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udrillard : Qu’est-ce que l’objet?

보드리야르: 사물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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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Dans le monde postmoderne de Baudrillard, la connaissance est un duel, et ce duel entre le sujet et l’objet entraîne la perte de la souveraineté du sujet, faisant de l’objet même de l’horizon de sa disparition. Bref, le jeu entre le sujet et l’objet est fini, le sujet doit renoncer à la souveraineté du monde des objets. Selon l’opinion de Baudrillard, “Nul n’est aujourd’hui en mesure de s’assumer comme sujet de pouvoir, sujet de savoir, sujet de l’histoire.” La seule stratégie possible est celle de l’objet. Au point de vue de Baudrillard, nous ne pouvons saisir le monde qu’à partir d’un point oméga extérieur à l’humain, à partir d’objets qui jouent pour nous le rôle d’attracteurs étranges. Dans la pensée de Baudrillard, “l’univers n’est pas dialectique―il est voué aux extrêmes, non à l’équilibre.” Et les objets progressent désordonnément, deviennent extrêmes et dépassent les limites. Ainsi Baudrillard veut analyser la trajectoire et la prolifération des objets. Aujourd’hui, ce à quoi on n’échappe pas, ce n’est pas au désir, c’est à la présence ironique de l’objet, c’est à son défi et à sa séduction. L’objet est la matrice de la séduction et de la fascination, le sujet tombe dans le charme et le piège de l’objet. D’ailleurs l’objet est plus malin que le sujet, et devient diabolique à mesure qu’il séduit le sujet. En somme le sujet ne peut pas échapper au principe du mal. “Le principe du mal s’exprime dans le malin génie de l’objet, il s’exprime dans la forme extatique de l’objet pur, dans sa stratégie victorieuse de celle du sujet.” Il nous semble du moins que l’objet peut avoir une vie propre, sortir de la passivité de son usage pour acquérir une sorte d’autonomie et peut-être même une capacité de se venger d’un sujet trop certain de le maîtriser. Pour Baudrillard, le triomphe et la vengeance d’objet signifient que la position de sujet est devenue intenable. Donc, il avance un paradoxe que nous devons recevoir la position d’objet. Au point de vue de Baudrillard, le sens et la position d’objet ont déjà changé. C’est l’inversion du jeu: si le sujet a pu faire événement dans le monde de l’objet, aujourd’hui l’objet fait événement dans le monde du sujet. Contre toutes les intériorités du sujet qui essaie de dominer l’objet, il faut réveiller cette externalité, cette puissance extérieure de l’objet. Il est vrai qu’il y a là un parti obscur et difficile: passer du côté de l’objet, prendre le parti de l’objet. Mais on doit considérer la bonne forme alternative du rapport entre le sujet et l’objet.


  • KEYWORD

    objet , sujet , extase , malin genie de l’objet , suprematie de l’objet

  • 1. 서론

    보드리야르는 탈근대 세계에서 자신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상한다. 이 새로운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그는 현실원칙과 인식원칙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궁극적인 현실을 개념화하려는 시도였으며, 인식원칙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대상에 대한 주체의 우위를 전제로 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바라보는 탈근대 세계에서는 “인식은 주체와 대상간의 싸움이며, 이러한 싸움은 대상 자체를 사라짐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주체의 절대적 지배의 상실을 초래한다.”1) 요컨대 주체와 대상간의 게임은 끝났으며, 주체는 사물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권력의 주체, 지식의 주체, 역사의 주체임을 자처할 수 없다.”2) 그러므로 가능한 전략은 대상(사물) 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인간과 무관한 최종 단계로부터, 우리를 기이하게 끌어당기는 힘의 역할을 하는 사물로부터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유에서 “세계는 변증법적이지 않다. 세계는 균형을 향해서가 아니라 극단으로 나아간다.”3) 그리고 사물들은 논리적으로 혹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오로지 무질서하게 혹은 되어가는 대로 발전하며, 극단적이 되고 있고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리하여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궤적과 사물이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 증식하고 확장되는 것을 분석하고자 한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분석은 자신의 사유의 뿌리에 해당하는 『사물의 체계 Le système des objets』로부터 시작되어 『숙명적 전략 Les Stratégies fatales』, 『자기 자신에 의한 타자 L’autre par lui-même』, 『불가능한 교환 L’Échange impossible』에서 아이로니컬한 양상을 띠면서 구체화된다. 실제로 탈근대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 철학적 주제는 사물 개념이다. 그의 텍스트들을 읽으면, 사물은 언제나 텍스트의 어디에서나 출현한다. 그는 언제나 사물을 사유하고 탐색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때때로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기도 하고 사물을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가 바라보는 사물과 사물세계에 대한 탐구는 사물의 심오한 실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보드리야르의 사유의 근원을 이루는 ‘사물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물과 사물세계를 탐색하는 보드리야르가 극단에 대한 찬양과 변증법과 균형(혹은 통합)에 대한 거부를 통해 어떻게 사물세계와 자신의 사유방식을 연결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사물과 사물세계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전은 대체로 주체를 압도하고 유혹하는 사물의 힘, 즉 주체에 대한 사물의 우위, 사물의 증식과 사물의 승리(복수)와 관련된다. 맨 먼저 보드리야르의 사유세계에서 일관된 철학적 주제인 사물의 개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탈근대 세계에서 사물이 극도로 증식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물의 황홀경은 어떤 양상을 띠며, 우리는 왜 사물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되는지, 사물이라는 악마는 왜 순수한 사물의 황홀한 형태로, 주체의 전략에 승리하는 사물의 전략으로 나타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사물의 운명에 연결되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숙명적 전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물의 숙명적 전략이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주체와 사물의 변증법의 이면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 기묘한 전략을 지닌 사물의 수수께끼 속에서 사물의 증대하는 매혹과 유혹, 사물의 우위와 복수를 분석하고 주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적 형태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것이다.

    1)Jean Baudrillard, L’Échange impossible, Galilée, 1999, p. 35(약호 EI).  2)Jean Baudrillard, Les Stratégies fatales, Grasset, 1983, p. 166(약호 SF).  3)SF, p. 9.

    2. 사물의 개념

    탈근대 문명에 대한 탐구에서 보드리야르의 독창성을 집약하는 철학적 주제는 사물 개념이다. 사실 한 문명 전체의 위상은 사물의 존재방식과 더불어 변화한다. 문명 이해의 문제를 사물의 주제를 통해서 사유하고 탐구하는 것은 보드리야르의 텍스트의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사물의 존재와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먼저 보드리야르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예전에 주체가 사물에 자신의 리듬을 부과 했다면, 오늘날에는 사물이 주체에게 자신의 불연속적인 리듬을 부과하게 될 것이다”4)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그는 사물의 변화된 환경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탈근대 문명이 낳은 체계적이고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주체를 유혹하고 매혹하는 사물과 사물세계를 탐구한다.

    보드리야르의 사유세계에서 사물은 전형적인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는 이러한 관점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는 주체의 문제와 결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문제는 바로 사물의 해결책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그의 사유방식으로 존속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시대와 연결된 이유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생산의 우위에서 소비의 우위로의 이행은 사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했다. 물건을 하나씩 만들어내는 시대에는 모든 사물은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대량생산과 더불어 물건이 대량으로 소비되는 시대에는 사물의 개념 자체가 바뀐다. 이제 사물은 그것과 똑같은 다른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대량생산되는 사물은 사물의 의미와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사물은 단순한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의미작용을 하는 실체이다. 실제로 보드리야르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체 속에서 만들어진 사물들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에게 말했던 것, 즉 사물들이 만들어 내었던 기호의 체계이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호의 세계에서는 교환과 사용, 가치와 등가를 초월한 사물의 지위 변화에 대한 꿈이 존재했다. 이 기호학적 형식화 이면에는 사물의 근원에 대한 무의지적 기억이 존재했다. 보드리야르에게 사물은 거의 정열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혹은 어쨌든 사물이 고유한 삶을 지닐 수 있으며, 나아가 일종의 자율성과, 사물의 지배를 너무도 확신하는 주체를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 자기 사용의 수동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물은 늘 무기력하고 말 없는 세계로 간주되었는데, 사람들은 사물의 이러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구실로 마음대로 이용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사물의 이러한 세계는 자신의 사용을 넘어선 무엇인가 말할 것을 지녔다. 말하자면 사물세계는 아무 일도 그저 단순히 일어나지 않는 기호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기호는 언제나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은 실재계 뿐만 아니라 실재계의 부재, 특히 주체의 부재를 나타냈다.

    보드리야르에게 이전의 경계와 목적을 넘어서는 사물과 사물세계의 탐구는 다영역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다양한 접근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이 무엇이건 간에 보드리야르를 항상 사로잡은 것은 사물이 해방되고 부재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 그 자체 속에 ‘불안한 기이함’으로 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물은 바타이유가 말한 바 있는 결코 해결되지도 구원받지도 못할 ‘저주받은 부분’에서 생겨날지도 모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사물의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주체가 지배할 수 없는 사물의 ‘잔재’, 말하자면 주체가 풍부함과 축적을 통해 일시적으로 대처한다고 믿고 있지만 주체와 사물 사이의 관계의 장애물을 증가시킬 뿐인 사물의 ‘잔재’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주체는 사물을 통해 소통하지만, 그 다음에는 사물의 증식이 이 소통을 정지시킨다. 사물은 끔찍한 역할을 맡는다. 그것은 “사물이 모든 단순한 기능성을 실패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자격을 가진 관계자”5)와 같다. 바로 그 점에서 사물은 아이로니컬하게 보드리야르의 관심을 끄는 것처럼 보인다.

    4)Jean Baudrillard, Le système des objets, Gallimard, 1968, pp. 222-223.  5)Jean Baudrillard, Mots de passe, Pauvert, 2000, p. 17.

    3. 사물의 황홀경

    탈근대의 세계는 모델과 패션, 초과실재와 시뮬라시옹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탈근대 문화는 경쟁과 표현의 유희에서 불확실성과 현기증의 유희로 이행하고 있다. 토대에 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형식적 특성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지나치게 증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황홀경의 형태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인 것의 황홀경(대중), 육체의 황홀경(비만), 성의 황홀경(외설스러움), 폭력의 황홀경(공포), 정보의 황홀경(시뮬라시옹)에 빠져들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견해에 따르면 상품·자본·패션·광고·성·육체·미디어·정보·코드·모델·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예술 등은 인간을 압도하고 유혹하는 사물들이다. 그러면 사물의 황홀경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도처에서 사물이 범람하고 포화상태에 도달함으로 인해 사물이 이상증식하고 이상발달하게 된다. 이는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사물의 황홀경이다. 사물의 황홀경은 사물이 극도로 증식하고 확장되는 것이다. 황홀경은 스스로를 벗어나거나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황홀경은 의미를 상실하기에 이르기까지 자기 주위를 맴돌며 자신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태 속에서 빛나는 모든 사물에 고유한 특성이다.”6) 패션은 아름다운 것보다 더 아름다운 아름다운 것, 즉 아름다운 것의 황홀경이자 소용돌이치는 미학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태이다. 텔레비전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실재, 즉 실재의 황홀경이다. 포르노는 성보다 더 성적인 섹스, 즉 성의 황홀경이다. 광고는 상표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태 속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폐기될 때까지 소용돌이치는 상품의 황홀경이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예술도 그 자체에서 벗어나고 그 자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예술이 실현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예술은 하이퍼리얼하게 되고 자신의 공허한 본질 속에서 자신을 초월하려는 경향이 있다. 병의 물기를 빼는 병걸이를 전시하는 뒤샹의 창조적 행위만큼이나 순수하고 공허한 형태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빛나게 하는 것은 거의 드물다. 평범한 사물의 황홀경은 동시에 회화의 행위를 자신의 황홀한 형태에 이르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탈근대 세계에서 사물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위반하고 있다. 사물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혹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오로지 무질서하게 혹은 되어가는 대로 발전한다. 사물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극단적이 되고 있다. 사물과 사물의 본질이 더 이상 조화롭게 될 수 없는 것은 사물이 자신의 정의를 무시하고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물은 사회적인 것보다 더 사회적인 것(대중)이 되고, 뚱뚱한 것보다 더 뚱뚱한 것(비만)이 되고, 격렬한 것보다 더 격렬한 것(공포)이 되고, 진짜보다 더 진짜(시뮬라크르)가 된다. 이는 사물세계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견해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예시가 된다.

    탈근대 시대에는 사물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는 사물의 은밀한 특성을 급진화하는 미묘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진짜보다 더 진짜는 가짜보다 더 가짜에 대립된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은 대립되지 않고 추한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추구되며,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이 대립되지 않고 숨겨진 것보다 더 숨겨진 것이 추구된다.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이 대립되지 않고 움직이는 것보다 더 움직이는 것이 추구된다. 진짜와 가짜는 구별되지 않고 가짜보다 더 가짜가 추구된다. 이러한 결과는 소용돌이를 벗어나면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 즉 초과실재로 예증되는 매혹적인 것이 탄생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극단과 극치의 ‘소용돌이’다.

    게다가 사회적인 것의 수준에서 사회적인 것보다 더 사회적인 것은 바로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모든 에너지(무기력·저항·침묵)를 흡수하는 대중이다. 사회적인 것의 논리는 거기서 자신의 극단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것의 논리는 자신의 목적성을 뒤집고 무기력과 전멸의 상황에 도달하는 동시에 황홀경에 이르는 지점을 발견한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대중은 사회적인 것의 황홀경, 사회적인 것의 황홀한 형태이자, 사회적인 것이 자신의 완전한 내재성 속에 반영되는 거울이다”7)

    역시 다른 점에서 실재는 상상계를 위해 사라지지 않는다. 실재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 즉 초과실재를 위해 사라진다. 시뮬라크르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것이다. 공허는 가득함 앞에서가 아니라 포화상태 앞에서 사라진다. 말하자면 가득한 것보다 더 가득한 것은 바로 비만 속에서 육체의 반응, 외설스러움 속에서 성의 반응, 공허에 대한 해제 반응(abréaction)이다. 움직임은 부동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속도와 가속 속에서, 말하자면 움직임보다 더 움직이는 것 속에서, 움직임을 극단에 이르게 하는 움직임 속에서 사라진다. 성은 승화와 억압과 도덕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성은 성보다 더 성적인 것, 즉 포르노 속에서 사라진다. 초과성적인 것(hypersexuel)은 초과실재적인 것(hyperréel)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시적인 것은 모호함과 침묵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스러움 속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논리에 비추어 보면 황홀경은 더 높은 수준처럼 보이고 배가되고 강화된 초과실재와 (완전히 명백하고 숨겨진 것이라고는 없는) 외설스러움의 형태이다. 따라서 탈근대 세계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전은 과도한 상품·과도한 광고·과도한 패션·과도한 미디어·과도한 정보·과도한 메시지와 욕구를 확장하고 분비하면서,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성장과 복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합리적 목적과 경계를 넘어서면서 사물이이상발달과 이상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6)SF, p. 12.  7)같은 책, p. 14.

    4. 사물이라는 악마

    20세기 초부터 과학은 미시적 차원에서 분석과 관찰의 장치가 사물의 변화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분석과 관찰에 의해 소외받는 것에 불만족해 하는 사물은 분석되고 관찰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분석되고 관찰되는 것을 도전으로 간주하고 이에 다른 도전으로 응하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이 분석을 통해 실체화하는 주체와, 이 주체가 자신의 계산과 조작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사물(대상) 사이의 싸움에 대한 가정은 우리의 관심을 끌 만큼 매혹적이다. 이 가정은 환상적 명백함에 속한다. 그것은 사실 같지 않은 세계의 객관성에 대한 가정이다. 여기서는 무기력과 수동성이 아니라 사물(대상)을 예속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게 하는 악마(malingénie)를 가정해야 한다. 데카르트의 악마는 분명하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그를 유혹하려고 한 주체의 술책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신의 주체성을 지배하고 압도할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드리야르의 악마는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주체의 인식론적 기만보다 훨씬 더 교활한 사물 그 자체이다.”8) 왜냐하면 보드리야르의 악마는 주체성의 철학의 종말을 바라는 숙명적 운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정보·대중 등과 같은 사물은 이 숙명적 운명을 잘 구현한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사물이라는 악마(malin génie de l’objet)는 과학적이고 인지적인 이해와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9) 이전의 사물이 과학이 발명한 법칙과 개념적 도식을 따르긴 했지만, 오늘날 사물은 통제에 저항하고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모델에 반항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사물은 죽은 물질로서가 아니라 이해와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양자처럼 악마적이고 반항적이고 능동적인 동인으로서 특징지어진다. 더구나 인문과학의 영역에서 조사의 대상(사물)인 대중이 자신의 본성을 실제로 폭로하거나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의 행위에 부과하는 개념적 도식에 따른다고 확신할 수 없다. 이 경우에 조사의 대상(사물)은 분석과 관찰에 저항할 수 있으며 사라짐으로써, 질문받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반항함으로써 혹은 다른 술책을 통해서 반응할 수 있다. 따라서 분석적 주체의 지위가 상대성과 불확실성으로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위가 완전히 역전될 수 있다. 즉 분석된 사물은 사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통해서 도처에서 분석의 주체를 물리치고 주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 이와 같은 알 수 없고 강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물세계의 투영적 비전은 현대물리학의 결과, 말하자면 불확정성·불확실성·상대성의 결과이며 “숨겨진 극단에서 모든 물리학을 엿보는 파타피지크(상상적 해결책의 학문)”10)에 있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전망에는 조사라는 시뮬라시옹11) 장치의 영역에서 대중이 희미해지는 방식, 혹은 미디어와 텔레비전의 스크린 이면으로 사건이 사라지는 방식이 존재한다. 사건이 거울 같은 반사의 스크린이 아닌 굴절의 스크린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이 주체의 상상적 장소이었던 반면, 망·회로·시뮬라시옹 모델·기록과 통제의 장치로 이해되는 스크린은 주체가 사라지는 장소이다. 텔레비전의 빛은 내생적(內生的)이다. 그것은 내부에서 생겨나며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치 스크린 자체가 거기서 발생하는 현상들의 본원적 장소이자 원인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이는 바로 시뮬라시옹 장치의 고도화의 결과이다.

    보드리야르는 “대상(사물)은 과학의 영역에서 사라지고, 사건과 의미는 미디어의 영역에서 사라진다”12)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라짐 자체가 전략 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라짐이 정보장치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통제의 스크린이 어떻게 보면 사라짐의 스크린으로 되는―사물의 고유한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스크린에 개인이나 대중은 사라짐의 패러디한 행위로 반응한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면이 되는데, 이는 바로 사라지는 방식이다. 오늘날 그들은 스마트폰·텔레비전 같은 피상적인 스크린 속으로 사라진다. 미디어는 사건·사물·좌표계를 사라지게 한다. 미디어는 사물 자체의 전략일 수 있는 사라짐의 전략에 구체적인 매체의 구실하는가? 실제로 스크린의 이면에서 사물은 사라진다.

    어떻게 보면 스크린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스크린도 여론조사의 스크린도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마치 말이 사물을 나타내고 이미지가 실재를 나타내듯이 여론조사가 무엇이건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념과는 반대로 모델은 재현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가상적이고 불확실하고 비지시적인 시뮬라시옹의 영역에 속한다. 모델 체계에 재현 체계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질적인 두 체계 사이에는 터무니없고 해결될 수 없는 혼합(mixage)이 존재한다. 이는 조작·통계·정보·시뮬라시옹의 체계가 전통적 가치·재현·의지·견해의 체계에 비논리적으로 투영되는 것과 같다.

    여론조사가 어떤 방식으로든 완전하게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여론조사의 규칙은 재현의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의 논리는 객관성의 논리와 일치하긴 하지만, 이 과정 끝에는 어떠한 대상(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별 것 아니다. 미디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시뮬라시옹 안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진짜도 가짜도 아닌 것 속에 있을 때, 모든 윤리는 완전히 위선적이다. 가령 패션의 힘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대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불분명함과, 일반화된 유혹의 효과 속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의 분화되지 않은 소용돌이를 이용하는 것인 한, 패션의 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패션의 윤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여론조사(혹은 미디어)의 윤리에 대해 말하는 사실 같지 않음이 존재한다.

    물론 여론조사가 완전한 신뢰도에 이를 수 있으며 어떤 사실의 정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비극적인 것이 될 터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에서 진부한 생각을 얻어내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비극적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의 기술(technique)에 의해 패배당했다는 것을 뜻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이는 정말 모든 시뮬라시옹이 지향하는 ‘악마적’ 목적이다. 바로 거기서 전멸시키는 테크놀러지가 시작된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바람직한 기능에 대한 가정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테크놀러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실의 왜곡이 기보다는 이 테크놀러지의 객관적 신뢰도에 의한 실재의 왜곡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는 “진실의 시대에 정보는 얼마만큼 유용했는지, 실재의 시대에 과학은 얼마만큼 유용했는지, 사물의 시대에 객관성은 얼마만큼 유용했는지”13)를 반문한다.

    따라서 의미의 체계와 시뮬라시옹의 체계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디어의 이로운 사용을 찬양하는 사람도 미디어의 조종을 규탄하는 사람도 옳다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광고와 여론조사는 판단이 형성되는 의지와 재현의 시공간 속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누구의 의지나 견해를 상실하게 할 수 없다. 똑같은 이유로 광고와 여론조사의 관점에서 그 누구의 의지나 견해를 밝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쨌든 두 체계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불확실한 상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광고와 여론조사가 실제로 의지나 견해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미디어와 정보가 직물처럼 짜는 스크린은 전적으로 불확실한 스크린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불확실한 스크린이다. 이는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불확실한 스크린이 아니라 정보 그 자체와 정보의 과잉에서 생겨나는 불확실한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해결될 수 있었던 전통적인 불확실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불확실성은 따라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결코 제거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론조사를 받고 정보를 갖게 되고 통계되는 우리의 운명이다. 만약 여론의 객관적 진실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고유한 가치와 고유한 의지와 더불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인 것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광고·여론조사·미디어·정보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확신은 인간 소외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훨씬 더 나아가 미디어와 정보의 이론에 연결된 모든 유토피아가 재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일반적인 퇴화의 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의 과잉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사태를 파악하고 비판적 이론을 아이로니컬한 이론으로 대체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만약 우리가 여론조사의 진위를 결정할 수 없음과 여론조사결과의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만약 우리가 여론조사가 무엇이건 말한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무도 확인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있는 그대로의 예상된 이미지 속에서도 통계적 사실의 터무니 없는 거울 속에서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놀이하는 사람이 우연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그는 가능성 혹은 확률을 믿는다), 아무도 운명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통계를 믿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통계의 위대함은 통계의 객관성에 있지 않고 통계의 무의지적 유머에 있다.”14) 이렇게 유머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론조사는 결국 사회적인 것과 사회적 현상을 유연하게 다루는데, 유머는 적어도 이 같은 유연함을 통해 여론조사를 파악하면서 반응한다. 여론조사는 사회적인 것을 심각하게 다루는데, 유머는 여론조사의 불확실한 왜곡의 아이러니를 통해 이 심각함에 반응한다. 따라서 여론조사라는 이 대단한 술책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유머의 통찰 같은 것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여론조사는 객관성의 거울의 함정에 빠져든다. 따라서 “여론조사와 통계에 의해 연출되는 반응의 시뮬라시옹에 대한 반응으로서 철저한 은폐의 결정적 수단이 사회적인 것의 깊숙한 곳에서 출현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의 분석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악마, 대중이라는 악마, 즉 ‘사물이라는 악마’라고 불리는 것이다.”15)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사물은 결코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물은 존재하며 복수한다. 사회적인 것의 내용에 관한 정보의 빛의 나쁜 굴절은 사고나 장치의 불완전함이 아니다. 이러한 굴절은 ‘사물이라는 악마’에서 비롯되고, 사회적인 것의 조사에 대한 사회적인 것의 공격적인 저항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여론조사원과 여론조사 대상자 사이의, 대중과 정치계급 사이의 은밀한 싸움의 형태를 지닌다. 만약 대상이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약 대상이 물음에 서투르게 대답한다면, 만약 대상이 물음에 너무 잘 대답한다면, 만약 대상 자체가 물음을 제기한다면, 이는 분석장치에 부적합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여태껏 과학은 환상적 착오에 의해 자기 대상(사물)의 공모를 언제나 확인해 왔다. 과학은 자기 대상(사물)의 교활함·유연함·공모를 과소평가하는데,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주체의 전략에 대립되는 사물의 전략을 조장한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여론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여론조사는 자신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기능한다. 말하자면 여론조사는 정보의 스펙터클처럼(사람들은 오로지 정보의 스펙터클만을 원한다), 정보를 비웃는 것처럼 기능한다. 여론조사의 무의지적 유머는 여론조사가 모든 정치적 신뢰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결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테스트는 무슨 전략을 대신하겠는가? 이 경우 여론조사는 모든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며 미디어의 함정에 자신의 힘을 맡기게 된다. 미디어는 한 사회의 정치적 기능을 사라지게 하며 대중의 아이로니컬한 무의식에 부응한다. 이 때 대중의 심오한 충동은 실제로 정치계급을 상징적으로 살해한다.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오늘날 대중은 전혀 억압과 조종의 대상이 아니다. 대중은 해방될 필요가 없으며 해방될 수 없다. 대중의 초정치적인 힘은 순수한 사물로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침묵, 대중의 욕망의 부재를 그들에게 말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중을 유혹하고 자극하고 포위하려고 한다. 무기력하고 심오한 대중은 수동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지배력을 행사한다. 대중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동물들이 자신의 동물적 무관심 속에 있듯이 교묘하게 모든 무대와 정치적 담론을 중화시킨다. 오늘날 “대중이 매우 공허한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침묵하는 거대한 항체(anticorps)의 집단적 외설스러움에 기인하며, 자신의 무기력을 체계를 가속하는 에너지로 강화하고 나아가 이 무기력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이 분비하는 무수한 정보로 강화하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사물’의 수축성에 기인한다.”16) 어쨌든 대중은 순수한 사물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주체의 영역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침묵이 말의 영역에서 사라져버리는 순수한 사물이듯이, 비밀이 의미의 영역에서 사라져버리는 순수한 사물이듯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사물로서의 대중의 놀랄 만한 힘이 존재한다. 대중은 정치적인 것의 순수한 사물, 즉 절대 권력의 이상을 구현한다. 대중은 권력의 무서운 꿈을 구체화한다. 이와 동시에 “대중은 권력이 없는 사물, 무가치한 물질화, 정치적 주체성에 접근할 수 없는 철저하면서도 쓸데없고 위험한 항체이다.”17) 여기서 정치적인 것의 시나리오는 전도된다. 이제 권력은 대중을 자기를 뒤쫓아 오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중이 권력을 자기붕괴로 이끌어 간다.

    말하자면 주체에 의해 사물로 구성되었던 모든 것은 주체에게 가상적인 위협을 나타낸다. 노예가 자신의 예속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은 자신의 강요된 객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주체는 어쨌든 상상에 의해 일시적으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사물의 저항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는 사물의 유일한 혁명, 사물의 말 없는 혁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18)라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의 사유세계에서 사물의 이러한 저항과 혁명은 결코 상징적이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호하면서도 아이로니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변증법적이지 않고 숙명적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은 보드리야르 자신의 글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세계는 변증법적이지 않다. 세계는 균형을 향해서가 아니라 극단을 향해 나아간다. 세계는 화해나 통합이 아닌 철저한 대립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바로 악의 원리이다. 악의 원리는 사물이라는 악마로 나타난다. 그것은 순수한 사물의 황홀한 형태로, 주체의 전략에 승리하는 사물의 전략으로 나타난다.”19)

    8)Douglas Kellner, Jean Baudrillard: From Marxism to Postmodernism and Beyond(약호 MPB), Polity Press, 1989, p. 163.  9)SF, p. 160.  10)같은 책, p. 120. 파타피지크(Pataphysique)는 물리학이나 논리학의 일정한 법칙과는 대조적으로 ‘문제들의 부재에 대한 유일한 상상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학문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파타피지크는 기체 상태의 철학이다. 파타피지크는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언어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Jean Baudrillard, Pataphysique, Sens & Tonka, 2002, p. 15). 보드리야르는 문화·기술, 그리고 사회의 지배적인 모델을 뒤집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11)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고 우월한 실재, 즉 초과실재(하이퍼리얼리티)가 산출되는 과정을 뜻한다.  12)같은 책, p. 121.  13)같은 책, p. 126.  14)같은 책, p. 130.  15)같은 책, p. 131.  16)같은 책, p. 133.  17)같은 책, p. 134.  18)같은 책, 같은 쪽.  19)같은 책, p. 9.

    5. 사물의 체계에서 사물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보드리야르의 사물세계에 천착해 보면 ‘사물의 체계’에서 ‘사물의 운명’으로 나아가는 이중의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호·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의 영역을 향한 일반화된 전환의 소용돌이와, 유혹과 죽음의 곁에서 이루어지는 기호의 가역성의 소용돌이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정치경제학·생산·코드·체계·시뮬라시옹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틀래치·낭비·희생·죽음·유혹·숙명적인 것이 있다. 하지만 이중의 이 소용돌이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시뮬라크르는 두 번째 질서에서 세 번째 질서로 옮겨갔으며, 소외의 변증법에서 투명성의 현기증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상징적 교환 이후 유혹과 더불어 꿈은 위반으로 혹은 코드의 가능한 전복으로 사라졌다. 유혹과 더불어 기호의 도전과 기호에 의한 도전에는 더 이상 상징적 지시대상도 없고 사라진 사물도 없다. 가역성의 주도권을 갖는 것, 유혹하고 방향을 바꾸는 주도권을 갖는 것은 사물 그 자체이다. 이는 결정적인 또 다른 연속이다. 말하자면 주체와 담론의 연속인 상징적 질서의 연속이 아니라 놀이 규칙의 연속이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세계의 놀이는 가역성의 놀이다. 주체의 욕망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 이는 바로 사물의 운명이 되고 있다.”20)

    보드리야르는 “모든 내재성에 맞서 주체의 최종원리를 초월하여 사물의 숙명적 가역성을 자극하는 외적인 힘, 즉 외재성을 되살아나게 해야한다. 악의 원리를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21)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러한 방향 전환을 탈근대 세계의 상황을 균형잡히게 하는 하나의 해결책으로 본다. 탈근대 세계에서 사물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적인 숙명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 자체와 우리의 평범함에 내재하는 숙명―자신의 의미에 대한 사물의 무관심―일 수 밖에 없는 탈근대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말 없는 전략으로 활기를 띠는 사물이라는 악마가 연출하는 기묘한 상황, 즉 객관적 질서에 직면한 주체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자신의 놀이에 사로잡힌 사물의 객관적 아이러니를 구성한다. 여기서 보드리야르는 숙명적인 것의 평범한(관례적인) 비전에 맞서 평범한 것의 숙명적인 비전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듯하다. 그는 사물의 전개에 내재하는 도전이 우리 체계의 무관심과 단조로움의 극단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도전은 초월적인 도전이 아니다. 만약 이 도전에 어떤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의 전략이 아니다.

    보드리야르는 탈근대 세계에서 “역사·지식·권력에 대한 주체의 전략은 그 자체에서 사라진다”22)라고 말한다. 이 전략이 실패하지 않는 한, 이 전략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물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태 혹은 황홀한 형태를 허용하면서 전략이 읽혀지고 그 에너지가 전도되는 사점(死點 dead point)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인 것은 자신의 체계적인 확장 속에서 사회적인 것 자체에 숙명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대중은 황홀한 무관심과 정보의 외설성에 빠져들고, 대중이 체계를 중화시키고 무효화하는 상황에서 체계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는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정보를 이용하여 사라지고, 정보는 대중을 이용하여 대중 속에 파고든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는 사회학자와 대중매체 연구가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탈근대 역사의 놀라운 술책이다. 과학은 정밀한 조사와 탐구를 통해 자신의 대상(사물)을 전멸시킨다. 즉 과학은 살아남기 위해 시뮬라시옹 모델로서의 대상(사물)을 인위적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에서 기술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물의 복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주체는 자신의 좌표계를 상실하는 동시에 사물의 통제를 상실하며 자신이 사물의 연속성을 기대했던 곳에서 자기 권력의 역전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한다.23) 사물과 세계는 주체와 과학에 의해 한 순간 깨닫긴 했지만 오늘날에는 격렬하게 다시 일어서서 투명하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숙명의 형태, 즉 사물과 세계의 방향전환의 형태이다.

    보드리야르의 사유세계에서 ‘숙명적’이라는 말에는 숙명론적인 것도 종말론적인 것도 없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결정론적이지도 불확실하지도 않지만 높은 차원의 필연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 세계―이 세계에서는 사물의 사라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물은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한다―속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의 변화이다.24) 보드리야르에게 주체를 초월하여 주체의 사라짐에 연관되는 모든 것은 숙명적이다. 더 이상 인간적 전략이 아닌 모든 것은 숙명적 전략이 된다. 이러한 숙명에는 어떠한 초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사물에는 유한성도 욕망도 없다. 사물이 이미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했다. 따라서 사물은 주체의 앎에 접근할 수 없다. 사물은 이미 그 모든 의미를 지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에는 유토피아가 없다. 사물의 유토피아는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사물은 주체에게 끊임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사물은 숙명적이다.

    그러나 주체의 전략의 필연성과 다른 필연성의 출현은 수수께끼가 아닌가? 사물의 아이로니컬한 숙명은 어떻게 주체의 통제와 분석 방식의 압력 아래서 해독할 수 없는 것이 되었는가? 이 숙명적 전략은 주체로부터 전방으로의 탈출, 실재의 부정, 인위적인 황홀경에 빠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주체가 언어와 욕망이나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이 주체에 의해 명명되고 욕망되기 때문에 주체가 어떻게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고 돌·짐승·가면·별의 운명과 침묵에 빠져들기를 꿈꿀 수 있겠는가?

    ‘사물의 운명’에는 다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체계로서의 사물에서 운명으로서의 사물에 이르기까지 이 두 극단 사이에는 근본적인 일치와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신의 일상적 형태 속에서 사물의 강박관념은 주체를 관통하고 주체와 사물의 변증법의 이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물은 자발적인 예속의 세기 이후 복수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정열과 기묘한 전략을 지닌 사물의 수수께끼 속에서, 결국 주체보다 더 교활한 악마로 예감되는 사물의 수수께끼 속에서, 요컨대 주체의 기획에 저항하는 사물의 수수께끼 속에서 주체와 사물의 변증법이 전복된다고 보드리야르는 주장한다.

    20)Jean Baudrillard, L’autre par lui-même, Galilée, 1987, p. 69.  21)같은 책, p. 71.  22)같은 책, p. 74.  23)같은 책, p. 75 참조.  24)Mike Gane, Baudrillard: Critical and Fatal Theory, Routledge, 1991, p. 173 참조.

    6. 사물의 우위

    보드리야르는 탈근대 사회에서 사물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이상증식하고 이상발달하게 되면, 탈근대 사회는 내파하고 무기력에 이를 수 있다고 진단한다. 그의 견해로는, 탈근대 사회의 이러한 과정은 결국 주체의 파국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증식과 사물세계의 가속화가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의 차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물 자체가 주체보다 우위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우위’, ‘투명해지면 보복을 당한다(le cristal se venge)’는 폭로에 이르는 ‘사물의 복수’를 역설한다. 어떻게 보면 ‘투명해지면 보복을 당한다’는 이 불길한 구절은 여러 세기 동안 사물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했던 주체에 대한 사물과 사물세계의 승리와 복수를 의미한다.

    자신의 책 『숙명적 전략』에서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우위’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철학자들이 언제나 주체의 영광과 사물의 비참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철학자들에 의하면 역사를 창조하고 자연을 지배하며 지식의 토대가 된 것은 주체였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데카르트에서 현상학과 사르트르에 이르는 주체성의 철학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부언해야 한다. 물론 이 주체성의 철학은 주체에게 자유·창조성·상상력·확실성·객관성·지식이라는 훌륭한 형태를 부여했던 반면, 열등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은 그 존재가 수 혹은 죽은 물질로 정의되는 양적 관계 혹은 인과관계의 영역 속에서 무기력한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따라서 주체는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지식의 토대를 제공했으며, 사물은 단지 주체의 희생물과 노획물에 불과했다. 심지어 더 나쁜 것은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사물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하찮은 것, “외설스러운 것, 수동적인 것, 타락한 것, 악과 순수한 소외의 구현”25)으로 표시되었다. 이상주의적 혹은 주체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속에서 노예였다. 이 경우 주체는 자연을 지배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굴복시키고 통제하려고 했다.

    주체의 이 형이상학에 맞서서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탁월한 힘을 꿰뚫어 보고 개념화하려고 했다. 실제로 보드리야르는 인간을 압도하고 유혹하는 사물의 힘을 관찰해 왔다. “욕망에 대한 우리의 견해로는 주체가 절대적인 특권을 지닌다. 욕망하는 것은 바로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모든 것은 뒤집힌다. 거기서 욕망하는 것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며, 유혹하는 것은 사물이다. 마치 모든 것이 욕망이 아닌 유혹에서 출발하듯이, 모든 것은 사물에서 출발하여 사물로 되돌아간다. 주체의 아득한 옛날의 특권이 전도되는 것이다.”26) 돌이켜 보면 주체에 대한 사물의 증대하는 힘은 처음부터 보드리야르의 주제였으며, 그의 계획의 기초가 되는 연속성을 나타낸다. 자신의 초기 저서들에서, 그는 사물이 인간을 매혹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사물세계와 사물의 체계의 요소인 기호가치와 코드의 매개로 사물세계가 새롭고 더 큰 가치를 지니는 방식까지도 탐구했다.

    매혹과 유혹이 증대하는 사물세계에 대한 그의 비전 속에서 사물의 매혹은 급속히 가속되고, 주체는 자신이 점점 더 사물세계에 빠져들고 접속되고 유혹되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주체의 지위가 그저 단순히 유지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권력의 주체, 지식의 주체, 역사의 주체임을 자처할 수 없다”27)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체의 지위가 유지될 수 없게 된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지위는 사물의 지위라는 역설에 이르게 된다. 이제 가능한 유일한 전략은 ‘사물의 전략’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는 주체에게 도전하고 주체에게 자신의 불가능한 지위를 참조하게 하는 사물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사물의 전략의 비밀은 무엇인가? 사물은 자신의 욕망의 환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사물에는 어떠한 욕망도 없다. 사물은 무엇이건 사물만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은 재점유나 자율성의 환상을 품지 않는다. 사물은 그 자체 속에서 분리되지 않는데, 이는 주체의 운명이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사물은 거울이다. 사물은 주체에게 자신의 덧없는 투명성을 참조하게 하는 것이다. 사물이 주체를 매혹하고 유혹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떤 실체나 고유한 의미를 발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물은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물 위에서 주체의 지배력이 파괴되고 주체가 자신의 환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투명해지면 보복을 당한다.28) 이는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사물의 복수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세계의 초월적인 중심에 위치하고 자신을 보편적 인과성으로 간주하던 주체는 맹목적 숭배의 대상으로서, 인과성을 뒤집는 형태로서 은밀히 사물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주체의 운명은 사물에게로 넘어간다. 탈근대 세계의 아이러니는 보편적 인과성을 특이한 사물의 숙명적인 힘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와 사물의 지위를 전복하려는 자신의 시도를 통해서, 보드리야르는 흥미로운 것은 ‘악이 아니라 최악의 소용돌이’라고 주장한다. 최악의 소용돌이는 주체에 대한 사물의 승리, 그리고 (주체에 대한 사물의 승리로 동어반복적으로 정의되는) 악의 승리를 의미한다.29)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전략에 의해 사물은 주체를 매혹하고 주체에게 도전하고 주체를 유혹하여 결국 주체를 압도하게 된다고 말한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이는 탈근대 세계에서 주체의 쇠퇴와 사라짐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물의 우위와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25)SF, p. 163.  26)같은 책, p. 164.  27)같은 책, pp. 165-166.  28)같은 책, p.167 참조.  29)MPB, p. 161 참조.

    7. 결론

    보드리야르의 견해로는, 오늘날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사물의 아이로니컬한 현존, 사물의 무관심, 사물의 도전과 유혹이다. 특히 보드리야르에게 유혹은 주체의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 사물의 매혹으로서 이해된다. 유혹은 숙명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근원적인 동요를 일으키고 우리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하는 사물(대상)의 효과이다. 숙명은 매혹적이다. 사물은 숙명적인 것을 이끌어간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유혹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물의 편재와 우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사물은 유혹과 매혹의 모체이며, 주체는 사물의 매력과 함정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물은 주체보다 교활하며, 주체를 유혹함에 따라 악마적이 된다. 요컨대 주체는 악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악의 원리는 사물이라는 악마로 나타난다. 그것은 순수한 사물의 황홀한 형태로, 주체의 전략에 승리하는 사물의 전략으로 나타난다.”30)

    따라서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주체의 의지·의식 혹은 무의식의 허구와 함께 주체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포기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이러한 견해를 어느 정도로 고수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히 그는 우리가 주체의 우위와 탁월함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사물을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주체가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이제 사물이 주체에게 반항하고 복수하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사물의 반항과 복수는 주체의 지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사물의 (숙명적) 전략을 참조하면서 사물의 지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사물의 사회적 의미와 지위는 이미 바뀌었다. 그는 “예전에 주체가 사물의 세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오늘날 사물은 주체의 세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을 것”31)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사물이다’ ‘너를 보는 것은 텔레비전이다’라는 역설적인 가설을 내놓는다. 여기서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사물이라는 것을 우선 생각한다면, 사물을 조정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사유일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너가 아니라 너를 보는 것은 텔레비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사물은 너에게 나를 봐, 스크린을 보라고 말을 건넨다. 오늘날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는 스마트폰에 매혹되고 유혹되고 있다. 더욱이 스마트폰이 없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계산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지적으로 스마트폰을 켠다. 스마트폰을 켜는 것은 너가 아니라 스마트폰 사물이 나를 켜봐라고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의사소통의 착란에 연결되는 매혹과 현기증의 고유한 상태이다. 보드리야르의 이 역설적인 가설은 사물이 유혹하고 압도하고 지배하는 상황에서 사물의 우위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듯하다. 개인이나 대중이 의식 있는 주체, 반성적이고 비판적이고 인격적인 주체가 되지 않으면 사물화되거나 사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탈근대 세계에서 광고와 대중매체라는 사물은 다양한 메시지와 욕망을 분비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매혹하고 유혹한다. 뿐만 아니라 명품 또는 브랜드 상품은 우리를 유혹하고 압도한다. 백화점 명품 특가판매 행사나 명품 아울렛 매장에 쇄도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주체를 상실하는 세계, 사물이 사태를 발생하게 하고 사물이 지배하는 세계가 상상될 수 있다. 주체는 시뮬라시옹과 초과실재를 통해 사라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주체의 사라짐과 사물의 승리는 현기증이나 공황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드리야르는 경고한 바 있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사물과 세계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려는 주체의 내재성에 맞서 사물의 외재성, 즉 사물의 외재적인 힘이 대조적으로 돋보인다. 따라서 사물은 자신의 본질과 정의를 초월했으며, 극단적이 되고 황홀한 것이 되고 통제를 벗어났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실은 극단 속에 있다’라는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의 역설적인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드리야르에게 사물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없는 듯하다. 사물은 사물에 특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잠재적 가능성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사물은 더 이상 도달할 초월적 목적도 없는 듯하다. 사물이 이미 그 자체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위반할 어떠한 한계도 없는 듯하다. 사물이 모든 목적과 잠재적 가능성을 초월하는 이상증식과 이상발달의 상태 속에서는 한계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32)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이러한 현상을 주목하고 사물 쪽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로서는 사물 쪽으로 넘어가는 것, 사물 쪽을 편드는 것은 모호하고 어려운 선택일 터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사물의 범주만이 중요하고 주체의 범주는 필요 없는 것인가? 사물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한 범주가 다른 범주보다 우월하거나 바람직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주체의 범주를 다룰 수는 없는가? 이제 우리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적 형태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주체와 사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식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체가 사물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사물에 의해 지배되는 방식이나, 사물이 주체를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주체에 의해 지배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물이 주체의 세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과 주체가 사물의 세계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것을 동시에 둘 다 수용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여러 점에서 사물의 결과이며, 사물 역시 여러 점에서 주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33)

    따라서 한 범주가 다른 범주보다 우월하거나 바람직하다는 보드리야르의 형이상학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사실 주체성을 생각하지 않는 사물과 사물세계를 고려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주관적 방식과는 별도로 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하거나 사물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지적으로, 비판적이지도 반성적이지도 못한 채 사물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해지면, 주체와 사물의 대립과 충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관점은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30)SF, p. 9.  31)EI, pp. 36-37.  32)Douglas kellner, Baudrillard: A Critical Reader, Basil Blackwell, 1994, pp. 15-16 참조.  33)배영달, 『보드리야르의 아이러니』, 동문선, 2009, pp. 267-268 참조.

  • 1. 배 영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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