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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Revisiting the Concept of Suture in Lacanian Film Criticism 라캉주의 영화비평에서 봉합이론의 재고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Revisiting the Concept of Suture in Lacanian Film Criticism
KEYWORD
suture , Jacques Lacan , Jacques-Alain Miller , Jean-Pierre Oudart , Jean-Louis Baudry , Daniel Dayan , Todd Mcgowan , Slavoj ?i?ek
  • I. 서론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은 그의 전공이었던 정신의학은 물론이고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제 분야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 중 영화비평 분야는 1970년대 일군의 영화비평가들이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을 영화비평과 접목하고, 또 알튀세(Louis Althusser)와 푸코(Michel Foucault) 등 당시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론과 결합하여, 영화이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당시 라캉의 이론에 근거한 영화비평은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지와 영국의 스크린(Screen)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우다르(Jean-Pierre Oudart), 메츠(Christian Metz), 보드리(Jean-Louis Baudry), 코몰리(Jean-Louis Comolli), 히스(Stephen Heath), 멀비(Laura Mulvey), 월런(Peter Wollen) 등이 주요 영화이론가로 활약했다. 이들이 라캉의 초기이론, 즉 거울단계 이론을 영화비평에 응용한 라캉의 초기 영화이론가라면, 최근에 등장한 토드 맥고완(Todd McGowan)이나 실라 컨클(Sheila Kunkle) 같은 영화비평가들은 라캉의 실재계 이론을 영화비평에 접목한 라캉의 후기 영화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젝(Slavoj Žižek), 살레클(Renata Salecl), 주판치치(Alenka Zupančič) 등 슬로베니아 라캉 학회 비평가들이 전개한 라캉의 후기이론을 영화에 접목하고자 한다. 라캉 연구에서 상상계-상징계에 집중된 초기이론과 상징계-실재계에 집중된 후기이론이 구별 되듯이, 초기이론과 후기이론이 각기 접목된 영화이론 역시 차별성을 갖는 듯보인다. 숀 호머(Sean Homer)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서 “오늘날의 라캉주의 정신분석 영화이론의 초점은 거울단계와 주체의 위치에 대한 초기의 관심으로부터 실재계, 환상 그리고 응시에 대한 라캉 후기 연구에 대한 이해로 이동하였다 ” (128)라고 지적한다. 또한 맥고완은 컨클과의 공편저인『라캉과 현대영화』(Lacan and Contemporary Film)에서 한때 영화비평계를 풍미하던 라캉이론이 편협함으로 인해 쇠퇴했다고 지적한 후, 이 책의 논문들이 “그 이전의 라캉주의 영화이론과 단절을 요구한다” (xiii)고 명백히 밝힌다. 그가 주장하는 단절의 대표적 예는 이데올로기와 영화적 주체의 관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라캉주의 영화분석의 초기단계는 주체가 자신을 통일된 자아로 오인하는 라캉의 거울단계와,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호명으로 구성된다는 알튀세의 이론을 접목한 이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 관점에 따르면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인 무기가 되었고 할리우드는 주체를 이데올로기 안으로 호명하는 공장이” (xiv) 된다. 반면 후기 라캉주의 영화분석에서는 “주체를 이데올로기적 과정의 정점으로 파악하기보다 이데올로기가 실패하는 지점으로” (xvii) 보며,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데올로기 내의 간극과 상징적 질서 내부의 공백을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라캉주의 초기와 후기의 영화이론이 명백히 다르다는 일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은 봉합이론을 중심으로 과연 이들 이론이 얼마만큼 또 어떤 측면에서 다른지 조사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잠정적 가설은 이 이론들이 맥고완을 비롯한 후기 라캉주의 영화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그렇게 상반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론의 방향은 차라리 관점의 차이, 또는 방향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초기 영화이론이 영화를 보는 주체가 어떻게 영화의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는지에 초점을 두었다면, 후기 영화이론은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의 과잉과 외상적 실재와의 대면을 통하여 주체의 결핍과 의미의 실패를 강조한다. 이는 초기 이론에서는 주체가 의미의 생산자이고 후기 이론에서는 주체가 의미의 실패라는 식으로 상반된 견해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위치를 어디로 보는가에 따른 견해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초기 이론에서 주체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주체인 반면, 후기 이론에서 주체는 영화 텍스트에 포함된 주체, 영화 텍스트의 의미가 파열되는 지점에 있는 주체이다. 다시 말하여 초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이 관객성에 초점을 맞추는 수용이론이라면, 후기 이론은 영화 텍스트 내부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맥고완은 임상 정신분석적 해석이 정신의 텍스트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영화 정신분석적 해석은 영화 텍스트 그 자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후기 라캉주의 영화비평은 “관객성의 개념과 결별한다” (xx)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관객성 개념은 영화비평에서 지울 수 없는 문제이며, 이 문제를 다룰 때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이 다시금 참조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후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에서는 영화가 주체의 결핍과 나아가 대타자의 결핍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그 결핍을 지우는 것은 봉합의 작용이다. 관객은 영화관을 나올 때 이미 봉합된 주체인 것이다. 라캉주의 후기 영화이론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결합의 산물인 봉합을 넘어서서, 실재계가 상징계에 낸 구멍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만, 상징계의 파열을 꿰매는 것도 봉합이다. 따라서 봉합은 초기영화이론의 고전적 개념으로 지나칠게 아니라 계속하여 영화이론을 다듬어갈 때 참조해야 할 라캉의 유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논문은 초기 라캉주의 영화비평에서 봉합의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 개념이 후기 라캉주의 영화비평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임을 주장 할 것이다.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과 후기 이론을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서로 참조할 수 있는 이론으로 간주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영화이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에서의 봉합(1)―의미작용 논리로서의 봉합이론

    라캉의 복잡한 기표이론과 영화비평이 접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개념 중의 하나가 ‘봉합’ (suture)이다. 원래는 상처를 꿰매는 외과수술 용어인이 용어를 라캉의 상징계 이론과 봉합시킨 인물은 자크 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이다. 그는 1966년 발표된 논문「봉합: 기표의 논리의 요소들」(“Suture: elements of the logic of the signifier”)에서 봉합의 개념을 “주체가 기표의 위장을 하고 상징계 등록소에 들어가는 지점이며, 그렇게 해서 존재를 희생하여 의미를 얻는 것” 이라고 정의한다.1 밀레는 이 논문에서 라캉의 가르침의 중요한 이슈를 “기표의 논리” 라고 간주하고 이를 자신의 용어로 정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표의 논리는 논리학의 논리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포괄적인 논리를 말한다. 봉합은 주체와 담론사슬의 관계에 관여하는데, 주체는 담론 속에서 대역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결핍된 요소이다. 이때 결핍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밀레는 의미작용 속의 주체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수 연속체에 대한 프레게의 논의를 참조한다. 우선 프레게는 세 가지 개념, 즉 개념, 대상, 숫자와, 두 가지 관계, 즉 포섭(subsumption)이라고 불리는 개념-대상의 관계와, 배정(assignation)이라고 부르는 개념-숫자의 관계를 제시한다. 이들의 관계를 요약하면, 숫자는 대상을 포섭하는 개념에 배정된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대상은 개념에 포섭된 것으로서 실제 사물이 아니라 개념 속의 사물이다. 세상의 독특한 단위의 경우 그 토대는 동일성인데, 그것은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것에게 1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여 사물을 개념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프레게는 동일성의 정의를 라이프니츠(Leibniz)에게서 가져오는데, 그에 의하면 “참의 상실 없이 하나가 다른 하나로 치환된다면 그것은 동일하다” 는 것이다. 이 동일성에 의해 사물에서 대상으로의 이동이 참을 보유하게 된다. 예컨대 세상에 x라는 사물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x에 대한 경험적 개념이 있다고 하자. 이 때 프레게의 도식에 사용되는 개념은 이러한 경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배가한 개념, 즉 x의 개념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 아래에 떨어지는(즉 포섭되는) 대상은 x 자체이다. 여기에서 개념 x에 배정되는 숫자가 등장하는데, 이 숫자가 1이다. 이 1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1, 단위로서의 1이며, 1, 2, 3과 같은 연속된 숫자의 1은 아니다.2

    그런데 숫자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즉 모든 사물이 1, 1, 1, 1, . . .의 단위로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0이 출현해야한다. 1이 “자신과 동일한 것”의 개념에 배정된 숫자라면, 0은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에 배정된 숫자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라는 개념이 포섭하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 그런 대상은 없다.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대상, 즉 A = not A 를 만족시키는 대상은 참을 희생하지 않고는 없다. 따라서 0은 포섭하는 대상이 부재하고 결핍되어 있다. 0은 대상이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단지 결핍을 보이게 하기 위해 표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0이 논리적 담론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0은 포섭하는 대상이 결핍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0의 대상은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숫자 0에서 개념을 구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개념이 유일한 대상으로 0을 포섭한다면, 그것에 배정될 숫자는 1이 된다.3 그렇다면 0은 1로 셀 수 있게 된다. 프레게는 자연수 n 다음에 올 계승자를 n'로 정의하는데, n'는 n+1과 같다. 프레게가 정의하는 계승자에 대한 공식은 “‘n으로 끝나는 자연수 연속체의 구성원’ 이라는 개념에 배정되는 숫자는 자연수 연속체에서 n 다음에 곧바로 따라온다” 는 것이다. 숫자 3을 예로 들어보자. ‘3으로 끝나는 자연수 연속체의 구성원’의 개념에 해당되며, 3 다음에 곧바로 따라오는 숫자는 4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실재의 세계에서 3은 3개의 대상을 말하지만(예컨대 개 3마리), 숫자의 세계에서 3은 세어진 숫자가 3개라는 것을 말한다. 즉, 3 이전에 세 개의 숫자가 있다. 그런데 3 이전에 세 개의 숫자가 있으려면 1, 2 외의 다른 존재, 즉 0이 필요하다. 0이 추가됨으로써, 그리고 그 0이 1로 세어짐으로써 3 다음에는 3+1=4가 올 수 있는 것이다.

    복잡하게 보이는 위의 논의의 요점은 자연수가 연속하기 위해서는 결핍하지만 1로 세어질 수 있는 0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는 역으로 말하면, 결핍으로서의 0의 존재가 연속체를 이루는데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n+1=n'”이 끊임없이 무한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0이 출몰하여 1로 세어져 n → n'가 되는 동시에 0은 사라지고, n'가 된 n이 다시 n'로 되기 위해서는 0이 출몰하고 1로 세어지고 또 사라지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4 이러한 과정, 즉 숫자 0이 구성되고 무화되는(instituted-annulled) 과정을 통해 연속체를 유지하는 과정이 봉합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주체가 의미 사슬에 봉합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를 밀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캉에게 기표의 정의는 주체를 다른 기표를 위해 재현하는 것이다. 주체는 기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진다. 주체는 숫자를 열고 닫는 운동처럼, 또 1의 형태로 결핍을 전달했다가 계승자 안에서 폐기해버리는 운동처럼 “소멸 속의 깜박임” (flickering in eclipses) 같은 것이다. 주체의 근본적인 결핍을 덮어 버리고 주체를 의미작용의 사슬 속에 정립하는 과정이 봉합인 것이다.

    이러한 봉합의 개념을 영화이론에 접목하여 본격적인 라캉주의 영화비평을 선도했던 이는 우다르이다. 그는 1969년 발표한 논문「영화와 봉합」(“Cinema and Suture”)에서 밀레가 의미작용을 위해 사라지는 주체로 제시했던 무의식의 주체를 관객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후 관객성의 이론이라고 할 영화의 봉합이론의 토대를 세웠다.5 밀레에게 봉합이 기표의 논리라면, 우다르에게 봉합은 영화의 논리이다. 영화의 논리는 영화만의 독특한 구조 내지는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다르는 밀레의 봉합의 이론을 차용하여 영화의 독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의 논리를 세우고자 한다. 밀레의 기표의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 점멸하는 무의식의 주체와, 사라지는 주체를 담보로 출현하는 의미였다면, 우다르의 영화의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부재의 장과 그 장이 사라짐에 의해서 출현하는 영화의 상징계적 의미이다. 이 두 가지 논리에서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는 것, 즉 결핍이 사라짐으로써 의미가 생겨나는 과정이 봉합인 것이다.

    우다르에 따르면 영화 의미의 생산은 영화와 관객의 관계가 이자관계에서 삼자관계로 바뀔 때 일어난다. 먼저 영화 이미지를 대할 때 관객은 영화 이미지와 둘만의 관계 즉, 이자관계에 빠진다. 예컨대 싱글 샷으로 찍은 전쟁장면이 있다고 하자.6 두 군대가 강둑에서 만난다. 병사들이 강을 건너려고 하는 장면은 하이 앵글 롱 샷으로 찍혔다. 갑자기 적군이 이미지의 아래쪽 프레임에서 거대한 규모로 솟아오른다. 카메라의 위치에 의해 숨겨졌던 적군이 이제 강 위로 솟아 오른 것을 보면서 관객은 두 군대를 분리하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희열을 가지고 경험한다. 그 자신이 이미지와 함께 유동적이고 유연하게 확대된다. 그는 영화안에 있다. 그런데 곧 그의 희열은 사라지고 그는 물러선다. 그가 영화의 프레이밍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갑자기 카메라에 의해 숨겨졌던 공간, 즉 영화와 자신 사이에 있는 공간을 감지한다. 영화와의 이자관계를 깨는 제3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그는 좀 전에는 즉자적으로(being-there-ness) 영화 속에 존재하는 희열을 느꼈었는데, 이제 영화와 거리를 둔 대자적 존재로서(being-therefor-ness) 영화와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관객 양식의 전환이 어떻게 이미지들이 의미를 생산하는 상징적 의미 사슬로 구성되는가를 보여준다. 관객이 영화 이미지 안에 있는 것처럼 희열을 느낄 때, 그가 마주하는 것은 아직은 영화의 장이 아닌 그냥 활동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카메라의 존재를 모르고 단지 영화 이미지만을 앞에 마주한 채, 이자적인 관계에서 마치 영화 안의 사물들을 그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수한 공간의 확장이라는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나 갑자기 스크린의 존재가 그와 영화 이미지 사이에 끼어들면서 관객의 매료를 깨어버린다. 프레이밍을 지각함으로써 관객의 희열은 끝이 나고, 이미지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폐기된다. 그런 다음 나타나는 영화의 장이 부재의 장이다. 이 부재가 등장함으로써 이미지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하는 사물들의 기표가 된다. 순간적으로 경험된 부재의 장은 영화 이미지 속의 사물들을 고정점 없이 떠다니는 부재의 기표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이대로 멈추어버린다면 그 영화 이미지는 아무런 의미도 낳지 못하고 부재의 기표로 얼어붙을 것이다. 이때 부재가 누군가로 채워지면서 부재의 장은 상상적 공간으로 대체되고 영화 이미지는 의미 총체로 거듭난다. 부재가 지워지면서 의미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 모여 무언가를 의미하는 의미 특징들의 합계인 의미 총체 안에는, 단지 기표로 환원되어 그 자체를 무화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부재의 울림이 언제나 있다.

    우다르에 의하면 이미지가 의미의 총체로 거듭나는 이 과정이 봉합이다. 희열과 독해 사이에서, 즉 관객이 이미지 속에 함몰되어 희열을 느끼는 순간에서 갑자기 이미지와 자신 사이의 공간을 느끼고 뒤로 물러날 때, 이미지는 기표계로 들어가고 의미의 총체로 거듭난다. 이미지가 기표가 될 때, 이는 부재에 근거한다.7 이 부재가 어떤 것으로 채워질 때 상상의 장이 나타난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과정은, 즉 희열에서 독해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과정은, 부재의 장이 상상의 장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부재와 현존, 비현실과 상상의 이중적인 운동이,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만의 특징과 영화의 언술을 만든다. 부재 (the Absent One)를 지워버리고 상상 속에서 무엇인가(some one)로 현존하게 하는 효과가 봉합이며, 기표가 의미 총체로 생산되는 것, 또는 영화 언술이 상상의 장에서 고정점을 만나게 되는 것이 봉합이다. 만약 봉합이 없다면 관객은 이미지의 희열 속에서, 내지는 기표의 무의미한 연속 속에서 얼어붙을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의미있는 총체로 인식하는 것은 봉합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다르에게 있어 봉합은 이미지가 기표로, 기표가 의미 총체로 전환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며, 부재의 장이 상상의 장으로, 즉 부재하는 것이 상상 속의 어떤 것으로 채워짐으로써 의미가 발생하는 과정을 말한다. 관객은 부재의 장에서 상상의 장으로 왔다갔다 함으로써 의미의 생산에 참여하게 되고 영화를 독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모든 영화에 다 해당하는 것은 아닌데, 우다르는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잔 다르크의 재판』(The Trial of Joan of Arc)을 봉합의 훌륭한 예로 들고 있는 반면, 같은 감독의 다른영화인『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는 봉합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우다르에 따르면, 영화적인 것의 모델이라고 할 만한『잔 다르크의 재판』은 신중하게 엇박자로 진행되는 담론의 봉합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여기에서 쇼트들은 일종의 기호라고 할 이미지들, 예컨대 공인 기록담당자의 손이나 잔에게 서명하게 하는 사제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잔과 재판관 사이의 대면을 보여주는 쇼트들은 미소한 시간차를 두면서 재판관의 말에 대한 잔의 얼굴에 나타난 영향, 즉 목구멍의 경직, 입술의 움직임, 보이지 않는 채찍질의 흔적 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쇼트들의 이동에 의해 야기되는 엇박자의 진행이 다른 인물들로 부재를 지우면서 영화적 장을 만들고 봉합을 이루어낸다. 반면『당나귀 발타자르』에서는 카메라가 그냥 사물을 지칭하듯이 이미지를 배열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주 선형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관객은 부재를 상상 속에서 지우고 담론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봉합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왜냐면 공백과 틈과 같은 부재만을 무수히 만들어 내고, 아주 드문 장면에서만 이 부재가 채워지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잔 다르크의 재판』처럼 관객이 부재와 상상 사이에서 독해를 하는 심도깊은 영화적 장을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봉합의 실패를 보여준다.8

    이와 같은 우다르의 봉합의 설명에서 간파할 수 있는 점은 비극적이고 불안정한 영화의 언어라는 정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봉합의 쉽지 않은 특징이다. 봉합의 비극적인 특징은 영화에서 의미를 얻기 위하여 관객이 희열을 반납하고 상징적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데 있다. 밀레의 설명에서도 나왔듯, 의미의 연쇄사슬은 그냥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주체라는 부재자가 나타나고 그 부재자가 지워짐으로써 의미의 사슬이 이어진다. 영화의 봉합에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관객은 더 이상 희열을 느끼는 자가 아니며, 부재가 지워지며 의미가 생산되는 제4의 면, 상상의 장을 차지하는 자이다. 영화의 프레이밍을 지각함으로써, 자신이 영화 안에 있고 영화 속의 사물들을 만질 수 있다는 희열에서 깨어난 관객은 희열을 포기하는 대신 영화 이미지와 카메라 사이의 영화적 장에서 만들어지는 의미 담론 안으로, 즉 상징계 안으로 들어간다.

    우다르가 결코 쉽지 않은 영화인 브레송의『잔 다르크의 재판』을 봉합의 예로 들었다는 사실 역시 봉합이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이 잔과 재판관 사이의 심문의 과정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 재판관은 거의 정면의 각도로, 잔은 3/4 각도로 찍혀있다.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장의 이러한 비스듬한 각도는 관객 자신의 위치를 나타낸다. 관객은 잔을 보는 다른 인물이나 또 재판관을 보는 다른 인물과 동일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미지로 나오는 인물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인물을 보는 위치에 있는 부재자, 인물이 없기 때문에 상상적으로만 존재하는 부재자와도 동일시 할 수 없다. 관객은 자신의 것이 아닌 시야의 주체(영화 이미지 속의 인물이 자신을 볼 것이라고 상정하는 보는 자)로서 부재자를 설정하고, 또한 영화 이미지를 부재의 기표로 설정한다. 그리고 오직 이 둘 사이의 간격에서 관객의 상상은 자유로이 활동하여 사라지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 위치는 관객의 상상력에 의해 인물이 점유하는 위치도 아니고, 관객이 자기 것이 아닌 시야의 허구적 주체로서 부재자를 영구히 위치시켜 상상력을 멈추게 하는 임의적인 위치도 아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은 비스듬한 각도로 쇼트들을 연결시킴으로써 봉합에 의해, 주관적인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브레송이 개개의 이미지가 ‘교환’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차원, 즉 영화를 읽을 수 있는 상징적 차원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다르의 설명에서 관객은 사회의 시공간 속에 구체적인 삶을 사는 주체, 즉 주관적인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생산에서 요구되는, 아니 의미의 생산이 사라지는 주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구조적 인과성 속의 요소이다. 우다르는 영화를 하나의 의미체계로 보고, 밀레의 봉합의 개념을 차용하여 영화 이미지, 관객, 의미 사이의 관계를 부재와 상상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함으로써 영화의 언술에 상징적인 차원을 부여하였다. 영화의 상징적인 차원, 즉 영화가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의미사슬을 가지면서 의미를 창출하는 그 과정을 봉합이라고 불렀고, 따라서 봉합은 그에게 영화의 논리인 것이다.

    1이 텍스트는 1966년 Cahiers pour l’analyse 1지에 실렸고 영문판은 1978년 Screen 18지에 실렸다. 이 텍스트의 출처는 http://www.lacan.com/symptom8_articles/miller8.html이다.   2예컨대 개라는 실제 사물이 있으면 구체적인 시공간을 차지하는 그 사물에 대한 경험적 개념이 있다. 백구, 황구, 점박이 식으로.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숫자가 나오지 못한다. 숫자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백구, 황구, 점박이의 개념과 동일한 개념으로서의 개라는 개념이 도출되어, 개라는 개념에 맞는 개라는 대상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단위로서 1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3앞서 1은 “자신과 동일한 것”의 개념에 배정된 숫자이고, 0은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의 개념에 배정된 숫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의 개념이 포섭하는 대상이 결핍이라는 것은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과 “결핍”이 동일한 것이므로 그 개념에 배정될 숫자는 1이 된다.   4자연수의 연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다음에 2가 나오기 위해서는 0이 깜박 출현하여 하나로 세어지면서 1+1=2가 되고, 또 2 다음에 3이 나오기 위해서는 또다시 0이 깜박 출현하여 하나로 세어지면서 2+1=3이 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0이 깜박일 때마다 숫자는 하나씩 증가하여 무한대의 연속을 이룬다.   5이 텍스트는 Cahiers du Cinéma의 211호와 212호(1969년 4월과 5월 간행)에 발표되었고 영문번역은 1978년 Screen 18지에 게재되었다. 이 텍스트의 출처는 http://www.lacan.com/symptom8_articles/oudart8.html이다.   6키튼(Buster Keaton)의『장군』(The General)의 한 장면임.   7이미지가 기표로 되었다는 것은 이미지 속의 사물을 실제의 사물과 혼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화를 상영하였을 때, 사람들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실제의 기차라고 생각하여 소동을 피웠다. 그러나 그 후 관객은 영화의 이미지가 단지 기표라는 것을 안다.   8우다르는『당나귀 발타자르』외에도, 랑(Fritz Lang)의 영화에서 이미지가 영화진술에서 분리되어 고정되지 않은 의미총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고다르(Jean-Luc Godard)의 영화가 이미지의 ‘사물’과 기호 사이의 균열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봉합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III.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에서의 봉합(2)―이데올로기 효과로서의 봉합

    이러한 낯선 봉합의 이론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드러내는 이론으로 친숙하게 확립된 것은 여러 비평가 중에서도 특히 장-루이 보드리와 대니얼 데이언(Daniel Dayan)의 비평적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드리는「기본적인 영화적 장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Ideological Effects of the Basic Cinematographic Apparatus”)(1970)라는 논문에서 또 데이언은「고전영화의 튜터 코드」(“The Tutor-Code of Classical Cinema”)(1974)라는 논문에서, 고전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생산하는 과정으로서의 봉합이론을 전유하였다. 먼저 보드리의 논문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영화적 장치’는 카메라와 영사기를 가리킨다. 언뜻 보기에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보이는 테크놀로지에 속하는 영화 카메라와 영사기가 초월적 주체 생산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의 논문의 핵심이다. 그는 그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카메라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이 함축하는 눈의 중심성과 연결하며, 또 그러한 중심적 눈과 주체를 연결한다. 그리고는 후설의 현상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참조하여, 영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여 생산하는 것은 초월적 주체라고 주장한다. 한편 데이언은 고전시대의 회화의 재현원칙, 즉 회화의 재현은 암묵적으로 보는자를 포함하다는 원칙과, 우다르의 영화의 논리, 즉 부재의 장과 상상의 장을 넘나들면서 영화의 의미가 생산된다는 봉합이론을 서사 중심의 고전영화에 적용하여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밝힌다.

    보드리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은『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에서 심리적 생산에 봉사하는 기구의 시각적 모델로 복잡한 현미경 또는 카메라를 지목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언급에 있다.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꿈의 내용은 그 기저에 무의식의 작용을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는 영화의 내용은 카메라의 촬영과 편집, 영사의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객관적 현실의 느낌을 주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매끄럽게 흐르는 현실의 기록과 같다. 그러나 그 매끄러운 현실의 전개가 숨기고 있는 것은 영화적 기구들의 사용이며 그 사용이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생산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카메라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무엇인가? 보드리는 그 함의를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의 구성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공간을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다각적인 시점에 근거한 회화를 생산하였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서는 공간이 집중되며 이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눈 또는 주체이다. 고정된 한 점을 중심으로 시각화된 사물들이 배치되는 그 점이 주체의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서구 형이상학의 충만하고 동질적인 존재의 개념에 상응하는 총체적 시야를 대변한다. 코엥-세아(Cohen-Séat)나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같은 영화이론가가 ‘진리의 발견’이니 ‘순수한 현상’이니 ‘정신적 현존’과 같은 말로 영화를 찬미한 것은 영화가 서구 형이상학의 이상적이고 초월적 주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358).

    카메라가 모든 것을 보는 눈인 초월적 주체를 이데올로기적 효과로 생산한다면, 영사기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미세한 차이를 부정하고 연속성이라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장면들의 연속이며 초점이나 시점이 다른 장면들이 모여서 일관적인 흐름을 형성한다. 이 때 일관적이고 동질적인 흐름은 각 장면의 이질적인 차이가 부정되기에 가능하다. 장면들의 차이는 영화가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차이의 부정에 의해 영화가 지탱된다. 영화는 “차이의 부정에 의거해서 살아나가는” (359) 것이다. 이 과정은 꿈의 생산과도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차이를 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미세한 차이를 골라 억압하여 그 결과 의미를 획득한다. 카메라가 이것저것 불연속적인 것을 찍었다면 편집과정을 거친 영화는 영사기를 통해 차이나는 요소들을 억압하고 오직 관계만을 보여준다. 개별적인 이미지들이 사라지면서 운동과 연속성이 나타난다. 개별적이고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거나, 적어도 통합된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반면, 연속된 이미지가 일관성과 운동과 의미를 획득할 때, 원근법적 이미지의 중심으로 작용했던 눈, 즉 주체가 활성화된다.

    보드리는 여기서 일관적인 이미지들의 연속적 흐름과, 원근법적 시각의 기원으로 역할하는 주체 사이의 접목을 시도한다. 그가 카메라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눈-주체)와 영사기의 이데올로기적 함의(의미의 생산)를 접붙이는데 참조하는 철학자는 후설과 라캉이다.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는 ‘의식의 의도성’에 대한 후설의 명제처럼, 영화의 이미지가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라고 한다면 그 어떤 것은 의미라고 보드리는 말한다. 의식과 세계가 함께 구성되듯이, 영화와 의미는 함께 구성된다. 초월적 주체가 자연적으로 현존하는 실재를 괄호속에 넣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하여 의미 있는 객관적 실재를 얻어내듯, 영화는 무의미한 이미지들에서 유의미한 영화적 이미지를 추출해내는데, 이는 통합하는 주체인 초월적 눈-주체의 작용과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의미의 구성에 필수적인 연속성과, 이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성립된다. 연속성은 주체의 속성으로 이미 들어가 있으며, 주체의 자리를 둘러싼다. 이러한 연속성은 앞서 언급했던 부정된 차이의 체계에 의해서, 또 서사적인 연속성에 의해서 영화 속에 나타난다. 개별적으로 찍힌 쇼트들이 편집 과정을 거쳐서 일관적인 흐름과 서사적 연속성을 유지한 영화로 보여지는 데에는, 서사가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기원의 역할을 하는 초월적 주체라는 통합적이고 인공적인 통일의 장소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있다.

    보드리가 이데올로기 기계로서의 영화적 장치에 덧붙이는 또 다른 작용은 라캉이 거울 단계에서 설명한 동일시이다. 라캉의 거울단계는 6~18개월 사이의 유아의 단계로서, 통합된 신체의 거울 이미지를 통해 상상적 기능으로서 ‘나’가 구성되는 단계이다. 라캉은 자아의 상상적 구성이 가능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아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미성숙한 이동력과 그것에 비해 조숙한 시각적 구성이다. 보드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영화가 영사되는 동안의 조건, 즉 관객의 이동성의 중지와 시각적 기능의 우월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에 일치시킨다. 라캉의 거울단계를 영화에 접목시킬 때, 반영된 이미지가 신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의미가 주어진 세계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보드리는 두 가지 단계의 동일시를 구분한다. 먼저 이미지 자체와 연결된 첫 번째 동일시는 2차적 동일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과의 동일시에서 나온다.9 그 다음 두 번째의 동일시는 카메라의 위치를 차지하는 초월적 주체와의 동일시이다. 따라서 관객은 재현된 스펙터클 자체보다는 스펙터클을 지휘하는 것, 스펙터클을 보이게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스펙터클이 보는 것을 보도록 강요하는 것, 즉 카메라의 위치인 초월적 주체와 동일시한다. 거울이 파편화된 신체를 조립하여 자아라는 상상적 통일체를 만들어내듯, 초월적 주체는 불연속적이고 단편적인 현상과 산 경험을 통합하서 통일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파편화된 신체의 상상적 통합과, 통일적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서의 자아의 초월성을 연결함으로써, 보드리는 이후의 라캉주의 영화이론의 주된 테마라고 할 수 있는 눈-주체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구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났던 재현과 반영의 이데올로기며, 충만하고 관념적인 초월적 주체의 이데올로기이다.

    한편 데이언은 고전영화가 서구적 주체의 생산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함축한다는 주장을 위하여 우다르가 분석한 푸코의 고전적 재현 설명과 더불어 우다르의 봉합이론, 그리고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을 참조한다. 벨라스케스(Diego Velézquez)의『시녀들』(Las Meninas)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보여주듯, 고전적 재현에서 관객은 회화 그 자체 안에 각인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궁중의 인물들과 화가 자신은 관객을 향해 보고 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방의 후면에 있는 거울에 비춰져 있듯이 왕과 왕비, 즉 벨라스케스의 후원자이다. 거울이 없더라도 그림 속 인물들의 눈에 어리는 긴장감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왕과 왕비, 즉 이 그림을 보는 자이다. 이와 같이 고전적 재현은 보는 자를—주로 보이지 않는 형태로—재현에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는 관객의 위치는 어디인가? 관객이 이 그림을 보는 위치도 역시 왕과 왕비가 점했던 그 위치로서, 관객으로서는 그림 속의 인물들과 화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관객은 왕과 왕비의 자리, 뒤쪽 거울 속에서 어렴풋이 비치지만 실제로는 그림의 앞쪽에 있는 비어있는 위치를 점하면서 동시에 그 그림의 재현이 확보해놓았던 보는 주체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이것이『시녀들』의 역설이다. 이 그림에서 주체의 현존의 자리(왕과 왕비의 자리)는 자유로이 비어있다. 그러나 관객이 그 자리에 서면 그의 주체성은 그림에 의해 미리 결정된 빈공간을 채우게 된다. 그림을 읽는 관객의 자유는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읽는다는 것 자체가 그림 안에 내장되어 있는 주체성의 자리를 점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데이언은 고전적 재현의 원리를 회화를 넘어서 영화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우선 그는 “재현 체계에 근거하지 않은 영화가 있는가” (113)라고 선제적으로 묻는다. 그런 영화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전적인 서사영화는 재현 체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고전적인 서사영화에서 중요한 질문은 고전적 재현에 근거한 회화에서와 같이 “누가 보는가”이다. 이 질문은 “누가 이 이미지들을 주문하는가?” 또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영화가 함축적으로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질문을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고전적 회화에서와 같이 코드는 메시지 속에 숨겨진다. 고전적인 서사영화에서 관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사, 즉 스토리 또는 메시지이지, 그 메시지를 나르는 코드가 아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고전적인 서사영화에서는 코드가 아니라 메시지가, 즉 발화행위가 아니라 허구가 중심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데이언은 우다르의 봉합 이론을 참조한다. 우다르는 부재자가 상상 속의 어떤 것으로 대치되는 봉합과정을 통해 영화가 의미를 생산한다고 하였다. 데이언은 부재자와 상상 속의 어떤 것을 쇼트와 역 쇼트로 전유하면서 고전적 영화가 허구를 생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이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시각적 장과 동일시하면서 느꼈던 관객의 희열은 장면의 프레이밍을 지각하면서 깨어진다. 관객은 자신과 카메라 사이에 부재자의 존재와 부재자가 바라보고 있는 자리를 깨닫는다. 이것이 쇼트이다. 역 쇼트는 부재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어떤 인물을 보여주는데, 그 인물이 쇼트에서 드러난 부재자의 시선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시녀들』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면, 쇼트는 관객이 보는 것(그림)을 보는 부재자의 장이고, 역 쇼트는 그 부재자의 장을 채우는 거울 속의 왕과 왕비이다. 『시녀들』에서 화가를 포함한 인물들은 앞을 보고 있고, 역으로 이는 앞에서 누군가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인데, 그 위치가 부재자의 장이다(쇼트). 그 다음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가 그들을 보고 있는 부재자의 장을 채우는 누군가로 등장한다(역쇼트). 영화에서 부재자의 시선은 아무도 아닌 자의 시선이지만 역쇼트에 의해 누군가의 시선으로, 즉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의 시선으로 전환된다. 역쇼트는 부재자를 감지함으로써 뚫렸던 영화의 장과 관객의 상상적 관계 속의 구멍을 ‘봉합’한다(115). 쇼트에서 부재자의 존재에 의해 틈이 생겼던 관객의 상상적 장은 역쇼트에 의해 다시 봉합되고 상상적 장은 지속된다.

    봉합은 또한 의미의 생산에도 관여한다. 영화가 보이기 위한 쇼라는 것은 영화의 이미지가 인물이나 사물을 재현하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관객의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다. 영화의 장은 부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쇼트가 부재자의 시선이고 역쇼트가 누군가의 시선으로 전환된 부재자의 시선일 때, 역쇼트는 관객에게 부재자의 장으로 제시된다. 쇼트를 쇼트1(S1), 역쇼트를 쇼트 2(S2)하고 하면, S2는 부재자의 장을 대신함으로써 S1의 기의가 된다. 다시 말해, 부재자의 장 → 누군가의 장은 S1 → S2이 되고, 뒤에 오는 S2는 앞의 S1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S2는 단지 S1의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S1의 기의가 되는 의미체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생산의 봉합의 체계에서 영화의 의미는 언제나 뒤에 온다. 쇼트의 의미는 회고적으로, 관객의 기억 속에서 구성된다. 관객이 영화를 읽는 과정, 즉 영화의 의미를 감지하는 과정은 회고적으로 현재가 과거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관객의 자유는 제한된다고 할 수 있다(116).

    S1과 S2의 관계를 단지 순서가 아니라 기표와 기의라는 의미사슬의 관계로 만드는 주요 인자가 부재자이다. 부재자는 영화의 쇼트를 진술의 차원에 연결시킨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봉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동풍』(Wind from the East)과 같은 고다르의 영화에서는 쇼트가 완전한 진술을 이루기 때문에 관객은 더 이상 뒤에 올 쇼트를 기다리지 않고 쇼트를 보는 순간 쇼트를 읽어버리는 현재성을 누린다. 이 영화에서 부재자는 뒤에 올 쇼트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져 버리는 부재자가 아니라 언제나 감지되는 부재자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봉합의 메커니즘이 작동되지 않는다. 그러나 봉합 체계에서는 부재자가 숨겨지고 인물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이미지의 진정한 기원은 거짓 기원으로 대체되고 그 거짓 기원이 허구 안에 자리잡는다. 영화독해의 차원은 관객을 영화의 차원보다는 허구의 차원에 묶어버린다. 그렇다고 이미지의 영화적 차원이 참이고 허구적 차원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거짓 기원은 이미지의 진짜 기원을 억압하여 이미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봉합에 의해 영화담론은 그 자체 스스로 말하는, 기원 없는 담론으로 제시된다. 스스로 말하면서 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고전적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9라캉에 따르면, 1차적 동일시는 어린이에게 있어서 자아와 타자의 구별 이전의 어머니와의 관계와도 같은 상상적인 것이며, 2차적 동일시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지나 상징적 자아가 구성되는 상징계의 작용이다. 이를 영화분석에 참조한 메츠에 따르면 영화에서 1차적 동일시의 대상은 카메라의 시점, 카메라의 언술 행위 자체이며, 2차적 동일시의 대상은 영화에 의해 이야기되는 것, 특히 영화 속의 인물이 된다.

    IV. 라캉주의 후기 영화이론의 주요 개념과 봉합

    이상에서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에서의 봉합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봉합은 관객이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말한다. 영화의 쇼트가 이어질 때 그 이음새의 역할을 하는 것이 봉합이다. 기표가 된 영화 이미지가 그 다음 기표로 이어질 때 그냥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주체의 결핍을, 사라지는 주체를 흔적으로 가지고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위치는 부재자의 위치이며, 관객의 상상의 장에서 그 부재자가 어떤 누군가로 대체될 때 영화는 의미를 가지고 이어진다. 밀레에서 데이언까지 개념의 부침을 겪으면서 봉합 이론의 주체는 점멸 속에 깜박이는 주체에서 고전적 서사영화를 읽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호명된 주체로 단계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봉합의 과정은 의미생산이라는 상징계의 등록을 위해 관객의 상상적 장을 필요로 하는 상상계-상징계의 상호작용이고, 그러한 의미생산이 초월적 주체와 통합된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함축하고 있고, 따라서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된다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초기 라캉주의 영화비평과 선을 긋는 후기 라캉주의 영화비평가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한 예로 맥고완은 자신의 저서『실재적 응시』(The Real Gaze)에서 초기 라캉주의 영화비평과 후기 비평의 차이를 “상상적 시선에서 실재적 응시로”라고 요약하면서 이 두 비평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초기 라캉주의 영화비평은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빚지고 있는데,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거울을 보면서 실제로는 가지지 못한 자신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착각으로 가지게 된다. 영화는 거울 단계처럼 상상적인데, 이 때 상상적이란 말은 ‘영상’(image)과 ‘상상’(imagine)이 합쳐진 ‘imaginary’라는 영어단어가 보여주듯, 시각적이고 가공적이라는 의미이다(3). 초기 영화이론은 상상계의 오인에 근거한 통합된 자아 이미지에 대한 통제권을 강조하다보니 라캉의 제3의 영역인 실재계를 은폐했다는 것이 맥고완의 비판이다. 맥고완은 실재계와 응시 등 라캉의 후기이론의 개념들을 이용하여 영화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재고찰한다.

    라캉의 실재계는 상징계의 불완전성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그것은 의미작용이 무너지는 지점이며 사회구조의 틈이 발생하는 자리이다. 실재계를 도입하는 것은 우리가 실재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즉 언어를 넘어서서 무엇이 실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실재계는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부정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실재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작용이 결코 문제없이 진행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설명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지점을 그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외부로 벌어지는 실재계의 지점이다. 따라서 실재계는 이데올로기의 취약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3). 영화가 실재계와 관계하는 것은 응시를 통해서이다. 응시는 주체가 대상안에서 만나는 것, 즉 관객이 영화 안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응시는 초기 라캉주의 비평과 후기 라캉주의 비평을 가르는 주요한 축이 된다. 전자에서 본다는 것은 관객의 능동적인 활동에 속한다. 나는 눈을 통하여 보는 것을 나의 통제권 하에 둔다. 반면 후자에서 본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 안에서 만나는 것, 오브제 a로서의 응시이다. 오브제 a라는 대상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시각장의 빈틈(lacuna)을 가리킨다.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아니라, 주체의 전능할 것 같은 시선 내에 있는 틈이다(6). 상상계의 표명이 아니라 실재계의 표명으로서 응시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의 장애를 표시한다.

    초기 라캉주의 영화이론과 후기 이론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접근법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초기 이론에서 이데올로기는 극복하고 저항해야 할 허위의식으로 간주된다. 어두운 관람석에서 스크린에 비춰지는 영상이미지에 몰입하여 상상계의 영역에서 무비판적으로 영화의 내용에 함몰되는 것을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라고 여긴 초기 이론에서는 관객의 매료를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영화는 관객의 매료를 일으키는 것이라기보다 깨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기 이론에서는 의식적인 비판으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식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며, 통제권에 대한 환상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그 작용이 총체적이기 때문에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각장에서 빠진 것을 보지 못한다. 후기 이론은 영화적 경험을 의심하기보다는 이 경험에 보다 더 깊이 빠질 것을 요구한다. 그때 주체는 영화 내에 감춰진 응시를 보다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꿈에 가깝다. 꿈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이끌지 못하고 따라가듯, 영화에서도 우리는 이미지를 따라간다. 깨어있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트라우마를 피하겠지만 꿈에서나 영화에서는 외상적 만남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 외상적 만남이 응시이다. 본다는 것의 통제권을 부숴버리는 것이 응시이다. 초기 이론에서는 영화적 조작과 비판적 거리를 두고 영화 경험을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보는 것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후기 이론에서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부서지는 지점을 인식하는 능력과 관련있다. 영화가 꿈과 같은 환상적 세계로 주체를 이끌 때 주체를 이데올로기 안으로 기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한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힘을 방해하는 외상적 실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고도 볼 수 있다(15).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응시의 외상적 실재를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실재는 이데올로기가 보호하려고 하는 사회 질서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 안정성은 총체성에 대한 착각과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권력에 근거해있다. 실재계는 주체의 시선의 실패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설명력의 실패를 표시한다. 따라서 주체가 외상적 실재를 경험할 때 주체는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상징적 권위의 실패를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이 응시의 정치적 의미이다. 응시와의 만남은 주체가 피하고 싶은 외상적 경험을 안겨주지만, 또한 상징적 권위, 즉 주체의 상징적 정체성을 받쳐주는 대타자자 부재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따라서 대타자의 구속으로부터 주체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16). 외상적 실재와의 만남, 즉 대타자 내의 무의미와의 만남은 주체를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17).

    이상에서 맥고완의 설명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라캉주의 후기 영화이론은 영화와 주체의 관계를 상징계—실재계의 관계틀에서 재설정한다. 상징계는 대타자이며 사회적 질서이며 이데올로기이다. 그 상징계의 틈이 실재계와의 만남으로 간주된다. 실재계와의 만남은 외상적인데, 그것은 대타자의 결핍, 즉 상징계의 무근거와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 즉 상상계와 상징계의 결합으로 나온 정체성이 근거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상징계의 틈, 실재와의 외상적 만남,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영화에서 가장 잘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라캉주의 후기 영화이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표명하는 것은 아닌데,10 이는 맥고완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모든 영화가 실재계와의 만남을 드러내어서 주체의 정체성을 와해시키는 독특한 계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듯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게 하는 주체를 생산하는 영화가 양적으로 더 많다면, 이는 라캉주의 초기 영화이론의 주요 개념인 봉합이 여전히 여기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주체를 양산하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는 봉합의 성공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반면, 봉합의 실패로 우다르가 제시했던 브레송의『당나귀 발타자르』나 데이언이 제시했던 고다르의『동풍』은 후기 라캉영화이론에서 상징계의 틈을 보여주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봉합이 의미 작용을 관장하는 상징계의 논리이고,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만드는 메커니즘이라면, 후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응시는 반(反)봉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도 초기 이론이나 후기 이론이 긍정하는 것은 응시와 반봉합의 반이데올로기적 영화이다. 이데올로기적 영화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후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은 초기 이론과 손을 잡을 수 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지젝의 봉합/인터페이스 이론이다. 그는 키에슬롭스키(Kiešlowski)의 영화를 다룬『실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의 한 장의 제목을 “다시 봉합으로”라고 짓고, 초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의 봉합을 표준 봉합(standard suture)라는 이름으로 재고찰하고 있다. 지젝의 관심은 봉합의 효과를 다시 확인하기보다 봉합의 실패에 있다. 봉합이 실패할 때 드러나는 것이 인터페이스 효과이다. “인터페이스는 표준 봉합 과정보다 더 급진적인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봉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때 인터페이스-스크린 장은 ‘부재자’의 직접적인 대리자로서 개입한다”(52). 다시 말하여 봉합이 ‘부재자 → 누군가(영화 속 인물)’의 전환을 거치면서 관객을 의미있는 서사로 초대한다고 할 때, 인터페이스는 그러한 봉합이 실패하면서 부재자가 그냥 드러날 때의 유령같은 물체의 존재감이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예로 들자면『블루』(Blue)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줄리의 눈을 클로즈업한 쇼트에서, 거의 모든 스크린을 채우고 있는 눈의 내부에 비친 외부의 현실은 그 눈에 비친 반영으로서 유령 같은 외양으로 환원된다. 봉합에서 (누군가의) 역쇼트가 앞의 (부재자의) 쇼트의 기의를 담당한다면, 인터페이스에서는 역쇼트에 유령 같은 차원이 덧붙여짐으로써, “코스모스(조화)가 없다는 것을, 우리의 우주는 그 자체가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정합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인터페이스-인위적 계기가 그것을 봉합해야 함을 (마치 현실을 차단하는 배경막처럼 간극을 채우는 무대 소도구로서)”(53)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봉합과 인터페이스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후자가 전자의 급진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내부의 틈을 메워서 주체를 자족적인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외부 개입을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표준적인, 즉 고전적인 봉합개념과는 다르게 지젝은 “외부 현실이 하나의 정합적인 전체로 보이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요소에 의해 ‘봉합’되어야”하며, 그 지점에서 인터페이스가 발생하는데 이는 “‘외부 현실’ 자체의 정합성을 지탱하기 위한 내부 요소이고, 우리가 보는 것에 현실의 효과를 부여하기 위한 인위적 스크린” (55)이며 이것이 라캉의 오브제 a, 곧 객관적인 외부 현실을 구성하는 주관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봉합은 의미생산의 기표의 논리를 넘어 외부 현실의 정합성을 지탱하기 위한 주관적 요소의 상관물인 인터페이스의 역할까지 범위가 확장된다. 외부 현실의 사물이 아닌 유령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인터페이스는 현실의 정합성을 유지하려는 주체의 노력과 더불어 그 정합성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를 표명하며, 더 나아가 외부 현실이라는 대타자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봉합은 대타자에 근거한 상상계-상징계의 환상/의미와, 실재계의 부재하는 대타자를 이어주는 부실한 동아줄인 것이다.

    10이러한 문제점, 즉 ‘모든’ 영화가 그러할 것이라는 존재론적 설명은 그렇지 않은 예들의 출현으로 ‘이론’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김소연은 후기 라캉주의 영화이론에서 “영화가 ‘실재의 표상’일 가능성”과 “실재가 ‘영화적 표상’이 되는 방식”(75)의 차이점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데, 존재론적인 설명과 방법론적인 설명의 간극에 대한 고민은 이론의 ‘모 아니면 도’라는 총체적 성향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V. 결론

    이상에서 봉합이론을 중심으로 라캉주의 영화비평의 주요의제를 살펴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봉합의 개념은 라캉연구의 흐름에 따라 그 중요도의 변천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거울단계에 대한 라캉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로 라캉의 이론은 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관계에 집중되었고, 이 기간에 정신병 환자의 치료의 종결은 상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후 세미나 XI 이후의 라캉 이론에서는 실재계가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였고, 여기서 치료의 종결, 즉 통과는 주체가 대타자의 결핍을 받아들여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상징계의 논리인 봉합은 그 중요도가 후기에 갈수록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봉합의 의미가 여러 이론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약간씩 각도를 달리하여 변화해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봉합을 최초로 이론화시킨 밀레에서나 그 이론을 영화에 대입했던 우다르에게 봉합은 상징계의 논리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트로피와도 같은 것이었다. 밀레가 자연수 공리에 대한 프레게의 논의를 이용하여 라캉의 상징계의 논리를 입증하려고 한 것이나, 우다르가 비극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미지를 심도 깊은 독해로 전환시킨 브레송의『잔 다르크의 재판』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서, 우리는 봉합에 대한, 상징계에 대한, 영화의 논리에 대한 일종의 열정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봉합을 이데올로기와 결합시킨 보드리나 데이언에 오면 봉합은 초월적 주체 또는 고전적 재현의 주체의 이데올로기를 기입하는 메커니즘으로 정립되며, 이제는 열정이라기보다 비판적 의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경향은 라캉주의 후기 영화이론도 예외가 아니며, 봉합은 주체가 실재의 틈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게 하는 기제로 고착된다.

    마지막으로 봉합에 대한 라캉의 직접적인 언급을 살펴보자면, 봉합에 대한 라캉주의자들의 열정적인 웅변에 비하여 실제로 라캉이 봉합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 라캉은 열한 번 째 세미나의「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The Freudian Unconscious and Ours”)에서 무의식의 특징은 간극인데, 후세대 분석가들이 정형외과의사인 것처럼 분석이론을 심리화하면서 간극을 “봉합하는 데” (in stitching up this gap) [à suturer cette béance](23) 시간을 썼기 때문에 무의식은 스스로 문을 닫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신중을 기해서 그 간극을 다시 열어 보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봉합은 상처를 꿰매는 외과수술의 이미지를 가짐으로써 상처를 은폐하는 것이라는 함축성을 띤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봉합된 상처가 여전히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그 꿰맨 자국이 터진다면, 이는 곧 무의식의 드러남, 실재의 만남이 아닐까? 그렇다면 봉합은 그 자체가 상처를 덮고 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징계의 반창고가 될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즐기는 것은 봉합의 견고함이 아니라 취약성일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힘이 아니라 외설성일 것이다. 봉합은 주체가 상징계 속에서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산과정의 탈중심화된 흔적들을 성공적으로 지우는 환영적이고 자기폐쇄적인 총체성과 정확히 반대되는 위치에 봉합이 있다” (58)는 지젝의 말에 동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봉합은 근거없는 현실의 무근거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그것을 의미의 정합성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언제나 성공하지는 못하는 주체의 슬프고도 부단한 노력을 말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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