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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atrical Dialogue From the Viewpoint of Cognitive Science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본 연극대사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atrical Dialogue From the Viewpoint of Cognitive Science

오늘날 연극에서 말은 수난의 시기를 맞이했다. 소위 ‘포스트모던 연극’ 혹은 ‘포스트드라마’로 표현되는 현대연극은 이제 말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성격을 벗어나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중시하게 된다. 이런 움직임 뒤에는 대사에 대한 편견이 있다. 즉, 대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전달하기에 부적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또처럼 비언어적 연극을 주장하는 입장이 대두되었다. 과연 그럴까?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의 기본가설은 대사가 신체 감각적인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지과학에 의해 이론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인지언어학에 따르면, 언어는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에 호소한다. 이처럼 언어는 단지 추상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에 대한 신체적 체험을 유발시킨다. 이에 본 논문은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연극대사가 어떻게 신체 감각적인 체험을 불러일으키고, 그 체험이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고대그리스 비극인 <아가멤논>을 분석의 사례로 삼았다. 과거의 사건들을 아주 길게 서술하는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최대한 그 사건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고안되어 일종의 “가상적 행동(virtual action)”을 창조한다. 그 결과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그것이 묘사하는 사건이나 상황에 관한 ‘심상’을 불러일으켜, 마치 우리로 하여금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얻어진 ‘신체화된 감정’은 후속적인 인지 처리과정을 형성하여 의미를 발생시킨다. 쉽게 말해 신체 감각적인 대사는 특정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느낌은 특정한 생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아가멤논>은 위와 같은 성격의 대사를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아가멤논>의 대사는 극의 주제인 ‘정의의 응징(dike)’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특별한 방식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러스는 트로이에 대한 응징을 우선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것은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미 토끼를 찢어 죽이고, 이로 말미암아 뱃속의 새끼까지도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체 감각적 느낌에서 ‘정의의 응징’이 그 성격을 드러낸다. 즉, 정의 실현은 또 다른 끔찍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강렬한 신체 감각적 경험이 은유적인 의미로 확장된 결과이다. 이처럼 신체 감각적인 대사는 감각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특별한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다. 그 결과는 ‘생각의 신체화’라 할 수 있다. 비언어적인 표현이 각광을 받는 오늘날 우리가 연극의 본질을 언어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편파적인 시각을 벗어나, 연극대사에 관한 균형 있는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cognitive science , Agamemnon , physically sensuous dialogue , dike , embodiment of thinking.
  • 1. 서론

    오늘날의 연극에서 말의 언어는 수난의 시기를 맞이했다. 연극적 표현수단으로 ‘말(speech)’보다는 비언어적 표현수단이 보다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징조는 이미 아르또(Antonin Artaud)의 연극에서 감지되었다. 아르또에 따르면, 서구의 말은 “제한된 도식적 용어(a restricted schematic terminology)”로 화석화되어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킨다.1)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상적 경험이나 심리적·사회적 갈등을 표현하는 데만 유용하다.2) 이와 같은 서구의 말은 삶의 진실에 이르는 ‘형이상학적 경험’에 부적합하다. 따라서 그는 “삶과 접촉하기 위해 언어(language)를 파괴하는 것은 연극을 창조하거나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3) 이처럼 아르또가 언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의 필요성” 때문이다.4) 신체감각적인 표현수단에 대한 아르또의 집착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현재와 같이 타락한 상태에서는 형이상학은 피부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다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5) 즉, 연극은 형이상학을 감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아르또는 인도의 피리 부는 악사가 코브라를 움직이는 예를 들고 있다.

    아르또의 연극은 결코 ‘정신적인 개념’을 통해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형이상학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려 한다. 이를 위해 그는 “기호언어(sign-language)” 즉, “말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연극적 언어”로서 “표의문자적 가치(ideographic value)”를 지닌 제스처, 동작, 춤 등을 강조한다.7) 이러한 기호언어는 마음보다는 감각에 주로 호소하며,8) 그 목적은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을 지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9) 여기서 아르또가 생각하는 것은 연극에서 “말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목적을 변화시키거나 그 지위를 축소시키자는 것이다.”10) 따라서 그는 “서구식 말의 용법을 포기하고, 말을 주술로” 바꾸어, “언어를 지성에 종속시키는 일로부터 독립”할 것을 제안한다.11) 아니면 연극은 말의 비중이 최소화되고 감각적 호소력을 가진 ‘기호언어’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아르또의 생각은 곧잘 ‘비언어적 연극’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비언어적 연극은 아르또의 사례처럼 연극철학의 산물일 뿐 아니라, 20세기 테크놀로지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영화와 비디오를 거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무대에 도입한 오늘날의 연극에서 말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축소되었고, 공연은 시각적 이미지 중심으로 흐르는 것이다. 소위 ‘포스트모던 연극’ 혹은 ‘포스트드라마’로 표현되기도 하는 현대연극은 이제 말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성격을 벗어나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중시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비언어적인 표현수단이 언어(말)보다 각광을 받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언어적 연극은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다. 연극의 본질은 어떻게 보면 언어(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연극은 철저히 말 중심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의 표현수단으로 ‘대사(logos)’를 먼저 생각하고, ‘정경(spectacle)’ 혹은 ‘시각적 치장(opsis)’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취급했다.12) 그에 따르면, 무대장치, 가면, 의상 같은 시각적 수단은 관객의 감정을 일으키나 가장 예술적이지 않은 요소이다. 왜냐하면 비극의 목적은 그러한 시각적 효과 없이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대사는 일차적으로 지적 사고의 표현체였다. 왜냐하면 연극의 제3요소인 ‘사고(dianoia)’는 제4요소인 ‘대사(logos)’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어적 표현(verbal expression)’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는 “실제적인 시의 구성(the actual composition of the verses)”을 말하는 것으로, 단어나 말이 아닌 하나의 ‘진술(statement)’ 혹은 ‘판단(judgement)’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로고스란 “인간은 동물이다” 같은 진술 혹은 판단이다.13) 이렇듯 대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무엇보다 ‘지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아르또가 비난했던 것이 바로 이런 연극이었다. 그에게 “과도한 논리적 지성주의(excessive logical intellectualism)”는 “쓸모없는 도식(useless schema)”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14) 그가 바라던 것은 삶의 진실을 ‘도식적인 말’이 아닌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형이상학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관객의 마음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의 논리는 간단하다. 즉, 형이상학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 다음, 그런 느낌을 통해 형이상학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15)

    아르또의 생각은 허황된 것인가? 어떻게 보면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경험은 연극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연극은 ‘행동하는 인간(men in action)’을 모방하는 것이며, 관객은 바로 이런 행위들을 직접 보고 듣는다. 따라서 감각적 경험은 연극에서 가장 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연극의 지적 의미는 이와 같은 감각적 경험에서 비롯될 수 있다. 여기에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일면이 드러난다. 예술은 감각적 경험이 지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아마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이 예술의 이런 측면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감각적이고 이미지적인 사고과정(sensual and imagist thought process)”에 기초한다.16) 다시 말해 예술은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으로 지식을 제공하는 효과(logico-informative effect)”가 아닌 “정서적 감각적 효과(emotional sensual effect)”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다.17) 예를 들어 ‘우호적으로 맞이하다’라는 사실은 부시맨의 언어에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기,’ ‘담배쌈지를 채우기’, ‘고기 요리하기’ 등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형상화된다.18) 그 결과 부시맨의 언어는 예술처럼 단순정보전달이 아닌 ‘이미지 감각적 경험’을 고무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기’ 같이 ‘행위를 묘사한 언어’가 특별한 감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그 이미지는 ‘우호적인 접대’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는 연극대사로 확대될 수 있다. 연극대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듯 지적인 생각의 표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특별한 ‘신체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켜 특정한 생각을 환기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에 의해 이론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인지언어학에 따르면, 언어는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에 호소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월이 흘러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강물에 대한 신체적 경험에 기초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처럼 언어(말)는 단지 추상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에 대한 신체적 체험을 유발시킨다. 이에 본 논문은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연극대사가 어떻게 신체 감각적인 체험을 불러일으키고, 그 체험이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런 논의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지적인 생각을 일으킨다는 예술의 일반원리 그리고 아르또의 생각을 반영하기도 한다. 특히 본 논문은 이와 같은 경험이 대사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고대그리스 비극인 <아가멤논>을 분석의 사례로 삼는다.

    1)Artaud, Antonin, The Theater and its Double. Trans. Mary Caroline Richards (New York: Grove Press Inc., 1979), pp. 110, 117.  2)Ibid., p.46.  3)Ibid., p.13,  4)Franco Tonelli, 『잔혹성의 미학: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 연극의 미학적 접근』, 박형섭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p.25.  5)Artaud, Op. cit., p.99.  6)Ibid., p.81.  7)Ibid., p.39.  8)Ibid., p.38.  9)Ibid., p.70.  10)Tonelli, Op. cit., p.24.  11)Artaud, Op. cit., p.91.  12)『시학』에서 언급한 제6요소인 opsis는 정경으로 번역되다가, 엘즈(Gerald Else)의해 시각적 치장으로 정정되었다. Gerald F. Else, Aristotle's Poetics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70), p.90 참조.  13)Gerald Else, Plato and Aristotle on Poetry, ed. Peter Burian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6), p.128.  14)Artaud, Op. sit., p.50.  15)이와 같은 해석은 토넬리에 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또의 연극에서 “생각은 우선 감정과 감각으로 생성되며, 이어서 이념이 되는 색다른 전이의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Tonelli, p.25.  16)Sergei Eisenstein, Film Form: Essays in Film Theory, trans. and ed. Jay Leyda (New York: Harcourt, 1949), p.130.  17)Ibid., p.133.  18)Ibid., p.138.

    2. 인지과학과 언어

    대사의 신체 감각적 측면은 그리스 비극에 관한 연구에서 일부 거론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탠포드(W.B. Stanford)는 Greek Tragedy and The Emotions(그리스비극과 감정)에서 그리스 비극작가들이 대사를 쓸 때“시를 희생시켜가며 개념적 의미를 강조하기보다 가능한 대사의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성격들이 효과적으로 드러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19) 그런 방법 중의 하나가 은유, 직유, 비유의 사용이었다.20) 그예로 <아가멤논>의 클라임네스트라(Clytemnestra)는 거미나 쌍두의 뱀에 비유되면서 그녀의 기만적인 사악함이나 흉물스러움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할 뿐 아니라, 공포와 같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21) 이와 같은 감각적인 대사는 해브락(Eric A. Havelock)에 따르면 구어적인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가 지적하다시피 그리스 희곡작가들은 ‘문어적 커뮤니케이션(written communication)’이 아닌 ‘구어 커뮤니케이션(oral communication)’의 전통을 따라 작품을 만들었다.22) 여기서 ‘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지적이거나 이념적인 경향이 있다면, ‘구어 커뮤니케이션’은 이념적이기보다는 행위와 사건의 파노라마를 환기시키는 경향이 있다.23)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구어적 극작술’은 ‘구어적 기억’을 위해 분석적이기보다 ‘행동적(activist)’ 설명을, 추상보다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을, ‘진술(proposition)’보다 이미지를 선호하는 ‘연행적 구문론(performative syntax)’을 고무했다.24) 이렇듯 사건의 생생한 행위와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그리스 연극의 대사는 그 사건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할 잠재력이 크다. 따라서 과거의 사건들을 아주 길게 서술하는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최대한 그 사건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고안되었다. 이를 두고 엘즈(Gerald Else)는 그리스 비극대사의 특성이 “가상적 행동(virtual action)”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25) 그는 <아가멤논>에서의 “가상적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비록 과거에 벌어진 일을 설명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어적 대사’는 그리스 비극의 또 다른 특성인 ‘문자적 대사’와 절묘한 균형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 통치의 말기인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사람들은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테네 사람들은 손으로 쓰고 읽는 문자적 감각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구어적 감각과 조화시킬 필요가 있었다.27) 이 과정에서 문자적 대사는 점차 ‘지성주의(intellectualism)’를 드러내면서, 말이 그 자체로 존립하는 ‘생각’으로 객관화되었다. 이로써 대사는 철학의 경계에 가까이 가게 된다.28) 그 결과 그리스 비극의 대사는 이미지와 사색의 절묘한 균형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엘리엇(T. S. Eliot)은 그리스 연극대사의 천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위와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아마 구체적 이미지와 행동을 환기시키는 ‘구어적 대사’와 지적 생각을 표현하는 ‘문자적 대사’의 균형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각적 이미지는 지적인 생각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극장 즉, theatron이 ‘보는 장소’를 의미하듯, ‘보는 행위’를 본질로 하는 연극은 의미를 시각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연극은 지적인 대사뿐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연극적으로 번역한다.30)

    위와 같은 대사의 특성들은 인지과학에 의해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언어와 정신적 개념은 기본적으로 신체경험으로부터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앞’과 ‘뒤’의 개념은 몸에 근거한다. 우리가 한 마리의 고양이가 차 앞이나 뒤에 있다고 생각할 때, 차와 고양이 사이의 ‘in front of(~의 앞에)’ 혹은 ‘behind(~의 뒤에)’의 공간관계는 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화된 본성에 근거한 상상의 투사일 뿐이다.31) 이렇게 정신적 개념이나 언어가 신체경험으로부터 시작하기에, 인지과학은 소위 ‘신체화된 실재론(embodied realism)’의 입장을 취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지과학은 정신(이성)이 몸과 분리되고 독립되었다고 보는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을 거부한다. 서구의 전통에 따르면, 정신(이성)의 자율적인 능력이 바로 우리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러나 인지과학은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정신(이성)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32) 오히려 우리의 정신은 몸의 감각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의 산물인 것이다.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둔 말은 때에 따라 ‘이미지’를 환기시킬 수 있다. 그것은 사건이나 상황에 관한 ‘심상’을 불러일으켜, 마치 우리로 하여금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33) 여기서 환기된 사건이나 상황은 그것과 연관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말은 생각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34)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두뇌의 ‘거울 뉴런(mirror neurons)’ 때문이다. 무리를 무릅쓰고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거울 뉴런’은 외부세계의 동작을 거울처럼 두뇌 안에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은유적으로 말해 그것은 일종의 “신체적 공명(physical resonance)”으로 “마치 시각적 입력이 이루어지면 뉴런이 공명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35)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동작과 관련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관객은 연극을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배우의 얼굴표현과 신체언어를 지켜본다. 이것은 뇌에 있는 ‘거울 뉴런’을 작동시켜 ‘신체적 상태의 감정’을 복제하게 한다.36)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고도로 진화된 ‘거울 뉴런’을 가졌으며, 따라서 타인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감정과 의도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연극에서의 모방의 주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듯 배우가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 배우들의 신체적 동작과 그것이 수반하는 감정을 ‘거울 뉴런’을 통해 복제하는 것이다.37) 그 결과 관객은 배우들이 하고 있는 것을 마치 그가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신체화된 감정’은 후속적인 인지 처리과정을 형성하여 의미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두뇌 안에서 일어난 신체적 모방의 감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처럼 ‘배우/등장인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신체화된’ 감정적 반응에 부분적으로 기초하는 것이다.38) 여기서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은 말과 ‘거울 뉴런’ 사이를 연결시킨다. 즉, 말이 상기시키는 동작이 ‘거울 뉴런’에 반영되어, 그와 관련된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극대사는 그것이 내포한 상황이나 행위를 우리로 하여금 신체적으로 느끼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리가 컵을 집었다’라는 말은 컵을 집어 드는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면 이해 못한다. 이것은 언어가 체험을 전달하는 체계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임을 말해준다.39)

    그렇다고 모든 언어가 동등하게 신체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언어가 신체 감각적 경험과 맺고 있는 관계는 대략 세 가지 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다. 그것은 ‘신체 감각적 언어’, ‘개념적 은유의 언어’, 그리고 ‘문자적 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신체 감각적 언어와 개념적 은유의 언어는 인지언어학의 선도적인 연구자들인 레이코프와 존슨(G. Lakoff and M. Johnson)이 개념의 신체화 층위로 설명한 ‘현상학적인 의식적 경험’과 ‘인지적 무의식’에 각각 상응한다. 현상학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신체 감각적 언어는 운동감각적 경험의 느낌에 관해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에 관해서, 또는 치통이나 초콜릿의 맛이나 바이올린 소리 같은 다양한 감각적 경험에 관해서 설명한다.40) 이런 점에서 신체 감각적 언어는 신체적 체험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한다고 볼 수 있다. 개념적 은유의 언어는 신체적 경험을 간접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한다. 개념적 은유는 중요성, 유사성, 어려움, 그리고 도덕성과 같은 추상적인 것에 관한 주관적 판단이나 욕망, 애정, 친밀감 및 성취와 같은 주관적 경험을 개념화하고 사유할 때 신체적 경험을 은유로 삼는 것을 말한다.41) 예를 들어 우리는 애정에 관한 주관적인 판단을 “그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했다”(They greeted me warmly)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즉, 우리는 애정 깊게 안길 때의 ‘따뜻함’의 신체적 느낌을 은유로 사용하여 애정에 관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42) 또 다른 예로 우리는 ‘고등’ 자아가 우리의 ‘하등’ 자아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고등’ 자아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암시하고, ‘하등’ 자아는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뜻한다.43) 이와 같은 자아에 대한 개념화는 높고 낮은 대상에 대한 신체적 경험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보다 높이 있는 것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나보다 낮게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천하다고 느꼈다. 이런 신체적 느낌이 은유로 작용하여 고등과 하등의 자아를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개념적 은유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신체화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만일 우리에게 신체적 경험이 없다면, ‘따뜻한 애정’ 혹은 ‘고등’ 자아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은유적 개념화는 우리의 무의식적 개념체계들 속에 너무나 깊게 뿌리를 박고 있어서, 자동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 정신에 작용한다.44) 따라서 개념적 은유는 ‘인지적 무의식’의 일부라고 한다. 이처럼 ‘개념적 은유의 언어’는 신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언어이되, 그 신체적 경험이 간접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껴진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무의식적 사고가 모든 사고의 95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인지적 무의식은 언어와 정신적 작용에서 매우 중요하다.45) 여기서 개념적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in terms of)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46) 그렇다면 신체적 경험에 기초한 언어는 한 종류의 느낌을 다른 종류의 느낌을 통해 보다 풍부히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세 번째 분류인 ‘문자적 언어’는 레이코프와 존슨이 말한 비은유적 개념 혹은 문자적 개념에 상응한다. 이것은 신체적 경험이 부재한 순수한 문자적 표현이다. 예를 들어 “이 색체들은 유사하다”(These colors are similar)에서 ‘유사하다’는 문자적 언어라면, “이 색체들은 가깝다”(These colors are close)에서 ‘가깝다’는 신체적 경험을 은유로 사용한 개념적 은유이다.47) 문자적 언어에는 ‘죽은 은유’도 포함된다. 즉, 한때 개념적 은유였다가 문자적 표현으로 굳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pedigree(가계 혹은 족보)는 ‘foot of a grouse’(뇌조류의 발)을 의미하는 불어의 ped de gris에서 유래하였다. 가계도의 모양과 뇌조류의 발모양의 유사성에 근거한 이런 개념적 은유는 오늘날 작동되지 않는다.48) 그 결과 개념적 은유의 언어가 문자적 언어로 굳어진 것이다.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개념도 문자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의, 권리, 민주주의, 자유 같은 논쟁적 개념들은 신체적 경험과 무관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인지과학의 논의에 따르면, 대사는 신체적 감각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언어와 순수한 문자적 언어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신체적 경험은 은유적 확장을 통해 비신체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체적 경험에 기초한 언어는 지적인 사고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원리는 개념적 은유의 언어 뿐 아니라, 신체 감각적 언어에도 해당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체 감각적인 대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고찰하려 한다. 여기서 본 논문이 말하는 ‘신체 감각적인 대사’는 그와 같은 체험을 직접 일으키는 대사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개념적 은유의 언어’도 일부 포함시킨다. 이와 같은 고찰을 위해 본 논문은 두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첫째는 신체 감각적인 대사가 ‘거울 뉴런’의 작용을 통해 그에 해당되는 ‘신체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신체화의 능력(embodied abilities)을 이용하여 언어에 의해 묘사된 관점, 사물과 행위의 이동을 즉각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49) 둘째 본 논문은 그렇게 발생한 신체적 감각이 은유적인 차원에서 지적인 이해로 연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9)W.B. Stanford, Greek Tragedy and the Emotions: An Introductory Study (London: Routledge, 1983), pp.64-5.  20)Ibid., p.108.  21)Ibid., p.108.  22)Eric A. Havelock, "The Oral Composition of Greek Drama," Quaderni urbinati Di Cultura Classica 35 (1980): pp.61-113. 특히 pp.65, 86를 볼 것.  23)Havelock, p.90, p101, p106.  24)Havelock, p.84.  25)Gerald F. Else, "Ritual and Drama in Aischyleian Tragedy," Illinois Classical Studies 2(1977): p.73.  26)Ibid., p.73.  27)Havelock, Ibid., p.62.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와서야 연극은 읽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연이 비극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 후로 이런 생각은 보편화되며, 특히 19세기에 강하였다. 이상은 Oliver Taplin, Greek Tragedy in Action (London: Routledge, 2003), p.2 참조.  28)Ibid., p.90.  29)Taplin(2003), Op. cit, p.1.에서 재인용.  30)Ibid., p.3.  31)G. Lakoff and M. Johnson. 『몸의 철학: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 임지룡, 윤희수, 노양진, 나익주 옮김 (서울: 박이정, 2002), 71쪽.  32)위의 책, 46쪽.  33)허버트 A. 사이먼, 「문학비평: 인지과학적 접근」, 정상준 번역, 『문학과 사회』, 32호 (1995, 겨울호), 1471쪽.  34)위의 책, 1473쪽.  35)Susan Leigh Foster, “Movement's contagion: the kinesthetid impact of performance,” ed. Tracy C. Davis, The Cambridge Companion of Performance Studies (Cambridge: Cambridge UP, 2008), p.55.  36)Bruce McConachie and F. Elizabeth Hart, “Introduction,” Performance and Cognition: Theatre Studies and the Cognitive Turn (London: Routledge, 2006), p.5.  37)Bruce McConachie, “Falsifiable Theories for Theatre and Performance Studies.” Theatre Journal 59 (2007): p.564.  38)Ibid., p.564.  39)Amy Cook, “Interplay: The Method and Potential of a Cognitive Scientific Approach to Theatre,” Theatre Journal 59 (2007): p.589.  40)Lakoff and M. Johnson, 앞의 책, 163.  41)위의 책, 85쪽.  42)위의 책, 91쪽.  43)위의 책, 40-41쪽.  44)위의 책, 40-41쪽.  45)위의 책, 39쪽.  46)G. Lakoff and M. Johnson, 『삶으로서의 은유』, 노양진/나익주 옮김 (서울: 박이정, 2009), 24쪽.  47)앞의 책, 103쪽.  48)위의 책, 191쪽.  49)Raymond W. Gibbs, Embodiment and Cognitive Science Account (Cambridge: Cambridge UP, 2006), pp.199-200.

    3. <아가멤논>에 나타난 신체 감각적 대사

    이제 논의는 <아가멤논>의 대사가 제공하는 신체 감각적 경험과 그런 신체 감각적 경험이 지적인 의미 즉, 주제와 연결되는 것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때 본 논문은 널리 알려진 극의 주제가 어떻게 신체 감각적인 대사로 표현되는지에 주목할 것이다.50)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도입부에 해당되는 장면 1과 합창 1을 분석한 다음, 은유와 직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대사들을 신체 감각적 차원에서 검토하겠다.51)

       3.1. 도입부

    <아가멤논>의 첫 장면은 파수꾼이 아가멤논의 집 지붕 위에서 10년이 넘도록 망을 보는 고달픈 처지를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행에서 3행으로 진행되는 첫 대사는 파수꾼의 고달픈 삶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처럼 누워서’ 망보는 처지이다. 여기서 ‘누운 자세’는 슬픔을 은유한다. 왜냐하면 “수그러진 자세는 전형적으로 슬픔이나 절망을 동반”한다는 물리적(신체적)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53) 이와 같은 뜻과 함께 개처럼 누워 있는 신체적 경험은 문화적 경험의 차원에서도 의미화 된다.54) 그것은 dog's life가 의미하듯 비참하고 단조로운 삶이며, doggish가 뜻하듯 ‘개 같은’ 처지이다.55) 슬프게도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파수꾼은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신께 기원을 한 다음, 드디어 동쪽 하늘에서 기다리던 봉화불이 타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신호인 것이다.

    위 대사는 밤에서 대낮으로, 암흑에서 빛으로의 대변화를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신체 감각적 경험은 곧 개념적 의미를 수반한다. 왜냐하면 어둠과 빛 그리고 밤과 대낮에 관한 우리의 신체적 경험은 이것들을 특별한 은유적 의미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대사는 고통에서 환희로, 악에서 선의 시간으로의 변화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둠의 새벽’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새벽’은 신체 감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새벽’ 혹은 ‘어둠이 낳은 새벽’이다. 이런 운동감각은 은유적으로 선 혹은 정의 실현은 악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에 <아가멤논>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자만심이 빚은 죄인 ‘휴브리스(hubris)’와 ‘정의의 응징(dike)’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즉, 정의의 실현은 불가피하게 휴브리스를 범하게 하고, 그 휴브리스에 대해 ‘정의의 응징(dike)’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러나 그 정의 실현은 또 다른 휴브리스를 범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따라서 죄를 저지른 트로이를 응징하기 위해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니아(Iphigeneia)를 희생시키고 트로이의 백성을 도륙하는 휴브리스를 범한다. 그런 남편에 대해 클라임네스트라는 ‘정의의 응징(dike)’을 시도한다. 그러나 정의 실현을 위해 왕이자 남편을 살해하는 그녀의 행위는 또 다른 휴브리스이다. 이처럼 <오레스티아>(Oresteia)의 1부인 <아가멤논>은 3부작을 통해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의 응징(dike)’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휴브리스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둠이 낳은 새벽’이라는 운동감각적 표현은 그 뜻이 은유적으로 확장된다. 즉, 새벽(정의 실현)은 어둠(휴브리스)의 산물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은유는 후에 클라임네스트라에 의해 되풀이 된다. 승리의 소식을 듣고 그녀가 재단에 제물을 바치자, 코러스는 무슨 기쁜 소식 때문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기서의 표현은 보다 노골적이다. 새 날은 밤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신체 감각적 느낌은 은유적인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이중적이다. 겉으로 보면 이 대사는 밤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 새 날이라는 기쁨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겉 뜻 속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밤이라는 도덕적 악에서 새 날 즉, 정의 실현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클라임네스트라가 계획하는 행위이다. 남편을 살해하려는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파수꾼의 대사로 돌아가, 승리의 봉화불에 환호하던 그는 클라임네스트라에게 이 소식을 알리려 한다.

    왕비에게 기대하는 행동들은 모두 ‘위로 올라가는’ 운동감각적 느낌을 준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는’ 신체적 경험은 “나는 기분이 들떠 있다(I'm feeling up)”에서처럼 행복이나 기쁨을 은유할 수 있다.56) 이렇게 위 대사의 신체적 느낌은 은유적으로 확장되어 ‘절망에서 일어나 기뻐하라’는 뜻을 암시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동작은 개처럼 누었다가 일어나는 것과도 연관이 되면서, 새로운 상황을 상승하는 움직임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기쁨을 뒤로 한 채 파수꾼은 갑자기 근심걱정에 빠진다. 왜냐하면 아가멤논의 집안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며 서둘러 나가고, 뒤를 이어 코러스가 들어온다. 코러스는 아내인 헬렌(Helen)을 트로이 왕자 파리스(Paris)에게 빼앗긴 메넬라오스(Menelaus)와 그의 형 아가멤논의 분노를 다음과 같이 새끼를 약탈당한 독수리에 비유한다.

    코러스는 두 왕의 처지를 용감한 맹수인 독수리가 새끼를 약탈당한 것에 비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분노는 성난 독수리의 광분한 날개 짓을 통해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은 시각적 이미지와 소리를 동시에 수반하는 점에서 공감각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그들은 약탈자 트로이를 응징한다. ‘정의의 응징(dike)’은 코러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위 대사는 트로이에 대한 응징을 신체 감각적으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미 토끼를 찢어 죽이고, 이로 말미암아 뱃속의 새끼까지도 피를 토하며 같이 죽는 것을 우리는 신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체 감각적 느낌에서 ‘정의의 응징(dike)’이그 성격을 드러낸다. 즉, 정의 실현은 또 다른 끔찍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강렬한 신체 감각적 경험이 은유적인 의미로 확장된 결과이다. 이처럼 위 대사는 ‘정의의 응징(dike)’이 곧 ‘휴브리스’가 된다는 생각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신체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응징이 ‘찔러 죽이자’, ‘피가 뿜어져 나오는’ 행위로 묘사된 것이다. 이런 신체 감각적 이미지는 후에 클라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할 때 반복된다. 언제나 ‘정의의 응징(dike)’은 문자적인 언어로 이해되지 않고 신체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코러스는 트로이에서의 승리를 예감하는 노래를 부른 다음,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묘사한다. 아가멤논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트로이를 쳐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바다의 여신은 앞으로 있을 잔악한 대학살을 막기 위해 폭풍우를 일으켜 아가멤논의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한다. 이에 아가멤논은 바다의 여신에게 청을 하고, 여신은 그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단다. 즉, 아가멤논보고 그의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아가멤논은 고심 끝에 사랑하는 딸을 죽이기로 한다. 그는 왕으로서 피눈물이 나는 아픔을 참고 정의 실현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코러스는 다음과 같은 10행의 시로 설명하고 있다.

    위 대사들은 모두가 신체 감각적 체험을 통해 관객의 마음속에서 ‘가상적 행위’가 생생하게 일어나도록 고안되었다. 예를 들어 ①행에서 몸을 두 번 구부리며 애원하는 행동, ②행에서 옷으로 몸을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행동, ③행에서 재단에 바치는 희생양처럼 올라가는 소녀의 몸, ④행에서 말처럼 재갈이 물린 소녀의 입, ⑤행에서 땅에 떨어져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옷 등은 힘없는 한 소녀의 희생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여, 마치 그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와 같은 신체 감각적 느낌을 통해 위대사는 강렬한 감정을 일으킨다. 특히 그것은 ekplisis 즉, 아주 측은하거나 공포스러운 장면이 불러일으킨 망연자실의 감정이다.58) 이와 같은 망연자실의 감정은 이피게니아가 성난 장수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옷을 벗고 맨몸으로 호소할 때 절정에 이른다. 이피게니아의 입은 아가멤논의 명에 따라 재갈이 물려있고, 따라서 그녀는 옷을 흘려 내려 힘없고, 무고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소녀의 몸으로 마지막 호소를 하려는 것이다.59) ‘가슴 아픈 희생’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위 대사들은 또 다시 은유적 차원에서 극의 주제를 환기시킨다. 위 장면은 어린 자식을 희생시키는 점에서 독수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뱃속의 토끼 새끼를 연상케 한다. 두 경우 모두 정의 실현을 위해 무고한 어린자식들을 무참히 희생시킨다. ‘정의의 응징(dike)’을 위한 행위는 또 다른 죄를 범한다는 극의 주제가 이처럼 이피게니아의 희생장면에서도 신체 감각적으로 체험된다.

       3.2. 비유에 의한 신체 감각적 체험

    <아가멤논>에서 신체 감각적 체험은 은유, 직유, 환유 등을 사용하는 비유법적 대사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예 중의 하나가 ‘활짝 피어나는 꽃’의 이미지일 것이다. 승리를 전하러 온 전령은 귀향하는 아가멤논의 군대가 한밤 중 바다의 폭풍을 만나 대재앙을 겪은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들은 트로이 백성들을 모두 도륙한 아가멤논의 군대에 분노하여 그들을 폭풍으로 응징했고, 그 결과가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꽃이 활짝 피어나듯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물 위에 퍼져나가는 광경이었다. 이처럼 전령은 시체들이 물 위에 둥둥 떠오르는 것을 ‘꽃이 활짝 피는’ 동작에 비유하면서, 그 광경을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런 감각이 불러일으킨 지배적인 감정은 망연자실(ekplisis)의 감정으로, 신들이 행하는 ‘정의의 응징(dike)’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면서 이 대사는 2차적인 느낌을 곧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과 ‘피어나는 꽃’의 상충되는 이미지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치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일 만큼 비정상적인 느낌을 준다. 느낌은 생각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정의의 응징(dike)’과 관련하여 상기될 수 있다.

    유사한 비유가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라임네스트라에 의해 사용된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한 순간의 희열을 코러스에게 다음과 같이 기쁘게 설명한다.

    여기서 클라임네스트라는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의 얼굴에 뿌린 검붉은 피가 큰 기쁨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갓 피어난 꽃봉오리가 신의 은혜로운 소나기를 맞고 활짝 피어나는 운동감각에 비유했다. 여기서의 신체 감각적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수의 환희를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정의의 응징(dike)’의 성격에 대해서도 개념화 한다. 그것은 독수리의 응징처럼 ‘피가 터져 나오도록 하는’ 행위로서, 또 다른 죄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은 ‘검붉은 피의 소나기’와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비정상적인 결합을 통해서도 암시된다. 즉, 클라임네스트라의 정의 실현은 비정상적이고 사악한 면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느끼는 정의실현의 환희는 코러스에게 혐오감을 준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이미 코러스의 노래에서 암시되었다.

    여기서 코러스는 옛 격언을 말한다. 인간사에는 좋은 일이 후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패러독스를 코러스는 ‘고통의 꽃이 피어난다’고 신체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작품의 주제는 다양한 신체 감각적인 대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인간세상에서 승리의 행운이 고통을 불러들이고, 정의실현은 또 다른 범죄를 꽃 피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오레스티아> 3부작의 내용이다.

    작품의 주제는 빛과 어둠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서도 환기된다. <아가멤논>은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에서 시작해서 대낮으로 옮겨진다. 이와 같은 신체감각적 변화는 은유적으로 절망의 시간에서 기쁨의 시간으로, 도덕적 악의 시간에서 도덕적 선의 시간으로 이동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암시에도 불구하고 대낮은 아직도 어둠이다. 왜냐하면 보다 큰 고통과 도덕적 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파수꾼과 클라임네스트라의 대사에 의해 지적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들에게 새벽(빛)은 밤(어둠)의 자식인 것이다. 여기서 빛의 모호한 성격이 드러난다. 그것은 빛이자 어둠인 셈이다. 이와 같은 느낌은 대재앙을 드러내는 햇빛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 앞서 논의한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밝은 태양은 시체들로 꽃을 피우는 바다를 드러낸다. 그리고 코러스는 밤에 행해진 이피게니아의 희생이 태양 빛 아래 선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어둠 속에서 행해졌던 아가멤논 군대에 대한 응징의 결과를 아침 햇빛이 드러내는 것이며, 후자는 밤에 무고한 소녀를 죽인 ‘죄(hubris)’의 결과가 눈부신 태양 아래 드러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두 경우 모두 암흑 속에 자행되고, 햇빛은 옳지 못한 일의 결과를 드러낸다. 여기서의 빛의 신체 감각적 경험은 희망이나 도덕적 선이 아닌 그 반대의 경우로서 ‘망연자실’의 감정을 일으킨다. 이처럼 빛은 상대적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빛은 다른 사람에게 암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령은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아가멤논을 코러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전령은 아가멤논의 정체를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인 것이다. 이런 신체 감각적 느낌은 은유적으로 아가멤논이 기쁨과 도덕적 선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전령에게의 빛은 클라임네스트라나 아이기스토스(Aegisthus)에게 암흑이다. 그들에게 아가멤논은 슬픔과 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가멤논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기스토스는 비로소 낮의 빛을 보게 된다.

    아이기스토스에게 빛은 곧 복수이다. 아가멤논이 살해된 날 그는 비로소 환희에 찬 빛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빛의 이중적인 신체적 느낌은 곧 ‘정의’의 모호성을 연상시킨다. 아가멤논의 정의의 빛은 클라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범죄이며, 클라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정의의 빛은 코러스를 비롯한 백성들에게 악인 것이다.

    이중적인 느낌은 불의 체험에도 있다. 클라임네스트라는 코러스에게 승리의 횃불이 릴레이 되어 전해지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빛이 환희에 차서 춤을 추는 것은 그 자체가 신체 감각적인 표현이다. 이런 운동감각적 느낌은 곧 클라임네스트라의 심정을 드러낸다. 그녀는 아가멤논 군대의 승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쁨에는 복선이 깔려 있다. 그녀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복수의 시간이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그 환희의 기쁨에 들뜬 클라임네스트라의 눈에 봉화불은 기뻐 춤을 추는 모습으로 보인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녀는 모든 제우스의 재단에 불을 밝힌다. 그 불의 느낌에 대해 코러스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이제 하늘로 치솟는 눈부신 불길은 신체 감각적으로 승리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한다. 따라서 코러스는 재단의 불이 “무섭도록 밝게 타는 빛”이라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들의 예감은 정확했다. 불길은 클라임네스트라의 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복수의 불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코러스는 그것을 ‘무섭게 타는 빛’이라고 신체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그녀가 밝힌 재단의 불은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를 제우스에게 기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아가멤논을 살해하기 위해 집안으로 유인하고 나서 제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기원한다.

    복수의 불길은 아가멤논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카산드라(Cassandra)에게도 미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에게 앞으로 닥칠 일을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여기서 앞으로 일어날 운명은 신체 감각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몸을 불태우는 불길’이다. 카산드라는 그 불길을 아폴로와 연결시키면서 의미화 시킨다. 즉, 그녀는 아폴로가 보낸 운명의 불길에 의해 파멸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차적 의미 뒤에는 이차적 의미가 암시된다. 카산드라는 클라임네스트라가 자기를 죽일 것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길은 클라임네스트라의 복수를 신체 감각적으로 느끼게도 해준다. 이처럼 모호한 불길의 성격은 정의로도 확대된다. 그 불길은 클라임네스트라에게 정의의 불길이지만,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에겐 죄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호성은 극에 자주 등장하는 그물의 비유에서도 반복된다. 그물을 던지는 행위는 <아가멤논>에서 정의 실현의 행위와 밀접히 연결된다. 코러스는 트로이를 응징하는 제우스의 뜻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체 감각적으로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사로잡는 느낌을 준다. 제우스의 정의는 그만큼 빈틈없이 실행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물망이 너무 촘촘하여 무고한 트로이 백성들까지 희생시키는 것에 있다. 그물은 신의 정의만이 아니다. 그것은 클라임네스트라의 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몸에 던져질 그물망을 다음과 같이 예감한다.

    이제 그물은 복수의 올가미가 된다. 그것은 영웅인 아가멤논을 유인하여 살해하려는 사악한 그물인 것이다. 따라서 코러스는 다음과 같이 슬퍼한다.

    그물이 사악한 거미줄로 비유되는 것이다. 이런 은유 속에 거미줄에 걸린 수컷 거미는 암컷 거미에게 먹히고 만다. 그러나 사악한 그물은 클라임네스트라의 편에서 보면 정의의 실현이다. 따라서 아이기스토스는 다음과 같이 기뻐한다.

    이처럼 <아가멤논>에서 정의와 관련된 모든 현상은 이중적이다. 그물의 경우도 누구에겐 정의의 그물이지만, 다른 누구에겐 사악한 그물이다. 여기서 ‘던져진 그물’이 불러일으키는 신체 감각적 느낌은 무언가를 ‘옭아 메는 것’이다. 여기에 정의의 이중적 느낌이 있다. 정의는 죄인들을 옭아 메어 단죄하지만, 동시에 음흉한 범죄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50)<아가멤논>의 주제가 ‘정의의 응징(dike)’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학술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은 해석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가 키토(H.D.F. Kitto)이다. H.D.F. Kitto, Greek Tragedy (Garden City: doubleday & Company, Inc., 1954). 본 논문은 특히 이 저술의 III장 The ‘Oresteia’를 참고했다.  51)이런 분류는 테플린(Oliver Taplin)에 따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사와 합창의 구분에 따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는 부적합하고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두 부분이 섞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등퇴장의 시퀀스(sequence of exit and entry)’에 따른 구조이다. The Stagecraft of Aeschylus: The Dramatic Use of Exits and Entrances in Greek Tragedy (Oxford: Clarendon, 1989), pp.53-55.  52)Aeschylus, The Oresteia, trans. Robert Fagles (New York: Bantam Book, 1977), p.105. 이후 인용되는 <아가멤논>은 별도의 설명이 없는 한 이 판본에서 나온 것이다. 괄호는 행을 표시한다. 따라서 앞으로 별도의 페이지 수 없이 행을 찾아가면 된다.  53)Lakoff and M. Johnson, (2009), 앞의 책, 39쪽.  54)은유는 우리의 물리적(신체적) 그리고 문화적 경험에 뿌리를 둔다. 왜냐하면 문화마다 신체적 경험을 달리 의미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에서는 미래가 우리 앞에 있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미래가 우리 뒤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책, 38쪽 참조.  55)사이먼, 앞의 책, 1466쪽.  56)Lakoff and M. Johnson, (2009), 앞의 책, 38쪽.  57)Aeschylus, , trans. Tony Harrison, Dramatic Verse 1973-1985, by Tony Harrison(Newcastle upon Tyne: Bloodaxe, 1985), p.196. 여기서는 해리슨이 번역한 <아가멤논>을 사용했다. 그리고 각 행은 시각적 이미지에 따라 재배열한 것이다.  58)Op. cit., p.28.  59)Ibid., p.129.  60)Aeschylus, Oresteia: Agamemnon, The Libation Bearers, The Eumenides, trans. Richmond Lattimo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4)  61)이 대사의 번역은 “무섭도록 밝게 타는 빛”(the light that burns with dreadful brightness)으로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사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번역했다. 이에 대해서는 John J. Peradotto, “Some Patterns of Nature Imagery in The Oresteia,”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vol.85 (1964): p.390 참조.

    4. 결론

    언제부터인가 연극대사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연극대사는 지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일차적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연극의 역사를 통해 실현되었다. 연극대사는 점차 문자적·개념적 언어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경향은 토론을 극에 도입한 사실주의 연극이나 서사극 등의 현대연극에서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연극대사는 오늘날 그 힘이 소진된 것처럼 판단되기도 한다. 아르또와 같은 입장에 따르면, 문자적 언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전달하기에 부적합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언어적 연극을 주장하는 입장이 나온다. 이런 추세는 시청각적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을 얻기도 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연극 혹은 포스트 드라마의 시대라 일컫는 오늘날 마치 대세는 ‘비언어적 연극’인 것처럼 여겨진다. 과연 오늘날 연극대사는 그 생명력이 다한 것일까?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의 기본가설은 대사가 신체 감각적인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적 언어가 아닌 구어적 언어에 뿌리를 둔 그리스 연극의 대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신체 감각적인 대사는 감각적 경험에 머물지 않고 특별한 느낌과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생각의 신체화’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언어가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에 뿌리를 둔다는 인지과학의 입장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신체 감각적인 대사는 ‘보는 경험’을 본질로 하는 연극의 속성에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비언어적 연극’에 몰입된 오늘날의 연극담론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 과연 연극이 언어(말)로부터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언어(말)는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비언어적 수단이 갖지 못한 수사학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연극적으로 ‘장식된 언어’는 나름대로의 미학적 즐거움의 원천이다.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언어(말)는 연극에서 필요불가결하다. 언어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필수적인 수단이며,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언어(말)는 신체감각적 체험을 일으킬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신체화된 언어’는 어떤 행위나 상황을 몸으로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지적인 생각을 촉발시킨다. 이런 점에서 신체 감각적 연극대사는 ‘감각적 느낌을 통한 지적 이해’라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수행한다. 비언어적인 표현이 각광을 받는 오늘날, 우리가 연극의 본질을 언어(말)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편파적인 시각을 벗어나, 연극대사에 관한 균형 있는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속연구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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