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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Language of Presence’ and Perceptual Meaning 소리시―‘존재의 언어’와 지각적 의미
  • 비영리 CC BY-NC
ABSTRACT
‘Language of Presence’ and Perceptual Meaning
KEYWORD
sound poetry , language of presence , articulation , code , perceptual meaning
  • I. 서론―소리시와‘존재의 언어’

    ‘소리시’(sound poetry)라는 용어의 사용은 아직 일관된 양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용어로 지시되는 시적 현상들을 포괄적 개념과 제한적 개념의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포괄적 의미의 소리시는 언어의 물질성 특히 청각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시를 통칭한다. 이 경우 소리시는 비록 청각적 효과에 중점을 두지만 언설적(verbal) 또는 개념적(conceptual) 의 미작용을 허용하거나 때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시에서 청각적 특성은 개념적 측면에서의 교란과 과잉반복을 통해 부각된다.1

    한편, 제한적 의미의 소리시는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다다 시인 발(Hugo Ball)의 정의에 충실한 경우이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장르의 시를 창안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말 없는 시’(poetry without words) 또는‘소리시’ (sound poems)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를 위해서“우리 자신의 용도를 위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내지 않은 (문장들은 물론이고) 단어들의 수용을 포기해야 한다”(Scobie 217 재인용)고 역설한다. 즉 좁은 의미의 소리시란 아예 기존 단어들을 거부함으로써 개념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하게 언어의 청각적 물질성을 추구하는 시다. 본 논문의 논의 대상은 이러한 제한적 의미의 소리시이며, 앞으로 지칭되는 모든‘소리시’는 이를 가리킬 것이다.

    캐롤(Lewis Carroll), 쉬어바르트(Paul Scheerbart), 모르겐스턴(Christian Morgenstern) 등의 예에서 간헐적으로 소리시와 유사한 양상이 앞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소리시는 1910-20년대 퓨쳐리즘과 다다이즘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에 의해 처음 추구되었고, 이후 한동안 거의 잊혀 졌다가 1950년대에 다시 등장하여 최근에는 1980년대에 시작된 언어시(Language Poetry)의 한 양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리시는 기본적으로 퍼포먼스(performance)의 형태를 취한다. 즉 단지 낭송된다기보다는 일종의 극적인(theatrical) 행위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는 소리시가 하나의 사건이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또한 소리시의 쓰인(written) 텍스트는 전통적인 시의 텍스트와 달리 오로지 소리를 내기 위한, 말하자면 음악의 악보에 상응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때때로 소리시는 텍스트를 거부하기도 하며 즉흥적으로 수행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리시는 무엇보다 소리 자체의 특성을 탐구하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실험음악 같은 다른 형태의 예술적 퍼포먼스와 유사한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소리시를 여타의 실험적 예술과 구분 짓는 기준으로 소리시가 (의식적이던 아니던) 여전히 모종의 언어를, 즉 음성을 바탕으로 하며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갖는 언어를 추구한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언어는 영어, 불어, 한국어 같은 일반 언어가 아니라, 에릭슨(Jon Erickson)이‘존재의 언어’(language of presence)라 칭하는 언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언어는 만인에게 공통된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언어이자, “인간의 모든 조직과 기관과 신경에 내재한 존재의 힘을 불러내며, . . 밖으로 발산되어 청자와 결합하는”(280) 주술적(incantatory) 언어다. 즉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은 육체의 직접적인 작용으로서, 이 때의 커뮤니케이션은 순전히 감정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언어시인 맥카프리(Steve McCaffery)는 소리시를 더 이상‘언어’라 칭하지는 않지만‘존재의 언어’개념에 부합하는 특성을 소리시에 부여한다.2 그리고 더 나아가 소리시의 사건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소리시는 육체와의 직접성으로 인해 기호(재현)작용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고, 따라서 의미와 전혀 무관하며 반복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도 소리시는 실체 없는 의미체계( “부재의 형이상학”)에 연루되어 다른 무엇을 재현하는 대신, 그 자신의 물질적 실체인 소리의 사건으로 제시되고 작동하는‘존재의 언어’인 것이다.3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존재의 언어’의 실제적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과연 기호작용과 의미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순수한 육체적 발산이자 반복 불가능한 사건으로 작동하는, 그래서 문화의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통용되는 보편적인 언어가 가능할까? 본 논문의 목적은 소리시의 대표적인 양상들을 초기와 1950년대 이후로 나누어 시학적 차원에서 개괄하고, 맥카프리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지각적(perceptual) 의미와 관련하여 ‘존재의 언어’의 불가능성을 입증함으로써 소리시를 바라보는 보다 적절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1그녀의 시에서 단어들 사이의 개념적 연관들은 논리적 불확실성이나 모순을 일으켜 의미의 일관된 통합을 허용하지 않으며, 단어들 사이에 형성되는 연관은 국지적이지만 다양해진다. 즉 논리적 애매함으로 인해 개념적 연관의 필연성이 그만큼 줄어들고, 동시 에 같거나 유사한 단어들의 과잉반복에 의해 상대적으로 청각적 연관이 두드러지면서 전 체적으로 청각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2그는 소리시를 전언어적(pre-linguistic) 현상으로 간주한다.  3즉‘존재의 언어’의 반대말은‘부재의 언어’(language of absence)다.

    II. 초기의 소리시

    비록‘소리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다다이스트 발이지만, 그보다 앞서 퓨처리즘에서 본격적인 시운동으로서의 소리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탈이아 퓨쳐리즘과 러시아 퓨쳐리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 퓨쳐리스트 마리네티(F. T. Marinetti)도 기존의 단어들을 변형시키고 소리의 효과를 내세우지만, 그의 소위‘자유언어’(Words-in-Freedom)는 엄밀히 말해서 현실을 의성적(onomatopoeic)으로 모방하는 언어에 불과하다. 즉 그의 시는 말하자면 언어가 현실과 맺는 자의적인 재현 관계를 자연적인 재현 관계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언어의 청각적 특성 자체를 추구하는 소리시로 보기는 힘들다.

    한편, 러시아 퓨처리즘 시는‘자움’(Zaum)시라고 불리는데, ‘자움’이란 러시아어‘zaumnyj jazyk’의 줄임말로‘초이성적(transrational) 언어’라는 뜻이다. 즉 자움시는 이성의 사고 작용을 벗어난 언어로 만들어진 시인 것이다. 크루체 니크(Alexei Kruchenykh)와 클레브니코프(Velimir Khlebnikov) 등의 자움 시인들에 의해 서명된 1913년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물리학 용어인‘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지닌 양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예가 힘(force)이다. 따라서“말의 벡터”란 힘으로서의 말의 물리적 특성이며, “그래픽 적이고 음성적인 특징들에 근거한 내용”이란 바로 이러한 물리적-물질적 특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움시는 문자들의 새로운 조합을 바탕으로 새로운 단어를 구성하여, 기존의 문법규칙에 근거한 이성적인 단어(개념)와 논리를 벗어나, 벡터로서의 물질성을 추구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4

    이처럼 (개념적) 의미를 버리고 물질성에 의존하는 언어를 우리는‘추상어’ (abstract language), 그런 언어로 쓰인 시를‘추상시’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때‘추상’은 현실의 사물이나 사태를 모사하는 모방의 기능을 버리고 매체(형태와 색) 자체의 물질적 특성을 추구하는 추상회화(abstract painting)에서 비롯된 것이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종합예술’(Gesamtkunstwerk)에 영향을 받은 발의 소리시 개념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추상회화의 원리를 시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발에 따르면 물질성의 추구를 통해 소리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영역과 접촉하고 영적인 힘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소리시 작업을 마술 또는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칭하며, “우리는 언어의 가장 은밀한 연금술로 돌아가야 하며, 심지어 언어를 버려야 한다. 이로써 시를 위한 가장 신성한 영역을 보존할 수 있다”(Scobie 217 재인용)고 말한다. 다음은 1916년에 처음 수행된 발의 가장 유명한 소리시“gadji beri bimba”의 첫부분이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하는 것은 기존의 특정한 언어가 아니다. 물론 어떤 원시 부족의 언어일 것 같다는 인상을 줄 수는 있다.5 하지만 발 자신이 밝히듯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원시부족의 언어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사제의 읊조림이다. 그 의식적(liturgical) 발언이 (라틴어의 개념적) 의미보다는 소리 자체의 억양과 울림을 통해 성스러운 감정을 자아내는 것처럼, 이 시도 의미와 상관없이 청각적 효과를 통해 마술처럼 청자의 영적인 힘과 가장 은밀한 감정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4물리학 용어인‘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지닌 양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예가 힘(force)이다. 따라서“말의 벡터”란 힘으로서의 말의 물리적 특성이며, “그래픽 적이고 음성적인 특징들에 근거한 내용”이란 바로 이러한 물리적-물질적 특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움시는 문자들의 새로운 조합을 바탕으로 새로운 단어를 구성하여, 기존의 문법규칙에 근거한 이성적인 단어(개념)와 논리를 벗어나, 벡터로서의 물질성을 추구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4  5실제로 짜라(Tristan Tzara)와 같은 일부 다다 시인들은 문명인들의 언어보다 더욱 현실과 밀접한 언어라는 생각으로 원시부족의 언어에 매력을 느끼고 시에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해당 부족에게 그 언어는 엄연한 하나의 개념적 의미체계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III. 1950년대 이후의 소리시

    1950년대 이후 소리시는 새로운 국면을 맞으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녹음기, 증폭기(amplifier)나 악기와 결합되기도 하고 집단적인 퍼포먼스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소리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관례적 언어의 기본 단위인 단어의 범주 자체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그 주된 경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맥카프리는 초기 소리시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초기의 소리시는 기존의 형태에서 변형된 단어, 즉 문자들 또는 음소(phoneme)들의 새로운 결합으로 이루어진 유사단어에 의존하며, 이는 기존의 단어나 어근을 연상시키는 등 의미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새로운 경향의 소리시는 아예 음소로 분절되지 않은또는 음소들의 동시적인 겹침이나 기계적 조작으로 분절이 상실된 탈분절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유사단어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문자로 표기될 수도 없으며, 미리 계획되거나 반복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발의 정의( ‘말 없는 시’)에 더욱 충실한 이러한 경향의 예는 우선 프랑스의 초문자주의(Ultraletter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문자주의는 시의 구성단위를 단어에서 문자로 전환한 1940년대의 문자주의(Letterism)에서 더 나아가, 음소로 분절되지 않은 소리로 시를 구성한다. 예컨대 뒤프렌느(Francois Dufrene)의‘외침-리듬’(cri-rhythmes)은 순수한 육체적 표출로서의 외침이나 앓는 소리(grunt), 울부짖음(howl), 비명(shriek), 쉿 소리(hiss)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에게 시란 의미와 전혀 상관없는, 즉 의미의 흔적도 없는 육체적 에너지의 방출이다. 따라서 맥카프리에 따르면 그의 소리시는“기쁨처럼, 하나의 순수한 감정적 반응으로서의”(Prior 173) 일회적 사건이다.

    또 한 명의 초문자주의 시인 쇼팽(Henri Chopin)은 녹음기를 활용하여 육체의 소리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사실, 이 소리는 분절되지 않은 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조작을 통해 분절성을 손상시킨 소리다. 그는 단어들과 음소들의 분절음을 녹음하고 거기에 다양한 기술적 조작을 가한다. 즉 속도를 늦추거나 빠르게하기, 소리의 단편들을 편집하여 재배치하기, 여러 소리를 겹치게 하기, 증폭기로 소리를 변환시키기 등을 통해 원래 분절된 목소리를 더 이상 분절된 소리로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이로써 인간의 실제 목소리로는 불가능한 음향적 효과 를 낳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녹음기가 단지 기계가 아니라 목소리의 확장이며, 시는 여전히 육체적인 것이고, 더 나아가“시는 다름 아닌 인간의 육체”(McCaffery Prior 173 재인용)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 소리시는 료타르(Jean-Francois Lyotard), 들뢰즈(Gill Dleuze) 등의 육체이론(theories of the body)과 결합하여 미체계에서 벗어난 언어의 사건성과 반복불가능성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역동성과 탈주체성을 주장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개인의 음성이 아닌 집단적 음성의 퍼포먼스 형태를 취하는 소리시다. 집단적 소리시의 음성들의 겹침은 반복 불가능한 일회성과 즉흥성을 더욱 보장하고, 또한 개인적 주체를 초월하게 되어, 소리시의 음성은 말하자면 데리다(Jaques Derrida)가 지적하는 사고의 현존의 지표가 아니라 육체의 현존의 지표가 된다는 것이다.

    맥카프리를 포함한 캐나다 출신의 니콜(bpNichol), 브레토-리베라(Rafael Breto-Rivera), 듀튼(Paul Duton)으로 구성된 네 기수(The Four Horsemen)는 대표적인 집단적 소리시 그룹이다.6 이들은 육체와 시의 직접성을 손상시키고 퍼포먼스의 육체적 생동감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녹음기와 증폭기 등의 전기장치 사용을 거부한다.7 그 대신 발성자 집단의 분절된 목소리와 분절되지 않은 목소리들의 동시적인 교차와 겹침을 통해 즉흥적으로 생성된 탈분절음의 집적을 낳는다. 맥카프리는 이를 들뢰즈의‘집합’(assemblage) 개념과 연관시키며 그 다중성, 과정성, 비결정성을 주장한다. 즉 네 기수의 소리시는, 그 음성들이 기호작용에 따르는 구조(structure)의 필연적 원리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집합’의 다중적이고 비결정적인 관계들 속에서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맥카프리에게 개별적 주체의 사고에서 벗어난 집단적 소리시의 소리는 의미작용을 완전히 배제한 육체적 발산이 된다. 이때 발생하는 것은 오로지 감정적인 에너지의 소진(expenditure)이다.「 피의 시를 위해」“( for a poetry of blood”)라는 네 기수의 선언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소리시는“인간 생리의 확장”으로서 생명력의 기본인 피의 리듬에 따르는 육체적 과정인 것이다.

    6네 기수’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말을 탄 짐승들로 최후심판의 전조다. 그밖에 영국의 집단적 소리시 그룹 Konkrete Canticle, Jgjgjgjg 등이 있다.  7하지만 예외적으로 Nada Canadada라는 작품을 녹음으로 남긴다.

    IV. 지각적 의미

    이처럼 소리시는 의미의 영역을 벗어난 육체적 발산으로서의‘존재의 언어’를 추구한다. 그리고 1950년대 이후의 탈분절음 소리시는 실제로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맥카프리는 탈분절음 소리시를 염두에 두고 소리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또 다른 언어시인 번스틴(Charles Berstein)은 이와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텍스트의 시각적 외관이나 수행되는 작품의 소리 같은 요소들 은 어휘외적(extralexical)일 수는 있어도 의미외적(extrasemantic)이지는 않다”(5). 다시 말해서, 소리시의 소리는 단어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있어도 의미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번스틴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도상적(iconic) 의미다. 그는 언어가 음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소극적인 의미 뿐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서 도상적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가 도상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단어에 의존하는 경우에도) 시는 도상적 특질들을 내세운다는 번스틴의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도상적 의미에 대해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다.

    퍼스(Charles S. Peirce)에 따르면 기호는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도상적 기호는 대상의 특질을 공유하여 유사성을 띠며, 지표적(indexical) 기호는 대상과의 물리적-물질적 관계 속에서 그 결과(effect)로 나타나며, 끝으로 상징적(symbolic) 기호는 대상과 무관하게 관례적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어떤 기호도 어느 정도는 상징적 즉 관례적이라는 것이다. 즉 순수한 도상은 불가능하며 도상적 기호는 관례의 규칙(코드)에 따라 의미를 낳는다. 따라서 도상적 의미 역시 상징적 의미(예컨대, 문법적 음가의 차이에 의한 의미)처럼 유형화되고 재현된 의미다. 사실상‘의미’라는 개념 자체가 재현(기호)과 맞물려 있으며, 제시는 의미작용과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번스틴의 주장들을 수정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즉 소리시는 어휘외적일 수는 있어도 의미외적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언어가 상징적 의미 즉 개념적 의미 외에 도상적 의미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도상적 의미는 특정한 소리에 내재한 신비로운 또는 자연적인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관례에 의해 형성된 재현되는 의미다. 다만 그것은 순전히 관례적인 것이 아니라 소리의 특질들을 공유하는 의미다. 이러한 소리의 특질들은 청각적 즉 일종의 지각적 특질들이며, 따라서 소리시의 도상적 의미를 지각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의미’의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의미란 연속체(continuum)인 현실을 식별 가능한 형식으로 분절하여 코드화한 결과물이다. 분절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추상적으로 유형화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반복 가능한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형화된 형식은 기호(표현)로도 의미(내용)로도 기능할 수 있는데, 코드란 이들 사이에 성립된 상응의 규칙, 엄밀히 말하면 추론적 연상의 규칙이다. 코드는 언어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의식 활동과 관련되며, 지각적 코드에서부터 유행 같은 상품 코드, 예절 같은 행위 코드, 그리고 미적 코드, 이데올로기 코드까지 실로 다양한 양상으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작동한다. 결국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코드들의 총체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언어의 작용에는 개념적-문법적 코드(일반적인 언어코드) 뿐 아니라 지각적 코드도 작동될 수 있다. 사실, 기본적으로 언어는 다른 어떤 기호체계와도 달리 이중 분절되어 있다. 1차 분절은 개념적 의미의 최소단위인 단어로의 분절이고, 2차 분절은 개념적으로 무의미하고 오로지 구문적 기능만 갖는 음소로의 분절이다. 이러한 언어의 개념적-문법적 코드는 하나의 문화에서 작동하는 코드 중 가장 명확하게 규정되고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가장 강한 코드다.8 이는 맥카프리가 지적하는 초기 소리시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 된다. 즉 자움시나 다다 소리시는 비록 기존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분절된 음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음소들을 사용하는 더 강한 코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지각적 코드는 (개념적 코드에 비해 매우 불명확한 코드이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분절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특정한 음성을 개념적 코드에 따라 단어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소리를 지각해야 한다. 즉 그 청각적 자극에 서 특정한 단어의 분절된 형식에 부응하는 음가를 지각해야 한다. 그런데, 예컨대 실험적으로 반복해서 듣는다면, 우리가 그 소리를 어떤 단어-개념에 연관시키는 대신, 마치 음악의 선율을 감상할 때처럼, 적극적으로 그 청각적 특질들 자체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청각적 특질들은 그 자체로 즉 지각적 차 원에서 코드화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음성의 문법적 음가 이외에 보다 적극적으로 높낮이, 길이, 음색 등의 특질들과 관련하여 분절되고 그에 상응하는 의미 즉 지각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각적 특질들이 굳이 분절되고 코드화 되어야 하는 것인가? 감각적 자극은 그냥 자연스럽게 또는 직관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지각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물질 또는 현실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은 뇌에 의해 변환된(translated) 현실이다. 니콜스(Bill Nichols)는 우리의 시각적 지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콜스가 덧붙이듯 이러한 변환 작업은 청각적 지각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된다. 즉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켜서 지각한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란 패턴화된 형태 즉 반복될 수 있는 형태이며, 도상적으로 분절된 형태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그 감각인상을 (유아기부터) 이미 습득한 지각적 코드에 따라서 즉 그 코드의 분절된 형식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불가피하게도 지각작용 자체가 이미 의미작용인 것 이다.

    그런데 지각적 의미는 이처럼 단지 친숙하고 식별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9 그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적 활동과 연관되기도 한다. 예컨대, 붉은색의 농담(shade)은 신호등을 보고 있는 운전자에 게는 무시되지만 화가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운전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녹색, 노란색과 구분되어 식별되는 붉은색의 최소한의 지각적 의미이지만, 화가에게는 보다 세분되고 그만큼 풍부한 지각적 의미, 즉 미적 의미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지각적 코드가 닫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코(Umberto Eco)가 지적하듯, 일반적으로 코드는 아직 코드화되지 않은 영역에 열려있어서, “새로운 정보에 의해 성장할 수 있고, 그 추가적인 데이터는 불완전한 데이터에서 추론될 수 있다”(124). 따라서 지각적 코드 역시 성장을 통해 이전에 의미의 영역 밖에 있던 현상을 의미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미적 현상들은 전통적으로 흔히 분석될 수 없는 영역, 또는 직관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은 예술작품에 사용된 재료의 미세구조(microstructure)를 분석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될 수 없는 직관적 영역이라 여겨지던 것은 사실은 단지 아직 분석되지 않은 즉 아직 지각적 패턴, 미세구조로 분절되지 않은 영역일 뿐인 것이다.

    탈분절음 소리시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즉 탈분절음 소리시는 개념적-문법적으로는 분절되어 있지 않지만 지각적으로는 분절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소리시는 아직 적극적으로(미적으로)는 분절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정보들로 인해 분석되고 분절되어 적극적인 지각적 의미를 부여받을 가능성에 열려있다. 결국, 단어(1차 분절)뿐 아니라 음소(2차 분절)로도 분절이 안 되어 (혹은 분절이 상쇄되어) 개념적 의미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더라도, 지각작용의 대상이 되는 한, 소리시는 최소한 소극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의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 역시 유형화되어 기호와 의미로 작동한다.10 소리시는 감정의 발산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의 발산은 사실상 감정의 표현이며 따라서 재현이다. 예컨대 문화마다 비명소리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여러 가지로 유형화되어 코드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다른 문화의 비명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소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문화의 코드를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리시는 의미작용을 벗어난“직접적인 감정 직면의 시”는 아니며, 따라서 순수한 육체적 과정이자 반복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으로 남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소리시가 반복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으로 남을 수 없다’는 말은, 예컨대, 어떤 소리시가 수행될 때 마다 똑같은 수행의 반복이 된다는 뜻인가? 더욱이, 즉흥적인 소리시 조차도 똑같은 수행으로 반복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든, 각각의 수행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그것들은 그들 자체로는 고유성을 지닌 반복 불가능한 사건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을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지각될 때 (전체적 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반복 가능한 공통된 유형(들)을 통해서만 지각되기 때문이다.11 결론적으로 말해서, 소리시는 소극적으로는 지각과정에서의 필연적인 변환에 의해 의미에 연루되며, 적극적으로는 미적 특질들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거나 또는 갖게 될 가능성에 열려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8코드는 하나의 사회 내에서도 특정한 집단에게만 제한적으로 통용될 수도 있고, 시 간의 흐름에 따라 그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 또한 법조문처럼 명확하게 규정될 수도 있고, 미적 관례처럼 불명확하게 규정될 수도 있다.  9결국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믿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가상적인 세계다. 허구이론에서 는 이러한 내적 모순이 없는 따라서 상식적으로 수용 가능한 가상 세계를‘가능한 세계’ (possible world)라고 부른다.  10퍼스에 의하면, 의미 즉‘해석소’(interpretant)는 기호가 해석자에게 일으키는 효과이며, 그 양상에 따라 감정적인 것, 역동적인 것, 논리적인 것(emotional interpretant, energetic interpretant, logical interpretant)으로 분류된다.  11흔히 필연적으로 일회적이고 유형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즉흥적 수행은 (음 악에서의 즉흥연주처럼) 사실상 이미 유형화된 부분들의 무의식적인 새로운 조합에 불과하다.

    V. 결론―소리시와 의미

    「치아, 손바닥」“( The tooth, the palm”)이라는 글에서 료타르는 아르또(Antonin Artaud)의 극적 퍼포먼스를 에너지 전이(transfer)로 규정한다. 그는 “이가 아프다. 주먹을 움켜쥔다. 내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든다. 리비도의 두 개의 투여. 손바닥의 행위가 치아의 격정을 재현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것이 저것의 기호인가?”(105)라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맥카프리도 탈분절음 소리시에 대하여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할 것이다. 즉 소리시를 구성하는 소리들은 마치 아픈 치아와 손바닥의 경우처럼 기호의 위계질서를 벗어나 서로 독립적이면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우발적인‘집합’을 구성하며, 따라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힘, 감정의 제시, 에너지의 전이라고.

    필자는 소리시가 모종의 생리학적 작용과 연관되어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육체의 생체적 매카니즘과 연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점은 그것이 육체의 영역 또는 물질의 영역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시가 수행될 때, 청자(관객)는 그 소리들을 듣게 된다. 즉 지각하게 된다. 그런데 소리를 지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변환시킨다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는 일회적이고 고유한 소리의 사건은 지각과정에서 반복 가능한 패턴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소리시는 이미 기호와 의미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다. (지각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소리시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현실적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점은, 우선 청자가 그 소리시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코드)을 총 동원하여 식별하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식별은 예컨대‘이것은 전통적인 시의 범주를 벗어난 실험적인 퍼포먼스의 한 예다’라는 개념적 판단을 이끌어 내는 감각경험이고. 그 자체로 소극적이나마 엄연히 하나의 지각적 의미다. 아마도 청자는 그 감각인상의 적극적인 지각적 의미는 파악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 감각인상이 이러한 의미를 용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아직 그에 요구되는 적극적인 지각적 코드가 청자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바닥의 행위가 치아의 격정을 재현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것이 저것의 기호인가?”그렇다. 손바닥의 행위는 아픈 치아의 기호로 작동할 수 있다. 연기와 불의 관계만큼 강하게 코드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 둘을 서로 연관된 것으로 의식하는 한, 그것들 역시 물리적-물질적 관계 속에서 전자가 후자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표적 관계유형의 예로 간주되며, 따라서 전자가 후자의 지표적 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처럼“우리가 의식하게 되는 모든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정리되고,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고, 해석된다”(263-64). 즉 모든 사물과 사건은 의식의 대상이 되는 한(적어도 지각되는 한), 파악 가능한 형식으로 변환되어 어떤 식으로든 (상징적, 도상적, 지표적, 또는 복합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설사 불명확하거나 심지어 오류 또 는 부적절한(invalid)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의미로서 현실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소리시는‘존재의 언어’인가? 소리시는 개념적 의미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수행자의 육체로부터 발산되고, 청자의 육체에 수용될(또는“청자와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소리시도 지각과정을 거치지 않고 청자에게 수용될 수는 없다. 즉 그것은 기호작용과 의미의 개입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소리시를 육체와 직접적이고 의미와 무관한 언어로서의‘존재의 언어’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소리시를, 순수음악의 소리나 추상회화의 색채와 형태가 그러하듯, 매체 자체의 특질들인 다양하고 풍성한 지각적 의미들의 향연으로 봐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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