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정치적 상황이 야기한 음악계의 변화와 논쟁

Le changement et la querelle de l'opera par la situation politique du XVIII eme sie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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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La littérature du Siècle des Lumières en France se caractérise avant tout par son aspect philosophique. Les philosophes des Lumières tels que Voltaire, Rousseau et Diderot ont trouvé un support adéquant à la propagation de leurs idées pholosophiques dans la littérature notamment dans le genre musique aussi.

    Pour le monde de la musique en France, il y a eu quatre fois de querelle de l'opéra. Surtout la querelle de Bouffons est très célébre comme le symbole de la querelle du 18ème siècle. Pour cela, Pourquoi la querelle de Bouffons a bouleversé toute la France au siècle des Lumières? En revanche pourquoi les autres querelles de l'opéra n'a pas provoqué des réactions sérieuses? Quelle est la différence entre la querelle de Bouffons et les autres querelles? Voilà, c'est le point du départ de notre travail dans cet article. Afin de bien analyser la situation au sein de la querelle de Bouffons et les autres, il faut bien étudier sur la situation politique et celle de sociale du 18ème siècle en France. Rousseau et Rameau sont l'un des plus grands compositeurs français au millieu du 18ème siècle, mais ses opéras et ses idées faisaient toujours l'objet de débat. Surtout à travert les recherches de Rameau pendant près de 40ans, on peut constater ses efforts énormes pour suivre les systèmes de formules scientifiques même pour l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théorie de la musique. Bien sûr que Rousseau est aussi le même cas. Rousseau, philosophe et dramaturge, a eu pour vocation de substituer la morale religieuge et traditionnelle par une morale laïque, dite moderniste. Le projet du drame et celui de l'Encyclopédie sont sur la même ligne pour donner, chacun de son côté, une image rationaliste de la société au public bourgeois.

    D'abord, Rameau, son premier oeuvre, Hippolyte et Aracie a provoqué la querelle entre ramistes et lullistes. C'était la deusième querelle de l'opéra en 1733 en France. En effet, Rameau a été la personnage centrale pour la deusième et la troisième querelles de l'opéra depuis le début du 18ème siècle. Rameau a été critiqué très fortement par les protecteurs de Rousseau, Diderot et Voltaire aussi, pour sa trop grande richesse materiau, sa difficulte technique et surtout sa voie originale, differente de Rousseau. En fait, les penseurs comme Rousseau et Diderot étaient pour longtemps considérés, même après ses morts, comme le schéma de l'opéra Italien.

  • KEYWORD

    Philosophie des Lumieres , La Querelle des Bouffons , Rousseau , Rameau , Situation politique

  • 1. 들어가는 말

    프랑스 역사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은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18세기를 꼽는다.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에 영향력과 파워를 과시했었던 절대군주이자 태양왕으로 군림했었던 루이14세(1638-1715)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계몽사상(philosophie des Lumières)이 확립되었고 새로운 시민계급이 대두됐으니 이를 18세기의 획기적인 변화중 하나로 꼽아도 큰 무리가 없다. 절대 권력과 함께 문화, 예술의 애호가였던 루이14세는 예술가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과 함께 적극적인 문화, 예술 활성화 정책을 유지했었다. 18세기 들어 이런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프랑스는 정치, 사회, 문화예술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가 바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꽃피기 시작한 18세기였다. 이처럼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18세기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프랑스 음악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거셌는데 루이 14세 시절부터 확고한 자리를 잡아온 프랑스 전통을 중시하던 고전주의자들과 계몽주의 영향아래 백과전서 발간에 관여하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갈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18세기 초반인 1703년부터 시작된 음악계의 논쟁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바람을 타고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1752년 파리에서 공연됐던 이탈리아의 페르골레지(Pergolesi)의 오페라 작품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1)로 인해 프랑스 음악계는 ‘프랑스 오페라가 우월한지’ 혹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우월한지’를 놓고 뜨거운 논쟁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논쟁을 흔히 ‘부퐁논쟁’(La Querelle des Bouffons)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부퐁 논쟁은 백과전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기득권으로 군림하던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결함을 논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오페라의 단점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대급부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언급하게 됐으며 이것이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처럼 오페라를 둘러싼 갈등은 과거의 논쟁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물론 철학적, 정치적 그리고 사상적 요인까지 포함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이 논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다양한 논쟁 관련 서적을 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부퐁논쟁이 단지 음악적 논쟁만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세기 미학사와 철학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던 나라가 프랑스였기에 음악미학의 주요 문제들도 프랑스에서 주로 논의되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부퐁논쟁을 비롯한 여러 차례에 걸친 음악적 논쟁이 벌어졌던 것인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음악에만 한정됐던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는 당시 떠오르는 사상이었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초한 정치관과 철학관 그리고 당대의 미학관들이 ‘오페라’라는 가면을 쓰고 경합을 벌였었던 것이다. 즉 당시에 벌어졌던 수차례의 음악적 논쟁2)의 배경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들 사상이 특히 득세했던 시기가 바로 18세기였다. 흔히 18세기의 오페라 논쟁을 말하면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을 먼저 생각하지만 실상 18세기 초부터 있었던 논쟁은 부퐁논쟁 한 번만이 아니고 한 세기 동안 무려 4차례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1752년부터 벌어졌던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이 철학가, 음악가, 백과전서파의 일원인 루소와 기성 프랑스 음악계의 유명인인 라모의 대립3)으로 말미암아 유명했는데 이 시기는 프랑스에서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로 인해 가장 치열한 사상적, 정치적 다툼을 벌이던 시기였기도 했다. 또한 1752년 부퐁논쟁이 촉발되기 몇 년 전인 1751년 백과전서4)의 첫 번째 발간이 이루어져서 1772년까지 이어지게 됐는데 백과전서의 이런 등장도 역시 부퐁논쟁5)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음악적인 이유뿐만이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여러 차례의 오페라 논쟁 중에서도 유독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은 그토록 치열했었고 나아가 음악계 논쟁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됐는데 과연 당시 음악적인 요소 외에 어떤 사항들이 이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본 논문은 출발한다. 18세기 초반인 1704년과 1733년에도 부퐁논쟁과 비슷한 음악적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당시는 별 문제가 없이 순조롭게 지나갔는데 왜 유독 1752년의 논쟁은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까 하는 의문도 역시 중요한 출발점이다. 미리 언급한다면 1752년 당시는 프랑스 정치계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파리고등법원 사이에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퐁논쟁이 그토록 치열했었던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또한 본고에서는 부퐁논쟁의 상징이기도 한 라모와 루소는 왜 서로 반목했었는지, 그리고 그런 치열했던 음악적 논쟁의 배경에 어떤 정치적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음악적 논쟁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장이 될 것이다.

    1)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는 오페라 부파의 선구적 작품이자 유럽의 다른 희극 오페라들의 발전에 촉매 역할을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1733년 그의 오페라 세리아 <자랑스러운 죄수Il Prigioniero Superbo>의 막간극으로 작곡되어 8월28일 나폴리의 산 바르톨로메오(St. Bartolomeo)극장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후 이 작품은 1752년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어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2)이경희, 계간 『낭만음악』, 제12권 제2호 2000년, 봄호, 5, 음악사에서 ‘오페라 논쟁’이라고 하면 누구나 ‘부퐁논쟁’을 쉽게 연상하지만 실상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들어 4차례의 오페라 논쟁을 겪게 된다. 이 4차례 오페라 논쟁의 성격은 물론 계기와 사람들도 달랐다. 각각의 논쟁의 중심인물도 달랐는데 1차 논쟁은 라그네(Raguenet)와 르쎄르(Lecerf), 2차 논쟁은 륄리(Lully)와 라모(Rameau)가 중심이었고 3차 논쟁, 즉 부퐁논쟁은 루소(Rousseau)와 다시 라모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으며 이들 논쟁의 결과로 결국 글룩(Gluck)과 피치니(Piccini)의 4번 째 논쟁에 이은 오페라 개혁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3)재인용, 강희석, 『프랑스학 논집』, 제77집, P.3, 1733년 10월 1일 왕립음악아카데미에 의해 팔레 루아얄에서 초연된 <히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충격이었다....중략... 막이 오르자마자 겨우 들릴만한 소리가 입석에서 생기더니 점점 더 커졌다는 당시 증언처럼 공연은 순조롭지 않았다. 공연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는데 라모는 륄리가 그토록 많은 세월 동안 구축해 놓았던 것, 확고한 것으로 생각했던 프랑스 오페라를 파괴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쟁은 1737년에 이르러 더욱 격렬하게 활기를 띠게 되며 그 와중에 라모는 인기 있는 작곡가로 부상한다. 대단한 창작력을 보이며 전성기를 보낸 라모는 1752년부터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의 파리 공연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4)백과전서와 백과전서파 : 프랑스에서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집필과 간행에 참여한 계몽 사상가들의 집단을 백과전서파라고 불렀고 이들이 만든 책이 백과전서였는데 과학, 기술, 학술 등 당시의 학문과 기술을 집대성한 대규모 출판 사업으로 1751년 제1권이 출판되고, 이어 1772년까지 본문 19권, 도판 11권의 대사전이 완성되었다.  5)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의 프랑스 공연을 계기로 프랑스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격론이 벌어졌으며 1752년부터 1754년까지 2년 동안 프랑스 음악계를 양분했던 치열했던 논쟁이었다. 음악계는 물론 프랑스 왕정까지 나서서 두 파로 나뉘어졌는데 루이15세를 중심으로 퐁파두르 부인, 프레롱 등이 중심이 된 프랑스 오페라파와 루소를 비롯해서 디드로, 돌바크, 그림 등 당시 백과전서파들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 오페라파로 양분되게 됐다. 흔히 친왕파와 친왕비파라고도 불렸던 이 논쟁은 오페라를 포함한 음악만의 문제가 아닌 근대파와 고대파의 논쟁과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내포하고 있었던 다툼이었다.

    2. 18세기 전후 음악계의 동향

    18세기 중반의 음악적 논쟁과 배경을 살펴보기 전에 18세기 이전 프랑스 음악계에 관한 동향을 볼 필요가 있다. 절대왕정의 약화와 몰락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확산과 합리주의, 정치권과 철학관의 변화가 결국 정치, 사회는 물론이고 음악계의 변화를 촉발시켰는데 그렇다면 18세기 이전 17세기 프랑스 음악계의 동향은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7세기 중반이었던 1660년경 이전까지는 프랑스 오페라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도 오페라가 아닌 비극이나 혹은 비희극에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프랑스 음악계와 연극계의 반응은 조금 과장하면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에 관심을 갖는 자체만으로도 프랑스 비극과 비희극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다. 17세기 당시(1677) 나왔던 오페라에 관한 책으로서 가장 유명했었던 셍테브르몽(Saint-Evremont)의 『버킹검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la Duke de Buckingham』를 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 대한 차이점과 비교를 언급하면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에서 오페라를 선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프랑스의 최고 인기 장르중 하나인 비극을 직접적으로 망치고 있다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할 정도였다.6) 특히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오페라는 기존 연극에 비해 기계장치를 많이 사용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기계장치의 사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작 연극의 내용이나 진행 등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한 편의 극 안에 음악이나 노래가 끊임없이 들어있는 것도 기존 연극에 비해 오페라를 높게 보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서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는 특히 극 안에 들어있는 음악의 존재와 함께 매우 낮게 취급되었었다.

    18세기 들어 계몽주의의 활성화로 인한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변화는 프랑스 연극의 경우 17세기까지 많은 각광을 받았었던 비극이 몰락하고 대신 그 자리를 새로운 장르인 ‘드람(drame)’이 채우기도 했다. 문화의 경우 계몽주의로 인한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이고 다양한 변화는 프랑스 음악의 변화로도 나타났는데 특히 오페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7세기, 루이14세 시절 인기를 끌었던 것은 궁정에서 행해졌었던 궁정 오페라였는데 흔히 ‘서정비극(Tragédie Lyrique)’ 이라고 불리던 그것이었다. 당시 이 장르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극의 처음 시작부터 온통 루이14세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그 서막을 열었던 것이 큰 이유가 됐다. 루이14세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칭송, 왕의 찬란한 위업, 고귀한 신분 그리고 극적 소재의 선택, 고귀한 신분을 가진 등장인물 게다가 루이14세가 좋아하고 친히 배우까지 했었던 발레가 나오는 궁정 오페라의 전형을 잘 보여줬기에 17세기 당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17세기 연극에서 루이14세를 찬양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됐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절대왕정의 권위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절대왕정의 영향력이 정치는 물론 문화 전반에 까지 공고하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큰 인기를 끌었었던 궁정 오페라였던 서정비극도 18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비껴갈 순 없었다. 18세기 들어 공고했던 절대왕정의 권위가 도전받게 되자 당장 연극과 오페라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왕에 대한 찬양이 서막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7) 이처럼 18세기 들어 새롭게 시작된 절대왕정의 약화와 몰락 그리고 계몽주의에 의한 시민계급의 대두라는 정치적 변화 앞에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서정비극도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들어 변화한 새로운 음악의 변화는 18세기 내내 지속, 유지됐으며 특히 4차례에 걸친 오페라 논쟁은 음악가들은 물론이고 귀족이나 정치가, 철학가등 당대 지성과 상류층을 상징하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폭넓은 논쟁으로 비화했다. 이같이 오페라에 관련된 음악가들뿐만 아니고 당시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음악적 논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음악적 상황은 물론이고 당대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그런 논쟁을 유발시켰고 많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극이 우선이냐’ 혹은 ‘음악이 우선이냐’ 같은 음악적인 문제를 놓고 벌어졌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외국인들까지 가세하는 전 국가적인 문제로 확대됐다. 이탈리아의 희극 오페라였던 ‘오페라 부파(Opéra Buffa)’가 여러 나라들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프랑스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를 야기했다. 흔히 프랑스 궁정오페라의 막과 막 사이에 공연하는 막간극의 형태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가 들어갔는데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신성한 왕권의 권위에 대한 불손과 도전으로까지 여기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오페라 부파의 특성을 이해하면 된다. 흔히 오페라 부파는 극의 내용이 희극적이면서 익살스러운 풍자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형태의 극이다. 이처럼 오페라 부파가 제시하는 가벼우면서도 풍자성이 강한 스타일과 내용의 단순함은 당시 사회적 변화와 개혁 그리고 진보를 염원하던 프랑스 백과전서파를 비롯한 대중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특히 이런 분위기는 더 나아가 프랑스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전반에 대한 일종의 자아비판을 요구하면서 갈등의 싹이 커져갔다. 특히 프랑스 오페라를 이끌던 라모의 작품들을 비롯해서 프랑스 음악에 대한 그림(Friedrich Melchior Von Grimm) 의 비판이 가해지게 되면서 문제가 더욱 커지게 됐다.8) 루소를 비롯한 달랑베르 그리고 디드로 등이 주축이 된 프랑스 계몽주의의 흐름 안에서 음악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직접 음악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으며 특히 마블리의 경우 오페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프랑스 음악이론에 대한 초석을 놓았던 라모의 음악체계9)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며 논쟁을 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유독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친 것은 다른 나라들보다 유난히 강했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계몽주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18세기 들어 이러한 오페라를 위시로 한 음악의 변화와 논쟁은 궁정 오페라의 몰락을 틈타 계몽주의의 득세와 함께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10) 라는 일명 18세기의 프랑스 국민 오페라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의 18세기는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고 음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 중심에 바로 오페라에 대한 치열했던 논쟁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6)이경희, 「18세기 이태리 오페라 미학」, 『음악과 민족』 제19호, 민족음악학회, 2000, p. 196.  7)Cuthbert Girdestone, Rameau, sa vie, son oeuvre, ouvr. cit, 1997, p.142, 왕의 찬양으로 극의 서막을 장식해야 한다는 오랜 전통은 1733년에 와서는 더 이상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왕의 찬양이 차지했던 자리는 고대 신화속의 인물이나 우의적 인물들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돼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그린 짧은 스펙터클이 오페라 앞에 오며 서막을 장식하였다.  8)Charles B. Paul, Music and Ideology : Rameau, Rousseau and 1789, 『 Journal of the Ideas』, 1981, p. 396.  9)Journal de Trévoux(1722), p. 1734. 당시 라모의 음악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화성학이론 Traité de l'harmonie(1722)'으로 데카르트적인 관점을 갖춘 것이었다.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라모에 대해 과학자이면서 악기 발명자이기도 했던 베르트랑 카스텔 신부는 “자연은 라모가 숫자로서 발견한 그 체계를 우리에게 주었다”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10)스티븐 페팃, 『오페라의 유혹』, 이영아 역, 예담, 2004, P. 37, ‘오페라 코미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것은 18세기 초반인 1715년이었는데 부퐁논쟁이 시작된 후에 작곡된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는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오페라 코미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에 가까운 이 오페라는 신이나 왕보다는 변변찮은 보통 사람들을 주로 이야기 했다. 그 후 약 50여년 동안 오페라코미크는 오페라계를 완전히 장악했고, 과거에 있었던 희극적인 요소는 점점 그리고 많이 줄어들었다.

    3. 절대왕정의 정치적 약화가 몰고 온 음악계의 변화

    부퐁논쟁을 비롯한 오페라 논쟁은 음악적 우월성에 대한 논쟁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내용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는 말을 위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17세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던 음악적 논쟁이 유독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표면화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17세기에는 별로 부각되지 않았었던 음악적 논쟁이 18세기 들어 이처럼 표면화됐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양한 이유들 중 가장 비중 있는 것은 역시 비록 음악극을 소재로 했지만 그 바탕에는 17세기 내내 공고했었던 절대왕정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에 원인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부퐁논쟁의 시작이 18세기 초반인 1740년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힘입은 백과전서파들이 프랑스 궁정오페라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음악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오페라의 논쟁은 실상 정치적으로는 ‘왕비파(Coin de la reine)’와 ‘국왕파(Coin du roi)’의 다툼이기도 했는데 왕비파는 루이15세의 왕비를 선두로 백과전서파와 계몽주의 사상가들 그리고 신지식인들이었고, 국왕파는 루이15세를 위시로 한 그의 애첩 퐁파두르 그리고 17세기 내내 기득권층이었던 귀족들과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 논쟁은 또한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있던 백과전서파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입장에 있던 구시대 세력(Ancian Régime)의 알력이기도 했다.11) 그렇다면 여기서 살펴볼 것이 루이14세 시절부터 강력한 권위를 구축했었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만약 절대왕정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공고해졌다면 혹은 17세기를 지배했던 기득권 세력의 힘이 그대로 유지됐다면 프랑스 음악계에서 치열한 논쟁과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절대왕정의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가 18세기 들어 가속화되며 종국에는 음악분야에서의 논쟁으로 까지 연결됐으니 절대왕정의 약화와 영향력의 감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음악적 논쟁의 중요한 배경이 됐던 절대왕정의 기세와 권위가 무슨 계기로 인해서 흔들리게 됐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은 18세기 음악적 논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면을 보면 프랑스는 큰 변화를 맞이했는데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루이14세의 퇴장과 루이15세(1710-1774)시대의 개막이었다. 루이15세가 어려서 오를레앙 공 필립(Louis-Philippe d'Orléan, 1725-1785)의 섭정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섭정이라는 권력을 잡은 오를레앙은 루이14세와는 다른 정치적 선택을 했는데 절대왕정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기존 귀족층의 정치적 권리와 권한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또한 왕궁을 루이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에서 파리로 옮겼는데 이것은 다른 의미로 과거의 강력했던 왕궁, 즉 절대왕정의 약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오를레앙의 섭정시대는 루이14세의 절대왕정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귀족들의 권한 축소에서 새로운 시대의 자유와 잃었던 권리의 회복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를레앙을 비롯한 섭정 세력들과 귀족들의 정치적인 무능이었다. 이들의 무분별한 방종, 쾌락주의, 정치적인 무능은 프랑스 국민들의 실망감으로 표출됐고 결국 왕정과 교회세력 같은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처럼 절대왕정의 상징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곧바로 이어진 섭정이라는 새로운 정치는 프랑스인들에게 일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자 시작이 됐으며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인해 공고하던 절대왕정이 급속히 약화되고 몰락하게 됐던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궁핍함인데 경제적인 문제, 즉 국가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겪은 재정적 어려움은 루이16세(1754-1793)의 재위 기간이었던 18세기말로 갈수록 더 심각해졌지만 루이15세와 루이14세 시대부터 시작됐었기 때문이었다. 루이14세가 권력을 휘두르던 당시에도 전쟁으로 인한 재정악화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궁핍을 가져왔었고 이것은 결국 절대왕정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은 오를레앙의 섭정이나 루이15세의 통치기간에 해소되지 못했으며 점점 어려워지던 프랑스의 재정악화는 루이16세 시대에 즈음해서 심각해졌던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한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갔고 막다른 궁지에 몰린 루이16세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세금개혁, 즉 조세개혁이 유일했는데 이 카드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층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 중 불과 2프로가 채 되지 않았던 특권층은 물건 구입에 대한 세금감면 등 면세와 같은 특혜를 누리면서 부와 명예를 독식하고 있었다. 반면 인구의 98프로에 해당하는 평민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운 상황에 무거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기에 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낼 모임(삼부회)에서도 종교인, 귀족 등 1, 2 계급과 달리 평민들이 속한 제3 계급은 원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이 평민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18세기말의 상황이었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삼부회는 무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소집조차 안 되고 있었다.12) 18세기 들면서 루이14세의 퇴장 이후 왕권의 약화라는 정치적 변화와 함께 심각한 재정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귀족들과 파리고등법원 등의 세력들이 약화되고 있는 왕정의 권위에 맞서면서 급격한 절대왕정의 몰락을 부채질 했던 것이다. 그 외에 사상적인 변화도 절대왕정의 몰락에 이바지 했는데 사상가들은 특권층들의 폐단에 직접 대항하고 잠들어있던 프랑스인들의 의식을 깨우는 작업에 열중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들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정치적인 불합리와 부패한 권력, 귀족들을 비롯한 특권층들의 면세제도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약해져 가는 왕권은 물론이고 권력 집단으로 군림하던 교회세력에 대한 비판까지 하면서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게 됐다. 게다가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가들의 도전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과시하지 못했었던 부르주아 계급들도 지적인 능력, 재물, 기술 등을 겸비하게 되면서 점차로 힘을 기르기 시작했고 이들은 사회에서 의사, 법관, 사업가, 학자등의 직업을 바탕으로 혼란한 사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이 되길 원했었다. 이 당시의 이러한 상황은 루이16세 시절 재상이었던 리슐리외(A. J. de Richelieu)의 말을 들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3) 이처럼 루이14세라는 절대강자의 퇴장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 일어났던 정치적인 변화와 재정적인 어려움 게다가 사상가들이 들고 나온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앞에 굳건히 유지돼 오던 절대왕정은 약화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됐다. 영원할 것 같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위세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사회 각 부분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불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터져 나오게 됐고 이러한 불만과 다툼은 프랑스 음악계도 피해갈 수 없었기에 18세기 들어 오페라를 중심으로 라모를 지지하던 기존 세력과 루소를 지지하던 새로운 세력 간의 치열했던 논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1)Yoshihiro Naito, Formation des idées musicales de Rousseau- 「Lettre sur l'opéra italien et français, Libertas,」 No 12, décembre 1998, p.204  12)앙드레 모로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기린원, 1994, p. 284. “삼부회는 무려 175년 동안이나 정식으로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3 계급은 정치적으로도 완전 배제되었다.”  13)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염무웅, 반성환 역, 창작과 비평사, 2008, p. 20, “루이14세 시대에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못 냈는데, 루이15세 시대에는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나 거리낌 없이 떠들고 있습니다.”

    4.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음악적 논쟁의 상관관계

    부퐁논쟁은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음악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하게 펼쳐졌었다. 그 이유는 이 논쟁으로 인해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양 되면서 프랑스인들의 애국적 성향까지 개입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음악적 논쟁이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대했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고 일반 국민들의 관심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결국 파리가 양분됐고 오페라 극장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넘어섰다는 말이다. 물론 음악적 논쟁이 모두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당시 지식인들 중에서도 음악과 관련한 논쟁을 평가절하한 이들도 있었다. 백과전서파의 일원이었던 달랑베르는 물론이고 노엥빌(Noinville)도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1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하는데 음악적 논쟁을 제공했었던 이탈리아 부퐁들의 파리 공연이 1752년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1723년에 부퐁들의 파리 초연이 있었고 1729년 여름에도 역시 부퐁들의 파리 공연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부퐁논쟁처럼 큰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었다. 1752년 부퐁논쟁 발발 몇 년 전인 1746년에도 역시 동일한 부퐁들의 공연이 있었지만 이때도 역시 비록 인기는 얻었고 공연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큰 관심과 반향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었다. 이처럼 동일한 이탈리아 부퐁들의 파리 공연을 상대로 프랑스 국민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의 반응이 18세기 초반과 중반이었던 1752년에 이르러 극도로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프랑스 사회는 물론이고 프랑스 국민들의 정신적 변화에 큰 일조를 했었던 백과전서 Encyclopédie, 1751-1772의 출판이었다. 특히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의 시작 시기가 1752년이었고 이보다 조금 앞선 1751년부터 사상가들과 개혁파들의 결실인 백과전서가 발간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15) 그 이유는 백과전서파들의 등장과 함께 백과전서의 첫 번째 발간이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개혁을 포함한 문화, 예술분야에도 개혁에 대한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절대왕정의 몰락을 가속화 시켰고 새로운 근대 시민사회가 구축되는 데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처럼 절대왕정의 약화에 일조한 계몽사상과 백과전서파들의 등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를 촉발했는데 그중 하나가 부퐁들의 음악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또 하나 주시해야 될 것은 직접적인 정치적 상황으로 당시 (1752년) 파리고등법원과 국왕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매우 첨예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국왕과 고등법원 사이에는 심각한 정치적 이견과 갈등이 있었는데 1753년 발표된 루소의 서간문이 부퐁논쟁에는 불을 지폈지만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적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줄 정도였으니 당시 두 지배 세력의 갈등을 짐작할 수 있다. 루이15세 시절인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파리고등법원의 불만은 주로 국왕의 권력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에 국한됐었다. 그러나 부퐁논쟁이 시작될 즈음에 와서는 종교적인 문제까지 가세되면서 국왕과 고등법원의 갈등양상은 급박하게 전개됐었다. 즉 프랑스의 자존심이 걸린 종교적인 문제가 시대의 전면에 부각됐던 것이다. 특히 고등법원이 국왕의 권력에 맞서 가장 문제시 삼았던 것은 바로 ‘장세니즘의 허용 여부’였는데 고등법원은 국왕이 장세니즘의 박해를 위해 로마 교황청의 개입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국왕과 치열하게 맞섰던 것이다. 백과전서의 등장과 계몽주의의 영향이 있기 전만하더라도 장세니즘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파리 고등법원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이 장세니즘을 금했던 <우니게스투스 Unigestus>칙서를 지지하자 반대를 했던 것이다. 결국 파리 고등법원은 국왕의 꼭두각시가 되길 거부하며 국왕과 본격적인 갈등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16) 특히 고등법원 세력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개인적인 문제로까지 연관시키며 자신들의 주장을 밀어붙였는데 그것은 국왕과 왕실의 무분별한 낭비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호사스러움과 대비되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궁핍한 생활모습까지 언급했기에 고등법원 세력을 지지하는 그룹들이 점차 증가하게 됐다. 이처럼 장세니즘의 허용여부를 놓고 벌어졌던 국왕과 고등법원의 갈등과 대립은 비단 두 세력만의 문제가 아닌 일반 국민들의 많은 관심을 끄는 사건이 됐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국왕 편에 섰던 교회세력과 고등법원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사상가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비판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볼테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1계급으로 군림하며 온갖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행사했던 교회세력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제기하며 사상적인 투쟁을 했다. 그의 사상은 철학계, 예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그가 중요시 여겼던 관용정신을 바탕으로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기도 했으며 대대로 프랑스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해 오던 종교(카톨릭)에 대한 비판과 도전에 일조하기도 했다.17) 볼테르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또 다른 프랑스의 저명 사상가들이었던 디드로와 달랑베르 그리고 루소로 이어지는 동안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며 더욱 세를 불리고 있었다. 이들 사상가들이 일반인들의 의식을 계몽시키기 위해 택했던 것이 바로 백과전서를 출판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만든 저서는 궁정에 있는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상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며 인기를 끌게 됐다. 그동안 독점적인 지위와 특혜를 누리며 온갖 부귀를 누리던 국왕을 위시로 한 왕실세력과 고위성직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국왕에 의해 이 전서의 몰수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이미 계몽주의와 함께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보장이라는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계몽주의로 철저히 무장된 이들 사상가들은 철학과 정치는 물론, 음악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데 특히 디드로와 루소는 백과전서에서 음악에 관한 부분을 직접 담당했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와 백과전서파들에게 음악은 생소하거나 거리감이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루소는 물론이고 달랑베르나 디드로도 음악의 구조 등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마블리 역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현했었다. 이들 백과전서파들은 당시 프랑스 음악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했던 라모의 음악적 체계에18)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했고 음악적 논쟁을 일으키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루소의 경우는 라모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까지 더해지면서 부퐁논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기도 했다. 특히 그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 언급했었던 “프랑스에는 제대로 된 음악이 없으며 어떠한 음악도 있을 수 없다”라는 극단적인 표현과 결론이 당시 반대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었다.19)

    14)Denise Launay, La Querelle des Bouffons: texte des pamphlets, Genève, Minkoff Repnet, 1973, vols 3, p. 38 재인용.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견해들 때문에 그렇게 적나라한 싸움을 할 필요 없다. 만약 철학적인 의미이거나 아니면 신학에서 중시하는 주요 주제를 가지고 하는 논쟁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음악 아니면 저런 음악 중에서 어떤 음악이 좀 더 재미있거나 아니면 좀 더 재미없거나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닌가?”  15)도널드 그라우트, 『서양음악사』, 민은기 역, 이앤비플러스, 2007, p. 96.  16)김진균, 『음악예술의 이해』, 계명대출판부, 2003, p. 158.  17)Wahl, Jean, 『프랑스 철학사』, 김연숙 역,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87, p. 164.  18)「Journal de Trevoux」, October, 1722, p. 1734. 이헤령, 재인용. 라모의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저술은 음악에서 1722년에 화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Traité de l'harmonie 였다. 과학자로서 악기 발명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카스텔 신부(Pere Louis Bertrand Castel)는 “자연은 라모 선생이 숫자로서 발견한 바로 그 체계와 생각을 우리에게 부여했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19)Launay, Denise, La Querelle des Bouffons; texte des pamphlets, Genève, Minkoff Reprint, 1973, vols3. p.169

    5. 1750년 이전, 라모에 동조하던 루소

    프랑스 음악에 대한 루소의 생각을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750년을 기점으로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1750년 까지는 당대 프랑스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라모를 비롯한 기득권층에 대한 루소의 음악적 반감이 크지 않았는데 이후 루소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결국 라모와 피할 수 없는 치열한 음악적 논쟁을 벌이게 됐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서 종국에는 음악적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 의미까지 포함하는 ‘부퐁논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사상사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루소는 왜 1750년을 기점으로 해서 프랑스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게 됐던 것인가. 왜 1750년 까지는 라모의 음악관(프랑스 음악과 화성의 중요성)에 대해 비판은커녕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양새를 띠었던 루소가 1750년 이후 생각이 바뀌면서 오히려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고 프랑스 음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을까. 또한 루소는 무슨 이유로 1753년 자신의 『프랑스 음악에 대한 편지La Lettre sur la musique francaise』에서 프랑스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을 했던 것인가. 물론 루소의 생각과 발언을 빌미로 그의 반대파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이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서간문에서 보여줬던 프랑스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그의 생각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의 루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백과전서를 발간할 때 음악에 대한 부분을 담당했었던 루소의 세계관과 이탈리아 음악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겼던 프랑스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1750년을 기점으로 하는)을 살펴보는 것은 부퐁논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성장하면서 보통 아이들에 비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루소가 음악적인 재능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카톨릭 신부였던 콩피뇽(Confignon)의 소개와 도움으로 바렁스 부인(Francoise Louise de Warens, 1699-1762)의 집에 머물던 십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렁스 부인은 루소에게는 어머니 같은 중요한 존재로서 루소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녀의 도움으로 역사, 철학, 과학은 물론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여인은 루소를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 생각으로 그를 안시(Annecy)에 있는 메토리즈(Métorise) 성가학교에 보내서 당시 악장이었던 르 메트로(Le Métro)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루소의 어머니였던 수잔(Suzanne)이 루소를 낳은 지 9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나의 탄생은 수많은 나의 불행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20)라고 자신의 저서 『참회록』에서 밝혔듯이 어머니를 일찍 여읜 충격을 생각하던 루소에게 바렁스 부인은 특별했던 사람이었다. 카톨릭 교리학교는 물론, 음악학교에서 음악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바렁스 부인의 후원으로 루소는 음악교사와 악보사보를 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21) 루소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길 바랐던 바렁스 부인의 도움으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음악공부를 한 채로 1730년 로잔(Lausanne)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때 루소는 음악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음악악보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모르던 상태였다. 음악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에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당시의 암담했었던 경험이 훗날 루소가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악보를 볼 수 있는 쉬운 음악악보를 만들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 당시의 결심과 경험이 루소로 하여금 새로운 악보, 즉 누구나 쉽게 악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숫자악보’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루소는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숫자악보의 개량과 보급에 꾸준히 애를 썼는데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한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지름길이 바로 음악적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악보정도는 쉽게 읽고 이해하고 그걸 바탕으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루소가 그토록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중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루소가 음악교육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강하게 하고 정서적, 도덕적으로 잘 조화된 가치 있는 인간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22) 이러한 루소의 음악에 대한 생각은 그가 작곡가와 음악교사를 할 때부터 계획했었고 구상했었던 일이기도 했다. 루소는 그 자신 음악가로 불리어지길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로서의 삶은 사상가나 철학가의 삶과 명성에 비해 잘 조명되지 않았다. 오페라 음악은 물론, 가곡을 비롯해서 기악곡까지 그리고 종교적 음악까지 열심히 음악을 작곡했고 음악평론, 음악사전 편찬, 그리고 음악평론가의 역할까지 감당했었던 루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로의 명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음악에서보다 철학이나 사상계에서 더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음악교육을 받았던 루소는 거의 혼자 음악에 대한 공부를 했는데 특히 그가 음악을 하던 초기에 크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라모(1683-1764)였다. 라모의 음악이론서를 통해 작곡이론이나 화성법등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큰 영향을 받았던 루소가 자신의 음악관(프랑스 음악은 오페라에 적합하지 않고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 오페라보다 더 우월하다)을 놓고 라모를 위시로 한 귀족들과 대립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루소는 자신이 바라던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당대 음악계의 명사였던 라모를 비롯한 기존 음악인들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1744년 10월, 베니스 대사의 비서직에서 물러나면서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파리사교계에 순조롭게 적응하고 잘 동화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23) 이를 위해 루소가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자신이 착안했다는 새로운 악보법, 즉 기존의 음정이 아닌 숫자를 활용해서 악보를 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의 악보법은 고대의 개념을 반영해서 하나의 옥타브 내에 있는 음정들을 숫자로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루소는 자신이 직접 경험했었던 기존의 악보를 읽는 것에 대한 어려움, 즉 기본적인 음악적 지식 없이 독보를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다. 루소는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 겪어야만 하는 악보를 읽는 독보력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1741년에는 『창가법』에 숫자악보의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다음해 여름인 1742년 8월에는 파리과학아카데미(L'Académie des Sciences)에서 『새로운 음악 악보법에 대한 초안』 le projet concernant de nouveaux signes』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지만 루소의 예상과는 달리 크게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논문 발표에서 루소가 의외로 당시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의 새로운 악보법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변과 방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24) 특히 당시 파리 과학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루소가 들고 나온 새로운 악보법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숫자로 만들어진 악보법은 기존의 악보법을 대신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며 특히 실용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다른 심사위원들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던 루소도 당대 최고 음악가였던 라모의 날카로운 지적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25) 여기서 그치지 않고 루소는 다시 음악 악보법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1년 후인 1743년 『현대음악평론la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새로운 악보법에 대한 의견과 연구결과물을 제시했지만 이 시도마저도 루소가 기대했던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끝나게 됐다. 이처럼 누구나 알기 쉬운 악보법, 즉 음악적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는 진정한 음악교육을 위한 기초적인 악보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연구했던 루소의 새로운 악보법에 대한 연구물들이 음악 대가였던 라모를 비롯한 프랑스 음악계의 높은 벽에의해 좌절되는 것을 여러 차례 겪은 후 프랑스 음악과 라모에 대한 그의 반감이 이때부터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0)J. J. Rousseau, 『참회록』, 박순만 역, 집문당, 1988, p. 8  21)로버트 워클러, 『루소』, 이종인 역, 시공사, 2001, p. 28.  22)이흥수, 『음악교육의 현대적 접근』, 세광출판사, 1999, p, 42.  23)Samuel Baud-Bovy, Jean-Jacques Rousseau et la musique française, Analyses de la société J-J Rousseau, Tome 37ème, 1969-1971, p. 259.  24)『Correspondance Complète de J-J Rousseau』.Edition critique, établie et annotèe par R. A. Leigh. tome I, no, 49. 당시 파리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이자 루소의 새로운 음악 악보법을 심사했었던 사람들은 메랑(De Mairan), 델로(D'Hellot) 그리고 푸쉬(De Fouchy)가 주요 회원들로서 루소에게 질문을 하는 역할이었고 계몽주의자였던 달랑베르는 심사위원들과 함께 자리했으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라모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자문이나 조언을 주로 하는 위치에 있었다.  25)Rousseau, Confessions, Oe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 p. 294, “나의 새로운 악보법에 관한 날카롭고 정확한 반박은 라모의 반박이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라모는 즉시 내 의견의 약점을 간파하고 반박했다. 라모는 “당신의 악보(기호)는 음의 장단을 쉽게 구분하고 음정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좋다. 그러나 이 악보(기호)가 머리를 많이 쓰게 한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머리가 연주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기존의 악보 위치는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악보의 경우 나는 쉽게 악보를 읽을 수 없다. 당신의 악보가 말하는 숫자를 하나하나 주워 나가는 것 외에 눈으로 쉽게 읽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모의 날카로운 지적과 반박에 대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으며 나는 그의 반박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6. 종교적 문제가 야기한 1752년의 정치적 상황과 갈등

    위에서 언급했던 장세니즘의 허용여부를 놓고 벌어졌었던 파리 고등법원과 왕실의 대립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왕과 왕실에 대한 종교적 갈등은 종교의 문제를 넘어 왕실의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차원으로 발전하며 정치적 갈등양상으로 번지게 됐다 그러면 장세니즘의 허용으로 인해서 고등법원과 왕실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심각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문제가 됐던 <우니게스투스>칙서에 대해서 파리 고등법원은 프랑스 전통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초인 1714년 고등법원에 등록되었고 1730년, 루이15세 치하에서 교회는 물론 프랑스의 법률로까지 선포되었었다. 이처럼 고등법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왕정이 장세니즘을 금하는 <우니게스투스>칙서를 지지하자 두 세력 간에 갈등과 대립이 생겨났던 것이다. 고등법원의 생각에 이것은 곧 프랑스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전반기 동안 고등법원은 왕실 반대파들을 주동해서 강력한 갈등양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등법원이 주도하던 왕실과의 갈등과 대립이 가능했던 것은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이 왕실에 대한 항명권을 고등법원에 부여했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에 대해 항명할 수 있는 고등법원의 권리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18세기 초반에 파리에서 사역하던 주임사제들이나 성직자들이 이미 <우니게스투스>를 거부하고 있었다. 종교문제로 인한 고등법원과 왕실의 대립과 갈등은 두 권력집단을 넘어 전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되기에 이르면서 대립은 더욱 심화된다. 프랑스 대중들을 선동해서 왕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왕실은 1730년 파리 고등법원을 추방하게 되고 이런 조치로 인해 프랑스는 7. 라모와 루소가 중시하던 서로 다른 음악적 요소들혼돈과 무질서한 상태로 나가게 된다. 왕실에 의한 강제적인 추방과 진압으로 인한 무질서 상태는 상당히 오랫동안 프랑스 정국의 불안요소로 군림하게 됐고 이런 현상은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 특히 1749년 파리의 대주교였던 크리스토프 보몽Christophe de Beaumont을 따르던 주교들이 가세하면서 갈등은 더 심해지게 된다. 이들 주교들이 들고 나온 것은 미사를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우니게스투스>칙서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해성사 후에 당연히 주는 ‘고백증명서'(Billet de Confession)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왕실과 일단의 추종자 주교들의 행태에 맞서서 고등법원은 왕실의 무분별한 사치와 불평등한 과세계획, 그리고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이유로 더욱 강력하게 맞서기 시작하며 18세기 중반 프랑스 정국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1752년 무렵 고등법원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미사와 고백증명서 발부를 거부하는 것을 프랑스의 공적인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로 인정하는 포고 (arrêtté)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물론 주교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고등법원의 포고에 대해 미사같이 지극히 영적인 것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반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왕실과 고등법원의 갈등양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마치 고등법원과 성직자들 간의 대립처럼 보이게 됐다. 왕실은 고등법원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배후조종자와 다름없었다. 성직자들과 고등법원의 갈등이 격화되자 왕실은 1752년 말, 보몽 파리 대주교를 자신의 영지로 추방하고 이어서 1753년에는 고등법원도 추방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장세니즘의 허용여부를 놓고 벌어졌던 왕실과 고등법원의 대립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가세하게 되면서 일반 프랑스인들의 주목을 끄는 사회적인 갈등양상으로 확대됐는데 사실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왕실과 고등법원의 의도와 저의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실은 주교와 성직자들을 끌어들이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으며 성직자들은 왕실의 편을 들어주는 대가로 왕실에서 제공하는 무상기부금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법원 역시 루이15세 치하에서 마치 불쌍한 제3신분의 지지자를 자처하면서 프랑스인들의 호의적인 여론을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왕실에 맞서 종교,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움직이는 세 축인 왕실과 고등법원 그리고 성직자들의 갈등과 대립은 엘리자베스 쿠에 의하면 비록 30여 년이라는 시차는 있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도 한다.26) 왕실과 고등법원 그리고 성직자들이 벌이는 정치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혼란양상은 정치문제를 넘어 드디어 문화적인 문제로 확대되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디드로의 백과전서였다. 1751년 첫 권이 발간된 백과전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 권력계층 전반에 대한 비난과 분노 그리고 저항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1751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백과전서는 1752부터 1754년까지 대략 일 년에 한 권씩 발간되면서 위압적인 권위로 뭉친 모든 기관이나 제도 그리고 교회의 권위조차도 다시 보게 만들면서 프랑스인들에게 새로운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26)Elisabeth Cook, La Querelle des Bouffons dans la vie culturelle française du 18ème siècle, CNRS, 2005, p. 146.

    7. 라모와 루소가 중시하던 서로 다른 음악적 요소들

    부퐁논쟁의 양대 상징이던 라모와 루소는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 중시하는 요소들이 상이했고 이런 음악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결국 세 번째 음악논쟁인 부퐁논쟁을 촉발하고 격화시키게 됐다. 1750년 까지만 해도 확실하게 라모의 음악관에 동조하던 루소는 그로부터 2년 후 라모에 대한 동조에서 비난으로 그리고 프랑스 음악 우위에서 이탈리아 음악 우위로 생각의 변화를 보인다. 게다가 알베르 얀센에 의하면 이 당시 루소는 음악과 사상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기도 했다.27) 그렇다면 라모와 루소는 음악적인 어떤 부분을 중요시 여겼었고 왜 그토록 상이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이점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라모는 바로크 후반기에 활발했던 작곡가 겸 음악이론가로 바흐(Bach), 헨델(Handel)과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1722년에 나온 화성에 관한 그의 첫 논문이었던 『자연원리로 환원된 화성론Traité de l’harmonie réduite à ses principes naturels』이후 프랑스에서 확고한 음악적 이론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라모는 자신의 논문 내용처럼 음악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화성’의 중요성을 매우 중시했으며 특히 음악을 과학이나 수학과 연결시켜 모든 음악에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법칙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부분, 즉 음악도 분명하고 정확한 법칙에 의한다는 라모의 생각이 특히 루소가 중시하는 음악과 다른 부분이기도 했다. 반면 당대 철학자이자 오페라 작곡가이기도 했던 루소는 음악에 있어서 화성이 중요하다는 라모의 ‘화성우위론’을 반대했었는데 라모와 달리 루소가 음악적으로 중시했던 것은 화성이 아닌 ‘선율’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음악은 인간의 다양하고도 근원적인 감정표현을 위한 것이고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화성이 아닌 선율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율이야말로 음악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화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면서 라모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게다가 루소의 평소 사상관에 비춰볼 때도 화성우위론과 음악을 수학과 과학처럼 인위적이고 확실한 규칙에 비유한 라모의 음악관에 반대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소의 평소 입장에서 사상적으로 중시했던 것이 바로 ‘자연사상’이었는데 이 사상에 입각해서 자연스러운 감정을 중시하며 음악을 바라보는 루소의 음악관에서는 정해진 규칙과 수학적 계산에 의한 라모의 화음을 중시하는 음악관은 자연적이 아닌 인위적인 음악관이라고 여기게 됐던 것이다.28) 이처럼 잘 짜여 진 규칙과 인위적 관습의 결과로 여겨진 라모의 화성우위론에 맞서 루소는 더욱 선율의 중요성을 주장하게 되고 라모의 음악관을 비판하는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루소는 백과전서의 음악항목에서도 라모의 음악 이론과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는데 음악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즉 음악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인 아니라 문화적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성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즉 라모의 절대주의적인 음악이론에 맞서 루소는 상대주의적인 음악이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루소의 생각이야 말로 음악체계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라모의 음악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고 이것은 라모의 음악관을 비판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음악관과 사상에 대해 비판과 반기를 든 루소의 ‘선율우위론’에 맞서 라모는 화성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자신이 쓴 논문의 서문에서 “‘음악은 과학으로서 너무도 분명한 법칙을 갖는다. 이 법칙들은 단 하나의 분명하고 확실한 원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원리는 특히 수학의 도움에서 비롯된다.”29)라고 오히려 자신의 음악관에 대한 타당성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라모는 이처럼 자신이 중시하는 화성을 수학이라는 과학적이고 규칙적인 법칙으로 설명하기 위해 음정은 물론 화음의 기능, 기초저음 그리고 음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했다. 반면 루소는 라모의 이런 생각들을 음악에 대한 일종의 일탈 혹은 타락이라고 까지 여겼으며 이 같은 음악의 일탈 혹은 타락에 맞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루소가 당대 프랑스 음악계의 거장으로 군림하던 라모의 음악관에 맞서 제시한 현실적인 방법이 바로 음악에 있어서 화음을 좀 더 단순화하자고 했던 것이다. 사실 화성에 맞서 선율의 우위를 주장한 것이 루소가 처음은 아니었고 루소의 그런 생각은 18세기 초반(1720-30년대)부터 불기 시작했던 새로운 음악양식의 한 표현이라고 볼수 있다. 1720-30년대 등장한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에 있어서의 선율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하고 선율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최초의 사람은 사실 루소가 아닌 요한 마테존 이라는 사람이었다. 화성이 아닌 선율의 중요성을 루소에 앞서 먼저 주장했었던 요한 마테존은 모든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 중 가장 기초이자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선율이라고 생각했으며 음악에 필요한 다양한 감정들이 선율에 따라 움직여지는 유일한 필수요소라고 역설했다. 요한 마테존외에 요한 샤이베도 역시 음악에 있어서 마테존처럼 선율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선율의 중요함을 피력했었던 사람이었다.30) 이처럼 음악에 있어서 화성보다 선율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과 주장들은 루소에 앞서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프랑스 음악계에 존재했었다. 한편 루소와 더불어 당시 백과전서를 편찬하는 일에 한 축을 맡았었던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의 경우도 그동안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었고 라모의 화성이론에 대한 축소판까지 만들었을 만큼 라모의 음악관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번에는 루소의 편에 서게 된다.31) 뛰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던 달랑베르는 라모에 대한 우호적인 책 출간이후 라모에게 기본적이고 틀에 박힌 것 같은 규칙과 원칙으로는 음악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직시하고 인정하라는 조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화성이 선율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성과 선율은 서로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자신의 음악관을 폈다.32) 한편 루소는 라모의 화성우위론에 맞서 선율이 더 중요함을 피력하면서 아예 자신의 음악관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오페라 작품을 쓰기도 했다.33) 1753년 루소는 자신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라는 작품을 발표해서 프랑스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는데 이 작품은 평소 루소가 꿈꾸던 새로운 프랑스판 희극 오페라였다. 또한 이 오페라는 파리음악계의 대중들은 물론이고 백과전서파였던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자들에게도 큰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

    27)Albert Jansen, Jean-Jacques Rousseau als Musiker, Genève, 1971, p.146. 1750년 겨울 즈음에 루소는 프랑스적인 음악극의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스스로의 생각에 부족했던 음악적 지식과 확고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의 혼란 속에서 강한 내적인 혼돈을 겪고 있었다.  29)『학문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é parmi les hommes, 1754, 그리고 이후에 루소가 쓴 저술에서 그는 인위적인 문명과 인위적인 사회에 의해 망가지고 훼손된 인간의 본래의 본성을 제대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9)Kintzler, catherine, Rameau et Rousseau: Le choc de deux esthétiques, Ecrits sur la Musique, Stockholm, p. 144, 1979.  30)이기홍, 『문학과 음악』, 부산문예, 1984, p. 21.  31)J. W. Bernard, Elèments de musique, théorique et pratique, suivant les principes de M. Rameau, JMT 24, 1980, p. 40.  32)Origine de Sciences, 1762.  33)단순한 화성적 반주와 선율로 이루어진 음악을 중시했던 루소의 음악관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오페라였던 <마을의 점장이 Le Devin du village> 다. 양치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오페라는 춤이나 합창 등의 프랑스 음악의 전통을 잘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잘 접목시켜 많은 음악적 교육이나 음악적 지식을 갖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쉽게 노래하고 접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8. 1750년 이후, 라모의 음악관과 대립하는 루소

    루소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문명이나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과학이나 문명은 인간의 적이라고까지 했으며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는 원인이 문명과 과학의 발전과 완성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문명의 발전에 대한 루소의 생각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특히 그가 쓴 『학문예술론le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이라는 책에 잘 드러나 있는데 예술과 과학이 인간들에게 불평등을 초래했고 도덕적 후퇴를 부추겼다고 보고 있다.34) 최초의 인간에게는 인간 본연의 소박함과 순수성이 있었는데 예술과 학문의 발전과 문명의 혜택에 따라 인위적인 취미와 관습, 유행 등 좋지 않은 성향들이 생겼다고 한다. 루소의 생각은 문명과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불평등과 도덕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사치, 방종, 나태 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루소가 가진 문명과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는 음악, 특히 프랑스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본고의 관심이기도 한 최고의 프랑스 음악가이자 근대 유럽 음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화성학 이론을 정립한 음악의 대가였던 라모와의 치열했었던 논쟁이었다. 사실 서양음악이 다른 문화권의 음악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화성(Harmonie)'이라는 독특한 구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화성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자연과학의 법칙과 연결시켜 연구하고 체계화했던 사람이 바로 라모였으며 음악사에서는 그 중요성이 상당히 큰 작가였다. 라모는 1722년 『자연원리로 환원된 화성론 Traité de l'harmonie réduite à ses principes naturels』을 출간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고 자신을 이론에 능한 인물로 대중에게 어필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당시 널리 통용되었던 과학의 여러 이론들을 적용하여 화성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으며 그 후 그의 화성에 관한 이론은 당대는 물론, 고전파 음악 전반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소자신도 순조로운 음악계 데뷔를 위해 라모의 음악관을 따르고자 했었으니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루소가 1750년을 전후로 라모를 비롯한 그가 추종하는 프랑스 음악계 전반에 대한 반대파로 돌아서게 됐는데 그 전후사정을 좀 더 소상히 살펴보도록 하자. 루소가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접어든지 약 10년이 지난 1752년부터 2년 동안 프랑스 음악계가 양분돼서 치열하게 싸웠던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이 절정이던 1753년 루소의 저서를 보면 루소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그가 발표했던 『프랑스 음악에 대한 서간문la Lettre sur la musique francaise』에서 루소는 프랑스 음악이 아닌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자신의 호의적인 생각과 이탈리아 음악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게 된다. 이것은 루소 자신이 3년 전에 발표했었던『학문예술론』에 비해서도 훨씬 더 자극적인 내용이었고 프랑스 음악을 포함한 전반적인 프랑스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표출했었던 것이다. 루소의 이러한 프랑스 음악 전반에 대한 폄하는 프랑스 음악인들을 포함한 예술계는 물론이고 정치인들까지 가세하게 되고 나아가 전 프랑스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루소의 음악관은 대체적으로 1750년을 기점으로 심정적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루소는 프랑스 음악과 라모의 음악관에 대해서 오히려 호의적인 입장에 있었다.35) 그러던 루소의 친 프랑스와 친 라모에 대한 생각이 2년 후인 1752년에 접어들며 갑자기 변화하기 시작했다. 라모의 음악관에 대한 동조에서 비난으로 그리고 프랑스 음악에 대한 생각도 부정적으로 변해서 이탈리아 음악이 프랑스 음악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그 다음 해인 1753년에 발표한 『프랑스 음악에 대한 편지』에서는 프랑스에는 음악다운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당히 극단적인 입장으로까지 바뀌게 된다. 이런 루소의 생각은 언어에서 음악의 선율이 생기는 것인데 프랑스어보다는 이탈리아어가 선율의 입장에서 더 적합하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루소의 생각은 프랑스어의 경우 모음과 거친 자음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노래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루소의 프랑스어와 프랑스 음악에 대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어와 이탈리아 음악이 프랑스 음악을 압도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점은 왜 루소는 프랑스 음악과 라모의 음악관에 대해 단 2-3년 사이에 이렇듯 확실히 상반되는 생각을 갖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라모의 음악관을 추종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던 루소를 생각한다면 이런 그의 음악관에 대한 급작스런 변화는 의아하기까지 하다. 사실 루소의 이러한 급격한 음악관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루소의 프랑스 음악과 라모에 대한 생각이 불과 2-3년 만에 이처럼 상반되게 바뀐 배경에는 기존의 완고한 프랑스 음악계와 자신에 대한 라모의 신랄한 비판이 하나의 이유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루소에 대한 라모의 직접적이고도 비호의적인 평가가 루소로 하여금 라모는 물론이고 라모가 지지하는 프랑스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라모는 루소의 악보법에 대해서 그다지 높게 평가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루소 자신의 개인적인 악보법을 들고 와서 프랑스 음악계의 호감을 얻고자 하는 그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사실 라모는 루소의 음악관은 물론이고 그가 프랑스 음악계로 나가는 것도 좋지 않게 여겼었다. 1733년 라모는 그의 후원자였던 왕실 세금 징수 책임자였던 라 푸플리니에르(la Pouplinière)의 도움으로 당시 인기 대본작가였던 펠르그렝(Pellegrin) 신부의 시에 음악을 붙인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라는 명작을 상연해서 대중적인 인정과 인기를 받았었다. 파리의 왕립아카데미에서 상연했던 이 작품에 대해 프랑스 음악계를 포함한 각계의 많은 찬사가 줄을 이었고 특히 앙드레 캉프라(André Campra)의 경우 그 어떤 오페라 작품보다도 이 오페라 속에 값지고 훌륭한 음악이 스며들어 있다는 극찬을 한 바 있다.36) 이런 수많은 찬사를 들으며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승승장구하던 라모에게 있어 루소의 음악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Muses galantes>라는 작품을 공연 할 때 라모는 루소가 작곡한 음악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적이 있었다. 즉 라모가 루소의 음악에서 불만을 가졌었던 부분은 루소가 담당했던 프랑스 성악파트와 기악파트 부분이었는데 이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이 첫 번째 지적사항이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지적사항은 루소가 만든 수준 낮은 프랑스 음악과 달리 루소가 이탈리아 음악은 매우 아름다운 선율과 반주부분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놓고 표절의 의심이 있다고 비판했었던 것이다. 그동안 루소 자신이 가졌었던 당대 음악계의 대부였던 라모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과 라모의 음악관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을 떠올릴 때 루소의 음악에 대한 라모의 폄하와 비판은 루소로 하여금 라모에게서 심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만들었었던 매우 심각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소의 음악에 대한 라모의 이러한 비판과 폄하는 루소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음악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라모에 대해 루소가 가졌던 마음과 라모의 신랄한 비판으로 인한 아픔을 루소 자신의 음악관을 충실히 쌓는 데 활용했다고 바렁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하고 있다.37) 라모에게 많은 비판을 들었던 루소는 이후부터 라모에 대한 추종적인 마음을 완전히 접고 음악적으로 라모와 완전히 대립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물론 루소의 과거와 다른 변화된 음악관은 1749년 초에 쓰여 진『백과전서l'Encyclopédie』의 음악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백과전서의 음악부분에서 루소는 자신의 변화된 음악관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특히 루소는 백과전서의 음악부분에서 음악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데 음악 역시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기 상이한 문화적 상황에 따른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변화된 음악관이야말로 그동안 라모가 줄곧 주장해왔던 음악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루소는 여러 민족들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라모의 음악관이기도 한 절대주의적인 음악이론을 부정한다. 그의 생각은 음악이라는 것은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상황을 절대적으로 반영하는 상대주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담겨있는 고유한 정서를 반영한 음악을 갖고 있으며 라모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 하나의 음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절대적인 음악이라는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루소에게 있어 애당초 그가 프랑스 음악계 데뷔를 위해 일종의 모델로 삼으려고 했었던 라모라는 존재와 그의 음악관은 1750년, 좀 더 엄밀하게는 그보다 1년 앞서 나온 『백과전서』의 음악부분을 집필하면서부터 확연히 달라지게 됐다.

    34)최정웅, 『루소의 교육사상』, 배영사, 1999, p. 35.  35)같은 책, p. 42.  36)Paul Marie Masson, Histoire de la musique I, Paris, Pléiade, 1970, p. 1658.  37)J.J.Rousseau, Lettres du 17 janvier 1749 à Mme de Warens, Correspondance Complète, tome II, pp.112-113.

    9. 나가는 말

    프랑스 서정 비극이 등장한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의 음악에 대한 우월성 논쟁은 18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될 만큼 중차대한 문제였고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나았다. 흔히 부퐁논쟁이라고 해서 한 번에 그친 줄 알았던 음악적 논쟁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와중에 생성됐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바람을 타고 음악을 넘어 정치, 사회적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됐다.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라모를 비롯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과 이에 맞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루소와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들이 치열하게 맞섰던 부퐁논쟁을 비롯한 무려 4차례에 걸쳐 벌어졌었던 오페라 논쟁은 단순한 음악적 논쟁과 다툼만이 아니었다. 특히 세 번째 오페라 논쟁이었던 1752년의 부퐁논쟁은 다른 논쟁들에 비해 더욱 치열한 다툼양상을 보였고 또한 오래 지속됐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논쟁의 무대로 끌어 들였는데 이것은 당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치열하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부퐁논쟁에 몇 년 앞서 활동을 시작했던 백과전서파들이 이 논쟁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확고한 계몽 사상가이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루소나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일명 개혁주의자들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가세하자 이미 계몽주의에 맛을 들인 대중들이 함께 하게 됐다. 이것은 사실 표면적으로만 오페라라는 음악에 관한 논쟁이었지 실상은 기존에 있던 기득권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개혁의 요구였는데 이것이 바로 비록 표면적으로는 오페라 논쟁이지만 부퐁논쟁이 당시 18세기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18세기 당시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 가던 계몽주의 에 힘입어 다른 분야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 오페라 논쟁에 가세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 음악 전체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실 서양 미학사의 역사에서는 18세기 중반 프랑스 음악의 위상은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그리 우월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1703년, 즉 18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오페라 논쟁과 같은 치열하고 지속적인 이론적 공방을 하면서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 전반에 대한 위상을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8세기 후반을 지나 19세기로 이어지면서는 다른 예술보다 우위에 서게 됐던 것이다.38) 사실 부퐁논쟁에 가세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보면 이런 오페라 논쟁이 음악에 대한 우열을 가리기 위한 다툼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라모를 비롯한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세력은 몰락해 가는 구 귀족을 중심으로 흔히 말하는 ‘앙시앙레짐, 즉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현상 옹호적 입장에 있었고, 반면 루소를 위시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백과전서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백과전서파들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새로운 내용과 규칙을 가진 사회적 진보를 주장하고 원하던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이자 보수주의자들인 프랑스파와 진보세력인 이탈리아파들 간의 치열한 논쟁과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이것이 바로 부퐁논쟁이 단지 음악적 논쟁이 아닌 시대적 산물의 결과로서 갖는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부퐁논쟁이 정치, 사회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어서 부퐁논쟁이 끼친 음악적인 의미와 결과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음악의 내적 성숙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연성과 표현성의 부족, 그리고 언어적인 억양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선율 등 내적인 어려움과 한계에 봉착했던 프랑스 음악극은 18세기 중반 촉발된 부퐁논쟁을 겪으면서 오페라 코미크 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할 수 있었고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오페라를 발전시키면서 프랑스 음악계의 발전 또한 함께 어 우러지게 됐던 것이 바로 부퐁논쟁이 가져다 준 또 다른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38)이경희, 「근대 예술 체제의 성립과정에서 시, 미술, 음악의 위상변화」, 한국예술연구소, 1998,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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