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적 모티프의 극적 구성

The dramatic structure of cyclical motif-focusing on the movie,

  • cc icon
  • ABSTRACT

    이 글의 목적은 윤회라는 모티프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어떻게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요소들 속에 불교의 시간관을 하나의 양식으로 차용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장르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갈등, 이분법적 이항대립을 전면에 내세우고, 내면적으로 윤회의 원형적 시간의 인식을 토대로 상호작용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서구적 이분화와 동양적 상호작용의 결합으로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서구의 근대적 시간 인식과 동양의 불교적 시간인식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극적구성을 밝히기 위해 먼저 선형적(직선적) 시간 인식 속에 원형적(순환적) 시간 인식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극적인 맥락에서 탐구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논리적 연결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6개의 에피소드는 사건의 진행 과정에 따라 시공간을 파편화한다. 관객의 감정몰입을 방해하는 이 지점에서 상호작용의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윤회의 모티프가 극적으로 구성되어 주제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다음은, 윤회로부터 시작하는 원형적 시간 인식이 어떻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지 살펴본다. 영화 텍스트 속에서 순환적인 상징들을 찾고,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 이분화된 인식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경계를 극복하는 극적구성을 살펴본다.

    결과적으로 장르영화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플롯의 새로운 극적 전개로 근대의 서구적 인식의 대안으로서 원형적 시간을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파멸을 향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스스로 ‘나’라는 ‘자아’의 경계를 극복하면서, 평등한 사랑을 발견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how the motif of reincarnation unveils the subject matter in the movie <Cloud Atlas>. This movie borrows buddhist concept of time as one form from the elements of Hollywood genre film. Superficially, dichotomous binary opposition such as a conflict between good and evil in the genre film comes to the front and the relation of the interaction based on cognition of cyclical time in reincarnation is concentrated inwardly.

    This work, that has exposed the subject by the conjunction of western dichotomy and oriental interaction, is composed of modern time cognition of the West and buddhist time cognition of the Orient.

    First of all, to clarify this dramatic structure, I explore how cyclical time cognition is adapted to linear time cognition in the dramatic context.

    The logical connectivity of a narrative is destroyed intentionally and 6 pieces of episodes become finely fragmented by time and space depending on the progress of the case. At this point where the spectator would not be allowed to emotional immersion, the relation of the interaction reveals dramatically.

    Secondly, I examine how cyclical time cognition starting from reincarnation unveils the subject matter, look up cyclical symbols in the context of this film and then explore the dramatic structure overcoming all boundaries that dichotomous cognition has made in the relation to the interaction.

    Consequently, maintaining properties of genre film, the new dramatic development of plot accepts cyclical time as an alternative for modern western cognition. Thus, in the world where human greed and self-interest lean towards destruction, human being by himself overcomes boundaries of the ego, 'I' and he shows the subject matter finding out equal love. Reincarnation is not a simple repetition but an active self-creation trying to seek out self-affirmation through the process and the relation.

  • KEYWORD

    윤회(輪廻, Samsara) , 근대적 시간 , 선형적 시간 , 원형적 시간 , 연기(緣起)적 관계

  •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영화의 미적가치 분석과 철학과의 소통을 보류하고, 모티프로 작용한 윤회가 극적맥락 속에서 어떻게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1)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장르영화의 내러티브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장르영화가 이야기의 기본 축으로 하는 갈등과 대립에 있어서 선과 악, 이항 대립의 구도, 관객들이 익숙한 장르적 관습 및 약호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플롯은 에피소드의 작은 사건들에 따라 파편화되어 관객의 반응을 늦추게 하고 감정 이입을 방해한다.

    감독 중 한명인 앤디 워쇼스키는 “원작의 윤회사상에 매력을 느꼈고, 윤회 2)와 카르마의 철학을 영화에 전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3)고 말했다. 부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윤회의 모티프는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의 상호작용의 과정과 변화를 통해서 극적구성의 순환적 상징으로 작용한다. 영화적 장치로서 윤회는 근대적 시간 인식의 갈등구조가 지향하는 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상호작용에 의한 관계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윤회의 모티프는 원작에서 보다 훨씬 복잡하고 파편화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선과 악, 이항대립의 스토리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것 보다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실천이다. 6개의 에피소드는 근대 서구의 산업혁명과 과학발전으로 이룬 자본주의 확립과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가 보여주는 위선들을 폭로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서구의 근대적 위선은 인간이 근대적 사유에서 획득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위선적 폭력과 이기적인 탐욕의 야만성을 드러낸다.

    영화의 스토리는 과학과 인간의 위선적 권력과 폭력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위선적 권력과 폭력 앞에서 주인공(들)의 선택과 실천은 갈등을 넘어서고,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에 의한 인간의 평등한 사랑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이것은 윤회의 순환적 상징이 연기(緣起)적 인식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연기적 인식은 곧 연기적 시간의 인식으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불교의 인식론이다. 어떤 것도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고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연기적 개념의 핵심은 의존성이다.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을 일으키는 근대적 인식이 윤회의 순환과 반복, 그리고 연기적 인식의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와 결합하면서 영화의 주제의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이 영화의 편집은 서구의 선형적(직선적) 시간 인식에서 일어나는 서사구조의 배열을 따르지 않는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파편화된 이야기들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장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쇼트와 쇼트의 유기적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의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순환적 상징은 제목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영상과 언어로 정보를 반복적으로 전달하면서 순환적 모티프는 생성, 소멸, 재생과 관련된다.

    이러한 관계를 토대로 가장 중요한 극적 모티프인 윤회는 원형적 시간에 대한 죽음의 긍정이나, 삶과 죽음의 반복적인 극적 구성이 아니라 연기적 관계를 부각시킨다.

    먼저 윤회에 대한 순환적 모티프가 이 작품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리고 선형적(직선적) 시간 인식 속에 원형적(순환적) 시간 인식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극적인 맥락에서 탐구한다. 즉 근대적 시간과 연기적 관계의 결합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주제를 드러내는지 연구한다. 끝으로 윤회의 순환적 상징이 어떻게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1)2012년 앤디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톰 티크베어 감독이 만든 영화. SF, 액션 장르영화. 데이비드 미첼의 동명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1월9일 개봉했다.  2)윤회는 불교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인도를 중심으로 동양의 종교와 철학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고대의 우주와 자연법칙의 순환적 세계관과도 연관된다.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비종교, 피타고라스학파, 스콜라학파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무비워크』와의 인터뷰. 2012년. 12월 27일자.

    2. 본론

       2.1 윤회(輪廻, Samsara)의 순환적 모티프

    ‘윤회’는 감독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의 모티프가 되었다. 감독의 말처럼 ‘윤회’라는 사상을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주제에 부합하는 형식적인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윤회란 “불교 고유의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인 생사관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4) 동방의 정서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고대의 우주와 자연법칙의 순환적 세계관과 연관되고, 영혼의 순환성을 주장하면서 윤회 사상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접근이 있었다.5)

    불교에서는 학파와 경전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인과관계에 따라, 즉 지은 죄의 업(Karman)에 따라 육도6)의 세계 중에 한 곳에 태어나 유한한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생성, 소멸, 재생의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는 원작과 영화의 중요한 극적 구성요소다. 원작에서 윤회는 환생한 인물을 통해서 극히 제한적으로 드러나고, 처음과 끝이 같은 순환적 이야기 구성을 통해서 윤회의 순환성이 플롯의 전개와도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세기 태평양 항해일지로부터 시작하여 대멸망 이후 문명이 사라진 어느 미래를 기점으로 플래쉬백 하여 끊어졌던 이야기가 연결되면서 다시 19세기 이야기로 끝나는 순환적 구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편 영화에서 윤회는 플롯의 전개 뿐 아니라 극적구성에 있어서 시간의 진전이나 극의 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과 순환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주제적 요소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 윤회의 순환성은 작품 전체의 흐름과 관계한다. 이것은 단순히 연상할 수 있는 모티프의 차원이 아니라 윤회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그물망처럼 반복되고 진전된다. 다시 말하면 윤회의 순환적 모티프는 단순히 인물의 환생뿐 아니라 인물과 인물의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와 파편화된 이야기들의 상호작용 관계, 그리고 인물의 존재론적 순환과 반복의 영화적 장치로 주제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내러티브의 비연결성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문학 작품을 영화화 할 때 영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물리적 제약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원작의 인물, 사건, 배경에 대한 재구성이 따른다. 소설과 영화가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서술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리 외에 영화를 이루는 기본요소는 영상(이미지)과 소리(사운드)이다. 즉 글로 표현된 관념성을 시청각적 이미지화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작의 생략과 축소를 통해 영화적 변형이 이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감독의 말처럼 윤회를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윤회의 순환적인 상징이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적 차원이 된다. 원작이 근대로부터 시작하는 과학과 문명의 폭력성과 배타성, 그리고 인간의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면, 영화는 이야기의 파편화를 통해 이러한 폭력성과 배타성, 그리고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진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상호의존적 순환관계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평등한 사랑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파편화된 이야기는 이 영화 속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문명과 야만, 물질과 영혼, 인간과 복제인간, 인간과 신,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자본과 노동 등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호의존적 순환관계만이 대립과 갈등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대안적, 반성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즉 윤회의 순환적 모티프는 영화 갈등의 핵심인 서구 문명의 위선과 야만적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주제적 요소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다. 그리고 파편화된 여섯 개의 이야기가 각각의 장르적 요소7)를 가지고 있지만, 윤회의 순환적 모티프가 상호의존적 순환관계로 연결되면서 관객을 영화의 이야기 속으로 봉합시키지 않는 편집의 새로운 비전과 다르지 않다.

       2.2 근대적 시간과 연기(緣起)적 관계의 결합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순환적 시간관을 하나의 양식으로 차용하고 있다. 순환적 시간관은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와 연결되면서 곧바로 불교의 연기적 시간, 즉 연기적 시간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연기적 관계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시간을 통해서 존재감을 획득한다. 시간의 인식은 변화와 운동, 우리의 기억과 의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관점은 인간 존재와 현상에 대한 문제들을 연구할 때 중요한 철학적 척도를 제시한다.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성찰은 순환적(원형적) 시간 인식과 선형적(직선적) 시간 인식으로 구분한다. 흔히 순환적 시간은 농경사회와 자연적인 시간, 불교적, 동양적 시간관을 연상하고, 선형적 시간은 근대 산업사회와 역사적 시간, 그리스도교적, 서구적 시간관을 연상한다.8) 사실 일상 속에서 우리의 삶의 리듬은 자연의 시간인 순환적 시간과,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직선적인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은 두 시간관을 절대적으로 구분하여 논의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9)이기 때문이다.

    한편, 시간의 척도는 상대적인 것으로 “특정한 사회·역사적 조건의 산물”10)이기도 하다. 근대의 과학적 사고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근대의 시간 인식은 선형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과학 기술발전과 연관되는 “근대의 시간이 시계의 발전과 보급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1) 기계적 분할이 가능했던 근대의 시간은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시계 위에 공간화함으로서 인간을 통제하고 “노동을 강제하는 형식으로 작용을 하게 된다”12).

    근대 이전의 순환적인 삶의 척도가 직선 위에서 분할하고 선분화된 절대적인 기준에 맞추어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준은 점차 우리의 인식 또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계량화 균질화하면서 존재의 내면적 질서로 자연화되었다.

    변화는 산업혁명 이후 더욱 공고화되어 사회적 이분화를 가속화시켰다. 근대 자본주의의 확립과 부르주아 계급의 탄생으로 자연현상뿐 아니라 물질과 노동까지도 선분화된 질서 속에서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근대적 시간 개념 아래서 사회계급이 이분화되고, 권력은 공고화되고,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즉 서구의 근대적 시간은 근대문명의 기술발전과 합리주의, 인간이 획득한 주체적 사유를 바탕으로 존재가치를 더욱 획일적으로 이분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계량화로 모든 가치가 계산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물질적인 현상으로 집중하게 만드는 경향으로 변화시켰다. 이 지점이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근대적 시간 인식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 영화의 스토리 시간13)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일어났던 근대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48년은 유럽에서 일어났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이중혁명이 마무리 되는 지점이다. 즉 다음 해인 1849년부터 혁명의 영향이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의 외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실패로 인하여 사회적 신분 계층제가 유지되었다. 관료제가 지배하는 폐쇄적인 사회구조가 오히려 부르주아들의 귀족화를 가속화시키면서 현대적 자본주의 권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 말 자본주의 경제는 강자와 약자를 대립시키고, 민족주의 확산으로 강자는 약자의 희생위에서 더욱 힘을 팽창하고 세계는 양분화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가 자막으로 제시하는 시대적 배경은 공교롭게도 근현대의 세계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14)

    스토리 시간의 출발인 1949년은 근대의 과학적 사고와 역사적 조건의 산물들로 첨예화되었던 시간이며, 공간은 태평양제도다. 이곳은 서구가 야만으로 치부하며 힘의 논리로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주체와 대상, 영혼과 육체등의 이분법적 근대적 인식은 이 영화에서 백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등으로 대치하고 있다.

    주인공 애덤 스윙은 근대적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지만, 몽매한 자신의 신뢰를 깨닫고 노예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로 한다. 근대적 인식의 위선과 탐욕을 경험하고 난 뒤 선택하는 평등한 사랑에 대한 실천은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에 대한 명증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서구의 근대적 인식은 500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영화의 갈등과 위기, 멸망으로 향하는 출발 지점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적 인식의 출발인 데카르트적 이분법과 기계론적 인식과 다름 아니다. 연속적인 실재 세계를 불연속적으로 구분하고,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직선 위에 분할하여 절대적인 기준을 정함으로서 신의 권력을 밀어 낸 자리에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권력이 자연의 법칙까지 인간의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영화는 6개의 시공간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들)15)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과 순환구조 의 큰 틀 속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더 잘게 파편화되어 내러티브의 논리를 획득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연대기적 내러티브의 흐름을 파편화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연속적인 실재 세계를 분절하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순환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여기서 파멸을 초래하는 인간의 탐욕적인 위선이 가장 비극적인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비셔와 손미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그들의 믿음이 허위임을 깨닫고 진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다.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진실은 분별함이 없는 평등한 사랑이다. 프로비셔가 죽음으로 탄생시킨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도 이런 맥락과 다름 아니다. 즉 극적 맥락에서 보면 6개의 다른 이야기의 조화, 6대륙의 다양함의 조화, 그리고 인간의 인식기관인 6개의 감각기관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다양한 인식의 조화이다. 다양한 차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조화는 평등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6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크리는 그가 믿고 있었던 손미 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고, 몽매한 신뢰로부터 깨어난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인 악마 올드 조지의 비겁한 유혹과 끊임없이 갈등하는 자크리는 비로소 손미 신이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16)

    손미와 혜주가 나누는 사랑은 프로비셔의 1인칭 내레이션 “..소음과 소리는 생각의 차이일 뿐..”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마침내 모든 금기가 깨어지는 순간이다. 인조인간과 순혈인간 사이의 사랑, 백인과 노예의 우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비셔가 식스미스와 함께 도자기를 깨트리는 장면은 주제를 관통한다.17) 산산 조각나는 도자기의 소음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외부의 현상만을 믿고 신뢰한 자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다. 이후 비로소 음악이 완성되고, 손미의 말과 행동은 신화가 되어 반복적으로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프로비셔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손미의 죽음 역시 깨달음의 승화다. 진실과 깨달음의 상징으로서 이들의 죽음은 선형적 시간 인식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 인식, 즉 윤회의 모티프가 연기적 시간과 연결되는 지점인 상호의존적 순환의 관계로 구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이며 평등한 사랑의식의 최종적인 의례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들의 몽매한 앎으로부터의 깨달음은 이중적인 상징을 띠고 있다. ‘안’과 ‘밖’, ‘나’와 ‘타자’를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얻은 자유다. 스스로 닫혀있었던 ‘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고,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있었던 ‘분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다.

    이런 맥락에서 6개의 에피소드가 잘게 파편화되어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은 서구의 근대적 시간 인식으로부터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이원화된 분별과 인간의 탐욕과 폭력을 윤회의 순환과 반복, 더 나아가 연기적 시간인식으로부터 시작하는 연기적 관계의 상호의존적 순환관계로 풀어내고 있다. 즉 선형적 시간 인식의 분절화가 아니고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발전하는 순환적 관계이며, 주체와 대상의 분별이 아니라 상호관계의 작용으로 조화를 이룰 때 평등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윤회가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인들에게 철학적, 권선징악의 윤리적 측면에서 친근하다면, 연기적 시간 인식에서 출발하는 연기적 관계는 불교적 존재론의 인식이다.

    윤회의 원형적 시간은 인간의 삶을 자연 섭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고대의 자연철학에서는 세계 생성의 근원을 물, 불, 흙, 공기로 보았다. 이 네 가지의 결합과 분리를 통해서 세상의 만물은 생성, 소멸을 반복한다. 즉 원형적 시간의 인식은 그 근거를 자연에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죽음도 윤회 전생의 순환적 진행 과정으로 보았다. 원형적 시간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순환성을 기초로 한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순환적 시간과 선형적 시간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시간인식은 순환적 인식과 선형적 인식을 결합하여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연기적 시간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연기적 관계를 통해서 주제의 의미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 단순한 순환과 반복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순환관계를 말한다.

    연기적 관계의 기본은 “모든 존재자는 서로 의존해서 발생한다’”18)는 상호의존적 순환성이다. 인과관계에 의한 반복과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윤회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연기적 관계는 변화의 개념으로 고정된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상호 간에 영향을 주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여 과거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생명현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로, 1차원인(직접원인)인 인(因)과 2차원인(간접원인)인 연(緣)이 결합하여 서로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19)

    잡아함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뜻이다. 어떠한 것도 독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불교적 존재론이다. 이것은 상호관계성 속에서 생사(生死)와 자타(自他)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마찬가지로 존재적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분별하는 마음을 거두고, 문제와 고통이 발생한 현실 자체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실천은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기 변화를 통해서, 즉 과정과 관계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마침내 영화 속 인물들은 몽매한 그들의 믿음으로부터 진실을 깨닫고 이분법적 구분의 분별과 금기로부터 자유와 진실을 선택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갈등과 대립은 서구의 근대적 시간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탐욕과 제국주의적 권력의 폭력성으로 첨예화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영화적 장치로 활용한 윤회의 순환과 반복은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인 연기적 관계와 결합함으로써 주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2.3 순환적 상징과 극적구성

    이 영화에서 순환적 상징은 제목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제목은 그 자체로서 물의 순환성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순환적 상징은 다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강조되고 있으며, 극적 구성의 차원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순환적 상징을 묘사하고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우리말로 하면 ‘구름도감’20)이다. 제목의 상징성은 몰입을 방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영화의 주제적 의미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제목의 순환적 상징은 주제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가지고 있다. 구름은 경계를 두지 않고, 분별하는 마음 없이, 순환하는 물과 같은 것이다.21) 구름은 수증기로부터 생성되고,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선명한 경계를 가지지 않는다. 즉 구름과 물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순환한다. 구름은 경계를 가지지 않고, 물은 어떠한 형태의 그릇에도 그 형태에 맞추어 담길 수 있으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물의 순환성이 순환적인 자연의 본성이듯, 구름도 물도 모두 그냥 흘러갈 뿐이다. 물은 바닷물에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고, 다시 내려와 땅을 적시고, 하천과 강을 적시고, 바다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반복으로 순환한다. 그리고 물은 분자 속에 다양한 성분들을 용해하면서 받아들인다. 제목은 이러한 물의 순환적 상징과 특성들을 영화 전체의 상징적인 의미와 주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편 물과 대척점에 있는 불은 상승의 기운이다. 불은 이 영화에서 주로 화면의 전경에 위치한다. 그러나 불은 감독에 의해 다른 피사체보다 작고 기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첫 쇼트에서 화면의 전경에 불이 있지만 프레임에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윙이 노예문서를 태우는 벽난로의 불처럼 정화와 재생의 기운22)으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결국 불은 물의 상징처럼 그 상징성을 크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물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상승의 기운을 상징하는 불은 주로 분노와 파괴와 관련될 때 후경과 측면에서 그 부피감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에서 불은 영화 속의 근대와 관련되고, 물은 자연적인 순환과 관련된다.

    물과 구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의 흐름과 주제의식을 제시하고 강조한다. 프롤로그에서 첫 쇼트는 주관적 카메라 시점과 1인칭 주인공 보이스 오버와 클로즈업으로 관객을 장면 속으로 깊이 참여시키고 주인공의 정서 체험과 관련시키고자 한다. 이 최초의 깊은 연관성은 플래시백(flash back)으로 내러티브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플래시백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호들23)을 통해서 내러티브의 논리를 방해받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이 과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6개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화되어 전달되는 과정에서 내러티브의 논리를 방해하고, 에피소드의 파편화는 과거에 대한 정보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어 몰입을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플래시백은 그 결말에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또는 사건의 현재 상태를 설명해 줌으로써 ‘자연스러운’ 결말을”24) 맺도록 하는 지연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플래시백의 효과는 프롤로그 이후, 에필로그, 즉 영화의 끝 부분에서 윤회를 거듭한 자크리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밝혀진다. 결과적으로 주관적이고 고백적인 플래시백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이룬 문명의 이기심과 탐욕이 부른 대 멸망의 원인을 폭로한다.

    프롤로그에서 자크리의 말이 끝나면 땅위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 속으로 구름이 투영되어 있다. 그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애덤 어윙)가 바다 쪽(화면의 Y축에서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25) 차츰 땅으로 내려오는 카메라는 전경에 있는 인물보다 후경에 있는 하늘과 바다를 더 크게 잡는다. 즉 프레임 2/3 정도의 크기가 구름이 있는 하늘과 푸른 바다로 채워진다. 하늘, 바다, 대지가 수평을 이루고 양쪽 화면 끝에는 큰 바위 덩이가 수직으로 서 있다. 자연적 요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인간을 한 프레임에 배치하고, 바위 덩이의 무게감은 애덤이 과학을 믿고 의지한 것에 대한 큰 믿음이면서 장애를 상징한다.

    다음으로 연결되는 검은 화면은 간격을 만든다. 간격 속에서 우리의 사고를 멈추거나 또는 유도하는 검은 화면은 그 위로 하얀 수직과 수평의 그래픽 선이 나타나서 자막과 세계지도를 그린다. 그래픽 선으로 그려진 세계지도는 구름으로 디졸브(dissolve)된다. 지도가 구름으로 바뀌는 디졸브는 감독에 의해 근대적 영토 확장과 같은 제국주의적 권력 확장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향한 감독의 주관적 염원으로 볼 수 있다. 영화이론에서는 대체적으로 “두 쇼트 사이의 디졸브는 둘 사이의 더 깊은 연관성을 의미한다”26)고 본다.

    여기서 세계지도는 이중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다. 근대 서구의 착취를 상징하는 지도와 그래픽 선으로 그려진 세계지도가 구름처럼 경계를 가지지 않으며, 순환하는 물의 상징을 반영한다. 즉 <클라우드 아틀라스 6 중주>의 음악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카메라가 점점 하강하면서 하늘과 산, 바다, 그곳에 정박해 있는 배가 보인다. 풍경 쇼트는 노예문서에 봉인되는 클로즈업 쇼트로 연결된다. 프롤로그에서 물의 순환적인 상징은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봉인되는 노예문서로 이어지면서 흐름으로서의 순환이 절대적인 권력으로 감금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구름과 물(바다)은 극의 구성에서 내면의 양심의 소리와 진실을 인식하거나 위기를 벗어날 때 중요한 작용을 하면서 프레임 내에서 인물의 크기 보다 더 지배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유나 939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주장할 때와 자크리가 두려움과 공포로 동생의 남편을 구해내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할 때, 손미와 혜주, 루이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물은 하나의 중요한 피사체로 작용한다. 절대적 권력에 의해 감금된 자연적인 흐름은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필로그에서 봉인된 문서는 불에 탄다. 자신이 믿었던 근대 과학과 주체가 된 인간 이성의 거짓과 탐욕의 실체를 확인하고, 노예 오투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애덤 어윙은 비로소 인간의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를 깨닫는다. 노예폐지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어윙에게 장인은 ‘자네의 행동은 거대한 바다의 한 방울 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실을 깨달은 어윙은 스스로 순환하는 작은 물방울의 길을 선택하고 실천한다. ‘그 물방울들이 모여 거대한 바다가 되죠’라고 말하는 어윙의 대답은 자연의 순환성과 상호의존적인 순환관계에 대한 믿음의 표명이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 구성는 순환적 상징이 훨씬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원작과 영화가 모두 시작과 끝이 같은 원형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원작의 경우 1-2-3-4-5(1권)-6-5-4-3-2-1(2권)으로 연대기적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중단되었던 이야기들은 플래쉬백으로 연결된다. 6개의 이야기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소설 속 화자들에 의해 각장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다음 장의 화자의 이야기 속으로 연결되어 연대기적 내러티브의 논리를 깨트리지 않는다. 여기서 윤회의 순환적 상징은 기시감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원작에서 순환적인 상징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혜성 모양의 모반으로 서로 환생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 구성이 원형적으로 전개되고, 시작과 끝이 있는 근대적 시간 인식의 구조를 닮은 연대기적 내러티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6개의 이야기가 6편의 소설처럼 각 장 마다 다양한 장르와 소재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원작의 스토리와 플롯을 독창적으로 영화화했다.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영화매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제약과 이미지와 소리로 전달하는 영화적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순환적 상징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내러티브의 흐름을 파편화함으로서 기존의 교차편집27)의 연결성과도 차별화된다. 영화의 기본 문법인 편집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유형, 즉 쇼트와 쇼트의 연속과 결합, 쇼트와 쇼트의 불연속과 대조의 방식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두 방식을 응용하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는 원작을 시나리오의 기본 패러다임인 3막 형태의 설정, 대립, 해결의 형태로 정교하게 구성하였다. 6개의 이야기가 기본 패러다임을 유지하면서 세부적으로 사건의 위기와 절정 부분에서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긴장과 서스펜스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쇼트의 연속과 불연속은 파편화된 시퀀스들의 비연결성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스토리 시간을 프롤로그 장면과 에필로그 장면을 중심으로 담화의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목의 자막이 나온 후 주인공이 문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배경이 소개되는 1막의 앞부분 시퀀스에서만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편화된 시퀀스들은 인과적 관계나 심리적 흐름, 인물의 재구성 등을 통한 서사구조의 연속적인 배열과 일부 시퀀스의 내적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콜라주 형식과도 같지 않다. 시퀀스의 파편화는 윤회의 모티프와 물의 순환성이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의 확장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서술적 전후 순서 없이 입체적으로 파편화된 쇼트들의 연결은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큰 축을 지키면서 연결이나 분리도 아니고, 조각이나 콜라주도 아니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사건과 변화의 일정한 방향도 가지지 않는다. 세부적인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부분으로 보았을 때 6개의 이야기는 결코 단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다.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집합체다. 분절되고 선분화된 질서 속에서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집합체로서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나 이야기 될 수 있고, 사유될 수 있는 것이다. 원작에서 19세기로 시작해서 연대기적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최종적으로 환생한 자크리에 의해서 500년의 시간이 어느 날 저녁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된다. 무한히 열려 있는 시간과 사건과 변화에 굳이 방향성을 정하지 않는 것과 다름 아니다. 즉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하나의 집합체의 관계망으로서 상호작용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선형적 시간 인식이 수직적인 관계를 연상하고, 순환적인 시간이 유기적 연결망과 수평적인 관계를 연상한다면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하나의 관계망은 모든 차이를 수용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을 연상하게 한다. 구름처럼 경계를 가지지도 않으며, 분별의 마음도 가지지 않고, 다양한 성분을 용해하면서 물과 구름으로 순환하는 관계망이다. 파편화는 이런 순환의 상징의 연장선상에서 더 이상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스스로 긍정적인 자기변화를 창조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 파편화된 시퀀스들 사이의 간격을 연결해 주는 것은 인류의 문화다. 언어문화와 영상문화는 일기, 편지, 문학, 영화, 방송, 디지털 영상으로 연결되면서 인물의 내적변화와 정서와 연결된다. 이때 영상과 언어가 자주 반복된다.

    자크리가 자신을 포함한 6명의 인물들이 위기를 경험하는 꿈 영상의 파편으로부터 깨어날 때 카메라는 180도로 회전을 한다. 카메라가 순환적인 상징에 직접 참여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감독의 시선이다. 이 파편들이 조각도 아니고 콜라주도 아니며 하나의 관계망 속의 집합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형적 상징이 인물과 사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가장 야만적인 탐욕과 권력은 가까운 미래의 도시 서울에서 일어난다. 반군의 거점 도시가 된 서울은 19세기 혁명의 기운을 옮겨 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페브리컨트 인간의 생성, 소멸, 재생의 순환과 반복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은 19세기 보다 훨씬 비관적이다. 수많은 여성 페브리컨트의 무한한 생성, 소멸, 재생은 인간의 탐욕과 과학발전이 이룬 권력의 폭력성이 가장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현대기술이 완성한 최종적이고 이상적인 복제로서 가장 파멸적 이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과 재생이 반복되며 그 순환은 우리 자신의 복제와 다름 아니다. 무한히 복제됨으로서 생명과 노동의 가치가 부재한다. 그들은 소멸되면서도 단백질 재생을 위한 소모품으로 활용된다. 소모품이 된 생명의 무한한 재생이 근대산업 사회의 이분화와 과학문명의 탐욕으로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지구 종말의 시간으로 이르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순환적인 상징은 극적 구조에 있어서 물질과 탐욕에 대한 인간 욕망의 비극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와 연결되어 파멸적인 탐욕의 대안적 방편으로서 작용하여 주제의식을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손미와 혜주가 보는 단백질 재생공장은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장면이다. 이 장면의 광활한 전경을 익스트림 롱 쇼트(Extrem long shot)로 보여주는 것은 생성, 소멸, 재생의 무한한 반복에 대한 감독의 적극적인 폭로다. 이러한 폭로는 손미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마침내 진실을 알리기 위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순환적인 상징은 물의 순환성을 반영한다. 진실을 알리기 위한 죽음은 물의 순환적 상징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생성, 소멸, 재생의 순환적 상징은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모든 폭력성과 위선의 탐욕을 가장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순환적 상징은 극적 맥락에서 내용뿐 아니라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형식적 측면으로까지 작용하여 극 전체의 흐름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4)허남결, 「업과 윤회 사상의 일상적 수용태도:삶과 죽음의 윤리적 극복 가능성」, 인도철학회, 2009(제 26집), 126쪽.  5)대표적으로는 플라톤의 <공화국 제 10권>에 있는 <에르Er의 신화>에서 인간의 실존을 순환적인 운동 속에 재통합하며 다분히 동방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리고 쇼팬하우어와 니체 등에 의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윤회의 순환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사유는 지속적이다. 한편 서구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윤회의 순환성이 권선징악의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에서도 온전히 불교적인 입장에서 윤회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연기적 관계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불교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6)번뇌와 탐욕 어리석음으로 지은 죄(업)에 따라 윤회하며 머물게 되는 곳으로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가 있다.  7)장르영화는 관객에게 익숙한 기본적인 문법 즉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formula-장르요소 중에서 가장 큰 이야기 단위로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를 말한다. 유형화된 이야기의 기본갈등. convention-‘관습’이라는 뜻으로 두 번째 이야기 단위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구조 또는 사건. iconography-그리스 말로 ‘영상’, ‘닮은꼴’, ‘도상’ 이라는 뜻으로, 위의 두 가지가 내용적인 측면이라면 아이콘은 장르영화에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시각적 단위를 말한다. 이 영화는 6개의 에피소드가 각각의 장르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미스터리, 로맨스, 스릴러, 코미디, SF액션, 판타지. 이 영화의 매력은 이 6개의 장르가 파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파편화된 에피소드들도 각각의 이야기 전개의 과정에서는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원작이 윤회를 다루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구성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8)시간은 예로부터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분야다. 시간에 관한 일반적 표상은 순환적 시간과 직선적 시간으로 나눈다. 시간은 인간의 삶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순환적 시간은 주로 농경사회의 자연관에 기초한 그리스적 · 동양적 표상이고, 비실체론을 주장하는 불교의 시간관은 순환적 시간 표상에 가깝다. 직선적 시간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삶에서 연원하는 시간의 표상이다. 자연적 삶이 아니라 한 번 지나가면 결코 돌아오지 않는 역사적 사건과 인간 구원의 염원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교적 시간은 시작(창조)의 경우와 같이 시간의 종말도 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여 직선적 시간 표상을 따른다. 근대 산업사회 역시 시간이 직선의 선분 위에서 분절화 되고,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직선적인 시간표상을 따른다. 시간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는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서울:문예출판사, 2001, 21~101쪽 참조.  9)소광희, 위의 책, 35쪽.  10)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서울:푸른숲, 2002, 209쪽.  11)위의 책, 194쪽.  12)위의 책, 245쪽. 근대적 시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책, 235-258참조.  13)영화에서 시간성은 영화영상이 현재와 직접화법으로 지금 흐르고 있다는 미완료적 존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시간(카메라 앞에서 촬영하는)과 재현시간에 대한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시간은 영화의 스토리를 연대기적으로 재배열하는 스토리 시간과 개별 사건들을 텍스트 내부에서 구성하는 담론의 시간(플롯), 관객의 수용의 시간으로 나눈다.  14)영화에서 스토리 시간은 1849년(1) 태평양 제도로부터 시작한다. 제국주의의 세계 분할 전쟁인 2차 대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1936년(2), 1차 석유 파동이 시작된 시점으로, 당시 중동지역의 전쟁으로 석유가 정치적 무기로 이용되었고, 원자력발전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았던 1973(3)년으로 이어진다. 19세기와 20세기의 상징적인 시간 정보는 소설의 그것과 다르다.(소설은 오투아가 삼촌을 따라 포경선 견습 선원 생활에서 귀향한 해가 1835년이고 그 후 겪은 일들로 추정했을 때 대략 1840년 초 중반 쯤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각각 1931년과 1975년이다). 그리고 21세기인 2012(4)년과 가까운 미래인 2144(5)년, 대멸망 이후의 어느 행성인 2346(6)년으로 이어진다. 원작에 비해 구체적인 시기를 알려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있지만 스토리 시간은 원작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담론의 시간은 영화적 장치로 모두 파편화된다.  15)1948년의 애덤 어윙, 1936년의 프로비셔, 1973년의 루이자, 2012년의 티모시, 2144년의 손미, 2346년의 자크리는 환생을 거듭한 동일한 영혼이다. 원작에서처럼 그들의 몸에 있는 혜성을 닮은 버스마크(birthmark) 반점이 윤회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16)이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처음으로 손미가 아닌 메로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여기서 손미가 순혈인간과 대조적으로 줄기세포를 이용해 공장에서 대량으로 복제 생산된 페브리컨트라는 사실은 더욱 상징적이다.  17)이 장면은 원작에서는 프로비셔가 식스미스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 등장한다. 도자기로 가득한 방에서 깨지는 도자기들의 소음이 천사가 흐느끼는 청아한 음악소리로 들리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의 편지다.  18)김영진, 『공이란 무엇인가』, 서울:그린비, 2009, 6쪽.  19)앞의 책, 19-20쪽.  20)‘구름도감’ 또는 ‘구름지도’로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6개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달리하고 전개되므로 여러 개의 그림을 담고 있는 도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의미의 맥락에 부합 될 것이다.  21)경계를 두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은 불교적인 사고다. 불교의 핵심은 마음이다. 마음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분별이다. 분별은 의식 내외를 막론하고 ‘나’와 ‘나의 것’에 대한 구분이다. 이러한 자의식을 집착으로 본다. 이것은 실재론적 고집이다. 서구 사상가 중에는 니체가 실재세계는 날조된 것으로 보고 실재를 없애버린다. 비실체론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분별의 마음도 실재하지 않는다. 일체의 집착이나 분별의 마음으로 생기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무아’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22)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불은 프레임 내부의 전체를 지배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23)플래시백은 내러티브의 논리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페이드, 디졸브, 보이스오버 등의 시청각적인 약호들을 사용한다. 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플래시백은 주관적인 진실이자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한다. 더 자세한 설명은 수잔 헤이워드, 『영화사전:이론과 비평』, 서울: 한나래, 1997, 413-422쪽.  24)위의 책, 415쪽.  25)사각의 프레임에서 수평의 X축은 인간의 시각경험에 따라 좌-우는 주로 긍정적인 암시를 하고, 우-좌는 부정적인 암시를 한다. 수직의 축인 Y 축은 남북의 방향으로 움직일 때, 위-아래는 중력의 방향으로서 긍정적이고 쉬운 것이며, 아래-위는 중력의 반대방향으로서 부정적이고 힘든 것이다. 그리고 대각선 방향 역시 X축과 Y축의 기본 암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주로 충돌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암시는 때로는 극적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심도의 축인 Z축은 주로 전경, 중경, 후경을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깊이를 만들어 낸다. 즉 Z축은 프레임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들과 관련된다.  26)벨라 발라즈, 이형식 옮김, 『영화의 이론』, 서울:동문선, 2003, 186쪽. 디졸브는 부드러운 장면 전환기법으로, 앞 장면의 이미지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다른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27)이미지의 긴장감과 서스펜스, 세밀한 심리묘사 등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하는 편집기법으로 동시에 또는 다른 시간대에 일어나는 두 개 이상의 사건과 행위를 병치시키는 편집기법이다. 예를 들면 <메멘토>, <인셉션> 등의 영화에서 사용한 교차편집은 과거와 현재가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 교차편집되거나, 4개의 사건이 단계적으로 꿈속에 진입하는 장면으로 교차편집되면서 의식적 유사성과 다층적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교차편집은 의식적, 심리적, 다층적 사건의 연결이 아니라, 사건을 더 세부적으로 파편화하여 수평선 위에 펼쳐 놓고 있다. 그리고 윤회라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조각난 6개의 이야기가 펼쳐진 수평선은 결과적으로 큰 원형의 틀 속에서 서로 상호의존 작용하는 형태로 밝혀진다. 이 원형은 닫힌 구조가 아니라 나선형 구조의 원처럼 열려 있는 것이다. 한편 1916년 작품인 <인톨러런스>(Intolerance. 감독 그리피스)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차편집과 유사한 점을 찾아볼 수도 있다. 4개의 이야기를 뒤섞은 교차편집이 관념적 연상에 의한 결합(주제적 몽타주)으로, 즉 불연속적인 사건의 결합으로 주제를 부각시킴으로서 당시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관념적 연결을 중심으로 해서 주제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28)각주 16에 스토리 시간의 순서를 숫자로 기입되어 있음. 이 논고 7쪽.

    3. 결론

    영화는 가장 근대적인 서구문명으로부터 태동했다. 과학기술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대부분의 대중영화는 서구적 시간관인 선형적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관객들은 여기에 익숙하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서구 문명의 위선과 탐욕을 폭로하고, 현대과학 기술의 파멸적인 현상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약호들을 사용하면서 연대기적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는다.

    원작의 윤회를 모티프로 차용하면서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극적구성을 선택하고 있다. 윤회의 순환과 반복은 주제적 요소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 윤회의 순환성은 작품 전체의 흐름과 관계한다. 이것은 단순히 연상할 수 있는 모티프의 차원이 아니라 윤회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그물망처럼 반복되고 진전된다.

    그리고 윤회의 순환적 모티프는 연기적 관계와 연결되어 상호의존적 순환관계가 서구 문명의 탐욕과 위선적인 폭력의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구의 근대적 시간 인식과 과학적 사고, 혁명의 영향으로 현대적 자본주의의 권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의 대안으로 동양적인 순환적 시간관과 불교의 연기적 관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영화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원작과 가장 차별화되는 내러티브의 비연결성과 시퀀스의 파편화는 오히려 6개의 이야기를 하나의 집합체로 봄으로써 각각이 단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세부적인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것으로서 단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집합체다. 분절되고 선분화된 질서 속에서 분할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집합체로서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나 이야기 될 수 있고, 사유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순환관계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시간과 사건과 변화는 굳이 방향성을 정하지 않는다.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하나의 집합체로서 관계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편화는 조각도 아니고 콜라주도 아니며 우리가 사유해야 하는 하나의 집합체로서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선형적 시간의 수직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제목의 상징처럼 물의 순환성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물방울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물이 되듯이 어떤 경계도 가지지도 않으며, 분별의 마음도 가지지 않고, 다양한 성분을 용해하면서 물과 구름으로 순환하는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이 영화는 평등한 사랑만이 현대 과학의 폭력성과 탐욕으로부터 진실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할리우드는 이미 1980년대 이후부터 스토리의 고갈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동양의 전설과 역사, 신화 등의 문화들에 관심을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동양적인 사유와 인식에 관심이 많은 앤디 워쇼스키와 라나 워쇼스키 감독이 만든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어떤 방식으로 윤회를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윤회가 단순한 모티프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순환 관계로 연결시키는 지점에서 동양적인 방편이 서구적 인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주제의식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새 시대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윤회의 모티프가 어떻게 이 영화에서 주제의식으로 연결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에만 집중되었음을 밝히며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미학적, 철학적 논의들과 텍스트 읽기는 다음 연구 과제로 남겨 놓기로 한다. 시간에 관한 보다 심도 있는 철학적 고찰, 즉 고대 자연철학에서부터 쇼팬하우어와 니체, 현대의 들뢰즈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철학적 논의와 보다 깊은 불교적 관점에서 영화 읽기, 영화 편집의 미학적 고찰, 문학과 영화의 서술 체계의 변별성 등에 관한 연구는 후속 연구로 남겨 놓기로 한다.

  • 1. 김 범연 1988 ?기독교적 시간관, 영속으로서의 시간? [『광장』] google
  • 2. 김 영진 2009 『공이란 무엇인가』 google
  • 3. 서 정남 2004 『영화 서사학』 google
  • 4. 소 광희 2001 『시간의 철학적 성찰』 google
  • 5. 이 기영 1988 ?공으로서의 시간, 불교적 시간관? [『광장』] google
  • 6. 이 종철 1999 불교의 시간관』 [『계간 사회비평』] google
  • 7. 이 지훈 2008 『존재의 미학』 google
  • 8. 이 진경 2002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google
  • 9. 오 현숙 2007 ?들뢰즈와 불교의 시간론? google
  • 10. 조 용길 2007 『불교의 존재론 : 시간론·공간론』 google
  • 11. 학 담 2003 『소외와해탈의 연기법』 google
  • 12. 미첼 데이비드, 송 은주 2010 『클라우드 아틀라스』 google
  • 13. 발라즈 벨라, 이 형식 2003 『영화의 이론』 google
  • 14. 보드리야르 장, 배 영달 2002 『토탈 스크린』 google
  • 15. 스피겔 엘렌, 박 유희, 김 종수 2005 『소설과 카메라의 눈』 google
  • 16. 아미엘 뱅상, 광 동준, 한 지선 2009 『몽타주의 미학』 google
  • 17. 오몽 자크, 이 용주 『영화미학』 google
  • 18. 헤이워드 수잔, 이 영기 1997 『영화사전:이론과 비평』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