학의 도그마화라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고전 시학의 스타일의 문제는 호라티우스(Horace)의 비극과 희극의 주제나 스타일을 서로 뒤섞을 수 없다고 말한 다음의 인용문에 잘 드러난다. “A comic subject is not susceptible of treatment in a tragic style, and similarly the banquet of Thyestes cannot be fitly described in the strains of everyday life or in those that approach the tone of comedy. Let each of these styles be kept to the role properly allotted to it” Horace. Translated by T.S. Dorsch. "On the Art of Poetry", Aristotle/Horace/Longinus: Classical Literary Criticism, London: Penguin Books, 1965. p.82.  7)라틴어로 ‘옳다(right)’ ‘적절하다(proper)’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 원칙이다. 연극과 문학 안에서 사회적 행동, 매너, 에티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할 많은 규칙을 제시하고 제한했다.  8)“연극에서는 보여질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사실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실성이 연극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 원칙이다.” François Hédelin, abbé d'Aubignac, 『연극의 실제 La Pratique du théâtre』(1657), 귀 라루, 조성애 역, 『사실주의 문학의 이해』, 동문선, 2000. 31쪽 재인용.  9)때문에 귀 라루(Guy Larroux)는 리얼리즘 문학의 역사적 탄생 배경과 시학적 요소들을 정리하는 저서에서 “사실상 모든 사실주의란, 간단히 말해 이상주의와 환상의 측면, 합리주의와 일상생활의 관찰이라는 측면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문학사 개념 속에서 나타나는 반작용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방적인 경향을 발전의 단계로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현대적인 사실주의가 이 단계를 완성시키고 결말지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귀 라루, 앞의 책, 25~26쪽.  10)에리히 아우허바흐, 앞의 책. 202쪽.  11)같은 책, 276쪽.  12)그는 바로 그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리얼리즘은 근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리얼리즘에 보다 더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러시아 리얼리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명된 시민계급, 서유럽적인 부르주아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에리히 아우허바흐, 앞의 책, 232~236쪽 참조.  13)‘리얼리즘’라는 용어 그 자체가 19세기의 언어적 산물인데,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1821년으로 1821년 『19세기의 메르쿠리우스Mercure du Dix-neuvieme Siecle』에 실린 익명의 글이 이론으로서의 리얼리즘으로는 최초의 것이라 한다. 1830년대가 되면 미학적 의미로 사용되다가 1850년대가 되면 사실에 충실하고 하층계급의 삶을 드러내며 새로운 가치들을 전진시키고자 하는 운동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리얼리즘은 1821년 처음 등장한 이후 1850년대가 되면서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며 미학 용어로서 각종 서적에 등장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샹쁠뢰리가 1857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자 1856년에서 1857년 사이에 발행된 정기간행물의 제목이기도 했다. 1855년에는 쿠르베가 자신의 회화에 이용어를 사용했고 1861년에는 리얼리즘에 대한 자신의 이론들을 모아 출판하기도 했다. 리얼리즘라는 용어 및 전시대 미학에 대한 거부 및 새로운 운동으로서의 리얼리즘라는 용어의 형성에 대한 문제는 귀 라루, 『사실주의 문학의 이해』, 동문선, 2000. 115~118쪽.; 타타르케비치, 『미학의 기본 개념사』, 미진사, 1990. 331~334쪽 참조.  14)스타니슬라프스키(K.S.Stanislavsky), 강량원 역, 『나의 예술 인생』, 이론과 실천, 2000. 143~145쪽.  15)피에르 바르베리스(Pierre Barberis), 배영달 역, 『리얼리즘의 신화 : 발자크의 소설세계』, 백의, 1995, 309쪽.  16)피에르 바르베리스(Pierre Barberis), 앞의 책, 310쪽.  17)타타르케비치, 앞의 책, 334쪽.  18)“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리얼리즘은 작가의 관점에 구애받지 않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발자크는 놀랍도록 리얼리스틱한 프랑스 사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의 위대한 작품은 상류사회의 불가피한 몰락에 보내는 줄기찬 비가(悲歌)이며, 그의 모든 동정은 사멸하도록 운명지어진 계급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귀족들을 서술할 때보다 그의 풍자가 더 예리해지고 아이러니가 더욱 신랄해지는 적은 없습니다. 이처럼 발자크가 자신의 계급적 공감이나 정치적 편견과는 반대되는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가 좋아하는 귀족들의 멸망한다는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멸망해 마땅한 인물로 묘사한다는 것을 나는 리얼리즘의 위대한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19)타타르케비치, 앞의 책, 334쪽.

    3. 한국근대연극론에서의 현실, 리얼리즘, 낭만성

       3.1. 한국근대연극의 사실주의 재론

    한국근대연극의 많은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이 하나의 체계적이고 일관된 연극론을 형성하지 못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에 새로운 극문화를 수립하겠다고 하는 선각자적 의식과 열정은 충만했으되 그들에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너무 과다한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대한 분야의 예술들이 관련된 연극문화라는 것이 나아가 단지 예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요 대중과 사회라는 더 넓은 영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 그에 소진해야 하는 에너지가 그 어느 분야보다도 더 많이 요구되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근대 연극론의 논자들은 수입된 정보와 제 자신의 연극 철학, 타인들과의 논쟁에서 얻은 결론 등을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다듬을 여유를 얻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의 논의를 살피다 보면 때로는 용어가 혼재되고 사용된 개념이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사용된 개념어보다는 논자들의 입장과 맥락을 살펴야 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의 근대극을 사실주의 연극의 확립과 관련하여 보는 것은 근대연극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이래로 별다른 이의 없이 지속되어 왔다.20) 그러나 이것은 1920~1930년대의 실제 분위기였다기보다는 근대극은 곧 사실주의극이며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해야 근대극이 확립된다고 생각한 후대 연구자들의 관점이 오히려 강하게 반영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근대연극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초기 한국연극학자들의 시각이 그러했으며 그것이 특별한 비판 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다.21) 특히 근대연극에 대한 연구가 희곡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었고 대표적으로 연구되었던 김정진, 유치진 등의 희곡이 다분히 사실주의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생각할 때, 또 연출가 홍해성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 스타니슬랍스키와의 대비를 통해 연구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연구 경향들과 관점이 우리의 근대연극인들이 사실주의 연극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근대연극인들의 사실주의에 대한 경도는 거의 찾기 어렵다. 그들의 주장에서 한결같이 반복되어 드러나는 것은 연극과 현실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한 강조로, 연극이 현실의 진실,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 대한 주장인데 그것이 반드시 역사적 사조로서의 사실주의 연극을 경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대중에 대한 지향과 연극의 사회적 의미의 강조는 신극의 초창기부터 근대극을 소개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연극인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근대 연극의 특징 중 하나인 사회의 교화기관, 대중의 학교로서의 연극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 개조에 있어서 연극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음을 강조하면서 연극을 “교화기관의 수(粹)”22)라고 말한 윤백남이나 “연극은 문명의 계산기”23), “그 모든 민중을 졸지에 급속히 다수히 단시간에 교양하는 기관”24)이라고 강조한 현철, 모든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의 가치는 “인류의 영혼의 해방과 구제에 있다”25)고 말한 김우진 등은 모두 그러한 연극의 의미를 주장한다. 이들이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근대 초 선각자적 지식인으로서 민중의 계몽과 교화라는 과제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발견한 새로움, 즉 전통예술과는 다른 근대예술로서의 연극의 의미는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 특히 실제 현실 사회에서 지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능과 의미에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말하는 근대연극의 새로움, 가치 지향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근대예술로서의 연극이 구체적 현실과 관계 맺어야 하고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며 사회적 교화기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강조는 아니었다. 윤백남, 현철, 김우진 등의 논의에서는 입센을 비롯한 사실주의 작가들의 작업도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동시에 고든크레그나 표현주의에 대한 강조도 적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현철은 ‘현실 폭로’, ‘인과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26)으로 연극을 정의하는가 하면 표현주의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외면 묘사의 연극은 이미 끝났음을 말하면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27)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후 유치진, 홍해성, 김광섭, 함대훈, 장기제, 이헌구 등 30년대 들어 활발하게 외국의 연극론을 소개하고 자신의 연극관을 펼쳤던 극예술연구회의 논자들에게도 이어지는 사실이다. 그들은 신극론을 펼치는 자리에서 항상 ‘현실인식’, ‘사회의식’을 강조한다. 예컨대 이헌구는 흥행극단을 비판하고 조선의 신극이 나아갈 바를 주장하면서 “오늘의 극은 -특히 조선에 잇어서는- 그 어떤 문제를 제공하고 암시하고 해결하는 테-마를 가지지 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문제가 새로운 사회의 동향과 필연적 호흡을 같이 하여야 한다.”28)고 말한다. 서항석 역시 흥행극과 다른 신극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글에서 신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들이 흥행극과 다르다고 보는 신극, 근대극의 핵심은 바로 일개 오락이 아닌 진지한 연극,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극, 대중의 학교가 될 수 있는 연극이다. 그것이 시대정신을 지닌 오늘의 연극, 즉 신극인 것이다.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인 『극예술』 창간호에 실린 이헌구의 「조선연극사의 극연의 위치」에서 강조되는 극연의 창설과 함께 사회에 미친 영향의 첫 번째로 꼽는 것도 연극에 대한 인식의 개혁이다. “일반민중의 생활 속에 가지고 드러갓다는 것”, “즉 극으로 하여끔 인류문화의 가장 중요한 부문으로 인식식히는데 잇엇다.”30)는 것, 다시 말하면, 극장이 타락의 장소가 아닌 학교이자 교육기관이자 사회기관이라는 인식을 극연이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의 신극론이 꼭 내용상의 현실인식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극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미술가 등을 제대로 갖춘 근대적 시스템으로서의 연극 제도도 의미했다는 것을 이헌구의 다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근대극의 조건’으로 각본과 배우와 더불어 장치, 조명, 효과, 대사 등을 비롯한 제반 공연 시스템의 근대화를 지적하고 있다. 같은 글에서 흥행극이 근대극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무대 감독이라든가 장치라든가 조명이라는 것이 잇을 수 없었다”라고 지적한다. 그저 잘 울려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거기에는 “극적 생명, 극의 본질적 의의를 찾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이와 대비되는 선진국의 극문화를 이식하려는 운동으로서의 극에는 “인정이 잇고 눈물이 잇고 웃음이 잇으면서도 그를 일관(一貫)하는 극의 본질적 의의를 발하엿다”32)고 말한다. 흥행극에 무엇보다도 연출을 비롯한 공연예술가들의 무대 해석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이다.

    극예술연구회의 연구분과는 해외의 연극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신극론을 펼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해 왔는데, 이들은 소위 해외문학파로 불리는 서양문학의 전공자들이었다. 해외문학파의 논자들의 지향점이 ‘세계성이라는 모더니티’의 추구였으며33) 이들이 소개한 문학작품 및 해외 문예에 대한 소개들도 사실주의 문학보다는 오히려 상징주의, 표현주의, 미래파 등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이 주축이 되어 펼쳤던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이 사실주의극에 입각한 근대극이라고 보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34) 오히려 이들이 강조한 것은 동시대성, 사회성, 예술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일례로 대표적 리얼리즘의 연출가로 인식되는 스타니슬랍스키와 그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대한 함대훈의 소개를 들 수 있다. 1934년 『극예술』 창간호의 ‘신극운동의 진원지 순례’라는 꼭지의서 「모스크봐 예술좌의 거러온 길」이라는 글을 통해서 함대훈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극장이 흥행이나 오락이 아닌 예술로서의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행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한 평가이다. 그는 이 극장은 평의회를 열어 레퍼토리를 엄선함으로써 예술적 양심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스타니슬랍스키는 사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메이에르홀트, 알리사 쿠넨 등이 반기를 든 사실, 그리하여 메이에르홀트는 연극의 양식화를 주장하며 그를 통한 무대예술의 율동적 통일을 제창해 나갔으며, 알리사 쿠넨은 카메르니 극장을 창립하여 스타니슬랍스키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함대훈은 이어 스타니슬랍스키가 이 두 명의 명배우를 잃고도 <청조>를 2년간 더 준비해서 1908년 무대에 올린 일, 이어서 고든 크레그를 초청하여 3년간의 준비 끝에 1912년 <하믈레트>를 “상징적 연출”로서 공연한 일 등을 소개하면서, “우리 연구학도의 그 모범을 할 만한 연구적 태도”35)라고 언급한다.

    함대훈이 소개하고 있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작업은 1905년 이후 스타니슬랍스키가 관심을 두고 실험해 나간 상징주의 연극의 시기이다. 함대훈은 스타니슬랍스키가 인생의 단면을 무대에 올리고자 하는 사실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이에만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나간 ‘연구자’임을 강조한다. 그런 때문에 모스크바 예술좌는 혁명 이후에도 바흐탄코프와 같은 인물을 길러내는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극장의 부설기관으로 오페라 연구소를 건설하는 등, 프롤레타리아 극을 공연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극다운 연극’을 계속해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함대훈이 글을 맺으면서 내린 결론, “이리하여 모스크바 예술좌는 삼십칠년의 장구한 세월을 그의 참된 연극 수립을 위해 여러 가지 형식으로써 연극의 연출에 노력하고 있다”36)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여러 가지 형식적 실험을 끝없이 시도해나가는 이들의 탐구 정신이지 사실주의의 산실로서의 극장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 그가 바라보는 근대 예술의 특징, 근대 예술가의 자질에 대한 방점이 있는 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 근대연극인들이 사실주의적 연극관을 지향했다는 시각은 이들이 신극을 공부한 토양, 일본의 신극계를 살피는 것으로도 재고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우리 연극인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언급되는 일본 신극의 대표자들, 즉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나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 등이 특별히 사실주의 연극의 지지자들은 아니었으며, 또 이와타 도요오(岩田豊雄)이나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등의 연극인들은 프랑스로 유학하여 총체예술로서의 연극을 실험했던 자크 코포(Jacques Copeau)와 뷔에-콜롱비에 극장(Théâtre du Vieux-Colombier)을 직접 경험한 인물이었고, 오사나이 가오루와 축지소극장을 만든 히지카타요시(土方興志) 역시 표현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20년대의 독일 연극계를 직접 경험한 자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 근대연극의 산실이자 실험실이었다고 평가되는 축지소극장의 레퍼토리도 사실주의 극뿐만 아니라 유진 오닐, 루이지피란델로, 게오르그 카이저, 메텔링크, 스트린드베리 등을 상당히 다양한 경향의 서구 극작가들을 나열하고 있음37)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우리 연극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되는, 자유극장과 축지소극장을 이끌었던 오사나이 가오루의 유럽 경험은 주의를 요한다. 그는 1912년 12월부터 1913년 8월까지 유럽 연극계를 둘러보았는데 라인하르트와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오사나이 가오루는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난 사실을 매우 감격스러워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가 1913년 모스크바 방문 당시 그곳에서 보고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귀국 후 오사나이 가오루의 행보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귀국 후 그는 근대극 소개의 시대를 끝내고 기예(技藝)의 시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하는데, 기예의 시대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외국극 소개에서 벗어나 독자적 창조의 방법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38) 그러면서 올린 작품이 고리키의 <밤주막>과 안드레예프의 <별의 세계로>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올린 성공적인 사실주의 연출작 <밤주막>과 스타니슬랍스키도 관심을 보이고 공연하기도 했던 상징주의 작가 안드레예프의 작품인 것이다. 그가 다소간 결이 다른 이 두 작품을 통해 무대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그 스스로도 말했듯 자기 세계가 분명한 연극, 즉 연출력이 살아있는 연극이었다.39) 특히 성공적이지 못한 연출로 비판을 받아 ‘무대 형상화 논쟁’을 초래한 <별의 세계로>를 연출하면서 오사나이 가오루는 “이 작품을 예술적으로 연기하는 데는 조화나 통일이라는 낡은 기예 이외에, 어떤 새로운 정신적인 –오히려 영혼적인- 기예를 요한다고 강조”40)했다 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가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만난 것은 강력한 연출가 연극의 세계이었으며 무대예술가로서의 연출가의 역할에 대한 자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 근대연극인들이 수학한 일본 연극계의 상황은 20세기 초 서구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다양한 연출 실험과 이론들이 이미 소개되고 실험되고 논의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극을 공부한 우리의 근대연극인들이 단순히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실주의만이 사회적 현실을 담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우리의 근대연극론 안에서 언급되는 외국의 연출가 및 작가들 중에는 고든 크레그, 메이에르홀트, 바흐탄코프, 타이로프, 라인하르트, 자크 코포 등 역사적 사조로서의 사실주의를 벗어나는 상당히 다양한 경향의 인물들이 나열되고 있다. 1920~1930년대의 유럽 연극이 연출가 시대의 개화기이자 전위적인 예술의 논쟁장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이와 같은 유럽 연극계의 분위기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 연극계에 소개되고 실험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일본 연극계에서 유학했던 우리의 연극인들이 이 중에서 오로지 사실주의 연극에만 감화되고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1930년대 한국리얼리즘연극론을 다시 검토하는데도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히 초기 민중연극론을 통해 사회의식을 드러내고 농촌 3부작의 창작과 공연을 통해 리얼리즘 연극을 확립하고자 했던 유치진이 30년대 후반기에 보여준 급격한 변모와 그의 로맨틱 리얼리즘의 요체를 재검토하는 데에도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의 행보를 단순히 객관적 정세의 악화와 그에 따른 변모라고 설명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3.2. 1930년대 리얼리즘론에서의 ‘낭만성’의 문제

    한국근대문예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이론과 비평의 쟁점이 된 데에는 좌파 계열의 비평가들의 논쟁, 특히 문학에 있어서의 창작방법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이 크게 작용했다. 이 논쟁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던바 이곳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논쟁의 여파가 1930년대 연극의 리얼리즘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특히 유치진, 박영호의 글에서 보이는 ‘로맨틱 리얼리즘’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낭만성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재고하는데 필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41)이라는 용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32년 10월 막심고리끼의 집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스딸린이 사회주의 문학과 예술의 주된 경향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지칭한 이래, 1933년 10월 고리끼를 명예위원장으로 하여 소비에트 작가 동맹이 결성되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 동맹대회에서 채택된 ‘소비에트 작가 동맹 정관’에 의해 공식화된다. 정관의 가장 첫 머리에 밝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920년대의 소비에트 문화예술에 대한 이론상의 혼란과 여러 조직들의 폐쇄성들에 대한 반성으로 1932년 4월 23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문학과 예술단체의 개조에 관하여’라는 결의에 의거 기존의 모든 문예조직을 해산시킨다. 그런 후 소비에트의 모든 작가들이 가입할 수 있는 ‘소비에트 작가 동맹(союз писателей СССР)’이라는 단일 조직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채택된 소비에트 미학의 기본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다소는 모호한 인민성이라는 것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 즉 문학예술이 인민의 감정, 사상, 의지를 경합, 촉진, 발전시켜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작가와 예술가들은 인민성의 원칙에 따라 인민을 형상화하고 인민에게 쉽게 이해되고 인민의 이익과 요구에 복무하며 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인민의 것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창작방법론으로 공식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후 주다노비즘(Ждановиз м)43)으로 대표되는 왜곡화 경색화를 거쳐 문학계와 비평계가 철저하게 당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안드레이 주다노프(A.Жданов)는 제1차 소비에트 작가 동맹 대회에서 당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정신의 기사로서의 소련 작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질은 인민에게 봉사하고 레닌과 스탈린 당의 과업을 계승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또 문학은 경향성과 당성을 띠어야 하고, 인물은 낙천적이고 영웅적이어서 항상 미래를 예시하는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불어넣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일반적으로 사실주의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로맨티시즘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안에서 쟁점이 되게 되는 것이다.

    소비에트에서 거론된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우리 평단에도 즉각적인 반향을 가져왔고 그것이 카프 해소기와 맞물리면서 전향의 논리와 연결되어 복잡한 논쟁을 파생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하자는 편에 서 있었던 임화의 경우 이와 관련하여 ‘낭만정신’을 거론하게 되는데, 그는 이 낭만정신을 “나는 문학상에 주관적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낭만적이라 부르며, 그것이 사실적인 것의 객관성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현현하는 의미에서 ‘낭만적 정신’이라 부르고 싶다. 따라서 이곳에서 부르는 낭만적 정신이란 개념은 어떤 특정 시대 특정의 문학성의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원리적 범주로서 칭호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낭만정신은 부당한 과장과 불분명한 상징이라는 위험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를 일층 견고히 축조하는 것으로 피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 낭만주의는 가진 바 본래의 성질인 강고한 리얼리즘에 의하여 그것은 스스로 배제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44)

    이러한 임화의 낭만주의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전향의 논리, 예술의 탈정치 논리로 사용되던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18-19세기의 낡은 절대 객관적 몰아의 객관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주관’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낭만정신을 강조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차후 임화는 주체성의 문제를 낭만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성하면서 “그러므로 ‘레알이즘’이란 결코 주관주의자의 무고(誣告)처럼 사화(死化)한 객관주의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하여 실천에 있어서 자기를 증명하고 다시 객관적 현실 그것으로 개변해가는 주체화의 대규모적 방법을 완성하는 문학적 경향이다.”45)라고 말하며 오해되고 있는 사실주의를 재인식해야 함을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사실주의의 재인식의 문제는 낭만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붕괴된 주체를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후 임화의 논리는 주체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논리는 연극계에서 유치진, 박영호에 의하여 언급된다. 연극에서 먼저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을 논한 것은 박영호였다. 그는 「극문학 건설의 길-리얼리즘적 연극성의 탐구」(1936.4.2~10)라는 장문을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이어서 「희곡의 리얼리즘 –극문학 건설의 길」(1936.4.12~18)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입센을 “진정한 리얼리즘을 탐구한 작가”라고 언급하면서 그 이유로 “현실의 외면성보다는 내면성을 생명선으로 삼은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박영호에 의하면, 입센이 진정한 리얼리스트인 것은 그가 묘사적 리얼리스트라서가 아니라 그 내면의 탐구에 주목한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에 일으러 입센으로 돌아가라는 설은 그의 강렬한 주관표현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자는 데 주인(主因)이 잇다”고 말하면서, “근자에 내외의 문단이 말하는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와의 제휴설(提携說)과 공통되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로맨틱 리얼리즘’이 그것이다”46)라고 정리한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맥락에서 본다면 독일표현주의극도 입센의 후예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입센에게서 어떤 형식상, 스타일상의 특징보다도 ‘내면 탐구’를 강조하고, 나아가 ‘표현주의를 입센의 후예로 볼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박영호의 논리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임화가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에서 언급한 ‘주관’의 문제이다.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인 입센을 예로 들면서 그에게서 보이는 진정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는 객관적 관찰과 서술이 아닌 곳에 있다고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리얼리즘에 있어서의 작가의 ‘주관’이 객관성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의 합일이라는 개념은 바로 유치진에 의해서 반복된다. 유치진은 극예술연구회 제12회 공연으로 <춘향전>을 준비하면서 리얼리즘을 토대로 한 로맨티시즘의 시도라고 언급한다. 그는 춘향전 각색의 변에서 ‘리얼리즘을 버릴 수는 없었다’라고 말하면서 리얼리즘이 가지는 해부력과 관찰력을 토대로 한 새로운 발전과 전환을 <춘향전>을 통해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인 ‘춘향전이 자신의 문학행동의 고민에서 나온 부산물인 동시에 나의 문학생동의 새로운 코-스를 암시해 주는 바가 될 것’이라 말한다. 그는 작품에 대하여 “나는 춘향전을 각색하는데 그 시대적 배경을 되도록 뚜렷이 ‘크로-스·업’해 볼려고 힘썼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환경 속에서 탐관오리와 싸우는 춘향의 사랑 이야기를 ‘피의 기록’이라 말한다. “그(춘향)가 사람의 생명력을 갖이고 그 시대의 부패한 권력가 싸워나가려는 의지 – 거기에 춘향의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는 반문은 그가 춘향을 낭만적 영웅으로 그리려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유치진은 자신이 주장하는 로맨티시즘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낭만성 무시한 작품은 기름 없는 기계」를 통해 좀 더 설명한다. “레알리즘에만 충실했던 작품은 빈(空) 데가 잇고 기름기가 없어 빡빡하기만”하기 때문에 로맨티시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는 “좀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공상, 희망, 분노, 이데올로기 등을 배태(胚胎)한 로맨틱한 수법이라야 일반독자나 관중을 에필할 수 잇을 것”48)이라 주장한다. 그의 이와 같은 ‘로맨티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논리는 대극장공연을 옹호하는 다른 글 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오늘의 조선 신극이 소극장적 잔재물(殘滓物)을 청장(淸帳)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소극장 연극의 리얼리즘을 비판한다. 그곳에는 청산해야 할 말초적 리얼리즘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연극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로맨티시즘의 대두인데, 특히 대극장 연극에서는 더욱 로맨티시즘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관찰적 리얼리즘을 잊지 않으면서도 로맨티시즘의 희원과 이념을 지녀야지만 연극이 제 뜻을 펼 수 있다는 말이다.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의 합일을 주장하는 그의 논리는 얼핏 외면상으로는 임화의 논리와 유사한 듯 보인다.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에서 임화는리얼리즘이 전향논리로 사용되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성질, 한계에 대하여 전혀 추상적 객관주의의 망상에 사로잡혀 ‘레아리즘’을 마치 맑은 호수가 하날의 별을 반영하는 것 같이 절대몰아의 사실로 이해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그는 “문학은 호수의 물과 같이 무의지한 자연의 산물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소산이라는 점”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눈 먼 자들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문학은 결코 몰아주의(沒我主義)요 절대적 객관 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모든 주관적인 것을 임화는 낭만적인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는 이후 「위대한 낭만적 정신」에서 “가치있는 예술문학의 작품이란 항상 그 작품이 창조한 맺개의 대표적인 인간적 형상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것”이라 말하면서 햄릿, 돈키호테, 오브로모프, 카츄샤, 카르멘 등 고금의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을 언급한다. 그는 “인간적 형상이란 비일상성적인 전형임을 요하는 것이며 통상의 인간을 전형화하는 데는 실재성 우에 작가의 이상(꿈)이 작용하는 것을 상상키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50) 전형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수일, 심순애, 성춘향만치도 친접(親接)할 수 있는 인물을 오늘의 조선의 예술문학에서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낭만적 자각을 통과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진실한 로맨티시즘과 광의의 레알이즘이 영속적으로 통일된 문학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51) 임화의 이러한 주장은 ‘리얼리즘을 토대로 한 로맨티시즘’ ‘해부와 관찰로 다시 본 낭만문학 춘향전의 근대극화’라고 주장한 유치진의 논리에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임화는 춘향전 각색의 말을 비롯하여 일련의 로맨티시즘론을 주장하는 유치진을 1938년 3월 발표한 「극작가 유치진론–현실의 빈곤과 작가의 비극」을 통해 비판한다. 이 글에서 임화가 특히 비판하고 있는 유치진의 로맨티시즘은 1937년 12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래와 같은 부분이다.

    임화는 리얼리즘이 절망을 찾아내는 방법은 될지언정 희망을 찾지는 못한다고 말한 그의 리얼리즘 인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한다. “현실의 가치를 의심하기 전에 또는 그것을 표현하는 문학의 방법을 회의하기 전에 제 자신이 얼마마한 정도의 리얼리스트이엇는가를 음미의 제일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그는 문학적 의미에서 독창성이란 문학 세계가 몰랐던 세계를 발견함에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치진은 결코, 조선 작가 중 새 세계를 발견한 작가는 아니었다, 바꿔 말하면 치진은 다른 작가에 비하여 현실을 보다 더 깊게 인식한 작가는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어 “실상 여태까지 치진이 쓴 대부분의 사실적 작품은 거개가 현실과의 갈등의 소산이라고 보는 식은 관찰의 소산이라 할 수 잇다. 그러나 단순한 관찰자에겐 현실의 자기의 심오한 비밀을 개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치진의 예술적 도달점과 현실 인식의 수준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잇다고 단언할 수 잇다”고 비판한다.

    이에 유치진은 자신의 로맨틱 리얼리즘이 충분히 설명되고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연이어 이에 대한 발언을 발표한다. 자신의 로맨티시즘은 리얼을 강조하는 낭만이라는 것이다.53) “그것은 필히 ‘리알’의 핏줄기에서 난 ‘낭만’이오 ‘리알’을 살찌우고 그 심장을 강화하자는 낭만정신일 따름”이라 말하면서, “내가 말한 낭만정신은 이 불을 말함이다. 자기를 비약시키려는 줄기찬 감상력을 말함이다. 낭만정신은 생활에 대한 (혹은 예술에 대한) 의욕의 ‘에스푸리’가 아니면 안된다”라고 주장한다.54) 또, 그는 “아닌게 아니라 리앨하게 그려야 할 것은 우리 작가의 이저서는 안 될 물건일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고 전제한 후, 그렇다고 리얼한 작품만이 우수한 작품은 아니라 말한다. “리알을 뚫고 나아가 인생을 구하는 작가의 혼 – 이것을 시혼이라 할는지- 이 혼이 작품을 결정하는 최후일 것이다.”55)라고 말한다. 유치진이 말하는 시혼은 사실 막연하고 추상적이다.56) 더불어 그가 언급하고 있는 ‘리얼’의 개념도 막연하다. 그의 대부분의 글에서 리얼은 소재로서의 현실, 경험하는 실체로서의 현실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언젠가 리얼리즘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자리에서 “광의로 말하면 리얼리즘이란 근대문학의 근본적 성격이 아닌가 합니다.”57)라고 한 인식이나 작가 스스로가 ‘우리는 숙명적으로 리얼리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다소는 추상적 의미에서의 작가의 시대의식, 현실의식이라는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의 리얼리즘론은 많은 비판을 불러온다.58)

    그런데 회를 거듭하여 자신의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치진의 논리에서 한 가지 주목할 지점이 보인다. 그의 리얼리즘 논리가 점점 관객의 무대적 리얼리티의 인식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현실의 가지가지 사실은 단지 우리의 구하는 인생은 이러타는 –작가의 인생관을 증명하는 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은 결코 그것만으로는 창작의 수단은 될지언정 창작의 목적물은 될 수 업다.”고 하면서, “리알리티한 사실은 그것이 아모리 리알리티해도 한 예술품이 될 수 업는 것과 갓다”고 주장한다.59) 대극장론을 펼치면서 그가 강조한 부분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즉 중요한 것은 관객이 보기에 리얼해야 하고 관객을 움직이기에 적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가 소극장의 말초적 리얼리티를 비판하는 근거 중 하나도 그것이 더 이상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로맨티시즘의 근간은 결국 대중성에 있는 것이다.

    그는 로맨틱 리얼리즘론을 언급했던 초기, 다소는 소박하게 “일후(日後)의 문학은 레알리즘과 로맨티즘의 조화이리라고 했는데 물론 나도 이미 동감입니다. 그러나 희곡에 잇어서는 그보다도 더 한 층 로맨티즘이 요구되리라고 생각합니다.”60)라고 말한다. 그가 문학보다 희곡에서 더 한층 로맨티시즘이 요구된다고 말한 맥락은 무엇일까. 그것은 희곡이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연극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체험적으로 얻은 창작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가 있다.

    여기서 그가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현실의 ‘리알함’ 그 자체, 혹은 작가의 현실인식보다는 수용자의 입장에서의 ‘리알하게 보임’이다. 30년대 중반 이후 유치진의 연극론의 핵심이 관중본위, 대극장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로맨티시즘 역시 ‘관중에게의 어필’을 위한 것에서 크게 나아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임화에게는 작가의 주체 문제였던 로맨티시즘이 유치진에게는 관객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로맨티시즘이라는, 어찌 보면 속중의 흥행극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으로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로맨티시즘으로의 귀결이 30년대 중반 이후의 현실 상황에 따른 굴절이기만한 것일까. 그리하여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빈민가>, <소>의 작가 유치진이 자신의 초기 사실주의적 연극관을 버리고 만 것일까. 1930년대 초기 유치진의 연극론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가 사실주의 연극관을 주장하거나 이에 대한 언급을 한 부분은 거의 드물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62) 이 시기 그가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민중연극’에 대한 꿈이다. 그는 이것을 행장연극, 산신문극, 노동자 구락부극 등을 소개하면서 펼쳐 보이고 있다.63) 그런데 그가 이러한 일련의 글에서 끊임없이 주목하고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핵심은 이들 연극형식이 지니고 있는 관중 친연성에 있다. 유치진은 일본의 축지소극장을 비롯하여 서구의 근대적 소극장 운동들을 모두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비판의 요점은 이들이 대중성을 잃었다는 것에 있었다.64) ‘문학청년의 서재’65)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객석과의 소통을 잃어버린 채 연구와 실험에 머물러버린 아카데미즘에 대한 지적이다.

    예컨대 그가 행장극장에 매료된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신극의 산실이라고 추앙되는 축지소극장과 같은 근대의 소극장들은 “연극이 전문화의 낭중에 갇히어서 다시 한 번 참된 대중성을 박탈당하”66)도록 만든 것에 불과했다. 반면에 행장극장은 기동성있고 가변적일 뿐 아니라 민중이 함께 만드는 연극이었던 것이다. 그는 연극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일례로 러시아의 노동자 구락부극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는 구락부 활동이 거리로, 공장으로, 지역 전체로 활동해나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때로는 가두에서 청천(靑天)의 프로세니암을 그대로 사용하여 볼 것이오, 때로는 농가의 툇마루를 무대로 사용하여 사용하야도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공간의 확장에 대한 관심이다. 이어 그는 “로서아서는 트레챠곱흐 작 <와사(瓦斯) 마스크>를 연출하는데 공장내에서 실물의 와사탕크를 사용하야 큰 효과를 어덧다 한다. 이와가티 이 극의 이동성을 확대하야 비로소 구락부극은 그의 연극으로서의 직접 행동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잇을 것”이라 강조한다.67) 그의 산신문극에 대한 소개의 글에서도 이동의 편리성, 연극의 영향을 극대화하는 가능성등에 대한 강조는 반복된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일상의 변동을 인쇄활자로써 신문지면으로 보도하던 것을 동작과 육성과 음영으로 번역하여 일반사회에 전달시키려는 극형식”이라 말하면서 공연 장소와 상황에 따른 가변성을 주목한다.68) 이러한 가변성과 이동성에 관심을 둔 것은 그러한 활동이어야만 관객에의 영향력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유치진이 주목하고 있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이후 스탈린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고착화와 함께 일시에 사라지게 되는 전위적 연극형태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혁명 이념을 계승한 연극을 주장하며 10월 연극(Tеатр Oктября)을 주창한 것은, 유치진이 일본에서 아나키스트 극단 활동 당시 경험했다고 말하는 연출가 메이에르홀트였다. 메이에르홀트는 가장 열성적인 혁명가로, 10월 혁명을 거리에 운집한 민중들과 함께 재현한 거리극을 연출하고 유치진이 소개하고 있는 청복연극으로 일련의 작품을 공연했지만, 모든 전위적인 실험이 형식주의라고 비판받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대를 맞아 숙청되고 만다. 이렇듯 유치진이 초기에 관심을 갖고 소개한 민중 지향적 공연 형식들은 모두 반리얼리즘적인 전위연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치진에게 사실주의가 어떠한 의미였는가를 다시 재고하게 만든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방법이자 동시에 현실 재현의 방법이기도 했던 사조로서의 사실주의가 과연 작가로서 또 연출가로서 나아가 연극인으로서의 그에게 중요했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연극에 입문하던 시절부터 극연의 대표가 되고 대극장 공연을 하면서 통속성에 대해 비판을 받기까지 유치진에게 일관된 것은 “민중과 한 뭉치가 되야 가지고 민중의 물결 속으로 시대와 가티 추진하자 – 그것이 연극이었다. 이 위대한 것! 이 장엄한 것!”69)이라는 그 감격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다만 그의 민중이 과연 어떤 개념이었는가, 모든 수사와 모든 정치적 분위기를 걷어낸 그의 민중이 무엇이었는가의 문제 또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20)개화기 이후 전통극과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신극이 수립되었는데, 협의의 의미로서의 신극이란 근대극 즉 리얼리즘극이다 라는 견해, 또 동우회순회극단, 토월회, 이어서 극예술연구회에 이르는 길이 이 땅에 서구의 근대극인 리얼리즘 연극을 수립하는 길이었다고 보는 견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두현, 『한국신극사연구』, 서울대출판부, 1981. 유민영, 『한국현대희곡사』, 홍성사, 1982. 참조. 이후 극예술연구회를 필두로 한 예술단체들, 김정진, 유치진 등의 극작가들, 홍해성 등의 연출가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실주의와의 관련성 하에 연구가 되어 왔다.  21)신극의 계보를 토월회를 거쳐 극예술연구회에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당대의 시각, 특히 극예술연구회 자체의 시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헌구는 「조선연극사상의 극연의 위치」라는 글에서 조선 연극계를 흥행극단과 신극단으로 나누고 후자를 원각사 이후 윤백남씨 이기세 등의 문수성 유일단으로부터 토월회를 거쳐 오늘의 극예술연구회에서 새로이 출발된 극운동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헌구, 「조선연극사상의 극연의 위치」, 『극예술』 창간호, 1934.4, 3쪽.  22)윤백남, 「연극과 사회」1, 『동아일보』, 1920.5.4  23)현철, 「연극과 오인의 관계」, 『매일신보』, 1920.7.1.  24)현철,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개벽』 10, 1921.4. 107쪽.  25)김우진,「소위 근대극에 대하야」, 『학지광』 22호, 1921.6, 서연호 홍창수 편, 『김우진 전집 』 2. 연극과인간, 1999. 30쪽. 김우진은 이어서 이러한 영혼의 해방과 구제가 곧 정치적 사회적 실제 행동이 되는 것이라 하면서 ‘근대 연극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한다.  26)현철, 「현당극담」, 『조선일보』, 1921.1.24.~4.21.  27)현철, 「독일의 예술운동과 표현주의」, 『개벽』 15, 1921.9. 112쪽.  28)이헌구, 「극단 일년간 동향」, 『第一線』, 1932.12.  29)서항석, 「신극과 흥행극」, 『극예술』창간호, 1934.4. 16쪽.  30)이헌구, 「조선연극사의 극연의 지위」, 『극예술』 창간호, 1934.4. 2~9쪽.  31)이헌구, 앞의 글. 2쪽.  32)위의 글. 3쪽.  33)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 연구 (하)』, 을유문화사, 1975, 755쪽.  34)활동 초기에 발행한 잡지 『해외문학』을 연구하면서 김용직은 발행물을 통해 드러나는 경향 중 하나가 반사실주의, 반산문주의, 진보주의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성향은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카프의 활동에 대한 반동, 국민문학파들이 보여주는 보수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들이 관심을 가진 해외의 문학 동향은 동시대성과 실험성이 드러나는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김용직, 「해외문학파의 외국문학 수용양상–한국근대문학과 일본문학의 상관관계 조사 고찰」, 『관악어문연구』, 1983년 참조.  35)함대훈, 「모스크바 예술좌의 거러온 길」, 『극예술』 창간호, 1934.4. 22쪽.  36)함대훈, 앞의 글, 25쪽.  37)스가이 유키오, 박세현 역, 「쓰키지 소극장의 탄생」, 현대미학사, 2005; 김재석, 「일본의 축지소극장이 한국 연극에 미친 영향 연구」, 『어문학』 73, 2001; 홍해성이 출연한 스키지 소극장 공연 목록은 정철의 「홍해성 연출 연구」(『조선대인문과학연구』 18), 46-47쪽 참조.  38)스가이 유키오, 서연호, 박영산 공역, 『근대 일본연극 논쟁사』, 125-129쪽 참조.  39)이 점은 오사나이 카오루가 안드레예프의 <별의 세계로>를 공연한 후 고미야 도요타카와 설전한 ‘무대 형상화 논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사나이 카오루는 이 논쟁에서 연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진실로 희곡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힘은 시인적 직각(直覺)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면서 연출가는 희곡 선정에 대해서 자유스럽지 않으면 안된며 어떠한 희곡을 어떻게 연출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한다. 강력한 연출가 연극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스가이 유키오, 서연호 외 역, 「무대 형상화 논쟁」, 『근대일본연극논쟁사』, 135-141쪽 참조.  40)스가이 유키오, 서연호, 박영산 공역, 『근대 일본연극 논쟁사』, 130쪽. 1910년을 전후한 약십여 년의 시기는 러시아 상징주의가 만개한 시기이다. 특히 연극 분야에서는 메이에르홀트가 코민사르졥스카야와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 연극을 실험했으며, 스타니슬랍스키도 스튜디오를 만들거나 외부 연출가(고든 크레그)를 초청, 혹은 그 스스로가 직접 관련하여 상징주의 실험을 하던 시기이다. 오사나이 카오루가 강조하는 조화나 통일(심리적 사실주의에서 중요했던 앙상블)이 아닌 정신적, 나아가 영혼적 기예는 바로 상징주의 연출에 요구되는 부분(상징주의 예술가들이 자주 강조하는 ‘영혼’ ‘영혼의 비밀’ 등을 생각할 때)에 대한 언급이 아닌가 싶다. 이후 오사나이 카오루는 1927년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데 1차 방문의 목표가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는 것이었다면 2차 방문에서는 오히려 메이에르홀트를 만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41)이 용어가 공식 문헌에 등장한 것은 1932년 5월 23일자 『문학신문(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 』에서로 그론스키(И. Гронский)가 “대중은 예술가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형상화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고대한다”라고 언급하면서이다.  42)Краткая Литературння энциклопедия. T.7, 1972. http://feb-web.ru/feb/kle/Kle-abc/ke7/ke7-0923.htm  43)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스탈린 시대를 소위 ‘주다노프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1946년 8월 14일 당중앙위원회가 발표한 결의문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지에 관하여」에 의하면 작가들은 작품에서 정치성, 사상성, 교훈성을 타나낼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즉 당의 사상적 목적에 일치하지 않는 문학은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내용은 레닌그라드 작가회의 대회에서 한 주다노프의 연설 「문학운동에 대한 소련당의 새로운 비판」에 잘 드러나는 바, 잡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실린 작품들이 무사상적이고 무원칙적이며, 퇴폐적인 부르주와 문화의 시궁창에 빠져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뿌리 뽑기 위한 결의서인 것이다. 이 1946년의 결의문은 정치적으로 복잡했던 해방공간의 우리 문단에도 영향을 미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시집 <응향> 사건을 만든다. 김윤식은 <응향>과 같은 서정시의 개념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1947년 1월 발표 <시집 <응향>에 관한 결정서>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결정서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지에 대하여」를 흉내 낸 것이라 말한다. 이 사건에서 주다노프의 역할은 평론가 배인준이 행했다. 김윤식, 「해방후 남북한의 문화운동」, 443~444쪽 참조.  44)인식(仁植),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 『조선일보』, 1934.4.19-25.  45)임인식, 「사실주의 재인식」, 『동아일보』, 1937.10.8.-14.  46)박영호, 「희곡의 리얼리즘–극문학 건설의 길 (3)」, 『동아일보』 1936.4.18.  47)유치진, 「춘향전각색에 대하야」, 『극예술』 5, 1936.9. 21쪽.  48)유치진, 「낭만성 무시한 작품은 기름 없는 기계」, 『동아일보』, 1937.6.10.  49)유치진, 「신극운동의 한 제언」, 『조선일보』, 1937.6.11.  50)임화의 전형성은 엥겔스의 편지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엥겔스는 “리얼리즘이란, 내 생각에 의하면, 디테일의 성실성 외에도 전형적인 성격들을 그것을 둘러싸고 있으며 행동하게 만드는 정형적인 환경 속에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형성의 강조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51)임인식, 「위대한 낭만적 정신」, 『동아일보』, 1936.1.1.~4.  52)유치진, 「紙上對談」, 『동아일보』 1937.12.  53)이러한 주장은 임화의 주장을 염두에 둔 듯하다. 다른 글에서 그는 스스로 “내가 말하는 낭만주의란 임화씨가 말하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씨뻘건 심장이란 의미입니다”(「명일의 조선문학」, 『동아일보』 1938.1.1.)라고 말하기도 한다.  54)유치진, 「극단진흥책–신년에 제(際)하야 한 개의 제언」, 『매일신보』, 1938.1.3-5.  55)유치진, 「잃어버린 시혼을 찾자-위선 리알리즘의 수정부터」, 『조선일보』, 1938.3.9.  56)때문에 박영정은 그가 주장하는 시혼, 낭만 정신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작가정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박영정, 「초기 희곡과 비평에 나타난 유치진의 연극관」,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125~126쪽 참조.  57)유치진, 「대중성의 개척」, 『조선중앙일보』, 1935.7.7.  58)임화 외에도 김우종, 채만식 등이 그의 리얼리즘론이 가지고 있는 나이브함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정, 앞의 책, 120~122쪽; 양승국, 『한국근대연극비평사 연구』, 태학사, 1996. 391~392쪽 참조.  59)유치진, 「잃어버린 시혼을 찾자- 위선 리알리즘의 수정부터」, 『조선일보』, 1938.3.9.  60)유치진, 「낭만성을 무시한 작품은 기름없는 기계」, 『동아일보』, 1937.6.10.  61)유치진, 「대중성의 개척」, 『조선중앙일보』, 1935.7.7.  62)신아영은 유치진의 1930년대 전반기 연극론 역시 연극의 대중성이라는 오히려 반사실주의적 특성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하며 ‘관중본위’로 대표되는 후기의 대중지향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또 박영정은 그의 민중극 이론들은 이념적 가치 지향을 배제한 형식주의적 관점에서의 민중극 지향성이라 지적한 바 있다. 신아영, 「1930년대 후반 유치진의 연극론과 희곡 연구」, 『한국연극학』 7, 1995.; 박영정, 「초기 희곡과 비평에 나타난 유치진의 연극관」,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참조.  63)「산신문극 –그 발생과 특성에 대하여」 『동아일보』 1931.12.17.-19, 「노동자구락부극에대한 고찰」, 『동아일보』 1932.3.2~5;「연극의 브나로드 운동」, 『조선중앙일보』, 1934.1.1~3, 「농민극 제창의 본질적 의의」, 『조선문단』 21, 1935.2.  64)유치진, 「연극의 대중성」, 『신흥영화』 1, 1932.6. 7~13쪽 참조.  65)축지소극장을 ‘일문학 청년의 서재에 불과’한 감이 있었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반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아카데미즘에 빠진 운동이란 비판이다. 그리고 이것을 ‘소극장 운동이라는 것이 가진 세계적으로 공통된 폐풍(弊風)’ 이라고 지적한다. 유치진, 「세계극단의 동태–최근 10년간 일본의 신극운동(4)」, 『조선일보』, 1931.11.15.  66)유치진이 아나키즘에의 경도를 보이며 이러한 성향이 1930년대 전반기에 발표한 글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그의 1930년대 초기의 연극관은 좌파적이고 민중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윤진현의 연구(「유치진과 이나키즘 - 초기 희곡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 1994년)는 유치진의 초기 연극론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의 동생 치상(致祥)이 가입했던 아나키스트 모임 계림장, 그 자신이 가입했던 모임 토성회 등의 성격과 활동을 분석하면서 유치진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아나키즘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해 놓았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아나키즘적 활동, 특히 전위적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것이 그의 철저한 정치적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오히려 그러한 연극 형식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지향성 때문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철저한 정치적 주관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면 그 길지 않은 수년 간 별다른 사유 전환의 계기도 없이 급속도로 변모하는 까닭이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67)유치진, 「노동자구락부극에 대한 고찰」, 『동아일보』 , 1932.3.2.  68)유치진, 「산신문극」, 『동아일보』, 1931.12.18.  69)유치진, 「내 심금의 현을 울리인 작품: 로만 로란의 『민중 예술론』」, 『조선일보』, 1933.1.24.

    4. 결론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예술은 미학적 차원에서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한국연극사에서 근대적 예술로서의 연극이 지니는 새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연극은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장르이자 그에 대하여 발언하는 장르이었던 것이다. 연극은 관객과 예술가가 시공간을 공유한 채 직접적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근대인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던져주었다. 근대 연극인들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연극에 투신했던 것은 바로 그 연극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 불특정 다수의 민중을 바로 눈앞에서 하나가 되게 만들고 이들이 동요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그 힘에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근대연극인들에게 ‘연극예술’이 ‘현실’과 맺는 관계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문제는 이 관계를 그들 각자가 어떻게 상정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연극에 있어서 ‘예술’과 ‘실재’의 관계는 그 어떤 예술형식에서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항상 ‘진실’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서양 철학과 예술사에서 예술이 실재의 모방이며 그것의 목적은 진실에 있다는 생각이 지속되어 왔지만, 여기서의 실재와 진실이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개념은 아니었다. 고전주의 시학에서의 실재는 보편적 실재이자 영구불변의 이상적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이러한 개념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면서 모방과 실재 현실의 개념, 예술작품이 담아야 하는 진실의 개념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정점을 찍는 것이 19세기 리얼리즘이다. 일상적 현실, 구체적 사회문제와의 관련성은 기록과 연구의 차원으로까지 언급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조로서의 리얼리즘 운동과 그것이 강조하는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개인의 경험, 개인의 주관, 개인의 의식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아 예술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강조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한국근대연극의 새로운 운동가들은 근대극의 새로움이 실제 경험적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예술이라는 점에 있으며 사회에 직접적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현실이 무엇인가, 나아가 현실 및 관객과 연극이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논자마다 조금씩 다른 시각적 차이를 보인다. 그 동안의 한국근대연극사에 대한 연구는 다분히 우리의 근대연극이 서구식 근대극의 확립, 즉 숨겨진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고 폭로하는 입센류의 사회극을 사실주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극이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때문에 종종 근대연극인들의 연극론은 이러한 방향으로 재단되거나 예정된 결론을 향하도록 구획 지어져 왔다. 특히 연극인들이 관계했던 단체의 정치적 입장이나 성격에 의해 개인들의 연극관이 예단된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근대연극형성기를 사실주의극의 확립이라는 전제 없이 검토하면, 신극의 시작 이후 우리의 근대연극이 이를 지향하며 진행되었다는 관점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20년대 초 근대극 수립을 주창했던 논자들로부터 1930년대 극연 중심의 신극론자들까지 많은 연극인들은 근대극을 사실주의극으로 보지 않았으며, 단순히 사실주의극에만 경도되지도 않았다. 우리 근대연극인들이 신극을 공부한 토양이었던 일본 신극계 역시 사실 주의극을 근대극의 전범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근대연극인들은 20세기 들어 서구에서 만개한 연출가 시대의 다양한 연극론과 실험들을 일본 등을 통하여 직간접으로 듣고 보았으며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사조상, 형식상의 다양성이 있었으며 그 중 상당부분은 오히려 반사실주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개개인이 경도된 사조상, 형식상의 다양성을 넘어서는 근대극으로서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연극이 실재 현실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하며 사회 안에서 예술이 영향력 있고 진지한 역할, 즉 사회의 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강조였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 현실에 대한 자각이 바로 사실주의에로의 경도는 아니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제기 하에 1930년대의 리얼리즘 연극론을 다시 살펴보았다. 특히 30년대 후반 연극계에서도 논쟁이 된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합일의 문제를 살피고, 이 과정에서 노정된 유치진의 연극관을 재고해 보았다. 이를 통하여 일련의 초기 농촌극을 통하여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했다고 평가되어온 유치진의 연극이 실제로는 사조로서의 사실주의보다는 민중성, 대중성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사실주의에 대한 인식은 낭만적 리얼리즘론을 주창하던 시기의 글들을 통해 더욱 명징하게 드러나는데, 그에게 있어 현실의 개념은 ‘현실 취재’ ‘창작의 수단’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소재적 차원이었으며 또 그가 주장한 로맨틱시즘은 ‘관중에게의 어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념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그의 로맨틱 리얼리즘은 당시의 많은 논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면에서 논해진 담론들 못지않게 또한 중요한 것이 현장의 무대예술론일 것이다. 무대 위 현실 재현의 문제는 연극원론이나 비평이론보다 한층 복잡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근대에 들어와 스타니슬랍스키를 비롯한 여러 연출가/이론가들의 힘으로 연출론과 배우술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이루었다고는 해도, 무대 구현을 위한 실제 적용이나 그 영향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는 단순한 이론이나 글로 표명된 것과 배치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문제의식 하에 우리 근대연출론과 배우술이 심리적 사실주의를 일관되게 지향해 왔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근대연출론 및 배우술이 지향하고 성취한 바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꼭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국연극에서의 근대성과 리얼리즘의 문제에 있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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