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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미야자키 하야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난 ‘자기실현’ 과정* Selbstverwirklichung in Die bewegende Burg Hawuls von Miyazaki Hayao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미야자키 하야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난 ‘자기실현’ 과정*

Miyazaki Hayao verwendet und variiert verschiedene Mythen in Die bewegende Burg Hawuls. Dadurch werden phantastische Figuren entstanden, z.B. Hawul, Kab, Kelschifer, Hin, etc. Im Zentum des Films steht ein Mädchen Sophie, das fleißig arbeitet aber von Persona unterdückt wird. Am Anfang scheint sie passiv und ein bißchen depressiv zu sein. Aber sie fängt langsam an, ihre Situation zu ändern. Sie will wissen, wie sie wirklich leben will. Im Weg zur Schokoladenladen, wo ihre Schwester arbeitet, trift sie zufällig den Zauberer Hawul. Sie fliegen zusammen mit Hilfe von der Zauberkraft Hawuls. Demzufolge geriet sie in die Krise durch die Verflucht der Hexe in der Wüste. Sophie wird plötzlich zur 90jährigen alten Frau.

Sie steht aber ihre Krise gegenüber und geht ihren Weg fort, um Selbst zu finden. Im Film liegt der Schwerpunkt auf den Prozeß ihrer Selbstverwirklichung. Nach Jung gibt es das Selbst im Zentrum des Unbewußtseins. Am wichtigsten des jedes Leben des Individuums ist gerade das Selbstwerden. Jung bezechnet es als Selbstverwirklichung bzw. Individuation. Der Film zeigt sich, wie Sophie ihres Selbst verwirklichen. Dazu trägt Hawul als Animus bei. Er regt ihre Taferkeit an. Kabe und Hin helfen ihr mit. Durch diesen Prozeß befreit sie sich von ihrem Persona und erreicht das Selbst. Sie kann endlich ihr Selbst und ihr Gemeinschaft́—Hawul, Kelschifer, Mark, die Hexe und Hin- wirklich lieben und dadurch gerettet werden.

KEYWORD
미야자키 하야오 ,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자기실현 , 아니무스 , 대극의 합일 , 칼 구스타브 융
  • 1. 머리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다양한 신화적 원형이 중첩되고 변주되어 드러난다. 그러한 원형들은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어 관객의 보편적 심상을 자극한다.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기는 형벌을 신으로 받은 신화는 하울에게 변주되어 드러난다. 영웅이 신탁에 의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길을 떠나 험난한 여정을 거쳐 귀환하 는 과정은 소피를 통해 변주되어 드러난다. 영화의 처음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무표정하 모자를 만들고 있던 소피라는 소녀는 영화의 끝에 생명과 사랑의 힘으로 주변을 구원하는 역동적 존재로 변화해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전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러한 변화가 가능했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다양한 신화를 인용하여 변주하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신화의 원형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융의 분석심리학의 논의를 겹쳐 읽으면 풍요로운 의미들이 도출된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 소피의 ‘자기실현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영화를 받치고 있는 원형적 틀과 그것의 맥락을 밝혀낼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관객의 호응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에 대한 연구도 원작의 변용 측면1)에서, 서사전략의 특징의 측면2)에서 그리고 기호학적인 분석3)과 생태학적 분석4)까지 상이한 각도에서 이루어져 왔다. 임찬은 여성상을 탐구하면서도 원형과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관점을 첨가하였다.5) 그의 흥미로운 착안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본격적인 분석심리학적 연구로 보기에는 충분치 않은 부분이 많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융의 분석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적용하여,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주인공의 ‘자기실현’ 과정을 천착하려한다. ‘자기실현’은 융 이론의 핵심개념 중의 하나이다. 융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본래 ‘자기’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융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한다.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의식세계에서 ‘나’라고 인식하는 것을 ‘자아’라고 하고, 의식세계 밑의 무의식의 핵심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전체정신으로서 ‘자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면 그것이 자기가 되는데 그러한 진정한 자기가 되는 과정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 혹은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이라 일컫는다. 이부영은 “인식이란 지적인 인식일 뿐 아니라 감정적인 통찰이라는 점에서 의식화는 우리말의 ‘깨달음’에 가까운 뜻”7)이라고 해석한다.

    융의 수제자로서 융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킨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는 「개성화과정」8)이란 글에서 융의 방대한 자기실현에 대한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글에서는 융과 프란츠 그리고 우리나라의 분석심리학자인 이부영9)과 이유경의 논의10)를 바탕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의 자기실현과정과 하울의 성의 사회적 맥락을 천착하고자 한다.

    1)안영순, 「다이애나 존스 소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미야자키 하야오식 변용」, 『외국문학연구』, 제23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06.  2)박기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다성적 서사의 과잉과 결핍」, 『인문콘텐츠』, 제23호, 인문콘텐츠학회, 2011.  3)김경애, 「애니메이션에 표현된 공간적 서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몬스터 주식회사를 중심으로」, 『디지털 디자인학 연구』, 제16권, 한국디지털디자인학회, 2007. 한혜원, 「일본 애니매이션 피규어의 기호학적 의미 연구」, 『인문콘텐츠』, 제17집, 인문콘텐츠학회, 2010.  4)진은경, 「미야지키 하야오의 영화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비교문학연구』, 제39집, 한국비교문학회, 2006.  5)임찬, 「애니메이션<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난 여성상의 고찰」, 『디자인학연구』, 제64호, 한국디자인학회, 2006.  6)칼 구스타브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역, 『인격과 전이. 융 기본 저작집 3』, 솔, 75쪽.  7)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2003(2002), 96쪽.  8)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개성화 과정」, 『인간과 상징』(칼 구스타브 융 편, 이부영 외 역, 집문당, 2013(1983)).  9)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2003(2002).  10)이유경, 『원형과 신화』, 분석심리학연구소, 2008.

    2. 소피의 ‘자기실현’ 과정

       2.1. 위기: 페르소나의 균열과 그림자 인식

    가) 막다른 골목: 페르소나의 인식과 아니무스와의 조우

    영화가 시작되면 서걱서걱 철커덕 거리는 하울의 성의 움직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안개 속에서 그 기괴한 성체가 설산을 배경으로 한 황야에 드러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 그 성은 온갖 고철들이 무질서하게 붙어 있고 거대한 새의 발을 하고 꼬리가 달렸으며 귀가 있다. 이렇게 하울의 성은 생물과 고철덩이가 결합되어 있으며, 에너지원은 증기기관이다.

    거기에 검은 연기로 화면을 압도하는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면 기찻길 옆에 작은 창이 조명된다. 그리고 이내 푸른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무표정하게 모자를 만들고 있는 그 창이 있는 방이 줌–인된다. 그 방은 넓은 방 안의 또 하나의 작은 방이다. 작은 방에 고립되어 일에 열중하고 있는 그 소녀를 넓은 방의 여인들은 소피라 부른다. 넓은 방의 여인들은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파티에 가려 준비 중이다. 그들과는 다르게 소피는 파티에는 흥미가 없다. 그저 남은 일이나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이 두 방의 분위기의 대조는 소피가 자의든 타의든 이미 주변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고독한 (버림 받은)존재임을 드러낸다. 다른 여인들이 파티에 가버리고 난 후 모자 만들기를 마무리한 소피는 한숨을 쉬고 치마를 털고 일어선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하고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피에게는 흥미도 생기도 없고 어쩌면 내면 깊숙이 “지독한 권태”11)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외출을 하려 모자를 쓴다. 거울에 마주하여 무표정했던 얼굴을 애교 있는 표정으로 바꾸었다가 얼른 모자를 눌러 쓰며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다. 이 두 개의 표정의 간극에서 소피의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은 자연스런 감정을 억누른 결과임이 드러난다. 그녀는 모자가게를 나와 광장으로 향한다. 증기기관의 다양한 차들이 거리와 광장을 누비고 소피는 파란 버스를 타고 간다. 바깥에는 일상과 어수선한 또 다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행렬에 환호하는 소리는 예사로운 상황이 아님을 나타낸다. 거리에는 도처에 병사들이 있다. 소피는 주소를 들고 골목을 통해 어디론가 찾아가다 병사들에 의해 앞이 가로 막힌다. 그들의 장난기 섞인 희롱에 그녀는 길을 비켜달라고 저항한다. 이때 미소년의 하울이 등장해 그 병사들을 쫓아버림으로써 소피와 하울의 조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울이 쫓기는 중이었기 때문에 소피도 함께 고무인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골목을 끈적하게 막으며 다가오는 고무인간들에게 쫓기다 이 둘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이 막다른 골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검은 매연이 창을 가득 메우는 소피의 방은 어쩌면 그녀에게 막다른 골목일지도 모른다. 하울은 어딜 가나 쫓아다니는 고무인간들로 형상화된 황야의 마녀와 셜리먼 선생의 추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와 있을 것이다. 이 둘이 만나 아주 환상적인 순간을 마련한다. 더 이상 어디로도 갈수 없는 골목 끝에서 그들은 비상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을 연출한다. 하울과 소피는 비상하여 ‘인생은 회전목마’라는 주제곡에 맞춰 아름다운 공중산책을 한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소피도 하울의 격려에 힘입어 호흡을 맞춰 공중산책을 성공적으로 한다. 이것은 소피와 하울의 첫 번째 공중산책이지만, 영화에서는 몇 번 반복되면서 소피의 성장의 비약과 이 둘 관계의 심화를 형상화한다. 결국 하울과 소피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인생의 위기에서 주저앉거나 잠식당하지 않고 오히려 비약의 계기로 삼을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소피는 비상한 상태에서 동생 레티를 찾아가는 것이다. 레티는 화려한 용모와 친절한 성격으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이다. 초콜렛 가게에서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호응하는 남성들을 보면 고립되어 있는 소피와는 대조된 모습이다. 레티의 밝은 성격, 의상과 표정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방식은 만개한 하나의 꽃을 보는 듯하다. 가게를 떠나기 전 거울을 향해 잠시 지었다가 눌러버렸던 애교 있는 소피의 표정이 레티에게는 활짝 피어 실현되고 있다.

    융은 페르소나를 “개별적 의식과 사회 사이의 하나의 복잡한 관계 체계이며, 일종의 가면”으로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인상을 주기 위해 궁리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참된 본성을 가리기 위해 궁리된 것”12)이라 규정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와 시선에 맞춘 모습 즉 가면과 같은 것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실현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페르소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상像들의 암시적 강제력의 그룻된 굴레에서 자기Selbst를 해방시키는 것”13)이라 언급한다. 자아를 집단정신의 한 단면인 페르소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면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무의식은 전체가 되고자하는 자율적 조정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을 자극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페르소나와 아니마 사이에는 보상적 관계가 존재”14)한다고 한다.

    이러한 융의 분석을 바탕으로 소피가 레티를 찾아가는 행위를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피는 왜 레티를 찾아갔을까. 소피가 레티와 헤어지며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하려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사실은 소피도 레티처럼 사랑 받으며 살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말, “언니가 할 일은 언니가 정해야 해!”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아버지가 아끼던 가게이고 나는 장녀”니까 모자가게를 계속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마음 속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에 귀기울이려는 것이다. 페르소나에 묻어 버린 마음 속의 소리를 들으려 시도하는, 즉 무의식과의 대면을 소피는 레티를 찾아가는 행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확인하고 자신의 할 일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레티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피는 가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장녀로서의 페르소나로부터 거리를 갖기 시작한 셈이다. 또 하나 괄목할만한 점은 레티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소피가 하울을 처음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길목을 방해하는 군인으로부터 소피를 보호하기 위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나는 하울은 무의식의 핵심 즉 ‘자기’에서 보내는 아니무스라는 전령임에 다름 아니다.

    하울도 이중의 쫓기는 도망자로서 막다른 골목에서 소피를 만나 함께 비상을 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하울은 소피의 페르소나의 이면에 있는 보상적 존재 즉 아니무스이며, 소피는 하울의 아니마인 셈이다. 아니무스는 여성 속에 잠재해 있는 남성성이고, 아니마는 남성 속에 잠재해있는 여성성이며 이 둘은 다양한 양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영향을 미친다.15) 하울과 소피의 첫 번째 공중산책은 본격화될 자기실현과정의 시발점을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놓여 있는 사회적인 맥락은 전쟁이 발발하여 혼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소피와 하울은 내부적으로만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놓인 사회도 비상상황임이 전제된다. 영화는 소피의 시각과 소피에 관한 시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환상적 존재인 하울보다는 관객과 비슷한 수준인 평범한 한 인간을 전면에 내세운다. 따라서 소피의 자기실현과정에 관객이 차츰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나) 마녀의 저주: 그림자 인식

    소피가 페르소나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순간적으로 아니무스와의 조우를 경험함으로써 무의식과 대면하기 시작하자, 더욱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 둘의 만남을 시기하는 황야의 마녀가 나타나 소피에게 저주를 건다. 소피의 모자가게에 등장한 거대한 체구의 마녀가 날아서 소피를 압도하는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융의 수제자인 프란츠는 “자기와의 첫 번째 대면은 마치 그것이 앞질러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 같고 또는 ‘내부의 친구’는 처음에는 마치 그가 함정에 빠져 절망 적으로 버둥대는 자아를 잡으러 오는 사냥꾼 같기도 하다”16)고 한다. 마녀는 소피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냥꾼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소피에게 노파가 되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소피에게 걸린 이 저주는 그녀가 이제 하울을 찾아 떠나야 하는 ‘소명’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농염한 웃음을 흘리며 던지는 마녀의 언급, “하울한테 안부 전해줘”는 소피에게 하울을 찾아 떠나라는 자극에 다름 아니다. 프란츠도 “개성화의 실제과정–자기 자신의 내적 중심(정신의 핵) 또는 자기와의 의식적 대화-은 보통 인격의 상처와 그에 따르는 고통과 함께 시작한다. 이 첫 번째 충격은 마침내 일종의 ‘소명’이 된다”17)고 언급한다. 즉 황야의 마녀는 소피의 페르소나가 균열된 틈을 비집고 나오는 소피 자신의 그림자 인식인 것이다. 소피와는 전혀 상극인 것처럼 보이는 거칠고 성적 욕망으로 넘치는 마녀의 모습은 어쩌면 소피가 깊숙이 눌러버린 검은 욕망들이며 충동에 다름 아닐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러한 그림자 속에도 생명력과 창조력이 함께 있음을 간파한다. 그리하여 누르거나 제거해야할 것이 아니라 그림자의 양면성을 포괄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힘이 형성된다고 본다. 그림자의 엄습은 소피를 한 순간에 파파 할멈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골방에 앉아서 페르소나에 갇혀 아무런 활력 없이 살아가는 소피의 진면목이 바로 아흔 살의 할머니와 다름없을 것이다. 할머니가 된 소피가 거울을 바라보며 느끼는 경악은, 무의식이 의식화되기 시작하면서 자신과 직면하게 된 소피의 자기 인식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그림자 인식에 의해 자기와 직면한 소피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일 계기를 확보하게 된다.

       2.2. 길 떠남

    신화에서 영웅들은 대부분 버려지고 비상한 위기 상황에 봉착하여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바리공주, 유리왕, 테세우스, 푸시케 등등 뿐 아니라 부처와 예수까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우리는 소피의 길 떠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할머니가 된 소피는 경악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워하긴 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침착해야 돼!”, “당황하면 문제 를 해결할 수 없어~!”라고 타이르며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 거울을 바라보며 “걱정 말아요, 할머니. 아직 건강해 보이고…… 옷도 잘 어울”린다고 자신을 격려하고 길을 떠난다. 그 길이 험난함은 바람 부는 거친 황야를 늙은 몸으로 고통스럽게 올라가는 소피의 행동으로 형상화한다.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소피는 그로부터 회피하거나 좌절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나는 것이다. 프란츠도 개인의 생애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위기에서 효과가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편견 없이 전적으로 순진하게 직접 대면하여 그 숨은 목적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시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가 온갖 고통스러운 진실을 감수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시작해야할 시점이라고 한다.18) 그리하여 소피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순전히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향한 무의식으로의 탐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2.3. 정화작업과 상처의 직시

    험난한 여정 초입에서 소피는 순무머리 카브라는 조력자를 만난다. 바람 부는 황야의 언덕에서 싸온 빵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하던 소피는 수풀 속에 박혀 있는 막대기를 발견한다. 이 발견의 순간을 히사이시 조는 경쾌한 팡빠래 같은 음악으로 받쳐준다. 소피가 지팡이를 하려 힘들게 막대기를 수풀 속에서 빼내자 그것은 허수아비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던 것임이 드러난다. 소피와 첫 번째 조력자 순무머리 카브와의 조우가 이렇게 경쾌하게 형상화된다. 그의 도움으로 소피는 하울의 성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마녀의 저주로 하울을 찾아 떠난 소피는 이제 그의 근거지인 성에 도착하여 성의 동력인 캘시퍼라는 불 앞에 마주한다. 하울한테 안부 전하라는 마녀의 명령은 소피의 소명 자체인 것이다. 하울을 만나려면 그의 성에 가야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피에게 하울의 성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향한 여행에서 자기가 있는 근거지인 것이고 그곳에의 도착은 자기실현의 초기단계인 셈이다. 그러나 소피는 하울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이 단계에서는 하울의 심장을 담지하고 있는 캘시퍼라는 불의 정령이 무슨 존재인지 소피는 알 길이 없다. 단지 무질서하고 오염되어 있는 성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심리학적 헤라클레스의 첫 번째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즉 수 백 마리의 소들이 수십 년 동안 똥을 싸 온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하루에 깨끗이 치우는 작업19)처럼 정화를 해야 하는 단계인 것이다. 캘시퍼가 성의 동력을 마련하느라 남겨 놓은 벽난로의 수북한 재와 성안 구석 구석에 쳐진 거미줄과 생쥐들 쓰레기와 먼지를 깨끗이 물로 닦아내고 더러운 그릇들을 닦고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쌓여 있는 빨래를 말끔히 빤다. 여기서 소피가 사용하는 ‘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울과 캘시퍼가 불로써 동력을 마련하고 외부세계와 싸우는 것에 반해, 소피는 물로 정화시킨다는 점이다. 여성성의 상징인 물과 남성성의 상징인 불은 이들이 바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상징임을 명시하는 것이고, 이 둘의 만남은 조화를 상징하게 된다.

    소피가 하울의 성에 도착하여 하는 이 정화작업은 바로 ‘자기’의 근거지에 도착하여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는 작업인 것이다. 여기에 카브와 마르크르의 협동도 괄목할 만하다. 이들의 협동은 앞으로도 지속되는 작업으로 소피가 자기에 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적인 아니무스는 하울이지만, ‘자기’ 는 자신을 알리고 자아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 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중에 카브와 마르크르가 속하고 나중에는 힌이 여기에 합세한다.

    소피가 성의 내부를 정화시키는 동안 하울의 성이 별의 호수에 정박하게 된다. 깨끗이 정화된 빨래를 카브와 마르크르는 즐겁게 햇빛에 내다널고, 호숫가에서 차를 마시며 소피는 절대 평화를 느낀다. 설산을 바라보며 발밑까지 맑은 물이 찰랑이는 호숫가에서 “이렇게 까지 마음이 평온해진 건 처음”이라고 고백한다. 여성은 “자연의 체계와 함께 흐른다”20)는 에리얼 샐러의 언급처럼, 샘물 같은 소피가 물로써 자신과 주변을 정화하고 물가에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평정의 순간이다. 이제 소피는 맑고 평정한 물 속에서 자기를 향한 발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21) 히사이시 조가 이때 흐르는 음악을 “조용한 상념”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이제 소피는 자신과 주변을 정화하고 명정한 상태에서 자기와 대면하는 명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정은 순간이다. 그 정화작업을 통해 다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페르소나를 깨는 아픔으로 전환된다. 소피의 청소로 나름의 무질서 속에 균형을 잡고 있던 욕실소품들이 하울의 시각으로는 혼돈스럽게 된 것이다. 소피의 정화작업이 결과적으로 하울의 휘황한 변장술을 방해한다. 염색을 의도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지는 하울의 모습은 관객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초록 젤이 되어 녹아내리는 하울의 모습은 심리적 상태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아름답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하울의 절규에 예민한 공명을 하는 소피도 의미심장하다. “난 지금까지, 예뻤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라며 성 밖으로 뛰쳐나가 할머니가 되는 저주를 받고도 울지 않던 소피가 빗속에서 드디어 오열을 한다. 하울의 말은 소피의 가장 아픈 상처를 자극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할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성성의 상실을 의미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가장 깊숙한 열망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울의 자극은 결국 소피의 상처를 드러내게 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 그 상처를 직시하며 빗속에서 마음껏 슬픔을 토해내는 것은 소피가 이제 내면적인 정화를 시작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카브가 우산을 펼쳐 들고 등장하여 울고 있는 소피를 가만히 위로한다. 빗속에서 오열하는 소피가 등뼈가 굽은 할머니가 아니라 꼿꼿한 모습으로 형상화됨으로써 상처를 직시하고 드러냄을 통해 그 상처가 차츰 승화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성 안으로 다시 들어온 소피가 거의 다 녹아내릴 것 같은 하울을 용감히 들쳐 업고 계단을 올라 욕실을 향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목욕하다 뛰어내려온 하울에게 걸쳐 있던 단 하나의 옷인 팬티가 벗겨져 내려가 알몸이 되어 버린다. 빗속에서 그 물로 정화되고 심리적 상처를 직시하게 된 소피처럼, 하울도 모든 허물을 벗어버리고 목욕을 통해 깨끗이 정화된다. 그리고는 그동안 자신을 감추고 있던 모든 이름들과 치장 그리고 방을 가득 메우는 많은 장치들은 결국 셜리먼과 황야의 마녀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은 사실 “겁쟁이”임을 고백한다.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진면목을 드러내는 하울에게 소피는 깊이 공명한다. 하울의 모습은 아버지에 의해 씌어진 사명에 억눌려 그 속에 할머니처럼 도피해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울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울에게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독려한다.

    “하울처럼”이라는 지문이 명시하듯 소피는 이 순간 마치 빙의가 된 듯, 하울에게 온전히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하울에게 국왕의 법의 근원을 따지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독려하는 소피는 스스로도 ‘아버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순전히 자기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하울을 대신해 국왕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하울이 그녀를 위해 마법으로 옷을 마련해주지만, 자신의 옷과 모자를 그대로 쓰고 당당히 성을 나선다. 이는 자신을 감출 어떤 가면도 거부하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2.4. 아니무스의 의식화와 ‘자기’에 이르는 길

    가) 아니무스의 의식화

    국왕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성을 나서는 소피에게 하울은 자신의 반지를 끼워 준다. 반지란 남과 여의 결속을 상징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셉 앤더슨은 “결혼이란 주제는 아주 보편적인 것인 만큼 이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혼이 실제로 한 명의 아내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여성적인 요소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상징적으로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며, 이는 심지어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3)고 언급하고 있다. 이 논의를 긍정한다면, 하울이 소피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행위 즉 결속을 통해 하울은 마음속에 있는 여성성을, 소피는 자신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고 발견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반지 안의 ‘보석’은 소피가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방향을 상실했을 때 하나의 지남력(Orientation)24)으로 작용한다. 프란츠는 새로운 영적인 지남력으로서 자기의 화신을 “현자의 돌”에 비유하였는데, 자기의 사자인 하울이 준 반지 속의 보석은 소피에게 중요한 순간에 방향을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 소피는 자신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발견하여 의식화하여 자기를 향한 여정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펜드라곤의 어머니로 국왕을 만나기 위해 왕궁을 걸어갈 때 소피는 황야의 마녀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마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건 저주를 풀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마녀가 자신은 저주는 걸 수 있지만 풀 수는 없다고 하자 공부나 더 하라고 야유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닌다. 영화의 처음에 마녀에게 압도당해 두려움에 떨던 소피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그 동안의 변화가 뚜렷해지는 장면이다. 이는 그녀가 자기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길에서 자신 안의 아니무스를 의식화한 결과인 것이다.

    그 옆을 동행하는 ‘힌’이라는 늙은 개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피는 그 개가 하울의 변신인 줄 알고, 왕궁의 높은 계단을 오를 때 그 개가 계단을 오르지 못하자 끌어안고 힘겹게 그러나 끝까지 올라간다. 이때 힌의 무게가 엄청나게 무겁다는 것을 소피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보통의 개의 무게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신화적인 인용임을 떠올리게 된다. 여행자 수호자 성 크리스토퍼가 강에서 만난 어린아이처럼 힌은 계단을 오를수록 점점 무거워 “돌덩이” 처럼 된다. 힌은 소피에게 “내리누르는 자기의 상징”25)인 것이다. 따라서 힌을 안고 힘겹게 왕궁의 계단을 오르는 소피의 행위는 자기실현과정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임을 형상화한다. 소피가 그 과정의 고통을 극복하고 계단 끝까지 오르는 행위를 통해 자기에 한 단계 근접하는데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계단 맨 위에 올라 소피는 오르는 과정에 다 늙어버린 마녀에게 기운을 내라고 격려하는 여유까지 지니게 된다.

    이제 셜리먼과 대면한 소피는 주저함 없이 하울을 대변한다.

    여기서 소피가 하울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사랑함으로써 자신 안의 아니무스를 의식화하여 진정한 자기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애니매이션다운 기법으로 단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시퀀스에서 할머니 소피가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소녀로 변화하는 것이 몽타쥬로 형상화됨으로써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단지 설리먼이 소피가 하울을 사랑함을 간파하자 소피는 흠칫 놀라 다시금 할머니로 돌아간다. 이 장면에서 소피가 자기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관객은 알아차리게 된다. 소피 스스로는 아직도 두려워하지만, 관객은 그녀가 사랑의 주체가 됨으로써 온전히 자기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국왕으로 변장하여 나타난 하울과 함께 소피가 설리먼이 펼치는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도 의미심장하다. “네 진짜 정체를 보여 주”겠다는 언술과 함께 설리먼은 처음엔 엄청난 홍수로 다음은 유성들의 공격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비행선들의 추적 공격을 퍼붓는다. 그 과정에서 소피는 하울이 점점 괴물로 변해감을 간파하게 된다. 소피의 일깨움으로 괴물이 되어가던 하울은 스스로를 절제한다. 설리먼의 공격에서 소피와 하울이 당당하게 헤치고 나와 남은 공격을 마무리하려 떠날 때, 하울은 카약(작은 비행기)를 소피에게 넘겨주면서 마음 속으로는 캘시퍼를 부르면서 반지의 보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비행하라고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소피는 소심한 소녀가 아니라, 비행기를 조정할 수 있는 용감한 여성으로 비상한다. 이렇게 하울은 소피 안에 잠재해 있는 아니무스를 일깨워 펼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융은 무의식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림자뿐 아니라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까지도 모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26)는 것이다. 하울이 설리먼과 마녀와 대적하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면이고 긍정적인 면은 바로 용감함과 진취성이다. 소피는 아니무스의 이 두 측면을 모두 감싸 안는다. 하울이 악마와 거래하여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만 결국 스스로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도 지니고 있고, 하울이 가르쳐준 용감함과 진취성을 스스로 일깨움으로써 자기로 향한 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이상적인 결속 즉 결혼은 남성은 마음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를, 여성은 잠재되어 있는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나가 조화를 이루어 자기에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하울과 소피가 그 과정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약을 타고 성에 도착한 소피는 하울에 관한 꿈을 꾼다. 전투에서 부상당해 피를 흘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하울을 촛불을 들고 뒤따라 올라간다. 어린시절의 장난감으로 장식된 검은 동굴 속으로 가만가만 촛불을 들고 찾아들어 간다. 그러나 두 개의 동굴이 나오고 그 중 하나의 동굴에 들어간 소피는 상처투성이의 푸른 괴조가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저주도 못 푸는 주제에 어떻게 하겠냐는 답이 돌아온다. 그때 소피는 드디어 사랑한다고 당신을 돕고 싶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미녀와 야수라는 신화의 원형이 활용된다. 보통 이런 미녀의 반응은 야수를 구원한다. 그러나 꿈속에서 괴조는 “이미 때는 늦었다”고 답한다. 이 꿈은 소피가 아니무스를 온전히 사랑하여 의식을 확장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아니무스를 온전히 통합해야 한다는 점을 꿈이 보여주는 것이다.

    꿈속에서 소피는 괴물인 하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꿈에서 깬 다음날 하울은 마법으로 새집을 짓고 이사를 한다. 마치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새집은 하울의 성과 소피가 살던 옛집이 포개진 형국이다.27) 꿈에서의 소피의 사랑 고백은 현실에서는 하울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분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울은 소피에게 특별한 선물로 자신의 비밀의 정원과 그 속의 작은 집으로 안내한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홀로 보냈던 비밀스런 은신처가 있는 목가적 풍경 속으로 소피를 데려가고, 소피도 와 본적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아무런 상처도 없던 그 시절로 가서 서로의 사랑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순간이 영화에서는 자연으로 이루어진 순정한 세계로 묘사된다. 그 속에서 소피는 자신은 예쁘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청소뿐이지만 하울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소피에게 하울은 “소피는 예뻐!”라고 확인시켜 준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하울은 “난 지금까지 도망쳤어. 그런데 이제야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너야!”(222쪽)라고 사랑을 고백하며 전장으로 떠난다. 한 번도 예뻤던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소피에게 하울로부터의 이러한 사랑의 반향은 아니무스가 페르소나와 보상적 관계에 있다는 융의 논의에 근거28)하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소피가 자신의 무의식과 순전하게 대면하여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하울이라는 아니무스에 의해 보상받고 있는 것이다. 소피와 하울의 사랑은 이렇게 쌍방으로 반향을 하며 합일을 이룬다.

    이 둘의 사랑을 통해 소피와 하울은 각각 마음속에 있는 아니무스와 아니마를 의식화하여 스스로를 사랑하고 상대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하울은 이제 어떤 두려움과도 직면하여 싸워 소피를 지켜내려는 존재가 되었고, 소피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용감하게 사랑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함께 이루어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나) ‘자기’를 향한 지남성(Orientation)

    소피와 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인 자들에 대항하느라 괴물이 되어가는 하울을 살리기 위해 소피는 결단을 내린다. 핵심만 남기고 성을 파괴하기로 한 것이다. 그 핵심이 바로 캘시퍼라는 것을 소피는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희생하며 캘시퍼를 격려하여 ‘자기’가 있는 중심부만 남기고 모두 파괴해버린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업일지와 하이시 조의 음악에 이 부분을 ‘소피의 움직이는 성’이라 명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잡동사니 속에서 조그만 ‘소피의 움직이는 성’이 나타난다”29)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울의 성의 핵심은 소피의 성이며 그 곳이 바로 ‘자기’의 자리임이 명시되는 것이다. 소피의 결단력과 용감함 그리고 자기희생은 자신의 핵심 즉 ‘자기’에 더욱 다가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그림자에 남아 있는 충동과 욕망(마녀로 표상되는)은 자기실현과정의 가장 큰 위기를 마련한다. 중심에 다가가자 캘시퍼가 품고 있는 하울의 심장이 노출되고 만 것이다. 단숨에 그 심장을 손에 넣고 뜨거워 쩔쩔매는 마녀에게 소피는 물을 뿌려 성의 동력이 상실된다. 이제 자기를 보호하고 있던 성의 핵심부도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소피는 주저앉아 하울의 생명마저 꺼질 것을 두려워하며 운다. 모든 것이 파괴된 그 검푸른 폐허는 인생의 위기에 경험할 수 있는 절망의 심연과 닮아 있다. 카메라는 폐허 위에 망연하게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피를 하이앵글로 잡아 절망의 깊이를 형상화한다. 희생을 감수하면서 결단력 있게 자기실현의 길을 추진하던 소피가 순간의 실수로 난파하여 절망의 심연에 내던져지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하울이 끼워준 반지의 보석에서 빛이 나와 방향을 지시한다. 이것도 지남성을 지닌 인도자로서의 아니무스의 역할이다. 그 방향을 향하도록 힌도 소피를 일깨운다. 그리고 소피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가 숨겨진 문을 발견한다. 문을 열자 어둠만이 가득하다. 하울이 전쟁에 저항하기 위해 싸우러 떠나거나 파죽음이 되어 전장에서 돌아오던 문이 바로 검은 문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초반에 소피가 마르크르에게 그 검은 문은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을 때 마르크르는 하울만이 안다고 대답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제 소피는 하울의 세계 즉 아니무스가 부상하는 무의식의 세계와 담대하게 대면하고 깊은 대화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시공의 구멍 속으로 깊이 들어가니 전에 하울이 보여주었던 유년 시절의 오두막의 내부로 내려가고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향한다. 바깥에는 하울과 사랑을 확인하던 개울과 들꽃 있는 유토피아적인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이 빠지는 늪이 있다. 그 늪이라는 물질성은 기억의 세계임을 명시한다. 그곳에서 소피는 유년의 소년 하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을 삼키고 심장을 토해내는 장면을 바라본다. 이때 하울도 소피를 바라본다. 이 시선의 교차로 소피는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하울이 이 세계에 처음 초대했을 때 왜 자신이 와본 것 같았는지를, 그리고 하울이 바로 오래도록 자신을 기다려온 ‘자기’임을. 시공의 구멍을 빠져 나오니 검은 문은 사라지고 그 앞에는 차갑게 텅 비어버린 푸른 괴조가 앉아 있다. 소피가 그에게 키스를 하고 캘시퍼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폐허로 되돌아가니 널빤지를 두 개의 다리로 받치고 있는 성의 조각이 남아 있다. 그 위에서 소피는 황야의 마녀를 끌어안고 심장을 달라고 간청한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마녀가 갈망했던 대상은 바로 하울의 심장이었다. 소피에게 저주를 풀려면 하울을 찾아가려고 명하고선 소피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둔 편지에 이미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대, 별똥별을 붙잡은 자!/ 마음 없는 자!/그대의 심장은 내 것이다……”(21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가 순전하게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며 핵심인 자기에 도달하는 과정에 마녀는 다정한 존재로 변해 있다. 그리고 그 심장을 소피에게 넘기며 소중히 다루라고 부탁한다. 마녀는 소피 무의식 속에 있는 부정적인 그림자 인식으로서 페르소나에 대해 의식화되는 초기 단계에는 소피의 의식을 압도하지만, 소피가 치열하게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길들여져 차츰 자기에 통합되어 가는 것이다. 무의식의 핵 즉 자기가 바로 하울의 심장에 다름 아니다. 이부영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보통 자아를 자기에게로 매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하고 의식화하면 그 다음부터는 매개자 없이 자기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기의 사자와 같은 것으로 때론 사자와 그 주인은 하나라고 언급한다.30) 하울은 소피의 아니무스로서, 소피가 자기에 도달하도록 하는 자기의 사자이며 동시에 소피라는 자아가 도달한 자기 자체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인 심장은 이제 소피 자신의 손에 온전히 주어져 있다.

       2.5. 대극의 합일

    소피는 캘시퍼가 천년을 살고, 하울이 마음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정성껏 심장을 하울의 가슴에 넣어준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점점 텅 빈 괴물로 고사되어 가던 하울은 이 행위를 통해 진정한 생명을 얻는다. 자기의 사자이며 화신인 하울의 되살아남은 소피가 사랑과 헌신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분열되고 가리워지고 계약으로 묶여 있던 자기를 해방하고 온전히 회복됨을 의미한다. 즉 소피가 무의식의 어두운 세계와 순전히 대면하고 고통스런 자기실현과정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스스로 자기의 양극성을 통합함을 즉 대극합일을 이루어냄을 상징하는 것이다. 소피와 하울의 사랑의 합일은 자기의 양면적 특성의 온전한 조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시대와 문화를 넘어선 보편적 현상임을 프란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제 자기실현을 완수한 소피는 이전의 페르소나에 갇혀 있던 수동적인 소녀가 아니다. 그로부터 해방되어 사랑의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별빛 머리의 이 아름다운 여인의 키스는 구원의 신호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자기실현에 온전히 헌신한다면 주변에 불꽃처럼 긍정적인 전파효과를 끼친다”32)는 프란츠 의 언급처럼, 소피는 이제 하울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실현과정에 함께 했던 인도자와 조력자들에게 ‘키스’를 함으로써 불꽃같은 긍정적 효과를 전파한다. 하울은 마음을 얻어 살아나고, 허수아비 카브가 저주가 풀려 이웃나라의 왕자로 되돌아오고, 캘시퍼는 계약하는 악마가 아니라 협동하는 친구가 된다. 뿐만 아니라 황야의 마녀는 다정한 할머니가 되고, 때때로 마술사로 변장하던 마르크르는 명랑한 아이가 되고, 힌은 소피네의 온전한 동물가족이 된다. 그리하여 이웃나라 왕자로 돌아온 카브는 전쟁을 끝내러 자신의 나라로 떠나고, 소피와 하울을 중심으로 마녀 마르크르 힌은 하울의 성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렇게 하여 하울의 성은 자연과 풍력발전 증기기관의 협업으로, ‘움직이는’ 수준에서 ‘날아가는’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 물과 불, 늙음과 젊음, 인간과 동물이 서로 협동하는 공동체로 대극합일의 조화를 이룬다.

    11)프란츠, 앞의 책, 186쪽 참조. 프란츠는 개성화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인생의 위기와 함께 찾아오는데, 때로는 겉으로는 만사가 잘 되어가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지독한 권태에 시달려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소피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이 이와 유사하다.  12)융, 앞의 책, 100쪽.  13)융, 앞의 책, 77쪽.  14)융, 앞의 책, 100쪽.  15)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개성화 과정」, 『인간과 상징』, 칼 구스타브 융 편, 이부영 외 역, 집문당, 2013(1983), 197-219쪽 참조.  16)프란츠, 앞의 책, 186쪽.  17)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앞의 책, 185쪽.  18)프란츠, 앞의 책, 186-187쪽 참조.  19)앞의 책, 188쪽 참조.  20)Ariel Salleh, “Deeper and Deep Ecology: The Eco-feminist Connection”, Environmental Ethics 6: 1(1984), p. 340, 김욱동, 『문학생태학을 위하여』, 서울: 민음사, 1998, 361면에서 재인용. 에리얼 샐러는 여성의 생리‧임신‧분만‧양육 같은 생물학적 특성을 들어 “여성은 이미 자연의 체계와 함께 흐른다”고 하면서 남성보다는 선천적으로 자연친화적임을 언급했다.  21)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정업’의 과정과 유사하다.  22)지브리 스튜디오, 서현아 역,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학산문화사, 2013, 216쪽. 이후 시나리오 인용은 본문에 이 책의 쪽수만을 밝히겠음.  23)조셉 앤더슨, 「고대 신화와 현대인」, 앞의 책, 150-151쪽.  24)프란츠는 아니무스가 지닌 여러 기능 중에서 자기를 향한 인도와 지남력에 있음을 지적한다. 앞의 책, 223쪽.  25)프란츠, 앞의 책, 245쪽. 신화에 의하면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막강한 힘에서 오는 오만한 자부심을 가졌고 힘센 사람만을 섬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는 왕을 섬겼는데, 왕이 악마를 무서워하는 것을 보자 악마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악마가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을 보자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악마는 여울목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라고 충고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크리스토퍼는 많은 사람들을 업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한번은 깜깜하고 폭풍우 부는 밤에 한 작은 어린이가 강을 건네 달라고 소리쳤다. 성 크리스토퍼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그 어린이를 그의 어깨에 태웠으나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점점 무거워져 걸음이 느려졌다. 그가 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는 ‘마치 전 우주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야 그는 자신에 어깨에 그리스도를 태우고 왔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죄를 사해 주었고 그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6)프란츠, 앞의 책, 242쪽 참조.  27)이 이사를 영화전체의 전환점으로 보고, 하울의 성과 소피의 집이 겹쳐지는 순간을 하울과 소피의 성적 결합으로 보는 김윤아의 해석은 흥미롭다. 김윤아,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전쟁이 부르는 특별한 로망스」, 『미야자키 하야오』, 살림, 2005, 82쪽.  28)칼 구스타브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역, 『융 기본 저작집 3. 인격과 전이』, 100쪽 참조.  29)지브리 스투디오, 서현아 역, 『하울의 움직이는 성』, 학산문화사, 2013, 176쪽.  30)이부영, 앞의 책, 293쪽 참조.  31)프란츠, 앞의 책, 229쪽.  32)프란츠, 앞의 책, 252쪽 참조.

    3. ‘하울의 성’과 사회와의 관계

    앞선 분석에서 소피가 순정하게 무의식과 대면하고 자신을 덮고 있던 페르소나로부터 해방되어 자기를 실현하는 자기의 자리로서의 하울의 성을 고찰하였다. 그렇다면 소피가 자기를 찾아가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과정은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융은 자기실현과정을 개성화과정(Individuation)이라고 언급하면서 개성화는 개인지상주의와는 전혀 다른 일이라고 명시한다. 인간은 다른 고등동물들처럼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개성 자체 내에 이미 사회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체들이 자기실현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유성을 찾아가는 것인데 인간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협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실현의 중요한 요소로 사회와의 조화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집단적 페르소나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회집단으로부터 강요된 페르소나는 개성화와 모순을 일으킨다. 따라서 융은 집단적 페르소나를 강조하는 어떤 대중조작도 파시즘도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결국은 성공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34)

    그러한 맥락에서 소피의 자기실현과정과 하울의 성이 놓인 사회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은 증기기관에 의해 산업화된 유럽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업보고처럼 “무대는 19세기말 유럽 근미래화가들이 상상으로 그려낸 마법과 과학이 어우러진 세계(10쪽)”인 것이다. 증기기관이 화면을 압도하면서도 하늘에는 군함이 날아다니는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혼재한 상태로 보인다.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 소피의 모자가게의 창문은 때때로 그 연기로 가득 메워지고, 자동차나 버스도 모두 증기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울의 성도 캘시퍼라는 불이 동력이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증기기관이라는 에너지원은 산업화만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에너지원과 기술은 전쟁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마련이다. 영화의 서사를 이루는 기반은 킹스베리가 수도인 나라와 이웃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다. 소피와 하울은 킹스베리가 수도인 나라에 살고 있다. 하늘에는 군함들이 깃발을 달고 날아다니고, 거리에는 군인들이 행진을 하거나 도처에 경비를 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 이들은 비장하지 않다. OST에 ‘명랑한 경기병’이라 명명될 만큼 유쾌하고 광장에서는 군인들이 여인들과 춤을 추는 등 축제적인 분위기를 연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전쟁의 치열함이 가속화된다.

    소피는 전쟁을 싫어한다. 항구도시에서 군함들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소피는 “나는 이런 전쟁이 싫”다며 마르크르를 데리고 서둘러 성으로 되돌아온다. 소피의 반전적인 의식은 그녀의 분신인 하울을 통해서는 전쟁에 대항하여 싸우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하울은 대부분 소피와 함께 등장하는데 혼자 있을 때에는 검붉은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 사이를 나르며 양쪽을 공격하다 양쪽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거대한 새의 모습이다. 검은 문으로 파죽음이 되어 성으로 돌아오는 하울의 모습은 날로 상처투성이가 되어간다. 그의 아나키스트적인 측면은 “오늘은 동업자에게 당했다”고 캘시퍼에게 고백하거나, 설리먼의 부하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혹은 꽃의 정원에서 “어느쪽이나 다 마찬가지야”라며 엄청나게 많은 탄알을 장착한 군함을 “살인마”라고 비판하며 공격하는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국왕이나 설리먼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명령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하울은 젠킨스나 펜드라곤 등의 상이한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후반에 가면 하울이 소피를 사랑하여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아군인 설리먼에게 적극 대항하는 전투적인 모습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을 모두 내놓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폭력에 대한 하울의 반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존재를 해방하기 위해 신에게서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가져다주고 영겁을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기우는 형벌을 받았듯이, 하울은 신성한 불 즉 별을 삼키는 대신 자신의 심장을 내어준다. 하울의 유년시절로 간 소피가 목격했듯이 하울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유성을 삼켜 자신의 심장과 함께 토해내었다. 그것이 하울의 성을 움직이는 캘시퍼라는 동력이 된 것이다. 캘시퍼는 스스로를 불의 악마라 칭하면서도 전쟁에 사용되는 불과는 자신을 구별한다. “생물과 철이 타는 냄새” 즉 전쟁을 일으키는 불의 작용을 “예의가 없”다고 비판한다. 에너지원으로서의 불의 기능은 긍정하지만 그것을 이용한 전쟁은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혁명은 지배 권력과 긴밀한 관계에 놓이고 이는 다시금 권력을 확장하기 위한 전쟁으로 이어져 왔음은 인류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문명화의 역사가 바로 전쟁의 역사와 직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양날의 칼이 바로 에너지원으로서의 캘시퍼와 전화(戰火)로 양분되어 영화에서 형상화된다. 그 사이의 구분과 균열은 하울과 셜리먼의 갈등으로 드러난다.

    마법사 셜리먼은 하울의 스승으로서 지배권력 즉 국왕을 떠받치고 있는 실세이다. 고상하고 중후해 보이는 셜리먼은 잘 길들여 자란 나무들이 있는 거대한 온실과 같은 궁정에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경로로 하울을 감시하며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에 의해 제도화된 공간의 정점에 있는 마법사 셜리먼은 그녀의 외양과 공간이 보여주는 고상함과 중후함 질서정연함의 이면에 가공할만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 폭력성은 엄청난 재앙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검붉은 전화(戰火)일 뿐 아니라 거대한 홍수가 되기도 하고 인간의 몸과 정신을 혼돈에 빠뜨리거나 피폐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35) 이렇게 마법으로 불리는 기술혁신과 지배 권력의 결탁은 셜리먼을 통해 단적으로 형상화된다.

    하울은 그러한 폭력의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도화된 권력체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하울은 마법학교에 입학할 때 언제나 국가가 부를 때 복종할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권력과 결탁하지 않은 마법은 권력의 입장에서는 ‘위험스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셜리먼의 수제자였던 하울은 권력과의 결탁을 거부하고 스스로 거친 황야로 떨어져 나와 방랑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배담론를 형상화하는 셜리먼과 야생의 담론을 나타내는 하울의 대결은 이 영화의 기저 갈등을 형성한다. 푸코가 간파했듯 지배권력은 제도를 통해 끊임없이 담론을 길들인다.36) 왜냐하면 야생의 담론은 언제고 지배담론의 약한 고리를 끊어 낼 수 있는 위험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화에서 하울의 주된 행동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전쟁 자체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는 대항하기 위한 동력이 자신의 심장을 내놓아 얻은 불의 힘이고 대항하여 싸울수록 스스로 폭력을 내재화하여 텅 빈 괴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셜리먼과 하울 모두는 결국 인류 문명화의 메타포이다. 문명화를 통해 인간은 눈부신 산업을 발전시켰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죽이는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폭력에 대한 반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고통 받으며 스스로를 고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하울이라는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관객과 닮아 있는 소피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 살고 있음이 하울과의 교차를 통해 명시된다. 하울의 성에서 용감하게 자기를 찾는 과정을 거쳐 하울의 심장이 소피의 손에 온전히 달려 있듯이, 스스로를 고사시키고 있는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은 소피의 손에 달려 있다. 하울과 셜리먼이 형성해온 인류의 문명화의 역사와는 다른 판을 짤 소명이 소피와 소피에 감정이입하는 관객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소피가 전쟁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하기 위해 셜리먼과 국왕을 만나러 간다든가 하울이 전쟁에 대항하는 싸움을 중지시키기 위해 하울의 성의 핵심부만 남기고 파괴해 버리는 소피의 적극적 대응은 괄목할 만하다. 이렇게 문명화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만을 남기고 모두 포기해버리는 결단은 생태주의의 ‘지속가능한 생존’37)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구성원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소피의 방식은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처럼 공감과 대화 그리고 보살핌38)이다. 그녀는 대화로 캘시퍼의 힘을 돋우고, 하울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마녀를 끌어안고 부탁한다. 마르크르를 사랑으로 감싸고, 마법을 모두 잃고 무력한 노파로 변한 마녀를 정성으로 보살핀다. 소피의 자기실현 과정을 추동하는 원동력은 바로 공감과 보살핌으로 실현하는 사랑이다. 자기를 실현해 가는 주체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생명공동체를 사랑하고 보살핌으로써 셜리먼과 하울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영화는 제시하고 있다.

    33)융, 『융 기본저작집 3. 인격과 전이』, 76쪽.  34)융, 「무의식으로 가는 길」, 『인간과 상징』, 101-103쪽 참조. 프란츠, 앞의 책, 249쪽 참조.  35)셜리먼은 황야의 마녀를 궁정으로 불러 거대한 전구에서 불을 쏘아 고문을 하여 한 순간에 늙게 만들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여주며 하울이 국가의 부름에 정 응하지 않으면 마녀처럼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점잖게 협박하기도 한다. 하울과 소피가 궁정을 탈출할때 셜리먼은 거대한 홍수, 혼란스런 유성들의 압박, 비행선의 곤충모양의 부하들의 추격 등으로 총공격을 시도하기도 한다.  36)미쉘 푸코, 이정우 역, 『담론의 질서』, 새길, 1993, 16쪽.  37)반다나 시바, 강수영 역, 『살아남기: 여성·생태학·개발』, 솔, 1998, 35쪽 참조.  38)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손덕수ㆍ이난아 역, 『에코페미니즘』, 창작과비평사, 2000, 16쪽.

    4. 맺음말

    나는 이글에서 산업화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 속에서 하나의 수공업자인 소녀가 인생의 위기에서 자신과 직면하여 지난한 과정을 담대하게 겪어냄으로써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추적해냈다. 소피는 위대한 영웅이나 성인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한 하나의 평범한 소녀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그녀는 페르소나에 갇혀 위축되고 소심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선량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소피의 모습은 관객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영화는 그러한 소피를 전면에 놓고 그녀의 시선을 중심으로 형상화한다. 소피의 행동과 그녀가 놓여 있는 상황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피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유도한다.

    제목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지만 하울은 소피가 놓인 사회적 맥락을 제시하거나 소피의 자기실현 과정의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여 계기들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융의 ‘자기실현’ 개념에 근거하여 보면 하울은 소피의 의식과 무의식의 핵심에 해당하는 ‘자기’가 보낸 전령으로서의 아니무스이거나 혹은 자기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자기의 사자(使者)들은 허수아비 카브, 힌 등으로 확대된다. 소피의 자기실현과정은 자기에게서 보내온 사자들의 협조와 자극으로 더욱 활성화된다. 카브는 안내자와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하울은 소피에게 진취성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며, 힌은 소피가 절망의 심연에서 빛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존재이다.

    소피는 평범해 보이지만, 인생의 위기에서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마녀의 저주로 할머니가 되는 위기에 빠진 소피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돌파구를 차분히 찾아 나간다. 이때 마녀의 존재는 분석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아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파악할 수 있다. 융이 간파했듯이, 그림자는 표면적으로는 아주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창조적 잠재력이 있다. 그러기에 그림자인 마녀의 저주는 소피가 길을 떠나 하울을 만나게 되는 소명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소피는 위기의 매 순간마다 침착하게 직면하고 거친 황야로 길을 떠나 자신을 찾으려 적극 시도한다. 자기실현의 초기단계에서 소피는 자기의 자리인 하울의 성을 찾아 물로 정화하고 그를 통해 명정의 순간을 얻고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게 된다. 소피는 하울의 성이 온전히 난파했을 때에도 반지의 보석에서 비추는 빛을 발견한 순간 다시 일어나 빛이 지시하는 문을 열어 재끼고 무의식을 향한 어둠속으로 담대하게 걸아가 결국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그렇게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자기에 도달한 소피는 페르소나로부터 해방되어 대극합일의 존재로 승화된다. 영화의 말미에 별빛 머리의 소녀 소피는 하울, 카브, 캘시퍼에게 키스하고 황야의 마녀, 마르크르, 힌 등을 품어 안는 역동적인 사랑의 구원자로 성장한다.

    소피의 자기실현과정에 심리적인 동행을 하던 관객은 이 순간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캘시퍼의 동력과 대체에너지의 협업으로 날아오르는 하울의 성에 소피와 하울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함께 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환상적인 유토피아로 다가온다. 그러나 전쟁은 일시적으로 멈추었지만, 셜리먼과 국왕 등이 표상하는 지배 권력이 변하지 않고 엄연히 존재하는 한, 전쟁이 영원히 종식되리라는 낙관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중심에 도달해본 소피와 그녀와 함께 하고자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고통스럽더라도 투쟁하면서 새로운 역사로 나아갈 “결코 끝나지 않은 세계와의 약속”39)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영화는 제시한다.

    39)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주제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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